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SLA Best Books of 2024
‘2024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10권의 조경 서적
자연, 설계, 그리고 기후변화에 이르기까지, 조경가에게 새로운 정보와 영감을 주는 올해의 신간 도서를 만나보자. 2024년 미국조경가협회ASLA가 선정한 10권의 최고의 책을 살펴보자.
1. 조경가가 사랑하는 30그루의 나무
Ron Henderson, 30 Trees: And Why Landscape Architects Love Them , Birkhauser, 2023
전 세계 30인의 조경가가 좋아하는 나무와 이에 얽힌 개인적인 이야기, 나무의 역사를 함께 소개한다. 책 속에서 나무 소개에 나선 조경가들은 나무가 설계 프로젝트에서 어떻게 사용됐는지, 무엇을 연상시키는지 설명한다. 일리노이 공과대학 조경학 교수이자 ASLA의 멤버인 론 헨더슨(Ron Henderson)이 편집을 맡았고 조경가들이 엄선한 나무에 대한 식물학적 설명을 곁들였다. 조경가로는 섀넌 니콜(Shannon Nichol), 로리 올린(Laurie Olin), 마리오 슈예트난(Mario Schjetnan), 게리 힐더브랜드(Gary Hilderbrand), 엘리자베스 모솝(Elizabeth Mossop) 등 ASLA 멤버들이 함께 참여했다.
2. 아프리카 선조들의 정원: 국제 아프리카계 미국인 박물관의 역사와 기억
Walter Hood, Dr. Tonya M. Matthews, Bernard E. Powers Jr., The African Ancestors Garden: History and Memory at the International African American Museum, The Monacelli Press, 2024
저자 월터 후드(Walter Hood)는 조경가이자 예술가다. 그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찰스턴(Charleston) 시에 위치한 국제 아프리카계 미국인 박물관(IAAM)의 강렬한 풍경이 어떻게 설계됐는지를 아름다운 삽화와 함께 소개한다. 이 박물관은 미국에 노예로 도착한 아프리카인 대부분이 처음 발을 내디뎠던 개즈던스 부두(Gasden’s Wharf)에 건립됐다. 아프리카의 민속 식물로 구성된 정원과 인피니티 풀을 갖춘 박물관의 정경은 “같은 공간에 이처럼 서로 다른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며, 과거를 발굴하고 기리는 동시에 새로운 대화와 축하를 위한 공간을 보여준다.
3. 브루클린 브리지 공원: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츠
Michael Van Valkenburgh, Elijah Chilton, Amanda Hesser, Julie Bargmann, Brooklyn Bridge Park: 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 The Monacelli Press, 2024
마이클 반 발켄버그(Michael Van Valkenburgh)는 브루클린 해안가에 버려졌던 여섯 개의 선박 부두가 어떻게 한 세대 만에 시민들이 많이 찾는 85에이커의 공원이자 뉴욕에서 가장 거대한 공공 공간이 될 수 있었는지를 쉽게 풀어 소개한다. 브루클린 브리지 공원(Brooklyn Birdge Park)은 바비큐장뿐 아니라 운동장, 놀이터 등을 갖추어 누구나 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또한 생태적 식재와 기후변화에 대한 회복탄력성을 갖춘 공원의 모델이기도 하다. 커피 테이블에 앉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여유롭게 편집된 이 책에는 250개의 실감나는 도판과 조경설계를 담당했던 줄리 바그만(Julie Bargmann)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책을 읽고 난 뒤 당신이 실천할 수 있는 행동을 꼽는다면, 브루클린에 가는 것이 아닐까.
