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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디자인 오피스] 본시구도 삶의 터전, 그 본래의 구도를 추구합니다
    선릉 경치를 즐기기 위해 지하철 9호선 선정릉역과 2호선 선릉역 사이에 있는 본시구도 사무실. 처음 찾아오는 이는 몇 호선 열차를 타야 할지 잠시 고민할 것이다. 어느 역이라도 좋다. 역에서 내린 다음 선릉을 둘러싼 돌담길을 잠시 걸어보자. 돌담 뒤로 자리 잡은 언덕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의 왕릉이다. 길에서 왕릉을 제대로 감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4층에 있는 본시구도 사무실에서는 왕릉의 봉분은 물론 그 앞에 늠름하게 서 있는 문인석과 무인석까지 전부 시야에 담을 수 있다. 건물 4층에 올라오면 다시 한번 목적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복도의 중간쯤에서 멈춘다면 ‘본시건축’ 간판을 보게 될 것이고, 복도 끝까지 가게 될 경우는 ‘본시구도’ 사무실에 도착할 것이므로. 파트너사인 본시건축에 특별한 용무가 있다면 복도 중간에 멈추는 것을 말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본시구도 사무실에서만 선릉 경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사실, 4월부터 본시건축과 이 경치를 함께 볼 수 있게 됐다). 본래의 구도를 찾다 “본시구도本是構圖입니다.” 처음 회사 이름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하다. 회사 이름이 어렵다고 하거나,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다. 창립 전 회사명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 수십 번 회의를 하고 수십 가지 대안을 만들었다. 조경을 전공하고 10여년을 현업에서 종사했지만, 언제나 가지게 되는 근원적인 질문. 조경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래의 구도를 추구한다는 의미의 ‘본시구도’에서 찾았다. 본시(本是, origin)는 ‘처음’, ‘근본’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본질이나 본바탕. 즉 원래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 구도(構圖, composition)는 시간과 빛을 비롯한 재료, 형태, 색채 등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로 완성하는 것을 뜻한다. 본시구도는 땅이 말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따른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이상적인 인프라를 구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고, 지문地紋, 미기후, 인문, 심리 등 자연과 사람을 배우고 이해하며 공감을 바탕으로 한 통찰력을 토대로 한 환경을 설계하고자 한다. 공간에서 느끼는 가치가 극대화되도록 시간과 공간의 융합을 추구한다. 생태, 도시, 건축, 토목, 구조 등의 기술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모든 생명체의 삶이 번영하도록 그 본래의 구도를 찾아가고자 한다. 과거 건물을 지을 때 터잡이가 건물의 위치와 방향을 잡고 간잡이가 건물을 설계했던 것과 같이 조경, 설계에 국한하지 않고 마스터플래너로서 본래의 구도를 지향하는 것이다. 거침없이 달려온 지난 3년의 기록 본시구도 설립 후 3년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동안 다양한 전문가들과 함께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좋은 성과를 남겼다. 이 과정에서 조경 분야에서 축적된 노하우가 풍부한 우리 구성원들의 노고가 가장 컸지만, 파트너인 건축사사무소 본시와 협력 분야의 긴밀한 네트워크의 도움도 컸다. 또한 도면 작성 단계에서 단순 작업을 효율적으로 줄여준 자체 개발 프로그램이 큰 역할을 했다. 동부간선도로(창동-상계구간) 지하차도 상부 공원화: 서울 주요 간선도로 중 하나를 지하화하고 상부를 공원화하는 프로젝트의 첫 단추였다. 창동-상계구간을 대상으로 하였고, 기술 제안으로 당선되었다. 근처 케이팝 공연장의 문화, 중랑천의 흐르는 물결을 모티브 삼아 서울 웨이브(Seoul Wave)를 콘셉트로 정했다.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 이형석 소장이 예전 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 실격의 아픔을 주었던 프로젝트. 제출 당시 서류에 오류가 있어 심사 과정에서 실격 처리되었다. 본시구도를 창립하고 나서 다시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을 때 감회가 남달랐다. 양평 국수리 전원주택단지: 양평군 국수역 인근에 있는 약 50세대에 이르는 전원주택단지 조성 프로젝트로 시행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측량에서부터 시작해 전체적인 콘셉트를 잡고 단지 계획, 조경 계획에 이르기까지 마스터플래너로서 마음껏 역량을 발휘했다. 카스카디아 CC: 지형의 제약을 발상의 전환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27홀 규모의 하이엔드 골프장 프로젝트다. 국내 골프장들은 코로나 이후 경쟁 시기를 대비하여 코스 및 클럽하우스뿐 아니라 조경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클럽하우스와 거대한 폭포 주변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홀마다 특색 있는 경관을 만들기 위해 27홀 전체를 3D 시뮬레이션을 해 아이디어를 도출했다. 앨리웨이 인천 쑥골광장 활성화 계획: 부지 중앙에 있는 공공 기여 광장 특화 설계 및 시공을 경쟁 방식으로 맡게 되었다. 당선 후 특화 설계는 김건영 실장이 담당하고, 그의 친형 김건우는 현장 소장으로 시공을 담당했기에(당시 조경디자인 이레에 근무하고 있었다)김건영 실장에게 의미가 깊은 프로젝트다. 하동지구 두우레저단지 개발사업: 우리가 마스터플래너로서 이끌어갔던 프로젝트로 건축사무소 선정부터 단지 전체 콘셉트 및 건물 배치까지 약 80만 평에 이르는 부지에 골프 코스, 콘도, 테마파크, 상업 가로 등을 계획했다. 순천만 국가정원 식물원(온실) 건립사업: 전시 온실 설계는 흔한 프로젝트가 아니기 때문에 설계자로서 욕심이 나고 더 의미가 있었다. 450여 종 이상의 식물 종류를 선별하는 과정이 고생스러웠기에 기억에 남는다. 2023년 국제정원박람회 마중물 사업으로 의미 있는 작품을 남겼다는 것에서 더욱 감회가 새롭다. 송산GC 물 순환 마을 개발사업: 국내 최초의 물 순환 주거 단지를 만드는 프로젝트로서 조경이 주도하여 그린 인프라 주거 환경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향후 한국 도시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선도적인 지침이 될 공간을 만들어나간다는 생각에 책임감과 설렘을 느꼈다. 공간 크리에이티브 집단을 표방하다 최근 건축과 인테리어로 집중됐던 일반인의 관심이 점차 외부 공간으로 향하고 있다. 조경에 국한된 사고로는 공간을 다루는 데 한계가 있고, 이러한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공간을 다룰 때 건축, 토목, 구조, 경관, 생태, 도시의 맥락까지 이해해야 하며, 나아가 인간의 행동을 알기 위해 역사, 철학 등 인문학적 사고까지 필요하다. 우리는 좀 더 진보적인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한다. 계획 설계를 할 때 크게 세 가지의 키워드를 생각하는데, 시간, 공간, 가치다. ‘시간’은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따른 디자인, 인간의 일생을 담는 공간을 뜻한다. ‘공간’은 비움과 채움, 군더더기가 없는 쓸모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가치’는 맥락을 고려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하여 가치 있는 공간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전문적인 디자이너가 모여 있는 집단을 형성한다. 직원과 회사가 상생한다면 시장에서도 인정받을 것이다. 건축, 골프, 작가, 가드닝, 미술 등 다양한 방면에 강점을 가진 인력을 품어왔으며, 폭넓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시행사, 건축사무소 등과의 협력 관계도 강화해왔다. 소비자에게 공간에 대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솔루션을 제공하여 삶의 질을 높이는 것. 우리가 공간 크리에이티브 집단을 꿈꾸는 이유다. 