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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우연한 풍경은 없다
김연금 박사를 보내며
비합리와 몰상식을 초월한 광기와 폭거, 12.3 비상계엄 내란 사태가 시민들을 다시 차디찬 광장으로 불러냈다. 안온한 일상을 빼앗긴 겨울, 45년 전으로 퇴행한 이 도시의 정치적 풍경 앞에서 여느 해 1월호처럼 새해의 잡지 편집 방향을 희망차게 전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 며칠 지나지 않은 지난해 12월 17일, 조경계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한평공원’의 주창자이자 커뮤니티 참여 디자인 이론가이며 어린이 놀이 환경 실천가로 분투해온 김연금 박사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는 투병의 마지막 순간 남동생을 통해 자신의 페이스북에 끝인사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어쩌다 보니 청춘만 살았습니다. 항상 애쓴 만큼 보상이 적었다고 투덜거렸는데, 돌이켜 보니 함께해주신 분들이 계셔서 저의 청춘은 늘 신났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거의 다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저를 애처롭게 여기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변함없는 가족들의 사랑으로 의연하게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 그릇이 크지 못해 저의 말과 태도로 인해 상처받으신 분들이 있다면 사과드립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특히 포용력 있는 리더가 되지 못한 게 가장 후회됩니다. ‘조경작업소 울’의 새로운 리더는 포용력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저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도와주세요. 누군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두유와 토마토로 간단한 아침을 먹고, 요란스럽지 않은 미소로 반겨주는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책을 읽은 뒤 출근하고, 퇴근 뒤에는 가족들과 투닥거리며 저녁을 먹는 것입니다. 혹여 시간이 맞는다면 마음 맞는 친구와 만나 먹고사는 일 너머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더욱더 좋겠죠.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김연금, 2024년 12월 4일 수요일 오후).
1971년 서울 옥수동에서 태어나 자란 김연금 박사는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생 옥수동에서 살았고, 바로 옆 동네 약수동에 ‘조경작업소 울’을 열어 참여와 소통, 연대와 돌봄에 뿌리를 둔 디자인 작업과 행동을 펼쳐왔다. 그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조경학자이자 조경가였다. 박사논문을 개작한 첫 저서 『소통으로 장소 만들기』(한국학술정보, 2009)가 이론과 실천의 경계를 허무는 학문적 태도를 보여준다면, 마지막 저서 『놀이, 놀이터, 놀이도시』(한숲, 2022)에는 현장의 실험에 토대를 둔 조경가의 지혜와 열정이 짙게 배어 있다.
김연금 박사는 한국 조경 50년사가 낳은 몇 안 되는 글쟁이였다. 편집자가 일말의 주저함 없이 글을 청탁할 수 있는 필자였다. 그의 글은 논리적으로 명징했음은 물론 “진솔하고 명랑했다”(고정희). 김연금 박사의 저술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우연한 풍경은 없다』(나무도시, 2011)는 삶의 장소와 실천의 실험실을 가로지르는 그의 글 풍경의 씨앗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별생각 없이 매일 스치는 풍경, 그 앞에 문득 서보자. 그리고 말을 건네 보자. 오늘 하루 어땠냐고. 좀 생뚱맞은 질문도 던져보자. 당신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이냐고. 갑작스런 질문에 처음엔 서로 좀 어색하겠지만, 곧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연인 듯하나, 절대 그렇지 않은, 삶의 필연성이 빚어낸 풍경이니까”(5쪽).
김연금 박사는 단독 저서뿐 아니라 여러 책 작업에 기획자로, 번역자로, 공동 필자로 참여했다. 그가 기획자 겸 편집자 역할을 맡은 『이어 쓰는 조경학개론』(한숲, 2020)은 조경학 전문 지식을 안내하는 지도 같은 책이다. 팀 워터맨의 원저를 번역한 『조경 설계 키워드 52』(나무도시, 2012)도 조경학과 교과서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다. 『텍스트로 만나는 조경』(나무도시, 2007),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다: 주민참여로 가꿔나가는 삶의 공간』(나무도시, 2009), 『용산공원』(나무도시, 2013),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한숲, 2021), 『한국 조경 50년을 읽는 열다섯 가지 시선』(한숲, 2022) 등에 필자로 참여한 글에는 이론과 실천, 비평과 설계를 횡단한 그의 여정이 고스란히 감광되어 있다.
책으로 묶이지 않은 김연금 박사의 글들은 『환경과조경』을 비롯한 여러 지면에 흩어져 있다. 아마도 공식적인 마지막 글은 채 맺지 못한 연재물 “공원에 간다(5): 서울숲, 따로 또 같이”(‘e-환경과조경’ 2024년 11월 11일)일 테다. 끝부분을 옮긴다. “그래서 그녀는 개인으로서, 작업의 일환으로서 미래에 공원을 만들고 싶어 한다. 혼자 소유하고 즐기는 정원이 아닌, 각자 즐기면서도 함께 하는 공원.”
『놀이, 놀이터, 놀이도시』의 필자 소개 글 마지막 몇 문장을 옮겨 적지 않을 수 없다. “천생 몸치라 공놀이며 고무줄놀이며 뭐든지 못했고 항상 깍두기였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놀았다. 다정한 환대와 집중의 시간이 좋았다. 그 기억으로 사는 것 같다. 얼마간 못 놀았다. 이 책을 시작으로 다시 놀려고 한다. 어린이들과 함께.” 허약하고 부박한 이 조경판은 남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김연금 박사는 편안한 곳에서 마음껏 노시길.
2025년을 여는 이번 호는 본지가 주최한 ‘제7회 젊은 조경가’ 수상자 원종호(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 소장) 특집호다. ‘보이지 않는 조경’의 힘을 실천해온 원종호 소장의 작업들, 그의 에세이 “보이지 않는 조경의 길”, 김모아 기자의 인터뷰, 파트너 정욱주 교수와 동료 최재혁 소장의 글을 특집 지면에 담았다. 원종호 소장의 조경 작품과 조경에 대한 생각을 한눈에 조감하는 기회가 되기를, 또 그의 작업을 촘촘한 비평의 장으로 불러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2014년 1월호~2016년 12월호)의 필자 고정희 박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대표)가 8년 만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번에는 매달 ‘우먼스케이프’로 독자 여러분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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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다시 만난 세계, 조경의 위로
신나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기대했던 지난해 겨울, 난데없는 12.3 비상계엄 사태로 대한민국은 또다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이했다. 놀란 시민들은 국회로 한달음에 달려가 완전 무장한 특수부대 계엄군과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아냈다. 국회에서 어렵사리 계엄 해제가 의결되고 진통 끝에 탄핵안이 가결되는 순간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열망하는 시민들의 함성이 차디찬 겨울 광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1980년대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시절에 목 놓아 부르던 민중가요 대신 거리에는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깃발을 든 2030 청년들이 걸 그룹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떼창으로 부르며 축제와 다름없는 새로운 시위 문화를 만들어냈다. 해외 언론들은 한국이 ‘K팝 문화’에 이어 새로운 ‘K시위 문화’를 만들어냈다며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 회복력에 찬사를 쏟아냈다. 반면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로 한국 경제는 증시 급락, 원‧달러 환율 급등 등 큰 충격을 받았고 정부와 한국은행은 유동성 공급 등 긴급 대책을 시행해 시장 안정화에 나섰지만, 정치적 위기에서 비롯된 소비 위축, 금리와 물가 상승 등 경제 리스크는 지속되고 있다. 정치적 불안이 장기화될 경우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지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저하시켜 자본의 급격한 유출로 인한 국내 경제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나라의 어려움과 함께 지난해 조경계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임금과 원자재 가격 등이 오르면서 건설 업종 수익성이 전년 대비 크게 나빠졌고, 하도급 회사가 대다수인 조경 시공 회사 경영에도 연쇄적으로 적신호가 켜졌다. 정부의 ‘건전 재정’이라는 명목하에 복지, 민생 안정 정책은 후퇴하고 공공 부문의 건설 관련 예산도 대폭 삭감되어, 선행 지표 격인 건설 계약액도 5년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서면서 대부분 영세한 조경설계사무소도 일감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연말 비상계엄 이후 탄핵 정국이 이어지면서 불확실성이 커져 주택 거래가 위축되고, 공공 기관이 발주하는 건축·토목 사업도 영향을 받아 향후 건설 경기 전망을 어둡게 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조경계의 어려움도 더 커지고 있다.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옛 선인의 고사처럼 2025년 신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회복과 함께 조경계도 찬란한 부활을 꿈꾸어본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계엄 사태에 놀란 시민에게 새로운 희망과 위로의 노래로 울려 퍼지듯, 조경이 만드는 세상도 우리 사회에 큰 위로가 될 것이다. 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한국 조경은 산업화 시대의 단순한 국토 환경 조성 역할을 넘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녹색 공간 복지에 기여하는 필수 분야로 자리매김해 왔다. 공원 녹지로 대표되는 생활 공간의 녹색 인프라(green infrastructure)는 지역 사회에 중요한 서비스를 제공해 기후위기로 인한 홍수, 폭염 등 자연재해로부터 시민 안전을 도모하고 인간과 환경의 건강을 뒷받침하는 대기와 수질 개선에 도움을 준다.
조경가는 옥상 녹화, 벽면 녹화, 빗물 정원, 잔디 수로, 투수 포장 등 기존 토목의 접근 방식과 다른혁신적 친환경 인프라 해결책을 통해 크고 작은 지역 사회가 빗물을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조경은 공원과 개방된 공간을 자연 탄소 흡수원으로 변환하는 기후 포지티브 디자인(climate positive design) 접근 방식을 사용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고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자연과 함께 설계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생물 다양성을 높이고 지구상의 생명체를 지탱하는 생태계를 보호하고 복원한다. 또 조경가는 자연환경과 함께 인간 커뮤니티를 돌봄으로써 인종과 성별, 직업과 국가를 넘어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문제에 대해 더 정의롭고 포용적인 커뮤니티, 공정한 사회로의 길을 모색하고 선도한다. 조경가는 환경 및 사회과학 교육과 첨단 기술의 활용을 통해 활기차고 탄력적이며 공평하게 모두를 위한 정의로운 커뮤니티를 설계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동네의 작은 골목길부터 어린이 놀이터, 공원, 도시 전 지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에서 조경가는 공공 레크리에이션 시설, 운동 시설, 자전거 도로, 산책로 등 신체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를 조성하며, 지역 사회의 장기적인 건강과 회복력을 향상시키고 안전하고 건강하며 능동적인 교통 시스템을 갖춘 걷기 좋은 교통 중심 환경을 계획하고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조경은 이제 소극적 의미의 경관적, 미학적 기능을 넘어 공공 복지를 실천하는 사회 서비스의 중요한 첨병이다. 자연환경과 인간 커뮤니티를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설계하면서 우리 사회에 풍부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다양한 방면의 생태적, 문화적 기능을 향상시킨다.
