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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도가 만든 도시] 도시의 자연
    때마침 온갖 봄꽃이 해사하게 만발한 탓에 우리 도시의 자연에 대해 불만인 점이 뭔가 저절로 너그러워진다. 전봇대와 어지러이 이어진 전선 사이에서 볼품없이 몽둥가리 당한 가지일망정 하늘하늘한 분홍빛 꽃과 고슬고슬한 연한 초록의 새순이 달린 나무 한 그루에서도 도시를 찾아온 봄과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도시 안에서 녹색의 존재는 기본 가치가 높은 자원이다. 요즘은 공세권이니 숲세권이니 하는 말이 통용되고, 경의선숲길이 지나는 연남동처럼 새로 공원이 조성되면서 그 주변이 소위 ‘뜨는’ 동네가 되는 현상이 기사에서 빈번하게 다뤄지기도 한다. 도시 안에서 녹색 공간이 발휘하는 현실적인 힘을 더 많은 사람이 이해하게 됐다는 뜻이다. 덕분에 설계공모를 통해 계획된 훌륭한 대형 공원도 여럿 갖게 되었고, 도시 내 공원을 만들기 위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도로와 철도를 지하화 하는 엄청난 토목 사업도 사회적 동의를 얻는다(그림 2). 또한, 조성 후에도 촘촘한 운영과 관리를 해야 공원의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는 정책적 인식도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의 일상 공간 아주 가까이에 있는 도시의 자연,(각주 1) 건물 한편의 조경 공간, 도로변의 가로수와 녹지, 동네의 오래된 작은 공원은 존재만으로 ‘기본은 하는’ 녹색의 가치를 다 발휘하고 있을까? 도시의 자연이라는 표현이 모호하고 넓지만, 이번 글에서는 산이나 하천, 대규모 공원이 아닌 일상 도시 공간의 작은 자연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일녹다역, 도시의 자연 도시의 환경오염과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위협이 점점 가시화되면서 도시 안 자연이 지닌 가치가 더 다양한 측면에서 증명되고 있다. 도시의 건조물과 대비해 ‘자연’이라 셈할 조건은 외기에 노출되어 날씨의 영향을 받는 식생과 토양일 것이다. 녹색의 식생은 벌레와 새의 서식처가 되어 도시 생태계를 구성하고, 그 시각적 가치가 심리적, 문화적 가치라는 2차 가치를 생산한다. 또한 대기와 땅속 물과 공기의 흐름에 닿아 있어 우수와 미세 먼지를 흡수해 홍수, 지하수 고갈, 공기 오염 문제를 완화한다.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직접 흡수할 뿐만 아니라 도시 열섬 현상 완화 등 미기후를 조절해 냉방 에너지 수요를 낮추는 간접적 작용도 기후변화 저감에 일조한다. 여러 자연의 가치는 사실 작동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다. 도시 생태계를 위해서라면 식생의 양이 절대적으로 많고 서로 이어져 있으며 실질적 생육 환경이 갖춰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경관적 가치를 위해서는 도시 공공 공간에서의 인지와 접근성, 조화로움을 위해 위치와 형태, 식재와 시설의 설계가 중요할 테다. 물 순환의 매개와 조절을 위해서는 같은 면적이라도 균등한 분포가 효과적이며 식재보다는 투수 조건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도시 안에서 자연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들은 자연의 여러 가치를 효과적으로 달성되도록 유도하고 있을까? 생태적, 경관적, 환경적 기능이 모두 잘 작동하도록 정교하지도, 그중 어느 하나라도 확실하게 달성하도록 효과적이지도 않다. 그런 제도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도시의 자연은 ‘대지의 조경’이다. 건축물을 지을 때 의무적으로 만드는 조경 공간의 목적이 무엇인지, 도시의 자연이 지닌 여러 차원의 가치 측면에서 매우 모호하다. 그러다 보니 개발 압력에 이런 저런 완화 조항이 쉽사리 허용되고, 결국은 그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법적 용어로는 200m2 이상의 대지에 의무적으로 조성하는 ‘대지의 조경’, 소공원, 어린이공원, 근린공원 등 ‘생활권공원’, 완충 녹지, 경관 녹지, 연결 녹지 등 ‘시설녹지’에 해당한다.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 유영수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스튜디오일공일 101, 생각을 그리다
    일공일의 생각 스튜디오일공일은 궁극적으로 소규모 스튜디오 방식을 추구한다. 외형적 규모에 욕심내지 않으며, 소수의 프로젝트를 깊이 있게 수행하며 모든 프로젝트에서 디자인의 집중력을 잃지 않는, 작지만 강한 조경 디자인을 지향한다. 프로젝트의 종류, 성격과 규모에 경계를 두지 않으며, 작은 정원에서부터 주거 단지, 오피스, 공원 및 오픈스페이스, 리조트 등 다양한 스케일을 넘나들며 단위 경관, 소재, 디테일 등 또 다른 차원의 경관적 융합을 이어가고자 한다. 마이크로micro 경관과 매크로macro 경관이 살아 숨 쉬는 공간,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풍성한 경관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101’의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실험성, 심미성, 실현성을 바탕에 두고 있다. 100 다음에 새롭게 시작하는 1이라는 숫자가 갖는 상징적 의미처럼,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이 새로움을 이끈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중심적 사고는 단순히 결과물 디자인의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행하는 모든 프로젝트의 바탕이자 과정이며 결과다. 현장 조사와 리서치, 분석, 디자인, 디자인 검증 등 프로젝트 시작부터 끝나는 순간까지의 전 과정에서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생성적 다이어그램을 통한 대상지 읽기, 디지털 또는 피지컬 모형을 통한 디자인 발전 스터디와 디자인 검증, 라이노를 통한 도면화, 디자인 감리 현장에서의 디자인 보정과 검수 등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제안하는 계획이 우리만의 태도를 담는 차별화된 경관 디자인 창작물로 안정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책임과 노력을 다하고 있다. 여전히 설계 스튜디오 ‘일공일’은 궁극적으로 구성원 모두가 직위 및 역할에 상관없이 개별적인 디자인 주체로서 존중받고, 동시에 책임감 있는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올 라운더(all rounder) 조경설계사무소를 추구한다. 설립 초기부터 공공 영역의 기본계획이나 대형 공공 프로젝트보다는 주로 민간 영역에서 벌어지는 규모가 작고 디자인 밀도가 높게 요구되는, 실제 시공으로 바로 이어지는 민간 특화설계 프로젝트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디자인 팀을 운영할 때 계획실과 설계실의 구분 없이 한 팀에서 기본계획부터 실시설계까지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수행하게 했다. 일종의 고급 조경이라고 불리는 높은 수준의 디자인이 요구되는 프로젝트는 골격 디자인을 시작할 때 부터 각 부분의 세부 디테일까지 함께 고려하는 경우가 많아서, 디자이너들이 디테일 디자인을 접어두고 계획안만 그리는 훈련만 하면 디자인 실력 향상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스럽게 다양한 스케일을 오가는 디자인 과정에 참여하고, 본인이 참여한 설계안을 3D 작업으로 실체화하는 데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고, 어떻게 도면화되는지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이 직원들을 올 라운더 디자이너로 성장시킬 것이라 본다. 같은 맥락에서 직원들에게 정원 공모에 참여할 것을 적극 권장한다. 정원박람회는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까지의 전 과정을 더 긴밀하게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더 나아가 다양한 정원 디자이너, 시공 전문가와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의무 사항은 아니지만, 공교롭게 지금까지의 모든 팀장급 직원은 개인 자격으로 공모전에 참가해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2015 순천만 한평정원 디자인전 작가부 선정(김현민, 차용준, 서용현, 김광중, 이상수), 2017 순천만 한평정원 페스티벌 작가부문 최우수상(오태현), 2020 경기정원박람회 작가정원 선정(이슬기), 2023 서울정원박람회 작가정원 부문 우수상(이세희, 장지연), 2023 서울정원박람회 작가정원 부문 우수상(최담희, 김선우) 등 다양한 정원박람회에 참여하고 수상했다. 공모전 참가자는 다른 직원에게 수차례 출품작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크리틱을 거쳐 작품을 발전시킨다. 시공작으로 선정되면 준공 시까지 필요한 작업이나 미팅, 답사 등을 업무 시간에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부분적인 경비를 지원한다. 직원 역시 본인의 여름 연차를 사용하거나, 작품 및 이미지 저작권을 회사와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장소의 이야기를 듣다 예전에 기고했던 ‘그들이 설계하는 법’(『환경과조경』2014년 4월호)에서 언급한 ‘인터페이스 랜드스케이프(접촉면 경관)’는 여전히 내가 조경을 하고 있는 이유이며, 스튜디오일공일 설계 철학의 바탕이다. 짧게 요약하면 우리가 디자인하는 조경 공간의 이용자는 ‘조경가가 설계한 공간(다른 의미로는 조경가에 의해서 해석된 공간, 또는 원래 대상지가 가지고 있었던 무수한 역사적, 환경적 정보와 의미가 조경가에 의해서 선별되고 해석되어 다른 공간으로 재탄생된 공간)’의 이용을 통해서만 그 공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조경이라는 작업은 대상지와 이용자 사이의 역사, 문화, 생태, 그리고 공감각적 감흥을 포괄하는 ‘접촉면 경관’을 형성하는 작업이며, 그것을 통해 이 땅의 가치를 이해하고, 경관과 소통하고, 장소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의미 깊은 작업이 아닐까. 우리가 대상지 리서치와 분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아가 우리가 이러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이러한 땅과 자연, 그리고 시간의 의미를 경관과 함께 통합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전문가는 조경가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도시숲과 숲놀이터 생명의숲은 학교숲운동과 도시숲운동 등 날로 열악해지고 있는 도시 환경에 숲을 통해 다시 건강한 도시 생태계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시민단체다. 우정숲 프로젝트는 당시 도시숲운동의 일환으로 이 사업을 후원하던 우정사업본부가 서울중앙우체국 공개 공지에 기존 시설 철거 후 도시숲을 조성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명동의 입구인 대상지는 불과 60~70년 전까지 남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퍼져 있던 남산의 끝자락이었고, 민족의 상징적 의미인 남산의 생태계가 열악한 도시 환경에 의해서 생태적 천이의 방향이 건강한 숲의 방향이 아닌 오염에 강한 산업 단지의 도시림인 팥배나무림와 산딸나무림의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러한 주제를 담아 도시의 포장 블록을 뚫고 올라오는 자연의 힘을 모티브로 한 ‘들썩플랜터’를 주요 시설로 하는 도시숲운동 기념정원을 조성했다. 