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리스트
- [에디토리얼] 우연한 풍경은 없다
- 비합리와 몰상식을 초월한 광기와 폭거, 12.3 비상계엄 내란 사태가 시민들을 다시 차디찬 광장으로 불러냈다. 안온한 일상을 빼앗긴 겨울, 45년 전으로 퇴행한 이 도시의 정치적 풍경 앞에서 여느 해 1월호처럼 새해의 잡지 편집 방향을 희망차게 전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 며칠 지나지 않은 지난해 12월 17일, 조경계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한평공원’의 주창자이자 커뮤니티 참여 디자인 이론가이며 어린이 놀이 환경 실천가로 분투해온 김연금 박사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는 투병의 마지막 순간 남동생을 통해 자신의 페이스북에 끝인사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어쩌다 보니 청춘만 살았습니다. 항상 애쓴 만큼 보상이 적었다고 투덜거렸는데, 돌이켜 보니 함께해주신 분들이 계셔서 저의 청춘은 늘 신났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거의 다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저를 애처롭게 여기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변함없는 가족들의 사랑으로 의연하게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 그릇이 크지 못해 저의 말과 태도로 인해 상처받으신 분들이 있다면 사과드립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특히 포용력 있는 리더가 되지 못한 게 가장 후회됩니다. ‘조경작업소 울’의 새로운 리더는 포용력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저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도와주세요. 누군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두유와 토마토로 간단한 아침을 먹고, 요란스럽지 않은 미소로 반겨주는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책을 읽은 뒤 출근하고, 퇴근 뒤에는 가족들과 투닥거리며 저녁을 먹는 것입니다. 혹여 시간이 맞는다면 마음 맞는 친구와 만나 먹고사는 일 너머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더욱더 좋겠죠.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김연금, 2024년 12월 4일 수요일 오후). 1971년 서울 옥수동에서 태어나 자란 김연금 박사는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생 옥수동에서 살았고, 바로 옆 동네 약수동에 ‘조경작업소 울’을 열어 참여와 소통, 연대와 돌봄에 뿌리를 둔 디자인 작업과 행동을 펼쳐왔다. 그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조경학자이자 조경가였다. 박사논문을 개작한 첫 저서 『소통으로 장소 만들기』(한국학술정보, 2009)가 이론과 실천의 경계를 허무는 학문적 태도를 보여준다면, 마지막 저서 『놀이, 놀이터, 놀이도시』(한숲, 2022)에는 현장의 실험에 토대를 둔 조경가의 지혜와 열정이 짙게 배어 있다. 김연금 박사는 한국 조경 50년사가 낳은 몇 안 되는 글쟁이였다. 편집자가 일말의 주저함 없이 글을 청탁할 수 있는 필자였다. 그의 글은 논리적으로 명징했음은 물론 “진솔하고 명랑했다”(고정희). 김연금 박사의 저술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우연한 풍경은 없다』(나무도시, 2011)는 삶의 장소와 실천의 실험실을 가로지르는 그의 글 풍경의 씨앗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별생각 없이 매일 스치는 풍경, 그 앞에 문득 서보자. 그리고 말을 건네 보자. 오늘 하루 어땠냐고. 좀 생뚱맞은 질문도 던져보자. 당신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이냐고. 갑작스런 질문에 처음엔 서로 좀 어색하겠지만, 곧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연인 듯하나, 절대 그렇지 않은, 삶의 필연성이 빚어낸 풍경이니까”(5쪽). 김연금 박사는 단독 저서뿐 아니라 여러 책 작업에 기획자로, 번역자로, 공동 필자로 참여했다. 그가 기획자 겸 편집자 역할을 맡은 『이어 쓰는 조경학개론』(한숲, 2020)은 조경학 전문 지식을 안내하는 지도 같은 책이다. 팀 워터맨의 원저를 번역한 『조경 설계 키워드 52』(나무도시, 2012)도 조경학과 교과서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다. 『텍스트로 만나는 조경』(나무도시, 2007),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다: 주민참여로 가꿔나가는 삶의 공간』(나무도시, 2009), 『용산공원』(나무도시, 2013),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한숲, 2021), 『한국 조경 50년을 읽는 열다섯 가지 시선』(한숲, 2022) 등에 필자로 참여한 글에는 이론과 실천, 비평과 설계를 횡단한 그의 여정이 고스란히 감광되어 있다. 책으로 묶이지 않은 김연금 박사의 글들은 『환경과조경』을 비롯한 여러 지면에 흩어져 있다. 아마도 공식적인 마지막 글은 채 맺지 못한 연재물 “공원에 간다(5): 서울숲, 따로 또 같이”(‘e-환경과조경’ 2024년 11월 11일)일 테다. 끝부분을 옮긴다. “그래서 그녀는 개인으로서, 작업의 일환으로서 미래에 공원을 만들고 싶어 한다. 혼자 소유하고 즐기는 정원이 아닌, 각자 즐기면서도 함께 하는 공원.” 『놀이, 놀이터, 놀이도시』의 필자 소개 글 마지막 몇 문장을 옮겨 적지 않을 수 없다. “천생 몸치라 공놀이며 고무줄놀이며 뭐든지 못했고 항상 깍두기였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놀았다. 다정한 환대와 집중의 시간이 좋았다. 그 기억으로 사는 것 같다. 얼마간 못 놀았다. 이 책을 시작으로 다시 놀려고 한다. 어린이들과 함께.” 허약하고 부박한 이 조경판은 남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김연금 박사는 편안한 곳에서 마음껏 노시길. 2025년을 여는 이번 호는 본지가 주최한 ‘제7회 젊은 조경가’ 수상자 원종호(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 소장) 특집호다. ‘보이지 않는 조경’의 힘을 실천해온 원종호 소장의 작업들, 그의 에세이 “보이지 않는 조경의 길”, 김모아 기자의 인터뷰, 파트너 정욱주 교수와 동료 최재혁 소장의 글을 특집 지면에 담았다. 원종호 소장의 조경 작품과 조경에 대한 생각을 한눈에 조감하는 기회가 되기를, 또 그의 작업을 촘촘한 비평의 장으로 불러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2014년 1월호~2016년 12월호)의 필자 고정희 박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대표)가 8년 만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번에는 매달 ‘우먼스케이프’로 독자 여러분을 만난다.
- [칼럼] 다시 만난 세계, 조경의 위로
- 신나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기대했던 지난해 겨울, 난데없는 12.3 비상계엄 사태로 대한민국은 또다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이했다. 놀란 시민들은 국회로 한달음에 달려가 완전 무장한 특수부대 계엄군과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아냈다. 국회에서 어렵사리 계엄 해제가 의결되고 진통 끝에 탄핵안이 가결되는 순간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열망하는 시민들의 함성이 차디찬 겨울 광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1980년대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시절에 목 놓아 부르던 민중가요 대신 거리에는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깃발을 든 2030 청년들이 걸 그룹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떼창으로 부르며 축제와 다름없는 새로운 시위 문화를 만들어냈다. 해외 언론들은 한국이 ‘K팝 문화’에 이어 새로운 ‘K시위 문화’를 만들어냈다며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 회복력에 찬사를 쏟아냈다. 반면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로 한국 경제는 증시 급락, 원‧달러 환율 급등 등 큰 충격을 받았고 정부와 한국은행은 유동성 공급 등 긴급 대책을 시행해 시장 안정화에 나섰지만, 정치적 위기에서 비롯된 소비 위축, 금리와 물가 상승 등 경제 리스크는 지속되고 있다. 정치적 불안이 장기화될 경우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지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저하시켜 자본의 급격한 유출로 인한 국내 경제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나라의 어려움과 함께 지난해 조경계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임금과 원자재 가격 등이 오르면서 건설 업종 수익성이 전년 대비 크게 나빠졌고, 하도급 회사가 대다수인 조경 시공 회사 경영에도 연쇄적으로 적신호가 켜졌다. 정부의 ‘건전 재정’이라는 명목하에 복지, 민생 안정 정책은 후퇴하고 공공 부문의 건설 관련 예산도 대폭 삭감되어, 선행 지표 격인 건설 계약액도 5년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서면서 대부분 영세한 조경설계사무소도 일감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연말 비상계엄 이후 탄핵 정국이 이어지면서 불확실성이 커져 주택 거래가 위축되고, 공공 기관이 발주하는 건축·토목 사업도 영향을 받아 향후 건설 경기 전망을 어둡게 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조경계의 어려움도 더 커지고 있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옛 선인의 고사처럼 2025년 신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회복과 함께 조경계도 찬란한 부활을 꿈꾸어본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계엄 사태에 놀란 시민에게 새로운 희망과 위로의 노래로 울려 퍼지듯, 조경이 만드는 세상도 우리 사회에 큰 위로가 될 것이다. 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한국 조경은 산업화 시대의 단순한 국토 환경 조성 역할을 넘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녹색 공간 복지에 기여하는 필수 분야로 자리매김해 왔다. 공원 녹지로 대표되는 생활 공간의 녹색 인프라(green infrastructure)는 지역 사회에 중요한 서비스를 제공해 기후위기로 인한 홍수, 폭염 등 자연재해로부터 시민 안전을 도모하고 인간과 환경의 건강을 뒷받침하는 대기와 수질 개선에 도움을 준다. 조경가는 옥상 녹화, 벽면 녹화, 빗물 정원, 잔디 수로, 투수 포장 등 기존 토목의 접근 방식과 다른혁신적 친환경 인프라 해결책을 통해 크고 작은 지역 사회가 빗물을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조경은 공원과 개방된 공간을 자연 탄소 흡수원으로 변환하는 기후 포지티브 디자인(climate positive design) 접근 방식을 사용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고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자연과 함께 설계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생물 다양성을 높이고 지구상의 생명체를 지탱하는 생태계를 보호하고 복원한다. 또 조경가는 자연환경과 함께 인간 커뮤니티를 돌봄으로써 인종과 성별, 직업과 국가를 넘어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문제에 대해 더 정의롭고 포용적인 커뮤니티, 공정한 사회로의 길을 모색하고 선도한다. 조경가는 환경 및 사회과학 교육과 첨단 기술의 활용을 통해 활기차고 탄력적이며 공평하게 모두를 위한 정의로운 커뮤니티를 설계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동네의 작은 골목길부터 어린이 놀이터, 공원, 도시 전 지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에서 조경가는 공공 레크리에이션 시설, 운동 시설, 자전거 도로, 산책로 등 신체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를 조성하며, 지역 사회의 장기적인 건강과 회복력을 향상시키고 안전하고 건강하며 능동적인 교통 시스템을 갖춘 걷기 좋은 교통 중심 환경을 계획하고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조경은 이제 소극적 의미의 경관적, 미학적 기능을 넘어 공공 복지를 실천하는 사회 서비스의 중요한 첨병이다. 자연환경과 인간 커뮤니티를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설계하면서 우리 사회에 풍부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다양한 방면의 생태적, 문화적 기능을 향상시킨다. 배정한 교수는 저서 『공원의 위로』에서 “공원은 도시의 여백이다. 미래 세대를 위한 숨통이다. …… 공원은 누구에게나 자리를 내주는 위로의 장소이자 모두를 환대하는 공간”이라며 공원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선한 영향력의 무한한 잠재력을 전한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련을 겪었던 우리 세대에게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줄 알았던 민주주의의 위기와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새해에는 조경이 모든 국민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 [풍경감각] 가지치기
- 길게 뻗어 나온 줄기가 발걸음에 걸려서 화분이 쏟아지고 말았다. 무성한 모습이 좋아 일부러 가위를 대지 않았는데. 아깝게 부러진 잎사귀를 주워 모은다. 투명한 유액에 검은 흙먼지가 엉긴다. 뭉개진 자국에서 시린 풀냄새가 난다. 줄기를 잘 보고 발을 디뎠다면, 베란다가 조금만 더 넓었다면, 크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이런 사고는 없었을 텐데. 쏟아진 뿌리를 추스르고 흙도 새것으로 바꿔 다시 심는다. 너무 차갑지 않은 물로 샤워를 흠뻑 시킨다. 남은 잎사귀에 매달린 물방울이 반짝인다. 우리가 여러 계절을 함께 하려면 가지치기를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 조경가 원종호
- 보이지 않는 조경. 이 말은 다소 모호하고 모순적일지도 모른다. 조경이라는 장르는 보이는 걸 구현하고, 그래서 결국 보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조경이란 무엇이며, 이를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가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조경가 원종호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름을 적극 알리는 걸 한사코 마다하는 대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왔다. 내향적인 성격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조경에 임하는 태도는 결코 소극적이지 않다. 그는 보이지 않는 조경을 통해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되는 조경의 편견에 도전하고,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걸 증명하고자 노력한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디자인 언어를 덧대는 대신 명확하고 직관적인 구조와 절제된 디자인 언어를 정리해 정제되고 편안한 풍경을 구현한다. 그래서 다소 심심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오히려 완결성과 완성도를 갖춘 공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조경의 가치를 역설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 모두는 혼자서 결코 할 수 없었다고. 수상 소감에서 말하듯, 동료와 함께 그려내는 일의 가치를 아는 그는 동료와 스승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려 깊은 조경가이기도 하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자세로 동료와 설계를 다루는 그가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을 다섯 가지 단상과 에세이, 인터뷰로 담아냈다. 비슷한 길을 함께 걸어온 동료와 지지와 존중을 아끼지 않는 동반자의 글을 통해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그의 다양한 면모를 조망했다. 이번 지면이 결코 자신을 드러내는 법 없이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는 그를 새로 알게 되거나 더욱 깊은 이해를 제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자료제공 원종호 보이지 않는 조경의 길 _ 원종호 보이지 않는 조경의 다섯 가지 단상 _ 원종호 완벽한 동화를 꿈꾸는 디자인 _ 김모아 랜드스케이프 플레이메이커 _ 정욱주 터를 그리는 난초 _ 최재혁
- [조경가 원종호] 보이지 않는 조경의 길
- 나와 나의 설계를 설명하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 조경가의 보이지 않는 조경’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디자이너는 각자의 생각과 일상을 표출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홍보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시대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다. 조용히 작업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고 작업물을 홍보할 재주도, 적극성도 부족하다. 나와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이하 JWL)의 작업은 내 성격과 묘하게 비슷하다. 조형적 혹은 개념적으로 설계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프로젝트도 없다. 다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작업물이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조경은 심심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다른 조경가의 작업에 비해 명확하게 드러나는 조형이나 개념이 없다고도 한다. 내 작업을 규정하는 포인트를 나 역시도 짚어내기 쉽지 않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설계의 비가시성은 내가 가고 있는, 가고자 하는 조경설계의 방향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보이지 않는 조경, 하지 않은 듯한 조경, 원래 있던 듯한 조경’ 등의 어휘로 말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조경은 매우 높은 수준의 설계적 완결성 없이는 획득하기 어렵다. 요컨대 보이지 않는 조경은 높은 설계적 완성도의 역설적 표현이다. 남들보다 좀 더 크고, 좀 더 화려하고, 좀 더 눈에 띄는 풍경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동시대 건설 산업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수년간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좀 더 가시적인 방식의 조경을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 많은 설득과 성공, 때로는 좌절을 겪었다. 우리 생각에 동의했던 사람보다는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덤덤하게, 그리고 꾸준히 내가 지향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을 해 나가고 싶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조경을 구현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가로 성장해 나가고 싶다. 편안한 풍경 만드는 법을 배우다 학부 시절부터 막연하지만 설계가가 되고 싶었다. 다만 조경설계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석사 시절부터다. 졸업 후 대학원 석사 과정의 지도 교수에게 합리성에 입각한 조경계획의 기본을 배웠고, 휴학 중 일했던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에서 조경설계 실무를 익혔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던 그 시기에 설계관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의 첫 직장은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였다. 당시 김용택 소장의 곁에서 직간접적으로 듣고 경험했던 것들이 조경가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사무실에서 대안을 고민하거나 현장에서 빠르게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 그는 입버릇처럼 늘 편안한 풍경, 억지스럽지 않은 풍경을 강조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일을 배우다 보니 어느새 그가 만든 풍경이 제일 편안하게 느껴졌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당시 나는 호암미술관의 희원을 참 좋아했다. 뭐 하나 거스르지 않는 편안한 풍경, 절제미가 느껴지는 조형과 분위기 때문이었다. 희원 조성 당시 설계 PM이었던 김 소장을 통해 희원의 공사 도면집을 볼 기회가 생겼다. 편안한 희원의 분위기처럼 도면 집도 소박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편안한 풍경 이면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양의 도면, 아름다운 디테일, 높은 수준의 기술적 고민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편안하고 비가시적인, 즉 보이지 않는 조경은 역설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설계적 완결성 없이는 획득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설계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또 다른 프로젝트를 뽑자면 바로 경의선숲길 프로젝트를 꼽을 수 있다. 2013년 안계동 대표(동심원조경기술사무소)가 진행하던 경의선숲길 연남동 구간 설계 용역에 정욱주 교수와 함께 기본계획 실무진으로 참여했다. 조경계획 진행 과정에서 두 분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협의 과정을 어깨 너머로 목격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정말 많은 걸 배웠다. 대상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 범인이라면 그냥 지나칠 잠재력 있는 경관을 발굴해 이를 설계에 반영하는 방법,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편안한 공원 풍경을 만드는 설계적 해법 등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나의 머릿속을 살뜰히 채워주는 살아있는 지식 그 자체였다. 당시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의선숲길의 모습을 자주 상상했다. 너무 심심하지는 않을까, 너무 이상적인 생각 아닐까. 자문하며 혼자 걱정도 많이 했다. 준공 된 모습을 본 뒤에는 두 분이 그때 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깨닫고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는 서울의 대표적인 공공 공간이 된 경의선숲길 프로젝트는 여러 면에서 오늘날 나의 설계관을 구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직관적 설계로 만드는 공간 문화 설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설계의 명징성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설계의 개념, 배치, 구조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계가 중요하다. 말하는 개념이나 제안하는 이미지가 깊이 생각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하고 꼬인 설명은 아닌지, 장식적인 면에 치우쳐 원래 하려던 이야기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지 늘 경계한다. 요컨대 치장과 덧댐을 줄이고 본질과 직관에 가까운 설계를 지향한다. 또한 조경설계를 통해 구현된 공간이 공공성을 증진하고, 특별한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켜 우리 사회에 문화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공간을 직간접적으로 이용할 잠재적 사용자에 대한 파악에 많은 시간을 쓰며, 조형적으로 최대한의 완결성을 갖춘 공간을 만들기 위해 팀원들과 늘 고민한다. 공간의 수준은 동시대의 문화적 수준을 온전히 반영한다고 믿기에 우리 조경가도 문화인이라는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다. 묵묵히 나아갈 길 부족한 경력과 실력이지만, 내가 걸어온 길 그리고 걸어갈 길이 조경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으로 미치길 기대하며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좋은 설계를 통해 양질의 공간을 꾸준히 세상에 내놓고 싶다. 단편적인 프로젝트로 기억되는 대신 꾸준히 좋은 작업을 생산하여 조용하지만 묵직하고 내공 있는 조경가로 기억되고 싶다. 또한 조경설계에 대한 여러 편견을 깨고 싶다. 조경가는 재능 있는 사람만 해야 한다, 설계를 하면 야근과 철야는 필수다 등 근거 없는 이야기가 꽤나 많다. 이게 사실이 아니란 걸 나와 JWL을 통해 증명하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이 다름 아닌 이러한 편견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또래에 비해 특별한 재능이 있지 않았지만 디자인이 즐거웠고 열심히 노력해 설계를 업으로 삼았다. 스스로 야근을 힘들어 해서 업무 시간의 집중도를 최대화하고 야근을 지양하는 사내 문화를 만들어 왔다.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조경가들, 이제 막 조경설계에 뛰어든 주니어 조경가들, 설계가 내 길이 맞는지 오늘도 수백 번 고민하고 있을 조경학도 모두를 응원한다. 우리 모두 한국의 젊은 조경가다. 원종호는 서울대학교에서 조경학을 전공했다.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와 현대건설에서 설계와 시공 실무를 경험한 뒤 2017년부터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JWL)에서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크고 화려하며 눈에 띄는 조경보다는 보이지 않는 조경, 하지 않은 듯한 조경, 원래 있던 듯한 조경을 통해 완성도 높은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조용하지만 묵직하고 내공 있는 조경가로 기억되고자 한다.
