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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2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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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거진 가격 16,000
잡지 가격 22,000

기사리스트

[에디토리얼] 설계공모의 난맥을 되짚어보며
설계공모라는 네 글자는 언제나 기대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설계공모가 생각만큼 꿈과 낭만의 보물 상자인 것만은 아니다. 성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경쟁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과정과 결과를 둘러싸고 의혹과 불신이 끊이지 않는다. 설계공모의 목적은 좋은 설계안 또는 설계자를 뽑는 데 있다. ‘좋은’은 ‘독창성 뛰어난’이나 ‘실험성 강한’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어휘로 대체할 수 있다. 주최자의 의도를 대변하는 설계 지침서들을 보면 “○○를 ○○할 수 있는 ‘독창적’ 아이디어와 디자인을 구한다”는 공모 목적이 예외 없이 쓰여 있지만, 말 그대로 독창적이기만 한 제출작은 당선되기 쉽지 않다. ‘좋은’의 자리를 경제성, 합리성, 공공성 같은 가치가 차지하는 설계공모도 적지 않다. 하지만 경제성은 값싼 재료와 시설, 합리성은 뻔한 디자인, 공공성은 실체 없는 말 잔치로 귀결되는 예가 허다하다. 설계공모의 성과물을 누릴 주체는 당선작에 따라 실현될 공간의 사용자들이지만, 그들이 공모의 과정에 개입할 기회는 매우 드물다.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는 출품자, 주최자(또는 그를 대리하는 전문위원), 심사위원 정도다. 세 배역을 조금씩이나마 맡아본 경험담을 나누고자 한다. 설계공모의 꽃은 게임의 선수인 출품자다. 나는 자신을 조경가가 아니라 이론가 또는 비평가로 정의하고 있지만 아주 드물게 공모전에 출품한 적이 있다. 다양한 인력으로 구성한 팀의 일원으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거나 전반적인 디자인 개념을 잡는 데 조력하는 역할을 했다. 불확실한 경쟁의 장에 뛰어드는 일이었음에도 초조함이나 불안감보다는 엔돌핀이 샘솟는, 아주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자신의 디자인 아이디어와 해법을 실험할 수 있다는 기대,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거나 적어도 공론화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테다. 당선의 기쁨을 맛본 적은 없다. 억울하진 않았지만 아쉬움은 컸다. 무엇보다도 패인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패인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주최자나 심사위원회가 제출작과 최종 경쟁작에 대해 상세한 리뷰를 제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몇 줄의 형식적인 심사평이라도 발표되면 다행이다. 대부분의 패자는 작품 외적인 모종의 상황 때문에 당선되지 못한 것이라고 의심하며 분루를 삼킨다. PA(Professional Advisor)라고도 불리는 설계공모의 전문위원은 주최자의 대리자 역할을 한다. 설계공모가 갑자기 늘어난 2000년대 중반 무렵 국내에 도입된 제도다. 나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광교신도시 호수공원, 동탄신도시 워터프런트, 용산공원 등 몇몇 국제 설계공모의 전문위원단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복잡하지만 도전적인 일이었다. 전문위원단은 설계공모 전반을 기획하고 설계 지침을 쓰고 제공 자료를 만들고 심사위원을 섭외하고 심사 과정을 진행한다. 지명 공모라면 지명 초청자를 선정해 섭외하는 일도 해야 한다. 홍보, 의전, 전시 기획, 작품집 출판까지 관장해야 한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경험은 주최자가 공모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였다. 대상지를 무엇으로 어떻게 쓰겠다는 명확한 의도 없이, 원하는 설계안과 설계자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도 없이 행정 절차의 하나로 공모를 맡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공들여 설계 지침을 작성해도 머릿속에 그렸던 작품이 제출되지 않는 때도 많았다. 지침을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일 테다. 심사위원으로 초대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작품 자체보다 태도와 스타일에 초점을 두고 심사를 하거나 난데없는 국가 대항전, 감정적 민족주의의 대리전을 펼치는 등, 심사 과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다시 하라면 가장 하기 싫은 배역은 심사위원이다. 나에겐 출품자가 몇 달씩 집중하고 몰입해 제출한 성과를 단 몇 시간 안에 평가할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심사에서는 ‘이 작품은 직선이 많아 생태적이지 않다’, ‘저 작품은 정자가 있으니까 한국적이다’라는 수준의 주장이 토론을 주도했다. 첨예한 이권이 걸린 공모에서는 공정성 보장과 투명성 확보를 구실로 심사자 간 토론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네킹처럼 다소곳이 앉은 심사위원들이 자신의 채점표에 점수만 매기는 풍경이 생중계됐다. 심사위원을 맡기 난감한 더 큰 이유는 인간관계다. 심사위원 후보로 예상되면 선후배와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 생전 본 적 없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친다. 전화기를 꺼놓아도 소용없다. 연구실 문을 잠그고 없는 척해야 한다. 제출작 제목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오는가 하면 패널 이미지 파일이 카톡으로 날아들기도 했다. 설계공모 기획, 설계 지침서 작성, 공모 운영, 심사위원 선정, 심사 진행, 공모 이후 당선작 구현에 이르는 프로세스 전반을 다시 디자인하고 공론의 장에서 토론할 시점이다. 이번 호에는 다섯 명 필자를 초대해 특집 지면 ‘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를 꾸린다. 최영준(서울대학교 교수)은 한국 현대 조경의 지형 속에서 설계공모가 변천해온 과정을 살피고, 좋은 설계공모의 기준으로 기획자의 선 설계, 참여자의 본 설계, 관람자의 설계 인식을 꼽는다. 이해인(HLD 소장)은 참가 자격, 심사 공정성, 의사 결정 방식, 당선작의 구현 보장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설계공모의 정상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안한다. 이승환(아이디알 건축사사무소 소장)은 설계공모의 공정성을 둘러싼 문제를 다각도로 짚는다. 일부 설계사무소의 당선 독점, 심사위원 사전 접촉과 로비 등 불공정 문제를 검토하고, 심사위원 선정 및 사전 공개와 관련된 현실적 개선 방안을 논의한다. 정평진(스코어러 대표)은 ‘스코어러’ 데이터베이스와 심사위원 인터뷰집 『코멘터리』 0호를 바탕으로 국토교통부의 설계공모 운영 지침, 심사위원 위촉과 구성, 당선 결과의 양상, 올바른 심사의 기준 등을 검토한다. 임유경(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은 건축공간연구원의 연구를 토대로 공공 프로젝트 설계공모 이후의 설계 변경과 공사 부실 문제를 살피고, 이상과 실제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 2024년 1월부터 이어온 신명진의 연재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를 맺는다. 도시의 공원을 일상의 장으로, 관심의 공간으로, 다시 연구의 대상으로 경험해온 한 밀레니얼 박사의 이야기에 그간 많은 독자의 호응이 있었다.15회에 걸친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풍경 감각] 손쉬운 다이어트법
아침 수영을 마치고 체중계에 올라선다. 어라, 뜻밖의 몸무게다. 수건으로 몸에 남은 물방울을 꼼꼼히 닦아내고 뜨거운 바람에 머리카락을 바짝 말린 뒤 다시 잰다. 마찬가지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무게에 한해서는 언제나 최고 기록을 갱신하는 중이다. 다른 체중계로 재면 다를지도 몰라. 집으로 돌아와 체중계를 꺼낸다. 계기판이 흔들리며 높은 숫자 중 하나를 고르려고 해서 재빠르게 내려온다. 그리고 저울을 옮긴다. 벽에 기대어 세워두고 발로 밀어 몸무게를 잰다. 7㎏ 남짓. 바늘 끝이 아주 가볍다. 다이어트 그까짓 것, 정말 쉬운 일이다. 1월마다 결심해온 체중 감량. 올해는 해낼 수 있을까. 그래도 바늘이 가리키던 숫자처럼 마음이 가볍다.
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매년 다양한 규모와 성격의 조경 설계공모가 열린다. 2007년 조경 설계공모의 분기점으로 불리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부 오픈스페이스 국제설계공모’ 이후, 설계공모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질적으로도 서서히 진화를 거듭했다. 조경 설계공모가 활성화되자 조경가는 그에 발맞춰 설계 역량을 키웠다. 설계공모의 결과물은 동시대 조경의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냈고, 완성된 좋은 공원과 광장들은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조경의 중요성을 알렸다. 이는 곧 다른 분야와의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어 선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많은 조경가가 말한다. 목록을 빼곡하게 채운 설계공모 제출물은 그 쓸모를 의심하게 한다. 공모 당선 후 설계안은 발주처에 의해 고쳐지며 원형을 알 수 없게 된다. 실시설계까지 너무나 짧은 시간이 주어지기도 한다. 설계 대상이 분명 조경이지만 설계 자격을 얻지 못할 때도 있다. 설계안을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는 무산된다. 형식적인 자문과 심의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가 하면, 대가 없이 용역 기간이 늘어나거나 추가 업무가 생기기도 한다. 이번 특집에서는 조경 설계공모의 현재를 진단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공모를 조망한다. 조경 설계공모는 어떻게 변해왔으며 현재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 그 과정에서 조경가의 자격은 어떻게 변해왔고, 설계공모와 결과물의 상관관계는 어떠한지 살펴본다. 아울러 현재 설계공모의 운영과 심사 방식의 문제점을 진단한다. 이번 기획이 계속 변화해온 설계공모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안을 모색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 조경 설계공모 변천사 _ 최영준 공모 정상화를 위한 제안 _ 이해인 설계공모, 결국 심사위원의 문제 _ 이승환 자격을 논할 자격 _ 정평진 공공건축 설계공모 이후, 이상과 실제 _ 임유경
[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조경 설계공모 변천사
설계공모에 대한 글을 몇 편 쓰며 스스로 묻고 답하고 싶은 질문이 하나 생겼다. 과연 설계공모의 시초는 언제이며 어디에서 시작됐는가. 경쟁‧경연‧대회(competition)라는 형식에 기반을 둔 효시는 쉽게 예상할 수 있듯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다. 건설 환경 분야와 관련된 디자인 공모에 대한 최초 기록은 기원전 448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세운 전쟁기념관을 위한 설계공모다.(각주 1) 몇몇 글에 따르면, 중세에는 여러 예술 창작자 사이에서 의뢰 지정 방식에 대한 대안으로, 근대에는 건축 양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전에 없던 형태와 디자인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설계공모가 실행됐다. 균등 기회 기반의 경쟁 입찰이 일반화되고 디자인의 교류가 국제화를 넘어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의 설계를 확인할 수 있게 된 현 시점의 설계공모는 어떤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일까. 조경 설계공모의 첫 걸음, 민주적 변곡점 설계공모는 디자이너 개인의 자율 창작 의지에 기반한 아이디어를 사회적으로 합의된 의사 결정으로 만들어가는 열린 동의 과정이라 정의할 수 있다. 조경은 공공 영역과 자주 맞닿기에 공동체를 위한 합의 기능에 기대야 마땅하다고 여겨지고, 분야의 탄생 자체가 옴스테드와 복스의 센트럴파크 설계공모 당선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한국의 조경 중심 설계공모의 역사는 의외로 길지 않다. 그리고 정부 주도의 국토 개발 역사를 지녀 조경 설계공모의 시작과 발전이 정치적 성숙과 그 진도를 함께 해왔다. 건축 설계공모는 해방 이후부터 그 역사를 찾아볼 수 있고 일찍이 일반화됐지만, 공원 녹지 사업을 조경 주도로 기획‧실행한 첫 설계공모는 1996년 말 공고해 1997년에 당선작을 발표한 여의도광장 공원화 설계현상공모다.(각주 2)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 등장한 민원(民願) 제도와 그 시점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일반에게 널리 공개하여 모집한다’는 의미의 공모(公募)와 1997년 제정된 ‘국민이 행정 기관에 어떠한 것을 신청하는 것’을 의미하는 민원 제도가 만났던 이 시기는 공공의 영역에 대한 제안을 국민에게 널리 열어서 모집하는 공식적 경로가 열린 한국 조경의 민주적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 여의도광장의 공원화 사업을 시작으로 몇 해 동안의 조경 설계공모는 서울의 대표적 오픈스페이스 유형들에서 하나씩 시행됐다. ‘공원’으로의 변화를 꾀한 여의도(1997)를 시작으로, 서울‘광장’이 된 서울시청 앞 광장조성 설계공모(2002)(각주 3)에 이어 ‘도시 숲’의 시초가 된 서울숲 조성 설계공모(2003)(각주 4)까지 설계공모가 실행된 이 시기를 조경 설계공모의 태동기라 하겠다. 초창기인 만큼 설계공모라는 경쟁 게임에 대한 미숙한 규칙과 진행이 많았다. 여의도광장 공원화 설계현상공모 참가 팀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는 『환경과조경』 1997년 3월호 내용을 인용한다.(각주 5) “주무부서의 치밀한 사전 준비 절대 부족”, “심판관 얼굴 가릴 필요있나”, “게임이므로 공정성과 형평성의 원칙에 따라야”, “앞으로 설계경기 기간을 이번 1개월 보다 늘리겠지만”, “심사위원 사전 공개는 불변 심사위원 소감 및 소개”, “심사위원 사전 공개 시범적으로 해봄직”, “서울 공원 유지‧관리에 대한 서울시의 장래 계획이 언급되어야”, “더 많은 전문가의 의견 수렴 필요, 추진 방법에는 신중 가해야”, “상식 수준에서 선택된 작품이라고 판단”, “본 과업의 적극적 홍보 필요, 여성 심사위원 수도 좀 더 늘렸으면”. 게임의 규칙, 심판, 선수의 매너 모두에 대한 불만과 불완전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듯 설계공모의 기획, 진행, 후속 절차는 초보 단계에 머물렀기에, 여의도의 경우 당선작과 크게 다른 준공 결과물을 남겼고, 서울시청 앞 광장은 당선작이 전면 취소되기도 하는 등 반복되어서는 안 될 선례를 남겼다. 반면, 서울숲 설계공모는 ‘숲’이라는 구체적 오픈스페이스 유형에 맞춘 기획이 탄탄하게 갖춰진 사례였다. 도시 숲 성격에 맞는 숲 연계 프로그램이나 환경 생태 기능을 강조하는 구체적 설계 지침을 제시하는 판을 깔았기에, 상투적 개념 구현이나 형태 중심 설계를 탈피하고 목적에 합당하고 ‘쓸모 있는’ 당선작이 선정됐다(각주 6)는 평가를 받았다. 기획과 결과 간의 동기화가 된 선례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Jack L. Nasar, Design by Competiti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p.29. 2. 한우드엔지니어링의 작품이 당선됐다. 3. 당선작: ‘빛의 광장’, 서현(당시 한양대 교수)·인터씨티건축사사무소 4. 당선작: ‘서울숲’,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대우엔지니어링·조경진(당시 서울시립대 교수) 5. “여의도광장 공원화 추진의 발자취”, 『환경과조경』 1997년 3월호, pp.143~151. 6. 이상민·조정송, “서울숲 조성 설계공모에 대한 비판적 연구”, 『한국조경학회지』 2(31), 2004, pp.15~27. 최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조경설계를 가르치고 조경 디자인의 성능을 연구하는 교수지만, 정체성의 중심에는 외부 공간을 그리고 만들어가는 조경가가 자리한다. 매년 다시 찾아가고 싶은 준공된 장소를 하나씩 만들어 이웃들과 공유하는 기쁨을 위해 설계하고 짓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공모 정상화를 위한 제안
