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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세 번째 트랙, 비평으로서의 디자인
    십여 년 전 기억 한 토막. 어느 한여름 밤, 무더위는 생맥주로 이겨내야 한다는 신념으로 뭉친 번개 모임 1차가 끝나자 누군가 신선한 제안을 했다. 2차 대신 공원 벤치에 떨어져 앉아 호젓하게 아이스크림을 먹자. 편의점에서 각자 최애 아이스크림을 골라 근처 보라매공원에 들어섰다. 정적만 감도는 고요한 밤을 기대했지만, 예상과 전혀 다른 놀라운 풍경. 군중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많은 사람이 넓은 공원을 힘차게 걷고 있었다. 넓은 운동장의 트랙을 따라 한 방향으로 줄지어 걷는 군중. 알고 보니 그날 밤의 비현실적 장면은 일상의 풍경이었다.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자리한 보라매공원에는 여느 공원의 공간 구성과 다른 특징이 있다. 공원 한가운데 대형 운동장이 있는 것. 한 바퀴 도는 데 600m가 넘는 트랙을 따라 다양한 연령대의 동네 주민들이 날씨에 상관없이 새벽에도, 낮에도, 늦은 밤에도 걷고 뛴다. 낮보다 밤에 더 붐비는 공원. 이 공원 운동장은 원래 공군사관학교의 연병장이었다. 1958년 이곳에 터를 잡은 공군사관학교가 1985년 말 청주로 이전하자 서울시는 부지와 시설물, 수목을 매입하고 보수해 1986년 어린이날 보라매공원(면적 413,352㎡)을 열었다. 이전적지 공원화 사업의 초기 사례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공원 이름의 ‘보라매’는 대한민국 공군을 상징한다. 명칭뿐 아니라 공원의 여러 공간과 시설도 공군과 공군사관학교의 기억을 잇고 있다. 1960년대 초에 조성한 연병장은 공원의 대형 운동장으로 쓰이고 있고, 당시의 연못도 계속 유지되면서 공원 경관의 주연 역할을 하고 있다. 보라매탑과 성무탑을 비롯한 많은 기념물과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고, 건물 일부도 재활용되고 있다. 보라매공원 초창기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공간과 시설이 강조되었다. 개원 직후 연못 근처에 작은 동물원이 조성됐고, 1990년대에는 수영장과 롤러스케이트장이 운영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 다양한 청소년 시설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점차 전 연령대가 이용하는 공간들이 마련되면서 당대 공원 문화 트렌드를 반영했다. 운동장 트랙을 가득 메운 남녀노소 산책자들과 러너들이 보여주듯, 보라매공원은 체육과 운동 중심의 공원으로 각광받으며 시민들의 건강한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각주 1) 스타 조경가가 각 잡고 디자인한 공원이 아님에도 보라매공원은 공원의 양과 질이 취약한 동작구, 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등 서울 서남권의 멀티플레이어 공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지난 5월 22일부터 보라매공원에서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개최되고 있다. 공군사관학교에서 대형 공원으로 이어진 70년 가까운 장소의 기억 위에 무려 111개의 전시 정원(show garden)이 뿌려졌다. 10월 20일까지 다섯 달 동안 쇼는 계속된다. 서울시 보도자료에 따르면, 개막 열흘 만에 120만 명 넘는 시민이 정원박람회를 찾았다. 방문객 수만 보자면 성공한 축제다. 각각 존재감을 뽐내는 화려한 정원들의 전시장으로 바뀐 보라매공원, 발 디딜 틈이 없다. 요즘 조경가들 모임이나 대학원 세미나에서는 대형 공원과 정원박람회―또는 전시 정원―의 관계를 둘러싼 열띤 토론이 벌어지곤 한다. 정원박람회의 정원들은 공원의 장소성이나 도시(계획)적 맥락과 상관없는 특별한 주제, 형태, 메시지를 전시한다. 전시 정원의 핵심은 일시성이다. 화려한 축제가 끝나고 나면 오랫동안 작동되던 공원의 일상 풍경이 빠르게 회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보라매공원 정원박람회는 반년 가까이 운영되며, 행사가 끝난 뒤에도 전시 정원 대부분이 유지‧관리될 예정이다. 정원의 존치에 지속가능성이나 친환경성 같은 시대정신까지 부여된다. 일시적이어야 할 전시 정원들이 영속되며 공원을 재구성한다면, 공원을 체계적으로 재편하는 마스터플랜이 선행됐어야 한다. 첼시 가든쇼로 유명한 영국왕립원예협회(RHS) 정원박람회들의 설계 지침서를 보면 체계적 철거 계획과 철거 후 자재 재활용 계획이 중요한 심사 항목 중 하나다. 알록달록한 정원들로 가득 찬 이번 호 지면에서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초청정원인 ‘세 번째 트랙’에 특별한 주목을 해주시길.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작업은 공원 속 전시 정원의 한계, 즉 공원의 장소성이나 도시적 맥락과 무관하게 전시되는 정원 형식과 메시지의 난맥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다. 그는 운동장 둘레를 걷고 뛰는 보라매공원 특유의 공원 문화를 그대로 수용했다. 빠르게 걷거나 뛰는 첫 번째 트랙과 보통 속도로 걷는 두 번째 트랙 안쪽에 ‘아주 느리게(largo)’ 걷는 세 번째 트랙을 삽입했다. 원래 있던 느티나무와 이팝나무 몇 그루 사이에 날렵한 트랙을 끼워 넣고 도시 주변 야산에서 만날 수 있는 관목과 풀을 심은 게 전부다. 화려한 형태도, 잔뜩 힘준 메시지도 없다. 박승진은 이렇게 말한다. “공원을 방문한 이들이 아주아주 천천히 이 길을 걷기를 바란다.” 박승진의 ‘세 번째 트랙’은 서울형(?) 정원박람회에 대한 예리한 비평이기도 하다. 글이 아닌 디자인으로 쓴 비평. 그는 박람회에 초청된 뒤 “가장 큰 부담과 고민은 쇼 가든, 즉 전시 정원이 공원에 계속 남는다는 점”이었다고 말한다. “일시적인 정원이라면 마음껏 형태와 주제, 메시지를 펼칠 수 있겠지만, 계속 유지되는 작품이라면 그건 공원 설계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세 번째 트랙’은 마치 공원의 그 자리에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은 작은 흔적이자, 그 장소의 일상이 더 풍성하게 확장되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각주 정리 1. 보라매공원의 조성 과정과 변화, 도시계획적 의의에 대해 더 상세히 알아보고자 한다면, ‘도시경관연구회 보라’가 서울시 공공 기록물을 토대로 작성한 다음 논문을 권한다. 서영애, 박희성, 길지혜, 김정화, 이상민, 최혜영, “이전적지 공원으로서 서울 보라매공원의 변화와 의미”, 『한국조경학회지』 51(1), 2023, pp.85~97.
  • [웅크린 이야기들] 친절한 들판, 친절한 마음
    알멘트 슈테트바흐(Allmend Stettbach)는 스위스 취리히의 동쪽 경계에 있는 들판이다. 뜀걸음으로 5분이면 가로지르는 넓은 풀밭 한쪽으로 나무가 드문드문 자라는 거친 언덕이 자리한다. 다소 생경한 이곳의 풍경은 1980년대 취리히산에 터널을 뚫으면서 파낸 40만㎥의 흙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지하 깊은 곳에서 꺼낸 흙은 척박하고 예산은 적었기에 조경가는 이곳에 통상적인 공원의 이미지를 구현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연접한 기찻길의 소음을 막는 언덕을 만들고 몇 그루의 선구 식물을 심은 것이 계획의 전부다. 그리고 한 해에 두 번 풀을 베고 10년에 한 번 생물 조사를 하며 자연이 스스로 자리를 찾게 두기로 한다. 프로젝트가 실행된 당시에는 투박한 결과물을 두고 냉소적인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도시에서 보기 드문 초지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지역이 되었다. 독일어 알멘트(allmend)는 공유지(common)(또는 common land)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보호구역인 이곳 역시 모두가 공유하는 땅으로,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강아지와 산책을 하거나,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거나, 산악자전거를 타거나, 양궁 연습을 해도 된다. 홀로 언덕 위에 앉아 지는 해를 보며 시를 쓰거나 이상한 춤을 춰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행동은 이 들판이 천이의 초기 단계에 머무르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듯하다. 종종 홀로 이곳을 찾는다. 매번 같은 경로로 반시간 정도 걸으며 관찰하고 기록한다. 지난여름에는 열기를 피해 줄기 끝에 모여 마치 하얀 꽃무리처럼 보이는 달팽이들을 보았고, 가을비가 오기 시작할 즈음에는 비를 피해 꽃 속에 숨은 작은 벌과 축축한 풀밭에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저녁 소풍을 즐기는 연인을 보았다. 화려하고 복잡한 계획이나 시설물 없이도, 척박한 불모지에서 공유지가 된 이 들판은 도시의 모든 존재를 차별 없이 반긴다. 자연의 시간을 존중하고 40년 넘는 세월 동안 이곳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를 관찰하며 사랑하고 기록해 온 사람들의 친절함 덕분이 아닐까. 어제 새벽, 오래간만에 들판을 다시 찾았다. 이슬일까, 아직 땅에 닿지 못한 채 나무 위에 머물던 지난주의 눈송이가 녹은 것일까, 나뭇가지마다 작은 물방울이 많다. 자세히 보니 작은 물방울 안에도 섬세하고 복잡한 세계가 담겼다. 질척거리는 진흙 길을 걸으며 물방울들을 사진에 담았다. 다음에는 또 어떤 발견을 할지 궁금해하며 걸음을 이어갔다. 2024년 가을 기록. ---- 느린 속도로 걸으며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도시에서 숨을 곳을 찾는 수줍은 많은 새나 장마에도 꽃이 피는 길가의 작은 풀들, 더위를 피해 벽돌 사이에 움츠린 달팽이. 이들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지만, 도시라는 교향악에 꼭 필요한 낮은 음계를 더한다. ‘웅크린 이야기들’은 이미지를 곁들인 글, 또는 글을 곁들인 이미지를 통해 우리 곁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지 못하는 것, 그러나 결국 보아야만 하는 이 웅크린 존재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신영재는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ETH) 건축학부 조경학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조경설계사무소 초신성의 소장이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아름답고 쓸쓸한 것에 관심이 많다.
