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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던스케이프] 인물을 기념하는 법
    기념과 숭배의 의례는 인류의 오랜 전통으로, 동상은 그 수단이 되었다. 높은 대좌 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 동상은 신전이나 교회에 설치되어 복종 혹은 권위를 상징했다. 이때 동상은 신성한 종교와 같아서 낙서 등의 불경스러운 행동은 용납하지 않았다. 종교와 동일시될 만큼 신성하게 여겨진 동상은 시민 사회의 태동과 함께 국가 권력의 과시용 혹은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상징용으로 전환된다. 대표적 예가 프랑스의 마리안느(Marianne) 동상이다. 마리안느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혁명과 공화정의 가치를 담았던 가상의 여성으로, 도시와 농촌 코뮌 전역에 동상이 확산된 바 있다. 지금은 마리안느 흉상을 설치하지 않은 관공서가 없을 정도니 프랑스의 대표 동상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신생 국가의 경우, 체제의 정당성을 위해 나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을 동상으로 제작해 이용하기도 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회쇠크 테레(Hősök tere, 영웅 광장)는 헝가리 건국 1,000년의 역사와 위대한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1896년에 조성된 곳이다. 광장 중앙의 대천사 가브리엘 동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회랑이 펼쳐지는데, 이곳에 헝가리 건국에 큰 역할을 한 영웅들을 표현한 청동상을 돌기둥과 나란히 세웠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특별한 장소를 동상을 이용해 기념하기도 했다. 1862년 조성된 오스트리아 빈 시립공원(Stadtpark)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 슈베르트, 모차르트, 안톤 브루크너 등 빈의 저명한 예술가 동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근대기에 들어서면서 동상은 때로는 사회의 부조리에 맞선 급진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때로는 국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영웅을 기념하고, 또 한편으로는 문화예술 분야의 천재를 기념하며, 공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공간을 압도하는 강렬한 장치로 다채롭게 활용됐다. 한국에서는 동상이 1960~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건립됐다. 그 중심에는 1966년 8월 11일에 발족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愛國先烈彫像建立委員會)가 있다. 1964년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 37인 선현 석고상의 착색, 결락 등의 문제가 불거진 것이 위원회 발족의 배경이었다. *환경과조경425호(2023년 9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류기현, “‘애국선열’의 거리 만들기”, 『광화문 앞길 이야기』, 서울역사편찬원, 2021, pp.182~196. 서울특별시 푸른도시정책과, 『공원현황』, 서울시, 2010. 전우용, “서울의 기념인물과 장소의 역사성”, 『서울학연구』 25, 2005, pp.89~122. 정호기, “박정희시대의 ‘동상건립운동’과 애국주의”, 『정신문화연구』 30(1), 2007, pp.335~363. 조은정, “한국 동상조각의 근대이미지”, 『한국근대미술사학』 9, 2001, pp.285~287. 에릭 홉스본 외, 박지향·장문석 역, 『만들어진 전통』, 휴머니스트, 2004. 그림 출처 그림 1~2. 위키피디아 그림 3. 국가기록원 그림 4. 대한뉴스 제468호 장면 캡처, KTV 아카이브
  • [에디토리얼] 조경학 교육인증제, 첫걸음
    이번 달 기획 지면의 출연진은 『환경과조경』 역사상 가장 젊다. 특집 ‘캠퍼스 톡담, 배움을 설계하다’에 여섯 개 대학 조경학과 학부생 여섯 명을 초대했다. 경희대 강다연, 계명대 김은주, 서울대 권효진, 서울시립대 신진호, 전남대 정세영, 한경국립대 안태경은 편집부가 던진 여섯 가지 공통 질문에 이메일로 답을 보내왔다. 공들여 쓴 각자의 답변을 서로 돌려본 뒤 이들은 온라인상에서 활기찬 토론을 벌이며 생각을 나눴다. 강의, 설계 스튜디오, 커리큘럼, 캠퍼스 일상, 외부 활동, 사회 이슈 등을 둘러싼 이들의 생각이 모든 조경학과 학생들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조경 교육의 현실과 문제를 관찰하고 해결 과제의 단서를 파악하게 해주는 생생한 자료로서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 학생의 이야기는 얼핏 읽으면 평범해 보이지만, 그 행간에는 기성 조경(학)계의 안일한 현실 인식과 틀에 박힌 교육 방식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게 담겨 있다. 특히 서로 다른 성장 배경과 관심사를 가진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짚고 있는 문제가 설계·시공 실무 현장과 유리된 교육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특집이 조경 교육의 최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는 전국의 교수자들에게 많이 읽히기를 기대한다. 한국 조경의 역사와 조경 교육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이 두 갈래의 50년은 과연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선순환을 이뤄왔는가. 별도의 지면에서 면밀하게 검토하고 치열하게 토론해야 할 주제일 테지만, 그간의 조경 교육이 전문직능(profession)이자 학문분과(discipline)인 조경(학) ‘전문 교육’ 실천의 목표, 체계, 내용 정립에 소홀했다는 점만큼은 우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학교는 다양성과 다각화를 추구하면서, 또 일부 학교는 학부 중심 교육보다 대학원 중심 연구에 비중을 두면서 조경학과의 중심에서 조경(학) 자체가 흐릿해진 상황이라는 진단도 가능할 것이다. 교수 연구성과의 양은 늘었지만 그러한 성과가 막상 조경 실무의 질적 발전이나 졸업생의 조경 관련 취업으로 연결되지 않는 역설. 폭넓은 스펙트럼인가, 조경(학) 없는 조경 교육인가. 한국 조경 교육 50년 역사가 배출한 조경가가 과연 몇 명인지 꼽아본다면, 기성의 조경 교육을 교정하고 다음 50년의 새 교육 기반을 구축할 계기가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경의 전문성 자체를 교육의 중심에 두고 전문 교육과 전문 학위, 면허로 이어지는 체계를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조경학회는 한국조경협회, 한국조경가협회와 힘을 합쳐 (가칭)‘조경학 교육인증제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오는 9월부터 심층 연구와 토론을 시작할 계획이다. 조경학 교육인증제의 필요성과 목적은 대학 조경 교육의 정상화와 정체성 정립, 교육-학위-면허의 연속적 체계 확립, ‘조경사’ 제도와의 연동, 국제적 기준의 조경 교육의 내용과 질 확보, 인구 감소에 따른 조경학과 폐과 위기 대응 등 다양한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조경진흥법’에 기반한 ‘제2차 조경진흥계획’(2022)의 과제 중 하나로 추진되고 있는 설계 자격 제도 (가칭)‘조경사’의 필요조건은 교육인증을 받은 조경학과 졸업이다. 교육인증제와 조경사 제도가 원활하게 맞물리면 조경 교육과 실무의 유기적 관계가 비로소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조경학 교육인증제는 조경 교육과 실무의 전문성과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경학 교육인증제 추진위원회는 우선 1단계(2023~2024)로 각 학교의 교육 현황(교수, 학생, 교육과정, 성과, 취업, 시설 등)을 조사하고 국내외 사례 연구에 착수하며, 인증 기준과 절차(인증기관, 자격, 교육과정, 인증 평가 기준과 절차 등)에 관한 연구에 나선다고 한다. 2단계(2025~)로는 다양한 형식의 토론과 공론화(워크숍, 세미나, 심포지엄 등), 인증 기준과 절차 심화 연구, ‘조경사’ 자격제와 연계 추진 등을 전개한다고 한다. 본지는 오는 11월호 특집으로 조경학 교육인증제를 심도 있게 다룰 예정이다. 『환경과조경』의 베테랑 에디터인 김모아 기자가 이번 8월호부터 격월로 인터뷰 지면, ‘오늘의 대화, 어제의 재구성’을 꾸립니다. 김 기자는 “조경의 한복판에서, 혹은 조경의 언저리에서 독특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들을 찾아” “내밀한 대화까지” 나눌 것이라고 합니다. 첫 인터뷰이는 조경가이자 만화가인 김수린입니다. 새 지면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 [풍경감각] 버스 유람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지하철역이 가까웠던 이전 작업실에서는 붐비고 밀리는 버스로 발걸음이 선뜻 향하지 않았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바닥이 흥건하고 축축한 공기가 유리창을 뿌옇게 가렸다. 그래서 화창한 날씨, 한산한 시간만을 골라 버스에 올랐다. 지금 작업실은 서울답지 않은 한적한 구석. 북한산 자락이고 다다음 정류장이 종점이기에, 창밖은 푸르고 버스 안은 늘 한적하다. 버스 출입문 바로 앞자리에 앉는다. 어쩐지 동승자가 되는 기분이 들어 기사님에게 멋쩍은 인사를 건넨다.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좁은 도로에 햇살이 내리쬐고, 내놓은 플라스틱 화분에 코스모스며 해바라기 따위를 가꾸는 작은 집과 가게를 지난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와 닮은 작은 건물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빌딩이 가득한 곳에 도착한다. 이제 지하철로 갈아타야 한다는 뜻이다. 친구를 만나면 이제는 어디 돌아다니기가 힘들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서울의 가장 바깥으로 옮겨간 만큼 이동 시간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환승을 많이 해야 한다고. 내가 먼 길을 왔으니, 이제 네가 우리 동네 놀러 올 차례라고. 그렇지만 실은 나쁘지 않다. 짧은 버스 유람을 하고 오는 길이니까. 이게 외딴곳에 사는 매력 아닐까.
