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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다
자연의 속삭임 전, 2025년 2월 9일까지
“자연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내게는 들려온다. 그런 감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각주 1) 자연의 소리를 화폭에 어떻게 옮길지 고민한다는 구순의 노 작가의 말이다. 이는 작가의 예술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서울시립미술관은 2024년 12월 12일부터 2025년 2월 9일까지 한국 구상 회화사의 발전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한 박광진 개인전 ‘자연의 속삭임’을 개최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과 작가의 대표작 중 117점을 선별해 네 개의 섹션으로 나눠 선보였다. 첫 번째 섹션 ‘탐색: 인물, 정물, 풍경’에서는 한국 구상 미술의 대표 화가 이봉상, 손응성, 박수근 등의 영향을 받으며 여러 소재를 대상으로 예술적 방향성을 모색하는 과정을 다룬다. 두 번째 섹션 ‘풍경의 발견’에서는 작가가 점차 풍경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포착한 여러 경관을 살펴본다. 세 번째 섹션 ‘사계의 빛’에서는 작가가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그린 한국의 순수 자연을 섬세한 빛의 묘사를 통해 사실적으로 담아낸 풍경화를 선보인다. 네 번째 섹션 ‘자연의 소리’에서는 1990년대 이후 작가가 제주에서 자생하는 억새와 유채를 대상으로 집약되고 응축된 화면을 보여주고자 새로운 구상 미술의 가능성을 여러 측면에서 모색했던 시기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탐색: 인물, 정물, 풍경
박광진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 한국 아카데미즘의 영향 아래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통해 예술적 방향성을 모색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수채화에 매료된 그는 서울 사범학교에서 이봉상에게 수업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미술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각주 2) 그의 첫 유화 작품인 ‘창경원 입구’(1952)는 이봉상이 사용한 캔버스에 덧그린 것으로, 스승의 색채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 진학한 박광진은 비원파 창시자인 화가 손응성에게 사사하며 예술적 정체성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손응성의 영향을 받아 불상, 자기, 꽃 등과 고궁을 소재로 작품을 그렸다. 그는 손응성의 그림 보조로 박물관에서 사생하던 중 고미술품 전시실을 배경으로 반가사유상과 기마인물형 토기, 청동 정병 등을 묘사한 ‘국보(國寶)’(1952)를 완성했다. 이 작품으로 제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하며 미술계에 등단했다.
박광진은 옛 문화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장소로 궁궐을 택했고, 이곳에서 사생을 시작했다.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전당포, 담배 가게, 일제강점기부터 수제화 거리로 알려진 염천교 다리 등으로 영역을 넓히며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풍경을 찾았다. 특히 그는 이웃이었던 서양화가 박수근과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 인터뷰(각주 3)에서 박수근이 초가집이나 농부를 많이 그릴 때, 자신은 홍익대학교 근방을 사생했다고 설명했다. 이때 그렸던 ‘담배가게’(1956)는 유화를 활용해 홍익대 학생들의 담배를 사기 위해 들렸던 초가집 노점을 담은 졸업 작품이다. 더불어 이 시기에 그는 보문동과 혜화동 등 여러 장소를 다니며 인물과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다. ‘보문동 전당포’(1956)는 당시 많은 작가가 물감을 살 돈을 구하기 위해 자주 찾았던 곳으로, 그들의 일상과 생활 감정을 반영했다.
작가의 시선과 재료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닭장, 토끼장 같은 향토적 소재를 활용하고, 자화상(1964),(각주 4) 여성 좌상 등을 그리며 고전주의, 인상주의, 사실주의 화풍을 시도했다. 고색(古色)을 사용하거나, 건필로 색을 덧바르거나, 붓질의 속도에 변화를 주는 등 여러 기법을 실험했다. 특히 그는 ‘파고다 탑’(1957), ‘해바라기’(1961) 등에서 주변을 생략하고 가까운 대상이나 그 일부에 집중했고, ‘토끼장’(1962)에서는 가축우리의 사각 격자무늬 구도를 사용해 전통적 원근법에서 벗어난 독특한 시선을 선보였다. 이는 이후 작품의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전시 제목 ‘자연의 속삭임’은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비롯됐다.
2. 박광진은 서울 사범학교 재학 당시 이봉상 외에도 서양화가 권옥연, 류경채 등의 미술 수업을 수학한 바 있다.
3. 서울시립미술관, 박광진 화백과의 인터뷰, 2024년 10월 31일.
4. 유일한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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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재현, 권력의 탐구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스페이스 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전시장 하나를 상상해보자. 관객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눈길을 외면하는 작품들, 무심하게 툭 펼쳐져 있어 의도를 알 수 없는 공간들, 안내판 하나 없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놓여 발견조차 어려운 설치물들. 이런 전시장을 활보하다 보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간 방문했던 전시장들이 어땠는지 회상하며, 관객과 작품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이어 깨닫는다. 관객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듯, 작품 또한 관객에게 반드시 친절히 제 의도를 보여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처럼 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실을 뒤집는, 체계와 조건의 전복은 엘름그린(Elmgreen)과 드라그셋(Dragset)이 자주 사용하는 기법이다. 이들은 전복을 통해 그 안에 내제된 권력의 구조를 탐구하는데, 그 매개로 ‘장소’를 애용한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지하는 공간과 구조물, 그리고 이에 주어진 기능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한 의미와 위계질서가 파생되는 현장이라는 인식과 의심에서 비롯”(각주 1)된 것이다. 이러한 ‘공간’은 이번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린 ‘스페이스(Spaces)’(2024. 9. 3. ~ 2025. 2. 23)의 전시명 그 자체이기도 하다.
올해는 1995년부터 아티스트 듀오로 작업해온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이 협업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스페이스 전은 둘의 공간 작업을 한 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전시 제목에 어울리도록 실제 크기에 버금가는 대형 수영장, 집, 레스토랑 자체를 전시장에 들였다. 누군가는 실제와 같은 공간을 전시장에 옮기는 게 과연 예술이냐 물을 수도 있다. 이에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답한다. “우리는 균질화된 전시 공간을 완전히 다른 환경으로 전환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이를 통해 관객은 본래 정체성을 위장시킨 새로운 조건과 상황에서 작품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각주 2)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엘름그린 & 드라그셋 개인전 ‘어댑테이션(Adaptation) 소개글 중
2. 탁영준, “엘름그린 & 드라그셋 작품 속 신체와 공간”, 『신세계 매거진』 44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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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조경
제7회 젊은 조경가 원종호’ 온라인 토크쇼
지난 2월 19일, 그룹한빌딩 2층 환경과조경 세미나실에서 제7회 젊은 조경가 원종호 소장(JWL)의 온라인 토크쇼 ‘보이지 않는 조경’이 개최됐다. 유튜브 생중계 형식으로 열린 토크쇼는 1부 강연, 2부 질의문답 순으로 진행됐다.