- [조경가 원종호] 보이지 않는 조경의 다섯 가지 단상
- 원종호의 작품과 설계 철학을 살펴본다. 조경가 원종호가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의 구심점이 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다섯 가지 이야기를 구성했다. 직관적 개념과 간결한 구조, 사소한 생각과 조형의 가능성, 크래프트 디테일, 관습과 타성에 저항하기, 팀워크와 최적의 경로 찾기 순으로 소개한다. 1. 직관적 개념과 간결한 구조 이번 기회를 통해 작업해 온 프로젝트를 천천히 훑어볼 수 있었다. 나의 작업에 대해 스스로 정의했던 ‘보이지 않는 조경’이라는 다소 막연한 개념을 실제 프로젝트와 연결해 보니 몇 가지 단상으로 수렴됐다. 다만 이 단상들은 설계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원고 작성을 위해 짧지 않은 시간 고민하며 정리된 생각들을 말해보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조경에서 직관적이고 단순한 개념과 배치가 왜 중요할까. 궁극적으로 설계는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자 행위다. 그 과정에서 양질의 통찰과 많은 담론이 오간다 하더라도 결국 겉으로 구현돼 세상에 드러난 모습이 공공성을 높이거나 미적 감흥을 주지 못하면 사실 큰 의미가 없다. 혹자는 이를 설계 이론 및 담론에 대한 경시나 결과 지상주의로 비판할 수도 있다. 다만 10여 년간 실무를 하면서 느낀 건 조경설계 분야에는 피상적인 개념과 장식적인 디자인이 꽤 많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태어난 결과물의 수준이 생각보다 아쉽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결과물로서 완성도 높은 공간을 만드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 그 과정에서의 개념과 배치 및 구조 등은 최대한 간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이해가 쉬운 직관적 개념과 함께 명확한 배치와 구조를 갖춘 디자인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방식을 지향한다. 물론 직관적 개념과 배치가 큰 고민 없이 즉흥적으로 나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양한 리서치와 수많은 고민을 통해 설계안이 피상적이지는 않은지, 혹여나 장식적인 측면에 너무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끊임없이 검토한다. 검토 후 안목과 완성도의 관점에서 그 디자인이 목표하는 수준에 다다랐다고 판단되는 순간, 클라이언트에게 우리의 생각을 가장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며 디자인의 예봉이 꺾이지 않은 상태로 건설적인 협의를 통해 프로젝트를 만들어 나간다. JTBC 상암동 사옥 공개공지와 공공 보행통로 앞서 말한 생각을 잘 구현한 프로젝트가 바로 상암동 JTBC 구·신사옥 외부 공간이다. JTBC 구사옥과 바로 마주하고 있는 신사옥이 세워지며 뒷골목 흡연 공간으로 쓰이던 구사옥의 공개공지가 신사옥과 직결되는 가장 중요한 외부 공간으로 강제로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아가 인접 아파트 단지들과 초등학교를 연결하는 기존의 공공 보행통로가 구사옥과 신사옥 사이를 가로지르게 되면서 그 기능과 역할이 좀 더 강화될 필요가 있었다. 활용한 개념과 배치는 간단했다. 구·신사옥의 입구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언론인들의 다양한 토론과 휴식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외부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사옥과 큰 물리적 관계없이 외딴 오솔길처럼 존재하던 공공 보행통로를 구사옥의 공개공지와 접점을 갖도록 연결시킨 ‘마을길’을 통해 누구나 원활하게 오갈 수 있는 보행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구사옥과 신사옥 부지 사이에 존재하는 약 60cm의 단차는 자칫 기능성에 치우쳐 심심하게 정리될 수도 있었던 디자인에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 주었다. 단차를 극복하는 구간은 JTBC 구성원들이 편히 이동할 수 있는 보행 램프가 되기도 하고, 다양한 교관목 식재 기반으로 기능하는 기단과 화계의 틀이 되기도 했다. 예쁜 나무와 꽃으로 가득한 정원적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철저히 배치와 구조의 측면에서 설득하며 다양한 이미지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만약 구조적이고 직관적인 측면에서 프로젝트를 다루지 않고 피상적으로 흐르기 쉬운 꽃과 정원에 대한 담론을 개념과 배치의 중심에 두고 클라이언트와 협의했다면, 디자인 결정 과정에서 온전히 우리의 의도를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저리 휘둘리며 디자인을 끝까지 지키기 매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성수동 코너 50 공개공지 성수동의 코너 19, 25, 50 시리즈도 세월이 흘러 준공된 지 어느새 4년이 넘어간다. 특히 코너 50은 매우 직관적인 공간 구조로 설계된 프로젝트다. 기후변화는 이미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있다. 뜨거운 여름, 서울 도심에서 바깥을 활보하는 일은 재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도시민의 쾌적하고 안전한 보행을 위해 점점 더 많은 녹지와 그늘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생활권 공원의 추가 확보가 쉽지 않은 서울 도심에서 민간이 제공하는 공개공지는 쾌적한 도시 환경을 위한 녹지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수동 코너 50의 공개공지를 폭염을 피해 잠시 쉴 수 있는 도심 속 오아시스 공간으로 계획했다. 디자인의 입면적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단정한 수형을 가진 백합나무(튤립나무)를 그리드로 배치한 총림을 만들어 하부에 충분한 그늘을 드리우게 했다. 그늘이 집중되는 영역에는 무게감 있는 색상과 형태의 고흥석 통석 벤치를 가로와 수직 방향으로 여러 개 배치해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하더라도 시각적으로 서로 충돌 없이 수용할 수 있게 했다. 백합나무 하부에는 높이 0.4m 내외의 회양목을 최대한 빽빽하게 붙여 배치한 후 칼같이 전정해 박스형 생울타리로 만들었다. 약 30년 전, 원로 조경가 이교원이 도심지에 조성해 놓은 많은 공간이 이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데, 어찌 보면 그의 유산을 성수동에 소환한 셈이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때 이 공개공지를 ‘프랑스 정원’이라는 직관적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정한 나무 그늘과 박스형의 화단을 이야기했다. 나아가 이처럼 단순 간단한 구조는 성수동에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분위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당시 성수동 대부분의 외부 공간은 소위 자연주의 식재를 중심으로 한 조경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공간 전략이 매우 큰 환영을 받았다. 준공 이후 회양목을 정기적으로 박스형으로 칼같이 깎아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관리 측면에서도 유리한 점이 많아 사용자와 관리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공간이 되고 있다. 2. 사소한 생각과 조형의 가능성 일견 보잘 것 없는 조형이나 사소한 생각도 끊임없이 다듬고 정제하면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JWL은 프로젝트 설계를 시작하는 시점이 되면 각자의 다양한 생각과 스케치를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팀원들과 함께 브레인스토밍 시간을 갖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시점에 큰 고민 없이 가볍게 툭툭 던졌던 이야기나 즉흥적으로 그려냈던 거친 스케치들이 차후 디자인의 큰 방향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기도 했다. 조형의 완성도는 떨어지나 한 끗의 가능성이 보이는 대안, 혹은 매우 도전적이거나 반대로 매우 일반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끊임없이 다듬고 정리되어 나가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순간 조형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완결성을 지니게 되는 순간을 경험했다. 이 순간을 경험해 본 팀원들은 조경설계의 진짜 재미를 느낀 동시에, 본인의 실력이 계단식으로 상승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평소 팀원들이 가지고 오는 서투른 안이나 생각도 최대한 열린 자세로 듣고, 그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부도 근린공원 설계공모 제부도 근린공원 설계공모안(74~79쪽)은 사소한 생각들이 빛을 발한 프로젝트다. 횟집과 카페가 즐비한 제부도 상업 가로 한가운데 정사각형으로 자리하고 있는 3,000여 평 공영 주차장 부지를 근린공원으로 재설계하는 공모였다. 대상지를 방문했을 때 바다 방향으로 약 100m 정도 뻥뚫려있는 전망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답사 후 팀원들이 모여 각자 소회를 밝히고 아이디어를 나눴는데, 아주 간단하지만 인상적인 아이디어를 말하는 팀원들이 있었다. 바다 방향으로 대지를 살짝 들어 올리고, 들어 올린 수직의 벽면을 활용한 휴게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학생들이 즐겨 사용하는 소위 들어 올리는 설계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우리가 느꼈던 그리 넓지 않은 스케일감, 단순하지만 사뭇 강력해 보이는 팀원들의 스케치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디자인 발전 과정에서 우연히 화성시의 보석같은 해식 절벽을 알게 됐고, 이를 모티브 삼아 초기의 거친 제안을 정제해 나갔다. 결과적으로는 해변을 향해 약 2.5m 높이의 해식 절벽 구조물이 ㅁ자 형태로 공원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안을 제안했다. 시작은 다소 실험적이고 거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숨겨진 가능성에 집중하며 팀원들과 함께 디자인을 깎고 또 깎으며 정제해 나갔던 과정이 당선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성수 현대테라스타워 공개공지 성수 현대테라스타워 공개공지는 민간의 자발적 공개공지 개선 의지와 함께 성동구의 지원이 더해져 완성된 프로젝트다. 바텀업 방식으로 새로 조성된 성수동 내 첫 번째 공개공지로, 대상지는 폭 5m, 길이 약 100m의 긴 선형 공간이었다. 성수동의 힙한 분위기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전형적인 지식산업센터 유형의 공간이었다. 클라이언트와의 첫 번째 디자인 미팅 때, 디자인 대안 대신 잘 조성된 긴 선형 공간의 다양한 사례 사진을 보여줬다. 보통 여러 사례 사진을 보여줄 때는 우리가 미리 정한 선호안을 중심으로 클라이언트를 직간접적으로 설득한다. 하지만 당시 그다지 생각하지 않던 사례 사진에 클라이언트가 큰 호감을 표시해 조금은 의도하지 않은 방향에서 디자인을 시작하게 됐다. 클라이언트가 선호한 공간은 중국 어느 도시의 빌딩 앞 공지였는데, 동글동글한 모양의 플랜터가 긴 공간 안에서 반복되고, 이를 배경으로 키 큰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경관이 특징이었다. 원이라는 강한 기하학적 형태를 전면에 내세우면 자칫 어디선가 본 듯한 진부한 이미지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방문객의 편리한 사용보다는 기하학적 완결성에 치우치게 될 것 같아 고민이 많았다. 따라서 원을 적절히 사용하면서도 진부하지 않으며 다양한 시각적 형태를 선보이는 휴게 공간을 마련하는 합리적 설계가 필요했다. 원을 평행하게 나란히 두기도 하고, 엇갈려 두기도 하고, 겹쳐 놓기도 하면서 팀원들과 다양한 대안을 그리며 디자인을 정제해 나갔다. 결과적으로 한 개의 원, 두 개의 엇갈린 원, 세 개의 엇갈린 원이 반복되는 땅콩 모양의 앉음벽(플랜터)을 배치했다. 방문객이 앉아 쉴 수 있는 평평한 면을 확보하는 동시에 원형 플랜터의 유려한 조형미를 잘 살릴 수 있게 플랜터의 단면 프로파일을 여러 개로 구성해 모듈을 제작했다. 모듈 도면을 바탕으로 제작한 국산 포천석 플랜터를 현장에 설치해 식재 기반을 확보한 뒤 귀룽나무 10주를 적당한 간격으로 보기 좋게 심었다. 신록이 가장 빨리 찾아와 봄의 전령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하는 귀룽나무는 다양한 목적을 갖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시원하고 안락한 그늘을 드리워 주었다. 프로젝트는 우리의 의도와 살짝 다르게 시작됐지만, 클라이언트의 의견을 존중하고 이를 꾸준한 디자인 발전을 통해 정제해 나간다면 충분히 좋은 디자인으로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 [조경가 원종호] 완벽한 동화를 꿈꾸는 디자인
- 서울대입구역 인근,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의 사무실이 있는 7층 대신 2층에서 원종호 소장과 만났다. 철재 문을 열자 길쭉한 테이블과 온 벽면을 따라 놓인 선반, 그 위를 채운 전통 목재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는 내게 원 소장은 원래 정욱주 교수의 취미인 목공예 공방으로 쓰던 곳인데, 사무실 식구가 늘어나며 공간이 부족해져 이곳 일부를 회의실로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원종호 소장은 신기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사실 사진과 잡지 지면으로 그를 만나며 달변가일 거라 예상했었다. 얇은 테의 안경, 간결하지만 필요한 단어들로 충실히 채워진 글과 문장, 군더더기 없는 도면이 그런 인상을 남겼다. 실제로 마주한 원종호는 그의 동료의 말처럼 “침착하고 조용한 편”의 “전형적인 I 스타일”(정욱주)이었으며, 정말로 “난초를 닮은 면”(최재혁)이 있었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만남으로 그를 얼마나 파악할 수 있겠냐마는 원종호에게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하지 않아도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덕분에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문득 그가 어디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원래 그랬던 것처럼 주변과 동화되는 디자인을 실천하는 그의 조경설계처럼. 창작물은 그것을 만든 사람과 닮는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그날의 대화를 옮긴다. 설계를 향한 열망 - 수상 축하드립니다. 지원서 내실 때 어느 정도 수상에 대한 기대가 있었나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사실 2년 전부터 주변 지인들이 젊은 조경가 공모에 지원서를 내보라고 넌지시 말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스스로 아직은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제 포트폴리오에 담을 수 있는 작품도 적다고 생각했어요. 덜 익었다고 느꼈죠. 올해도 지인과 더불어 정욱주 교수님(서울대학교)의 부추김이 있었어요. 저도 이번에는 한번 도전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제출했는데 기대는 전혀 안했어요. 너무 훌륭하고 잘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선정 소식을 듣고 당황했습니다. 우선 너무 감사한 마음입니다.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인 면이 무엇일까 되돌아보기도 했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는 시기였는데, 설계에 동력을 얻고 각성하는 계기가 됐어요.” - 자기소개서를 너무 즐겁게 읽었습니다. 학부 시절부터 막연하지만 설계가를 꿈꿨다고 적혀 있더군요. 처음부터 설계의 대상이 조경이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서울대학교로 견학을 갔었어요. 공대에 들렀는데, 마침 건축학과에서 과제전을 하고 있었죠. 전시된 모형과 패널을 보는데 마음이 동했어요. 건축이 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서울대 건축학과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꿈꿨던 대로 건축학과에 가지는 못했지만, 조경이라는 분야가 30년 동안 전도유망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조경에 대해 알아보니 건축학과 과제전을 보며 상상했던 일과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조경학과에 진학했죠. 입학 후 동기들이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릴 때도 저는 설계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한 적이 없어요.” - 보통 자신의 적성과 전공이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잖아요. 막상 공부해보니 나와 맞지 않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요. 내 길은 조경설계라는 확신을 언제 가졌나요? “사실 1학년 때는 긴가민가한 상태였어요. 군대에 가서 그 책을 읽지 말았어야 했죠(웃음). 입대 후 배정한 교수님의 스테디셀러인 『현대 조경설계의 이론과 쟁점』을 읽고 꽂혀버렸어요. 제임스 코너의 책도 많이 읽었고, 그때 조경설계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어요. 제대 후 돌아왔을 때 본 현업에서 활동하는 훌륭한 선배들의 모습도 조경설계를 향한 꿈을 키워줬어요. 최영준 교수(서울대학교), 이상훈 교수(전남대학교)를 비롯해 설계 잘하는 선배가 많았고, 전반적으로 다들 조경가를 꿈꾸는 분위기라 자연스럽게 그 시류에 젖어들기도 했어요. 항상 잘하는 사람을 보며 난 언제 저렇게 되지 하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어요.” - 그 시기에 많은 선배와 동기들이 해외로 유학을 떠났잖아요. “맞아요. 제가 04학번인데 동기들이 펜실베이니아대학교(유펜)와 하버드대학교로 유학을 엄청 많이 갔어요. 저는 처음부터 여러 이유로 유학을 고려하지 않았어요. 당시 정욱주 교수님과 김아연 교수님(서울시립대학교)이 프랙티스 기반으로 교수가 된 첫 사례였어요. 그분들에게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대학원에 입학해 정욱주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갔죠. - 약력 중 눈에 띄는 문구가 있어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최우등 졸업’. 어떤 조건을 갖춘 학생에게 주어지나요. “학점은 당연히 괜찮아야 하고, 학과에 봉사를 한 학생에게 주어져요. 학교에 행사가 있으면 좀 솔선수범해서 일을 했었는데, 그 덕분에 최우등 졸업을 할 수 있었어요.” -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다면요. “당시 학과장님이 조경학과 뉴스레터를 만들어보라고 제안해주었어요. 