진화하는 조경, 함께 성장하고 싶은 회사 임인년 본시구도에 새로운 부서를 만들었다. 식물을 연구하고 실무에 적용하기 위해 만든 가든랩(정원사업부)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김지영 이사와 서정완 이사가 주축이다. 이들이 만드는 정원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조경 수목의 탄소 계산기 개발 및 BIM 연동 프로젝트도 연구 중이다. 탄소 계산기는 수목의 환경 성능을 계획 과정에 적용하여 식재 설계 시 설계안의 탄소 저감량을 계산해내는 방식으로, 전 세계적인 탄소 이슈에 직능적으로 동참하면서 추후에는 BIM과의 연동을 통해 더욱 효율적으로 풍경을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현재 조경 BIM은 그 자체만으로도 도전 과제지만, 새로운 저작 도구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조경 설계의 영역과 차원을 한 단계 향상시켜 줄 시스템이라 확신한다. 본시구도는 반복적이고 기능적인 업무로 디자이너의 역량이 정체되는 것을 지양하며, 체계화된 디자인 시스템과 자체 프로그램 개발에 지속해서 투자하고 있다. 진화하는 외부 환경에 선구적으로 대응하고자, 끊임없이 트렌드를 연구하고 워크숍 등 내부교육을 통해 회사의 핵심 동력인 직원들이 체화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신구의 조화로 전문 지식이 누적되고 심화되어 깊이 있는 디자인, 조경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범위의 디자인을 추구하는 회사. 최고의 디자이너가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환경, 그 환경의 구도를 잡는 것이 바로 본시구도가 추구하는 경영 철학이다. [email protected] 이형석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풍경디자인, 현대건설, 해안종합건축사사무소를 거쳐 오지영 대표, 김건영 실장과 함께 본시구도를 열었다. 환경이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킨다고 믿으며, 지금보다 더 나은 꿈을 꾸며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조경을 인간의 생활과 삶의 터전을 바꿀 수 있는 직접적인 작업이자 세상을 바꿀 힘으로 여긴다.
  • [모던스케이프] 두 개의 공원, 독립공원과 탑골공원
    대한제국기를 거치며 탑골공원과 독립공원, 두 개의 공원이 계획되었다. 자주적 시도였지만 미완에 그쳤고 공원을 매개로 근대화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이 닮았다. 그런데 접근 방식이나 구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사뭇 달라서 이 두 공원을 비교하듯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차이를 알 수 있다. 탑골공원보다 앞서 조성된 독립공원은 서재필, 윤치호 등 급진개화파 계열의 독립협회 회원들이 계획한 것으로, 1896년 7월에 발족하여 1898년 12월에 해산한 독립협회만큼이나 짧고 강렬하게 등장했던 공원이다. 공원은 돈의문 밖 무악재 너머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 자리에 독립문, 독립관과 함께 계획되었는데, 그 위치가 의미심장하다. 영은문과 모화관은 조선이 중국 사신에 예를 갖추기 위해 만든 숙박 시설과 기념물로 건국 초기에 일찌감치 건설된 사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수백 년간 유지된 시설을 하루아침에 폐기 또는 용도 변경하겠다고 선포했으니 독립협회는 그들의 급진적(진보적) 성향만큼이나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1896년 7월 2일자 「독립신문」 영문판에 실린 사설은 독립공원의 풍경과 쓰임을 다음과 같이 상상하고 있다. “…천변(무악천)에는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그 바로 아래에 멋진 길이 있어 마차와 자전거가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실개천 옆 땅은 뒤편 언덕과 부드럽게 이어지고 여기저기에 심겨있는 관목과 낙엽수, 구불구불 나 있는 산책길과 도로는 우리에게 흡사 공원과 같은 장소를 제공해 줄 것이다. …… 이곳에는 반드시 한국군의 군악대를 위한 연주대band-stand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곳은 여가의 한 형태로 외국인이 선택한 몇 안 되는 목록에 추가될 수도 있겠다. 한국인에게는 정말 훌륭한 교화의 장이 될 것이다. 순수하게 미적인aesthetic 목적으로 마련한 땅을 보는 것, 아름답게 만들어지는 것,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느낌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밋밋한 공리주의의 삶에 참으로 오아시스와 같은 장소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하시모토 세리, 『한국 근대공원의 형성』,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6. 이나미, “개화파의 공공성의 논의: 공치(共治)와 공심(公心)을 중심으로”, 『공공사회연구』 3(1), 2013, pp.151~181. 우연주·배정한, “개항기 한국인의 공원관 형성”, 『한국조경학회지』 39(6), 2011, pp.76~85. 이동수, “「독립신문」과 공론장”, 『정신문화연구』 29(1), 2006, pp.3~28. 「독립신문」 영문판 *환경과조경407호(2022년 3월호)수록본 일부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들을 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의자가 공원을 살린다
    이달 지면에는 꼼꼼히 살펴봐야 할 근작들이 넘친다. 이미 여러 매체의 주목을 받은 ‘타임워크 명동 공유정원’은 정원 문화의 감각적 경험과 그 가치를 공유하는 장소 실험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기획자 조영민(앤로지즈)과 조경가 최영준(랩디에이치)의 협력이 낳은 이 창의적 공간이 도심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촉매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지난해 늦봄 완공된 뉴욕 허드슨 강변의 ‘리틀 아일랜드Little Island’는 물 위에 세운 정방형 공원이다. 물 위에 떠 있는 구릉지에 여유롭게 앉아 머무르며 지형을 감각하는 경험이 맨해튼 경관의 역동성과 극적 대조를 이룬다. 부두 교각의 형태에서 착안한 튤립 꽃봉오리 형상의 132개 기둥은 구조체이자 플랜터이며 공원의 표면이다.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의 경계를 허물며 미와 성능을 동시에 성취한 기술력이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지명 초청 형식으로 열린 ‘IFLA 기념정원 설계공모’의 제출작들은 동시대 공공 정원의 가치와 조경가의 역할을 재점검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유승종(라이브스케이프)의 당선작 ‘사람의 정원, 자연의 정원’은 살아 있는 생명의 세계에 가까이 개입해 미시적으로 관찰하는 섬세한 공간 해법을 제안한다.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요구한 설계 지침을 비판하는 것처럼 읽힌다. 편집자의 눈을 오래 머물게 한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제출작 ‘21×129×298’은 한층 더 비판적이다. 21개 원형 패치에 129그루 나무를 심고 298개 의자를 흩어놓은 게 전부인 이 작품은 ‘설계로 쓴 비평’이다. “봐야 할 것은 많고 다리는 아프고 그늘도 부족”한 이 대상지에 필요한 건 “실용적 쓰임새와 (사회적) 가치를 갖는 공간”이라는 박승진의 설명은, 장소 맥락이나 지형 조건과 무관한 거대 서사나 피상적이고 낭만적인 주제를 일관되게 지향하는 최근의 정원박람회 경향에 대한 비평과 다름없다. 이 설계안의 핵심은 298개의 의자다. “앉을 수 있는 장치는 휴식의 질을 좌우한다.……의자는 디자인 이전에 인권이며 보편적 복지의 출발점이다.” “공원의 의자는……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따로 상석이 없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의자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원에 놓음으로써 공원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그가 제안하는 가볍고 단순한 디자인의 흰색 의자는 특정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앉고 싶은 곳, 바라보고 싶은 곳을 향해 의자를 두고” 공원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빈 의자, 누군가 앉아 있는 의자, 가까이 놓은 의자, 멀찍이 혼자 놓인 의자, 둥글게 대형을 이룬 의자, 등을 돌린 의자, 사람이 없는 의자”는 각자의 표정으로 말을 걸며 우리와 관계 맺는다. 