1억 원 이상의 공공 설계 프로젝트는 공모를 진행하도록 한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 덕분에 건축에서는 조경보다 설계공모가 더 활성화되어 있다. 하지만 설계공모가 많다고 해서 마냥 부러워 할 일만은 아니다. 설계공모는 만능이 아니며, 오히려 갖은 소규모 공모가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 설계공모는 PQ나 제안서 입찰 등 다른 방식에 비해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수반하는데, 참가 팀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매몰 비용만으로도 설계를 몇 번이고 발주할 만한 금액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수상작에 대한 보상금, 공모 운영비뿐 아니라 절차에 필요한 시간적 비용도 크다. 그렇다면 이 모든 비용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공모를 통해 진정으로 탁월한 계획안을 선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설계공모는 실적, 기술 점수, 회사의 신용 평가 등 설계와 무관한 요소를 배제하고 설계안 자체를 평가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공모 참가 자격이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기회의 박탈이 더 쉽게, 더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심사위원의 편향성과 심사 방식의 오류가 공정성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크며, 결과적으로 공모로 선정된 안이 이후 마구 변경된다면 설계공모의 근본적 목적이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참가 자격 설정 방식, 심사 공정성, 의사 결정 방식, 당선작의 구현 보장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개선안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참가 자격 설계공모의 참가 자격은 최대한 포용적으로 설정하되 계약 단계에서는 해당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조정할 수 있다. 참가 자격과 당선자의 계약 조건은 충분히 분리될 수 있으며, 이를 활용하면 불필요한 배제를 방지하면서도 공모의 신뢰성을 유지할 수 있다. 대부분 건축 공모에 외국 건축사가 참가 자격을 갖는 걸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일부 공모에서는 이런 조정 없이 초기 참가 자격 자체를 불필요하게 제한하는 사례가 많다. 대표적 사례는 건축사만 참가할 수 있거나 대표사를 맡을 수 있도록 나오는 공원 설계공모다. 이런 제한은 공정한 경쟁을 저해할 뿐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부작용을 가져온다. 제출작 또는 당선작의 크레디트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거나 불리한 하도급의 관계에 갇혀 정당한 설계 대가를 받지 못하는 일로 이어진다. 공모에서 조경가가 배제되는 건 조경사 제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공모 운영 방식이 특정 분야를 과도하게 우선하는 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다. 공모 정상화 방법으로 조경사 제도 신설을 논하는 사람도 있지만, 공모 제도의 문제는 특정 직능의 법적 지위보다 공모 운영 방식과 절차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조경사 제도가 신설된다 해도 조경이 공모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며, 심사의 공정성이나 당선작 구현 보장 같은 본질적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따라서 공모 제도의 개선은 참가 자격 설정 방식과 심사 구조를 바로 잡는 방향으로 논의되어야 하며 조경사 제도와의 연관성은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 대부분 참가 자격 설정은 법이 아니라 발주 기관과 운영위원회의 내부 논의를 통해 결정된다. 어떤 분야가 핵심 분야여서 배제되면 안 되는지에 대한 판단은 프로젝트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 단순히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언제나 합리적으로 작동할 규정을 만드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법 개정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해결이 요원해질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부당한 자격 제한이 설정될 때마다 이를 지속적으로 반박하고 공론화하는 것이 현실적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조경 분야 내부 문제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손실을 초래하는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 또한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분야의 대응 방식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런 분야들과 협력해 공통적인 개선 방향을 모색하고, 필요할 경우 공동 대응하는 것도 효과적 전략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참가 자격 기준을 명확하게 정하기 위한 플로차트를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반복되는 논쟁을 줄이고 실무 운영 체계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것이다. 제안 · 참가 자격과 당선작의 계약 요건을 분리해 공모의 포용성을 높이되 전문성은 계약 단계에서 보완할 수 있도록 한다. · 특정 분야를 배제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질적 저하와 사회적 손해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해 공론화한다. · 법 개정보다는 발주 기관과 운영위원회가 참가 자격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대응하고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분야와 협력해 개선 방향을 모색하고 필요하면 공동 대응한다 심사의 공정성 공정한 심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쉽지 않지만, 여기에서는 ‘공정하지 못한 심사’를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설계안의 우수성과 무관하게 평가하거나 심사위원으로서의 전문성이 부족해 당선작의 선정을 방해하는 경우로 한정해 논의하고자 한다. 심사위원이 공정했는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건 쉽지 않다. 결국 심사는 개인의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완전한 공정성을 보장하거나 불공정성을 100% 제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실적 대안은 무엇일까. 대부분 심사위원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는 심사 과정을 공개하거나 녹화‧생중계하는 방식처럼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가 부담스럽고 껄끄럽게 만들어 불공정한 심사가 발생할 가능성을 낮추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여기에 더해 심사위원의 심사 패턴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정 심사위원이 반복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의 편향된 평가를 한다면 이를 데이터로 축적해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불공정한 심사가 단발성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 패턴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걸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특정 심사위원이 의도적으로 특정 안을 밀어주거나 배제하는 경향이 감지되면 공론화하거나 심사위원 선정 기준을 조정하는 등의 대응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시스템은 LH와 서울시처럼 공모를 다수 운영하는 기관 단위로 운영할 수도 있고, 조경‧건축 설계 분야 전반에서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도 있다. 공식적인 운영이든 비공식적인 방식이든 심사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면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심사위원 제척은 불공정성을 줄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지만 역으로 전략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제도로 작동하기 어렵다. 블라인드 심사의 실효성도 높지 않다. 설계안 제출 과정에서 익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발표할 때 얼굴을 보지 않는다고 공정성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만약 특정 안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발표장에서 얼굴을 가린다고 해서 이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사전 접촉 여부를 증명하는 것도 어렵다. 누가 설계한 것인지 알고 싶다면 다른 경로로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블라인드 심사는 실효성이 크지 않은 형식적 절차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제출작의 익명성을 유지하는 건 중요하지만, 발표 시 얼굴을 못 보게 하는 블라인드 심사는 특히 국내 조경 설계공모에 비추어 본다면 공정성 향상에 그다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누가 낸 안인지 알고 싶다면 그걸 발표장에서 얼굴을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전 접촉이 있었는지는 누군가의 자발적 고발이나 수사 없이 알아낼 방법도 없다. 아무 정보도 받지 않았더라도 딱 봐서 누구 것인지 유추할 수도 있는데 얼굴을 안 보고 심사를 한다는 건 요식 행위 아닐까. 또한 공정성을 위해 토론을 배제하는 방식은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토론 없는 심사는 심사위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며 논의하는 과정을 차단하고 오히려 개별 심사위원이 자의적으로 점수를 조정하는 걸 용이하게 만든다. 애초에 토론을 배제한 이유는 특정 심사위원이 지나치게 강한 의견을 피력하면서 토론을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토론 문화를 성숙하게 만들고 토론 과정을 공개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토론이 사라지면 오히려 심사위원들은 개별적 점수 차등을 통해 본인 의견을 반영할 수 있고 설계자 역시 이러한 평가에 대한 설명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제안 · 심사 과정을 공개하고 심사위원의 심사 이력을 기록하고 아카이브해 패턴을 분석할 수 있도록 한다. · 심사위원 제척, 블라인드 심사, 토론 없는 투표 방식은 실효성이 낮거나 부작용이 클 수 있으므로 지양한다. 의사 결정 방식 단계별 평가 방식은 심사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번의 투표로 당선작을 정하는 방식과 여러 단계에 걸쳐 심사를 진행하는 방식 중 어떤 것이 더 신뢰도 높은 결과를 가져올까. 만약 심사위원 개개인의 판단이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 독립적 사건이라면, 한 번의 투표와 여러 단계에 걸친 투표 방식 사이에 오류 확률 차이는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단계 심사를 거칠수록 토론을 통해 추가적 정보가 축적되기 때문에 더 신중한 의사 결정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때 중요한 점은 단계별 평가를 어떻게 설계하느냐다. 좋은 안이 탈락하는 확률을 최소화하는 것이 목표라면 접수 합산 방식보다 순위 결정 방식을 적용해 여러 차례 걸쳐 탈락자를 제외해 나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반면 상위권 내에서 최적 안을 선정하는 것이 목표라면 1차에서 넓은 범위를 선정하고 최종 라운드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방식이 적절할 수 있다. 이런 다단계 심사는 이미 여러 공공 기관의 공모 심사에서 활용되고 있다. 다단계 심사의 한계는 초반에 탈락한 안이 후반 라운드에 진출한 안 보다 충분한 설명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만약 공사 예산이나 법규 위반 등을 검토하는 사전 기술 심사가 별도로 없고 개별 안을 검토할 시간이 짧다면, 자칫 현실적으로 구현이 어려운 안이 당선되거나 좋은 안이 예선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와일드카드’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심사위원당 한 번씩 탈락한 안을 다음 라운드에 진출시킬 수 있도록 하면 심사의 효율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소수 의견이 충분히 검토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단 와일드카드는 최종 라운드에서는 사용할 수 없으며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단계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특정 심사위원이 강하게 지지하는 안이 조기에 탈락하는 것을 방지하면서도 심사 과정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다단계 심사의 목적은 심사위원이 기존 견해를 바꾸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판단 속에서 놓친 부분을 보완하고 더 정밀한 평가를 내릴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있다. 따라서 심사위원 간 토론뿐 아니라 설계자와의 질의응답 과정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제안 · 접수 합산보다는 다단계 탈락자 제외 심사 방식을 채택한다. · 와일드카드 제도를 활용해 소수 의견이 쉽게 묵살되지 않도록 보완한다. · 의견 피력보다는 질문과 답변 형식의 토론을 진행한다. 당선작의 구현 보장 설계공모를 통해 당선된 안이 제대로 구현되는 것은 당연한 원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심사에서 선정된 계획이 실시설계 단계에서 대폭 수정되거나 심지어 공모 과정에서 제시된 핵심 아이디어가 사라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 발주처 관계자가 “설계공모로 뽑아 놓으면 발주자가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어서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설계공모가 아니라 제안서 평가를 통해 선정된 경우, 발주자가 설계자의 원안을 훨씬 더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다는 점이 공공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설계공모의 본래 취지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경우다. 실제 사례로 얼마 전 한 공모전에서 당선작이 결정된 후 발주처가 당선안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자 담당자는 “어차피 당선작이 다 바뀔 건데, 괜히 발표했다가 나중에 민원이 발생할까 봐 그렇다”고 답했다. 설계공모가 결과적으로 의미 없는 절차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제안 · 공모 단계에서 예산 타당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현실적 범위 내에서 계획하도록 한다. · 당선작 변경 사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요 수정 사항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설정한다. · 설계공모를 통해 선정된 안이 지나치게 변형되지 않도록 당선자의 설계 의도를 반영할 수 있는 절차를 제도적으로 보완한다. 정상화냐, 활성화냐 설계공모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만 단순히 공모 숫자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공모를 통해 선정된 안이 실제 공간으로 실현되기까지 우리는 과정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공정한 심사, 합리적인 의사 결정 방식, 그리고 참가 자격의 개선이 이루어진다면, 설계공모는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누가 설계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안이 가장 나은 해법을 제시하는가’다. 참가 자격의 불필요한 제한을 완화하고 공모가 특정 분야의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이 아니라 더 나은 공간을 만드는 도구로 기능하도록 해야 한다. 공모 제도는 우리 사회가 공공 공간을 조성하는 방식 자체를 반영한다. 만약 공모가 단순한 형식적 절차로 전락한다면 결국 공공 공간의 질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공모 활성화를 논하기 전에, 먼저 공모 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 심사의 공정성을 강화하고, 합리적 의사 결정 구조를 마련하며, 당선작의 구현을 보장하는 장치를 도입하지 않는다면, 공모의 확대는 오히려 문제를 약화시킬 뿐이다. 공모 제도가 정상화된다면 공모의 가치가 다시 주목받을 것이고, 공모 기획과 운영을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것만으로도 활성화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이해인은 조경설계사무소 HLD 소장이다. 디자인을 통한 주장과 혁신이라는 철학 아래, 공간적 문제와 도전 과제에 대한 핵심적 개입 제공을 목표로 한다.
