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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불식간에 닥친 일들이 있다. 크고작은 공간에서 어떤 대상에게 스스로 사진을 어떻게 찍고 있는지 풀어놓아야 하는 일이 그렇다. 강연 제의를 받을 때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지 난감함을 감추기가 쉽지 않다. 우선은 가르치는 일보다는 무엇을 가리키는 일이라 생각되기에 어렵다. 무엇으로 인도해야 하는 선지자가 되라는 것도 아닌 단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하면 될 일인데도 초롱한 눈망울을 마주하는 데에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반응은 그때그때 다르다. 일종의 쇼맨쉽을 발휘하여 그럴듯한 이야기로 포장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때 사람들은 더욱 흥미를 느낀다. 포장지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에 대한 궁금증 그것을 향한 마음인가 하고 짐작한다. 기다려 주지 않는 기상상태와 비일비재한 현장의 돌발여건, 멀쩡했던 장비가 갑자기 말을 듣지 않는 등 일종의 에피소드 -정작 본인에게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를 풀어놓는 것이 흥행이 되기도 한다. 설명하는 일은 때로는 설명한 것을 다시 역으로 설명 된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본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담아낸 것이 결과로 설명되는 일이다. 이런 역치환의 일들은 긴장을 동반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누군가 보고있는 듯한 긴장은 자신의 관점과 더불어 한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곤 한다. 물론 어쩌면 다른이의 시선을 신경쓴다는 것은 영 성가신 일이지만 사진은 결국 누군가의 감응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역시 좋아!’ 상업이든 아마추어든 예술이든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최고의 찬사는 ‘역시’라는 감탄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반전을 주었다는 쾌감이기도 하다. 혹은 그 전에 가졌던 편견에 대한 오해의 불식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동감의 표현에 대한 감사함이랄까. 설명하는 사진, 해석되는 사진 사진을 찍는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현장을 무덤덤히 담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더 나아가 현장의 의도를 과장한다. 특정 사건이 단서가 된다. 포인트를 잡아내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이때 전제조건이 필요한데 결과에 대한 가상의 결론이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 준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어떤사람은 글로 쓰고 어떤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어떤사람은 몸으로 표현하고 어떤사람은 그저 생각한다. 또 어떤사람은 수 많은 단서가 될 사진을 찍는다. 모두 몸으로 직접 수행해야하는 육체가 겪어야 하는 단계다. 두 목적 모두 도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장비들이 좋아서 찍으면 나오는 사진이지만 이것은 복잡한 메커니즘을 통한 산물이다. 그저 ‘자동’인 것이다. 종이위에 그리는 펜 한자루처럼 이리 가라면 이리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가지 않는다. 수 많은 변수를 익혀야 결과를 예측하고 알 수 있다. 그래서 ‘사진 잘찍는 법’은 도구인 사진기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간혹 어떻게 찍어야 좋은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 질문에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하는가 하고 안절부절하게 된다. ‘어떻게’는 ‘왜’나 ‘무엇’을 동반해야 하는데 오로지 ‘어떻게’가 중요한 듯한 질문인 것이다. 어떤 카메라를 사면 잘나오는가와 다름 아니다. 요즘은 어떤 어플을 사용해야 하느냐는 말로 대신된다. 모든 이들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펜이 어떻게 제작되는지 알 필요 없다. 펜의 구조를 굳이 알 필요도 없다. 어떤 영화의 주인공처럼 몽당연필로 애써 글을 써 나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다. 도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당장 ‘무엇’을 찍고 싶으냐가 중요하다. 그렇게 하고나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도구에 대한 욕구는 필요에 의한 것이 되어야한다. 펜이 종이와 닿을 때 역사는 이루어 진다. 유성인지 수성인지 가늘은지 굵은지 잉크는 어떤 종이와 만나는 것이 좋은지는 알아야 다음 단계를 나간다. 사진도 이와 같다. 그래서 어떻게 찍느냐는 질문은 어렵다. 내게 질문한 사람이 펜을 쥐는 것부터 물어보는지 펜의 종류를 물어보는지 선긋기를 물어보는지 컬러의 조합을 묻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선긋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도구가 말하는 방식을 이해해야한다. 이쯤되면 설명되고 설명하는 사진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가고 기초 이야기만 하느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어떻게 찍냐고요?’라는 질문 할지도 모른다. 정작 카메라를 잡는 것을 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잘 찍은 사진을 원한다면 권하고 싶다. 핸드폰이던 카메라이던 한달동안 찍은 사진을 들여다 보시라. 그 중에서 자신이 찍고 싶은 사진이 담겨 있는지 살펴보시길 바란다. 찍었던 그때를 떠올릴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혹은 좋은 순간을 놓쳤다면 이유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것이다. 수 많은 사진이 본인을 설명하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설명하려고 하는 것보다 어떻게 설명되는지 수없이 타자화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모든 순간은 예고없이 찾아온다. 찰나는 능동적이지 않아 단지 누군가 일으키는 기다림으로 잡아낼 뿐이다. 유청오 / 조경사진가
- 유청오 조경사진가[email protected]
- 201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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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빗물이 말하는 일산호수공원 “사람이 있으니 사랑이 있다. 아무러한 시대 아무러한 제도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의 증명처럼 사랑한다.” _ 김별아, 『도시를 걷는 시간』, 해냄, 2018, p.99. 일산호수공원은 생각의 방식을 바꿔준 독특한 위상의 ‘한국적 공원’이다. 특히 이곳하면 떠오르는 넓은 수면은 갑작스런 변화의 충격을 대비하고 흡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충격을 흡수한 것만이 아니라 그 충격을 현대 도시가 주는 우리 식의 감성으로 소화하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체현된 감각은 여러 방식으로 전파되어 하나의 전형처럼 자리 잡고 있다. 여기소(汝其沼, ‘너의 그 사랑이 잠긴 못’) 터에서 끌어온 작가의 서술이 일산호수공원을 보며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물은 생명의 기본이다. 흔히 보는 땅 위의 물은 대개 빗물에서 시작되고 이것은 그 위의 생명과 직결된다. 물이 새로 자리하면(내리면) 숨어있던 생태계가 한 번에 펼쳐지곤 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다. 저 먼 사막에 비가 오면 윤회하듯 생로병사를 담은 생명들이 그 짧은 시간에 가득 차오르는 것은 대표적이다. 그러니 물은 볕만큼 중요한, 어쩌면 더 중요한 살아있는 것들(생태)의 기반이자 어머니(모태)다. 삶의 총아인 도시도 마치 살아 있는 것인 양 그것을 따른다. 일산신도시는 도시의 다단함보다 거대한 호수공원으로 먼저 기억된다. 논밭이었던 한강 옆의 들에 마치 센트럴파크마냥 하나하나 파내고 덮고 채워서 만든 대표적인 호수이기도 하다. 듣기로 물을 채우는 데에만 10개월이 걸린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마을 이름으로 나뉘는 도시의 장소들(일테면 아파트 단지별 이름)은 유치함을 벗어난 지 오래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도시도 공원도 빈티지 풍이 나는 제법 역사를 가진 삶터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규모의 수면은 처음 하는 시도여서 시행착오가 많았다. 1990년대 한창 공사 막바지인 현장에 수업의 답사로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돌아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까만 방수포와 자갈을 깔았고 한강물을 채워 이미 수질 관리에 매진하던 때이기도 했다. 호수 주변은 긴 조깅코스와 전통조경, 현대조경이 테마별로 이어졌고 한 번에 다 둘러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는 완전히 새로운 공원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후 이제는 어지간한 신도시에 호수든 분수든 벽천이든 물과 관련된 조경공간은 필수요소가 되었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물은 가만히 두어도, 쏘아 올려도, 흘려내려도 모두가 좋아한다. 심미적인 기능만이 아니라 열섬 완화, 생태계 지원, 미세기후 조절 등 도시적 보완 기능까지 생각한다면 보편화된 옥외공간 물 사용은 규모가 작든 크든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일산호수공원은 그러나 문제가 많았다. 가둬놓은 물이 스스로 깨끗해질리 만무, 수년간의 시도에도 적절한 수질관리 방법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지식이었다. 역시 듣기로 수많은 방법을 사용해 보았지만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지금 사용하는 것으로 물 밑에서 공기를 불어 올리는 것이라고 한다. 역시 자연물은 자연의 법칙을 따를 때 최적화 되는 법, 여러 화학물질보다 자연의 신선한 공기가 지금 호수공원 수질 유지의 핵심이다. 호수에 가본다면 한번 꼼꼼히 찾아보기를 권한다. 수질문제를 해결할 경험적 지식을 습득하는 사이 공원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변화되었다. 곳곳의 정원과 조경이 자리 잡아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곳인 양 가히 환골탈태한 것이다. 물이 많아지며 이 지역의 미세기후까지 바뀌었고 사람들이 많아지며 방생하는 생물들과 절로 나타난 생물들이 뒤섞이며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곳이 이제 대한민국 국토의 측면에서 새로운 지리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택리지를 수정해야 할 만큼 도시와 호수가 터를 바꾸어놓고 그 기법은 국토 여러 곳에 전파되어 수정할 부분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일산신도시와 일산호수공원이 우리 도시와 조경에 던져준 의미를 요약해보면 이렇다. “물의 테크놀로지 시험장, 신도시 마을실험의 전시장,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운동장, 축적된 조경미학의 집합장.”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 의미를 알 수 있으리라. 기회가 된다면 이에 대해서는 상세히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대규모 공사를 필요로 하는 거대한 기획과 새로운 설계로 진행되었다는 점은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사항이고, 지속적인 보완으로 세대가 쌓이는 신도시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 다른 기획된 신도시의 벤치마킹 사례가 되었다는 점은 살아있는 반면교사로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호수공원은 일산신도시 택지개발사업과 연계하여 조성한 근린공원으로서 국내 최대의 인공호수를 만들어 도시인이 접할 수 없는 자연생태계를 재현하고 다양한 주변경관 및 호수를 이용한 레크리에이션 공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호수를 중심으로 한 4.7km의 자전거도로와 메타세쿼이아길 등 9.1km의 산책로는 시민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장소이며, 그 밖에 생태자연학습장, 조형예술품, 선인장전시관 등이 다양한 생태문화시설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매년 고양국제꽃박람회, 가을꽃축제, 호수꽃빛축제 등이 개최되는 등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명소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공원입니다.” _ 일산호수공원 안내문 설명에서처럼 공원은 세계적인 명소라 해도 손색이 없다. 이런 성과에도 ‘여기소’에서의 감성이 여전히 겹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메워진 연못과 그 기억을 끌어와 비석으로 흔적을 되살리는 그 의지는 이 공원에서 가능할까? 생각해보면 이 공원에는 그런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으로 지금도 꾸준히 우리 곁에 보이는 심적으로는 가까운 공원이지만 그만큼 자연의 날씨와 빗물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버린 탓일까? 긍정적으로 보자면 일산호수공원은 특별함보다 이미 일상의 배경이 된 셈이다. 사실 이때부터 중요하다. 여기소가 담은 정치, 경제, 시대를 뛰어넘어 지속되는 사랑(이야기)은 의심이 필요 없는 공리(公理)라는 듯 장소의 혼처럼 남아 있다. 그 배경에 물의 기운이 깔려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여기소’는 아마도 여건이 되었다면 비석만 놓는 것이 아니라 연못의 원형을 찾아 복원하려 했을 것이다. 여건이 된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강(잠실 수중보 상류) → 유입수로 자연정화(부들, 부레옥잠) → 유입수처리시설 2500㎡/일 응집침전법 → 청평지 4000㎡ → 일산호 인공호수(지역1,2) → 자연호수 자연생태재현 → 방류 한강하류 그런 점에서 일산호수공원은 이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야 할 때가 되었다. 빗물의 공원이 이야기의 공원이 되었으면 한다 할까, 이벤트로 기억되는 공원이 아니라 생의 의미가, 삶의 가치가, 이야기의 성찰이 드넓은 공원 전체를 고루 적시는 빗물처럼 여기저기서 피어났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드러나지 않았을 뿐 공원은 이미 많은 이야기가 쌓여있을 것이다. 이제 그것들이 문화가 되고 문명이 되어 비석 하나로 기억될 그때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물길은 어디든 그 길을 만든다. 생태적이고 자연적이다. 일산호수공원은 그 큰물을 모아 담고 새로운 물길을 유도하는 희망의 도시를 꿈꾸었다. 세대가 지나고 시간이 흐르며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담긴 도시는 이제 본래부터 그런 것 같은 “세월의 도시”가 되었다. 난센스 같은 공원은 이미 자연스런 일상이 되었다. 이제 희망의 도시는 “삶의 질에서 삶의 신선도”(철학자 김용석의 말)를 바라는 행복의 도시를 꿈꾸고 있는 것. 우리는 이제 그것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결국 이 정도면 이 공원이 ‘생각의 방식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되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 인정할 만하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실무진들의 노력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이것은 도시와 공원이 물을 매개로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 어쩌면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내놓은 답안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면에서 이 빈티지 공원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별아 작가가 본 ‘너의 그 사랑이 잠긴 못’은, 물을 두고 만나는 사람은, 물에 두고 만나는 사랑은 그 밖의 아무러한 상황에서도 삶이 되고 각자(삶)의 증명이 된다는 표지였을 것이다. 이야기는 물처럼 남아 사람과 사람 사이를 돌고 돌며 사람과 사랑을 끌어당긴다. 어느 시대든 물을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 하나는 이것으로 자명해진다. 사람과 사랑이 춤추는 물의 공원은 계절에 따라 적절히 내리는 빗물 같은 것이다. ‘너라는 집으로 지금 다시 way back home ~’(SHAUN 곡, ‘Way Back Home’ 중) 우리는 난센스 같은 희망의 도시가 아니라 이제 이야기 가득한 행복의 도시를 꿈꾸어야 할 때이다. Park 05. 빗물이 말하는 공원들, “자연과 인공의 대립 또는 문화적 공생(제3의 자연)” 물이 도시와 성장해야 하는 것은 지난 시대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여전할 우리의 과제이자 필수 문제이다. 이수와 치수가 고도화된 지금이라지만 여전히 우리는 1990년대 서울의 대홍수를 트라우마로 가지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들려오는 허리케인 피해도 여전하고 새로운 기법과 기술로 통합적인 체계에다가 대심도 침수지 같은 확대되는 실천에도 여전히 우리는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다. 빗물은 자연 그 자체이기에 축적되고 지속되며 새로운 대응책과 대비책에도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시대의 빗물은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다. 마치 주변의 나무들이 온전히 자연스럽지만은 않은 것처럼 도시의 자연은 그저 천연스레 자연스럽지만은 않은 것이다. 도시의 야생성은 순치(馴致)된 그것 같아서 그 위로 쏟아지는 빗물도 허락된 야생성에 기반 한다. 다시 말해 해답은 여러모로 이미 가지고 있다는 말이고 문제는 의지와 결정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 문제, 의지와 결정, 즉 모두의 생각이 쉽게 통합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셈이다. 그런 변화의 근원을 지난 편에 이어 더 정리해 본다.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하였고 또 이번에도 그렇지 못하더라도 눈 밝게 읽는다면 그 순서와 의미가 이해될 것으로 믿는다. 생각이 많아지길 바라는 바도 소통되길 바라본다, 함께 고민하길 고대하는 것이다. 3. 행동(activity)과 기술들(technical skills), 실천을 분별하기 우리는 혼합의 시대를 살고 있다. 다방면의 기능과 물체들이 모르는 사이 뒤섞여 새로운 무언가로 쉽게 주어지는 시대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한 우물만 파며 평생을 보내는 일은 이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일이 되기 쉽다. 물론 모든 일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분야든 첨단을 달리는 위치에서는 넓이보다는 깊이가 더욱 중요할 테니 말이다. 그렇더라도 이미 우리의 생활양식은 생각이든 행동이든 제작이든 편이나 길을 나누어서는 곤란한 시대를 지나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기서 뒤섞이는 것이 혼합이라지만 마구잡이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할 때 앞길을 짐작하고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난무하는 융복합이니 통섭이니 다중지성이니 하이브리드니 하는 말들 사이에서 길 잃지 않고 앞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혼합이 대세라지만 혼탁하고 혼미한 생각으로는 제대로 된 섞임도 창의도, 또한 의사결정도 오히려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 분명히 짚을 필요가 있다. 건축, 도시, 조경 등 어떤 식으로든 1회성 작업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는 분야라면 이런 융복합이라는 개념의 사용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기술이 명확하게 위상을 갖지 못한다고 하여 그 본질적 작업의 개념조차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하여 필자는 지속적으로 융합, 융복합이라는 말의 비민주성을 주장한 바 있다. 밑에 도사린 패권주의가 결국 제대로 된 혼합을 이루어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쓸데없는 다툼과 낭비를 가져와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온당치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혼합을 주장하는 말들에 비민주적이고 패권주의적인 태도가 도사리고 있다는 정도만은 기억해 두자.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만든다는 말인가. 우리는 근대를 지나며 저마다의 전문 분야 지식과 실천을 바로 인접 분야에서조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한 지점까지 발전시켜놓고 있다. 그 한계에 이르자 나타나는 현상이 이제 좀 주변을 둘러보며 서로 갈린 지식과 실천을 묶어 새로운 결과와 새로운 영역을 구축해보자는 것이 이러한 경향의 배경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융복합을 이야기하는 태도는 여러 지식과 실천의 혼합을 요청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각자의 방식과 시각을 구축해둔 여러 전문 영역들이 쉽게 혼합되기는 쉽지 않을 터. 그러니 지금까지 여러 시도가 있었어도 그 결과가 신통치 않았던 것이고 현장에 대입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융합하자고 나서는 목소리가 있다. 융복합하자고 떠드는 목소리가 크다. 왜 일까? 그래야 새로운 것을 만들고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계가 명확하니 그렇게라도 돌파해보자는 것이다. 혼합의 과정은 우리가 잘 모르지만 크게 네 단계의 특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를 무시한 혼합은 결국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으며, 1회성 작업을 해야 하는 분야로서는 그야말로 탁상공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짧게만 얘기한다. 혼합은 단자화 된 단순 기능의 배치와 연계의 ‘조합’과 단자화 되었으나 자체 기능 조절로 유동적으로 엮여진 ‘통합’, 본래의 기능 우선권을 잃고 큰 틀의 목적에 따라 분해되고 배치되며 섞인 ‘융합’, 그리고 큰 틀에서 물리적인 대상을 다루지 않는 지식의 혼합으로서의 ‘통섭’(이 말은 설명을 위해 차용함) 등 4 가지의 위상으로 나뉠 수 있다. 이 중 전통적인 방식의 혼합이 조합이고, 산업제품과 같이 대량 복제와 생산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통합은 좀 다른 성격을 가진다. 각자의 전통적이고 고유한 기능은 유지한 채 주변 상황에 따라 그 성능과 범위를 자율적으로 조절하고 적응하는 방식의 혼합을 말하기 때문이다. 쉽게 보면 인체의 여러 장기들이 컨디션에 따라 그 기능을 스스로 조절하는 것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융합 또는 융복합은 기존 체계와 지식을 어느 하나의 의지에 따라 깡그리 뒤섞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산업제품의 생산에는 이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창의적은 제품 생산이 가능할 것이다. 허나 어떤 작업이든, 설령 동일한 도면으로 같은 건물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결코 같은 것이 될 수 없는 1회성 전문 분야에서 이것은 기존 전문 분야에 대한 폭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융합의 시대가 아니라 통합이 먼저 고민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각자의 역할을 조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누구 하나의 마스터플랜으로 세세한 전문기술 영역을 통제하거나 혼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명심할 일이다. 4. 지속성과 회복성을 위한 철학하기 조경은 고도의 철학성과 윤리성이 요청되는 실천학이다. 근대를 지나오며 조경이 전문적 사회서비스로, 다시 말해 프로페셔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러나 이러한 부분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공중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시작된 공원 만들기였지만 전문화의 과정은 그 자체로 업역을 둘러치는 일이었고 타 업역과의 차별성을 형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안 맥하그가 주목받는 이유도 그런 배경이 있다. 조경은 근대를 거치며 그렇게 나름의 객관화 작업을 통해 굳건한 위상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했던 당시 풍토를 생각한다면 그러한 과정에서 고군분투하며 구축한 조경실천의 방법론들은 가히 경이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에서야 너무도 흔하게 보편화된 방법론일지 모르겠으나 교과서 없이 자연과 직면해야 했던 당시로서는 단순히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 작업이었을 것이다. 한 분야의 전문성은 이처럼 몇몇 선구자에 의해 갖춰지기 마련이고 이런 틀에서 새로운 방법론과 가치가 추가되고 보완되며 현재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하나에만 집중한 노력은 대체로 생각을 단순화하고 시야를 좁고 깊게 만들게 된다. 이안 맥하그만 하더라도 그의 방법론이 몇 차례 수정되며 진화하였지만 여전히 보완이 필요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거의 모든 분야가 전문성의 깊이에만 몰두하던 근대적 시야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에 와있다. 근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통칭되는 경향이 해체라는 과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환경문제는 모두에게 닥친 시급한 문제임이 공감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전문성의 분화라는 경향에도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통합이 논의되고 융복합적 사고가 강조되는 배경에는 이러한 추세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처럼 실천이 중요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우리는 우리가 가진 사고 체계를 돌아볼 필요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작업에서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환경을 다룬다는 점에서 조경의, 조경가의 윤리는 의사들의 생명윤리 못지않게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함에도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할 뿐 제대로 된 반성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때 철학자 김용석은 중요한 시사를 던져주었다. 조경이든 도시든 우리는 이것을 심도 있게 논의할 때라고 본다. 그것을 차용하여 생각의 단서를 찾아보자. 조경은 무엇보다 환경의 지속가능성과 회복탄력성을 목표이자 대상으로 하는 분야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여러 이론과 실천, 행위가 뒤따르고 그 결과에 대한 반성과 그 피드백으로 전문성을 다시 도약시키곤 한다. 조경의 이론학, 실천학, 윤리학은 그런 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이다. 설리, 즉 이야기 철학은 여기에 새로운 관점을 더해준다. 철학이 크게 원리, 윤리, 진리에 몰두하며 발전해왔다면 이제는 인간의 서사가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통해 새로운 철학의 분야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인간의 가상적 경험의 이야기가 내재적 논리성을 갖고 있는지 탐구하는 것”이자 “그 논리성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이르는 통로가 될 것”이라며 철학을 구체화하며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통해 “인간의 인공적 산물에 대해서도 철학적 연구”를 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설(說)을 풀어내는 인간의 작업이 철학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는 것, 이 설(넓게 보아 텍스트)에 이치가 있음을 밝히는 작업으로서 설리(說理)라는 새로운 철학적 탐구의 영역이 간과되었었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보니 설리의 탐구가 진리의 탐구와 크게 다르지 않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 내용을 모두 살필 수는 없으니 역작 『서사철학 : 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휴머니스트, 2009)을 직접 읽어보기 권한다. 조경이 환경을 다룬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설계를 통해 대상지의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재조정한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근대 과학적 시각에 입각한 원리와 진리 중심의 사고에서 시야를 확장하여 윤리와 설리를 실천의 중심에 불러들여 조경철학의 부족함을 메워야 할 것이다. 철학이 부족했음은 성찰이 부족했음을 말하며, 끊임없이 고군분투했음에도 성찰이 부족했음은 원리, 윤리, 진리, 설리 중 어느 한 둘에만 매몰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일 테다. 깊이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고개 돌려 주변을 살피며 동반 성찰하는 새로운 통합적 지혜가 지구정원에 필요한 시점이다.