강연은 간단한 자기 소개로 시작됐다. 원종호는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조경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대학원 졸업 후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 현대건설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에 합류한 과정을 설명했다. 이어서 토크쇼 제목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특집 ‘조경가 원종호’(『환경과조경』 2025년 1월호)의 다섯 가지 키워드는 설계를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와 제 동료들이 추구하는 비가시적인 작업을 가장 잘 드러내는 키워드”라며 직관적이고 단순한 개념과 배치, 사소한 생각과 조형의 가능성, 크래프트, 관성에의 저항, 팀워크, 협업의 힘에 대해 말했다.
원 소장은 상암동 JTBC 신사옥, 성수동 코너 50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그가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누군가 우리의 프로젝트를 보고 ‘설계한 게 뭐가 있어?’라고 묻기도 하지만, 많은 고민과 생각의 결과물이다. 개념과 배치를 풀어가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주로 단순하고 직관적인 개념과 배치를 활용하며, 직선이나 돌과 수목 캐노피를 통해 공간의 구조미를 강조한다”고 말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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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빛나는 북극성을 향해
하마터면 금 기자가 아니라 금 주사나 금 선생이 될 뻔했다. 취업 준비 시절 지인은 섬마을 시골 분교 국어 선생님 관상이라며 내게 선생님을 권유했다. 고향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넘치는 아버지는 내게 백수의 삶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는 면사무소 주사가 되기를 원하셨다. 모두 훌륭한 직업들이지만, 이상하게도 끌리지 않았다. 시골의 감성을 너무나도 좋아하지만, 각종 놀거리와 볼거리가 넘쳐나는 서울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말은 제주로 가고,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속담을 핑계 삼아 서울의 삶을 계속 영위하고 싶었다.
이러한 내가 기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인터뷰’ 때문이었다. 아는 선배의 권유로 웹진의 대학생 에디터로 잠깐 일하며 인터뷰 기사를 써볼 수 있었다. 당시 지금처럼 힙하지 않았던 한 동네의 카페들을 팝업 스토어로 활용한 전시에 참가한 예술가를 인터뷰하는 꼭지를 맡았다. 내밀 명함조차도 없는 초보였지만 열심히 그들을 인터뷰했다. 밥값이나 벌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참 즐거웠다. 버려진 철사로 만든 설치물로 환경 보호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치미술가, 명상과 숨소리에서 영감을 얻는 화가, 문 닫은 동네 공장의 문을 추상화처럼 담아낸 사진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철학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서사도 흥미로웠지만,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열정이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 울림이 기자란 일을 선택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마치 숲에서 오랫동안 헤매다 마침내 길을 안내하는 북극성을 발견한 기분이라고 할까.
기자가 된 이후에도 그 시절을 떠올리며 새로운 북극성을 찾는 마음으로 인터뷰집을 꾸준히 모아왔다. 그중 좋아하는 책을 한 권 꼽자면 바로 『일하는 예술가들』(2018)이다. 소설가 강석경이 장욱진, 김중업 등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했던 근현대 예술가의 철학과 작업을 섬세한 언어로 풀어 낸 인터뷰집이다. 잠언집이라 해도 좋을 만큼 밑줄 치고 싶은 예술가들의 답변이 많지만, 그보다 인터뷰를 소설처럼 풀어낸 방식이 더 흥미로웠다.
정확히는 소설처럼 인물의 삶과 서사를 해체했다고 할까. 등장하는 예술가들의 삶에 대해서 말하지만, 오롯이 그 사람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삶에 작든 크든 영향을 주었던 주변인들을 소설의 등장인물처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복선을 활용해 서사를 구성했다. 또한 인터뷰란 장르의 특성을 놓치지 않고 자기만의 해석을 더해 한층 더 입체적으로 인물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가령 단순한 도상에 오롯이 집중하며 그림을 그렸던 장욱진의 미학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생략의 예술가로 자주 얘기 된다. …… 춤은 언어의 생략이고, 시는 산문의 생략이며, 소설은 인생의 생략이다. 그림은 마음의 생략이라고나 할까.”
문득 세심한 언어로 탁월한 해석을 내놓았던 작가에게 열다섯 명의 예술가를 만난 후의 소회를 묻고 싶었다. 이제는 하나의 역사가 된 거장들의 작업과 철학을 육성으로 들으며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했다고 할까. 그 답변을 서문에서 어렴풋하게 들을 수 있었다. “물은 깊은 밤에도 저 혼자, 혼자 흘러내리며 자신을 정화시킨다. 끊임없이 흐르면서 맑음, 자기본질을 지키는 물의 속성을 닮고 싶다. 예술가란 바로 세상의 가치에 안주하지 않고 물처럼 쉼 없이 자신을 씻으며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이번 호 특집(16쪽)은 이처럼 건축과 조경 분야에서 ‘일하는 예술가’들을 모아 공모의 문제점을 진단하며 공모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봤다. 이를 통해 잠시나마 공모의 본질과 공모의 미래 방향에 대해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탈도 많고, 문제도 많고,숙제도 많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을 야기하는 문제를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도외시하거나, 남들도 다 한다는 이유로 도의를 저버린 수단을 강구하고, 세상의 불의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더 어두워진다. 그래서 이번 특집이 어긋나버린 공모의 문제를 직시하고, 좋은 공모, 나아가 좋은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목적지로 가는 작은 길잡이가 되길 바라본다. 어두울 때 가장 빛나는 북극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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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대단찮은 기록이 만든 무수한 접점과 다양한 변경이 조경의 외연을 넓히고 사물과 인식 사이에서 끝없이 우리를 흔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편집위원 회의를 마친 뒤 뒤풀이로 곱창집에 간 적이 있다. 완벽한 내향인인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임무가 주어졌으면 해서, 곱창 굽기에 일가견이 있다는 남기준 편집장의 손에서 집게라도 뺏고 싶었다. 긴장한 날 가여워한 것인지 누군가 물었다. “김 기자는 왜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숱하게 고쳐 쓴 자기소개서의 지원동기 항목을 읊으면 될 일었지만, 질문자가 내가 늘 ‘글은 이런 사람이 쓰는 거구나’ 생각했던 이수학 소장(아뜰리에나무)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는 관심사가 넓으며 박학다식하고 수많은 책과 영화를 볼 뿐 아니라 깊이 소화해 자신의 언어로 내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함부로 입을 뗐다간 속이 텅 빈 사람이라는 걸 들킬까봐 우물쭈물하는 사이 다 구워진 곱창을 입에 욱여넣는 걸로 상황을 무마했다.