    • 신영재
  • [우먼스케이프] 제인 라우던의 풍경
    정원과 책은 마치 목도리와 장갑처럼 한 세트가 되어 우리의 삶을 포근하게 한다. 글 쓰는 사람 중에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글쟁이가 아니라도 정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책도 좋아한다. 그래서 풍경과 문학은 서로 관계가 깊다. 이 둘을 엮으면 정원 서적이 된다. 정원의 나라 영국의 경우, 정원을 만드는 속도와 정원 서적을 읽고 쓰는 속도가 거의 비례한다는 느낌도 든다. 문학 속에서 풍경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풍경 속을 자주 걷는다. 그녀의 이야기들이 ‘픽처레스크’한 풍경을 배경 삼지 않았다면 리안 감독이 『센스 앤드 센서빌리티』를 영화로 찍고 싶어 했을까? 제인 오스틴 이후에도 샤를로테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영국의 풍경 묘사는 지속된다. 브론테 자매는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다. 브론테 자매 외에도 빅토리아 시대는 출중한 여성 작가를 많이 배출했다. 빅토리아 시대란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 즉 1837년에서 1901년까지 거의 70년 가까운 기간을 말한다. 빅토리아 여왕이 특별히 통치를 잘했거나 못했기 때문에 그리 불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조선의 성종대, 중종대라고 일컫듯 시대를 구분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 시기에 영국에는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부강해졌고 과학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날 때 영국은 의회 개혁을 통해 혁명의 발발을 막았다. 1870년경부터 영국 제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해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 식민지 정책에 기반을 두었던 대영제국이었기에 지금은 부끄러워 하지만 당시 대영제국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신분 계급에도 변화가 나타나 상공인을 주축으로 중산층이 크게 성장했다. 엔지니어, 건축가, 변호사 등 전문직도 이에 속해 중산층의 직업 구조도 다양해졌다. 이들은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외곽에 소위 빌라라고 불린 고급 주택을 짓고 살았다. 대개 3층 규모에 방이 열 개 정도 있고, 앞뒤로 정원이 딸린 구조였다. 이와 더불어 제인 오스틴의 무대였던 풍경 정원의 시대가 지나가고 도시의 빌라 정원의 시대가 시작됐다. 그런데 빌라 정원 시대와 함께 ‘여성의 정원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 무렵 또 다른 제인, 제인 웰스 라우던(Jane Wells Loudon)이 나타나 모름지기 여성 정원의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게 된다. 풍경 정원에서 잠들면 생기는 일 어느 뜨거운 여름날, 17세의 제인은 머릿속이 복잡해 집을 나섰다. 2년 전, 제인이 17세 되던 해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유산으로 빚을 정리하고 나니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태야 함을 깨달았다. 그런데 양갓집 규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세 가지밖에 없었다. 세밀화를 그리는 것, 모자나 의상을 만드는 일, 그리고 가정교사였다. 그중 가정교사가 가장 흔했지만, 좋은 직업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수도 형편없었다. 제인은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독서광에 상상력이 풍부했던 제인은 글을 쓰기로 했다. 글쓰기는 돈벌이로 취급하지 않았기에 주변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단편 소설 몇 편을 쓰고 시도 쓰고 외국의 이야기를 번역해 책으로 묶었다. 다행히 출판사에서 받아들여 약간의 인세를 받았다. 이제 장편 소설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영웅 이야기를 쓸까? 그런데 어떤 영웅? 제인이 여태 읽은 이야기 속의 영웅들은 모두 비슷했다. 서로 형제나 되는 듯 비슷하게 잘나고 비슷하게 용감하고 비슷하게 낭만적이었다. 그런 건 내 취향이 아닌데……. 뭐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 이런 생각에 잠겨 제인은 집 뒤에 있는 언덕을 올랐다.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골짜기 사이로 구불거리는 오솔길과 그 옆을 흐르는 시냇물, 저 멀리 드문드문 보이는 마을들 그리고 아주 먼 곳에 아련히 보이는 높은 산허리. 제인은 풀밭을 지나 큰 떡갈나무 그늘로 향했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바람이 솔솔 불어와 땀을 식혀주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잠이 들면 꿈을 꾸기 마련이다. 눈앞에 문득 젊고 아름다운 신령이 나타났다. 머리엔 꽃으로 엮은 관을 쓰고 아지랑이 같은 날개옷을 떨쳐입었는데 손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너 아이디어를 찾고 있지? 이거 네게 줄게 하면서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이게 미래의 연대기야. 이걸 줄 테니 이야기를 만들어 봐. 왜 미심쩍어? 그러면 주변을 한번 둘러봐. 그제야 제인이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전혀 다른 세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2126년의 영국이었다. 무려 3백 년 뒤의 미래로 온 것이다. 제인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 이는 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인은 자신의 공상과학 소설 『미라(The Mummy)』가 그렇게 탄생 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물론 그것도 허구지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때 제인의 나이가 20세였다. 소설은 잘 팔려 바로 이듬해에 재판을 찍었다. 문학적으로 그리 높게 평가받지는 못했지만, 소설 속에 그려낸 미래의 세계와 뛰어난 과학 기술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리고 작가의 어린 나이에 비추어 볼 때 사회와 세상에 대한 높은 성찰이 번득이는 점 또한 대단했다. 제목 이 ‘미라’인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이 고대 지식을 얻기 위해 이집트의 파라오 케옵스의 미라를 부활 시켰기 때문이다. 케옵스가 깨어 보니 세상은 기술의 경이로 가득했다. 비행선이 하늘을 날고 의사와 변호사, 판사는 모두 로봇이었다. 의료 사고도 없고 법정의 오판도 없었다. 가전제품이 있고 농업에도 기상천외한 기계를 도입해 생산력을 높였다. 그러나 좋은 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케옵스는 22세기 사회를 지켜보며 인간의 오만, 과학의 오용과 정치적 혼란을 목격했다. 자신의 역할이 시대를 관찰하고 증인이 되어 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살아 있지 않은 자신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임을 성찰한다. 그래서 다시 피라미드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그러나 제인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라』 덕분에 인생의 2부가 시작됐기 때문이 다. 런던에 존 클라우디우스 라우던(John Claudius Loudon, 1782~1843)이라는 저명한 식물학자 겸 조경 가가 있었다. 제인의 소설이 발표될 무렵 그는 40대 중반이었다. 우연히 소설을 접하고 무척 재미 있게 읽었다. 특히 제인이 발명한 각종 기계에 흥미를 느껴 자신 발행하는 잡지 『가드너스 매거진(Gardener’s Magazine)』에도 소개했다. 그 역시 개량 온실 또는 테양열 난방 시스템을 고안하는 등 기 술 발전에 관심이 많았기에 소울 메이트를 찾은 느낌이었다. 저자를 꼭 만나고 싶었다. 알음알음으로 저자와 식사 약속을 정했다. 소설이 무명으로 발표됐기 때문에 존은 저자가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가보니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존은 즐겁게 놀랐고 둘은 서로 첫눈에 반했다. 그때가 2월이었는데 두 사람은 그해 9월에 결혼한다. 그리고 제인은 버밍햄에 있던 아버지의 전원주택을 떠나 남편을 따라 런던의 빌라에 입성했다. 약 4천 제곱미터 크기의 정원이 있었다. 우리도 삽질할 수 있다 남편을 통해 제인은 식물과 정원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전원에서 성장하긴 했어도 제인의 머릿속에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생각이 가득해 정원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특유의 지 적 호기심과 긍정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에 접근했다. 결혼하던 해에 남편의 역작 『호르투스 브리 타니쿠스(Hortus britannicus)』가 출판됐다. 브리타니아의 자생 식물, 원예 식물, 도입 식물을 총망라 한 식물 도감이었다. 존은 류머티즘성 열과 관절염으로 오른팔을 못 쓰게 되었다가 결국 절단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오른팔이 없는 관계로 집필을 위해 제도사와 비서를 고용해야 했다. 제인이 그 일을 자청하고 나섰다. 낮에는 정원에서 식물 공부를 하고 저녁이면 서재에 나란히 앉아 책을 쓰는 생활이 지속됐다. 남편의 집필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다. 다음으로 ‘브리타니아의 수목’이라는 방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를 도우며 제인의 지식도 날로 늘었고 정원 일에서도 의외로 큰 기쁨을 얻었다. 제인의 과학기술에 관한 관심이 제대로 주인을 만난 것 같았다. 제인은 식물과 정원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렇게 8년이 지난 뒤 제인은 『젊은 여성들을 위한 식물학』이라는 책을 냈다. 이 즐거운 학문 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책이라고 덧붙였다. 남편 존의 책은 지극히 전문적이어서 아마추어들은 읽기 어려웠다. 특히 제인은 자기와 같은 세대의 여성들에게 식물학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 알 려주고 싶었다. 이어서 여성 정원 잡지 『가드닝 여성지(Ladies Magazine of Gardening)』를 발간하는 등 1858년 만 5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인은 근 이십 권의 정원 책을 썼는데 모두 실용서였다. 그림도 잘 그렸으므로 책에 넣을 식물 세밀화도 직접 그렸다. 소설 쓰는 것보다 정원 책이 수월하고 재미있었다. 독자들은 제인과 함께 경험을 쌓고 성장해 갔다. 빅토리아 시대에 제인의 책 외에도 정원 서적이 꽤 많이 출판되었는데,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우선 18세기 중반부터 제인이 시작하고 다른 여성들이 부지런히 따라서 쓴 가드닝 가이드 책이 많이 나왔다. 이렇게 여성들의 경험과 지식이 쌓이고 전문성이 커지면서 18세기 후반에는 정원 에세이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거트루드 지킬(Gertrude Jekyl, (1843~1932) 같은 거물급 정원 전문가가 탄생하게 됐다. 