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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설계공모의 난맥을 되짚어보며
    설계공모라는 네 글자는 언제나 기대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설계공모가 생각만큼 꿈과 낭만의 보물 상자인 것만은 아니다. 성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경쟁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과정과 결과를 둘러싸고 의혹과 불신이 끊이지 않는다. 설계공모의 목적은 좋은 설계안 또는 설계자를 뽑는 데 있다. ‘좋은’은 ‘독창성 뛰어난’이나 ‘실험성 강한’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어휘로 대체할 수 있다. 주최자의 의도를 대변하는 설계 지침서들을 보면 “○○를 ○○할 수 있는 ‘독창적’ 아이디어와 디자인을 구한다”는 공모 목적이 예외 없이 쓰여 있지만, 말 그대로 독창적이기만 한 제출작은 당선되기 쉽지 않다. ‘좋은’의 자리를 경제성, 합리성, 공공성 같은 가치가 차지하는 설계공모도 적지 않다. 하지만 경제성은 값싼 재료와 시설, 합리성은 뻔한 디자인, 공공성은 실체 없는 말 잔치로 귀결되는 예가 허다하다. 설계공모의 성과물을 누릴 주체는 당선작에 따라 실현될 공간의 사용자들이지만, 그들이 공모의 과정에 개입할 기회는 매우 드물다.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는 출품자, 주최자(또는 그를 대리하는 전문위원), 심사위원 정도다. 세 배역을 조금씩이나마 맡아본 경험담을 나누고자 한다. 설계공모의 꽃은 게임의 선수인 출품자다. 나는 자신을 조경가가 아니라 이론가 또는 비평가로 정의하고 있지만 아주 드물게 공모전에 출품한 적이 있다. 다양한 인력으로 구성한 팀의 일원으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거나 전반적인 디자인 개념을 잡는 데 조력하는 역할을 했다. 불확실한 경쟁의 장에 뛰어드는 일이었음에도 초조함이나 불안감보다는 엔돌핀이 샘솟는, 아주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자신의 디자인 아이디어와 해법을 실험할 수 있다는 기대,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거나 적어도 공론화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테다. 당선의 기쁨을 맛본 적은 없다. 억울하진 않았지만 아쉬움은 컸다. 무엇보다도 패인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패인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주최자나 심사위원회가 제출작과 최종 경쟁작에 대해 상세한 리뷰를 제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몇 줄의 형식적인 심사평이라도 발표되면 다행이다. 대부분의 패자는 작품 외적인 모종의 상황 때문에 당선되지 못한 것이라고 의심하며 분루를 삼킨다. PA(Professional Advisor)라고도 불리는 설계공모의 전문위원은 주최자의 대리자 역할을 한다. 설계공모가 갑자기 늘어난 2000년대 중반 무렵 국내에 도입된 제도다. 나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광교신도시 호수공원, 동탄신도시 워터프런트, 용산공원 등 몇몇 국제 설계공모의 전문위원단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복잡하지만 도전적인 일이었다. 전문위원단은 설계공모 전반을 기획하고 설계 지침을 쓰고 제공 자료를 만들고 심사위원을 섭외하고 심사 과정을 진행한다. 지명 공모라면 지명 초청자를 선정해 섭외하는 일도 해야 한다. 홍보, 의전, 전시 기획, 작품집 출판까지 관장해야 한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경험은 주최자가 공모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였다. 대상지를 무엇으로 어떻게 쓰겠다는 명확한 의도 없이, 원하는 설계안과 설계자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도 없이 행정 절차의 하나로 공모를 맡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공들여 설계 지침을 작성해도 머릿속에 그렸던 작품이 제출되지 않는 때도 많았다. 지침을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일 테다. 심사위원으로 초대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작품 자체보다 태도와 스타일에 초점을 두고 심사를 하거나 난데없는 국가 대항전, 감정적 민족주의의 대리전을 펼치는 등, 심사 과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다시 하라면 가장 하기 싫은 배역은 심사위원이다. 나에겐 출품자가 몇 달씩 집중하고 몰입해 제출한 성과를 단 몇 시간 안에 평가할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심사에서는 ‘이 작품은 직선이 많아 생태적이지 않다’, ‘저 작품은 정자가 있으니까 한국적이다’라는 수준의 주장이 토론을 주도했다. 첨예한 이권이 걸린 공모에서는 공정성 보장과 투명성 확보를 구실로 심사자 간 토론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네킹처럼 다소곳이 앉은 심사위원들이 자신의 채점표에 점수만 매기는 풍경이 생중계됐다. 심사위원을 맡기 난감한 더 큰 이유는 인간관계다. 심사위원 후보로 예상되면 선후배와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 생전 본 적 없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친다. 전화기를 꺼놓아도 소용없다. 연구실 문을 잠그고 없는 척해야 한다. 제출작 제목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오는가 하면 패널 이미지 파일이 카톡으로 날아들기도 했다. 설계공모 기획, 설계 지침서 작성, 공모 운영, 심사위원 선정, 심사 진행, 공모 이후 당선작 구현에 이르는 프로세스 전반을 다시 디자인하고 공론의 장에서 토론할 시점이다. 이번 호에는 다섯 명 필자를 초대해 특집 지면 ‘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를 꾸린다. 최영준(서울대학교 교수)은 한국 현대 조경의 지형 속에서 설계공모가 변천해온 과정을 살피고, 좋은 설계공모의 기준으로 기획자의 선 설계, 참여자의 본 설계, 관람자의 설계 인식을 꼽는다. 이해인(HLD 소장)은 참가 자격, 심사 공정성, 의사 결정 방식, 당선작의 구현 보장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설계공모의 정상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안한다. 이승환(아이디알 건축사사무소 소장)은 설계공모의 공정성을 둘러싼 문제를 다각도로 짚는다. 일부 설계사무소의 당선 독점, 심사위원 사전 접촉과 로비 등 불공정 문제를 검토하고, 심사위원 선정 및 사전 공개와 관련된 현실적 개선 방안을 논의한다. 정평진(스코어러 대표)은 ‘스코어러’ 데이터베이스와 심사위원 인터뷰집 『코멘터리』 0호를 바탕으로 국토교통부의 설계공모 운영 지침, 심사위원 위촉과 구성, 당선 결과의 양상, 올바른 심사의 기준 등을 검토한다. 임유경(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은 건축공간연구원의 연구를 토대로 공공 프로젝트 설계공모 이후의 설계 변경과 공사 부실 문제를 살피고, 이상과 실제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 2024년 1월부터 이어온 신명진의 연재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를 맺는다. 도시의 공원을 일상의 장으로, 관심의 공간으로, 다시 연구의 대상으로 경험해온 한 밀레니얼 박사의 이야기에 그간 많은 독자의 호응이 있었다.15회에 걸친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 [풍경 감각] 손쉬운 다이어트법
    아침 수영을 마치고 체중계에 올라선다. 어라, 뜻밖의 몸무게다. 수건으로 몸에 남은 물방울을 꼼꼼히 닦아내고 뜨거운 바람에 머리카락을 바짝 말린 뒤 다시 잰다. 마찬가지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무게에 한해서는 언제나 최고 기록을 갱신하는 중이다. 다른 체중계로 재면 다를지도 몰라. 집으로 돌아와 체중계를 꺼낸다. 계기판이 흔들리며 높은 숫자 중 하나를 고르려고 해서 재빠르게 내려온다. 그리고 저울을 옮긴다. 벽에 기대어 세워두고 발로 밀어 몸무게를 잰다. 7㎏ 남짓. 바늘 끝이 아주 가볍다. 다이어트 그까짓 것, 정말 쉬운 일이다. 1월마다 결심해온 체중 감량. 올해는 해낼 수 있을까. 그래도 바늘이 가리키던 숫자처럼 마음이 가볍다.
  • [우먼스케이프] 카트린 드 메디치와 디안 드 푸아티에 슈농소 성의 두 여인
    여인들의 성 프랑스 루아르 지방에 가면 동화에나 나올 법한 성이 줄지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 것이 슈농소 성(Château de Chenonceau)이다. 슈농소 성은 마치 셰르(Cher)강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축조된 우아하고 독특한 건축물이다. ‘여인들의 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여인들의 손으로 빚고 완성하고 다듬기도 했지만, 여러 미망인의 한과 넋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 성에서 살다 간 여인들 이야기가 모두 흥미롭지만,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1519~1589)와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1499~1566)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두 여인 모두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으며 이 둘이 만들어 남긴 테라스 정원이 지금도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 정원은 사이좋게 나란히 존재하지만, 사실 두 여인은 연적이었다. 카트린은 앙리 2세(Henri II)(1519~1559)의 사랑을 받지 못한 왕비였고, 디안은 그의 영원한 연인이었다. 정실부인을 두고 젊은 정부를 얻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세 사람의 경우는 그것이 뒤바뀐 관계였다. 정부 디안이 왕비 카트린보다 스무 살이나 많았다. 카트린이 열네 살에 동갑내기 앙리에게 시집갔을 때, 이미 마흔에 가까운 디안이 앙리의 연인으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디안은 왕에게도 20년 연상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왕이 40세로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는데 그때 디안은 60세였다. 어떻게 그 나이 되도록 사랑받을 수 있었는지 많은 이가 지금도 궁금해 한다. 글쎄, 앙리 2세와 디안은 그저 연인 관계였을까? 왕에게 디안은 보호자였다가 연인이 되었고, 정치적 조언자이자 생의 동반자였으며, 여신과 같은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카트린과 디안의 경쟁 구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슈농소 성을 둘 다 탐냈으나 여기서도 디안이 이겼다. 앙리 2세가 죽은 뒤 카트린은 형식상 왕실 재산이었던 슈농소 성을 반환받아 그곳의 여주인이 되었으며 그 대가로 디안에게 쇼몽 성을 주었다. 쇼몽은 해마다 가든쇼가 개최되는 곳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성이다. 슈농소 성을 먼저 소유했던 디안의 삶과 그녀가 만든 정원부터 잠시 살펴볼까 한다. 디안 드 푸아티에 루브르 박물관에 다이애나 여신을 그린 유화 한 점이 있다. 전신상 크기인데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가 나체로 활을 손에 들고 활통을 맨 채 사냥개 한 마리를 동반하고 숲속을 걷는 장면이다. 이 그림의 모델이 디안이었다고 한다. 디안은 다이애나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1550년경에 그린 것이니 디안이 50세가 넘었을 때 모델을 선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플레이보이』 잡지 표지를 장식한 마돈나를 연상하면 될 것 같다. 평범한 외모의 카트린과는 달리, 디안은 빼어난 미모에 품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냉수욕을 하고 건강한 식단과 운동은 기본이었으며, 허브 추출물로 만든 천연 크림을 직접 고안해 피부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고 한다. 한편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며 사업 수완이 뛰어나 앙리를 설득해 슈농소 성을 선사 받았는데 성의 증축과 관리에도 철저했다. 당시 성이란 그저 화려한 거처에 그치지 않았다. 귀족들에겐 작물을 재배하는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디안은 주변의 땅을 사들여 영토를 넓히고 성 주변을 숲으로 둘렀으며 뽕나무를 잔뜩 심어 수입을 세 배로 늘렸다고 한다. 정원 만들기와 가꾸기에도 심취해서 당시 프랑스에선 아직 새로웠던 이탈리아 르네상스풍으로 12,000㎡ 규모의 테라스 정원을 조성했다. 이때 물속에 대를 쌓고 그 위에 정원을 만드는 대범함을 보였다. 중앙에 분수를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종횡의 축을 내고 다시 대각선의 축으로 나누었다. 이로써 모두 여덟 개의 구획이 탄생했는데 각 구획은 운동과 놀이 공간, 식재 공간으로 분류했다. 주변의 숲에 정원사들을 보내 9천 줄기의 야생 딸기와 제비 꽃 뿌리를 캐게 해 정원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수월한 관리를 위해 잔디로 구획을 채우고 토피어리를 심어 간소화했다. 디안은 원래 궁중에서 왕자를 돌보는 임무를 맡았었다. 조선시대와 비교한다면 동궁전의 상궁이었던 셈이다. 앙리가 아홉 살 되던 해 스페인에 볼모로 가서 4년간 머물렀던 일이 있다. 그때 스페인으로 떠나는 어린 앙리를 디안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는데, 앙리가 그 따뜻한 품을 평생 잊지 못했던 것 같다. 앙리의 젊은 아내 카트린에게 질투나 경쟁심을 느낄 필요가 없었거나 현명했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후사를 생각해 자신에게만 엉겨 붙는 앙리를 카트린의 침실에 들여보내 남편의 의무를 다하게 했다고 한다. 카트린은 앙리 2세와의 사이에서 열 명의 자녀를 낳았다. 