이 프로젝트를 인연으로 2023 모두에게 평등한 숲 만들기 희망숲 2호: 틈새숲, 2024 희망숲 3호: 무궁화기념정원, 2024 청주가드닝페스티벌 입구정원: 씨앗숲 등을 통해 도시에서의 숲과 자연의 의미를 전달하는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있다.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와 협업 프로젝트로 함께하게 된 유니세프 아동권리공간 ‘맘껏숲’ 프로젝트 역시 버려진 도시 공간을 다양한 연령의 아동을 위한 자연 여가 공간으로 조성한 숲놀이터다. 김아연 교수와는 이전에 군산의 유니세프 아동권리광장 ‘맘껏광장’을 통해서 18세 이하 아동(청소년)을 위한 자립적 활동 공간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선행한 적이 있다. 맘껏숲에서는 맘껏광장보다 심화된 콘셉트를 활용해 평일 낮과 주말에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숲 놀이터를 마련하고, 저녁 시간에는 청소년을 위한 공방 및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청소년 숲 여가 공간을 조성했다. 홍석환 교수(부산대학교 조경학과)와 함께 진행한 밀주초등학교 역시 이와 비슷하게 밀양의 구도심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생태적 자연 놀이터로 전환한 프로젝트다. 자연 놀이터 완공 후 입소문을 타고 대도시에서 전학을 오는 등 2개 학급이 늘어나고, 많은 주변 학교와 지자체 교육 관계 부서의 견학이 이어지는 등 큰 이슈가 되었다. 사무실을 운영한 지 올해가 벌써 9년 차다. 돌이켜 보면 한 해, 한 해 매년 정신없이 지나가기만 한 것 같은데, 이런 저런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제법 많이 쌓였다. 그들 간에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통일된 방향성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이런 것들이 일공일의 이미지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자리를 빌려 일공일의 지난 9년을 함께 노력해 준 모든 직원들에게 감사했고, 앞으로도 여전히 감사한다는 말을 전한다. 스튜디오일공일(STUDIO101)의 ‘101’은 100 다음의 새롭게 시작하는 ‘1’을 의미한다. 기본에 충실한 것이 곧 새로움의 시작이라는 디자인 철학을 기반으로 실험성, 심미성, 실현성을 갖춘 작업을 지향하는 실천적 조경설계사무소다. 정원, 오피스, 공원, 주거 특화설계, 리조트 및 테마파크 등 실제 시공으로 이어지는 공공·민간 영역의 다양한 외부 공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눈치 싸움 산책 vs 조깅 vs 자전거
    에피소드 1. 타돌이의 반기 이 글을 작성하기 바로 며칠 전, 자유를 갈망한 타조의 성남 도심 탈출기가 기사를 탔다. 함께 지내던 친구가 먼저 세상을 뜨며 상실에 빠진 ‘타돌이’가 근처 생태 체험장에서 탈출한 것으로, 대로에서 버스와 나란히 달리는 위험천만한 풍경이 펼쳐졌다. 봄날의 한 일화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최근 연구실에서 토론하고 있는 ‘비인간 도시’의 조건이 생각나며 그 잔상이 가시질 않는다. 만약 이곳이 타조가 뛰어다니는 게 익숙한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이라면 타조를 위한 별도의 도로가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야생 동물이니깐 인간의 신호 체계에 무조건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야생 동식물 서식처의 연결과 이동을 돕고자 만든 생태 통로가 일반화됐듯, 타조가 도시를 활보하는 어떤 차원에서는 공존을 위한 또 다른 규칙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사실 안전하고 편리한 도시를 꿈꾸며 만들어낸 도로 규칙들은 결코 고정적이지 않다. ‘우회전할 때 횡단보도가 빨간불이면 무조건 멈춤’이라는 규칙 역시 이제 갓 돌이 지난 신생 규칙 중 하나다. 보행자와 운전자의 안전을 위해 제정된 교통 규칙이다. 한 차원 깊이 들어가자면 도시 공간을 누가 점유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실려 있다. 이처럼 실제 공간 규칙은 필요에 따라 언젠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반대로 관습화된 규칙은 변화에도 쉽게 움직이지 않으며 아주 천천히 바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치렀던 운전면허시험의 기억도 이미 가물가물(참고로 필자는 운전면허 필기시험 73점을 받은 용사다). 실제 우리가 도시 공간을 향유할 때는 대부분 본능처럼 체화된 규칙을 따르기 마련이다. 이 도시 공간 활용의 변화는 반드시 갈등을 불러오고, 공원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스테드: 뉴욕의 산책과 드라이브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의 걸작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보스턴 에메랄드 네클러스 공원 시스템(Boston Emerald Necklace Park System)은 뉴욕 센트럴파크와 프로스펙스 공원에서 그가 꿈꿨던 ‘녹지이자 교통 인프라이자 여가 공간’으로서 공원이 실험된 곳이다. 특히 파크웨이와 함께 회자되는 옴스테드의 발상 중 하나는 도시의 분리 이용에 관한 것이다. 필자가 종종 참고하는 옴스테드의 1870년 보스턴 미국사회과학협회 발표문을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12년 전 뉴욕에서 드라이브(pleasure driving)를 하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최소한 1만 마리의 말이 드라이브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 12년 전에는 경량 마차를 위한 길이 전무했다. 오늘날에는 준공된 공원 내 14마일에 달하는 드라이브 코스가 있고 사람이 바글거린다. (뉴욕과 브루클린) 두 도시를 합하면 50마일에 가까운 파크웨이가 조성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적어도 평균 150피트 넓이의 녹지 경계가 만들어질 예정이다.”(각주 1) 비단 옛날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공원 조성 관련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흔히 목격하게 되는 것이 조용하게 자연 속에서 산책할 수 있는 공원에 대한 욕망과 다양한 운동과 활동이 가능한 공원에 대한 욕망의 부딪침이다. 공원 내 자전거 도로용 신호등 체계나 골프 카트와 전기 자동차가 일렬로 서 있는 관리자용 주차 구역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지 않게 단차를 조정하고 동선을 그려놓은 센트럴파크를 누가 그려냈는가 생각해보면, 이처럼 욕망의 부딪침으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는 건 결국 설계가의 몫이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 [에디토리얼] 지사(地史)를 돌보고 가꾸는 조경가
    한국 조경 50년사를 대표하는 1세대 조경가 정영선. 그의 삶과 작업을 조명하는 전시회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식목일부터 9월 2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4월 17일에는 그의 조경관을 담은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감독 정다운)가 극장 개봉한다. 세계조경가협회IFLA 제프리 젤리코 상을 받은 지난해에 이어 2024년은 가히 정영선의 해라고 할 만하다. 지난 50년간 정영선(조경설계 서안)의 손을 거친 작품은 정확한 목록을 작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개인과 기업의 정원, 도시 가로와 광장, 근린공원, 기념공원, 생태공원, 산업시설 재활용 공원, 선형 공원, 묘역, 병원, 오피스, 상업시설, 복합문화공간, 공동주택단지, 공장, 캠퍼스, 종교시설과 단지, 테마파크, 리조트, 하천. 그가 다룬 프로젝트의 유형은 조경 직능의 다양성과 복합성 그 자체를 예시한다. 이 방대한 작업을 관통하는 ‘정영선 조경’ 고유의 특징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자연스러움’, ‘꾸미지 않은 듯한 꾸밈’, ‘한국적 풍경’ 같은 형용어로 그 특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정영선 조경 특유의 미감을 낳는 설계의 기반은 땅의 시간과 이야기를 읽어내고 주변 경관과 관계 맺는 태도다. 그의 작품은 즉물적이고 감각적이지만 그가 자신의 태도를 설명하는 방식은 관념적이고 이론적이다. 정영선의 글과 말에서 그의 태도를 대변하는 개념을 단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지사(地史)”를 택할 것이다. 그는 ‘지사’란 지형, 지질, 토양, 인문, 사회, 역사, 문화 등을 포괄하는 시공간적 맥락을 뜻한다고 말한다. 한 인터뷰에서 정영선은 매우 간명하게 조경의 직능을 정의한다. “조경가는 연결사”다. 지사, 즉 땅의 시공간적 맥락을 섬세하게 독해해 설계의 조건과 연결하는 태도가 그의 작업을 가로지른다. 지사를 잇고 엮는 태도를 담은 그의 문장 몇 구절을 옮긴다. “우리가 다루는 대지[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절대 독립되지 않고 시‧공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조경이라는 작업[에서는] …… 관계를 다듬고 설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경관은] 글자의 선택과 배열, 호흡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시’처럼 세심하게 다뤄져야 한다.” 지사를 돌보고 가꾸는 정영선의 설계는 대표작인 희원과 선유도공원을 비롯한 여러 작업에 구현되었지만, 그것을 가장 직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오설록 티뮤지엄(+이니스프리 제주 하우스)일 것이다. 제주도의 필수 관광 명소로 자리 잡은 오설록 티뮤지엄은 아모레퍼시픽이 1983년부터 일궈온 차나무 재배지인 서광다원 한구석에 있다. 24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차밭은 불모의 황무지인 곶자왈을 개간해낸 역동적인 생산 경관이다. 곶자왈은 지하 깊숙한 곳까지 돌과 자갈이 덮여 있어 지형이 울퉁불퉁하고 가시덤불과 양치류가 얼크러져 정글처럼 빽빽한 제주도 특유의 야생 숲이다. 정영선과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loci)은 오설록 티뮤지엄의 새 경관을 직조하면서 건물에 맞붙은 거친 곶자왈 숲의 지형과 수목, 돌과 풀을 그대로 받아들여 재해석했다. 제주 중산간 저지대 고유의 ‘지사’가 쌓인 곶자왈의 원풍경을 돌보고 가꿔 장쾌한 녹차밭 경관의 지사와 연결한 것이다. 오설록 프로젝트는 현재진행형이다. 함께 작업해온 건축가 조민석(매스스터디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둑알을 하나씩 놓아 바둑판 위에 ‘집’을 키우듯 …… 환경과의 관계성을 단계적으로 구축하고 확장해나가는 느리고 섬세한 과정이었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한 원로 조경가의 회고전이 아니다. 조경설계를 개척하고 이끌어온 한 개인의 업적뿐 아니라 한국 조경 50년의 성장사와 그 이면을 새롭게 읽을 수 있다. 다음 50년의 좌표를 질문하고 설계할 수 있다.