[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설계공모, 결국은 심사위원의 문제
한국에서는 공공사업 기준으로 매년 천여 개에 달하는 건축과 조경 설계공모가 시행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설계공모를 하는 이유는 공공시설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다. 한국의 모든 건설 산업을 주관하는 국토교통부는 아예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이라는 법을 따로 만들어 공모의 목적과 절차를 세세하게 정하고 있다. 하나의 공공시설이 설계공모를 통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사업 기획부터 사전 검토, 설계공모 운영, 심사, 당선작 선정, 계약, 각종 심의와 인증, 시공사 선정, 그리고 설계 의도 구현까지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이다. 그런데 그 과정 중 하나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업계 대부분은 물론 정부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데 도무지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심사의 공정성 문제다. 2024년 대한건축사협회(이하 건축사협회) 공정건축설계공모추진위원회가 실시한 건축사 대상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무려 93.9%가 설계공모의 불공정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물론 낙선한 입장에서 본 물증이 없는 심증에 따른 착각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 이건 어떤가.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설계공모에 대한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수집해 오고 있는 설계경기기록원 스코어러의 자료를 분석해 보면 비정상적인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선 조달청 공모전을 보자. 지난 2023년 조달청에서 발주한 공모전 85개 중 36%에 달하는 31개를 상위 네 개 설계사무소가 독점했는데, 설계비로만 따지면 전체 합계 금액의 절반이 넘는다. 이게 얼마나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인가 하면, 비슷한 시기 총괄건축가 제도하에 공모전 운영위원회를 조직해서 상대적으로 공정성에 정성을 기울인 서울시의 27개 공모전에서는 그 어느 사무소도 두 번 이상 당선된 사례가 없다. 조달청뿐만 아니라 특정 지역의 공모전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인구 60만 명이 넘는 모 도시는 설계비 기준으로 공모전의 60%를 한 설계사무소가 독점하고 있다. 오죽하면 시의회 의원이 이를 문제 삼아 언론에 제보까지 했을까. 전국의 지자체에서 발주하는 공모전을 이런 관점으로 조사해 보면, 소위 그 지역의 절대 강자가 없는 지자체를 세는 편이더 빠르다. 객관적인 데이터만 보아도 이런데, 공모전 심판과 선수로 뛰면서 겪는 현실은 훨씬 더 심각하다. 참가 업체가 심사위원에게 사전 접촉을 시도하는 것쯤은 당연한 관행이 되었고, 오히려 찾아오지 않으면 성의가 없다며 심사위원이 괘씸해 하기도 한다. 심지어 앞서 말한 설문조사에서 11.8%의 응답자가 역으로 심사위원으로부터 금품 요구를 받아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1,200명 가까이 답한 설문조사에서 이는 적지 않은 숫자다. 제일 곤란한 상황은 지인을 통한 간접적인 사전 접촉이다. 대형 설계사무소일수록 협력 관계로 일하는 작은 설계사무소들이 많은데, 그렇게 네트워크를 넓게 펼쳐놓고 보면 어떤 심사위원이든 학연이나 지연으로 반드시 엮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한두 단계 꺾여 접점이 파악되면 ‘나를 봐서라도 ○○○ 한번만 만나주면 안 되겠니’ 같은 인정에 호소하는 로비가 펼쳐진다. 사전 접촉을 한 사람이 공모전 참가 당사자가 아니기에 직접 증거가 없기도 하거니와, 인간관계가 걸려 있어 아무리 청렴하고 올곧은 심사위원일지라도 웬만해선 발주 기관에 신고하기가 매우 힘들다. 행여 마음이 독한 심사위원을 만나 사전 접촉 시도가 신고로 이어지더라도 그 업체는 해당 공모전의 심사 대상에서만 제외될 뿐, 추가적인 제재 조치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최근 서울시 건축사회가 사전 접촉을 시도한 건축사사무소에 대해 단순 경고만으로 징계를 마무리해서 고발 당사자를 허탈하게 만든 사건도 있었다. 그나마 잡기 쉽다는 ‘주는 쪽’에 대한 대처가 이 모양인데, ‘받는 쪽’에 대한 감시나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기에, 이미 뭔가를 받는 시점에서는 양쪽 모두 한배를 탄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심사 중 휴식 시간에 로비 금액을 올려달라고 딜을 치는 배짱 좋은 심사위원을 봤다는 목격담도 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진 걸까? 많은 이가 지금은 없어진 턴키 제도가 많은 것을 망쳐놓았다고 입을 모은다. 건설사의 막강한 자금력을 이용해 수십 억의 돈이 공모전 영업비로 들어가던 시절,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다들 한두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심사 당일 새벽 어느 집에 불이 켜지나 지켜보다가 심사위원 당첨이 확인되면 동선을 따라다니며 무슨 첩보 작전 수행하듯 밀착 로비를 했다는 둥, 최고급 노트북에 피티 영상을 띄워서 보여주고는 마치 실수인 듯 연구실에 노트북을 그대로 놓고 나왔다는 둥. 건설사의 그런 일을 도맡아 했던 인력들이 턴키가 없어지자 대형 설계사무소로 자리를 옮겼고, 그간에 만든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예전 건설사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무실을 다니며 업계 이면의 규칙을 배운 직원들이 독립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로비를 일삼았고, 또 민간 경기 악화로 설계공모 전체가 과열되면서 사전 접촉 정도는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금액대 낮은 공모전으로까지 번져 지금과 같은 진흙탕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물론 그 한편에는 심사를 업으로 삼는 교수들이 마치 하늘이 준 특권인 양 특정 안을 밀어주는 대가로 한몫 챙기는 것을 당연시해 온 분위기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어떤 방법이 있을까. 근본적으로 설계공모와 관련된 불공정 행위에 대해 제대로 된 감시 시스템과 처벌 규정이 없는 것이 문제다. 건축사협회는 자체적인 윤리 규정을 통해 건축사에 대한 징계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태생적으로 협회의 주 목적이 회원의 권익 보호이기에 앞서든 사례처럼 실질적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더구나 심사위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교수에게는 건축사 윤리 규정과 같은 통제 수단이 없다. 그나마 2023년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 개정으로 심사 행위가 청탁금지법의 공무수행사인, 즉 민간인이라도 공무원에 준하는 법의 처벌이 가능한 행위에 해당된다는 규정이 신설되었지만, 별다른 감시나 적발 수단이 없는 현실을 고려하면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바꿔 말하면 제대로 된 처벌이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법 체계를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또 시급한 방법 중 하나는 가능한 한 많은 공모전에 능력 있는 건축 전문가를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게 만드는 일이다. 종종 심사위원의 전문성과 공정성이 늘 같이 가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 반대, 즉 전문성이 없고 공정하기만 한 심사위원보다는 더 나은 심사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전문성이 부족하다면 공정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좋은 안을 선택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매한가지다. 무엇보다 공정성은 세평이나 소문 빼고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지만, 적어도 전문성은 몇 가지 측정할 객관적 기준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심사위원의 자질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직 공표되지 않아 구체적으로 밝히긴 어렵지만, 현재 모 기관이 전문성을 갖춘 심사위원 후보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기초 자료 수집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 물론 이 데이터베이스가 곧바로 심사위원 선정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런 시도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처음이고, 공청회나 관련 단체의 의견 수렴을 거쳐 몇 가지 추가적 보완을 거친다면 검증된 심사위원 풀을 만드는 초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계기로 2024년 설계공모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위촉 횟수가 7회 이상인 225명의 심사위원 면면을 조사한 적이 있다. 그들이 그해 설계공모의 약 4분의 1을 심사했는데, 그중 60%에 달하는 심사위원의 건축 작품이나 설계 관련 논문, 전문 분야 등을 공개된 매체나 데이터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데이터베이스가 제대로 구축된다면 이런 일은 점차 줄어들 것이고, 심사위원 위촉에 대한 최소한의 객관적 근거가 마련될 것이라 기대한다. 제도를 개선하는 또 다른 방법 중 하나는 정보의 공개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다.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은 2014년 첫 제정 이후 지속적으로 설계공모와 관련된 정보를 더 많이 공개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어 왔다. 투명성이야말로 공정성의 바탕이라고 본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점이 부족하다. 요즘 들어 소위 ‘손을 타는’ 공모전들은 운영위원회 단계부터 작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운영된 공모전은 설계공모 지침서에 운영위원의 명단을 공개하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공모전은 그렇지 않다. 사소하게 보이는 이런 정보도 숨기고 싶어 하는 쪽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심사 과정의 중계도 마찬가지다. 현행 지침에 따라 실시간 공개는 의무지만 그 취지가 무색하게 제출된 공모안을 보여주지는 않고 심사위원의 표정만 내내 보여주거나 민감한 부분에서는 음소거를 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하루빨리 지침이 개정되어 명확하게 각각의 안을 식별할 수 있게 중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심사가 끝나면 심사평은 물론 실명이 명기된 표결 용지와 입상작의 투시도, 평면도와 같은 기본 도면까지 지정된 홈페이지에 공개되어야 한다. 현재 지침에는 심사위원의 실명 공개 의무도 없고 입상작은 막연히 이미지만 공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 데다 공개하지 않을 때의 처벌 조항이 전무해서 건축행정시스템 세움터 기준으로 결과가 미등록 상태인 공모전이 전체의 30%에 육박한다. 발주처 입장에서는 공개했을 경우 발생할 민원이 피곤해서 그랬으리라 짐작이 되지만, 이런 투명하지 못한 행정이 불공정의 가능성을 키우는 씨앗이 되기에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심사위원 비공개를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이런 주장에 힘입어 2023년 지침 개정부터 설계비 20억 원 이상의 설계공모는 심사위원을 공모안 제출 이후에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심사위원 비공개 주장의 핵심은 비공개 기간을 최대한 늘려 심사위원과 참가자가 접촉할 기회를 차단하자는 것이다. 극도로 혼탁한 현재의 설계공모 판을 생각하면 언뜻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이것 또한 맹점이 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심사위원의 정보가 비공개의 망을 뚫고 새어나갈 염려도 그중 하나지만, 더 큰 문제는 전문성 있는 심사위원의 비율 자체가 지나치게 낮은 현실에서 참가자로부터 그래도 괜찮은 공모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다는 점이다. 당장 각각의 설계공모를 누가 봐도 공정한 절차에 따라 운영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능력 있는 설계자를 공모전으로 끌어들여 결과적으로 더 나은 공공시설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도 정보를 숨기는 방향으로 가면 누군가는 결국 시스템의 허점을 찾아낼 것이고, 이는 또 다른 불공정과 불평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당장은 어렵고 돌아가더라도 가능한 모든 정보를 공개하기 시작하면 그토록 요원해 보이던 자정 작용이 서서히 작동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미리 나눠준 안도 제대로 안 보고 와서 토론을 기피하거나 하던 말과 관계없는 엉뚱한 안을 찍는 이상한 심사위원의 수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심사위원의 권리는 근본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국민이 낸 세금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일이고, 결국 그 선택의 결과는 공적 자원이 국민 생활에 기여하는 방식과 정도를 결정짓는다. 설계공모 심사에 임한 심사위원은 소신을 갖고 양심에 따라 자신의 전문적 견해를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평가의 근거를 밝히고 당선작으로 지지하는 안을 표명하는 것은 위임받은 권리를 행사하는 자로서 당연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촘촘한 인적 네트워크로 엮여 있는 건축과 조경계에서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참가자가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는 발표 심사인 경우 그 괴로움은 더 심하다. 물론 요즘 들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블라인드 발표가 널리 퍼지면 상황이 좀 나아지긴 하겠지만, 그 이전에 심사라는 일 자체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적합한 일이 아닌 것이다. 또 한 가지 덧붙이면, 다른 심사위원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꺼려서는 안 된다.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에서는 심사 시 ‘충분한 토론’을 강조하고 있는데, 여기서 토론이란 토의와는 달리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상대를 설득하는 매우 적극적인 행위를 말한다. 즉 누군가에 의해 설득을 당한다는 것은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럴 경우 집단 지성을 통해 더욱 올바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커진다. 목소리 큰 사람이 심사에 들어가면 분위기에 휩쓸린다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걱정이 앞서는 사람은 스스로 심사위원의 자질이 있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한국의 설계공모는 개수에 비해 능력 있는 심사위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주장도 있다. 몇 가지 알려진 사실을 근거로 얼추 따져보기만 해도 꽤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심사위원의 자질 문제와 함께 공모전 제도 전반에 대해서도 같이 고민해 보아야 할 이유다. 어수선한 나라 사정으로 뭐가 됐든 추진 동력이 부족한 지금, 쉽지 않은 일이긴하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보유하고 있는 괜찮은 심사위원들이 제대로 활용되고 있는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그들을 적절한 설계공모 심사장으로 가능한 한 많이 보내는 일은 제도를 갈아엎는 일보다 훨씬 쉬운 편에 속한다. 그래서 정말 누구든 도전해 보고 싶은 설계공모의 수를 늘리는 것, 그것이 당장 한국 공공시설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라 믿는다. 원래 설계공모라는 제도의 취지가 바로 그것 아니었는가. 이승환은 서울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아뜰리에17과 해안건축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09년 런던으로 이주해 메트로폴리탄대학교에서 MA(Master of Arts) 과정을 마치고 다양한 경험을 쌓은 뒤 2014년 귀국해 파트너 전보림과 함께 개소했다. 건축 설계를 하면서 동시에 글쓰기를 통한 현실 개선과 건축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그래도 건축』, 『건축가 아빠가 들려주는 건축 이야기』를 펴냈다.