내가 어느 도시의 시장이라면 당장 박승진의 설계를 살 것이다. 도시를 걷다 마음 편히 앉아본 적이 있는가. 화려한 상업 가로는 물론 레트로 열풍에 힘입어 뜨고 있는 그 많은 ‘핫플’ 골목길 어디에도 눈치 안 보고 잠시 머무를 나의 자리가 없다. 카페에 아메리카노 한 잔 값 내지 않는 한,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라도 사지 않는 한, 나를 반기는 빈 의자가 없다. 마음대로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의자는 의외로 공원에도 많지 않다. 캠핑용 의자를 챙겨가지 않는 한, 걷기를 멈추고 숨을 돌릴 수 있는, 쪽잠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노을을 즐길 수 있는 나의 자리가 공원에조차 없다. 공원의 의자는 걷는 사람을 멈추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머무르게 한다. 공원의 의자에 기대앉으면 숨을 고를 수 있다. 느긋하게 다음 걸음을 준비할 수 있다.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볼 수 있고, 날씨의 변화를 살갗으로 느낄 수 있다. 원하는 곳으로 의자를 옮기면, 나무 그늘 밑에도, 잔디밭 한복판에도, 호숫가에도 나만의 온전한 시공간을 만들 수 있다. 걷기는 공원에 자유를 주고, 앉기는 여유를 준다. 편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은 좋은 공원의 필요조건이고, 여유롭게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는 충분조건이다. [email protected] 다양한 잡지에서 취재와 편집을 경험한 금민수 기자가 이달부터 『환경과조경』에 합류했다. 눈치채셨겠지만, 2022년에는 작품 지면에 인터뷰나 비평을 함께 배치하는 기획을 늘려보려고 한다. 이달에는 타임워크 명동 공유정원의 조영민과 최영준을 금민수 기자가 만났고, IFLA 기념정원의 유승종을 김모아 기자가 인터뷰했다. 리틀 아일랜드를 다룬 평문은 뉴욕에서 활동 중인 조경가 최지수(SOM)가 맡아주었다.
  • [풍경 감감] 환상을 믿어요
    아름다운 작품을 통해 작가를 만난다. 작품에서 느낀 섬세한 온기와 달콤한 다정함, 바람결 같은 기발함을 바탕으로 작가의 모습을 그려본다. 때때로 작가를 실제로 만나게 되면, 마음속에서 늘 그렸던 이와 달라 놀라기도 한다. 작품 속과 실제 사이의 간극이 크고 깊었던 것일까. 그 낙차에서 오는 충격이 상처를 주었던 걸까. “작품을 보고 사람에 대한 환상을 키우지 말아야 한다”고 단언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풍경 속의 작가를 믿는다. 작품에 오롯한 진실을 담을 수 있을까. (못나고 부끄러운 점을 포함한) 작가의 모든 면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작품은 진실의 결정체가 아니라, 자신의 가장 예쁜 모습을 나무 가꾸듯 오래 보듬어 만들어낸 것이다. 그 환상을 뿌리처럼 굳게 믿고 싶다. 조현진은 조경학을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다. 2017년과 2018년 서울정원박람회, 국립수목원 연구 간행물 『고택과 어우러진 삶이 담긴 정원』, 정동극장 공연 ‘궁:장녹수전’ 등의 일러스트를 작업했고, 식물학 그림책 『식물 문답』을 출판했다. 홍릉 근처 작은 방에서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린다. [email protected]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안마당더랩 상생의 가치 아래 사람과 자연의 균형을 고민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질 수 있는 것을 원한다. 대상 자체에 집중하는 대신 가치에 집중한다. 인간과 자연의 균형, 구성 요소 간의 관계성, 규칙 안의 변주를 찾고자 한다. 형태보다는 분위기를 살리고, 따뜻하지만 선명하게 표현하고 싶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질감, 시간의 흔적, 그림자처럼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은 요소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나아가 우리의 스타일을 규정하고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다. 존재 이유를 묻다 2016년 안마당더랩을 설립하고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달려왔다. 4년쯤 됐을 때 회의감이 생겼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안마당더랩이 만드는 공간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찾고 싶었다. 조경, 정원설계사무소는 많고, 우리보다 설계 능력이 뛰어난 곳도 많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도 안마당더랩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안마당더랩을 유지해야 하나.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으나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배운 것이 조경이고 그 기술로 돈을 벌고 있지만, 반드시 조경, 정원설계로 생계를 이어나갈 필요는 없다. 그때 답을 얻고자 우리만의 고유한 핵심 가치를 설정했다. “현재 우리는 매우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앞으로 수많은 정보와 가치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쉽게 잊힌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단순히 미적인 정원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의 작업을 통해 공간을, 일상의 질을, 넓게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상생의 가치 상생(相生)은 공생의 의미도 있지만 공생과 다르다. 상생은 순환을 의미한다. 자연이 스스로 지속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도 지속가능성을 키우기 위해서 상생을 핵심 가치로 정했다. 상생은 너와 나, 이쪽과 저쪽이라는 이원론적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다원론적 이야기이다. 어떤 행동 하나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족하게 하는 것, 상생이라는 용어 속에는 그러한 뜻이 담겼다.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면 지구 환경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지속가능성이 필요한 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수많은 가치의 지속가능성에 공통으로 필요한 요소는 균형이다. 무엇이든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균형이 깨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안마당더랩이 가장 우선하는 디자인 철학은 균형이다. 정원 설계 의뢰를 받으면, 설계 공간에 공존하는 많은 가치를 파악하고 그 가치들이 서로 상생하며 균형을 찾을 방법을 모색한다. 예를 들어 상업 공간의 경우 심미성을 비롯해 고려해야 하는 다양한 가치가 있지만, 수익성과 회전율을 염두에 둔 테이블 개수를 반영한 계획이 균형 잡힌 설계안이 될 수 있다.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면 지구 환경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지속가능성이 필요한 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수많은 가치의 지속가능성에 공통으로 필요한 요소는 균형이다. 무엇이든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균형이 깨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안마당더랩이 가장 우선하는 디자인 철학은 균형이다. 정원 설계 의뢰를 받으면, 설계 공간에 공존하는 많은 가치를 파악하고 그 가치들이 서로 상생하며 균형을 찾을 방법을 모색한다. 예를 들어 상업 공간의 경우 심미성을 비롯해 고려해야 하는 다양한 가치가 있지만, 수익성과 회전율을 염두에 둔 테이블 개수를 반영한 계획이 균형 잡힌 설계안이 될 수 있다. 