4. 불의 디자인: 불의 시대에 대한 저항과 공동의 창조, 그리고 후퇴
Emily Schlickman, Brett Milligan, Design by Fire: Resistance, Co-Creation, and Retreat in the Pyrocene, Routledge, 2024
우리는 인류가 불을 활용하는 지질학적 시대, 파이루신(Pyrocene)의 시대에 살고 있다. 책의 저자인 에밀리 슐릭만(Emily Schlickman)과 브렛 밀리건(Brett Miligan)은 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을 이용한 27가지 설계 전략에 대해 소개한다. “변화무쌍한 야생 지대, 그리고 야생과 도시의 경계는 디자인이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역”이다. 특히 이 책은 북미 서부와 지중해 유역, 남아프리카 케이프, 칠레 중부, 호주 일부 지역 등 지중해성 기후를 공유하는 전 세계 다섯 곳의 화재 취약 지역에 주목했다. 여러 과학자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산불은 더 이상 각 지역의 국지적 재해가 아니며, 더 큰 지구환경적 시스템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5. 빛을 먹는 포식자: 보이지 않는 식물 지성의 세계를 통해 지구의 생명체를 새롭게 이해하는 법
Zoë Schlanger, The Light Eaters: How the Unseen World of Plant Intelligence Offers a New Understanding of Life on Earth , Harper, 2024
“식물이 되려면 굉장한 생물학적 창의성이 필요하다. 식물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린다는 약점을 극복하고 생존하고 번성하기 위해 독창적인 생존 전략을 채택해 왔다.” 최근 과학자들은 식물도 의사소통을 하고 동족을 인식하며 사회적으로 행동하고, 소리를 듣고 몸체를 변형시켜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수명 주기에 대한 유용한 정보와 기억을 저장하고 동물을 속이는 트릭을 사용하는 등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 애틀랜틱The Atlantic』의 환경과학 전문 기자이자 저자인 조에 슐랭거(Zoë Schlanger)는 최근 식물학 분야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 식물이 어떻게 소통하고 감지하고 학습하며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지 설명한다
6. 환경 디자이너를 위한 현장 스케치
Chip Sullivan, Field Sketching for Environmental Designers , Routledge, 2024
이 책은 조경과 도시설계 드로잉을 연습하고자 하는 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하기 위한 입문서다. UC 버클리의 조경학과 교수이자 저자인 칩 설리번(Chip Sullivan)은 이 스케치 안내서는 “단순히 관찰한 것의 모방을 넘어, 풍경이 지닌 의미와 영혼을 찾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고 소개한다. 초보자뿐 아니라 숙련된 설계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넘치는 영감과 실용적인 팁을 통해 스케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다음 산책 때는 이 책을 손에 들고 나가보자.
7. 노구치의 정원: 풍경이 만들어낸 조각
Marc Trieb, Noguchi’s Gardens: Landscape as Sculpture , ORO Editions, 2024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는 아카리 조명(Akari Light)과 공공 예술로 유명한 일본의 현대 예술가다. 한편으로는 “공간을 주요 수단으로 삼아” 조각의 풍경을 만들었던 조경가라고도 볼 수 있다. 조경사학자이자 UC 버클리의 명예 교수로서 많은 책을 집필해 온 마크 트라이브(Marc Trieb)는 노구치의 초기 설계안인 놀이터와 기념비 프로젝트부터 사후 완공된 일본 삿포로의 대형 공원까지, 실현되지 못한 설계안을 포함해 노구치의 다양한 조각 프로젝트가 실제 풍경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설명하고 비평한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희귀한 사진도 함께 제공했다.
8. 고운 모래, 모래, 진흙: 파내기와 쌓기, 우리가 공사 중인 세계
Rob Holmes, Gena Wirth, Brett Milligan, Silt Sand Slurry: Dredging, Sediment, and the World We Are Making , Applied Research + Design, 2024
퇴적물, 즉 쌓인 토사는 어디에 있고, 왜 쌓이며, 어떻게 미국 해안가의 미래에서 중심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해저에서 퇴적물을 파내 컨테이너선을 위한 수중 고속도로를 만들기도 하고, 홍수를 조절하기 위해 강 유역에서 토사를 퍼내기도 한다. 이러한 인위적 활동은 매년 자연적인 지질 활동보다 더 많은 퇴적물을 이동 시키고 있음에도, “현재와 미래의 삶의 조건을 형성하는” 지구 표면 퇴적물의 재구성에 대한 논의는 거의 진행된 바 없다. 책의 공동 저자인 로브 홈즈(Rob Holmes)와 브렛 밀리건(Brett Miligan), 제나 워스(Gena Wirth)는 “퇴적물을 지능적이고 민주적이며 공평하게 설계하자”는 강력한 행동 촉구문을 함께 작성하기도 했다. 이 책은 지각 단위의 규모에서 현대 생활의 인프라로 기능하는 퇴적물에 대한 조사 결과서이며, 풍부한 시각적 자료를 제공한다.
9. 미래 사색: 변화를 탐색하고 회복력을 키우며, 우리에게 필요한 도시를 함께 만들기 위한 설계 전략
Johanna Hof fman, Speculative Futures: Design Approaches to Navigate Change, Foster Resilience, and Co-Create the Cities We Need, North Atlantic Books, 2024
요한나 호프만(Johanna Hoffman)은 UC 버클리에서 조경학을 전공한 예술가이자 도시학자로, “새롭고 잠재력 있는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지역 공동체와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세계 만들기 world-making 방식은 “현존하는 세계를 넘어 언젠가 올 수 있는 미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호프만은 “예술, 영화, 소설, 산업 디자인” 등 창의적 분야의 종사자들이 “사색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자극하고 상상하고 꿈꾸는 법”에서 설계 전략의 영감을 얻었다. 이 책은 지역 공동체가 큰 꿈을 꾸고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새로운 참여 디자인 전략을 제시한다.