디안은 재테크의 귀재여서 축적한 재산도 많았고 성도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기에 말년에는 자신의 성에서 조용히 살다가 1566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카트린 드 메디치 그 똑똑했던 디안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점이 있었다. 겸손하고 명랑하기만 했던 카트린이 두뇌회전이 엄청난 능력자라는 사실이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1519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부를 상속받아 너도나도 탐내는 신붓감이었다. 증조부인 교황 레오 10세의 보호 아래 친척들의 집에서 자라다가 잠시 수도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레오 10세의 뒤를 이어 카트린의 후견인이 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에게 카트린을 시집보냈다. 프랑스에서의 삶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카트린은 앙리를 보자마자 반했다고 하는데, 앙리는 카트린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그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막대한 지참금에 더해 밀라노를 넘겨받기로 했으나 후견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다. 밀라노를 넘겨주기는커녕 지참금도 지급하지 않았다. 이로써 지참금 외에는 볼 게 없던 카트린은 낯선 프랑스 궁중에서 완전히 찬밥이 되고 말았다. 인물이 뛰어나지도 않고 프랑스어도 서툴고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신분도 격에 맞지 않은 상인의 딸, 카트린을 피렌체로 돌려보내라는 소리가 높아졌다. 숙부의 배신으로 돌아가도 별 볼 일 없음을 알게 된 카트린은 홀딱 반한 앙리의 곁에 남기 위해 납작 엎드리는 전략을 취했다. 이를 본 프랑수아 1세가 카트린의 총명함을 간파해 총애했고 프랑스 궁중에 남게 했다. 왕위 계승자였던 태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카트린의 남편인 둘째 왕자 앙리가 왕으로 등극하고 카트린은 왕비가 된다. 그렇다 해도 처음엔 크게 달라진 바 없다가 열명의 왕자와 공주를 차례로 낳으며 카트린은 서서히 입지를 굳혀가기 시작했다. 당시엔 이탈리아가 문화적으로 프랑스에 월등히 앞서 있었다. 카트린은 시집갈 때 피렌체의 의상 디자이너와 요리사를 데리고 갔는데, 이들을 통해 세련된 패션과 우아한 생활 방식이 프랑스 궁중에 전파됐다. 그뿐 아니라 이탈리아 요리가 주목받아 후일 유명해지는 프랑스 요리의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카트린은 남편이 사망한 뒤 권력을 손에 쥐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드러내게 된다. 아들 셋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으나 일찍 죽거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까닭에 실제로는 카트린이 정치를 틀어쥐었다. 당시 프랑스는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고, 특히 종교 분쟁으로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이 매우 어지러운 격변의 시대였다. 게다가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높은 귀족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아들의 왕위를 지키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디치 가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카트린의 ‘정치 본색’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카트린의 차남 샤를르 9세가 통치하던 1572년 여름, 그 유명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 일어났다. 원래 구교와 신교의 화합을 위해 둘째 딸 마고를 신교의 지도자 앙리 드 나바르와 혼인시켰으나 그 혼인을 보러 온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에 처참한 살상이 시작되어 화합은 물 건너갔다. 종교 분쟁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을 뒤흔들게 된다. 1993년에 ‘여왕 마고’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영화 속에서 카트린은 검은 옷을 입은 악녀로 묘사된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일은 물론 아니다. 카트린의 슈농소 성 카트린은 슈농소 성을 가장 사랑하는 거처로 삼고 상당한 재정을 투자해 성을 확장하고 아름답게 꾸몄다. 디안이 이미 건설을 시작한 셰르강 교량을 완성하고 그 위에 2층짜리 갤러리를 추가해성의 독특한 외관을 완성했다. 1557년에 완공된 이 갤러리는 무도회장이 되었다. 카트린은 슈농소 성을 거처가 아니라 정치적 무대로 활용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화려한 연회와 행사를 자주 열어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과시했다. 1560년에는 아들 프랑수아 2세의 즉위를 기념하는 프랑스 최초의 불꽃놀이가 슈농소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디안에 대한 감정이 어땠는지 알 수는 없다. 주변에서는 디안의 코를 잘라서 내치라고 했다는데카트린은 그 대신 슈농소 성을 반환하라고 했다. 이에 디안은 그 대신 쇼몽 성을 달라고 요구했고 카트린은 이에 응했다. 부동산 가치로만 본다면 쇼몽 성이 훨씬 낫다. 그 사실을 카트린이 모를리 없었지만 슈농소 성을 빼앗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던 것 같다. 디안은 끝까지 유리한 거래를 한 것이다. 슈농소에 입성한 카트린은 바로 증축 작업에 들어간다. 우선 뽕나무 농장의 규모를 확장해 수익을 더 올리고 조류관을 지어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이탈리아에서 올리브 나무를 들여와 대량으로 심었는데 기후에 잘 적응했다고 한다. 디안의 정원은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둔 대신 한 귀퉁이에 도서관 겸 문서고를 지었다. 디안과 달리 카트린은 책을 좋아했고 지리학, 천문학, 물리학, 수학에 두루 지식이 풍부했다. 또한 건축적 재능도 뛰어나 파리의 튀일리 궁전과 정원 외에도 많은건축물 축조에 관여했다. 카트린은 5,500m²의 규모로 테라스 정원을 지었는데, 성 본채를 사이에 두고 디안의 정원과 마주 보는 형국이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사다리꼴이며 그 중앙에 커다란 원형 연못을 만들었다. 정원 가꾸기에는 디안만큼 관심이 크진 않았다. 테라스 정원에 어떤 식물을 심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다만 당시의 풍습대로 약초와 향기나는 식물을 심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금은 정원사들이 절기에 따라 경계 화단에 초화류를 심고 벽에 기대어 장미도 심어 두었다. 당시 유럽의 왕실이나 귀족들에게 백성이란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았다. 민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사소한 죄를 지어도 무지막지한 벌을 받았는데, 그들이 무자비하게 형벌 받는 장면을 구경하며 연회의 안줏감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묘사된다. 동양의 민民이라는 개념은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카트린이나 디안의 능력과 삶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볼 일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특권을 오로지 그 자체를 지키는 데 썼을 뿐이다.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프로이센의 공주로 태어나 바이로이트의 여주인으로 살았던 빌헬르 미네(Wilhelmine von Bayreuth, 1709~1758)다. 18세기 소위 계몽주의를 살았던 여인인데, 계몽이라는 관점에서 정말로 개선된 것이 있었을지 기대해 본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밀레니얼도 이미 옛날 이야기
    75%를 위한 공원 25%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21세기 말이다. 시간이 반드시 직렬로 흐르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근현대 교육의 수혜자에게 감지되는 시간이란 앞으로만 쏟아진다. 따라서 앞으로 21세기는 이제 75%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는 겨우 몇 년 만에 AI를 필두로 세상이 끝없이 변해 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다.(각주 1) 누군가는 그 변화의 선두에 서 있고, 누군가는 뒷자락에서 페이스 맞추어 가며 달려가고, 또 어떤 사람은 옆에 서서 이 행렬을 지켜보거나 곁눈으로 흘기고 있다. 한 심야 토크쇼의 호스트 존 올리버(John Oliver)는 몇 년 전 로봇 시대에 앞으로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판적 사고,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 사회적 지능을 요구하는 직업.” 다만 “우리가 아는 직업 중 이런 직업은 없고 이제부터 찾아봐야 한다”는 것이 해당 섹션의 안타까운(!) 결론이었다. 결국 자신의 머릿속을 까뒤집는 한이 있더라도 뿌리부터 다시 생각해야 된다는 이야기다. 여러 호에 걸쳐 조금씩 언급했지만,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격변하는 도시 사회를 위해 어떤 공원을 상상해야 하는가. 조경은 미래에 유의미한 업역으로 남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이용을 위한 공원은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될까. 에피소드 1. 단계적 MZ 거부 운동(과 그 외 소식) 너도나도 MZ라는 단어를 남발한다. 1988년생 밀레니얼로서 당당히 이 구분을 거부하는 바다. 한때는 기계 속 펼쳐진 세계에 열광했지만, 이제는 자우림의 노래 “20세기 소년소녀”(각주 2)를 흥얼거리며 ‘어린 시절의 갬성이 그리운’ 걸 보면 밀레니얼 시대는 이제야 ‘돌이켜볼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듯하다. 기술이 빠르게 변하고 사회도 그에 맞춰 가속도가 붙는 만큼 이 두 세대를 한 덩이로 잡아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일견 이해가 된다. 하지만 사회는 앞으로 전진하는 동시에 돌고 돈다. 나선형의 미래를 바라보며,(각주 3) 지금 조성되는 공원과 정원은 앞으로 얼마나 유의미할지, 또는 얼마나 ‘추후 재설계’의 여지를 두고 조성되어야 하는 것일지 궁금해진다. 단계별 조성으로 대표되는 조경의 리질리언스 실천이 그저 “기본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서 내외부의 혼란을 저항하는” “그저 버티는 것 뿐”인 설계 패러다임이라는 리차드 웰러(Richard Weller)의 비판은, 우리 시대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꼬집는다.(각주 4) 우리는 여전히 돌고만 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무섭다. 2. “비틀즈의 무지개, 오즈의 마법사, 듀란듀란의 노래”로 시작하는 이 곡은 사실 X세대를 위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을 읽고 자란 이들에게도 넌지시 울림을 준다. 3. 일본 애니메이션 ‘천원돌파 그렌라간’(2007)의 테마. 필자는 몇 번이나 돌려보고 한참 울었다. 4. Richard Weller, “The Landscape Project”, in The Landscape Project, Richard Weller and Tatum Hands eds., AR&D, 2022, p.11.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 [모두의 퍼니처] 토인디자인 지속가능한 쉼과 삶을 위한 디자인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쉼 흔히 현대 도시의 삶을 표현할 때 생존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지만 생존의 반의어를 생각하면 선뜻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는 현대 도시에서 생겨나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에너지의 응축을 해소하려는 조치로서 생겨났으며, 치유의 개념을 가진 대표적 도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현대 도시엔 생존보다 치유가 필요하다. 도시는 특유의 기능과 화려한 겉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질주하고 있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만 한다면 존재가 지속될 수 없다는 걸 도시의 구성원은 이제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멈춰야 할지, 어떻게 쉬어야 할지 막막함을 느낄 때도 있다. 답답한 일상이나 생업에서 벗어나 잠시 멈추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감정을 많이 해소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쉼’이라 부르지만 쉼의 형태는 사람들의 개성만큼 다양하고 계속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쉼’의 형태와 랜드스케이프를 결합하는 퍼니처를 연구하며, 자연과 가까워지려는 인간의 행위가 불편하지 않게 현대인의 생활상을 적절히 반영하고자 노력한다. 이는 조경이란 분야가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모두를 수용하는 유니버설 누구에게나 평등한 사회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사회의 최종적인 진화 형태이며 모두가 힘을 합쳐 마땅히 도착해야 할 종착지다. 하지만 현실은 추구하는 이상과는 거리가 멀고 21세기로 넘어온 지 20년이 지난 현재도 쉽지 않은 문제다. 예를 들어 조경 시설에 흔히 적용되는 계단은 휠체어로 진입할 수 없고, 테이블, 벤치 등 시설의 높이가 모든 사람이 사용하기에 적당한 높이인지 검증이 필요하다. 또한 일률적인 간격의 자전거 거치대는 다양한 크기의 자전거를 모두 수용하기 어렵다.