방향성을 바탕으로 한 완성도 디자인할 때 방향성을 설정하고 그 맥락 속에서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것을 우리는 ‘완성도’가 높아졌다고 표현한다. 설계에서 단순하게 호오(好惡)를 따지면, 그 기준 자체가 주관적이라서 바른 방향성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판단이 어렵다. 가령 이도커피 사유점의 경우 브랜딩 단계에서부터 이름 그대로 ‘사유하다’라는 콘셉트가 정해져 있었다. 정원도 ‘사유’의 개념 안에서 설계해야 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도커피 사유점의 정원은 중정이었고, 모든 좌석이 정원을 바라보게 배치되어 있었다. 중정을 바라보며 사유하게 만들 방법을 찾고자 했다. 방문객이 알게 모르게 자연을 느끼다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숲(자연)은 하나의 객체가 중요한 공간이 아니다. 전체의 장면을 하나로 느껴지게 하는 것이 이곳의 중요한 방향성이었다. 숲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의 선정이 매우 중요했다. 숲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생존을 위한 경쟁으로 수관 폭이 좁고 위로 웃자라는 형태를 띤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나무가 필요했다. 중정의 크기에 적당하고 이식하기 좋으며 생장 속도가 빠르지 않은 나무여야했다. 발품을 팔아 나무를 직접 찾아다녔다. 우연히 소사나무를 발견했는데, 나무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찾았다!’라고 외쳤다. 12주의 소사나무를 수형의 특성을 살려 자연스럽게 배치하기 위해 계속 자리를 바꿔가며 숲의 장면을 만들어 갔다. 건축의 제안으로 미스트 장치를 설치해 이른 아침 안개 낀 숲의 모습을 연출했다. 미스트 장치가 작동하는 빈도는 식물의 생육에 지장이 없도록 계절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된다. 이 장면을 더 극대화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오래전에 봤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생각났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나비가 나온다. 이 나비는 영화를 시적으로 만드는 요소다. 더 나아가 나비에 관련된 이야기 ‘장주지몽’을 떠올렸다. 장주지몽은 자신이 꿈속에서 나비가 됐는지, 원래 나비였던 본인이 꿈속에서 장주가 됐는지 알 수 없게 됐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물아일체의 경지를 주제로 하는 얘기다.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이 더 깊게 사유할 수 있도록 나비를 불러보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소사나무 하부 식재 수종은 나비를 불러오는 흡밀 식물을 식재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어프로치 커피(Approach Coffee) 프로젝트는 영국식 브런치 카페를 론칭하는 작업이었다. 자연스럽게 영국식 정원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 사항으로 시작됐다. 초기 조사 분석 과정에서 첼시 플라워쇼, 코티지가든 등 영국 정원의 방향성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했다. 어느 순간 그 사례들이 영국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오래전 영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들을 다시 꺼내 봤다. 흔히 생각하는 영국 정원의 이미지는 오래된 전통 정원 혹은 대부분 지방에 위치한 시골 정원의 모습이었다. 도심인 런던의 모습과는 달랐다. 서울과 용산이라는 도심의 한복판에 세워지는 영국 브런치 카페라면 런던 도심의 모습을 담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런던 도심 속 풍경의 공통점을 찾기 시작했다. 공통점은 검은색이었다. 특히 오래된 양식의 건물과 석재 포장이 주를 이루는 구도심에서도 간판, 표지판, 각종 시설물 대부분 검은색을 사용한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오래된 건축 양식과 대비되는 검은색,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 초록 식물들의 조화가 런던의 이미지라는 생각으로 공간의 컬러 가이드를 만들어 설계를 진행했다. 손으로 만드는 과정 설계를 진행하면 3D 프로그램을 통해 작업을 많이 한다. 빠르게 공간감을 검토할 수 있고 클라이언트의 이해를 돕는 이미지를 다른 방법보다 손쉽게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하면 직접 손으로 만들어 보는 과정을 거치려 한다. 그 이유는 모델을 만들거나 일대일 목업을 만드는 과정에서 깨닫는 것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를 경험담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새로 지어지는 현대식 한옥의 난간과 전통 공간에서 쓰인 취병을 재해석해서 풀어본 프로젝트다. 창덕궁 후원에 가면 볼 수 있는 취병의 본래의 쓰임은 관목류 덩굴성 식물 등을 심어 가지를 틀어 올려 병풍 모양으로 만든 울타리다. 밖에서 내부가 보이는 것을 방지하고 공간을 분할하는 역할을 하면서 경관을 조성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취병을 설계에 반영했는데, 전에 만든 경험이 없었기에 공사 전 대나무 살의 간격과 매듭 방법을 목업을 통해 검증하고 도면에 적용해 공사를 진행했다. 이 아이디어로 건축이 설계했던 유리 난간을 대신하게 됐다. 두 번째는 지형 조작이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공간의 크기가 작아 실제로 미리 지형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 프로젝트는 3D 프로그램을 이용해 지형을 검토했는데, 지형의 공간감을 실제 스케일로 느껴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직접 흙을 파내면서 지형을 먼저 미리 만들고 공간감을 느낀 다음 그 지형의 높이를 레벨기로 측정해 도면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물론 주변 환경까지 모형으로 만들 수는 없기에 현장에서의 공간감은 또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을 통해 설계의 방향성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은 확신했다. 디자인 빌드를 하는 이유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효율성과 생산성이 중요하다. 현대인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업무를 분업화했다. 이로 인해 보람은 잃었다. 그렇다면 보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 ‘내가 했다’ 또는 ‘우리가 했다’라는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철저하게 분업화한 과정(하나의 공간을 만드는 데 기획, 설계, 시공이 분리 발주되는 과정)을 통한 결과에서는 보람을 느끼기 어려웠다. 정말 가치가 큰 프로젝트에 참여해도 수많은 전문가와 실무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 안에 우리 것은 없었다. 누구의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실무자들의 이름도 남길 수 없었다. 오로지 발주처의 것이었다. 분업화의 효율성은 인정하지만 그 안에서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발굴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들기의 중요성에 관해 묻는다면 공간을 만드는 전 과정에 참여했을 때 조금 더 보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직접 식물을 심고 돌봄을 통해 식물의 생활사를 보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도 한다. [email protected] 안마당더랩(Anmadang the Lab)은 상생의 가치 아래 균형, 단순, 조화, 대비, 스토리, 실용성, 합리성 등 다양한 디자인 철학을 담아 외부 공간을 기획, 설계, 시공하는 디자인 작업실이다.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지속가능한 것에 관심이 많다. 좋은 공간이 우리의 삶을 개선시킨다고 믿는다.