- 안명준 조경평론가[email protected]
- 201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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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 연재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조경분야의 장기 발전전략 도출을 위한 거대 담론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본 고에서는 소소한 일화를 통해 조경의 지난 날을 돌아보고자 한다. 과거 경험에 기초한 미래지향적 제안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경험은 1970년대 말 시작된 대학생활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 같은 희망을 안고 ‘조경’이라는 세상에 첫발을 디딘 신입생이 기억하는 선배님의 고민은 기대와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신출내기의 고민과 다른 양상을 띠었다. “기껏 공부해서 대학 나와 부잣집 정원이나 만드는 거 아닌가?”, “시작 단계인 조경업이 지지 부진하니 그냥 반짝하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산업은 아닌가?” 등의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 선배들은 당시의 치열했던 고민만큼 열심히 ‘조경’을 했기 때문에 아직도 일선에서 건실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열정' 두 번째는 1980년대 초반 원예학 수업시간 교수님 말씀이 기억난다. 조경산업 태동기라 조경학과 학생들에게 의욕을 불어넣기 위한 발언으로 기억된다. 당시 원예, 조경, 라면 시장의 한해 사업(매출) 규모가 2000억 원 정도로 비슷했는데교수님은 해외 유학 시절 선진국의 사례를 소개하며 "조경분야가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이니 모두들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학업에 매진하라"고 권면했다. 시간이 흘러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고나서도 조경분야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야기하며 학생들에게 자긍심과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내용과 정도는 다르지만 지나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낙관론이 지배적이지는 않다. 학생들은 "조경의 여러 영역에서 느끼는 위기감은 실제로 도래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작금의 건설경기 불황과 인접분야와의 업역 갈등은 조경산업의 미래와 정체성 측면에서 기성세대는 물론 미래세대인 학생에게도 불안감을 키우고, 학습의욕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우려된다. 감상적인 낙관론에 의지하기 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조경’의 정체성을 재정비하고, 상충되는 인접 분야와의 상생 발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상생' 세 번째, 지난 대학시절 누군가가 ‘넌 장래에 꿈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은 항상 ‘흰머리 수북한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도 제도판에 앉아서 골몰하며 도면을 그리고 있는 게 꿈’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 젊은 세대(학생)는 제도판에서 도면을 그리지 않는다. 시대가 변하면서 내 연구실의 제도판까지 사라졌다. 주변의 선배, 동료, 후배들도 현역에서 은퇴하는 시점이 되다보니 여러 생각과 감정이 교차한다. 세계화 시대에는 효율과 속도, 결과가 중요한 가치였지만 이제는 과정과 질이 더 중요시 되는 시대가 되었다. 조경시설물도 대부분 기성제품을 선택하다 보니 차별화되고 개성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이 되었다. 흰머리 수북해서도 삶의 공간을 매만지는 일을 하겠다던 그들의 검은 머리 무성했던 시절의 열정을 소환해보자. 쟁쟁했던 그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적극 활용한다면 도시재생과 같이 지역의 역사와 특성을 살리는 섬세한 과정이 중요시 되는 일들에는 훨씬 좋은 성과를 내지 않겠는가. 보수나 일자리 다툼의 영역을 넘어서는 사회 발전 차원에서의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동참' 네 번째는 최근의 일이다. 모 지자체 기술심의에서 방음벽 디자인과 안전펜스의 설계자 제안이 시설 설치 목적 달성에 미치지 못해 재검토를 요청했다. 돌아온 제안자의 답변은 "검토한 내용으로 바꾸고 싶지만 앞선 경관심의 내용을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문분야 기술자 발견된 문제를 고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라고 재협의를 요청하니, 며칠 후 제안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행히 검토한 내용으로 문제가 잘 정리가 되었다면서, 문제를 미루지 않고 부딪혀해결하고 나니 깔끔하게 일이 정리되고 명쾌해서 좋았다는 말도 함께 건넨다. 조경의 영역이 갈수록 넓고 다양해지고 있다. 경관, 디자인, 생태 등 유관 분야의 협의·조정 능력 발휘가 요청되는 시점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양한 분야의 조정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는 젊은 조경분야 기술자들이 이런 관문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은게 현실이다. 문제해결을 위해 산·학이 연계하여 전문가들과 함께하는 캡스톤디자인, 진로지도, 현장실습 등 여러 다양한 시도로 서로 손을 맞잡고 헤쳐나가고 있지만, 넓고 다양해진 조경산업 후속세대인 학생들의 필요와 요구에 더 많은 관심과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심과 협력' 모두가 만족스럽고 행복한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런 이상향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래도 지난 50년 세월처럼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손에 손을 잡고 연대하며 뚜벅뚜벅 새로운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간다면 나아진 ‘조경’의 미래가 반드시 올 것이라 믿는다. 김대수 / 대전과학기술대학교 도시환경조경과 교수
- 김대수 대전과학기술대 도시환경조경과 교수[email protected]
- 2019-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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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가 발간한 5차 평가보고서(AR5)는 인간의 산업 활동으로 인한 기후변화가 인류와 자연 생태계에 새로운 위험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나라의 평균기온은 1912년 이후 1.5℃ 상승하였고, 이외에도 태풍 및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 증가, 생태계 변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연안 침수 등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실제 관측되고 있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은 기후변화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2100년까지 2800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한다. 따라서 기후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온실가스를 감축하는 완화정책뿐만 아니라 자연계와 인간사회가 직면한 기후변화위험을 최소화하는 적응정책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부터 기후변화 적응의 필요성을 인식하였고, 기후변화 영향평가 및 적응대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2010년부터 시행된 「저탄소 녹색성장 기본법」 제48조 및 시행령 제38조에 근거하여 ‘기후변화 적응대책’ 수립·시행을 의무화함에 따라 모든 광역 및 기초 지방자치단체는 5년마다 기후변화 적응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적응계획이 얼마나 원활하게 이행되었는지 그리고 실제 기후변화 영향저감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평가할 수 있는 지표와 방법론이 없어 적응계획의 실효성을 판단하기 어렵다. 특히 기초 지자체는 현실적으로 예산과 전문성이 부족하여 기후변화 적응대책기술에 대한 평가를 자체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우므로 이들을 위한 의사결정 지원도구가 필요하다. 즉, 기후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적응계획을 수립·이행하기 위해서 개별 적응대책기술의 효과를 평가하는 지원시스템이 요구된다. 이러한 지원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환경부 산하기관인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은 기후변화대응 R&D 사업의 하나로 “기후변화 적응정책 선정을 위한 통합평가 의사결정지원 도구개발 및 실증화·고도화”를 제안하였고, 이를 본 연구진이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진행한다. 필자는 총괄 연구책임자를 맡아 협동기관인 연세대학교,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과 공동으로 연구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조경학, 도시계획학, 경제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진을 통해 여러 측면에서 기후변화 적응방안을 살펴본다. 연구과제의 목표는 국가와 광역 및 기초 지자체가 기후변화 적응계획을 원활하게 수립할 수 있도록 의사결정 지원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다. 지원시스템은 단기 및 중·장기 기후변화 적응계획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기후정보와 적응대책에 대한 정성적·정량적 평가방법론과 결과를 제공한다. 필자는 2016년 월간 『에코스케이프』(환경과조경사 발행)에 기고한 “기후변화 적응대책으로서의 그린인프라의 가능성: 기후변화, 조경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린인프라가 기후변화를 완화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단기 및 중·장기 피해를 줄이는 적응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그린인프라의 기후변화 영향저감효과는 기후변화로 인해 증가한 폭염을 예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미세먼지 감축이나 효율적인 물관리 등 다양하다. 그러나 그린인프라를 통한 기후변화 적응효과에 관한 연구 대부분이 다양한 부문에 미치는 영향을 복합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있다. 이에 연구진은 기후변화로 인한 다양한 부문의 피해를 동시에 고려하기 위해 환경성, 안전성, 건강성 측면에서 그린인프라를 포함한 여러 적응대책기술의 영향저감효과를 평가한다. 개별 결과는 화폐 가치로 환산하여 통합되며, 이후 적응계획에 대한 주기별 적응경로가 제안된다. 더불어 적응대책기술이 지역 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분석하여 지자체가 산업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한다. 현재까지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린인프라는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효과가 있으며,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증가한다. 또한, 그린인프라를 적용하지 않은 적응계획과 비교하여 그린인프라를 적용한 대안은 구조물의 내구성이 떨어지지 않아 유지관리비용이 저렴하여 경제적으로도 이득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린인프라에 기반을 둔 기후변화 적응계획은 사회경제적 혜택을 가져오고 인간과 자연 생태계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본 연구진이 개발한 지원시스템을 통해 생태 가치를 보전하면서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그린인프라의 가치가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그린인프라 조성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지속 가능한 사회로 한 걸음 나아갈 기회가 되리라 기대한다. * 이동근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경대학교 녹지조경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통합적인 기후변화 영향평가, 도시 열섬 저감 기술을 비롯한 여러 R&D 연구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환경영향평가론』, 『경관생태학』, 『환경계획학』 등 다수의 공저를 포함하여 국내외 논문 200여 편 이상을 발표하였다. 현재 한국기후변화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국회기후변화포럼 운영위원장, 『Landscape and Ecological Engineering』 편집위원장, 환경부 자체평가위원 겸 중앙환경정책위원, 한국환경영향평가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동근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이동근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email protected]
-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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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름이 갔다. 열어둔 창문이 절로 닫힐 정도로 온도가 변해있다. 녹음은 제자리를 잡기도 전에 누런 빛으로 변해간다. 길에는 긴 옷을 걸친 사람들, 빛은 길어지고 차분한 공기가 길에 깔려있다. 지나는 날씨가 차창에 기웃거릴 때 문득 옛 생각이 났다. 대도시로의 시대, 그 때 흔한 부모는 고향에 생긴 일들을 위해 귀경을 하곤했다. 따라나선 아이들은 긴 여행이 지루할 뿐 무슨 생각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저 위안은 외부로 열려있는 차창을 바라보는 일 따위다. 차창 밖 풍경은 영상이 되고 사진이 되기도 했다. 멀미를 최대한 늦출 수 있는 임시방편이기도 했다. 결국은 비닐봉지를 귀에 걸고 메스꺼움을 견딜 수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한참을 차창밖 바라보던 형은 느닷없이 깔깔대며 말했다. "저것봐, 나무가 오줌을 누고 있어." 세상에 어떤 나무가 오줌을 싼단 말인가. 나는 쉽사리 동의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어떤 뜻인지 해석할 수 있었다. 스치는 나무의 잔상, 곧게 하늘로 뻗은 나무의 고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슬로우 셔터 속에서 벌어지는 나무의 휘어짐처럼 대상을 보고 말한 것이었다. 이제와서 지나는 가로수를 보고 있자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나무가 소변을 보는 것에 공감이라니 얼마나 대단한 발견인가!(정작 본인은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세월의 아이러니 일까) 오랫동안 보았던 차창밖 풍경은 이제 다르지만 가끔씩 ‘어떤감성’에 젖게 한다. 요즘의 대중교통 차창 안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이제는 익숙한 온통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모습이 있다. 그 안의 세상이 궁금해진다. 힐끗, 넘겨본 그들의 세상에는 대부분 게임 아니면 SNS어플이 열려있다. 참 많은 글과 이미지들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낯 모르는 대중 속 유일한 혼자만의 시간, 작은 기기로 낯모르는 사람으로 통한다. 수 많은 이성으로 만들어진 모바일 기기가 수 많은 감성의 도구가 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관조하고 평가가 그 안에 있고 사람들은 누군가의 감성에 공감한다. 감히 감성과 공감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찍는 행위도 비슷하다. 이성으로 가득찬 차가운 카메라는 그저 작동할 뿐이다. 보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해석이나 읽기의 능동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성과 논리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감성으로 보면 달리 보인다. 그런 과정을 통해 찍힌 사진은 더욱 열려있게 된다. 찍는 사람에게 열려있는 사진이 보는 사람에게도 열려있다. 한 장의 사진은 감성으로 읽으면 달라질 수 있다. 누군가에게 그냥 한 그루의 나무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소년의 시절로 순간 회귀하는 환상을 겪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는 사진 안에는 공감과 이유가 있다. 고백하자면 아직도 오줌을 누고있는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감성이 부족한 걸까하고 반문해 보기도 한다. 요즘을 돌이켜본다. 내가 생각하는 나무의 감성은 무엇일까 자문한다. 여러분의 나무는 무엇으로 어떻게 담길지 궁금하다. 문득, SNS를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청오 / 조경사진가
- 유청오 조경사진가[email protected]
-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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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중심에 있는 놀이터를 디자인하면서,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놀이터를 알아보기 위한 워크숍을 진행했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놀이터를 분석해서 그 결과를 놀이터 디자인에 활용하는 게 원래 목적이었는데, 의도치 않은 성과를 얻었다. 오늘은 ‘동네’ 어디서 무엇을 하며 놀 것인가? 우리가 다루는 놀이터를 중심에 놓고 일반적으로 보행권이라 이야기되는 반경 500m내 놀이터를 표시한 지도를 가운데 두고 ‘어느 놀이터에서 주로 노는지, 어느 놀이터가 좋은지’에 대해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처음엔 어린이들과 소통이 되지 않았다. 어린이들은 “저는 코뿔소 놀이터가 좋아요”라고 하는데 그 놀이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적어간 공식적인 놀이터 이름과 아이들이 부르는 이름이 달랐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동네 놀이터에 나름의 이름을 붙이고 있었고, 어른인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특성을 파악하게 됐다. 어디는 시설물은 없지만 넓어서 좋다고 했고 어떤 놀이터는 목재 가벽에 싱크대 같은 주방 모습이 표현돼서 소꿉놀이하기에 좋다고 했다. 또 자신들한테는 재미없지만 동생들은 좋아할만한 놀이터라 높이 평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그날의 일정과 일정에 따른 동선, 시간적 여유, 날씨, 자신의 기분에 따라 놀이터를 선택하고 있었다. 일정이 바쁜 날은 좀 시시한 놀이터라도 학교 근처 놀이터에서 놀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날은 좀 더 멀더라도 시설물이 크고 넓은 놀이터로 원정을 나가기도 했다. 또 어떤 놀이터는 자신들보다 고학년 언니들이 자주 모이기 때문에 피한다고도 했다. 어린이들이 놀 곳을 찾는 방식은 어른들이 놀 곳을 찾는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어른들도 퇴근 후 한 잔 할 곳을 찾을 때, 동선, 시간적 여유, 그날의 기분, 날씨를 고려하지 않던가? 바쁜 날은 좀 시시하더라도 학교 근처 놀이터에서 놀고 여유가 있는 날은 좀 멀더라도 크고 넓은 놀이터로 원정을 가며 어떤 놀이터는 고학년 언니들이 자주 모이기 때문에 피한다. 어린이들이 놀 곳을 찾는 방식은 어른들의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어른들도 동선, 시간, 그날의 기분, 날씨를 고려하지 않던가? 동네 단위에서의 놀이 환경 진단 지표 이 워크숍 이후 놀이터에서 동네로 시선을 확장하게 됐다. 놀이터 디자인을 의뢰받으면, 대상지 일대 동네에서의 어린이들의 동선을 검토하고 주변의 놀이터를 조사한다. 어린이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동네 놀이터와 동네에서 떨어져 있어 가끔 찾는 놀이터는 구성이 달라야 한다. 어린이들은 동네 놀이터에서는 반복적으로 시설물을 이용하면서 친구들과 놀이를 발전시키기 때문에 시설물 구성이 단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가끔 찾는 놀이터, 특히 부모나 보호자와 찾는 놀이터에서는 친구들과 발전시킨 놀이도 없고, 친구조차도 없을 수 있으므로 시설물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고 이는 디자인에 반영돼야 한다. 또 대상지 주변 동네 놀이터가 주로 초등학교 입학 전 어린이들이 놀기에 좋다면, 대상지는 초등학생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조성해야 한다. 즉, 주변 놀이터와의 관계 속에서 동네에서 충족되지 않는 놀이 활동을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이 워크숍 덕분으로 디자인 접근 방식에 변화가 있었지만, ‘동네 단위의 놀이 환경’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 현황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벤처 기부(Venture Philanthropy) 펀드인 C프로그램의 지원으로 2017년 봄부터 1년간 ‘동네 놀이환경 진단도구 개발’이라는 연구를 진행했고, 세 가지 진단 지표로 ‘바깥놀이장소의 향유’, ‘놀이장소의 질’, ‘연결성’을 도출했다. 세 가지 진단 지표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이 연구를 함께 진행했던 최이명 박사(현 두리공간연구소)와 강현미 박사(현 건축도시공간연구소)가 그간 발전시켜온 연구 방법을 사용했다. 어린이들의 일주일 동안의 동선을 GPS로 기록하는 방법으로, 세 가지 진단 지표의 타당성을 검토하는데 유용했을 뿐만 아니라 지도로 드러난 어린이들의 일상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웠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잘 놀 수 있는 조건으로는 시간, 공간, 사회적 허용성 등등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의 놀이터를 멋들어지게 만들어준다고 공간의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집에서 나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거리에 놀이공간이 있어야 하고, 집과 학교 가는 도중에 혹은 학교에서 학원 가는 도중에도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또한 각각의 놀이공간으로 가는 길도 안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네 단위로 놀이 환경을 본다는 것은 아동들의 일상을 염두에 두고 놀이 환경을 본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이들의 일상에 놀이가 깃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 자료: 김연금, 최이명 외 2인(2018) 동네 놀이환경 진단도구 개발(Playable Neighborhood Index), C 프로그램. 김연금 / 조경작업소 울 소장
- 김연금 조경작업소 울 소장[email protected]