한 달에 한 번 온라인으로 조경학과 소식을 전하는 뉴스레터를 만드는 활동을 열정적으로 했었는데, 재미있었고 기억에 남아요. 반 년 정도 이어지다가 사라져서 아쉽습니다.” - 학창시절 제게는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이 정말 큰 이벤트였어요. 조경설계의 길을 걷고 싶은 학생들이라면 다들 수상을 꿈꾸며 작품을 제출했거든요. 제8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원종호‧최재혁‧신지선‧안데레사) 수상이 조경설계를 하겠다는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줬을 것 같아요. “사실 학부 졸업할 때 낸 작품은 입선에 그쳤어요. 조금 약이 올랐죠. 그 다음 해에 대학원 동기인 최재혁과 학부 후배들을 모아 다시 참여했는데 대상을 받았어요. 그때 노력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열심히하면 뭐든 된다는 걸 깨달았죠.” - 대학원 생활은 어땠나요. 어떤 연구를 주로 했는지도 궁금해요. “저의 대학원 생활은 실무 위주로 이루어졌습니다.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 이름으로 계약한 디자인 프로젝트를 주로 했습니다. 경의선숲길 기본계획, 보육원 설계 프로젝트 등에 참여할 수 있었어요. 공공 공간이나 복지 시설 프로젝트가 많았는데, 덕분에 그때부터 공공 공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어요. 제가 보기보다 인문적인 곳에 관심이 많아서 졸업 논문 주제로는 한국 기념 공간에 대해 다뤘습니다.” - 첫 직장이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이하 KnL)였어요. 줄곧 하고 싶었던 조경설계를 할 수 있는 직장이죠. 그런데 3년 뒤 현대건설로 자리를 옮겼네요. “대학원을 다니며 운 좋게 KnL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었어요. 김용택 소장님에게 조경설계의 기초를 배웠습니다. 설계는 물론이고 현장에서 흙도 날라볼 수 있었죠. 그런데 주로 작은 공간을 다루다보니,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그리 경험도 많지 않으면서 소규모 프로젝트만 하는 것 같다는 답답함을 느낀 거예요. 시공에 대해서도 더 배워보고 싶었고요. 설계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시공은 지금 아니면 못해볼 것 같다는 어쭙잖은 생각도 했어요. 마침 현대건설 공개 채용 공고가 올라왔고, 그렇게 직장을 옮기게 됐습니다.” - 현대건설 입사 후에는 주로 해외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해외 건설 붐이 일던 때였어요. 건설사와 엔지니어링 회사가 중동 등 해외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주하던 상황이었죠. 현대건설에 입사하자마자 카타르 국립박물관 현장에 투입됐어요. 당시 OJT라는 직장 내 교육 훈련이 있었어요. 현장에서 한두 달씩 숙식하면서 일을 배우는 거죠. 그때는 카타르 현장이 얼마나 열악한지 모르고 지원해서 가게 됐습니다. 한번 발 들이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며 만류하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욕심이 났습니다. 카타르 국립박물관 설계를 프랑스 건축가장 누벨이 했거든요. 힘들어도 그 거장의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죠. 1월에 입사해 카타르로 떠나 3년 3개월 있었어요. 악성 현장이었어요. 시공 난이도가 높아서 공사 기간이 3배 정도 늘어난 상황이었죠. 제가 퇴사하고 2년 정도 뒤에야 완공됐더라고요.” - 그때의 경험이 어떤 점에서 도움이 되던가요. “우선 육체와 멘탈이 단단해졌어요. 매일 새벽 여섯 시에 나가서 저녁 열 시에 돌아와 잠만 자고 다시 일하러 나가는 생활을 3년가량 했더니 이제 웬만한 일은 힘들지 않아요. 조경설계를 향한 제 열망을 확인하는 계기도 됐죠. 얼마나 설계가 하고 싶었는지, 그 바쁜 시간을 쪼개서 국내 공모전에 참가하기도 했어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일종의 설계를 향한 갈망의 표출 방법이었죠.” - 그래도 퇴사 결정을 쉽게 내리진 못했을 것 같아요. 그동안 고생한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들 것 같고요. “퇴사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다들 미쳤다고 말했어요. 우선 한국으로 돌아와 생활하면서 생각을 다시 정리해보라고 저를 달랬죠. 한국으로 복귀해 본사에서 한 달 정도 일을 하다가 관뒀어요. 마음이 바뀌지는 않더라고요. 사실 대학원 졸업할 때부터 정욱주 교수님이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었어요. 카타르에 머무는 동안에도 계속 연락이 왔었죠. 덕분에 현대건설 생활을 정리한 뒤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이하 JWL)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조경가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건강한 설계 환경 - 정욱주 교수님과의 관계를 파트너라고 칭하더군요. “정욱주 교수님은 제게 늘 너와 나는 사제지간이지만 일을 시작하면 동등한 디자이너이자 파트너로 대하겠다고 강조해왔어요. 사실 말이 쉽지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게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함께 일하게 된 뒤로는 제게 존대어를 사용하고 저를 한 명의 온전한 디자이너로 대우해주세요. 정욱주 교수님이 대외적으로 엄청난 하드워커로 알려져 있어서 다들 제가 힘들게 일하는 줄 아는데 전혀 아니에요.” - 일 수주 방식은 어떤가요. “아직은 대부분 교수님이 수주한 프로젝트로 사무실이 운영되고 있어요. 물론 제가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프로젝트도 있고요. 이번 제부도근린공원 조성사업 설계공모의 경우가 제가 팀을 꾸려 참여해 일을 수주한 경우죠.” - 자기소개서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어요. “프로젝트는 대표와 PM만의 것이 절대 아닙니다. 프로젝트를 빌드업해 나가는 모든 구성원이 그 프로젝트의 크레디트를 가짐을 상기시키며, 조경가로서 스스로 자부심을 간질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 재능 있는 구성원에게는 직급과 나이에 관계없이 비중 있는 프로젝트를 맡기고, 설계 매니징의 기회를 부여하여 스스로의 성장과 동시에 동료들이 적당한 선망과 긴장을 가질 수 있도록 합니다.” 젊은 조경가 공모를 진행할 때마다 건강한 크레디트 문화에 대해 생각해보곤 하거든요. 회사나 작품이 아닌 조경가라는 한 인물에 주는 상이다 보니, 크레디트 문화가 바르게 자리 잡히지 않으면 젊은 조경가상의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아서요. 크레디트를 어떤 식으로 부여하는지 궁금합니다. “회사에 직원 다섯 명이 전부였던 시기에는 저와 정욱주 교수님이 매번 PM 역할을 했습니다. 직원들이 모두 신입사원이라 별 다른 수가 없었죠. 그때 회사 구조가 2중이었다면, 지금은 3중이에요. 경력을 쌓은 중간 관리자들이 생겨났죠. 이제 역량이 되는 팀장급 직원이 PM을 맡고 있습니다. 그 경우 저와 정 교수님이 디자이너들을 매니징하는 역할을 하죠. 흥미로운 게 직원 수가 다섯 명일 때와 열 명일 때 직원 개개인의 성장 속도가 달라요. 어찌됐든 직급이 가장 낮은 직원이 많은 일을 맡아 처리할 때 역량이 확 늘더라고요. 지금은 중간 관리자들이 워낙 일을 잘하다보니 그 아래 직원들의 성장이 더뎌요. 그래서 파격적으로 사원급 직원에게 PM을 맡기기도 합니다. 큰 프로젝트도 있지만, 경력 1년 정도의 직원도 PM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거든요. 저나 교수님이 일대일로 코칭을 하고요.” - 그런 경우 반응이 어떤가요?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들 해보겠다고 의지를 보여요. 직원들끼리 유대 관계가 좋아서 그런지 PM을 맡은 친구가 버거워하면 다른 직원들이 일을 거들어주기도 하고요. 능력이 있다면 누구든 PM을 맡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연말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려 노력해요. 모든 직원이 디자이너가 아닌 조경가로 자라게 하는 게 모토이기도 하고요. 직장인처럼 다니는 직원을 원치 않아요. 지금까지는 이런 시스템이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조경, 보이지 않는 조경가 - 자신의 조경 설계관을 ‘보이지 않는 조경’이라 말했죠. 비슷한 말을 ‘어떤 디자인 오피스’ 지면에서 찾았어요. “보는 사람의 눈을 단번에 매혹시키는 화려한 조형 언어나 깊은 지적 탐구를 통해 도출한 형이상학적 설계 개념은 우리의 작업에서 찾아보기 힘들다”(“어떤 디자인 오피스: JWL”,2023년 12월호). 어쩌면 보이지 않는 조경은 원종호뿐 아니라 JWL의 설계를 관통하는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한 맥락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왜 누군가와 함께 일하다 보면 그 사람들의 방식에 젖어들기도 하잖아요. 저와 정욱주 교수님 둘 다 튀는 걸 싫어해요. 조형적인 개념뿐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쨍한 느낌의 프로젝트를 선호하지 않아요. 아마 그런 면에서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껴 정 교수님이 저와 함께 일하고 싶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보이지 않는 조경은 저만의 설계관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 보이지 않는 조경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KnL에서 조경설계를 배우면서, 김용택 소장님이 보이지 않는 조경을 하는 조경가라고 느꼈어요. 늘 설계할 때 편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눈에 거슬리는 것 없이 편안하고 원래 있던 것 같은 공간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였죠. 계속 이야기를 듣고 배우다 보니 자연스레 저도 그런 설계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조경설계 서안의 작품을 볼 때도 보이지 않는 조경의 감각을 느낍니다. 편안하고 평온해요. 김용택 소장님도 서안에서 일했던 조경가이니 서안의 감각이 김용택 소장님에게 묻어있다고 볼 수도 있겠죠. 사실 학부 시절에는 제임스 코너처럼 형상과 개념이 강한 설계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10년쯤 실무를 하고 되돌아보니 누가 보면 심심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담백하고 편안한 느낌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 롤모델이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조경을 잘 보여주는 작품 중 좋아하는 공간도 알고 싶어요. “정영선 소장(조경설계 서안)님은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 제외하고 골라보자면 유럽의 조경가들을 좋아해요. 미셸 드비인(Michel Desvigne)과 귄터 폭트(Günther Vogt)의 작품을 좋아해요. 혹자는 설계한 게 뭐가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장소들을 좋아합니다. 그걸 잘 보여주는 작품이 독일의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Museum Insel Hombroich)이에요.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더라고요. 원래 있던 자연 위에 인간이 만든 인공물이 편안하게 폭 얹어져 있는 듯한 느낌의 공간이에요. 그래서 거스름이 없고 그 편안함에서 힐링과 감동을 느낄 수 있죠.” - 보이지 않는 조경은 “특별히 설계한 것이 없어 보인다거나 너무 뻔한 혹은 소극적 디자인이라는 평을 들을 때”가 있죠. 조경의 역할을 축소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요. 이명준 교수님(한경대학교)은 “조경이 ‘보이지 않는다(invisible)’고 할 때,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는다. 하나는설계한 경관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하여 대중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며 “조경은 좀 더 보일(visible) 필요가 있다”(이명준, “정원섬, 보이는 정원”, 2018년 8월호)고 말하기도 했고요. “실무에서 많이 겪는 문제이기도 해요. 설계안을 가져갔을 때, 명확하게 설계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려당하기도 하거든요. 모든 조경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조경 프로젝트의 넓은 스펙트럼 중 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 조경인 거죠. 기본적으로 조경가는 예술가가 아니고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추어 설계를 해나가는 일종의 조정자라고 생각합니다. 클라이언트가 보이는 조경을 원한다면 당연히 해야 하죠. 보이지 않는 조경이라는 설계관은 피상적인 조형이나 개념 너머의 가치관 같은 것이기도 해요. 워낙 설계를 잘하는 사람도 많고 서로 잘났다고 아우성치는 세상 속에서 언젠가 오히려 좀 조용하고 절제된 것이 각광받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요. 보이는 조경은 AI도 할 수 있는데, 안 보이는 조경은 하지 못할 거 라는 믿음도 있고요.” - 황매산 군립공원 입구부 조경이 ‘보이지 않는 조경’의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대상지가 지닌 조건 자체가 워낙 좋은 프로젝트잖아요. 하지만 관 주도의 프로젝트이다 보니 보이지 않는 조경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했어요.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난 덕분에 큰 어려움을 겪진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관 프로젝트에서는 눈에 딱 보이는 설계를 원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상황을 예상하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클라이언트인 합천군청이 오히려 우리의 의견에 동의해주었어요. 황매산 프로젝트의 핵심은 황매산의 전경을 입구부에서 압축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거였어요. 대상지에 총천연색의 시설물과 흔히 볼 수 있는 포토존 조형물이 많았어요. 이런 것들만 덜어내도 이곳은 좋아진다고 합천군청을 설득했죠. 더하는 조경이 아닌 빼는 조경을 한 셈이죠. 난항을 겪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 즈음에 디림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황매산 군립공원 휴게소 ‘철쭉과 억새사이’가 대통령상을 수상했어요. 임영환 교수(홍익대학교, 디림건축사사무소 대표)는 그 건축물을 “자연의 기록에 사람의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는 건축 방식은 무엇일지 고민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했죠. 그러한 의도와 설명이 본래 가진 경관을 보여주는 설계를 하려는 저희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죠. 입구부뿐만 아니라 황매산 군립공원 전체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구역마다 상세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작업을 진행했어요. 이 구역에 데크를 놓을 때는 오일 스테인을 바르지 말 것, 이 구역에는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말 것, 이 구역에는 유채색을 쓰지 말 것 하는 식으로요. 보통 이런 가이드라인을 잘 따르지 않는데, 황매산은 실제로 가이드라인을 지키고 있어요.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 덜어내는 조경을 하다보면 벤치, 의자, 포토존 등 관광객 편의를 위한 시설도 함께 줄어들 것 같은데 방문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황매산이 원체 전국적 명소다보니 접객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또 자연 그 자체인 것 같은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입구부를 그냥 산의 일부라 여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다 싫다 평하지 않더라고요. 자연스럽게 공간을 받아들이는 거죠.” - 쭉 보이지 않는 조경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렇다면 지금껏 진행한 프로젝트 중 형태가 가장 드러나는 작품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하나은행 부산 IPC요(원종호, “나의 미개봉작 상영기: 잭과 콩나무 부산판”, 2021년 5월호). 동화 ‘잭과 콩나무’의 이야기를 조경으로 풀어냈어요. 지하 2층과 지상 1층 사이 계단실은 콩나무의 뿌리, 1층은 콩나무의 얼굴, 12층부터 15층까지의 램프 구간은 하늘을 향해 뻗은 콩나무 줄기, 15층은 거인의 마당, 16층은 거인의 집으로 개념화했어요. 벽화, 바닥 패턴, 벽면 녹화, 선형 램프를 통해 잭과 콩나무 이야기를 직관적이고 일차적인 방식으로 표현했죠. 그게 발주처의 요구 사항이기도 했고요.” 완성도를 높이는 재료와 디테일 - JTBC 사옥 공개공지와 성수동 코너 프로젝트의 앉음벽, 램프, 메지 등 작은 요소의 디테일이 매끈하게 마무리되어 있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전체 설계에서 보면 앉음벽, 램프, 메지 같은 디테일이 별 것 아닌 작은 요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어떤 공간이 사람들에게 양질의 공간이라고 인지되는 첫 번째 순간은 눈에 거슬리는 것 없이 반듯하고 깨끗하게 떨어진 풍경을 마주하는 때라고 생각해요. 가장자리가 깔끔하고, 포장이 균질하고, 무언가 엇나간 지점 없이 말끔하게 떨어지는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해요. 설계 자체도 중요하지만 작은 디테일의 마감 완성도가 공간의 질을 좌우하는 순간을 많이 목격했어요. 그래서 디테일에 힘을 많이 주는 편입니다. 도면만 봤을 때는 별거 없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땅과 시설물이 만나는 부분, 높이 차가 나는 땅이 연결되는 부분을 깔끔하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방법이 녹아들어 있어요. 조형 아래 숨은 설계 원리가 공간의 완성도를 결정한다는 신념이 있습니다. 화려하지만 디테일이 조악한 공간을 지양합니다. 좋은 공간에 놓은 벤치 하나가 공간의 인상을 바꾸기도 하거든요. 