10. 왓 이프: 우리가 제대로 한다면? 기후 미래의 비전
Ayana Elizabeth Johnson, What If We Get It Right?: Visions of Climate Futures , One Books, 2024
실존적 위기를 맞닥뜨렸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일을 꼽는다면, 아마도 그 반대의 일을 상상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ASLA 2022 조경 컨퍼런스의 기조강연자였던 아야나 엘리자베스 존슨(Ayana Elizabeth Johnson) 박사의 베스트셀러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모든 것: 기후 위기에 대한 진실과 용기, 해결책』의 후속작이다. 책에서 존슨 박사는 조경가 케이트 오프(Kate Off), 기후 연구자 빌 맥키벤(Bill McKibben, MoMA의 큐레이터 파울라 안토넬리(Paola Antonelli) 등 각 분야의 선구적 연구자와 함께 더 건강하고 공평한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대화 내용을 도발적이고 유쾌하게 그려낸다.
-
부산 첫 민간정원, F1963 정원
부산시 수영구에 있는 F1963 정원이 부산시 제1호 민간정원으로 선정·등록됐다. ‘수목원·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정원’은 식물, 토석, 시설물 등을 전시·배치하거나 재배·가꾸기 등을 통해 지속적인 관리가 이뤄지는 공간이다. 그중 ‘민간정원’은 법인·단체 또는 개인이 조성·운영하는 정원을 말한다.
F1963 정원은 복합문화공간 F1963의 야외 정원이다. F1963은 본래 고려제강의 모태인 수영공장이 있던 곳으로 1963년부터 2008년까지 45년 동안 와이어를 생산해왔다. 2008년 이후에는 고려제강 창고로 사용되다가 2016년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되어 부산비엔날레 특별 전시장으로 활용됐다. 공장이 처음 지어진 연도인 1963과 공장을 의미하는 영단어 팩토리(factory)의 첫 철자에서 따와 F1963이라 명명됐다. 야외 정원은 2016년 건축 리모델링과 함께 구상되어 2021년까지 5년여에 걸쳐 단계적으로 조성됐다. 건축 후 잔여 부지에 조경을 하는 관행적 형태를 벗어나 건축과 조경의 조화를 꾀하며 함께 설계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
제27회 올해의 조경인· 제7회 젊은 조경가 시상식
지난 12월 6일 그룹한빌딩 그룹한갤러리에서 본지가 주최한 ‘제27회 올해의 조경인·제7회 젊은 조경가 시상식’이 개최됐다. ‘제27회 올해의 조경인’에는 심왕섭 이사장(환경조경발전재단)이, 제7회 젊은 조경가에는 원종호 소장(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이 선정됐다.
심왕섭 이사장은 환경조경발전재단의 위상과 역할 강화에 기여했다. 특히 환경부 외에 재단 주무관청에 국토교통부를 추가해 2개 부처로 확대하고, 재단 정관의 목적 및 사업에 ‘공원녹지법(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조경진흥법’과 관련된 사업을 추가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2023년 환경조경발전재단이 공식 조경지원센터로 지정된 이후 조경수 거래가격 조사공표 방안 연구, 2024년 제14회 대한민국 조경대상 주관, 조경지원센터 비전 발표를 추진하는 등 조경 분야의 핵심 사업을 추진하며 조경 전문 싱크탱크 기반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 조경지원센터 간담회 등을 추진해 조경인의 소통을 도모했으며, 2022년에는 한국조경 50년 기념행사를 추진해 조경계의 산관학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다. 심 이사장은 “46년간 조경 분야에 몸 담으며 조경인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일해 왔다. 앞으로도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에 집중하겠다”라고 하며 수상 소감을 전했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
[기웃거리는 편집자] 낮달을 기다리며
등산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진경산수화 같은 풍경의 산을 완상하는 건 좋지만, 정상을 정복하는 등산은 별로다. 하지만 만약 극한의 한계를 극복하는 알피니스트처럼 등산을 해야 한다면 한라산에 오르고 싶다. 특히 비바람이 몰아치는 한라산 정상에 가고 싶다. 이러한 로망은 순전히 한 드라마 때문이다. 한때 즐겨 보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2005) 속 남녀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재회하는 장소가 바로 비바람과 안개로 가득한 한라산 정상이었다. 그들의 재회보다 안개와 비바람이 몰아치는 역동적인 풍경이 이상하게 끌렸다. 나아가 그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극한의 등산을 마친 후 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를 벗겨내고 사발면의 뜨끈한 국물을 후루룩 마시면 어떨지 궁금했다. 눈물 젖은 빵이란 진부한 표현 대신 한라산 정복 후 먹는 사발면이란 비유를 머리 대신 몸에 새기고 싶은 작은 욕심이라고 할까.