-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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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 연재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최근 미세먼지와 폭염 등의 기상피해는 어린이들이 학교와 학교 밖에서 맘 놓고 숨 쉬지도 뛰어놀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 미세먼지와 폭염 등에 취약한 학생들을 위해 더욱 풍성한 학교숲이 필요하다. 학교숲은 학교의 자연으로 공기청정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학교숲은 국민의 30%이상을 차지하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일상생활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생활공간이자 야외교실이다. '가르칠 수 있는 순간(teachable moment)'에 활용할 수 있는 환경교육의 장(場)이다. 이미 1999년부터 생명의숲, 산림청, 서울시, 유한킴벌리 등 다양한 주체들이 학교숲을 꾸준히 조성하여 3000여 개에 이르는 학교숲이 조성되었으며, 환경적, 교육적, 사회적 성과를 내고 있다. 20년 동안의 학교숲 운동은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성된 학교숲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고, 강당, 체육관, 식당 등 건물 신축을 위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학교숲도 있다. 조성과정의 주체, 사후 관리, 교육적 활용 등 다양한 개선 과제들이 남아있다. 우리들은 여전히 학교운동장이라는 신화(神話)에 갇혀있다. 학교운동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호하지만 일제 강점기 군사훈련을 했던 연병장에서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떠하든 우리는 운동장이 없는 학교를 상상하지 못하고 있고, 한동안 인조잔디 운동장 광풍이 불기도 했지만 유해하다고 평가되어 사라져 가고 있다. 천연잔디 운동장은 관리의 어려움으로 논의만 무성하고 성공사례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아직 학교운동장은 맨땅인 마사토 운동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미세먼지와 폭염 등의 환경재난으로 학교숲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새롭게 학교숲 운동의 비전을 모색해야 할 상황이다. 이제 학교숲은 학교 내 공간을 중심으로 운동장주변, 학교자투리에 숲을 조성하는 소극적이고 협의적 개념에서 적극적이고 광의적 개념인 '숲속 학교'를 꿈꿔야 한다. '숲속 학교'는 학교운동장을 최대한 숲으로 조성하고, 건물의 벽면, 옥상, 실내에 조성되는 다양한 녹화(벽면녹화, 옥상녹화, 실내녹화 등)를 포괄해야 한다. 특히, 학교공간을 넘어서 건강하고 안전한 학생들의 통학로 확보를 위한 '통학로 숲'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다. 2018년 경기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경기도 학생 1인당 학교숲 면적은 2.0㎡이고, 신설학교의 학생 1인당 학교숲 면적은 2.59㎡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국제기구(WHO/FAO)가 권장하고 있는 1인당 9㎡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숲속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최소한 1인당 6㎡의 학교숲을 돌려주려는 목표가 필요하다. 그래야 학생이 실감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숨쉬기 편하고 쾌적한 환경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녹색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 우선, 기존 학교숲의 훼손녹지를 복구하고 학교운동장 절반을 학교숲으로 조성한다. 학교경계숲, 학교건축물 녹화(벽면, 옥상, 실내) 등 다각적인 노력을 통해 학생 1인당 3㎡의 학교숲을 추가 확보할 수 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온도도 낮추고 미세먼지도 저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출산율 저하로 도시 내 학교는 통폐합과 함께 도시형 폐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2개 학교가 1개교로 통폐합되면 남은 학교운동장은 의미있는 알짜배기 땅이다. 학교숲과 마을정원 융합모델도 꿈꿀 수 있고, 공동체의 거점 공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학교운동장 전체를 녹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이렇듯, 학교숲에서 '숲속 학교'로 양적인 확대가 진일보해야 한다. 이와 함께 학교숲의 질적인 발전과 개선도 필요하다. 해외 학교숲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사례들을 본다면 시사점은 7가지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학생 중심의 절차와 과정을 중요시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학교구성원과 지역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둘째로 전문성의 확보와 일자리 창출에도 관심을 가진다. 다양한 조직과 전문가가 네트워크를 이루고, 전문성을 반영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지역의 일자리와도 연계된다. 셋째로 교육과정과 연계하여 학교숲에서 다양한 교육적 경험을 얻도록 하고 있다. 넷째로 인증제도를 통해 학교숲에 대한 인지도를 향상시키고 있다. 다섯째로 지역사회와 학교, 중앙정부와 지자체, 교육청, 전문가, NGO 등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이를 통해 프로그램, 연구, 자문, 자금, 자료 등을 지원받는다. 여섯째로 연구와 효과 검증을 통해 사회적 신뢰성을 확보하고 있다. 지역의 대학 및 연구소와 연계되어 지속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홍보와 확산을 위해 SNS, 유튜브 등 시대에 걸맞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우리나라 학교숲 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경기도교육청은 「미세먼지 저감을 통한 안전하고 건강한 교육환경 조성」을 정책과제로 설정하고 세부 추진과제로 학교숲을 조성하겠다고 선포하였다. 학교가 학교숲 조성을 주도하고 외부에서 지원하는 조성 주체의 변화가 예상된다. 또한 서울시는 올해부터 초록빛 꿈꾸는 통학로 프로젝트를 실시하는데, 학교 안에서 머물던 학교숲이 학교주변으로 확대되는 '숲속 학교'의 좋은 사례이다. 학교숲은 조성도 중요하지만 지역주민, 학생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배려를 통한 유지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학교숲의 복리이자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앞으로는 관리하지 않아 훼손되고 사리지는 학교숲은 없어야 한다. 학교숲은 다른 어떤 숲보다 교육적인 자산이다. 꿈꾸고 만들고 가꾸는 것이 교육과정과 연계될 수 있고 학생들의 참여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래서 학교숲 계획과 조성과정은 참여형 설계, 시공과정과 연계되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교육받을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투리에 숲을 조성하는 학교숲에서 '숲속 학교'로의 과감한 인식 전환과 실천이 요구된다. 김인호 / 신구대학교 환경조경과 교수
- 김인호 신구대 환경조경과 교수[email protected]
- 2019-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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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도시의 옥외공간은 이제 수십 년 자란 수목들을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일부는 여름 한낮인데도 가로등 불빛이 필요할 정도로 빽빽한 수관에 시원함과 상쾌함을 자랑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가로를 정원으로 삼아 보기 좋은 조경공간들이 민간의 손길로 가득 채워진 거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미 한국 조경은 그 만큼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전문업으로 새로운 지평을 가시화하고 있다. 지난 7월 24일 이와 관련한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다. 업계의 현황을 반영하듯 부실한 홍보에도 많은 청중이 참여하여 열띤 관심과 의견을 교류한 자리였다. 개인적 소회보다도 행사 이후의 관심과 격려에 한국 조경의 현실이 여전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것은 도시의 조경은 변화를 요청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응하는 업무 환경(전문업)은 고루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조경유지관리에 대한 제도 개선을 모색했던 계기였던 만큼 여기에 집중해 보자면, 건설의 한 종류로 한정된 채 사회적 서비스로 지속되기에는 새로운 활동 반경이 시급하게 필요한 시기라는 진단으로 요약된다. 개선의 방향이야 다방면으로 많은 논의와 소통이 기본일 터, 관심과 담론이 이어지길 기대하며 여기에서는 그 동안 제쳐두었던 기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 도시의 조경공간과 조경관리 90년대 이후 현대 조경이 장소의 재활용과 단계적 성장 전략을 보편화하며 신규 조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온 동안 기존 조경공간은 도시에 누적되며 스스로 성장하고 지속해왔다. 가히 제3의 자연으로 진화하며 이제는 도시인지 자연인지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그런 세월은 새로 만들고 채우는데 급급한 조경에 마치 되돌아보며 걸어온 길을 살펴달라는 듯 관심과 관리를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 조경이 지금여기의 위상을 점검할 때 필수적인 새로운 위치이자 또 하나의 지평이다. 도시재생이라는 큰 흐름에 가려 경제적, 사회적 지속성이 도시의 중요한 활성화 주제로 부각되었다지만, 낡은 아파트 단지에 아름드리로 자란 나무들은 재생의 대상으로 우선시되지 못하는 현실이 단적이다. 민간 영역이라 치부하기에는 그 역할이 달라져 이제는 생활인프라로서 이런 수목들은 도시적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지만 관리 사무에 있어 골칫거리 취급을 받기도 하고 새로운 개발의 저해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런 한편에서 미세먼지 등으로 공동의 관심사이자 문제가 된 기후변화의 해결사로 조경공간이 주목받는 추세임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새로 만들어 채울 공간과 그에 따르는 예산은 부족하고 제대로 눈길 주지 못해 제멋대로인 나무들 사이에서 조경유지관리의 필요성이 아이러니하게 부각되고 있는 셈이다. 살펴보면 해방 이후 우리 국토의 대부분에는 넉넉한 조경공간들이 산재하며 채워져 왔고 조경공간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녹지공간과 조경시설이 도시의 활력 그 자체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수령이 제법 되어 크기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거대한 나무들이 어렵지 않게 가득하다. 오래된 조경공간을 건물과 경쟁하며 커버린 나무들이 제 역할 다할 수 있도록 살펴봐 달라는 시기가 된 것이다. 커지는 재해 위험과 안전 요청, 재건축과 재개발 등은 대형목들에게는 생사여탈을 조경에 묻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현대 조경에 처음 있는 상황이다. 조경관리인가? 조경유지관리인가? 그에 비해 조경공간에 대한 ‘조경의 관리’는 모호한 편이다. 생태복원, 산림경관, 자연환경, 녹색인프라 등 새로운 조경공간의 조성에 제법 기술을 축적하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지난 세월 동안 조경관리는 그 기술이나 체계를 고도화(체계화)하지 못한 채 여전히 미약한 경험지식에 의존하고 있다. 단적으로 고품격의 조경수목관리는 소수의 최고 전문가들만이 활동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관련 교과서의 부실함은 인적 자원 또는 경험지식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카더라식 조경유지관리는 차치하더라도 신규 조경시공에 적용되는 방법을 그대로 여기저기 활용하는 것은 지금의 조경공간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다변화된 조경시설물로 인해 다양한 재료가 활용된 조경공간들은 제대로 된 유지관리가 흔치 않아 흉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목재를 활용한 시설물은 미관뿐만 아니라 안전에도 심각한 우려를 주는 경우가 많다. 관성처럼 신규로 누적되는 조경공간이 고도화되고 보편화된 결과일 것이나, 그 관리가 어떠한지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식재든 시설물이든 ‘조경의 관리’ 문제가 이뿐만이 아님은 조경가라면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근원은 조경관리와 조경유지관리의 모호함에서 그 첫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개념의 부정확과 혼란이 가져오는 결과들은 단순히 이해와 오해라는 인식의 간극을 뛰어넘는다. 한국 조경은 아직 이러한 이해와 오해의 간극에 천착해보지 못하였다. 단언하듯 말할 수 있는 것은 새로 채워 만드는데 치중해온 세월과 거기에 최적화된 업계의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논의가 필요하다. 7월의 심포지엄은 그런 문제의식의 표출이기도 했다. 조경유지관리는 어떻게? 먼저 중요한 것은 이것이 처음 맞는 상황이고 예상되었던 새로운 지평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무엇에서부터 어떻게 대응하고 준비해야 하는지는 적절한 질문에서 시작한 적합한 해답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 자료를 보니 벌써 10여 년도 전에 이러한 논의는 수차례 있었다. 몇 가지 답안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좀 더 근원적 해답이라기보다는 닥친 현실에 시급히 대응하기 위한 임시적 해법이라는 인상이다. 각론이 우선이었고 개론이 두루뭉술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잊듯 서론이나 문제의식은 단순히 형식적 도입부가 아니며 전체를 경계 짓고 방향을 지시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가지는데, 수십 년의 학생 시절을 거친 대부분의 우리는 교과서의 앞부분에 그리 집중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또는 당연히 잘 안다는 착각을 가지기도 한다. 심포지엄은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본성에서 시작하는 접근이 필요한데 몇 가지를 화두로 제시한 바 있다. 우리는 조경(造景)을 행위 개념으로 이해하고 정의하지만 그 결과물은 다양하고 그 경계도 불명확하다. 조경의 결과물이 하나로 지칭되거나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동안은 문제가 아니었을지라도 이제는 사용되는 어휘와 빈도, 관련된 개념이 일반어(보통명사)처럼 통용되고 있어 그 전문성이 희석되어 가는 양상이다. 그 대표격이 “조경공간”이라는 전문어이다. 조경설계기준이나 조경공사표준시방서에 흔하게 사용되고 또한 NCS와 같은 표준 교재에서도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말이지만 전문어로서의 정의나 개념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다시 말해 조경의 관리, 조경유지관리를 위한 대상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것이 지금까지의 조경관리와 조경유지관리를 어렵게 실행해야 했던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특히 조경을 고전적으로 폭넓게 광의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라면 더욱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문제의 원인 하나로는 충분히 곱씹어볼만 하고 이 글에서도 여러 어휘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눈치 챈 조경가가 많다면 조경유지관리의 ‘어떻게’가 충분히 조경의 새로운 지평이 될 수 있다는 방증이 될 것이다. 조경이 관리의 시대로 넘어왔다는 지적은 이미 이십여 년 전부터 들려왔다. 그 사이 조경은 어떤 변화와 대응을 해왔는지 따져 묻고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다. 현장과 현실은 언제나 생각과는 달랐고 조경은 그 특성상 눈앞의 문제에 우선 집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눈앞에 이제 답을 요청하는 새로운 역할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말뿐인 것이 아니라 현실이다. 새로운 조경의 지평이기도 하다. 조경유지관리는 즉 시급히 필요한 현대 조경의 현실이다. ‘아파트 조경’에서는 이미 그 전문성 미지원으로 인한 문제들이 가시화하고 확대되고 있다. 조경의 전문성이 이러한 현장에 하루 빨리 제대로 역할 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못함으로서 나타나는 문제는 단지 관리되지 못하는 대형목, 조경시설물 등의 문제를 벗어나고, 조경유지관리의 기술과 품질 문제를 벗어나, 조경의 전문성에까지 타격을 주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물론 지식을 체계화하는 것은 최우선의 과제일 터. 그리고 조심스럽게 우리는 조경관리업의 설정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조경의 새로운 공공성은 숨어 있는 고수들의 지식과 지혜에 기반해야 한다. 조경유지관리는 지난 시절처럼 지식을 수입하여 활용하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재적 경험지식에 권위를 부여하고 현대화 된 기술체계로 그것을 해석,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시간이 녹아야 스며나는 현장지식은 조경유지관리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이미 세월은 충분히 흘렀고 우리 현실에 적합한 경험도 충분하다. 현대 조경은 그 공과를 부여안고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야 한다. 안명준 조경평론가
- 안명준 조경평론가[email protected]
- 2019-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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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비가 풍년이다. 해가 다르게 날이 다르니 가늠이 잘되지 않는다. 패턴을 파악할만하면 변수가 생겨 촬영 일정을 몇 번 망치고 나니 비가 원망스럽다. 감히 안다고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리라 짐작해 본다.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가오는 가을에 맞춰 감상적인 질문을 던져 본다. "취미 하면서 일하고 좋구먼" 집중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누군가 다가와 처음 내뱉는 말에 무장해제 되어버린다는 것은 어떻게 반응할지도 생각하기도 전에 눈만 껌뻑이는 바보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 경험은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어떤 감정이다. 마무리가 다 되어가는 현장을 다니다 보면 일꾼들은 한창때보다는 걸음이 길다. 긴 걸음 사이 그들은 하릴없이 주렁주렁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신기한 누군가에게 거침없이 한마디씩 던질 뿐이다. 대답할 쯤 그는 이미 멀리 가버렸다. 처음에는 대답을 듣고 싶어 저런 것인지 아니면 혼잣말에 과민반응한 것인지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해보면 그저 안 보이던 누군가의 행색이 신기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각양각색의 현장 사람들을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아닌 관찰자의 시점으로 보게 되는 일종의 각성 시야를 갖게 될 때가 있다. 그들은 짧게는 며칠에서 몇 년에 걸쳐 한 곳에 있었고 심지어 그곳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을 보아왔을 것이다. 단 며칠로 그들보다 그곳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록으로서 사진의 한계가 실제 경험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죽은 나무 찍으러 왔어요? 아니면 뭐를 찍으러 왔데?" 준공이 끝난 현장에서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공간을 단순히 점유하기보다 이용하면서 겪는 누군가의 경험을 듣는 것은 하자에서 시작해 하자로 끝날 때도 있다. 물론 호평 일색의 설명도 있다. 공간의 소유와 소비 혹은 점유하는 누군가의 관점은 감상을 넘어 보고 싶지 않은 것과 그러한 것으로 나뉘기도 한다. ‘저 나무’ 때문에 ‘이 사진’이 싫은 경우도 있다. 이미 사진 미학은 저 너머에 있다. 그들보다 그곳을 잘 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어떤 대답을 위해 허공에 사진기를 위치하고 있어야 할까. 한 장의 사진은 누군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때로는 기술적 필요에 의해서, 때로는 아름다움을 위해 대답해야 한다. 어떤 사진은 모든 사람을 위해, 어떤 사진은 일부에 의해 만들어진다. 수많은 변수 틈에서 한 장의 사진은 기록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록은 수많은 사건의 바탕이 될 상상을 해본다. 무한한 바탕이 되어 사진은 무한한 사건들을 품는다. 이쯤에서 사진은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조경을 품은 사진에 대해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일어났고 일어날 수많은 일들을 감히 안다고 하지 않겠다. 다만 짐작하며 담아낼 뿐이다.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날 자리를 담아내는 것, 그것이 조경사진의 역할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한낱 기억의 파편이 될지라도 말이다. 유청오 / 조경사진가
- 유청오 조경사진가[email protected]
- 2019-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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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오픈 자문회의 이후, 어린이 참여에 대한 의심은 옆으로 밀쳐놓고 경험과 함께 축적된 편견은 의심하면서 어린이 참여에 접근하고 있다. 운이 좋게도 시간을 가지고 어린이 참여디자인을 차근차근 진행해볼 수 있는 기회도 여러 번 갖게 되었다. 경험을 되새김질하며 매회 워크숍 계획을 신중하게 짰고, 워크숍이 끝난 후에는 계획한 대로 워크숍이 진행됐는지, 기대했던 결과물을 얻었는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토론했다. 또 2018년 가을부터 2019년 봄 사이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후원으로 ‘아동참여 놀이터조성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작성하면서는 많은 관련 연구도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나나 조경작업소 울 구성원들은 편견을 갖게 된 원인을 파악했고 이는 우리의 노하우가 되었다. ‘연령별로 참여 방식이 달라야 한다. 참여의 목적이 명확해야 한다. 아이들은 철사 사용을 힘들어 하고 사용 자체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유독 좋아하는 점토는 어느 회사의 00점토이다. 워크숍 진행시 각 팀은 4~5명을 넘지 않는 게 좋다. 각 테이블마다 보조 진행자가 있어야 한다. 보조 진행자는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 크루아상은 부스러지기 쉬워 간식으로 좋지 않다. 유제품을 못 먹는 어린이들을 미리 확인하고 간식을 준비해야 한다’ 등등이다. 이번 글에서는 이 중 세 가지 노하우를 공유하려 한다. “목적을 명확히 해야 한다” 언젠가 한 어린이 관련 시민단체에서 어떻게 어린이 감리단을 운영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자문을 구하는 연락을 해왔다. 감리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작업인데 어떻게 어린이들이 할 수 있냐고 역으로 질문했더니 난감해하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하고 있어 별 의심 없이 자신들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감리’라는 단어를 사전 그대로 적용하기 보다는 ‘어린이들이 공사 과정에 참여한다’라는 의미로 보고 어린이들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공사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두 가지 목적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어린이들과 공사의 과정을 공유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이들의 시선에서 위험요소(hazard)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 속에서 세 번의 워크숍을 기획할 수 있다. 공사 시작 시점에서는 어린이들한테 도면이나 조감도 상의 공간이 어떻게 대상지에 구현되는지를 설명해주면서 디자인의 추상성을 구체화시켜주는 것이다. 공사 중간 단계에서는 현재 어떤 공정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 공정에서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에는 어린이들과 현장을 돌며 위험요소와 불편 요소를 어린이들의 시선에서 점검하는 것이다. “점진적 의사 결정을 원칙으로 두고 과정을 디자인해야 한다”만약 어린이들과 총 다섯 번의 워크숍을 한다고 했을 때, 첫날 만나자마자 어린이들한테 “여러분들이 원하는 놀이터가 무엇이에요?”라고 물으면 테마파크에서나 볼 법한 시설물을 그려놓기 쉽다. 말만으로는 우리가 다루어야할 대상지가 동네 놀이터임을 인식시키기가 쉽지 않다. 반면 먼저 동네 놀이터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원하는 놀이터를 그리게 하면 아이들은 자연스레 동네 놀이터를 대상으로 생각을 펼친다. 이렇게 실행 속에서 어린이들이 프로젝트의 맥락에 들어오고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과정을 디자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문제 인식의 공유, 방향성 설정, 디자인 발전이라는 디자인의 점진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아무리 열심히 과정을 디자인해도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다. 과감하게 순서를 바꿔야 할 때도 있다. 즉 순환적인 과정이어야 한다. “연령별로 어린이 참여의 접근 방식이 달라야 한다” 어린이 참여디자인 과정을 디자인하고 워크숍 기법을 선정할 때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한다. 대상지가 어린이집 앞마당인지, 학교 운동장인지 아니면 어린이공원인지도 하나의 변수이고 몇 회의 워크숍이 가능한지도 염두에 둔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변수는 연령이다. 일례로 조경작업소 울은 디자이너와의 상호작용이 필요한 디자인 워크숍은 보통 초등학교 4, 5학년과 함께 한다. 저학년과는 상호소통을 통한 디자인 발전이 쉽지 않고 6학년은 이미 놀이터에 대한 관심이 줄어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편견인지 아니면 일반화할 수 있는 경험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문헌을 찾아보니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연령별로 참여 기법을 달리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린이 참여 연구의 권위자인 Hart(1997)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7~10세의 어린이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점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또 10세 이상이 되면 다른 사람들의 다양하고 엇갈린 감정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10~12세의 아동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을 보는 방식에 대해서도 인식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다 높은 수준의 참여가 가능하다.” 어린이 참여는 쉽지 않다. 할수록 어렵다.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반화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의 어린이들은 색종이를 잘 사용했는데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거나, 어떤 질문이 어디에서는 효과적으로 전달되는데 또 어디에서는 그렇지 않다. 스스로 세운 가이드라인과 원칙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지속적이고 반성적으로 경험을 축적하는 게 어려움을 최소화하는 최선일 것이다. 물론 각자가 자신이 축적한 경험을 공유하고 논하는 자리도 필요하다. 첫날 만나자마자 어린이들한테 “여러분들이 원하는 놀이터가 무엇이에요?”라고 물으면 테마파크에서나 볼 법한 시설물을 그려놓는다.먼저 동네 놀이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원하는 놀이터를 그리게 하면 아이들은 자연스레 동네 놀이터를 대상으로 생각을 펼친다. 어린이 참여디자인은 어린이들이 프로젝트의 맥락에 먼저 들어오고 점차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과정을 디자인해야 한다. ‘아동참여 놀이터 디자인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분은 조경작업소 울([email protected])로 문의하면 된다. 김연금 / 조경작업소 울 소장