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접근법이 중요하며, 이러한 것이 모든 종류의 의사 결정에 당연히 포함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환경과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사용자들을 최대한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려동물과 동행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영혼의 개념이 있는 영적 동물이다. 무리를 이루거나 짝을 찾아 함께하기를 원하며 인간의 심연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고독의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공동의 목표 또는 취향을 공유하기 위한 커뮤니티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생겨나고 성장하고 쇠퇴하고 있다. 인간의 최소 구성단위인 가족의 개념도 시대가 변화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다양한 형태로 적응하며 진화하고 있다. 개인의 일상을 공유하고 유대를 형성하고 안식처가 되어주는 동반자의 모습도 이제는 반드시 인간일 필요는 없다. 반려동물 양육 인구 천만 시대에 도달할 만큼 다양한 동반자가 출현하는 시대다. 이와 같은 현대의 동반자 형태는 공공 시설의 영역에서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요구에 발맞춰 반려동물이 인간과 조화롭게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진화하는 티하우스 조경 시설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단순히 휴식을 보조하는 옥외 시설, 산책로에 군데군데 놓인 벤치와 차양막이 있는 시설. 보통 떠올리는 과거의 시설들이다. 현재는 생활 방식의 변화와 기능의 세분화가 이루어지며 휴게 시설들이 변화무쌍하게 진화하고 있다. 특히 다수의 시민을 수용하는 공공 시설로 기능했던 퍼걸러는 이용 주체와 커뮤니티의 구성에 발맞춰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가령 냉난방이 가능한 실내 공간, 각종 모임을 지원하는 내부 가구들, 주변의 정취를 즐기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야외 테라스까지 건축과의 경계를 허무는 형태의 퍼걸러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복층형 티하우스는 신축 아파트 단지 내부 주요 공간의 랜드마크로 기능하는 공공 휴게 시설이다. 단순히 잠시 쉬어가는 시설로 활용됐던 과거의 퍼걸러들과 달리 주민들이 머물 수 있는 생활 공간의 개념을 담아냈다. 이용자의 편의성을 최대한 고려한 디자인을 통해 마치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고자 했다. 누구나 이용하는 슬로프 전망대 공공의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 중에는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보통 전망 시설은 각종 공원이나 명소의 주변 경관을 편하게 즐기기 위한 목적의 시설이지만, 누구에게나 접근이 가능한 시설은 아니다. 가령 전망대 진입 시 계단밖에 없는 공간에서 신체가 불편한 이용자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상층부로 올라갈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고려해 누구나 편하게 진입할 수 있는 배리어 프리 전망 공간을 만들고 있다. 2층 구조의 전망대형 퍼걸러인 스카이네스트는 기존 계단 진입부 외에 휠체어로도 올라갈 수 있는 경사의 슬로프를 만들고, 진입부 핸드레일에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판을 설치해 다양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누구나 차별 없이 시설에 접근할 수 있는 전망 공간을 만들고자했다. 진입 장벽을 낮춘 인피니트 트랙 올라타서 이용하거나 베어링으로 운동 범위가 제한적인 운동 시설은 획일적인 운동 형태를 제공해 이용자의 흥미를 감소시킨다. 이러한 운동 시설의 구동부 베어링은 소모품으로 지속적인 유지·관리가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발판이 있는 운동 시설은 물리적 제약이 있는 사용자에게는 높은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트랙형 운동 시설인 인피니트 트랙은 이러한 점을 보완했다. 지정된 발판에 올라가서 사용해야 하는 제약을 줄이고 방위나 높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본인의 체중과 근력에 맞게 운동의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모듈의 형태를 자유롭게 제작할 수 있어 맞춤형 구성이 가능한 시설로 사용 공간의 성격이나 주요 이용 계층에 맞게 조합해 각 공간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신개념 운동 시설이다. 베어링의 사용을 최소화해 유지·관리가 기존 운동 시설보다 용이하다. 자원 순환의 세덤 퍼걸러 첨단 기술과 자연이란 상반된 요소가 시대적 요구로서 공존한다.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꾀하는 시도로서 식재와 조합된 시설물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일상에서 벗어난 휴식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시설들은 플라스틱, 스틸 등 인공 자재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목재, 석재 등 자연적 소재를 우선적으로 활용하고 자연의 느낌을 연출할 수 있는 식재 등을 시설에 접목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세덤 퍼걸러는 빗물을 활용해 지붕의 식재에 관수를 하고 물탱크에 저장 후 남는 물은 수도꼭지를 통해 재활용할 수 있는 휴게 시설이다. 자원의 재생산 개념을 바탕으로 버려지는 물까지 다시 사용하는 자원순환을 통해 비용 절감 등 경제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게 했다. 반려동물과 조화를 꾀하다 반려동물 양육 인구 천만 시대에 가족 같은 동물들과의 동행은 시대적 흐름이다. 인간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공공 시설은 반려동물과 함께할 수 없기에 아쉬움이 생길 수 있다. 동행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시설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다양한 시설이 필요해지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 놀 수 있는 놀이대와 반려동물의 생활 패턴을 고려한 제품 개발을 통해 인생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반려동물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토인디자인은 토털 스트리트 퍼니처 디자인 브랜드로 트렌드를 고려한 현대적 감성의 디자인을 추구하며,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도시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자연을 보존하는 동시에 이용자에게 기능성과 편안함을 제공하며 빠르게 변해가는 삶의 방식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다양한 커뮤니티를 수용할 수 있게 돕는 스트리트 퍼니처를 만든다. 궁극적으로 주변 환경과 사회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이용자들의 이용 패턴을 연구해 지속가능한 인간의 쉼과 삶을 위한 디자인을 구현하고자 한다.
  • [에디토리얼] 코펜하겐, 조금 덜 익명적이고 때때로 연결되는 관계의 도시
    2025년 1월은 한 해를 새로 시작하는 설렘과 들뜬 기분이 전혀 없는 달이었다. 세간에 떠도는 ‘계엄성 수면 장애’나 ‘내란성 집중력 저하’ 같은 신조어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시절, 2월호를 여는 이 지면을 마감 직전까지 도통 채울 수 없었다. 편집부 기자들과 표지 후보안을 놓고 토론을 벌여 최종 선택을 하고 난 뒤, 에디토리얼 글감이 전혀 안 떠오른다고 한참 투정을 부렸다. 금민수 기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말했다. “관계도시 어떠세요?” 연말에 나온 신간 『관계도시』(돌베개, 2024)를 다뤄보라는 뜻이었다. 어, 금 기자는 출간 한 달이 채 안 된 책을 내가 이미 읽은 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어느 소셜미디어에 ‘이달의 책’으로 추천한 걸 본 걸까? 아무튼 체한 것처럼 꽉 막혔던 마음이 갑자기 뚫렸다. 그래, 답이 없을 땐 책이지. 그래, 책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요즘, 모처럼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은 책을 그냥 넘길 순 없지. 사나흘씩 세 번 방문한 게 전부지만, 다양성이 공존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대명사 코펜하겐은 언젠가 꼭 살아보고 싶은 도시로 내 버킷 리스트에 진하게 적혀 있다. 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의 눈으로는 쉽게 풀기 어려운 의문이 하나둘 아니었다. 도시 대부분이 고밀한 저층 공동주택 일색인데 어떻게 세련된 도시 경관이 가능한 걸까? 도심 한복판의 강가에서 자유롭게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는 풍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산업 시설이 점유했던 항구와 수변이 어떻게 시민들의 여유로운 여가 공간으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도심에 주차장이 거의 없고 우버조차 없는 도시가 이 시대에 정말 가능한 걸까? 시민 50퍼센트가 자전거로 등하교하고 출퇴근하는 모빌리티 혁명이 어떻게 성공했을까?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거나 더블 재킷에 로퍼를 신고 자전거로 출근하는 게 낯선 풍경이 아닌 비결은 무엇일까? 일간지 주말판 한구석에 실린 『관계도시』의 출간 소식을 발견하고 서점으로 바로 뛰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의 겉모습만 경험했던 여행자의 궁금증이 단번에 해소됐다. 코펜하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가 박희찬이 쓴 『관계도시』는 정보 중심의 도시 안내서도 아니고, 이론 위주의 도시설계 해설서도 아니다. 이 책은 코펜하겐의 도시 정체성과 매력이 다른 도시와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기보다는 ‘왜’ 다른지 드러내면서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다. 저자가 찾아낸 ‘왜’의 핵심은 책 제목에 강하게 박혀 있는 단어, ‘관계’다. 이 관계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자 사람과 집단의 관계이며, 사람과 이념의 관계이자 사람과 도시의 관계다. 복합적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관계의 성격을 명쾌하게 요약하는 말은 아마도 책의 부제인 “조금 덜 익명적이고 때때로 연결되는”일 테다. 즉 저자는 코펜하겐을 관통하는 도시성의 핵심을 ‘익명의 도시에서 조금은 덜 외롭고 모르는 타인과 이따금 연대하며 공동체의 삶에도 참여하는 일상의 관계’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도시의 일상과 주거 문화에 깊이 배어 있는데, 그 분위기를 대변하는 단어가 책의 첫 챕터에 나오는 ‘휘게(hygge)’다. 휘게는 덴마크어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말이라고 한다. 휘게에 해당하는 말을 찾자면 편안함(coziness) 정도겠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복합적인 뜻이다. 공간의 분위기는 물론 개인과 개인의 관계,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구성하는 핵심 개념인 휘게는 덴마크 특유의 가구 디자인, 건축, 도시, 경관을 관통한다. 코펜하겐 특유의 공동주택 문화와 경관은 “조금 덜 익명적이고 때때로 연결되는 관계”와 ‘휘게’의 공간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상생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협동조합주택과 사회주택, 오랜 전통을 가진 저층형 공동주택인 레케후스(rækkehus)(줄 지어 있는 집), 다용도 중정을 공유하는 집합주택 등에 관한 저자의 밀도 있는 설명과 섬세한 해석이 ‘관계도시’ 코펜하겐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이해하게 해준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자율 도시 ‘크리스티아나’의 존재가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거쳐 허용되었는지, 도시 확장 계획인 ‘핑거플랜’이 어떻게 도시에 자연을 제공하고 시민의 행복지수를 높였는지 등 정독해야 할 부분이 차고 넘치지만, 스포일러를 염려해 소개를 아껴둔다. 단 하나의 문장만 뽑으라는 어려운 숙제가 주어진다면, 나의 선택은 책 표지 사진의 캡션이라 할 만한 다음 문장이다. “코펜하겐 하버는 사람들이 여름철 휘게를 함께 누리는 거대한 ‘공동의 거실’이다”(84쪽). 본지가 주최한 2024년 ‘조경비평상’의 가작 수상작 “몰링하는 도시생활자”를 이번 호 지면에 싣는다. 기록을 뒤져보니 수상자 권정삼은 2007년 조경비평상에 평문을 제출한 적이 있다. 17년 만에 다시 조경비평가의 등용문에 도전한 수상자에게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풍경 감각] 그곳의 풍경은 어떤가요
    #1 하얗게 언 창문을 연다. 투명한 공기 너머로 북한산이 보인다. 뾰족 솟은 화강암 꼭대기에는 눈이 남아 있고 그 아래로 겨울 숲이 구불거리며 도시로 내려온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걸으면 산책하는 기분으로 정상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창가에 기대어 생각하지만 길을 나서지 않는다. 저 멀리 작은 계곡마다 드리워진 그림자가 크고 깊기 때문이다. #2 여름엔 하늘이 낮아진다. 구름이 인수봉과 백운대를 가릴 정도로 내려오곤 한다. 산꼭대기에 부딪친 습한 바람이 새 구름을 피워 내거나 작은 구름 조각이 골짜기 틈에 끼어 머무르는 날도 있다. 저 구름 속을 걷고 있을 누군가를 상상해본다. 그곳에서 보는 풍경은 어떤가요? 여기의 나에겐 구름인데 그곳의 당신에게는 안개로 보이겠군요. 모든 것이 뿌옇겠지만 조금만 더 오르면 정상이니 힘을 내길. 그리고 돌아와 알려 줄래요? 당신이 지나온 것이 구름인지, 안개인지 말이에요.
