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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백업으로부터의 자유
기록 생활
1 한국, 호주, 미국의 다섯 개 회사에서 일한 이력이 있다. 현재 근무지인 필드 오퍼레이션스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특정 회사를 대변하기보다 BIM을 사용한 지난 7년간의 개인 경험을 토대로 글을 작성한다. 기록 루틴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미시적 단계부터 시작하자면, 실무에 몸담은 지 13년 차가 되니 어느 시점에 프로그램 충돌이 일어나도 업무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저장하는 게 몸에 뱄다. 갑자기 사무실 전기가 나가거나 프로그램이 꺼지면, 그 순간을 기지개를 펴고 동료와 담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정도다. 분명히 20분 이내에 나도 모르게 저장을 했을 테니까.
그 다음 단계는 날짜가 바뀔 때 파일을 새로 저장하는 것이다. 특히 프로젝트 초반에는 라이노를 통해 수많은 디자인 아이디어를 테스트해 보고 지우기를 반복하는데, 과거에 버린 옵션이 다시 거론되고 되살아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일단 보존해 놓는다. 디자인이 최종 확정되면 그동안 보존해 두었던 수많은 라이노 파일들을 정리한다.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파일은 과감하게 지우려고 노력한다. 프로젝트 폴더를 간결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서버의 메모리 용량도 줄이기 위함이다. 중요 설계 단계를 마칠 때는 납품한 파일과 도면집을 모두 모아서 특별히 지정된 폴더에 아카이브해 둔다. 프로젝트로서 작업물을 기념하기 위함인데, 유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우 “우리가 전에 어떻게 했었지?”하고 참고할 때 자주 찾는 폴더가 되기도 한다.
2 래빗을 이용한 3D 모델링과 도면 작업, 삽화 렌더링에 대부분의 업무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기록물의 종류가 래빗과 루미온에 치중되는 편이다. 래빗이라는 소프트웨어에 전반적인 3D 모델뿐 아니라 디테일, 도면집, 수량 산출, 협력사 3D 모델이 모두 내재되다 보니 래빗 파일만 주기적으로 백업해도 프로젝트의 핵심 디자인 정보를 보존하는 효과가 있다. 설계 세부 자료나 도면집을 보고 싶을 때 래빗 파일을 통해 열람할 수 있다.
필드 오퍼레이션스를 비롯한 많은 조경 회사가 루미온이라는 렌더링 프로그램을 쓴다. 루미온에 익숙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실사에 가까운 삽화를 빠르게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포토샵에 대한 의존도를 비약적으로 낮췄다. 루미온 파일만 있으면 수십 장의 삽화를 수십 분 내에 재생산할 수 있다.
이처럼 도면집과 삽화를 빠르게 재생산할 수 있게 하는 핵심 파일, 즉 래빗과 루미온을 중점적으로 아카이브한다. 라이노, 프레젠테이션, 보고서 등의 문서도 있는데, 이것들은 보통 작업했던 폴더 내에 그대로 남겨 보존한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이홍인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의 오피스박김, 호주의 맥그리거 콕샐(McGregor Coxall)과 하셀(Hassell), 미국의 하트 하워튼(Hart Howerton)에서 경력을 쌓은 뒤 필드 오퍼레이션스(Field Operations) 뉴욕 오피스에 입사해 BIM 전문가로서 래빗을 실무에 도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테크놀로지를 빠르게 접하고 이를 통해 어떻게 실무 효율과 완성도를 올릴 수 있을지 탐구하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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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생존 기록
기록 생활
1나의 기록 생활과 기록 루틴 대부분은 과업 일정, 업무 내용, 아이디어, 개인 생활 등 조경 작업과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대로 말하면 기록하지 않으면 작업과 생활 유지가 어려울 만큼 건망과 망각이 심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필수 행동이 기록인 것이다. 즉, 기록은 나의 생존 또는 존재 그 자체다.
인문학적으로 가치 있는 시와 소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료, 우주의 원리를 밝히는 수학 공식과 같은 기록이 아니라 오래전 인류가 살기 위해했던 사냥, 채집, 은폐·엄폐, 이동, 수면 등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생존 그 자체로서 기록 루틴은 단순하다. 생각나는 그 즉시, 일정이 잡힌 바로 그때 그곳, 협의한 내용 그대로,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내용이 틀림이 없이 공유될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기록한다. 하지만 운전, 보고, 회의, 미팅, 협의, 현장, 통화 등 즉시 기록할 수 없을 때는 따로 시간을 내 기억을 더듬으며 정리한다. 그만큼 정확할 수 없으므로 운전, 미팅 중의 통화 내용은 상대방에게 메신저나 메일로 정리해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다소 미안하더라도 부탁하는 편이다. 잘못 기억하거나 약속을 못 지키는 것보다는 낫다.
업무와 관련된 기록 루틴은 생존 기록과 다르게 복합적이다. 업무와 관련된 메일과 카카오톡 대화, 보고 자료, 설계 도면, 공사 내역서, 디자인 노트 등을 꼼꼼히 되새기면서 일정과 업무 내용을 정리해야 틀리지 않고 일을 진행할 수 있다. 업무 내용 크로스 체크를 위해 통화나 대화 등이 필요할 수 있으므로 사무실 가운데 회의용 테이블에서 수기로 번호를 매겨가며 기록한다. 하지만 이 루틴도 늘 지키기 쉽지 않다. 회사 운영과 개인 영달을 위해 다양한 성격의 일을 하다 보니 루틴이라는 안정 상태를 유지하는 행위가 사치일 만큼 바쁜 시기와 시점이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과 관련된 기록은 미루고 미루다 늘 막바지에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름대로 늘 새롭고, 이전의 나와는 달라야 하고, 주어진 대상지는 어렵고, 기간은 늘 촉박하다. 그래서 최대한 최신 정보를 습득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결정을 하다 보니 늘 막판에 가서야 개념에 맞는 디자인을 정하고 형태를 잡는다. 미리 잡고 나서도 막바지에 바뀌는 경우가 있다 보니 디자인 결정을 함부로 미리하지 않도록 루틴을 만든 것이다.
답변의 끝에서 질문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기록과 루틴이란 단어가 불편하고, 흔쾌히 원고 청탁에 응했지만 몇 주 동안 글쓰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를 답을 하면서 찾게 됐다. 나에게 기록이란 생존과 관련된 것이기에 다루기 어려웠던 것이다. 루틴이란 안정된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기 위한 행동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늘 불안정한 상태와 관계를 이겨내야 하는 나에게는 아주 어려운 질문이었다.
2기록물을 아카이브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한 건 아니지만 기록을 하다 보니 아카이빙된 것들이 생겨났다. 그러다 기록물의 가치를 알게 됐다. 별거 아니더라도 기록은 시간이 지나면서 설명되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기록물 종류는 직접 만들어 쓰는 디자인 노트, 모든 일정이 담긴 종이 캘린더, 빠질 수 없는 인스타그램, 디자인 작업의 출발이자 끝인 옐로 페이퍼, 늘 지니고 있는 스마트폰의 메모장, 총 다섯 카테고리다.