  • [어떤 디자인 오피스] 듀송플레이스 조경 디자인의 경계를 허물다
    우리의 디자인 서울에서 제주로 듀송플레이스는 제주도 서귀포에 위치한 조경 디자인 회사다. 조경설계뿐 아니라 시공 및 유지·관리를 한다. 시공과 유지·관리는 듀송플레이스에서 설계한 조경에 한해서 진행하고 있다. 두 소장은 각각 성균관대학교와 경희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사무소와 건축회사 내 조경설계 부문에서 일했다. 2015년 제주로 이주했고, 제주의 로컬 엔지니어링과 시공 회사에서 일하며 제주의 문화를 익힌 뒤 2017년 듀송플레이스를 개소했다. 설계사무소로 처음 시작했으나, 설계안이 시공사로 전달된 뒤 시공사 수익 등의 이유로 계획안이 변화하는 사례를 겪다 직접 시공을 하게 됐다.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영역의 일을 하는 게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자재와 인력 수급 등 막막하고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차근차근 알아가며 새로운 영역으로 입문하는 점에 매력을 많이 느꼈다. 공사 규모가 작다 보니 세세하게 신경 쓸 일도 많았으나, 그만큼 이윤이 남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설계만 하다가 시공을 하게 되니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는 현장감이 좋았고, 현장에서 생기는 돌발요소를 바로바로 수정했는데 때론 설계안보다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등 시공에서 받을 수 있는 기쁨이 많았다. 사무실 너머 현장까지 처음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우리가 디자인 회사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평소 이 점에 대해서 늘 고민하지만, 조경이라는 영역이 설계와 시공으로만 이분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본계획부터 실시설계까지 도면화 작업은 인 오피스 디자인(in office design)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현실화하는 것은 비욘드 오피스 디자인(beyond office design)이 아닐까 싶다. 송이슬 소장은 사무실 내부 업무를 책임지고, 김민호 소장은 사무실 외부 업무를 책임지고 있다. 공대의 조경학과를 졸업한 송 소장은 꼼꼼하게 정리하는 업무를 더 선호하고, 미대의 조경학과를 졸업한 김 소장은 직접 손으로 만지고 만들어 내는 것을 더 즐겨하기에 그런 것 같다. 업무의 책임을 나누었지만 사실상 두 소장 업무에는 교집합이 더 많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현장 방문을 시작으로 모든 걸 같이 하는 편이다. 현장을 처음 마주할 때의 느낌을 믿는 편이고, 현장에서 나누는 대화와 영감이 디자인에 가장 많이 반영되기에 현장에 가서 느낀 것을 토대로 채우고 비울 곳을 의논해 정한다. 채워야 할 소재도 함께 결정한다. 직접 농장에 가서 가장 어울리는 수형의 나무, 그것과 어울리는 질감의 재료를 같이 고른다. 콘셉트에 따라 배치하는 것을 정리하는 건 송 소장 역할이고, 실제로 구현하는 건 김 소장 역할이다. 디자인의 현실화 프로젝트 시작과 동시에 완성도에 대한 책임감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송 소장은 현장에서 머릿속에 그린 풍경이 하나씩 채워질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 상상한 것보다 더 멋진 나무가 심기거나 식물, 재료 등이 배치되는 것을 보면 한편으론 설계로 표현하는 것의 한계를 느낀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배치들은 몇 날 며칠 동안 고심해 탄생한 계획안 안에서 발전하고 변경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설계 단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안전주의인 송 소장과 다르게 프로젝트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김 소장이다. 김 소장은 프로젝트마다 새로운 수종과 재료, 새로운 시공 방식을 제안한다. 시공 초창기에는 이 때문에 의견이 맞지 않았지만, 새로운 시도로 새로운 창조물이 생기고 점점 발전하는 모습을 본 뒤 송 소장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김 소장을 믿고 따르는 편이다. 조경 공사가 시작되면 두 소장은 함께 현장에 머문다. 김 소장은 현장 소장 역할을 하고 송 소장은 현장 감리 역할을 하며 설계와 시공의 균형을 맞추려 한다. 토목 공사부터 마무리까지 두 소장의 손을 꼭 거쳐야 한다는 고집으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러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지 않는다. 특히 식재는 위치 선정과 심는 것을 직접 하고자 한다. 현장에서 돌발적인 사태나 환경, 기후에 따라 수종이나 위치를 변경하기도 하고 직접 흙을 만지며 상태를 살핀다. 흙이 질거나 답압이 심하거나 암반이 나타나면 흙을 치환하거나 식재 위치를 변경할 때도 많다. 공사를 마치면 조경 유지·관리 매뉴얼을 건네고 건축주, 관리 주체와 함께 현장을 둘러본다. 대개 정원을 처음 소유하는 클라이언트가 많아서 기본적인 설명을 하는 데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초기 관리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준공 뒤에도 많이 소통한다. 살아있는 생명을 관리하는 일인 만큼 조성 후 유지하는 일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나가며 보는 풍경, 자료 조사하다 보는 이미지, 농장에서 보는 나무 수형 등에서 두 소장은 서로 추구하는 이미지가 매번 다르다는 걸 느끼지만 서로 거침없이 좋다 나쁘다는 얘기를 한다. 이유가 있든 없든 의견이 다르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고, 그런 의견을 거침없이 얘기할 수 있는 서로가 있어서 지금의 듀송플레이스가 있을 수 있었다. 앞으로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더 많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의 공간 손 안의 작은 정원, 식물집 듀송플레이스 사무실 맞은편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카페 ‘식물집’이 나온다. 식물집은 우리가 만든 브랜드로 제주 내 다양한 화분과 식물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한동안 사무실 내에 식물과 화분 편집숍을 운영하다가, 더 많은 사람이 좋은 공간에서 식물을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 부부가 살던 주택을 리모델링해 카페 겸 플랜트숍 식물집을 만들었다. 처음 식물집을 열었을 때는 수제 토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다. 사무실의 조그만 공간에 수제토분을 하나둘 모아 비치했고, 업무 시간 동안 그 공간을 오픈했다. 처음 예상 고객은 동네 산책을 하다가 들어오는 동네 주민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났다. 공간이 협소한 탓에 옮겨갈 공간을 숱하게 찾았지만 마땅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느 날 문득 주택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식물집과 가장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던 곳을 옮기고 그곳을 지금의 식물집으로 만들었다. 기존보다 공간이 넓어지다 보니 카페도 함께 운영하게 됐다. 뭐 하나 대충하는 걸 싫어하는 둘이라서 커피도 함께 배우고 베이킹도 배우며 공간을 함께 만들어 갔다. 브랜딩과 공간 디자인은 건축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매뉴얼, 레시피 등은 둘이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 나갔다. 조경 작업이 외부 공간을 조성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님을 플랜트숍을 운영하며 느꼈다. 야외 정원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화분에 식물 하나하나를 심어 키우며 실내에 자신만의 정원을 소유한다. 식물집에 방문하는 이들에게 식물과 화분을 제안해 이를 심어주는 일 또한 조경의 한 영역이라는 걸 깨달았다. 대표 프로젝트 외부의 자연을 들이다 제주에 있다 보니 제주 프로젝트의 비율이 더 많지만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디자인을 한다. 제주 프로젝트는 서울 프로젝트보다 대상지 규모가 크고 주변 시야가 트인 경우가 더 많다. 대상지 내부의 콘셉트도 중요하지만, 외부의 환경도 함께 고려한다. 공간에 들어 갔을 때 받는 느낌은 외부의 환경이 크게 좌지우지한다. 내부의 콘셉트가 따로 있더라도 그 둘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것이 조경의 역할이다. 트믐 스테이와 카페 오른이 바로 그런 경우다. 트믐 스테이 트믐 스테이는 광활한 밭과 들판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다. 대지 바깥의 드넓은 들판의 자연이 건물 내부로 스며드는 콘셉트로 시작했다. 거대한 지붕의 중압감을 외부의 초록 식물들이 중화시킨다. 건물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면 시선과 같은 높이에 바람과 함께 너울거리는 그라스를 감상할 수 있다. 거대한 지붕의 하부 공간 식재를 위해 사계절별 그림자를 분석해 영구양지 구간과 영구 음지 구간을 나누고, 각 면에 서로 다른 수종을 심었다. 건물 주변에 산책로를 조성했는데, 산책로를 거닐며 식재들의 구분이 느껴지지 않게 자연스러운 식재 연출을 했다. 카페 오른 카페 오른은 바닷가 앞에 위치해서 바람과 염분을 고려해야 했다. 수종 선택 시 주변의 식생이 어떻게 자라나고 있는지를 관찰했고, 그동안 쌓아온 경험으로 수종을 선택했다. 옆 부지의 억새밭이 대상지 내부로 들어오고 정원의 그라스들이 이를 중화해 푸른 잔디가 펼쳐진 오픈스페이스를 형성한다. 지형의 단차를 둬 건물 내부에서 입체감 있는 녹지를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건물 뒤편 주차장 겸 드넓은 벌판에 일년초를 파종하는 것을 제안해 매년 다양한 꽃이 피고 지는 경관이 펼쳐진다. 이국적 경관 제주에서 조경할 때 육지와 또 다른 점이 있다면 노지 월동을 할 수 있는 식물이 조금 더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수종들을 선택해 육지의 조경과는 조금 다른 경관을 조성한다. 소규모식탁과 오라동 단독주택을 예로 들 수 있다. 제주 오라동 단독주택 오라동 단독주택은 양지바른 전면 언덕에 금잔디를 깔고 언덕 주변은 그라스와 호주아카시아를 심었다. 건물과 높은 나무로 인해 그늘이 드리워진 후정은 제주 곶자왈을 형상화한 이끼, 고사리 정원으로 조성했다. 대문을 열면 제주 자생종인 솔비나무가 크게 자리하고 있고, 우측으로 호주아카시아와 그라스가 만드는 이국적 경관이 펼쳐진다. 소규모식탁 소규모식탁은 기존 귤밭의 일부 공간에 건물을 지어 가족들이 함께 운영하는 식당이다. 귤밭 옆에 어떤 경관이 있으면 좋을까. 밝은 아이보리톤 건물에 영감을 얻어 귤밭과 대비되는 호주아카시아와 그라스를 주요 수종으로 정했고 건물 외부의 색감과 동일한 바닥 포장재를 선택했다. 가게 내부에서 전면 창을 통해 보이는 경관은 호주아카시아와 그라스로 인해 이국적으로 보이는 반면, 후면 창으로 제주의 고사리와 귤나무가 보여 건물 내에서 다양한 경관을 즐길 수 있다. 더 넓은 지역으로 제주의 프로젝트만 소개했지만 육지의 프로젝트도 매년 하고 있다. 서울 프로젝트는 제주 프로젝트와 다르게 작은 공간에 집약해야 하고 좀 더 큰 효과를 줘야 해서 손이 더 많이 간다. 서울에서 첫 프로젝트는 스테이 데이오프였다. 스테이 데이오프 스테이 데이오프는 서촌 체부동에 있는 한옥을 리모델링한 스테이로 가운데에 3평 남짓한 중정이 있다. 한옥 분위기에 맞춰 바닥 포장석은 아이보리 톤의 잔다듬 석재를 사용했고, 그와 대비되고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녹지에는 검은 돌 소재를 사용했다. 입구의 문을 열면 좌측으로 라일락 계열 낙엽수가 보이도록 심어 봄에는 향이 좋은 꽃이 피고 여름에는 초록의 녹을 제공하는 계절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한옥에세이 한옥에세이는 서촌 누하동에 있는 한옥 스테이로 기역자 건물 형태로 건물 내부 어느 곳에서나 외부 정원이 한눈에 보인다. 정원의 배경은 기단석을 기초로 한 와편담장이다. 정성스러운 담장을 가리지 않으면서 한옥 고유의 색을 담고자 했다. 수형이 아름다운 배롱나무와 단풍이 아름다운 화살나무로 너무 예스럽지 않으면서 세련된 한옥 정원의 큰 틀을 잡아 주었고, 라일락, 치자나무, 맥문동을 심어 사계절 다른 정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봄에는 대문 옆 라일락의 보라색 꽃의 진한 향, 여름에는 배롱나무의 진분홍 꽃, 가을에는 화살나무의 붉은 단풍, 겨울에는 맥문동의 푸른 잎이 사계절 동안 다양한 경관을 자아낸다. 듀송플레이스는 자연 소재를 활용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조경 디자인 설계, 시공 회사다. 현장을 마주하고 콘셉트와 기능, 미적인 것을 고려하여 오롯이 그곳만의 분위기를 설계해 시공하고 유지하는 것을 추구한다.