어떤 비유를 찾는 목적의 등산을 꿈꾸는 나처럼 다른 목적으로 등산을 하는 이가 있다. 그는 등산전문지 『월간 산』 에디터 윤성중으로 얼마 전 『등산 시렁』(2024)이란 책을 펴냈다. 등산 시렁은 그가 월간 산에 연재하던 꼭지의 제목으로, 제목만 보면 무슨 내용인지 감이 잘 안 잡히는데 콘셉트는 이렇다. 산에 가서 등산만 하고 오는 건 싫은 남자의 등산 중 딴짓. 실제로 딴짓을 하며 어떻게 등산을 즐길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준다. 역경과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진지한 등산가들이 나오는 등산 잡지의 전형적 문법에서 벗어난 기발한 발상과 저자의 고유한 엉뚱함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는 취재를 위한 등산을 할 뿐, 단순히 순수한 재미나 휴식을 위한 여가 활동으로 하는 등산을 하지 않는다. 등산 자체를 위한 등산을 하지 않지만, 등산 중 기발한 딴짓은 누구보다 다양하게 시도한다. 등산을 싫어하는 이들을 설득해 등산 시렁 산악회를 만들어 함께 산에 오르고, 산 정상에서 책 낭독회나 사생대회를 개최하고, 복학생인 척하면서 대학생 산악부 선발 면접에 참가하는 등 등산을 매개로 한 재미있는 일을 벌인다.
또한 에디터로서 기자 정신과 전문성도 두루 갖추고 있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산속 약수터를 찾아다니고, 아웃도어 오프라인 매장에서 직접 일일 직원 체험을 하며 아웃도어 시장의 현실을 들여다 본다.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을 가로지르는 47km의 능선과 도로를 하루 안에 주파하는 일명 불수사도복 종주를 위해 밤낮으로 달리기 훈련을 하는 등 등산 전문가로서 성장하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그는 책 서문에서 등산이 진짜 좋은지, 왜 좋은지가 여전히 궁금하고, 연재와 등산을 통해 자신을 점점 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그의 도구는 딴짓이었지만 결국 등산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이우성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그의 비범한 태도와 자질에 대해서 평범함 속에 깃든 천재성이라고평가했다. 문득 이번 특집의 주인공 원종호 소장이 떠올랐다. 정욱주 교수의 표현(66쪽)처럼 그 역시 평범함을 가장한 비범함이란 단어가 잘 어울린다. 그는 무엇을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는 조경설계를 추구하며, 자신의 작업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조경가로서 정진했다. 물론 내가 그를 정확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작품과 에세이 원고를 통해 본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직선처럼 조경을 향한 자신만의 단정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갖고 있었고, 이제껏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설계를 향한 고유한 시선과 명징한 감각을 오랫동안 다듬어 온 조경가였다.
보이지 않는 조경가로서 보이지 않는 조경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조경에 대해 깊게 탐구하고 정확하게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주변 동료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우리만의 공간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특집에서 그를 부르는 여러 명칭이 등장했는데, 내가 부르고 싶은 이름은 낮달이다. 그가 추구하는 조경설계가 평소 잘 보이지는 않지만, 맑은 날 그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낮달과 닮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가 설계로 그려내는 보이지 않는 낮달을 더 보고 싶다. 나아가 현재 낮달처럼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스케치를 그리고 있을 미래의 조경가들에게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여의도공원을 그렇게 멋대로 밟고 다닌 건 처음이었다. 살기 위한 걸음이었다. 잔디를 가로지르고, 철책을 무시하고, 녹지와 길의 경계를 가르는 울타리 위에 올라서고, 잎이 다 떨어진 화살나무의 앙상한 가지에 패딩이 뜯기지 않도록 우스꽝스럽게 걸었다. 인파에 가려 발밑이 보이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앞 사람이 “요 앞에 턱 있어요. 조심하세요!” 하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난해 초 끊어졌던 인대를 떠올리며 더욱 조심조심 걷는 수밖에. 국회의사당 초록 지붕을 표적 삼아 걸으며 ‘광장’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절실해졌는지 모른다.