배정한 교수는 저서 『공원의 위로』에서 “공원은 도시의 여백이다. 미래 세대를 위한 숨통이다. …… 공원은 누구에게나 자리를 내주는 위로의 장소이자 모두를 환대하는 공간”이라며 공원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선한 영향력의 무한한 잠재력을 전한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련을 겪었던 우리 세대에게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줄 알았던 민주주의의 위기와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새해에는 조경이 모든 국민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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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감각] 가지치기
길게 뻗어 나온 줄기가 발걸음에 걸려서 화분이 쏟아지고 말았다. 무성한 모습이 좋아 일부러 가위를 대지 않았는데. 아깝게 부러진 잎사귀를 주워 모은다. 투명한 유액에 검은 흙먼지가 엉긴다. 뭉개진 자국에서 시린 풀냄새가 난다.
줄기를 잘 보고 발을 디뎠다면, 베란다가 조금만 더 넓었다면, 크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이런 사고는 없었을 텐데. 쏟아진 뿌리를 추스르고 흙도 새것으로 바꿔 다시 심는다. 너무 차갑지 않은 물로 샤워를 흠뻑 시킨다. 남은 잎사귀에 매달린 물방울이 반짝인다. 우리가 여러 계절을 함께 하려면 가지치기를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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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스케이프] 고대 이집트 핫셉수트 여왕
연재를 시작하며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2014년 1월호~2016년 12월호) 연재 이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시간은 정말 쏜살같다. 나이가 들수록 가속이 붙는지 살은 더욱 빨리 날아간다. 살이 과녁에 가서 꽂히기 전에 다시 연재를 시작해 본다.
이번 연재의 제목은 “우먼스케이프(womanscape): 여인의 풍경”이다. 필자가 여자라서 여성만을 편들자는 건 아니다. 100장면 이야기를 엮는 과정에서, 그리고 식물적용학 강좌에서 뛰어난 디자이너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동안, 20세기 초에 활동한 멋진 여성을 여럿 만났다. 그들은 물론 소수였다. 대세에는 역행하고 싶고, 그에 밀리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싶은 건 필자의 천성 탓일 것이다. 그래서 조경과 정원의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난 소수의 여성에 관한 관심을 키워 왔다.
지금 21세기에는 조경과 정원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 비율이 매우 높다. 새내기들에겐 생소한 얘기겠지만, 백 년 전 조경계에 여성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화젯거리였고 그때 그 여성들에게는 ‘남성이 주도하는 세계에서 뜻을 관철하여 두각을 나타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들은 인정받기 위해 남성 동료에 비해 배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편견에도 많이 시달렸다. 예를 들어 독일의 칼 푀르스터(Karl Foerster)는 거의 성인 대접을 받지만, 그의 딸 마리안네(Marianne Foerster)는 뛰어난 조경가였음에도 사람들은 그의 직업이 ‘칼 푀르스터의 딸’인 줄 안다. 최근에는 유럽 최초의 여성 조경가 헤르타 함머바허(Herta Hammerbacher)에 관해 “그 여인이 요리를 잘 못했어”라고 험담하는 건축가를 만난 적이 있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조경가)가 탕 소리가 나게 탁자를 내려치며 그따위 소리하면 이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그는 얼굴을 붉혔다.
조경과 정원 전문가 외에도 문장가, 화가로서 정원을 가꾸고 풍경을 노래한 유명한 여성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분위기를 바꿔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각각 ‘문학가의 정원’과 ‘화폭에 담은 정원’으로 묶어서 담아내면 좋지 않을까? 한편, 정원을 탐구의 대상으로 보았던 여성들도 있어 이들을 한 그룹으로 묶어 보려 한다.
물론 전문 여성들의 비중이 큰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이들은 다시금 ‘정원사, 정원 디자이너, 식재 디자이너’를 한 그룹으로 묶고, 조경가들은 ‘개척의 시대’와 그 이후의 ‘표현주의의 시대’로 크게 나누려 한다. 20세기 초에 머물지 않고 현재 중견으로 자리 잡은 1970년대생의 작품 세계까지 살펴볼 예정이다.
근 백년 전에 여성이 조경계에 등장했다고 한다면 그 이전 시대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을까? 사실 그 이전의 정원은 왕족과 귀족, 지배층의 영역이었다. 지배층에 속했던 여군주나 왕비, 고위 귀족 부인들이 정원 역사에 더러 이름을 남겼다. 도시계획과 건설 사업, 토목과 조경 사업 역시 군주들의 과업이었다. 그리고 그 과업에 충실한 여성들이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흠 잡히지 않고 권좌를 지키기 위해 더욱더 열심이었다.
먼저 프리퀄 개념으로 네 명의 여군주를 선발해 그들의 활약상을 전하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해외의 소식을 주로 전했지만, 이번에는 한국의 여성들과도 함께한다. 시대순으로 우선 고대 이집트의 핫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이야기를, 그다음 첨성대를 비롯하여 사찰과 능의 건설로 서라벌 도시축을 완성으로 이끈 선덕여왕 이야기를, 이어 프랑스 르네상스 왕실에서 이탈리아 여성으로 고생깨나 했던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erina de' Médicis)의 이야기를, 그리고 계몽주의 시대로 넘어가 바이로이트 공국의 왕비 빌헬미나(Wilhelmina)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빌헬미나는 남편이 사망한 뒤 그 역할을 넘겨받아 역량을 발휘했다.
1부 여인천하, 여군주들의 풍경
첫 번째 이야기: 고대 이집트 핫셉수트 여왕(기원전 15세기)
2021년에 ‘듄Dune’이란 영화가 엄청난 모래바람을 몰고 왔었다. 사막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여서 보는 동안 갈증에 시달렸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이 지났다. 듄 1편을 보면 주인공 폴이 새로 이주한 아라키스 궁전을 둘러보다가 정원에서 대추야자 나무에 물을 주는 남자를 만나는 장면이 있다(43분부터). 하필 그 장면이 인상에 남는 건 직업병일 것이다. 이집트에서 보았던 숱한 대추야자 나무와 핫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이 떠올랐었다. 감독이 여왕의 장제전을 보고 영감을 얻은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사실 나는 이집트에 가기 전부터 핫셉수트 여왕에게 매료됐었다. 『서양정원사』에서 처음 만난 인물이다. 고대 이집트 편에 반드시 언급되는 여왕,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 파라오였다. 스스로 왕관을 쓰고 파라오가 된 창의적이고 담대한 여인이었다. 이집트의 여왕은 클레오파트라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클레오파트라(재위 기원전 51~30년)보다 천사백 년 이상 선조였다. 클레오파트라가 나라를 로마에 넘겨주어야 했던 비운의 여왕이었다면, 핫셉수트는 상하 이집트의 결속을 다지고 외세를 물리쳐 평정하고 나라를 번영으로 이끈 성공적 지도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남자의 독차지였던 왕조에 앉아 그리 편한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다. 줄곧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했고 권위를 재삼재사 다져야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원칙은 다를 바 없었다. 이 원칙은 법전이 아니라 신화에 못을 박아 두었기 때문에 더욱 지엄했다. 핫셉수트는 그 신화를 어떻게 깼는지, 어떻게 깰 생각을 했는지 그것이 몹시 궁금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스스로 새로운 최고의 신을 추대하고 그의 딸이라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기존의 신화를 깼다. 담대하고 용의주도했다.
핫셉수트는 투트모세(Thutmose) 1세의 딸이자 투트모세 2세의 왕비로서 성골 중의 성골이라 왕이 될 자격은 충분했지만 여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병약한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파라오가된 어린 의붓아들 투트모세 3세의 섭정을 맡았다. 7년 뒤 아들을 밀치고 그의 왕좌에 앉았다.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아들을 공동 통치자라 칭했다. 그렇지만 종교와 정치는 핫셉수트가 독점하고 아들에게는 군사 책임을 맡겨 전장을 돌게 했다.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투트모세 3세보다는 자신의 정당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자기 능력을 믿고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왕관을 썼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제사장들의 동의 없이는 왕이 될 수 없었다.핫셉수트는 본래 테베(Thebae), 지금 룩소르(Luxor)의 지역신에 불과했던 아문(Amun)을 최고의 신으로 추대하고 그를 모시는 테베 제사장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테베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던 때였다. 아직 남편 투트모세 2세가 살아있을 때는 나서지 않고 조용히 뒷전을 지켰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권력욕이 도졌다기보다는 그녀의 여러 행적으로 보아 내심 오랫동안 치밀하게 계획한 흔적이 보이는데 아문 신에게 모든 것을 건 듯하다. 아문 신의 딸이라는 자신의 탄생 신화를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 홍보한 파라오는 핫셉수트가 처음이었다.(각주 1)아문 신이 “왕을 낳을 생각으로 아버지 투트모세 1세의 모습으로 화해 어머니와 동침하고 나를 낳았다. 그러므로 나는 왕이다”라는 서사시를 지어 장제전 벽에 가득 부조로 새겨 넣게 했다.