  • [어제의 대화, 오늘의 재구성] 그 다음의 조경 김수린
    처음 만난 때를 언제라 말해야 할지 어렵다. 조경가 김공일의 정체가 김수린인지 모른 채 오대오 가르마의 안경을 쓴 캐릭터와 먼저 인사했었다. 얼마 뒤에는 매끈하고 현대적인 광장에 동양화풍의 산과 수목을 조화시킨 광화문광장 조감도를 산업디자인과 조경을 전공한 김수린이 그렸다는 어느 인터뷰를 읽었다. 어떤 사람일까. 김수린은 궁금증이 사라질 즈음이면 공모전 당선이나 정원작가 선정 소식으로 다시 이름 세 글자를 내밀곤 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는 여러 힌트를 조각조각 이어 붙여 만든 관념적 김수린이 생겨났다.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김수린을 만난 건, KT 디지코 가든(2022년 10월호) 인터뷰 자리에서였다. 오대오 가르마를 타지도 않고, 안경을 쓰지도 않은 모습을 확인하고는 괜히 자리에 기웃거렸던 기억이 난다. 벽에 수묵화가 걸려 있지는 않을까 그런 걸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인터뷰 날에는 비가 내렸다. 신발을 적시는 빗물은 성가셨지만, 인터뷰 장소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자료실에서 듣는 빗소리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환경과조경 편집위원으로 좀 더 가까이 지내게 되었지만, 늘 묻고 싶던 질문은 이번에야 할 수 있었다. “김공일 캐릭터는 일부러 본인과 다르게 디자인한 건가요?”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종종 그런 질문을 듣는데, 김공일 캐릭터 사실 저랑 똑같아요. 평소에 후줄근하게 입고 안경 쓰고 다니거든요. 제 진짜 모습을 본 친구들은 저랑 김공일이랑 똑같다고 말해요.” 진짜 김수린이 더욱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제는 뭐했나요? 최근 산림청 주최로 진행되는 ‘정원드림프로젝트’에서 정원작가로 활동하고 있어요. 나성진 소장님(서브디비전)의 추천으로 참여하게 됐는데, 계명대 학생과 매칭되어 즐겁게 멘토링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그려온 디자인을 어떻게 발전시키면 더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는지, 정해진 예산 내에서 시공할 수 있는지 조언하고 있어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멘토 역할을 하느라 구미에 있었어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과 조경을 공부했죠. 두 전공이 설계하는 점 외에 접점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용을 염두에 둔 디자인을 한다는 점에서 닮아 보여요. 맞아요. 사실 산업디자인, 조경뿐 아니라 디자인 관련 학과는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프로세스는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단지 속한 분야에 따라 결과물이 다를 뿐이죠. 예술은 자기만족에서 그칠 수 있지만,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이 디자인을 도출했는지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 방법이 논리든, 스토리텔링이든 설득하는 법을 고민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닮았어요. 조경을 복수전공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산업디자인학과 3학년 시절에 공공디자인이라는 수업을 듣게 되면서 조경을 접했어요. 당시 산업디자인의 뿌리가 산업혁명이고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돌아가는 기업 이윤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좀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차였죠. 디자인으로 더 좋은 일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공공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조경이라는 학문을 만난 거죠. 조경을 공부하면 더 넓은 세계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복수전공을 하게 됐어요. 두 전공이 서로 영향을 주기도 했나요? 산업디자인학과와 조경학과 모두 과제가 많은 전공인데 학창시절 이야기도 궁금해요. 두 전공 모두 스튜디오 수업을 진행하고, 과제와 팀 프로젝트가 많아 쉽지 않았어요. 대충 졸업 요건만 채울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서 휴학 없이 학교를 6년이나 다녔어요. 조교님이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제적이라고 경고했고, 친구들은 네가 무슨 초등학생이냐고 놀렸죠. 이래저래 고생은 많이 했지만 돌이켜보니 조경을 복수전공하길 꽤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산업디자인학과에서는 제품을 직접 만들어요. 1, 2학년 때는 수업 시간에 목재, 철재, 석고, 플라스틱 등 다양한 재료를 직접 가공하는 방법을 배워요. 목업실에 전기톱, 드릴, 샌딩기 같은 각종 목공 장비가 구비되어 있고, 용접실에 아르곤가스와 용접봉이 있어서 그 사용 방법을 배우고 과제에 활용할 수 있었죠. 3, 4학년 때는 종로, 을지로, 동대문을 돌아다니며 더 많은 재료를 탐구했어요. 절곡, 벤딩, 빠우(버핑), 샌딩, 레이저커팅, CNC, 분체도장 등 학교에서는 할 수 없는 가공을 숙련된 기술자에게 맡기고 직접 그 과정을 관찰했어요. 5, 6학년 때는 조경학과 커리큘럼에 집중했는데, 제품에 한정되어 있던 시야를 넓히고 도시적 차원으로 땅의 맥락을 읽고 조경학적으로 설계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제 강점이자 특징이 된 거 같아요. 대상지를 넓게 보고 설계하는 건 조경가가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이지만, 실제 사용자가 공간을 거닐면서 받는 인상은 공간에 설치된 시설물, 포장 재료의 작은 디테일에서 비롯되잖아요. 이 모든 걸 섬세하게 챙겼을 때 공간에 완성도가 생기고 사용자에게 감동이 전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경험 덕분인지 광화문광장 실시설계 단계에서 시설물 도면을 맡게 되었는데, 기존에 잘 쓰이지 않은 디테일을 해외도서와 인터넷을 참고해 시설물에 풀어나갔어요.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시설물들을 볼 때마다 뿌듯하고, 이런 기회를 준 CA조경에 늘 감사해요. 졸업 후, 조경 전공을 살리는 방향으로 진로를 정한 이유가 있다면요? 졸업할 당시에는 오직 취업만이 목표였어요. 그리고 조경설계사무소에는 가고 싶지 않았어요. 야근이 많고 박봉이라 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빤히 보이는 고생길을 걷고 싶지 않았어요. 실패한 인생처럼 보일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죠. 남들이 적당히 부러워할 만한 기업에 취직해 평범하고 안정적으로 사는 게 목표였습니다. 닥치는 대로 자기소개서를 썼죠. 첫 직장은 국민체육진흥공단에 속한 소마미술관이었는데, 3개월 동안 인턴 생활을 하면서 조각공원 관리를 했어요. 올림픽공원 내 있는 조각공원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작품 소개를 하는 일종의 도슨트 역할을 했죠. 아이들이 공원에서 노는 것을 지켜보는데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예요. 순간 ‘아, 이런 행복한 공간을 만드는 직업이 조경가였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공원, 리조트, 한강변 모두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이 떠오르는 공간이잖아요. 예전에도 조경이라는 학문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조경이 만든 공간 안에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하니 벅찬 마음이 들었습니다. CA조경에서 처음 맡았던 일이 기억나나요? 2017년 겨울에 CA조경 신입사원 공개채용 공고를 봤고, 다음 해에 입사했어요. 제 자랑이라 좀 쑥스럽지만, 회사 내 평가에서 포트폴리오 1등을 차지하기도 했고 면접도 잘 봐서 두 소장님이 서로 저를 데려가려고 골프 내기까지 했다고 들었어요. 처음 맡았던 프로젝트는 ‘고덕국제화지구 2단계 설계공모’였어요. 입사하자마자 현상 팀에 투입됐고 한 달 반 동안 평일과 주말을 포함해 집에 일찍 들어가 본 적이 없었어요.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제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힘들어서 ‘내가 설계에 이만큼의 열정은 없었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래도 결국 당선이 되었고 소식을 듣자마자 고생한 팀원들과 눈물 콧물 다 흘리며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 이 맛에 설계하는구나’ 했어요. 김공일 시리즈를 통해 본 바로는, 연차에 비해 굉장히 다양한 프로젝트와 상황을 경험한 것 같아요.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없을 것처럼 최선을 다해 일했고, 정말 일밖에 모르던 성실한 일꾼이었다고 생각해요. 5년 간 진행한 프로젝트를 나열하면 A4 용지 한 장을 꽉 채울 수 있을 거예요. 어느 일 년도 쉽게 흘러간 적이 없어요.2년 차에는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국제설계공모’를 진행했고, 3년차에는 ‘종로구청 통합청사 기본 및 실시설계’ PM을 맡게 됐어요. 