그런 이수학 소장에게서 격주에 한 번씩 편지를 받는다. 아뜰리에나무(이하 나무)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 ‘나뭇잎’이다. 첫 뉴스레터는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는데, “여행지 한켠에서 급하게 휘갈겨 쓴 엽서처럼 또는 하고픈 말 다 묻어두고 주소만 덩그러니 있는 그림엽서처럼 난데없고 하릴없지만 이 작은 소식지로 조경이 맞닿은 일상과 일에 때로 가볍고 어쩌면 느리게 낙하해 볼까 합니다”라는 인사말을 마주하고서는 몽롱해졌다. 편지는 아날로그로 써야 낭만적이라는 생각은 다 편견이었다. 바람에 나뭇잎 부딪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뭇잎’은 조경과 경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길을 걷다 만난 풍경은 물론 책과 영화 속 경관도 다룬다. 나무의 설계 프로젝트도 소개하는데 좀 독특하다. 설계 철학과 해법을 설명하기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설계와 경관에 어떻게 투영했는지 이야기한다. 나무에게 설계는 “세상과 관계 맺고”, “세상과 얘기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전하는 꽃나무 이야기는 내가 발신자와 같은 계절을 보내고 있다는 걸 실감케 한다. 다이어리의 아무 페이지에 그린 손그림에는 디지털 도면에서는 볼 수 없는 손을 떨며 그린 듯한 선이 있는데, 그 떨림에 고민이 묻어 있는 듯해서 들여다보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나뭇잎이 ‘뉴스’가 아닌 ‘레터(편지)’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편지는 ‘디자인 4제’ 시리즈의 데크 편. 데크라는 단어의 의미가 갑판(16세기)에서 부두나 승강장의 나무로 된 평평한 바닥(19세기)으로 확장되어 “집에 딸린 ‘목재 테라스’가 떨어져 나와 공원이나 정원의 시설물로서 지금과 같은 뜻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일 것”이라 추측하며 데크의 역사와 그 역할에 대해 설명한다. 어릴 적 툇마루에서 평상으로 이어지는 기억 덕분에 데크를 좋아하게 됐다고 고백하는데, 생생하게 묘사한 풍경이 참 인상 깊었다. “한옥의 구조를 흉내 낸 그 집에서 마루는 내부도 외부도 아닌 중간 영역으로 앞뒤가 늘 열려 있어 바람 불면 좋고 비 오면 더 좋았다. 툇마루는 햇빛의 자리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시간과 계절에 따라 농도를 달리하여 끝없이 하릴없게 만들었다.”
이수학은 데크를 바닥 데크와 뜬 데크로 분류한다. “바닥으로서 데크는 땅의 표면으로 재료의 물성을 통해 영역을 나눈다. …… 지면에서 최소한의 높이 이상으로 떠 있는 데크는 지면에 붙은 데크와 달리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전이한다. …… 눕고 뒹굴다 엎드리고 자다 깨는 데크는 풀밭의 연장이고 무심한 하늘 밑이다.” 이어지는 나무의 데크 목록. 바닥 데크: 평평한 데크(사각데크, 둥근데크), 기울어진 데크(긴데크), 뻗어나간 데크(먼데크, 얹혀펼친데크, 바람자리), 스탠드로 연장된 데크(접힌데크), 뜬 데크: 평평한 데크(둥근데크, 모꼴데크), 기울어진 데크(너른긴데크), 놀이를 위한 데크(놀이데크), 계단이 연장된 데크(물가데크). 하나의 주제를 다양하게 풀어내는 솜씨가 웬만한 무크지 편집자보다 낫다. 이걸 공짜로 봐도 되나 이상한 죄책감이 든다. 조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 관심을 갖게 하는 데는 이런 소식지가 제격이지 않을까 싶다.
이수학은 기록을 다루는 특집에서 말했다. “개개인이 엮어 묶은 작업의 기록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사적인 사건이고 시간일 뿐이지만, 그 대단찮은 기록이 만든 무수한 접점과 다양한 변경(邊境)이 조경의 외연을 넓히고 사물과 인식 사이에서 끝없이 우리를 흔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각주 1) 좀 더 많은 사람이 ‘나뭇잎’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각주 정리
1. 이수학, “기록하다”, 『환경과조경』 2024년 7월호,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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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NY] 도시민의 건강한 라이프스타일 ‘창사원’
팜한농,(각주 1) 키우고 수확하는 즐거움과 함께하는 도심형 팜을 고민하다
은퇴한 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교외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며 사는 삶. 전원 생활은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이 꿈꾸는 제2의 삶의 형태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과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도 전원이 마냥 행복할 수 있는 이상향으로 여겨질까. 도시 밖에서 생활해 본 적 없는 이들에게 한적한 시골은 자연을 가까이에서 즐기며 자급자족할 정도의 가벼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인 동시에, 낯설어서 조금 두려운 장소다. 하지만 농사라는 생산적 여가 활동을 즐기려는 도시민의 갈망은 주말 농장 같은 형태로 발현되고 있다. 과연 작물을 키우고 수확하며 성취감을 느끼고, 자연에 대해 배우는 기쁨은 도시를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일까.
창사원, 세계 최초의 궁중 온실을 계승하다
창사원(蒼笥園)은 ‘푸른 정원’이라는 뜻으로 세계 최초의 온실인 ‘창사루(蒼笥樓)’에서 따왔다. 1450년경 문헌인 『산가요록(山家要錄)』에 따르면, 조선시대 조상들은 창덕궁 후원에 창사루를 지어 한겨울에도 꽃과 채소를 재배해 왕실에 공급했다. 이는 1619년 만들어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온실보다 무려 170년이나 앞선 기록이다.
역사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가 덕임에게 애정을 담아 감귤을 건네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과일나무까지 키울 정도로 발전한 온실 전통이 조선 초기에서 후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선의 요리책 『산가요록』의 ‘동절양채’ 부분에는 창사루의 조성 원리가 쓰여 있는데,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온돌 위에 흙을 30cm가량 깔아 겨울에도 흙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했다. 온돌을 데우는 아궁이 위에 가마솥을 걸어 물을 끓이고 그 수증기를 창사루 안으로 들여 적정 습도를 유지했다. 천장에는 기와 대신 들기름을 몇 겹 바른 한지를 덮어 햇빛을 들이되 비와 눈을 막았다. 온실의 3대 요소인 난방, 태양광, 온습도를 모두 갖춘 셈이다. 팜한농은 이러한 창사루의 전통과 기술을 계승하여 일상에 지친 도시민들에게 색다른 고객 경험을 제공하고자 특별한 온실 공간을 연암대학교(충남 천안)에 구현했다.