핫셉수트 장제전과 정원
그러나 물론 그 담대함 때문에 서양 정원사에서 언급되는 것은 아니다. 불모의 사막에 정원을 만든 공적 때문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 정원은 아주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고 지금은 나무를 심었던 구덩이와 연못 터 두 군데만 남아 있다. 핫셉수트가 사막에 나무를 심었다는 대목이 내게 큰울림을 주었다. 3,500년 전에 판 그 구덩이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소식에 그것을 보러 이집트에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핫셉수트는 재위 초기부터 데이르 엘 바하리(Deir-el-Bahari) 언덕에 자신의 장제전을 건설했다. 삼단 테라스 형의 거대한 건축으로서 이집트 건축 중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이집트 여행을 하면 반드시 가게 되는 곳이다. 나일강 서안 왕가의 계곡 가까이에 있다. 왕가의 계곡은 무수한 석묘가 모여 있는 곳이고, 데이르 엘 바하리는 파라오들의 제사를 모시는 장제전이 있는 곳이다. 한국의 현충사나 문묘 등에 해당할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의 사당이나 문묘는 후세가 지어주는 데 반해 고대 이집트의 장제전은 각 파라오의 재위 기간에 미리 지어놓았다는 점이다. 대개는 재위가 시작되면서 바로 무덤과 장제전 축조 사업을 시작했다. 파라오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태어남과 동시에 사후 세계를 준비했다. 이는 고대 이집트인의 사후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혼이 계속 살아간다는 믿음은 거의 모든 문화권에 있었지만, 이집트 사람들의 사후 세계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죽으면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서안으로 가서 사막의 엘쿠른(El-Qurn)산을 건너 저편에 존재하는 다른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런데 혼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승과 똑같은 육신으로 살아간다고 믿었기에 미라를 만들었다. 면포가 칭칭 감긴 미라의 몸으로 사막의 석산을 넘어가는 것이 너무 고생스럽다고 여겼는지 산을 뚫어 석묘를 짓고 그곳에 미라를 안치했다. 석묘는 곧 서쪽의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인 셈이었다. 당시의 이집트 사람들은 엘쿠른산을 살아서는 넘을 수 없는 장애로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너머에 펼쳐지는 끝없는 죽음의 사막도 죽어서는 살아볼 만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장제전
데이르 엘 바하리에는 세 개의 장제전이 있는데, 그중 핫셉수트의 장제전이 가장 잘 ‘복원’되어 멀리서도 그 웅장함이 압박해 들어온다. 붉은 석산을 수직으로 깎고 그 안에 건물을 앉혔다. 여왕 재위 7년에서 22년 사이에 건설됐다. 여왕의 무덤은 언덕 넘어 왕가의 계곡에 있으며 이곳은 오로지 여왕과 아문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다. 이로써 아문 신과 핫셉수트의 긴밀한 관계가 성립되어 아문이 핫셉수트이고 핫셉수트가 아문이라는 등식 하에 왕권의 신성함을 과시했다.
장제전은 나일강 서안에서부터 약 1km 정도 떨어져 있다. 지금은 관광버스 주차장도 있지만 당시에는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도보나 가마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때 이미 쭉 뻗은 대로가 닦여 있었다. 대로 양변에는 이집트에 비교적 흔한 아카시아(Acacia sp .)(각주 2)를 심었다는데, 지금은 그저 먼지 나는 사막길이다. 마침내 장제전의 거대한 마당에 들어서면 중앙축이 있고 그 양변으로 핫셉수트 형상의 스핑크스가 열 지어 있어야 맞는데 지금은 두 개만 남았다.
정원
스핑크스 행렬이 끝나는 곳에서 정원이 시작되었다. 길 양쪽에 대칭으로 T자형 연못을 두고 그 주위에 격자형으로 나무를 심었다. 이 정원의 핵심은 두 연못이다. 연못은 각각 길이 10m, 폭은 좁은 곳이 2.6m 넓은 곳이 6m다. 이런 T자형 연못은 이집트 정원에서 흔히 보는 형태다. 나일강에서 퍼온 점토를 바닥에 깔고 물을 댄 후 파피루스 등 수생 식물을 심었던 흔적이 발견됐다. 오리도 헤엄쳤을지 모르겠다. 이 파피루스 연못은 그저 연못이 아니라 풍요의 여신 하토르를 기리는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파피루스 수확 장면을 모방하고, 부메랑을 던져 새를 잡는 의식을 말하는데 이집트 건국 초기로부터 매우 중요한 종교적 의식이어서 여러 벽화에 묘사되어 있다.(각주 3)핫셉수트는 왕이기 이전 왕가의 여성으로서 하토르 여신의 화신이었고 그 때문에 여기에 파피루스 연못을 꾸며 풍요의 의식을 치렀을 것이다. 연못의 양쪽에서 발견된 구덩이는 모두 66개며 각 구덩이의 깊이는 3m나 된다. 어떤 나무를 심었었을까?
사막에 나무를 심기 위해 핫셉수트는 ‘미지의 나라 푼트’라는 곳으로 원정대를 보내 몰약나무(Commiphora myrrha) 와 유황나무(Boswellia sp .)를 31그루씩 수입했다고 전해진다.(각주 4)둘 다 이집트에서는 자라지 않는 나무다. 다만 이 나무에서 생산되는 몰약과 유황이 이집트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이다. 몰약과 유황은 그 많은 신전에서 매일매일 향을 피워 신들을 기쁘게 하려 필요했고, 특히 몰약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약으로도 널리 쓰였으며 무엇보다 미라를 만들 때 필요했다. 그러나 모두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핫셉수트 이전에도 여러 왕이 그 두 종의 나무를 들여와 번식시켜 보려 했지만, 기후 조건이 맞지 않아 모두 실패했다. 나무줄기에 상처를 내면 나오는 진이 굳어서 각각 몰약이 되고 유황이 되는 이 두 나무는 뜨겁고 건조한 기후가 필요하지만, 일정 기간 우기도 있어 주어야 한다. 이집트의 리비아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곳으로 일 년에 평균 하루 비가 내리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곳이다. 기온도 아프리카 내륙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그런 곳에서 유독 핫셉수트가 심은 나무만이 살아남으라는 법은 없었다. 항공 사진을 보면 잘 알아볼 수 있는데 장제원의 규모에 비해 정원은 어처구니없이 작다. 그 큰 마당을 나무로 모두 채운다면 어느 정도 비율이 맞을 것이다. 그런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굳이 왜 그곳에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었을까?
푼트 원정대 이야기
핫셉수트 장제전 2층 테라스의 좌측 열주실에 보면 ‘푼트 원정대 이야기’가 부조로 길게 새겨져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집트의 부조는 그림과 함께 그 그림에 대한 설명을 상형문자로 함께 새겼다. 푼트(Punt)라는 곳에서 나무를 뿌리째 분에 담아 가져오는 장면이 유명해서 서양 정원사 책에 반드시 실린다. 이 부조 벽화는 엄청난 공을 들여 원정 경과를 소상히 묘사한 스토리 보드인데 많은 부분 훼손되어 19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근 150년 동안 여러 나라의 여러 학자와 복원가가 달라붙어 해석하고 복원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푼트 원정에 관해서는 해마다 새로운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이러하다.
푼트 원정은 아문 신이 핫셉수트 여왕에게 직접 지시한 일이라고 한다. “아문 신께서 짐에게 이르기를 신전에 정원을 꾸미라 하셨다. 그 뜻을 받들어 배 다섯 척을 지어 푼트에 원정대를 보냈다. …… 나무를 가져와 정원에 심어 가꾸었더니 잘 자라서 소들이 나무 밑에서 풀을 뜯었다”(각주 5)고 벽화에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구절이 새빨간 거짓말이 아닌 것은 나무 구덩이가 증명해 준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푼트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소말리아라는 설이 유력했는데 2020년에야 비로소 개코원숭이 세포 내 스트론튬의 동위원소를 분석해 확인됐다. 황금의 나라라 불렸던 푼트, 진귀한 나무와 황금과 애완용 개코원숭이도 선물하는 나라 푼트는 ‘아프리카의 뿔’이라 일컬어지는 지역, 즉 지금의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그리고 북서 소말리아 지역에 있었다고 결론이 났다.(각주 6)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원정의 우선 목적이 정원 조성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의도가 더 컸다는 해석이다. 장제전의 긴 벽을 푼트 원정 묘사에 할애한 것은 그만큼 그 일이 중요했다는 뜻이다.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깟 원정이 뭐 그리 대단했을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당시 푼트에 가는 일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제례와 장례가 산목숨보다 중요했던 이집트 사람들의 유황과 몰약 소비량은 어마어마했다. 수입한 나무 62그루의 재배에 성공했다고 해도 그 수요를 채우기에 턱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핫셉수트 여왕의 능력과 신심을 만방에 알리는 상징적 제스처였을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정원도시’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정원이 진심이 아니고 정치적 프로그램이었다. 현대의 정치가나 고대의 군주에게 정원이 진심이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푼트 원정은 꼬박 3년이 걸렸다. 당시 이집트에서 ‘아프리카의 뿔’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선박을 끌고 ―그래서 조립식으로 만들었다― 사막을 건너 홍해까지 가서 거기서 뱃길을 타고 내려가야 했다.(각주 7)죽을 게 뻔한 나무 62그루를 얻기 위해 그 험한 원정길에 2백 명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무뿐 아니라 유황과 몰약 알갱이를 산더미처럼 가져 왔고 그외에도 숱한 보물을 가득 실어 왔다. 이는 선조 왕들이 정복 전쟁을 통해 얻었던 전리품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핫셉수트는 살상을 하지 않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아문 신에게 바칠 어마어마한 물량의 보물을 구해옴으로써 자신의 역량을 증명해 보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문 신의 향기라고 불리는 몰약으로 만든 향기로운 오일을 온몸에 발랐다고 한다. 이제 핫셉수트는 아문과 같은 향을 지님으로써 상징적으로 신과 동화되었고, “기쁨에 가득 차 상하 이집트를 영원히 통치할 것이다”(각주 8)라고 벽화에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이 신격이며 아무도 넘볼 수 없다는 것을 신하들에게 알렸다. 이때부터 핫셉수트는 여인의 복장을 버리고 남자로 변신하기 시작했다.(각주 9)왜 끝까지 여자임을 지키지 않았는지에 관해 지금 3,500년이 지난 시점에 의문을 품는 건 적절치 않을 것이다.