아직 PM을 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하고 어리다는 의견이 있어, 보란 듯이 잘 해내고 싶어서 밤낮없이 일했던 것 같아요. 4년 차에 진행한 ‘판교 제2테크노밸리 도시첨단산업단지 1구역 내 E2-1블록 실시설계’도 기억에 남아요. 2018년 회사에 입사한 뒤 기본계획에서부터 참여한 프로젝트였고, 설계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에서 조용준 소장님(CA조경)에게 처음으로 디자이너로서 가능성을 검증받았던 프로젝트였어요.5년 차에 PM을 맡아 진행한 ‘KT 디지코 가든’은 설계, 시공, 감리를 거쳐 완공까지 이르는 전 과정을 본 첫 프로젝트였어요. 여름 폭염과 장마에 대응하느라 야간에도 공사를 진행해 체력적 한계를 맛보기도 했는데, 고생 끝에 서울시 조경상 대상이라는 선물을 받아 뿌듯했습니다. 김수린 하면 새로운 광화문광장 설계공모에 제출한 조감도가 생각나요. 입체적 건물과 광장 뒤편으로 보이는 회화 느낌이 강한 남산이 인상 깊었어요. 설계 작업에서 실제와 다른 이미지를 만드는 걸 경계하기도 하잖아요. 이 조감도가 어떤 의미가 되길 바랐나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게 전에 김영민 교수님을 포함해 공모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모여 아이디어를 공유했어요. 그 회의에서 나온 키워드 가 ‘표면’이었습니다. 광화문광장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한국까지 이어 져온 천여 년의 기억이 새겨져 있는 땅이잖아요.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 는 하나의 평면으로 압축되어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깊은 표면(deep surface)’이라는 개념을 도출했어요. 그 개념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고 조감도에도 담기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 하면서도 평면적인 느낌이 나는 조감도를 만들고 싶었어요. 분위기를 잡아볼 겸 저해상도로 시험 삼아 작업을 했어요. 고풍스러운 산자락을 배경에 놓고 미래적인 느낌의 평면도를 바닥에 깔았는데 팀원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고해상도로 다시 작업을 했는데 이전 작업만큼의 느낌이 나지 않았어요. 이유를 찾으려 출력도 해보고 조감도를 멀리에 서 봤다가 가까이에서 봤다가, 수정을 거듭하다 제출 전날이 됐습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데, 진양교 대표님 (CA조경)이 지나가며 전 작업물의 산 느낌이 더 좋다고 코멘트를 해주었죠. 산이 문제였다는 걸 깨닫고, 점심시간 직전까지 완성한다면 조감도를 교체할 수 있다는 조용준 소장님의 허락을 받아 다시 작업하기 시작했어요. 점심을 삼각김밥으로 대충 때우며 작업해 겨우 마감 시간에 맞 출 수 있었어요. 빠르게 작업해서 아쉬운 점도 보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훨씬 좋아져서 여전히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D와 3D를 어우러지게 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3D 모델링 이미지를 바탕으로 시작한 작업이라, 입체적 느낌을 더 살릴 지 평면적 느낌을 더할지 고민했어요. 그림자를 넣은 버전, 그림자를 넣지 않은 버전을 모두 만들어 출력해 회의실에 붙여봤죠. 멀리서 보며 고 민하고 있는데 조용준 소장님이 그림자가 없는 버전이 더 좋다고 의견을 주었어요. 그래서 그림자 없는 버전을 선택해 발전시켰죠. 제가 참 귀가 얇은 편인 거 같아요. 이 팔랑귀 때문에 불필요한 고생을 한 적도 있 지만, 디자이너로서는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덕분에 많은 사람의 생각을 수용할 수 있고, 여러 작업물을 만들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 회화적 작업을 ‘비포 선셋’에서 다시 만났어요. “바다와 갯 벌이 만나는 자연의 지형을 구현하기 위한 콜라주 기법”을 사용했다는 설명이 기억나요. 산업디자인이라는 전공이 영향을 미친 걸까요? 도면이 자칫 그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 쓰는 방법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콜라주는 제가 굉장히 자주 사용하는 기법이에요. 그런데 이게 산업디자인의 영향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저 이미지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이고, 사고도 이미지적으로 하는 것 같아요. 그림이 평면도처럼 보이고 평면도가 그림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 둘을 꼭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조경 공간은 이용을 목적에 두기 때문에 인체 치수를 기준으로 동선 폭, 경사도, 계단 폭, 앉음벽 높이를 설정해 기본적으로 불편하지 않은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비포 선셋’에서 재료를 다루는 방식도 눈길을 끌었어요. 화 강석 판석의 각도와 마감 방식을 바꾸어 색다른 효과를 냈죠. 재료에 대한 탐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나온 작업이라 봐요. 재료의 물성은 제 디자인의 큰 원동력이에요. 새로운 재료를 발견하거나 흔하게 쓰는 재료를 다르게 가공해 색다른 느낌을 낼 때, 생각지도 못한 조합으로 재료를 이용할 때, 큰 재미를 느껴요. 산업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을 겁니다. 학부 때 재료를 직접 가공하고 물성을 실험하며 자연스럽게 재료에 대한 관심과 이해력이 높아진 것 같아요. 재료 연구를 많이 하고 가장 트렌드가 빠른 분야가 인테리어라고 생각 하거든요. 그래서 평소에 홍대나 을지로에 있는 인테리어 재료 상점을 틈틈히 방문해 탐구하며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에서 ‘비포 선셋’의 확장판, ‘LH 공공 정원’을 볼 수 있었어요. 비포 선셋과 같이 정원의 의미를 엿 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 아쉬웠는데, 따로 붙여둔 이름은 없나요? 개인적으로 ‘Sustainable Future: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LH 공공정 원‘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갯벌은 생명의 땅이지만 과거에는 개발의 땅으로 여겨졌죠. 순천만 갯벌 또한 한때 훼손될 뻔했지만 다행히 보존되어 수많은 생명체가 서식하는 자연의 보고가 됐고요. 대상지를 조사하면서 흥미로웠던 게 순천만국가정원이 갯벌과 도시 사이에 있어 개발과 보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국가정원이 ‘개발’과 ‘보존’ 사이 ‘공존’의 영역으로 의미가 있고, LH의 지향점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자연과 인간,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의 공존의 의 미를 담은 공원을 구상했습니다. 진입부는 개발로 인해 훼손된 자연으로, 뒷부분은 순천만 갯벌의 모습으로 표현했어요. 밀물과 썰물이 드나 드는 갯벌을 표현하기 위해 바닥 포장을 빗각을 치고 윤광 마감을 해 한 쪽에서 보면 물이 차 있는 듯한 모습을, 다른 쪽에서 보면 물이 빠져 있 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습니다. 미디어월은 순천만 갯벌이 위치한 남쪽을 향해 비스듬하게 배치했어요. 정원에서 미디어월을 바라보는 방향과 실제 순천만 갯벌을 바라보는 방향을 일치하게끔 해 행위의 중첩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다양한 정원 디자인을 선보이고 싶은 욕심이 날 법도 한데, 두 정원을 비슷한 방식으로 설계한 이유가 있나요? 닮은 것처 럼 보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요? LH에서 ‘비포 선셋’을 보고 연락을 주었기에 기본적인 틀을 비슷하게 가져갔어요. 하지만 대상지 조건이 달라 새로운 콘셉트가 필요했죠. 이번 기회에 기술과 조경을 접목해 새로운 유형의 정원을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감사하게도 LH가 이 도전을 받아들여줬어요. LH 공공정원에 사용한 기술은 크게 두 개예요. 첫 번째는 사물인터넷(IoT) 기술입니다. 미디어월을 보면 만조와 간조의 실시간 데이터가 반영 된 순천만 갯벌이 보여요. 갯벌이 만조일 땐 미디어월 속 바다의 물이 차 오르고 간조일 땐 물이 빠지죠. 파도 소리도 그에 따라 변합니다. 두 번째 기술은 AI를 활용한 모션 캡처 기술입니다. 미디어월 하단부에 카메 라가 있는데, 이 카메라가 프레임 안에 사람이 들어왔다고 인식하면 알고리즘에 따라 화면 속에 나무가 자라나요.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나무 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정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풍성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정원이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떤 시대건 새로운 도전이 있었고 그 시도가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나갔죠. 그런 의미에서 LH 공공정원도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작은 시도라고 생각하며 보듬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중이 모르는 김수린의 작업이 또 있을까요? CA조경에 다닐 때, 조용준 소장님, 장서희 대리님과 함께 ‘서울형 저이 용 도시공간 혁신 아이디어 공모’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서울시 내 방치 된 도시기반시설 12곳을 새롭게 활용하는 방안을 찾기 위한 공모전이 었어요. 우리 팀은 ‘더스트 캡처dust capture’라는 아이디어로 미세먼지에 대한 도시적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하늘공원과 한강을 잇는 보행 공간을 만든 뒤, 보행로 주변 곳곳에 미세먼지 측정 상태, 공기 정화 상태, 오염 상태를 보여주는 타워를 설치하고 미세먼지를 포집하는 거미줄 형태의 시설물을 조성했습니다. 