  • [풍경감각] 여전히 남아있는 풍경이 있다
    설계 수업을 들을수록 책이 늘었다. 조경은 나무를 심는 게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하며 수강한 1학년 기초 설계 스튜디오. 교수님은 대상지를 분석하고 좋은 개념과 콘셉트를 제시하는 것이 나무를 고르는 일보다 먼저라고 했다. 대상지 분석? 좋은 개념? 콘셉트? 이것들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선배들에게 도움을 구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줄기처럼 촉감만 스쳐 갈 뿐 좀처럼 움켜잡을 수 없었다. 책 속에서 단단한 것을 건져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알쏭달쏭한 단어를 만날 때마다 책을 사 모았다. 조경설계를 그만두면서 이 책들을 버렸다. 자취방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책을 볼 때마다 조경가를 꿈꾸었던 지난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 모으니 손수레로 두 짐이 되었고 빠르게 치우고 싶어 고물상에 팔기로 했다. 그런데 한 짐을 내려 두고 집으로 돌아오니 나머지 책이 사라져 있었다. 폐지를 모으는 이웃 할머니가 그새 챙겨간 것이다. 내 책을 뒤적이고 있는 할머니에게 마음대로 가져가시면 어떡하냐고 돌려 달라고 했다. “버리려고 내놓은 거 주워 간 게 잘못이냐?” 할머니는 역정을 냈지만 꿋꿋이 책을 되찾아 와 고물상에 팔았다. 가끔씩 오래 전의 책장을 떠올린다. 어떤 책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을 찾았는지 기억을 되짚는다. 가물가물하다. 왜 동네 할머니와 다투면서까지 책을 되찾아 왔는지 생각해본다. 그냥 두었다면 그 무거운 짐을 챙겨 귀찮은 걸음을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을 텐데. 이해하기 어렵다. 책을 색깔과 크기로 나누어 꽂아 두었던 책꽂이와 해가 갈수록 색이 옅어지던 책등, 테두리가 노랗게 변색된 내지, 그리고 지저분하게 붙여 놓은 포스트잇만큼은 선명하다. 손가락을 적시는 물줄기의 촉감처럼 여전히 남아있는 풍경이 있다.
  • [어제의 대화, 오늘의 재구성] 유청오 공감 너머의 공명
    ‘빛 우물’에서 처음 만났다. 2015년 12월, ‘유청오의 이 한 컷’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동그란 중정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식물들 위를 가로지르며 죽죽 뻗은 단풍잎을 닮은 빛줄기가 인상적이다. 우물을 수식하는 단어로 빛을 쓰기에는 그 양이 좀 부족하지 않나. 사진을 두어 번 더 들여다보고 나서야 해가 내리쬐는 각도에 따라 저 우물이 빛으로 가득 차는 시간도 있겠다는 걸 깨달았다. 사진 찍는 일이 시 쓰는 일과 닮아 보였다. 막연히 사진 찍는 일은 낭만적일 거라 상상했다. 카메라를 메고 현장의 분위기를 흠뻑 탐미하다가 시적 풍경을 포착하는 순간 멈춰 셔터를 누를 거라고. 하지만 실제는 전혀 달랐다. 사진 촬영은 체력전이다. 종일 뛰어다니고 무거운 장비를 지고 끌고 다녀도 온몸의 관절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사진가로 살아남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름이면 유청오는 기능에 충실한 테크웨어를 입고 팔에 토시를 낀다. 목 뒷덜미와 귓바퀴 바깥에까지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카메라 서너 개와 드론을 들고 현장을 뛰어다닌다. 해가 대상지 전역에 고루 뿌려지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기에, 겨울이면 더욱 바빠진다. 시간, 날씨와 싸우는 동시에 설계 의도를 캐내기 위해 조경가와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인터뷰를 함께 갈 때면 유청오는 사진가를 넘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조경을 전공하고 실무를 경험한 전 조경가로서 “저 하나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하고 말을 뗀 그는 내가 생각지 못 한 질문을 던진다. 그 방식이 무례하지도 흐름을 깨트리지도 않는다. 렌즈 앞에 서는 걸 어색해하는 인터뷰이를 위해 일부러 농담을 던지거나 대신 포즈를 취하며 딱딱한 분위기를 녹인다. 사람과 잘 어울리는 게 천성이냐는 내 물음에 유청오는 답했다. “사람을 찍을 때는 공감과 존중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일종의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거예요. 서로 일 때문에 만난 게 아니라 공유하는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함께 만들지 않은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사진에 담는 것은 기억을 박제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좀 거창하게 말했네요. 결국 소통이 중요하고 촬영은 그 다음이라는 말이에요.” 어쩌면 유청오의 사진은 프레임 안과 밖에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쓴 시일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뭐했나요? 단순히 어제의 일과를 묻는 게 아니라 인생에 대한 질문처럼 느껴져서 고민했어요.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내가 무엇을 찍고 있는지 고민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어요. 올해가 조경사진가라는 단어를 명함에 새기고 일한 지 10년이 되는 해에요. 그런데도 일은 언제나 어렵고 사진도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 더 나은 사진을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하는 중간 틈틈이 답을 구하려 애쓰고 있어요. 『환경과조경』과 함께하게 된 지 10년이에요. 첫 작업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나요. 마로니에공원, 잘 찍고 싶은 욕심에 자꾸 갔어요. 고생은 기억에 남는 법이라더니 지금도 생생해요. 2014년 『환경과조경』이 리뉴얼 하면서 전속 포토그래퍼를 찾고 있었고 제게 연락이 닿았어요. 운이 좋았죠. 『환경과조경』의 첫 의뢰로 마로니에공원을 찍게 됐는데 그 자체로도 의미있었지만, 10대 후반을 거쳐 20대 시절을 대학로에서 보낸 터라 마로니에공원에 얽힌 추억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더 잘 찍고 싶었고요. 이 작업을 하며 ‘익숙한 것에 대한 낯섦’이 뭔지 알게 됐어요. 자주 가던 곳이니 공원이 리뉴얼되며 바뀐 곳이 어디인지도 명확했고, 미리 전달받은 설계 자료를 통해 어떤 부분이 중요한지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개인적 경험과 잘 찍고 싶다는 욕심과 뒤엉켜 헝클어졌던 것 같아요. 서너 번 방문한 후에야 그냥 현장에 집중해보자고 생각했죠. 그런데도 카메라를 들기 어려웠어요. 하루 종일 앉아서 보기만 한 적도 있고, 두어 시간 주변을 돌다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공원 특성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당시 마로니에공원은 무대와 광장, 배후 건물들과의 연결 고리로 작동하고 있었거든요. 어디에서 어떻게 찍어야 공간의 유기성이 보일지, 프로그램도 함께 담을 수 있을지 고민했던 거 같아요. 그렇게 큰 규모의 공간도 아닌데, 현장에 열 번도 넘게 방문했어요. 그런데도 육체적 고통보다 심적 고생이 더 컸던 작업이었습니다. 조경이라는 피사체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누군가 내게 조경 사진을 찍어달라고 카메라를 쥐여 준다고 상상하니 막막하더라고요. 프레임에 무엇을 얼마큼 담아야 하는지 감이 안 잡혀요. 도발적인 답이지만, 그걸 알았다면 사진 일타강사가 됐을 겁니다. 워낙 조경이라는 범위가 넓고 다루는 대상도 많아 프레임에 담아야 하는 것을 꼬집어 말할 수 없네요. 누군가 조언을 구한다면 되도록 정면을 찾아보라고 권할 겁니다. 이때의 정면은 촬영자, 설계자, 시공자, 의뢰인 등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따라 달라져요. 이에 따라 어디까지 찍어야 할지 경계를 만들어 찍고 있어요. 클라이언트는 종종 거울로 본인 얼굴을 보듯 공간을 바라봐요. 즉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원하죠. 사진은 객관적 매체지만,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빛의 화장술이 필요할 때도 있어요. 또 담을 것을 찾기보다 담을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현장의 이론적 배경, 날씨, 장비, 자신의 능력을 아는 게 중요하죠. 건축 사진의 경우, 건축물을 오브제처럼 담거나 건축물의 각을 회화적 요소로 사용하기도 하죠. 조경 사진에서 이런 시도를 해본 적이 있나요. ‘조경에서 무엇이 오브제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비슷한 고민을 해본 적 있는데 결국 사람이 조경의 오브제가 아닐까 싶더라고요. 조경은 대지에 흩어져 있는 나무, 벽, 땅, 시설, 포장 등 여러 요소가 만들어낸 공간이거든요. 공간(空間)이라는 단어의 뜻 자체처럼 채워지지 않은 곳을 찍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꼭 여집합을 찍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요. 예를 들어, 수벽으로 공간을 위요시키는 개념을 보여주려면 수벽이 아닌 수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찍어야 하는 식이죠. 결국 공간의 의도를 보여줄 수 있는 오브제는 그 수벽 안에서 아늑함을 즐기는 사람이 돼요. 인체 스케일을 넘어 넓게 펼쳐진 광장에서는 뛰노는 아이들이, 잔디밭에서는 피크닉을 온 가족이 오브제가 되는 셈이죠. 조경 안의 모든 피사체가 오브제로 치환될 수도 있다고 상정하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담을 것을 찾기보다 담을 수 있는 것을 찾는다는 것도 여기에 기반을 둔 생각이고요. 대상을 어떤 관점으로 담느냐에 따라 색다른 느낌을 낼 수 있어요. 조경이 식물을 많이 다루다보니 식물로 다양한 시도를 해봤는데, 회화적으로 찍을 수도 있고 현대적으로 느껴지게 할 수도 있죠. 비슷한 도구를 쓴다고 해서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에요. 같은 붓으로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말이죠. 악보를 보며 운율을 상상하는 음악가나 시나리오를 쓰는 감독과 같은 마음으로 대상지에 깔려 있고 솟아나오는 모든 조경 요소를 바라보고 있어요. 사진은 언제부터 좋아했나요. 고등학교 시절 두 살 터울인 형에게 큰 영향을 받았어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군대에 사진병이라는 보직이 있었어요. 부대 내 행사나 훈련 내용을 촬영하는 일을 하죠. 대학에 입학한 형이 사진병 준비를 시작하면서 사진 학원에 등록했고 카메라를 샀습니다. 펜탁스에서 나온 SLR 카메라였어요. 완전한 수동 카메라가 주는 감각이 새로웠어요. 전에는 일회용 카메라나 소위 똑딱이라 부르는 카메라 정도만 다뤄봤거든요. 조리개나 셔터 스피드 같은 카메라의 메커니즘 자체도 매력적인데, 그 결과물이 이미지로 남는다니 관심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형이 군 제대를 한 후에 카메라를 물려받았고, 손에 쥐고 쓰다 보니 궁금한 게 생겼죠. 책을 읽으며 답을 찾아보고 사진에 대한 호감이 더 깊어지고 하는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반복된 거죠. 처음 갖게 된 본인 소유의 카메라는 뭐였나요. 캐논의 20D. 20대 중반 정도에 취미 생활을 본격적으로 할 생각으로 들였는데, 샀을 때의 그 설렘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민감한 기계라 끌어안고 자진 못했지만, 머리맡에 두고 자고 틈만 나면 손에 쥐고 있었죠. 벌써 20년이나 됐네요. 전 디지털 카메라의 수혜를 받은 세대에요. 만약 필름 카메라밖에 없었다면 과연 내가 사진을 업으로 삼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하거든요. 필름 값과 현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으니까요. 