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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For a Fair Competition
매년 다양한 규모와 성격의 조경 설계공모가 열린다. 2007년 조경 설계공모의 분기점으로 불리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부 오픈스페이스 국제설계공모’ 이후, 설계공모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질적으로도 서서히 진화를 거듭했다. 조경 설계공모가 활성화되자 조경가는 그에 발맞춰 설계 역량을 키웠다. 설계공모의 결과물은 동시대 조경의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냈고, 완성된 좋은 공원과 광장들은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조경의 중요성을 알렸다. 이는 곧 다른 분야와의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어 선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많은 조경가가 말한다. 목록을 빼곡하게 채운 설계공모 제출물은 그 쓸모를 의심하게 한다. 공모 당선 후 설계안은 발주처에 의해 고쳐지며 원형을 알 수 없게 된다. 실시설계까지 너무나 짧은 시간이 주어지기도 한다. 설계 대상이 분명 조경이지만 설계 자격을 얻지 못할 때도 있다. 설계안을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는 무산된다. 형식적인 자문과 심의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가 하면, 대가 없이 용역 기간이 늘어나거나 추가 업무가 생기기도 한다.
이번 특집에서는 조경 설계공모의 현재를 진단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공모를 조망한다. 조경 설계공모는 어떻게 변해왔으며 현재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 그 과정에서 조경가의 자격은 어떻게 변해왔고, 설계공모와 결과물의 상관관계는 어떠한지 살펴본다. 아울러 현재 설계공모의 운영과 심사 방식의 문제점을 진단한다. 이번 기획이 계속 변화해온 설계공모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안을 모색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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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설계공모 변천사 _ 최영준
공모 정상화를 위한 제안 _ 이해인
설계공모, 결국 심사위원의 문제 _ 이승환
자격을 논할 자격 _ 정평진
공공건축 설계공모 이후, 이상과 실제 _ 임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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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조경 설계공모 변천사
설계공모에 대한 글을 몇 편 쓰며 스스로 묻고 답하고 싶은 질문이 하나 생겼다. 과연 설계공모의 시초는 언제이며 어디에서 시작됐는가. 경쟁‧경연‧대회(competition)라는 형식에 기반을 둔 효시는 쉽게 예상할 수 있듯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다. 건설 환경 분야와 관련된 디자인 공모에 대한 최초 기록은 기원전 448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세운 전쟁기념관을 위한 설계공모다.(각주 1) 몇몇 글에 따르면, 중세에는 여러 예술 창작자 사이에서 의뢰 지정 방식에 대한 대안으로, 근대에는 건축 양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전에 없던 형태와 디자인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설계공모가 실행됐다. 균등 기회 기반의 경쟁 입찰이 일반화되고 디자인의 교류가 국제화를 넘어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의 설계를 확인할 수 있게 된 현 시점의 설계공모는 어떤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일까.
조경 설계공모의 첫 걸음, 민주적 변곡점
설계공모는 디자이너 개인의 자율 창작 의지에 기반한 아이디어를 사회적으로 합의된 의사 결정으로 만들어가는 열린 동의 과정이라 정의할 수 있다. 조경은 공공 영역과 자주 맞닿기에 공동체를 위한 합의 기능에 기대야 마땅하다고 여겨지고, 분야의 탄생 자체가 옴스테드와 복스의 센트럴파크 설계공모 당선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한국의 조경 중심 설계공모의 역사는 의외로 길지 않다. 그리고 정부 주도의 국토 개발 역사를 지녀 조경 설계공모의 시작과 발전이 정치적 성숙과 그 진도를 함께 해왔다. 건축 설계공모는 해방 이후부터 그 역사를 찾아볼 수 있고 일찍이 일반화됐지만, 공원 녹지 사업을 조경 주도로 기획‧실행한 첫 설계공모는 1996년 말 공고해 1997년에 당선작을 발표한 여의도광장 공원화 설계현상공모다.(각주 2)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 등장한 민원(民願) 제도와 그 시점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일반에게 널리 공개하여 모집한다’는 의미의 공모(公募)와 1997년 제정된 ‘국민이 행정 기관에 어떠한 것을 신청하는 것’을 의미하는 민원 제도가 만났던 이 시기는 공공의 영역에 대한 제안을 국민에게 널리 열어서 모집하는 공식적 경로가 열린 한국 조경의 민주적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
여의도광장의 공원화 사업을 시작으로 몇 해 동안의 조경 설계공모는 서울의 대표적 오픈스페이스 유형들에서 하나씩 시행됐다. ‘공원’으로의 변화를 꾀한 여의도(1997)를 시작으로, 서울‘광장’이 된 서울시청 앞 광장조성 설계공모(2002)(각주 3)에 이어 ‘도시 숲’의 시초가 된 서울숲 조성 설계공모(2003)(각주 4)까지 설계공모가 실행된 이 시기를 조경 설계공모의 태동기라 하겠다. 초창기인 만큼 설계공모라는 경쟁 게임에 대한 미숙한 규칙과 진행이 많았다. 여의도광장 공원화 설계현상공모 참가 팀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는 『환경과조경』 1997년 3월호 내용을 인용한다.(각주 5)
“주무부서의 치밀한 사전 준비 절대 부족”, “심판관 얼굴 가릴 필요있나”, “게임이므로 공정성과 형평성의 원칙에 따라야”, “앞으로 설계경기 기간을 이번 1개월 보다 늘리겠지만”, “심사위원 사전 공개는 불변 심사위원 소감 및 소개”, “심사위원 사전 공개 시범적으로 해봄직”, “서울 공원 유지‧관리에 대한 서울시의 장래 계획이 언급되어야”, “더 많은 전문가의 의견 수렴 필요, 추진 방법에는 신중 가해야”, “상식 수준에서 선택된 작품이라고 판단”, “본 과업의 적극적 홍보 필요, 여성 심사위원 수도 좀 더 늘렸으면”.
게임의 규칙, 심판, 선수의 매너 모두에 대한 불만과 불완전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듯 설계공모의 기획, 진행, 후속 절차는 초보 단계에 머물렀기에, 여의도의 경우 당선작과 크게 다른 준공 결과물을 남겼고, 서울시청 앞 광장은 당선작이 전면 취소되기도 하는 등 반복되어서는 안 될 선례를 남겼다. 반면, 서울숲 설계공모는 ‘숲’이라는 구체적 오픈스페이스 유형에 맞춘 기획이 탄탄하게 갖춰진 사례였다. 도시 숲 성격에 맞는 숲 연계 프로그램이나 환경 생태 기능을 강조하는 구체적 설계 지침을 제시하는 판을 깔았기에, 상투적 개념 구현이나 형태 중심 설계를 탈피하고 목적에 합당하고 ‘쓸모 있는’ 당선작이 선정됐다(각주 6)는 평가를 받았다. 기획과 결과 간의 동기화가 된 선례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Jack L. Nasar, Design by Competiti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p.29.
2. 한우드엔지니어링의 작품이 당선됐다.
3. 당선작: ‘빛의 광장’, 서현(당시 한양대 교수)·인터씨티건축사사무소
4. 당선작: ‘서울숲’,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대우엔지니어링·조경진(당시 서울시립대 교수)
5. “여의도광장 공원화 추진의 발자취”, 『환경과조경』 1997년 3월호, pp.143~151.
6. 이상민·조정송, “서울숲 조성 설계공모에 대한 비판적 연구”, 『한국조경학회지』 2(31), 2004, pp.15~27.
최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조경설계를 가르치고 조경 디자인의 성능을 연구하는 교수지만, 정체성의 중심에는 외부 공간을 그리고 만들어가는 조경가가 자리한다. 매년 다시 찾아가고 싶은 준공된 장소를 하나씩 만들어 이웃들과 공유하는 기쁨을 위해 설계하고 짓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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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공모 정상화를 위한 제안
1억 원 이상의 공공 설계 프로젝트는 공모를 진행하도록 한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 덕분에 건축에서는 조경보다 설계공모가 더 활성화되어 있다. 하지만 설계공모가 많다고 해서 마냥 부러워 할 일만은 아니다. 설계공모는 만능이 아니며, 오히려 갖은 소규모 공모가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 설계공모는 PQ나 제안서 입찰 등 다른 방식에 비해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수반하는데, 참가 팀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매몰 비용만으로도 설계를 몇 번이고 발주할 만한 금액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수상작에 대한 보상금, 공모 운영비뿐 아니라 절차에 필요한 시간적 비용도 크다. 그렇다면 이 모든 비용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공모를 통해 진정으로 탁월한 계획안을 선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설계공모는 실적, 기술 점수, 회사의 신용 평가 등 설계와 무관한 요소를 배제하고 설계안 자체를 평가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공모 참가 자격이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기회의 박탈이 더 쉽게, 더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심사위원의 편향성과 심사 방식의 오류가 공정성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크며, 결과적으로 공모로 선정된 안이 이후 마구 변경된다면 설계공모의 근본적 목적이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참가 자격 설정 방식, 심사 공정성, 의사 결정 방식, 당선작의 구현 보장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개선안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참가 자격
설계공모의 참가 자격은 최대한 포용적으로 설정하되 계약 단계에서는 해당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조정할 수 있다. 참가 자격과 당선자의 계약 조건은 충분히 분리될 수 있으며, 이를 활용하면 불필요한 배제를 방지하면서도 공모의 신뢰성을 유지할 수 있다. 대부분 건축 공모에 외국 건축사가 참가 자격을 갖는 걸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일부 공모에서는 이런 조정 없이 초기 참가 자격 자체를 불필요하게 제한하는 사례가 많다.
대표적 사례는 건축사만 참가할 수 있거나 대표사를 맡을 수 있도록 나오는 공원 설계공모다. 이런 제한은 공정한 경쟁을 저해할 뿐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부작용을 가져온다. 제출작 또는 당선작의 크레디트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거나 불리한 하도급의 관계에 갇혀 정당한 설계 대가를 받지 못하는 일로 이어진다. 공모에서 조경가가 배제되는 건 조경사 제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공모 운영 방식이 특정 분야를 과도하게 우선하는 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다.
공모 정상화 방법으로 조경사 제도 신설을 논하는 사람도 있지만, 공모 제도의 문제는 특정 직능의 법적 지위보다 공모 운영 방식과 절차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조경사 제도가 신설된다 해도 조경이 공모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며, 심사의 공정성이나 당선작 구현 보장 같은 본질적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따라서 공모 제도의 개선은 참가 자격 설정 방식과 심사 구조를 바로 잡는 방향으로 논의되어야 하며 조경사 제도와의 연관성은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 대부분 참가 자격 설정은 법이 아니라 발주 기관과 운영위원회의 내부 논의를 통해 결정된다. 어떤 분야가 핵심 분야여서 배제되면 안 되는지에 대한 판단은 프로젝트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 단순히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언제나 합리적으로 작동할 규정을 만드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법 개정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해결이 요원해질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부당한 자격 제한이 설정될 때마다 이를 지속적으로 반박하고 공론화하는 것이 현실적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조경 분야 내부 문제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손실을 초래하는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 또한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분야의 대응 방식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런 분야들과 협력해 공통적인 개선 방향을 모색하고, 필요할 경우 공동 대응하는 것도 효과적 전략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참가 자격 기준을 명확하게 정하기 위한 플로차트를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반복되는 논쟁을 줄이고 실무 운영 체계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것이다.
제안
· 참가 자격과 당선작의 계약 요건을 분리해 공모의 포용성을 높이되 전문성은 계약 단계에서 보완할 수 있도록 한다.