이 무렵 ‘뉴 우먼(New Woman)’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여성상은 정원에서 태어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 우먼이란 곧 삽질하는 능동적인 여성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원을 장악해 가고 있었는데 사회에서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정원은 집에 속한 것이므로 사회의 통제를 덜 받았다. 여성의 영역으로 인정받아 남성들도 견 제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원에서의 여성을 “사랑스럽게 꽃을 꽂고 우아하게 풀밭을 거니는” 존재 로 이해했지만, 여성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땅 파고 거름 주고 전정하고 토양을 개량하고 디자인 하고 땀을 흘려가며 능동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제인은 『여성을 위한 실용적 가드닝 지침서』라는 책을 써서 첫 장에 땅 파는 방법부터 자세히 소개했다. 정원 일의 시작은 땅 파기인데 이것이 얼 핏 보기에 여성에게 힘든 작업 같지만 역학의 원리와 운동의 법칙을 잘 이용하면 쉽다고설명했다. 삽을 쥐는 법, 발로 삽날을 땅에 수직으로 박는 법, 손잡이를 지렛대 삼아 흙을 뒤집는 법, 파 낸 땅 덩어리를 삽날로 찍어 펼친 뒤 등으로 평평하게 두드리는 법 등을 설명했다. 이때 삽을 조금 작게 제작하는 것이 좋다고도 조언했다. 제인의 전용 삽 손잡이는 가벼운 버드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정원이라는 내 공간, 내 땅에 대한 여성들의 책임 의식이 싹트면서 정원은 정원 이 상의 것이 되어 갔다. 자신을 구현할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지식과 기술을 쌓고 문화적 책임을 지는 곳이었다. 정원 여성들 사이에 네트워크도 만들어졌다. 1880년경이 되면서 정원 서적의 어 조도 달라졌다. 이제 기술은 익혔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고 보면 되겠다. 정원에 관한 토론은 곧 사회, 문화, 정치에 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여성들이 쓴 여성을 위한 정원서에서는 여성의 발 언권이 제한되지 않았기에 마음 놓고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정치색을 띠고 ‘뉴 우먼’에 관해 토론하고 정원 스타일도 자유분방하게 변해갔다. 모두 제인 라우던으로 인해 비롯된 일이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기름 사막 위 아이들의 섬] 환대
    2021년 12월 청소년 보호소 근처 텍사스 공항에 내렸다. 우버를 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흰 색 밴이 도착했다. 한때 열여덟 개 바퀴가 달린 화물 트럭으로 캐나다-미국-멕시코를 오가던 백인 기사는 고향으로 돌아와 물건 대신 인간을 실었다. “A에서 B로 이동하는 일일 뿐”이라며 그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곧 ‘하이웨이 투 헬(highway to hell)’이라 불리는 285번 고속도로에 올라타 하염없이 직선으로 달렸다. 무심히 돌아가는 석유 채굴기 뒤로 소각탑이 맹렬히 열기를 뿜었다. 회갈색 평야엔 텀블위드(tumbleweed)가 바람 따라 앙상하고 둥근 몸을 굴렸다. 고속도로에서 내리자 허허벌판에 홀리데이 인(Holiday Inn) 녹색 간판만이 빛났다. 갈색의 3층짜리 호텔 건물 뒤로 성인 키를 훌쩍 넘는 담장이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이 이어졌다. 저 담장 뒤에 아이들이 있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비자도, 보호자도 없이 넘어온 아이들이. “아이스(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미국 이민세관단속국) 시설은 너무 추웠어요. 거기서 만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버스에 올라탔어요. 한참을 가고, 졸다 깨니 밤이더라고요. 여기 도착했을 때 어딘지도 모르겠고, 어둡고 무서웠던 것만 기억나요.” 청소년 보호소의 첫인상을 물었을 때 아이들이 했던 이야기다. 2021년 한 해 동안(각주 1) 미국 국토안보부는 체류 허가도, 보호자도 없이 넘어온 미동반 아동(unaccompanied child) 12만 명을 수용했다. 이는 전년 대비 약 8배 증가한 수치로, 급증의 이유는 두 가지다. 미국 입국이 가능해져서, 그리고 고향을 떠나야만 해서다. 1기 트럼프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공중 보건을 명분으로 미국-멕시코 국경의 망명 신청자와 이민자들을 추방했다. 이후 들어선 바이든 정부가 미동반 아동에 대해 이 조치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면서, 아이들은 미국 국경을 넘어도 추방되지 않고 보호 절차를 받게 됐다. 미국 입국의 기회가 생긴 중미 지역의 많은 아이들이 살기 어려워진 고향을 떠났다. 그래야만 했다. 중미 3국으로 불리는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서는 수년에 걸친 가뭄과 허리케인으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고,(각주 2) 그 와중에 갱단의 강제 징집, 성폭행, 살인이 남은 일상마저 파괴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아이들 중 12만 명이 미국에 도착했다. 긴 여정에 지친 그들을 맞이한 건 포화 상태에 다다른 수용 시설이었다. 일례로 수용 가능 인원이 250명인 텍사스 도나(Donna)의 한 시설은 4,000명까지 수용해야만 했다. 아이들은 찬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은박 담요를 덮고 잤다. 음식은 엉망이었고, 샤워는 일주일에 한 번뿐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아이들이 아팠다.(각주 3)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긴급 수용 시설을 신설했고 그중 하나가 내가 일하게 된 청소년 보호소였다. 기독교계 비영리 단체가 운영하는 이 보호소는 원예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며 온실을 설계할 자원봉사자를 찾았고, 지도 교수였던 게럿 도허티(Gareth Doherty)가 내게 권해주었다. 대학원 졸업 후 방황하던 중이었기에 선뜻 시작했다. 무지로 가벼웠던 마음은 곧 무거운 현실로 가라앉았다. 온두라스에서 미국 국경까지는 약 3,000㎞. 서울에서 울란바토르까지가 겨우 2,000㎞에 불과한데, 그 거리를 아이들은 걷거나 화물 열차에 몰래 올라타며 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다리엔 갭(Darién Gap)이라는 정글에서 길을 잃어서, 열차에서 떨어져서, 멕시코 북부 사막을 건너다 목이 말라서, 리오그란데 강에 휩쓸려서, 인신매매와 성폭력을 당해서, 많은 아이들이 도착하지 못했다.(각주 4)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죽음은 짝 잃은 신발과 옷가지, 망가진 인형으로 남았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에 담겼다. 그래서 보호소의 아이들이 상실감에 잠겨 있으리라 상상했다. 하지만 첫인상은 슬픈 얼굴이 아닌, 작은 몸이었다.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Z가 13세에서 17세 사이 청소년만 머물고 있다고 얘기했지만, 실제로 만난 그들은 기껏해야 열 살이나 됐을까 싶었다. 저 여린 몸으로 어른들도 통과하지 못한 길을 넘어왔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런 여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꽤 자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저 또래 아이들처럼 친구들이랑 노래도 부르고 축구도 하면서. 무엇이 이 평범한 아이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오게 할까. 배고픔과 폭력을 피해 왔다는 거시적 설명은 명료해 보이지만, 실상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가족과 꿈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중미 지역 가난한 농부의 아이들이었고, 고향에 두고 온 형제와 자매, 부모를 걱정했다. 갱단의 폭력에, 기후변화로 알 수 없게 된 농사까지. 살기가 막막해진 많은 가정이 미국에서 친척이나 가족이 보내주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래서 빚을 내서라도 밀입국 브로커에게 아이를 부탁하는 부모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아이들은 가장의 눈을 하고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런 아이들 5백여 명이 머물던 보호소는 본래 오일 산업 노동자를 위한 시설이었다. 광화문광장의 네 배 정도 되는 20에이커 평지에 57개의 기숙사동, 대형 텐트로 만든 다섯 개의 교실, 의료 시설부터 가족 혹은 난민 케이스 담당자와 연락하는 콜센터, 급식실, 축구장, 농구장까지. 많을 때는 약 천 명의 아이들과 비슷한 수의 직원들까지 있어서 작은 마을 같았다. 다만, 단층 조립식 건물 사이로 성인 키를 훌쩍 넘는 갈색 담장과 철조망, 그 위로 한없이 푸른 하늘이 이곳에 갇혀 있음을 상기시켰다. 오직 평면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자마저도 날카로운 갈색의 풍경. 나는 그 광활함과 답답함, 황량함에 압도되어 도망치고 싶었다. 종종 저 담장을 넘어 탈출을 감행한 아이들도 있었는데, 주변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 발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직원들 사이 농담처럼 돌았다. 집으로 돌아갈 수도, 미국에 속할 수도 없어, 아이들은 기름 사막 위를 부유했다. 이런 사막에서 많은 직원들이 아이들에게 피난처를 만들어주고자 했다. 원예 치료사로 일하는 K는 화단을 만들며 아이들에게 꽃과 흙을 만질 수 있게 했다. 아이들이 좋아했지만, 사막의 겨울은 생각보다 추워 더 이상 야외에서 수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온실 설계를 부탁했다. 나는 설계를 시작하기 전 아이들이 어떤 공간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교육대학원 교수 V, 교육학 전공 대학원생 P, 원예 치료사 E, 코디네이터 Z와 함께 우선 이곳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했다. 급조한 흰색 모형 위로 십여 명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느낀 것들을 물감과 실을 사용해 풀어놓았다. 그 결과 우리가 배운 건 아이들이 세 가지 공 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친구랑 놀 수 있고, 녹색이 많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 첫 번 째와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하는 축구장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곳은 다 함께 뛰어놀 수 도 있었고, 인조 잔디에 앉아 삼삼오오 수다를 떨기도 좋았으며, 금요일 밤에는 노래자랑에, 일 요일 아침에는 미사까지. 축구장은 그들에게 성당이자 노래방이었고 자유였다. 그렇다면 마지막,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기숙사에서는 혼자 있을 수 없기에 아이들이 괴로워했다. 두 명이 한 방을, 그리고 네 명이 두 방 사이에 하나뿐인 샤워실과 변기를 함께 사용하는 구조였다. 성인 혼자 누우면 꽉 찰 방은 이층 침대와 작은 책상으로, 유일한 창문은 블라인드로 답답했다. 기숙사 건물은 복도 양쪽으로 스무 개의 방이 붙어 있는 구조였지만 공용 라운지 하나 없었다. 