한참 동호회가 유행하던 시기라 사진 동호회에 가입해 형, 누나들에게 많이 배웠어요.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만 했던 상상을 사진으로 찍어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죠. 이즈음에 사진으로 용돈벌이를 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회사마다 웹진을 내는 게 트렌드였거든요. 웹진 사진 전문 포토그래퍼도 있던 때였어요. 동호회에서 만난 형 소개로 웹툰 회사와 건설사와 연이 닿아 사진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죠. 그때의 경험이 지금 도움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투박하고 쑥스러움을 타는 경우가 많아요. 카메라 앞에 서는 걸 어색해하시죠. 그 딱딱한 분위기를 말랑하게 풀어내고 자연스러운 표정과 자세를 끌어내는 방법을 조금 배웠어요. 공사 현장을 둘러보며 그 복잡하고 정신없는 분위기에 익숙해지기도 했어요. 현장 시스템이 어떤 순서로 흘러가는지도 경험했고요. 설계사무소를 다니다가 조경사진가로 전향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조경사진가를 꿈꾸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경제적 측면에서 괜찮은 편인가요. 대단한 계기가 있던 건 아닙니다. 훗날 사진가가 될 거라면 지금 당장 시작하자는 생각이었어요. 무모했죠. 금전적 기반도 없었고, 촬영 능력도 사진과 관련된 배경도 부족한 상태였거든요. 그래도 신났던 기억이 나네요. 경제적 측면은 의식주의 목표를 어느 선에 맞추느냐에 따라 달렸다고 봅니다. AI 기술이 발달하며 의도한 이미지를 좀 더 쉽게 만들 수 있게 됐잖아요. 현실을 반영하는 사진가라는 직업을 과연 유망하다고 말할 수 있나 싶기도 해요. 하지만 AI와 달리 사람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구현하려 하잖아요. 분명 사람이 찍은 사진이 필요할 거라 생각해요. 카메라를 매개로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먹고사는 건 가능합니다. 얼마를 버느냐는 문제는 다른 차원의 일이겠지요. 대학원에서는 무엇을 공부하셨어요. 넓은 시야를 배운 것 같아요. 대학원은 그냥 무언가를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진학한 거였어요. 학부를 졸업할 즈음 막상 조경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특출 나게 잘하는 것 없이 운 좋게 입학했고 그때의 결정에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닌 대학원은 학부 때와 다른 특유의 공기와 분위기가 있었어요. 다양한 곳에서 온 사람들이 가볍고 무거운 사건들을 겪는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보고 배우게 된 것들이 있어요. 늘 사진 잘 찍는다는 소리를 들었었나 봐요. 쑥스럽지만 제법 듣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사진을 더 좋아하게 되고, 자존감도 올라가고 그랬죠. 학생 때는 학과 행사 사진 촬영은 모두 제 몫이었죠. 대학원과 설계사무소에서의 경험이 사진을 찍는 데 미치는 영향은 없나요. 이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없을 겁니다. 대학원은 시야를 넓혀 주었고 설계사무소는 조경의 구조를 아는 데 도움이 됐어요. 대학원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며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그 과정에서 겸손함을 배웠고 모르는 것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하는지 터득했어요. 작은 울타리에서 한 발 밖으로 나가는 법을 배웠달까요. 설계사무소에서의 실무는 조경 자체를 알게 해줬죠. 같이 일했던 선후배는 현실 감각을 일깨워줬죠. 대학원과 설계사무소에서 각각 삼 년 정도의 짧은 시간을 보냈는데, 어쩌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작업을 함께 하며 사진에 대한 대화를 종종 나눴잖아요. 그때마다 상업 사진과 작품 사진 사이의 괴리에 대한 고민을 꾸준히 한다고 느꼈어요. 그 작업의 균형점을 찾아나가고 있나요. 답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상업 사진이 무엇이고 작품 사진은 무엇인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어요. 선을 긋는 게 맞는지도 혼란스럽고요. 제 사진에 아직 작품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 낯 뜨겁기도 하고요. 조경설계와 비슷한 부분도 있어요. 조경설계에 클라이언트가 있듯 제가 의뢰를 받아 찍는 사진에도 클라이언트가 있거든요.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장면이 있기도 하고, 말하지 않아도 저 스스로 클라이언트 성향을 의식해 작업하기도 해요. 다루는 피사체 자체가 조경가의 작품이기도 하잖아요. 상업적 속성과 작품으로의 방향을 둘 다 품고 싶은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환경과조경』에 ‘유청오의 이 한 컷’을 연재하고 있죠. 글이 없는 지면이라 늘 제목만 보고 담긴 의미를 추측하곤 했거든요. 어떤 마음과 목표로 이 지면을 채워나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조경 미디어에 실리는 사진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두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어요. 첫 번째는 현장 스케치나 설명적인 사진을 지양하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여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쉼표 같은 지면을 만드는 겁니다. 굳이 해석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는 꼭지가 되어도 좋고요. 제목도 되도록 추상적으로 짓고 있어요. 두 번째는 반드시 조경 현장에서 찍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의도적으로 작정하고 이 한 컷을 찍기도 하고, 찍어 온 사진 중 하나를 이 한 컷으로 선정하기도 하죠. 서울식물원에서 진행한 ‘더 튤립’ 전을 인상 깊게 봤어요. 조경을 전공한 사람이 찍은 식물 사진이니, 식물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자연에 가깝게 찍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회화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사진이 가득했어요. 작업 과정과 의도가 궁금해요. 튤립의 특성과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은 사진은 서울식물원이 펴낸 『튤립 도감』에 실렸어요. 더 튤립 전은 이 도감 작업의 연장선인 셈이죠. 튤립은 장미와 더불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종이에요. 육종가들이 다양하고 화려한 꽃을 피우도록 개량을 거듭해왔고 그 종수가 셀 수 없이 많아요. 서울식물원에는 200종이 넘는 튤립이 있었어요. 싹을 틔우기 전 튤립 구근이 쫙 깔려 있는데, 막막했어요. 튤립은 대부분 같은 시기에 꽃을 피우거든요. 2주 내 200송이의 꽃이 천천히 피어날 예정이었죠. 또 햇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꽃잎이 벌어져서 아침, 점심, 저녁의 모습이 달라요. 즉, 200여 종의 튤립 모습을 비슷한 조건으로 찍기 위해서는 제가 그만큼 부지런해져야 한다는 말이었죠. 예상은 했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웠어요. 전시를 위한 사진 작업은 또 색달랐어요. 튤립은 꽃받침이 없어 구조적으로 찍기 좋은 꽃이에요. 또 다른 종과 접붙여 개량되다보니 수국처럼 피는 튤립, 난을 닮은 튤립 그 형태가 무궁무진하죠. 그렇게 다양한 꽃들을 매일 꾸준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꽃송이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서사를 가진 인물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오랜 시간을 들여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구근 식물인 튤립은 길어야 3~4년을 살고 대부분 한해살이에요. 사진 찍던 중 제가 튤립의 온 생애를 다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꽃이 핀 순간을 포착하는 일이 튤립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기록하는 일이라 생각하니 슬퍼지더라고요. 자신이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것을 차려입고 화려하게 단장한 사람들의 영정사진을 찍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묘한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다채로운 튤립의 색에서 전통인물화를 떠올렸어요. 먼 이국에서 한국에 온 튤립을 존중하고 그 특성을 기록하고자 동양적 느낌을 내고 싶었어요. 그렇게 더 튤립 전이 완성됐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후에 수선화 도감 작업도 진행했어요. 사진을 찍다보면 조경과 관련된 사회 문제나 이슈가 보이기도 할 것 같아요. 조경은 인간의 삶이 반영된 결과물이라 생각해요. 즉 제가 찍는 촬영 대상은 이미 사회적 결과물로 빚어진 방증인 거죠. 몇 년에 걸쳐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친 코로나19, 계절마다 이슈가 되는 미세먼지와 황사,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안전하고 다양한 방식의 휴게 공간 등에 대한 인식을 담아 사진을 찍는 게 제 일이기도 합니다. 어린이를 보기 힘들어진 어린이 놀이터와 공원을 보며 새삼 인구 감소 문제를 실감하기도 해요. 조경 외에 관심 있는 피사체는 뭔가요. 잊히는 것들에 관심이 많아요. 구도심의 모습, 사람의 흔적을 좋아합니다. 언제까지 새것을 지향하기는 어렵잖아요. 새롭고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시대라 그런지 피고 지는 계절이 더 값지고 의미 있게 느껴져요. 찍기에 가장 까다로운 대상도 있을 것 같아요. 목적성이 보이지 않는 공간을 찍는 게 쉽지 않아요. 명확한 의도 없이 좋아 보이는 것을 섞은 공간을 촬영할 때면, 저 역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미지를 재생산하게 되더라고요. 앞서 말하기도 했지만 빈 곳을 찍는 것도 어려워요. 보통 조경가의 의도와 공간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사람을 함께 담는 방식을 택하는데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찍어요. 때로는 나무와 벤치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찍기도 하죠. 의식하고 찍지 않았는데 그런 이야기가 공간에 씌워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해요. 진입 공간을 설계할 때 입구성을 강조하기 위해 큰 나무를 심거나 너럭바위, 벤치 등을 놓기도 하잖아요. 같은 맥락입니다. 조경이라는 단어를 풀어 해설하면 경관을 짓는 일이라고 할 수 있죠. 경관이라는 단어를 참 넓게 풀이할 수 있는데, 때로는 사람을 품기도 해요. 사람을 프레임에 담을지 담지 않을지를 어떻게 결정하나요. 사진(寫眞)의 한자 풀이가 사실을 베낀다는 뜻이니 조경 사진은 경관을 베껴 넣는 일이기도 할 겁니다. 사진은 사실에 의탁하고 조경은 경관에 의탁을 하니 둘이 속성이 비슷한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조경과 사진 모두 사람을 위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이라 생각해요. 조경은 사람을 전제한 경관을 만드니 조경 사진은 그 경관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면 되는 것이겠죠. 공간 안에서 사람이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진을 찍지는 않습니다. 