  • [모던스케이프] 혼란과 잡거의 도시
    한국의 인천과 부산, 중국의 상하이와 칭다오, 일본의 요코하마와 나가사키. 이들 도시의 공통점은 도시 여행자에게 외국인 거류지가 만든 ‘이국적인 근대 풍경’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개항장이라고 불리는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인데, 서울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외국인이 국가 경계를 넘나들고 거주하려면 국가 간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조선의 경우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시작으로 11개국의 열강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국경의 빗장이 열렸고, 이후 미국과 영국, 러시아, 독일 등 아홉 국가의 공사관 또는 영사관이 서울 정동 일대에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 양국은 다른 서구 열강과 달리 정동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일본은 조선과 가장 먼저 조약을 체결했지만, 조선 정부는 공사관은 물론 일본인이 도성 안에 주거하는 것조차 불허했기 때문에 일본 공사관은 돈의문 밖에 자리해야 했다. 그러다 임오군란 때 공사관이 화재로 소실되고 일본 측 피해 보상 문제를 다룬 제물포 조약을 맺으면서 비로소 도성 안으로 입성하게 된다. 1896년 현재 신세계 백화점 본점 자리에 영사관을 신축하고 진고개(지금의 충무로2가)와 주동注洞(남산 예장자락 일대)을 중심으로 일본인의 거주가 허가됐다. 남산 북사면에서 시작된 일본인 거류지는 훗날 용산과 이촌까지 확장된다. 반면 중국인이 서울에 정착한 배경은 또 다르다. 그들은 수백 년간 지속한 양국의 관계를 명분으로 가장 먼저 들어와 가장 오래도록 남아있는 부류였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우리나라와 교섭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청국은 자신들과의 오랜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통적 사대 관계를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군대와 상인을 이용해 조선에 대한 새로운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청국 군대가 임오군란 등의 폭동 진압을 돕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정부에 초권력 행세를 했다면, 화상華商은 자국 군대와 결탁해 조선의 국가 재정에 개입하고 상권을 장악하는 역할을 했다. 화상들은 뒷배에 군대를 두고 있어서 조선인 중심의 기존 상권을 파고드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종로 등 기존 상권을 점거하면서 조선인들과 종종 마찰을 일으켰지만, 결국 중국 공관인 총판조선상무위원공서總辦朝鮮商務委員公署(이하 상무공서)를 중심으로 거대한 타운을 형성하게 된다. 1883년 9월 지금의 주한중국대사관 자리에 건립된 상무 공서는 원래 무위대장武衛大將 이경하李景夏의 집이었으나, 상무공서의 초대 상무위원인 진수당陳樹棠이 매입하여 지은 것이다. 그 이전에는 조선 후기에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숙소로 이용했던 남별궁(이후 환구단 자리)에서 영사 업무를 처리했었다. 참고문헌 박희성, “1910~1920년대 경성부 華僑 토지 소유 분포와 변화 양상”, 미발표 논문. 강진아 외, 『개항기 서울에 온 외국인들』, 서울역사편찬원, 2016. *환경과조경406호(2022년 2월호)수록본 일부
  • [에디토리얼] 새해를 걸으며
    해피 뉴 이어. 이미 두 달 전에 정해 둔 새해 첫 호 이 지면의 제목은 ‘한국 조경 50주년, 『환경과조경』 40주년을 맞으며’였다. “한국 조경이 쉰 살을 맞는다. 2022년, 한국조경학회 설립 50주년과 『환경과조경』 창간 40주년이 겹치는 해다. 8월 말에는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Re:Public Landscape’를 주제로 내걸고 광주에서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World Congress가 열린다. 한국 조경의 지난 50년을 돌아보며 기록하는 일, 다음 50년을 예비하며 설계하는 일 모두가 중요한 2022년이다.” 이렇게 잔뜩 힘들여 한 문단 쓰고 나니 글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연말 강추위에 얼어붙은 거리를 걷다 돌아왔다. 걸으며 새해를 맞는다. 계속 붕 떠 있는 느낌, 토대가 무너진 허공에 서 있는 기분. 어디가 끝인지 모를 답답하고 막막한 코로나 시대의 긴 터널,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통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유도, 계기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감염된 도시의 어수선한 풍경 속을 목적 없이 걷는 취미 아닌 취미를 가지게 됐다. 몸을 일으키면 저절로 걷게 되고 그냥 걷다 보면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한 희망이 생긴다. 노을을 바라보며 무작정 걸으면 복잡하게 뒤엉킨 습한 생각들이 바람에 바싹 마른다. 두 발과 땅이 대화하는 느낌, 나 자신을 세상으로 여는 느낌. 이동이나 답사처럼 특별한 의도를 갖는 걷기와 달리 그냥 느릿느릿 걷다 어슬렁거리며 떠돌다 옆길로 새는, 우연에 내맡긴 걷기는 시간과 공간에 묶인 신체에 자유를 준다. 어쩌면 걷기보다 걷기에 관한 책에 더 재미를 붙인 건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이론형 인간인지라 닥치는 대로 걷기 책을 모으고 빌리고 읽었다.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같은 책에서는 여러 철학자와 문인의 산책에 얽힌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고통의 순간에 걷고 또 걸은 니체, 바람구두를 신고 세상을 누빈 랭보,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 루소, 자본주의의 아케이드를 소요한 베냐민. 그들의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내려가다 보면 움츠린 몸을 일으키고 운동화 끈을 묶지 않을 수 없다. 걷기와 사유가 교차하는 아름다운 책들을 읽다 보면 도시를 느리게 걸으며 섬세한 풍경을 누리는 것 못지않은 즐거움이 생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이나 크리스토프 라무르의 『걷기의 철학』이 경쾌한 산책이라면,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과 『길 잃기 안내서』는 긴 도보 여행이다.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는 거리로 뛰쳐나온 전위적 발걸음을, 토르비에른 에켈룬의 『두 발의 고독: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에서는 공간과 시간을 제 것으로 장악한 자신감을 만날 수 있다. 급기야 지난 가을학기 대학원 ‘환경미학’ 시간에는 교실을 버리고 거리로 나섰다. ‘걷기의 미학, 도시에서 길을 잃다.’ 강의계획서 첫 줄에 허세 가득한 문장을 적었다. 익숙한 도시를 낯선 시선으로 걸으면 일상의 환경에 대한 미학적 문해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수강생들을 설득했다. 시흥갯골생태공원과 배곧생명공원, 하늘공원과 메타세쿼이아길, 경의선숲길, 청계천, 후암동과 해방촌 골목길, 그리고 지도 바깥의 이름 없는 길들을 정처 없이 걸으며 두 발로 지도를 그렸다. 학기말쯤 우리는 하늘과 날씨에 대한 글을 적고 잡초와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에 끌려 정지돈의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을 집어 들었다. “산책은 거창한 의미 이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세련된 숍과 산책로가 없어도 우리는 걸을 수 있다. 돈이 없고 친구가 없고 연인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걷는 것이다. 막차가 끊긴 서울 시내를 걷고, 가끔은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기도 하고, 퇴근 후에 집에 가기 싫어 정처 없이 쏘다니기도 한다.……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오로지 걸을 때만 진정으로 쾌활해진다.” 걷기의 가장 큰 매력은 막막하고 답답할 때도,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도 걸을 수는 있다는 점 아닐까. 걸으며 새해를 연다. 2022년을 여는 이번 호는 ‘제4회 젊은 조경가’의 수상자인 조용준(CA조경 소장) 특집호다. 에세이 ‘언플래트닝 랜드스케이프’에 담은 그의 설계 철학, ‘여섯 가지 이야기’로 편집한 그의 작업, 남기준 편집장의 인터뷰, 진양교와 제임스 코너의 추천 에세이로 구성한 특집 지면에서 조용준의 도전과 실험을 만날 수 있다. 이번 호부터 두 편의 흥미로운 시리즈를 새로 올린다. 박희성(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이 집필을 이어갈 ‘모던스케이프’는 근대기의 그림, 엽서, 지도, 책 등 다양한 매체에서 근대 도시의 풍경을 엿보는 기획물이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는 설계 작업과 설계사무소 경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는 지면인데, 첫 순서는 ‘조경하다 열음’ 편이다. 본지 창간 40주년(2022년 7월호)을 맞아 올해 ‘조경비평상’의 상금이 대폭 풍성해졌음을 꼭 확인하시기 바란다. 조경을 주어로 고민 중인 예비 조경비평가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린다.