친구 K는 모이기에는 역시 광화문광장만 한 곳이 없다고 말했다. 모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 발에 걸리는 턱이 없는 공간, 차량이 덮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원한다면 행진을 할 수 있는 공간, 고개만 돌리면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공간이 광장이라는 걸 몸소 깨달았다. 그래도 여의도공원은 평지 공원이라 다행이었다. 어느 SNS에서 봤는데, 부산에는 주로 서면에 모인단다. 파도타기를 하면 조금 이어지던 물결이 금세 갈래갈래 나뉜 골목으로 흩어져버리고, 오르막길이 많아 행진을 하다보면 숨이 차서 구호와 노래 소리가 점점 잦아든다고 그랬다. 그래서 광장이 없는 도시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인터넷이 먹통이 됐던 기억을 떠올리며 LED 화면과 통신사 이동기지국 차량이 가까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바닥에 앉아 노래하고 구호를 외치고 연단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은 집중할 수 없었다. 핫팩을 주무르고 보온병의 물을 마시려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질까 봐 관두었다. 예고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마음을 빼앗은 건 한 야구 팀 유니폼을 입고 무대에 오른 시민의 발언이었다.
그는 자신을 “앞선 세대가 쟁취한 민주주의의 드넓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태어난 세대, 여러분이 일구어낸 생존이라는 결실”이며 “그래서 삶을 꿈꾸게 된 세대”이고 “절박함이 아닌 사랑으로 연대하는 세대”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곳에 서게 된 이유를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빗대어 말했다. “무너진 민주주의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무승부가 있을 수 있습니까? 콜드게임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천 취소, 강설 취소가 있을 수 있습니까? 스포츠 팬 여러분! 우리는 국가대표처럼 끝까지 맞설 것입니다. 게이머 여러분! 우리는 정의의 엔딩을 위해 몇 번이든 리트(리트라이)할 것입니다! 오타쿠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최애인 것처럼 민주주의를 수호할 것입니다. 빠순이 여러분! 우리는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보려고 밤새워 기다렸듯, 찬란한 민주주의의 태양이 다시 뜨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함께, 여기에서, 독재의 담장을 넘어 홈런을 칠 것입니다! 맞습니까? 야구 팬 여러분, 스 트라이크를 세 번 놓친 타자에게 네 번째 기회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광장에서 꽉 찬 직구를 던질 것입니다.”
세상은 넓고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은 그리 넓지 못하다. 세상은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관심이 없지만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것,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것들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기 다른 세상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세상의 넓이는 나의 인식이 미치는 범위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들이 늘어갈수록 내가 구축하는 세상의 크기는 점점 커지게 된다. 무언가를 깊이 사랑해본 사람들의 세계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발 딛고 선 세계가 끔찍해지더라도 그곳을 떠나기보다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지난해 12월 7일,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물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 물음을 들었을 때, 광장에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의 이야기를. 세계가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워지는 만큼, 그 세계를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온전히 머무를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늘어나리라 믿는다. 나는 전보다 더 광장을 사랑하게 됐다. 그 너른 광장의 크기만큼 나의 세계도 넓어졌기를.
-
[PRODUCT] 바이오필릭을 구현하는 쉼터, 그린하우스
유리 온실 구조의 자연친화적 실내형 쉼터
도시에서 자연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도시 속 자연은 쾌적한 도시 환경을 위해 필요하며, 시민들에게 지친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는 휴식의 기회를 제공한다. 휴게 시설 전문 브랜드 푸르너스(Prunus)는 감각적이고 자연 친화적 시설물을 통해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며 도시민들에게 안락한 휴식을 제공한다.
푸르너스의 그린하우스는 유리 온실 구조를 활용한 자연 친화적 실내형 쉼터다. 그린하우스는 자연 친화적인 업무 공간 조성을 위해서 바이오필릭 오피스(biophilic office) 콘셉트로 만들어진 충북도청 하늘정원에 활용됐다. 이곳은 충북도청 및 의회 건물의 다양한 옥상 공간을 유기적 연계해 조성한 정원이다. 티하우스와 벤치 등 다양한 휴게 시설물이 초화류, 산책로와 조화를 이루며 시민들을 위한 휴게공간으0로 거듭나고 있다.
그린하우스에서는 충북도청 앞 당산 공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주변 식재와 더불어 자연광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쾌적한 환경을 구축한다. 개인적 휴식뿐 아니라 회의 및 업무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어 도청 직원들의 심리적 안정성과 자연적 감수성을 높이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또한 다양한 초화류와 조화를 이루는 산책로의 벤치와 테이블에 앉으면 자연과 가까운 거리에서 교감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직원들의 업무 효율성과 만족도를 높이며 쾌적한 근무 환경을 제공한다. 나아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환경 교육 장소와 어른들을 위한 휴게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TEL. 031-943-6114 E-MAIL.