창사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국적 색채로 디자인된 온실에서 여러 가지 과채류를 동시에 분양받아 재배해볼 수 있고. 창사원 라운지에서는 직접 재배한 작물을 이용한 쿠킹 프로그램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원하는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환경
창사원은 환경을 생각하는 에너지 절감 시스템, 양액 순환 시스템, 최적의 재배 환경을 통해 도심에 적합한 친환경적 온실형 농장을 제공한다. 지열을 이용한 시스템은 가스보일러 대비 운영 비용을 82% 절감하고, 순환식 양액은 환경오염을 방지한다. 계단형 재배기와 LED를 탑재한 수직형 재배 모듈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과 생산에 최적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보기에도 아름답다. 멀티3 시스템 윈도우는 작물 재배에 악영향을 미치는 곰팡이와 박테리아의 주 원인인 결로를 외부로 자동 배출한다.
무엇보다 창사원의 가장 큰 장점은 온실과 창사원 애플리케이션 그리고 취향을 같이하는 커뮤니티가 모바일로 연결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앱을 이용하여 작물 분양을 신청하면 작물을 키우고 싶은 위치까지 선택할 수 있다. 온실 내부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창사원 로봇 ‘워니’는 매일매일 작물 사진을 찍어 모바일로 전송해 고객이 좀 더 농장 가까이에서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햇빛, 물, 온도, 습도가 자동으로 조절되고, 자주 방문하지 못하는 고객을 위해 창사원의 식집사들이 손수 작물을 관리한다. 작물 재배 일지를 쓸 수 있는 식집사 다이어리, 작물 재배 팁을 알려주는 온실 알리미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고객 맞춤형 서비스로 일종의 작물 재배난이도 조절도 가능하다.
도심 어디에나 파고들 수 있는 도심형 팜, 새로운 유형의 공공 공간을 제시하다
창사원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공간 이상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바로 공간에 침투해 주변과 상호작용하며 시너지를 내는 콘텐츠가 되는 것. 창사원이 들어설 수 있는 장소는 무궁무진하다. 쓰이지 않는 건물 옥상을 직접 재배한 작물로 만든 샐러드를 즐기는 루프탑 카페로 바꿀 수 있다. 고층 주거단지 하부에 창사원을 들이면 다양한 공동체가 함께 작물을 재배하며 서로 소통할 수 있고, 먼 곳으로 외출이 어려운 교통 약자도 식물을 기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시니어 타운에 들어선다면, 노인들의 자연스러운 신체 활동을 유도해 건강을 도모하고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통해 정서적 안정 효과를 낼 수도 있다.
만약 창사원이 공원에 들어선다면 어떨까. 최근 여러 공원이 녹지와 쉼터로 구성된 공간을 넘어 다양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일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2022년 새 단장을 한 파리공원에는 ‘살롱 드 파리’라는 건물이 있다. 이곳에서는 프랑스 문화원과 연계한 프로그램이 열리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전시가 진행된다. 양천공원의 책 쉼터는 비가 오는 날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공원을 향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도시공원에 들어선 온실형 농장은 공원과 한데 어우러져 수확의 기쁨뿐 아니라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와 이치를 배우는 장소가 될 것이다. 창사원이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궁중 온실에 대해 학습할 수도 있다.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사람들이 자연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경험한 바 있다. 식물집사, 반려식물 등의 키워드가 연일 트렌드로 떠올랐다. 최근 교외의 북적이는 온실형 카페는 여전히 사람들의 식물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하지만 온실형 카페 대부분은 보기 좋은 관엽 식물과 꽃을 관람하는 데 그친다. 도심형 팜은 식물을 키우는 재미뿐 아니라 이를 수확해 먹는 색다른 경험까지 느낄 수 있는 콘텐츠다. 이와 연계된 쿠킹 클래스, 재배 교육, 나눔장터 등 계절별로 열리는 색다른 이벤트는 창사원을 재방문하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글 김모아 사진 팜한농
**각주 정리
1. 그린 바이오 기업, 팜한농. 1953년 창립하여 2016년부터 LG그룹과 함께한 팜한농은 국내 1위의 그린 바이오 기업이다. 오랜 경험과 앞선 기술력으로 작물 보호제 시장 점유율 1위, 종자 및 비료 시장 점유율 2위를 달성하며, 한국 농업의 경쟁력을 향상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일상에 지친 도시민들에게 도심형 팜을 통해 새로운 고객 경험을 선사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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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 가족을 위한 반려견 놀이터, 바우
다양한 놀이와 훈련이 가능한 애견 시설물
국내 반려동물 양육 인구가 1,500만 명에 육박하면서 반려동물은 단순히 기르는 동물이 아닌 온전한 가족 구성원으로 자리 잡았다. 애견인의 증가로 인해 애견인을 위한 다양한 공간도 함께 늘어가는 추세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이용자 중심의 공간을 만드는 토인디자인은 견주와 반려견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반려견 놀이터 ‘바우(BAU)’를 선보이고 있다.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특징인 바우는 맞춤형 제작이 가능하며 전문적인 훈련 시설을 갖추고 있다. 허들과 점프 시설은 소형견부터 대형견까지 모두 이용할 수 있게 제작했다. 도그워크, 에이프레임, 위브폴스 등 국제애견연맹의 장애물 통과 시설 표준에 맞춰 설계된 전문적인 애견 훈련 시설로 구성했다. 시설을 트랙형으로 배치하면 자연스럽게 훈련을 이어나갈 수 있다. 또한 반려견의 배설물을 위생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배변 봉투 보관함과 목줄을 걸어 견주와 반려견이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애견 벤치 등 편의 시설도 제공한다.