핫셉수트는 재위 22년째 되던 해, 기원전 1457년 1월 14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탄생 연도가 불확실하므로 35세에 죽었다는 설과 45~60세에 죽었다는 설이 공존한다. 마침내 단독으로 군림하게 된 투트모세 3세는 이때 30세였다. 20여 년간 전장을 떠돌았기 때문인지, 핫셉수트가 죽은 뒤에도 정복 전쟁을 멈추지 않고 영토를 크게 확장한 명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는 핫셉수트 치세 기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실은 이집트 학자들조차도 19세기 말까지 핫셉수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산사태로 장제전이 묻혀버렸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사후에 누군가 그녀의 흔적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벽화에서 그녀의 이름과 형상을 모두 쪼아내고 석상을 파괴하고 오벨리스크를 엎었다. 1860년경 장제전이 우연히 발견된 이후 핫셉수트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서서히 비밀이 벗겨졌다. 학자들은 이 ‘기록 말살’을 열 받은 투트모세 3세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모된 자리를 조사한 결과 훨씬 뒤에 벌어진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와서 누가 언제 왜 그랬을까를 알아내는 방법은 없는 듯하다. 한국 드라마 ‘선덕여왕’처럼 상상력의 힘으로 창작물을 만들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각주
1. Walter Saller, “Hatschepsus”, GEO 7, 2002, pp.14~40.
2. 아카시아는 우리가 말하는 아까시나무(Robinia pseudoacacia)하고는 다르다. 아까시나무는 거짓아카시아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이집트의 아카시아는 나일강아카시아라고도 불리며 노란색의 둥근 털 방울 같은 꽃이 핀다. 예로부터 중요한 목재이며 약용으로도 쓰였다.
3. Arne Eggebrecht & Abdel Ghaffar Shedid, Das Grab des Nacht. Kunst und Geschichte eines Beamtengrabes der 18. Dynastie in Theben-West, Mainz: von Zabern, 1991, p.56.
4. 거의 모든 자료에서 몰약나무 혹은 유황나무 31그루를 수입한 것으로 서로 엇갈린 해석을 하고 있다. 심하게 훼손된 벽화의 상형문자를 복원해가며 해독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대 이집트인들 자신이 몰약과 유황의 이름을 혼동하거나 같은 이름을 썼다고 한다. Renate Germer, “Handbuch der altagyptischen Heilpflanzen”, Wiesbaden: Harrassowitz (Philippika, 21), 2008, pp.210, 230; Renate Germer, “Die Pflanzen und ihre Nutzung (des Altägypten)”, Christian Tietze , Ägyptische Gärten, 2011, p.145.
이 경우 상형문자 설명문보다 그림 자체에 해답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벽화에 두 종의 나무를 분에 담아 옮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잎을 정교하게 하나씩 묘사한 나무는 유황나무, 나무의 윤곽과 가지만 표현한 나무는 몰약나무인 것으로 추정된다. 즉 각 나무의 특성에 맞게 묘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몰약나무와 유황나무를 각각 31그루씩 수입했을 것이고, 장제원 마당에 66개의 나무 구덩이를 판 것도 이치에 맞는다.
5. Edouard Naville, The Temple of Deir el Bahari (Band 3): End of Northern Half and Southern Half of the Middle platform, London, 1898, p.17.
6. Patrick Wheatley, “Mummified Baboons Reveal the Far Reach of Early Egyptian Mariners”, eLife , 2020, pp.1~28.
7. Angelika Franz, “DAS SAGENHAFTE GOLDLAND PUNT”, Wissenschaft.de , 2011. 10. 18.
8. 5번 책, p.16.
9. 1번 글, p.38.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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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이상한 세기의 이상한 공원들
무엇인가 이상한 공원들
도시 분야 번역가의 입장으로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지점이 있다. 바로 ‘공원’이 ‘파크(park)’의 번역어라는 점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애매한 상황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공원’이라는 단어는 서양의 공공 정원(public park)이 한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공공’의 공(公)과 ‘park’를 의미하는 원(圓)이 합쳐진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단계인 park는 공공이 내포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파크의 어원으로는 라틴어 파리쿠스(parricus) 또는 파도 (paddock)를 주로 드는데, 이는 모두 수렵원 또는 수렵을 위한 동물을 키우던 사육지를 의미한다.이 때문인지 영어 단어 ‘파크’는 반드시 공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원(public park) 외에도 가장 흔히 사용되는 야구장(baseball park)과 놀이공원(amusement park), 국립공원(national park) 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공원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공공의 활용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반드시 ‘공원’이 말하는 공공과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는 뜻이다. 야구장과 놀이공원은 실제 일정 요금을 내고 이용하는 공간인 만큼 공공성보다는 일상과 다른 행위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공원’이라고 부르지만 ‘공원(public park)’은 아닌 이상한 ‘공원(park)’들.
에피소드 1. 아이스 스피어 5스택
롯데월드에 얽힌 얼룩진 추억 하나. 필자는 유치원생 시절 알 수 없는 이유로 이곳에서 피겨 스케이팅을 배웠다. 당시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장은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외곽은 자유롭게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위한 트랙이었고, 내부 공간은 레슨을 받는 사람들을 위한 연습 공간이었다. 스케이트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무 데나 앉아서 쉬지 말라고 몇 번이고 혼냈지만 유치원생이었던 필자에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나가는 잔소리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졌다. 스피닝을 연습하다가 머리가 어지러워 몰래 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던 어느 순간, 옆에서 턴을 연습하던 사람의 스케이트 날에 손가락을 크게 베였다. 하필이면 새하얀 바닥에 새빨간 피가 흐르니 크리티컬이 터진 듯 모두가 얼어붙었던 게 기억난다. 공기가 차가워서인지 크게 아프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날 처음 피부를 꿰맨다는 게 무엇인지 배웠고 한동안 붕대에 퉁퉁하게 감긴 손가락을 개선장군처럼 들고 다녔다.(각주 1)
또또스테드 인 시카고
미국 근대 도시사에 대해 조금만 파헤쳐보면 튀어나오는 그 이름,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FrederickLaw Olmsted, Sr.)(각주 2) 흔히 조경사 시간에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World’s Columbian Exposition)와 도시 계획사를 연관해 배우면서 대니얼 번햄(Daniel Burnham)의 진두지휘 아래 옴스테드가 조경을 맡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실 만국박람회 이전, 1868년 옴스테드와 복스는 시카고의 사우스공원(South Park) 조경 계획을 맡은 적이 있었다.(각주 3) 동시에 브루클린의 프로스펙트 공원(Prospect Park) 마스터플랜과 일리노이주 리버사이드(Riverside) 교외 단지 설계를 하며 여러 공원을 파크웨이로 연결하는 범도시적 공원 시스템에 대한 논의를 도시계획 차원으로 확장해 나가던 시기다.
1868년 미시간 호수(Lake Michigan)와 관련 수공간을 담당하던 시카고 위생위원회(Chicago Sanitary Commission)가 옴스테드와 복스에게 사우스공원 계획을 의뢰하면서 수공간에 대한 문제를 특히 주요하게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옴스테드와 복스가 제출한 계획안에는 미시건 호수에서 라군(Lagoon) 지역을 지나 미드웨이 플레장스(Midway Plaisance)를 통해 가장 내륙에 위치한 사우스 오픈 그라운드(South Open Ground) 지역까지 배를 타고 들어가는 수공간이 있다. 물이 고이는 탓에 활용이 더뎠던 공간을 공원으로 만들어 이 일대의 개발을 촉진시키고자 한 의도가 한가득 담겨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계획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계획안이 제출된 지 몇 달 뒤, 1871년 시카고 대화재가 일어나 도시를 완전히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복구 작업을 위해 천문학적 비용을 지출해야 했던 시카고는 이 사우스공원 계획을 전면 중단시켰다.
*환경과조경441호(2025년 1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그 이후로 출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과하게 용감한 어린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2. 이때 옴스테드의 둘째 아들, 릭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Jr.)는 번햄 아래에서 도시계획을 배우고 있었다. 이 시기 옴스테드는 마라탕 같은 존재였다. 어딜 가도 나온다.
3. 당시 라군(Lagoon, 오늘날 잭슨공원), 미드웨이 플레장스(Midway Plaisance), 사우스 오픈 그라운드(South Open Ground, 오늘날 워싱턴공원)가 있는 지역이 ‘사우스공원(South Park)’로 통칭됐던 것으로 보인다.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있다. @jin.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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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조경설계사무소 탐구
분주했던 2024년이 저물어간다. 이번 12월호에는 지난 3년간 이어온 기획 지면 ‘어떤 디자인 오피스’의 마지막 편을 싣는다. 2022년 1월호(405호)에 문을 연 ‘어떤 디자인 오피스’는 한 조경설계사무소의 대표작과 근작을 둘러싼 뒷이야기, 사무소 경영과 생활 등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은 지면이었다. 한국 현대 조경의 역사를 이끌어온 중견 설계사무소뿐 아니라 새롭게 부상하며 활발한 작업 성과를 펼치고 있는 설계사무소, 신생 아틀리에형 스튜디오를 포함한 이 기획에 총 34개 설계 조직이 참여했다. 서른네 편의 ‘어떤 디자인 오피스’ 지면이 훗날 2020년대 한국 조경의 지형과 풍경을 탐구할 수 있는 생생한 자료로 쓰이기를 기대한다.
한국 조경사 50주년을 맞았던 2022년에는 조경하다 열음(윤호준)의 첫 편에 이어 안마당더랩(이범수+오현주), 본시구도(이형석), 오픈니스 스튜디오(최재혁), 엘피스케이프(박경의+이윤주), 조경설계 디원(최철호), 얼라이브어스(김태경+강한솔), 안팎(반형진+정주영), 조경그룹 이작(양태진), CAT 조경설계사무소(김성완+김용희), 조경사무소 사람과나무(오화식)의 이야기를 담았다.