[email protected]
-
[기웃거리는 편집자] 기쁨이와 불안이
갓난아이가 부모를 보고 웃는다. 아이 머릿속에 있는 감정 컨트롤 본부에 입장한 첫 감정은 기쁨이(joy). 기쁨이가 본부에 들어온 지 33초 만에 감정이 바뀐다. 슬픔이(sad)가 감정 컨트롤 버튼을 누르며 등장한다. 기쁨이와 슬픔이에 뒤이어 소심이(fear), 까칠이(disgust), 버럭이(anger)가 본부에 입장한다. 감정 컨트롤 본부의 리더는 기쁨이. 기쁨이는 다섯 개의 핵심 기억 구슬 색깔이 기쁨의 상징색인 노란 색으로 유지될 수 있게 노력한다. 이 구슬들은 아이의 성격을 형성해 주는 다섯 섬(엉뚱 섬, 하키 섬, 정직섬, 우정 섬, 가족 섬)과도 연결되어 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2015)의 주인공 소녀 라일리의 감정 컨트롤 본부 이야기다. 영화는 라일리 아빠가 직장을 옮기면서 정든 도시를 떠나 새 도시에 정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사 간 집과 도시, 전학 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던 찰나, 기쁨이와 슬픔이가 장기 기억 파이프에 빨려 들어가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사라지게 된다. 라일리는 감정 조절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이 정도 배경 지식을 갖추고 나면 영화가 어떻게 펼쳐질지 예상할 수도 있다. 위기를 이겨내면서 싸웠던 주인공들이 화해하고, 왜 갈등이 빚어졌는지 깨닫게 되는 디즈니 영화 특유의 클리셰. 맞다, 이 영화도 생각한 대로 흘러간다. 하지만 이 영화가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라일리의 이야기가 나도 겪은 과정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내 머릿속에도 열일하고 있는 감정 컨트롤 본부와 장기 기억 저장소, 꿈 제작소, 기억 처리반이 있을 것 같다고 상상하게 해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기쁨이는 기쁨만이 라일리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힘들다고 솔직하게 울 수 있게 도와주는 슬픔이와 함께 모든 감정이 라일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노란색으로만 칠해졌던 핵심 기억 구슬은 여러 감정의 색이 섞이고 무너졌던 성격 섬은 더 단단해진다. 새로운 도시와 학교에 적응한 라일리는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끝날 것 같던 영화는 새로운 막을 예고한다.
13살이 된 라일리는 우수상을 받을 만큼 공부를 잘하고 친구들에게 친절하며, 여전히 아이스하키도 잘하고 키가 훌쩍 컸다. 그녀의 성격 섬 중 가족 섬은 다른 섬에 비해 많이 작아졌고 우정 섬이 매우 커졌다. 라일리가 성장하면서 모인 여러 신념이 만든 ‘난 좋은 사람이야’ 자아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친구를 도와주고, 친구들과 우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자아는 ‘인사이드 아웃 2’(2024)의 새로운 장치다. 2015년에 개봉한 시즌 1에 이어 9년 만에 개봉한 시즌 2. 시즌 2는 사춘기에 접어든 라일리의 자아 정착기를 담았다.
사춘기에 들어선 라일리의 감정 컨트롤 본부에 이유 모를 사이렌이 울리고 기존 감정들에게 예고도 없이 새 단장이 시작된다. 그렇게 등장한 새 감정들, 불안이(anxiety), 당황이(embarrassment), 따분이(ennui), 부럽이(envy). 네 개 감정이 더 추가됐고, 감정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라일리의 감정이 요동친다.
아이스하키 시합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라일리는 불안이 가득한 자아에 지배되면서 ‘난 아직 부족해(I’m not good enough)’란 말이 반복해서 들리고, 불안이의 컨트롤 제어가 안 된다. 폭주하는 불안이를 막은 건 기쁨이의 한 마디. “라일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네가 정하는 게 아냐, 이제 라일리를 놔줘(You don't get to choose who Riley is. You need to let her go).” 불안이의 폭풍이 잠재워지고 부정과 긍정이 섞인 여러 자아가 형성된다. 감정들은 자아를 컨트롤할 수 있는 건 라일리 본인이라는 걸 깨달으며 영화가 끝난다.