첫 번째, 직접 만들어 쓰는 디자인 노트다. 회사 이름을 붙여 ‘라디오 노트’라고 부른다. 조경 생활 초기부터 수년간 사서 쓰던 다양한 노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 만들어 쓰게 됐다. 원하는 노트 조건은 간단했는데, 선이 없고, 크기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두께가 두꺼운 듯 안 두꺼워야 했다. 간단한 조건 같지만 이를 충족하는 노트가 어디에도 없었기에 회사 근처 제본 집에서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 쓴다. 노란 빛 나는 미색 A4 용지 100장 정도를 레자크 재질의 표지로 열 제본하면 두께 1cm 정도가 되는데, 이를 B5 크기로 재단해달라고 한다. 이 노트는 각종 업무 와 업무 순서, 상세 스케치, 보고 내용 등 조경 업무 전반을 다 기록하는 아카이빙 자료다.
두 번째, 업무·개인 일정을 담은 종이 캘린더다. 스마트폰의 다양한 캘린더와 일정 관련 애플리케이션은 쓰지 않는다. 손과 펜으로 종이에 직접 적어야 그나마 그 상황이 이미지로 남아 기억되는 편이다. 애플리케이션에 쓰면 기억에 남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정을 종이 캘린더에 적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옮겨가지 않은 유일한 기록이다. 덕분에 바쁜 삶이 시각적으로 그대로 인식돼 바쁜 삶이 말뿐 아니라 실제임을 주변에 쉽게 증명할 수 있기도 하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김지환은 영남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씨토포스와 스튜디오 엘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현재는 조경작업장 라디오의 대표다. 스스로를 작업반장, 설계공이라 칭하듯, 설계와 시공 사이의중재자(신호등)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해 그 관계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사회적 대기업을 만들어 도시 내 모든 디자인을 손대고 싶어 하는 야망과 유명 건축가와 조경가의 작업을 보며 절망과 환호를 즐기는 이상주의적 성향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고 믿는다. 때론 못다 한 말을 해시태그로 덧붙이기도 한다. #라디오에이스 #정원작가 #은근히낯가려요 #조경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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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조경가의 드로잉, 설계적 상상과 탐험의 기록
기록 생활
‘조경가의 기록법’이란 특집 제목을 보고, 떠올린 이미지는 조경설계를 가르쳐 준 선생님의 낡은 수첩이었다. 정확히는 수첩이 아니라 수첩 커버인데, 선생님은 매년 속지를 교체하면서 계속 쓰는 가죽 수첩 커버를 사용했다. 군데군데 손때 묻고 세월의 흔적이 담긴 수첩. 지금도 선생님은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면 그 수첩을 꺼내서 한두 문장 짧게 메모하곤 한다. 부끄럽게도 제자인 나는 기록에 그다지 충실하지 못하다. 연초에 문득 드는 생각이나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메모하고자 작은 수첩을 사곤 하는데, 연말에 펼쳐보면 깨끗한 백지가 절반이 넘는다. 하지만 텍스트 중심의 기록에 서툰 내게도 나름의 기록법은 있다. 바로 설계 작업의 중간적 기록인 드로잉이다. 이런 드로잉들은 좀처럼 다른 이들에게 드러나지 않는다. 대게 완성된 공간의 사진이나 정제된 도 면들이 먼저 외부에 공개되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질문에 답하기보다 자신만의 기록법을 묻는 4번 질문의 답인 드로잉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드로잉을 텍스트보다 많이 쓰는 편이며, 설계 초반 단계부터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주로 사용하는 기록 매체다. 크로키-콘셉트 플랜-플랜팅 플랜-플랜팅 스케치로 이어지는 순차적인 설계 작업 기록이 그것이다.
4크로키, 대상지에서 이루어지는 첫 번째 상상의 기록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직접 해설하며 연주하는 영상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음악은 연주자가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It’s already started)”라고 말하며, 공중에서 맴도는 선율을 살포시 끌어당기듯이 건반 연주를 시작하는 장면은 정말 아름다웠다. 나 또한 새로운 대상지를 만난 순간, 비슷한 맥락으로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곤 한다. 대상지를 바라보며 그곳에 이미 어떤 장소가 펼쳐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이미 새로운 모습을 갖춘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며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는 풍경을 상상한다. 그리고 이내 그 순간의 상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현장에서 빠르게 크로키로 그 장면을 기록한다. 크로키는 일반적으로 회화의 드로잉 기법 중 밑그림에 해당한다. 대강의 윤곽만 빠르게, 간결한 선으로 그려내는 기법인데 조경가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현장에서 느낀 감정을 글로 기록하기보다는 크로키 같은 빠른 스케치로 남기는 방식을 선호한다. 글로 적으려면 생각을 정제해 언어로 환원하는 과정을 거쳐야 해서 긴 시간이 소요되지만, 크로키는 더 직관적이고 빠르다. 또한 생생한 감정과 구체적인 상(像)을 기록하기 쉽다. 크로키는 이런 면에서 대상지에서 이루어지는 첫 번째 상상의 기록이다.
콘셉트 플랜, 다양한 대안을 탐색한 발자취로서의 기록 최근 지도하는 학생들에게 늘 이야기하는 말인데, 디자인은 결국 디자이너가 자기 이야기를 전달하는 행위이며, 그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얼마나 잘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디자이너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표적 매체 중 하나가 플랜이다. 플랜은 공간의 전체 구성과 배치, 나아가 서사적 흐름까지도 하나의 이미지 내에 종합적 시각 정보로 함축한다. 그래서 어떤 프로젝트에서 플랜의 변화 과정만 훑어보더라도 전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대략 유추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의 설계 스튜디오에서는 플랜의 기록을 중요하게 다룬다. 플랜은 프로젝트 초기부터 최종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로 작성한 것이든지 손으로 작성한 것이든지, 표현이 거칠든지 정교하든지 여부에 상관없이 가급적 모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누군가에게 공개되는 최종 마스터 플랜이 나오기 전에 다양한 콘셉트 플랜이 작성된다. 콘셉트 플랜은 주요한 아이디어 중심으로 핵심 내용만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다수의 대안이 제시된 뒤 선택과 발전의 과정을 거친다. 마치 새로운 황야를 탐험하는 탐험가가 남긴 발자국처럼, 콘셉트 플랜은 설계가가 프로젝트라는 여정 동안 한 단계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간 흔적을 담은 기록물이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최재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조경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정원과 조경설계 실무를 익혔다. 2017년 오픈니스 스튜디오(Openness Studio)를 창업해 생태적 관점을 바탕으로 정원, 공공예술 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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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기록법] 숨 쉬듯 관찰하고, 꾸준히 기록하기
기록 생활
1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고 나름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은 나의 행복이며 오래된 습관이다. 어릴 적 살던 집 베란다 테이블 위에는 몇 가지 물풀이 사는 항아리 뚜껑이 있었는데 햇살이 드는 오후면 그 곁에 앉아 반짝이는 물 표면이나 송사리의 움직임, 생이가래 잎의 잔털을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지금도 그때의 감각이 생생한데, 여전히 나는 물이 고인 곳이 있으면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곤 한다.
관찰한 것을 기록하는 일은 나의 일상에 큰 즐거움이다. 군인 시절, 훈련과 행사의 사진을 찍는 일을 맡았던 나는 부대의 작은 초지에서 진행하는 훈련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봄, 가을이면 매주 같은 훈련장을 방문했었다. 그 당시 무엇보다도 눈에 띄었던 것은 작은 풀들의 변화였다. 민들레와 제비꽃으로 가득하다가도 한 주가 지나면 봄맞이꽃이 땅을 덮고, 여름 장맛비에 가끔 웅덩이가 생기다 가을이면 붉게 물든 띠가 들판을 뒤덮는 모습. 시기마다 풍경은 바뀌었지만, 이듬해가 되면 풀들의 돌림 노래가 반복됐다. 그 풍경을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었기에 훈련장으로 가는 고된 발걸음에는 늘 약간의 기대가 묻어 있었다. 오늘은 어떤 풍경일지, 작년에 본 흰 솜털 같은 띠꽃을 올해는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어쩌면 나는 일상에서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돌볼 것이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관찰하고 기록하고 기억하며 다시 돌아올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나의 일상을 더 풍요롭게 했다. 기록 행위는 나와 관찰 대상이 처한 상황에 따라 느슨해지기도 하고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기도 했지만, 나의 일상에는 관찰하고 기록하는 무언가가 늘 있었다.