현장에서 목격하는 무수히 다양한 사람의 행태를 예상하거나 조정하는 건 바람의 방향을 맞추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에요. 사람을 중심에 두기보다 현장의 나무, 꽃, 튀어 오르는 물방울, 새어나오는 빛을 의인화해서 생각하곤 해요. 조경 요소를 ‘미녀와 야수’의 마법에 걸린 사물들처럼 여기는 거죠. 그러면 팽나무의 뻗은 나뭇가지가 지나는 사람에게 흔드는 손이 되기도 하고, 일렬로 선 단풍나무가 그려내는 모양이 기차놀이 하는 아이들의 행렬이 되기도 해요. 사진을 찍으며 생긴 루틴, 철학, 원칙은 없나요. 공간의 정면을 찾는 데서 시작하는 게 루틴이 됐어요. 사진 한 장에 모든 단계와 모든 규모의 공간을 담을 순 없죠. 그렇기에 전 공간을 관통하는 통일된 이미지를 사진에 담아야 하기 마련입니다. 사진으로 조경을 읽는 방법이라 일컬어도 될 것 같아요. 모든 작업에서 공간의 대표이미지―얼굴―를 찾는 일을 가장 먼저 합니다. 평소에 스냅 사진도 찍나요. 갑자기 반성하게 되네요(웃음). 요즘 일상 스냅은 자주 찍지 않아요. 일부러 안 찍는 건 아니고, 일이 바쁘다보니 작업을 하는 중 틈이 나거나 눈을 사로잡는 장면이 있으면 스냅을 찍는 식으로 바뀐 것 같아요. 닮고 싶은 사진가가 있다면요. 제임스 낙트웨이(James Nachtwey)를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전쟁사진가 혹은 포토저널리스트로 불리는데, 전쟁의 최전선에서 폭력과 상처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해왔어요. 20대에 우연히 보게 된 다큐멘터리 ‘워 포토그래퍼(War Photographer)’(2001)를 통해 그를 알게 됐어요. 사실 제목만 보고 고른 영상이라 전쟁터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진가들의 모습을 다루는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제임스 낙트웨이를 다룬 인물 다큐멘터리더라고요. 전장을 누비는 낙트웨이의 모습을 추적할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 인터뷰를 통해 그의 다채로운 면면을 탐구하는 영상이었죠. 흥미로운 장면이 많았지만, 그중 제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인터뷰를 통해 엿본 낙트웨이의 진중한 자세였어요. 큰 감명을 받았죠. 총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전장을 누비다 돌아오면 현장에서의 흥분감이 안전지대의 숙소로 돌아온 후에도 가라앉지 않기 일쑤거든요. 보통의 사진가들은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정돈되지 않은 마음을 돌본다고 하는데, 낙트웨이는 이에 동참하지 않고 조용히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고 하더라고요. 그 모습이 진중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걸까?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불행이… 내 성공의 밑바탕이 되었던 걸까? 나는 그 사람들을 착취하는 걸까? 나는 카메라를 든 흡혈귀인가?” “가장 힘든 건 내가 타인의 불행을 이용한다고 느낄 때다. 이 생각은 날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매일같이 내가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최대한 대상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노력한다. 외부인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인간애에 어긋나는 일일 수 있다. 나의 입장을 내가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존중하는 것이다. 내가 존중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그만큼 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낙트웨이가 끊임없이 들려주는 고민과 갈등에서 사진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읽을 수 있었고, 그런 마음가짐을 닮고 싶다고 생각했어요.사진가는 아무리 피사체에 깊이 몰입하더라도 그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대상에 깊이 공감하더라도 현장에서 빠져나오면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죠. 피사체와 나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걸 인정하되, 그 대상을 무례하게 대하지 않는 방법이 필요해요. 전쟁터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제가 찍는 조경 현장 역시 설계, 시공, 기획 등 여러 사람의 손과 노력을 거쳐 완성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늘 존중하려 애씁니다. 단순히 내 눈에 보기 좋은 장면을 포착하기보다 공간 기획 의도와 만들어지기까지의 서사를 담을 수 있는 사진을 찍으려 노력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엄청난 사명감으로 셔터를 누르는 건 아니지만, 무책임하지 않으려 해요. 촬영 전에 설계 도면과 자료를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설계자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죠. 그러면 공감을 넘어 공명하는 순간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어요.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진, 보는 사람을 더 몰입시키는 사진을 찍을 수있게 됩니다. 마이클 케냐(Michael Kenna)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스물세 살 무렵 길을 가다 본 포스터에 반해서 그와 그의 작업을 열심히 찾아봤던 기억이 나네요. 후 작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많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편이에요. 의도에서 벗어난 것들이 현장에 놓여 있는 경우도 있고 날씨의 영향을 받는 날도 있거든요. 이런 요소를 약화시키고 강조해야 할 것을 강화해 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조정하는 작업을 진행합니다. 이 모든 작업을 ‘뽀샵’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진 후 작업은 필름을 현상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어떤 가공도 되지 않은 로우raw 파일을 보여드리면 대부분 사진이 굉장히 흐릿하다고 느낄 거예요. 또 카메라 기종마다 색감이 조금씩 다른데 이런 톤 앤 매너를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죠. 하지만 빈 땅에 나무를 심거나 사람을 합성하는 등의 CG 작업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매체의 변화가 빠른 시대에 살고 있어요. 조경을 기록하는 방법도 글, 도면, 사진을 넘어 영상, 드론 영상 등으로 더 확대되고 있어요. 앞으로 사진은 우리에게 무엇이 될까요.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이지만, 달라지지 않는 건 외부의 자극을 느끼는 감각이 오감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많은 부분을 시각에 의존하고 이로 인해 판단을 내린다는 점도요. 인공 지능의 놀라운 발전으로 이미지가 생성되고 소비되면서 사람들은 오히려 갈증을 느끼게 될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인공 지능을 통해 마주한 상상의 벽이 사람들을 현실로부터 탈출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어 박탈감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거든요. 기술의 발전에 물론 적응해야겠죠. 사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저도 그 변화를 수용하고 작업에 이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래도 아직까지 두 손으로 눈높이에서 보이는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사진이 좋습니다. 시간의 흐름에서 기억이 잠시 머물다 가는 찰나가 사진이 됩니다. 사진이 있기에 그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더 애틋해지고, 휘발되는 것을 유형의 무언가로 남기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하는 것 같거든요. 사진은 제게 참 고마운 존재에요.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업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조경 사진의 골격을 잡아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풍경 사진과는 또 다른 조경 사진의 구조를 주관적으로라도 정리해보고 싶어요. 그 형태가 작품이 될지, 자료가 될지, 책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요. 아직 조경 사진의 이론이라고 부를만한 게 없어요. 조경의 정의 자체도 아직 불분명하니 당연한 일이지만요. 어떤 이들은 풍경 사진이 조경 사진 찍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물론 로직은 닮아 있을 겁니다. 조경 사진 역시 경관을 담아내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조경 사진은 단순한 경관이 아니라 설계 의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같은 산책로를 찍더라도 단순히 아름다운 산책로의 모습을 담아내는 게 아니라 산책로 선형이 왜 그렇게 뻗어 나가야 하는지, 길 주변을 따라 심긴 높고 낮은 나무의 존재 이유, 벤치의 간격과 그 거리로 인해 생기는 공간감 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해요. 조경에는 독립적인 피사체가 거의 없어요.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그래서 조경 사진은 대지에 펼쳐져 있는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요소를 아울러야 하죠. 조경의 의도를 담기 위한 방법론을 만들어나가야 해요. 그래야 아직은 흐릿한 조경 사진이라는 분야의 틀이 조금씩이라도 보이기 시작할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빤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거에요. 예를 들면, ‘조경의 전체 구조를 보려면 하늘에서 전체 대상지를 내려다본 사진이 한 장 이상 필요하다’처럼 너무 당연해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이요. 당연한 것들을 소소하게 기록하면 아카이브가 되고, 그 아카이브가 분야의 전문성을 높여줄 겁니다. 더불어 ‘나는 이렇게 찍는다고’ 말하는 조경사진가가 많아지면 더욱 좋겠죠. 유청오 본지 전속 사진 작가. 조경 작업을 기록한다. 현재 ‘유청오의 이 한 컷’을 연재 중이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조경작업소 울 울의 조경작업 소울, 경계를 넘나드는 질문과 도전