  • [풍경 감각] 그린란드 상어의 바다
    그린란드 상어가 보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수명이 수백 년이나 되는 그린란드 상어는 대부분 어렸을 때 시력을 잃는다. 기생충이 눈을 파먹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아도 뛰어난 청각과 후각이 있어 먹잇감을 문제없이 사냥하고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바다를 유영하는 그린란드 상어에게 풍경은 없는 존재일까. 아니면 어렸을 적 보았던 바닷속을 몇 백 년 동안 곱씹으며 자신만의 풍경을 만들고 있을까. 길 한복판에서 끊어지거나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점자 블록을 본다. 밝은 색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는 것, 올록볼록하지 않은 것도 있다. 안내견이나 동행인이 없으면 길을 잃기 쉬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머나먼 북극해 깊은 곳의 그린란드 상어를 떠올린다. 경험해보지 않아 상상하지 못하는 풍경, 상상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마음을 생각한다. 검고 차가운 밤하늘이 북극해 같다. 조현진은 조경학을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다. 2017년과 2018년 서울정원박람회, 국립수목원 연구 간행물 『고택과 어우러진 삶이 담긴 정원』, 정동극장 공연 ‘궁:장녹수전’ 등의 일러스트를 작업했고, 식물학 그림책 『식물 문답』을 출판했다. 홍릉 근처 작은 방에서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린다.
  • 긴자 소니 파크 여백의 공원, 도시공원을 재정의하다
    1966년 긴자에 지은 지상 8층과 지하 5층의 소니 빌딩은 소니 제품을 전시하는 곳이자 판매하는 쇼룸이었다. 2013년 소니는 기존 건물을 허물고 새 빌딩을 세우기로 했다. ‘긴자 소니 파크Ginza Sony Park(이하 소니 파크) 프로젝트’의 출발이었다. 일반적으로는 헌건물을 해체하고 바로 새 건물을 세우지만, 소니는 건물을 허물고 빈 공간에 잠시 공원을 짓기로 한다. 2016년 건물을 해체하고 2018년 공원을 열었다. 건물이 사라진 긴자 스키야하시 교차로에는 면적 707m2의 지상 공원과 지하 4층 규모의 로우어 파크Lower Park가 생겼다. 지상에는 세계 각지의 특별한 식물이 모여 있다. 지하 1층에는 음식점이 들어섰고, 카페가 있는 지하 3층은 인근의 니시 긴자 주차장 지하 2층과 직접 연결된다. 지하 4층에는 크래프트 맥주 가게가 있고, 지하 2층은 이벤트나 전시가 열리는 공간으로 쓰인다. 2018년 인터넷에서 우연히 접한 소니 파크,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도심 속 사적 공간인 소니 빌딩을 올림픽 개최 시기에 맞추어 도쿄 시민을 위한 공공 공간으로 임시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사례였다. 처음 소니 파크를 방문한 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니 빌딩 일부를 소재로 한 한정판 기념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 뒤에도 꾸준히 찾아가 소니 워크맨 40주년 기념행사 ‘워크맨 인 더 파크Walkman In The Park’를 소니 워크맨을 10년 넘게 애용한 세대로서 추억에 잠겨 둘러보고, 크리스마스에는 아이와 함께 ‘에르메스 징글 게임’을 관람하기도 했다. 소니 파크는 나와 가족에게 도심 속 놀이터 같은 공간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2020년 이후에는 직접 찾아가지 못했지만 다양한 채널을 통해 소니 파크에서 벌어지는 인터랙티브 전시와 이벤트를 확인했고 그 속에서 ‘소니다움’, 즉 예측 불가능한 혁신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긴자라는 보수적이면서도 럭셔리한 콘텍스트 안에서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혁신적 허브로 발돋움해 다양한 커뮤니티 역할을 하는 소니 파크의 활기찬 모습이 큰 감명을 남겼다. 하지만 소니 파크는 기간 한정 공간이다. 2022년, 이곳은 새 빌딩을 들이기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본래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에 맞춰서 2020년까지 소니 파크를 개방할 계획이었지만 1년 연장해 2021년 9월까지 공원을 운영했다. 2024년 완성될 뉴 소니 빌딩은 어퍼 파크Upper Park, 파크(지상 공원), 로우어 파크로 구성된다. 새로운 빌딩 역시 거리에 공공 공간을 제공하는 공원이라는 소니 파크의 콘셉트를 계승한다. 소니답고 독특하고 장난기 있는 공간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프로젝트 1단계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그간 소니 파크가 도시건축적 관점과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뉴 소니 빌딩은 어떤 모습으로 고객과 시민에게 다가갈지 궁금해졌다. 소니의 대표이사이자 소니 파크 프로젝트를 이끈 나가노 다이스케Nagano Daisuke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나가노 다이스케(Nagano Daisuke)는 소니 기업의 대표이자 치프 브랜딩 오피서(CBO)다. HQ 브랜드전략부 브랜드인큐베이션그룹에서는 제네럴매니저를 담당하고 있다. 긴자 소니 파크 프로젝트 인솔자로서 2013년부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2018년 8월부터 2021년 9월까지 긴자 소니 파크 시즌 1을 이끌었다. 2024년에 공개 예정인 다음 시즌을 준비하며 소니 그룹의 새로운 브랜딩 실험을 주도하고 있다. 이원제는 도심 속 다양한 공간과 상호 작용하는 데 관심이 많다. 공간을 구성하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휴먼웨어를 라이프스타일 관점에서 읽고 해석해 ‘도심에서 풍요로운 삶의 질이란 무엇인 가’를 찾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상명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교수이며, SPC그룹과 UDS 코리아 자문교수를 역임했다. 중앙일보 폴인에서 ‘밀레니얼의 도시’(2018) 콘퍼런스를 총괄·기획했고, 저서 및 번역서로는 『인간을 위한 도시 만들기』(2014), 『도시를 바꾸는 공간기획』(2021) 등이 있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조경하다 열음 삶의 그릇을 빚는 젊은 조경가의 매니지먼트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바꾸는 전문가 대학 입학 때부터 지금까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조경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었다. 비슷한 시기에 조경 공부를 시작한 이들 중 조경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경을 떠난 사람도 적지 않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전공자로서 그동안 해온 고민의 공통분모는 조경일 것이다. 그 속에서 길을 찾은 사람 혹은 찾고 있는 사람은 아직 조경 제도권에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나 또한 수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아직 조경이라는 궤도 위를 달리고 있다. 그렇다고 답을 찾은 것은 아니다. 다양한 인연과 기회를 통해 떠올리게 된 새로운 화두가 동력이 되어주고 있을 따름이다. 조경 설계 도면만 그리는 사람이 조경가일까, 이 질문은 내게 기연機緣과도 같다. 답을 찾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헤맨다 해도 좋을만큼. ‘조경하다 열음’(이하 열음)을 꾸린 지 5년째다. 대학에서는 설계 중심 커리큘럼으로 조경을 배웠다. 졸업 후엔 조경설계사무소를 다니며 10년간 경력을 쌓았지만, 교육 과정이 조경의 영역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실무를 하다 보니 사회에는 조경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다는 걸 체감했다. 하지만 제도와 구조적 문제로 손을 뻗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물론 의견을 제시하거나 활동 참여가 제한되는 건 아니다. 어느 분야나 회사에 속하지 않은 한 명의 자연인으로서 접근한다면 말이다. 지역의 자원이나 문제를 발굴하더라도 조경업의 측면 그리고 회사에 소속된 직원으로서는 공모에 참여하거나 설계 도면을 납품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설계를 위해 대상지를 조사하면 할수록 갑갑했다. 도면을 완성하는 일 외에도 조경학과에서 배운 역량으로 솔루션을 내놓을 수 있는 일이 많은데 눈을 감아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판을 만들기로. 조경가의 역할은 주어진 대상지에 대한 디자인을 완성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장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래서 디자인을 넘어 여기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했다.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바꾸는 전문가, 열음이 지향하는 조경가의 모습이다. 