· 특정 분야를 배제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질적 저하와 사회적 손해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해 공론화한다.
· 법 개정보다는 발주 기관과 운영위원회가 참가 자격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대응하고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분야와 협력해 개선 방향을 모색하고 필요하면 공동 대응한다
심사의 공정성
공정한 심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쉽지 않지만, 여기에서는 ‘공정하지 못한 심사’를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설계안의 우수성과 무관하게 평가하거나 심사위원으로서의 전문성이 부족해 당선작의 선정을 방해하는 경우로 한정해 논의하고자 한다.
심사위원이 공정했는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건 쉽지 않다. 결국 심사는 개인의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완전한 공정성을 보장하거나 불공정성을 100% 제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실적 대안은 무엇일까. 대부분 심사위원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는 심사 과정을 공개하거나 녹화‧생중계하는 방식처럼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가 부담스럽고 껄끄럽게 만들어 불공정한 심사가 발생할 가능성을 낮추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여기에 더해 심사위원의 심사 패턴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정 심사위원이 반복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의 편향된 평가를 한다면 이를 데이터로 축적해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불공정한 심사가 단발성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 패턴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걸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특정 심사위원이 의도적으로 특정 안을 밀어주거나 배제하는 경향이 감지되면 공론화하거나 심사위원 선정 기준을 조정하는 등의 대응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시스템은 LH와 서울시처럼 공모를 다수 운영하는 기관 단위로 운영할 수도 있고, 조경‧건축 설계 분야 전반에서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도 있다. 공식적인 운영이든 비공식적인 방식이든 심사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면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심사위원 제척은 불공정성을 줄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지만 역으로 전략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제도로 작동하기 어렵다. 블라인드 심사의 실효성도 높지 않다. 설계안 제출 과정에서 익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발표할 때 얼굴을 보지 않는다고 공정성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만약 특정 안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발표장에서 얼굴을 가린다고 해서 이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사전 접촉 여부를 증명하는 것도 어렵다. 누가 설계한 것인지 알고 싶다면 다른 경로로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블라인드 심사는 실효성이 크지 않은 형식적 절차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제출작의 익명성을 유지하는 건 중요하지만, 발표 시 얼굴을 못 보게 하는 블라인드 심사는 특히 국내 조경 설계공모에 비추어 본다면 공정성 향상에 그다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누가 낸 안인지 알고 싶다면 그걸 발표장에서 얼굴을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전 접촉이 있었는지는 누군가의 자발적 고발이나 수사 없이 알아낼 방법도 없다. 아무 정보도 받지 않았더라도 딱 봐서 누구 것인지 유추할 수도 있는데 얼굴을 안 보고 심사를 한다는 건 요식 행위 아닐까.
또한 공정성을 위해 토론을 배제하는 방식은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토론 없는 심사는 심사위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며 논의하는 과정을 차단하고 오히려 개별 심사위원이 자의적으로 점수를 조정하는 걸 용이하게 만든다. 애초에 토론을 배제한 이유는 특정 심사위원이 지나치게 강한 의견을 피력하면서 토론을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토론 문화를 성숙하게 만들고 토론 과정을 공개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토론이 사라지면 오히려 심사위원들은 개별적 점수 차등을 통해 본인 의견을 반영할 수 있고 설계자 역시 이러한 평가에 대한 설명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제안
· 심사 과정을 공개하고 심사위원의 심사 이력을 기록하고 아카이브해 패턴을 분석할 수 있도록 한다.
· 심사위원 제척, 블라인드 심사, 토론 없는 투표 방식은 실효성이 낮거나 부작용이 클 수 있으므로 지양한다.
의사 결정 방식
단계별 평가 방식은 심사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번의 투표로 당선작을 정하는 방식과 여러 단계에 걸쳐 심사를 진행하는 방식 중 어떤 것이 더 신뢰도 높은 결과를 가져올까. 만약 심사위원 개개인의 판단이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 독립적 사건이라면, 한 번의 투표와 여러 단계에 걸친 투표 방식 사이에 오류 확률 차이는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단계 심사를 거칠수록 토론을 통해 추가적 정보가 축적되기 때문에 더 신중한 의사 결정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때 중요한 점은 단계별 평가를 어떻게 설계하느냐다. 좋은 안이 탈락하는 확률을 최소화하는 것이 목표라면 접수 합산 방식보다 순위 결정 방식을 적용해 여러 차례 걸쳐 탈락자를 제외해 나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반면 상위권 내에서 최적 안을 선정하는 것이 목표라면 1차에서 넓은 범위를 선정하고 최종 라운드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방식이 적절할 수 있다. 이런 다단계 심사는 이미 여러 공공 기관의 공모 심사에서 활용되고 있다.
다단계 심사의 한계는 초반에 탈락한 안이 후반 라운드에 진출한 안 보다 충분한 설명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만약 공사 예산이나 법규 위반 등을 검토하는 사전 기술 심사가 별도로 없고 개별 안을 검토할 시간이 짧다면, 자칫 현실적으로 구현이 어려운 안이 당선되거나 좋은 안이 예선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와일드카드’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심사위원당 한 번씩 탈락한 안을 다음 라운드에 진출시킬 수 있도록 하면 심사의 효율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소수 의견이 충분히 검토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단 와일드카드는 최종 라운드에서는 사용할 수 없으며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단계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특정 심사위원이 강하게 지지하는 안이 조기에 탈락하는 것을 방지하면서도 심사 과정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다단계 심사의 목적은 심사위원이 기존 견해를 바꾸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판단 속에서 놓친 부분을 보완하고 더 정밀한 평가를 내릴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있다. 따라서 심사위원 간 토론뿐 아니라 설계자와의 질의응답 과정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제안
· 접수 합산보다는 다단계 탈락자 제외 심사 방식을 채택한다.
· 와일드카드 제도를 활용해 소수 의견이 쉽게 묵살되지 않도록 보완한다.
· 의견 피력보다는 질문과 답변 형식의 토론을 진행한다.
당선작의 구현 보장
설계공모를 통해 당선된 안이 제대로 구현되는 것은 당연한 원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심사에서 선정된 계획이 실시설계 단계에서 대폭 수정되거나 심지어 공모 과정에서 제시된 핵심 아이디어가 사라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 발주처 관계자가 “설계공모로 뽑아 놓으면 발주자가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어서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설계공모가 아니라 제안서 평가를 통해 선정된 경우, 발주자가 설계자의 원안을 훨씬 더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다는 점이 공공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설계공모의 본래 취지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경우다.
실제 사례로 얼마 전 한 공모전에서 당선작이 결정된 후 발주처가 당선안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담당자는 “어차피 당선작이 다 바뀔 건데, 괜히 발표했다가 나중에 민원이 발생할까 봐 그렇다”고 답했다. 설계공모가 결과적으로 의미 없는 절차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제안
· 공모 단계에서 예산 타당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현실적 범위 내에서 계획하도록 한다.
· 당선작 변경 사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요 수정 사항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설정한다.
· 설계공모를 통해 선정된 안이 지나치게 변형되지 않도록 당선자의 설계 의도를 반영할 수 있는 절차를 제도적으로 보완한다.
정상화냐, 활성화냐
설계공모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만 단순히 공모 숫자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공모를 통해 선정된 안이 실제 공간으로 실현되기까지 우리는 과정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공정한 심사, 합리적인 의사 결정 방식, 그리고 참가 자격의 개선이 이루어진다면, 설계공모는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누가 설계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안이 가장 나은 해법을 제시하는가’다. 참가 자격의 불필요한 제한을 완화하고 공모가 특정 분야의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이 아니라 더 나은 공간을 만드는 도구로 기능하도록 해야 한다.
공모 제도는 우리 사회가 공공 공간을 조성하는 방식 자체를 반영한다. 만약 공모가 단순한 형식적 절차로 전락한다면 결국 공공 공간의 질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공모 활성화를 논하기 전에, 먼저 공모 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 심사의 공정성을 강화하고, 합리적 의사 결정 구조를 마련하며, 당선작의 구현을 보장하는 장치를 도입하지 않는다면, 공모의 확대는 오히려 문제를 약화시킬 뿐이다. 공모 제도가 정상화된다면 공모의 가치가 다시 주목받을 것이고, 공모 기획과 운영을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것만으로도 활성화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이해인은 조경설계사무소 HLD 소장이다. 디자인을 통한 주장과 혁신이라는 철학 아래, 공간적 문제와 도전 과제에 대한 핵심적 개입 제공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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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설계공모, 결국은 심사위원의 문제
한국에서는 공공사업 기준으로 매년 천여 개에 달하는 건축과 조경 설계공모가 시행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설계공모를 하는 이유는 공공시설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다. 한국의 모든 건설 산업을 주관하는 국토교통부는 아예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이라는 법을 따로 만들어 공모의 목적과 절차를 세세하게 정하고 있다. 하나의 공공시설이 설계공모를 통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사업 기획부터 사전 검토, 설계공모 운영, 심사, 당선작 선정, 계약, 각종 심의와 인증, 시공사 선정, 그리고 설계 의도 구현까지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이다. 그런데 그 과정 중 하나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업계 대부분은 물론 정부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데 도무지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심사의 공정성 문제다.
2024년 대한건축사협회(이하 건축사협회) 공정건축설계공모추진위원회가 실시한 건축사 대상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무려 93.9%가 설계공모의 불공정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물론 낙선한 입장에서 본 물증이 없는 심증에 따른 착각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 이건 어떤가.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설계공모에 대한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수집해 오고 있는 설계경기기록원 스코어러의 자료를 분석해 보면 비정상적인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선 조달청 공모전을 보자. 지난 2023년 조달청에서 발주한 공모전 85개 중 36%에 달하는 31개를 상위 네 개 설계사무소가 독점했는데, 설계비로만 따지면 전체 합계 금액의 절반이 넘는다. 이게 얼마나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인가 하면, 비슷한 시기 총괄건축가 제도하에 공모전 운영위원회를 조직해서 상대적으로 공정성에 정성을 기울인 서울시의 27개 공모전에서는 그 어느 사무소도 두 번 이상 당선된 사례가 없다. 조달청뿐만 아니라 특정 지역의 공모전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인구 60만 명이 넘는 모 도시는 설계비 기준으로 공모전의 60%를 한 설계사무소가 독점하고 있다. 오죽하면 시의회 의원이 이를 문제 삼아 언론에 제보까지 했을까. 전국의 지자체에서 발주하는 공모전을 이런 관점으로 조사해 보면, 소위 그 지역의 절대 강자가 없는 지자체를 세는 편이더 빠르다.