특히 저는 부품도를 만드는 작업에 집중했어요. 아이디어 공모전이라 상세 설계가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더스트 캡처라는 아이디어가 독특한 만큼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구현 가능한 아이디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랑니를 뺐던 터라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작업해서 결국 부품도를 완성했어요. 심사위원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아 1등을 차지해서 대상을 받았죠. 『LAM』에 이 결과물을 바탕으로 한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고, 『환경과조경』 2019년 11월호에도 소개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김공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조경 이야기를 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을 텐데, 만화라는 방식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많이 봤어요. 초등학생 때는 만화를 보느라 학 원도 안 가고, 중학생 때도 시험이 끝나면 만화방에서 살았죠. 수학 공식이 가득해야 할 고등학교 수학 노트의 반은 제가 그린 캐릭터가 차지 하고 있어요. 수학 과외 선생님이 제 노트를 보고 혼내지 않고 재미있어 하며 다음 편을 궁금해 하기도 했는데, 그 시절 받은 긍정적 피드백이 좋은 원동력이 됐어요. 그래서 네이버 디자인프레스에 기자로 지원할 때도 자연스럽게 조경이라는 콘텐츠를 만화로 설명하는 샘플 콘텐츠를 그려 제출했죠. 다행히 좋은 평가를 받아 네이버 메인에 연재할 수 있었습니다. 김공일 1화의 주제가 ‘조경’은 무엇인가였죠. 당시 “내가 설계 한 조경 공간에서 산책하고, 힐링하고, 행복해 할 그 누군가 를 위해 열심히 고민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했어요. 그때로부터 벌써 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 조경에 대한 정의는 그대로인가요?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제가 내린 조경의 정의를 읽는다고 생각하면 좀 부끄럽긴 해요. 새벽에 쓴 글이었거든요. 새벽에는 누구 나 감성에 쉽게 젖어들잖아요. 그날도 감성에 취해서 적었던 터라 좀 쑥 스럽습니다(웃음). 김공일 시리즈에서 세계 조경가 소개 코너를 재밌게 봤어요. 학창시절 조경사를 배웠지만, 현대 조경가를 많이 다루진 않죠. 동시대의 조경가를 찾아보는 건 학생 자신의 몫이기도 하고요. 김공일 시리즈에서 소개한 조경가가 마사 슈워츠, 피터 워커, 로리 올린, 제임스 코너였어요. 평소 좋아하는 조경가 인가요? 롤모델로 삼은 조경가가 있는지도 궁금해요. 저도 회사에서 실무를 접하면서 동시대 조경가의 설계가 궁금해져서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학창시절에는 잘 몰랐죠. 제가 현대조경사를 관심 있게 살펴보기 시작했을 때, 조용준 소장님이 더 많은 정보를 접하도록 도와주었어요. 인생을 살며 감사를 전하고 싶은 세 분이 있어요. 학부시절 제 가능성을 처음 발견해준 김영민 교수님, 그 가능성을 실무 역량으로 키워준 조용준 소장님, 마지막으로 설계를 포기하고 싶을 때 잡 아준 안기수 소장님에게 항상 감사합니다. 아직 어리고 아직도 한창 성장해야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세 분 덕입니다. 마사 슈워츠, 피터 워커, 로리 올린, 제임스 코너를 선정한 이유는 이들의 작업이 사람들에게 흥미롭게 다가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롤모델로 삼은 조경가는 없지만, 로리 올린처럼 평범한 것 같지만 편안 하고 좋은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경의선숲길을 거닐 때면 그런 느낌을 받거든요. 그런데 사실 제가 잘하는 작업은 마사 슈워츠처럼 독특하고 회화적인 작업인 것 같긴 합니다. 유튜브 채널도 가지고 있던데, 원래 미디어 콘텐츠 제작에 관심이 많았나요? 평소에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어느 정도 사유가 쌓이면 명확히 정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콘텐츠 만드는 일이 번거롭고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사람들이 잘 보고 있다는 피드백을 주면 너무 뿌듯해서 멈출 수가 없어요. 조경가로서 설계에서 성과를 낼 때도 보람을 느끼지만, 정보를 전달하며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 을 한다고 느낄 때 기뻐요 고백하자면, 저는 일하는 자아를 따로 두고 살아요. 그게 건강한 삶에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김수린에게는 저보다 더 많은 자아가 있는 것 같아요. 조경가 김수린의 얼굴, 김공 일의 얼굴, 대학원생 김수린의 얼굴. 셋 중에 어떤 얼굴이 진짜 김수린에 가깝나요? 더불어 일과 일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제 MBTI가 INFJ에요. INFJ가 16가지 성격 유형 중에서도 수많은 자아 를 가지고 있기로 유명하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아요. 제 수많은 자아 중 어떤 모습이 저인지 모를 때가 많았어요. 예전에는 이 때문에 정체성 혼란을 겪었는데,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저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건 전 사람에게 영향을 많이 받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냐에 따라 제 모습이 달라져요. 다행인 건 인복 이 많아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는 거예요. 조경가, 만화가, 대학원생 중 저다운 자아를 굳이 꼽으라면 조경가를 선택하고 싶어요. 만화가는 정말 조경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을 담은 자아라서 때묻지 않게 아껴주고 싶은 존재에요. 조경가의 자아는 제 마음의 심해를 유영하며 바닥까지 찍고 올라올 때도 있고, 조용한 공간에서 생각 을 정리할 시간을 많이 갖기 때문에 실제 제 모습을 가장 많이 담았다 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잠깐 조경설계를 멈추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죠. 무엇을 연구 하고 있나요? 대학원에 다녀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설계사무소에서 실무를 만 5년을 경험했어요. 개인 일정보다 회사 일정이 우선이었고, 그렇게 일에만 푹 빠져 살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간 건지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 주변을 돌아보니 대표님, 소장님을 제외하고 제 근속년수가 가장 길더라고요. 5년을 성취지향적으로 밤낮없이 살다보니 몸도 조금씩 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잠깐 멈추기로 결정했어요. 지금은 대학원에서 ‘조경식재배치 자동화 알고리즘’에 관련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실무를 하면서 ‘이런 도구가 개발되면 참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 어렴풋한 상상을 실현해보고 싶었어요. 김공일 마지막회 ‘잠시 쉬어가기로 했습니다’에서, 앞으로의 계획이 뭐냐고 묻는 동기에게 잘 모르겠다고 답하셨다고 했 죠. 지금도 같나요?커리어적 목표가 아닌 김수린이라는 인간의 목표를 들려주셔도 좋아요. 전에는 헷갈렸는데 지금은 제 장점이 뭔지 알겠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제 생각을 많이 정리할 수 있었어요. 이런 기회를 갖게 되어 감사합니다. 저는 조경과 기술을 접목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전통적인 조경도 좋지만,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재료에 대한 경험도 쌓았고 새로운 기술에도 관심이 많아 이를 조경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는지 계속 고민해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 제가 가진 가능성을 발전시키면서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했죠. 10년 뒤의 조경, 20년 뒤의 조경은 어떻게 변할까요? 앞으로 조경의 경계에서 ‘넥스트next 조경’, 즉 다음의 조경을 이끌어나가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김수린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과 조경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식재설계를 자동화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CA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 ‘종로구 통합청사 기본 및 실시설계’ ‘판교 창조경제밸리 도시첨단산업단지 기본 및 실시설계’, '디지코 KT 기본 및 실시설계'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실무을 익혔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2016년 참가한 GIF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2년 ‘LH 작가정원’으로 정원설계 활동을 시작했으며, 2023년 LH의 초청을 받아 순천만국가정원에 ‘LH 공공정원’을 조성했다.