- 김연금 조경작업소 울 소장[email protected]
- 2019-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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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 연재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우리 사회는 전후 세대의 폭발적 인구 성장시대를 지나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1960년 2500만 명이던 인구는 2012년 5000만 명으로 증가하여 불과 50년 만에 2배로 성장했다. 그리고 2031년 5300만 명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접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인구성장에 맞춰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택지개발촉진법이 1980년 제정되었다. 이 법은 도시지역의 시급한 주택난 해소를 위하여 주택건설에 필요한 택지의 취득·개발·공급 및 관리 등에 관한 특례를 규정하였다. 1989년 성남시 분당, 고양시 일산 등 5개의 1기 신도시 건설계획으로 1992년 117만명이 거주하는 대단위 주거타운이 탄생했다. 2003년에는 경기 김포(한강), 화성 동탄1·2 등 수도권 10개 지역을 포함한 12개 2기 신도시 계획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2014년 국회에서 발의된 택지개발촉진법 폐지 법률안은 주택부족 문제가 크게 개선되어 법 실익이 떨어진다고 전했다. 공공택지의 안정적 공급과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향후 택지 개발의 감소로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도시계획시설로서 공급되던 도시공원의 양적 성장에 기여를 해온 신도시 시대의 폐막을 의미한다. 현재 전국에 2만 1500개의 도시공원이 조성되어있다. 도시공원 문제와 시민참여 그동안 열악한 도시환경에서 공원은 양적인 확대가 가장 큰 과제였다. 도시인구의 급속한 증가와 더불어 도시공원의 기능은 계획 목적과 다양한 활동 요구에 따라 세분화되어 왔다. 하지만 도시공원은 대부분 시설을 중심으로 설계가 이루어졌고 조성 이후 운영과 관리에 대한 고려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최일홍 박사는 2002년 ‘공원녹지 특성화를 위한 이용프로그램 개발 및 계획지침 작성 연구’에서 기존 공원의 문제점으로 설계자 위주의 계획, 법규적 디자인, 공원의 위계적 규모 및 균등적 배치기준의 문제, 과정적 가치의 부재로 인한 주민참여 미흡을 들었다. 공원은 미술관의 전시품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실제 이용하는 하나의 공공재로서 변화된 사회적 요구와 계층별 이용자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요소로 구성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95년 지방자치시대가 개막되어 도시행정에서 시민참여의 목소리가 높아져 갔으며 일부 도시공원에서는 훌륭한 수용체 역할을 하였다. 김인호 신구대 교수는 2011년 한일 도시공원정책 세미나에서 "시민사회로의 성숙과 함께 참여민주주의로 발돋움하고 있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도시공원 정책은 환경개선을 의미하는 단선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제반 사회문제들과 연계되어 검토되어야 한다"며, "이미 선진국에서 성공사례로 소개되고 있는 성숙한 주민의식을 바탕으로 한 시민참여형 공원관리는 선진 행정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요체"라고 강조했다. 시민참여와 도시공원의 변화 양상 도시공원은 도시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도시의 필수시설로서 점차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3만 불 소득, 주 52시간 근무, 평생교육 등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며 지역 공동체의 중심으로서 녹색복지와 일자리 창출 등에 기여해왔다. 이와 같은 도시공원의 역할 다양화와 더불어 도시공원의 패러다임은 다음과 같은 변화양상을 보이고 있다. 첫째, 도시공원의 설계, 조성과 이용에 시민참여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도시공원 조성 단계별로 시민참여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둘째, 참여 프로그램 중심의 공원 이용과 리모델링이 늘어나고 있다. 2013년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에 도시농업공원이 포함되고, 숲유치원, 자연체험 학습장 등 시민들의 활동과 참여 이용 프로그램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셋째, 공공 주도의 공원 운영에서 기업, 시민단체와의 협업과 타 공공기관의 적극적인 운영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도시공원의 이용과 운영의 효율성 증대를 위해 시민참여와 파트너십이 나타나고 있고 도시공원의 접근성과 지역자원에 부응하는 다양한 형태의 공원 운영이 시도되고 있다. 다양한 시민 이용프로그램 제공 도시공원은 도심에서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시민 모두에게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고 활용되고 있다. 특히 시민들의 도시공원 이용 활성화를 위해서는 방문 동기를 높일 수 있는 이용 참여프로그램의 제공이 필요하며 다음의 4가지 프로그램의 유형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환경·생태 프로그램이다. 근린공원에서 많이 시행 중인 환경체험‧교육 프로그램은 시민들이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환경의 의미와 가치를 경험하고 환경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학습할 수 있다. 둘째, 문화·예술 프로그램이다. 도시공원의 문화·예술 프로그램 및 시설은 지역의 문화적인 활력소가 된다. 최근에는 문화행사를 할 수 있는 주제공원을 조성하여 도시 정체성을 살리고 있다. 셋째, 건강·체육 프로그램이다. 도시에서 공원녹지는 육체적 활동공간으로서 건강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치유 환경의 기반이다. 넷째, 도시농업 프로그램이다. 공원형 도시농업의 유형은 공원 내 텃밭 조성과 주제공원인 도시농업공원으로 구분된다. 도시농업공원은 농업이 중심이 되어 농업·농촌과 관련한 공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관리방식의 다각화와 사업모델의 창출 도시공원의 관리주체인 지자체는 전문 인력의 부족과 전문성 결여로 공원관리와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해 왔다. 도시공원의 관리는 주로 공원관리청인 지방자치단체에서 직접 운영·관리하는 직영관리나 시설관리공단이나 공원관리공단 등 준정부기관을 통한 간접관리 방식을 채택해 왔다. 하지만 향후 공원관리는 정부의 팽창을 방지하고 시설투자의 비용 감소, 노무관리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공원의 일부 및 전체 관리를 공기업, 민간업체, 시민단체 등에 위탁하는 민간위탁 방식으로 확대될 것이다. 특히 공기업은 특수성격의 공원을 총괄관리하고 민간업체는 단위시설 경영관리와 녹지 및 조경시설 유지관리, 시민단체는 이용자나 프로그램, 시민참여 관리 등에 참여기회가 증대되고 있다. 그동안 조경분야는 인구성장에 따른 도시의 확장과 신도시 건설시대를 지나며 공동주택 조경이나 도시공원의 계획‧설계와 시공에 주력해 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국토는 건설에서 관리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어 여건 변화에 따른 탄력적 대응이 필요하다. 조경계는 현실과 미래의 여건 변화를 직시하고 조성 시설의 운영·관리에 대한 관심과 역량 배양을 해야 한다. 특히 도시공원의 질적 향상을 위한 기술개발과 집중을 통해 선진 도시공원의 면모를 갖추고 조경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도록 해야 한다. 대학에서는 시민사회와의 교류와 교과목 개발을 통한 선도적 역할이 필요하며 업계는 기존 도시공원에 대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운영·관리에 대한 경쟁력을 확보하는 새로운 사업모델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저성장시대에 있으며 인구 성장의 저하와 성장 동력의 부재로 새로운 가치 창출을 통한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사회적 요구가 증대되고 있다. 부동산 경기의 침체, SOC 투자 감소 등 건설 산업의 저조는 해외진출이나 대북사업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하지만 현실은 요원한 상황이다. 따라서 대내외적 상황을 고려한 외연 확장의 기초는 다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도시공원을 기반으로 한 이용프로그램을 확충하는 동시에 시설 리모델링을 병행하는 사업모델 창출이 필요하다. 안승홍 / 한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 안승홍 한경대 조경학과 교수
- 2019-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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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집들이 춤추는 선유도공원 아래의 나무를 먼저 보자. 나무는 사연을 가지고 있다.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 모습만으로도 세월의 풍파가 느껴진다. 나무는 이곳에 자리 잡기 전 새로운 개발로 베어 없어질 위기에 놓인 적이 있다. 기회가 있어 이 나무만은 터의 주인공으로 남겨 달라 부탁 아닌 부탁을 했었다. 다행히 나무는 터를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기회가 되면 이곳에 들러 그 세월의 흔적을 나무와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선유도공원은 본래 공원 전체가 이 나무와 비슷했다. 지워 없애고 진한 화장의 산뜻한 현대 도시공간으로 흔적 없이 변모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다행히 장소는 재활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처음의 낯설면서 새로웠던 ‘문화적 충격’을 소화한 듯 ‘인문학적 공원’으로 진화하고 있다. 마셜 맥루한이 말했다든가 “구텐베르크가 모든 사람을 독자로 만들었듯”. 선유도공원은 드디어 우리에게 공원을 생활(lifestyle)로 선물하고 있다. 알다시피 선유도공원은 정수시설이었다. 산업시설이자 보안시설이었던 셈이다. 우리에게 예전 그곳 모습이 좋든 싫든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도시에, 저 너머 강 가운데 있지만 가볼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자 너머의 장소였던 것이다. 장소의 기억과 이미지는 그렇게 통제되기도 한다. 시설물의 특성이 그렇듯 활용이 달라지고 마침 2000년대로 들어선 시대와도 맞물려 용도를 바꾸어야 했다. ‘일방적이지 않은 의사결정(bottom-up decision making)’이 보편화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곳이 공모를 통해 ‘작품’인 설계안을 선정하여 공원으로 만들어진 배경이다. 이후 여러 상을 휩쓸다시피 하고 그 전략이 다른 공원에도 이식되며 하나의 문화적 트렌드이자 대표성(특이점)을 가지게도 된다. 선유도공원은 그렇게 탄생한 우리 역사 최초의 ‘본격 장소 재활용 공원’이다. 공원을 걷다보면 이제는 과하게 느껴질 만큼 장소의 역사와 흔적이 빼곡하게 꽉 차 있다. 시간이 흘러 새로 자리 잡은 자연물이 그 강렬함을 새로운 차원으로, 새로운 인식으로 이끌어 간다. 아류보다 진품이 깊이가 있다는 것은 공원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 만큼 선유도공원은 여전히 시대적 화두처럼 문화의 한 시점(viewpoint)으로 작용하고 있다. 21세기의 5분의 1이 지나는 시점에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 만큼의 ‘경험과 생활’(文化)이 쌓였다면 이제 새로운 성찰과 통찰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한다. 선유도공원이 준 문화적 충격은 어떤 의미였고 새로운 논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우리에게 남겼는지 생각의 깊이를 더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는 공원을 살펴보기 보다는 몇 가지를 돌아보면 어떨까 한다. 앞 편에서 얘기했듯 공원이 우리에게 이식된 문화의 하나임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첫 번째로 선유도공원은 조경이 만든 공간이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조경이 딱딱하고 무거운 도시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경관과 풍경을 다루는 전문가가 도시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 세계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공원이기도 하다. 혹자는 건축물로 오해하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 조경공간이다. 조경공간에 건축물과 구조물이 집처럼 뒤섞여 있는 것이다. 공원이 도시기반시설이라고는 하지만 그 전에 조경공간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건축물로 착각하는 배경에는 건축이라는 개념의 포괄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물리적으로 만들고 경계 짓는 것에 익숙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내외부 풍경이 보이고 보여지며 만들어지는 독특한 공원의 풍경은 기존의 낡은 구조물과 공간들로 인해 은연중 경계가 생기며 다채로우면서도 독립적인 공간 특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당시의 설계는 그것이 중요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한 공원은 그런 경계진 공간들이 저마다 각각의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공간들이 도시의 집처럼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는 장소로 성장한 것이다. “공원은 삶을 반영한다. 공원은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 다시 말해 기품과 공간, 선택, 전망을 보여준다… 우리는 변하고 나이 들고 머물렀다 떠나가고 종국에는 죽는다. 하지만 공원은 이 모든 것을 견뎌낸다. 언제나 그것에 있을 공원이 슬픈 우리의 영혼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_ 케이티 머론 저, 오현아 역, 『도시의 공원』, 마음산책, 2015. 그런 점에서 선유도공원은 여전히 화두가 된다. 공원이 살아 있는 도시공간으로 성장해갈 것이라는 점은 처음부터 고려되었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공원은 도시의 삶으로 성장하고 진화할 숙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조경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옥외환경에 조성하는 역할만 해서는 안 된다. 조경은 특히 경계 없는 식물 공간을 주 무기로 한다는 점에서 여타 전문분야와 차별되는 독특한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조경전문가의 사회문화적 기능과 가치를 획기적으로 보여준 사례는 국내에서 많지 않다. 여러 면에서 선유도공원은 그 첫 사례로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한국 조경에서의 아방가르드(the vanguard)라 해도 무방하다. 기획, 계획, 설계, 시공, 관리 모든 측면에서 말이다. 보다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한국에서 장소의 역사를 제대로 활용한 대표적인 곳이 선유도공원이다. 맥주 담금솥 하나로 수줍게 장소를 기억하던 시도(영등포공원)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기처럼 터의 이야기를 과감하게 주인공으로 삼은 공원은 우리에게 이전에는 없었다. 환경 재생 공원, 장소 재활용 공원 등의 레토릭은 실은 이를 모두 표현할 수 없는 설명이다. 이곳의 역사와 문화가 외부와 직접 연결된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원에 펼쳐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장소의 특수성이 아니라 시대의 특수성, 시대적 공통감을 먼저 활용했다고 보는 것이 우선이다. 여기에는 터에 담긴 이야기를 뽑아 버릴 수 없는 무엇으로 보는 시각을 모두에게 인식시켰다는 성과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잊고 있지만 그렇게 되살아난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성으로 복기되며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선유도공원은 한강과 위아래 강 너머 풍경, 산업시설과 최신 문화시설, 생태환경과 자연공원 등이 새로운 감성이자 본성으로 체득되었을 것이다. 공사판 같았던 도시 풍경과 빽빽한 철문 사이의 골목길 풍경의 우리들 낡은 도시 기억이 아니라 그들만의 새로운 도시 풍경이 ‘그리운 옛 기억’으로 이미 자리 잡은 것이다. 선유도공원의 가치는 이런 점에서 심도 있게 재탐구 될 필요가 있다. 2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세대에게 기억되는 서울을 기성세대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공원을 생활의 하나로 즐기며 성장한 그들과 행락을 특별한 무엇으로 여겨야만 했던 우리들의 도시 이미지가 선유도공원을 통해 만나고 겹쳐지며 새로워지기를 꿈꾸어 보자. 세 번째로 선유도공원에는 우리 도시의 본성이 그대로 담겨 있다. 도시는 집들이 춤추는 터이다. 근대 도시계획은 단단한 공간들로 우리의 일상을 꽉 차게 구축한 바 있다. 그래서 도시는 딱딱하고 무겁고 힘들다. 게다가 생산이 멈춘 도시는 이제 시민들이 뛰노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은 정보(IT)가 유목민도 못된 채 그 사이를 날아다닌다. 사유의 실로(失路)가 보편화된 시대에 선유도공원은 옛 구축물로 꽉 채워진 산업시설의 바탕 위에 연하고 하늘거리는 생명이 가득 들어차 묘한 대조의 미, 숭고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임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선유도공원을 통해서 서울만의 독특한 ‘단자화 된 사람들, 무리로 사는 인간’을 볼 기회를 가진다. 선유도공원은 그런 점에서 인문(학)적이고 감성적인 공원이자 장소인 것이다. 수많은 집들과 공간들이 시간까지 얽어가며 섞인 이 공원은 그런 점에서 다시 보고 다시 보아야 할 고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도시의 모습을 단순히 축소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감성을 다각도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모든 것을 지을 수 있지만 사는 일을 강요할 수 없다는 아래와 같은 반성은 공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누구나 건축가다. 모든 것이 건축이다. All are architects. Everything is architecture.(한스 홀라인, Hans Hollein, 오스트리아 건축가)…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사람의 삶은 건축보다 훨씬 중요하고 또 어려워서,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삶이라 할지라도 건축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거나 디자인할 수는 없다. 건축가에게는 사는 이의 생활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_ 김광현,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 뜨인돌출판사, 2018, pp.68~71. 그런 흔적은 선유도공원에 담겨 있다. 선유정으로 대표되는 본능처럼 작용한 한국성이라는 화두는 그렇게 집들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상징적 전통이 오브제처럼 놓여 있지만 이름이든 공간이든, 의도였든 강요였든 이것은 이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지점이다. 불편하고 어색하다는 처음의 목소리가 어떻게 변화했으며 특히 공원을 생활로 즐기는 우리에게 어떤 목소리를 내게 하는지 장소의 관점에서 시계열적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거기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녹아 있다고 믿는다. 네 번째로 선유도공원은 생활공간의 예술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간간이 들리는 공공예술의 문제와는 달리 작품으로서의 공원은 전혀 다른 위상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선유도공원은 그 중에서도 아방가르드적이라 할 만큼 커다란 공원미학적 충격을 주었다. 우리 사회는 그러나 그 충격을 재치 있게 소화하였다. 선유정은 그 표징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마크 로스코의 예술관에서 새로운 힌트를 찾아보자. 그는 표현보다 소통에 중점을 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이고 “소통을 위한 표현성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도 울릴 수 있는 나름의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는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감정들(human emotions), 즉 비극(tragedy)과 환희(ecstasy), 그리고 숙명(doom)과 같은 감정들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그림과 직면했을 때 주저앉아 운다는 사실은, 제가 그런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감정들을 ‘소통시켰다(communicate).’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기표현(self-expression)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행해지는, 즉 세계에 대한 소통(communication)입니다. 이러한 소통이 있은 후 세계가 납득된다면, 우리 세계는 변하게 될 것입니다. 피카소나 미로가 있은 후의 이 세계는 결코 과거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그림은 사물을 보는 우리의 시선을 변형시켜 주는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_ 강신주, 『마크 로스코(Mark Rothko)(VOL.2:TEXT)』, 민음사, 2015, pp.85~87. 그런 점에서 선유도공원은 조경을 공공을 위한 예술의 하나라고 할 때 무엇을 남겨주었고 보편화하였나, 형태만 좆는 아류 설계 또는 이전 시대 이름만 커다란 설계에 어떤 성찰을 주었나 돌아보게 한다. 아니다, 이제는 무엇을 남겼고 어떻게 진화했는지 꼭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앙리 마티스의 이야기는 예술을 추구하는 모든 이에게 조언이 될 수 있고 선유도공원을 예술로 다룬 모든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모든 예술가에게는 시대의 각인이 찍혀 있다. 위대한 예술가는 그러한 각인이 가장 깊이 새겨져 있는 사람이다. 좋아하건 싫어하건 설사 우리가 스스로를 고집스레 유배자라고 부를지라도 시대와 우리는 단단한 끈으로 묶여 있으며 어떤 작가도 그 끈에서 풀려날 수 없다.” 앙리 마티스, “어느 화가의 노트” 중(이광래, 『미술 철학사』 3권, 미메시스, 2016, p.4) 집들이 들어앉아 이제 제 안방인 양 춤추는 공원의 모습을 우리는 인문(人文)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집들이 여기에 들어앉았는지 체험하고 체현하며 새로움은 언제나 낡음으로부터 진화된 것임을 또 하나의 사례로 되새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 이식된 근대 공원은 생활로 소화되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집은 인간의 가장 작은 생활의 단위, 진화의 단위이다. 오늘날 새 시대의 선유도공원은 어떤 집들이 춤추고 있는지 직접 보고, 자주 보고, 돌아보며 즐기고 느끼는 인문 공원으로 재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를 분별하는 새로운 시점이라는 성찰로 기억될 수 있어야 한다. Park 04. 집들이 춤추는 공원들, “확장하는 도시와 공원, 그리고 재생” 우리 사회는 이제 좀 인문학 열풍이 수그러든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느 정도 사람과 인간에 대한 생각들이 생활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그것이 수평적 보편화가 아니라 수직적 특수화(개성화)로 깊이를 달리할 것이다. 이때는 경제로 치환되지 않는 역사와 문화, 공동체성이 깊게 작용한다. 문명이 나뉜 것도 그 때문이다. 인문의 보편화는 진화의 초석이고 새로운 문명의 시점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미 그것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빨리빨리와 모두가 함께 라는 동질화가 작용하고 있다. 유행이라지만 몸에 밴 상호작용이라 낙관할 부분이라고 본다. 그리니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은 얼마든지 인류의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선유도공원은 그 트리거였다. 월드컵공원도 그러하였다. 하늘공원, 서울숲, 북서울꿈의숲 등 대형공원들도 그러하였다. 우리의 인문(人文)은 그렇게 집들과 공간들 사이를 오가고 있는 셈이다. 공원이 인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공원은 언젠가 “도시의 문양”(都市文)으로 기억되고 활용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그런 개인적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경공환장’ 시리즈의 핵심이라고 할 만 하다. 