  • [우먼스케이프] 신라 선덕여왕
    두 번째 이야기: 신라 선덕여왕(각주 1) 사실 모험하는 기분이었다. 한국 여인들의 이야기도 함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가장 먼저 떠올린 인물이 선덕여왕이었다. 아마도 인상 깊게 본 드라마 ‘선덕여왕’(2009)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드라마를 보기 전 선덕여왕에 대한 내 지식은 첨성대와 향기 없는 모란꽃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러다 선덕여왕 드라마를 보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뭐야, 저게 다 신라의 이야기라고? 에이, 설마. 그러면서도 작가의 상상력을 부추긴 근거가 있을 것이므로 검색해 가며 봤다. 그때부터 틈날 때마다 한국사 공부를 다시 하고 있는데, 내 지식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그간 열심히 탐구하고 연구해 온 역사학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조사 중 정기호 교수(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 퇴임)가 쓴 첨성대에 관한 논문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경주 선도산에서 비롯해 동서로 뻗는 축과 동지 일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첨성대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석굴암과 경주의 축조물들은 극히 계획적으로 앉혀졌으며, 특히 첨성대는 국가 체계 수립 과정에서 왕도 건설의 의도적인 축 설정과 관계되어 있다고 해석했다.(각주 2) 첨단의 도시계획이다. 정기호 교수를 통해 선덕여왕 이야기의 진정한 실마리를 찾았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신라의 왕도 건설은 언제 시작됐고 어떤 이념 하에 계획됐으며 선덕여왕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질문의 가닥이 잡혀갔다. 암탉이 울었다? 그리고 펼쳐 든 책이 하필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이었다.(각주 3) 알다시피 신라의 사기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영규는 『삼국사기』 등을 토대로 『조선왕조실록』처럼 신라왕조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엮어 펴냈다. 그중 제27대 “선덕왕실록”을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객관적 서술 사이사이에 저자의 주관적 해석이 내비쳤다. 선덕여왕을 시름시름 앓기나 하던 무능한 여왕으로 묘사했다. 우선 “국제 사회에서 따돌림 당하는 선덕왕과 신라 내정의 혼란”이라고 부제를 붙인 것부터 수상쩍었다. 국제 사회에서 따돌림당했다는 것은 오랜 적대 관계였던 백제의 젊은 의자왕이 막강한 기세로 공격해 여러 성을 빼앗겼고 고구려와의 협상도 순조롭지 않았던 것을 말하는 듯했다. 백제의 침공도, 고구려와의 관계도 선덕여왕이 여자였다는 사실과는 무관했다. 그럼에도 당태종이 “너희들 은 여자를 왕으로 모셔 이웃 나라로부터 경멸당하고 있다”고 시비를 걸어 온 것에 박영규라는 21세기의 인물이 “저도 같은 심정이에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감히 우리의 왕을 두고 도발을 서슴지 않은 당태종을 비판하고 꾸짖어야 마땅했다. 천사백 년 전에 죽은 당태종이 아직도 무서웠거나 아니면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김부식은 사료(각주 4)에 바탕을 두고 삼국사기를 매우 객관적으로 집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덕(여)왕 편에서도 그는 학자의 객관성을 지켜 “선덕왕이 즉위했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 등 여러 고서의 내용을 착실히 옮겨 적었다. 선덕여왕이 즉위 16년 되던 해에 승하했다는 것까지 다 쓰고 나서 마지막에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신라의 여왕에 대한 사론’이라는 단락을 첨부해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여자를 받들어 세워서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요,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서경에는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고 하였고, 역경에는 파리한 돼지가 껑충껑충 뛰려 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경계하지 않을 만한 일이겠는가!”(각주 5) 암탉도 모자라서 돼지까지 등장시켰다. 심해도 정말 심했다. 이쯤 되면 유교적 사고 때문이라 하기도 어렵다. 여자 남자를 떠나 국왕을 이런 식으로 디스(디스리스펙트의 준말)한 것은 유학의 가르침에도 분명 어긋난다. 그런데 신라의 여왕 세 명 중에서 유독 선덕여왕만 비판했다. 세 여왕 중 맏이니 대표로 욕을 먹으라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세 여왕 중에서 선덕여왕만 여러 사료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선덕여왕이 그저 여자 임금, 암탉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니었을까? 성조황고라는 칭호까지 받은 선덕여왕의 치세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면 혹시라도 고려에 여왕이 나타날까 봐 두려웠을까? 21세기의 작가 박영규는 선덕여왕이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고 무덤 자리를 정했다고 설명하며 그것도 “좋게만 볼 일은 아니”라고 했다.(각주 6) “아니 왜?” 읽다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소리다. 박영규는 왜 좋게만 볼 일은 아닌지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9층 목탑 건립 등 무리한 공사를 강행한 것은 반정 세력에게 빌미만 제공한 꼴이어서 선덕여왕을 결코 좋게 평가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꽤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반정 세력, 즉 비담파가 반역을 꾀한 이유가 무리한 건설 프로젝트나 도탄에 빠진 민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자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어서”라고 했다는데,(각주 7) 그렇다면 선덕여왕 즉위 직후에 반정을 도모하지 않고 왜 16년 동안 잘 있다가 여왕 재위 마지막 해에 반란을 일으켰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왕이 후사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후사가 없던 선덕여왕이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견하고 사촌 여동생 승만(진덕여왕)에게 왕위를 계승하겠다는 유지를 내렸을 것이다. 그때 상대등이었던 비담은 자신이 왕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보고 은근히 기대했을 것이며 그것이 틀어지자 반란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여자 임금”은 이미 운명을 다 한 선덕여왕이 아니라 진덕여왕을 말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타당할 것이다. 선덕여왕의 치세에는 이의가 없었으나 다음 왕은 내가 해야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며, 김유신, 김춘추 등 여왕파와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김유신이 반란을 진압했다고 하는데, 여러 정황으로 보아 당시 선덕여왕은 김춘추, 김유신과 안정적인 삼각구도를 이루며 통치했고 신라의 미래를 길게 내다봤던 것 같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해 분황사, 영묘사 등 많은 사찰을 건립했는데 이는 왕의 불심이 너무나도 두터운 나머지 무리한 사찰 건설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신라만의 독특한 호국신앙에 근거한 장기적인 왕도 건설의 청사진이 있었으며(각주 8) 여왕은 실천의 주축을 이루었다. 왕도 건설의 청사진이란 곧 ‘불국토’의 구현이었다. 정원도시, 생태도시 등을 표방하는 것이 21세기적 도시설계의 이념이라면, 7세기 신라에는 불국토의 구현이라는 뚜렷한 이념이 있었다. 거대 담론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선덕여왕 즉위 시점의 주변 정세를 보면 사실 사면초가와 같아 호국이 절대적 과제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같은 민족이 아니라 서로 타국으로 이해하여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았었다. 당과의 관계도 복잡했고 백제와 친한 일본도 신라의 해안을 수시로 범했다. 아직은 세력이 작았던 신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기르고 한편으로는 줄타기 식의 아슬아슬한 외교 정책에 의존해야 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에게 외교를, 김유신에게 군사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나라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즉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을 온 힘으로 맡아냈다. 신라인들이 과연 선덕여왕이 갑옷을 입고 전장에 뛰어들어 외세의 침입을 몸소 막는 것을 바랐을까? 아닐 것이다. 21세기의 관점에서 고대사를 바라볼 때 간과하기 쉬운 부분인데, 당시에는 정치, 외교, 군사 외에도 종교가 국가적 핵심 사안이었다. 고대의 왕이 제사장 혹은 무왕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왕에게는 호국의 책임이 있었다. 선덕여왕은 불교적 호국의 상징적 존재였다. 신라인들이 호국을 오로지 군사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종교에 더 크게 기댔다는 사실은 수많은 능과 사찰과 불탑의 존재, 그와 관련된 많은 설화가 입증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첨성대다. 첨성대에 올라 춤추고 노래한 조선의 시인들 첨성대는 천문을 관찰하는 곳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천문대치고는 그 형태가 기이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내가 고민할 일은 아니라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 적어도 네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기능에 관한 확실한 역사적 기록이 전해지지 않으므로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우선,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였다는 설이 주도한다.(각주 9)그러나 천문을 관찰하 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하게 설계됐다는 의견도 대두되었다.(각주 10)그러므로 다른 기능도 있을 것이라 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저 별을 관찰하는 곳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별자리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각주 11)즉 천상열차분야지도 등의 별자리 지도를 땅에 투영해 주요 시설을 각 별 자리에 배치했는데, 그 중심에 첨성대를 앉혔다는 해석이다. 정기호의 교차축 이론에 천문의 관점에서 새로운 레이어를 얹은 것이다. 고대의 천문 의존도를 고려해 볼 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런가 하면 젠더적 해석도 있다. 호리병 같은 형태와 상부에 얹은 사각형의 틀이 우물을 닮았고 그것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라의 “토착적 여신신앙에 뿌리를 둔 성스런 건축물이기도 하다”는 주장이다.(각주 12)즉, 첨성대는 선덕여왕을 직접적으로 상징한다는 논지다. 같은 여성으로 서 여성을 성적 특성에 제한하는 것은 자승자박이라 마땅치 않은 해석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첨성대가 ‘도리천’으로 가는 통로라는 기상천외한 설이다.(각주 13)불교의 세계관을 보면 우주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는데 그 위의 하늘을 일컬어 도리천이라고 한다. 그런데 선덕여왕 자신이 바로 그 도리천에 자신을 장사 지내라고 지시한 바 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다. 선덕여왕이 아무 병도 없는데 “짐이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지시했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지 몰라 물으니, 왕이 말하기를 낭산 남쪽이라고 했다.”(각주 14)지금 선덕여왕 능이 바로 그곳에 자리 잡고 있다. 여왕의 혼이 49일 만에 능에서 일어나 첨 성대를 올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계단을 밟고 도리천으로 승천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첨성대는 수미산이 되는 셈이다. 여왕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을까? 고대 그리스 신화가 부럽지 않은 멋진 이야기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세월을 이기고 조선 중후기까지 면면히 전해져 내려왔다는 사 실이다. 서거정(1420~1488), 김세렴(1593~1646), 조수삼(1762~1849), 김매순(1776~1849) 등 조선의 여러 시인이 첨성대에 다녀와서 지은 시들이 남아 전해진다. 예를 들어 서거정은 첨성대 아래에서 신라 시대의 춤과 노래로 선덕여왕의 영혼을 위로했더니 도리천을 갔다 오는 꿈을 꾸었다는 글을 남겼다. 19세기 중엽에는 조수삼이 첨성대 계단을 오르면 계단이 끝나면서 허공의 층계가 이어진다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각주 15)어떻게 된 일인가. 