    조경작업소 최근 조경작업소 울은 어린이공원이나 근린공원 설계 이외에도 몇 가지 흥미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공원 입구에 상징성이 강한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몇 년 전 함께 일했던 실무자는 이 프로젝트의 중심을 스토리텔링으로 보았고, 조경작업소 울이 공간에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능하다고 판단해 의뢰했다고 한다. 다양한 주제의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에 숨겨진 패턴과 원리를 발견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장점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주민과의 소통을 통해 상호 이해를 도모하고, 이를 공간 설계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한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야외 공간뿐 아니라 실내 놀이터도 디자인한다. 조경작업소 울이라는 이름, 특히 ‘울’이라는 단어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울타리’의 ‘울’이라고 보통 대답하지만, 사실 깊이 고민한 단어는 아니다. 오히려 ‘조경작업소’라는 명칭에 더 많은 생각을 기울였었다. 조경작업소라는 단어를 통해 설계사무소를 넘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공간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2009년 상상어린이공원 설계공모에 당선되며 회사를 설립했지만, 회사의 정체성은 설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의 공부와 연구자로서의 훈련, 시민단체 활동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회사를 운영하고자 했다. 다행히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형태의 조경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여느 조경설계사무소처럼 도면 작업은 기본이고 어린이 대상 워크숍을 위해 색종이를 자르며 아기자기한 소품을 만들기도 한다. 배워야 할 지식과 습득해야 할 기술의 범위도 넓다. 식물의 특성과 구조물 설계도 탐구해야 하고, 어린이의 성장 발달과 놀이 환경에 대한 이론은 물론 통계도 공부해야 하고, 워크숍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기술 개발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최근 팝업 놀이터 프로젝트를 해 볼 기회가 늘어나면서, 이와 관련된 전문 지식과 노하우도 축적해 가고 있다. 넓은 스펙트럼의 작업은 장점인 동시에 도전이다. 설계와 연구, 워크숍, 팝업 놀이터 운영은 각기 다른 태도와 능력을 요구한다. 연구자로서 깊이 있는 분석은 흥미로운 과정이지만, ‘왜 그런데?’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데?’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설계자로서 정밀한 데이터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설계는 단순한 분석을 넘어서는 창의력과 통합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 워크숍이나 팝업 놀이터 운영은 순발력과 대화의 기술을 요구한다. 그래서 조경작업소 울의 정체성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고,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하라는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조경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가 좋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면, 연구, 설계, 워크숍, 현장 활동이라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이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각 분야가 만나는 경계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정체성이지 않을까. 각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이해하고, 요구되는 근육을 안다는 것, 다양한 분야가 어떻게 서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직접 경험하고 있다는 점, 그리하여 영역 간의 ‘번역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은 조경작업소 울의 큰 자산일 것이다. 또한 우리가 부족한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소통하고 협력할 줄 아는 자세 역시 우리의 강점이라고 내세워본다. 울 협업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울은 폭넓은 파트너십을 가지고 있다. 프로젝트 관리표의 주 담당자와 부담당자 칸 옆에 ‘협력’이라는 칸이 별도로 있을 정도다. 앞에서 언급한 상징 공간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는 건축가와, 주민과의 협력이 중요한 프로젝트는 시민단체와 협업하고 있다. 최근에는 식재 디자인 전문가와 협력하고 있다. 대상지가 산지라 실시설계의 난이도가 높은 프로젝트는 현장에서의 설계 변경 경험이 많은 전문가와 협력한다. 꼭 프로젝트 단위가 아니더라도 그때 그때 자문을 요청할 수 있는 이들과 협력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항상 든든하다. 물론 그 협력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또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통합놀이터만들기네트워크의 일원으로서 통합놀이터를 연구하고 관련된 시민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활동이 잠잠하지만 빅바이스몰의 일원이기도 하다. 빅바이스몰은 노들섬 현상설계를 준비하면서 조직된 이후 토론회나 교육 등의 활동을 함께했다. 최근 도시연대라는 시민단체와 함께 어린이와 도시라는 이름의 기금을 만들어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다. 작년에는 어린이들과 그들의 일상에 어떻게 하면 놀이를 끼워 넣을 수 있을지 실험했다. 이러한 외부와의 협업과 협력은 ‘울’이란 이름에 담긴 의미로 살펴보면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처음 시작할 때는 울의 의미를 크게 두지 않았지만, ‘왜 울인가요?’라는 질문에 답하며, 울 자체가 느슨한 울타리, 개방성과 협력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바람을 현실화하기는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모든 조직은 그 존재 이유에 부합하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이념이나 사회적 가치를 중심으로 모인 곳도 마찬가지이지만, 의뢰받은 일을 수행해야 하는 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체계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조직 구조와 역할 및 책임에 따른 위계를 갖추어야 한다. 업무 처리 방식, 의사 결정 절차, 직원 행동 규범을 포함하는 규칙과 절차도 필요하다. 연구, 기획, 설계비가 상대적으로 낮은 한국의 상황에서 구성원이 야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효율성도 중요하다. 또한 공정한 보상을 위해서는 업무 성과 평가 시스템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맞추며 느슨한 울타리를 만들기에 운영자로서 나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조경작업 소울 한계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매일 매일 한계를 발견한다. 극복 방법은 모두가 아는 그것이다. 열심히 끝까지 해보는 것이다. 우리에게 끝까지 한다는 것은 의구심을 없애는 것과 같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세이브더칠드런의 ‘놀이터를 지켜라’ 사업의 일환으로 중랑구 상봉어린이공원의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를 맡아 설계부터 설계 감리까지의 전 과정을 진행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어린이 참여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을 찾고 있었고, 당시 조경작업소 울은 놀이터 디자인은 많이 해보지 않았지만 참여 디자인 경험이 많아 함께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놀이터에 대한 탐구가 시작됐다. 좋은 놀이터란 무엇인가? 놀이터의 역사는? 놀이란? 어린이는 어떻게 노는가? 놀이를 유발하는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공부하고 현장에서 실험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답하다 보니 어느새 놀이터 디자인 전문 회사가 되었다. 놀이터에 대한 질문은 어린이들이 잘 놀 수 있는 도시란 어떤 도시일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2017년도 씨프로그램(C-Program)의 지원으로 놀이 환경 측정 지표 도구를 개발했으며 2019년도에는 LH의 아동 놀이 행태를 고려한 도시 공간 조성 방안 연구를 진행했다. 지금은 서울시 도시공원의 어린이놀이 환경 조성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어린이 참여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껴 2018년에는 어린이재단과 함께 아동 참여 디자인 놀이터 조성을 위한 가이드라인도 만들었다. 2015년 대웅제약이 지원하고 아름다운재단이 주관한 통합놀이터 조성 사업에 통합놀이터만들기네트워크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통합놀이터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사회적 확산이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 보니 다양한 활동으로 이어졌다. 많은 이의 도움을 받아 여러 주체와 함께 통합놀이터 조성 가이드라인을 만들었고, 사회적 확산과 관련 법 개정을 위해 여러 차례 토론회를 개최했으며, 2018년부터 작년까지 총 네 번의 아이디어 공모전을 진행했다. 최근 통합놀이터라는 단어는 일반명사가 됐고, 조성 사례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통합놀이기구가 한정되어 있어, 여러 놀이터 시설물 회사와 함께 통합놀이기구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때때로 조경작업소 울을 ‘조경작업 소울(soul)’로 듣는 사람들이 있다. 이전에는, 어떻게 회사 이름에 ‘소울’이라는 단어를 넣겠어? 영혼을 다해 일한다는 생각은 조금 구시대적이지 않아? 그리고 좀 무섭지 않아? 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오해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영혼을 좀 갈아 넣지 뭐. 아껴서 뭐 하겠어. 이 일의 끝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한번 가보자는 생각으로 일상에서의 루틴을 꾸리고 있다. 항상 모래를 잡은 주먹을 꽉 쥐고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꽉 쥐더라도 모래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열심히 끝까지 해보자는 결심도 마찬가지다. 숨가쁘게 보고서, 도면, 협의 사이를 오가다 보면 작업의 본질적 의미는 사라진다. 어느 초여름 밤, 우리가 설계한 공원 한 편에 중학생 소녀가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여기에 와 있으면 기분이 좋다고 한다. 또 한번은 우리가 디자인한 놀이터에서 만난 어린이들에게 이 놀이터를 디자인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더니, 이런 멋진 놀이터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이런 순간 손바닥을 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조경작업소 울은 설계, 연구, 공유의 선순환 관계를 지향한다. 특색 있는 놀이터,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주민 참여 디자인, 현장의 이해를 토대로 한 연구가 우리의 강점이며 우리를 찾는 공통적인 이유다. 우리는 하나의 주제에 대한 깊은 탐구와 체계적인 개념화를 통해 소외된 현장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전방위적 접근과 실험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자 노력한다.