관찰을 통해 발견한 것은 손에 든 아이스크림 같아서 금방 녹아버렸다. 기억이 잊히지 않도록 바로 먹던지, 냉동실에 넣어두던지 해야 한다. 먹는 것이 기록물의 행태로 정리하는 행위라면 냉동실에 넣는 것은 정리를 미뤄두고 일단 기록한 것을 보존하는 행위 같다. 쉽게 말해 숙제를 미루는 것, 관찰할 때마다 미루지 않고 부지런히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 일상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다 보니 머릿속 냉장고에는 점점 먹지 못한 아이스크림이 늘고 있다.
2새, 나무, 풀꽃, 벌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들 삶의 꼴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은 늘 즐겁다. 작은 생명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지, 지구와 태양의 위치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또 사람은 어떻게 이들과 만나왔으며 오늘 이곳에서는 어떻게 자연과 만나고 있는지, 알면 알수록 경이롭고 아름답다. 오랫동안 잘 정리한 기록은 무심코 지나치던 현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게 도와주기 때문에 관찰한 것을 성실히 기록하고자 한다.
새의 경우 이버드(eBird)나 네이처링(Naturing)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 관찰한 새의 종류와 개체 수를 사진과 함께 기록하는데, 더 알아낸 정보나 자세한 관찰 내용은 노션(Notion) 애플리케이션에 정리한다. 캘린더 기능을 활용하면 탐조한 날짜에 맞춰 계절별 도래 양상을 내가 찍은 사진과 함께 기록할 수 있어서 좋다.
식물 기록의 경우 조금 더 복잡한데,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속이나 과 수준에서 공통된 특성과 서식처별 특징, 분포, 기타 생물 분류군과의 관계, 발견한 관련 문헌이나 도감의 내용을 한 곳에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몇 년 전, 노션의 ‘데이터베이스’ 기능을 활용한 지금의 기록 플랫폼을 만들었다.
정원 만들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뒤로는 정기적 정원 기록 역시 중요한 기록물 중 하나가 됐다. 최지은과 함께 만든 제2회 서울식물원 식재 설계 공모전의 ‘37.5N 126.8E’가 그 시작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방문했는데, 돌볼 곳이 늘다 보니 요즘은 계절에 한 번 가는 게 고작이다. 요즘은 집에서 가까운 광야숲1과 작년에 조성한 장안동 늘봄어린이공원의 작은 정원을 자주 찾는다. 바쁠 때는 겨우 몇 분, 여유 있을 때는 몇 시간을 어슬렁거리며 오늘은 어떤 변화가 있는지 관찰하고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잘못된 것과 잘된 것 무엇인지 파악하고 예상하지 못한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찍은 사진은 프로젝트별 폴더에 날짜순으로 저장해두며 필요한 경우 노션의 기록 플랫폼에 정리한다.
3정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다. 작업물의 경우 많은 사람이 경험했듯 폴더나 파일명에 ‘최종’, ‘수정’을 우수수 덧붙이며 증식시킨다. 때로 어떤 게 ‘진짜 최종’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더군다나 요즘은 너무 바쁘다 보니 늘어나는 파일들을 제때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모니터링이나 탐조하며 찍은 몇 백 장의 사진은 제때 정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정작 필요한 사진을 찾기 정말 어려워진다. 노션에 깔끔하게 정리하기 어려울 때는 당일 찍은 사진을 넣은 폴더명에 날짜와 인상적인 관찰 내용을 적어 다시 찾을 때 도움이 되도록 한다.
4나만의 특별한 기록 방법은 없지만 좋아하는 방식은 있었다. 학생 때는 무엇이든 노트에 연필로 기록하는 것을 선호했다. 작은 노트 하나를 늘 가지고 다니며 아이디어든, 일기든, 짧은 글이나 낙서든, 뭐든 다 적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뒤로는 디지털 파일을 정리할 곳이 필요했다. 블로그, 구글 문서, 드라이브 등 몇 가지 매체를 경험했고 지금은 노션 애플리케이션에 안착했다. 언제 어디서든 핸드폰만 있으면 기록할 수 있고, 텍스트, 이미지, 영상, 음성 녹음, 인터넷 링크 등 다양한 형태로 정리할 수 있다. 서로 연결할 수도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더불어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다면 올린 파일을 원본으로 다운받을 수 있고 기록의 일부는 간편하게 웹 링크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공유하거나 함께 편집할 수 있다.
5지금은 다양한 사람과 협업하고 개인 작업도 하다 보니 작업물의 경우 폴더를 구분하게 된다. 누구와 함께한 작업인지에 따라 크게 폴더를 구분하고, 그다음은 프로젝트 성격과 상관없이 시작된 날짜와 프로젝트 이름을 적은 폴더에 파일들을 넣어 정리한다.
6인스타그램은 많은 사람과 한번에 소통할 수 있는 창구다. 간편하게 소식을 전할 수 있고 내가 본 예쁜 것들을 자랑할 수 있어서 좋아한다. 2022년에 포트폴리오 삼아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작업물을 한 곳에 정리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나를 파악하기 좋은 곳이지만 정리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요즘은 거의 업데이트하지 않았다. 2년쯤 지났으니 새로 수행한 프로젝트를 올릴 시점일지도.
*각주
1.SM엔터테인먼트의 후원으로 마인드풀가드너스 등 여러 주체와 협업해 조성한 서울숲 내 정원이다. 도심 생물 다양성 및 생태 감수성 증진을 목표로 삼은 곳이다. 역시 최지은과 함께 설계하고 여러사람과 협업해 만들었으며 올해 5월 확장 공사를 마쳤다.
신영재는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사무소 HLD에서 4년간 근무했다. 현재는 생태적 정원설계 및 시공 스튜디오 초신성과 디자인·아트 스튜디오 madswanattack(미친백조의공격)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심연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고 그들이 자리할 곳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조경가와 시인은 닮았다고 생각한다. 작고 여린 것들이 쉬이 잊히는 옹색한 시대에 정의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고민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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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조경을 흔히 식물을 다루는 장르로 한정하지만, 실은 돌, 물, 철, 유리 같은 유형의 소재부터 빛, 소리, 바람 같은 무형의 소재가 경관을 구성한다. 마운딩, 데크, 루버, 포장 등 소재와 결합된 설계 세부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소재의 작은 차이는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들어낸다. 재료 그 자체가 때로는 실험적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하는 자극제, 풀리지 않는 문제의 독특한 설계 해법이 되기도 한다. 소재는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공간의 콘셉트와 내용이 되기도 하고, 색다른 구조와 분위기를 만들어 조경의 완성도에 영향을 미친다.
