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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MDL
자연의 표현과 확장
젊은이의 패기
호기로운 시작
작년 이맘때쯤 PWP(Peter Walker and Partners)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피터 워커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진을 보았다. 나이를 찾아보니 1932년생 91세, 오랜 세월을 버티며 조경 현업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는 그와 비교하면 아직 엠디엘은 걸음마를 뗀 수준의 어린아이일 뿐이다. 조경가 정영선의 전시를 보고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살짝 소원해졌던 조경과의 관계에 다시 불꽃이 튄다. 앞으로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도 많다. 회사를 시작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펜을, 마우스를, 호미를 든다.
엠디엘은 겁 없는 20대의 패기로 무장한 1인 기업으로 시작했다. 당시 정부의 창업 지원과 1인 기업 열풍이 불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자존감이 생겨났다. 설계안을 가지고 그 누구라도 설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당당히 조경가 세 글자를 명함에 새기고, 인도 허왕후 기념공원 설계공모(2016)에 출품하면서 조경계에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조경계 선배들과 경쟁해서 3등의 성적을 거두면서 어깨가 더 올라갔다. 건방지게도 이 정도면 경쟁할 만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민망하지만, 스물다섯 살의 호기로움이 조경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니 그걸로 부끄러움은 덮을 수 있지 않을까.
느슨한 네트워크, 함께라면 두렵지 않아
어린 나이에 겁 없이 회사를 차린 후폭풍일까. 경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인허가, 대관 업무 등 경험과 대처 능력이 필요한 영역에서의 부족함은 쉽게 메꾸기 어려운 부분이다. 호기롭게 회사를 차렸는데 선배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뜻이 있으면 길이 보인다고 했던가. 대학원 시절부터 봐왔던 스튜디오테라의 네트워크 구조에 영감을 받아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 뭉치면 답이 나올 것 같았다. 현재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고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느슨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조경작업소 이룸(계획), 수수플랜(설계), 드오르(정원), 시대조경(공간), 스튜디오테라(협력), 경남종합조경(시공)이 함께하며 서로의 부족함과 빈틈을 채워 나간다. 따로 또 같이 뭉쳤다 흩어지며 주어진 공간에 다양한 시도를 해나간다.
하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아
조경을 하고 있지만, 설계와 시공으로 업역을 한정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세상만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새로운 사업과 기술, 방향에 대해 언제나 고민하고 쉽게 수용하는 자세를 취한다. 늘 조경의 업역이 교육, 계획, 설계, 시공, 재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조경 분야의 확장, 자연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2016년 창업진흥원 프로그램으로 식물 재배기 사업을 구상한 적이 있다. 비록 실체화에는 실패했지만, 다양한 분야로의 진출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조경설계 바깥의 분야로도 세계관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한정된 공간과 재료를 다루는 조경 분야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엠디엘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일을 도모하는 중이다. 그중 하나는 식물 구독 서비스인 ‘더초록’과 한국판 랜드진(Landezine) 조경 플랫폼 ‘엘에이-베이스(La-base)’다. 신기술 도입에도 적극적이다. 조경 분야에서는 아직 생소한 라이다LiDAR 센서, 360도 카메라를 이용한 맵핑을 통해 대상지를 보는 다양한 방법을 도입하고, AR과 VR을 활용해 설계안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등 신기술의 도입에 힘쓰고 있다.
설계자가 재미있으면 클라이언트도 재미있다
우리가 설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재미와 즐거움이다. 대상지를 머릿속으로 체험하고 상상하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은 설계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경험이 아닐까. 계획안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누가 더 재미있는 공간을 상상하는지 신입부터 소장까지 경쟁한다. 설계안을 그리고 있는 직원 뒤로 가서 꼰대처럼 묻기도 한다. ‘너는 이 공간이 재미있니?’ 계획하는 사람이 공간을 계획하면서 재미를 느낀다면 그 안은 그 누가 봐도 즐겁고 재미있는 공간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즐거운 과정에서 즐거운 결과물이 나오고, 이는 프레젠테이션 과정에서 더 강력한 설득력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설계안은 지금도 즐거움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불나방 정신
수많은 공모, 우리만의 것을 한다.