[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자격을 논할 자격
과제 심사는 일종의 대의(代議) 과정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어려움들은 대체로 누가, 누구를 대신하여 논의하고 결정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단순화하자면, 공공의 장소가 복무할 대상은 시민 일반이고 전문 집단은 그들의 대의자로 선출되어 계획안에 대한 심사를 수행하는 것이나, 현실에서는 그 사이에 수많은 간극이 존재한다. 시민 사회가 충분히 배양되지 않았던 과거 한국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설계공모는 주로 국가를 표상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심사위원의 역할 또한 그러한 목표로 수렴되었다. 지금과 같이 작고 일상적인 공공의 영역까지 디자인 경합을 통해 계획하는 것은 불과 한 세대 전에 시작된 일이다. 1990년대 지방자치제도의 전면적 시행에 따라 점차 늘어난 설계공모는 2019년 시행 의무 기준액을 설계비 2억원에서 1억원으로 하향 조정하면서 그 시행 건수가 두 배 가까이 확대되었다. 과거에는 그 공간들을 향유할 시민들에 앞서 행정의 편의와 기관장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발주 기관 내부에서 심사위원이 위촉되기도 했으나 그러한 경향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가격 입찰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좋은 품질의 설계안으로 공공의 공간을 만들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한국 사회와 행정 및 전문가 집단에게는 그만큼의 설계공모 심사를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소화해 내야한다는 벅찬 과제가 부여됐다. 제도 국토교통부의 설계공모 운영 지침은 최근 몇 년간 개정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심사와 관련된 조항에 개정이 집중되고 있다. 이처럼 빈번하게 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현실의 심사에서 여러 문제와 한계가 발견됐다는 걸 말해준다. 가장 최근의 변화는 2023년 4월 개정안(국토교통부고시 제2023-180호)으로, 1) 심사위원 사전 공개 제한 가능(설계비 20억 이상일 경우), 2) 심사 과정 실시간 중계 의무화, 3) 심사 횟수 총량제 등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각주 1) 이 중 2번 항목은 지난 2017년 8월 개정된 평가사유서, 투표 및 채점 내역 등 심사 자료 전반에 대한 공개 규정을 더욱 확장한 것으로, 현재의 기술적 환경에서 고려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을 도입한 것이다. 평가 자료 공개는 투명성 및 심사의 질적 수준 제고 등 여러 긍정적 효과를 의도하며 큰 기대를 모았으나, 오히려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실망스러운 심사의 이면이었다. 빈칸 또는 ‘의견 없음’으로 기재된 평가사유서들이 SNS에 공유되며 그 부실과 무성의함이 공분을 산 것이다. 개정 2년 후 조달청은 평가사유서의 최소 분량 작성을 의무화하는 등 조치를 취했지만, 평가 내역의 내실화가 어느 정도까지 개선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전히 내역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남아 있으며 공개를 강제하거나 사유서의 수준을 일정한 정도 이상으로 높이게 하기 위한 확실한 기준과 수단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가 자료에 대한 판단은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서 공개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좁게는 응모자에게 피드백 용도로 제공된다면, 굳이 누구나 접근 가능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해 함축적으로 작성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 일반에게 대의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공해야 하는 것이라면, 대부분의 평가사유서는 함량 미달의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심사 과정 실시간 중계의 도입은 이 점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대의자로서 전문가는 비전문가인 일반 시민에게 어떤 계획안이 당선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가 가능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나, 그런 경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평가 내역과 마찬가지로 실시간 중계를 수행하지 않는 다수의 공모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을 강제하거나 논의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뾰족한 방법을 지금으로선 찾기 어렵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장영호,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 개정안’, 4월 1일 시행”, 「건축사신문」 2023년 3월 30일. 정평진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설계경기 기록원인 스코어러(www.scorer.co.kr)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2020 ‘사회적 건축: 포스트코로나 젊은건축가 공모’에서 대상을, 2022년 『환경과조경』 ‘조경비평상’에서 가작을 수상했다. 건축 디자인 전문지의 에디터로 일했으며, 여러 매체에 도시와 건축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 공공건축 설계공모 이후, 이상과 실제
2022년 10월 7일 대학로에 위치한 공공그라운드 001스테이지에서 이 글 제목과 같은 타이틀을 건 세미나를 개최했다. 건축공간연구원이 수행한 ‘설계공모 이후 건축 생산과정 모니터링을 통한 공공건축 제도 개선 연구’(각주 1) 결과를 공유하고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홍보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준비한 좌석이 부족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세미나에는 건축가뿐 아니라 지자체 공무원도 다수 참여했으며, 지정 토론자뿐 아니라 플로어에서도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공공건축 설계공모로 꿈꾸는 이상과 실제의 간극에 대한 관계자들의 높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에도 새만금공항 같은 국가 기반 시설, 국립민속박물관 등의 대규모 문화 시설, 노들섬 예술섬 등의 도시 랜드마크뿐 아니라 주민센터와 어린이집 같은 소규모 공공 시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의 설계공모가 진행되고 있다. 설계공모의 대상은 개별 건축물에 그치지 않는다. 3기 신도시 마스터플랜, 개포 구룡마을 기본구상과 같은 도시설계, 도시 외부 공간과 공원 역시 설계공모 대상이다. 2020년 이후 공공 부문에서만 건축 설계공모 건수가 연간 1,000여 건에 이른다.(각주 2)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이 제정된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조달정보 개방 포털에 공고된 설계공모는 총 5,947건에 이른다. 우리 주변에는 과연 수천 개의 우수한 공간이 만들어졌는가? 이상 다수의 문헌이 최초의 설계공모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이며, 중세 시기에도 성당 설계를 위해 설계공모를 개최했다고 언급한다.(각주 3) 르네상스의 대표적 건축물인 브루넬레스키의 플로렌스 성당 돔 역시 설계공모의 결과다. 이후 절대 왕정 시기에는 왕립 광장이나 궁전, 18세기 이후 근대 국가 시기에는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관청이나 공공시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과 북미 주요 국가의 중요 시설이 설계공모의 대상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 개발 과정에서는 국가와 도시의 랜드마크 건립을 위한 설계공모가 활발하게 개최됐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지배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저축은행(1932), 총독부박물관(1935), 조선은행 앞 분수지(1939)(각주 4) 등 주요 시설과 도시 공간을 대상으로 한 설계공모가 실시됐다. 해방 이후 1960년대부터 정부종합청사(1967~1968), 여의도 국회의사당(1968), 세종문화회관(1973) 등 국가의 주요 청사와 문화 시설 디자인을 위한 설계공모가 개최됐다.(각주 5) 역사적으로 설계공모는 중요한 대규모 프로젝트에 주로 적용됐으며, 공모를 통해 선정한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디자인은 국가와 도시의 경쟁력과 문화적 저력을 보여주며 전 세계의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한국도 1995년에 공모 방식 시행을 제도화한 ‘건설기술관리법 시행령’(각주 6)에서 그 대상을 “상징성ㆍ기념성ㆍ예술성 등 창의성과 새로운 기술 또는 특수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건설공사”로 규정한 것을 보면, 제도 도입 초기 공모의 목적은 상징적이고 기념비적인 건물을 건립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임유경·배선혜·박태홍·양은영, 『설계공모 이후 건축 생산과정 모니터링을 통한 공공건축 제도 개선 연구』, 건축공간연구원, 2022. 이 글의 설문조사, 사례, 개선 방향 부분은 보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으며, 표와 다이어그램은 보고서의 그림을 재편집한 것이다. 2. 조달정보 개방 포털 용역입찰 공고내역에서 확인한 설계공모 공고 건수는 2020년 1,018건, 2021년 1,093건, 2022년 1,121건이다. 3. The Association of Finnish Architects, Dreams and Completed Projects: 130 Years of Finnish Architectural Competitions , 2006 외 4. 서영애·심지수, “일제강점기 광장의 생성과 특성 - 조선은행 앞 광장을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지』 45(4), 2017, pp.11~22. 5. 엄운진·임유경·차주영, 『1950년대 이후 한국 주요 공공건축물 조성과정의 사회적 담론 연구』, 건축도시공간연구소, 2017. 6. 건설기술관리법 시행령(대통령령 제14744호, 1995. 8. 4., 일부 개정) 제38조의2(건설기술의 공모대상) 임유경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건축과 조교수로 도시와 건축, 제도와 실제, 연구와 설계의 중간 영역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대학원, 국립고등파리벨빌건축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도시설계학 과정에서 도시계획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건축공간연구원에서 도시·건축 제도와 가로 공간, 공공 건축, 역사 보존·관리 연구를 수행했다. 기획부터 설계, 시공, 운영까지 공공 건축 생산 과정에서 다양한 주체의 역할을 추적하고 이용 현황을 살펴본 『좋은 공공건축 1~4』(건축공간연구원)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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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대화 “쇼핑몰은 공원의 새로운 경쟁자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두 공간의 성격은 분명 다르지만, 현대 도시민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부산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동부산점 외부 공간 리노베이션을 위한 현장 점검을 마친 뒤 프로젝트 담당자인 권정삼 책임과 나눈 대화다. 우리는 설계부터 현장 감리까지 10개월이란 긴 시간을 함께했다. 공식적인 회의를 넘어 때로는 현장에서, 때로는 이동 중에 자연스럽게 의견을 나누었다. 프로젝트와 관련된 논의가 끝나도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조경을 둘러싼 고민과 아이디어는 끝없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생각이 조금씩 확장되기도 했다. 쇼핑몰과 공공 조경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두고 각기 다른 시각을 공유하며 그 차이를 음미했다. 쇼핑몰은 소비와 유희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이고 공원과 광장은 휴식과 공존을 위한 장소지만, 두 공간 모두 현대인의 욕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프로젝트 방향성에 대해서는 의견을 맞춰가며 조율했지만 이외 논의에서는 차이 속에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는 과정이 더욱 흥미로웠다. 몰링(mailling)의 흐름이 만드는 동선 북측 광장은 중앙의 비상 차로로 인해 녹지대가 네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방문객들은 매장 앞길 대신 중앙 길을 따라 이동하게 됐고 매장 입구와의 연결성이 약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에 녹지대를 만들어 동선을 조정했다. 방문객들을 자연스럽게 매장 입구 방향으로 유도했고,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매장을 향하도록 했다. 아울렛 내 모든 동선은 쇼핑 경험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특히 550m 길이의 타원형 입체 동선은 두 개 층의 상업 공간을 순환하며 주요 광장과 내부 공간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구조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진입 동선과 만나는 지점에는 세 개의 라운지형 휴식 공간과 엘리베이터 중심을 둘러싼 여섯 개의 플랜터형 정원을 배치해 쇼핑 동선 속에서도 휴식을 고려한 공간을 조성했다. 아홉 개 주요 공간의 전체적 톤은 일관성을 유지했다. 화강석 플랜터, 목재 벤치, 다층 구조 식재를 기본 요소로 삼아 쇼핑 공간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구성만으로 정제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공간은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쇼핑객들이 둘러본 제품 중 어떤 걸 선택할지 고민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VMD을 위한 적절한 비움 아울렛은 1년 내내 계절과 이벤트에 맞춘 테마형 공간을 제공한다. 비주얼 머천다이징VMD은 단순히 매장 내 전시에 국한되지 않고, 공간을 활용한 이벤트를 통해 고객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브랜드와 매장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남측 광장, 북측 광장, 이를 잇는 중앙 보행몰은 아울렛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세련된 분위기와 함께 이벤트, 전시, 마켓 등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계획됐다. 양측 광장은 중앙 보행몰에서 초점 경관을 연출하는데, 북측에는 명품 매장이, 남측에는 실내형 쇼핑몰 입구가 자리하고 있다. 이를 고려해 축선상에 빈 포장 공간과 눈높이보다 낮은 녹지와 시설물을 배치해 개방감을 확보했다. 남측 광장 중앙에 휴식과 팝업, 전시와 공연이 가능한 복합 활용 공간을 마련했다. 공간 중심에는 450㎜ 높이의 팔각형 플랫폼(스테이지)을 조성했다. 이는 에비뉴엘 잠실점의 팝업 공간 ‘더크라운The Crown’을 변용한 디자인이다. 특히 해안가에 입지한 대상지의 특수성을 고려해 스테이지 둘레에 3cm 높이의 미러폰드를 적용했고, 공간을 활용할 때 전기선이 노출되지 않도록 페데스탈 포장 하부에 전기 인입을 가능하게 했다. 중앙 보행몰에 다섯 개의 녹지대를 설치했는데, 사이 공간에 시즌형 마켓 가판대와 키오스크, 전시물을 설치할수 있도록 녹지대를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했다. 북측 광장은 두 개의 2단 플랜터가 중앙의 빈 공간을 감싸는 형태로 구성했다. 이 세 공간은 고흥석 잔다듬 마감의 포장재로 연결되어 단일 톤의 정제된 분위기를 띤다. 특별한 VMD 시설이 없을 때는 매장의 정체성이 강조되며 이벤트와 전시가 들어서면 풍성하고 활기찬 쇼핑몰 풍경이 완성된다. 특별함을 위한 도어매트 포장 도어매트 포장은 쇼핑몰의 매장 입구를 따라 배치되는 특별한 포장 방식으로, 공간의 전이를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치 문 앞에 놓는 러그처럼 실내와 실외를 부드럽게 연결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폭 1.6m, 길이 0.8m인 쇼핑몰 내부 보행 공간보다 더 넓은 영역에는 포천석 계열의 밝은 화강석을 사용해 입구 주변을 시각적으로 강조했다. 쇼핑몰이 두 개 층이라 자연광이 충분히 들어오지 못하고, 중앙 명품 스트리트가 상대적으로 어두운 점을 고려한 디자인적 접근이다. 밝은 석재가 매장 내부 조명을 반사하면서 공간 전체를 더 환하고 개방적인 분위기로 조성한다. 보행로에는 회색 계열의 고흥석을 사용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매장 입구를 따라 이어지는 두꺼우면서 밝은 회색 선과 보행 공간을 구성하는 넓고 좀 더 어두운 회색 면이 대비를 이루며 쇼핑몰의 공간 구조를 정돈한다. 이런 디자인 요소들은 단순한 포장 디테일을 넘어 쇼핑몰 내부의 빛과 동선, 분위기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행운의 가시나무 식재 설계 과정에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몰링하는 방문객들에게 풍부한 녹음을 제공하기 위해 서로 다른 높이의 지엽이 풍성한 수목들을 다층 구조로 식재하고, 하부에는 1~3㎡ 규모의 패턴 식재를 적용했다. 최근 트렌드인 자연형 식재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식재가 브랜드 간판을 가리고 유지·관리가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설계사에게 유지·관리가 당연히 필요하고 쇼핑객이 이동하면서 시점이 바뀌면 간판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설득했지만, 돌이켜보면 이는 설계자의 논리일 뿐이었다. 클라이언트 요구를 다시금 고려해 식재 설계를 보완했다. 적절한 밀도의 잎을 가진 수목을 선정하고 중층의 아교목과 대관목을 최소화했다. 하부 식재는 플랜터 크기에 맞춰 매스 식재와 패턴 식재를 혼용했다. 가장 고민스러웠던 부분은 상록활엽수의 비율과 수종 선택이었다. 당시 남부 지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상록 활엽수는 녹나무, 후박나무, 감탕나무, 참식나무, 동백나무 정도였다. 대부분 잎이 두껍고 짙은 녹색이며 지엽이 촘촘했다. 보다 밝고 가벼운 느낌의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옅은 녹색의 하늘하늘한 수목이 필요했지만, 겨울철을 고려해 70% 이상을 상록교목으로 구성해야 했다. 이에 녹나무와 후박나무를 전정해 유사한 분위기를 내기로 하고 적합한 수목을 찾아 나섰다. 운 좋게도 후박나무를 보러 간 현장에서 가시나무를 발견했다. 농장에서 발주처를 설득한 끝에 마음에 드는 나무들을 붉은 노끈으로 표시했고, 끈을 묶는 순간 마치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다시 조정해야 했던 식재 설계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끝나지 않은 대화 대형 쇼핑몰은 공간 구조와 동선이 도시공원과 유사하며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 성격을 지닌다. 다양한 활동과 공동의 감각을 형성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면서 최근 어느 비평문(『환경과조경』 2025년 2월호)의 주장처럼 ‘유사공원(類似共園)’, 즉 공공성과 사적 소유 경계를 넘어선 공동 경험의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말해 온 “쇼핑은 인류 공공 활동의 마지막 남은 형식일 것”이라는 주장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오늘날 도시 환경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몇 개월 후, 사무실 근처 중국집에서 고량주 한 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다시금 쇼핑공간과 공공 공간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치 쇼핑몰을 거닐 듯,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또 다른 주제로 이어졌다. 글 CA조경기술사사무소 조경설계 총괄 CA조경기술사사무소(조용준) 조경설계 CA조경기술사사무소(조용준, 서유진, 신원재, 허지선) 조경 디자인 감리 CA조경기술사사무소(조용준, 서유진, 신원재, 허지선) 조경 시공 공간시공 에이원 발주 롯데백화점 위치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기장해안로 147 면적 4,600㎡ 완공 2024. 8. 사진 안상순 2004년 설립된 CA조경기술사사무소는 작은 공간의 설계부터 도시 스케일의 계획에 이르는 국내외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공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 www.cadesign.co.kr