객관적인 데이터만 보아도 이런데, 공모전 심판과 선수로 뛰면서 겪는 현실은 훨씬 더 심각하다. 참가 업체가 심사위원에게 사전 접촉을 시도하는 것쯤은 당연한 관행이 되었고, 오히려 찾아오지 않으면 성의가 없다며 심사위원이 괘씸해 하기도 한다. 심지어 앞서 말한 설문조사에서 11.8%의 응답자가 역으로 심사위원으로부터 금품 요구를 받아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1,200명 가까이 답한 설문조사에서 이는 적지 않은 숫자다. 제일 곤란한 상황은 지인을 통한 간접적인 사전 접촉이다. 대형 설계사무소일수록 협력 관계로 일하는 작은 설계사무소들이 많은데, 그렇게 네트워크를 넓게 펼쳐놓고 보면 어떤 심사위원이든 학연이나 지연으로 반드시 엮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한두 단계 꺾여 접점이 파악되면 ‘나를 봐서라도 ○○○ 한번만 만나주면 안 되겠니’ 같은 인정에 호소하는 로비가 펼쳐진다. 사전 접촉을 한 사람이 공모전 참가 당사자가 아니기에 직접 증거가 없기도 하거니와, 인간관계가 걸려 있어 아무리 청렴하고 올곧은 심사위원일지라도 웬만해선 발주 기관에 신고하기가 매우 힘들다. 행여 마음이 독한 심사위원을 만나 사전 접촉 시도가 신고로 이어지더라도 그 업체는 해당 공모전의 심사 대상에서만 제외될 뿐, 추가적인 제재 조치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최근 서울시 건축사회가 사전 접촉을 시도한 건축사사무소에 대해 단순 경고만으로 징계를 마무리해서 고발 당사자를 허탈하게 만든 사건도 있었다. 그나마 잡기 쉽다는 ‘주는 쪽’에 대한 대처가 이 모양인데, ‘받는 쪽’에 대한 감시나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기에, 이미 뭔가를 받는 시점에서는 양쪽 모두 한배를 탄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심사 중 휴식 시간에 로비 금액을 올려달라고 딜을 치는 배짱 좋은 심사위원을 봤다는 목격담도 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진 걸까? 많은 이가 지금은 없어진 턴키 제도가 많은 것을 망쳐놓았다고 입을 모은다. 건설사의 막강한 자금력을 이용해 수십 억의 돈이 공모전 영업비로 들어가던 시절,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다들 한두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심사 당일 새벽 어느 집에 불이 켜지나 지켜보다가 심사위원 당첨이 확인되면 동선을 따라다니며 무슨 첩보 작전 수행하듯 밀착 로비를 했다는 둥, 최고급 노트북에 피티 영상을 띄워서 보여주고는 마치 실수인 듯 연구실에 노트북을 그대로 놓고 나왔다는 둥. 건설사의 그런 일을 도맡아 했던 인력들이 턴키가 없어지자 대형 설계사무소로 자리를 옮겼고, 그간에 만든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예전 건설사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무실을 다니며 업계 이면의 규칙을 배운 직원들이 독립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로비를 일삼았고, 또 민간 경기 악화로 설계공모 전체가 과열되면서 사전 접촉 정도는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금액대 낮은 공모전으로까지 번져 지금과 같은 진흙탕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물론 그 한편에는 심사를 업으로 삼는 교수들이 마치 하늘이 준 특권인 양 특정 안을 밀어주는 대가로 한몫 챙기는 것을 당연시해 온 분위기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어떤 방법이 있을까. 근본적으로 설계공모와 관련된 불공정 행위에 대해 제대로 된 감시 시스템과 처벌 규정이 없는 것이 문제다. 건축사협회는 자체적인 윤리 규정을 통해 건축사에 대한 징계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태생적으로 협회의 주 목적이 회원의 권익 보호이기에 앞서든 사례처럼 실질적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더구나 심사위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교수에게는 건축사 윤리 규정과 같은 통제 수단이 없다. 그나마 2023년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 개정으로 심사 행위가 청탁금지법의 공무수행사인, 즉 민간인이라도 공무원에 준하는 법의 처벌이 가능한 행위에 해당된다는 규정이 신설되었지만, 별다른 감시나 적발 수단이 없는 현실을 고려하면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바꿔 말하면 제대로 된 처벌이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법 체계를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또 시급한 방법 중 하나는 가능한 한 많은 공모전에 능력 있는 건축 전문가를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게 만드는 일이다. 종종 심사위원의 전문성과 공정성이 늘 같이 가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 반대, 즉 전문성이 없고 공정하기만 한 심사위원보다는 더 나은 심사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전문성이 부족하다면 공정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좋은 안을 선택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매한가지다. 무엇보다 공정성은 세평이나 소문 빼고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지만, 적어도 전문성은 몇 가지 측정할 객관적 기준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심사위원의 자질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직 공표되지 않아 구체적으로 밝히긴 어렵지만, 현재 모 기관이 전문성을 갖춘 심사위원 후보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기초 자료 수집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 물론 이 데이터베이스가 곧바로 심사위원 선정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런 시도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처음이고, 공청회나 관련 단체의 의견 수렴을 거쳐 몇 가지 추가적 보완을 거친다면 검증된 심사위원 풀을 만드는 초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계기로 2024년 설계공모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위촉 횟수가 7회 이상인 225명의 심사위원 면면을 조사한 적이 있다. 그들이 그해 설계공모의 약 4분의 1을 심사했는데, 그중 60%에 달하는 심사위원의 건축 작품이나 설계 관련 논문, 전문 분야 등을 공개된 매체나 데이터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데이터베이스가 제대로 구축된다면 이런 일은 점차 줄어들 것이고, 심사위원 위촉에 대한 최소한의 객관적 근거가 마련될 것이라 기대한다.
제도를 개선하는 또 다른 방법 중 하나는 정보의 공개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다.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은 2014년 첫 제정 이후 지속적으로 설계공모와 관련된 정보를 더 많이 공개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어 왔다. 투명성이야말로 공정성의 바탕이라고 본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점이 부족하다. 요즘 들어 소위 ‘손을 타는’ 공모전들은 운영위원회 단계부터 작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운영된 공모전은 설계공모 지침서에 운영위원의 명단을 공개하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공모전은 그렇지 않다. 사소하게 보이는 이런 정보도 숨기고 싶어 하는 쪽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심사 과정의 중계도 마찬가지다. 현행 지침에 따라 실시간 공개는 의무지만 그 취지가 무색하게 제출된 공모안을 보여주지는 않고 심사위원의 표정만 내내 보여주거나 민감한 부분에서는 음소거를 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하루빨리 지침이 개정되어 명확하게 각각의 안을 식별할 수 있게 중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심사가 끝나면 심사평은 물론 실명이 명기된 표결 용지와 입상작의 투시도, 평면도와 같은 기본 도면까지 지정된 홈페이지에 공개되어야 한다. 현재 지침에는 심사위원의 실명 공개 의무도 없고 입상작은 막연히 이미지만 공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 데다 공개하지 않을 때의 처벌 조항이 전무해서 건축행정시스템 세움터 기준으로 결과가 미등록 상태인 공모전이 전체의 30%에 육박한다. 발주처 입장에서는 공개했을 경우 발생할 민원이 피곤해서 그랬으리라 짐작이 되지만, 이런 투명하지 못한 행정이 불공정의 가능성을 키우는 씨앗이 되기에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심사위원 비공개를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이런 주장에 힘입어 2023년 지침 개정부터 설계비 20억 원 이상의 설계공모는 심사위원을 공모안 제출 이후에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심사위원 비공개 주장의 핵심은 비공개 기간을 최대한 늘려 심사위원과 참가자가 접촉할 기회를 차단하자는 것이다. 극도로 혼탁한 현재의 설계공모 판을 생각하면 언뜻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이것 또한 맹점이 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심사위원의 정보가 비공개의 망을 뚫고 새어나갈 염려도 그중 하나지만, 더 큰 문제는 전문성 있는 심사위원의 비율 자체가 지나치게 낮은 현실에서 참가자로부터 그래도 괜찮은 공모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다는 점이다. 당장 각각의 설계공모를 누가 봐도 공정한 절차에 따라 운영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능력 있는 설계자를 공모전으로 끌어들여 결과적으로 더 나은 공공시설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도 정보를 숨기는 방향으로 가면 누군가는 결국 시스템의 허점을 찾아낼 것이고, 이는 또 다른 불공정과 불평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당장은 어렵고 돌아가더라도 가능한 모든 정보를 공개하기 시작하면 그토록 요원해 보이던 자정 작용이 서서히 작동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미리 나눠준 안도 제대로 안 보고 와서 토론을 기피하거나 하던 말과 관계없는 엉뚱한 안을 찍는 이상한 심사위원의 수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심사위원의 권리는 근본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국민이 낸 세금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일이고, 결국 그 선택의 결과는 공적 자원이 국민 생활에 기여하는 방식과 정도를 결정짓는다. 설계공모 심사에 임한 심사위원은 소신을 갖고 양심에 따라 자신의 전문적 견해를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평가의 근거를 밝히고 당선작으로 지지하는 안을 표명하는 것은 위임받은 권리를 행사하는 자로서 당연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촘촘한 인적 네트워크로 엮여 있는 건축과 조경계에서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참가자가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는 발표 심사인 경우 그 괴로움은 더 심하다. 물론 요즘 들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블라인드 발표가 널리 퍼지면 상황이 좀 나아지긴 하겠지만, 그 이전에 심사라는 일 자체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적합한 일이 아닌 것이다. 또 한 가지 덧붙이면, 다른 심사위원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꺼려서는 안 된다.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에서는 심사 시 ‘충분한 토론’을 강조하고 있는데, 여기서 토론이란 토의와는 달리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상대를 설득하는 매우 적극적인 행위를 말한다. 즉 누군가에 의해 설득을 당한다는 것은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럴 경우 집단 지성을 통해 더욱 올바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커진다. 목소리 큰 사람이 심사에 들어가면 분위기에 휩쓸린다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걱정이 앞서는 사람은 스스로 심사위원의 자질이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한국의 설계공모는 개수에 비해 능력 있는 심사위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주장도 있다. 몇 가지 알려진 사실을 근거로 얼추 따져보기만 해도 꽤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심사위원의 자질 문제와 함께 공모전 제도 전반에 대해서도 같이 고민해 보아야 할 이유다. 어수선한 나라 사정으로 뭐가 됐든 추진 동력이 부족한 지금, 쉽지 않은 일이긴하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보유하고 있는 괜찮은 심사위원들이 제대로 활용되고 있는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그들을 적절한 설계공모 심사장으로 가능한 한 많이 보내는 일은 제도를 갈아엎는 일보다 훨씬 쉬운 편에 속한다. 그래서 정말 누구든 도전해 보고 싶은 설계공모의 수를 늘리는 것, 그것이 당장 한국 공공시설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라 믿는다. 원래 설계공모라는 제도의 취지가 바로 그것 아니었는가.
이승환은 서울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아뜰리에17과 해안건축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09년 런던으로 이주해 메트로폴리탄대학교에서 MA(Master of Arts) 과정을 마치고 다양한 경험을 쌓은 뒤 2014년 귀국해 파트너 전보림과 함께 개소했다. 건축 설계를 하면서 동시에 글쓰기를 통한 현실 개선과 건축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그래도 건축』, 『건축가 아빠가 들려주는 건축 이야기』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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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자격을 논할 자격
과제
심사는 일종의 대의(代議) 과정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어려움들은 대체로 누가, 누구를 대신하여 논의하고 결정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단순화하자면, 공공의 장소가 복무할 대상은 시민 일반이고 전문 집단은 그들의 대의자로 선출되어 계획안에 대한 심사를 수행하는 것이나, 현실에서는 그 사이에 수많은 간극이 존재한다.
시민 사회가 충분히 배양되지 않았던 과거 한국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설계공모는 주로 국가를 표상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심사위원의 역할 또한 그러한 목표로 수렴되었다. 지금과 같이 작고 일상적인 공공의 영역까지 디자인 경합을 통해 계획하는 것은 불과 한 세대 전에 시작된 일이다. 1990년대 지방자치제도의 전면적 시행에 따라 점차 늘어난 설계공모는 2019년 시행 의무 기준액을 설계비 2억원에서 1억원으로 하향 조정하면서 그 시행 건수가 두 배 가까이 확대되었다. 과거에는 그 공간들을 향유할 시민들에 앞서 행정의 편의와 기관장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발주 기관 내부에서 심사위원이 위촉되기도 했으나 그러한 경향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가격 입찰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좋은 품질의 설계안으로 공공의 공간을 만들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한국 사회와 행정 및 전문가 집단에게는 그만큼의 설계공모 심사를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소화해 내야한다는 벅찬 과제가 부여됐다.