회사의 시작이 공모이기도 했고, 이름난 설계사무소가 아니다 보니 일을 수주할 수 있는 방법은 공모가 가장 적합했다. 이름을 가리고 어떤 설계안이 가장 대상지에 부합하는지 가려내는 설계공모는 쟁쟁한 선배들과 계급장 떼고 붙을 수 있는 기회이기에, 빛을 보면 환각에 이끌려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정말 수많은 공모와 제안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생산 작업이 고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즐거운 생각을 대중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점만으로 늘 설레고 즐겁다.
잠실한강공원 자연형 물놀이장 설계공모
잠실한강공원 자연형 물놀이장 설계공모는 엠디엘 설계안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단순하고 명료한 공간이 주는 묵직함, 한강에 필요한 스케일과 공간감에 대해 고민했다. 자연과 인공의 레이어가 공존하는 환경의 조성에 관해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기술사사무소 이수, 스튜디오테라와 함께 큰 이견 없이 협업을 진행하며 앞으로 더 발전시킬 수 있는설계안의 높은 가능성을 보았다.
여울공원 전시온실(식물원) 건립사업 설계공모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디자인 원칙을 바탕으로 제이와이아키텍츠(JYA-RCHITECTS) 건축사사무소, 요앞 건축사사무소와 협업했다. 공간의 구조가 자연스러운 대류를 발생시키고 그에 따른 온도와 습도가 형성되는 것을 계획의 방향성으로 잡았다. 공간적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는 환경에 맞춰 식생대를 조성한 온실을 제안했다.
동부간선도로 지하차도 상부공간 기획 디자인 공모
동부간선도로 지하화 공간 상부 공원에 서울 아레나 파크를 제안했다. 크고 작은 공간, 운동, 놀이, 문화, 정원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하는 아레나들이 모여 공원을 형성하는 코딩에 의한 공원 조성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2등에 그쳤지만 그 가능성을 타 공원에도 적용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직원들과 함께 계획하면서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우리의 프로젝트
청량리 4구역 가로공원
청량리 4구역 기부채납 공원 중 가로공원 부분의 제안 공모 당선으로 작업한 작품이다. 청량리에 새롭게 조성되는 랜드마크인 65층 주상복합아파트의 앞마당 같은 공간으로, 하루의 일조량이 낮은 대상지 특성을 설계안에 녹여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처음에 제안한 캐노피 워크와 일부 시설이 BF 심의로 인해 삭제됐고 인허가 과정도 순탄치 않았지만 곧 개방을 앞두고 있다.
공간와디즈
크라우드 펀딩의 대표 주자인 와디즈의 첫 오프라인 스토어 외부 공간 설계를 맡아 진행했다. 성수동의 옛 건물 마당 공간을 법정 주차 공간, 다양하게 교류하는 커뮤니케이션 장소, 활동적 체험형 행사가 가능한 공간으로 풀어냈다. 현재는 누적 방문객 30만 명이 넘는 성수동의 핫플레이스로, 제품 및 콘텐츠 홍보 행사, 팝업의 성지가 됐다.
영도 마리노 오토캠핑장
차를 타고 지나가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부산항대교. 그 교각 하부의 유휴 공간을 활용해 도시와 바다의 경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캠핑장을 조성했다. 초기의 원형 순환 동선과 캠프 사이트에 변화가 있어 아쉽지만 부산 시민은 물론 인근 지역 주민에게 한번쯤 가봐야 하는 캠핑장으로 소개되고 있어 뿌듯하다.
부경대학교 백경광장
부경대학교는 숲과 보행로, 차량 통행로로 이용되던 학교의 유휴 공간을 보행 전용 광장 겸 휴식과 소통, 지역 축제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넓은 광장을 원하는 학교의 의지와 소나무 숲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절충해 설계안을 만들었다.