반려견 훈련과 함께 동반 가족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놀이 공간은 일상 공간에서 생길 수 있는 비애견인과의 갈등을 줄이고, 성숙한 애견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긍정적 도움을 줄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반려동물 놀이 공간은 행복한 반려동물 가족을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TEL.02-533-3720WEB. www.toinp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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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링하는 도시생활자-공동공간 쇼핑안내서
제16회 조경비평상 가작
“나는 우리가 여전히 가로와 광장이 공공을 위한 영역이라는 생각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공을 위한 영역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어요.(각주 1)쇼핑은 인류 공공 활동의 마지막 남은 형식일 것입니다.”(각주 2)
1. 몰링하는 도시생활자
나는 아침 청소와 빨래를 마치고 대형 쇼핑몰을 산책하고 있다.(각주 3) 아쿠아리움 주변은 학생들로 북적인다. 연차를 쓴 오늘, 딱히 별다른 목적은 없다. 그저 어슬렁거리다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실 생각이다. 우연히 괜찮은 카디건을 발견하면 입어볼 수도 있겠다. 몸뚱이에 외제들로 가득한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 국산 브랜드 한두 곳을 둘러보긴 할 건데 오늘 지갑을 열 생각은 없다. 어제부터 열린 팝업에서 러닝 장갑이나 양말 색깔이 마음에 들면 와이프 선물로 살 수도 있겠다. 이따 영화를 볼지 스파에 갈지는 고민 중이다. 강아지 터깅 장난감과 바질페스토는 사갈까 싶다. 근데 귀찮으면 밥만 먹고 집에 가서 쪽잠이나 자려 한다. 나는 이따 쇼핑하긴 할 건데 쇼핑하지 않을 수도 있고 지금 쇼핑하고 있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각주 4) 이러한 오프라인 리테일 공간에서의 산책과 점유, 방랑과 배회를 몰링(malling)이라 부른다.(각주 5)
바깥은 지금 미세먼지가 많기도 하고 날씨 예보는 고장 난 오락기처럼 오락가락한다. 사오월과 구시월을 지나 그래픽·사인의 남루함을 드러내는 주변 공원에는 촌스러움이 싹트고 지루함이 개화한다. 공원의 맥락을 무시한 채 뜬금없이 등장하는 땡땡 정원들. “왜 공원 안에 정원이 있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된 건축도 없고 공원도 엉망인데 별 요상한 정원들만 많다”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철학적 대화는 꽃 사진을 찍는 아저씨들의 조리개 너머로 개똥처럼 사라진다. 제각각의 그래픽·사인으로 난장을 이루는 여느 핫플 거리들은 공황장애 초기 증세를 유발한다. 그렇다고 파시즘이 점령한 마을처럼 색채가 획일화되고 경직된 기획 공간을 걷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세금으로 충당한 재원을 이렇게 썼다는 전시 행정의 비루함. 힘들게 모은 돈으로 자녀를 통제하려는 엄마 아빠의 욕심과 오버랩된다. 찰나의 영감보다는 특유의 비장함과 모종의 살기로 뒤덮인 거리. 따분함과 씁쓸함을 배가시킨다. 공원 게이트 주변에 걸린 정치 편향적 현수막들과 공사 준공을 뽐내는 전시 행정의 파편들. 다수의 광장, 거리, 공원 등의 공공 공간들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다. “공공 영역은 사라지고 공공 공간만 남았다”는 누군가의 도시 진단이 떠오른다.(각주 6) 그사이 마주치는 몇몇 상인들의 태도는 부담스러운 비즈니스적 환대감 또는 저급한 불친절함 그 어딘가의 좌표에 널부러져 있다.
반면 대형 쇼핑몰은 과거의 잡스러움과 호객 무드를 탈피한 지 오래다. 편집숍, 박람회장, 미술관의 큐레이터 무드로 고객을 느슨하게 환대한다. “어서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는 이제 불필요한 화법이다. 똘망똘망한 눈빛과 연출성 웃음보다는 되려 차분하고 시크한 눈빛의 담담함이 덜 부담스럽고 더 전문적으로 느껴진다. 대형 쇼핑몰은 고객이 상품과 교감할 시간, 선물 거리를 고민할 시간, 브랜드 가치를 경험할 시간, 그 경험 자체를 공유할 시간, 어슬렁거림과 익명성을 누릴 시간이 모두에게 고결한 시간들로 인정되는 고립 영토다. 이곳에선 서로의 취향과 영역이 오롯이 존중된다. 상품이 진열되고 간택되는 “셀링 공간”은 브랜드 고유의 가치가 전개되는 “쇼룸”의 형식으로 전환되었기에(각주 7) 상품 앞에, 아니 쇼룸과 몰이라는 이 영토 안에서 익명의 이웃들이 평등해지는(듯한) 순간을 마주하는 것이다.(각주 8)
대형 쇼핑몰에서는 전체 공간을 아우르는 일관된 무드의 그래픽·사인이 공간의 레이아웃을 잡는다. 그 안에서 여러 테넌트들이 각자의 개성을 전개한다. 주차장, 식품, F&B, 코스메틱, 여성 패션, 럭셔리, 컨템, 남성 패션, 스포츠, 리빙, 식당가, 문화센터, 옥상정원들이 각 층에 고루 배치되어 있다. 이색적인 팝업스토어와 보이드 VM, 유명 아티스트의 수준 높은 전시회와 테니스 클래스, 시네마와 스파, 셀렉숍 콘셉트의 서점과 특색 있는 카페들, 적당한 온도의 에어컨디셔닝과 깨끗한 화장실, 편리한 ESC와 무장애를 위한 E/V는 덤이다. 적재적소에 전략적으로 배치된 벤치들과 고감도로 연출된 화분과 화단이 인공적인 환경에 환대감을 선사한다. 보타닉·바이오필릭 개념의 대형 쇼핑몰 디자인은 유행이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한 디자인 옵션 중 하나가 되었다.(각주 9) 유리 천장은 높이 뚫려 은은한 햇빛이 들어오고 고감도로 디자인된 적당한 크기와 색감의 그래픽·사인이 공간에 안정감을 더한다. 매장 주변의 보행 폭원은 4m에서 12m까지 널찍해서 마주 오는 사람들이 있다 해도 둘이 걷다 하나가 없어질 리없다. ESC는 MD 구성에 따라 1ㆍ2층을 연결하기도 하고 2ㆍ4층을 과감하게 연결하기도 한다.
벤야민이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목격한 쇼핑공간의 스케일을 몇십 배 넘어서는 이곳엔 콜하스가 예견했던 대형 건축의 특성들이 충만하다. 대형 쇼핑몰 건축 파사드와 내부의 디자인 연계는 모호하고(건축내ㆍ외부의 분리), 내부 공간들은 서로 다른 취향의 디자인 콘셉트로 가득하며(내부와 내부의 분리), 내부 공간의 테넌트와 팝업은 끊임없이 변모하고(단절과 연계의 지속적 변화), 고객들은 전후방 구분 없이 각 층과 각 방향에서 쇄도한다(전이감의 해체).(각주 10)
2. 라지(large)-쇼핑몰과 유사공(共)원
대형화된 쇼핑 공간에서의 몰링은 여느 도시공원 산책과 유사하다. 동선 디자인에는 픽처레스크의 유려한 곡선 DNA가 담겨있다. 더 많은 양의 브랜드를 보행자에게 인식시키려는 쿨한 상업적 시뮬라크르다. 대형 쇼핑몰은 누구나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으며 유니버설 디자인의 수준은 펫 라운지까지 이르렀다. 케빈린치가 제시했던 도시 이미지의 다섯 가지 요소도 이곳에서 유효하다. 에지는 고객 사이드 동선·직원 후방 동선으로, 패스는 메인 동선으로, 디스트릭트는 각 테넌트의 매장들로, 노드는 트래픽 교차점과 결절부(VP) 공간으로, 랜드마크는 곳곳의 대형 보이드와 VM·팝업 공간으로 완벽히 치환된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은 도시생활자에게 다른 행성 소 도시에 온 듯한(낯설지만 익숙한) 기분을 선사한다. 장축 200~400m에 단축 100~150m를 선회하는 대형 쇼핑몰은 거대한 공원과도 같다. 어느 조경 비평가도 모 기자에게 야구장을 파크(park)라고 하지 않았던가.(각주 11) “도시가 공원이고 공원이 곧 도시”라는 20여 년 전 다운스뷰 파크에서의 문장이 지금도 유효하다면, “도시가 대형 쇼핑몰이고 대형 쇼핑몰이 곧 도시”라는 은유 역시 가능해 보인다.