제도
국토교통부의 설계공모 운영 지침은 최근 몇 년간 개정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심사와 관련된 조항에 개정이 집중되고 있다. 이처럼 빈번하게 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현실의 심사에서 여러 문제와 한계가 발견됐다는 걸 말해준다. 가장 최근의 변화는 2023년 4월 개정안(국토교통부고시 제2023-180호)으로, 1) 심사위원 사전 공개 제한 가능(설계비 20억 이상일 경우), 2) 심사 과정 실시간 중계 의무화, 3) 심사 횟수 총량제 등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각주 1)
이 중 2번 항목은 지난 2017년 8월 개정된 평가사유서, 투표 및 채점 내역 등 심사 자료 전반에 대한 공개 규정을 더욱 확장한 것으로, 현재의 기술적 환경에서 고려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을 도입한 것이다. 평가 자료 공개는 투명성 및 심사의 질적 수준 제고 등 여러 긍정적 효과를 의도하며 큰 기대를 모았으나, 오히려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실망스러운 심사의 이면이었다. 빈칸 또는 ‘의견 없음’으로 기재된 평가사유서들이 SNS에 공유되며 그 부실과 무성의함이 공분을 산 것이다. 개정 2년 후 조달청은 평가사유서의 최소 분량 작성을 의무화하는 등 조치를 취했지만, 평가 내역의 내실화가 어느 정도까지 개선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전히 내역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남아 있으며 공개를 강제하거나 사유서의 수준을 일정한 정도 이상으로 높이게 하기 위한 확실한 기준과 수단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가 자료에 대한 판단은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서 공개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좁게는 응모자에게 피드백 용도로 제공된다면, 굳이 누구나 접근 가능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해 함축적으로 작성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 일반에게 대의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공해야 하는 것이라면, 대부분의 평가사유서는 함량 미달의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심사 과정 실시간 중계의 도입은 이 점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대의자로서 전문가는 비전문가인 일반 시민에게 어떤 계획안이 당선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가 가능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나, 그런 경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평가 내역과 마찬가지로 실시간 중계를 수행하지 않는 다수의 공모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을 강제하거나 논의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뾰족한 방법을 지금으로선 찾기 어렵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장영호,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 개정안’, 4월 1일 시행”, 「건축사신문」 2023년 3월 30일.
정평진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설계경기 기록원인 스코어러(www.scorer.co.kr)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2020 ‘사회적 건축: 포스트코로나 젊은건축가 공모’에서 대상을, 2022년 『환경과조경』 ‘조경비평상’에서 가작을 수상했다. 건축 디자인 전문지의 에디터로 일했으며, 여러 매체에 도시와 건축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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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공공건축 설계공모 이후, 이상과 실제
2022년 10월 7일 대학로에 위치한 공공그라운드 001스테이지에서 이 글 제목과 같은 타이틀을 건 세미나를 개최했다. 건축공간연구원이 수행한 ‘설계공모 이후 건축 생산과정 모니터링을 통한 공공건축 제도 개선 연구’(각주 1) 결과를 공유하고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홍보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준비한 좌석이 부족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세미나에는 건축가뿐 아니라 지자체 공무원도 다수 참여했으며, 지정 토론자뿐 아니라 플로어에서도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공공건축 설계공모로 꿈꾸는 이상과 실제의 간극에 대한 관계자들의 높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에도 새만금공항 같은 국가 기반 시설, 국립민속박물관 등의 대규모 문화 시설, 노들섬 예술섬 등의 도시 랜드마크뿐 아니라 주민센터와 어린이집 같은 소규모 공공 시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의 설계공모가 진행되고 있다. 설계공모의 대상은 개별 건축물에 그치지 않는다. 3기 신도시 마스터플랜, 개포 구룡마을 기본구상과 같은 도시설계, 도시 외부 공간과 공원 역시 설계공모 대상이다. 2020년 이후 공공 부문에서만 건축 설계공모 건수가 연간 1,000여 건에 이른다.(각주 2)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이 제정된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조달정보 개방 포털에 공고된 설계공모는 총 5,947건에 이른다. 우리 주변에는 과연 수천 개의 우수한 공간이 만들어졌는가?
이상
다수의 문헌이 최초의 설계공모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이며, 중세 시기에도 성당 설계를 위해 설계공모를 개최했다고 언급한다.(각주 3) 르네상스의 대표적 건축물인 브루넬레스키의 플로렌스 성당 돔 역시 설계공모의 결과다. 이후 절대 왕정 시기에는 왕립 광장이나 궁전, 18세기 이후 근대 국가 시기에는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관청이나 공공시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과 북미 주요 국가의 중요 시설이 설계공모의 대상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 개발 과정에서는 국가와 도시의 랜드마크 건립을 위한 설계공모가 활발하게 개최됐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지배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저축은행(1932), 총독부박물관(1935), 조선은행 앞 분수지(1939)(각주 4) 등 주요 시설과 도시 공간을 대상으로 한 설계공모가 실시됐다. 해방 이후 1960년대부터 정부종합청사(1967~1968), 여의도 국회의사당(1968), 세종문화회관(1973) 등 국가의 주요 청사와 문화 시설 디자인을 위한 설계공모가 개최됐다.(각주 5)
역사적으로 설계공모는 중요한 대규모 프로젝트에 주로 적용됐으며, 공모를 통해 선정한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디자인은 국가와 도시의 경쟁력과 문화적 저력을 보여주며 전 세계의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한국도 1995년에 공모 방식 시행을 제도화한 ‘건설기술관리법 시행령’(각주 6)에서 그 대상을 “상징성ㆍ기념성ㆍ예술성 등 창의성과 새로운 기술 또는 특수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건설공사”로 규정한 것을 보면, 제도 도입 초기 공모의 목적은 상징적이고 기념비적인 건물을 건립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임유경·배선혜·박태홍·양은영, 『설계공모 이후 건축 생산과정 모니터링을 통한 공공건축 제도 개선 연구』, 건축공간연구원, 2022. 이 글의 설문조사, 사례, 개선 방향 부분은 보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으며, 표와 다이어그램은 보고서의 그림을 재편집한 것이다.
2. 조달정보 개방 포털 용역입찰 공고내역에서 확인한 설계공모 공고 건수는 2020년 1,018건, 2021년 1,093건, 2022년 1,121건이다.
3. The Association of Finnish Architects, Dreams and Completed Projects: 130 Years of Finnish Architectural Competitions , 2006 외
4. 서영애·심지수, “일제강점기 광장의 생성과 특성 - 조선은행 앞 광장을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지』 45(4), 2017, pp.11~22.
5. 엄운진·임유경·차주영, 『1950년대 이후 한국 주요 공공건축물 조성과정의 사회적 담론 연구』, 건축도시공간연구소, 2017.
6. 건설기술관리법 시행령(대통령령 제14744호, 1995. 8. 4., 일부 개정) 제38조의2(건설기술의 공모대상)
임유경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조교수로 도시와 건축, 제도와 실제, 연구와 설계의 중간 영역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대학원, 국립고등파리벨빌건축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도시설계학 과정에서 도시계획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건축공간연구원에서 도시·건축 제도와 가로 공간, 공공 건축, 역사 보존·관리 연구를 수행했다. 기획부터 설계, 시공, 운영까지 공공 건축 생산 과정에서 다양한 주체의 역할을 추적하고 이용 현황을 살펴본 『좋은 공공건축 1~4』(건축공간연구원)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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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 원종호
제7회 젊은 조경가
보이지 않는 조경. 이 말은 다소 모호하고 모순적일지도 모른다. 조경이라는 장르는 보이는 걸 구현하고, 그래서 결국 보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조경이란 무엇이며, 이를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가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조경가 원종호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름을 적극 알리는 걸 한사코 마다하는 대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왔다. 내향적인 성격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조경에 임하는 태도는 결코 소극적이지 않다. 그는 보이지 않는 조경을 통해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되는 조경의 편견에 도전하고,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걸 증명하고자 노력한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디자인 언어를 덧대는 대신 명확하고 직관적인 구조와 절제된 디자인 언어를 정리해 정제되고 편안한 풍경을 구현한다. 그래서 다소 심심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오히려 완결성과 완성도를 갖춘 공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조경의 가치를 역설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 모두는 혼자서 결코 할 수 없었다고. 수상 소감에서 말하듯, 동료와 함께 그려내는 일의 가치를 아는 그는 동료와 스승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려 깊은 조경가이기도 하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자세로 동료와 설계를 다루는 그가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을 다섯 가지 단상과 에세이, 인터뷰로 담아냈다. 비슷한 길을 함께 걸어온 동료와 지지와 존중을 아끼지 않는 동반자의 글을 통해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그의 다양한 면모를 조망했다. 이번 지면이 결코 자신을 드러내는 법 없이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는 그를 새로 알게 되거나 더욱 깊은 이해를 제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자료제공 원종호
보이지 않는 조경의 길 _ 원종호
보이지 않는 조경의 다섯 가지 단상 _ 원종호
완벽한 동화를 꿈꾸는 디자인 _ 김모아
랜드스케이프 플레이메이커 _ 정욱주
터를 그리는 난초 _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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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 원종호] 보이지 않는 조경의 길
나와 나의 설계를 설명하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 조경가의 보이지 않는 조경’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디자이너는 각자의 생각과 일상을 표출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홍보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시대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다. 조용히 작업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고 작업물을 홍보할 재주도, 적극성도 부족하다. 나와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이하 JWL)의 작업은 내 성격과 묘하게 비슷하다. 조형적 혹은 개념적으로 설계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프로젝트도 없다. 다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작업물이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조경은 심심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다른 조경가의 작업에 비해 명확하게 드러나는 조형이나 개념이 없다고도 한다. 내 작업을 규정하는 포인트를 나 역시도 짚어내기 쉽지 않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설계의 비가시성은 내가 가고 있는, 가고자 하는 조경설계의 방향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보이지 않는 조경, 하지 않은 듯한 조경, 원래 있던 듯한 조경’ 등의 어휘로 말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조경은 매우 높은 수준의 설계적 완결성 없이는 획득하기 어렵다. 요컨대 보이지 않는 조경은 높은 설계적 완성도의 역설적 표현이다.
남들보다 좀 더 크고, 좀 더 화려하고, 좀 더 눈에 띄는 풍경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동시대 건설 산업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수년간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좀 더 가시적인 방식의 조경을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 많은 설득과 성공, 때로는 좌절을 겪었다. 우리 생각에 동의했던 사람보다는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덤덤하게, 그리고 꾸준히 내가 지향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을 해 나가고 싶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조경을 구현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가로 성장해 나가고 싶다.