봉래산 헬기장 실외정원
우리가 설계한 프로젝트 중 최초로 상을 받은 공간이다. 부산 영도구의 봉래산 헬기장을 정원화하는 프로젝트로, 영도구 천혜의 바다 경관과 봉래산의 숲 경관을 아울러 경험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산지라는 공간적 특성 때문에 계획에 어려움을 겪던 직원들이 데크 상세도를 그리며 김수희의 ‘멍에’를 하루 종일 틀었던 즐거운 기억이 남아 있다.
성장과 확장
엠디엘은 이제 10년 차를 바라보고 있다. 하다가 망하면 취업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던 회사지만 이제는 망하거나 약해지면 안 되는 이유가 가득하다. 피터 워커를 보면 아직 우리에게는 60년에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거나 무한한 시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기간 동안 어떻게 성장하고 확장하며 세계관을 구축해 나갈지 궁금해진다. 자연을 표현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 땅을 벗어나 우주의 공간으로 자연을 확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도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엠디엘(MDL)은 조경을 포함한 세상만사에 관심을 둔 젊은 친구들이 모인 집단이다. 설계자가 계획하는 과정이 즐거우면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도 즐거운 마음으로 이용한다고 믿는다. 자연 앞에서 겸손과 존중의 자세를 유지하고 하나하나 배워 나가며,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에선 유행이나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혁신적인 것을 산출하고 도입하며 자연을 표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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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천이었으나 천이 아니고 천인 그곳
에피소드 1. 2006년 7월의 폭우
용감한 어린이는 용감한 청소년으로 자랐다. 신도시를 뒤로 하고 이사 간 곳은 양재와 과천의 경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무려 세 번째 중학교. 교복이 예쁘다는 이유로(각주 1) 학교를 고르고 나서 후회막심하게 양재천과 시민의 숲을 따라 왕복 한 시간이 걸리는 등하교를 반복했다. 그로부터 몇년 뒤 어느덧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교 입학 사이. 드디어 입시와 결별하고 귀국해 여유를 즐기고 있던 여름 어느 날, ‘비 내리는 양재천을 걷자’는 마음으로 우비를 입고 집을 나섰다. 걸어가는 길에 빗줄기가 강해진다고 느꼈지만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설마 문제가 생기겠나 하며 온몸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즐겼다(고등학생 시절 우산 없이 비를 맞고 다니는 게 익숙해져서 더욱 그랬던 듯하다). 양재천을 따라 과천 방향으로 한 30m 걸었을까, 수면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꿀렁꿀렁.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고 곧바로 발길을 되돌려 귀가를 서둘렀다. 건넜던 징검다리는 이미 물에 잠겨있었다. 수초의 높이가 줄어든 듯 착시가 일어났다. 영국 고전 드라마 ‘닥터후(Docotor Who)’에 나오는 우는 천사(The Weeping Angel)(각주 2) 마냥 눈 깜짝하는 순간 수면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내 인생 첫 수해를 직면했다. 도망이다, 도망.
공원이 된 하천
1997년 양재천은 탄천과 함께 ‘하천종합공원’으로 새롭게 (재)등장했다. 강남구 구간을 시작으로 서초구와 과천시가 합세하면서 약 1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대규모 하천 공원으로 확장된 것이다. 가장 나중에 진행된 과천시 구간의 양재천 복원 사업은 2003년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타당성 검토 용역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됐던 것으로 보인다. 2005년이 되어서야 공사가 착공됐고, 2006년 말 준공이 완료됐다.(각주 3) 물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여러 변화가 진행됐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곳이 많으니 공원에 완료란 단어가 있을까 싶다.