좋은 설계는 도면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조경가는 자신의 창조성을 어떤 재료로 표현하고, 어떤 방식으로 공간에 구현하고 있을까. 차별화된 공간의 한 끗을 만드는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소재를 선택한 이유, 재료를 다루는 방식, 그 소재만이 주는 감각, 설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재료 가공 방법, 새롭게 발견한 소재 설계 방식 등 소재와 관련한 경험과 고민을 통해 소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작은 길라잡이를 제공하고자 한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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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의 부활 _ 장혁준
보이지 않는 바람들 _ 조용준
조경의 웜톤 _ 최영준
물의 모양 드러내기 _ 이호영
경관의 깊이와 질감을 만드는 돌 _ 이형석
철의 선명한 음색 _ 강한솔
공간에 깊이를 더하는 미스트 _ 김용희
나무를 다루는 손 _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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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표면의 부활
포장은 결과물을 지칭한다. 과정의 단어라기보다는 결과의 단어다. 그러므로 설계를 하면서 포장을 따로 떼어내 사고하지 않는다. 후행적으로 납작한 표면의 단단한 일부를 포장이라고 규정할 뿐이다. 이미 단단해진 결과물을 논할 땐 도구적 관점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기능이 무엇인지, 가격은 저렴한지, 공사 속도는 빠른지, 충분히 튼튼한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유연한 논의가 아닌 딱딱한 정답이 기대되는 질문을 하기엔 포장에 내재된 기능이 아쉽다.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포장이 단단해지기 전으로 돌아가 과정의 단어인 말랑말랑한 ‘표면’을 이야기해보자. 설계 과정에서 표면을 대하는 태도(사실 설계 태도와 다르지 않다)와 물화된 의지의 단편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류는 인간을 재발견하면서 대성당의 시대를 종결했다. 나아가 데카르트가 영혼의 세계에서 물질의 세계를 분리해내자 주술의 신앙이 아닌 합리적 이성이 세상을 다스리는 근대가 시작됐다. 근대는 구텐베르크로부터 시작된 인쇄술을 날개 삼아 폭발적으로 정보를 교환했고 마침내 계몽의 시대가 도래했다. 근대는 실로 괄목할 만한 과학적 발견을 이뤄냈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은 더 이상 의학의 참고서가 아니라 관찰과 이해의 대상이 됐다. 산과 바다는 두려운 미지가 아니라 정복의 대상이 됐다. 인류는 지구와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진보의 미래를 꿈꾸었다. 근대가 선사한 이성이라는 빛은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근대의 마지막은 전쟁과 독재였다. 인류라는 함선의 등대 같았던 빛은 실로 화염이었다.
옛날이야기를 한 이유는 지구를 뒤덮었던 화염의 불씨가 우리의 일상 공간과 더 나아가 표면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성, 정확히 말해 도구화된 이성은 공간 영역에서도 과학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제일의 가치로 설정했고,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지역, 신화, 개인, 역사, 전통, 장식, 감정, 자연과 같은 것들을 거세시켰다. 그리하여 도시는 자동차를 연료로 하는 기계가 됐고 주거는 아파트라는 화폐가 됐다. 그리고 우리가 딛고 있는 표면은 한 변이 200mm인 정사각의 투수형 콘크리트 블록으로 수렴하고 있다.
사실 콘크리트 블록은 잘못이 없다. 싸고 제작이 쉬우며(그러나 다른 규격을 쓰긴 어렵다. 물량이 많지 않은 이상 새로운 규격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시공이 쉽고 빠르다. 게다가 물 순환에 도움을 주지 않는가. 나쁜 게 하나도 없다. 단지 두려운 것은 이 합리성 뒤에 숨은 폭력이다. 감성을 미천한 것으로 취급해온 근대의 불씨가 표면에도 남아 있다. 콘크리트 블록은 정답이 되어가고 있다. 인구의 60% 이상이 아파트에 살면서 똑같은 표면을 걷는다. 공간은 행동을 지시한다. 남들과 다른 것을 참지 못하는 지금 한국 문화에 대해 표면의 도플갱어들도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이 다스리는 사회에서 대중문화는 필연적으로 비참해진다고 했다. 내일의 표면은 오늘보다 슬퍼져야만 하는 것일까.
연약한 개인이자 공간 문화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전투원으로서 내일의 표면을 상상하며 소소한 저항을 시도하고 있다. 합리적 설계안과 재료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 그다지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원탁 위에 함께 올려두자, 스테인드글라스가 강화 유리로 진화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우리 주변엔 쓸데없어 보이지만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 많다.
직물을 모방한 화강암
집합 주택인 에테르노 청담의 표면은 카펫이다. 운 좋게 서울 초호화 집합 주택 프로젝트 몇 가지를 연달아 하게 됐다. 그 중 두 번째 프로젝트가 에테르노 청담이다.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가 건축에 참여했고 아이유와 송중기가 분양 받았다고 해 세간에 오르내렸던 곳이다. 물론 수백 억의 분양가가 더 큰 화제가 됐지만. 설계를 시작하고 기존 도서들을 확인해 보니 생태 면적 확보를 위해 지상 모든 표면이 투수형 콘크리트 블록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걸 걷어내지 않는다면 화제성에 걸맞은 표면을 선사하기 어려워 보였다. 표면을 제외하고 생태면적률을 높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검토했다. 먼저 건축과 토목 분야에 간절한 호소문으로 협조를 구해 각자 영역에서 마른 수건을 짜내 최대한의 점수를 선물 받았다. 그리고 분양자들에게 사전 고지를 하고 분양된 각 세대의 테라스와 옥상 녹지까지 포함한 모든 종류의 녹지를 법이 요청하는 면적으로 삽입해 겨우 자유로운 표면을 만들어 냈다. 상상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초호화 주택의 조경에 대해 조금 솔직히 말해 보자면, 사치품이다. 학계와 산업의 최전선에서 외치고 있는 도시의 역할, 나아가 전 지구적 기후위기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이 명품백 구매의 이유가 되긴 어렵다. 물 순환과 탄소 순환을 위해 수억 원을 들여 정원을 조성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이용률이 높지도 않고 특별한 기능이 있지도 않으니 말이다. 명품백은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싶어 사는 것이다.
아름답고 누구나 쉽게 가지지 못하는 물건을 당신에게 선사한다는 게 여기에선 더 중요하다. 타 분야에 협조를 구할 때 이런 식으로 말했다. 걸어 다닐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한 번을 걷더라도 그 한 번의 경험이 우리 집 정원의 인상을 좌우할 수 있지 않을까. 근대는 개인적 취향이 깃든 사치품을 필연적으로 사멸한다 했지만 과거의 낭만적인 사치품이 지금의 예술품이 되지 않았는가. 사치품은 잘못이 없다. 가능성을 닫아버린 우리의 오만함을 되돌아볼 시간이다.
사실 처음부터 화려한 카펫을 깔고 싶었다. 카펫은 중동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실내 온기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으나 권력과 무역의 발달에 힘입어 예술적 가치를 얻게 됐다. 레드카펫은 도구가 아닌 상징이다. 카펫에 내재된 아우라를 장소화하고 싶었다. 넓은 외부에 진짜 카펫을 깔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직물이 갖는 패턴과 섬세한 디테일을 두 종류의 석재로 번안했다. 큰 면적에서 읽히는 패턴을 짜고 직물을 자세히 볼 때 눈에 들어오는 실 한 올의 유려함까지 번안하기 위해 5cm 폭의 얇은 돌을 패턴 사이에 교차시켰다. 남은 과제는 어떤 실을 사용해야 하는가다. 국내에서 흔히 쓰이는 화강암은 대부분 회색톤이다. 어디에나 무난하게 어울리고 때도 덜 타며 비교적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다. 건축 외장으로 사용된 흰색 세니아 스톤을 보니 내 직관은 초록색 카펫을 떠올렸고 석재상에 초록빛이 나는 화강암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2주가 지났을까, 저 멀리 북유럽에서 건너와 은은한 초록빛을 발사하는 화강암 샘플이 사무실로 도착했고 곧이어 현장에도 깔렸다. 에테르노 청담의 카펫은 그렇게 석화되어 물건에서 장소가 됐다.