생활밀착형 조경 코로나19로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공원 녹지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생활 공간 속으로 자연을 가져올 수 있도록 도시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꾸준히 나온다. 도시를 쾌적하게 하는 대형 공원과 녹지와 더불어 일상 속 생활밀착형 공간의 쾌적성을 높여주는 일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공간에는 선과 숫자 중심의 기존 엔지니어 방식을 넘어 커뮤니티 디자인을 통한 솔루션 제시가 요구된다. 석수골 마을정원 조성(2018), 서울국제정원박람회 동네정원 코디네이터(2019, 2021)는 시민의 욕구를 듣고 때로는 디자이너, 때로는 전략가가 되어 현장을 바탕으로 해법을 찾아본 경험이다. 열음은 주민들을 만나 소통하고 공간 조사, 설계, 시공뿐만 아니라 교육과 컨설팅까지 아우르는 현장 중심의 ‘생활밀착형 조경’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국가 정책의 변화와 시대적 수요를 조경가가 주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다양한 정책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국가 과제의 핵심은 지역 주민과 함께 공간을 개선하고 운영하는 것이다. 조경가는 관계를 만들고 대응하며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이 강하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주민 참여 공간 조성 사업에는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열음의 조경가들은 소셜 디자이너로서 전문적 식견과 경험을 가지고 지역을 변화시키는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북촌 도시 재생, 여수 농촌 재생, 강화도 어촌 재생이 그 사례다. 북촌은 개발이 아닌 보존을 선택한 주민들 덕분에 600년 역사적 자산을 지키며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세계적 명소가 된 곳이다. 하지만 최근 무분별한 상업화로 인한 정체성 훼손, 과도한 관광객 방문으로 인한 생활 환경 침해 등의 문제가 대두됐다. 살고 싶은 마을과 머물고 싶은 동네를 위한 공존·상생의 길을 현장에 상주하며 찾고자 했다. 먼저 한옥 보존에 대한 규제로 인한 경직된 지역민의 마음을 달래고자 ‘북촌정원산책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부담 없이 접근하고 식물을 통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정원을 만들어 도시재생의 포문을 열었고, 지금까지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여수 새뜰마을에서는 개발제한구역과 여수 국가산업단지로 인해 열악해진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 잠재된 마을 자원을 발굴해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자 했다. 봉계동 일원의 ‘주삼지구 새뜰마을사업’을 통해 지역 내 빈집 및 노후 주택을 정비하고,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및 복지 지원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진행했다. 강화도에서 진행한 ‘어촌뉴딜사업’은 주민이 주도해 해양 경관 개선 및 경제 활성화 기반을 마련하는 프로젝트다. 곳곳에 산재된 유휴 공간과 해양 경관을 개선하며 지역 사회 구성원과 방문객을 위한 공간 개선 활동을 전개했다. 우리의 역할을 찾고 비전을 제시하면서 조경가의 활동 무대를 바다로 확장하는 중이다. 조경은 가진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품질의 차별화된 조경 공간은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고급 주택의 정원 등 사적인 공간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오피스 빌딩이나 호텔, 상업 공간, 아파트 조경이 주로 완성도가 높은 조경 공간으로 꼽힌다. 따라서 디자인적 조형미, 고가의 자재와 식물 활용, 시공성, 식물 간의 균형과 조화로움 등은 차치하고 들어주기를 바란다. 동네에서 더 나은 조경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 주민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다. 조경은 워낙 다양한 역할을 하기에 그 의미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근간에는 자연의 모습을 도시에 재연하는 편집자로서의 사명이 있다. 자연과 멀어진 사람의 일상으로 자연을 끌어와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도시의 누군가는 이러한혜택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는 실정이다. 정원에 공공성이 더해지면서 조경이 태동했다. 그런데 다수의 공공을 위한 공간일수록 좋은 품질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적 약자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조경 공간의 품질은 더 떨어진다. 좋은 소재와 기술을 쓰고 인력을 많이 투입하면 품질이 좋아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본력을 가진 클라이언트만 좋은 조경 공간을 가질 수 있다면 과거 귀족에게만 허락된 정원(loyal garden)과 다를 게 없다. 다수의 공공을 위한 공간일수록 좋은 품질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적으로 경제 자본과 멀어지면 쾌적한 환경을 누릴 수 있는 권리도 제한되는 것인가. 예산 분배는 정책가의 역할이니 접어두고 조경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조경가의 손길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도 일단 뛰어들어 솔루션을 제시하고 자격을 갖추어 판을 만들자는 전략을 세웠다. 많은 비용이 요구되는 디자인이나 재료를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변화의 체감률을 높이는 방법을 찾는 데 주력했다. 지금까지 조경가는 주민들이 원하는 걸 듣고 설계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자체 진단과 직관에 의한 설계 결과물을 공청회를 통해 주민들에게 통보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조경가는 일을 마치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아서 공간을 누리는 사람들은 주민이란 점을 종종 잊어버린다. 꾸준하게 마을과 연을 맺고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은 이를 잊지 않기 위함이다. 누구나 집 앞에서 고급 정원을 향유할 수는 없겠지만, 보다 나은 공간에서 쾌적함을 누리는 일에는 공평하면서 보편적인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돈이 되는 고급형 조경이 아닌 누구나 누릴 있는 녹색 복지로서 보급형 조경에도 관심을 갖고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게 조경의 공공성이 아닐까. 자연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면 도시에 영양 결핍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결핍은 결국 사회 문제로 이어지니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 열음이 주목하는 지점이다. 아이들의 일상에 자연을 놓아주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소외되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학교는 창의적인 인재 육성보다 효율적인 통제를 목적으로 설계됐다. 주인인 학생을 위한 공간이 어디에도 없는 모순적인 구조다. 교육부도 이를 인지하고 ‘그린스마트 미래학교’라는 학교 공간 혁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외부 공간에 대한 접근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특히 운동장은 일상에서 자연을 접하고 숲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공간인데도 대부분 방치되어 있다. ‘생태 숲 미래학교’는 경기미래교육 핵심 과제 5가지 중 하나다. 우리는 2개 학교(김포 고창초등학교, 부천 송내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시범 사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에게 생태적 가치와 감수성을 일깨워주고 기후 변화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진로 탐색 기회를 제공하는 외부 공간 조성이 목표였다. 그 과정을 통해 조경가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경기도 교육청은 학교 공간 혁신을 위한 공간 전문가를 촉진자로 위촉하고 건축·도시·조경 전문가가 참여할 길을 열어놨으나 조경 분야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업적 측면에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점과 기존과 접근 방식이 다른 생소한 프로젝트인 점이 이유인 것 같다. 촉진자 선정에 참여한 40여 명의 전문가 그룹 중 조경가 그룹은 열음이 유일했다. 