잘 때도 ‘보호’를 이유로 방문을 닫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각주 5)그렇다면 기숙사 외에 홀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있을까? 모든 시설은 항상 단체로만 사용할 수 있었고, 혼자 사용하기엔 너무 크고 개방되어 있었다. 온실을 만든다 해도 오직 원예 수업을 들을 때만 접근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이들은 그저 혼자서 울거나 기도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절실히 원했지만, 그곳 어디에도 그런 공간은 없었다. 자신만의 장소가 없다는 것은 인격의 상실과 다름없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 에서 한 인간은 사회가 자리를 내어줄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환대란 바로 이 자리를 주는 행위이며, 그 자리가 모여 사회가 된다. 즉, 사회란 서로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라고 할 수 있다.(각주 6)청소년 보호소는 난민 제도 속에 떠도는 아이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대기실일 뿐, 누구도 속한 장소가 아니었다. 아이 들은 평균 2주가량 머물렀고, 직원들 또한 3주 간 근처 호텔에서 출퇴근한 뒤 일주일의 휴가 동 안 자신의 장소로 돌아갔다. 사막의 풍경과 갈색 건물이 단지 낯설어서 아이들이 풀과 나무를 찾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의 갈색 풍경 속에서는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 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자리가 있던 곳이 언덕 과 강,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 작은 마을과 옥수수 밭이었기에. 그러므로 이 보호소에서 건축과 조경의 역할은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런 환대의 풍경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영감을 준 것은 아이들이 손수 엮은 우정 팔찌였다. 다양한 색상과 패턴을 엮는 그 팔찌처럼, 중남미 지역에는 기하학 무늬의 다채로운 천을 짜는 문화가 있다. 직선으로 반복되는 기숙사 건물을 씨줄로 삼고, 그 사이 공터마다 크기와 색상이 다른 그늘막과 정원을 날줄처럼 배치해 보호소 전체를 하나의 직조된 풍경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 아래에서 일과를 마친 아이들이 함께, 혹은 홀로 쉴 수 있기를 바랐다. 당시 보호소를 이끌던 A는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프로토타입을 만들 기회를 주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가장 많이 통과하는 삼각 형 길목에 작은 마당과 그늘을 만들었다. 2백만 원도 안 되는 예산으로 목재와 그늘막을 사고, 창고에 남아 있던 인조 잔디를 가져왔다. 남는 목재로 삼각형 테이블과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직원들은 땅을 파서 기둥을 올릴 기초를 만들고, 잔디를 깔고, 화단을 놓았다. 우리는 이 공간을 아이들에게 익숙한 색상과 식물, 상징으로 장식하기로 했다. 무엇을 심고 싶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부겐빌리아(Bougainvillea glabra)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종이꽃’으로도불리는 부겐빌리아는 중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목으로, 종이처럼 얇고 바스라질 듯한 세 장의 포엽이 아주 작은 꽃을 받치고 있다. 연중 열 달 가까이 꽃을 피우며, 복숭아색, 자주색, 빨간색으로 만발하는 포엽이 무척 화사하다. 우리는 화단에 부겐빌리아를 심고, 맞닿아 있는 기숙사 건물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고향의 새와 나무, 국기부터 유명한 피라미드까지 아이들이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는 기호들로 채웠다. 아이들은 이 공간을 작은 광장이라는 의미의 라플라시타(La Placita)라고 불렀다. 어설픈 공간이었지만 만들자마자 직원들과 아이들이 많이 찾았다. 특히 아이들과 개인적으로 대화할 공간이 필요했던 상담사들과 케이스 담당자들이 자주 이곳에 앉아 있었다. 첫 디자인 워크숍이 끝난 뒤, ‘호수에’라는 이 름의 한 소년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줘서 고맙다고. 비록 이 공간이 완성될 즈음에는 자신이 떠나 있을 테지만, 앞으로 이곳에 올 친구들이 좋아할 걸 생각하니 보람이 있다고 했다. 그러곤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 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아이들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뿐 아니라 다음 사람을 위해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각주 7) 사실 부유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저 주어진 단계만 따라가면 인생이 정답처럼 풀 릴 거라 생각했는데, 졸업 후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그 막막했던 시절, 그 친구의 꿈이 내게 길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좀 더 해볼 까 싶었다. 어쩌면 여기서 내 길을 찾을 수 있을 까 싶어서. 그런 이기적인 마음으로. **각주 정리 1. 2021 회계연도(FY2021, 2020년 10월 1일~2021년 9월 30일) 동안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 난민재정착국은 총 122,731명의 미동반 아동을 보호했다. 이 수치는 전년 대비 약 8배 증가한 것으로, 2020년에는 15,381명의 미동반 아동을 보호했다. 출처: 난민재정착국(acf.gov/orr/about/ucs/facts-and-data) 2. 2021년 3월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은 이 지역 주민 약 백만 명이 기아 상태임을 선언했다. American Immigration Council, “Rising Border Encounters in 2021: An Over-+view and Analysis”, March 4, 2022. 3. Hilary Andersson and Anne Laurent, “Children Tell of Neglect, Filth and Fear in US Asylum Camps”, BBC News, May 23, 2021. 4. 이러한 여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뉴욕타임스 기자가 쓴 르포 기사를 읽어보길 권한다. Julie Turkewitz, “A Girl Loses Her Mother in the Jungle, and a Migrant Dream Dies”, New York Times , June 20, 2023. 5.인류학자 김현경은 고프먼의 『수용소』를 요약하며 이와 같이 타인 과 함께 자는 데서 오는 일상적 노출과 감시의 편의를 위해 강요되 는 노출이 “자아의 영토”를 침범하며 인격의 신성함을 오염시키는 것임을 지적한다. 자세한 논의는 ‘4장. 모욕의 의미’ 속 소단원 ‘배 제와 낙인’ 참조.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6.위의 책 ‘1장. 사람과 개념’과 ‘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참조 7.빅터 프랭클이 인용한 니체의 문구를 변용했다. 한국어판에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로 나와있으며, 원문은 “Hat man sein warum? des Lebens, so verträgt man sich fast mit jedem wie?”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2006, p.123. 강준호는 존재와 제도가 만든 풍경을 읽는 건축가다. UCLA에서 건축과 미술사를 복수전공한 뒤 하버드 디자인대학원(GSD)에서 건축학 석사를 마쳤다. 이후 게럿 도허티(Gareth Doherty) 교수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Critical Landscapes Design Lab)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해안 지역의 기후변화 인식을 조사했다. 현재 건축가로 일하며 좋은 풍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junho_s_kang
  • [슬기로운 공원 생활] 브라이언트 공원과 나의 뉴욕 이야기
    뉴욕 맨해튼의 심장부, 번잡한 거리와 고층 빌딩 사이에 숨 쉬는 초록의 오아시스, 브라이언트 공원(Bryant Park)이 있다. 이곳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나의 일상을 채우는 활력소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이 공원이 왜 이렇게 내게 특별한지 그리고 왜 수많은 뉴요커와 관광객이 이곳에서 웃고 쉬고 꿈꾸는 지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깨달았다. 공원의 매력은 단순히 아름다운 잔디나 계절별 이벤트가 아니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삶과 에너지에 있다는 것을. 삶의 일부가 된 브라이언트 공원 나는 맨해튼 동남쪽 스튜이타운(Stuytown) 아파트 단지에 살며, 미드타운 40번가에 위치한 필드 오퍼레이션스 사무실까지 거의 매일 걸어서 출퇴근한다. 처음 뉴욕에 왔을 땐 뉴욕시의 공유 자전거인 시티 바이크(Citi Bike)로 출퇴근을 시도했다. 자전거를 타고 맨해튼 거리를 질주하는 상상은 꽤 멋졌지만, 현실은 사용 가능한 자전거를 찾기 위해 10분씩 헤매는 전쟁터였다. 결국 자전거를 그만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집에서 매디슨 스퀘어 공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지하철로 갈아타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뉴욕의 악명 높은 교통 체증, 거리 시위, 지하철 고장 같은 변수로 인해 소요 시간이 25분에서 50분까지 들쑥날쑥했다. 게다가 낡고 냄새 나는 지하철도 감내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분 전환 삼아 사무실까지 걸어가니 40분이 걸렸고 걷기가 가벼운 운동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로 걸어서 출퇴근하는 게 일상이 됐다. 이 루트의 묘미는 뉴욕에서 가장 사랑받는 두 공원, 메디슨 스퀘어 공원과 브라이언트 공원을 자연스럽게 지나친다는 점이다. 출근길엔 메디슨 스퀘어의 아침 햇살을, 퇴근길엔 브라이언트 공원의 활기를 만난다. 점심시간엔 동료들과 공원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사람 구경을 하곤 한다. 이 공원들은 내 일상에 녹아들어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가 됐다. 브라이언트 공원의 진짜 매력 브라이언트 공원에 앉아 글을 쓰던 중, 문득 깨달았다. 내가 이 공원을 사랑하는 이유는 단순히 벤치에 앉아 사색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순간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의 진짜 매력은 사람들이다. 대학생 시절, 주말이면 별다른 계획 없이 명동으로 향하곤 했다. 커피숍 창가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개성 넘치는 젊은이들, 호기심 가득한 외국인 관광객들, 노점 상인의 익살스러운 호객 행위, 신기한 길거리 음식을 맛보는 사람들, 그 모든 장면이 묘한 열망과 활력을 내게 불어넣었다. 브라이언트 공원도 다르지 않았다. 