땅을 발견한 콘크리트
대전 신세계 백화점 아트 앤드 사이언스Art and Science 옥상 표면은 깊고 무한한 땅이다. 모든 백화점 옥상 공원이 모든 시민에게 열려있으나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지상과 옥상을 24시간 연결하는 엘리베이터가 이곳이 공공 공간임을 웅변하고 있기때문이다. 이곳은 모두에게 열린 ‘옥상 정원’이다. 그렇기에 설계 핵심은 옥상 같지 않은 땅을 만드는 것이었다. 축구장 두 개가 넉넉히 들어가는 넓이의 옥상에 고저차 3m가 넘는 역동적 지형을 만들었다. 근원적으로 땅은 깊지만 표면은 얇다. 깊은 땅은 얕은 표면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표면은 우리를 매개한다. 다시 표현하면 얕음으로써 깊음을 취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땅의 형태를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단단히 굳힐 수 있는 콘크리트를 표면 재료로 선정했다. 시간이 더해지기 전 콘크리트는 점성이 높은 유체이기에 거푸집만 있다면 어떠한 형태든 만들어 낸다. 이곳의 거푸집은 비정형의 땅이고, 이 형태를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기에 콘크리트가 적절한 재료였다. 100mm 두께의 콘크리트를 단단함이 필요한 표면 위에 부었다. 콘크리트가 경화되어 밝게 빛나면서 땅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콘크리트는 근대의 상징과도 같다. 철근 콘크리트가 근대적 공간 문화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기계적 재료에 인간성의 향기를 입히기 위해 마감에 수공예 감성을 더했다. 콘크리트가 다 굳기 전에 일정 방향으로 빗자루질을 해 불규칙한 줄무늬 패턴을 입혔다. 옥상에 올라간 땅은 아무리 깊어도 3m가 넘지 않는다. 만약 진짜 깊음이 있다면 표면은 자칫 도구로 전략할 것이다. 표면은 없는 깊이를 있도록 하며 모두에게 다른 깊이를 상상하게 한다. 추동의 힘을 가진 예술이 진리보다 값지듯 얕음은 때론 깊음보다 가치 있다.
빛나는 콘크리트가 수직적 깊이를 드러낸다면 흰 바다의 물고기 떼처럼 흘러가는 검정 띠는 수평적 무한함을 강조한다. 검정 띠는 검은색 안료를 섞은 골재 노출 콘크리트다. 눈을 사로잡기 위해 흰 표면과 대조적인 색을 섞고 마감도 바탕 표면과 다른 골재 노출 방식을 선택했다. 검정 띠는 울퉁불퉁한 지형과 휘몰아치는 선형 위에 얹혀 있기에 그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곳에서 표면의 끝은 가려진다. 표면은 가려짐으로써 무한함을 상상하게 한다.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와의 그림 대결에서 캔버스의 반을 차지하는 커튼을 그려 제욱시스로 하여금 걷어내는 행위를 하게 했다. 아름다움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했던가. 제욱시스는 호기심을 품은 자신에게 패배를 선언했다. 모름의 깊이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고 행동하게 한다. 여기 빛나는 콘크리트 표면은 알 수 없는 땅의 깊이를 생각하게 하고 가려진 저곳으로 발걸음을 떼게 만드는 커튼이다.
사라짐을 애도하는 점판암
온천 호텔 유원재의 리셉션을 담고 있는 환영의 못 표면은 돌너와 지붕이다. 유원재는 한국식 온천 문화 활성화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사명감을 안고 탄생했다. 충청북도 충주 수안보는 한국 최초 천연 온천수가 자연적으로 솟아올랐던 지역으로 먼 옛날부터 왕의 온천으로 불렸으며, 1980~1990년대에는 매년 5백만 명 이상 찾은 관광지였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던 탓일까. 지금의 수안보는 유령 도시라는 수식어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니 유원재는 아스라이 잊힌 한국 온천 문화에 대한 애도이자 부활의 장소다.
온천 도시에 있는 온천 호텔이니 방문객이 물을 반길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건축이 리셉션을 별동처럼 뽑아주니 그 주위를 얕은 물로 채웠다. 물과 반영 효과가 중요하니 물에 잠긴 수조 표면은 튀지 않도록 검은색의 평평한 석재를 깔거나 쇄석을 포설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엔 물을 투과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질감을 가진 점판암을 겹쳐 깔았다. 한반도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옥천 습곡대라는 습곡-단층대가 가로지르고 있다. 이 습곡대가 충북 지역에도 분포하는데, 이곳에서 퇴적암이 강한 압력으로 변성되어 점판암이 만들어진다. 과거 이 지역에 짚이나 기와를 구하기 힘든 산지에 사는 사람들이 산에서 구한 점판암을 기와처럼 널어 용의 비늘 같은 지붕을 만들곤 했다. 제작술과 운반술의 한계가 인간의 아이디어와 만나 탄생한 풍경인 이 지붕을 돌너와 지붕이라 하며 돌너와 지붕을 가진 집을 돌너와 집이라 한다. 이 용의 비닐은 과거엔 정주 환경을 구축하는 도구로서 가장 높은 곳에서 존재를 보이지도 않은 채 우릴 지켜주었으나 지금은 아름다움으로 남았다. 과거가 현대에 용의 비늘을 선물했다. 허나 이를 개선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에 의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애도의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말이다.
가장 위에서 물을 막았던 점판암은 이제 유원재의 가장 아래에서 물을 담는다. 50mm 얕은 물은 온천 문화 부활의 성소인 건축 그리고 사람을 표면에 반영해 풍경화를 그린다. 그리고 얕음으로 인해 점판암에 빛을 선사하는데, 빛을 받아 존재하게 된 점판암은 물이 그린 풍경화 위에 자신의 모습을 덧칠한다. 그리하여 표면은 건축을 감싸 안았다. 돌너와 지붕은 이제 가장 낮은 곳에서 새로운 온천 문화를 지키는 용의 비닐로 부활했다. 장소가 사라진 문화를 애도하고 부활을 마중하듯 표면은 사라진 구축술을 체화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정말 이것이 저것을 죽였을까. 2019년 노트르담 대성당에 화재가 발생해 첨탑과 목조 지붕이 붕괴됐다. 슬퍼했던 이들이 흘렸던 눈물은 관 속에서 시체를 꺼내 안은 기만이었을까. 배우지 못한 자들로의 성서로서 성당은 죽었을지 모르나 영혼은 예술로서 부활해 수백 년간 빛을 내뿜었다. 그러므로 부활은 복제가 아닌 새로운 세상으로의 날개 짓이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님은 육신이 아닌 정신으로 20세기를 넘게 살고 있다. 표면은 부활을 꿈꾼다.