편안한 풍경 만드는 법을 배우다
학부 시절부터 막연하지만 설계가가 되고 싶었다. 다만 조경설계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석사 시절부터다. 졸업 후 대학원 석사 과정의 지도 교수에게 합리성에 입각한 조경계획의 기본을 배웠고, 휴학 중 일했던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에서 조경설계 실무를 익혔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던 그 시기에 설계관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의 첫 직장은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였다. 당시 김용택 소장의 곁에서 직간접적으로 듣고 경험했던 것들이 조경가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사무실에서 대안을 고민하거나 현장에서 빠르게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 그는 입버릇처럼 늘 편안한 풍경, 억지스럽지 않은 풍경을 강조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일을 배우다 보니 어느새 그가 만든 풍경이 제일 편안하게 느껴졌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당시 나는 호암미술관의 희원을 참 좋아했다. 뭐 하나 거스르지 않는 편안한 풍경, 절제미가 느껴지는 조형과 분위기 때문이었다. 희원 조성 당시 설계 PM이었던 김 소장을 통해 희원의 공사 도면집을 볼 기회가 생겼다. 편안한 희원의 분위기처럼 도면 집도 소박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편안한 풍경 이면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양의 도면, 아름다운 디테일, 높은 수준의 기술적 고민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편안하고 비가시적인, 즉 보이지 않는 조경은 역설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설계적 완결성 없이는 획득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설계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또 다른 프로젝트를 뽑자면 바로 경의선숲길 프로젝트를 꼽을 수 있다. 2013년 안계동 대표(동심원조경기술사무소)가 진행하던 경의선숲길 연남동 구간 설계 용역에 정욱주 교수와 함께 기본계획 실무진으로 참여했다. 조경계획 진행 과정에서 두 분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협의 과정을 어깨 너머로 목격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정말 많은 걸 배웠다. 대상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 범인이라면 그냥 지나칠 잠재력 있는 경관을 발굴해 이를 설계에 반영하는 방법,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편안한 공원 풍경을 만드는 설계적 해법 등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나의 머릿속을 살뜰히 채워주는 살아있는 지식 그 자체였다.
당시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의선숲길의 모습을 자주 상상했다. 너무 심심하지는 않을까, 너무 이상적인 생각 아닐까. 자문하며 혼자 걱정도 많이 했다. 준공 된 모습을 본 뒤에는 두 분이 그때 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깨닫고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는 서울의 대표적인 공공 공간이 된 경의선숲길 프로젝트는 여러 면에서 오늘날 나의 설계관을 구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직관적 설계로 만드는 공간 문화
설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설계의 명징성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설계의 개념, 배치, 구조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계가 중요하다. 말하는 개념이나 제안하는 이미지가 깊이 생각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하고 꼬인 설명은 아닌지, 장식적인 면에 치우쳐 원래 하려던 이야기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지 늘 경계한다. 요컨대 치장과 덧댐을 줄이고 본질과 직관에 가까운 설계를 지향한다.
또한 조경설계를 통해 구현된 공간이 공공성을 증진하고, 특별한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켜 우리 사회에 문화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공간을 직간접적으로 이용할 잠재적 사용자에 대한 파악에 많은 시간을 쓰며, 조형적으로 최대한의 완결성을 갖춘 공간을 만들기 위해 팀원들과 늘 고민한다. 공간의 수준은 동시대의 문화적 수준을 온전히 반영한다고 믿기에 우리 조경가도 문화인이라는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다.
묵묵히 나아갈 길
부족한 경력과 실력이지만, 내가 걸어온 길 그리고 걸어갈 길이 조경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으로 미치길 기대하며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좋은 설계를 통해 양질의 공간을 꾸준히 세상에 내놓고 싶다. 단편적인 프로젝트로 기억되는 대신 꾸준히 좋은 작업을 생산하여 조용하지만 묵직하고 내공 있는 조경가로 기억되고 싶다. 또한 조경설계에 대한 여러 편견을 깨고 싶다. 조경가는 재능 있는 사람만 해야 한다, 설계를 하면 야근과 철야는 필수다 등 근거 없는 이야기가 꽤나 많다. 이게 사실이 아니란 걸 나와 JWL을 통해 증명하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이 다름 아닌 이러한 편견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또래에 비해 특별한 재능이 있지 않았지만 디자인이 즐거웠고 열심히 노력해 설계를 업으로 삼았다. 스스로 야근을 힘들어 해서 업무 시간의 집중도를 최대화하고 야근을 지양하는 사내 문화를 만들어 왔다.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조경가들, 이제 막 조경설계에 뛰어든 주니어 조경가들, 설계가 내 길이 맞는지 오늘도 수백 번 고민하고 있을 조경학도 모두를 응원한다. 우리 모두 한국의 젊은 조경가다.
원종호는 서울대학교에서 조경학을 전공했다.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와 현대건설에서 설계와 시공 실무를 경험한 뒤 2017년부터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JWL)에서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크고 화려하며 눈에 띄는 조경보다는 보이지 않는 조경, 하지 않은 듯한 조경, 원래 있던 듯한 조경을 통해 완성도 높은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조용하지만 묵직하고 내공 있는 조경가로 기억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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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 원종호] 보이지 않는 조경의 다섯 가지 단상
원종호의 작품과 설계 철학을 살펴본다. 조경가 원종호가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의 구심점이 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다섯 가지 이야기를 구성했다. 직관적 개념과 간결한 구조, 사소한 생각과 조형의 가능성, 크래프트 디테일, 관습과 타성에 저항하기, 팀워크와 최적의 경로 찾기 순으로 소개한다.
1. 직관적 개념과
간결한 구조
이번 기회를 통해 작업해 온 프로젝트를 천천히 훑어볼 수 있었다. 나의 작업에 대해 스스로 정의했던 ‘보이지 않는 조경’이라는 다소 막연한 개념을 실제 프로젝트와 연결해 보니 몇 가지 단상으로 수렴됐다. 다만 이 단상들은 설계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원고 작성을 위해 짧지 않은 시간 고민하며 정리된 생각들을 말해보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조경에서 직관적이고 단순한 개념과 배치가 왜 중요할까. 궁극적으로 설계는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자 행위다. 그 과정에서 양질의 통찰과 많은 담론이 오간다 하더라도 결국 겉으로 구현돼 세상에 드러난 모습이 공공성을 높이거나 미적 감흥을 주지 못하면 사실 큰 의미가 없다. 혹자는 이를 설계 이론 및 담론에 대한 경시나 결과 지상주의로 비판할 수도 있다. 다만 10여 년간 실무를 하면서 느낀 건 조경설계 분야에는 피상적인 개념과 장식적인 디자인이 꽤 많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태어난 결과물의 수준이 생각보다 아쉽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결과물로서 완성도 높은 공간을 만드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 그 과정에서의 개념과 배치 및 구조 등은 최대한 간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이해가 쉬운 직관적 개념과 함께 명확한 배치와 구조를 갖춘 디자인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방식을 지향한다. 물론 직관적 개념과 배치가 큰 고민 없이 즉흥적으로 나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양한 리서치와 수많은 고민을 통해 설계안이 피상적이지는 않은지, 혹여나 장식적인 측면에 너무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끊임없이 검토한다. 검토 후 안목과 완성도의 관점에서 그 디자인이 목표하는 수준에 다다랐다고 판단되는 순간, 클라이언트에게 우리의 생각을 가장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며 디자인의 예봉이 꺾이지 않은 상태로 건설적인 협의를 통해 프로젝트를 만들어 나간다.
JTBC 상암동 사옥 공개공지와 공공 보행통로
앞서 말한 생각을 잘 구현한 프로젝트가 바로 상암동 JTBC 구·신사옥 외부 공간이다. JTBC 구사옥과 바로 마주하고 있는 신사옥이 세워지며 뒷골목 흡연 공간으로 쓰이던 구사옥의 공개공지가 신사옥과 직결되는 가장 중요한 외부 공간으로 강제로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아가 인접 아파트 단지들과 초등학교를 연결하는 기존의 공공 보행통로가 구사옥과 신사옥 사이를 가로지르게 되면서 그 기능과 역할이 좀 더 강화될 필요가 있었다.
활용한 개념과 배치는 간단했다. 구·신사옥의 입구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언론인들의 다양한 토론과 휴식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외부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사옥과 큰 물리적 관계없이 외딴 오솔길처럼 존재하던 공공 보행통로를 구사옥의 공개공지와 접점을 갖도록 연결시킨 ‘마을길’을 통해 누구나 원활하게 오갈 수 있는 보행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구사옥과 신사옥 부지 사이에 존재하는 약 60cm의 단차는 자칫 기능성에 치우쳐 심심하게 정리될 수도 있었던 디자인에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 주었다. 단차를 극복하는 구간은 JTBC 구성원들이 편히 이동할 수 있는 보행 램프가 되기도 하고, 다양한 교관목 식재 기반으로 기능하는 기단과 화계의 틀이 되기도 했다.
예쁜 나무와 꽃으로 가득한 정원적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철저히 배치와 구조의 측면에서 설득하며 다양한 이미지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만약 구조적이고 직관적인 측면에서 프로젝트를 다루지 않고 피상적으로 흐르기 쉬운 꽃과 정원에 대한 담론을 개념과 배치의 중심에 두고 클라이언트와 협의했다면, 디자인 결정 과정에서 온전히 우리의 의도를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저리 휘둘리며 디자인을 끝까지 지키기 매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성수동 코너 50 공개공지
성수동의 코너 19, 25, 50 시리즈도 세월이 흘러 준공된 지 어느새 4년이 넘어간다. 특히 코너 50은 매우 직관적인 공간 구조로 설계된 프로젝트다. 기후변화는 이미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있다. 뜨거운 여름, 서울 도심에서 바깥을 활보하는 일은 재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도시민의 쾌적하고 안전한 보행을 위해 점점 더 많은 녹지와 그늘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생활권 공원의 추가 확보가 쉽지 않은 서울 도심에서 민간이 제공하는 공개공지는 쾌적한 도시 환경을 위한 녹지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수동 코너 50의 공개공지를 폭염을 피해 잠시 쉴 수 있는 도심 속 오아시스 공간으로 계획했다.
디자인의 입면적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단정한 수형을 가진 백합나무(튤립나무)를 그리드로 배치한 총림을 만들어 하부에 충분한 그늘을 드리우게 했다. 그늘이 집중되는 영역에는 무게감 있는 색상과 형태의 고흥석 통석 벤치를 가로와 수직 방향으로 여러 개 배치해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하더라도 시각적으로 서로 충돌 없이 수용할 수 있게 했다.
백합나무 하부에는 높이 0.4m 내외의 회양목을 최대한 빽빽하게 붙여 배치한 후 칼같이 전정해 박스형 생울타리로 만들었다. 약 30년 전, 원로 조경가 이교원이 도심지에 조성해 놓은 많은 공간이 이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데, 어찌 보면 그의 유산을 성수동에 소환한 셈이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때 이 공개공지를 ‘프랑스 정원’이라는 직관적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정한 나무 그늘과 박스형의 화단을 이야기했다. 나아가 이처럼 단순 간단한 구조는 성수동에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분위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당시 성수동 대부분의 외부 공간은 소위 자연주의 식재를 중심으로 한 조경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공간 전략이 매우 큰 환영을 받았다. 준공 이후 회양목을 정기적으로 박스형으로 칼같이 깎아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관리 측면에서도 유리한 점이 많아 사용자와 관리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공간이 되고 있다.
2. 사소한 생각과
조형의 가능성
일견 보잘 것 없는 조형이나 사소한 생각도 끊임없이 다듬고 정제하면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JWL은 프로젝트 설계를 시작하는 시점이 되면 각자의 다양한 생각과 스케치를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팀원들과 함께 브레인스토밍 시간을 갖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시점에 큰 고민 없이 가볍게 툭툭 던졌던 이야기나 즉흥적으로 그려냈던 거친 스케치들이 차후 디자인의 큰 방향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기도 했다.