우리는 집을 중심으로 사고하기 마련인데 그것에 대한 평소의 생각이 여기에 압축되어 있다. 기술사(史)가 아닌 문화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강연을 통해서 틈틈이 설명해오던 요약 같은 결론만 몇 가지로 도표화하였다. 이는 공원과 조경을 이해하는 좀 더 넓은 시야를 획득하기 위함이다. 앞 편에서 우리는 공원과 산책 사이의 관계를 조경 개념을 매개로 이해해보고자 하였다. 보기에 따라 무리함이 있고 다소 긴 내용이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모두 이해할 필요는 없더라도 한 번의 일별을 권유한 것은 그것을 바탕으로 확장되는 우리 도시와 삶터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시야를 위해서였다. 한 번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것을 이번에는 밑그림 식으로 전체를 보고자 하는 것이며, 차차 이것들을 하나씩 심도 있게 살펴보기를 기대한다. 물론 그것은 공원을 통해서이다. 1. 자연(origin)과 파생어들(originality), 본연을 구분짓기 우리 문명에 대해서는 수많은 설명이 있지만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류가 물리적 공간과 일상적 활동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쉽게 말해 현대 도시는 공간과 삶이 분리된 채 물리적으로 채우는데 급급한 도시로 성장하였다는 것이고 이제는 그렇게 분리된 두 가지가 장소라는 개념을 통해 본능으로 남아 있는 삶터에 대한 욕구를 되살리려 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장소성은 그런 맥락을 통틀어 부르는 가벼운 이름일 뿐이다. 여러 사례들이 전문가의 손을 거치지 않고 도시 생활공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본능의 측면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 그림은 이런 생각을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학자들이 말하는 혁명적 사건의 발생에 따라 도시공간과 인간활동은 점점 더 거리를 두며 멀어지게 되었다. 거기에 적응하는 인류의 노력은 여러 문화적 현상으로 뒤따르기는 하였으나 그 힘이 결국에는 우리 도시의 미래를 새롭게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본연이라 할 수 있는 자연이 어떻게 이해되고 분해되느냐에 따라 많은 전문분야가 파생되었고, 심지어는 의도적인 구분짓기를 통해 개념을 강화하고 새로운 사고의 방향성을 발명처럼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런 모든 것이 공간과 활동의 새로운 통합을 지향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시점이다. 우리는 나누고 구분하고 분석하며 보낸 20세기를 그렇게 반성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2. 실천(practice)과 실행들(making), 지식을 구별하기 도시가 복잡해지면서 그에 따르는 행위도 복잡해졌다. 그러나 행위의 표현과 소통은 해당 행위 이전에 만들어진 개념과 사고를 통해 이루어진다. 쉽게 말해, 말을 통해 행위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느끼지만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으면 행위가 의도와는 다르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언어의 세계는 수학이 아니어서 말이 하나의 행위에 하나의 어휘로 대입되지 않기 때문에 말은 저마다 다른 뜻을 내포한 채 새롭게 필요로 하는 행위에 따라 조합되어 사용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각자가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는 같은 어휘라 하더라도 저마다의 경험과 사고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곤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어는 본성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시는 항상 탈이 많을 수밖에 없다. 도시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며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같은 언어라도 위계를 두고 체계를 두어 곤란해질 수 있는 행위들에 기준을 세워두었다. 대체로 “일상어, 전문어, 법률어”로 나뉘는데 사용하는 문자가 다른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경우에 따라 아주 복잡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전문어와 법률어를 모두 우리가 알고 구별하며 사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대부분 일상생활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일상을 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두 또는 대부분 직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직업이 아니더라도 저마다의 전문 분야에 몸담고 저마다의 생산활동으로 삶을 영위한다. 이 생활과 저 생활을 오가는 이때 우리의 일상어와 전문어는 뒤섞이곤 한다. 그런 날들이 많아지면 그 경계는 더욱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 대부분은 그 사람의 말투에 따라 그가 어디에 더 방점을 두고 사는지 알 수 있다. 일상에서야 이런 상황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문 분야에서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동일한 어휘를 사용하고 충분히 소통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최종 결과물이 엉뚱한 경우를 대부분 한두 번씩 경험한 적 있을 것이다. 현장에서 지속적인 회의와 지난한 협의가 반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래 말들은 그 대표적인 것들을 모아본 것이다. 특별히 범주를 구분하지 않았으나 비슷한 유형으로 보이는 것들은 묶어보았다. 어떤가, 일상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되고 구별되는 어휘이지 않은가? - 조경, 건축, 도시, 엔지니어링, 경관, 건물, 공간, 환경, 장소, 풍경, 지리, 문화, 유산, 복합, 융합, 통합, 융복합, 생활, 시야, 시선, 시점, 아름다움, 운치, 천연, 인공, 유적, 전원, 조망, 조망점, 진화, 축, 차경 - 토지, 지반, 기반, 대지, 경치, 통경, 풍치, 하천, 마을, 생태, 자연, 시설물, 구조물, 건축물, 문화재, 정원, 공원, 유원지 - 계획, 설계, 구조, 기능, 배치, 설치, 공간구조, 생활권, 주변, 기능, 용도, 도시, 지역, 지방, 지구, 구역, 용도, 기반시설, 공간시설, 공급시설, 교통시설, 광역시설, 공공시설, 공작물, 생활인프라, 생활환경, 자연환경, 야생생물, 습지, 생태계 - 설치, 정비, 개량, 개발, 보수, 제공, 향상, 인가, 허가, 승인, 협의, 의견, 처리, 검사, 지정, 경우, 처분, 행위, 조치, 촉진, 지정, 점용, 분할, 공유, 개발행위, 보전, 활용, 복원, 제공, 공급, 평가, 관리, 변경, 조정, 검사, 안녕, 건전, 양호, 미관, 공동번영, 균형발전, 협력 전문어로서는 그렇다면 어떤가? 그 의미와 용도를 잘 구별할 수 있을까? “개발, 정비, 개량, 보수, 조치, 조정, 변경” 이것들은 각각 무슨 의미이고 어떻게 구분하여 사용해야 할까? 전문성은 거기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전문가라면 최소한 일상어와 전문어는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법률어로 본다면 또 다른 이해가 필요해 진다. 그러나 근래 수십 년간 여러 분야들이 뒤섞이는 과정에서 전문어로 이해되고 구별되어야 할 개념과 사고가 경계 없이 뒤섞이는 경우는 많이 보아왔다. 혹자는 창의적이라 보았고 혹자는 영역의 확장이라고 보았다. 또는 여러 가지가 혼합되는 시대적 흐름이 반영된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가는 전문어에 담긴 역사성과 전문성을 무시하고 그로 인한 기술적, 문화적 깊이를 지워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었다.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깊이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이기는 하지만 겉핥기식 개념어 혼합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식으로 말하면 키치(kitsch)의 양산일 뿐이다. 단순히 저속한 작품을 양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본성 또는 전문성을 무시한 채 익숙한(일상적) 겉모양만 베껴 활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전문가라면 최소한 해당 전문 영역의 개념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인접 분야 전문어에 대해서 최소한의 이해가 필수인 시대를 지나고 있는 셈이다. 다음의 그림은 그런 용어들 중에서 중요하게 구별하고 활용해야 하는 것들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대상물을 지칭하는 말들과 실천행위를 지칭하는 말들은 결국 분야의 전문성과 깊이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통할 때 오해 없는 실천이 가능할 것이다.
- 안명준 조경평론가[email protected]
- 20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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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어린이들의 참여를 통한 놀이터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 참여를 하자고 클라이언트한테 제안하면 “뭐 그렇게까지”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말이다. 그들이 달가워하지 않은 이유를 질문 형식으로 거칠게 정리하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 텐데 써 먹을 게 나올까요?” “애들이 뭘 알까요?”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린이 참여를 놀이터 디자인의 핵심이라고 보는 이들이 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 일이 종종 있다. “어린이들의 의견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건 무엇인가요?” “어린이들이 디자인뿐만 아니라 공사 감리까지 해야 하지 않나요?” 어린이 참여 써 먹을 게 나올까요? 회의적인 입장과 어린이 참여를 만능으로 보는 입장, 이러한 극과 극의 입장 사이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초기 어린이들과 했던 워크숍이나 여러 활동은 즐거웠으나 반복될수록 ‘어린이 참여라는 게 필요한가?’, ‘형식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의심이 생겼다. 원하는 놀이터를 그려달라는 요구에 어린이들은 매번 놀이동산에서나 봄직한 놀이터를 그렸고, 설문조사 결과는 진부했다. 또한 설계안을 보여주었을 때 어린이들은 신기해했지만 피드백은 그리 신선하지 않았다. 나의 의심이 정당한가를 확인하고 싶어서 2017년 6월 22일 ‘오픈 자문’이라는 형태로 어린이 참여에 관심과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정우 EUS+건축 대표, 정수진 서울시정연구원 박사, 주신하 서울여자대학교 교수가 함께 했었다. 그 때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어린이 참여에 대해 스스로 가졌던 질문, 타인들이 내게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해보았다. 어른이라고 다른가! 자문회의에서 지정우 대표는 이 멋진 말로 ‘어린이들은 미숙하다’는 편견에 뿌리를 두는 나의 의심을 간단히 해결해주었다. Driskell(2001)은 어린이들의 참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어린이들은 지식적 및 기술적 배경이 없다. 실수를 한다.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장기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자주 마음을 바꾸고 판단력이 부족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로 정리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조목조목 반박하는데 핵심은 “어른이라고 다른가”이다. 많은 워크숍에서 만난 어른들도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고 미래를 전망하며 결정하는 걸 어려워했다. 그런데 나는 이를 잊고 있었다. 창의적 아이디어, 창의적 질문 영국의 놀이터 컨설팅 조직인 ‘PLAYLINK’의 사이트에서는 “어린이들한테 원하는 놀이터를 그리라고 하면 알고 있는 것을 그린다. 어른들이 좋아할 것을 그린다”는 어린이 참여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언급하면서 어린이 참여의 필요성을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어린이들의 한계를 탓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나의 한계였다. 질문이 뻔했기 때문에 대답도 뻔했던 것이다. 지정우 대표와 정수진 박사는 이를 피하기 위해 추상화와 한계를 두기, 스토리텔링 등 자신들만의 독특한 방식을 개발하고 있었다. 받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그리는 것 어린이들과 함께 디자인을 했다고 하면, 누군가는 결과물에서 어린이들의 아이디어를 구분해 내기를 원하고 디자이너가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진정한 어린이 참여라고 주장한다. 정수진 박사는 “어린이들의 아이디어를 구분해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디자이너의 개입이 무슨 문제냐”고 반문했다. 소통의 과정 속에서 디자이너도 어린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겠냐는 것이다. 주신하 교수는 그러므로 참여하는 디자이너와 퍼실리테이터의 역할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주었다. 참여디자인은 단순히 디자이너가 참여자인 어린이의 의견을 들어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협업이기 때문이다. 과정을 잘 디자인해야 한다.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어린이들과 한두번 정도만 만나며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 ‘우리’로 칭하게 되는 관계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디자이너와 어린이들은 서로의 언어와 사고 체계에 친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서로 탐색하기’, ‘주어진 이슈의 가장자리를 돌기’, ‘아이디어를 교환하기’,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과정을 평가하기’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가 되어 앞에서 말한 ‘함께 그리기’가 가능해진다. 결국은 정당성의 문제 어린이들과의 소통 과정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고, 디자이너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짚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린이 참여의 의의는 결과물보다는 정당성에 있다. 내가 어린이 참여 디자인을 의심했던 건 결국은 ‘결과물’에 대한 집착이었다. 어린이들의 아이디어가 그리 대단하지 않더라도 그 공간의 주인인 그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차근차근 그들의 바람과 욕구를 끌어내는 것은 어른의 책임인데 말이다. 더불어 참여디자인은 그 자체로 어린이들에게 세상에 대한 새로운 탐색의 문을 열어주는 일이기도 한데 말이다. 어린이들과의 워크숍이 반복될수록 ‘어린이 참여라는 게 필요한가?’라는 의심이 생겼다.어린이들은 매번 놀이동산에서나 봄직한 놀이터를 그렸고, 설문조사 결과는 진부했다.그런데 한 자문회의에서 지정우 대표는 어린이 참여를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핵심은 “어른이라고 다른가”이다,많은 워크숍에서 만난 어른들도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고 미래를 전망하며 결정하는 걸 어려워했다. 나는 이를 잊고 있었다. 김연금 / 조경작업소 울 소장
- 김연금 조경작업소 울 소장[email protected]
- 2019-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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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것들이 있다. 눈에 띄는 것이 있고 배경이 되는 것이 있다. 어느 것도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대상에 대한 관찰과 솎아내는 작업은 새로운 도전이다. 마치 어지럽혀진 방을 치우는 기분이랄까. 대지 위에 깔리고 솟아있는 대상을 찍는 작업은 보이는 것에서 숨어있는 것까지 긁어내야 한다. 때로는 관찰자가 되고 때로는 경험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 비평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소박한 소비자가 되기도 한다. 다만 한가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날씨가 그렇다. 하늘을 움직일 수 없는 노릇이니 요즘 같은 흐림의 연속에는 무심하게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사계절 뚜렷한 한국에서 사진가를 택한 나의 숙명이라 하면 거창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장마를 보내는 사진가는 이렇게 만감이 교차한다. 하늘만 볼 수는 없다. 여전히 대상을 관찰하고 인입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의 작업, 하지만 결국 손가락 하나에 종결되는 작업은 일어날 일이다. 조경 사진은 결국 ‘누군가’의 작품을 재정의하는 과정이 된다. 대상의 크기나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 그들이 그것을 만들게 했는가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바람이 되는 ’이쁘게 찍기'를 늘 한 켠에 담아둔다. 사진은 선택의 작업이다. 대상을, 일정을, 장비를, 날씨를, 대상지를, 클라이언트의 욕구를, 나의 욕구를, 프레임을, 데이터를, 결과물을 미리 선택한다. 그리고는 결과물 중에서 골라 디지털 현상을 한다. 마음대로 되는 것은 오로지 한순간, 현장에서 꿈틀거리는 하나의 손가락만이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다. 그것이 다른 선택으로 선순환하니 타노스의 핑거 스냅과 맞먹는 것일지도. 장마가 끝나간다. 긴 더위가 시작하면 잎들을 위해 한낮은 비워두어야 한다. 배롱을 위해 이른 아침은 담아두어야 한다. 이슬을 위해 새벽을 남겨두어야 한다. 쉬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일몰 시간은 서성일 것이다. 늦은 일몰에 날벌레가 렌즈에 등장하는지 노심초사할 것이다. 장마가 끝나면 또 다른 선택을 위해 바닥을 끌고 다닐 것이다. 유청오 조경사진가
- 유청오 조경사진가[email protected]
-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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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 연재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근대건축의 거장 프랭크로이드 라이트를 모델로 했다는 소설 마천루에는 주인공이 대략 다음과 같은 대사를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철근콘크리트란 공법이 나왔습니다. 새롭고 혁신적인 '유리'라는 소재가 나왔습니다. 이제 이것들을 사용하면, 대규모의 건물을, 빠른 시간 내에, 그것도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아직도 기둥과 기둥사이가 폭이 좁아야만 하는, 석조건물의 모델을, 다시 말해, 파르테논신전의 모사품을 만들고 있어야 합니까?”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주인공은 신식의 문물(?)을 주장하는 열정 가득한 야심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주인공과 늘 다투는 상대편 진영의 고고한 어떤 인물께서 등장하셔서 ‘전통이란 말일세... 진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하나의 중요 양식이며, 우리가 지켜야만 할 것이며...’라는 투의 입장일 때 그러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이 근대건축운동(movement)의 거대한 광풍조차도 시간이 흘러 이제는 하나의 양식(orders)이나 스타일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 근대 '양식'을 옹호하는 건축가는 노출콘크리트의 재료적인 미학을 이야기하며 시간과 철학을 읇조린다. 여기에 변혁은 없다. 오히려 변혁을 외치는 쪽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근대 '양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시 '진정성'을 이야기 한다. 100년 전의 그들에게 사용한 단어들이 그렇게 서로 뒤바뀌어 있다. 아방가르드가 아리에가르드가 된 상황이다. 문제는 우리가 시대라는 맥락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는가이다. 시대는 변한다. 진정성이란 단어 조차도 이제 그것이 처한 위치나 발화자의 입장에 따라서도 말의 뜻과 범위가 이렇게 달라지고 있다. ‘조경을 넘어’라는 전혀 앞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은 오래된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라는 맥락을 읽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외국의 저명한 어느 조경가의 새로운 디자인이론, 신문물, 신사조만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 것이 변화의 동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변화라기보단 수동적 답습에 가까울 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알아야 하고, 그것은 현재 우리가 처한 시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트렌드따위에 영합한..."이란 말을 하는 그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대가 그토록 이 용어를 거북스러워 한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서로 대립하는 생각을 동시에 아우르며 목표에 이르는 길을 찾는 능력을 사전에서는 '지능'이라 한다. 여기에 '시대'라는 단어를 조합한다. '시대지능', 다시 말해 우리가 유의미한 변화를 이루어나가기 위해서는 현시점의 시대를 보고 거기에 반응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젠트리피케이션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하자. 그것을 이야기하고, 그것의 문제점에 대해 논하면서 오직 ‘진정성’ 있는 개발만을 이야기 한다면, 소위 말해 다시 그 모든 사회현상의 대항점을 '진정성'에만 두고 만다면, 시대의 오독이며 자가당착이며 학습하지 않는 자의 게으름에 불과하다. 당장 스스로 답을 만들기 어렵다면 그것에 반응하는 타분야의 공간개발사업에서는 과연 이런 문제가 어떤 양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가, 사회문제가 어떤 해법으로 다시 사회에 투사 적용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유학파들의 어학연수 비자 시절의 그럴싸한 향수만을 골라 젊은 부자동네에 기획한 공간 '슈퍼막셰' ▲오랫동안 수집한 기품있는 사물들로 뮤지엄과 점포사이의 중간영역 소비자들을 정확히 타겟팅한 성수동 '오르에르'나 잠원동 '파운드로컬' ▲자연을 벗삼으려면 자연이 주최가 아니라 자연이 제공하지 못하는 따스한 환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남양주의 '비루개' 등 요즘의 공간추세는 '덜하고', '엣지있게', '디자인이 아닌 간지'라는 추세를 만들어 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심은 주인이 나가라고 할 때 금방 핵심집기만을 들고 나갈 수 있도록 가능하게 공간을 기획하는 바에 있다. 비단 젠트리피케이션을 주제로 놓고 보아도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학습할 재료들은 동시대의 세상에 넘쳐나고 이런 학습이 쌓여서 세상을 이겨내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앞으로 중요한 것은 디자인이 아니다. 비용이 발생하는 디자인보다는 가치를 재편하는 디자인 이전 단계 기획의 영역이 훨씬 중요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조경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서비스디자인, 경험디자인이라는, '디자인' 앞에 붙는 새로운 신조어의 조합 영역들이 출현하는 이유 역시도 이제는 더 이상 공간디자인 만으로는 그 어떠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음에 기인한다. 변화를 원하는가 세상을 보라. 알렉산드로 미켈레, 수년 전 구찌(Gucci)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취임하면서 그가 주장한 것은 '맥시멀리즘'이다. 미니멀리즘, 예를 들어 흰색과 검은색, 톤앤매너의 일치를 꾀하는 생각은 이미 안드로메다 저편으로 보내버린다. 그가 디렉팅한 화보와 스테이지 공간들에서는 동물원과 우주인이 나오고 털복숭이 낙타같은 기괴한 생명체가 등장한다. 우리는 주변의 크리에이터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반응하는가, 나에게 스스로 늘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미니·맥시멀리즘의 사례에서도 그러하듯 늘 같은 습관적 사고 안에, 혹은 '조경은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다'라는 식의 허울 좋은 인문학적인 명제 속에 스스로에 매몰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는 변한다. 끊임없는 진행형이다. 나 역시 그러해야 한다. 페이팔의 창립자 피터틸이 설립한 '틸장학금'이란 것이 있다. 미국의 우수한 IT전공의 학부·대학원 인재에게 매년 수여되는 장학금이다. 단일 장학금으로 무시 못 할 액수를 자랑하는 이 장학금은 수여자의 선정도 까다롭지만, 정작 수여를 하기위해 내세우는 조건이 파격적이다. 장학금으로 학업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학업을 중단하고 창업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 같은 인재는 학교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으니 이 자금으로 창업을 하라'는 이야기이다. 전통적 교육 방법으로는 혁신과 변화를 따라가기가 어려움을 모두들 알기 때문에 이런 조건이 환영받고 있는 시대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유승종 / 라이브스케이프 대표