마테오티 광장
마테오티 광장(Piazza Matteotti)은 1990년대부터 오랜 역사가 축적된 장소지만, 뚜렷한 지향점 없이 광장 일부가 지속적으로 바뀌고 재설계되며 점차 왜곡된 상태였다. 마테오티 광장 공공 정원 프로젝트를 통해 이곳에 카스틸리온 피오렌티노(Castiglion Fiorentino)의 역사적 중심지인 아레초-투스카니(Arezzo-Tuscany)로 향하는 관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발 디 키아나(Val di Chiana)의 아름다운 테라스 위에 다정하고 활기 넘치는 공간을 조성하고자 했다. 설계 목표 설계 목표는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를 단순화하고 요소 간 위계를 복원해 본래 광장의 주인이었던 식생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관목이 우거진 화단으로 채운 광장 주변의 꽉 찬 공간(solid)은 나무 그늘에서 쉴 수 있는 중앙 광장의 빈 공간(void)과 대조를 이룬다. 도로는 다양한 활동을 포용할 수 있도록 새롭게 포장했다. 기능과 미학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도록 포장 재료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이러한 설계를 통해 1930년대의 정원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동선, 작은 광장, 휴식 공간 사이의 명확한 위계를 복원하고, 현대에 알맞게 활용될 수 있도록 조정했다. 공간 구성 사암으로 포장한 외부 보행자 순환로에서 정원으로 진입할 때 이용하는 지점은 크게 네 곳이다. 본래 계단이 있던 곳을 보행 약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경사로로 바꾸고 좀 더 넓게 조성해 이용 편의성을 높였다. 정원에 들어서면 발 디 키아나의 경관과 분수가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분수는 북쪽 공간으로 향하며 마주치는 첫 번째 광장의 핵심 요소 중 하나다. 분수에서 전쟁기념관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다양한 이벤트를 열 수 있는 작은 광장과 키오스크를 설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마련했다. 경계부의 산책로는 현재의 벨베데레(belvedere)(전망대 또는 정자)로서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되, 새로운 시설물을 배치해 개선하고 경계 난간을 설치해 안전성을 더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글 Pool Landscape Landscape/Architecture Firm Pool Landscape Lead Architect Pool Landscape(Caterina Gerolimetto, Ilaria Sangaletti, Elisa Frappi) Fountain’s Restoration Ilaria Forti Structure Zam Engineering Client Municipality of Castiglion Fiorentino Location Castiglion Fiorentino, Arezzo, Italy Area 3,200㎡ Completion 2024 Photograph Alessandra Bello, Marco Frappi 풀(Pool Landscape)은 건축가 카테리나 제롤리메토(Caterina Gerolimetto), 농학자 엘리사 프라피(Elisa Frappi), 조경가 일라리아 산갈레티(Ilaria Sangaletti)가 설립한 사무소로, 건축과 조경을 아우르는 창의적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경험, 열정으로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을 이해하며 자신만의 설계를 해나가고 있다. 빛, 바람, 잎사귀 같은 자연의 요소를 재료로 삼아, 대상지에 대한 신중한 분석에서부터 설계를 시작한다. 이탈리아의 베로나, 베르가모, 페사로를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스토르케엔 공원
덴마크에 위치한 스토르케엔(Storkeengen) 공원은 다양한 건축적 도구를 통해 도시계획, 기후 변화 적응, 자연 보존 전략을 결합한 프로젝트다. C.F. 몰러 아키텍츠(C.F. Møller Architects)가 고안한 덴마크 중부 지역의 혁신적인 홍수 대응 시스템은 도시계획, 기후 변화 적응, 자연 보호를 결합하며 라네르스(Randers)를 미래 도시의 모델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홍수에 대응하는 자연 공원 라네르스는 산책과 카누 타기 명소인 구덴강(Gudenåen)으로 잘 알려진 도시다. 하지만 저지대에 위치해 홍수에 취약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기후 변화로 인한 위험성이 더 커졌다. 라네르스 시, 지역 수도사업소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라네르스의 자연환경을 개선하고, 홍수로부터 이 지역을 보호하는 것이 목표였다. 도심의 건물 지붕, 주차장, 도로를 타고 흐르는 우수는 빗물 배수로(cloudburst routes)로 유입되고, 강가 목초지를 지나며 정화 및 여과된 뒤 구덴강으로 다시 흘러 들어간다. 새로운 도로와 배수로는 불투과성 포장 지역에 물이 고이는 것을 방지한다. 위험에 처한 초원을 습지로 전환함으로써, 다양한 건축적 멀티툴을 통해 자연환경을 개선하고 지역의 홍수 위험을 줄이며 주민과 방문객이 자연을 감상하며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자연 공원을 만들고자 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글 C.F. Møller Architects Landscape Architect C.F. Møller Architects Architect C.F. Møller Architects Construction Jakobsen & Blindkilde Engineer WSP Denmark Collaborator Geo Client Randers Municipality and Vandmiljø Randers Location Randers, Denmark Area 83㏊ Completion 2024 Photograph Peter Sikker Rasmussen, Silas Andersen C.F. 몰러 아키텍츠(C.F. Møller Architects)는 스칸디나비아의 대표 건축사무소로 혁신과 노하우, 북유럽적 가치를 기반으로 완성도 있는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건축의 기능적, 예술적, 사회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도시를 위한 지속가능하고 심미적인 디자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지역적 맥락에 대한 세심한 분석을 통해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해법을 도출하며, 도시계획, 조경과 건축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합하는 접근법을 통해 새로운 국제적 표준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자원 절약과 환경 문제, 프로젝트 예산을 고려하며 장인 정신을 토대로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다룬다.
양주옥정 파티오포레
힐스테이트 양주옥정 파티오포레(이하 파티오포레)는 양주 옥정 신도시에 위치한 블록형 단독주택 용지에 조성된 타운하우스로, 독립된 주거 공간과 공동 이용 시설을 결합한 새로운 주거 형태를 제시한다. 건물 대부분이 세 개 층과 다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세대에서 정원과 테라스를 즐길 수 있다. 파티오포레의 조경에 서울 외곽 저층 주거를 선호하는 수요층이 자연과 조화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다는 점을 반영하고자 했다. 따라서 고층 아파트에서 경험할 수 없는 자연과의 밀접한 연결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고, 이를 위해 SWA는 자연 속 예술로의 초대(Invitation to the Arts in Nature)라는 콘셉트를 설정했다. 외부 공간은 여섯 개 블록으로 구성되며, 각 블록의 경계는 근린공원이나 녹지와 연결되어 자연과 어우러진 단지를 만든다. 주변의 자연경관에서 돌, 숲, 산, 공원이라는 디자인 콘셉트를 도출해 차별화된 경관을 조성했다. 이러한 조경 요소를 통해 입주민들은 자연을 가까이 느끼고 정원의 예술적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 마운틴 빌리지, 산의 조형이 정원이 되다 단지에서 길을 따라 걸으면 대상지를 두른 산의 능선이 보인다. 이 풍경을 재해석해 산의 능선이 중첩된 형상을 연상시키는 공간을 연출했다. 산이라는 규모가 큰 공간을 끌어옴으로써 정원의 깊이감과 신비로움을 더했다. 어린이 놀이터와 놀이 정원: 8블록의 어린이 정원에는 마운틴 빌리지의 이미지에서 모티브를 얻어 사선을 활용한 디자인을 시도했다. 공간을 사선으로 분리해 삼각형의 놀이 공간과 휴게 공간을 효율적으로 배치했으며, 고보 조명을 활용해 역동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데크 라운지: 주민 공동 시설 앞에 마련한 데크 라운지는 목재 데크를 활용한 자연 친화적 커뮤니티 쉼터다. 느티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수목을 식재해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풍부한 녹음을 제공한다. 녹음을 즐기며 주민들이 자유롭게 앉거나 누워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글·사진 엘피스케이프 조경 계획 SWA(San Francisco) 조경 설계 엘피스케이프, 라모디자인그룹 건축 설계 디에이그룹 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사무소 시공 현대건설 조경 식재 정한조경 조경 시설 동영조경 놀이 시설 플레이잼 시행 미래개발2, 무궁화신탁, 미래인 위치 경기도 양주시 월정로 57 일대 규모 809세대 대지 면적 165,117.60㎡ 완공 2024. 6. 엘피스케이프(LPSCAPE)는 부지의 고유성을 맥락 분석과 깊이 있는 해석을 통해 발굴하고, 이를 재구성하여 그 장소만의 상징적 가치와 특별함을 창출한다. 독창성을 갖추되 주변 환경과의 균형을 고려하여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을 지향한다. 다양한 국가에서 수행한 프로젝트 경험을 토대로 분야의 경계를 넘어서는 확장된 조경설계를 통해 변화하는 미래 사회에 대응하는 공간을 구현하고자 한다. SWA 그룹은 조경, 기획, 도시설계 등 전문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인간과 경관이 서로 교류하는 방식을 정의하는 디자인을 선보이고, 장소와 지역적 맥락의 힘을 믿으며 대상지의 본질과 문화를 디자인에 담는다. 인간과 자연, 예술과 생태 사이에서 교집합을 만들고,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건축과 자연이 결합해온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라모디자인그룹의 ‘라모’는 랜드스케이프와 모자이크의 합성어(landscape+mosaics)로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는 많은 경관과 조각의 조합을 뜻한다. 2003년에 설립되어 마스터플랜부터 조경 및 도시계획, 주거 등 다양한 규모와 유형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대지가 들려주는 소소한 속삭임, 사회적 요구, 변화하는 삶을 담아낼 수 있는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설계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먼스케이프] 카트린 드 메디치와 디안 드 푸아티에
여인들의 성 프랑스 루아르 지방에 가면 동화에나 나올 법한 성이 줄지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 것이 슈농소 성(Château de Chenonceau)이다. 슈농소 성은 마치 셰르(Cher)강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축조된 우아하고 독특한 건축물이다. ‘여인들의 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여인들의 손으로 빚고 완성하고 다듬기도 했지만, 여러 미망인의 한과 넋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 성에서 살다 간 여인들 이야기가 모두 흥미롭지만,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1519~1589)와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1499~1566)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두 여인 모두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으며 이 둘이 만들어 남긴 테라스 정원이 지금도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 정원은 사이좋게 나란히 존재하지만, 사실 두 여인은 연적이었다. 카트린은 앙리 2세(Henri II)(1519~1559)의 사랑을 받지 못한 왕비였고, 디안은 그의 영원한 연인이었다. 정실부인을 두고 젊은 정부를 얻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세 사람의 경우는 그것이 뒤바뀐 관계였다. 정부 디안이 왕비 카트린보다 스무 살이나 많았다. 카트린이 열네 살에 동갑내기 앙리에게 시집갔을 때, 이미 마흔에 가까운 디안이 앙리의 연인으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디안은 왕에게도 20년 연상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왕이 40세로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는데 그때 디안은 60세였다. 어떻게 그 나이 되도록 사랑받을 수 있었는지 많은 이가 지금도 궁금해 한다. 글쎄, 앙리 2세와 디안은 그저 연인 관계였을까? 왕에게 디안은 보호자였다가 연인이 되었고, 정치적 조언자이자 생의 동반자였으며, 여신과 같은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카트린과 디안의 경쟁 구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슈농소 성을 둘 다 탐냈으나 여기서도 디안이 이겼다. 앙리 2세가 죽은 뒤 카트린은 형식상 왕실 재산이었던 슈농소 성을 반환받아 그곳의 여주인이 되었으며 그 대가로 디안에게 쇼몽 성을 주었다. 쇼몽은 해마다 가든쇼가 개최되는 곳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성이다. 슈농소 성을 먼저 소유했던 디안의 삶과 그녀가 만든 정원부터 잠시 살펴볼까 한다. 디안 드 푸아티에 루브르 박물관에 다이애나 여신을 그린 유화 한 점이 있다. 전신상 크기인데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가 나체로 활을 손에 들고 활통을 맨 채 사냥개 한 마리를 동반하고 숲속을 걷는 장면이다. 이 그림의 모델이 디안이었다고 한다. 디안은 다이애나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1550년경에 그린 것이니 디안이 50세가 넘었을 때 모델을 선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플레이보이』 잡지 표지를 장식한 마돈나를 연상하면 될 것 같다. 평범한 외모의 카트린과는 달리, 디안은 빼어난 미모에 품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냉수욕을 하고 건강한 식단과 운동은 기본이었으며, 허브 추출물로 만든 천연 크림을 직접 고안해 피부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고 한다. 한편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며 사업 수완이 뛰어나 앙리를 설득해 슈농소 성을 선사 받았는데 성의 증축과 관리에도 철저했다. 당시 성이란 그저 화려한 거처에 그치지 않았다. 귀족들에겐 작물을 재배하는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디안은 주변의 땅을 사들여 영토를 넓히고 성 주변을 숲으로 둘렀으며 뽕나무를 잔뜩 심어 수입을 세 배로 늘렸다고 한다. 정원 만들기와 가꾸기에도 심취해서 당시 프랑스에선 아직 새로웠던 이탈리아 르네상스풍으로 12,000㎡ 규모의 테라스 정원을 조성했다. 이때 물속에 대를 쌓고 그 위에 정원을 만드는 대범함을 보였다. 중앙에 분수를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종횡의 축을 내고 다시 대각선의 축으로 나누었다. 이로써 모두 여덟 개의 구획이 탄생했는데 각 구획은 운동과 놀이 공간, 식재 공간으로 분류했다. 주변의 숲에 정원사들을 보내 9천 줄기의 야생 딸기와 제비 꽃 뿌리를 캐게 해 정원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수월한 관리를 위해 잔디로 구획을 채우고 토피어리를 심어 간소화했다. 디안은 원래 궁중에서 왕자를 돌보는 임무를 맡았었다. 조선시대와 비교한다면 동궁전의 상궁이었던 셈이다. 앙리가 아홉 살 되던 해 스페인에 볼모로 가서 4년간 머물렀던 일이 있다. 그때 스페인으로 떠나는 어린 앙리를 디안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는데, 앙리가 그 따뜻한 품을 평생 잊지 못했던 것 같다. 앙리의 젊은 아내 카트린에게 질투나 경쟁심을 느낄 필요가 없었거나 현명했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후사를 생각해 자신에게만 엉겨 붙는 앙리를 카트린의 침실에 들여보내 남편의 의무를 다하게 했다고 한다. 카트린은 앙리 2세와의 사이에서 열 명의 자녀를 낳았다. 디안은 재테크의 귀재여서 축적한 재산도 많았고 성도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기에 말년에는 자신의 성에서 조용히 살다가 1566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카트린 드 메디치 그 똑똑했던 디안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점이 있었다. 겸손하고 명랑하기만 했던 카트린이 두뇌회전이 엄청난 능력자라는 사실이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1519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부를 상속받아 너도나도 탐내는 신붓감이었다. 증조부인 교황 레오 10세의 보호 아래 친척들의 집에서 자라다가 잠시 수도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레오 10세의 뒤를 이어 카트린의 후견인이 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에게 카트린을 시집보냈다. 프랑스에서의 삶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카트린은 앙리를 보자마자 반했다고 하는데, 앙리는 카트린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그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막대한 지참금에 더해 밀라노를 넘겨받기로 했으나 후견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다. 밀라노를 넘겨주기는커녕 지참금도 지급하지 않았다. 이로써 지참금 외에는 볼 게 없던 카트린은 낯선 프랑스 궁중에서 완전히 찬밥이 되고 말았다. 