이곳은 연중무휴로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뉴욕 공원 특유의 철제 의자에 앉아 있으면, 5분 만에 피자를 해치우고 떠나는 직장인, 여행에 지친 유럽 가족, 영상 통화로 고향에 소식을 전하는 유학생, 선글라스를 끼고 책을 펼쳤지만 주변만 두리번거리는 사람, 잔디밭에서 럭비공을 던지다 관리인에게 저지당하는 청년들, 초콜릿을 파는 남미 이민자와 그 손을 꼭 잡고 따라다니는 다섯 살쯤 된 아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력서를 고치는 사람. 이 모든 이들이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간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나는 내 삶을 돌아보고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며 묘한 위로와 에너지를 얻는다. 누군가는 여유롭게 웃고, 누군가는 열정 넘치는 얼굴로, 누군가는 울상 지으며 지나간다. 나도 그들과 함께 웃고 힘을 내고 슬픔에 공감한다. 이게 나만의 휴식이며 에너지 충전 방식이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이유로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이홍인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의 오피스박김, 호주의 맥그리거 콕샐(McGregor Coxall)과 하셀(Hassell), 미국의 하트 하워튼(Hart Howerton)에서 경력을 쌓은 뒤 필드 오퍼레이션스(Field Operations) 뉴욕 오피스에 입사해 BIM 전문가로서 래빗을 실무에 도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빠르게 발전하는 테크놀로지를 적극 활용하여 실무 효율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그림자 기록하기, 공원의 비인간 행위자들과 나눈 느린 대화
    절경의 봉우리에서 버려진 섬으로, 숨겨진 폐허의 정수장에서 숭고의 미감을 발산하는 공원으로 운명이 바뀌어온 선유도. 어쩌면 선유도공원은 서울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공원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비인간적’은 비정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뿐 아니라 식물과 곤충, 빛과 바람, 물과 이끼, 부스러진 콘크리트와 녹슨 철근이 모두 주체가 되어 장소의 행위자(agent)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선유도공원은 인간만이 도시의 거주자가 아님을, 인간만이 공원의 주인이 아님을 감각하게 한다. 산업의 폐허 사이사이를 비집고 생명체가 스며든 선유도공원은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을 무력화하는 복합체 경관이다. 인간과 비인간이 복잡하게 얽힌 연결망, 선유도공원에 또 하나의 조용한 흔적이 내려앉았다.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선유담담’의 하나로 조성되어 지난 4월 23일 모습을 드러낸 김아연(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의 설치 작품, ‘그림자 아카이브’다. ‘그림자 아카이브’는 선유도의 정수장 구조물(비인간 사물)과 식물(비인간 생명체)이 빚어내는 오랜 거주의 기억과 현재를 시아노타입(cyanotype)이라는 고전적 인화 기법으로 포착한다. 진청색 감광천에 새겨진 그들의 그림자는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비인간들이 단지 기록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풍경의 주체임을 증명한다. 시아노타입은 19세기 식물학자들이 빛과 물, 약품을 이용해 식물 표본을 기록하던 인쇄 기법이다. 얼마 전까지 설계 도면을 만들 때 쓰던 청사진도 시아노타입의 일종이다. 햇빛으로 이미지를 현상하기 때문에 ‘선 프린트’라고도 불린다. 김아연은 이 오래된 기록 방식을 공원의 시간과 풍경에 겹쳐놓는다. 그는 “관찰과 발견과 느낌과 상상”을 통해 감각한 선유도공원의 “무위의 풍경을,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자라는 생명을, 오늘의 잠깐을, 물과 햇빛과 약품이 만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기록하고”자 시아노타입을 택했다. 공원 곳곳에서 발견하고 채집한 사물과 식물의 윤곽을 햇빛에 감광시켜 인화했다. 그러나 김아연의 기록은 정밀한 재현이 아니다. 실루엣과 흔적, 즉 그림자만을 남긴다. 바람에 흔들리며 명확히 찍히지 못한 경계들, 색의 농도에 따라 드러나는 미세한 잔상들이 그림자로 남아 짙푸른 캔버스에 감광된다. 버드나무, 억새와 수크령, 노린재, 바닥의 몽돌, 철재 펜스, 계단. 어떤 건 바람에 날려 일부만 드러나고, 또 어떤 건 그림자조차 희미하다. 이 불완전성이야말로 ‘그림자 아카이브’의 본질이다. 존재는 흔들리며 기록되고, 완전하게 포착되지 않는다. 선유도공원의 설계는 조경가가 했지만, 실제로는 여러 비인간 생명체와 사물이 끊임없이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다. 김아연의 작업은 비인간들의 자기표현을 도와주는 일에 가깝다. 그들의 자율적 행동과 흔적이 드러나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작가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기록자이며, 그들은 대상이 아닌 공저자가 된다. ‘그림자 아카이브’는 우리가 기록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명확성과 명명 가능성에 균열을 낸다. 대신 그것은 도시의 이름 없는 존재들의 자취를 감광해 ‘인간 너머’의 세계를 보여준다. 김아연의 아카이브는 과학적 분류와 세밀한 묘사를 담은 도감이 아니다. 공원에 잠재한 비인간 존재들과 느린 대화를 시도하는 일종의 청취 행위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그 목소리를 다시 도시에 되돌려주는 것. 선유도공원 수생식물원을 바라보는 긴 정자이자 한강 풍경의 병풍이기도 한 ‘그림자 아카이브’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도시는 누구의 삶을, 무엇의 존재를 기억하는가.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의 흔적, 이름조차 없는 잡초의 자취를 빛의 언어로 기록한 김아연의 설치 작업에는 도시에서 잊혀온 비인간들의 그림자가 정성스레 담겨 있다. 명명과 통제가 아니라 감응과 연대의 방식으로. 짙푸른 ‘그림자 아카이브’는 계속 변해 갈 것이고 어느 시점에는 완전히 탈색되어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언젠가 정해진 생애를 마치면 겸허히 퇴장해야” 하는 것처럼, “그림자 아카이브는 그 기록 장치로 행복한 삶을 살다 서서히 서서히 사라지기를 희망”한다고 김아연은 말한다. 이번 호 지면에 담은 그의 “기록물을 만들기 위한 여정의 기록”을 꼼꼼히 읽어보시길, 책장을 덮자마자 양화대교행 버스에 올라타시길 권한다. 지난 5월호부터 일상의 ‘다양한 공원 사용법’을 청취하는 꼭지, ‘슬기로운 공원 생활’을 새로 마련했다. 매달 다른 필자가 하나의 공원과 그 공원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2020년 6월호부터 이어온 ‘풍경 감각’을 이번 호로 맺는다. 무려 만 5년이 넘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긴 기간을 통과하며 늘 따뜻한 글과 그림을 보내준 조현진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 [풍경 감각] 창문으로 들어오는 손님
    매일 아침 베란다 창문을 연다. 식물들이 햇빛과 바람을 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도록 방충망까지. 그런데 열린 문으로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도 찾아온다. 가장 단골은 파리. 근처 텃밭 퇴비 더미에서 날아왔으리라. 위생이 나빠 보이지만 밝은 쪽 다른 창을 열어두면 금방 날아가기에 내쫓기 수월하다. 드론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는 손님은 말벌이다. 위험하다고 하니 스스로 나갈 때까지 안전한 방에서 지켜봐야 한다. 나방은 더럽거나 무서울 게 없어 방심했는데, 종종 나타나 입맛에 맞는 화초를 골라 몽땅 먹어 치우던 애벌레가 이 녀석의 유생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꽤 근사한 손님들도 있다. 작업실 옆의 숲에서 온갖 나비가 날아와 꽃 꿀을 더듬고 있으면 날개 표면에서 산란하는 오색 빛을 구경할 수 있다. 꽃잎에 우아하게 앉는 나비와 달리 꿀벌은 꽃에 얼굴을 쑤셔 박은 채 꿀과 꽃가루에 열중한다. 투명한 날개 아래로 씰룩거리는, 노랗고 귀여운 엉덩이들. 언젠가 다홍색 무당벌레가 찾아와 며칠 동안 화분의 진딧물을 싹 청소해 준 적도 있다. 무당벌레는 진딧물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깡충거미’라는 거미 하나가 별 일 없이 찾아와 지내며 몬스테라 잎사귀 사이를 깡충거리며 놀았다. 다가가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쭈뼛대던 그 친구 덕분에, 징그럽게만 여겼던 거미가 이제는 어깨에 내려앉아도 아무렇지 않다. 이 글을 끝으로 ‘풍경 감각’을 마무리한다. 처음엔 그림에 글을 붙이는 것도, 잡지의 가장 앞쪽에 자리잡은 것도 어쩐지 부끄러워서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유난히 작업이 어려웠던 몇 달간 휴재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도 매일 아침 창문을 여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아니길 바라지만, ‘풍경 감각’의 몇 편은 누군가의 베란다에서 파리나 나방 같을지도 모르겠다. 나비나 무당벌레는 욕심인 듯 하고. 그래도 바라건대 깡충거미쯤 되었으면 좋겠다. 귀한 지면을 내어주신 편집부와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 [우먼스케이프] 허난설헌의 풍경
    허난설헌과 허균, 신사임당과 율곡을 낳은 강릉. 그곳에 뭔가 특별한 기가 서려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이번 5월 귀국 길에 강릉행을 계획했다가 실패했다. 허난설헌 기념공원도 둘러볼 생각이었다. 역에 가서 기차표 끊으면 될 거라고 쉽게 생각한 것이 첫 번째 실수였고 5월 초 연휴가 길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실수였다. 기차표도 고속버스표도 일찌감치 완전히 매진된 상태였다. 차를 임대해서 가볼까도 생각했으나 그래 봐야 강릉의 정기는커녕 고속도로에 줄지어 선 자동차의 행렬 속에서 스트레스만 한가득 충전하여 돌아올 것이 뻔했기에 포기했다. 물론 아주 오래전, ‘잘 먹고 잘 살고 잘 놀기’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미 여러 차례가 보긴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둘러본 것이 아마 2008년경인 것 같다. 용평에 머물며 정원을 하나 만들고 있을 때였다. 강릉이 멀지 않았으므로 경포대도 볼 겸 겸사겸사 주말에 길을 떠났다. 강릉에 도착해 경포 해변으로 내려가다가 혼비백산하고 돌아섰다. 언덕의 능선을 결딴낸 호텔과 펜션, 어지럽게 번득이는 오색 등불, 어디선가 들려오는 요란한 음악, 주차장에 종으로 횡으로 진입하는 자동차 등, 아수라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아수라장을 통과했더라면 백사장으로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토록 망가진 풍경에 대한 노여움이 불같이 치솟아 도저히 머물 수가 없었다. 지금 갔더라면 달라졌을까? 대형 호텔과 펜션, 횟집과 주차장의 자동차들 사이에서 난설헌의 정신을 읽어낼 수 있었을까? 그녀의 위대한 시가 그 추해진 풍경을 다 덮을 수 있을까? 혹시 난설헌이 강릉의 풍경을 거듭 노래했더라면 이를 기리기 위해서라도 강릉시가 풍경을 보존하려 노력해 보지 않았을까? 난설헌의 시는 풍경시라고 말할 수도 있을 만큼 수많은 풍경을 노래했지만 강릉을 노래한 시는 단 한 수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 집은 강릉땅 강가에 있어 / 문 앞 흐르는 물에서 비단옷을 빨았지요 / 아침에 목란배를 한가히 매어 두고는 / 짝지어 나는 원앙새를 부럽게 보았어요.”