- 유승종 라이브스케이프 대표
- 2019-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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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통합놀이터의 가치를 추구하는 놀이터를 조성했다. 조성 과정에서 진행했던 워크숍에서 아이들에게 원하는 놀이터를 그려달라고 주문하자, 한 아이가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까지 오를 수 있는 사다리의 모습을 그렸다. 그 아이의 소망을 조금이나마 담아내고 싶어서 높이 오를 수 있는 시설물을 구상했다. 그런데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휠체어 이용자가 휠체어를 탄 채 시설물의 어디까지 오를 수 있게 할지를 정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쳤다. 결국 시설물 주변의 지형을 올려 시설물 앞까지는 접근할 수 있도록 했지만, 시설물의 바닥 면적이나 땅으로부터 시설물까지의 높이 등을 고려하다보니 시설물 자체에 오르게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이전 글에도 언급했던 옮겨타기 시스템을 설치해 휠체어에서 내려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휠체어에서 내려 놀이시설물 끝까지 놀이터가 조성된 후, 이 사업의 실행 주체였던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이하 무장애연대)는 아이들의 평가도 듣고 통합놀이터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놀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한계도 발견했지만, 긍정적인 피드백도 받았다. 가장 기뻤던 것은 설계 의도대로 휠체어 이용 아이가 휠체어에서 내려 손으로 짚어서 시설물 끝까지 올라갔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친구들의 도움도 있었다. 친구들은 “여기를 짚어라, 다음에는 저쪽을 짚어라”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휠체어 이용 아이의 역량에 결합해 팁을 주었다. 통합놀이터가 고려되지 않는 안전기준 통합놀이터만들기네트워크에서는 내부적으로 휠체어 이용자의 시설 이용 범위를 논해왔다. 아래 사진처럼,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휠체어 이용자가 휠체어에서 내려 놀이시설물을 오를 수 있을까? 오르려 할까? 부모나 보호자는 오르도록 할까? 이것은 신체적으로 가능한지 안한지의 문제가 아닌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단순히 ‘yes’ 혹은 ‘no’로 답하기 쉽지 않은 충실한 고민이 필요한 질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충실한 답을 만드는 데 단초가 될 수 있는 장면을 마주했다. “그 아이는 오를 수 있었고, 오르려 했다.” 통합놀이터를 공부하고 만들수록, 그리고 사람들과 이에 대해 말을 할수록, 통합놀이터는 단순히 시설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설계자의 한계를 실감하게 된다. 장애인의 인권,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사회적 철학적 태도를 드러내는 리트머스지이다. 현장에서 만나는 여러 장면은 우리의 사회적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특히 놀이터 안전기준이 그러하다. 조수미 씨가 서울시와 세종시 등에 장애아와 비장애가 함께 탈 수 있는 휠체어 그네를 기증했지만 놀이터에는 설치되지 못했다. 어린이제품 안전특별법에 장애 아동용 놀이기구 시설에 대한 안전인증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아, 기존 어린이 놀이시설 안전 기준을 장애인용 놀이기구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한 놀이시설물 제작 업체에서는 휠체어를 탄 채로 탈 수 있는 시소를 개발하면서 국민신문고에 통합놀이시설물에 적용되는 기준과 관련 기준 제정의 가능성에 대해 문의했다. 휠체어 그네와 같은 문제를 겪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행정안전부에서는 현행법에는 장애아동을 위한 놀이시설에 적용되는 별도의 기준은 없으며, 해외사례, 관계부처, 이해당사자 등 여러 의견을 고려해 장기적으로 추진돼야 할 사항으로 판단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변화를 위한 노력이 감지되지 않고 있다. 통합 팝업 놀이터, 다름을 보다 이에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무장애연대 등 어린이나 장애와 관련된 9개 단체는 어린이날이 있는 5월 30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팝업 통합놀이터를 운영했다. 당일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는 “그동안 나는 창 안에서 창밖을 구경하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그네라는 것을 타보게 됐다. 앞뒤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네를 타면서 나무 위를 올려다보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 중에는 나처럼 어른이 돼서야 처음 그네를 타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팝업 통합놀이터의 디자인은 조경작업소 울에서 진행했다. 비록 잠깐 열렸다 닫히는 놀이터였지만, 여러 전문가의 자문을 받고 함께 하는 단체들과도 많은 논의를 했다. 이를 통해 신체적 움직임뿐만 아니라 감각을 자극하는 놀이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과자 따먹기를 할 때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이들은 자신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지 않도록 빨리 먹을 수 있는 과자를 선택했다. 더불어 종이상자 쌓기에서는 참여자의 다양한 신장을 고려해 종이상자의 크기를 결정했다. 조경작업소 울의 구성원들은 이번 팝업 통합놀이터를 디자인하며 지식적인 것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휠체어를 탄 채 탈 수 있는 그네나 시소를 도입한다고 해서 휠체어 이용 아이들의 이용이 많아질 것이라고, 혹은 발달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 감각놀이시설물을 설치한다고 그들의 이용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항상 무장애연대의 김남진 국장이 말하는 것처럼, 선택의 결과로 이용하지 않는 것과 선택의 여지도 없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또한 그것을 만드는 과정과 존재 자체가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하는 사회에 대한 학습이기도 하다. 한 아이가 설계 의도대로 휠체어에서 내려 손을 짚어가며 시설물의 끝을 올랐다.“그들은 오르려 할까?” “그 아이는 오를 수 있었고 오르려 했다” 휠체어채로 탈 수 있는 놀이시설을 도입한다고 그들의 이용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하지만 ‘이용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는 것과 ‘선택의 여지도 없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통합놀이터 디자인 가이드라인 Ver 1.0’이 필요하신 분은 조경작업소 울([email protected])로 문의하면 된다. 김연금 / 조경작업소 울 소장
- 김연금 조경작업소 울 소장[email protected]
- 201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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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미쳐있던 것은 아니었다. 차츰 친해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어느 날 다가왔고 매력을 느꼈으며 내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좋았다. 한 걸음 다가가면 알쏭달쏭한 질문을 다시 던져주고 그것을 풀기 위해 온 신경을 써서 해결하다 보니 정이 들었다. 때론 깊게 빠져들었다. 집에 가는 길에 가로등에도 생각나 집에 들었다 다시 나와 한참을 만났다. 빛이라는 것이 그렇게 신비하고 재밌을 수가 없다. 결국 남은 것은 알 수 없는 결과였지만 그것도 매력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그때는 아날로그라 바로 답해주지 않았다- 답해주는 것이 좋았다. 정이 들듯 논리정연한 것이 아닌 무엇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왔다. 지금도 잘 알지 못하는 우리 사이, 하지만 정으로만 만나지는 않는다. 디지털시대, 답을 바로바로 해준다는 점이 변했다. 내가 질문하는 속도가 못 따라갈 정도로 말이다. 시간 속에 사진은 오랜 연인이 되었다. 가끔 어떻게 해야 좋은 사진을 찍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연애 상담처럼 느껴진다. 길고 길게 답을 늘어놓든지 짤막한 해결책이든지 듣고 싶은 대로 말해 주는 것이 상책이다. 몇 가지 생각 나는 나만의 방식을 늘어놓아 본다. ‘돈을 많이 쓰면 됩디다’ 물량 공세만큼 쉬운 것은 없다. 상대방을 현혹하는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원하는 사진이 생기면 원하는 장비를 사면 된다. 그래도 안 되면 시중에 수많은 액세서리가 준비되어 있다. 그래도 안되면 명품 카메라나 렌즈로 스스로 미혹되는 것이 상책. 장비는 남는다. 떠나간 것들이 있을지언정 물건은 남지 않는가. 먼지가 쌓이는 것만 주의하시라. 약간의(?) 헛헛함은 덤. ‘많이 찍어보세요’ 수없이 대화한다. 될때까지 들이대는 것이다. 그래도 안된다면 -열번 찍어도 안될 수 있으니- 남는 시련은 감수해야 한다. 떠나가도 사진은 남는다. 애정 공세 끝에 몇장의 사진도 남는다. 자기만족의 가장 쉬운 방식. 짝사랑은 그렇게 시작하고 끝나기 마련. 물론 성공하면 좋다.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쉽지 않아 문제라면 문제이지만. 한 가지 주제가 어렵다. ‘책을 찾아봅시다’ 이론에 빠삭한 분석가가 되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부작용이 있는데 아는 만큼 결과도 미리 짐작하여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이럴 때는 아는 것이 병이다. 이성으로만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다. ‘내’게 맞는 감성은 책에 쓰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이러저러해서 안돼’라며 염세주의자로만 변하지 말자. ‘소개라도 받아보세요’ 정확한 목표설정은 방법을 강구하게 한다. 공모전이 대표적인 방법. 상대방을 아는 방법을 배우기 좋다. 역시 단점이 있는데 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주변에서 찾아보세요’ 익숙한 것을 담아내는 것은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다. 하나씩 일기처럼 기록하고 비틀어 주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다만 익숙하니 쉽게 질릴 수 있으니 이것도 주의. 이렇게 늘어놓으니 사진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닮아있다. 쉽게 만들어지고 상실감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진득하게 오래갈 때도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본다. 첫 카메라를 손에 쥐고 기뻤던 순간. 그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잠들었던 풋풋한 기억들이 살아난다. 어설펐던 그시절, 대상에게 내 생각만 강요하던 시기는 어느덧 지나고 대상이 들려주는 것에도 집중하려 한다. 오랜 연인과 이야기 하듯 말이다. 아 그리고, 연재에 실리는 인물 사진을 찍어준 이계후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유청오 조경사진가
- 유청오
- 201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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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 연재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나는 결코 컴퓨터에 친숙하거나 프로그램에 능숙한 기술적인 사람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흔한 컴퓨터 게임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늦은 출산과 육아로 잠시 쉬는 시간을 갖고서 다시 학교에 돌아와 보니, 갓난아기가 아장아장 걷게 된 짧은 기간에 세상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이전의 수업에서 다뤘던 설계기법이나 접근방식이 구닥다리로 느껴졌다. 현재의 복잡하고 다양한 설계이슈들을 풀어내고 조경의 미래를 이끌어갈 수 있는 학생들의 역량을 키워줘야 하는 의무와 함께, 새로운 설계방법의 도입이 절실했다. 현재 커리큘럼을 새로 만들고 평소 교류하던 재야의 고수들을 총동원하여 직접 배워가면서 모든 수업을 전면 개편하는 중이다. 21세기 조경분야의 계획가와 설계가가 풀어야하는 기후변화, 도시재생, 스마트시티, 미세먼지 등 긴급하고 도전적인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접근방법을 넘어서는 용감한 시도가 필요하다. 특히 설계기법에 대한 수업은 실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만큼 최근의 설계방식이나 기술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학계는 미래를 위한 인재양성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는 만큼, 업계에서 새로운 업역을 구축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설계 이슈는 더욱 복잡해졌는데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설계 교육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디자인이란 주어진 제한적 조건 안에서 디자이너(설계가)가 우선적으로 고려할 규칙들을 정하고, 좌뇌와 우뇌의 반복적인 사고와 드로잉이나 모델에 의한 구체화를 통해 형태와 시스템이 걸러지고 결정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가장 처음 그린 디자인이 최종안인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안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대략 3~4번째 쯤에 시도했던 디자인이 최종안으로 발전됐던 것 같다. 그렇다고 마지막 디자인이 가장 완벽한 디자인인가? 최종안은 단지 주어진 마감시간에 내에 완료된(완성이 아닌) 디자인일 뿐이다. 나는 어떤 디자인이라도 충분한 분석을 근거로 현실화에 시간을 들인다면 최종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산적 설계(Computational Design)는 디자인을 구체화하여 표현하는 방법을 기하학에서 논리로 전환하는 설계과정으로, 고도의 복잡성을 알고리즘을 통해 제어한다는 면에서 ‘설계의 자동화’라고도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연산적 설계는 컴퓨터가 대신 설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설계가가 특정 데이터에 어떠한 규칙을 적용하는가에 따라 설계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빠른 시간에 확인하는 과정이다. 연산적 설계의 전제는, 설계자가 과학적이고 정량적인 분석을 통해 무엇이 중요한 규칙인지를 결정하고 이를 어떻게 적용하는지에 따라 설계안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계방식은 디자인이 공간의 시각화와 소통의 기능을 넘어서 기능성(performance)과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최근 해외동향을 파악해보면 연산적 설계(Computational Design)는 다양한 분야를 중심으로 실무에 활용되고 있다. 건축 분야에서는 이미 10여년전부터 연산적 설계의 한 축인 파라메트릭 디자인(Parametric Design) 수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으며 이를 실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예술과 디자인 분야에서도 다양한 변수를 추출하여 파라메트릭 모델을 구축하고 3D 프린터로 제작하는 방식의 수업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건축설계와 시공업계를 중심으로 점차적으로 의무화되고 있는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ling)의 도입도 설계와 시공 프로세스의 획기적인 변화이다. 게임제작도구인 언리얼 엔진(Unreal Engine)으로 구축한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설계안의 시뮬레이션을 넘어 블루프린트라는 코딩 작업을 통해 공간에서의 상호작용을 재현하는 도구로 활용가치가 높다. 건축이나 예술 분야에 비해 조경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매우 느리게, 때로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협업의 일원으로서 조경분야도 이제는 BIM을 CAD와 같은 기본적인 프로그램으로 여기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외부 공간의 특성상 환경적 요소의 지대한 영향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감성적이거나 단편적 분석에 의존하여 어떤 환경적 변수를 어떤 가중치로 설계에 적용해야 하는지를 검증할 기회도 없이 설계안이 그려지고, 공사가 시작된다. 우리는 이제 조경분야에서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이 연필, 지우개, 가위와 풀을 대신하여 전산화된 작도와 표현의 도구로만 사용되었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설계와 시공 과정에서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와 프로그래밍 소프트웨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설계가가 코드나 스크립트를 만들어서 소프트웨어를 사용자화하고 설계 도구를 직접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 주위에는 무료로 제공되는 오픈소스가 넘쳐나고 융합적인 설계방식과 아이디어들을 교환하고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도 만들어지고 있다. 이를 활용하여 학생들과 신진 세대가 새롭고 혁신적인 도구를 익히고 실무에 적용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어야 한다. 기존 세대가 첨단의 기술과 프로그램을 익혀서 실무와 교육에 활용하는 일은 쉽지 않으나, 최소한의 시도는 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 또한 잠깐이라도 쉼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 다람쥐 쳇바퀴에서 내리는 용기를 갖지 못했을 것 같다. 일단 맨땅에 던져지고 나니 그제야 지금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탐구가 시작되었기에. 이유미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
- 이유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 2019-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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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길들이 춤추는 서울숲 하릴 없이 걸으며 사색과 풍경을 즐기는 도시민은 얼마나 될까? 우리 도시가 그런 도시인지는 차치하고, 숨쉬기 바쁘게 걸어야 하는 출근길도 제외하고 부족한 운동을 만회하기 위해 식사 후 하는 잠깐의 걷기 정도가 우리시대 산책의 대부분이 아닐까 싶다. 특별히 시간 내고 돈 들여야 하는 걷기 말고, 우리시대 일상적 산책은 어떤 의미일까? 산책이라고 함은? 먼저 노래를 들어 보자. “산책이라고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얽매인 데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갈 것. 누굴 만난다든지 어딜 들른다든지 별렀던 일 없이 줄을 끌러 놓고 가야만 하는 것. …(중략)… 인생에 속은 채 인생을 속인 채 계절의 힘에 놀란 채 밤낮도 잊은 채 지갑도 잊은 채 짝 안 맞는 양말로 산책길을 떠남에 으뜸가는 순간은 멋진 책을 읽다 맨 끝장을 덮는 그때. 이를테면 “봉별기”의 마지막 장처럼.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心情)에 불 질러 버려라.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_ ‘속아도 꿈결’, 계피 노래, 정바비 작사/작곡, 「가을방학 1집」(2010년) 중 “속아도 산책~ 속여도 산책~”이라 해볼까, “그늘진 심정”을 ‘그늘진 심장’이라 들어도 좋을 설명이다. 노래처럼 ‘산책’은 집중하던 일상의 마침점이자 시작점이고 누구나 아무에게나 저마다의 의미를 주는 다양성과 변화의 가치도 있다. 그러니 산책은 다단한 일상 언제든, 어디에서든 가능해야 하지만 그런 여건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그럴 공간이 여기저기 많지 않기 때문이다. 선언하듯 말하자면, 삶에서 “산책을 빼버린 도시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건강하지 못한 도시는 산책이 없는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산책이 없는 도시는 불행하다, 산책할 수 없는 도시는 나쁘다. 너무 직설적인지 모르겠으나, 산책을 대표하는 도시 공간은 공원이다. 사회문화적 변화가 대형 몰과 마트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었다고는 하여도 나이를 막론하고 산책은 이왕이면 좋은 풍경과 느낌 있는 발걸음을 부르는 곳이어야 가능하다. 공원은 그럴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다. 기능적으로 보자면 산책은 기분 전환에 업무 효율 상승에 휴식과 치유에 모두 좋다. 도시에서 그것은 공장과 마트에 모아두고 매일 아침 전달되는 녹즙처럼 배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품질(실효성)을 생각하는 산책이라면 인위적으로 통제된 그것은 의미 없기까지 하다. 아무리 실외 공기 오염이 심해도 실내 환기가 필수인 것처럼 산책은 뭔가 다른 차별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보자면 이렇다. 산책은 먼저 땅과 함께 걷는 길을 말한다. 흙길과 풀길 없는 산책은 그대로 ‘앙꼬 없는 찐빵’이다. 굳건한 포장로를 무릎 아프게 오래 걷는 일은 산책길이 아니다. 운동이거나 작업이거나 어쨌든 하기 싫은 무리한 행위인 것이다. 땅을 즐기며 걷는 것은 자연과 이 지구와 내가 하나임을 실감하는 일이며 산책은 그것 자체이기도 하다. 요즈음 많은 푹신한 우레탄 포장길은 그런 점에서 적당한 산책길이 아니다. 그저 차선이자 대안일 뿐. 산책은 또 계절을 느끼며 걷는 길이다. 인위적 환경에서 통제된 생활을 이어가는 우리들 대부분이지만, 어쩌면 일기예보조차 시답잖게 여기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날들이지만, 잠깐의 산책은 해와 달이 바뀌고 습기와 햇볕이 바뀌는 지구의 시간을 직접 체감하는 길이다. 세월의 변화를 직접 직면하는 강제적인 감상의 기회이기도 하다. 작게는 적당한 복장이나 우산 챙기기 등 실용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크게는 미세먼지나 지구환경 변화를 생각하며 분리수거를 추동하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공기의 맛만으로 날씨를 점치던 우리의 본성을 되찾는 걸음이기도 하다. 최근의 산책은 이웃과 공동체를 즐기며 걷는 길이 되기도 한다. 혼자 사는 도시가 아니라 함께 살며 어울리는 도시로 변모하며 확대되는 우리 일상을 만나볼 수 있는 길이다. 여기에는 정원문화가 널리 공유되면서 확산되고 있는 이웃과 즐기는 도시, 함께 가꾸고 나누는 도시라는 새로운 공동체성이 깔려 있다. 이쯤 되면 개인적인 산책을 사회적인 산책으로 진화시켜 준다. 다시 말해 어울려 사는 나와 우리를 드러내주는 발걸음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산책은 나를 돌보며 몸을 느끼는 길이다, 감각의 행위이다. 자연에 반응하는 나를, 내 몸을 우리는 쉽게 접하지 못한다. 몸은 이미 인공물로 둘러싸여 알레르기처럼 이상 반응이 나타나기 전에는 매일 샤워하며 보는 내 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 몸은 의사 선생님들이 훨씬 더 잘 알고 분석해준다. 산책은 그런 내 몸이 내 것이자 나임을 알게 해준다. 꽃향기, 강한 햇볕, 소음과 냄새 등 나만의 감각을 시험하게 한다. 때로는 이런 느낌이 있었나? 몰랐던 감각을 일깨워주는 놀라운 체현의 길이기도 하다. 병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나를 생각이 아니라 몸(육체)으로 먼저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글자로 치환되지 않는 나의 구석구석을 일깨우는 길이 된다. 우리시대의 이런 산책 경험은 다시 말하지만 공원에서 대표적이다. 그 중 서울숲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잘 만들어진 공원이다. 현대 공원은 산책을 기본 유전자로 삼는다. 버큰헤드파크가 센트럴파크가 그랬던 이유 때문이다. 산책 때문에 공원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숲은 그런데 더욱 특화된 공원이다. 공원의 원래 터는 논란과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런 대규모의 터는 여러 갈래와 여러 연결이 가능한 터의 본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공원의 유전자는 도시 건물숲의 정돈된 걷기에서 발걸음을 해방해주는 알고리즘을 가진다. 조경가는 그것을 잘 해석할 의무가 있다. 서울숲은 그런 땅과 공원의 유전자 번역을 거친 장소인 것이다. 길이 많은 공원은 최근 한국의 정원문화, 공원문화의 선두 주자들과 이들을 지원하고 이들과 함께하는 봉사자들의 전당처럼 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언제나 다채롭고 활기 있으며 변화가 잉태되고 있는 공원으로서도 중요하다. 물론 한계는 있다. 개발 여건 변화에 따라 공원의 특성이 주변으로 확장되지 못한 것은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한다. 공원이 욕심의 공간이 되어버린 듯 한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한 번은 겪어야 할 몸살인지도 모르겠다. 좀 길게 가는 몸살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서울숲이 여전히 여러 산책의 모습들을 너무도 쉽게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집안에만 있지 말고 어서 한 번 산책해볼 일이라는 듯 길과 걸음이 공원에 가득하다, 발밑이 무엇이었을지 상상을 접어둔 채로. 