영화 중간에 나온 라일리 부모의 감정 컨트롤 본부 리더는 버럭이와 슬픔이. 부모도 라일리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감정 컨트롤러가 기쁨이에서 버럭이와 슬픔이로 바뀐 듯하다. (요즘) 나의 감정 컨트롤 본부의 리더는 불안이다.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뀌기 직전이라 불안이가 리더가 된 것 같다. 소문 무성한 30대의 여정을 견뎌낼 체력이 있는가, 아픈 곳은 없는가, 이 정도의 통장 잔고와 관리면 잘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잘 걸어온건지 등등 불안이 가득한 연말이다. 그래도 이 지면만 채우면 이번 달 잡지도 마감이다. 마감해서 신난 기쁨이와 싱숭생숭한 불안이가 감정 컨트롤 버튼을 동시에 누르고 있다.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내 속에 있는 그 의심을 확인하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 거야
이건 비밀인데, 횡단보도에 서는 족족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더니 어두운 집 앞 골목길에 발을 내딛는 순간 가로등이 켜졌던 날 어쩌면 신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냥 좀 지쳤던 날이었다. 꾸역꾸역 써내려간 특집 기획안은 오류로 날려 먹고 점심시간에 기분 전환 겸 맛있는 커피라도 마시려고 멀리까지 걸어갔더니 휴무라는 글자가 카페에 걸려 있던 날. 축 처진 내게 찾아온 좋은 우연의 연속은 날 유치한 상상에 빠트렸다. 짐 캐리의 얼굴을 한 신(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때문이다)이 “너 오늘 하루 고됐구나, 내가 좋은 일 몇 개 좀 주마”라며 훌훌 웃는 모습을. 이때의 기억이 강렬해서인지 그 뒤로 우연이 겹칠 때면 짐 캐리 얼굴이 떠올라 웃게 됐다. 이번 달에도 몇 번 그의 얼굴을 마주했는데, 운 좋게 본 영화와 흥미진진하게 본방 사수했던 드라마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물’(고레에다 히로카즈)은 예매를 미루다가 관람 시기를 놓쳤던 영화다. 꼭 영화관 큰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던 터라 아쉬워하던 중, 기적처럼 들려온 재개봉 소식에 일정 조정이고 뭐고 예매부터 해버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이름에 걸맞은 영상미와 음악, 연출, 그리고 그와 상반되는 명치 아래를 꽉 오그라트리는 묵직하고 참혹한 이야기. 러닝 타임이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생각했다. ‘제목이 완전 덫인 영화구나, 어쩜 이렇게 잘 지었지. 그런 점까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MBC)랑 닮았다. 연출이 과하다고 느낄 정도로 아름답다는 점까지도.’ 두 작품은 제목을 일종의 장치로 사용한다. 보고 있으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꾸 괴물은 누구인지, 배신자는 누구인지 끊임없이 추리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괴물은 아이들이 흥얼거리는 노랫말을 통해 노골적으로 묻기까지 한다. “괴물은 누구게.” 던져진 올가미를 가뿐히 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미련한 나는 그 미끼를 덥석 물고 괴물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진짜 괴물은 계속해서 탓할 사람을 찾고 증거로 치기에는 뜨뜻미지근하게 조각난 장면들을 가지고 남에게 함부로 혐의를 씌운 나라는 걸.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속 여러 인물이 던진 질문들은 드라마 속 인물을 넘어 시청자에게 보내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확신해? 그 확신부터 의심해.” 그 말에 찔려 잠깐 가동을 멈추었던 내 사고 체계는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추론을 시작한다. 작은 꼬투리를 잡고 멋대로 상상을 키워가며 함께 드라마를 보던 엄마에게 쟤 이상하다고 속삭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전부가 내 망상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또 다른 등장인물의 대사로 변명을 하고 싶어진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은데 그것이 안 될 때는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괴물과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전달하려는 진정한 의미는 관람객과 시청자의 반응을 포함할 때 완벽해질 것이다.
영화를 본 시점이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한참 방영되고 있을 때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계속해서 우연의 중첩이 주는 짜릿함을 마주했다. 마지막 회, 갈등이 고조됐을 때 등장인물이 나누는 대화가 그 심리적 자극을 극대화했다. “내가 괴물이라서 버린 거잖아”, “버린 게 아니라 도망쳤어. 내 속에 있는 그 의심을 확인하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거야.” 친밀한 배신자 역시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이 지면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이번 호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 우기고 싶은 우연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연결고리는 광주폴리다. 광주폴리를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이번 순환폴리는 내게 색다른 감각을 안겼다. 