(번역: 허경진) 그 외 난설헌의 시선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아주 먼 중국이나 혹은 그보다 더 먼 신화의 세계로 향해 있었다. 16세기 조선은 어떤 시대였나 허난설헌은 1563년에 출생해 1589년, 만 26세로 요절했다. 연대로 본다면 황진이와 신사임당의 손녀뻘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유명했던 세 여인이 모두 16세기를 살다 갔다. 문득 궁금해진다. 16세기 조선은 어떤 시대였을까? 조금 더 좁혀보자면 연산군(1476~1506)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즉 중종, 인종, 명종 대의 조선이다. 성리학이 아직 경직되기 전이었다. 붕당 정치가 태동했으나 세도 정치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사림 주도의 서원 문화가 활성화되어 온 나라에 무기 철렁이는 소리 대신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다. 신분제도 역시 세분되어 가는 과정에서 계층 간의 이동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우리가 아는 네 번의 사화가 모두 16세기에 일어났다. 정치적 격변의 시대였다. 황진이의 시를 빌려 표현해 본다면 15세기는 청산처럼 단단했고 16세기에 오히려 푸른 파도가 일렁였다. 흐름과 변화가 있었다. 가부장제도 역시 완전히 정착하지 않아서 사임당의 경우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풍습에 따라 혼인 후에도 평생 친정에서 맘 편히 살며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난설헌은 아뿔싸, 친영례(각주 1)가 도입된 직후에 혼인하여 시집살이를 시작한 1세대가 되었다. 난설헌의 시에 이따금 서릿발이 내비치는 것이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난설헌의 두 개의 삶 난설헌 허초희는 만 15세에 안동 김씨 가문 김성립과 혼인했고 이 혼인을 전후로 확연히 구분되 는 삶을 살게 된다. 구김살 없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하루아침에 낯선 가문, 낯선 가풍의 어린 며느리가 되었다. 친영례가 막 시작된 무렵이었으므로 시집살이에 관한 매뉴얼도 아직 없었을 것이다. 친정 아버지 허엽, 오빠 허성과 허봉, 동생 허균 모두 뛰어난 문장가여서 난설헌과 함께 허씨 5 문장이라 불렸다. 그중에서도 난설헌의 문장이 가장 격조 높았다고 평가된다.(각주 2)아버지 허엽은 지 난 호에 이미 등장했던 인물이다. 화담 서경덕의 문인으로 황진이와 함께 수학했던 열린 사고의 인물이었다. 딸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장려했으며 오빠들도 초희를 지극히 아꼈고 동 생 허균도 누이를 매우 따랐던 것 같다. 이 시절에 어린 초희는 마음껏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러다 혼인과 함께 초희의 세상은 급격히 달라졌다. 남편 김성립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와 의 갈등도 컸다고 전해진다. 각별했던 둘째 오빠 허봉이 글을 다시 쓰라고 붓을 보낸 것으로 보아 마음 놓고 글도 쓸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아이 둘을 낳아 한때 행복했으나 두 아이 모두 어린 나이에 역병으로 죽고 뱃속의 아이마저 잃게 된다. 곧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친정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오빠 허봉은 당파 싸움 끝에 귀양을 다녀와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난설헌도 죽는다. 죽음의 정확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상을 떠났다’라는 표현을 액면 그대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병을 앓았다는 이야기도 없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증거도 없다. 이제 그만 살겠 다고 작정하고 곱게 누워 영혼을 떠나보냈을지도 모르겠다. 떠나기 전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 듯,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라는 의미심장한 시 한 수를 남겼다.(각주 3)그토록 줄기차게 노래했던 신선의 세상으로 훌쩍 떠나간 것일까? 『난설헌집』의 머리말을 썼던 중국 시인 주지번은 난설헌을 선계에서 인간 세계로 잠깐 귀양 와 구슬 같은 시를 쏟아낸 선녀라고 소개했다.(각주 4) 유선사, 난설헌의 현실 초월일까 아니면 자아가 머무는 곳이었을까 난설헌의 시 세계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선계를 노래한 ‘유선사(遊仙詞)’다. 전해지는 210여 편의 시 중반이 넘는 128편에서 선계를 노래했다. 그중 총 87수로 이루어진 ‘유선사 연작’이 있는데 여기서 난설헌은 인간계의 굴레와 한계를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장엄하게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게 펼쳐낸다. 서왕모로부터 시작하는 신선들의 복잡한 계보와 그들이 깃들어 사는 무한한 세상에 관한 이 대서사시는 해독이 쉽지 않다. 수많은 지명, 신선명, 인명 및 사건을 이해하려면 백과사전을 일일이 검색해야 한다. 난설헌의 유선사는 혼인 후의 갑갑한 인생에서 도피하기 위해 쓴 것으로만 이해할 일은 아니다. 선계에 관한 동경은 이미 어린 시절에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통해 전해진 화담 서경덕의 영향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달달 외울 정도로 탐독했다는 송나라 책 『태평광기太平廣記 』에 실린 7천여 에 달하는 이야기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그중에서도 선계의 이야기가 어린 난설헌을 가장 사로잡았던 것 같다. 여덟 살에 지었다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각주 5)이라는 글도 선계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 87수 연작의 서사시로 귀결했고 마지막 시도 선계로 장식했다. 어린 시절 호기심과 재미로 출발했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계는 난설헌의 진정한 자아가 머무는 세상이 되었다.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난설헌은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과 자부 심을 가지고 있었다.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의 마지막 단락을 보면 꼬마 초희가 하늘의 명을 받 아 “강물이 내달리듯, 샘물이 솟아나듯” 상량문을 지어냈다고 하고 “구절이 아름답고 문장도 굳 세어 이백의 얼굴을 대해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썼다.(각주 6)죽기 전에도 흡사한 주장을 했다. 어느 날 밤 꿈에서 선녀들을 만났는데 시를 한 수 지어보라 해서 지었더니 선녀들이 이건 신선의 글이라 감탄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시 이태백에 견주었다.(각주 7) 나무에 붉은 말고삐를 매는 청년은 누구일까 유선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외에도 난설헌의 시제는 매우 다양했다. 거의 모든 세상만사를 한번 쯤은 시로 읊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중의 일을 묘사한 궁사 연작도 있고 ‘죽지사’라고 하여 풍속 이나 연정을 노래한 것도 적지 않다. 그중 연가 몇 수는 “절창이지만 방 탕하여 문집에 실 수 없다”라는 금지곡 선언을 받기도 했다.(각주 8) 그 모든 난설헌 시를 꿰뚫는 공통점이 있다. 4백 년 전에 쓴 시임에 도 불구하고 꼭 어느 영화에선가 본 듯한 장면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이 다. 그건 아마도 시마다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이 특정한 행동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인물을 등장시켜 특정한 행동을 하게 함으 로써 영화의 스틸 컷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난설헌 시의 남다른 점이다. 예를 들어 ‘버들가지 노래’라는 시에서는 이런 장면을 그렸다. “청루 서쪽 언덕에 버들꽃 흩어지자 / 아지랑이 낀 가지가 난간 을 스치는데 / 어느 집 청년인가 백마를 채찍질해 와서 / 버드나무 그 늘에다 붉은 고삐를 맨다.” 나무에 말고삐를 매는 청년 혹은 귀공자는 난설헌의 시에 꽤 자주 등장한다. 청년의 말고삐와 채찍의 색상이 바뀌고 장소도 달라져 궁궐 로 출근도 하고 장안 길가에도 나타났다가 기생집 앞에 말고삐를 매기도 한다. 마치 시그니처처럼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 말고삐를 매는 이 청년은 대체 누구일까? 혹시 난설헌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스스로를 이태백과 견준 난설헌의 기개로 볼 때, 그리고 “조선에서 여자 로 태어난 것과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3대 불행으로 꼽았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자신도 오빠들처럼 벼슬길에 올라 궁으로 출퇴근도 해보고 자유롭게 나들이도 하며 기생집 기둥에 말고삐도 한번 매보고 싶지 않았을까? 허난설헌의 다원적 자아 - 선인, 궁인, 귀공자, 전장의 장수 입새곡(入塞曲), 새하곡(塞下曲) 내지는 출새곡(出塞曲)이라는 한시의 장르가 있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와 병사들에 관한 시다. 난설헌은 입새곡 5수, 새하곡 5수, 출새곡 2수를 남겼다. 아마도 그녀의 시 중 가장 의외적 주제가 아닐까 싶다. 이제는 말고삐를 매는 청년티를 그만 벗고 장수가 되어 하늘 높이 걸린 석양을 바라보며 칼 차고 만 리 출정 길을 떠나 보고 싶었던 것일까? 깊은 구름 자욱한 사막에서 봉화 살펴보고 나서 밤 평원을 달려가는 기병들을 그리기도 했고 열 겹 포위망을 뚫고 흉노를 무찌른 뒤 백마를 타고 눈을 밟으며 돌아오는 장군의 노래도 불렀다. 그대로 웰메이드 사 극의 한 장면 같고 소설의 시놉시스 같다. 16세기의 조선에 갇혔던 난설헌은 시를 통해 선계에서 수만 년을 보내고 문득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와 베를 짜는 가난한 여인도 되어 보고 궁녀가 되었다가 상인이 되어 강상을 누비기도 했다. 붉은 말고삐를 쥐고 길 떠나는 청년으로,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 자아를 무수히 쪼개가며 살았다. 그녀가 그렸던 풍경도 그만큼 다채로웠다. 그러나 어느 것도 그녀의 것은 아니었기에 결국 죽음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2022년 국립발레단이 허난설헌의 시를 무용극으로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난설헌의 시 중에서 ‘감우(感遇)’와 ‘몽유광상산(夢游廣桑山)’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감우는 난설헌이 드물게 자신의 정서를 직접 표 출한 감성시로서 4수로 이루어졌다. 그중 1수에 난초와 서리, 즉 난설이 나타난다. 몽유광상산은 문자 그대로 선계에 있다는 광상산을 노니는 꿈을 꾸고 나서 지은 것으로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는 바로 그 장면이 묘사된 시다. 난설헌은 이 시에 특별히 서문을 지어 첨부했는데 거기서 스스로를 이태백에 견준다. 그녀의 난해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형상화하기에는 기념공원보다는 오히려 오페라나 발레 무대, 혹은 영상 예술이 적합할 수 있다. 이렇듯 난설헌은 20세기 후반부터 다각도로 크게 조명을 받고 있 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난설헌이 다시 태어나 한번 마음껏 훨훨 살아주었으면 생각해 본다. **각주 정리 1. 신부가 시댁에 가서 일생을 보내는 제도. 2. 임미정, “허난설헌 시자료의 재검토”,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제42호, 2021, p.80. 3. 몽유광상산(夢游廣桑山) 4. 홍경진, 『허난설헌 시집-10(한국의 한시)』, 평민사, 1987, p.227. 5. 선계의 광한전이라는 궁전에 백옥으로 된 누각을 새로 지었는데 그 대들보에 넣어둘 상량문을 상상해서 쓴 것이다. 6. 4번 책,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p.203. 7. 위의 책, p.211. 8. 난설헌과 동갑이었으나 더 오래 살았던 이수광(李睟光, 1563~ 1629)이 한시를 정리하며 그리 평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고정희