이들은 모두 유학자였지만 동시에 시인으로 명성이 높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첨성대가 하늘로 가는 길이라 노래하고 있다. 네 시인의 연혁을 보 면 각각 다른 시대를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서로 동무해서 같이 놀러 갔다가 취기에 지은 시가 아니다. 서거정과 김매순 사이에 삼백 년 이상의 세월이 놓여 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첨성대 축조의 의미가 정말 그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적어도 19세기 중엽까지 하늘로 가는 계단이라는 첨성대의 의미가 전승됐다는 뜻이다. 그 뒤 시대적 격변 속에서 잊혔다가 여 러 사람의 끈질긴 탐구로 다시 발견되었다.(각주 16) 불국토를 건설하기 위해 태어난 선덕여왕 그렇다면 선덕여왕이 누구였기에 그를 위해 하늘로 가는 통로를 만들어 주었을까? 이제 안함이라는 고승이 등장할 차례다. 선덕여왕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법사는 지장도, 원광도 아니고 안함이었던 것 같다.(각주 17)다소 비밀에 싸인 것 같은 이 인물은 진평왕 대에 중국에서 신라로 밀교를 가지고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점이 중요한데, 딸인 덕만이 왕위를 계승해야 할 근거를 제시 했다. 즉, 덕만이 사실은 길상천녀의 화신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길상천녀는 복덕을 주는 여신으로 아름다운 얼굴에 하늘의 옷을 입고 보관을 썼으며 왼손에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여신이 신라에 불국토를 건설하기 위해 덕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첨성대 축 조 역시 안함이 발원했다고 한다. 여왕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통로를 마련해 준 셈이다. 믿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다. 안함은 상당히 신통한 도사였다고 전해지는데, 기왕 반쯤 신화에 발을 담근 김에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 보자. 신라 불국토 건설의 이념이 안함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신라의 지도층에서 지지하 지 않았다면 구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불국토가 원래 신라 땅에 있었다고 하는데 “에이 뭔 소리” 라고 할 귀족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중심에 선덕여왕을 세운 것은 신의 한수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길상천녀라니 자신의 신화를 만든 것은 고대 이집트의 핫셉수트 여왕과 같지만 남장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안함은 선덕여왕 재위 8년에 입적했다. 구름을 타고 서쪽 하늘로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어 쨌거나 신라인들은 여왕을 길상천녀로 알고 나라를 지켜줄 거라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고, 여왕은 불국토 청사진에 따라 분황사와 영묘사를 세우고 황룡사 구층목탑을 완성했다. 자신의 무덤 자 리를 정하고 그 아래 사천왕사 설립을 지시한 뒤 세상을 떠났다. 후대의 문무왕이 선덕여왕의 뜻에 따라 사천왕사를 지었다고 하며 자신을 동해 대왕암에 장사를 지내라는 유지를 남겼다. 옥녀 봉에 위치한 김유신 장군의 무덤도 같은 축선상에 있다. 결국 선덕여왕, 김유신, 김춘추, 문무왕 모두 불국토 건설 계획을 공유하고 이를 빈틈없이 구현해 나간 하나의 팀이었던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결속력과 깊은 신뢰에서 나당전쟁에서 이길 힘을 얻었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인 까닭에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나당전쟁에서 이겼으니 망정이 지 까딱하면 나라 전체가 먹혀버렸을 수 있어 지금 생각해도 아슬아슬하다. 신라가 이긴 것이 요행이었을까 아니면 천운이었을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하늘의 별자리에 따라 주요 시설을 세운다거나 불국토의 건설 같은 것이 무척 생소할 수 있다. 처음 불국토설을 들었을 때 피식 웃었었음을 고백한다. 도시계획과 조경의 이념은 크게 달라졌으나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국토 보호의 염원은 예나 지금 이나 다르지 않다. 빛 공해로 인해 밤을 상실한 현대인으로서는 당시 신라의 밤하늘에 별이 어느 정도 총총하게 빛났었는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어두워지면 바로 머리 위 하늘에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그려졌을 것이다. 매일 밤 손에 잡힐 듯, 쏟아져 내릴 듯 가까이에서 빛나는 그 별자리들은 그 시대의 일상이었다. 그들의 운행에 따라 절기가 바뀌고 오곡이 무르익고 사람이 나고 죽는다는 믿음은 너무 당연했다. 게다가 별자리는 지금 지적측량기만큼이나 정확하게 방위를 알려줬다. 그러므로 경주의 유적지들이 별자리의 재현이라는 사실은 전혀 허황하지 않다. 올해도 동지 새벽에 대왕암에 떠오르는 해가 선덕여왕릉을 지나 첨성대 위로 쏟아지고 옥녀봉 에 있는 김유신묘에 이를 것이다. 빛은 거기서 머물다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태백을 달 려 백두산까지 가지 않을까? 옛 호국의 영웅들은 아직도 서로를 신뢰하며 묵묵히 한반도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금의 나라 형편을 보면 그들의 혼을 불러 기도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부디 이 땅의 지도자들로 다시 태어나 주소서. **각주 정리 1. 『삼국사기』 등 역사서에는 선덕왕으로 나타나지만, 모든 이들이 선덕여왕이라 부르기 때문에 그에 따르기로 한다. 2. 정기호, “경관에 개재된 내용과 형식의 해석: 석굴암 조영을 통하여 본 석굴형식과 신라의 동향문화성을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지』 19(2), 1991, pp.23~31. 3.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1. 4. 김부식이 참고했다는 고서 대부분이 분실되고 없다는데 어떤 경위로 사라졌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는 듯하다. 5. 김부식,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권, 선덕왕, 신라의 여왕에 대한 사론. 한국 고대 사료 DB 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05r_0020_0480 6. 3번 책, p.293. 7. 김부식,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권, 신라본기, 선덕왕 본기. 한국 고대 사료 DB 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05r_0020_0010 8. 이에 관해서는 정기호 교수가 집중적으로 연구한 바 있다. 9.천문학자 박상범은 첨성대를 현존 세계 최고의 천문대라 정의했 다. 박상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김영사, 2002, p.79. 10.1960년대 중반 전상운이 최초로 첨성대가 천문 관측에 적당한 구 조가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서금석, “천문대로서의 첨성대 이 설에 관한 재론”, 『한국고대사연구』 86, 2017, p.152. 11.‘첨성대 별기’, 울산MBC 다큐멘터리, 2009. 12.김명숙, “첨성대, 여신 상이자 신전”, 『한국여성학』 32(3), 2016, p.139. 13.장활식, “첨성대 축조 발원자”, 『신라문화』 49, 2017, p.57. 14.일연, 『삼국유사』, 권1 제1기이, 선덕왕 지기삼사. 15.13번 글. 16.부산대학교 장활식 교수는 십 수 년을 첨성대 연구에 바쳤으며 건 축가, 사학자, 천문학자와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 새로운 사실을 많이 확인해냈다. 17.국사편찬위원회, 『해동고승전』, 권 제2 유통1-2 , 석안함 편. db.history.go.kr/id/hg_002r_0060_0040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고정희
  • [어제의 대화, 오늘의 재구성] 박희성 미지근함의 미학
    냉정한 사람, 피가 차가운 사람, 쌀쌀 맞은 사람, 냉소적인 사람. 우리는 어떤 대상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온도에 비유할 때 차가움을 꺼내오곤 한다. 연구자라는 사람을 온도에 빗대야 한다면 차가운 쪽에 가까울 거라 생각했다. 연구 대상을 왜곡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치밀하게 분석하고 멋대로 상상하며 결론 내리지 않으려면, 잘 벼린 칼날 같은 태도가 필요할 것 같았으니까. 박희성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 예상보다 그가 앞으로 누벼야 할 이론의 바다가 훨씬 넓다는 걸 알게 됐다. 길고 긴 항해 내내 차가울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미지근함에 대해 생각했다. 열정으로 시작해 결코 차게 식지 않는 사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기를 보온병처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긴 여정에도 지치지 않고 포기를 생각하지 않는 그 적정한 온도에 대해서. 어제는 뭐했나요? 밀린 논문을 썼어요. 학기 중에는 강의를 비롯해 다양한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데, 전 멀티플레이어가 아니라 한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지 못해요. 조금 미뤄오다 이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밀린 논문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연구교수(이하 교수)에게 논문은 일종의 과제 같은 존재인가 봐요. 논문을 쓰는 이유는 다양하죠. 승진이 목적인 사람도 있고 개인적인 연구 욕심이 있는 사람도 있고요. 전 생산물이 없는 연구자는 본분을 잊은 거라 생각하거든요. 자기반성을 섞어 조금이라도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 생업이 있다 보니 순수하게 학자로서 공부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에요. 연구비 펀딩을 받은 경우, 페이퍼 형태의 최종 제출물을 만들어야 할 때도 있어요. 지금 쓰고 있는 논문도 그런 과제 중 하나이고요. ‘연구자’ 하면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요. 이른 아침 일어나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그런 이상적인 모습이요. 실제로 규칙적이고 부지런한 생활을 하나요. 반성하게 되네요. 저 역시 그런 이상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에요. 전 오히려 밤에 집중이 잘되는 스타일이라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있는 편입니다. 스트레칭을 꾸준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커피는 자주 마셔요. 인터뷰를 준비하며 환경과조경 홈페이지에 박희성을 검색해봤어요. 촘촘하진 않더라도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대략적으로 그려보기 좋은 아카이브거든요. 그런데 뜻밖의 결과에 눈이 갔어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옥외공간 조성 설계공모’, ‘한국도로공사 본사 이전사옥 건립 설계경기’, ‘사상광장로 명품가로공원 조성 기본계획 현상설계공모’ 참가자 명단에 교수님 이름이 있더군요. 처음부터 교수님을 연구자로서 만났기에, 설계에 참여한 적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 중 두 개 공모는 우리엔디자인펌 연구소장으로서 함께한 공모더군요. 2000년대 초 조경설계사무소가 기업부설연구소를 많이 열었었어요. 설계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의도이기도 했고, 정부에서 세제 혜택을 주기도 했죠. 강연주 소장(우리엔디자인펌)은 연구 집단과의 교류에도 관심이 많았고, 기존 설계 방식에서 벗어나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역량을 다지겠다는 의지가 있는 분이었어요. 2006년 우리엔디자인펌 조경설계연구소가 만들어졌고, 기존 조직이 연구소와 설계소로 나누어졌죠(“설계사무소 소장으로 산다는 것, 그 냉정과 열정 사이”, 『환경과조경』 2016년 5월호 참고). 그즈음이 당ㆍ송대 산수원림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로, 조경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는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미학을 기반으로 한 연구를 하다 보니 점점 조경의 범주 바깥으로 밀려나는 기분이었죠. 기회가 되면 조경설계를 알아보고 싶었는데, 마침 우리엔디자인펌의 조경설계연구소가 제게 기회를 줬어요. 1년 반 정도 머물렀으니 긴시간은 아니었지만 많은 설계공모에 참여할 수 있었고 알찬 시간을 보냈어요. 조경 연구자가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연구원, 교수뿐인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거든요. 연구자는 설계공모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조경설계연구소에 들어간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었어요. 연구자가 설계에 참여한다고 해서 프랙티스를 기반으로 하는 교수처럼 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죠. 1~2년 정도의 시간으로 설계가가 되지도 못할뿐더러, 저의 부족함은 채울 순 있어도 연구자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조언도 있었고요. 