기본에 충실한 설계, 튀지 않지만 클래식한 조형 원리에 입각한 설계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 “나의 미개봉작 상영기: 공개공지의 귀환”(2021년 5월호)에서는 “아무리잘 표현해도 현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조성 과정을 지켜보지 않는 한 완벽한 구현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다고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테일 완성도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필요한 경우 일대일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요. 요즘엔 컴퓨터 기술이 좋아져서 다양한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구조적으로 실현이 가능한지 검증이 필요한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때는 시공 팀에게 묻곤 합니다. 대부분은 가능하다고 답해주면서 그 방법을 알려주더라고요. 현장에서 많이 배웁니다.” - 즐겨 사용하는 소재나 식물, 디테일이 있나요? “너무 많죠. 식물 중에서는 노각나무를 너무 좋아합니다. 처음 봤을 때 충격적이었어요. 수피도, 수형도 너무 아름다웠어요. 김용택 소장님이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나요. “노각나무에 꽃이 피면 장마가 오는 거야.” 노각나무를 보며 계절의 흐름을 가늠해요. 꽃도 예뻐요. 노각나무 종류가 수십 가지인데, 한국 노각나무가 제일 예쁘더라고요. 또 직선을 좋아합니다. 곡진 형태 다루는 걸 어려워해요. 소재로는 철물을 좋아해요. 하나은행 부산 IPC에서 실컷 사용했죠.” - 그러고 보니 도면에서 곡선을 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깔끔한 디테일을 선호해서일까요? “네. 제 눈에 거슬리는 게 없는 공간은 대부분은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더라고요. 최근에는 원과 곡선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 또한 기하학적으로 거슬리지 않는 상태여야 합니다.” 문화와 조경 - 2021년 사용했던 프로필에는 지금과 달리 한 문장이 더 붙어 있었어요. “조경가가 문화인으로 인정받는 날까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실험해 볼 생각이다.” ‘문화인’의 정의가 궁금해요. 기획, 공간 브랜딩 등 더 넓은 분야로 조경의 영역을 확장하는 조경가도 나타나고 있잖아요.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쓴 문장은 아니에요. 정영선 소장님이 제가 생각하는 문화인으로서 조경가에요. 앞으로도 조경이 문화에 기여하는 부분이 커졌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문화 활동도 함께 일으키고요. 물론 제가 보이지 않는 조경인을 꿈꾼다고 말하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성향은 아니지만, 좋은 조경 작품을 만들어내서 조경도 문화적으로 성숙한 분야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 72시간 프로젝트, 정원박람회에도 참여했었죠. 추천하는 편인가요? “3~4년 전까지만 해도 관심이 많았고 팀원에게도 참가를 독려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정원박람회라는 행사에 대한 회의감도 들어요. 너무 많은 것들이 우르르 만들어졌다가 증발하는 느낌이에요. 그런 점에서 몇몇 결과물은 정원이라 부르기 어렵다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분야의 영역을 확대하고 자본을 끌어들이는 점에서는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제가 꿈꾸는 문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조경가와는 반대의 길을 걷는 방식으로 바뀌어가는 것 같아요. 아직 덜 여문 작품이 조경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대한 우려도 있고요.” - 작업 중에서 ‘성수 현대테라스타워 공개공지’를 빼놓을 수가 없어요. 출발이 독특했던 프로젝트잖아요. “현대테라스타워 입주민협의회의 의견으로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에요. 공개공지를 리모델링해서 건물의 가치도 높이고 가로 환경을 개선해보려는 거였죠. 우란문화재단을 비롯해 인근 몇몇 공간을 설계해서였는지 그들은 JWL에 연락을 해왔고 설레는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복잡해진 건 민관협력 공개공지 공유정원 조성 프로젝트로 전환이 이루어지면서였어요. 서울시에서 ‘정원도시, 서울’ 정책의 일환으로 자발적으로 공개공지를 리모델링하는 사람에게 예산을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였거든요. 현대테라스타워가 성동구의 제1호 민관협력 공개공지 공유정원이 되게 된 거죠. 예산 지원을 받게 됐지만 이해관계자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어요. 설계안을 서울시가 선정한 정원 디자이너에게 검토를 받아야 했고, 식물의 경우도 관이 규정하는 규격에 맞추어 바꾸어야 했죠. 봉사하는 마음으로 함께한 사람들이 언짢아지는 상황도 벌어지고 계약 관계 자체가 복잡해져서 좀 정신없이 프로젝트를 끝냈어요. 완성된 테라스로 인해 동네 분위기가 더 좋아진 점은 만족스럽지만, 실제 설계자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어요.” - 가장 중요한 건 클라이언트의 반응이었을 테죠. “사실 간판 문제 때문에 조금 갈등이 있었어요. 입주민협의회쪽에 처음 제시했던 렌더링 이미지 속 나무의 수고가 높았거든요. 간판이 나무의 수관 아래로 보이는 형태였죠.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충분한 토심을 확보하지 못했고, 수목 수배에도 어려움이 있어 조금 키가 작은 나무를 심었더니 나뭇가지가 간판을 가리게 된 상황이었어요. 처음에는 나무를 톱으로 베거나 뽑아버리겠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은 수그러든 상태입니다.” 영감의 원천과 취향 - 설계하면서 영감은 어디서 얻나요. 스트레스를 풀 때 어떤 취미를 즐기는지 알려줘도 좋습니다. “책 읽는 걸 좋아해요.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중국 역사를 다룬 책을 많이 읽어요. 만약 조경이 아닌 다른 전공을 택하라고 한다면 고고학을 공부해보고 싶거든요. 잘 생각해보니 고고학을 좋아하는 이유도 풍경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 것 같아요. 역사책이나 고고학 서적을 읽을 때면 머릿속에 그때의 풍경을 몽글몽글 그려보거든요. 설계의 영감을 얻는다고 볼 순 없고, 좋아하는 풍경을 상상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킨다고 보는 게 맞겠어요. 축구도 좋아하고, 멍하니 공상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멍 때리기를 즐겨요. 또 전투기를 정말 좋아해요. 전투기는 최고의 기능, 기능을 100퍼센트 발휘하기 위해 만들어진 극강의 디자인 결과물이거든요. 전투기 분해도나 아이소메트릭을 보면서 영감을 얻어요.“ -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 좋아하실 것 같아요. “맞아요. 좋아하는 말입니다.” - 사무소가 정욱주 교수님 때문인지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있어요. 혹 학창 시절부터 오갔던 쉼터나 아지트 같은 공간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아쉽게도 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원도 없고, 부족한 카페인을 보충하러 주구장창 스타벅스만 가는 것 같네요. 아, 역 주변에 와플 가게가 하나 있어요. 피곤한 날이면 와플을 사서 올라와 커피와 함께 먹는 걸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 가장 최근 소식은 제부도 근린공원 조성사업 설계공모였죠. 마침 같은 호에 당선작을 소개할 예정이에요. 잘 진행되고 있나요. “공모에 당선되어 계약을 한 지 한 달 정도 됐네요. 설계 계약 기간이 6개월, 즉 내년 4월 말까지 설계를 끝내야 해요. 말도 안 되게 짧은 기간이라 부지런히 달려야 합니다. 설계안이 엄청 흥미로워요. 구조적인 해법으로 풀어냈는데 바닥면을 비스듬히 들어올리고, 지형을 조작하면서 만든 벽에 해식 절벽을 구현했죠. 덕분에 그 구조를 검토하는 비용과 공사비가 어마어마하게 소요될 걸로 예상됩니다.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요. 제부도 근린공원을 JCFO의 통바파크(Tongva Park)같은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성공해낸다면 JWL의 아이콘 같은 공간이 될 겁니다. 지역성도 담겨 있고 디테일도 좋아 자부심을 갖고 있는 설계안입니다.” - 마지막으로 조경가를 꿈꾸는 학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학교에서 보낸 몇 년 정도의 시간으로 자신의 재능을 재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한번도 제가 설계를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내가 설계를 못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면 안 됩니다.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면 실력이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조경설계는 압도적인 천재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끈기만 있다면 누구나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분야예요. 자신이 평가한 실력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 눈엔 충분히 잠재력이 있는데 눈앞의 결과만을 보고 설계를 포기하는 친구들을 많이 봤어요. 좋아해서 계속하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걸어가게 될 길이 눈앞에 펼쳐질 거예요.”
- [조경가 원종호] 랜드스케이프 플레이메이커
- 원드리 프랭크 리베리(Franck Ribery)라는 은퇴한 축구 선수가 있다. 그는 프랑스 국가대표 출신으로, 현재 김민재 선수가 뛰고 있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선수 시절 윙어로 대활약했다. 원종호 소장 이메일과 인스타그램 아이디인 ‘원베리(wonbery)’는 리베리의 플레이 스타일을 좋아하는 팬이자 그 자신도 빠르고 기술적 타입의 축구 동호인인 점에서 비롯된 닉네임이다. 그는 본업에서도 빠르고 기술적 스타일의 조경가다. 그러나 리베리처럼 측면을 파고들어 크랙을 만드는 현란한 윙어의 이미지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오히려 그의 본업 스타일은 수비형 미드필더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한 로드리(Rodri)를 떠올리게 한다. 로드리의 소속팀 감독은 그의 기술적 역량, 영향력, 경기를 읽는 능력, 정신력이 완벽하다고 언급한다. 복잡한 도시 내에 아름답고 쾌적하며 건강한 공간을 만들기 위한 설계 과정에서 개인의 설계 실력뿐 아니라 넓은 시야를 갖고 사무실 안팎에서 의견을 조율해 가며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는 능력은 훌륭한 조경가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더불어 ‘더 젊은’ 조경가들이 함께 성장하도록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 역시 중요한 역량이다. 원 소장은 이런 면에서 다재다능한 조경가다. 개인적으로 ‘원드리(wondri)’란 아이디를 추천하고 싶을 만큼 그는 세련되고 꾸준하며 노련한 조율자다. 수비형 미드필더의 속성처럼 그는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한때 지도 교수였던 이와 함께 실무를 해서 넘버 투 정도의 역할만 할 것이라 넘겨짚는다. 젊은 조경가 수상을 계기로 그를 제대로 소개할 기회를 얻어 매우 기쁘다. 그간 함께한 여정을 되돌아보며 평범함을 가장한 비범함을 갖춘 젊은 조경가의 출현을 전하고자 한다. 성장의 기억 학부 때도 만났지만 본격적 인연은 2011년 그의 대학원 시절부터 시작된다. 빠듯한 스튜디오 작업과 논문, 많은 과제를 수행하면서 바쁜 삶을 함께 보냈다. 그 시절 기억 중 인상 남는 지점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와 협업한 경의선숲길 프로젝트에서 그가 그린 스케치 플랜, 다른 하나는 그의 석사 논문 최종 검토본이다. ‘라코닉(laconic)’이란 단어가 있다. ‘최소한의 언어로 요점을 명확히 전달하는’의 뜻을 지닌다. 필자의 대학원 시절 지도 교수가 자주 언급했던 단어로, 최소의 선으로 설계 핵심을 전달하라는 수업 때 사용됐다. 경의선숲길 북쪽 부분을 맡아 진행한 그의 스케치 플랜을 받았는데,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공간적 짜임새를 갖춘 스케치를 보며 그의 설계 감각 스위치가 켜졌다고 생각했다. 그가 쓴 논문의 최종 심사 검토본을 10년 넘도록 보관하고 있다. 논문 준비 과정에서의 논리적 구성력과 체계적 매니지먼트 능력이 묻어나는 물증이다. 논문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좋은 레퍼런스가 될 것이라 생각해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 안정과 신뢰는 그를 설명하는 또 다른 단어인 셈이다. 간결, 구성, 논리, 체계, 안정 등으로 설명되는 그의 성장 캐릭터는 그 만의 디자인 스타일로 가시화되면서 세련됨과 노련함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 인턴 생활도 실무 능력치를 향상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석사 과정 졸업 후 그는 건설사에 취직해 외국 현장으로 향했다. 설계 분야로 진출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시간 동안 다양한 설계 근력을 키우며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 기대했다. 언젠가는 같이 일해보자 하는 희망사항을 간간히 흘리면서 안부를 전하곤 했었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정욱주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WRT, 올린 파트너십(Olin Partnership), 필드 오퍼레이션스(Field Operations) 등 국내외 설계사무소에서 10년 가량 실무 경력을 쌓은 뒤, 2005년부터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4년부터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의 디자인 디렉터 활동을 겸하면서, 도시 정원, 대형 공원, 문화적 장소 구성에 대한 디자인 리서치와 실천을 펼치고 있다.
- [조경가 원종호] 터를 그리는 난초
- 난초 조경가 난초 조경가. 그를 이렇게 부른다면 과찬일까. 처음 만난 건 2010년 가을 무렵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다. 수더분하고 꾸밈없는 모습, 무던한 성격을 가진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덕망이 있었다. 그와 가깝게 교류하기 시작한 건 이듬해 정욱주 교수님 연구실에서 석사 과정을 보내면서다. 나이도 비슷하고 몇 가지 관심사도 공유하던 터라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는 난초를 닮은 면이 있다. 작약이나 모란은 화려한 모습과 강한 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바쁘지만, 난초는 절제된 외양과 은은한 향을 가지고 바위틈에서 숨어서 핀다. 예부터 사람들은 이런 난초의 겸손함과 고매한 태도를 높게 평가했다. 공자는 “선한 사람과 사귀는 것은 마치 난초를 가꾸고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오래 있으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하나 곧 그 향에 동화된다”고 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 돕기를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데 익숙하다. 이런 귀한 성품 때문에 그가 자신의 이름을 조경 업계에 알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의 권유와 추천이 아니었으면 그가 이번 기회에 발굴되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이 지금보다 더 늦어지지 않았을까. 달필 조경가 난초처럼 조용한 성격 탓에 조경가로서의 면모는 베일에 덮여 있었지만, 그 베일을 걷어보면 뛰어난 자질을 확인할 수 있다. 2010년 겨울부터 약 2년의 기간 동안 원종호 소장과 나는 끈끈한 공모전 파트너였다. 30대를 목전에 둔 20대 후반의 학생이라면 대개 마음이 조급하다. 본격적으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기 전이라 자신이 선택한 일이 나와 맞는 직업인지 자문하게 된다. 학업과 설계사무소 인턴 생활을 병행하면서도 짬을 내어 여러 개의 공모전에 도전한 것도 우리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보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참가했던 제8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의 주제는 ‘그린 인프라, 그린 시티’였다. 대상지로 선정한 장항습지 일대 도시 환경을 생태적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설계안을 제시했는데, 대상이라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 공모전에서 원 소장은 전체 설계안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다이어그램을 구상하고 구체화했는데, 논리적 사고의 탁월함과 표현 기술의 우수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달필이다. 문인에게 달필이라고 하면 글솜씨가 능숙한 사람을 말하겠지만, 설계가에게 달필이라 한다면 좀 더 다양한 의미가 있다. 대상지에 맞춘 설계를 구상하는 빠른 감각, 주저하지 않고 그려내는 과감한 드로잉, 거친 드로잉을 정교한 플랜이나 다이어그램으로 전환하는 섬세한 솜씨 등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펜 드로잉을 좋아한다. 드로잉에도 설계가의 특징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날렵한 직선들을 중첩해서 그리는 스케치 스타일이나 플랜에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그의 설계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둥글둥글하고 수더분한 그의 평상시 모습과 다르게 그의 설계는 이성적이고 명쾌하다. 당시 그와 4개 공모전에 함께 팀을 이뤄 참여했고 그중 3개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 2012년 박유선과 함께 3인 공동의 팀을 이루어 도전한 제3회 대한민국 신진조경가 대상 설계공모전에서 전문가 대상을 받는 영예를 얻었다. 젊은 시절의 도전과 성취에 대한 경험은 그가 조경가로 직업을 선택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최재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경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에서 정원 및 조경설계 실무를 익혔다. 2017년 오픈니스 스튜디오(Openness Studio)를 개소하여 생태적 관점을 바탕으로 정원, 공공 예술 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조직위원,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정원과 공원설계 수업을 하고 있다.