  • [모던스케이프] 해변의 풍경
    드뷔시(Claude Debussy)(1862~1918)가 관현악곡 ‘바다(La Mer)’에서 묘사한 바다는 직관적이어서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다. 음악은 수면 위로 떠오르는 태양에 바다가 서서히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오의 빛으로 반짝이며 바람을 만나 춤추는 듯 물결을 일으키다가 다시 거센 폭풍과 함께 파도가 휘몰아치듯 요란하다. 그리고 이내 파도는 어둠과 함께 고요히 잦아든다. 드뷔시는 음악을 통해 바다 이미지의 총체를 거대한 서사로 사실감 있게 풀어냈지만, 정작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실제의 바다가 아니라 일본 에도시대의 우키요에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추정 1760~1849)가 그린 ‘가나가와의 파도’였다. 그럼에도, 드뷔시를 낭만주의를 극복한 인상파 음악가로 분류하는 것은 사물의 인상을 주관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다’라는 작품에 관해 “바다의 일렁이는 물결과 하얗게 흩날리는 물보라는 물론, 빛과 구름, 바람, 냄새와 같은 움직이는 대상의 순간적 인상을 음악에 담으려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본래 서구 사회에서 바다는 산과 마찬가지로 혐오의 대상이었다. 바다의 끝 모르는 예측 불가능함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증폭시켰고, 비이성적 광기로 날뛰는 듯한 파도와 폭풍은 악마와 저주받은 영혼의 소행이라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유럽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해적의 노략질이나 시시때때로 영토를 침략했던 이민족의 공격도 모두 바다와 무관하지 않아서, 바다는 여러 면에서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 놓인 해변 또한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래 가득한 해변은 단조로운 데다 경계도 정확하지 않으며 바다도 육지도 아닌 모호함도 있었다. 해변은 분명함과 명료함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대상이었다. 바다와 해변의 이미지가 전환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다. 사람들은 점차 바다를 심미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바다와 해안가에서 포착되는 숭고미는 예술가들의 창작에 좋은 주제가 되었고, 해변은 도시의 팍팍한 삶에 지친 이들에게 새로운 도피처를 선사했다. 또 바닷가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이유가 바닷물, 바다 공기, 갓 잡아 올린 신선한 해산물 섭취 등에 기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심신 건강에 관심 있는 이들을 바다로 이끌었다. 최초의 해변 휴양지로 알려진 잉글랜드 남부 해안 브라이튼(Brighton)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1812~1870)가 정기적으로 방문해 소설을 집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841년 철도가 브라이튼까지 부설되고 방문객이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이곳은 유명 해변 리조트로 거듭나게 된다. *환경과조경424호(2023년 8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김윤정, “일제강점기 해수욕장 문화의 시작과 새변 풍경의 변천”, 『역사연구』 29, 2015, pp.7~34. 배정희, “바다–치유와 향랑과 재난의 이미지”, 『유럽사회문화』 13, 2014, pp.31~53. 이한석 외 1인, “영국 해변리조트 발달에 관한 연구”, 『한국생태환경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7, 2004, pp.45~51. 姜宇源庸, 『치인의 사랑(痴人の愛)』에 그려진 ‘여가’와 ‘근대일본’, 『比較日本學』 26, 2012, pp.81~98. 그림 출처 그림 1. Michaelasbest / Shutterstock.com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눕기의 기술
    성큼, 여름의 중심이다. 이번 7월호에는 조경가들이 참여한 ‘스테이’ 외부 공간 작업 일곱 편을 모았다. 김모아 기자의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의 제목처럼 “비록 잘 세팅된 편안함을 빌리는 형식일지라도, 복잡한 도시 생활로부터 이격된 약간의 여유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지 모른다”(77쪽). 올해 초부터 편집자들이 공들여 섭외해 함께 실을 수 있게 된 얼라이브어스의 ‘롯데호텔 부산 야외수영장’, 안마당더랩의 ‘호지’, 연수당의 ‘하도문 속초’, 듀송플레이스의 ‘와온’과 ‘월령지헌’,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퍼즈 글램핑장’, 펠릭스Felixx의 ‘언바운드’는 다양한 위치만큼이나 다채로운 성격을 지니지만, 경험에 방점을 둔 공간 설계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공통점을 갖는다. 호텔, 모텔, 여관, 펜션, 게스트하우스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숙박 시설이 언젠가부터 ‘스테이’로 통칭되고 있다. 물론 이름만 바뀐 건 아니다. 스테이의 유행은 ‘머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공간’의 부상을 의미한다. 스테이는 단순한 숙박을 넘어 머물며 공간을 소비하고 장소를 경험하는 일련의 활동 전체를 뜻한다. 스테이(머물다)와 베케이션(휴가)을 합성한 신조어 ‘스테이케이션(staycation)’도 요즘 휴가 트렌드를 대변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스테이 문화의 확산은 공간 경험의 맥락과 계기를 짓고 엮는 조경가의 안목과 손길을 초대하고 있다. 스테이에 그대로 스테이하고 싶은 유혹 때문이었을까. 다른 경우와 달리 스테이 원고 교정지는 집중해서 살피기 어려웠다. 편집된 텍스트와 이미지의 디테일로 눈이 가지 않았다. 교정지 속 스테이 공간 한가운데 두 발 뻗고 누워 일상을 규정하는 수많은 관계와 의무를 다 내려놓고 잠에 빠져드는 장면을 계속 상상했다. 이번 여름엔 나도, 독자 여러분도 어느 안온한 곳에 한참 머물며 침대로부터 등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 완벽한 스테이케이션을 누릴 수 있기를.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뜨고, 침대에 누워 창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쬐고, 다시 나른한 잠을 즐기다 후덥한 여름 정원을 산책하고, 책 몇 쪽을 읽다 다시 잠에 빠지기를 반복하는 온전한 시간. 홈캉스이건 호캉스이건 책 한 권은 동반해야 와식臥食 생활이 완성된다. 『환경과조경』 신간 말고 다른 책을 가져가야 한다면, 나는 독일 작가 베른트 브루너의 『눕기의 기술』(현암사, 2015)을 망설임 없이 꼽는다. “침대에서 할 수 없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이다.” 희극 배우 그루초 막스의 말로 포문을 여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통쾌하게 눕는 자세를 옹호한다. 누운 상태만큼 편안한 자세가 어디 있겠는가. 저자 브루너의 말처럼 “눕는 것은 신체에 가장 저항이 적게 주어지는 자세이며 가장 힘이 덜 드는 자세이다. 우리는 누운 자세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사랑을 하고, 생각을 하고, 슬픔이나 그리움에 잠기고, 백일몽을 꾸고 고민을 할 수도 있다.” 측정 가능한 성과를 중시하고 순발력과 결단력 있는 행동을 보여줘야 하며 성실과 근면을 입증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누운 자세는 게으름의 표상이자 무능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브루너의 생각은 다르다. “누워 있는 것은 짙은 안개 속에서 산책하는 것과 비슷한 작용을 할 수 있다. …… 누워 있는 행위는 목표 없이 걷는 수직적 산책의 수평적 짝꿍”이다. 눕기는 앉고 걷고 뛰는 무한 경쟁 사회에 브레이크를 거는 수평적 삶의 지표다. 비생산적이라 더욱 소중하다.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 위쪽(실내에서는 천장, 야외에서는 하늘)을 바라볼 때면 움켜쥐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며, 우리의 생각 또한 부유하기 시작한다. 몸의 자세를 바꿈으로써 마음도 따라 변하는 것이다.” “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을 자임하는 『눕기의 기술』은 다양한 시각으로 눕기를 관찰한다. 7만 년 전의 침상, 수면에 혁명을 일으킨 코일스프링 매트리스의 발명과 전파,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누워서 음식을 먹기 위해 고안한 소파와 그 현대적 변용, 침실의 사회적 변천사 등 역사적 주제가 책의 뼈대를 이루는 씨실이라면, 과학과 문학, 철학은 책에 무늬를 입히는 날실이다. 누워서 눕기의 기술을 익히며 『눕기의 기술』을 읽다 보면 수평 자세와 와식 생활에 대한 묘한 자부심까지 생긴다. 눕는 행위 하나로 중력이라는 자연의 진리에 순응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적 경쟁에 저항하고 있다는 자부심. 이번 여름 어딘가에 머물며 오래 누워 있는 시간을 실천할 계획이라면, 생활의 수직/수평 비율을바로 잡을 생각이라면, 그 깊은 심심함과 이완의 정점을 함께할 친구로 『눕기의 기술』을 권한다. 이 책은 누워서 읽어야 제맛이다. 읽다 보면 잠이 스르르 온다. 읽다가 얼굴에 떨어뜨려도 책이 워낙 가벼워 절대 코뼈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
  • [풍경 감각]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
    길을 나선다. 삐리릭. 도어록 소리를 듣고 나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잠근다. 철컥 철컥 철컥. 세 번 손잡이를 돌려 확실히 잠겼는지 살핀다. 열쇠 꾸러미를 끌러 왼쪽 앞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내려가다 멈춘다. 가스 밸브를 닫았는지, 창문 잠금 장치를 빼먹지 않았는지, 콘센트 전원 버튼을 껐는지 문득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나오기 전에 두어 번씩 확인했지만, 혹시나 싶어 다시 계단을 오른다. 작업실로 돌아와 잠금 장치와 버튼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 확인한다. 역시 다 괜찮구나. 다시 집을 나선다. 이 과정을 거치느라 3분 거리 버스 정류장 가는 데 늘 20분 정도 걸린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괜찮을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한번 더 온갖 버튼을 확인하는 일을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다. 깜빡 잊고 열어 둔 창문으로 누군가 들어오거나, 가스레인지나 과열된 콘센트에서 불길이 치솟는 장면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습관을 고칠 수 없을까 싶어서, 정말 도둑이 들거나 불이 나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아깝지만 그렇다고 정말 비싸거나 다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은 거의 없다. 중요한 파일은 클라우드에, 그리고 돈은 통장에 넣어두었다. 그럼 괜찮지 않을까? 아니다. 컴퓨터와 태블릿 PC, 스캐너, 액정 태블릿이 없어지면 큰일이다. 당장 그림을 그릴 수 없고 다시 구하기엔 가격도 만만치 않다. 클라우드에 업로드하지 못한 옛 작업물 파일과 종이 원화는 잃어버리면 끝이다. 작업실은 여러 가구가 사는 빌라인데, 만약 내 방에서 시작한 불이 건물을 홀랑 태운다면, 그래서 누군가 큰 해를 당한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계단 몇 번 오르내리고, 버튼 여러 개를 다시 확인하고, 3분 거리에 20분을 쓰는 게 무슨 대수인가. 아무래도 이 습관을 고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 [제도가 만든 도시] 제도, 크기를 줄일 수 있을까?