2023년에는 바이런(이남진), 스튜디오 테라(김아연+안형주), HEA(백종현),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안계동), 가원조경설계사무소(안세헌), 디자인 엘(박준서), 듀송플레이스(송이슬+김민호), 공간이오(이주은+오태현), 디멘션조경설계사무소(이동화), CA조경기술사사무소(진양교), JWL(정욱주+원종호)이 ‘어떤 디자인 오피스’ 지면을 꾸렸다.
2024년의 문을 연 디자인 오피스는 기술사사무소 예당(오두환)이었다. 이어서 조경설계호원(김호윤), 라이브스케이프(유승종), 조경작업소 울(김연금), 스튜디오일공일(김현민), HLD(이호영+이해인), Lab D+H(최영준), MDL(송민원), 인터조경기술사사무소(김수연), 우리엔디자인펌(강연주), 서도(홍광호)를 지면에 초대했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의 마지막 편(440호)은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은 그룹한어소시에이트(박명권) 이야기다.
3년간의 ‘어떤 디자인 오피스’는 34개 조경설계사무소의 작업과 경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정보 전달형 지면이었지만, 더 나아가 한국 조경계의 내면을 관찰하고 기록한 일종의 아카이브이기도 했다. 조경설계에 관심 있는 이에게는 조경설계사무소의 구체적 현황을, 잠재적 클라이언트에게는 후보 조경가 리스트를, 조경가를 꿈꾸는 학생에게는 각 설계사무소 특유의 스타일과 직장 환경을 탐색하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란다.
본지 편집부가 지면에 초대한 설계 회사는 훨씬 더 많았지만, 여러 계기를 통해 이미 잘 알려진 설계사무소 중 일부는 참여를 고사하거나 다른 사무소들에 지면을 양보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에 담지 못한 여러 조경설계사무소의 경영 현황과 대표 작품이 궁금하다면, 『환경과조경』 2019년 7월호(375호)의 특집 ‘2019 대한민국 조경설계사무소 리포트’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지면에는 총 88개 설계사무소의 현황과 정보를 모은 바 있다.
다시 한 해를 통과한다. 『환경과조경』의 친구가 되어준 독자들과 필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2025년에도 『환경과조경』은 조경 저널리즘의 최전선에서 조경 담론과 문화를 생산하는 역동적 공론장을 꾸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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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Hey DJ play me a song to make me smile(각주 1)
#1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수색역에서 중앙선을 타면 새벽 6시였다. 그 시간에도 앉을 자리가 없어서 한쪽에 선 채로 휴대폰을 꺼냈다. 라디오 앱을 켜고 방송 중 읽지 못한 청취자 문자를 읽는다. ‘새벽 출근을 하며 듣고 있는데 덕분에 힘이 납니다’, ‘제 최애 코너예요’, ‘이번 주말에는 소개해주신 곳으로 꽃구경 다녀올게요.’ 초반에는 지루하다는 평을 받거나 메시지가 몇 통뿐인 날도 있었지만, 댓글 창에는 대체로 반가운 말들이 가득했다. 한아름 선물을 받아가는 기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이 열차는 공덕역에 도착하고, 열차를 가득 메우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머물던 자리에 앉아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오늘 어떻게 시작하고 계신가요? 오늘 일단 출발!” DJ의 목소리가 들리면 전철이 지하 구간을 빠져나온다. 창밖으로 건물들이 스쳐가는 동안 노래가 몇 곡 더 흘러나오고, 버드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한강이 보일 때에는 게스트 아나운서가 짤막한 뉴스를 전했다. 노란 큰금계국이 한들거리는 철로를 지난 뒤 내일도 놀러 오라는 클로징 멘트가 들리면 역에 내릴 시간이었다.
#2
작년 11월, 라디오에서 하차했다. 개편은 당연한 일이다. 매년 봄가을이면 수많은 프로그램과 코너가 생기고 사라진다. 그러나 개편이 내 일이 되자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열심히 준비하고 웃으며 진행했던 코너가 개편을 피해가기 어려울 정도로 한참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이런 생각과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작업실에 늘 틀어두었던 라디오를 치웠다. 그렇게 일 년을 보냈다.
이제 다시 라디오를 꺼내려고 한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DJ의 목소리와 여러 프로그램으로 흩어진 PD, 작가님들이 꾸리고 있는 방송이 궁금해서다. 다만 걱정이다. 토도독. 버튼을 돌려 익숙한 주파수에 맞추면 작업실 창가의 빨간 벽돌 건물이 조금씩 뒤로 움직일 것 같다. 꽃이 핀 철도변과 아침의 한강과 건물 숲, 그리고 어두운 지하를 지나 수색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새벽에 가닿을 때까지. 시간이 약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틀린 말인 듯하다.
**각주 정리
1. 제목은 이소라의 노래 ‘신청곡’ 가사에서 가져왔다. “이봐요 디제이, 나를 웃게 해줄 노래를 틀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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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륙순환 도시주의] 다시 쌓는 불턱
“시끄럽다! 저리가라!”
삼양 3동에 남아있는 할망(할머니) 불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씨 삼춘(삼촌의 제주 방언)이 소리쳤다. 그가 애기 해녀였던 시절, 뭘 물어보려 불턱에 찾아가면 할망들에게 시끄럽다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우영팟에서 검질매고(김매고) 나온 잡초들을 불턱에 가져와 불을 피워두던 애기 해녀는 이제 노년의 잠수회장이 되었고, 할망 불턱도 옆집에서 창고를 지으며 반쯤 허물어져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지 오래.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쉬는 사적인 공간이자, 하루의 물질부터 마을의 대소사까지 중요한 일들을 의논하는 공적인 자리였던 불턱은 해녀 공동체의 건축적 상징이다. 하지만 해녀 인구의 고령화와 감소로 인해 이러한 공간들도 사라져가고 있다. 답사 중 스러져가는 탈의장이나 불턱을 볼 때마다, 나는 삼춘들이 떠난 뒤의 바당밭의 미래를 고민하고는 했다. 소멸해가는 것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한 첫 번째 방법은 기록이었다. 기록은 문화의 증거가 된다. 답사를 다니며 측량한 여러 불턱과 잠수탈의장을 이번 글에서 살펴보겠다. 두 번째 방법은 변화다. 앞선 글에서는 바다와 땅을 오가는 영양분을 섬과 바당밭 풍경의 스케일에서 살펴보고 지속가능한 순환을 그려봤다. 깨끗한 물을 끌어와 화학 비료와 육상 양식장 배출수, 축산 폐수 등으로 오염시켜 바다에 방류해왔던 근대적 착취에서 벗어나, 돼지 분뇨를 이용해서 지렁이를 키우고, 광어 양식장에서 나오는 유기물로 해조류를 키워 소라나 전복을 먹이는 통합 다중 영양 양식(Integrated Multi-Trophic Aquaculture)을 상상해봤다. 버려지는 소라 껍데기는 해녀들이 오가는 조간대 길의 재료가 되어 검은 현무암 지대를 수놓으면 그 길에서 해녀 공동체가 다른 이들과 함께 걷는 일도 가능할 것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건축적 스케일에서 삼양 3동 할망 불턱을 다양한 세대가 만나는 공간으로 변화시켜본 과정을 다뤄보겠다.
“또똣ᄒᆞᆫ디 이리로 오라(따뜻한 여기로 와라)”
불턱은 해녀 건축의 원형이다. 불턱은 크게 자연형과 인공형으로 나뉜다. 자연형 불턱은 자연 지형을 이용해 바람을 막아 불을 피워 사용한 형태를 지칭한다. 종달리에 위치한 돌청산 불턱이 대표적 예다.(각주 1) 현무암이 고르게 퍼져 있던 암반 지대가 마치 입을 벌리듯 갑자기 움푹 내려앉으며 바다로 이어지는 돌청산 불턱은 양옆으로 솟은 작은 현무암 절벽이 차가운 바닷바람을 막아주었다. 또한 이 골짜기는 해녀들이 바다로 드나드는 자연스러운 길이 되기도 했다.
자연 지형이 바람을 막아주지 못하는 경우 옛날 해녀들은 직접 돌담을 쌓아서 불턱을 만들었다. 이를 인공형 불턱으로 분류한다. 일례로 하도리에 위치한 보시코지 불턱이 있다. 해안도로변에서 마주하는 보시코지 불턱은 성인 허리께 높이의 약 동서 12m, 남북 6m의 직사각형 돌담으로, 그 단아한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담장 주변을 수놓은 문주란과 함께 담 위쪽에 덧발린 백색 모르타르가 눈길을 끄는데, 이는 인근 무두개의 산호모래로 만든 시멘트 모르타르다. 초기에는 오직 돌을 쌓아서 만드는 구조였으나, 제주에 시멘트가 보급되면서 해녀들은 이 모르타르로 돌담 틈새를 메워 바람을 차단하기도 했다. 그마저도 시멘트가 귀했던 초기에는 가장 바람에 많이 노출되고 구조적으로 취약한 위쪽에만 시멘트를 덧발랐다.
보시코지 불턱 입구로 들어서면 낮은 중간 담을 두어 내부를 두 개의 공간으로 구분한 구조가 드러나는데, 여기에 해녀 사회의 위계가 반영되어 있다. 서쪽의 높은 지대는 하군 해녀들이, 동쪽 낮은 지대는 상군 해녀들이 사용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보통 물리적으로 높은 자리에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이 앉는 것과 달리, 낮은 지대에 사회적 위치가 더 높은 상군 해녀들이 앉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불턱에 앉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소란스러운 풍경이 뒤로 물러나고, 사나운 바람과 파도 소리는 돌담을 거치며 온화해진다. 묵묵한 돌담 위로 하늘은 지나가고.
*환경과조경440호(2024년 12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청산은 성산일출봉과 비슷하게 생긴 바위를 주민들이 일컫는 말이다.