대형 쇼핑몰의 독특한 몰링 경험을 극대화하는 것은 “라지(large)”가 선사하는 규모감이다.(각주 12) 국내 오프라인 대형 리테일의 경우 교외형 아울렛은 2007년(여주 신세계아울렛), 도심형 대형 백화점은 2009년(부산 신세계백화점), 도심형 복합쇼핑몰은 2014년(잠실 롯데월드몰)부터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도심형 대형 백화점과 쇼핑몰의 경우 건축물 외부 녹지와 외부 주차장을 제외한 1층의 건축(영업) 면적만 따지더라도 근린생활권 근린공원 1만㎡와 도보권 근린공원 3만㎡ 이상의 규모를 충분히 상회한다. 1층 몰링에 약 15분(약 1km)이 소요된다고 가정하면, 지하 1층~지상 5층 몰링에만 약 1시간 30분(6km)이 소요된다.
또한 대형 쇼핑몰은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제3조와 시행규칙 별표1에서 규정한 공원시설(조경시설, 휴양시설, 유희시설, 운동시설, 교양시설, 편익시설, 공원관리시설, 도시농업시설, 그밖의 시설) 대부분을 포함한다. 설치하기에 어색한 시설은 “9. 그 밖의 시설” 중 “가. 장사시설”, “라. 보훈회관”, “마. 무인동력비행장치 조종연습장” 등 세 가지 종류에 불과하다.(각주 13) 법규적으로도 이 둘은 모두 국계법이 정한 “기반시설”이다. ‘국계법’ 시행령 제2조(기반시설)에서 규정한 일곱 가지 종류의 기반시설 중 공원은 공간시설에, 대형 쇼핑몰은 유통·공급시설에 해당한다. 모두 ‘도시·군계획시설의 결정·구조 및 설치기준에 관한 규칙’ 제2조(도시·군계획시설결정의 범위)에 따라 도시·군관리계획결정을 받아야 하는 도시계획시설이다.(각주 14)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형 쇼핑몰은 동선의 형태와 공간의 구조, 근린공원·문화공원의 규모감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공원시설을 수용하며 주어진 시간 내에 누구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하다. 구경하고 관찰하고 구매하고 사진을 찍고 기다리는 활동,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멍을 때리는 활동, 브랜드 팝업이나 대규모 이벤트에 참여하는 활동도 가능한 멀티플레이어다. 심지어 야구장, 극장, 공연장처럼 입장료를 징수하지도 않고 좌석에 차등을 두지도 않으니 그 유사도가 대단히 높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공원(公園)은 사(私)적인 장소의 반대 개념으로서 국가나 사회에 관계된 “공적인(public) 장소”를 의미하므로, 대형 쇼핑몰을 유사공원이라 부르기에는 무리일 수도 있다. 그것은 공원의 아류 또는 공원의 가면을 쓴 상업적 페이크 공원(fake park)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가 몰링 경험이 선사하는 공동의 감각에 다시 한번 주목하는 순간, 유사공원의 가능성이 개화한다. 이 접근은 유사공원의 성립 조건을 공(公)과 사(私)라는 소유 개념에 두는 것이 아니라, 공공(公共)공간에서의 두 번째 공(共), 즉 커먼즈(커머닝)의 공간 경험에 주목하는 미학적 접근이다. 이에 따라 대형 쇼핑몰은 단순히 공원과 닮아 보인다는 의미의 유사공원(類似公園)일 뿐만 아니라 유사공원(類似共園), 즉 공과 사의 구분 없이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관계하는 “공동(통)적인 것(commons)”을 경험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제 유사공원은 엄연히 새로운 버전의 스핀오프 시리즈로 거듭난다. 이 세계관에서 대형 쇼핑몰, 야구장, 공항, 가로, 환승센터, 역사, 박물관, 대형병원 등은 모두 유사공원의 지표인 “공동공간 커머닝(감각)”이라는 속성을 득하게 됨으로써 유사공(公)원의 위상, 아니 유사공(共)원이 된다.(각주 15)
*환경과조경442호(2025년 2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렘 콜하스, 봉일범 역, 『렘 콜하스: 학생들과의 대화』, 엠지에이치엔드맥그로우한, 2000, p.45.
2. Rem Koolhaas, Chuihua Judy Chung, Jeffrey Inaba, Sze Tsung Leong(eds), Project on the city Ⅱ Harvard Design School Guide to Shopping , Cologne: Taschen, 2002, p.1. “Shopping is arguably the last remaining form of public activity”라는 선언은 렘 콜하스와 하버드 GSD의 도시연구서 시리즈 중 쇼핑과 도시의 관계를 다룬 두 번째 연구서 서문의 첫 문장이다. 이 연구서는 네 명의 저자가 작성한 약 800여 페이지의 에세이 모음집이며, 첫 번째 연구서 『Great Leap Forward』는 부동산의 세계화를 다룬다.
3. 이 글에 등장하는 대형 쇼핑몰은 비좁은 공간의 중소형 백화점이 아니라, 판매자와 잠재 고객 간의 거리가 최소 7m 이상 떨어져 서로의 시선이 희미하게 캐치되는 쇼핑 공간, 세미-프라이버시 확보라는 익명성의 규율을 암묵적으로 준수하는 쇼핑 공간을 의미한다. 이 기준은 ‘유통산업발전법’ 제2조 제3호에서 규정하는 대규모 점포(대형마트, 전문점, 백화점, 쇼핑센터, 복합쇼핑몰)의 규모 3천제곱미터 이상의 매장 면적을 훨씬 상회한다. 롯데월드몰(잠실), 더현대서울(여의도), 스타필드(하남, 고양), 타임빌라스(수원), 롯데백화점(동탄), 롯데프리미엄아울렛(의왕, 동부산), 현대백화점(판교), 현대프리미엄아울렛(김포, 남양주), 신세계백화점(대전, 대구), 롯데몰 웨스트레이크(하노이) 등 백화점·아울렛·복합쇼핑몰 일체를 일컫는다.