인물이 뛰어나지도 않고 프랑스어도 서툴고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신분도 격에 맞지 않은 상인의 딸, 카트린을 피렌체로 돌려보내라는 소리가 높아졌다. 숙부의 배신으로 돌아가도 별 볼 일 없음을 알게 된 카트린은 홀딱 반한 앙리의 곁에 남기 위해 납작 엎드리는 전략을 취했다. 이를 본 프랑수아 1세가 카트린의 총명함을 간파해 총애했고 프랑스 궁중에 남게 했다. 왕위 계승자였던 태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카트린의 남편인 둘째 왕자 앙리가 왕으로 등극하고 카트린은 왕비가 된다. 그렇다 해도 처음엔 크게 달라진 바 없다가 열명의 왕자와 공주를 차례로 낳으며 카트린은 서서히 입지를 굳혀가기 시작했다. 당시엔 이탈리아가 문화적으로 프랑스에 월등히 앞서 있었다. 카트린은 시집갈 때 피렌체의 의상 디자이너와 요리사를 데리고 갔는데, 이들을 통해 세련된 패션과 우아한 생활 방식이 프랑스 궁중에 전파됐다. 그뿐 아니라 이탈리아 요리가 주목받아 후일 유명해지는 프랑스 요리의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카트린은 남편이 사망한 뒤 권력을 손에 쥐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드러내게 된다. 아들 셋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으나 일찍 죽거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까닭에 실제로는 카트린이 정치를 틀어쥐었다. 당시 프랑스는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고, 특히 종교 분쟁으로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이 매우 어지러운 격변의 시대였다. 게다가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높은 귀족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아들의 왕위를 지키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디치 가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카트린의 ‘정치 본색’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카트린의 차남 샤를르 9세가 통치하던 1572년 여름, 그 유명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 일어났다. 원래 구교와 신교의 화합을 위해 둘째 딸 마고를 신교의 지도자 앙리 드 나바르와 혼인시켰으나 그 혼인을 보러 온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에 처참한 살상이 시작되어 화합은 물 건너갔다. 종교 분쟁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을 뒤흔들게 된다. 1993년에 ‘여왕 마고’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영화 속에서 카트린은 검은 옷을 입은 악녀로 묘사된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일은 물론 아니다. 카트린의 슈농소 성 카트린은 슈농소 성을 가장 사랑하는 거처로 삼고 상당한 재정을 투자해 성을 확장하고 아름답게 꾸몄다. 디안이 이미 건설을 시작한 셰르강 교량을 완성하고 그 위에 2층짜리 갤러리를 추가해성의 독특한 외관을 완성했다. 1557년에 완공된 이 갤러리는 무도회장이 되었다. 카트린은 슈농소 성을 거처가 아니라 정치적 무대로 활용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화려한 연회와 행사를 자주 열어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과시했다. 1560년에는 아들 프랑수아 2세의 즉위를 기념하는 프랑스 최초의 불꽃놀이가 슈농소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디안에 대한 감정이 어땠는지 알 수는 없다. 주변에서는 디안의 코를 잘라서 내치라고 했다는데카트린은 그 대신 슈농소 성을 반환하라고 했다. 이에 디안은 그 대신 쇼몽 성을 달라고 요구했고 카트린은 이에 응했다. 부동산 가치로만 본다면 쇼몽 성이 훨씬 낫다. 그 사실을 카트린이 모를리 없었지만 슈농소 성을 빼앗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던 것 같다. 디안은 끝까지 유리한 거래를 한 것이다. 슈농소에 입성한 카트린은 바로 증축 작업에 들어간다. 우선 뽕나무 농장의 규모를 확장해 수익을 더 올리고 조류관을 지어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이탈리아에서 올리브 나무를 들여와 대량으로 심었는데 기후에 잘 적응했다고 한다. 디안의 정원은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둔 대신 한 귀퉁이에 도서관 겸 문서고를 지었다. 디안과 달리 카트린은 책을 좋아했고 지리학, 천문학, 물리학, 수학에 두루 지식이 풍부했다. 또한 건축적 재능도 뛰어나 파리의 튀일리 궁전과 정원 외에도 많은건축물 축조에 관여했다. 카트린은 5,500m²의 규모로 테라스 정원을 지었는데, 성 본채를 사이에 두고 디안의 정원과 마주 보는 형국이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사다리꼴이며 그 중앙에 커다란 원형 연못을 만들었다. 정원 가꾸기에는 디안만큼 관심이 크진 않았다. 테라스 정원에 어떤 식물을 심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다만 당시의 풍습대로 약초와 향기나는 식물을 심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금은 정원사들이 절기에 따라 경계 화단에 초화류를 심고 벽에 기대어 장미도 심어 두었다. 당시 유럽의 왕실이나 귀족들에게 백성이란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았다. 민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사소한 죄를 지어도 무지막지한 벌을 받았는데, 그들이 무자비하게 형벌 받는 장면을 구경하며 연회의 안줏감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묘사된다. 동양의 민民이라는 개념은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카트린이나 디안의 능력과 삶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볼 일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특권을 오로지 그 자체를 지키는 데 썼을 뿐이다.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프로이센의 공주로 태어나 바이로이트의 여주인으로 살았던 빌헬르 미네(Wilhelmine von Bayreuth, 1709~1758)다. 18세기 소위 계몽주의를 살았던 여인인데, 계몽이라는 관점에서 정말로 개선된 것이 있었을지 기대해 본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밀레니얼도 이미 옛날 이야기
75%를 위한 공원 25%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21세기 말이다. 시간이 반드시 직렬로 흐르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근현대 교육의 수혜자에게 감지되는 시간이란 앞으로만 쏟아진다. 따라서 앞으로 21세기는 이제 75%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는 겨우 몇 년 만에 AI를 필두로 세상이 끝없이 변해 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다.(각주 1) 누군가는 그 변화의 선두에 서 있고, 누군가는 뒷자락에서 페이스 맞추어 가며 달려가고, 또 어떤 사람은 옆에 서서 이 행렬을 지켜보거나 곁눈으로 흘기고 있다. 한 심야 토크쇼의 호스트 존 올리버(John Oliver)는 몇 년 전 로봇 시대에 앞으로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판적 사고,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 사회적 지능을 요구하는 직업.” 다만 “우리가 아는 직업 중 이런 직업은 없고 이제부터 찾아봐야 한다”는 것이 해당 섹션의 안타까운(!) 결론이었다. 결국 자신의 머릿속을 까뒤집는 한이 있더라도 뿌리부터 다시 생각해야 된다는 이야기다. 여러 호에 걸쳐 조금씩 언급했지만,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격변하는 도시 사회를 위해 어떤 공원을 상상해야 하는가. 조경은 미래에 유의미한 업역으로 남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이용을 위한 공원은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될까. 에피소드 1. 단계적 MZ 거부 운동(과 그 외 소식) 너도나도 MZ라는 단어를 남발한다. 1988년생 밀레니얼로서 당당히 이 구분을 거부하는 바다. 한때는 기계 속 펼쳐진 세계에 열광했지만, 이제는 자우림의 노래 “20세기 소년소녀”(각주 2)를 흥얼거리며 ‘어린 시절의 갬성이 그리운’ 걸 보면 밀레니얼 시대는 이제야 ‘돌이켜볼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듯하다. 기술이 빠르게 변하고 사회도 그에 맞춰 가속도가 붙는 만큼 이 두 세대를 한 덩이로 잡아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일견 이해가 된다. 하지만 사회는 앞으로 전진하는 동시에 돌고 돈다. 나선형의 미래를 바라보며,(각주 3) 지금 조성되는 공원과 정원은 앞으로 얼마나 유의미할지, 또는 얼마나 ‘추후 재설계’의 여지를 두고 조성되어야 하는 것일지 궁금해진다. 단계별 조성으로 대표되는 조경의 리질리언스 실천이 그저 “기본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서 내외부의 혼란을 저항하는” “그저 버티는 것 뿐”인 설계 패러다임이라는 리차드 웰러(Richard Weller)의 비판은, 우리 시대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꼬집는다.(각주 4) 우리는 여전히 돌고만 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무섭다. 2. “비틀즈의 무지개, 오즈의 마법사, 듀란듀란의 노래”로 시작하는 이 곡은 사실 X세대를 위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을 읽고 자란 이들에게도 넌지시 울림을 준다. 3. 일본 애니메이션 ‘천원돌파 그렌라간’(2007)의 테마. 필자는 몇 번이나 돌려보고 한참 울었다. 4. Richard Weller, “The Landscape Project”, in The Landscape Project, Richard Weller and Tatum Hands eds., AR&D, 2022, p.11.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모두의 퍼니처] 토인디자인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쉼 흔히 현대 도시의 삶을 표현할 때 생존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지만 생존의 반의어를 생각하면 선뜻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는 현대 도시에서 생겨나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에너지의 응축을 해소하려는 조치로서 생겨났으며, 치유의 개념을 가진 대표적 도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현대 도시엔 생존보다 치유가 필요하다. 도시는 특유의 기능과 화려한 겉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질주하고 있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만 한다면 존재가 지속될 수 없다는 걸 도시의 구성원은 이제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멈춰야 할지, 어떻게 쉬어야 할지 막막함을 느낄 때도 있다. 답답한 일상이나 생업에서 벗어나 잠시 멈추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감정을 많이 해소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쉼’이라 부르지만 쉼의 형태는 사람들의 개성만큼 다양하고 계속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쉼’의 형태와 랜드스케이프를 결합하는 퍼니처를 연구하며, 자연과 가까워지려는 인간의 행위가 불편하지 않게 현대인의 생활상을 적절히 반영하고자 노력한다. 이는 조경이란 분야가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모두를 수용하는 유니버설 누구에게나 평등한 사회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사회의 최종적인 진화 형태이며 모두가 힘을 합쳐 마땅히 도착해야 할 종착지다. 하지만 현실은 추구하는 이상과는 거리가 멀고 21세기로 넘어온 지 20년이 지난 현재도 쉽지 않은 문제다. 예를 들어 조경 시설에 흔히 적용되는 계단은 휠체어로 진입할 수 없고, 테이블, 벤치 등 시설의 높이가 모든 사람이 사용하기에 적당한 높이인지 검증이 필요하다. 또한 일률적인 간격의 자전거 거치대는 다양한 크기의 자전거를 모두 수용하기 어렵다.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접근법이 중요하며, 이러한 것이 모든 종류의 의사 결정에 당연히 포함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환경과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사용자들을 최대한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려동물과 동행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영혼의 개념이 있는 영적 동물이다. 무리를 이루거나 짝을 찾아 함께하기를 원하며 인간의 심연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고독의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공동의 목표 또는 취향을 공유하기 위한 커뮤니티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생겨나고 성장하고 쇠퇴하고 있다. 인간의 최소 구성단위인 가족의 개념도 시대가 변화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다양한 형태로 적응하며 진화하고 있다. 개인의 일상을 공유하고 유대를 형성하고 안식처가 되어주는 동반자의 모습도 이제는 반드시 인간일 필요는 없다. 반려동물 양육 인구 천만 시대에 도달할 만큼 다양한 동반자가 출현하는 시대다. 이와 같은 현대의 동반자 형태는 공공 시설의 영역에서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요구에 발맞춰 반려동물이 인간과 조화롭게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진화하는 티하우스 조경 시설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단순히 휴식을 보조하는 옥외 시설, 산책로에 군데군데 놓인 벤치와 차양막이 있는 시설. 보통 떠올리는 과거의 시설들이다. 현재는 생활 방식의 변화와 기능의 세분화가 이루어지며 휴게 시설들이 변화무쌍하게 진화하고 있다. 특히 다수의 시민을 수용하는 공공 시설로 기능했던 퍼걸러는 이용 주체와 커뮤니티의 구성에 발맞춰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가령 냉난방이 가능한 실내 공간, 각종 모임을 지원하는 내부 가구들, 주변의 정취를 즐기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야외 테라스까지 건축과의 경계를 허무는 형태의 퍼걸러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복층형 티하우스는 신축 아파트 단지 내부 주요 공간의 랜드마크로 기능하는 공공 휴게 시설이다. 단순히 잠시 쉬어가는 시설로 활용됐던 과거의 퍼걸러들과 달리 주민들이 머물 수 있는 생활 공간의 개념을 담아냈다. 이용자의 편의성을 최대한 고려한 디자인을 통해 마치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고자 했다. 누구나 이용하는 슬로프 전망대 공공의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 중에는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보통 전망 시설은 각종 공원이나 명소의 주변 경관을 편하게 즐기기 위한 목적의 시설이지만, 누구에게나 접근이 가능한 시설은 아니다. 가령 전망대 진입 시 계단밖에 없는 공간에서 신체가 불편한 이용자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상층부로 올라갈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고려해 누구나 편하게 진입할 수 있는 배리어 프리 전망 공간을 만들고 있다. 2층 구조의 전망대형 퍼걸러인 스카이네스트는 기존 계단 진입부 외에 휠체어로도 올라갈 수 있는 경사의 슬로프를 만들고, 진입부 핸드레일에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판을 설치해 다양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누구나 차별 없이 시설에 접근할 수 있는 전망 공간을 만들고자했다. 진입 장벽을 낮춘 인피니트 트랙 올라타서 이용하거나 베어링으로 운동 범위가 제한적인 운동 시설은 획일적인 운동 형태를 제공해 이용자의 흥미를 감소시킨다. 이러한 운동 시설의 구동부 베어링은 소모품으로 지속적인 유지·관리가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발판이 있는 운동 시설은 물리적 제약이 있는 사용자에게는 높은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트랙형 운동 시설인 인피니트 트랙은 이러한 점을 보완했다. 지정된 발판에 올라가서 사용해야 하는 제약을 줄이고 방위나 높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본인의 체중과 근력에 맞게 운동의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모듈의 형태를 자유롭게 제작할 수 있어 맞춤형 구성이 가능한 시설로 사용 공간의 성격이나 주요 이용 계층에 맞게 조합해 각 공간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신개념 운동 시설이다. 베어링의 사용을 최소화해 유지·관리가 기존 운동 시설보다 용이하다. 자원 순환의 세덤 퍼걸러 첨단 기술과 자연이란 상반된 요소가 시대적 요구로서 공존한다.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꾀하는 시도로서 식재와 조합된 시설물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일상에서 벗어난 휴식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시설들은 플라스틱, 스틸 등 인공 자재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목재, 석재 등 자연적 소재를 우선적으로 활용하고 자연의 느낌을 연출할 수 있는 식재 등을 시설에 접목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세덤 퍼걸러는 빗물을 활용해 지붕의 식재에 관수를 하고 물탱크에 저장 후 남는 물은 수도꼭지를 통해 재활용할 수 있는 휴게 시설이다. 자원의 재생산 개념을 바탕으로 버려지는 물까지 다시 사용하는 자원순환을 통해 비용 절감 등 경제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게 했다. 반려동물과 조화를 꾀하다 반려동물 양육 인구 천만 시대에 가족 같은 동물들과의 동행은 시대적 흐름이다. 인간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공공 시설은 반려동물과 함께할 수 없기에 아쉬움이 생길 수 있다. 동행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시설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다양한 시설이 필요해지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 놀 수 있는 놀이대와 반려동물의 생활 패턴을 고려한 제품 개발을 통해 인생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반려동물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토인디자인은 토털 스트리트 퍼니처 디자인 브랜드로 트렌드를 고려한 현대적 감성의 디자인을 추구하며,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도시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자연을 보존하는 동시에 이용자에게 기능성과 편안함을 제공하며 빠르게 변해가는 삶의 방식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다양한 커뮤니티를 수용할 수 있게 돕는 스트리트 퍼니처를 만든다. 궁극적으로 주변 환경과 사회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이용자들의 이용 패턴을 연구해 지속가능한 인간의 쉼과 삶을 위한 디자인을 구현하고자 한다.