강준호는 존재와 제도가 만든 풍경을 읽는 건축가다. UCLA에서 건축과 미술사를 복수전공한 뒤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GSD)에서 건축학 석사를 마쳤다. 이후 게럿 도허티(Gareth Doherty) 교수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Critical Landscapes Design Lab)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해안 지역의 기후 변화 인식을 조사했다. 현재 건축가와 정원사로 일하며 조경과 건축을 함께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junho_s_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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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그룹한어소시에이트
그룹한의 선한 설계
30년,
한국 조경의 역사와 함께
1994년 창립한 그룹한어소시에이트(이하 그룹한)는 2024년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하는 조경설계사무소다. 현재 계열사 7개에 150여 명의 전문 인력이 근무하고 있다. 대형 공원과 주거 공간 설계에 강점을 두고 도시설계부터 정원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조직화된 시스템과 노하우를 통해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창의적 비전으로 미래에 도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 세계 20여 국가에서 매년 100개가 넘는 국내외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세계조경가협회(이하 IFLA) 대상 3회 수상, 대한민국 조경대상 대통령상 등 200개가 넘는 상을 수상했다.
자연과의 동거를 꿈꾸며
그룹한은 조경설계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이원화를 극복하고 일상에서 자연과 문화의 접점을 찾아 역동적이고 생동하는 자연성을 디자인하고 있다. 2016년에 준공된 배곧생명공원은 인간에 의한 개발로 훼손된 해안 매립지를 다시 자연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생명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대상지의 핵심인 중앙공원은 서해에서 급격하게 나타나는 조수 간만 차를 이용해 바닷물을 공원 내로 끌어들이고 자연 에너지만으로 담수와 기수, 해수가 만나는 복합적 생태계를 구성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경관을 연출하고 다양한 연안 생물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배곧한울공원은 사라진 해안선을 되살리고 바다의 기억을 회복하고자 갯벌, 바람 등 여덟 가지 바다의 기억을 테마로 설정하고, 매립에 의해 직선화된 6km의 호안을 굴곡진 12km의 역동적 호안으로 새롭게 바꾸었다. 미완의 작품이지만 송도 G5 블록 공원 현상설계에서는 서해안의 대표적 원경관인 갯골과 해식 절벽을 디자인 모티브로 지형을 만드는 바람의 흐름을 따라 바닷물을 대지 내로 끌어들여 새로운 물길과 대지의 모양새를 만들어 냈다. 2013년 개관한 국립생태원은 습지 생태계의 특징을 관찰할 수 있는 금구리구역, 한국의 기후대별 삼림 식생을 재현한 하다람구역 등으로 구성했다. 기존 대상지의 식생과 수문을 면밀히 분석하여 훼손을 최소화하고 자연적인 수순환 체계 확립과 종 다양성 증진을 위한 최적의 서식지 조성으로 박제된 자연이 아닌 살아있는 생태계를 구현했다. 천안삼거리공원은 능수버들의 유래와 흥타령을 간직해온 대상지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 흥이 넘치는 삼남길을 재현하고 광활한 습지와 능수버들 군락이 춤추는 자연마당을 조성해 문화와 자연이 어우러진 역동적인 작용들을 끌어내고자 했다. 이러한 디자인은 겉모습의 자연에 대한 동경을 넘어 변화하고 역동적인 자연, 문화적인 자연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다.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
예술적 또는 과학적 설계 방법론을 지향하는 상반된 디자인 경향을 융합해 나가면서 조경 디자인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나가고 있다. 자연의 생태계와 인간의 예술적 감성을 통합적 안목에서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자연의 생태적 과정에 디자인의 상상력과 의미를 결합하는 조경설계를 궁극적으로 추구한다.
우리의 작품 중 예술 지향적인 작품으로 일산자이에 설치한 조형 퍼걸러는 꽃잎을 확대하고 스케일을 과장해 만든 크고 작은 구멍들이 그늘을 제공한다. 퍼걸러 바닥에는 햇볕의 방향에 따라 변화하는 그림자가 장관을 이룬다. 근린공원의 수경 시설은 친수 공간과 환경 조각품을 결합한 스토리텔링으로 조경과 미술이 통합된 예술 장식품을 구현했다. 양평 현대그룹 연수원의 평면은 기하학적 추상화를 연상하게 하고, 수원 SK 스카이뷰에 설치한 소나무 환경 조각품은 진입로 좌우로 식재된 소나무 군락과 통합된 조형미를 구현한다. 개포 래미안 포레스트, 수원센트럴아이파크자이에 설치한 조형 수경 시설과 제주 신화역사공원 조경설계공모 당선작, 화성 봉담 프라이드시티의 수공간은 땅의 융기와 용암의 팽창, 등고선 지형의 복원 등을 표현한 대지 예술에서 영감을 받았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명지지구 조경설계공모 당선작은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한 생태학적 환경 이론과 대지 예술의 구현이라는 예술 지향적 조경설계를 결합해 완성했다. 쓰레기 매립지였던 대상지에 철새의 먹이인 새섬매자기 군락을 복원하고, 강 하구의 습지, 사구, 물골의 수문학적, 지형적 특성을 디자인에 반영해 자연과 인간이 함께 상생하고 치유되는 공원을 목표로 삼았다. 미사강변센트럴자이의 외부 공간 설계는 ‘디자인 위드 워터Design with Water’란 메인 콘셉트를 중심으로 물 관리와 함께 수공간을 디자인하는 과정을 통해 주민들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그리고 생명이 살아있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동탄목동공원(재난안전공원)은 전 지구적으로 심각한 재난과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중심으로 설계했다. 권역 안에서 수용할 수 있는 안전 및 대피 시설의 규모를 과학적으로 산정하고 도시 재해 시에 임시 거처로 활용할 수 있는 피난 광장과 관리 시설을 평상시 놀이 체험 및 교육 시설과 연계하며 조형미를 드러낼 수 있게 디자인했다. 렛츠런파크 영천은 경마공원에 머무르지 않고 부지 전체를 대지 예술로 승화시켜 정원 중심의 테마파크를 제공하는 지역문화형 공원으로 계획했다. 영천시의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 프로그램을 통해 관광객과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공원을 지향한다.
행정중심복합도시 5-1생활권 스마트 조경 설계공모 당선작은 지속가능한 스마트 공원을 활성화하기 위해 자연·인문 자원이 가진 지역성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스마트 과학 기술을 접목해 도시와 시민이 협력해 도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동적 시스템을 구축한다. 성남 복정 1, 2 공공주택지구 조경설계공모 당선작은 기후위기 영향을 줄이기 위한 탄소중립 공원으로 계획했다.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따라 녹색 공간의 지표를 제안하고, 자연 기반 탄소 흡수 및 저장량을 현재까지의 연구를 기반으로 정량화해 대상지 설계안에 탄소중립을 위한 생활의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도시를 건축하는 조경
조경의 전통적인 반도시적 가치 지향에서 벗어나 도시 속에서도 그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다. 조경과 건축과 도시가 혼합된 하이브리드 영역에서 조경가로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며 영역 간의 네트워크를 조절하는 지휘자로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관점의 프로젝트를 다수 수행했다.
가덕도 개발개념 현상설계안은 도로와 방파제 같은 회색 인프라가 아닌, 실개천과 조류의 흐름에 따라 경관과 그린 인프라가 우선적으로 고려된 경관 중심적 계획의 프로세스를 제시한다. 3기 신도시 공원의 첫 주자인 인천 계양 테크노밸리 공공주택지구 조경설계공모 당선작은 기존 대형 중앙공원 중심의 1, 2기 신도시 공원 계획의 패러다임을 탈피한 휴먼 스케일의 선형공원을 도입했다. 입주민의 일상 깊숙한 곳까지 공원ㆍ녹지가 자리 잡는 것을 지향하고 지역 경관을 담은 디자인 모티브, 입체적 선형공원, 도시와 상호 작용하는 일상의 공원을 추구한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추구했지만 미완의 작품으로 남은 대형 프로젝트로는 용산공원, 서남권 국회대로 상부공원, 서울국제교류복합지구 등이 있다.
일산 식사지구 도시 개발 프로젝트는 초기 단계부터 조경가가 참여해 전체 마스터플랜 계획 과정에서 회색 인프라가 아닌 녹지 원형으로부터 그린 DNA를 추출하고자 했다. 새로운 도시 녹지 체계를 재생하고 그린 인프라스트럭처를 구축하는 전략으로 생태적 관점으로 도시 골격을 구성한 프로젝트의 좋은 예시다. 이와 같이 대규모 주거 단지 개발에서 그룹한이 주도적 역할을 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실천한 프로젝트들이 있다.
군부대 이전 부지에 대규모 중앙공원으로 녹색 축을 만들고 ‘조경이 만드는 도시’를 추구한 창원 중동유니시티와 산수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봉우리와 계곡을 주제로 친환경 단지를 구현한 화성 봉담 프라이드시티, 지형의 선형이 살아있는 대지 예술로 단지를 가로지르는 중앙 공간과 대자연을 품은 생활 공간을 계획한 디에이치 아너힐즈, 한강으로의 경관 축을 따라 대규모 오픈스페이스가 설계된 잠실5단지, 메가 네이처 파크(Mega Nature Park)를 콘셉트로 올림픽공원의 자연을 담은 올림픽파크 포레온 등이 있다.
그룹한은 대지 예술로부터 영감을 얻어 독립적인 건축을 미적, 철학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나의 흐름을 일관성 있게 완성하고자 하는 건축가들과 협업해 왔다. 세종시 정부 청사, LH 사옥, 부산현대미술관,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 울산전시컨벤션센터(UECO), 판교 알파돔, 동탄 롯데백화점 복합몰, 마곡 원웨스트 서울, 송도 롯데몰, 제주중문리조트 등 조경, 건축, 도시가 혼합된 영역에서 조경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전통의 계승과 한국적 조경을 위하여
다양한 설계 방법을 통해 전통 조경을 계승하고 한국적 조경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시도를 이어왔다. 꽃담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수경 시설인 벽천에 도입한 수지 LG빌리지와 전통을 재현한 부여 백제문화단지는 초창기 작품에서 시도된 형태 모방에 그치지 않고 전통 마을을 이루는 조성 방식인 풍수사상 등을 재해석해 실개천과 비보숲 등 산수 조성 기법을 현대적인 공간 조성 방식으로 구현했다. 양주자이의 실개천은 풍수사상을 접목해 천보산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실개천을 단지 내로 끌어들여 녹지와 수계가 유지되도록 생태와 문화의 그린 네트워크를 구현했다. 강남 도심 속 대규모 주거 단지인 반포자이는 한강으로부터 단지를 관통하는 두 갈래의 실개천을 도입해 다양한 휴게 공간과 오픈스페이스, 놀이 공간과 운동 시설 등을 배치하고 자연스럽게 물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설계했다. 서울대학교 행정관 광장은 차경과 비움의 전통적 조영 원리를 계승한 작품으로 전통 한옥 마당이 가진 비움의 미학에서 영감을 얻어 채우는 대신 비움을 통해 실용의 미를 실천했다. 청계중앙공원은 숲(山經)과 개울(水經), 그리고 길(修己)이 만드는 한국 전통 마을의 구성 원리를 차용하고 자연과 상생하는 음양오행 사상을 도입한 전통 조경의 재해석을 통해 한국적 도시 공원의 모델을 제시했다.