꼭 공원에서만 산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원이 어디에든 주변에 많거나 배달이 되는 것도 아니므로 서울숲 마냥 쾌적한 산책길은 사실 많지 않다. 최상은 아니더라도 안전에 유념치 않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산책길이 많은 것은 우리 도시만의 자랑이라고 할 만하다. 더욱 다행인 것은 우리 도시는 대부분 차량이나 장애물 정도에 유념하는 정도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그런 도시라는 점이다. 필요한 것은 산책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뿐이다. “걷기는 ‘나’라는 존재의 시간과 공간에 차분하게 다시 매력을 불어넣는 방법으로 일단 집에서 나와 삶에 대한 의욕을 흐리는 구태의연한 습관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_ 다비드 르 브르통 저, 문신원 역, 『느리게 걷는 즐거움』, 북라이프, 2014, p.9.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처럼 강제로 사색에 잠기게 되는 길은 사실 산책에 적합하지 않다. 뭉크가 보여준 오슬로의 에케베르크 언덕(Ekeberg Park)처럼 강렬하게 나를 공포에 떨게 하는 길도 좋지 않다. 산책을 마치 중노동인 양 의무처럼 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주변 풍광이 아무리 자연스러운 사색과 감성을 부른다하더라도 그것은 잠깐의 관광에 지나지 않는다. 풍경으로부터 나를 떼어놓기 때문이다. 일상의 산책이 그런 모습이라면 곤란하다. 우리의 뇌는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구분하지 않는 정보처리 기능을 기본으로 한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가 상시적 주의력 결핍에 시달리며 하이퍼텍스트를 뛰어 다니는 것도 그런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산책은 직접 경험에 더 초점을 두며 산만해진 머리를 보완해 준다. 도시에서 공원이 필수적인 이유 한 가지는 거기에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사색 없는 시대가 산책 없는 일상”과 연관되고 “산책 없는 도시가 사색 없는 시대를 낳는다.”고까지 말할 수 있게 된다. 서울숲은 그런 풍경을 체험하게 한다. 공원이 아름다운 이유는 길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공원 안에만 있지 않다. 안팎이 경계를 드나드는 녹색의 풍경과 그 사잇길로 연결된다. 동적 경관(Landscape Sequence), 연속 경관(Sequencial Landscape)은 생각과 행동을 풍부하게 한다. 공원에 펼쳐진 물리적인 길은 결국 마음과 진로로 확장되는 것이다. 서울숲은 그런 새로운 마음의 길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다른 어떤 공원보다도 다양하다. 각자의 새로운 길이 그렇게 생성되는 공원인 것! Park 03. 길들이 춤추는 공원들, “도시의 공공공간과 공유 가치” 나무 심는 일만이 조경의 업(業)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의아해 할 사람이 많이 줄어든 시대를 지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조경에 대한 편견을 많이 가지고 있는 21세기를 지나고 있다. 역사적 전통까지 생각한 조경의 의미와 역할을 의문 없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시대를 바라는 것이 무리는 아닐 터, 작은 노력이지만 조경의 본래적 의미를 한 번 쯤 되돌아보고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싶다. 이것이 쌓여 편견이 걷히고 모두가 도시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소통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조경(造景, landscape architecture)은 전문분야(profession)이자 학문(scholarship)으로서 성장한 엄연한 도시 관련 대표 분야이다. 지난 시대 개발의 필요는 조경을 산림사업의 하나쯤으로 여기게 만들었다지만 이제부터라도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것이 지향하는 본래 역할을 공유하는 것이 오해를 줄이는데 중요하다. 따라서 다음의 긴 이야기는 비록 금방 잊어버릴지라도 일독을 권장한다. 조경은 기본적으로 삶의 터를 다룬다. 터를 닦고 길을 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자연과 환경을 보전하고 인간과 생태를 보호하는 넓은 의미의 직업적 소명도 가진다. 생명과 지구를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한 직업윤리가 필요한 분야이고 그저 나무 심고 녹색 공간을 풍부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최적의 기술과 최선의 철학이 기본인 분야이기도 하다. 이 점까지 여기서 다룰 수는 없고 우선 우리는 도시의 공원으로 맛볼 수 있는 조경의 역할을 기본적인 것 몇 가지로 되짚어보도록 하자. 1.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에 대한 올바른 이해 도시에서 조경의 역할은 전방위적이다. 그러나 아직도 조경은 오해가 많은 분야다. 몇 가지 오해를 이해로 바꾸어야 정원일(gardening)을 실천하는 우리의 시선도 풍경을 바라보는 그것처럼 여유로워질 수 있다. 우선 먼저 우리는 경관과 조경의 관계를 아래 그림과 같이 체계적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관을 어떤 측면에서 접근하여 다루느냐가 조경인 것이다. 바로 보는 ‘조경’ 일반적으로 조경(造景, Landscape Architecture)은 나무만을 다루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조경은 전문적으로 구조물을 제외한 모든 경관을 다룬다. 즉 조경은 ‘경관(景)을 만드는/다루는 행위(造)’인 것이다. 조경이 경관을 다루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고 건물 주변에 나무심어 환경을 치장하는 것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에 조경하면 다음과 같은 오해를 만나는 경우가 많다. ① 돈이 많이 있어야 한다? 아니다! 비용을 적게 들이고도 누구나 할 수 있다. 화초 하나만으로도 경관이 살아나곤 한다. ② 나무만 심으면 된다? 아니다! 조경은 경관을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경관, 즉 풍경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③ 보기에 화려한 것이 좋다? 아니다! 그림 같은 풍경에서부터 시작한다. 알록달록 화려하다고 좋은 그림은 아니다. ④ 비싸고 귀한 나무가 많아야 한다? 아니다! 장소에 맞게 나무가 쓰여야 한다. 경관에 맞는 다양한 식물 소재가 얼마든지 있다. ⑤ 뭔가 범접 못할 신비하고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 아니다! 조경은 장소에 담긴 삶의 예술이다. 소소한 일상만으로도 예술이 된다. ⑥ 도시와 농촌이 다르다? 아니다! 누구나 어디서나 조경은 가능하다. 작은 실내정원에서부터 옥상정원, 하천, 산지 등 어디에도 가능하다. ⑦ 정원과 공원이 다르다? 아니다! 자연을 대하는 방식과 자연을 제공하는 방식이 다를 뿐, 자연을 즐기고자 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같다. 조경을 정의에서부터 살펴보자면, “자연경관과 인공환경을 연구하고 계획, 설계, 관리하는 등의 분야로서 예술적, 과학적 원리를 적용하는 분야”로 되어 있다. 건축, 토목과 같은 구조물을 다루는 분야가 아니라 그 구조물 외부의 공간 또는 외부 경관을 계획하고 설계하고 시공하는 것이 핵심을 이룬다. 조경을 할 때에는 구조물의 주변 경관을 살펴 거기에 맞는 풍경을 만들게 되는데, 대체로 개인 정원이나 공동주택의 정원, 도시공원과 녹지, 문화재, 위락 및 관광시설, 생물 서식환경 등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지속가능한 개발 개념과 함께 생태적 복원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어 이와 관련된 생태공원 조성, 생태통로 조성, 하천 복원, 옥상 정원, 벽면 녹화 등이 활발하게 연구되기도 한다. 시민 참여와 장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면서 이에 대한 연구와 실천 사례도 많으며, GIS, RS, AI 등 첨단 기술을 응용한 연구도 활발하다.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환경계획, 농촌시설계획, 녹색관광, 농촌 어메니티 발굴 등 지역 활성화를 위한 연구와 실천도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인공물뿐만 아니라 자연 그대로에도 복원이나 보존의 시각에서 접근한다는 점에서 개발을 기초로 하는 건축이나 도시, 토목 등의 접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야이다. 또 살아있는 것과 구조물을 동시에 다루어 생태와 문화의 접목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굉장히 폭넓은 분야에 걸쳐 경관을 조성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좋은 조경의 조건 조경이란 이처럼 건축물/구조물의 외부 경관을 다루는데, 그저 이러한 경관을 다루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생물 모두가 즐길만한 경관,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고자 하는데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경관을 애써 만들었는데 오히려 전보다 못하다면 그것은 잘된 조경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조경이란 아름답다는 가치가 가미된 경관 만들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의 기준은 하나가 아니어서 조경으로 만든 경관이 객관적인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경가의 역할이 중요하고, 경관을 조성하는 사람의 미적 감각과 꾸준한 관심이 중요해진다. 최근에는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이 예전과는 다르게 인식되고 있는데, 이는 그저 눈에 보기에 좋은 것만이 아름답다고 보았던 과거의 태도를 벗어나게 되면서부터이다. 여기서 신경 써서 즐기고자 하는 경관은 풍경이라고 달리 부를 수 있는데, 누군가에 의해서 해석되고 감상되어야만 경관은 풍경이 되어 좋은 조경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조경에서 말하는 경관이란 무엇일까. 경관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환경적 요소들 모두를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보니 사람 손이 많이 가지 않은 하천과 산지 같은 자연경관, 도로와 건물 같은 문화경관 등으로 경관이 세분되기도 한다. 경관은 본래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요소들이 너무 많으면 복잡하고 너무 적으면 단조로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좋은 조경은 경관 요소의 많고 적음을 잘 조절하고 그것을 얼마나 잘 배치하느냐가 관건을 이룬다.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몇 가지 좋은 조경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주변과 조화를 이룬 조경이어야 한다: 조경을 하고자 할 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주변의 경관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너무 튀거나 너무 왜소한 조경은 좋지 않다. 적절한 조화는 경관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와 어울리는 경관은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② 만들어진 경관에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조경이 이루어진 경관은 전체적으로 통일된 느낌이 있어야 한다. 하나의 분위기 또는 풍경으로 다양한 경관 요소들이 집중되도록 해야 한다. 형태나 색상, 질감 등 시각적 요소의 통일된 구성은 경관에 질서와 비례, 균형의 느낌을 주게 된다. ③ 지루하지 않게 다양한 경관이어야 한다: 너무 단조로운 경관은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몇 가지 강조가 되는 경관 요소는 자칫 침체되기 쉬운 풍경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다양성이 있는 경관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다양한 경관은 좋지 않다. 복잡한 경관이 되어 오히려 통일성을 깨트리고 어수선한 경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통일과 다양은 그래서 핵심을 이루며 그 균형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조경가란 나름의 개성적 감각으로 자신만의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있는 조경전문가(조경가)를 말한다. ④ 일상 활동이 함께여야 한다: 생활과 함께하는 조경은 자연과 함께하는 것과 같다. 콘크리트 도시 속에서 녹색의 자연을 일상적으로 즐기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실내에 있는 화분 하나만으로도 자연과 자연의 프로세스를 경험할 수 있다. 손쉽게 접할 수 있고 큰 노력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⑤ 의미가 있는 조경이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경관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저 시각적으로 보기 좋은 외부 경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 수 있지만, 왠지 그것만으로는 풍경이 주는 맛이 오래 남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조경 공간이라 하더라도 의미와 체험이 있는 장소가 되도록 여러 가지 노력과 이야기가 담기는 것이 좋다. 장소성을 고려하는 것은 그러므로 기본이 된다. 조경 공간의 구분 조경 공간의 구분은 몇 가지의 기능적 특성에 따라 이루어진다. 요구되는 기능에 맞는 공간적 순서와 재료가 사용되도록 하는 것도 기본이다. 다음의 설명은 일반적인 조경공간에 대한 설명이지만 이를 참조하여 조경을 이해하고 정원의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좋은 조경이 될 것이다. ① 진입공간(진입로, 주/부출입구, 정문, 후문 등): 조경공간에는 어디에나 진입공간이 있다. 주진입과 부진입으로 나뉘어 진입의 위계가 설정되기도 하고 공간이 작은 경우 하나의 진입공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도 한다. 진입공간에는 대부분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경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그늘을 주는 나무를 심거나 작은 화단을 만드는 등 조경이 필요하다. 특히 진입로가 길게 만들어지는 경우 차량에 방해가 되지 않게 가로수를 심어 진입로부터 인상을 살릴 필요가 있다. 간판이나 시설물을 두되 디자인이 가미된 형태로 구성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쉽게 해결이 어려운 경우 초점이 될 수목을 두어 좋은 경관으로 살리는 것도 방법이다. ② 작업공간(논밭, 마당, 비닐하우스(온실), 휴게장소 등): 작업공간은 주로 마당과 작업공간, 창고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주요 동선이 여기를 중심으로 뻗어나간다. 작업을 항상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복잡한 조경은 어렵다. 그렇더라도 건물 옆면이라든지 창고 뒤편 공간, 군데군데 있는 휴게장소 등에는 나무뿐만 아니라 몇 가지 조경 시설이 도입될 필요가 있다. 작업하다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하지만 주변의 어수선한 경관을 차분하게 정리해주는 역할도 조경을 통해 바랄 수 있다. ③ 생활공간(주택, 공동시설, 가로, 주차장 등):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정돈된 경관이 만들어지는 것이 좋은데, 여기서 더 나아가 보다 신경을 쓴 조경으로 지역성을 살릴 필요가 있다. 주목할 만한 꽃나무를 심거나 사계절을 고려한 화단을 두는 등 보다 적극적인 조경 식재가 이루어지는 것이 좋다. 세심한 풍경을 만들어 저마다의 조경공간을 대표하는 경관으로 삼는 것도 좋다. 그렇다고 너무 화려한 꽃치장은 지양하자. ④ 경계공간(경계부, 공간별 교차부분, 외부경관): 도심의 조경공간은 대체로 넓은 면적이 아니고 개방되지 않아야 하는 경우가 많아 폐쇄적인 구성이 많다. 그러나 기능적 문제를 고려할 사항이 아니라면 가급적 개방적 경관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 이는 내부의 경관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주변에 보일 아름다움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변 마을로부터의 근중원의 조망점과 조망 경관을 고려한 조경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⑤ 공유공간(실외 공간, 오픈스페이스, 공원, 공개공지 등):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공적인 도시 공간으로 공공성이 우선된다. 이용 행태와 안전성 등 고려할 사항이 많지만 잘 가꾸고 디자인된 공유공간은 도시의 가치를 높여주고 거주민의 자부심을 형성하게 한다. 다만 수많은 제약과 요청으로 인해 쉬운 의사결정이 어려운 공간인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며, 거시적, 미시적 방법론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 ⑥ 기타 공간(하천, 비오톱, 산지, 옥상, 벽면 등): 도시에는 많은 실외 공간이 형성되며, 최근에는 생태계를 별도로 고려한 공간 구분과 조경 도입이 기본으로 여겨진다. 정형화되기 어려운 공간이지만 도시 서비스의 다양한 측면을 고려할 때 놓치지 않아야 할 부분이다. 특히 기후변화로 인한 여러 문제들을 접근하는 단초로서 이러한 공간들에 대한 별도의 접근과 이론, 이해가 필요하다. 조경식재의 기능 구분 조경에서 수목을 사용하여 경관을 조성할 때에는 각 공간별 이용 특성과 수목별 경관 특성을 고려하여 적절한 위치와 크기로 수목을 배치해야 한다. 정원의 경우 작업 공간과 생활공간, 야적 및 창고 공간 등으로 공간 구성과 동선 구성이 이루어지므로 여기에 맞게 식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경식재의 기능으로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한다. 식재 기능을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정원에서의 식재 기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이렇게 나누어진 식재 기능은 각 공간별로 적절히 배치하고 이에 따라 수종을 선택하도록 한다. ① 차폐식재: 차폐식재는 시각적으로 부정적인 요인을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다. 좋지 않은 경관을 수목을 통해 적절히 가리고 내부의 쓰레기장 같은 혐오시설을 차단하도록 식재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때에는 수목을 밀식하여 시각적으로나 경관적으로 차단이 가능한 측백나무류, 사철나무, 쥐똥나무 등이 사용되며, 완전하게 가리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는 수고가 높은 메타세쿼이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② 동선유도식재: 차량 및 보행을 유도하기 위한 식재를 말하는데 주로 외곽 진입로와 순환형 작업로 등이 해당한다. 도심에서는 가로수가 이에 해당하며 보행자나 자전거, 자동차 이동을 유도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작은 텃밭이나 정원에는 별도로 가로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는 없지만 규모가 크고 동선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경우 은행나무, 느티나무 같은 녹음수를 열식하여 터널식의 가로식재를 할 필요가 있는데, 가로수 식재만으로도 훌륭한 조경이 되기 때문이다. ③ 초점식재: 식재를 통해 시선을 한 곳으로 모아주는 역할을 하며 방향성을 주는 식재 기법이다. 길이 만나거나 건물 앞마당 부분 등 시각적으로 초점이 되는 위치에 포인트가 되는 나무를 심어 경관을 살리는 경우이다. 보통 조형성이 높은 수종을 식재하여 공간의 개성을 나타내므로 고가의 수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조형 향나무, 조형 소나무 등 고가의 나무도 좋지만 그보다는 경관에 맞는 느티나무, 섬잣나무, 모과나무, 목련, 단풍나무 등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사용하면 경제적이다. ④ 경관식재: 중요한 경관을 부각시키거나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기 위해 식재하는 경우로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핵심이다.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는데 식재의 목적이 있으므로,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볼륨으로 수목이 위치하도록 한다. 군식이 필요한 곳과 단독목으로 경관이 강조되는 경우를 구분하여 식재한다. 계수나무, 자귀나무, 목련 등 고급스럽고 화려한 수종은 단독 또는 소수로 경관을 만드는데 사용하고, 녹음이 푸르게 형성되어야 하는 곳에는 어떤 수종이든 구하기 쉬운 수목을 군집 형태로 사용한다. 철쭉, 회양목 등 관목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⑤ 경계식재: 공간을 기능별로 구분하고 분리해 주는 역할을 하며, 영역을 설정해 주는 식재를 말한다. 철재 또는 목재 울타리로 경계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가급적 강한 인공 시설로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 좋다. 시설물로 경계를 구분해야 하는 경우 경관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수목을 추가로 식재하는 것이 좋다. 특히 외부에서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경관적으로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이 효과적이며, 차폐의 기능과 동선유도의 기능을 동시에 하도록 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2. 우리 시대 도시와 조경의 방향,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라!” 현대 정원문화, 공원문화는 변화를 맞고 있는데 호사취미가 아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자연이자 공동의 일상 활동으로 전환되고 있다. 여기에 이전부터 그래왔듯 외부의 도움을 바랄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도시 풍경을 개선하려는 각자가 주인공이라는 성찰과 그런 주인공들의 교류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사는 도시 공간 및 환경 그 자체를 미적 장(the aesthetic field)으로 인식하는 태도가 깔려 있으며, 이를 통해 도시의 여러 주인공들(urban actors)이 미적 감성(the Aesthetics)을 소통하려는 욕구가 확산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이제 도시의 일상 환경이 하나의 정원으로 인식됨을 잊지 않아야 한다. 현대 정원문화는 이미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모르는 새 우리의 정원과 정원문화가 이미 “의생어중(義生於衆), 심생어원(心生於園)”의 그것을 찾아 움직이고 있음을 성찰할 때가 되었다. 언제나 정원은 생각과 소통의 마당이자 모든 정원사의 스승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새로운 공원문화도 그 갈피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핵심은 우리 도시를 경관이 아니라 풍경으로 보려는 태도에 있다. 물리적 외부 요소로서의 경관이 아니라 감성과 느낌의 내외부 요인으로서의 풍경을 그 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다. 풍경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흔하게 쓰인다. 그것은 물리적인 경우도 그렇고 사유나 문화와 같이 개념적인 경우도 그렇다. 다시 말해 실체가 있는 풍경도, 그렇지 않은 풍경도 우리는 흔히 사용한다. 생각해보면 풍경이란 말(개념)은 그 위치나 내용을 고정하기가 어려운데, 그러면서도 우리 사이에서 쉽게 통용되니 뭔가 특별한 지위를 가진 것에는 틀림없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나’로부터 시작되는 풍경, ‘경관’으로부터 시작되는 풍경에 대해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경계와 대화하기; 발견하는 풍경과 설정하는 풍경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연의 위력을 쉽게 체감하지 못하고 인공의 환경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도시로 경계 지어진 행동의 반경이 일상의 반경이기도 한 것은 대부분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삶이 무르익으면 우리는 대부분 전원을 찾아 조금은 덜 인공적일 것 같은 환경으로 삶의 자리를 옮기곤 한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이런 세태에도 변화가 있어 기존의 밀집된 도시에서도 경계 없이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이 인공의 경계 속에서 하나둘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정원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문화는 가히 정원의 원형을 제4의 본질로 생활기반의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라고까지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이고 문화의 전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변화는 뭔가 다른 경지를 우리에게 성찰하도록 요청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의 중간쯤에 놓인 우리의 생활문화가 새로운 첨단을 시험하는 첫 관문에 들어선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시 설명하도록 하고, 핵심은 동서양 자연관의 차이에서 이러한 성찰의 가치와 지평이 시작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다. 동양 자연관의 핵심이랄 수 있는 점은 삶의 환경을 자연과 인공이라는 두 주인공만으로 압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자연과 인공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단순화(dualism)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자연과 사회라는 보다 포괄적인 경계설정이 그 본질로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절대법칙으로 자리하지 않고 생활문화 전반으로 그 실체를 분명하게 못 박지 않은 채 저변을 이루게 된다. 