폴리를 짓는 것을 넘어 그 재료와 짓는 방식을 연구하고 개발한 것,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과 협력했다는 사실을 현장과 도록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이들이 주목한 재료 중 하나가 다양한 패각인데, 신기하게도 ‘해륙순환 도시주의’의 강준호도 제주 해녀 활동 공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라 껍데기와 전복 껍데기를 재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순환폴리의 또 다른 특징은 폴리가 누정과 같은 도시 속 새로운 커뮤니티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는 점이다. 누정이 어떤 공간인지 궁금하다면 책장을 다섯 쪽 앞으로 넘기면 된다. 이 우연을 발견한 사람들의 표정이 어떨까. 궁금해진다
-
안과 밖이 만나는 접점, 누정
조선시대 누정 로망, 12월 10일까지
누(樓)와 정자를 뜻하는 정亭을 합쳐 이르는 누정은 인간이 잠시 자연 속에 머무르며 풍광을 감상하는 공간이었으며, 정신을 수양하고 후학을 교육하고 문학과 예술에 대해 논하는 장소였다. “대저, 누정은 높고 광활한 데나 그윽하고 깊은 곳이 둔다. 저기가 싫증나면 여기가 그립고 이곳이 지겨우면 저곳이 생각나니, 이는 한결같은 사람의 마음이다”(안축, 『취운정기』 중 『동문선』 제68권)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누정은 수많은 건축 유형 가운데 관찬지리서의 중심 항목으로 당당히 하나의 자리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사랑받으며 곳곳에 설치되고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지난 11월 15일 한양대학교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시대 누정 로망’ 전시는 조선시대 누정에 함축된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한다. 조선왕조 500년 전반에 걸쳐 등장하고 변화했던 누정이 지난 역사와 사회, 문화를 대변하는 응축된 결정체임을 드러내고자 기획됐다. 누정의 경영주와 주변 인물, 입지와 환경, 묵적의 필체와 내용, 건축 형태와 구조 등 관련 자료를 엮어 전시했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건 실내에 들어선 거대한 누정이다. 전시 콘셉트에 맞춰 마련한 휴식 공간이겠거니 생각하며 지나치려 하는데 네 기둥 아래에 달린 바퀴가 눈길을 끈다. 이 누정의 정체는 문자로만 남아 있는 ‘사륜정’을 전라남도 무형유산 대목장인 김영성 선생과 제자가 실물 크기로 재현한 것이다. 사륜정은 고려시대 이규보가 창안한 이동식 누정이다. 당시 실제로 제작되지는 않았지만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기획 의도, 구조, 치수, 쓰임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종이에 남겨진 기록에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실체화된 사륜정은 우리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누정에 관한 새로운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환경과조경440호(2024년 12월호)수록본 일부
-
2024 디에스디삼호 조경나눔공모전
시니어 레지던스 외부 공간 프로그램 디자인 학생 아이디어 공모
지난 11월 8일 환경조경나눔연구원이 주최 및 주관하고 디에스디삼호와 월간 『환경과조경』이 후원한 ‘시니어 레지던스 외부 공간 프로그램 디자인 학생 아이디어 공모(2024 디에스디삼호 조경나눔공모전)’ 심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번 공모의 설계 목표는 실버 세대의 건강한 일상, 라이프 스타일과 취미, 연대와 협력, 자연 경험 등을 외부 공간 디자인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대상지는 경기도 가평군 호명산 일대의 시니어 레지던스 타운으로 건너편에는 시니어 요양원과 병원이 계획됐다. 주변은 산악 지형과 경관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케이블카, 집라인, 캠핑장 등을 갖춘 종합 레저 타운으로 개발될 예정이다. 참가자들은 이러한 도시적 맥락을 고려해 대상지의 활성화를 도모해야 했다.
총 45개 팀이 참가 신청했고, 30개 팀이 작품을 제출했다. 대상은 김소진·빙유진·우현·이시은(경희대학교)의 더 리지(The Ridge)가 차지했다. 대상작은 물에 둘러싸인 호명산 능선 사이를 연결하는 산책로와 전망대를 통해 시니어들이 노인이 아닌 한 개인으로 조명 받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하고 이를 통해 연대와 화합을 꿈꿀 수 있도록 공간을 계획했다. 완만한 경사도와 다양한 코스로 구성된 산책로를 통해 사색의 시간을 제공하고, 물의 흐름을 감상하거나 차를 마시며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는 명상을 즐기며 마음을 치유하고 휴식할 기회를 제공한다.
최우수상은 박송·윤여령(경희대학교)의 디웰(D-well), 이주하·김세나·박지연·이지연·진주희(단국대학교)의 톤피케이션(Tonfication)이 선정됐다. 우수상은 유채원·김수경·조서연(서울여자대학교)의 아-하! 올 타임 해피 플레이그라운드(A-Ha!: All Time Happy Playground), 황세은·김세원·배유진(서울여자대학교)의 어셈블 인디비주얼(Assemble Individual), 박찬영·김예연·이동주·정상혁·홍재환(한경국립대학교)의 포레지어(Foresier).포레지어가 수상했다. 가작은 임채진·이재영·전진아(서울여자대학교)의 루트 앤 루트(Roots & Routes), 이지영·김고은·김서진·변지혜·이지현(단국대학교)의 오감악소(五感樂所), 이임주·김강희·윤지상·이정주·정시인(단국대학교)의 풀-필Ful-Fill, 김가현·남나영·이유빈(경희대학교)의 라너지(Lanergy)가 선정됐다.
*환경과조경440호(2024년 12월호)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