맞는 말이었어요. 당연히 제가 선을 그리고 도면을 만드는 설계를 할 거라고 예상하진 않았어요. 대신 설계의 큰 콘셉트를 만드는 일을 했죠. 대상지를 분석해 공간 설계를 끌고 나갈 기본 방향을 만들고, 틀이 갖춰지면 작은 세부 요소를 구체화하고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연구자로서 공부해온 이론들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제가 제안한 콘셉트가 설계에 반영되는 걸 보며 공간을 바라보는 맥락과 해석하는 방식이 조경의 관점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도 있었습니다. 안심했어요. 설계공모뿐 아니라 일반 연구 용역도 진행했고, 관광 같은 다른 분야와 협업하는 구조를 만들기도 했어요. 다른 직원이 연구소가 세워지기 전보다 설계하며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다는 이야기를 해주어서 안심했습니다. 우리엔디자인펌을 떠나서는 바로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겼어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입사한 지 일 년 반쯤 지나니 생각이 복잡해지더라고요. 과연 이곳에 발붙일 수 있을지, 또 회사 경영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보통의 직장인들이 다 할 법한 고민들이었어요. 때마침 서울학연구소에서 조경을 전공한 연구자를 찾는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사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연구를 진행하는지는 모르고 들어왔는데, 완전히 새로운 판이더라고요. 조경학과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어떤 미래를 꿈꿨었나요. 자신에게 연구자의 소질이 있다는 걸 언제 깨달았는지 궁금합니다. 참 오래된 이야기네요. 큰 뜻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 건 아닙니다. 학부 졸업 시기가 다가오니까 막막했어요. 4년 동안 열심히 공부는 했는데 조경에 대해 뭘 아나 싶고, 졸업작품을 만들면서는 사람이 실제 사용할 공간이 될 선을 이렇게 가벼운 고민만으로 그려도 되나 망설여졌어요. 조경설계를 하려면 내가 어떤 공간을 지향하는지 조금의 가닥이라도 잡은 상태여야 제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대로 무작정 취업하게 된다면 또렷한 지향점 없이 흘러갈 테고 그래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돌이켜보니 이상한데, 당시 설계를 잘하기 위해서는 이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서울대학교 조경미학연구실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막상 연구에 발을 들이니 이론 분야는 바다와 같이 넓고,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워낙 많더라고요. 어떤 일을 할 때 제가 더 즐거운지 생각해봤더니 책을 볼 때 마음이 더 편안하더라고요. 그렇게 연구자의 길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석사논문 주제가 ‘한중 정원과 문인, 자연미’였죠. 지금까지도 동아시아 조경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고요. 긴 시간 하나의 분야를 계속 연구하면 지치지는 않나요. 점점 진전하는 느낌으로 연구하고 있어요. 이 연구를 마치고 보니 저 부분을 더 연구해야겠구나 하는 식으로요. 지루할 틈이 없어요. 조경이라는 학문 자체가 하나의 색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다방면을 살펴야 하거든요. 학위 논문을 쓸 때 절 고민에 빠트린 건 조경이 순수 학문이 아니라 실천적 학문이라는 점이었어요. 그에 반해 전 미학, 즉 이론을 공부했으니 어디까지 발을 담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예컨대 정약용의 자연관을 공부하고 싶으면 그 사람의 학문 세계와 시학,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알아야 하죠. 그런데 마냥 이론만 들여다보고 있을 순 없어요. 조경은 실체가 있는 공간이니까요. 이론에서 빠져나와 공간을 구체화해야 하는 지점이 있는데, 이론과 공간 사이를 잘 드나드는 기준을 세우는 게 참 어려웠어요. 어떤 공간을 만든 사람의 특징을 개인 성향으로 볼 것인지, 사회문화적 영향과 당시의 철학, 경제적인 부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지도 고민해야 하죠. 덕분에 다양한 사료를 살펴야 하고 다양한 연구 방식을 써야 하죠. 지루하고 지난한 연구의 나날을 이런 변주로 극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많은 주제 중 하필 동아시아 정원에 관심 갖게 된 이유가 있다면요. 학부 시절 안계복 교수님(대구가톨릭대학교)의 동양조경사 수업을 굉장히 재미있게 들었어요. 당시 동양 조경을 공부할 수 있는 교재가 적었는데, 윤국병의 『조경사』(일조각, 1978)라는 오래된 활자본 책이 있어요. 체감 상 내용의 30퍼센트 이상 한자로 쓰여 있었죠.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책인데, 시험공부를 한다고 한자를 일일이 다 찾아보며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나요. 지금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열심이었죠. 동서양의 조경사를 다 아우르는 책이었고 정말 잘 쓴 책이었어요. 그때부터 이미 동아시아 정원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대학원에 입학해 서양 미학 공부도 했지만 짧은 학습 시간 때문인지 내용에 충분히 공감이 되지는 않더라고요. 공부를 하면 하겠지만 체화하기는 쉽지 않겠다 싶었죠. 오래 연구할 주제라면 단순한 호기심으로 접근하기보다 내가 끝까지 견뎌낼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조경 연구자의 일에 대해 “짧게는 몇 백 년, 길게는 천 여 년 전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공간을 상상하는 일”(“언제나 지금만 같길 바라”, 2021년 4월호)이라 표현했었죠. 자료 분석과 연구의 차이가 있다면, 논거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하느냐의 여부인것 같아요. 그 상상력의 정도가 중요할 텐데 어떤 기준으로 접근하나요. 상상보다는 가설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상정하고 연구를 시작하기도 하고, 공부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주장과 색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선배와 선생님이 항상 내 것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해줬어요. 무조건 내가 맞다는 생각을 경계하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펼친 상상에 대한 객관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지, 견강부회해서 편견에 휩싸여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되묻는 훈련을 많이 하려했어요. 제가 연구하는 시대는 크게 전근대 사회와 서구 문명과 교류가 이루어졌던 근현대로 나뉘어요. 전근대 시기의 연구는 미의 인식, 즉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며 아름다움을 느꼈으며 무엇을 추구했는지,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등을 살펴 동아시아 문인의 보편적인 미의식을 탐구하고자 합니다. 글이라는 사료를 통해 인물의 성정과 사고 체계를 짐작하고, 이를 기반으로 어떤 공간에서 무엇을 지향했는지 추론이 가능하죠. 하지만 공간의 생김새나 정원의 조성 방법 등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반면 근현대 시기는 좀 더 과학적인 가설을 세워 상상해볼 수 있죠. 실체가 있고 자료도 많아서 객관적으로 논증할 수 있거든요. 근현대는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한 근간이기도 해서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연구는 지식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그 대상을 치밀하고 깊이 있게 조사하는 일이고, 그 점 때문에 자칫 지루할 것 같다는 인상을 남겨요. 하지만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지금껏 연구를 진행해오면서 머리가 번뜩하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있었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예컨대 가설이 좀처럼 참인지 진짜인지 증명되지 않고, 어렴풋이 답은 알 거 같지만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진이든, 회화든, 글이든 사료가 등장하며 의문점이 단숨에 풀릴 때가 있어요. 해결의 열쇠가 갑작스러운 등장 같지만, 대부분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 끝에 보상처럼 따라와 준 것 같아요. 연구자는 스스로 세운 가설이 증명되는 순간의 짜릿한 감동을 잊을 수 없는데, 연구를 지속하는 것도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요즘 느끼는 건데 시대는 끊임없이 변해도 인간의 본성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연구하는 시대의 사람들이 했던 생각과 고민, 그리고 성숙해가는 과정이 지금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우리와 똑같이 꽃 보며 즐거워하고 새로운 계절을 맞으며 설레어했던 모습을 발견하면 시공간을 뛰어넘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학생들에게도 그 시절이 결코 별천지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타인의 삶처럼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공감대를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던스케이프’(2022년 1월호~2023년 12월호) 연재를 통해 철도와 가로 같은 인프라에서 출발해 가로, 공원, 정원, 옥상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도시 풍경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에 대한 관심을 확인했어요. 원림, 양화소록, 장안성 등 본래 연구하던 시대와는 훌쩍 떨어진 근현대로 연구 분야를 확장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전근대 시기의 미학과 자연관만 계속 공부하다 보니 막연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연구만 계속할 게 아니라 연구자로서 동시대 조경도 다뤄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고요. 동아시아 정원이 마이너한 연구 분야라 외로웠던 점도 한몫을 한 것 같네요. 때마침 서울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고 보니, 조경 연구자는 저 혼자였고 건축과 역사전공을 한 연구자가 대부분이었어요. 서울학연구소가 학제간 연구를 지향하는 집단이라 다른 분야의 연구자와 함께할 기회가 생겼죠.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미학과 철학을 다뤄온 제 입장에서 건축과 역사 분야의 연구법은 과학적이고 철저한 논증을 기반으로 한 명징함 그 자체였어요. 흥미로워서 온갖 세미나에 참석하고 그들이 사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법들을 공부했죠. 이곳에 몸담은 김에 새로운 연구를 해볼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새로운 방법론만 습득할 게 아니라 연구 대상 자체를 확장하려고 보니 조경 분야가 근현대를 그저 암흑기로 치부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도시사적으로 많은 일이 벌어졌던 시기고, 다른 분야에서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거든요. 그 빈칸을 채워보자 하는 마음으로 근현대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학제 연구라는 개념이 제겐 좀 모호하게 느껴져요. 실제로 쉽지 않은 연구 방법이에요. 연구자끼리 모이면 서로 뇌 구조가 다르다는 농담을 자주해요. 처음에는 갈등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서로 연구를 전개하는 방법과 훈련 받아온 연구 방법 자체가 너무 다르다는 걸 인정하게 됐어요. 우선 큰 주제가 있으면 계속해서 토론을 해요. 예를 들어 한양도성이 주제라면, 각자 한양도성을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 이야기하는 거죠. 구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도성을 만드는 인물과 제도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다 보면 결코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가 만나는 순간이 있죠. 상관없을 것 같은 이야기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기고 맥락이 읽히게 되면 환경과 사람 사이에 다양한 인과 관계가 가설로 만들어집니다. 연구 결과를 텍스트에 의지해 설명하던 인문계 연구자는 지도나 도면 하나로 표현하면 훨씬 설득력이 있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요. 현상을 시각화하면 텍스트로는 볼 수 없던 경향을 포착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공계 연구자는 글의 행간을 읽는 훈련을 통해 보이지 않던 현상을 파악하는 경험을 합니다. 사료의 수집이나 활용법, 자료를 객관적으로 해독하는 기술도 배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받고 사고력을 확장하는 게 학제간 연구의 장점이죠. 