    지난 글에 이어 제도가 우리가 사는 도시의 ‘크기’에 관여하는 방식과 결과를 축소도시 문제를 통해 다룬다. 대도시 원도심, 지방 중소도시의 인구 감소는 적어도 1980년대부터 나타났지만 정책적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0여 년 전부터다. 인구 유출과 고령화로 지방 소도시들이 인구 감소를 넘어 인구 소멸의 위기에 있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된 것은 매우 최근이다. 그런데 인구 감소가 왜 문제일까. 더 정확히 묻자면, 도시 공간에서 인구 감소는 왜 문제인가. 세금 낼 인구가 감소하면 도시의 재정 재원도 줄어드는데 도로나 공공시설 등 이미 만들어진 도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동일하다. 늘어나는 빈집을 관리하고 운영 수입이 감소한 시설을 보조하기 위해 어쩌면 비용은 더 커지게 될 것이다. 결국 지자체가 파산하거나 최소한의 유지·관리를 포기하는 상황을 맞게 될 수 있다. 또한 온갖 지식과 문화를 교류하고 향유할 수 있는 도시적 기회는 물론 의료와 보살핌, 교육, 치안과 같은 기본적 사회 서비스를 누리기 어려워질 것이다(그림 2).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막대한 재정 지원이 들어갈 것이고, 이는 장차 매우 큰 사적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인구 감소로 인한 이러한 위기는 단순히 인구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는 줄어들고 있는데 인구가 성장하던 (또는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하던) 시기에 조성된 도시의 과도한 ‘크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1 그럼에도 2022년 제정된 ‘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을 비롯해 인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정책은 인구수에만 주목하고 인구 대비 도시의 크기를 함께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 도시는 ‘몸에 맞지 않는 너무 큰 옷’이 되어버렸는지(그림 3), 줄어드는 인구 변화를 유연하게 수용하기 어려운지, 도시 제도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과학적’ 도시계획의 회계분식,사회적 인구 증가 지난 연재에서 수용 인구를 기준으로 신도시의 용도별 적정 토지 면적을 ‘과학적’으로 자동 산출하는 플로 차트를 실었는데,2 이 ‘도시 면적 계산기’는 신도시 계획뿐 아니라 모든 도시계획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다. 다소 거칠게 설명하자면, 예를 들어 2000년대 중반 수립된 OO시 ‘2020 도시기본계획’에서는 2020년 OO시 인구를 15만 명으로 예측하고 이 인구를 ‘적정’하게 수용하기 위한 주거, 상업, 공업, 녹지 등 용도별 도시 지역 면적을 산출한다. 이 면적에서 기존 도시 내 각 용도별 면적을 제하면 2020년까지 이 도시에 더 필요한 도시 지역 면적이 된다. 이 필요 면적을 어디에 개발할지 정하는 것, 대표적으로는 ‘시가화 예정 용지’를 설정하는 것이 도시기본계획의 중요한 부분이다. 2023년 5월 기준 OO시 인구는 9만 6,700명으로 ‘2020 도시기본계획’의 계획 인구 15만 명은 고사하고 계획을 수립하던 당시 인구 10만 9,400명에서 12%나 감소했다. 반면, 도시 면적은 30km2에서 35km2까지 늘었다.3 ‘2020 도시기본계획’은 2020년쯤에는 15만 명이 적정하게 살기 위한 도시 면적을 38km2라고 했는데, 인구가 줄어드는 와중에도 15만 명을 목표로 하는 도시계획이 꽤나 착실하게 실행된 것이다. 그러나 인구는 오히려 줄어든 탓에 결과적으로, 숫자로만 보자면 그 적정하다는 수준보다 1.2배 큰 도시가 된 셈이다. 이러한 적정 도시 크기 설정의 오차는 인구 예측에서 비롯된다. 도시기본계획의 목표 년도 계획 인구는 해당 도시의 인구 구조(성별, 연령)를 기초로 산출되는 인구의 자연 증감과 도시 간 이주 예측에 따른 인구의 사회적 증감을 합산해 산출된다. 여기서 많은 지자체는 ‘희망’일 뿐인 사회적 인구 증가를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근거로 ‘도시 면적 계산기’를 돌려 도시계획을 수립한다. OO시는 ‘2020 도시기본계획’ 수립 당시에도 이미 1980년대 중반 인구 정점을 지나 20년 간 지속적으로 인구 감소가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당시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규모의 외부 인구 유입이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시나리오를 채택하고 미래의 도시 크기를 재단했다. 인구는 감소함에도 도시의 크기를 더 크게 만들 ‘과학적’ 근거로서 도시계획 계산기의 산출값을 인정해 온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도시 제도다. 도시기본계획에서 목표 년도의 인구를 추정하는 기준은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른 ‘도시·군기본계획 수립지침’에 근거하는데, OO시처럼 사회적 증가를 부풀려 도시 지역 면적을 과도하게 계획하는 폐해가 만연해왔다.4 최근에야 인구 추정에서 사회적 증가를 보조적으로 적용하라는 지침 개정이 이뤄졌지만 너무 늦었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국내외 여러 연구는 축소도시 또는 도시축소를 쇠퇴 도시, 도시 쇠퇴와 구분해 정의한다. 대체로 축소도시란 인구와 사회경제적 활동의 쇠퇴로 주택, 공공시설 및 도시 기반 시설의 실질적 이용이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과거 성장기에 공급한 도시의 물적 자원이 과잉인 상태에 이른 도시를 말한다(구형수 외, 『저성장 시대의 축소도시 실태와 정책방안 연구』, 국토연구원, 2016). 이 글에서는 도시의 ‘크기’를 단순히 도시의 면적, 즉 시가화 면적만이 아니라 그 안의 도로와 공공시설, 주택을 비롯한 민간 건축물 등 도시 공간을 구성하는 물적 자원의 규모로 규정하고자 한다. 2. 유영수, “제도, 도시의 크기를 정하다 1”, 『환경과조경』 2023년 5월호, p.104, 그림 1. 3. OO시 통계연보, 인구 및 용도지역 면적 통계 4. 구형수 외, 『저성장 시대의 축소도시 실태와 정책방안 연구』, 국토연구원, 2016.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 디자인 및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 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디자인 엘
    요즘 우리는 편안해졌다. 사무실 시작할 때 꿈에 부풀어 온갖 열정을 쏟아 내던 때가 있었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 들어갈 정도로 말야. 하지만 그 열정으로 타오르던 때조차 늘 마음 한구석엔 불안이 숨겨져 있었어. 이러다 내가 길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그런데 진짜 그런 일이 벌어졌어. 마치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 같은 내 모습을 마주한 거지. 정말 열심히 하고 주변에서 잘한다고 해주는데도 계속 헛디디며 한 계단도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듯한 허망함과 절망감이 들었지. 와, 정말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니까. 아마 그때 우리를 본 사람들은 엘이 이제 막을 내리겠구나 싶었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말야. 하지만 우린 막을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훌쩍 담을 넘어버린 듯 여유 있게 지내고 있어.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말야. 기적이 일어났냐고? 그런 건 없어. 기적 같은 거. 그런 건 방관자처럼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비치는 불연속적 이벤트의 자기 해석일 뿐. 우린 우리의 힘으로 지금에 이르렀어. 사실은 특별한 힘 같은 것도 없었어. 그저 우직하게 그 자리를 지켰을 뿐, 그리고 주변의 관심에 대한 기대를 접어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것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었지. 그 얘기를 해보고 싶어. 화려하지도, 근사하지도 않지만 꾸준한 근면함이 만들어 놓은, 잔잔한 호수 같은 평온함에 다다른 이야기. 엘을 성장시킨 프로젝트 석정과 노을 2016년 대한민국 한평정원 페스티벌은 기획이 좋았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방관만 하다 참가하게 된 거야. 정원박람회라는 게 여기저기 생기더니 듣도 보도 못한 쇼 가든–전시정원이란 게 심심찮게 보이는데, 그게 뭔가 싶었어. 정원이란 공간도 낯선데 그걸 전시용으로 만든다고? 나처럼 앞뒤 꽉 막힌 사람에게 그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지. 근데 그때 비슷한 고민을 하던 기획자가 대한민국 한평정원 페스티벌에서 골목길을 전시 공간으로 삼고, 골목길 곳곳의 빈 땅을 찾아내 그걸 쇼 가든 대상지로 준 거야. 이건 말이 된다 싶었지. 이건 맥락이란 게 있잖아. 난 그중 서쪽 입구에 있는 빈 땅에 ‘석정’이란 걸 만들었어. 노을을 등지고 집으로 오다 잠시 걸터앉을 정원이었어. 반응이 괜찮았어. 근데 대상을 받을 줄은 몰랐지. 이후 이렇게 삶이 영위되고 있는 공간을 쇼 가든의 대상으로 삼는 정원박람회가 몇 번 더 기획되더라. 2019년에 참여한 서울정원박람회 동네정원도 비슷한 기획 의도로 구성된 경우였어. 하지만 이때는 사실 쇼 가든을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간 것이었어. 그때 난 지독한 암흑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울부짖고 있었거든. 그래서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멍하기 일쑤고, 시간을 보내는데 일은 진척되지 않고, 밤이면 잠도 못 이루는 날이 많았어. 사람들과의 연락도 거의 끊고 지냈지. 뭐라도 해야 살겠다 싶었고, 몸을 움직여야겠다 싶었고, 땀을 흠뻑 흘려야겠다 싶었으며 ‘도전’이라는 불구덩이 속에 날 던져 넣어야겠다 싶었지. 내 사무실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친구가 심사위원으로 있던 자리에서 머리 숙여 프레젠테이션하고, 나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이랑 같은 조건에서 땀을 흘리며 작업했었어. 다행히 그 일을 마칠 즈음 난 웃을 수 있었어.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정원도 ‘노을’이 주제였다. 어쩌겠어. 이젠 뜨는 태양에 대한 희망보단 지는 노을에 묻은 땀이 더 끌리는 나이인걸. 트렌덱스 정원 어느 날 소식이 없었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 자기네 회사에 있는 데크가 낡아서 수리했으면 하는데 조언 좀 해달라며. 말만 들어서 알 수 있나. 