장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도시조경설계연구실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짓기 욕망에 충실하고자 조경을 하고 있다. 이야기와 형태의 합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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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보이지 않는 바람들
누구나 설계 과정에서 바람에 대해 한번쯤 고민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은유적 경관을 위한 소재로, 때로는 미세먼지, 미기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람은 보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예측이 어렵다. 바람의 특성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하지만, 잘 파악한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018년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바람 때문에 난감했던 경험이 있다. 상가 일대에 위치한 면적 120m2의 작은 대상지는 요란한 간판들과 관리되지 않는 녹지와 포장 상태 때문에 편안하게 쉴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중앙에 자리 잡은 느티나무 정자목 앞에는 눈꽃 조형물이 달린 조명 구조물이 계절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주변의 어지러운 풍경을 가리기 위해 눈꽃 조형물을 철거하고 노란색 아크릴 소재의 블라인드 스크린을 달았다. 그런데 이 스크린이 바람이 세질 때마다 심하게 흔들려 대상지가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계속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한번은 자리를 비운 사이 강한 바람으로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다. 대상지를 관찰하며 바람의 세기에 따라 움직임의 정도를 파악하게 됐고, 이를 기록하면서 바람에도 다양한 명칭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골칫거리가 관심거리로 바뀌게 되었다.
바람을 표현하는 매체들
바람은 대기의 흐름이다. 대기의 흐름에 반응하는 매개체만 있다면 바람을 시각화할 수 있다. 그래서 매개체는 바람에 움직일 만큼 충분히 가벼워야 한다. KT 디지코 가든에 설치한 윈드 웨이브에는 3×5cm 알루미늄 소재의 작은 패널이 달려 있다. 패널의 무게는 매우 가벼웠고, 패널 상단에는 패널을 고정하면서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를 설치했다. 3,000개 패널들이 움직이면서 바람의 흐름을 연출하는데, 다이내믹한 경관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패널의 전체 흐름이 느껴질 수 있는 꽤 넓은 면적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설계자의 의도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구조물이라 공사비 예산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초기 제안에서는 필로티 하부의 꽤 넓은 면적을 스크린으로 가리면서 내부에 시크릿가든을 제안했다. 높이 8m, 폭원 30m 정도였는데, 현재 조성된 규모와 비교할 때 4배 정도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결국 공사비 여건을 반영하여 환기구 주변으로 규모를 축소해 설치했다.
또 매개체의 소재가 바람의 세기에 어느 정도 저항성을 가져야 한다. 너무 가볍거나 파손이 쉬운 소재는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 적합지 않다. 2009년 반포한강공원을 조성하면서, 반포대교 교량 하부의 경관을 개선하기 위해 교각을 따라 곡선형 철판을 설치했다. 그런데 한강의 강한 바람으로 인해 철판이 결국 구겨져 못쓰게 됐다. 꽤 두꺼웠다고 생각했는데 한강의 거센 바람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작년 반포한강공원 내 물방울 놀이터를 조성할 때 침수와 바람 부분을 특히 많이 고민했다. 놀이 공간 중심에는 높이 3m의 7개 마법 지팡이(각주 1)가 있는데, 상부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철판에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풍향계처럼 돌아가는 7개 철판은 미스트와 함께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로 연출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었다. 새겨진 글자를 읽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무게가 있는 철판으로 디자인했다. 다행히 작년 겨울철 한강의 강한 바람에도 잘 버텼지만 생각만큼 많은 회전이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어두운 밤에도 바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조명의 빛이 매개체가 되면 가능하다. KT 디지코 가든의 주차장 출입구 상부 하늘정원에는 초지 언덕 풍경의 그라스류를 식재했고, 그 사이사이에 갈대 조명들을 설치했다. 200개의 갈대 조명이 일정한 간격의 그리드 패턴으로 놓여 있어서 멀리서 보면 빛의 표면으로 읽힌다. 갈대 조명 빛의 세기를 조절할 수 있는데, 이를 이용해 바람이 부는 듯한 빛의 물결을 연출했다. 흔들리는 그라스와 함께 빛의 움직임으로 바람을 시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원 설계안에서는 바람을 측정하는 장치를 5개 정도 언덕 주변에 설치해 주변 바람 세기에 따라 조명이 반응해 빛의 세기가 조절되도록 설계했다. 하지만 시공 과정에서 다른 공정 비용 증가로 인해 바람 측정 장치와 시스템 비용이 축소되어 설계안이 변경됐다. 하지만 이 장치와 시스템에 큰 비용이 소요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환경에 반응하는 특별한 야간 경관을 연출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바람이 야기하는 문제들
겨울철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과 도심 내 미기후 조절, 봄철마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나 미세먼지 등 기후 이슈는 도시계획부터 규모가 작은 외부 공간 설계까지 최근 들어 조경가가 빈번히 접하는 문제다. 해결책으로 방풍림, 바람길 숲, 미세먼지 차단숲 등이 자주 언급된다. 새로운 광화문광장의 서측 편에는 그늘을 만들고 미세먼지를 저감하기 위한 다층 구조의 수목을 식재했다. 그런데 한 연구에서 광장의 수목들이 그늘을 만들어 표면 온도를 저감하기는 하지만 바람의 흐름을 막아 광장의 쾌적감을 오히려 떨어뜨린다는 결과가 발표됐다.
쾌적한 이용 환경을 고려해 현재 광장에 식재된 수목의 배치와는 다른 배식이 제안됐다. 이 논문 결과는 서울시와 설계사를 곤혹스럽게 했다. 나 역시 김유진 교수(강릉원주대학교) 연구팀과 광장 이전과 이후의 온도, 습도, 바람을 측정하고 시뮬레이션하며 연구를 진행했고, 결과는 앞선 연구와 달리 수목 식재 공간 및 식재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쾌적감이 전반적으로 좋아지는 결과값이 도출됐다. 그런데 두 연구에서 의미 있게 볼 것은 일부 구간의 조밀하게 식재된 수목에 의해 바람이 정체되면서 시민들이 느끼는 쾌적감이 상대적으로 낮은 구간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 사례로 볼 때 앞으로 도심에 숲들이 생겨나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다.
최근 DL이앤씨가 새만금 간척지에 국립새만금수목원을 짓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일 년 전 기본 및 실시설계를 진행하면서 대상지 중심에 위치한 주제 전시원 수목들의 생육을 고려해 북서풍의 찬바람을 막기 위한 거대한 마운딩과 방풍림을 계획했다. 대상지 북서측에 배치한 높이 11m의 언덕은 시뮬레이션 결과 주제 전시 지역(해양성 기후를 테마로 다양한 수종이 식재된 중심 전시 공간)으로 부는 북서풍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덕분에 수목의 건조와 냉해 피해가 최소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풍림 조성 시에 북사면 세 개의 단을 따라 방풍책을 설치했다. 새만금 지역에서 방풍책의 유무에 따른 방풍림의 성장 속도와 수목 생육 상태를 연구한 내용을 고려해 설계한 것이다. 바람으로 인한 문제를 지형과 숲을 활용해 해결하는 방식은 여전히 가장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체계적이고 근거에 기반한 설계 접근이 필요하고, 좀 더 구체적인 방식이 개발되어야 한다. 우리가 바람과 관련된 환경 문제를 다룰 때 ‘숲’이라는 일반적 해결책만 안이하게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풍백(각주 2)을 꿈꾸며 그린 계획들
모든 공항의 활주로에는 각기 다른 숫자가 새겨져 있다. 이 숫자는 방위각을 나타내는데, 바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하늘로 떠오르는 양력을 얻을 수 있고, 착륙하면서 속도를 줄일 때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 재미난 사실에서 영감 받은 콘셉트로 계획안을 만들어 오성공원 설계공모에 출품했다. 이 공모는 인천공항에 인접한 오성산이 공항 조성으로 인해 잘려나간 부지에 근린공원을 만드는 사업이다. 방위각 33 활주로와 평행한 열린 경관축과 서해와 공항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방위각 01 축이 공원의 골격이 된다. 인천공항의 상징성을 담은 콘셉트와 계획안은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아쉽게 2등을 해 페이퍼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로 남게 됐다.