조형의 완성도는 떨어지나 한 끗의 가능성이 보이는 대안, 혹은 매우 도전적이거나 반대로 매우 일반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끊임없이 다듬고 정리되어 나가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순간 조형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완결성을 지니게 되는 순간을 경험했다. 이 순간을 경험해 본 팀원들은 조경설계의 진짜 재미를 느낀 동시에, 본인의 실력이 계단식으로 상승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평소 팀원들이 가지고 오는 서투른 안이나 생각도 최대한 열린 자세로 듣고, 그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부도 근린공원 설계공모
제부도 근린공원 설계공모안(74~79쪽)은 사소한 생각들이 빛을 발한 프로젝트다. 횟집과 카페가 즐비한 제부도 상업 가로 한가운데 정사각형으로 자리하고 있는 3,000여 평 공영 주차장 부지를 근린공원으로 재설계하는 공모였다. 대상지를 방문했을 때 바다 방향으로 약 100m 정도 뻥뚫려있는 전망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답사 후 팀원들이 모여 각자 소회를 밝히고 아이디어를 나눴는데, 아주 간단하지만 인상적인 아이디어를 말하는 팀원들이 있었다. 바다 방향으로 대지를 살짝 들어 올리고, 들어 올린 수직의 벽면을 활용한 휴게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학생들이 즐겨 사용하는 소위 들어 올리는 설계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우리가 느꼈던 그리 넓지 않은 스케일감, 단순하지만 사뭇 강력해 보이는 팀원들의 스케치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디자인 발전 과정에서 우연히 화성시의 보석같은 해식 절벽을 알게 됐고, 이를 모티브 삼아 초기의 거친 제안을 정제해 나갔다. 결과적으로는 해변을 향해 약 2.5m 높이의 해식 절벽 구조물이 ㅁ자 형태로 공원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안을 제안했다. 시작은 다소 실험적이고 거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숨겨진 가능성에 집중하며 팀원들과 함께 디자인을 깎고 또 깎으며 정제해 나갔던 과정이 당선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성수 현대테라스타워 공개공지
성수 현대테라스타워 공개공지는 민간의 자발적 공개공지 개선 의지와 함께 성동구의 지원이 더해져 완성된 프로젝트다. 바텀업 방식으로 새로 조성된 성수동 내 첫 번째 공개공지로, 대상지는 폭 5m, 길이 약 100m의 긴 선형 공간이었다. 성수동의 힙한 분위기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전형적인 지식산업센터 유형의 공간이었다.
클라이언트와의 첫 번째 디자인 미팅 때, 디자인 대안 대신 잘 조성된 긴 선형 공간의 다양한 사례 사진을 보여줬다. 보통 여러 사례 사진을 보여줄 때는 우리가 미리 정한 선호안을 중심으로 클라이언트를 직간접적으로 설득한다. 하지만 당시 그다지 생각하지 않던 사례 사진에 클라이언트가 큰 호감을 표시해 조금은 의도하지 않은 방향에서 디자인을 시작하게 됐다. 클라이언트가 선호한 공간은 중국 어느 도시의 빌딩 앞 공지였는데, 동글동글한 모양의 플랜터가 긴 공간 안에서 반복되고, 이를 배경으로 키 큰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경관이 특징이었다.
원이라는 강한 기하학적 형태를 전면에 내세우면 자칫 어디선가 본 듯한 진부한 이미지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방문객의 편리한 사용보다는 기하학적 완결성에 치우치게 될 것 같아 고민이 많았다. 따라서 원을 적절히 사용하면서도 진부하지 않으며 다양한 시각적 형태를 선보이는 휴게 공간을 마련하는 합리적 설계가 필요했다.
원을 평행하게 나란히 두기도 하고, 엇갈려 두기도 하고, 겹쳐 놓기도 하면서 팀원들과 다양한 대안을 그리며 디자인을 정제해 나갔다. 결과적으로 한 개의 원, 두 개의 엇갈린 원, 세 개의 엇갈린 원이 반복되는 땅콩 모양의 앉음벽(플랜터)을 배치했다.
방문객이 앉아 쉴 수 있는 평평한 면을 확보하는 동시에 원형 플랜터의 유려한 조형미를 잘 살릴 수 있게 플랜터의 단면 프로파일을 여러 개로 구성해 모듈을 제작했다. 모듈 도면을 바탕으로 제작한 국산 포천석 플랜터를 현장에 설치해 식재 기반을 확보한 뒤 귀룽나무 10주를 적당한 간격으로 보기 좋게 심었다. 신록이 가장 빨리 찾아와 봄의 전령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하는 귀룽나무는 다양한 목적을 갖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시원하고 안락한 그늘을 드리워 주었다.
프로젝트는 우리의 의도와 살짝 다르게 시작됐지만, 클라이언트의 의견을 존중하고 이를 꾸준한 디자인 발전을 통해 정제해 나간다면 충분히 좋은 디자인으로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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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 원종호] 완벽한 동화를 꿈꾸는 디자인
조경가 원종호 인터뷰
서울대입구역 인근,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의 사무실이 있는 7층 대신 2층에서 원종호 소장과 만났다. 철재 문을 열자 길쭉한 테이블과 온 벽면을 따라 놓인 선반, 그 위를 채운 전통 목재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는 내게 원 소장은 원래 정욱주 교수의 취미인 목공예 공방으로 쓰던 곳인데, 사무실 식구가 늘어나며 공간이 부족해져 이곳 일부를 회의실로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원종호 소장은 신기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사실 사진과 잡지 지면으로 그를 만나며 달변가일 거라 예상했었다. 얇은 테의 안경, 간결하지만 필요한 단어들로 충실히 채워진 글과 문장, 군더더기 없는 도면이 그런 인상을 남겼다. 실제로 마주한 원종호는 그의 동료의 말처럼 “침착하고 조용한 편”의 “전형적인 I 스타일”(정욱주)이었으며, 정말로 “난초를 닮은 면”(최재혁)이 있었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만남으로 그를 얼마나 파악할 수 있겠냐마는 원종호에게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하지 않아도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덕분에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문득 그가 어디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원래 그랬던 것처럼 주변과 동화되는 디자인을 실천하는 그의 조경설계처럼. 창작물은 그것을 만든 사람과 닮는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그날의 대화를 옮긴다.
설계를 향한 열망
- 수상 축하드립니다. 지원서 내실 때 어느 정도 수상에 대한 기대가 있었나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사실 2년 전부터 주변 지인들이 젊은 조경가 공모에 지원서를 내보라고 넌지시 말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스스로 아직은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제 포트폴리오에 담을 수 있는 작품도 적다고 생각했어요. 덜 익었다고 느꼈죠. 올해도 지인과 더불어 정욱주 교수님(서울대학교)의 부추김이 있었어요. 저도 이번에는 한번 도전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제출했는데 기대는 전혀 안했어요. 너무 훌륭하고 잘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선정 소식을 듣고 당황했습니다. 우선 너무 감사한 마음입니다.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인 면이 무엇일까 되돌아보기도 했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는 시기였는데, 설계에 동력을 얻고 각성하는 계기가 됐어요.”
- 자기소개서를 너무 즐겁게 읽었습니다. 학부 시절부터 막연하지만 설계가를 꿈꿨다고 적혀 있더군요. 처음부터 설계의 대상이 조경이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서울대학교로 견학을 갔었어요. 공대에 들렀는데, 마침 건축학과에서 과제전을 하고 있었죠. 전시된 모형과 패널을 보는데 마음이 동했어요. 건축이 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서울대 건축학과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꿈꿨던 대로 건축학과에 가지는 못했지만, 조경이라는 분야가 30년 동안 전도유망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조경에 대해 알아보니 건축학과 과제전을 보며 상상했던 일과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조경학과에 진학했죠. 입학 후 동기들이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릴 때도 저는 설계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한 적이 없어요.”
- 보통 자신의 적성과 전공이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잖아요. 막상 공부해보니 나와 맞지 않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요. 내 길은 조경설계라는 확신을 언제 가졌나요?
“사실 1학년 때는 긴가민가한 상태였어요. 군대에 가서 그 책을 읽지 말았어야 했죠(웃음). 입대 후 배정한 교수님의 스테디셀러인 『현대 조경설계의 이론과 쟁점』을 읽고 꽂혀버렸어요. 제임스 코너의 책도 많이 읽었고, 그때 조경설계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어요. 제대 후 돌아왔을 때 본 현업에서 활동하는 훌륭한 선배들의 모습도 조경설계를 향한 꿈을 키워줬어요. 최영준 교수(서울대학교), 이상훈 교수(전남대학교)를 비롯해 설계 잘하는 선배가 많았고, 전반적으로 다들 조경가를 꿈꾸는 분위기라 자연스럽게 그 시류에 젖어들기도 했어요. 항상 잘하는 사람을 보며 난 언제 저렇게 되지 하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어요.”
- 그 시기에 많은 선배와 동기들이 해외로 유학을 떠났잖아요.
“맞아요. 제가 04학번인데 동기들이 펜실베이니아대학교(유펜)와 하버드대학교로 유학을 엄청 많이 갔어요. 저는 처음부터 여러 이유로 유학을 고려하지 않았어요. 당시 정욱주 교수님과 김아연 교수님(서울시립대학교)이 프랙티스 기반으로 교수가 된 첫 사례였어요. 그분들에게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대학원에 입학해 정욱주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갔죠.
- 약력 중 눈에 띄는 문구가 있어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최우등 졸업’. 어떤 조건을 갖춘 학생에게 주어지나요.
“학점은 당연히 괜찮아야 하고, 학과에 봉사를 한 학생에게 주어져요. 학교에 행사가 있으면 좀 솔선수범해서 일을 했었는데, 그 덕분에 최우등 졸업을 할 수 있었어요.”
-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다면요.
“당시 학과장님이 조경학과 뉴스레터를 만들어보라고 제안해주었어요. 한 달에 한 번 온라인으로 조경학과 소식을 전하는 뉴스레터를 만드는 활동을 열정적으로 했었는데, 재미있었고 기억에 남아요. 반 년 정도 이어지다가 사라져서 아쉽습니다.”
- 학창시절 제게는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이 정말 큰 이벤트였어요. 조경설계의 길을 걷고 싶은 학생들이라면 다들 수상을 꿈꾸며 작품을 제출했거든요. 제8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원종호‧최재혁‧신지선‧안데레사) 수상이 조경설계를 하겠다는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줬을 것 같아요.
“사실 학부 졸업할 때 낸 작품은 입선에 그쳤어요. 조금 약이 올랐죠. 그 다음 해에 대학원 동기인 최재혁과 학부 후배들을 모아 다시 참여했는데 대상을 받았어요. 그때 노력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열심히하면 뭐든 된다는 걸 깨달았죠.”
- 대학원 생활은 어땠나요. 어떤 연구를 주로 했는지도 궁금해요.
“저의 대학원 생활은 실무 위주로 이루어졌습니다.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 이름으로 계약한 디자인 프로젝트를 주로 했습니다. 경의선숲길 기본계획, 보육원 설계 프로젝트 등에 참여할 수 있었어요. 공공 공간이나 복지 시설 프로젝트가 많았는데, 덕분에 그때부터 공공 공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어요. 제가 보기보다 인문적인 곳에 관심이 많아서 졸업 논문 주제로는 한국 기념 공간에 대해 다뤘습니다.”
- 첫 직장이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이하 KnL)였어요. 줄곧 하고 싶었던 조경설계를 할 수 있는 직장이죠. 그런데 3년 뒤 현대건설로 자리를 옮겼네요.