세계로 향한 발걸음
그룹한은 2007년부터 매년 IFLA 학생설계공모전의 공식 후원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9년에는 미국 뉴욕 맨해튼 지사를 설립해 세계화의 초석을 다졌다. 일산자이 제로가든(2011), 배곧생명공원(2014) 등 으로 IFLA 작품 대상을 받는 등 국제 무대에서 한국 조경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생명의 강(River of Life)(2011), 부르나이 케다야강 워터프런트(Kedaya Eco-corridor Waterfront)(2014), 아제르바이젠 바쿠 올림픽 경기장(Baku Olympic Stadium)(2014), 이란 아틀라스 플라자(Atlass Pars)(2016), 필리핀 클락 더 샵 힐즈 리조트(The Sarp Hills Resort)(2016),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토이테파 신도시(Toytepa Newtown)(2017), 미얀마양곤 한타와디국제공항(Hanthawaddy International Airport)(2019)등 전 세계 20여 개 국가에서 다양한 국제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오피스
구성과 문화
그룹한은 휴게 및 놀이 시설 설계·시공, LID 등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친환경 기술을 연구, 개발하는 자매 회사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며 성장 중이다. 가이아글로벌은 ‘아이들의 꿈이 현실이 됩니다’라는 비전을 토대로 2002년에 설립한 친환경 놀이 시설물 브랜드다. 화학적 방부 처리가 필요 없는 유럽산 1등급 아까시 원목과 무독성 천연 안료를 사용해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생태 놀이터를 만든다. 한국그린인프라연구소는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도시, 자연과 미래 세대를 위한 그린인프라 기술과 제품의 개발 및 보급을 목표로 2011년 설립됐다.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도시 환경을 만들기 위한 연구 개발에 앞장서고 있다. 토인 디자인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도시에서 예술성과 기능성을 겸비한 새로운 조경 시설물 개발을 위해 2014년에 설립됐다. 도심 속의 녹색 안식처를 지향하며 자연을 담고, 자연을 닮은 자연 감성의 미래형 야외 조경 시설물 연구 및 개발을 하고 있다. 또한 조경계의 유일한 전문지인 월간 『환경과조경』과 「한국조경신문」을 발간하며 ‘조경문화발전소’로서 조경계의 역사를 꾸준히 아카이브하고 조경 분야의 소통과 발전을 지원하고 있다.
회사 행사
매년 임직원들과 함께 다양한 사내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매년 봄마다 사옥 옥상에서 진행하는 스프링파밍데이는 채소와 과일들을 함께 심고 가꾸는 이벤트로 구성원들에게 사무실에서 벗어나 자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가평의 그룹한 연수원 포레하우스를 통해 계열사 워크숍과 직원 가족들을 위한 무료 힐링 여행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임원 해외 워크숍과 전 직원 국내 및 해외 답사, 우수 사원 해외 답사 프로그램 등도 진행하고, 환경조경나눔연구원과 함께 가평 꽃동네, 한사랑마을 등에서 나눔과 봉사활동도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소장들의
소회
그룹한의 의미
그룹한 30주년을 기념해서 지난날의 사진과 추억들을 열어보았다. 막상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내가 한 프로젝트, 나와 함께한 사람들 모두에게 그룹한이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해졌다. 신입 공채 입사 동기 13명 중 이제 3명이 남았다. 신입부터 대리, 과장, 차장까지 직급이 올라갈 때마다 세우게 되는 목표와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 있었지만 지금 얼만큼 이루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룹한은 내게 사회생활의 시작이었고, 힘든 직장 생활의 과정이었으며, 함께한 사람들과의 추억이었다고 정의하고 싶다. (전략 1본부, 김원대 소장)
내일의 꿈
“꿈을 먹고 사는 조경가 오태호입니다.” 2021년 겨울이 시작될 즈음, 그룹한 빌딩 6층 면접장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어린 시절, 독일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궁전의 정원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깊은 감동은 나를 조경의 길로 이끌었다. 그때 눈에 담았던 그림 같은 풍경을 내 손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은 지금도 변함없다. 조경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언젠가 국내 최고의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싶다’라는 다소 막연한 꿈을 꾸었고 내게 그룹한은 동경이자 꿈이었다. 그룹한에게 소망하는 바가 있다면, 어제의 내가 그랬듯 내일의 누군가에게 동경이자 꿈이 되어주길 바란다. (전략 2본부 , 오태호 소장)
다음 30년을 그리며
2024년은 그룹한이 30주년을 맞이한 해고, 그룹한과 함께한 지도 만 25년이 지났다. 누군가는 내게 한 회사에 어찌 그렇게 오래 다닐 수 있는지 묻는다. 돌이켜보면 정말 이 일이 좋아서 즐기며 했지만, 누구나 그러하듯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히고 힘든 순간도 많았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를 굳이 꼽자면 조경에 대한 각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대표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나와 함께 걸어가며 서로의 힘듦을 공감할 수 있는 동료들이 아니었을까. 그룹한은 30주년을 넘어, 앞으로의 30년을 더해도 거뜬하게 조경계를 이끌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설계 1본부, 김애경 소장)
한계를 넘는 새로운 도전
“그룹한에서는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 도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사 면접에서 전임 소장으로부터 들은 말의 의미를 지금 팀을 이끌며 깊이 이해하게 됐다. 주로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만큼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최근 진행 중인 군포대야미 공원 프로젝트에서는 기후 최적화 분석을 적용해 여름철에도 쾌적한 공원을 목표로 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그늘을 만들고, 바람이 흐르는 공간을 구상해 여름에도 시원한 공원이 되도록 계획하고 있다. 어떻게 더 새롭고 창의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프로젝트를 하며 늘 하는 고민이지만, 매 프로젝트에서 한계를 넘어서는 해결책을 고민해온 것, 그것이 그룹한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설계 2본부, 강이주 소장)
지난 20년을 돌아보며
20년 전 내 기억 속의 그룹한은 이전 회사에서 저녁 시간 잠시 빠져나와 경력직 면접을 보러온 것이 처음이었다. 유난히도 반짝이던 엘리베이터, 숨이 약간 찰 정도로 언덕을 올라야 하는 방배동 제일 높은 곳의 빌딩. 젊은 조경 그룹. 그때만 해도 20년을 근무할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힘들었지만 우리는 늘 작은 성공을 할 수 있어 자신감이 넘쳤고 최고의 회사 일원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동료 간의 우정과 경쟁, 선후배 간의 끈끈한 연대와 더불어 그때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한결 수월하게 내가 원하는 설계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20년을 그룹한과 함께했으며 우리는 같이 성장해왔다. 앞으로 더욱 성장할 그룹한과 나의 20년을 기대해본다. (설계 3본부, 주세훈 소장)
다채로운 가능성과 기회
그룹한은 나에게 많은 기회와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평생 가보지 못할 남극부터 앞으로도 살아보지 못할 아파트, 살면서 가서는 안 되는 공공 청사들까지 프로젝트로 다가오는 20년간의 만남이 있었다. 정기 워크숍은 평소 숨쉬기 운동밖에 모르던 나에게 겨울에는 보드를, 여름에는 래프팅과 서바이벌 게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다. 아마 100명의 사람과 뭉친 해외 패키지를 떠나는 경험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루를 그럭저럭 살아가던 나에게 다채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준 그룹한에 감사한다. (설계 4본부, 정미혜 소장)
유유자적의 삶을 꿈꾸며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조경가는 실재할 수 있는가. 조경설계를 하던 동료들과 이 주제로 늦은 술자리에서 자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린 시절에는 일이 바빠져 예약해 둔 휴가를 취소할 때 상사들을 탓하곤 했는데, 입사 6년차이자 소장인 지금은 모든 것이 내 탓이다. 지금 이 글은 연말까지 꼼짝없이 특근을 하며 고생해야 하는 우리 팀원들을 위한 고백문이다. 글을 쓰는 지금은 만추의 절경이 펼쳐진 10월 말, 마음은 저기 어딘가 시원한 바람 부는 벤치에 앉아 카페라테를 마시고 있지만 몸은 컴퓨터 앞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들이여, 빼앗긴 들에도 기필코 봄은 오고 우리는 곧 도서에 도장 쾅쾅 찍어서 납품을 하고야 말지어니. 함께 지금 이 역경을 묵묵히 함께 버텨내주어 몹시 감사하다. 오늘 유유자적한 삶을 살지는 못해도 내일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는 조경가 배상. (설계 5본부, 송시내 소장)
30년의 타임라인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룹한은 10주년을 맞이했다. 내가 기억하는 10주년의 그룹한은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인재와 희망이 넘치던 곳이었다. 입사 10년차, 20주년을 맞이한 그룹한은 성장의 정점을 달렸다. 부산과 뉴욕 지소가 설립됐고, 계열사가 늘어났고 해외 설계사들과의 무수한 교류와 조경설계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실험이 시도됐다. 30주년을 맞이한 그룹한은 조경 분야의 많은 사람들과 ‘관계’가 연결된 곳이 됐다. 수많은 사람이 그룹한을 통해 인연을 맺었으며 업계 내 외부의 다양한 공간으로 진출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에게 그룹한은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30년의 시간은 그룹한을 단순한 직장을 넘어 인연을 맺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 한구석에 보관해야 할 중요한 의미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그룹한과 인연을 맺고 있는 이들이 가진 기억이 소멸하지 않도록 지속되길 바란다. (그룹한 김기천 본부장)
주니어
디자이너와의 대화(각주 1)
창립 당시와 현재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당시 조경 분야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조경설계사무소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건축이나 토목 분야와 비교했을 때 역할과 위상이 너무 낮아 비전을 갖기 힘들었다. 그때부터 제대로 된 조경설계사무소를 만들어서 우리 사회에 조경에 대한 인식을 뿌리내리고, 후배들에게 조경설계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심어주고 싶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조경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많이 나아졌다. 특히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하던 당시와 비교할 때 워라밸 관점에서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다.