봄이면 중국으로부터 불어오는 미세먼지로 서울 도심에서 파란 하늘을 보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을 둔 부모들은 외부 활동을 하기에 앞서 미세먼지를 체크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2019년 서울형 저이용 도시공간 혁신 아이디어 공모전에 참여하면서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공원 일대에 더스트캡처(Dust Capture)를 제안해 대상을 받았다. 거미 생태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미세먼지 채집망은 적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클린 타워 기둥들에 의해 지탱된다. 아이디어 공모였기 때문에 현실성보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바람이라는 소재는 외부 공간을 다루는 조경가에게는 피해가기 어려운 설계 요소다. 적은 설계비와 한정된 시간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두고 불필요한 고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또한 불확실한 변수이기에 설계자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조경설계가 완결된 작품을 만들기보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지속하는 시스템과 관계를 만드는 작업이라면, 바람을 상상하는 일은 충분히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각주 정리
1. 여름철 더위를 식혀줄 목적으로 설치된 미스트 폴이다. 놀이 공간 특성을 고려해 마치 한강 설화 같은 이야기를 지어 한강 마법 지팡이로 명명했다
2. 바람을 다스리는 환웅의 신하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를 이끌고, 워커힐 더글라스정원 기본 및 실시설계, 이스탄불 하천 회복 프로젝트, 종로구 통합청사 설계공모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개인 자격으로 즉흥적인 기획, 전시하지 않는 그래픽 작업 등을 즐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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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조경의 웜톤
우리 발밑에는 데크가 많다
동네 뒷산을 오르는 길도 데크, 캠핑장에서 텐트를 치는 바닥판도 데크, 잠시 쉬러 가는 옥상과 테라스에도 데크가 있다. 데크는 우리 발밑에 널려 있다. 항만 분야에서 갑판을 칭하는 용어에서 유래된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실외의 특정한 높이에 만들어진 평평한 판을 뜻하지만, ‘목재’ 데크를 대신하는 말이라 할 정도로 목재 소재의 데크가 대중화됐다. 목재 널판의 연속된 마감이 주는 자연스러운 갈색 결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말이 된 지 오래다. 데크는 때로 수직으로 서 있다. 건물 외벽을 마감하기도 하고, 목재로 된 펜스는 데크가 서 있는 꼴이다. 루버 또한 목재로 된 부재의 연속된 마감이 주는 나뭇결의 질감이 기본이다. 차이점은 띄어진 널판 사이 간격에서 강조되는 평행선의 질서가 세련된 정연함을 강화해주고, 그 벌어진 간극에 드리우는 명과 암의 균형이 깊이감을 부여한다.
따뜻하고 가벼운
비바람과 사계절의 매서움을 견뎌야 하는 외부 공간에 무언가를 만들 때, 목재 면은 조경의 유일한 ‘엉뜨(엉덩이를 따뜻하게 해주는 기능)’ 옵션과도 같다. 열전도율이 낮은 목재는 여름엔 평상처럼 시원하고, 겨울엔 피부를 접촉할 만한 유일한 조경 소재다. 난간 등의 손스침과 벤치의 상판이 목재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부에 닿기 전부터 목재 데크의 온화한 나무색 톤이 시각으로 다가오고 만지면 더욱 편안한 감각을 준다. 데크는 가볍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적으로 무겁지 않다. 옥상에서 데크를 자주 만나는 이유가 비중과 경도가 큰 하드우드가 석재나 콘크리트 등 여타 조경 재료에 비하면 훨씬 가볍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에서 따뜻하고 가벼운 데크는 조경 팔레트에서 웜톤의 큰 축이 된다. 상하이 쇼핑몰 옥상부에 덮어야 할 시설이 있어 중부를 높인 데크 면과 기준면을 잇는 도구이자 편안한 라운지 의자가 되기를 의도했던 옥상 정원의 한 가구는 편안함에 신남이 더해져 미끄럼틀로 더 잘 쓰였다. 가구 단면의 유선형이 한몫했지만, 넓게 드러난 목재 면이 주는 온화한 감각이 기여한 바가 더 컸다.
살짝 비트니 살짝 설렜어
널(판), 장선, 멍에는 데크를 구성하는 구조적 삼요소다. 장선과 멍에를 엮은 데크 하부의 가지처럼 뻗어 있는 격자형 구조를 하지라고도 한다. 최하단에 멍에가 기초 구조를 잡고, 그 위에 장선이 멍에와 직교 방향으로 깔리고, 직교 방향으로 널판이 깔린다. 장선은 널 바로 아래에서 데크 면을 고정시키는데, 널판 표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힌 결합나사못, 소위 피스 자국들은 그 아래 장선의 자취를 드러낸다. 일반적인 데크 면은 하지 구조 질서의 한 방향으로 평행하게 뻗어가는 ‘데크 깔기’라는 방식으로 깔리며, 널판이 펼쳐져야 하는 구조를 최적화하고 비용과 공기를 모두 고려할 때 합리적이다. 데크 길과 같은 좁은 영역에서는 한 방향의 반복과 수평 확장이 문제가 없지만, 넓은 영역에서 단 방향의 반복은 단조로운 공간이 되기 십상이다. 체커보드 패턴이나 헤링본 같은 무늬 배치의 고려도 필요하다. 무한한 반복성을 수평적 확장의 도구로 활용한 장소가 일본 나오시마 예술 섬 베네세 하우스(Benesse House) 앞 수변 데크다. 수평선을 향해 곧게 뻗은 널의 평행선은 데크 면을 해수면과 동등한 위치로 느끼게 한다.
데크 깔기의 각도를 중간에 한두 번만 살짝 비틀어 주거나 서로 다른 두 각도의 시작을 교차시키면 살짝 설레는 지점에 도달한다. 작은 개인 프로젝트에서 널 방향을 지그재그로 비트는 디테일을 제안했다가 데크 기술자에게 노여움을 잔뜩 샀다. 한 번의 작은 회전으로 만족해야 했던 기억도 있던 반면, 적극적인 회전과 조합으로 기대 이상의 감각적 효과를 만든 적도있다. 데크 면의 질서가 만드는 결의 무늬로 조합할 수 있는 패턴과 중첩은 예상 못 할 새로운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최영준은 조경설계를 가르치고 조경 디자인의 성능을 연구하는 교수지만, 정체성의 중심에는 외부 공간을 그리고 만들어가는 조경가가 자리한다. 매년 다시금 찾아가고 싶은 장소를 하나씩 만들어 이웃과 공유하는 기쁨을 위해 설계하고 짓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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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물의 모양 드러내기
물은 상당히 동적이다. 조금만 기울어져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흘러가버리기 때문이다. 물은 스며들고 흐르기 마련이라서, 자연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물은 사실 멀리서 바라보는 바다와 호수가 아닌 이상 찾기 쉽지 않다. 그래서 고요한 리플렉션 폰드나 인피니티 풀은 우리에게 생경한 경관이고, 많은 조경가가 그 경관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는 물의 수평성만을 보여준다.