자연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다
“자연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내게는 들려온다. 그런 감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각주 1) 자연의 소리를 화폭에 어떻게 옮길지 고민한다는 구순의 노 작가의 말이다. 이는 작가의 예술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서울시립미술관은 2024년 12월 12일부터 2025년 2월 9일까지 한국 구상 회화사의 발전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한 박광진 개인전 ‘자연의 속삭임’을 개최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과 작가의 대표작 중 117점을 선별해 네 개의 섹션으로 나눠 선보였다. 첫 번째 섹션 ‘탐색: 인물, 정물, 풍경’에서는 한국 구상 미술의 대표 화가 이봉상, 손응성, 박수근 등의 영향을 받으며 여러 소재를 대상으로 예술적 방향성을 모색하는 과정을 다룬다. 두 번째 섹션 ‘풍경의 발견’에서는 작가가 점차 풍경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포착한 여러 경관을 살펴본다. 세 번째 섹션 ‘사계의 빛’에서는 작가가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그린 한국의 순수 자연을 섬세한 빛의 묘사를 통해 사실적으로 담아낸 풍경화를 선보인다. 네 번째 섹션 ‘자연의 소리’에서는 1990년대 이후 작가가 제주에서 자생하는 억새와 유채를 대상으로 집약되고 응축된 화면을 보여주고자 새로운 구상 미술의 가능성을 여러 측면에서 모색했던 시기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탐색: 인물, 정물, 풍경 박광진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 한국 아카데미즘의 영향 아래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통해 예술적 방향성을 모색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수채화에 매료된 그는 서울 사범학교에서 이봉상에게 수업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미술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각주 2) 그의 첫 유화 작품인 ‘창경원 입구’(1952)는 이봉상이 사용한 캔버스에 덧그린 것으로, 스승의 색채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 진학한 박광진은 비원파 창시자인 화가 손응성에게 사사하며 예술적 정체성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손응성의 영향을 받아 불상, 자기, 꽃 등과 고궁을 소재로 작품을 그렸다. 그는 손응성의 그림 보조로 박물관에서 사생하던 중 고미술품 전시실을 배경으로 반가사유상과 기마인물형 토기, 청동 정병 등을 묘사한 ‘국보(國寶)’(1952)를 완성했다. 이 작품으로 제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하며 미술계에 등단했다. 박광진은 옛 문화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장소로 궁궐을 택했고, 이곳에서 사생을 시작했다.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전당포, 담배 가게, 일제강점기부터 수제화 거리로 알려진 염천교 다리 등으로 영역을 넓히며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풍경을 찾았다. 특히 그는 이웃이었던 서양화가 박수근과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 인터뷰(각주 3)에서 박수근이 초가집이나 농부를 많이 그릴 때, 자신은 홍익대학교 근방을 사생했다고 설명했다. 이때 그렸던 ‘담배가게’(1956)는 유화를 활용해 홍익대 학생들의 담배를 사기 위해 들렸던 초가집 노점을 담은 졸업 작품이다. 더불어 이 시기에 그는 보문동과 혜화동 등 여러 장소를 다니며 인물과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다. ‘보문동 전당포’(1956)는 당시 많은 작가가 물감을 살 돈을 구하기 위해 자주 찾았던 곳으로, 그들의 일상과 생활 감정을 반영했다. 작가의 시선과 재료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닭장, 토끼장 같은 향토적 소재를 활용하고, 자화상(1964),(각주 4) 여성 좌상 등을 그리며 고전주의, 인상주의, 사실주의 화풍을 시도했다. 고색(古色)을 사용하거나, 건필로 색을 덧바르거나, 붓질의 속도에 변화를 주는 등 여러 기법을 실험했다. 특히 그는 ‘파고다 탑’(1957), ‘해바라기’(1961) 등에서 주변을 생략하고 가까운 대상이나 그 일부에 집중했고, ‘토끼장’(1962)에서는 가축우리의 사각 격자무늬 구도를 사용해 전통적 원근법에서 벗어난 독특한 시선을 선보였다. 이는 이후 작품의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전시 제목 ‘자연의 속삭임’은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비롯됐다. 2. 박광진은 서울 사범학교 재학 당시 이봉상 외에도 서양화가 권옥연, 류경채 등의 미술 수업을 수학한 바 있다. 3. 서울시립미술관, 박광진 화백과의 인터뷰, 2024년 10월 31일. 4. 유일한 자화상이다.
공간의 재현, 권력의 탐구
전시장 하나를 상상해보자. 관객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눈길을 외면하는 작품들, 무심하게 툭 펼쳐져 있어 의도를 알 수 없는 공간들, 안내판 하나 없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놓여 발견조차 어려운 설치물들. 이런 전시장을 활보하다 보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간 방문했던 전시장들이 어땠는지 회상하며, 관객과 작품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이어 깨닫는다. 관객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듯, 작품 또한 관객에게 반드시 친절히 제 의도를 보여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처럼 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실을 뒤집는, 체계와 조건의 전복은 엘름그린(Elmgreen)과 드라그셋(Dragset)이 자주 사용하는 기법이다. 이들은 전복을 통해 그 안에 내제된 권력의 구조를 탐구하는데, 그 매개로 ‘장소’를 애용한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지하는 공간과 구조물, 그리고 이에 주어진 기능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한 의미와 위계질서가 파생되는 현장이라는 인식과 의심에서 비롯”(각주 1)된 것이다. 이러한 ‘공간’은 이번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린 ‘스페이스(Spaces)’(2024. 9. 3. ~ 2025. 2. 23)의 전시명 그 자체이기도 하다. 올해는 1995년부터 아티스트 듀오로 작업해온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이 협업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스페이스 전은 둘의 공간 작업을 한 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전시 제목에 어울리도록 실제 크기에 버금가는 대형 수영장, 집, 레스토랑 자체를 전시장에 들였다. 누군가는 실제와 같은 공간을 전시장에 옮기는 게 과연 예술이냐 물을 수도 있다. 이에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답한다. “우리는 균질화된 전시 공간을 완전히 다른 환경으로 전환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이를 통해 관객은 본래 정체성을 위장시킨 새로운 조건과 상황에서 작품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각주 2)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엘름그린 & 드라그셋 개인전 ‘어댑테이션(Adaptation) 소개글 중 2. 탁영준, “엘름그린 & 드라그셋 작품 속 신체와 공간”, 『신세계 매거진』 44호, 2022.
보이지 않는 조경
지난 2월 19일, 그룹한빌딩 2층 환경과조경 세미나실에서 제7회 젊은 조경가 원종호 소장(JWL)의 온라인 토크쇼 ‘보이지 않는 조경’이 개최됐다. 유튜브 생중계 형식으로 열린 토크쇼는 1부 강연, 2부 질의문답 순으로 진행됐다. 강연은 간단한 자기 소개로 시작됐다. 원종호는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조경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대학원 졸업 후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 현대건설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에 합류한 과정을 설명했다. 이어서 토크쇼 제목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특집 ‘조경가 원종호’(『환경과조경』 2025년 1월호)의 다섯 가지 키워드는 설계를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와 제 동료들이 추구하는 비가시적인 작업을 가장 잘 드러내는 키워드”라며 직관적이고 단순한 개념과 배치, 사소한 생각과 조형의 가능성, 크래프트, 관성에의 저항, 팀워크, 협업의 힘에 대해 말했다. 원 소장은 상암동 JTBC 신사옥, 성수동 코너 50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그가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누군가 우리의 프로젝트를 보고 ‘설계한 게 뭐가 있어?’라고 묻기도 하지만, 많은 고민과 생각의 결과물이다. 개념과 배치를 풀어가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주로 단순하고 직관적인 개념과 배치를 활용하며, 직선이나 돌과 수목 캐노피를 통해 공간의 구조미를 강조한다”고 말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기웃거리는 편집자] 빛나는 북극성을 향해
하마터면 금 기자가 아니라 금 주사나 금 선생이 될 뻔했다. 취업 준비 시절 지인은 섬마을 시골 분교 국어 선생님 관상이라며 내게 선생님을 권유했다. 고향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넘치는 아버지는 내게 백수의 삶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는 면사무소 주사가 되기를 원하셨다. 모두 훌륭한 직업들이지만, 이상하게도 끌리지 않았다. 시골의 감성을 너무나도 좋아하지만, 각종 놀거리와 볼거리가 넘쳐나는 서울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말은 제주로 가고,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속담을 핑계 삼아 서울의 삶을 계속 영위하고 싶었다. 이러한 내가 기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인터뷰’ 때문이었다. 아는 선배의 권유로 웹진의 대학생 에디터로 잠깐 일하며 인터뷰 기사를 써볼 수 있었다. 당시 지금처럼 힙하지 않았던 한 동네의 카페들을 팝업 스토어로 활용한 전시에 참가한 예술가를 인터뷰하는 꼭지를 맡았다. 내밀 명함조차도 없는 초보였지만 열심히 그들을 인터뷰했다. 밥값이나 벌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참 즐거웠다. 버려진 철사로 만든 설치물로 환경 보호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치미술가, 명상과 숨소리에서 영감을 얻는 화가, 문 닫은 동네 공장의 문을 추상화처럼 담아낸 사진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철학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서사도 흥미로웠지만,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열정이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 울림이 기자란 일을 선택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마치 숲에서 오랫동안 헤매다 마침내 길을 안내하는 북극성을 발견한 기분이라고 할까. 기자가 된 이후에도 그 시절을 떠올리며 새로운 북극성을 찾는 마음으로 인터뷰집을 꾸준히 모아왔다. 그중 좋아하는 책을 한 권 꼽자면 바로 『일하는 예술가들』(2018)이다. 소설가 강석경이 장욱진, 김중업 등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했던 근현대 예술가의 철학과 작업을 섬세한 언어로 풀어 낸 인터뷰집이다. 잠언집이라 해도 좋을 만큼 밑줄 치고 싶은 예술가들의 답변이 많지만, 그보다 인터뷰를 소설처럼 풀어낸 방식이 더 흥미로웠다. 정확히는 소설처럼 인물의 삶과 서사를 해체했다고 할까. 등장하는 예술가들의 삶에 대해서 말하지만, 오롯이 그 사람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삶에 작든 크든 영향을 주었던 주변인들을 소설의 등장인물처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복선을 활용해 서사를 구성했다. 또한 인터뷰란 장르의 특성을 놓치지 않고 자기만의 해석을 더해 한층 더 입체적으로 인물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가령 단순한 도상에 오롯이 집중하며 그림을 그렸던 장욱진의 미학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생략의 예술가로 자주 얘기 된다. …… 춤은 언어의 생략이고, 시는 산문의 생략이며, 소설은 인생의 생략이다. 그림은 마음의 생략이라고나 할까.” 문득 세심한 언어로 탁월한 해석을 내놓았던 작가에게 열다섯 명의 예술가를 만난 후의 소회를 묻고 싶었다. 이제는 하나의 역사가 된 거장들의 작업과 철학을 육성으로 들으며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했다고 할까. 그 답변을 서문에서 어렴풋하게 들을 수 있었다. “물은 깊은 밤에도 저 혼자, 혼자 흘러내리며 자신을 정화시킨다. 끊임없이 흐르면서 맑음, 자기본질을 지키는 물의 속성을 닮고 싶다. 예술가란 바로 세상의 가치에 안주하지 않고 물처럼 쉼 없이 자신을 씻으며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이번 호 특집(16쪽)은 이처럼 건축과 조경 분야에서 ‘일하는 예술가’들을 모아 공모의 문제점을 진단하며 공모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봤다. 이를 통해 잠시나마 공모의 본질과 공모의 미래 방향에 대해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탈도 많고, 문제도 많고,숙제도 많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을 야기하는 문제를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도외시하거나, 남들도 다 한다는 이유로 도의를 저버린 수단을 강구하고, 세상의 불의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더 어두워진다. 그래서 이번 특집이 어긋나버린 공모의 문제를 직시하고, 좋은 공모, 나아가 좋은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목적지로 가는 작은 길잡이가 되길 바라본다. 어두울 때 가장 빛나는 북극성처럼.