- 제부도 근린공원 조성사업 설계공모
- 공모 과정과심사 주안점 제부도는 바다와 갯벌로 둘러싸인 섬으로 서해안 낙조 명소 중 하나다. 특히 육지와 섬을 잇는 갯벌 위 도로가 바다에 잠겨 있다가 간조 시 모습을 드러내며 독특한 경관을 선사한다. 하지만 관광객 감소, 난개발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 등 다양한 지역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6년부터 화성시는 제부도의 고유한 경관과 조화를 꾀하는 ‘제부도 명소화 문화재생 사업’을 통해 예술, 디자인, 건축 중심의 정비를 하며 차별화된 명소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 7월 화성도시공사는 전시 문화 공간 ‘제부도 아트파크’ 일원에 새로운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제부도 근린공원 조성사업 설계공모’를 진행했다. 이번 공모의 목표는 일반적 근린공원 형태에서 벗어나 제부도의 고유한 경관을 강조하고 서해안의 대표 랜드마크가 될 수 있는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공원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제부도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꾀하며 보행 편의성과 접근성을 높이고, 주변과 연결되는 확장된 수변 공간과 지역 주민의 정주 여건을 개선할 수 있는 휴게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궁극적으로 주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제부도의 고유한 정체성을 담고 지역의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는 현대적 감성의 공원을 만들어야 했다. 대상지는 산과 바다가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오픈스페이스로 탁 트인 바다와 산의 파노라마 경관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참가자들은 이를 고려해 산과 바다라는 대비되는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와 지역 주민을 위한 휴게 시설, 보행로와 광장, 조명 시설을 필수적으로 설치해야 했다. 또한 면적의 60% 이상을 녹지 공간으로 만들고, 갯벌과 해안이 가까운 만큼 생육 조건을 고려한 식재 계획이 요구됐다. 시설물은 이용자와 주변 환경을 고려한 디자인을 제안해야 했다. 모든 시설물은 유니버설 디자인 원칙과 배리어 프리 인증 기준에 부합해야 했으며, 지역의 스카이라인을 가리지 않게 시설물의 높이를 3층 이하로 제한했다. 장애인, 노약자 등의 보행 편의성을 고려해 계단 설치를 지양하고 단차를 만들지 않되 부득이한 경우 계단 및 경사로를 동시에 설치해야 했다. 인근 교통망과 접근성, 공원 내부 동선의 효율성 등을 고려한 보행자 동선과 차량 진출입로를 구축하고, 각 공간의 유기적 연결을 만들어야 했다. 나아가 인근 갯벌과의 연계를 꾀하며 기존보다 확장된 수변 공간 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이번 공모에는 총 11개 작품이 접수됐다. 심사위원회는 1차, 2차 심사를 거쳐 최종 당선작과 수상작을 선정했다. 1차 심사를 통해 5개 작품을 선정하고, 2차 심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의 ‘제부마루’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2등작은 조경상회 스튜디오엘의 ‘느림의 장소, 다시 쓰는 제부 풍경’(이하 느림의 장소), 그룹한어소시에이트의 풀, 꽃 그리고 숲 등(이하 풀, 꽃), 사이트닷의 ‘타이들 테라(Tidal Terra) 잠시 머무는 영원’(이하 타이들 테라), 동명기술공단종합건축사사무소+인우플랜의 ‘바람길 모래 언덕’(이하 바람길)이 공동 수상했다. 당선작은 해안 절벽에서 영감을 얻은 조형 마루 전망대를 중심으로 입체적 전망을 선사한다. 해변에서 공원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접근, 낙조 전망이 가능한 다양한 관측점, 주변 지역 상권과의 유기적 연결을 꾀하는 공원 경계부 공간 계획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4개의 공동 2등작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나왔다. 느림의 장소는 공간의 활력을 만드는 전망 파빌리온의 과감한 배치는 우수한 평가를 받았지만, 건물과 공원 간의 연계, 동선 체계가 다소 아쉽다는 의견이 있었다. 풀, 꽃은 입체적 랜드마크로 기능할 수 있는 대형 전망대가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설물의 시공 가능성과 과도한 조형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타이들 테라는 해안 경관을 육지로 끌어들이는 인피니티 풀과 마운딩을 활용한 치밀한 지형 조작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지형 조작으로 인한 시각적 단절과 단조로운 프로그램 구성에 대한 의견이 제기됐다. 바람길은 제부도의 장소성을 기반으로 한 해안 사구 콘셉트와 입체적 데크 계획은 우수하지만, 콘셉트의 실험성이 강해 실현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당선작 제부마루_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JWL) 2등작느림의 장소, 다시 쓰는 제부 풍경_조경상회 스튜디오엘 풀, 꽃 그리고 숲 등_그룹한어소시에이트 타이들 테라(Tidal Terra) 잠시 머무는 영원_사이트닷(SITEDOT) 바람길 모래 언덕_동명기술공단종합건축사사무소+인우플랜 주최 화성도시공사 도시사업처 개발사업2부 위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제부리 190-2 일원 면적 10,593m2 방식 일반 설계공모 예정 설계비 5억5천900만원(부가세 포함) 예정 공사비 59억7천800만원(제경비 및 부가세 포함) 시상 당선작: 제부도 근린공원 조성사업 기본·실시설계 계약 체결의 우선협상권 2등작: 1,375만원 심사위원 최혜영(성균관대학교 건설환경공학부 교수) 유승종(라이브스케이프 대표) 최은경(건화엔지니어링) 양태진(조경그룹 이작 대표) 이남진(바이런 대표) 안명준(조경시공연구소 느티 대표)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자료제공 화성도시공사, 수상 팀
- [제부도 근린공원 공모] 제부마루
- 해수욕, 노지 캠핑 등 제부도의 주요 해변 문화가 가장 발달된 지역에 위치한 대상지는 제부도의 유일한 면적 오픈스페이스다. 이곳은 해변 문화를 수용하고 증폭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동서 방향으로 바다와 산을 끼고 있는 통경축상에 위치해 서해의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하기 좋은 최적의 입지에 있다. 남북 방향에는 숙박 시설, 음식점 등이 모여 있는 주요 상업 가로가 있어, 관광객뿐 아니라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인근 지역 주민의 접근성도 매우 높다. 지역적 맥락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와 상생할 수 있는 새로운 공원을 계획했다. 제부 해수욕장의 일부로 편입된 제부마루는 전통 공간의 마루와 같이 즐겁고 쾌적한 휴식의 터로서 기능하며 아름다운 서해안의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을 제공한다. 나아가 지역 상권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다양한 공간적 장치는 제부도와 화성 관광의 새로운 촉매로 작용할 수 있다. 해식 절벽의 균열과 틈 제부도 자연 경관에서 디자인 모티브를 얻었다. 서해안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자연적 패턴과 제부도의 지역성을 녹인 공원은 섬 경관의 일부가 되며, 나아가 제부도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서해의 조석 작용으로 생겨난 해식 절벽은 제부도의 대표적 자연 경관이다. 해식 절벽은 차별적 침식 과정이 만들어내는 균열과 틈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규암과 같이 연약한 부분은 쉽게 깎이며 움푹 파이지만, 편암과 같이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부분은 강한 외부 충격에도 견디며 상대적으로 느리게 침식된다. 차별적 침식 과정으로 생기는 균열과 틈을 연상시키는 하나의 시설물 유닛을 기본 조형의 토대로 삼았다. 유닛의 입면 일부를 콘크리트 골재 노출로 마감해 절벽의 거친 질감을 표현했다. 여러 개의 유닛이 모여 형성되는 공간의 상부에는 전망대와 바닥분수를, 하부에는 녹지가 어우러진 벤치와 평상 등 다양한 휴게 공간을 조성해 입체적 경험을 선사한다. 특히 경사도가 높은 유닛에는 낙차를 활용한 낙수 공간을 마련해 방문객에게 새로운 친수 경험을 제공한다. 제부도 해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갯벌의 갯골을 연상시키는 무늬를 바닥 포장 패턴으로 연출했다. 해변의 일부로서의 공원 해변의 일부가 된 공원은 해변에서 공원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시퀀스를 선사한다. 해변에서 공원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접근을 통해 해변의 범위를 확장했다. 해변과 공원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디자인은 대상지로 막힘없는 접근을 유도한다. 동서 방향으로 조성하는 스탠드와 경사로를 통해 단차를 극복하고, 해변에서 공원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동선을 조성한다. 제부마루는 배후에서 해수욕장의 기능을 보충하는 새로운 오픈스페이스다. 공원 내부에는 해변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행위를 지원하는 샤워장, 나무 그늘, 벤치 등 배후 공간을 조성해 공원과 해변 사이의 관계를 재정의한다. 해변의 일부가 된 공원에는 다양한 행위가 발생한다. 해수욕을 즐기던 사람들은 공원으로 잠시 올라와 벤치에서 숨을 고르거나, 발의 모래를 털어내며 아름드리나무가 드리우는 녹음 아래에서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갯벌 체험이나 해수욕을 한 뒤 야외 샤워장에서 샤워하며 드넓은 서해 바다를 바라보는 경험은 제부마루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각이 될 것이다. 공원 경계부의 캠핑존은 제부도 남서쪽 해변에 집중됐던 노지 캠핑 문화를 공원 내부로 들여온 공간이다. 이를 통해 식음, 도구 등 캠핑에 필요한 간단한 인프라 제공을 위한 주변 상가의 자연스러운 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다. 전망대로서의 공원 동서를 관통하는 통경축 선상에 입체적 공간을 구성할 수 있는 세 가지 켜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해변과의 시각적 연결성을 갖는 랜드마크를 만들고자 했다. 대상지의 가장 큰 잠재력은 바다 방향으로 100m가량 막힘없이 시원하게 열린 전망이다. 이러한 전망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원의 대지를 수직으로 일부 들어 올렸는데, 전망을 방해하는 잡다한 요소들을 시각적으로 분리하는 동시에 풍부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대상지 맨 앞의 해변 전망대에서는 만조 시 펼쳐지는 가장 선명한 바다를, 중앙 마루 전망대에서는 간조 시 끝없는 갯벌의 수평선을, 배후에 위치한 파빌리온에서는 시원한 잔디밭과 수평선이 병치를 이루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제부도의 해식 절벽을 모티브로 한 전망대는 제부마루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기능한다. 이 전망대는 다양한 구도의 전망을 제공하는 동시에 휴게 공간, 수공간, PM 스테이션 등 공원의 다양한 인프라를 제공한다. 중앙의 광장은 탁 트인 잔디밭 위에서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서해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곳은 평상시 파빌리온 그늘 아래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전망대로, 비일상적인 이벤트 발생 시 많은 인원을 한번에 수용할 수 있는 오픈스페이스로 이용된다. 지역민 삶의 인프라로서의 공원 공원을 ㄷ자로 감싸는 다양한 녹지 공간은 주변 식당과 카페에서 구매한 식음료를 가지고 들어와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공원의 경계부를 피크닉이 가능한 다양한 녹지로 구성해, 주변의 카페 및 식당의 야외 테라스 역할을 하게 했다. 이를 통해 주변 상권 활성화를 도모했다. 또한 지역 축제나 비정기적인 마을행사를 수용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공원의 경계는 휴식, 보행, 식음료 배달 등 다양한 행위가 발생하는 띠가 되어 공원을 고립된 섬이 아닌 마을의 일부로 만든다. 공원을 거점으로 한 지역 상권의 선순환 체계를 만들고 지속가능한 공원 운영을 도모했다. 대부분 지역 주민이 숙박, 요식업 등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상업 활동을 통해 생계를 꾸리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반영해 공원의 경계부를 통해 주변과 다양한 방식의 관계를 맺도록 유도하며 지역 상권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앞으로 공원은 관광객의 소비 활동을 촉진해 지역 상권의 활성화를 돕는 새로운 인프라가 될 것이다.
- [제부도 근린공원 공모] 느림의 장소, 다시 쓰는 제부 풍경
- 서해안의 작은 섬 제부도는 아름다운 자연 자원을 가진 섬이다. 차별 침식으로 만들어진 해식 절벽, 파도와 바람이 만든 해안 사구와 염생 식물, 서해안에 얼마 남지 않은 갯벌을 가진 섬이자 서해안의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경관을 가진 장소다. 이런 환경은 인근 도시의 주민을 끌어당겼다. 케이블카가 놓이고 24시간 연결을 위한 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관광객을 위한 상업 시설도 들어서고 있다. 변화의 시기, 우리의 고민은 공공시설로서 제부도 근린공원은 어떤 성격이어야 하는가에서 시작됐다. 거대한 시설로 점유되기보다 다양한 이벤트를 할 수 있는, 그래서 사람으로 채워질 수 있는, 채움을 대비한 비워진 장소로서 공원을 제안한다. 빠른 속도로 개발의 밀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제부도를 찾은 모든 사람이 서해를 바라보며 쉬어 가고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바쁜 일상 속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면하는 여유를 찾을 수 있는, 느림의 장소로서 공원을 제안한다. 대지 현황 대지는 해안가부터 당산에 이르는 완만한 지형 안에 놓여 있다. 서측으로는 서해의 경관이, 동측으로는 당산의 초록이 펼쳐진다. 공원이 마주한 네 변은 각기 다른 조건을 갖고 있다. 서측 해안 도로변은 많은 관광객이 이용하는 도로다. 공원과 도로를 적극 연계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동측에는 해안 방풍림 일부가 남아 있어 대상지와의 2~3m의 단차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이다. 해안 도로에 집중된 교통 여건을 고려할 때 이면 도로에서 공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획이 필요하다. 북측과 남측에 면한 필지에는 상업 시설이 들어서고 있으며, 맞닿은 도로는 대상지와 2~3m 정도 단차가 난다. 공원과의 접점, 경계부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조성 전략 여섯 단계를 통해 공원을 만든다. 1단계, 다양한 이벤트를 수용할 수 있는 열린마당을 만든다. 2단계, 열린마당을 중심으로 휴게/전망 영역, 조경 영역, 주민 영역, 시설 영역을 설정한다. 3단계, 바다와 산을 향한 전망을 가리지 않도록 시설을 배치하고 계획한다. 4단계, 열린마당을 중심으로 동선을 연결한다. 5단계, 바다 숲을 조성한다. 6단계, 공원과 해안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를 조성한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 [제부도 근린공원 공모] 풀, 꽃 그리고 숲 등
- 제부도는 매력적인 섬이다. 하루에 두 번 열리고 닫히는 바닷길은 수많은 클리셰적 연애사의 중요한 소재이며, 대자연의 바다와 아름다운 노을은 삶의 분주한 마음을 잊게 해준다. 수도권에서 두 시간이면 이러한 제부도에 다다를 수 있다. 마음먹고 한껏 짐을 챙겨 떠나는 휴양지의 바다와는 결이 다르며 저녁에 잠깐 들러 가벼운 여행 기분을 낼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준비 없이 찾은 방문객이 가볍게 즐기기 좋은 제부해변공원을 제안한다. 새롭게 조성되는 근린공원은 등과 골이 반복되는 역동적인 언덕 지형, 그 위로 어우리는 풀과 꽃, 다채롭고 아름다운 해변 경관을 제공한다. 주위를 두른 해송숲은 관광객에게 잔잔함 속에서 바다를 즐기는 경험을 선사한다. 현황과 분석 대상지는 제부도 서측 해수욕장에 면해 있으며 넓은 해변과 바다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1.4km에 달하는 해안 산책로는 좁고 단조로우며, 바다와 갯벌을 시각적으로 즐길 수 있을 뿐 직접 체험하기는 부담스러운 형태다. 또한 그늘진 휴게 공간이 부족해 사람들을 오랫동안 해변에 붙잡아두지 못한다. 건물, 전봇대 등의 주변 시설은 바다와 당산으로 향하는 조망을 방해하고 있다. 해변은 차도와 제방으로 공원과 분리되어 있다. 바람이 만드는 언덕 언덕(등)은 공원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디자인 언어다. 크고 작은 언덕을 연속적으로 조성해 공원과 제부해변을 연결하고 경관적으로 통합한다. 바람이 만드는 언덕의 지형은 역동적 경관을 형성할 뿐 아니라 식생 구조의 회복 과정에서 마주하게 될 문제들을 해결해준다. 들어 올리다: 지형을 들어 올려 조망 플랫폼을 조성한다. 이를 통해 바다의 전망을 즐길 수 있으며 지속가능한 식생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공원 주변의 불량한 경관을 가려주는 효과도 있다. 통합하다: 해변과 공원의 경관적 통합을 꾀한다. 언덕의 디자인 언어를 적용해 해양과 육지의 경관 연속성을 확보한다. 강화하다: 해변 여가의 체험을 강화한다. 바다, 갯벌, 모래 해변 등 해양 경관 요소를 활용하고, 바다와 육지의 단계적 식재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 확장하다: 해변으로의 공원 확장을 꾀한다. 해변과 공원 사이 보행 광장을 조성한다. 이를 통해 갯벌과 바다를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바닷길로 지역성을 강화한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 [제부도 근린공원 공모] 타이들 테라(Tidal Terra) 잠시 머무는 영원
- 제부도는 조수로 인해 고립과 연결이 반복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경관을 오감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제부도 서쪽 끝에 있는 대상지는 이러한 서해의 자연을 지척에서 마주하고 있음에도 연접한 해안 도로와 제방, 평탄한 지형으로 인해 시각적·물리적 연결성이 낮고 주변 시설들로 인한 경관적 간섭을 받고 있다. 우리는 대상지를 다층으로 들어 올리고, 대상지가 관계하는 자연 요소들을 공간으로 끌어들이며, 대상지를 둘러싼 주변 경관과 프로그램을 연결하고자 한다. 제부도가 가진 자연 경관을 확장하고 그 안에서 몰입과 증강된 경관을 경험하는 공원을 제안한다. 푸른 하늘과 붉게 물든 노을,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에서 타이들 테라(Tidal Terra)는 제부도의 변화하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숨쉬는 자연적 공간이자 제부도의 상징적 장소가 될 것이다. 설계 전략 들어 올리다: 제부도의 자연 경험을 증강시킬 수 있는 다층의 플랫폼을 조성한다. 지면을 1.7m 들어 올려 도로의 간섭 없이 자연스럽게 바다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시각적 연결성을 높이고, 4.4m 들어 올려 불필요한 시설을 가리고 바다를 전망할 수 있도록 했다. 수목의 안정적 생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식재 기반을 마련한다. 끌어들이다: 제부도의 바다와 산을 끌어들여 자연 통경 축을 형성하고 자연 경관을 확장한다. 사구 지형과 갯벌 패턴을 차용해 지역성이 돋보이는 경관을 연출한다. 연결하다: 주변에서 대상지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동선을 계획한다. 관광부터 근린까지 다양한 성격의 프로그램이 유기적으로 연계될 수 있게 공간을 설계한다. 바다부터 갯벌, 대상지, 숲까지 경관을 잇는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 [제부도 근린공원 공모] 바람길 모래 언덕
- 해안 사구의 유연한 흔적을 대상지에 반영해 제부도 지질 자원의 특색을 강조한 독특한 사구 경관을 연출하고자 한다. 제부도의 지질학적 가치와 자연성을 담은 감성적 콘텐츠를 통한 참여형 공원이자 제부도의 자연 풍광, 모래 해변, 석양을 담은 특화 콘텐츠를 만들어 사람들이 머무는 새로운 명소를 만들고자 한다. 자연과 조화된 모래 언덕 속에서 독특한 지형의 매력을 방문객이 직접 체험하게 하고, 지질 명소로서의 이미지를 부각함으로써 제부도의 가치를 알리고자 한다. 바람길 모래 언덕은 지속가능한 자연 지질 관광을 활성화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지형 형성 프로세스, 제부도의 모래, 바람, 언덕 바람에 의해 모래가 지속적으로 옮겨지고 장애물 주변에 쌓이면서 모래 언덕이 형성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며 변화하는 역동적 사구 경관이 연출된다. 이러한 사구 지형의 변화 과정을 디자인에 반영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관과 다양성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자 한다. 개방적이고 아름다운 해안 경관과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식재 경관으로 사계절 내내 방문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이를 통해 제부도 지질공원의 상징성을 강화하고 지속가능한 관광지를 만들고자 한다. 제부의 언덕, 매력을 더한 모래 언덕 제부도의 해안 사구에서 모티브를 얻어 모래 언덕을 만들었다. 언덕의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오르면 제부도의 바다와 석양을 조망할 수 있다.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제부의 언덕 어디에서나 바다와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 [우먼스케이프] 고대 이집트 핫셉수트 여왕