“대학원을 다니며 운 좋게 KnL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었어요. 김용택 소장님에게 조경설계의 기초를 배웠습니다. 설계는 물론이고 현장에서 흙도 날라볼 수 있었죠. 그런데 주로 작은 공간을 다루다보니,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그리 경험도 많지 않으면서 소규모 프로젝트만 하는 것 같다는 답답함을 느낀 거예요. 시공에 대해서도 더 배워보고 싶었고요. 설계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시공은 지금 아니면 못해볼 것 같다는 어쭙잖은 생각도 했어요. 마침 현대건설 공개 채용 공고가 올라왔고, 그렇게 직장을 옮기게 됐습니다.”
- 현대건설 입사 후에는 주로 해외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해외 건설 붐이 일던 때였어요. 건설사와 엔지니어링 회사가 중동 등 해외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주하던 상황이었죠. 현대건설에 입사하자마자 카타르 국립박물관 현장에 투입됐어요. 당시 OJT라는 직장 내 교육 훈련이 있었어요. 현장에서 한두 달씩 숙식하면서 일을 배우는 거죠. 그때는 카타르 현장이 얼마나 열악한지 모르고 지원해서 가게 됐습니다. 한번 발 들이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며 만류하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욕심이 났습니다. 카타르 국립박물관 설계를 프랑스 건축가장 누벨이 했거든요. 힘들어도 그 거장의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죠. 1월에 입사해 카타르로 떠나 3년 3개월 있었어요. 악성 현장이었어요. 시공 난이도가 높아서 공사 기간이 3배 정도 늘어난 상황이었죠. 제가 퇴사하고 2년 정도 뒤에야 완공됐더라고요.”
- 그때의 경험이 어떤 점에서 도움이 되던가요.
“우선 육체와 멘탈이 단단해졌어요. 매일 새벽 여섯 시에 나가서 저녁 열 시에 돌아와 잠만 자고 다시 일하러 나가는 생활을 3년가량 했더니 이제 웬만한 일은 힘들지 않아요. 조경설계를 향한 제 열망을 확인하는 계기도 됐죠. 얼마나 설계가 하고 싶었는지, 그 바쁜 시간을 쪼개서 국내 공모전에 참가하기도 했어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일종의 설계를 향한 갈망의 표출 방법이었죠.”
- 그래도 퇴사 결정을 쉽게 내리진 못했을 것 같아요. 그동안 고생한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들 것 같고요.
“퇴사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다들 미쳤다고 말했어요. 우선 한국으로 돌아와 생활하면서 생각을 다시 정리해보라고 저를 달랬죠. 한국으로 복귀해 본사에서 한 달 정도 일을 하다가 관뒀어요. 마음이 바뀌지는 않더라고요. 사실 대학원 졸업할 때부터 정욱주 교수님이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었어요. 카타르에 머무는 동안에도 계속 연락이 왔었죠. 덕분에 현대건설 생활을 정리한 뒤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이하 JWL)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조경가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건강한 설계 환경
- 정욱주 교수님과의 관계를 파트너라고 칭하더군요.
“정욱주 교수님은 제게 늘 너와 나는 사제지간이지만 일을 시작하면 동등한 디자이너이자 파트너로 대하겠다고 강조해왔어요. 사실 말이 쉽지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게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함께 일하게 된 뒤로는 제게 존대어를 사용하고 저를 한 명의 온전한 디자이너로 대우해주세요. 정욱주 교수님이 대외적으로 엄청난 하드워커로 알려져 있어서 다들 제가 힘들게 일하는 줄 아는데 전혀 아니에요.”
- 일 수주 방식은 어떤가요.
“아직은 대부분 교수님이 수주한 프로젝트로 사무실이 운영되고 있어요. 물론 제가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프로젝트도 있고요. 이번 제부도근린공원 조성사업 설계공모의 경우가 제가 팀을 꾸려 참여해 일을 수주한 경우죠.”
- 자기소개서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어요. “프로젝트는 대표와 PM만의 것이 절대 아닙니다. 프로젝트를 빌드업해 나가는 모든 구성원이 그 프로젝트의 크레디트를 가짐을 상기시키며, 조경가로서 스스로 자부심을 간질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 재능 있는 구성원에게는 직급과 나이에 관계없이 비중 있는 프로젝트를 맡기고, 설계 매니징의 기회를 부여하여 스스로의 성장과 동시에 동료들이 적당한 선망과 긴장을 가질 수 있도록 합니다.” 젊은 조경가 공모를 진행할 때마다 건강한 크레디트 문화에 대해 생각해보곤 하거든요. 회사나 작품이 아닌 조경가라는 한 인물에 주는 상이다 보니, 크레디트 문화가 바르게 자리 잡히지 않으면 젊은 조경가상의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아서요. 크레디트를 어떤 식으로 부여하는지 궁금합니다.
“회사에 직원 다섯 명이 전부였던 시기에는 저와 정욱주 교수님이 매번 PM 역할을 했습니다. 직원들이 모두 신입사원이라 별 다른 수가 없었죠. 그때 회사 구조가 2중이었다면, 지금은 3중이에요. 경력을 쌓은 중간 관리자들이 생겨났죠. 이제 역량이 되는 팀장급 직원이 PM을 맡고 있습니다. 그 경우 저와 정 교수님이 디자이너들을 매니징하는 역할을 하죠. 흥미로운 게 직원 수가 다섯 명일 때와 열 명일 때 직원 개개인의 성장 속도가 달라요. 어찌됐든 직급이 가장 낮은 직원이 많은 일을 맡아 처리할 때 역량이 확 늘더라고요. 지금은 중간 관리자들이 워낙 일을 잘하다보니 그 아래 직원들의 성장이 더뎌요. 그래서 파격적으로 사원급 직원에게 PM을 맡기기도 합니다. 큰 프로젝트도 있지만, 경력 1년 정도의 직원도 PM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거든요. 저나 교수님이 일대일로 코칭을 하고요.”
- 그런 경우 반응이 어떤가요?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들 해보겠다고 의지를 보여요. 직원들끼리 유대 관계가 좋아서 그런지 PM을 맡은 친구가 버거워하면 다른 직원들이 일을 거들어주기도 하고요. 능력이 있다면 누구든 PM을 맡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연말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려 노력해요. 모든 직원이 디자이너가 아닌 조경가로 자라게 하는 게 모토이기도 하고요. 직장인처럼 다니는 직원을 원치 않아요. 지금까지는 이런 시스템이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조경, 보이지 않는 조경가
- 자신의 조경 설계관을 ‘보이지 않는 조경’이라 말했죠. 비슷한 말을 ‘어떤 디자인 오피스’ 지면에서 찾았어요. “보는 사람의 눈을 단번에 매혹시키는 화려한 조형 언어나 깊은 지적 탐구를 통해 도출한 형이상학적 설계 개념은 우리의 작업에서 찾아보기 힘들다”(“어떤 디자인 오피스: JWL”,2023년 12월호). 어쩌면 보이지 않는 조경은 원종호뿐 아니라 JWL의 설계를 관통하는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한 맥락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왜 누군가와 함께 일하다 보면 그 사람들의 방식에 젖어들기도 하잖아요. 저와 정욱주 교수님 둘 다 튀는 걸 싫어해요. 조형적인 개념뿐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쨍한 느낌의 프로젝트를 선호하지 않아요. 아마 그런 면에서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껴 정 교수님이 저와 함께 일하고 싶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보이지 않는 조경은 저만의 설계관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 보이지 않는 조경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KnL에서 조경설계를 배우면서, 김용택 소장님이 보이지 않는 조경을 하는 조경가라고 느꼈어요. 늘 설계할 때 편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눈에 거슬리는 것 없이 편안하고 원래 있던 것 같은 공간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였죠. 계속 이야기를 듣고 배우다 보니 자연스레 저도 그런 설계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조경설계 서안의 작품을 볼 때도 보이지 않는 조경의 감각을 느낍니다. 편안하고 평온해요. 김용택 소장님도 서안에서 일했던 조경가이니 서안의 감각이 김용택 소장님에게 묻어있다고 볼 수도 있겠죠. 사실 학부 시절에는 제임스 코너처럼 형상과 개념이 강한 설계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10년쯤 실무를 하고 되돌아보니 누가 보면 심심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담백하고 편안한 느낌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 롤모델이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조경을 잘 보여주는 작품 중 좋아하는 공간도 알고 싶어요.
“정영선 소장(조경설계 서안)님은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 제외하고 골라보자면 유럽의 조경가들을 좋아해요. 미셸 드비인(Michel Desvigne)과 귄터 폭트(Günther Vogt)의 작품을 좋아해요. 혹자는 설계한 게 뭐가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장소들을 좋아합니다. 그걸 잘 보여주는 작품이 독일의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Museum Insel Hombroich)이에요.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더라고요. 원래 있던 자연 위에 인간이 만든 인공물이 편안하게 폭 얹어져 있는 듯한 느낌의 공간이에요. 그래서 거스름이 없고 그 편안함에서 힐링과 감동을 느낄 수 있죠.”
- 보이지 않는 조경은 “특별히 설계한 것이 없어 보인다거나 너무 뻔한 혹은 소극적 디자인이라는 평을 들을 때”가 있죠. 조경의 역할을 축소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요. 이명준 교수님(한경대학교)은 “조경이 ‘보이지 않는다(invisible)’고 할 때,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는다. 하나는설계한 경관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하여 대중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며 “조경은 좀 더 보일(visible) 필요가 있다”(이명준, “정원섬, 보이는 정원”, 2018년 8월호)고 말하기도 했고요.
“실무에서 많이 겪는 문제이기도 해요. 설계안을 가져갔을 때, 명확하게 설계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려당하기도 하거든요. 모든 조경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조경 프로젝트의 넓은 스펙트럼 중 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 조경인 거죠. 기본적으로 조경가는 예술가가 아니고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추어 설계를 해나가는 일종의 조정자라고 생각합니다. 클라이언트가 보이는 조경을 원한다면 당연히 해야 하죠. 보이지 않는 조경이라는 설계관은 피상적인 조형이나 개념 너머의 가치관 같은 것이기도 해요. 워낙 설계를 잘하는 사람도 많고 서로 잘났다고 아우성치는 세상 속에서 언젠가 오히려 좀 조용하고 절제된 것이 각광받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요. 보이는 조경은 AI도 할 수 있는데, 안 보이는 조경은 하지 못할 거 라는 믿음도 있고요.”
- 황매산 군립공원 입구부 조경이 ‘보이지 않는 조경’의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대상지가 지닌 조건 자체가 워낙 좋은 프로젝트잖아요. 하지만 관 주도의 프로젝트이다 보니 보이지 않는 조경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했어요.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난 덕분에 큰 어려움을 겪진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관 프로젝트에서는 눈에 딱 보이는 설계를 원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상황을 예상하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클라이언트인 합천군청이 오히려 우리의 의견에 동의해주었어요. 황매산 프로젝트의 핵심은 황매산의 전경을 입구부에서 압축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거였어요. 대상지에 총천연색의 시설물과 흔히 볼 수 있는 포토존 조형물이 많았어요. 이런 것들만 덜어내도 이곳은 좋아진다고 합천군청을 설득했죠. 더하는 조경이 아닌 빼는 조경을 한 셈이죠. 난항을 겪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 즈음에 디림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황매산 군립공원 휴게소 ‘철쭉과 억새사이’가 대통령상을 수상했어요. 임영환 교수(홍익대학교, 디림건축사사무소 대표)는 그 건축물을 “자연의 기록에 사람의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는 건축 방식은 무엇일지 고민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했죠. 그러한 의도와 설명이 본래 가진 경관을 보여주는 설계를 하려는 저희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죠. 입구부뿐만 아니라 황매산 군립공원 전체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구역마다 상세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작업을 진행했어요. 이 구역에 데크를 놓을 때는 오일 스테인을 바르지 말 것, 이 구역에는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말 것, 이 구역에는 유채색을 쓰지 말 것 하는 식으로요. 보통 이런 가이드라인을 잘 따르지 않는데, 황매산은 실제로 가이드라인을 지키고 있어요.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 덜어내는 조경을 하다보면 벤치, 의자, 포토존 등 관광객 편의를 위한 시설도 함께 줄어들 것 같은데 방문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황매산이 원체 전국적 명소다보니 접객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또 자연 그 자체인 것 같은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입구부를 그냥 산의 일부라 여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다 싫다 평하지 않더라고요. 자연스럽게 공간을 받아들이는 거죠.”