4. 쇼핑의 개념은 구매하는 쇼핑, 구경하는 쇼핑을 거쳐 브랜드 고유의 가치를 오감으로 경험하는 개념, 그 경험을 익명의 이웃과 공유하는 개념으로 확장해왔다. 즉 물질 소비가 브랜드의 경험가치 소비로 전환된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쇼핑이 물질에 국한되지 않고 심리적인 것이 되는 양상은 마르크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쇼핑을 “돈과는 상관없는 하나의 공연”으로 보았다. 렘 콜하스, 프레드릭 제임슨, 임경규 역, 『정크스페이스ㅣ미래도시』, 문학과지성사, 2020, pp.92~93.
5. 대형 쇼핑몰의 몰링은 독특한 유형의 공동(커머닝) 감각을 선사한다. 커먼즈 연구가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에 따르면 커머닝이란 공유된 자원을 관리하는 체제들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상호 지원, 갈등, 협상, 소통 그리고 실험의 행동들을 의미한다. 이 글은 “커먼즈가 기본적으로 물질적 욕구와 정서의 공유 전반을 포괄한다”는 그의 주장에 주목함으로써 공동공간에서의 공동 경험, 즉 “커머닝 감각”이라는 용어를 제시하였다. 또한 커먼즈와 커머닝이 “단순한 공유(sharing)의 의미일 뿐만 아니라 나눔과 참여의 의미를 갖는다”는 한디디의 유연한 해석은 이 글이 몰링의 의미에 대한 전반적 기조를 형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커머닝과 커먼즈의 유의미한 담론은 다음을 참조할 것. 데이비드 볼리어, ‘Commoning as a Transformative Social Paradigm(사회변형 패러다임으로서의 커머닝)’, The Next System Project, thenextsystem.org/newsystemsreader; 데이비드 볼리어, 배수현 역,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갈무리, 2015; 한디디, 『커먼즈란 무엇인가』, 빨간소금, 2024.
6. “공공성과 공공 영역은 사라지고 물리적인 공공 공간들만 남았다”는 그의 기조는 여러 에세이에서 일관되게 드러난다. 4번 책, pp.31~44.
7. 롯데백화점 본점 ‘탬버린즈’, 잠실 롯데월드몰 ‘아더에러’, 하남 스타필드 ‘젠틀몬스터’ 사례처럼 비교적 작은 공간에서도 브랜드의 가치는 전개된다. 무신사 스탠다드와 같은 단독 매장들도 대형화가 되면서 피팅룸 역시 사이즈를 확인하는 엄숙한 밀폐 공간이 아니라 피팅의 과정을 즐기는 유희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8. 상품 앞에 평등하다는 말은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고가의 명품들이 중산층에게 박탈감을 선사하고 불평등을 조장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례로 조던 신상의 획득은 클릭을 누가 더 먼저하고 오픈런을 누가 더 먼저하느냐에 달려있게 되었다.
9. 의왕 롯데프리미엄아울렛과 여의도 더현대서울 모두 2021년에 오픈했다. 보타닉·바이오필릭 쇼핑 공간 콘셉트는 1851년 영국 만국박람회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글의 3장에서 다시 한번 언급할 예정이다.
10. 대형 건축의 특성들은 국내에 번역된 그의 여러 책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기는 하나 그중 가장 친절한 설명은 1번 책을 참조할 것.
11. 최근 야구장과 대형 쇼핑몰이 하나로 연결된 세계 최초의 돔품몰(인천 청라) 청사진이 공개됐다. 유사공원(야구장, 대형 쇼핑몰)의 기묘한 동거를 주제로 삼자대면을 한다면 그 기자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다.
12. 1956년 미국 최초의 몰, 미네소타주 사우스테일 쇼핑 센터의 규모는 보통 사람들이 도심에서 세 블록 정도를 걷는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그 거리에 해당하는 1,000피트가 평균 길이가 되었다. 설혜심, 『소비의 역사』, 휴머니스트, 2017, p.351.
13. 제도적으로 대형 쇼핑몰은 건축법에서 규정하는 다수의 시설을 대거 포함한다. 특히 ‘도시·군계획시설의 결정·구조 및 설치기준에 관한 규칙’ 제84조(시장의 구조 및 설치기준)와 ‘건축법’ 시행령 별표1(용도별 건축물의 종류)에서 정한 방대한 종류의 편익시설을 참조할 것.
14. 세부적으로 대형 쇼핑몰은 ‘유통산업발전법’ 제2조(정의)에 따른 대규모 점포(대형마트, 전문점, 백화점, 쇼핑센터, 복합쇼핑몰)에 해당하며 ‘건축법’ 시행령 제3조의5(용도별 건축물의 종류)에 따라 판매시설 중 소매시장에 해당한다.
15. 물론 유사공원 중 민간 자산의 경우 커머닝의 종류가 상대적으로 단조롭고 예측되며 특정 조직의 규율에 의해 통제된다는 점에서 커머닝의 한계가 존재한다. 쇼핑 공간에 우수고객 등급별 차등 서비스가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유사공원 정의가 비약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우수고객제도라는 보상 마케팅은 고립 영토의 자체 규율이라는 점과 그 내용이 공개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사공원으로서의 결격 사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권정삼은 씨토포스와 도화엔지니어링에서 도시·조경 디자인과 인허가 컨설팅을 담당했다. 현재는 롯데백화점 디자인센터 비주얼 부문에서 국내외 다양한 공간 디자인 빌드 파트너사와 협업하며 오프라인 리테일(백화점, 쇼핑몰, 아울렛)의 실내외 조경 디자인 프로젝팅, 프로듀싱, 디렉팅을 총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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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조경비평상 심사평
월간 『환경과조경』이 주최한 ‘2024 조경비평상’에는 여섯 편의 원고가 접수됐다. 지난 1월 15일 본지 세미나실에서 배정한 편집주간, 남기준 편집장, 박승진 편집위원이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권정삼의 ‘몰링하는 도시생활자’를 가작으로 선정했다.
비평은 대상과 현상을 탐구하거나 조사한 결과를 적는 논문이나 보고서가 아니다. 에세이와도 다르다. 비판적 읽기와 쓰기를 넘나드는 비평은 대상과 현상의 의미를 해석하고 가치를 평가해야 하며, 주장과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비평은 창작보다 더 어려운 글쓰기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조경비평은 조경 행위의 결과물인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공간 또는 문화 현상을 기술, 해석, 평가하는 작업이므로 쉽지 않은 글쓰기 장르다.