  • [슬기로운 공원 생활] 세상의 끝, 나의 공원
    공원 산책 산책 또는 걷기는 가장 단출하게 공원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집과 일터를 한군데로 합치고는 퇴근길이란 게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오후 여섯 시 반에 일을 마치면 동네 뒤편을 둘러싼 개운산 공원의 야트막하고 고즈넉한 산길을 홀로 걷는다. ‘퇴근 본능’이 이런 걸까. 처음에는 일과를 끝내는 느낌 때문에 발 닿는 대로 자꾸 걸었는데, 날씨에 따라 조금씩 경로가 달라지긴 해도 그럭저럭 반복과 규칙이 됐다. 유명 작가, 철학자들의 걷기와 인생을 주제로 쓴 책에서 나와 비슷하게 산책한 양반을 찾는다면 그건 아마도 ‘칸트’일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칸트는 날씨와는 상관없이 마치 시곗바늘처럼 매일 오후 다섯 시부터 늘 똑같은 길을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해질 무렵 정해진 코스를 되풀이한다는 면에서 일견 비슷하지만, 실제 결정적으로 닮아 있는 건 산책의 난이도다. “그(칸트)의 산책은 인색하고 쩨쩨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는 땀 흘리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여름에 아주 천천히 걸었고 땀이 몇 방울이라도 흐르는 게 느껴지면 곧바로 그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각주 1) 세상의 끝 협의 따위로 바깥 일이 없는 날에는 근처 공원의 어느 한 자락이 일터 겸 집을 기준으로 하루 중 가장 멀리 간 곳이다. 어딘가 걸어야 하루가 마무리되는 기분이 드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하루라는 ‘시간’의 관념적 마무리를 구체적인 ‘공간’의 끝까지 걸어가면서 몸으로 실제 확인하려는 그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습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쨌거나 내게 공원 산책은 하루를 정리하면서 그만치 세상의 끝까지 자분자분 걷는 일이다.인생 자체가 글쓰기와 산책이었던 작가 로베르트 발저가 쓴 『세상의 끝』이라는 짧은 소설이 있다. 주인공인 아이는 ‘세상의 끝’을 찾고자 무려 16년을 바다, 평원, 산을 걸어서 헤맨다. 모질게 고생을 겪은 뒤 길에서 만난 어느 농부에게서 구한 답이 다소 어이없다. “‘세상의 끝’은 근처에 있는 한 농가의 이름”(각주 2)이며, 삼십 분만 더 걸어가면 닿을 곳이란다. 이런 산책은 멀든 가깝든 그저 걷고 걷는 일일 뿐이다. 달리 고민 없이 공원 길을 가만히 따라가면 일과로 뒤엉켰던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조금씩 풀린다. 어느새 걱정도 아쉬움도 굴욕도 고뇌도 발길에 닳은 듯 사라진다. “네가 최고 강자다―그렇지만 넌 그저 최고 강자일 뿐이다. 이렇게 인간은 사물의 형태를 취한다. 작아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편이 낫다.”(각주 3) 개운산 공원 말끔하고 번듯한 대형 공원이나 정원을 좀체 가지 못한다. 아버지 환갑 때부터 팔순을 지나 사반세기 동안 인구가 통 변하지 않는 어느 허씨 일가의 가족사진처럼. 언제나 혼자였고 혼자이니 그렇게 멀리 외톨이로 가 봐야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게 먼저 꼽는 핑계가 되겠다. 더불어 ‘왜 나는 저렇게 설계할 수 없는가’라며 마음을 온통 들쑤시는 속 좁은 질투심 때문에 그런 공원들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게 또 하나의 유별난 사유다. 하지만 거기서 나아가 예쁘장한 정원과 공원에서 “‘노동’과 ‘노동자’의 흔적이 …… 어떻게 해서 사라지게 되었는지”(각주 4) 곰곰 생각하면 마음이 자꾸 시끄러워진다. 지나치게 매끈하고 반들거리는 시설들에 견주면 정작 사람이 겉돈다. 내개 “공원에서는 어떤 소속감 같은 걸 느끼기가 쉽다”(각주 5)고 하지만 그런 장소들이 내게는 때로 징글맞기도 하다. 호사롭지 않아도 그저 일상의 평화와 안식을 줄 수 있다면 그런 공원이 내게는 우선이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위치한 서울 성북구 ‘개운산 공원’은 1940년에 지정된 해발 134m 산지형 공원으로서 나이로 치면 딱 우리 아버지 연배다. ‘개운산(開運山)’은 조선시대 창건한 개운사(開運寺)라는 절에서 비롯됐는데, 다른 이름 진석산(陳石山)은 채석장이 있던 자리라서 그리 불렸다고 한다. 바위가 워낙 많아선지 산을 둘러 생긴 동네들인 종암동, 안암동, 돈암동 모두 형제처럼 바위 암(巖) 자 돌림이다. 지금도 공원 산길을 걷다 보면 높직한 돌덩이 절벽이 간간이 서 있고 울퉁불퉁 튀어나온 커다란 바위들도 많다. 공원 길 옆으로 동네 쪽을 내려다보면 오래 전 원석을 잘라내고 널찍하게 남긴 자리가 완만히 펼쳐져서, 그 경사진 바위로 걸어 나가 털썩 앉아서 멀리 용마산, 아차산, 수락산, 북한산을 빤히 바라보는 게 제법 장쾌하다. 주로 걷는 길은 개운산 공원 중에서도 고려대학교가 개방한 사유지에 있 다. 돌 계단이며 흙길, 데크 등으로 길이 차분히 이어지는데, 주변은 울울창 창하지도 삭막하지도 않게 적당히 빽빽한 숲이다. 수십 년 전 심은 소나무, 스트로브잣나무, 팥배나무, 산벚나무, 때죽나무 등 수목들이 어울려 자라고 상수리, 갈참나무, 졸참나무가 군데군데 버티고 선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천이되는 과정인 듯하다. 나무들 뒤로 외래종 서양등골나물의 추억이 따라온다. 주말 대낮이었다. 생태 교란종 서양등골나물 꽃들이 대거 창궐해서 심각하다는 기사를 봤는 데, 과연 문밖 아파트 곳곳까지 이미 널리 침투해 있었다. 늘 가던 대로 걷다 가 개운산의 높은 지점을 지나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빛이 거의 안 드는 숲 가장자리에도 떡하니 그 망할 흰 꽃들이 번지고 있는 게 아닌가. 부아가 치밀어서 풀을 잡아 뜯어도 만만치 않다. 여간해선 뿌리까지 나오질 않 는데 마침 주위에 아무도 없길래, 내친김에 아예 큰 나무들 밑으로 들어가 서 피하던 땀까지 흘려가며 그 풀들을 열심히 뽑아내던 참이었다. “지금 뭐 하세요?” 삼사십 대로 보이는 여인네가 홀연히 나타나서 묻는 다. 놀랐지만 그보다도 혹시 오해할까 두려웠다. 겉보기에 가녀린 들꽃을 피 사리하듯 뽑은 건 글쎄다, 사이코패스에게나 어울리지 않는가. “음, 이게 그 냥 꽃 같아도 말하자면 생태 교란종이라는 겁니다. 외국에서 온 녀석들이 하도 퍼져서 우리 고유의 좋은 식물들까지도 죄다 못 살게 굴어요.” “아,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몸을 돌려 몇 발짝 내려간다. 나도 다시 내 임무에 충실하려는 순간, 돌연 그녀가 홱 돌아서면서 웃음을 짓더 니 두 손을 마구 흔들며 부른다. “오빠, 같이 가요, 같이 내려가요!” 그녀의 동공이 왠지 묘하게 흔들렸다. 그늘에서 솎아낸 ‘꽃을 든 남자’와 그에게 애 타게 ‘손짓하는 여인’. 누군가 호젓한 산길에서 이런 장면을 마주한다면 과연 뭐라고 할 것인가. “저저, 전, 어이, 올라가는 길이었어요!” 숲 아래서 황급히 튀어나와 반대 방향으로 부리나케 올라갔다. 그날 나의 공원의 끝, 개운산 꼭대기에는, 비 교적 낡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쓸 만한 조합형 생활체육시설과 철봉이며 역기며 운동 기구를 두루 갖춘, 얼기설기 잇대고 덮은 막사 같은 서민형 피트니스 클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어쩌면 공원에서 “세상의 종말은 모든 것이 멈출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도 없이 계속될 때 다. 그러니 차가운 달빛 아래서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내딛기만 하면 된다.”(각주 6)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칸트가 반복한 걷기의 특징을 단조로움, 규칙성, 필연성, 세 가지로 꼽으면서 필연성이 규칙성의 개념에 덧붙으면 그것이 바로 ‘운명’이라고 한다. 무언가 맹렬한 추구와는 정반대로 마음을 내려놓은 한 인간의 ‘수동적 의지’가 지닌 힘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평생의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가 그런 운명이었을까. 발저는 1919년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산문에서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각주 7)라고 썼다. 공교롭게도 1956년 성탄절 아침 그는 산책을 나섰다가 눈밭에 쓰러져 죽은 채 발견됐다. 극적이라도 이렇게 쓸쓸한 운 명은 굳이 마다하겠다. 걷다 보면 그게 아닐 거라고, 마침내 어딘가에서 누군가 만나도록 흘러갈 거라고, 그렇게 되려고 혼자 걷는 중이라고 애써 되뇐다. 건축학과에서 가을 학기 조경학개론을 몇 년간 강의한 적이 있었다. 주 중 행사로 밤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의 주적은 무엇보다 ‘졸음’이다. 누군가 조언을 해서 중간고사가 끝난 추석 무렵이면 수업 대신 서울숲 답사를 갔다. 가기 전에 학생 대부분 입이 댓발은 나와서 툴툴거렸다. 설계 과제는 몰려 있고 마음은 바쁘고 몸은 피곤하며 학교가 있는 용인에서 서울 답사지는 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단풍이 곱게 들어가는 오후의 공원에서 수십 명 출석을 부르고 마음대로 흩어지라고 하면 강의실에서는 절대 못 볼 밝은 얼굴들이 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볕 좋은 가을날 두어 시간 동안 이곳저곳으로 제 방식대로 아름답게 섞여 들어간 청춘들을 여기저기서 천천히 돌아봤던 기억이 지금 도 생생하다. 그들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리라 믿는다. 혼자서도 좋지만 각자 짊어진 세상의 모서리들이 모처럼 둥그러니 느슨 하게 이웃하는 그런 순간 잠깐 드러나는 ‘세계의 끝’, 뭐 현실판 피안 같은 그런 널찍한 곳도 공원이 아닐지, “나는 연락하러 그곳에 간다.”(각주 8) **각주 정리 1. 프레데리크 그로, 이재형 역, “일상적인 외출, 이마누엘 칸트”,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책세상, 2014, p.222. 2. 로베르트 발저, 배수아 역, “세상의 끝”,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한겨레출판, 2017, p.83. 3. 폴 발레리, 백선희 역, 『폴 발레리의 문장들』, 마음산책, 2021, pp.66~67. 4. 제이디 스미스, 케이티 머론 편, 오현아 역, “보볼리, 피렌체/빌라 보르게세, 로마”, 『도시의 공원』, 마음산책, 2015, p.44 5. 위의 책, p.44. 6. 1번 책, p.318. 7. 2번 책, p.24. 8. 황지우 시 “인천으로 가는 젊은 성자들”의 마지막 구절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부터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좀처럼 화내지 않는 유능하고 성실한 친구들과 함께 주로 교육·연구 시설과 공공 업무 시설의 외부 공간을 설계하고 있다.