- 연재를 시작하며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2014년 1월호~2016년 12월호) 연재 이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시간은 정말 쏜살같다. 나이가 들수록 가속이 붙는지 살은 더욱 빨리 날아간다. 살이 과녁에 가서 꽂히기 전에 다시 연재를 시작해 본다. 이번 연재의 제목은 “우먼스케이프(womanscape): 여인의 풍경”이다. 필자가 여자라서 여성만을 편들자는 건 아니다. 100장면 이야기를 엮는 과정에서, 그리고 식물적용학 강좌에서 뛰어난 디자이너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동안, 20세기 초에 활동한 멋진 여성을 여럿 만났다. 그들은 물론 소수였다. 대세에는 역행하고 싶고, 그에 밀리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싶은 건 필자의 천성 탓일 것이다. 그래서 조경과 정원의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난 소수의 여성에 관한 관심을 키워 왔다. 지금 21세기에는 조경과 정원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 비율이 매우 높다. 새내기들에겐 생소한 얘기겠지만, 백 년 전 조경계에 여성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화젯거리였고 그때 그 여성들에게는 ‘남성이 주도하는 세계에서 뜻을 관철하여 두각을 나타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들은 인정받기 위해 남성 동료에 비해 배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편견에도 많이 시달렸다. 예를 들어 독일의 칼 푀르스터(Karl Foerster)는 거의 성인 대접을 받지만, 그의 딸 마리안네(Marianne Foerster)는 뛰어난 조경가였음에도 사람들은 그의 직업이 ‘칼 푀르스터의 딸’인 줄 안다. 최근에는 유럽 최초의 여성 조경가 헤르타 함머바허(Herta Hammerbacher)에 관해 “그 여인이 요리를 잘 못했어”라고 험담하는 건축가를 만난 적이 있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조경가)가 탕 소리가 나게 탁자를 내려치며 그따위 소리하면 이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그는 얼굴을 붉혔다. 조경과 정원 전문가 외에도 문장가, 화가로서 정원을 가꾸고 풍경을 노래한 유명한 여성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분위기를 바꿔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각각 ‘문학가의 정원’과 ‘화폭에 담은 정원’으로 묶어서 담아내면 좋지 않을까? 한편, 정원을 탐구의 대상으로 보았던 여성들도 있어 이들을 한 그룹으로 묶어 보려 한다. 물론 전문 여성들의 비중이 큰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이들은 다시금 ‘정원사, 정원 디자이너, 식재 디자이너’를 한 그룹으로 묶고, 조경가들은 ‘개척의 시대’와 그 이후의 ‘표현주의의 시대’로 크게 나누려 한다. 20세기 초에 머물지 않고 현재 중견으로 자리 잡은 1970년대생의 작품 세계까지 살펴볼 예정이다. 근 백년 전에 여성이 조경계에 등장했다고 한다면 그 이전 시대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을까? 사실 그 이전의 정원은 왕족과 귀족, 지배층의 영역이었다. 지배층에 속했던 여군주나 왕비, 고위 귀족 부인들이 정원 역사에 더러 이름을 남겼다. 도시계획과 건설 사업, 토목과 조경 사업 역시 군주들의 과업이었다. 그리고 그 과업에 충실한 여성들이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흠 잡히지 않고 권좌를 지키기 위해 더욱더 열심이었다. 먼저 프리퀄 개념으로 네 명의 여군주를 선발해 그들의 활약상을 전하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해외의 소식을 주로 전했지만, 이번에는 한국의 여성들과도 함께한다. 시대순으로 우선 고대 이집트의 핫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이야기를, 그다음 첨성대를 비롯하여 사찰과 능의 건설로 서라벌 도시축을 완성으로 이끈 선덕여왕 이야기를, 이어 프랑스 르네상스 왕실에서 이탈리아 여성으로 고생깨나 했던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erina de' Médicis)의 이야기를, 그리고 계몽주의 시대로 넘어가 바이로이트 공국의 왕비 빌헬미나(Wilhelmina)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빌헬미나는 남편이 사망한 뒤 그 역할을 넘겨받아 역량을 발휘했다. 1부 여인천하, 여군주들의 풍경 첫 번째 이야기: 고대 이집트 핫셉수트 여왕(기원전 15세기) 2021년에 ‘듄Dune’이란 영화가 엄청난 모래바람을 몰고 왔었다. 사막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여서 보는 동안 갈증에 시달렸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이 지났다. 듄 1편을 보면 주인공 폴이 새로 이주한 아라키스 궁전을 둘러보다가 정원에서 대추야자 나무에 물을 주는 남자를 만나는 장면이 있다(43분부터). 하필 그 장면이 인상에 남는 건 직업병일 것이다. 이집트에서 보았던 숱한 대추야자 나무와 핫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이 떠올랐었다. 감독이 여왕의 장제전을 보고 영감을 얻은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사실 나는 이집트에 가기 전부터 핫셉수트 여왕에게 매료됐었다. 『서양정원사』에서 처음 만난 인물이다. 고대 이집트 편에 반드시 언급되는 여왕,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 파라오였다. 스스로 왕관을 쓰고 파라오가 된 창의적이고 담대한 여인이었다. 이집트의 여왕은 클레오파트라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클레오파트라(재위 기원전 51~30년)보다 천사백 년 이상 선조였다. 클레오파트라가 나라를 로마에 넘겨주어야 했던 비운의 여왕이었다면, 핫셉수트는 상하 이집트의 결속을 다지고 외세를 물리쳐 평정하고 나라를 번영으로 이끈 성공적 지도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남자의 독차지였던 왕조에 앉아 그리 편한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다. 줄곧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했고 권위를 재삼재사 다져야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원칙은 다를 바 없었다. 이 원칙은 법전이 아니라 신화에 못을 박아 두었기 때문에 더욱 지엄했다. 핫셉수트는 그 신화를 어떻게 깼는지, 어떻게 깰 생각을 했는지 그것이 몹시 궁금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스스로 새로운 최고의 신을 추대하고 그의 딸이라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기존의 신화를 깼다. 담대하고 용의주도했다. 핫셉수트는 투트모세(Thutmose) 1세의 딸이자 투트모세 2세의 왕비로서 성골 중의 성골이라 왕이 될 자격은 충분했지만 여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병약한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파라오가된 어린 의붓아들 투트모세 3세의 섭정을 맡았다. 7년 뒤 아들을 밀치고 그의 왕좌에 앉았다.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아들을 공동 통치자라 칭했다. 그렇지만 종교와 정치는 핫셉수트가 독점하고 아들에게는 군사 책임을 맡겨 전장을 돌게 했다.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투트모세 3세보다는 자신의 정당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자기 능력을 믿고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왕관을 썼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제사장들의 동의 없이는 왕이 될 수 없었다.핫셉수트는 본래 테베(Thebae), 지금 룩소르(Luxor)의 지역신에 불과했던 아문(Amun)을 최고의 신으로 추대하고 그를 모시는 테베 제사장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테베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던 때였다. 아직 남편 투트모세 2세가 살아있을 때는 나서지 않고 조용히 뒷전을 지켰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권력욕이 도졌다기보다는 그녀의 여러 행적으로 보아 내심 오랫동안 치밀하게 계획한 흔적이 보이는데 아문 신에게 모든 것을 건 듯하다. 아문 신의 딸이라는 자신의 탄생 신화를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 홍보한 파라오는 핫셉수트가 처음이었다.(각주 1)아문 신이 “왕을 낳을 생각으로 아버지 투트모세 1세의 모습으로 화해 어머니와 동침하고 나를 낳았다. 그러므로 나는 왕이다”라는 서사시를 지어 장제전 벽에 가득 부조로 새겨 넣게 했다. 핫셉수트 장제전과 정원 그러나 물론 그 담대함 때문에 서양 정원사에서 언급되는 것은 아니다. 불모의 사막에 정원을 만든 공적 때문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 정원은 아주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고 지금은 나무를 심었던 구덩이와 연못 터 두 군데만 남아 있다. 핫셉수트가 사막에 나무를 심었다는 대목이 내게 큰울림을 주었다. 3,500년 전에 판 그 구덩이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소식에 그것을 보러 이집트에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핫셉수트는 재위 초기부터 데이르 엘 바하리(Deir-el-Bahari) 언덕에 자신의 장제전을 건설했다. 삼단 테라스 형의 거대한 건축으로서 이집트 건축 중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이집트 여행을 하면 반드시 가게 되는 곳이다. 나일강 서안 왕가의 계곡 가까이에 있다. 왕가의 계곡은 무수한 석묘가 모여 있는 곳이고, 데이르 엘 바하리는 파라오들의 제사를 모시는 장제전이 있는 곳이다. 한국의 현충사나 문묘 등에 해당할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의 사당이나 문묘는 후세가 지어주는 데 반해 고대 이집트의 장제전은 각 파라오의 재위 기간에 미리 지어놓았다는 점이다. 대개는 재위가 시작되면서 바로 무덤과 장제전 축조 사업을 시작했다. 파라오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태어남과 동시에 사후 세계를 준비했다. 이는 고대 이집트인의 사후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혼이 계속 살아간다는 믿음은 거의 모든 문화권에 있었지만, 이집트 사람들의 사후 세계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죽으면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서안으로 가서 사막의 엘쿠른(El-Qurn)산을 건너 저편에 존재하는 다른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런데 혼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승과 똑같은 육신으로 살아간다고 믿었기에 미라를 만들었다. 면포가 칭칭 감긴 미라의 몸으로 사막의 석산을 넘어가는 것이 너무 고생스럽다고 여겼는지 산을 뚫어 석묘를 짓고 그곳에 미라를 안치했다. 석묘는 곧 서쪽의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인 셈이었다. 당시의 이집트 사람들은 엘쿠른산을 살아서는 넘을 수 없는 장애로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너머에 펼쳐지는 끝없는 죽음의 사막도 죽어서는 살아볼 만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장제전 데이르 엘 바하리에는 세 개의 장제전이 있는데, 그중 핫셉수트의 장제전이 가장 잘 ‘복원’되어 멀리서도 그 웅장함이 압박해 들어온다. 붉은 석산을 수직으로 깎고 그 안에 건물을 앉혔다. 여왕 재위 7년에서 22년 사이에 건설됐다. 여왕의 무덤은 언덕 넘어 왕가의 계곡에 있으며 이곳은 오로지 여왕과 아문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다. 이로써 아문 신과 핫셉수트의 긴밀한 관계가 성립되어 아문이 핫셉수트이고 핫셉수트가 아문이라는 등식 하에 왕권의 신성함을 과시했다. 장제전은 나일강 서안에서부터 약 1km 정도 떨어져 있다. 지금은 관광버스 주차장도 있지만 당시에는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도보나 가마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때 이미 쭉 뻗은 대로가 닦여 있었다. 대로 양변에는 이집트에 비교적 흔한 아카시아(Acacia sp .)(각주 2)를 심었다는데, 지금은 그저 먼지 나는 사막길이다. 마침내 장제전의 거대한 마당에 들어서면 중앙축이 있고 그 양변으로 핫셉수트 형상의 스핑크스가 열 지어 있어야 맞는데 지금은 두 개만 남았다. 정원 스핑크스 행렬이 끝나는 곳에서 정원이 시작되었다. 길 양쪽에 대칭으로 T자형 연못을 두고 그 주위에 격자형으로 나무를 심었다. 이 정원의 핵심은 두 연못이다. 연못은 각각 길이 10m, 폭은 좁은 곳이 2.6m 넓은 곳이 6m다. 이런 T자형 연못은 이집트 정원에서 흔히 보는 형태다. 나일강에서 퍼온 점토를 바닥에 깔고 물을 댄 후 파피루스 등 수생 식물을 심었던 흔적이 발견됐다. 오리도 헤엄쳤을지 모르겠다. 이 파피루스 연못은 그저 연못이 아니라 풍요의 여신 하토르를 기리는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파피루스 수확 장면을 모방하고, 부메랑을 던져 새를 잡는 의식을 말하는데 이집트 건국 초기로부터 매우 중요한 종교적 의식이어서 여러 벽화에 묘사되어 있다.(각주 3)핫셉수트는 왕이기 이전 왕가의 여성으로서 하토르 여신의 화신이었고 그 때문에 여기에 파피루스 연못을 꾸며 풍요의 의식을 치렀을 것이다. 연못의 양쪽에서 발견된 구덩이는 모두 66개며 각 구덩이의 깊이는 3m나 된다. 어떤 나무를 심었었을까? 사막에 나무를 심기 위해 핫셉수트는 ‘미지의 나라 푼트’라는 곳으로 원정대를 보내 몰약나무(Commiphora myrrha) 와 유황나무(Boswellia sp .)를 31그루씩 수입했다고 전해진다.(각주 4)둘 다 이집트에서는 자라지 않는 나무다. 다만 이 나무에서 생산되는 몰약과 유황이 이집트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이다. 몰약과 유황은 그 많은 신전에서 매일매일 향을 피워 신들을 기쁘게 하려 필요했고, 특히 몰약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약으로도 널리 쓰였으며 무엇보다 미라를 만들 때 필요했다. 그러나 모두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핫셉수트 이전에도 여러 왕이 그 두 종의 나무를 들여와 번식시켜 보려 했지만, 기후 조건이 맞지 않아 모두 실패했다. 나무줄기에 상처를 내면 나오는 진이 굳어서 각각 몰약이 되고 유황이 되는 이 두 나무는 뜨겁고 건조한 기후가 필요하지만, 일정 기간 우기도 있어 주어야 한다. 이집트의 리비아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곳으로 일 년에 평균 하루 비가 내리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곳이다. 기온도 아프리카 내륙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그런 곳에서 유독 핫셉수트가 심은 나무만이 살아남으라는 법은 없었다. 항공 사진을 보면 잘 알아볼 수 있는데 장제원의 규모에 비해 정원은 어처구니없이 작다. 그 큰 마당을 나무로 모두 채운다면 어느 정도 비율이 맞을 것이다. 그런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굳이 왜 그곳에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었을까? 푼트 원정대 이야기 핫셉수트 장제전 2층 테라스의 좌측 열주실에 보면 ‘푼트 원정대 이야기’가 부조로 길게 새겨져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집트의 부조는 그림과 함께 그 그림에 대한 설명을 상형문자로 함께 새겼다. 푼트(Punt)라는 곳에서 나무를 뿌리째 분에 담아 가져오는 장면이 유명해서 서양 정원사 책에 반드시 실린다. 이 부조 벽화는 엄청난 공을 들여 원정 경과를 소상히 묘사한 스토리 보드인데 많은 부분 훼손되어 19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근 150년 동안 여러 나라의 여러 학자와 복원가가 달라붙어 해석하고 복원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푼트 원정에 관해서는 해마다 새로운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이러하다. 푼트 원정은 아문 신이 핫셉수트 여왕에게 직접 지시한 일이라고 한다. “아문 신께서 짐에게 이르기를 신전에 정원을 꾸미라 하셨다. 그 뜻을 받들어 배 다섯 척을 지어 푼트에 원정대를 보냈다. …… 나무를 가져와 정원에 심어 가꾸었더니 잘 자라서 소들이 나무 밑에서 풀을 뜯었다”(각주 5)고 벽화에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구절이 새빨간 거짓말이 아닌 것은 나무 구덩이가 증명해 준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푼트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소말리아라는 설이 유력했는데 2020년에야 비로소 개코원숭이 세포 내 스트론튬의 동위원소를 분석해 확인됐다. 황금의 나라라 불렸던 푼트, 진귀한 나무와 황금과 애완용 개코원숭이도 선물하는 나라 푼트는 ‘아프리카의 뿔’이라 일컬어지는 지역, 즉 지금의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그리고 북서 소말리아 지역에 있었다고 결론이 났다.(각주 6)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원정의 우선 목적이 정원 조성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의도가 더 컸다는 해석이다. 장제전의 긴 벽을 푼트 원정 묘사에 할애한 것은 그만큼 그 일이 중요했다는 뜻이다.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깟 원정이 뭐 그리 대단했을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당시 푼트에 가는 일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제례와 장례가 산목숨보다 중요했던 이집트 사람들의 유황과 몰약 소비량은 어마어마했다. 수입한 나무 62그루의 재배에 성공했다고 해도 그 수요를 채우기에 턱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핫셉수트 여왕의 능력과 신심을 만방에 알리는 상징적 제스처였을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정원도시’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정원이 진심이 아니고 정치적 프로그램이었다. 현대의 정치가나 고대의 군주에게 정원이 진심이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푼트 원정은 꼬박 3년이 걸렸다. 당시 이집트에서 ‘아프리카의 뿔’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선박을 끌고 ―그래서 조립식으로 만들었다― 사막을 건너 홍해까지 가서 거기서 뱃길을 타고 내려가야 했다.(각주 7)죽을 게 뻔한 나무 62그루를 얻기 위해 그 험한 원정길에 2백 명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무뿐 아니라 유황과 몰약 알갱이를 산더미처럼 가져 왔고 그외에도 숱한 보물을 가득 실어 왔다. 이는 선조 왕들이 정복 전쟁을 통해 얻었던 전리품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핫셉수트는 살상을 하지 않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아문 신에게 바칠 어마어마한 물량의 보물을 구해옴으로써 자신의 역량을 증명해 보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문 신의 향기라고 불리는 몰약으로 만든 향기로운 오일을 온몸에 발랐다고 한다. 이제 핫셉수트는 아문과 같은 향을 지님으로써 상징적으로 신과 동화되었고, “기쁨에 가득 차 상하 이집트를 영원히 통치할 것이다”(각주 8)라고 벽화에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이 신격이며 아무도 넘볼 수 없다는 것을 신하들에게 알렸다. 이때부터 핫셉수트는 여인의 복장을 버리고 남자로 변신하기 시작했다.(각주 9)왜 끝까지 여자임을 지키지 않았는지에 관해 지금 3,500년이 지난 시점에 의문을 품는 건 적절치 않을 것이다. 핫셉수트는 재위 22년째 되던 해, 기원전 1457년 1월 14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탄생 연도가 불확실하므로 35세에 죽었다는 설과 45~60세에 죽었다는 설이 공존한다. 