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대단찮은 기록이 만든 무수한 접점과 다양한 변경이 조경의 외연을 넓히고 사물과 인식 사이에서 끝없이 우리를 흔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편집위원 회의를 마친 뒤 뒤풀이로 곱창집에 간 적이 있다. 완벽한 내향인인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임무가 주어졌으면 해서, 곱창 굽기에 일가견이 있다는 남기준 편집장의 손에서 집게라도 뺏고 싶었다. 긴장한 날 가여워한 것인지 누군가 물었다. “김 기자는 왜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숱하게 고쳐 쓴 자기소개서의 지원동기 항목을 읊으면 될 일었지만, 질문자가 내가 늘 ‘글은 이런 사람이 쓰는 거구나’ 생각했던 이수학 소장(아뜰리에나무)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는 관심사가 넓으며 박학다식하고 수많은 책과 영화를 볼 뿐 아니라 깊이 소화해 자신의 언어로 내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함부로 입을 뗐다간 속이 텅 빈 사람이라는 걸 들킬까봐 우물쭈물하는 사이 다 구워진 곱창을 입에 욱여넣는 걸로 상황을 무마했다. 그런 이수학 소장에게서 격주에 한 번씩 편지를 받는다. 아뜰리에나무(이하 나무)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 ‘나뭇잎’이다. 첫 뉴스레터는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는데, “여행지 한켠에서 급하게 휘갈겨 쓴 엽서처럼 또는 하고픈 말 다 묻어두고 주소만 덩그러니 있는 그림엽서처럼 난데없고 하릴없지만 이 작은 소식지로 조경이 맞닿은 일상과 일에 때로 가볍고 어쩌면 느리게 낙하해 볼까 합니다”라는 인사말을 마주하고서는 몽롱해졌다. 편지는 아날로그로 써야 낭만적이라는 생각은 다 편견이었다. 바람에 나뭇잎 부딪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뭇잎’은 조경과 경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길을 걷다 만난 풍경은 물론 책과 영화 속 경관도 다룬다. 나무의 설계 프로젝트도 소개하는데 좀 독특하다. 설계 철학과 해법을 설명하기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설계와 경관에 어떻게 투영했는지 이야기한다. 나무에게 설계는 “세상과 관계 맺고”, “세상과 얘기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전하는 꽃나무 이야기는 내가 발신자와 같은 계절을 보내고 있다는 걸 실감케 한다. 다이어리의 아무 페이지에 그린 손그림에는 디지털 도면에서는 볼 수 없는 손을 떨며 그린 듯한 선이 있는데, 그 떨림에 고민이 묻어 있는 듯해서 들여다보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나뭇잎이 ‘뉴스’가 아닌 ‘레터(편지)’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편지는 ‘디자인 4제’ 시리즈의 데크 편. 데크라는 단어의 의미가 갑판(16세기)에서 부두나 승강장의 나무로 된 평평한 바닥(19세기)으로 확장되어 “집에 딸린 ‘목재 테라스’가 떨어져 나와 공원이나 정원의 시설물로서 지금과 같은 뜻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일 것”이라 추측하며 데크의 역사와 그 역할에 대해 설명한다. 어릴 적 툇마루에서 평상으로 이어지는 기억 덕분에 데크를 좋아하게 됐다고 고백하는데, 생생하게 묘사한 풍경이 참 인상 깊었다. “한옥의 구조를 흉내 낸 그 집에서 마루는 내부도 외부도 아닌 중간 영역으로 앞뒤가 늘 열려 있어 바람 불면 좋고 비 오면 더 좋았다. 툇마루는 햇빛의 자리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시간과 계절에 따라 농도를 달리하여 끝없이 하릴없게 만들었다.” 이수학은 데크를 바닥 데크와 뜬 데크로 분류한다. “바닥으로서 데크는 땅의 표면으로 재료의 물성을 통해 영역을 나눈다. …… 지면에서 최소한의 높이 이상으로 떠 있는 데크는 지면에 붙은 데크와 달리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전이한다. …… 눕고 뒹굴다 엎드리고 자다 깨는 데크는 풀밭의 연장이고 무심한 하늘 밑이다.” 이어지는 나무의 데크 목록. 바닥 데크: 평평한 데크(사각데크, 둥근데크), 기울어진 데크(긴데크), 뻗어나간 데크(먼데크, 얹혀펼친데크, 바람자리), 스탠드로 연장된 데크(접힌데크), 뜬 데크: 평평한 데크(둥근데크, 모꼴데크), 기울어진 데크(너른긴데크), 놀이를 위한 데크(놀이데크), 계단이 연장된 데크(물가데크). 하나의 주제를 다양하게 풀어내는 솜씨가 웬만한 무크지 편집자보다 낫다. 이걸 공짜로 봐도 되나 이상한 죄책감이 든다. 조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 관심을 갖게 하는 데는 이런 소식지가 제격이지 않을까 싶다. 이수학은 기록을 다루는 특집에서 말했다. “개개인이 엮어 묶은 작업의 기록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사적인 사건이고 시간일 뿐이지만, 그 대단찮은 기록이 만든 무수한 접점과 다양한 변경(邊境)이 조경의 외연을 넓히고 사물과 인식 사이에서 끝없이 우리를 흔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각주 1) 좀 더 많은 사람이 ‘나뭇잎’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각주 정리 1. 이수학, “기록하다”, 『환경과조경』 2024년 7월호, p.21.
[COMPANY] 도시민의 건강한 라이프스타일 ‘창사원’
은퇴한 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교외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며 사는 삶. 전원 생활은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이 꿈꾸는 제2의 삶의 형태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과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도 전원이 마냥 행복할 수 있는 이상향으로 여겨질까. 도시 밖에서 생활해 본 적 없는 이들에게 한적한 시골은 자연을 가까이에서 즐기며 자급자족할 정도의 가벼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인 동시에, 낯설어서 조금 두려운 장소다. 하지만 농사라는 생산적 여가 활동을 즐기려는 도시민의 갈망은 주말 농장 같은 형태로 발현되고 있다. 과연 작물을 키우고 수확하며 성취감을 느끼고, 자연에 대해 배우는 기쁨은 도시를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일까. 창사원, 세계 최초의 궁중 온실을 계승하다 창사원(蒼笥園)은 ‘푸른 정원’이라는 뜻으로 세계 최초의 온실인 ‘창사루(蒼笥樓)’에서 따왔다. 1450년경 문헌인 『산가요록(山家要錄)』에 따르면, 조선시대 조상들은 창덕궁 후원에 창사루를 지어 한겨울에도 꽃과 채소를 재배해 왕실에 공급했다. 이는 1619년 만들어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온실보다 무려 170년이나 앞선 기록이다. 역사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가 덕임에게 애정을 담아 감귤을 건네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과일나무까지 키울 정도로 발전한 온실 전통이 조선 초기에서 후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선의 요리책 『산가요록』의 ‘동절양채’ 부분에는 창사루의 조성 원리가 쓰여 있는데,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온돌 위에 흙을 30cm가량 깔아 겨울에도 흙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했다. 온돌을 데우는 아궁이 위에 가마솥을 걸어 물을 끓이고 그 수증기를 창사루 안으로 들여 적정 습도를 유지했다. 천장에는 기와 대신 들기름을 몇 겹 바른 한지를 덮어 햇빛을 들이되 비와 눈을 막았다. 온실의 3대 요소인 난방, 태양광, 온습도를 모두 갖춘 셈이다. 팜한농은 이러한 창사루의 전통과 기술을 계승하여 일상에 지친 도시민들에게 색다른 고객 경험을 제공하고자 특별한 온실 공간을 연암대학교(충남 천안)에 구현했다. 창사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국적 색채로 디자인된 온실에서 여러 가지 과채류를 동시에 분양받아 재배해볼 수 있고. 창사원 라운지에서는 직접 재배한 작물을 이용한 쿠킹 프로그램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원하는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환경 창사원은 환경을 생각하는 에너지 절감 시스템, 양액 순환 시스템, 최적의 재배 환경을 통해 도심에 적합한 친환경적 온실형 농장을 제공한다. 지열을 이용한 시스템은 가스보일러 대비 운영 비용을 82% 절감하고, 순환식 양액은 환경오염을 방지한다. 계단형 재배기와 LED를 탑재한 수직형 재배 모듈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과 생산에 최적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보기에도 아름답다. 멀티3 시스템 윈도우는 작물 재배에 악영향을 미치는 곰팡이와 박테리아의 주 원인인 결로를 외부로 자동 배출한다. 무엇보다 창사원의 가장 큰 장점은 온실과 창사원 애플리케이션 그리고 취향을 같이하는 커뮤니티가 모바일로 연결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앱을 이용하여 작물 분양을 신청하면 작물을 키우고 싶은 위치까지 선택할 수 있다. 온실 내부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창사원 로봇 ‘워니’는 매일매일 작물 사진을 찍어 모바일로 전송해 고객이 좀 더 농장 가까이에서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햇빛, 물, 온도, 습도가 자동으로 조절되고, 자주 방문하지 못하는 고객을 위해 창사원의 식집사들이 손수 작물을 관리한다. 작물 재배 일지를 쓸 수 있는 식집사 다이어리, 작물 재배 팁을 알려주는 온실 알리미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고객 맞춤형 서비스로 일종의 작물 재배난이도 조절도 가능하다. 도심 어디에나 파고들 수 있는 도심형 팜, 새로운 유형의 공공 공간을 제시하다 창사원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공간 이상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바로 공간에 침투해 주변과 상호작용하며 시너지를 내는 콘텐츠가 되는 것. 창사원이 들어설 수 있는 장소는 무궁무진하다. 쓰이지 않는 건물 옥상을 직접 재배한 작물로 만든 샐러드를 즐기는 루프탑 카페로 바꿀 수 있다. 고층 주거단지 하부에 창사원을 들이면 다양한 공동체가 함께 작물을 재배하며 서로 소통할 수 있고, 먼 곳으로 외출이 어려운 교통 약자도 식물을 기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시니어 타운에 들어선다면, 노인들의 자연스러운 신체 활동을 유도해 건강을 도모하고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통해 정서적 안정 효과를 낼 수도 있다. 만약 창사원이 공원에 들어선다면 어떨까. 최근 여러 공원이 녹지와 쉼터로 구성된 공간을 넘어 다양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일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2022년 새 단장을 한 파리공원에는 ‘살롱 드 파리’라는 건물이 있다. 이곳에서는 프랑스 문화원과 연계한 프로그램이 열리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전시가 진행된다. 양천공원의 책 쉼터는 비가 오는 날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공원을 향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도시공원에 들어선 온실형 농장은 공원과 한데 어우러져 수확의 기쁨뿐 아니라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와 이치를 배우는 장소가 될 것이다. 창사원이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궁중 온실에 대해 학습할 수도 있다.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사람들이 자연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경험한 바 있다. 식물집사, 반려식물 등의 키워드가 연일 트렌드로 떠올랐다. 최근 교외의 북적이는 온실형 카페는 여전히 사람들의 식물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하지만 온실형 카페 대부분은 보기 좋은 관엽 식물과 꽃을 관람하는 데 그친다. 도심형 팜은 식물을 키우는 재미뿐 아니라 이를 수확해 먹는 색다른 경험까지 느낄 수 있는 콘텐츠다. 이와 연계된 쿠킹 클래스, 재배 교육, 나눔장터 등 계절별로 열리는 색다른 이벤트는 창사원을 재방문하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글 김모아 사진 팜한농 **각주 정리 1. 그린 바이오 기업, 팜한농. 1953년 창립하여 2016년부터 LG그룹과 함께한 팜한농은 국내 1위의 그린 바이오 기업이다. 오랜 경험과 앞선 기술력으로 작물 보호제 시장 점유율 1위, 종자 및 비료 시장 점유율 2위를 달성하며, 한국 농업의 경쟁력을 향상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일상에 지친 도시민들에게 도심형 팜을 통해 새로운 고객 경험을 선사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반려동물 가족을 위한 반려견 놀이터, 바우
국내 반려동물 양육 인구가 1,500만 명에 육박하면서 반려동물은 단순히 기르는 동물이 아닌 온전한 가족 구성원으로 자리 잡았다. 애견인의 증가로 인해 애견인을 위한 다양한 공간도 함께 늘어가는 추세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이용자 중심의 공간을 만드는 토인디자인은 견주와 반려견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반려견 놀이터 ‘바우(BAU)’를 선보이고 있다.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특징인 바우는 맞춤형 제작이 가능하며 전문적인 훈련 시설을 갖추고 있다. 허들과 점프 시설은 소형견부터 대형견까지 모두 이용할 수 있게 제작했다. 도그워크, 에이프레임, 위브폴스 등 국제애견연맹의 장애물 통과 시설 표준에 맞춰 설계된 전문적인 애견 훈련 시설로 구성했다. 시설을 트랙형으로 배치하면 자연스럽게 훈련을 이어나갈 수 있다. 또한 반려견의 배설물을 위생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배변 봉투 보관함과 목줄을 걸어 견주와 반려견이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애견 벤치 등 편의 시설도 제공한다. 반려견 훈련과 함께 동반 가족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놀이 공간은 일상 공간에서 생길 수 있는 비애견인과의 갈등을 줄이고, 성숙한 애견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긍정적 도움을 줄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반려동물 놀이 공간은 행복한 반려동물 가족을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TEL.02-533-3720WEB. www.toinpl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