철학자의 말대로 ‘기우뚱한 균형’은 그렇게 삶의 기초로서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시작되는 풍경을 따져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로부터 담(생활환경) 너머, 자연(경관) 너머는 풍경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다시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감흥의 소통을 담지하게 한다. 먼저, 발견하는 풍경은 내면적이고 참여미학적이다. 그것은 적극적인 참여(engagement)를 부르고 소통을 이끄는 방식이다. 다음, 설정하는 풍경은 외향적이다. 그것은 구축적 합리와 감성적 통리가 경관으로부터 피어나게 한다. 내면에 녹아있는 감성을 먼저 자극하는 풍경이 되게 하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는 자연과 대화하는 우리(인간, 사회)를 이끌며 물리적 실체가 아닌 감성적 실재로서 ‘우리시대 저마다의 풍경’을 시작되게 한다. 시퀀스적 풍경과 풍경적 시퀀스 풍경이란 결국 우리 주변의 ‘경계’들과 대화하는 한 방식이자 매체(channel)라고 할 수 있다. 대화는 동적이어서 흐름(flow & follow)을 기본으로 한다. 우리가 흔히 잊곤 하지만 풍경은 그렇게 고정된 풍경(그림)이 아니라 흐름을 내포한 담지체라고 할 수 있다. 흐름으로 보는 풍경은 새로운 생각과 이론을 불러오는데 연결성(sequence)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중요한 한 가지 방식이다. 그간 우리는 이 점을 심도 있게 다루지 못했다. 동적이라는 것은 그 만큼 앉혀놓고 판별하기 어려운 상황을 다루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딜 가든 주변(파노라믹 경관)을 먼저 살핀다. 상황(situation)을 파악하는 것은 자연에서든 사람 사이(사회)에서든 중요하다. 이것은 발견하는 풍경과 소통하는 풍경이 결국 ‘전체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주며 풍경을 보기 전에 전체(경관)를 먼저 살펴야(지나야) 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지적해 준다. 여기서 전체는 부분들의 합 이상을 이루며, 풍경이 설정되는 것도 이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며, 앞서 살핀 두 가지 풍경의 범주가 그런 전반적인 관계성과 연관됨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의 네 가지는 결론적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정원을 통해 풍경을 진화시키고 있는 우리시대 풍경(개념)의 단면을 보여준다. ① 원로(園路): 담지적 풍경, 움직이는 주인공. 먼저 가있는 감성(viewpoint) 원로는 흔히 사용되는 용어는 아니지만 우리시대에 집중해서 살펴야 할 경관 및 풍경과 관련된 개념어이자 실행개념이다. 원로는 그 자체로 담지적 풍경들의 연속이며, 그러한 연속성의 구성(originality)은 감성을 옮겨가게 한다. 정원은(공원 포함) 이러한 원로들의 마당(field)이며 움직이는 이용자들에게 저마다의 연속성을 스스로 체험하게 한다. 풍경의 시퀀스는 그렇게 형성되며, 이것은 장소를 형성하는 기본이 된다. ② 차경(借景): 들고나는 관점. 우리시대 정원과 공원의 생산성(productivity) 담 너머 풍경은 주인공이 없이는 안으로 향할 수 없다. 차경이란 결국 주인공을 먼저 상정하는 방식인 것이다. 흔히 우리는 차경하면 일방적 끌어들임을 생각하기 쉽지만 소통과 교류가 없이는 이를 얘기하기 어렵다. 풍경은 그렇게 발생하는 결과중의 하나이자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관점을 고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경은 안팎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식이다. 건물과 정원(공원)을 들고나게 하며 우리시대 차경은 풍경(과 관점)을 그렇게 들고나게 한다. 차경은 풍경의 역동성을 그렇게 자극하는 방식이다. ③ 의경(意景): 미리 담은 속마음. 생성적 자연과 생성적 자연관 자연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경관도 그렇다. 그러나 풍경이 되면서는 달라진다. 말(이야기)하기도 하고 말하게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말이 되지 않으면 풍경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의경은 풍경이 가능할 때에야 나타난다. 의경은 그대로 생성적(Becoming) 방식이어서 말없는 자연을 말하게 하는 핵심이 된다. 풍경의 다음에서야 이루어지는 이것은 그런데 먼저 담긴 것, 미리 담은 것을 함의하기도 한다. 이분법을 벗어난 우리는 말이 없는 자연에 말을 담기도 말을 꺼내기도 하는 것은 그것이 풍경이 되면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④ 생활(生活): 멀지 않은 풍경, 일상에서 즐기는 생활기반(life-structure) 다시 말하지만 우리 도시는 우리 인류에게 처음인 환경이다. 처음인 생활이다. 그리고 처음인 풍경이 되고 있다. 본능적 가꾸기는 이런 환경에서 빛을 발하며 우리시대 삶터 변화와 진화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살펴보면 자연을 즐기려는 여러 욕구의 방향들이 이미 여기저기에서 제각각인데, 그것들은 의미 없고 생각 없는 환경(자연)에 의지를 담아 즐기려는 새로운 생활양식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우리시대 경관이 인프라라면 풍경은 생활인프라로 성장하고 있다. 공원과 정원에 더한 생활기반으로서의 풍경은 새로운 주인공으로 주목받고 있다. 풍경은 그렇게 연속되거나 연속을 이끌거나, 불연속을 뛰어넘거나 하면서 존재한다. 경관이 풍경으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이러한 힘이 작용하지만 경관은 그것과 관계없다. 우리는 이제 우리 도시의 풍경이 그렇게 만들어져 왔음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우리 도시의 경관이 그러한 과정 없이 다루어져 왔음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런 자문도 가능하다. 변화하는 아름다움이 만들어놓은 우리시대의 경관에는 풍경이 있는가? 우리시대의 경관에는 시퀀스적 풍경이 있는가, 풍경적 시퀀스가 있는가? 생각의 아름다움화, 풍경의 예술화 우리는 흔히 잊지만 아름다움(개념)은 달라지고 변화한다. 시절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아름다움이 이 지구를 가만두지 않기도 했다. 풍경은 그 위치가 내면이면서도 그 지향이 자연이이어서 달라지는 아름다움에 따라 우리의 내면을 움직이게도 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풍경 안팎의 문화적 본질이다. 그리고 흔히 잊는 또 하나는 그것의 바탕에 감각을 지원하는 생각(이해)이 흐른다는 점이다. 생각이 담긴 아름다움은 그런 점에서 예술을 지향하고 작품이 되고자 한다. 풍경이 하나의 작품처럼 소통을 기다리며 그림에 담길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풍경화는 그렇게 그 시절의 아름다움(생각)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이다. 작품이 되는 풍경은 그런 점에서 감성과 이성을 이끄는 원본성이 필요하다. 우리시대 정원이 문화가 되면서 나타나는 새로운 아름다움의 표현(풍경) 또한 이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생각과 원본성, 이것에 바탕하는 정원 속 풍경이라면 그 자체로 예술(정원예술)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시대, 우리에게 풍경에는 어떤 아름다움과 어떤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일까? 아니 먼저 그것을 담을 경관을 제대로 이해하고는 있는가? 풍경으로 역동칠 우리 삶터의 경관은 어떤 이론과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우리시대 경관이란 무엇인가? 풍경을 볼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그리고 많아져야 할 때이다. 3. 조경이 그리는 공동체 정원, “주민을 주인공으로!” 공동체 정원은 다양한 정원 유형 중의 하나이다. 중요한 점은 정원을 조성하고 유지관리하는데 그 주인공들이 부각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 정원은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과 정원을 즐기며 유지관리 하는 과정 자체에 중점을 두는 참여형 정원 유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원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의 문제보다는 공동체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할 필요가 있고, 다양한 의사를 가진 주민들을 상대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를 리드할 수 있는 여러 수법과 리딩의 경험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참여하는 주민들의 정원 가꾸기 참여 정도 또는 열망에 따라 공동체 정원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참여하는 주민이 주인공이라는 점만을 충분히 주지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과를 달성했다고 할 수도 있다. 농촌 지역에서의 경우 고령화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이러한 사업의 추진이 상당히 어려울 수 있지만, 이미 도시 지역의 경우 많은 연구와 실천 경험을 통해 공동체 운영에 필요한 노하우를 획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변화하는 정원문화의 트렌드에 맞춰 공동체 정원을 장려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형식과 실행 방안을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 충분히 습득하고 실행에 임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 정원의 개념과 새로운 의미 공동체 정원은 여러 형태로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나 공동체(community)가 주인공이 되는 공공의 정원(public garden)이라고 기본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기존의 정원이나 공원의 중간쯤에 놓이는 것으로, 실행하고 지원하는 방식이나 주체에 따라 그 범위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대체로 지역 공동체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반으로 “꽃이나 식물을 좋아하고, 흙과 가까이 하는 것을 좋아하며, 도심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공적인 활동공간을 확보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텃밭이나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것”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커뮤니티 가든은 유럽의 경우 도심의 적절한 공간을 주민에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운영돼온 역사가 있으며 근현대로 넘어오면서는 정원문화의 확산과 함께 도시를 친환경적으로 재조정하는 역할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메리카의 경우 도시농사를 테마로 식량 생산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정책적으로 장려된 바 있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야 문화 활동이자 시민운동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서구의 커뮤니티 가든은 지역마다 역사와 배경이 다르게 작용하여 현재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최근 들어서는 커뮤니티 가든의 효과가 “먹거리의 생산과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식물의 체험, 협동작업과 자연물을 통한 힐링, 방치된 지역 공간 활용이나 교류가 없던 지역민 참여를 통한 지역 활성화, 인근 주민들의 매개체 역할을 통한 지역사회 재형성, 녹색의 친환경 마을 만들기, 재해나 범죄 대비를 위한 피난처” 등 식물의 직접적 생산과 육성의 측면 이외의 것들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처럼 공동체 정원은 ‘정원이라는 물리적 실체, 생산 활동이라는 결과’가 중심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교류와 문화적 창의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가치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마을만들기 사업과 도시재생 사업, 다양한 주체간 파트너쉽 등에서 그 가치가 증대되고 있으며 새로운 유형과 진행 형식들도 나타나고 있다. 주민주도 정원 조성의 유의점 공동체 정원은 주민의 생활공간과 가깝다는 점에서 많은 장단점을 가진다. 주어진 대상지가 어떠하냐에 따라 운영 방식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고 주민의 참여도와 정원 관련 지식의 정도에 따라 가변성이 크다. 그간의 연구에서 제시된 참고할 만한 공동체 정원의 대상공간은 다음 표와 같다. 그러나 도시 공간 중 공동체 활동이 가능한 옥외공간이라면 충분히 공동체 정원으로 활용을 고민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상지에 대한 고민을 우선할 것이 아니라 정원을 어떻게 형성하고 운영해 갈 것인지를 먼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대상지의 윤곽이 어느 정도 정해지면 이에 참여할 주인공들을 찾고 지원할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청년회, 노인회, 부녀회, 주민자치회, 각종 시민단체, 환경단체 등” 기존 대상지와 관련하여 주민들이 자주 모이거나 모임이 가능한 기존 지역 커뮤니티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공동체 정원의 취지와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 주민 리더를 중심으로 주인공들을 찾아내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의 경우 행정에서 일종의 조력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으며 기존 도시재생 관련 활동의 경험을 통해 볼 때 사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진 후 실행에 나서는 것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된다. 농림부에서는 아직까지 이에 대한 매뉴얼 또는 가이드라인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므로 행정 담당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겠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발적으로 주민모임을 형성하여 행정의 도움 없이 공동체 정원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주민들도 있으니 이들을 리더로 육성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수원시의 경우 이러한 주민참여형 마을만들기 사례를 통해 공동체 정원을 운영할 수 있는 주민 역량이 상당히 높아져 있는 경우로 유명하다. 어떤 정원을 만들 것인가 부터는 참여하는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상지를 선정하고 어떤 설계안을 마련하여 적용할지 가급적 주민 리더를 통해 결정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기술적인 필요가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데 이때 적합한 전문가의 도움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공사 진행시 발생할 수 있는 전문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주민이 먼저가 아니라 행정 담당자가 사전에 검토하고 확인하여 예방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주민은 어떤 상황에서도 전문가가 아님을 잊지 않아야 한다. 공동체 정원의 운영과 활용 공동체 정원은 지역 사정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University of California, Division of Agriculture and Natural. “Community Gardens,” marinmg.ucanr.edu, Retrieved 2017-05-22.) 그러나 사실 이러한 유형은 개략적인 것으로 관점에 따라 더 많은 범주로 유형화될 수 있을 것이다. · 이웃 정원(Neighborhood gardens)은 과일, 야채 및 관상용 식물을 재배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정원으로 일반적으로 정의되는 가장 흔한 유형이다. 그것은 명목상 연회비로 지불하는 정원사들 개개인의 임대하는 개인 또는 공공 토지의 구획으로 식별 할 수 있다. · 거주민 정원(Residential Gardens)은 일반적으로 아파트 공동체, 보조 생활 및 저렴한 주택 단위의 주민들이 공유한다. 이 정원은 거주를 전제로 하는 주민들에 의해 조직되고 관리된다. · 단체 정원(Institutional Gardens)은 공공 기관 또는 사설 기관에 연계되며 주민에게 많은 유익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정신적 또는 육체적 재활 및 치료뿐만 아니라 직업 관련 기술을 가르치는 것까지도 해당한다. · 시범 정원(Demonstration Gardens)은 교육 및 레크리에이션을 목적으로 사용된다. 짧은 세미나 또는 정원 가꾸기에 관한 프리젠테이션을 제공하고 공동체 정원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은 운영의 중점을 어디에 두고 지원할 것인가와 관련되고 실제적인 실행의 중요 기준으로 활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공동체 정원이 어느 하나의 유형으로 고착되지 않고 각 유형이 상보적으로 섞여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각각 특징이나 방법이 다르므로 적합한 유형을 설정하고 지원 방안을 찾는 정도에서 공동체 정원의 각 유형을 고민해 최적의 방식을 찾을 필요는 충분하다. 미대륙의 경우 공동체 정원은 식량 재배와 소비라는 측면에서 각광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저소득층 도시민들에게 중요한 기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지적되는 것은 이웃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와 장소를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사회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범죄를 줄이는 동시에, 정치적 조직화의 장이 되는 등 다양한 이점을 가져왔다.(데이빗 헤스, “도시농업, 미국: 커뮤니티 가든의 폭넓은 역할”, 『환경과조경』 2011년 7월호) 반면에 몇몇 문제들도 지적되는데 토지 이용 문제가 먼저 지적된다. 지가 상승 압력으로 인해 개발 압력이 증가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원을 가꾸고자 하는 사람들과 개발을 추진하려는 사람들 사이의 충돌이 있었고 정치적 갈등 요소로까지 확대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뉴욕시에서의 경우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자 개발업자의 편을 드는 시와 정원을 가꾸던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이러한 갈등을 비영리 단체가 개입하여 토지를 매입하면서 해결한 사례도 있었다. 이처럼 공동체 정원을 운영하는데 있어서는 다양한 사회적 반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도시재생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도시 문제 해결 방안 중에서 활성화 된 도심에 개발 압력으로 등장하며 나타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큰 사회문제로까지 등장하고 있다. 공동체 정원에 있어서도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안명준 조경평론가[email protected]
- 2019-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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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제35호인 성락원의 원래 주인에 대한 재검토의 문제가 불거졌다.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의 별서였다는 기존의 설명과 달리 심상응이란 인물이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으면서 벌어진 논란이다. 이러한 진위논쟁은 성락원에 각자(刻字)된 ‘영벽지(影碧池)’ 시문의 출처가 밝혀지면서 전기를 맞게 되었다. 황윤명(黃允明)의 『춘파유고(春坡遺稿)』에 수록된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라는 시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논의를 보면 성락원은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의문을 품게 한다. 하나는 성락원을 조선시대에 조성된 정원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성락원의 존재가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도에서만 확인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하나는 성락원이 우리나라 전통 정원으로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과연 성락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원으로 평가하기에 무색한 곳일까. 이러한 의문의 실마리를 해결하는 데 주목할 만한 자료가 있다. 1887~1888년 정선군수(旌善郡守)를 지낸 오횡묵(吳宖黙, 1834~?)의 『총쇄(叢瑣)』에 기록된 내용을 아래에 밝힌다. “북쪽 시내로 방향을 돌려 시내가로 난 오솔길을 따라 1리 쯤 들어갔다. 길이 구불구불 돌고 아름다운 나무가 무더기로 빽빽하며 기이한 새와 꽃들이 세속 사람의 이목을 번쩍 뜨이고 기쁘게 하였다. 걸음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취병(翠屛) 하나가 있는데 제도가 매우 오묘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듯한 하나의 정자가 걸음을 따라 모습을 드러내니 바로 황춘파(黃春坡: 황윤명) 선생의 별서이다. 제도가 작고 경계가 그윽하며 폭포물이 떨어지고 향기로운 화훼가 형형색색이라 사람을 기쁘게 할 만 했다.”_ 오횡묵, 『강원도정선군총쇄록(江原道旌善郡叢瑣錄)』 1887년(고종 24) 4월 25일. 오횡묵이 1887년(고종 24) 4월 25일 황윤명의 별서를 기록한 내용의 일부이다. 이때 오횡묵은 혜화문(惠化門)으로 나가 성북동에 들러 참판 김병시(金炳始)의 집과 민영환(閔泳煥)의 별업을 방문하고 이어서 황윤명의 별서를 둘러보았다. 오횡묵의 언급대로 대단히 아름다운 제도를 갖춘 별서였음을 상상하게 한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에서 오횡묵은 정자에 몇 편의 시가 걸려 있어 읊으니 대단히 청아했다며 감탄을 금치 못하기도 했다. 위 글을 쓴 시기가 1887년으로 결국 19세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별서였음을 증언한다. 이후 오횡묵은 황윤명과 친교를 맺고 다시 황윤명의 별서를 방문했다. “참봉(參奉) 이승국(李承國)은 호가 청몽(淸夢)으로 산을 구경하는 벽(癖)이 있다. 일찍이 함께 가기로 약속했는데, 내가 황춘파를 방문하기로 하여 청몽(이승국)에게 먼저 광릉천점(光陵川店)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혜화문에서 황춘파의 계정(溪亭)으로 들어갔다. 춘파는 몇 년 간 병환으로 인해 조제를 불러다 머무르게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나를 보고는 몹시 기뻐했다. 안부를 묻는 동안 몇 시간이 지났기에 억지로 작별인사를 나누고 별장을 나섰다.” _ 오횡묵, 『경상도고성부총쇄록(慶尙道固城府叢鎻錄)』 1894년(고종 31) 10월 20일. 1894년 10월 20일 오횡묵이 이승국과 약조하고 도성을 나서는 길에 황윤명의 별서를 들른 기록이다. 당시 황윤명은 건강이 좋지 않아 병환을 다스리고 있다고 하였다. 황윤명의 『춘파유고』에 자신의 병세를 자조한 시문이 종종 보이는데 어쩌면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일인지 모른다. 이때 오횡묵이 방문하자 황윤명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몇 시간 대화를 나눈 끝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1887년 묘사된 그의 별서가 이때까지 지속된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상은 성락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황윤명 별서 기록의 일부에 불과하다. 황윤명의 『춘파유고』를 보면 영벽지에 석가산을 조성한 사실은 이미 밝혀진 바이고, 국화, 대나무, 오동나무 등 화목(花木)의 기록도 곳곳에서 산견된다. 비가 많이 내린 날에는 그곳에 배를 띄워 손자들과 노닐었다고 하였다. 앞서 오횡묵이 선경(仙境)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했던 설명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19세기 한말사대가의 한 사람인 강위(姜瑋)는 1870년대 육교시사(六橋詩社)를 통해 당대 명성을 드날렸다. 이들의 모임을 기록한 『육교연음집(六橋聯吟集)』에도 황윤명의 별서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당시 강위는 황춘파(황윤명)의 시옥(詩屋)에서 문형당(文衡堂: 문유용), 김추당(金秋棠: 김창순) 이취당(李取堂: 이원긍) 이소화(李小華: 이시영), 주소창(朱小滄: 주우남)과 만나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였다. 강위가 말한 곳이 성락원과 동일한 장소인지 여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나 강위의 몰년이 1884년임을 고려하면 황윤명이 별서를 경영한 시기는 그보다 이전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황윤명의 별서는 본래 존재했던 누군가의 정원을 이어받아 경영되며 주변 문인들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화재청에서도 관련 학자들이 모여 사료를 검증 중이라고 하니 성락원의 가치를 정립하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김세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문학박사 * 기고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김세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문학박사[email protected]
- 2019-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