사라졌거나 현재도 남아 있는 비공식적 전통 혹은 재밌는 관습이 있나
다양한 사내 행사 중에서도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 진행하는 해피아워가 있다. 모든 부서별로 지난 한 달간의 프로젝트를 모든 사원들이 돌아가며 발표를 하고 함께 소통하는 시간으로 매달 새로운 활력을 불러 일으킨다. 또 과거에는 직원들의 동기 부여를 위한 독특한 인사 시스템으로 일명 로터리(lottery) 제도를 시행했다. 능력 있는 직원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누구든 PM에 지원할 수 있게 하고 직원들을 상대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자율적으로 팀을 만들어 가는 전통이다.
회사에서 가장 특별했던 순간
직원들과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지만 함께 일했던 순간보다 사실 여행가고 놀던 기억이 더 그립다. 사회에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직원들과 주말에 시간을 쪼개 봉사활동을 다녔던 기억들이 특별하다. 환경조경나눔연구원과 함께 조성한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정원은 역사의 아픈 상처로 고통 받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조경이 선물한 따뜻한 마음이었다. 손수 삽을 들고 기념식수를 했던 생전의 김복동 할머니께서 기뻐하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평 꽃동네에서 예쁘게 조성된 정원을 보고 하루 동안의 기적이라며 좋아하던 수녀님의 환한 미소도 여태껏 기억에 남아있다. 또 2007년부터 IFLA 학생설계공모전의 공식 후원사로 참여해 지금까지 전 세계의 조경 학생들이 참가하는 국제 행사에 우리 회사가 기여하고 있다는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룹한이 지향하는 지속가능한 조경 디자인을 위한 중요한 원칙이 있을 것 같다
과거에는 조경이 그냥 건축이나 도시 분야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조경이 만드는 도시’가 세계적인 흐름이 되었다. 기존 대상지가 가진 생태적, 역사적 문화적 자원을 잘 보전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시가 만들어져야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도시가 된다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화가 공존하며 서로 상생의 길로 나갈 수 있는 대안을 찾는 것이 우리의 디자인 원칙이다.
3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지나온 여정은 파란만장했고 앞으로 가야할 길도 결코 만만치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어떠한 어려움도 함께 극복해왔던 것처럼 나와 그룹한 가족 모두가 멋지게 해내리라 믿는다. 우리에겐 조경을 위해 청춘을 불사르는 용광로와도 같은 열정이 있었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꺼지지 않는 혁신의 에너지가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당당하게 정도경영의 바른길을 걸어 갈 용기가 있다.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보다 지난 30년간 함께 동고동락했던 가족과도 같은 우리 동료들이다.
가장 기억에 남거나 아쉬웠던 프로젝트
수많은 공모전에서 당선됐지만 오히려 낙선했던 작품들에 아쉬움이 크다. 광교호수공원 국제설계공모에서 아쉽게도 우승을 놓치고 실망에 잠겼을 때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제임스 코너가 “이제 지는 법을 배워야 할 때이고, 전쟁에서 많이 져본 자만이 이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거야”라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당시 이미 세계적인 조경설계의 대가인 그도 수많은 공모전에서 낙선한 작품이 더 많았다고 했다. 스타 조경가로부터 지는 법을 배우고 다시 새로운 용기가 생겼고 더 많은 공모전에 도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30주년을 맞이한 감회가 어떤지 궁금하다
10주년을 맞이할 때는 회사가 급속한 성장기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파묻혀 있었다. 사원이 50명이 넘은 뒤 조직 관리의 어려움을 느끼고 체계적인 경영 공부를 위해 미국 와튼스쿨 최고경영자 과정을 이수했다. 디자이너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을 경영자라는 마인드로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20주년 즈음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국내 시장에서 벗어나 세계를 향한 도전을 시작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GSD 객원교수로 근무하면서 뉴욕 맨해튼에 그룹한 미국 지사를 세웠고, 조지 하그리브스, 제임스 코너, 사사키 등 세계적인 조경가들과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국제적인 조경설계사무소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30주년이란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 이제 다시 미래를 준비할 때가 온 것 같다. 앞으로도 그룹한은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 생명의 원천인 자연을 경외하고,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디자인,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미적 가치를 끊임없이 탐구해 나갈 것이다. 더불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며 건강한 사회와 이웃의 행복한 삶의 기반을 만들기 위한 노력에 더욱 힘쓸 것이다.
조경에 한이 맺혀 그룹'한'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얼핏 들었다. 지금 어느 정도는 그때의 한이 풀렸는지 궁금하다
1994년 11명의 젊은 디자이너를 모아 작은 조경설계사무소를 창업했다. 당시에 조경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해 우리가 앞장서서 조경의 한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을 사명에 새기고 크게 된다는 의미와 한국을 대표한다는 의미의 한자 클 한(韓)으로 의미를 더했다. 또 1인이 아닌 팀으로 하나가 된다는 의미와 장차 큰 기업으로의 성장을 염원하는 뜻으로 그룹을 사명에 넣어 그룹한을 완성했다. 창업한 지 30년이란 세월이 흘러 강산이 세 번 바뀌었다. 한국 조경설계 분야의 성장과 역사를 함께 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500명에 가까운 인재가 그룹한의 문지방을 넘나 들었다. 한때 100명이 넘는 인원으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고 IMF와 리먼 사태와 같은 국내외의 숱한 위기의 파도를 넘어오면서 그룹한은 조경설계를 바탕으로 친환경 놀이터, 조경 시설, 자재 개발, 조경 미디어 등 글로벌 조경 그룹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각주 정리
1. 그룹한 30주년을 맞이하며 입사 1~3년차 주니어 디자이너들(민연주, 강다운, 김민지, 임민부, 이민정, 이다솔, 김혜지, 김채송)로부터 그룹한의 과거와 현재, 비전 등에 대한 궁금한 점을 질문 받았고 이에 대한 답변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했다.
그룹한어소시에이트는 인간과 자연의 상생, 미적 가치와 효용성의 극대화,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환경을 위해 창의적이고 선한 디자인을 실천하고 있다.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 생명의 원천인 자연을 경외하고, 생물종 다양성과 전 지구적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디자인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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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파도 파도 끝이 없는 남산-공원
서울의 길에서는 (남)산이 보인다(각주 1)
조경과 도시를 키워드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관한 연구를 하다 보면 몇 번이고 마주치게 되는 남산 혹은 남산공원. 서울시 공원 홈페이지는 남산을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의 상징”이라고 소개한다. 실제로 서울 시민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산과 얽힌 기억 한두 가지는 있기 마련이다. 물론 남산-공원에 쌓인 복잡한 역사적 켜와 정치·사회적 맥락으로 인해 화자의 연령대, 시기, 취향에 따라 남산의 경험은 크게 갈리게 된다. 남산을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선조의 발자취로 볼 것인가? 한양도성이라는 걸출한 문화유산이 그 형태를 뽐내는 유산의 위치로 볼 것인가? 대도시 서울 속 자연의 재현으로 볼 수도 있는가? 김종성 건축가가 설계한 힐튼호텔부터 케이블카와 말 많고 탈도 많은 남산돈까스까지, 20세기 중후반 서울의 대중문화 속에 새겨진 장소 기억으로 볼 것인가? 그도 아니면 바라보는 곳, 즉 대상으로서 남산에 무게를 더 둘 것인가?
에피소드 1. 만화의 집
일상에서 남산을 어떤 공간으로 인지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를 훌쩍 졸업하고 난 뒤 신도시로 이사 갔음에도 ‘일부러’ 남산을 오고 갔기 때문. 2000년대 초반의 여름 주말, 연신 ‘더워’와 ‘왜 이렇게 먼 거야’를 중얼거리며 경사진 좁은 보행로를 걸어 올랐다. 언덕이라면 질색팔색 하는 중학생이 자발적으로 남산을 오른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기 마련. 현재는 문을 닫은 ‘만화의 집’이 그 이유였다.
서울에서 만화 좀 봤다는 20세기 소년, 소녀라면 열에 일고여덟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를 들어보지 않았을까. 최근 몇 년간 재건축으로 인해 회현역 근처로 자리를 옮겨 운영했지만, 원래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현재 남산예장공원이라고 알려진 곳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담론화가 부족할 뿐 이 부지의 역사도 한 굴곡한다. 1950년대 KBS 사옥으로 완공됐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는 국토통일원 청사, 1980년대에는 안기부, 1999년(Y2K!)부터 서울경제진흥원이 운영하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자리로 유지되고 있다. 그 이전에는 통감부 자리였고, 일제강점기 중반부터 한동안은 과학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남산의 유구한 역사와 비슷한 결을 지닌 부지다.
그렇다면 왜 만화의 집에 가야 했는가? 답은 간단하다. 온종일 무료로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손꼽히는 만화책 컬렉션을 볼 수 있는 시영 만화방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네 만화방보다 깨끗하고 만화책 관리도 잘 되어 있어서 이쪽 계열 학생들이 시내 곳곳에서 모여드는 핫플이기도 했다. 다만 다들 만화책 읽기 바빠서 사랑방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환경과조경440호(2024년 12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2024년 10월에 출간된 건축가이자 조경가이며 도시경관기록자로도 잘 알려진 김인수의 책에서 따온 소제목이다. 김인수, 『서울의 골목길에서는 산이 보인다: 오래된 골목길에서 바라본 서울, 그 30여 년의 기록』, 목수책방, 2024.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