연구하며 다양한 사료를 볼 텐데, 마음을 빼앗기는 사료 유형이 있을 것 같아요. 시각적 자료, 일본식으로 표현하자면 비문헌 자료가 아무래도 매력적이죠. 본인이 세운 가설에 몰입하다 보면 문헌 자료를 곡해할 여지가 많아요. 즉 비약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조경처럼 공간을 다루고 실체를 보여줄 필요가 있는 학문에서는 회화, 사진, 엽서, 지도 같은 시각 자료가 왜곡이 덜한 정보를 제공하죠. 단순해 보이지만 이런 시각 자료에는 상상 이상의 많은 정보가 들어있는데, 자칫하면 중요한 정보를 놓치기 십상이에요.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 보려는 경향이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던 정보가 나중에 갑자기 보이는 경우도 많거든요. 따라서 넓고 깊게 반복적으로 살펴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회화 중에서도 특히 동아시아의 회화는 관념을 표현한 부분이 많고, 원근법을 생략하고 재구성하는 경우가 많아서 사실과 다를 거라는 인식이 많아요. 그런데 경험한 바로는 회화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스케일이 왜곡되거나 함축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지만, 중요한 정보는 모두 담겨 있어요.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죠. 들여다보고 있으면 작자의 의도가 하나하나 읽혀서 너무 재미있어요. 옛 사료를 많이 접하는 연구자의 경우 특정 물건을 수집하기도 하던데요. 열정적인 연구자들은 이베이 같은 경매 사이트에서 사료를 사 모으기도 하는데 저는 평범한 편입니다. 원체 제공되는 자료가 많은 시대잖아요. 학위논문을 쓸 당시만 해도 자료 수집이 쉽지 않아서 자료 확보 능력이 연구 능력으로 간주되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 시절의 노력이 허무할 정도로 다양한 자료가 공개되어 있죠. 그래서 오히려 수집보다는 그 자료를 어떤 실로 꿸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모두에게 제공된 백 가지 정보 중 어떤 현상을 골라 어떤 물음에 답할지 틀을 짜는 게 연구자의 역량이죠. 참, 학위 논문을 쓰던 시절 중국 조경사 연구를 위해 칭화대학교와 베이징대학교를 다녔었죠. 그곳의 생활은 어땠나요. 정약용 선생과 다산초당원을 주제로 논문을 쓴 이후에도, 한국정원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이 절 따라다녔어요. 사실 정약용은 매너리즘에 빠진 당시의 성리학을 비판하고 조선이 주체가 되어 유학을 바로 세우려고 했던 학자이니, 공부하고 나면 또렷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 물음에 대한 답을 낼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정약용도 지금의 성리학은 너무 왜곡되었으니 원시 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공맹 사상으로 회귀하더라고요. 결국 한국정원의 고유성은 중국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건가 고민하다 보니 중국을 공부하면 한국과 차별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오른 거죠. 치기 어린 마음으로 덤벼든 겁니다. 걱정이 많았지만 운이 좋게도 중국에서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어요. 말도 잘 못하는 애가 중국 정원을 공부하겠다고 와 있으니 교수와 동기들이 어여삐 여겨 준 거죠. 개인적으로 중국이라는 대륙에 얼마나 많은 정원 이론이 연구되고 있을지 기대했는데, 의외로 제가 한국에서 책으로 접한 내용들 이상의 새로운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있었을 당시에는 그들도 우리만큼 자신들의 정원에 대해 잘 모르더군요. 문화대혁명 이후 학문 체계가 중화사상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어요. 우리 게 최고라는 생각 아래에서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나올 리 없죠. 오히려 바깥에서 여러 가지 시선으로 해석한 연구의 다양성이 더 풍부했고 흥미진진했어요. 대신 현장을 직접 답사하면서 얻은 게 많습니다. 정원이나 자연환경을 묘사한 회화 작품을 보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거든요. 예컨대 왕유라는 당나라 시인이 노모를 모시려고 만든 망천별업이라는 거대한 정원이 있어요. 수레바퀴 망(輞) 에 내 천川을 쓰는데, 해석하면 물이 수레바퀴가 지나간 것처럼 휘돌아가는 모양으로 흐르는 장소가 별업의 배경이 되어야 하는 거죠. 그림에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는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찾아가보니 회화에서 보던 모습이 그대로 펼쳐져 있더라고요. 천년이 훌쩍 지난 곳이니 거의 남아있는 게 없었지만, 회화에 묘사된 자연의 분위기와 스케일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어요. 한번은 백거이의 여산초당으로 알려진 곳을 찾아갔는데, 글과 경관이 너무 안 맞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의아했지만 그곳에서는 모두 맞다고 하니 달리 확인할 방법이 없었어요. 오히려 다른 장소에 들렀다가 그곳 매표소 직원에게 지나가는 식으로 물어봤는데, 마침 지나던 내국인이 제 질문을 듣고는 본인이 알고 있다며 장소를 알려주었어요. 얼결에 얻은 정보라 확신은 없었지만, 알려진 장소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만큼은 확실했기에 믿고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에 산길을 한참 올라갔더니, 백거이 시문에 묘사된 북향로봉 아래에 자리 잡은 여산초당이 거짓말처럼 드러났어요. 어두워지고 있어서 사진을 충분히 찍을 수 없는 아쉬움이 컸지만, 그때 느꼈던 전율과 감동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비로소 글쓴이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어요. 지금은 제대로 된 곳으로 안내가 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당‧송대 산수원림 연구를 마쳤을 때 한 인터뷰에서 “중국과 한국 정원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고 싶다”(“禪과 정원조성 관계 연구한 ‘공학박사’ 박희성씨”, 「불교신문」 2006년 9월 6일)고 말했죠. 이후 진전이 있었나요. 나름대로 해야 할 연구들을 정리해두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요. 그래도 실천한 것 중 하나는 강희안의 『양화소록』과 명말청초의 문인 문진형이 쓴 『장물지』를 분석해 초화류를 감상하는 방법과 그 지향점이 어떻게 다른지 미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연구예요. 사실 강희안과 문진형은 동시대 사람이 아니어서 비교가 가능할까 하는 고민이 있었지만, 두 인물은 각각 중국과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이기 때문에 식물에 대한 태도와 감성의 차이는 확연히 다른 것을 확인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다시 연구를 재개하고 싶습니다. 한국정원의 정체성 확립은 조경 분야의 오랜 과제입니다. 정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있어야 한국정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이어갈 수 있고요. 국가공원과 더불어 국가정원이 지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국정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여요. 학생들에게 한국정원을 가르쳐야 하는 때가 오면, 우선 우리는 한국의 정원을 잘 알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말을 먼저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한국정원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은 조선에 국한되어 있어요. 조선은 관념적 사고를 추구하는 사회였고, 조형적 창작물을 만들기보다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였죠. 이러한 조선이 단일 왕조로 무려 500여 년을 지속했어요. 규범과 질서를 강조하던 국가였기 때문에 다른 정원이 끼어들 여건도 아니었죠. 여러 연구자가 이야기하는 조선의 수려한 산수가 특별한 정원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데 영향을 미쳤다는 말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사회적‧경제적 여건 때문에 고도로 훈련된 정원 기술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어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게 조선의 색이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현재 실체가 남아 있는 건 대부분은 조선의 정원이고 북한 소재의 역사정원은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이죠. 훨씬 더 화려하고 정교할 거라고 짐작되는 고려, 백제, 신라의 정원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조선의 정원에만 매달려 있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중국의 3대 누정 중 하나인 등왕각에 간 적이 있어요. 당나라 때 만든 거대한 누정이 온전히 보전되어 있는 게 신기했는데, 내부에 엘리베이터가 있더라고요. 여러 층에 마련된 사료를 보며 기존의 등왕각은 이미 불에 타 소실됐고 여러 차례 다시 지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주목해야 할 점은 기존의 등왕각을 재현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송나라 때는 송나라 양식으로, 명나라 때는 명나라 양식으로 지었더라고요. 그 시대의 가장 최고의 누각이 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당시의 건축술로 최선을 다해 재설계한 거죠. 대신 과거의 누정이 어떠했는지 기록하고요.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산은 철저하게 고증해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전통을 토대로 자유로운 해석과 실험을 시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국성을 실험함에 있어, 실패와 망작에도 너그러울 필요가 있어요. 전통을 경직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현재에도 진행 중이라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변하지 않는 전통이 있겠지만 삶의 방식과 태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뀌기 마련입니다. 시대성은 동시대의 취미와 실천이 잘 축적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니, 많은 시도와 실험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모방보다 자유로운 재해석의 실험을 시도해야 후손들이 이 시대의 정원을 보며 한국의 정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산림청이 진행한 K-가든 사업에 참여한 이유도 한국정원을 재해석하는 방향을 좀 더 유연하게 정립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어요. 건축의 경우, 1960~1970년대에 거푸집을 정교하게 만들어 콘크리트로 목조 건물의 형상을 만드는 실험을 했었어요. 어린이 놀이터의 많은 놀이 기구도 콘크리트를 부어 만들던 시대였죠. 세종문화회관은 한옥의 기능과 구조, 형식을 근대 건축술로 재해석한 작품인데, 오늘날 재해석의 모범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실험을 계속했다면 지금쯤 한옥을 현대화하는 많은 기술이 만들어졌을 겁니다. 이제는 정교한 거푸집을 만드는 기술자를 찾기 힘들어졌죠. 우리에게는 식민지 트라우마가 있어요. 우리가 많은 것을 박탈당한 것도 사실이지만, 식민지와 무관하게 동아시아에 서구의 문물이 들어와 기존의 문화와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기도 했던 역동적인 시기이기도 하거든요. 우리가 변화를 주도한 주체가 아니었고 수동적으로 문물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우리가 스스로 변화를 받아들여 내재화하는 시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암흑기, 공백기로만 보지 않고 근대로의 전이 과정으로 바라보면, 미처 보지 못했던 선조들의 고민과 태도를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객관적 시선에서 바라보고 숨은 가치들을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선은 정원을 가꾸려는 마음과 정원을 즐기고 싶은 욕망은 있었지만 고도의 정원술은 없었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구릉 많은 지형을 어떻게 이용할지, 배수 체계를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할지, 주어진 자연 요소를 어떻게 극대화해 감상할지 등을 고민했다는 건 알 수 있지만, 정원 콘셉트를 잡고 자연과 인공 사이에서 정원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내어 누릴 수 없던 조선의 경직된 분위기는 정교하게 정원을 즐기고 가꾸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어요.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마음껏 드러낼 수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곰곰이, 여러 번 살펴볼 때 비로소 의도가 읽히는 전략을 취했던 것이죠. 그렇기에 조선의 정원이 뒤떨어진다고 치부할 수는 없고 조선이라는 시대를 알고 공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국정원의 우월성을 이야기하기보다, 시대의 배경과 맥락 속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시경관연구회 보라’ 활동을 이어가고 있죠. 