현장 한번 보자고 했지. 가서 봤더니 물류 창고들 한편에 지어 둔 3층짜리 낡은 사무실 건물, 그리고 옆에 향나무, 소나무가 잔뜩 심긴 손바닥만 한 정원이 늙어 가고 있었어. ‘친구야, 이게 데크가 문제가 아닌 거 같다’라고 한 게 내 조언이었어. 그 일이 인연이 된 건지 새로 온 그 회사의 대표가 정원을 ‘이번 참에 잘 만들어 봅시다’고 하길래 열심히 그림을 그려 드렸는데, 자꾸 사무실 건물을 맘에 안 들어 하시는 거야. 그러더니 한 일년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며 연락이 왔더라. 정원만 잘 손봐도 좋았을 텐데 건물마저 새로 짓고 정원도 새로 짓게 된 거지. 수많은 보고야 뭐 당연한 절차였지만 정말 기억에 남는 건 시공 막바지 한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5월 햇살 아래서 땀 뻘뻘 흘리며 꽃 심은 일이었어. 어찌나 몸 쓰는 게 좋던지. 순간 내가 농부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거 아닌가 싶었다니까. 이 일도 마무리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내 친구는 지금도 가끔 나한테 전화해서 얘기한다. 새로 지은 건물보다 이 조그만 정원이 더 좋다고. 직원들도 이 정원이 해마다 더 좋아지는 게 참 신기하다며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말야. 진짜겠지? 용인공원 내겐 운명처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마누라 같은 곳이 바로 이곳 용인공원이야. 벌써 10년 넘게 (가만있자 내가 처음 여길 드나들기 시작한 게 2009년이니 벌써 14년이네) 이곳의 일을 해오고 있으니 참 오랜 인연이지. 이곳은 공동묘지야. 말이 공원이지 사실은 공동묘지인데 어느 날 갑자기 공원이라는 법정 명칭을 달게 된 곳이지. 공원이란 말도 어쩌면 ‘공동묘지’의 낯설고 어두운 느낌을 조금이라도 중화시켜 보려는 노력 아니었을까. 하지만 난 이곳이 좋았어. 처음 소개를 받았을 때는 그냥 내 포트폴리오에 넣을 독특한 프로젝트를 하나 하는구나 싶었거든. 근데 첫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기야말로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명분에 잘 맞는 곳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여기가 그럴 수 있는 곳 아닌가 말이야. 마치 죽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처럼 생각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남아 활발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 아닌가 말이야. 어쩌면 내 평생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쫓겨나지만 않으면. 첫 작업은 낡은 사무실 건물과 폐허 같은 식당을 헐어 내고 방문객과 유족을 위한 건물과 그 주변을 구상하는 거였어. 조경가에게 건물을 포함한 경관을 구상해 봐 달라고 부탁한 거지. 우리가 제안한 것은 용인공원의 풍경을 거스르지 않는 투과성 높은 단층의 낮은 건물과 그 앞뒤 너머를 활용한 공간들이었어. 좋아해 주더라. 그게 모티프가 되어서 실제 건축가가 디자인을 이어가며 진행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와 긴 인연이 시작된 거야. 그 후 우리는 용인공원의 많은 일을 수행했지. 짓다가 중간에 설계하게 된 봉안담 영역인 하늘담재, 박목월 선생의 묘를 기점으로 만든 박목월 문학정원, 용인공원 환경계획 등등. 게다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묘 디자인과 묘역 디자인 등등. 그러면서 이 공동묘지를 조금씩 조금씩 용인공원으로 변모시켜 오고 있었어. 처음에 지으려고 했던 사무 및 문화 공간은 갑자기 변한 장묘 문화, 그러니까 매장 문화에서 화장 및 납골 문화로의 변화를 대비한 봉안당 건립 사업으로 바뀌었어. 하지만 풍경을 담으려는 원래의 제안은 그대로 유지했어. 모두 그 점에 동의가 됐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봉안당은 짓고 싶어 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건물 공간과 다양한 정원 공간이 하나의 긴 경험의 과정에 묶여 들어가도록 계획·설계하는 아너스톤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 거야. 기획에서부터 문을 열 때까지 꼬박 십여 년이 걸렸어. 건축가는 중간에 더는 못하겠다며 손절했지만 난 끝까지 남아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어. 정원 공간들은 우리가 하자는 대로 충실히 만들어졌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설계는 많이 바뀌긴 했지만 우리를 통해 조금씩 구현되어 갔다는 게 맞겠네. 그거 아나? 한국에서는 설계가가 그린 대로 시공되는 경우가 별로 많지 않은 거. 물론 옛날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현장에 가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 더 많아. 그나마 여기만큼은 그렇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큰 책임감을 느꼈던지.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오랫동안 쌓인 설계가에 대한 신뢰 때문 아니었을까 싶어. 아너스톤 테라스 정원 10여 년의 시간이 걸려 드디어 준공하고 오픈한 날. 마음 한구석에 담아 뒀던 찜찜한 부분을 이사장에게 털어놨어. 아너스톤에는 테라스가 있거든. 독특한 테라스 구조로 되어 있어서 거기에 정원을 만들기로 했지만, 결국엔 데크만 깐 채 덮어 둔 상태였거든. 이거 제대로 다시 하시는 게 어떨까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이사장도 좀 맘에 걸렸던 건지 ‘한번 그려 보시죠’ 하는 거야. 그런데, 아니 이 쬐그만 공간 하나 구상하는데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거야. 10년 전 설계 초반부터 이 테라스는 사실 내게 숙제 같은 공간이었어. 얼른 해야 하는데 안 풀리고 질질 미루고 있던 숙제. 너무 진지해도 너무 발랄해도 안 되고, 쓰임이 있으면서도 쓰임을 너무 강조해도 안 되고, 식물이 있지만 없는 듯해야 하고. 안을 닮았지만, 바깥도 담아야 하고 등등. 정말 수도 없이 많이 그리고 수도 없이 보고하고 수도 없이 다시 준비하는 과정이 있었어. 그걸 덮어 두고 있었는데 내가 그걸 다시 꺼낸 거야. 어쩌려고……. 증말. 내 발등 내가 찍은 거지 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거 다 꺼내 놓은 거 같았거든. 술 많이 처먹고 토하다보면 더 이상 토할 게 없어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 아나? 머릿속이 약간 그런 상태가 되어 가는 거 같았어. 그러면서 난 왜 이렇게 설계를 못 하냐부터 딴 놈이었으면 어떻게 풀었을까까지 오만 욕설과 울부짖음을 반복하고 있었어. 어느 날 또 퇴짜를 맞고 돌아와 가만히 눈을 감고 제발 이제는 좀 답을 찾자며 생각에 잠겼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이 먼저 떠올랐으나 이미 접었거나, 그건 아닌 거 같다는 반응을 받은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들뿐이었어. 그러다가 말이야. 신기하게도 하나 집히는 게 있었다. 그게 뭔 줄 아나? 그건 바로 나의 뾰족한 드러냄의 태도였다. 뭔 소리냐면 난 이 공간을 디자인하려는 노력보다는 이 공간을 어떻게 하면 돋보이게 할까를 더 앞에다 두고 있었다는 거야. 어떻게 디자인해야 이 공간이 더 두드러져 보일지, 어떻게 하면 누구도 만들어 내지 못 한 조형적 모양을 그려낼지, 누구도 발견 못 한 독특한 재료와 질감을 집어넣어서 감탄을 끌어낼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구상하고 있었던 거야. 이런…….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며 쉽게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어. 그건 아무것도 두드러지지 않고, 그냥 무덤덤한 하지만 오래된 듯한 느낌을 지닌 무심한 정원이었어. 이 그림은 모두 다 좋다고 했어. 근데 그게 정말 그림이 좋아서 그런 건지 나의 확신에 찬 목소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어. 어쨌든 그 힘으로 끝내 이렇게 만들어 낼 수 있었고, 비로소 10여 년의 설계 역할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거야. 그리고 얼마 전 부모님을 모시고 우리가 설계한 서울대공원 동물원 정문 광장을 다녀왔어. 내가 자랑했었거든. ‘이런 거 제가 설계했어요, 공모에도 당선했고요’ 하며. 개념도 괜찮다고 생각했었고, 무엇보다 그 이전에는 시간이 개입할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이젠 시간이 충분히 개입할 수 있는 곳으로 변한 이곳에 나름 자부심도 느꼈어. 숲이 많이 생겨서 부모님이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을까 했지. 부모님은 연신 ‘우리 아들이 참 대견하구나, 이렇게 큰 공간을 설계하다니’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어. 하지만 우리가 내세운 시간이 어쩌구, 풍경이 어쩌구, 전후가 어쩌구 하는 얘기는 못 알아들으셨어. 아들이 했다니 좋다고 조건 반사처럼 칭찬하신 거지 뭐. 하지만 그 건너편 장미가 잔뜩 핀 테마정원에 가서 보여주신 그 환한 미소와 귀여운 포즈 등은 온몸으로 이 공간이 훨씬 더 좋음을 말해 주고 있었지. 그야말로 찐 표정이었어. 백 마디 말로 설명되어야만 하는 공간 말고 직감적으로 좋음을 알 수 있는 공간, 세상을 뒤바꿀 만한 대단한 개념 아니어도 거기에 딱 맞춤한 공간, 있는 듯 없는 듯한데 좋은 공간, 지친 하루를 돌아 집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오래된 카페 정원 같은 공간. 좀 모자라도 꽃 하나 더 심을 여지가 떠오르는 그런 공간. 이런 공간을 찾는 일을 혹시 나를 드러내려는 뾰족한 태도 때문에 뒷전으로 미뤄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뾰족한 마음을 들여다보며 내 앞에 놓인 빈 공간을 들여다본다. 부디 이 빈 공간에 꼭 맞는 공간을 디자인하자며. 삶에 꼭 들어맞는 공간을 만들어 내자며. 디자인 엘은 2005년 처음 문을 열었다. 사무실 열 때 내세운 모토가 Link Landscapewith Life다. 그래서 첫 글자들인 L을 사무실 이름으로 내세웠고. 거창한 의미를 담기보다는 일관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자는 생각이었다. 잘 지은 거 같은데, 잘 실천하고 있는 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저 삶이 뭔지도, 공간을 그 잘 모르는 삶에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모르는 그 마음만 가지고 겸손하게, 성실하게 설계하려 한다. www.desig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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