    • 허대영
  • [모두의 퍼니처] 예건 장소성과 연계한 조경 시설 구현
    예건은 그동안 주변 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조성된 장소의 공간 활용도를 최대한 높일 수 있는 디자인을 시도해 왔다. 한 장소 안에서 자연스러운 배경으로 기능하는 조경 시설, 음식의 감칠맛을 높이는 소금처럼 공간의 활용도를 높여 공간의 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조경 시설을 만들고자 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장소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조경 시설을 통해 도시를 위한 공간의 장소성을 구현하고 있다. 입체적 경험을 만드는 장소성 장소성은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공간에 담긴 역사, 문화, 사회적 의미를 포함한다. 따라서 장소성의 관점에서 보면 조경 시설은 단순한 쉼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조경 시설은 시민들에게 일상 속 여유를 제공하며, 특정 장소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장소성을 고려한 조경 시설은 공간의 정체성과 그 공간이 가진 고유한 이미지와 분위기를 연출해 이용자에게 더 깊게 각인되는 입체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공간을 설계한 조경가의 계획을 충분히 숙고하며 설계에 부합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숲속 공간에 현대적 시설을 배치하는 것보다 숲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를 적용한 시설을 배치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전통 공간에 전통적 색감과 형상이 반영된 시설을 배치하면 조화를 꾀할 수 있다. 조선왕릉길에 조성한 조선왕릉 퍼걸러는 장소의 특수성과 공간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과도한 조형을 지양하고, 전통적 요소를 살릴 수 있는 비례와 형태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했다. 퍼걸러의 절제된 형상은 왕릉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가득 메운 나무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이를 통해 왕릉이 가진 특유의 정취와 장소성을 돋보이게 했다. 이처럼 장소의 특성을 이해하고 반영한 조경 시설은 이용자의 정서와 장소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장소를 읽어주는 디자인 조경 시설은 단순한 편의 시설을 넘어 도시 안에서 사람과 장소를 연결하는 장소적 매개체로 기능한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장소의 정체성과 맥락을 해석하고 시각화해 장소를 읽어 주는 디자인을 시도한다. 지역의 역사, 지리적 특성, 지역 주민의 삶의 방식 등 다양한 요소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설의 형태, 재료, 공간 배치 등을 기획한다. 이러한 기획의 대표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가 양재천의 복합휴게시설 ‘플로우 스테이션(Flow Station)’이다. 양재천 유속 흐름에서 형태적 모티브를 얻은 플로우 스테이션은 크게 커뮤니티 에디션과 바이커스 에디션으로 나뉜다. 커뮤니티 에디션은 주거 단지와 업무 단지의 이용자들을 위한 휴게 공간으로 담소 공간, 학습 공간 등을 마련해 다양한 형태의 휴식을 즐길 수 있게 했다. 바이커스 에디션은 자전거 이용객들의 편의성을 고려해 1층 자전거 임시 거치대에 자전거를 거치한 뒤 잠시 휴식할 수 있게 마련한 공간이다. 여름철 폭우로 자주 범람하는 양재천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서랍식 구조의 유선형 테라스를 구성하고 대상지 사면과 일체화된 유체역학적인 형태로 디자인해 폭우 시 범람과 부유물에 의한 파손을 최소화했다. 사고를 확장하는 디자인 장소성을 고려한 어린이 놀이 공간 디자인은 어린이와 놀이터를 연결한다. 최근 어린이 놀이 시설 디자인에서 주목 받는 키워드 중 하나는 지형의 재해석이다. 한때 인기를 끌던 원색과 캐릭터 조형 요소가 접목된 놀이 시설에서 벗어나 지형을 살린 창의적 놀이 시설이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언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놀이 공간은 자연을 접할 일이 적은 현대 아이들에게 자연을 닮은 놀이 구조가 되어주어 다른 시설과 비교해서 아이들의 성장 발달에 더 효과적이다. 다양한 높낮이를 가진 지형은 아이들에게 다양한 신체 활동, 상상력, 공간 인식 능력을 동시에 자극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균형 감각을 기르고, 꼭대기를 향해 경주하고 정복하는 능동적인 행위를 통해 행동 및 신체 발달을 꾀하고 적극성을 기를 수 있다. 언덕 사면을 따라 슬라이드, 네트, 터널, 암벽 홀더 등을 설치하면 다양한 도전과 협업, 창의적인 놀이가 가능하고, 경사도를 조절하면 다양한 연령의 아동이 함께 이용할 수 있다. 언덕 자체를 놀이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면, 아이들은 이곳에서 놀아도 될까라는 제한된 관점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보이는 모든 구릉과 언덕이 놀이터라는 확장된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조성한 서산 명륜근린공원 놀이터는 언덕을 새로운 놀이 공간으로 활용했다. 기존의 노후된 공원을 리노베이션하면서 계단만 놓여 있던 공원의 언덕 사면에 메가슬라이드를 설치하고 중앙 공간에 네트, 마운딩 등을 통해 다양한 연령대의 어린이들이 다양한 수준의 놀이를 즐길 수 있게 했다. 장소성을 위한 보편적 경험 설계와 소통 장소성을 구현하려면 단지 보기 좋은 형상을 디자인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이용자의 동선, 행동 패턴, 감성적 반응 등을 고려해 방문객이 실제로 편하게 이용하고, 다시 찾고 싶은 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 특히 어르신, 아이, 장애인 등 다양한 계층의 접근성과 편의성까지 고려한 유니버설 디자인이 요구된다. 특정 계층과 연령대만 향유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보다 모두가 나눌 수 있는 보편적 경험과 감성을 시설에 담았을 때 진정한 장소성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장소성을 구현하는 디자인은 개인적 창작물이 아니라, 공공성과 협력을 전제로 한다. 지역 주민, 방문자, 기관이나 단체 등 다양한 주체와 소통하며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고, 장소가 지닌 특성과 활용 가능성을 함께 찾아갈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정해준 형상만을 그리는 것이 아닌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다양한 의견을 조율한 대표적인 프로젝트는 반려동물 테마 시설 ‘왈로Waalo’ 시리즈다. 수도권 공동 주택, 용산 미군 장교 숙소, 수안보 생태공원 등 다양한 장소에 왈로가 활용됐다. 수도권 공동 주택 유휴 공간에 왈로를 조성할 때 입주민들과 디자이너가 함께 협업했다. 이곳은 훈련, 놀이, 휴게 공간을 구분해 디자인했으며, 반려견과 보호자가 교감하며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소중한 공간으로 조성됐다. 용산 미군 장교 숙소에서는 기존 잔디와 보행로로 기획된 공간을 반려견과 함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연출했다. 수안보의 생태공원에는 반려견을 동반한 가족단위 방문객을 위한 시설로, 바비큐장과 어린이 놀이터와 별도 분리된 안전한 공간을 선정해 자연석과 수목이 어우러진 공간 속에 반려견과 함께 할 수 있는 시설을 배치했다. 실용적이며 지속가능한 디자인 장소성과 연계된 시설물은 단기적 설치물이 아닌, 오랜 시간 장소와 함께 공존해야 한다. 실용성과 지속적인 유지·관리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소재의 내구성, 이용자의 접근성, 계절 변화에 따른 대응력 등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지속적인 유지·관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요소는 소재다. 소재는 음식으로 비유하면 고급 식자재라고 할 수 있다. 재료가 특별하면 맛도 특별하듯 품질이 뛰어난 자재가 주는 감성은 그대로 이용자들에게 전달되며 그 장소에서의 생명력도 길어진다. 양질의 소재는 사용자, 관리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장소성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해당 공간의 장소성은 더욱 오래 유지되고, 공동체의 자산으로 남는다. 진정한 의미의 장소성은 단지 과거를 보존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경험과 상호 작용 속에서 현재와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장소성과 연계된 조경 시설은 장소의 완성도를 높이고, 사람과 장소 사이의 정서적 연결을 만들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이제 단순한 ‘쉼’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장소와 이용자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조경 시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설계 단계부터 장소성과 깊이 있게 연결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건(Yekun)은 1990년 창립한 조경 시설 전문 기업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을 지향점으로 삼고, 도시 경관과 조경 공간에 어울리는 기능성과 심미성을 갖춘 조경 시설을 만들기 위해 창립 이래 꾸준히 매진해왔다. 국내의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조경 시설 ‘푸르너스’, 친환경 어린이 놀이터 ‘아이붐’, 반려동물 시설 ‘왈로’와 X-게임 등 다양한 조경 시설 브랜드를 선구적으로 시장에 선보였다. 기술과 완성도를 기반으로 한 디자인, 제작, 시공, 유지·보수까지의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토털 솔루션을 제공해 왔으며, 국내외 특허를 비롯해 ISO 9001, ISO 14001 인증을 통해 그동안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인정받았다. 자연친화적 소재와 디자인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를 바탕으로 자연과 조화를 꾀하며 시민들에게 편리하고 풍요로운 도시 환경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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