물의 동적 특성을 잘 볼 수 있는 곳은 계곡이다. 빠르게 흐르고 떨어지고 휘감아 돌아가고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다가 어느새 느려지기도 하고 자갈 위를 스치듯 흐르는 다양한 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계곡을 바라볼 때, 물 자체보다는 계곡을 이루는 지형, 암반, 식생 등 전체적인 공간과 경관으로서 인식한다. 그래서 아파트 조경으로 계류를 만들 때는 물의 다양한 동적 특성을 전달하기보다는 계곡의 바위와 식생같은 자연 요소를 미니어처로 구현해 경관 경험을 전달하게 된다.
HLD에서 최근 만든 몇 개 프로젝트는 물의 순수한 본연의 특성, 질감에 더 집중하려 했다. 전달하려 한 물의 경험은 계곡, 폭포, 연못 같은 자연을 재생하는 방식의 경관 경험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계곡의 경관을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물의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직접 목격하며 좋다고 느꼈던 수경 시설을 몇 가지 이야기 해보자면, 미국 보스턴 노스엔드 공원과 뉴욕 하이라인에 흐르는 얕은 물이 있다. 2% 정도의 경사가 있는 포장면 위에 5~10mm 두께의 얇은 물이 요동치지 않고 깨끗하게 흐르는데, 손으로 만지거나 발을 담그면 바로 물이 갈라지면서 역동성을 드러낸다. 사람이 들어가지 않으면 정적으로 주변 경관을 거칠게 반사시키고, 사람이나 나뭇잎이 수면에 닿는 순간 동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도시 환경에서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쾌적함,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한 성공적인 물의 설계다.
20년 전쯤 봤던 시드니 올림픽 공원의 대포 분수도 잊을 수 없다. 하그리브스가 설계한 이 물은 스펙터클하다고 할 만큼 강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자연에서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데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냥 경관의 일부로 여겨진다. 이 대포 분수가 뿜은 물 역시 완벽하게 물리 법칙을 따르며 10m가 넘는 궤적을 따라 물방울을 흩뿌리지만, 짧은 순간 굉장한 재미를 준다.
뉴욕 그라운드 제로에 있는 메모리얼의 물도 감동적이다. 물의 소리, 시각뿐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면 부서져 부유하고 있는 작은 물방울들이 몸에 닿으며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시각, 촉각, 청각을 다 자극한 공감각적인 물의 활용이다.
스위스에서 방문했던 프리트호프 회른을리(Friedhof Hörnli) 묘지의 물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계절은 낙엽이 모두 지고 황량함이 느껴지는 겨울이었다. 묘역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길의 한쪽에 덮개가 없는 콘크리트 배수로를 따라 물이 졸졸 흘러 내려온다. 만약 그 물 요소가 없었다면 묘지라는 점 때문에 축 가라앉는 일관적인 감정밖에 들지 않았을 텐데, 계속 들려오는 물소리의 경쾌함이 공간의 감각적 균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간 여러 설계 프로젝트에서 물을 다뤘다. 도쿄 오테마치원 정원에 있는 수경 시설처럼 디테일을 아주 치밀하게 고민해야 하는 훈련을 하기도 했다. 화성 동탄 국제작가정원인 워터리본은 캐서린 구스타프슨과 그가 이끄는 GGN과 함께한 작업으로, 그 과정에서 물의 강력한 잠재력을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측면을 배웠다. 특히 수로의 기울기 변화에 따른 물의 속도와 물결의 변화를 테스트하는 과정과 수로를 구성하는 수천 개의 석재 가공을 위한 스터디를 통해 새로운 노하우를 쌓을 수 있었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이호영은 고려대학교에서 원예학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을 전공했으며, 조경설계 서안, 미국 에이컴(AECOM), 오피스 ma(officema)에서 조경과 도시설계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조경설계사무소 HLD를 설립해 광범위한 분석과 접근 방법을 통해 대상지의 공간적 가치를 향상시키고, 그 장소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인문·사회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해법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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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로 푸는 조경 디테일] 철의 선명한 음색
조경과 조형
설계를 얼마나 드러나게 할 것인가 혹은 얼마나 드러나게 하고 싶은가에 대한 입장은 설계자마다 미묘하면서도 확연하게 다르다. “자연스럽게 해주세요”라는 말은 조경가가 가장 많이 요청받는 표현이다. 결코 쉽게 정의될 수 없는 자연, 자연주의라는 단어가 동시대의 흐름 속에 묘하게 자리 잡은 모습도 보인다. 물론 모든 설계가는 프로젝트의 성격과 본인 앞에 놓인 상황에 따라 자연스러움의 농도를 달리 할 것이다. 그럼에도 조경을 대하는 근간의 입장이 꽤나 확고함을 인지한 순간이 적지 않다. 하물며 자연스러운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마치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모습을 구축하는 방식에 대한 선호가 적지 않다. 나 역시 의도적으로 그러한 설계를 하는 경우가 꽤나 있다. 다만 공간을 방문한 사람에게 이곳이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점을 인지시킬 수 있는 방식을 조금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조경 공간에서 설계가의 의도와 개입을 표현하는 효과적 수단 중 하나는 조형이다. 내게 조형은 직선이냐 곡선이냐 비정형이냐를 가르지 않고 포괄하는 것이다. 본연의 자연에서는 보기 어려운 디자인적 조형을 사용하는 것은 천연의 자연과 조경의 작업을 차별화하는 데 효용이 크다. 식물이라는 가장 든든한 소재를 등에 업고 있음을 잘 알고 있고 식물 자체로 조형을 빚어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식물과 조합해 사용하는 의도적 조형은 조경가의 손길이 닿았음을 알리는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 그 조형은 돌이나 콘크리트, 목재, 철 등 다른 소재와 만나 각 공간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중 철은 꽤 목소리를 잘 내는 소재다.
대비의 소재
철은 차갑고 단단하며 이지적이다. 조경이라는 분야가 지닌 전반적 심상을 떠올릴 때나 조경이 다루는 식물이라는 소재를 함께 고려했을 때, 철은 많은 측면에서 조경이 내포한 이미지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하다. 돌이라는 소재가 철과 어느 정도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철이 조금 더 먼 지점에서 본연의 특성을 발현하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철은 자연 소재이지만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모습이 되려면 일련의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지점에서 철의 고유한 특성이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태생적으로는 자연물이지만 자연스럽다는 표현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소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조형과 연계해 설계 의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주는 소재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철은 특히 식물과 함께 사용했을 때 가장 즉각적인 대비의 효과를 자아낸다. 바람이 일어 나뭇잎과 가지가 서서히 흔들릴 때에도 철재 요소들은 그 곁에 굳건히 서 있다. 손가락 틈으로 빠져나가면서 느껴지는 식물 특유의 부드럽고 포근한 질감과 달리, 만지지 않더라도 알고 있는 철재의 차가운 표면은 이미 반대의 지점에 위치한다. 식물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감상과 낭만을 선사하지만, 철로 만든 무언가는 고정된 상과 함께 프로젝트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명료하게 전달한다. 병치와 대비를 통해 한 장면의 조화를 구상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철재는 그 구상을 가장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소재 중 하나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강한솔은 현대 도시를 만들어가는 건축, 조경, 도시재생, 문화 기획에 기반을 둔 디자이너 그룹 얼라이브어스(ALIVEUS)의 조경가다. 대규모 어바니즘부터 중소 규모 공간에 이르기까지 조경 디자인 실무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해왔다. 도시 공간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바탕으로 큰 아젠다와 세심한 디테일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