  • [에디토리얼] 스토스 ×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최전선을 이끌어온 스토스(Stoss)의 최근 작업들로 봄을 여는 3월호 특집을 꾸린다. 세기의 전환기,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은 녹색 장식술을 반복하며 낭만적 복고주의로 회귀하고 있던 조경과 도시설계에 교정의 방향을 제시했다. 21세기의 개막과 함께 문을 연 스토스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실천 가능성을 선보인 일련의 실험을 전개했다. 그리고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가시적 실체에 대한 물음표를 지워냈다. 회사 공식 명칭에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붙인 —즉, Stoss Landscape Urbanism— 유일한 설계사무소이기도 했다. 21세기 초, 도시의 탈산업 부지를 회복하고 재생하는 다수의 국제 설계공모를 통해 경관의 잠재력이 재발견됐고, 경관을 매개로 도시의 재구성을 기획하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부상했다. 제임스 코너와 함께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지평을 연 찰스 왈드하임은 『경관이 만드는 도시(Landscape as Urbanism)』(한숲, 2018)에서 이 새로운 담론에 전문 실무를 처음 결합한 조경가로스토스의 설립자 크리스 리드(Chris Reed)를 꼽는다. 왈드하임은 리드의 초창기―21세기의 첫 10년― 작업들을 생태, 인프라스트럭처, 어바니즘을 병치하고 합성해 경관의 힘을 확장한 시도라고 해석한다. 왈드하임은 포틀랜드 테이버산 저수지(Mt. Tabor Reservoir)(2003), 밀워키 이리 스트리트 광장(Erie Street Plaza)(2006), 토론토 로어 돈 랜드(Lower Don Lands)(2007) 등 설계공모 작품들에 나타난 스토스의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에서 세 가지 특징을 포착한다. 첫째는 스토스가 모든 대상지와 설계 주제에서 물의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점이다. 스토스의 설계는 물과 관련된 기존 인프라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며, 새로운 수문학적 판(surface)은 다공성, 안정성, 다양한 생물군이 융합해 빚어내는 혼성의 장치로 작동한다. 두 번째 특징은 복잡한 비선형 기하학 구조를 이용해 만든 판이다. 이러한 판은 단순한 형태 요소를 반복시킨 복합적 시스템이며 다중의 공간 프로그램을 수용하는 가변성을 지닌다. 세 번째 특징은 고유한 것과 외래의 것, 지역적인 것과 이국적인 것 사이의 긴장에 내재된 잠재력을 확장하는 설계다. 이번 특집에서 볼 수 있듯, 2024년의 스토스는 여전히 ‘경관의 힘’에 대한 강한 신념을 실천하고 있다. 경관이 도시, 환경, 지역 사회, 일상생활에 긍정적 변화를 추동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는 스토스의 비전은, 삶의 질과 생물 다양성을 향상시키는 역동적 경관의 설계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경관의 형태보다 경관을 대하고 읽는 ‘태도’를 중심에 둔 스토스의 접근 방식은 이제 실험을 넘어 워터프런트, 그린 네트워크, 도시 숲, 공원, 광장 등 다양한 스케일의 장소에서 실현되고 있다. 스토스의 근작들을 통해 동시대 조경의 의제를 공유하고자 열 개의 주제를 세 가지 범주로 나눠 지면을 구성했다. 공간의 성격 대신 프로젝트의 스케일에 따라 구분한 세 범주는 광역적 접근, 지구 단위 계획 단계, 상세와 실행이다. ‘광역적 접근’ 범주에 배치한 주제는 연안 침수 회복탄력성 전략, 형평성과 접근성을 갖춘 수변 계획, 생태 복원과 침식 저감 계획, 다양한 커뮤니티의 재연결이다. 다음으로 계획 스케일의 ‘지구 단위 계획 단계’는 주민 참여 디자인, 디자인과 정책의 상호작용, 역사‧문화적 맥락과 디자인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상세와 실행’ 범주에서는 도시 숲과 장소 만들기, 장소를 만드는 기능적 요소, 디자인 상세의 중요성에 대한 스토스의 실천을 소개한다.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스토스는 침수 워터프런트, 소외 지역, 방치된 구도심, 버려진 탈산업 부지 등 복잡하고 어려운 조건에 놓인 부지에서 경관의 힘을 계속 실험해왔다. 이번 지면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잠재력을 다시 환기하는, ‘경관이 만드는 도시’의 가능성을 다시 소환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특집 기획부터 구성, 원고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은 스토스의 김준연 디렉터에게 감사드린다.
  • [풍경감각] 꽃 피는 집
    다세대주택이 가득한 골목에 ‘꽃 피는 집’이라고 남몰래 이름을 붙인 곳이 있다. 빨간 담벼락과 검은 쇠창살로 꼭꼭 단속해둔 이웃 건물 사이로 유일하게 울타리를 없앤 집이다. 햇살이 쏟아지는 마당에는 큼직한 화분이 가득하고, 계단과 난간에도 좌르륵 화분을 줄 세워 놓았다. 계절마다 팬지, 백일홍, 코스모스 따위가 빛났고, 스티로폼 박스에 뿌리를 박은 고추와 호박이 열매를 맺고, 고무 통에는 꽤 큰 라일락과 서양측백도 있다. 식물을 키우려고 담장을 허문 걸까. 작고 낡고 오래된 공간을 살뜰히 가꾸는 마음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재개발조합추진위원회 사무실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 집을 통째로 갈아엎는 꿈을 꾸면서도 마당에 씨앗을 심고 물을 줄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마당 한 쪽엔 승용차가 서 있는데 담장을 없애 단순히 편하게 주차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면 이전 집 주인이 남긴 흔적이었던 걸까. 며칠 전고도 제한 완화 축하 현수막이 골목 어귀에서 나풀거렸고, 꽃 피는 집에는 수선화 꽃봉오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 [제도가 만든 도시] 소유
    현대 도시에서 공간의 소유에는 영역성 같은 동물적 본성부터 도시 공간에서 창출되는 부가 가치가 귀속되는 사회적 장치까지, 인류 역사를 통해 누적된 여러 층위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오랜 시간 주민들이 다니던 길을 막아 사유지임을 알리는 험악한 경고문을 붙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전세로 살던 집이 재개발되어도 소위 갭 투자를 한 집주인만 새 주택을 분양받는다. 공간 소유에 담긴 여러 의미는 다양한 법·제도에서 촘촘하게 규정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소유를 인정하는 권리인 재산권은 근대 자유주의 체제에서 기본권이자 불가침을 원칙으로 하는 천부 인권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한국도 재산권은 대다수 근대 국가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합의한 가장 상위의 규율인 헌법에서 ‘국민의 권리’로서 보장된다. 그에 따라 민법에서 부동산(토지와 정착물)과 소유권의 내용(사용·수익·처분)을 규정한다. 또한, 한국 도시 공간은 물론 사실상 국토의 어느 한 조각도 ‘소유’의 밖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공간의 소유는 우리 사회에서 참으로 철저하게 작동하고 있는 체제다. 이렇게 보면 마치 재산권이 어떤 공간 정책과 제도도 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연재를 시작하며 언급했듯, 모든 공간 제도는 “공공복리”를 근거로 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지며, 이는 재산권을 보장하는 헌법에서 함께 규정된다.(각주 1) 이런 근거로 우리의 공간 제도는 토지와 건물 등 공간의 소유에 대해 배타적으로 보장되는 사용·수익·처분의 권리 모두에 촘촘하게 개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도시계획상 일반상업지역이라면 단독주택을 지을 수 없다. 지금은 서울시 열린송현 녹지광장이 된 옛 미 대사관 부지는 한때 민간 기업 소유로 한옥 호텔 등 관광 숙박 시설 사업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학교에 인접한 탓에 계획이 불허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즉, 소유권이 있어도 땅의 ‘사용’은 제한될 수 있다. 또,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올릴 때도 법이 정한 한계가 있으니 개인이 소유한 공간으로 ‘수익’을 내는 것에도 참견한다. 공공은 물론, 민간이 개발한 아파트를 팔 때도 무주택자에게, 혹은 신혼부부에게, 다둥이 가족에게 우선하여 팔라는 분양 제도는 ‘처분’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다. 이처럼 직접적 제한을 비롯해 차등적 세금 체계를 통해 소유권에 간접적 제한을 가하여 정책적 목적을 유도하는 제도는 수도 없이 많다. 도시 개발의 매개, 소유 개발 이익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각주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든 건물이든 소유권 자 체를 강제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기본권인 재 산권의 보장 원칙을 침해하는 중대한 문제다. 그러나 대규모 시가지를 개발하고 혹은 고속도로 나 공항, 산업 단지 같은 인프라를 조성하는 등 광대한 토지가 필요한 경우, 조각조각 나뉜 개별 소유권을 인정하고 자발적 동의를 얻어 실행한다 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재산권 을 보장하는 사회에서는 도시 개발에 필요한 토 지와 건물의 소유권을 강제적으로 가져오는 것, 즉 ‘수용’을 하고 적정한 보상을 하는 방법을 채택한다.(각주 3) 물론 나라마다 수용이 정당화되는 범위 와 보상의 방식, 수준은 다를 것이다. 지난 반세기 엄청난 속도로 도시화를 이룬 한국은 도시 개발을 위해 개별 소유를 어떻게 다뤘 을까. 현재 한국의 도시 공간을 만든 대표적 개발 방식은 1980년대까지 주를 이룬 토지구획정리사업, 그리고 그 이후는 택지개발사업이다. 두 사업 모두 도시 용지로서 인프라가 전혀 없는 농 지와 자연 발생 촌락을 도로망과 공공시설 용지 를 갖추고 용도에 맞게 획지가 나뉜 시가지로 조 성하기 위한 제도지만, 소유권 측면에서는 완전 히 다른 구조로 진행됐다. 전자는 원 토지주의 소유권을 유지한 채 지자 체나 공사가 사업을 시행하고, 완료 후 원래 소유 한 토지 면적에 비례해 새로 조성한 도시 용지로 돌려받는 ‘환지’ 방식이다(그림 1). 다만 도로나 공 공시설 용지를 확보하고 사업 비용을 회수하기 위한 ‘체비지’를 떼어두어야 하므로 돌려받는 토 지의 면적은 원래보다 상당히 줄어들게 되는데, 이를 ‘감보율’이라고 한다. 심한 경우 절반까지 줄 어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도시 용지로서 인프라 를 갖춘 반듯한 땅의 총 가치는 기존 농지의 토 지 가치에 비해 훨씬 높고, 또 지가는 계속 오르 고 있었으니 토지주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일제강점기 영등포, 청량리 일대 개발에 처음 도입됐고,(각주 4)전후 도시 개 발을 위한 재원이 부족했던 시기에 서울을 비롯 한 대도시에서 광범위하게 채택됐다. 도시 개발 에 필요한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막대한 보상비가 들지 않으며, 앞서 설명한 바처럼 개발 이익이 토지주에 귀속되는 구조로 실행이 용이했다. 반대로 택지개발사업은 택지개발지구가 지정되면 사업을 시행하는 지자체나 공사가 해당 토지를 강제 수용하고 현재 토지 이용(농지)을 기준으로 원 토지주에게 보상한 후에 개발을 진행한다.(그림 3) 이렇게 조성된 공공택지는 원 토지주와 상관없는 주택 건설 사업자 등에게 소형 주택을 짓는 조건으로 원가 이하로 공급된다. 그리고 여기에 지어진 아파트는 분양 제도에 따라 무주택 자 등에게 우선 공급되는 흐름이다. 1980년대를 전후해 주된 도시 개발 수단이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택지개발사업으로 전환된 배경에는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도시개발에 아 무런 기여가 없는 소수의 원 토지주(종종 투기꾼)에 게 개발 이익이 집중되는 문제가 있다. 