홈페이지를 보니 “따로 또 같이 활동하는 조경학 전공자 중심의 자율 연구 집단. 도시, 경관, 역사, 이론의 키워드에 관심을 둔 조경 전공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는 장이다”라고 소개되어 있어요. 자율 연구 집단은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내나요. 보라는 조경 연구자들이 모여 만든 연구 집단입니다. 연구는 설계와 달라서 홀로 작업하는 내성이 필요합니다. 박사학위논문을 쓰면서부터는 오랜 시간을 고독하게 지내야 하는데, 학위 수여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허탈감과 고독함이 크게 다가오죠. 연구자라면 당연히 감내해야 할 감정이지만 가끔 그 현실을 자각하며 복합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프로젝트를 통해 연대할 수도 있지만 기회가 많지 않죠.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는 박사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이런저런 기회로 알게 되었고 함께 도모할 일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모였어요. 연구의 바탕과 관심 분야가 제각각이라 걱정했는데, 조경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서로 의견도 주고받고 흥미로운 많은 대화가 오가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가지게 됐습니다. 연구의 길을 잃었을 때나 혹은 연구의 의지를 상실할 때면 서로 용기를 주고 의지를 다지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각이 열리기도 해요. 공동 프로젝트로 진행한 서울시 도시공원 아카이브 프로젝트는 조경계에 아카이브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리게 된 성과까지 덤으로 얻은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지금은 각자의 연구를 지속하면서 어떤 프로젝트를 새롭게 시작해 볼지 구상 중입니다. 일부러 느슨하게 이어가는 활동이기도 해요. 마음 맞는 연구자들의 사교 모임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책무가 주어지는 순간부터 부담스러워질 테고, 서로가 가진 일의 양을 비교하는 등 미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우선 크든 작든 이 활동이 끊이지 않도록 이어가자는 암묵적인 규약 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풀다보니 참 여러 주제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자칫하면 중심을 잃을 정도로요. 지금 박희성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가장 큰 질문은 무엇인가요. 황기원 교수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은 늘 학자는 자기만족을 위해서만 공부해서는 안 되고, 후학을 양성하고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요즘 들어 그 말을 자주 되새깁니다. 우선 동아시아 국가의 정원술을 우월의 관점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를 꾸준하게 가지려고 합니다. 결국은 한국정원의 고유성을 알리고 가치 발굴, 보존 관리, 활용을 하는 이야기로 귀결되지 않을까 싶어요. 근대 주택정원 연구도 이어가고 싶어요. 대다수의 근대 정원이 개인 소유라 방문이 어렵고 공간의 변형이 많아 어려움이 있는데, 동서양 문화의 교류와 혼종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 한국조경의 흐름과도 연결 지점이 있을 것 같고요. 최근에는 김정화 교수(네바다주립대학교)의 제안으로 길지혜 박사와 함께 잔디 경관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공원에서 흔히 보게 된 잔디밭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떻게 근대의 대표 경관으로 인식되었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무덤에서나 볼 수 있던 잔디의 경관이 어떻게 근대 정원과 공원에 꼭 두어야 하는 필수 공간으로 변화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미국과의 연결고리가 확인되어서, 잔디의 교류와 전파의 과정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 한국의 들잔디가 미국에 수출되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함께 연구할 예정입니다. 전근대, 근대를 막론하고 한국에 국한된 연구를 하기보다 교류와 영향을 함께 보려는 태도를 견지하려 해요. 마지막으로 한국조경학회 학술부회장을 맡았는데, 앞으로 어떤 일을 해나갈지 궁금합니다. 다양한 학술 주제를 발굴해 내용을 공유하고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려 합니다. 조경이 다루어야 하는 과제가 참 많아요. 나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주제도 조경 분야 안에 있다면 사실 나와 연동되어 있는 경우가 대다수거든요. 조경인이라면 공감대를 형성해 함께 고민해야 할 다양한 주제를 다룰 계획입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참여를 견인해 일찍부터 조경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어요.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의 한 꼭지를 맡게 되어(“언제나 지금만 같길 바라”) 과월호를 통해 1세대 조경가의 활동을 한꺼번에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어요. 그분들이 제도적, 환경적으로 지금보다 더 열악한 여건에서 조경의 역할과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걸 다시 깨달았죠. 그렇게 마련된 토대 위에서 우리는 너무 안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그 토대를 더 단단히 다지고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데, 자신의 몫을 다하는 데만 충실한 면이 있어요. 조경이라는 분야가 어떤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 논의하는 자리도 부족했고요. 오히려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관에 대해, 도시 외부 공간에 대해, 역사 유산의 주변부 관리와 운영에 대해 조경이 정말 잘 해내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변화하는 시대와 관계망 속에서 조경이라는 분야를 어떻게 이끌고 나갈지 토론의 장을 만드는 역할을 학술분과가 해냈으면 합니다. 물론 여러 사람의 협조가 필요할 거예요. 조경학회의 다른 분과를 비롯해 아이디어가 있다면 언제든 함께 협력해 세미나를 꾸려보고 싶어요. 이 자리를 빌려 많은 관심과 의견을 부탁드린다는 말을 전합니다.
  •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거칠고 거친 1960년대, 재생의 물살 속으로
    공원도 꼬까옷이 필요해 ‘좋은 공원’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수많은 조경인에게 묻고 싶다. 무엇이 좋은 공원을 만드는가? 좋은 공원이 되기 위한 조건에는 무엇이 포함될까? 변화된 사회에 걸맞게 새롭게 단장한 공원이 속속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물론 필연적이다― 공원은 어떤 ‘꼬까옷’으로 단장해야 할까?(각주 1) 조경사 강의 중 1960년대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제스처가 커진다.(각주 2) 1960년대는 환경, 우주 개발, 세계 정세, 금융, 도시계획 등 온갖 분야에서 새로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 시기였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를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나씩 뽑자면 끝이 없겠지만 환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던 당시 조경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는 (주로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안 맥하그(Ian McHarg)를 필두로 한 생태적 지역계획 방법론과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의 그리니치 빌리지 마을 보존 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에피소드 1. 그리니치 빌리지의 그와 그녀 시민 참여, 장소 만들기, 도시재생, 지역다움 보존 등 재개발의 반대 선상에 놓인 분야의 교과서 격인 제인 제이콥스의 책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1961)은 제이콥스를 인문 도시계획 분야의 일약 스타로 만들어 주었고, 1960년대 초 그리니치 빌리지를 둘러싼 그(로버트 모세스, 당시 75세)와 그녀(제인 제이콥스, 당시 48세)로 대표되는 ‘도시 개발 대 마을 보존’의 대결이 불거졌다.(각주 3) 사실 제이콥스가 좀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건 1961년 맨해튼 웨스트 빌리지 아파트 개발 사업으로, 실제로 고층 빌딩이 아닌 낮은 층수의 인간적 스케일(human scale)로 건설이 진행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미디어에, 그리고 이후 학계에 한층 더 큰 여파를 낳게 된 건 그리니치 빌리지(Greenich Village), 특히 워싱턴 스퀘어 공원을 가로지르는 로어 맨해튼 고속도로(LOMEX) 계획이었다. 도시에 (현재) 살고 있는 거주민을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 도시 발전을 위해 일정 부분 거주민의 희생이 있더라도 교통을 우선할 것인가?(각주 4) 뉴욕시 공원 운영위원장, 로버트 모세스 조경가의 인식 속 로버트 모세스(Robert Moses)의 평판이 바닥을 찍게 된 계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하나는 대중교통 등한시, 웨스트사이드 고속도로와 허드슨 브리지 등의 교통 개편, 슬럼을 없애고 커뮤니티를 해체한 대대적인 재개발로 뉴욕시의 구조를 압축적으로 변화시킨 일이다. 다른 하나는 로버트 카로(Robert Caro)의 퓰리처 수상에 빛나는 모세스 전기, 『위대한 브로커(The Power Broker)』(1974)로 인한 것으로, 오늘날 도시계획 관료로서 모세스의 생각과 실천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데 가장 강력한 계기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세스가 뉴욕의 도시공원과 공공 공간 활성화에 미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테다. 1934년 1월 18일, 뉴욕시 공원국은 “다섯 개로 나뉘어 운영되던 자치구별 공원 운영위원회를 하나로 통합하고, 이에 따라 한 명의 운영위원장이 뉴욕시 전체의 공원을 다루게 되었다”는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한 명의 위원장’은 뉴욕주 공원위원회의 대표이기도 했던 로버트 모세스였다. (뉴욕시 보직을 수락하기 전 모세스는 뉴욕시 자치구별 운영위원회를 하나로 통합할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당시 뉴 욕시장이었던 라 과디아(La Guardia)는 진보주의적 입장에서 공학적이고 효율적인 도시 운영(각주 5)의 가능성을 중요하게 보고 있었고, 이에 따라 뉴욕시 대표적 진보주의자였던 모세스가 뉴욕주와 뉴욕시의 공원녹지계획을 모두 진두지휘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발행된 뉴욕시 공원국 보도자료를 살펴보면 모세스가 추구한 공간 효율성 증대와 활성화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대중교통보다 자동차를 중시했으며, 도로를 따라 여러 파크웨이를 조성했다. 흔히 ‘벨트 파크웨이(Belt Parkway)’라고 불리는 이 파크웨이들은 반세기 전 옴스테드가 주장한 ‘공원의 연장선이자 도로’로서의 파크웨이가 아니라, 뉴욕시의 여러 자치구를 연결하는 새로운 고속도로 옆 버퍼 공간으로서 녹지대를 의미했다. 즉 도로로서 파크웨이의 의미가 사라지고 효율적이고 편안한 자동차 운행을 위한 장식이자 분리대로서 파크웨이의 기능적 측면이 강조된것이다. *환경과조경442호(2025년 2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오랜 기간 조경의 장식적 활용에 대해 부정적 견해가 많았다. 다만 ‘장식’의 개념을 새롭게 재정리하자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Anita Berrizbeitia, “Design: On the (Continuing) Uses of the Arbitrary”, A Cultural History of Gardens in the Modern Age , John Dixon Hunt, ed., New York: Bloomsbury Publishing, 2016. 2. 은사인 배정한 교수(서울대학교)의 조경 이론 수업도 1969년에 방점을 찍고 있다. 권위자 이름을 빌려 의견에 무게를 실어본다. 3. 이 내용을 바탕으로 다양한 공연도 제작된 바 있다. ‘불도저: 로버트 모세스를 위한 노래’, 모세스의 삶을 바탕으로 한 ‘직선에 미친 사람(Straight Line Crazy)’, 로버트 모세스와 제인 제이콥스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오페라(!) ‘놀라운 질서(A Marvelous Order)’ 등 이다. 4. 봄, 가을에는 전자로, 여름, 겨울에는 후자로 기울어진다. 기상청에 물어보자. 5. 20세기 초중반 정치적 차원에서 미국 북동부의 진보주의란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논리에 따라 도시를 운영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볼 수 있다.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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