마침내 단독으로 군림하게 된 투트모세 3세는 이때 30세였다. 20여 년간 전장을 떠돌았기 때문인지, 핫셉수트가 죽은 뒤에도 정복 전쟁을 멈추지 않고 영토를 크게 확장한 명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는 핫셉수트 치세 기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실은 이집트 학자들조차도 19세기 말까지 핫셉수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산사태로 장제전이 묻혀버렸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사후에 누군가 그녀의 흔적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벽화에서 그녀의 이름과 형상을 모두 쪼아내고 석상을 파괴하고 오벨리스크를 엎었다. 1860년경 장제전이 우연히 발견된 이후 핫셉수트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서서히 비밀이 벗겨졌다. 학자들은 이 ‘기록 말살’을 열 받은 투트모세 3세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모된 자리를 조사한 결과 훨씬 뒤에 벌어진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와서 누가 언제 왜 그랬을까를 알아내는 방법은 없는 듯하다. 한국 드라마 ‘선덕여왕’처럼 상상력의 힘으로 창작물을 만들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각주 1. Walter Saller, “Hatschepsus”, GEO 7, 2002, pp.14~40. 2. 아카시아는 우리가 말하는 아까시나무(Robinia pseudoacacia)하고는 다르다. 아까시나무는 거짓아카시아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이집트의 아카시아는 나일강아카시아라고도 불리며 노란색의 둥근 털 방울 같은 꽃이 핀다. 예로부터 중요한 목재이며 약용으로도 쓰였다. 3. Arne Eggebrecht & Abdel Ghaffar Shedid, Das Grab des Nacht. Kunst und Geschichte eines Beamtengrabes der 18. Dynastie in Theben-West, Mainz: von Zabern, 1991, p.56. 4. 거의 모든 자료에서 몰약나무 혹은 유황나무 31그루를 수입한 것으로 서로 엇갈린 해석을 하고 있다. 심하게 훼손된 벽화의 상형문자를 복원해가며 해독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대 이집트인들 자신이 몰약과 유황의 이름을 혼동하거나 같은 이름을 썼다고 한다. Renate Germer, “Handbuch der altagyptischen Heilpflanzen”, Wiesbaden: Harrassowitz (Philippika, 21), 2008, pp.210, 230; Renate Germer, “Die Pflanzen und ihre Nutzung (des Altägypten)”, Christian Tietze , Ägyptische Gärten, 2011, p.145. 이 경우 상형문자 설명문보다 그림 자체에 해답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벽화에 두 종의 나무를 분에 담아 옮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잎을 정교하게 하나씩 묘사한 나무는 유황나무, 나무의 윤곽과 가지만 표현한 나무는 몰약나무인 것으로 추정된다. 즉 각 나무의 특성에 맞게 묘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몰약나무와 유황나무를 각각 31그루씩 수입했을 것이고, 장제원 마당에 66개의 나무 구덩이를 판 것도 이치에 맞는다. 5. Edouard Naville, The Temple of Deir el Bahari (Band 3): End of Northern Half and Southern Half of the Middle platform, London, 1898, p.17. 6. Patrick Wheatley, “Mummified Baboons Reveal the Far Reach of Early Egyptian Mariners”, eLife , 2020, pp.1~28. 7. Angelika Franz, “DAS SAGENHAFTE GOLDLAND PUNT”, Wissenschaft.de , 2011. 10. 18. 8. 5번 책, p.16. 9. 1번 글, p.38.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이상한 세기의 이상한 공원들
- 무엇인가 이상한 공원들 도시 분야 번역가의 입장으로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지점이 있다. 바로 ‘공원’이 ‘파크(park)’의 번역어라는 점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애매한 상황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공원’이라는 단어는 서양의 공공 정원(public park)이 한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공공’의 공(公)과 ‘park’를 의미하는 원(圓)이 합쳐진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단계인 park는 공공이 내포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파크의 어원으로는 라틴어 파리쿠스(parricus) 또는 파도 (paddock)를 주로 드는데, 이는 모두 수렵원 또는 수렵을 위한 동물을 키우던 사육지를 의미한다.이 때문인지 영어 단어 ‘파크’는 반드시 공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원(public park) 외에도 가장 흔히 사용되는 야구장(baseball park)과 놀이공원(amusement park), 국립공원(national park) 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공원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공공의 활용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반드시 ‘공원’이 말하는 공공과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는 뜻이다. 야구장과 놀이공원은 실제 일정 요금을 내고 이용하는 공간인 만큼 공공성보다는 일상과 다른 행위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공원’이라고 부르지만 ‘공원(public park)’은 아닌 이상한 ‘공원(park)’들. 에피소드 1. 아이스 스피어 5스택 롯데월드에 얽힌 얼룩진 추억 하나. 필자는 유치원생 시절 알 수 없는 이유로 이곳에서 피겨 스케이팅을 배웠다. 당시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장은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외곽은 자유롭게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위한 트랙이었고, 내부 공간은 레슨을 받는 사람들을 위한 연습 공간이었다. 스케이트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무 데나 앉아서 쉬지 말라고 몇 번이고 혼냈지만 유치원생이었던 필자에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나가는 잔소리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졌다. 스피닝을 연습하다가 머리가 어지러워 몰래 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던 어느 순간, 옆에서 턴을 연습하던 사람의 스케이트 날에 손가락을 크게 베였다. 하필이면 새하얀 바닥에 새빨간 피가 흐르니 크리티컬이 터진 듯 모두가 얼어붙었던 게 기억난다. 공기가 차가워서인지 크게 아프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날 처음 피부를 꿰맨다는 게 무엇인지 배웠고 한동안 붕대에 퉁퉁하게 감긴 손가락을 개선장군처럼 들고 다녔다.(각주 1) 또또스테드 인 시카고 미국 근대 도시사에 대해 조금만 파헤쳐보면 튀어나오는 그 이름,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FrederickLaw Olmsted, Sr.)(각주 2) 흔히 조경사 시간에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World’s Columbian Exposition)와 도시 계획사를 연관해 배우면서 대니얼 번햄(Daniel Burnham)의 진두지휘 아래 옴스테드가 조경을 맡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실 만국박람회 이전, 1868년 옴스테드와 복스는 시카고의 사우스공원(South Park) 조경 계획을 맡은 적이 있었다.(각주 3) 동시에 브루클린의 프로스펙트 공원(Prospect Park) 마스터플랜과 일리노이주 리버사이드(Riverside) 교외 단지 설계를 하며 여러 공원을 파크웨이로 연결하는 범도시적 공원 시스템에 대한 논의를 도시계획 차원으로 확장해 나가던 시기다. 1868년 미시간 호수(Lake Michigan)와 관련 수공간을 담당하던 시카고 위생위원회(Chicago Sanitary Commission)가 옴스테드와 복스에게 사우스공원 계획을 의뢰하면서 수공간에 대한 문제를 특히 주요하게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옴스테드와 복스가 제출한 계획안에는 미시건 호수에서 라군(Lagoon) 지역을 지나 미드웨이 플레장스(Midway Plaisance)를 통해 가장 내륙에 위치한 사우스 오픈 그라운드(South Open Ground) 지역까지 배를 타고 들어가는 수공간이 있다. 물이 고이는 탓에 활용이 더뎠던 공간을 공원으로 만들어 이 일대의 개발을 촉진시키고자 한 의도가 한가득 담겨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계획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계획안이 제출된 지 몇 달 뒤, 1871년 시카고 대화재가 일어나 도시를 완전히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복구 작업을 위해 천문학적 비용을 지출해야 했던 시카고는 이 사우스공원 계획을 전면 중단시켰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그 이후로 출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과하게 용감한 어린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2. 이때 옴스테드의 둘째 아들, 릭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Jr.)는 번햄 아래에서 도시계획을 배우고 있었다. 이 시기 옴스테드는 마라탕 같은 존재였다. 어딜 가도 나온다. 3. 당시 라군(Lagoon, 오늘날 잭슨공원), 미드웨이 플레장스(Midway Plaisance), 사우스 오픈 그라운드(South Open Ground, 오늘날 워싱턴공원)가 있는 지역이 ‘사우스공원(South Park)’로 통칭됐던 것으로 보인다.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있다. @jin.everywhere
- ASLA Best Books of 2024
- 자연, 설계, 그리고 기후변화에 이르기까지, 조경가에게 새로운 정보와 영감을 주는 올해의 신간 도서를 만나보자. 2024년 미국조경가협회ASLA가 선정한 10권의 최고의 책을 살펴보자. 1. 조경가가 사랑하는 30그루의 나무 Ron Henderson, 30 Trees: And Why Landscape Architects Love Them , Birkhauser, 2023 전 세계 30인의 조경가가 좋아하는 나무와 이에 얽힌 개인적인 이야기, 나무의 역사를 함께 소개한다. 책 속에서 나무 소개에 나선 조경가들은 나무가 설계 프로젝트에서 어떻게 사용됐는지, 무엇을 연상시키는지 설명한다. 일리노이 공과대학 조경학 교수이자 ASLA의 멤버인 론 헨더슨(Ron Henderson)이 편집을 맡았고 조경가들이 엄선한 나무에 대한 식물학적 설명을 곁들였다. 조경가로는 섀넌 니콜(Shannon Nichol), 로리 올린(Laurie Olin), 마리오 슈예트난(Mario Schjetnan), 게리 힐더브랜드(Gary Hilderbrand), 엘리자베스 모솝(Elizabeth Mossop) 등 ASLA 멤버들이 함께 참여했다. 2. 아프리카 선조들의 정원: 국제 아프리카계 미국인 박물관의 역사와 기억 Walter Hood, Dr. Tonya M. Matthews, Bernard E. Powers Jr., The African Ancestors Garden: History and Memory at the International African American Museum, The Monacelli Press, 2024 저자 월터 후드(Walter Hood)는 조경가이자 예술가다. 그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찰스턴(Charleston) 시에 위치한 국제 아프리카계 미국인 박물관(IAAM)의 강렬한 풍경이 어떻게 설계됐는지를 아름다운 삽화와 함께 소개한다. 이 박물관은 미국에 노예로 도착한 아프리카인 대부분이 처음 발을 내디뎠던 개즈던스 부두(Gasden’s Wharf)에 건립됐다. 아프리카의 민속 식물로 구성된 정원과 인피니티 풀을 갖춘 박물관의 정경은 “같은 공간에 이처럼 서로 다른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며, 과거를 발굴하고 기리는 동시에 새로운 대화와 축하를 위한 공간을 보여준다. 3. 브루클린 브리지 공원: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츠 Michael Van Valkenburgh, Elijah Chilton, Amanda Hesser, Julie Bargmann, Brooklyn Bridge Park: 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 The Monacelli Press, 2024 마이클 반 발켄버그(Michael Van Valkenburgh)는 브루클린 해안가에 버려졌던 여섯 개의 선박 부두가 어떻게 한 세대 만에 시민들이 많이 찾는 85에이커의 공원이자 뉴욕에서 가장 거대한 공공 공간이 될 수 있었는지를 쉽게 풀어 소개한다. 브루클린 브리지 공원(Brooklyn Birdge Park)은 바비큐장뿐 아니라 운동장, 놀이터 등을 갖추어 누구나 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또한 생태적 식재와 기후변화에 대한 회복탄력성을 갖춘 공원의 모델이기도 하다. 커피 테이블에 앉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여유롭게 편집된 이 책에는 250개의 실감나는 도판과 조경설계를 담당했던 줄리 바그만(Julie Bargmann)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책을 읽고 난 뒤 당신이 실천할 수 있는 행동을 꼽는다면, 브루클린에 가는 것이 아닐까. 4. 불의 디자인: 불의 시대에 대한 저항과 공동의 창조, 그리고 후퇴 Emily Schlickman, Brett Milligan, Design by Fire: Resistance, Co-Creation, and Retreat in the Pyrocene, Routledge, 2024 우리는 인류가 불을 활용하는 지질학적 시대, 파이루신(Pyrocene)의 시대에 살고 있다. 책의 저자인 에밀리 슐릭만(Emily Schlickman)과 브렛 밀리건(Brett Miligan)은 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을 이용한 27가지 설계 전략에 대해 소개한다. “변화무쌍한 야생 지대, 그리고 야생과 도시의 경계는 디자인이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역”이다. 특히 이 책은 북미 서부와 지중해 유역, 남아프리카 케이프, 칠레 중부, 호주 일부 지역 등 지중해성 기후를 공유하는 전 세계 다섯 곳의 화재 취약 지역에 주목했다. 여러 과학자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산불은 더 이상 각 지역의 국지적 재해가 아니며, 더 큰 지구환경적 시스템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5. 빛을 먹는 포식자: 보이지 않는 식물 지성의 세계를 통해 지구의 생명체를 새롭게 이해하는 법 Zoë Schlanger, The Light Eaters: How the Unseen World of Plant Intelligence Offers a New Understanding of Life on Earth , Harper, 2024 “식물이 되려면 굉장한 생물학적 창의성이 필요하다. 식물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린다는 약점을 극복하고 생존하고 번성하기 위해 독창적인 생존 전략을 채택해 왔다.” 최근 과학자들은 식물도 의사소통을 하고 동족을 인식하며 사회적으로 행동하고, 소리를 듣고 몸체를 변형시켜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수명 주기에 대한 유용한 정보와 기억을 저장하고 동물을 속이는 트릭을 사용하는 등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 애틀랜틱The Atlantic』의 환경과학 전문 기자이자 저자인 조에 슐랭거(Zoë Schlanger)는 최근 식물학 분야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 식물이 어떻게 소통하고 감지하고 학습하며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지 설명한다 6. 환경 디자이너를 위한 현장 스케치 Chip Sullivan, Field Sketching for Environmental Designers , Routledge, 2024 이 책은 조경과 도시설계 드로잉을 연습하고자 하는 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하기 위한 입문서다. UC 버클리의 조경학과 교수이자 저자인 칩 설리번(Chip Sullivan)은 이 스케치 안내서는 “단순히 관찰한 것의 모방을 넘어, 풍경이 지닌 의미와 영혼을 찾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고 소개한다. 초보자뿐 아니라 숙련된 설계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넘치는 영감과 실용적인 팁을 통해 스케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다음 산책 때는 이 책을 손에 들고 나가보자. 7. 노구치의 정원: 풍경이 만들어낸 조각 Marc Trieb, Noguchi’s Gardens: Landscape as Sculpture , ORO Editions, 2024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는 아카리 조명(Akari Light)과 공공 예술로 유명한 일본의 현대 예술가다. 한편으로는 “공간을 주요 수단으로 삼아” 조각의 풍경을 만들었던 조경가라고도 볼 수 있다. 조경사학자이자 UC 버클리의 명예 교수로서 많은 책을 집필해 온 마크 트라이브(Marc Trieb)는 노구치의 초기 설계안인 놀이터와 기념비 프로젝트부터 사후 완공된 일본 삿포로의 대형 공원까지, 실현되지 못한 설계안을 포함해 노구치의 다양한 조각 프로젝트가 실제 풍경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설명하고 비평한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희귀한 사진도 함께 제공했다. 8. 고운 모래, 모래, 진흙: 파내기와 쌓기, 우리가 공사 중인 세계 Rob Holmes, Gena Wirth, Brett Milligan, Silt Sand Slurry: Dredging, Sediment, and the World We Are Making , Applied Research + Design, 2024 퇴적물, 즉 쌓인 토사는 어디에 있고, 왜 쌓이며, 어떻게 미국 해안가의 미래에서 중심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해저에서 퇴적물을 파내 컨테이너선을 위한 수중 고속도로를 만들기도 하고, 홍수를 조절하기 위해 강 유역에서 토사를 퍼내기도 한다. 이러한 인위적 활동은 매년 자연적인 지질 활동보다 더 많은 퇴적물을 이동 시키고 있음에도, “현재와 미래의 삶의 조건을 형성하는” 지구 표면 퇴적물의 재구성에 대한 논의는 거의 진행된 바 없다. 책의 공동 저자인 로브 홈즈(Rob Holmes)와 브렛 밀리건(Brett Miligan), 제나 워스(Gena Wirth)는 “퇴적물을 지능적이고 민주적이며 공평하게 설계하자”는 강력한 행동 촉구문을 함께 작성하기도 했다. 이 책은 지각 단위의 규모에서 현대 생활의 인프라로 기능하는 퇴적물에 대한 조사 결과서이며, 풍부한 시각적 자료를 제공한다. 9. 미래 사색: 변화를 탐색하고 회복력을 키우며, 우리에게 필요한 도시를 함께 만들기 위한 설계 전략 Johanna Hof fman, Speculative Futures: Design Approaches to Navigate Change, Foster Resilience, and Co-Create the Cities We Need, North Atlantic Books, 2024 요한나 호프만(Johanna Hoffman)은 UC 버클리에서 조경학을 전공한 예술가이자 도시학자로, “새롭고 잠재력 있는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지역 공동체와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세계 만들기 world-making 방식은 “현존하는 세계를 넘어 언젠가 올 수 있는 미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호프만은 “예술, 영화, 소설, 산업 디자인” 등 창의적 분야의 종사자들이 “사색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자극하고 상상하고 꿈꾸는 법”에서 설계 전략의 영감을 얻었다. 이 책은 지역 공동체가 큰 꿈을 꾸고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새로운 참여 디자인 전략을 제시한다. 10. 왓 이프: 우리가 제대로 한다면? 기후 미래의 비전 Ayana Elizabeth Johnson, What If We Get It Right?: Visions of Climate Futures , One Books, 2024 실존적 위기를 맞닥뜨렸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일을 꼽는다면, 아마도 그 반대의 일을 상상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ASLA 2022 조경 컨퍼런스의 기조강연자였던 아야나 엘리자베스 존슨(Ayana Elizabeth Johnson) 박사의 베스트셀러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모든 것: 기후 위기에 대한 진실과 용기, 해결책』의 후속작이다. 책에서 존슨 박사는 조경가 케이트 오프(Kate Off), 기후 연구자 빌 맥키벤(Bill McKibben, MoMA의 큐레이터 파울라 안토넬리(Paola Antonelli) 등 각 분야의 선구적 연구자와 함께 더 건강하고 공평한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대화 내용을 도발적이고 유쾌하게 그려낸다.