논거를 충실히 갖춘 글보다 한 번에 읽히는 글과 이미지가 사랑받는 시대에 여섯 편의 평문이 접수되어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다수의 출품작이 비평의 필요충분한 형식을 갖추지 못했고, 동시대 조경에 의제를 던지거나 기성 담론에 균열을 내는 참신한 주제를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응모자 모두 조경비평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확인한 바, 다음 ‘조경비평상’의 문을 다시 두드릴 것을 권한다.
가작으로 뽑은 ‘몰링하는 도시생활자’는 경쾌한 글쓰기 스타일이 돋보이는 글이었다. 대형 쇼핑몰에서 도시공원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는 참신한 발상을 논리적으로 끌어갔다는 점에서 가작으로 선정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한층 더 압축적으로 논지를 전해 독해의 밀도를 높였다면 어땠을지 궁금하지만, 역으로 길게 풀어쓰는 형식 자체가 장점으로 읽히기도 했다. 출품자 권정삼의 말처럼 대형화된 쇼핑 공간은 일종의 공공 영역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몰링’ 행위는 도시공원에서 경험하는 산책과 유사한 면이 있다. “도시가 대형 쇼핑몰이고 대형 쇼핑몰이 곧 도시”라는 주장, 대형 쇼핑몰이 “유사공원의 지표인 공동공간 커머닝(감각)이라는 속성을 득하게 됨으로써 유사공公원의 위상, 아니 유사공(共)원이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수상을 축하하며, 이번 글쓰기에서 보여준 잠재력이 앞으로의 비평 활동에서 더욱 정련되어가기를 기대한다.
가작 수상작과 함께 최종 토론에 오른 제출작 ‘서사의 발견’은 글의 탄탄한 구조가 돋보이는 평문이었다. 조경에 서사를 담아야 한다는 주장을 세 가지 예를 통해 제시한 점이 안정적이었지만, 조경과 서사를 잇고 엮는 논지가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데 심사 의견이 모였다. 응모자 모두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내년에는 작가론, 작품론을 비롯해 다양한 평문이 도착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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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바람 따라 보낸 하루
일요일 아침, 단잠을 깨우는 알람 소리가 울린다. 힘겹게 눈을 떠 잠을 깨우는 녀석이 누구인지 확인해 보면 매주 보던 알림이다. “지난주 스크린 타임은 12% 증가하였으며 하루 평균 기록은 4시간 25분입니다.” 울릴 때마다 알람 소리를 꺼두어야지 생각하지만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당장 울리는 알람 소리 끄기에만 급급해 설정을 바꾼다는 걸 까먹어 매주 만난다. 메시지를 볼 때마다 조금은 반성하게 된다. 증가만 하는 스크린 타임 기록, 줄어드는 일은 손에 꼽힌다.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8시간을 잠을 자고 8시간을 회사에서 지내니 16시간을 빼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8시간. 8시간 중 절반은 핸드폰을 보고 있다는 소리다. 스마트폰 없이는 못 사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계산한 시간을 보니 하루 중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다. 특히 밥 친구로 OTT나 유튜브를 보는 습관이 스크린 타임을 늘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밥 먹으며 보는 몇 가지 유튜브 채널이 있는데, 이 중 업로드되면 바로 찾아가 보는 채널이 있다. 유재석이 진행하는 ‘핑계고’다. 유재석이 게스트들과 함께 떠들어 제끼는(이 채널에서 ‘수다를 떤다’는 단어를 ‘떠들어 제낀다’라고 표현한다) 영상으로, 라디오처럼 즐길 수 있어 밥 먹을 때 잘 챙겨 본다.
배우 황정민이 핑계고에 출현해 채널명을 실수로 ‘풍향고’라고 잘못 말해 시작된 스핀오프 시리즈는 내게 색다른 계획을 세우게 했다. 유재석이 풍향고에 ‘바람 따라 떠나는 여행’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정식으로 풍향고가 만들어졌고 유재석, 황정민, 지석진, 양세찬이 함께 베트남으로 떠났다. 베트남으로 떠나면서 조건을 덧붙였는데, ‘애플리케이션 없이 떠나는 여행’이다. 사전에 비행기 표만 예약하고 숙소, 이동 수단, 환전, 음식점 등은 현지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애플리케이션 없이 베트남에서 고군분투하는 출연진의 모습이 웃기면서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어딜 가든 휴대폰을 안 챙긴 적이 없으니 애플리케이션을 쓰지 않고 여행을 간다는 걸 상상한 적이 없다. 애플리케이션 없이 해외여행은 무리인 것 같아 당일치기로 가까운 곳을 다녀오는 걸로 도전했다. 목적지는 경기도 양평의 어느 대형 카페. 첫 장소만 정하고 다음 장소는 도착하면 고르기로 했다. 출발 전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수도권만 확대되어 있고 명소가 표기된 종이 지도를 구하는 게 힘들었다. 서점에서 파는 국내 여행 책을 뒤져 원하는 지도를 찾았고, 종이 한 장 들고 떠났다. 최대한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더 집중해서 지도와 표지판을 봤다. 무사히 도착한 카페에서 마신 커피는 더 달달했고, 통창으로 본 남한강의 풍경은 시원하게 뻥 뚫린 기분을 느끼게 했다.
다음 목적지는 딸기 체험 농장. 처음에는 양평의 대표 명소 두물머리를 가려고 했는데, 카페 오다 본 ‘달달한 딸기도 따고 케이크도 먹고’라는 광고 문구가 생각나 농장으로 가게 됐다. 가지고 온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아 기억을 더듬어 왔던 길로 되돌아가며 도착했다. 이미 예약이 다 차 있어서 취소 표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금 고민됐지만 하자고 마음먹었으니 기다리기로 했고, 다행히 자리가 났다. 딸기 따고, 딴 딸기로 케이크도 만드는 꽤나 알찬 체험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해 근처에 보이는 한정식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여행을 마무리했다.
글로 읽을 땐 큰 탈 없이 다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경로 이탈도 많이 하고 목적지 하나 정하는 것도 오래 걸렸다. 카페에서 그냥 집에 갈까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찼지만 이왕 시작한 아날로그를 즐겨 보기로 했다. 어딘가에 앉으면 SNS 게시물을 보는 게 루틴이 되었는데 할 게 없으니 주위를 더 둘러보게 됐다. 특히 동행자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애플리케이션 없이 잘 다녀올 수 있을까 걱정 반, 뭔가 더 재미있을 거 같은 설렘 반으로 바람 따라 떠난 여행은 스스로 쌓아둔 장벽을 무너뜨리게 했다. 뭐든 해낼 수 있는 무모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새해 버프까지 더해진 자신감은 을사년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