- 쭉 보이지 않는 조경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렇다면 지금껏 진행한 프로젝트 중 형태가 가장 드러나는 작품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하나은행 부산 IPC요(원종호, “나의 미개봉작 상영기: 잭과 콩나무 부산판”, 2021년 5월호). 동화 ‘잭과 콩나무’의 이야기를 조경으로 풀어냈어요. 지하 2층과 지상 1층 사이 계단실은 콩나무의 뿌리, 1층은 콩나무의 얼굴, 12층부터 15층까지의 램프 구간은 하늘을 향해 뻗은 콩나무 줄기, 15층은 거인의 마당, 16층은 거인의 집으로 개념화했어요. 벽화, 바닥 패턴, 벽면 녹화, 선형 램프를 통해 잭과 콩나무 이야기를 직관적이고 일차적인 방식으로 표현했죠. 그게 발주처의 요구 사항이기도 했고요.”
완성도를 높이는 재료와 디테일
- JTBC 사옥 공개공지와 성수동 코너 프로젝트의 앉음벽, 램프, 메지 등 작은 요소의 디테일이 매끈하게 마무리되어 있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전체 설계에서 보면 앉음벽, 램프, 메지 같은 디테일이 별 것 아닌 작은 요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어떤 공간이 사람들에게 양질의 공간이라고 인지되는 첫 번째 순간은 눈에 거슬리는 것 없이 반듯하고 깨끗하게 떨어진 풍경을 마주하는 때라고 생각해요. 가장자리가 깔끔하고, 포장이 균질하고, 무언가 엇나간 지점 없이 말끔하게 떨어지는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해요. 설계 자체도 중요하지만 작은 디테일의 마감 완성도가 공간의 질을 좌우하는 순간을 많이 목격했어요. 그래서 디테일에 힘을 많이 주는 편입니다. 도면만 봤을 때는 별거 없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땅과 시설물이 만나는 부분, 높이 차가 나는 땅이 연결되는 부분을 깔끔하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방법이 녹아들어 있어요. 조형 아래 숨은 설계 원리가 공간의 완성도를 결정한다는 신념이 있습니다. 화려하지만 디테일이 조악한 공간을 지양합니다. 좋은 공간에 놓은 벤치 하나가 공간의 인상을 바꾸기도 하거든요. 기본에 충실한 설계, 튀지 않지만 클래식한 조형 원리에 입각한 설계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 “나의 미개봉작 상영기: 공개공지의 귀환”(2021년 5월호)에서는 “아무리잘 표현해도 현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조성 과정을 지켜보지 않는 한 완벽한 구현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다고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테일 완성도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필요한 경우 일대일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요. 요즘엔 컴퓨터 기술이 좋아져서 다양한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구조적으로 실현이 가능한지 검증이 필요한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때는 시공 팀에게 묻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능하다고 답해주면서 그 방법을 알려주더라고요. 현장에서 많이 배웁니다.”
- 즐겨 사용하는 소재나 식물, 디테일이 있나요?
“너무 많죠. 식물 중에서는 노각나무를 너무 좋아합니다. 처음 봤을 때 충격적이었어요. 수피도, 수형도 너무 아름다웠어요. 김용택 소장님이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나요. “노각나무에 꽃이 피면 장마가 오는 거야.” 노각나무를 보며 계절의 흐름을 가늠해요. 꽃도 예뻐요. 노각나무 종류가 수십 가지인데, 한국 노각나무가 제일 예쁘더라고요. 또 직선을 좋아합니다. 곡진 형태 다루는 걸 어려워해요. 소재로는 철물을 좋아해요. 하나은행 부산 IPC에서 실컷 사용했죠.”
- 그러고 보니 도면에서 곡선을 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깔끔한 디테일을 선호해서일까요?
“네. 제 눈에 거슬리는 게 없는 공간은 대부분은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더라고요. 최근에는 원과 곡선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 또한 기하학적으로 거슬리지 않는 상태여야 합니다.”
문화와 조경
- 2021년 사용했던 프로필에는 지금과 달리 한 문장이 더 붙어 있었어요. “조경가가 문화인으로 인정받는 날까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실험해 볼 생각이다.” ‘문화인’의 정의가 궁금해요. 기획, 공간 브랜딩 등 더 넓은 분야로 조경의 영역을 확장하는 조경가도 나타나고 있잖아요.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쓴 문장은 아니에요. 정영선 소장님이 제가 생각하는 문화인으로서 조경가에요. 앞으로도 조경이 문화에 기여하는 부분이 커졌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문화 활동도 함께 일으키고요. 물론 제가 보이지 않는 조경인을 꿈꾼다고 말하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성향은 아니지만, 좋은 조경 작품을 만들어내서 조경도 문화적으로 성숙한 분야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 72시간 프로젝트, 정원박람회에도 참여했었죠. 추천하는 편인가요?
“3~4년 전까지만 해도 관심이 많았고 팀원에게도 참가를 독려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정원박람회라는 행사에 대한 회의감도 들어요. 너무 많은 것들이 우르르 만들어졌다가 증발하는 느낌이에요. 그런 점에서 몇몇 결과물은 정원이라 부르기 어렵다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분야의 영역을 확대하고 자본을 끌어들이는 점에서는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제가 꿈꾸는 문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조경가와는 반대의 길을 걷는 방식으로 바뀌어가는 것 같아요. 아직 덜 여문 작품이 조경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대한 우려도 있고요.”
- 작업 중에서 ‘성수 현대테라스타워 공개공지’를 빼놓을 수가 없어요. 출발이 독특했던 프로젝트잖아요.
“현대테라스타워 입주민협의회의 의견으로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에요. 공개공지를 리모델링해서 건물의 가치도 높이고 가로 환경을 개선해보려는 거였죠. 우란문화재단을 비롯해 인근 몇몇 공간을 설계해서였는지 그들은 JWL에 연락을 해왔고 설레는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복잡해진 건 민관협력 공개공지 공유정원 조성 프로젝트로 전환이 이루어지면서였어요. 서울시에서 ‘정원도시, 서울’ 정책의 일환으로 자발적으로 공개공지를 리모델링하는 사람에게 예산을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였거든요. 현대테라스타워가 성동구의 제1호 민관협력 공개공지 공유정원이 되게 된 거죠. 예산 지원을 받게 됐지만 이해관계자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어요. 설계안을 서울시가 선정한 정원 디자이너에게 검토를 받아야 했고, 식물의 경우도 관이 규정하는 규격에 맞추어 바꾸어야 했죠. 봉사하는 마음으로 함께한 사람들이 언짢아지는 상황도 벌어지고 계약 관계 자체가 복잡해져서 좀 정신없이 프로젝트를 끝냈어요. 완성된 테라스로 인해 동네 분위기가 더 좋아진 점은 만족스럽지만, 실제 설계자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어요.”
- 가장 중요한 건 클라이언트의 반응이었을 테죠.
“사실 간판 문제 때문에 조금 갈등이 있었어요. 입주민협의회쪽에 처음 제시했던 렌더링 이미지 속 나무의 수고가 높았거든요. 간판이 나무의 수관 아래로 보이는 형태였죠.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충분한 토심을 확보하지 못했고, 수목 수배에도 어려움이 있어 조금 키가 작은 나무를 심었더니 나뭇가지가 간판을 가리게 된 상황이었어요. 처음에는 나무를 톱으로 베거나 뽑아버리겠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은 수그러든 상태입니다.”
영감의 원천과 취향
- 설계하면서 영감은 어디서 얻나요. 스트레스를 풀 때 어떤 취미를 즐기는지 알려줘도 좋습니다.
“책 읽는 걸 좋아해요.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중국 역사를 다룬 책을 많이 읽어요. 만약 조경이 아닌 다른 전공을 택하라고 한다면 고고학을 공부해보고 싶거든요. 잘 생각해보니 고고학을 좋아하는 이유도 풍경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 것 같아요. 역사책이나 고고학 서적을 읽을 때면 머릿속에 그때의 풍경을 몽글몽글 그려보거든요. 설계의 영감을 얻는다고 볼 순 없고, 좋아하는 풍경을 상상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킨다고 보는 게 맞겠어요. 축구도 좋아하고, 멍하니 공상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멍 때리기를 즐겨요. 또 전투기를 정말 좋아해요. 전투기는 최고의 기능, 기능을 100퍼센트 발휘하기 위해 만들어진 극강의 디자인 결과물이거든요. 전투기 분해도나 아이소메트릭을 보면서 영감을 얻어요.“
-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 좋아하실 것 같아요.
“맞아요. 좋아하는 말입니다.”
- 사무소가 정욱주 교수님 때문인지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있어요. 혹 학창 시절부터 오갔던 쉼터나 아지트 같은 공간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아쉽게도 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원도 없고, 부족한 카페인을 보충하러 주구장창 스타벅스만 가는 것 같네요. 아, 역 주변에 와플 가게가 하나 있어요. 피곤한 날이면 와플을 사서 올라와 커피와 함께 먹는 걸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 가장 최근 소식은 제부도 근린공원 조성사업 설계공모였죠. 마침 같은 호에 당선작을 소개할 예정이에요. 잘 진행되고 있나요.
“공모에 당선되어 계약을 한 지 한 달 정도 됐네요. 설계 계약 기간이 6개월, 즉 내년 4월 말까지 설계를 끝내야 해요. 말도 안 되게 짧은 기간이라 부지런히 달려야 합니다. 설계안이 엄청 흥미로워요. 구조적인 해법으로 풀어냈는데 바닥면을 비스듬히 들어올리고, 지형을 조작하면서 만든 벽에 해식 절벽을 구현했죠. 덕분에 그 구조를 검토하는 비용과 공사비가 어마어마하게 소요될 걸로 예상됩니다.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요. 제부도 근린공원을 JCFO의 통바파크(Tongva Park)같은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성공해낸다면 JWL의 아이콘 같은 공간이 될 겁니다. 지역성도 담겨 있고 디테일도 좋아 자부심을 갖고 있는 설계안입니다.”
- 마지막으로 조경가를 꿈꾸는 학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학교에서 보낸 몇 년 정도의 시간으로 자신의 재능을 재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한번도 제가 설계를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내가 설계를 못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면 안 됩니다.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면 실력이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조경설계는 압도적인 천재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끈기만 있다면 누구나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분야예요. 자신이 평가한 실력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 눈엔 충분히 잠재력이 있는데 눈앞의 결과만을 보고 설계를 포기하는 친구들을 많이 봤어요. 좋아해서 계속하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걸어가게 될 길이 눈앞에 펼쳐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