도시계획과 그에 따른 도시 개발이라는 공적 행위로 창출 된 이익 배분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결국 소유를 매개로 한 사업의 구조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유권을 가져옴으로써 원 토지주 를 개발 이익에서 배제한 결과, 택지개발사업의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도시 개발을 시행한 지자체와 공사, 그리고 아파트를 건설한 사업자에게도 돌아가지만, 가장 큰 이익을 챙기는 것 은 시세보다 훨씬 낮은 분양가로 아파트를 최초로 분양받은 사람이다. 물론 원 토지주와 마찬가 지로 최초 분양자도 개발 이익을 가져갈 특별한 기여와 노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 택난과 낮은 주택 소유율 하에서 주택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수요자에게 간다는 전제로 우 리 사회의 암묵적 동의를 얻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소유하는 소유권(Ownership Takes It All), 오래된 도시 공간의 공간 가치는 누가 가져 가는가 신도시 개발의 이익이 대부분 농지와 인프라를 갖춘 도시 용지의 가치 차이 그 자체에서 발생한 다면, 기성 시가지에서 공간 이익의 상당 부분은 오랜 시간 여러 도시 활동이 누적된 결과로 공간 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에서 온다. 그런데 누가 얼마큼 기성 도시 공간의 가치 상승에 기여했는가 를 가르기란 매우 어렵다. 수많은 사람이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으며, 여러 도시 정책과 공공 투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의 지가는 미미하지만 잠깐 그 동네 어학원을 다닌 사람들의 몫부터 시작해 대로를 따라 늘어선 고층 빌딩과 같은 민간의 투자와 서울 어느 곳보다 도 촘촘하게 놓인 6개 전철 노선 등이 반영된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간 가치 상승의 이익은 소유권에 귀속된다.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은 기성 도시 공간에서 이러한 기여와 이익 배분의 어긋남을 잘 드러낸다.일반적으로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은 독특한 문화 자원이 있는 지역이 명소화되면서 임대료가 높아지고, 기존 점유자들이 내몰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디 음악의 근거지였던 홍대 앞이 그런 예다. 그러나 이제는 상대적으로 물리적 환경 이 낙후되어 임대료가 낮았던 지역에 특색 있는 소비―주로 식음― 공간이 하나둘 생겨나 그 자체 가 그 지역의 문화 자원이 되어 젠트리피케이션 을 촉발하는 현상으로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구 시가지 저층 주거지, 영세 제조 업체나 도소매점 이 밀집한 지역 등 전통적인 소비 중심지와 거리 가 먼 입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과정에 서 공간 가치 상승의 기여자는 누구일까? 상업 공간은 주택에 비해 건물 자체의 노후도가 중요 하지 않으며 인테리어나 주방과 냉난방 설비 등 을 대개 건물주가 아닌 임차인이 영업 목적에 맞 게 따로 투자한다. SNS에 올릴 만한 소품과 메 뉴 또한 임차인의 능력이다. 이런 몇몇 가게가 유 명세를 타면 주변에 더 많은 카페와 음식점이 새 로 문을 열고, 이 지역을 소위 OO리단길로 명명 하며 더 많은 사람이 찾고 또 자발적인 홍보를 한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듯, 건물주가 아닌 임차인과 이 지역을 찾는 사람들이 만든 공간 가 치는 임대료와 부동산 가격에 반영되어 ‘소유’만 이 그 이익을 가져갈 자격이 된다. 도시 공간에 새겨지는 소유 도시의 생김새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변하지만, 어떤 특성들은 도시 공간에 깊게 새겨져 상대적 으로 오래도록 유지된다. 스피로 코스토프는 오랜 도시 역사에서 산과 강, 해안선 같은 지형적 특성이 만든 특유의 도시 윤곽, 다음으로는 주요 가로망과 블록, 그리고 필지의 구획이 차례대로 쉽게 변하지 않는 도시 형태의 요소들이라고 설명한다. 소유는 여기서 상대적으로 쉽게 변하는 필지를 단위로 한다. 그런데 지난 반세기 한국의 도시 공간을 만들어 온 과정과 그에 결부된 제도를 보자면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싶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산을 깎 아내고 바다를 메워 산업 단지를 건설하며 택지 를 조성하기 위해 강줄기 바꾸기를 서슴지 않았다. 도로를 새로 개설하거나 넓히기 위해 도시계 획선들은 수백 년에 걸쳐 자리 잡은 옛길을 무심 하게 가로질러 선 밖의 토지를 강제 수용했다. 숱 한 주택 재개발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엮인 저층 주거지를 하나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병합해왔다. 이 과격한 이력과 반대로 개별 필지 단위에서 제도의 개입은 오히려 소극적인데, 소유권을 침해할 만큼의 ‘공공복리’를 인정받기 어렵다는 뜻 이다. 부정형 필지를 반듯하게 펴거나 지나치게 작은 필지나 도로가 닿지 않는 맹지를 다른 필지와 합치는 소소한 조정조차 각 필지를 소유한 이 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기 쉽지 않아 어렵다. 그렇 기 때문에 소유의 구획은 도시 공간에 의외로 오래도록 유지되어 깊게 새겨진다. 한번 하나의 소유로 묶인 공간은 그 이후의 변화에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 단위가 된다. ‘그림 5’는 2010년대 우후죽순 지어진 도시형생활주택 의 대지 형상이다. 한 필지의 크기가 작은 저층 주거지에서는 도시형생활주택을 짓기 위해서 보 통 둘 이상의 필지가 필요하다. 소유주가 각기 다른 연접한 필지들을 한번에 사들여 병합 개발 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아서 한 집은 팔고 싶어 해도 다른 집은 그럴 의사가 없거나 매매 가격을 맞추기 어려워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확보 가능한 연접 필지에서 사업을 진행하다 보니 도 시형생활주택의 대지가 테트리스 조각 같은 기 형적인 형상이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작은 필지 들을 병합은 사실상 비가역적이다. 또한, 병합 개 발에 편입되지 않은(또는 못한) 작은 필지는 독자적 인 재건축이 어려워 장기간 노후한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결국 임의적인 병합에 의한 불합리한 대지 형상을 조정할 기회는 도시형생활주택이 재건축 시기를 맞게 될 몇 십 년 후가 될 것이다. 집합 소유라는 시한폭탄 작은 필지를 합쳐 도시형생활주택을 짓듯, 도시 에서 토지를 이용하는 단위, 즉 건축물의 대지는 대체로 계속 커지고 있다. 경제 발전으로 점점 더 큰 규모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은 땅을 불리하게 만드는 여러 제도가 작용한 탓(각주 5)도 있다. 그러나 소유권 하나의 토지 면적은 심각하게 작아지고 있다. 커진 대지에 들어서는 건물 다수가 소유권이 여럿으로 나뉜 ‘집합 소유’ 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도시형생활주택의 경우도 두 세 채의 단독주택 필지를 합쳐 하나의 도시형생활주택 대지를 이루지만, 통상 도시형생활주택 한 동에는 적어도 십여 세대, 많게는 수십 세대 가 있고 모두 개별적인 소유권이 있다. 실제 서울 시 강서구 화곡동을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에서 315채의 단독주택이 적어도 3,465세대의 도시 형생활주택으로 개발됐고, 그로 인해 소유권 하 나당 평균 토지 지분은 191.7m2에서 19.5m2로 극단적인 감소를 보였다. 집합 소유 공간에서 개별 소유권의 사용·수익·처분의 독립성은 세대 내 공간에 한정된 것이 다. 부수고 짓고 용도와 외관을 바꾸는 도시 공간의 내에서의 변화는 개별 소유 단위가 아닌 집합 소유 단위로 일어난 다. 그렇다면 30년 후 도시형생활주택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기껏해야 300~400㎡에 불과한 대지에 수십 세대, 거기에 임차인까지 수많은 이해 관계가 얽혀 그 공간의 변화를 꾀하기란 너무나 어려울 것이다. 다양한 크기의 필지와 골목길이 사라져 슈퍼 블록화되고 건축물의 크기가 커 지는 것만큼, 도시 공간의 소유 구조가 집합으로 바뀌는 것 또한 미래의 공간 수요를 수용할 유연성과 민첩성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소유 밖의 공간은 가능한가 이번 글에서는 소유가 우리 도시 공간에서 얼마나 공간적으로나 사회적 으로 견고하게 작동하는 전제 조건인지 살펴봤다. 우리 사회의 모든 제 도가 점점 더 촘촘해지고 있고 소유의 구획 밖에 남겨지는 공간은 사실 상 없어지고 있다. 그리고 개발 규모가 커질수록 일상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언제든 닫혀버릴 수 있는 사적 소유의 공공 공간(privately owned public space)이라는 모순적인 설명이 붙는 공간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겨울밤 출출한 퇴근길의 포장마차나 광장에 설치된 소외된 자들의 절박한 외침이 그저 느슨한 시절의 낭만일 뿐, 소유권이 없이도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더 이상은 필요치 않게 된 것인가. 결국 현재 소유가 독점하는 배타적 권리의 선은 사회적 합의의 결과로 인정해야 하지만, 그래도 항상 질문은 필요하다. **각주 정리 각주 1. ‘대한민국 헌법’ 제23조 1항 “모든 국민의 재산권을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2항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 3항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ㆍ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 각주 2. 토지구획정리사업과 택지개발사업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 음 연구를 참고. 박배균, “Where Do Tigers Sleep at Night? The State's Role in Housing Policy in South Korea and Singapore”, Economic Geography 74, 1998, pp.272~288; 권영덕·이보경, 『서울, 거대도시로 성장하다』, 서울연구원, 2020. 각주 3. 소유권을 완전히 가져오는 수용이 아니라도 어떤 사용·수익·처분 에 대한 제한에는 수용과 마찬가지로 보상이 따른다. 보상이 따라 야 하는 제한과 그렇지 않은 제한의 구분은 당연히 근대적 재산권 개념과 도시계획의 정당성 정립에서 첨예한 논쟁과 갈등, 수많은 사례가 축적된 중요한 이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김지 엽, 『도시를 만드는 법』,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2. 각주 4. 당시 일본에서는 영세 자영농의 반대로 토지구획정리사업의 실 행이 제한적이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대규모로 시행된 건 역 설적으로 조선 자영농이 일본 지주의 소작농으로 전락했기 때문 이다. A. Sorensen, “Land Readjustment and Metropolitan Growth: an Examination of Suburban Land Development and Urban Sprawl in the Tokyo Metropolitan Area”, Progress in Planning 53, pp.217~330, 2000. 각주 5. 『환경과조경』 2023년 5월호, “제도, 크기를 정하다” 참고.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 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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