- 부산 첫 민간정원, F1963 정원
- 부산시 수영구에 있는 F1963 정원이 부산시 제1호 민간정원으로 선정·등록됐다. ‘수목원·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정원’은 식물, 토석, 시설물 등을 전시·배치하거나 재배·가꾸기 등을 통해 지속적인 관리가 이뤄지는 공간이다. 그중 ‘민간정원’은 법인·단체 또는 개인이 조성·운영하는 정원을 말한다. F1963 정원은 복합문화공간 F1963의 야외 정원이다. F1963은 본래 고려제강의 모태인 수영공장이 있던 곳으로 1963년부터 2008년까지 45년 동안 와이어를 생산해왔다. 2008년 이후에는 고려제강 창고로 사용되다가 2016년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되어 부산비엔날레 특별 전시장으로 활용됐다. 공장이 처음 지어진 연도인 1963과 공장을 의미하는 영단어 팩토리(factory)의 첫 철자에서 따와 F1963이라 명명됐다. 야외 정원은 2016년 건축 리모델링과 함께 구상되어 2021년까지 5년여에 걸쳐 단계적으로 조성됐다. 건축 후 잔여 부지에 조경을 하는 관행적 형태를 벗어나 건축과 조경의 조화를 꾀하며 함께 설계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 제27회 올해의 조경인· 제7회 젊은 조경가 시상식
- 지난 12월 6일 그룹한빌딩 그룹한갤러리에서 본지가 주최한 ‘제27회 올해의 조경인·제7회 젊은 조경가 시상식’이 개최됐다. ‘제27회 올해의 조경인’에는 심왕섭 이사장(환경조경발전재단)이, 제7회 젊은 조경가에는 원종호 소장(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이 선정됐다. 심왕섭 이사장은 환경조경발전재단의 위상과 역할 강화에 기여했다. 특히 환경부 외에 재단 주무관청에 국토교통부를 추가해 2개 부처로 확대하고, 재단 정관의 목적 및 사업에 ‘공원녹지법(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조경진흥법’과 관련된 사업을 추가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2023년 환경조경발전재단이 공식 조경지원센터로 지정된 이후 조경수 거래가격 조사공표 방안 연구, 2024년 제14회 대한민국 조경대상 주관, 조경지원센터 비전 발표를 추진하는 등 조경 분야의 핵심 사업을 추진하며 조경 전문 싱크탱크 기반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 조경지원센터 간담회 등을 추진해 조경인의 소통을 도모했으며, 2022년에는 한국조경 50년 기념행사를 추진해 조경계의 산관학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다. 심 이사장은 “46년간 조경 분야에 몸 담으며 조경인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일해 왔다. 앞으로도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에 집중하겠다”라고 하며 수상 소감을 전했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 [기웃거리는 편집자] 낮달을 기다리며
- 등산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진경산수화 같은 풍경의 산을 완상하는 건 좋지만, 정상을 정복하는 등산은 별로다. 하지만 만약 극한의 한계를 극복하는 알피니스트처럼 등산을 해야 한다면 한라산에 오르고 싶다. 특히 비바람이 몰아치는 한라산 정상에 가고 싶다. 이러한 로망은 순전히 한 드라마 때문이다. 한때 즐겨 보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2005) 속 남녀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재회하는 장소가 바로 비바람과 안개로 가득한 한라산 정상이었다. 그들의 재회보다 안개와 비바람이 몰아치는 역동적인 풍경이 이상하게 끌렸다. 나아가 그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극한의 등산을 마친 후 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를 벗겨내고 사발면의 뜨끈한 국물을 후루룩 마시면 어떨지 궁금했다. 눈물 젖은 빵이란 진부한 표현 대신 한라산 정복 후 먹는 사발면이란 비유를 머리 대신 몸에 새기고 싶은 작은 욕심이라고 할까. 어떤 비유를 찾는 목적의 등산을 꿈꾸는 나처럼 다른 목적으로 등산을 하는 이가 있다. 그는 등산전문지 『월간 산』 에디터 윤성중으로 얼마 전 『등산 시렁』(2024)이란 책을 펴냈다. 등산 시렁은 그가 월간 산에 연재하던 꼭지의 제목으로, 제목만 보면 무슨 내용인지 감이 잘 안 잡히는데 콘셉트는 이렇다. 산에 가서 등산만 하고 오는 건 싫은 남자의 등산 중 딴짓. 실제로 딴짓을 하며 어떻게 등산을 즐길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준다. 역경과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진지한 등산가들이 나오는 등산 잡지의 전형적 문법에서 벗어난 기발한 발상과 저자의 고유한 엉뚱함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는 취재를 위한 등산을 할 뿐, 단순히 순수한 재미나 휴식을 위한 여가 활동으로 하는 등산을 하지 않는다. 등산 자체를 위한 등산을 하지 않지만, 등산 중 기발한 딴짓은 누구보다 다양하게 시도한다. 등산을 싫어하는 이들을 설득해 등산 시렁 산악회를 만들어 함께 산에 오르고, 산 정상에서 책 낭독회나 사생대회를 개최하고, 복학생인 척하면서 대학생 산악부 선발 면접에 참가하는 등 등산을 매개로 한 재미있는 일을 벌인다. 또한 에디터로서 기자 정신과 전문성도 두루 갖추고 있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산속 약수터를 찾아다니고, 아웃도어 오프라인 매장에서 직접 일일 직원 체험을 하며 아웃도어 시장의 현실을 들여다 본다.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을 가로지르는 47km의 능선과 도로를 하루 안에 주파하는 일명 불수사도복 종주를 위해 밤낮으로 달리기 훈련을 하는 등 등산 전문가로서 성장하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그는 책 서문에서 등산이 진짜 좋은지, 왜 좋은지가 여전히 궁금하고, 연재와 등산을 통해 자신을 점점 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그의 도구는 딴짓이었지만 결국 등산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이우성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그의 비범한 태도와 자질에 대해서 평범함 속에 깃든 천재성이라고평가했다. 문득 이번 특집의 주인공 원종호 소장이 떠올랐다. 정욱주 교수의 표현(66쪽)처럼 그 역시 평범함을 가장한 비범함이란 단어가 잘 어울린다. 그는 무엇을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는 조경설계를 추구하며, 자신의 작업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조경가로서 정진했다. 물론 내가 그를 정확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작품과 에세이 원고를 통해 본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직선처럼 조경을 향한 자신만의 단정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갖고 있었고, 이제껏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설계를 향한 고유한 시선과 명징한 감각을 오랫동안 다듬어 온 조경가였다. 보이지 않는 조경가로서 보이지 않는 조경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조경에 대해 깊게 탐구하고 정확하게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주변 동료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우리만의 공간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특집에서 그를 부르는 여러 명칭이 등장했는데, 내가 부르고 싶은 이름은 낮달이다. 그가 추구하는 조경설계가 평소 잘 보이지는 않지만, 맑은 날 그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낮달과 닮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가 설계로 그려내는 보이지 않는 낮달을 더 보고 싶다. 나아가 현재 낮달처럼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스케치를 그리고 있을 미래의 조경가들에게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 여의도공원을 그렇게 멋대로 밟고 다닌 건 처음이었다. 살기 위한 걸음이었다. 잔디를 가로지르고, 철책을 무시하고, 녹지와 길의 경계를 가르는 울타리 위에 올라서고, 잎이 다 떨어진 화살나무의 앙상한 가지에 패딩이 뜯기지 않도록 우스꽝스럽게 걸었다. 인파에 가려 발밑이 보이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앞 사람이 “요 앞에 턱 있어요. 조심하세요!” 하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난해 초 끊어졌던 인대를 떠올리며 더욱 조심조심 걷는 수밖에. 국회의사당 초록 지붕을 표적 삼아 걸으며 ‘광장’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절실해졌는지 모른다. 친구 K는 모이기에는 역시 광화문광장만 한 곳이 없다고 말했다. 모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 발에 걸리는 턱이 없는 공간, 차량이 덮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원한다면 행진을 할 수 있는 공간, 고개만 돌리면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공간이 광장이라는 걸 몸소 깨달았다. 그래도 여의도공원은 평지 공원이라 다행이었다. 어느 SNS에서 봤는데, 부산에는 주로 서면에 모인단다. 파도타기를 하면 조금 이어지던 물결이 금세 갈래갈래 나뉜 골목으로 흩어져버리고, 오르막길이 많아 행진을 하다보면 숨이 차서 구호와 노래 소리가 점점 잦아든다고 그랬다. 그래서 광장이 없는 도시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인터넷이 먹통이 됐던 기억을 떠올리며 LED 화면과 통신사 이동기지국 차량이 가까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바닥에 앉아 노래하고 구호를 외치고 연단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은 집중할 수 없었다. 핫팩을 주무르고 보온병의 물을 마시려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질까 봐 관두었다. 예고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마음을 빼앗은 건 한 야구 팀 유니폼을 입고 무대에 오른 시민의 발언이었다. 그는 자신을 “앞선 세대가 쟁취한 민주주의의 드넓고 푸른 하늘 아래에서 태어난 세대, 여러분이 일구어낸 생존이라는 결실”이며 “그래서 삶을 꿈꾸게 된 세대”이고 “절박함이 아닌 사랑으로 연대하는 세대”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곳에 서게 된 이유를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빗대어 말했다. “무너진 민주주의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무승부가 있을 수 있습니까? 콜드게임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천 취소, 강설 취소가 있을 수 있습니까? 스포츠 팬 여러분! 우리는 국가대표처럼 끝까지 맞설 것입니다. 게이머 여러분! 우리는 정의의 엔딩을 위해 몇 번이든 리트(리트라이)할 것입니다! 오타쿠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최애인 것처럼 민주주의를 수호할 것입니다. 빠순이 여러분! 우리는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보려고 밤새워 기다렸듯, 찬란한 민주주의의 태양이 다시 뜨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함께, 여기에서, 독재의 담장을 넘어 홈런을 칠 것입니다! 맞습니까? 야구 팬 여러분, 스 트라이크를 세 번 놓친 타자에게 네 번째 기회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광장에서 꽉 찬 직구를 던질 것입니다.” 세상은 넓고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은 그리 넓지 못하다. 세상은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관심이 없지만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것,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것들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기 다른 세상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세상의 넓이는 나의 인식이 미치는 범위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들이 늘어갈수록 내가 구축하는 세상의 크기는 점점 커지게 된다. 무언가를 깊이 사랑해본 사람들의 세계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발 딛고 선 세계가 끔찍해지더라도 그곳을 떠나기보다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지난해 12월 7일,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물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 물음을 들었을 때, 광장에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의 이야기를. 세계가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워지는 만큼, 그 세계를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온전히 머무를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늘어나리라 믿는다. 나는 전보다 더 광장을 사랑하게 됐다. 그 너른 광장의 크기만큼 나의 세계도 넓어졌기를.
- [PRODUCT] 바이오필릭을 구현하는 쉼터, 그린하우스
- 도시에서 자연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도시 속 자연은 쾌적한 도시 환경을 위해 필요하며, 시민들에게 지친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는 휴식의 기회를 제공한다. 휴게 시설 전문 브랜드 푸르너스(Prunus)는 감각적이고 자연 친화적 시설물을 통해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며 도시민들에게 안락한 휴식을 제공한다. 푸르너스의 그린하우스는 유리 온실 구조를 활용한 자연 친화적 실내형 쉼터다. 그린하우스는 자연 친화적인 업무 공간 조성을 위해서 바이오필릭 오피스(biophilic office) 콘셉트로 만들어진 충북도청 하늘정원에 활용됐다. 이곳은 충북도청 및 의회 건물의 다양한 옥상 공간을 유기적 연계해 조성한 정원이다. 티하우스와 벤치 등 다양한 휴게 시설물이 초화류, 산책로와 조화를 이루며 시민들을 위한 휴게공간으0로 거듭나고 있다. 그린하우스에서는 충북도청 앞 당산 공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주변 식재와 더불어 자연광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쾌적한 환경을 구축한다. 개인적 휴식뿐 아니라 회의 및 업무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어 도청 직원들의 심리적 안정성과 자연적 감수성을 높이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또한 다양한 초화류와 조화를 이루는 산책로의 벤치와 테이블에 앉으면 자연과 가까운 거리에서 교감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직원들의 업무 효율성과 만족도를 높이며 쾌적한 근무 환경을 제공한다. 나아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환경 교육 장소와 어른들을 위한 휴게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TEL. 031-943-6114 E-MAIL.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