학교는 미래 세대가 자라는 공간이고 전국의 학교 개수를 고려하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잠재적 탄소 흡수원이자 환경 교육 거점으로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참여 계기였다. 이후 조경 분야가 참여할 길을 열어두기 위한 교두보 역할만 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어 보였다. 학생들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학교에선 교실 말고는 딱히 갈 곳이 없으니 쉬는 날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산과 바다와 같이 먼 곳으로 바캉스를 떠난다. 완벽한 스트레스 해소는 어려울지라도 일상에서 잠깐이라도 자연을 마주하며 힐링하는 경험은 스트레스 총량을 줄이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소생물 서식처 기능까지 고려한다면 사람과 야생 동물이 공존하는 지역의 생태적인 거점으로 거듭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3년의 시간, 12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면서 생활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특히 부천 송내고등학교에서는 교내 환경 교과목 교사와 합을 맞추면서 소프트웨어와 어우러진 공간 조성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기존 환경 교육은 학교 바깥의 녹지를 간헐적으로 모니터링하는 정도였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교육할 수 있도록 학교 구성원들과 심도 있는 상의를 통해 교육 과정과 연계한 AI 교육 등의 학습 공간을 계획했다. 음악회나 독서와 같은 공간 경험을 넘어 진로 탐색과 연계할 수 있는 모델로 서 숲을 제안했다. 교직원과 학생들 모두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진행 과정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처음에는 일부 위요된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과업이었으나 또 하나의 위요 공간부터 필로티, 건물 틈새 중층, 옥상 등 내외부를 관통하는 하나의 녹지 네트워크를 아우르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하여 추가로 예산을 받아 과업을 수행하게 됐다. 학생들과 함께 도출한 생각을 설계로 구현했지만 공사는 가격 입찰로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의 손을 벗어나 의도가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정식 공사 감리는 아니지만 디자인 감리 제도를 통해 시공사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소재 선택부터 디자인 디테일 조정 등 여러 부분에 관여했다. 프로젝트 성과에 100% 만족하는 건 아니지만 학생들이 빗물, 숲, 옥상, 실내 등 여러 가지 유형의 정원을 일상의 일부인 학교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된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조경하다 열음’의 구성원 현재 열음은 경영 관리, 설계와 엔지니어링, 공동체 등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조민영 소장이 경영 관리 총괄로 회사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고, 윤호준 소장은 설계 및 엔지니어링, 김도훈 소장이 공동체 파트 총괄이다. 엔지니어링 파트 행동대장 이병우는 온갖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건 식재다. 설계부터 시공, 활착 후 모니터링까지 본인 머리에서 현장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걸 좋아한다. 식재와 관련된 부분에선 회사 내 ‘원 톱’이다. 이외에도 각종 설계가 실제 현장에서 구현될 수 있게끔 관리한다. 신혜지는 기획과 구상을 실시설계로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장하니는 내역을 담당하면서 다른 직원들이 의욕으로 채운 도면을 현실과 연결시키는 데 주력한다. 김윤은 사회초년생이지만 기복이 없고 뚝심이 강해 선배들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준다. 그래픽 기술을 특화해 역량을 키우고 있다. 공동체 파트는 현재 북촌 도시재생활성화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임은경은 현장에서 주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정리하는 소통 창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김용진은 다양한 의견을 북촌에 맞게 체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다. 어떤 문제가 들어와도 북촌화하여 주민과 협의해 적절한 프로그램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김범진은 사업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오랜 시간 머물며 자리를 지켰다. 시대적 흐름이나 상황 속에서 북촌에 대한 이야기를 연결해준다. 박지영은 센터 내 유일하게 도시 공학을 전공한 도시재생 전문가로 하드웨어 중심의 계획 수립과 사업 실행을 전담해서 진행하고 있다. 조경가 매니지먼트를 꿈꾸며 회사와 대표는 동일체가 아니란 점을 강조하고 싶다. 법인은 또 하나의 인격체다. 회사와 대표가 등가 관계로 매칭되는 순간 동료들이 빛을 잃을 우려가 있다. 그래서 열음에는 직급이 없다. 창립 때부터 직급 체계를 두지 않았다(물론 나이 차에 따른 구분과 예를 갖춘다). 모든 동료의 명함에는 ‘조경가’란 타이틀만 있을 뿐이다. 각 파트장들만 소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을 뿐, 다른 동료들은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열음의 조경가들은 대외 업무 시 회사를 대표하며 자기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책임질 권한을 갖는다. 그렇다고 경력자나 소장이 자기 업무만 하면서 방치하는 건 아니다. 권한을 주되 책임을 선배들이 분담하며 업무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한다. 직원들이 연봉만으로 설계업을 영위하는 건 회사나 개인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다. 설계는 계량이 어려운 지식 서비스 산업이므로 야근, 주말 출근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보다 나은 방법을 고민하다 보면 시간을 정해놓고 일을 마무리하는 게 어려운 법이다. 그렇기에 직원 개개인의 역량 차이가 있더라도 최소한 일정 수준의 품질을 맞추기 위해 함께 스터디 하면서 해법을 마련하는 구조를 취하고 이를 보상하는 시스템을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다. 열음을 배경으로 한 조경가 개인의 커리어 축적, 수익 배분, 방학 제도 운영이다. 열음은 정원박람회 작가나 공모전 등 개인 커리어를 쌓는 것도 장려하고 있다. 연봉 외에 노력하는 만큼 수익을 배분하는 경영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데, 회사 매출의 일정 수익금은 직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 나가고 있다. 방학은 주로 연말에 주어지며 2~3주 동안 회사와 어떤 연락도 하지 않는 휴식기를 갖게 한다. 자기 프로젝트를 끝까지 완수할 정도로 성장한 조경가는 각자 독자적 조직을 구축하도록 만드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연예인의 방송 활동 외 경영 전반을 관리해주는 매니지먼트 회사 개념을 모티브로 한다. 회사가 소화하지 못하는 전문적인 역량은 다양한 전문가와 의 협업 관계를 통해 보완하며, 이를 연결하는 것 또한 열음의 역할이다. 조경을 잘 하고 싶은 사람이 조경에만 전념할 수 있게 도와주는 회사가 되려 한다. 자기만의 확고한 철학을 갖고 조경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온전하게 자기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는 배경이 되어주는 회사로 성장하는 것이 열음의 꿈이다. 조경 설계에 국한해 우수한 사람들을 모아놓는 게 아니라 도시, 공동체, 스마트 시티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업무를 수행하는 조경 전문 소속사, 그게 바로 ‘열음’이다. [email protected] 조경하다 열음의 대표 조경가 윤호준은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학부에서 조경을 전공하고 설계사무소에서 10년간 경력을 쌓은 뒤 제도권을 넘어 새로운 판을 만들자는 포부로 2017년 조민영과 함께 사무실을 열었다. 주민과 소통하고 공간의 조사, 설계, 시공뿐만 아니라 교육과 컨설팅까지 아우르는 생활밀착형 조경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자연의 모습을 도시에 재현하는 편집자로서 사무실보다 현장에서 답을 찾고, 직관보다 경험, 발주처보다 주민의 이야기에 귀를 더 기울인다. 예비 조경가를 발굴·육성하는 매니지먼트 회사로 조경설계사무소를 키우고자 한다.
    • 윤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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