다시 말해 2000년 초반까지 양재천에 지금과 비슷한 ‘공원’의 형태가 확연하게 드러난 지역은 강남구와 서초구였다. 과천시 구간 양재천 주변은 본격적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이었고, 이쪽의 양재천은 ‘공원’보다는 아직 ‘천변길’이란 단어가 더 어울렸다. 오히려 화훼 판매를 위한 비닐하우스와 소규모 농사가 이루어지는 복합 농업 경관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강남구부터 서초구를 지나 천변을 따라 걸어오면 하나둘씩, 그러다 갑자기 떼로, 비닐하우스의 둥그런 천장이 자유롭게 자라난 가로수 위로 드러났다. 당시 양재천은 도회적 아파트 경관부터 농업 경관까지 도시다움과 시골다움이 스르륵 연결되는 경계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레몬색 니트 조끼는 15세 소녀의 심금을 울렸다.
2. ‘우는 천사’는 닥터후 시리즈에 등장하는 독특한 설정의 포식자 종족으로, 긴 방영 기간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이 시리즈에서 역대 최고로 꼽히는 호러 외계인이다. 양자적 방어 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설정으로, 살아 있는 생물에게 관찰 당할 때는 몸이 석상이나 관찰되지 않을 때는 사냥을 시작한다.
3. 이양주, “양재천을 더욱 건강하게”, 『과천 지역연구』, 수원경기개발연구원, 2007, p.130.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있다. @jin.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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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그래서 노들섬은 어떻게 될까
글로벌 예술섬. 화려하면서도 모호한 이름을 달고 진행된 노들섬 설계공모의 당선작이 지난 5월 29일 선정됐다. 서울시 보도자료 첫 줄은 당선작 ‘소리 풍경(Soundscape)’을 출품한 디자이너 토머스 헤더윅을 ‘영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묘사한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헤더윅의 당선작은 기존 건축물을 최대한 살려 주변부를 계획했으며 공중부에 다양한 곡선으로 한국의 산 이미지를 형상화한 특별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헤더윅(=다빈치), 곡선, 산, 환상. 이 네 가지 키워드만으로는 사업을 둘러싼 본질적인 의문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무엇을/누구를 위한 글로벌 예술섬인가. 누가 원하는/누구를 위한 랜드마크인가.
가장 안타까운 건 이번 당선작 발표에 사회적 반응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보도자료를 받아쓴 몇몇 짧은 기사 외에는 별다른 해설, 비평, 토론, 반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강 한가운데 유기된 섬에서 유원지와 관광지로, 오페라하우스로, 예술섬으로, 텃밭으로, 예술창작기지로, 다시 글로벌 예술섬으로. 지난 50년간 노들섬에서 주기적으로 들끓었던 도시의 욕망에 이제 모두가 지친 것일까. ‘한강르네상스’나 ‘그레이트 한강’ 같은 슬로건은 이제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기시감과 피로감 때문일까. 한강에 랜드마크‘들’을 만든다며 쏟아내고 있는 서울시의 화려한 구상‘들’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전문가 사회도 조용하다. 요악하자면 무관심이거나 냉소. 노들섬 공모와 당선작에 대한 건축, 조경, 도시계획 분야의 토론이나 비평을 거의 접할 수 없다. 그나마 소셜 미디어에 간혹 올라온 단편적인 반응을 간추려 보면 크게 세 가지 갈래다. 노들섬을 지금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 헤더윅의 설계안이 뉴욕 리틀 아일랜드(본지 2022년 2월호)의 재탕 아니냐는 의구심, 서울시의 랜드마크병에 대한 피로감 호소.
이번 설계공모 출품작들의 게재 여부를 두고 본지 편집부의 의견은 다소 엇갈렸다. 다루지 않는 게 곧 비평이라는 의견과 설계안의 기본 정보라도 제공해야 그나마 추후의 토론을 낳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 후자로 결론 내고 촉박한 마감에 쫓기며 서둘러 지면을 꾸렸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사회적 관심을 모으기 위해 공모전 성과를 적극 홍보해야 할 서울시가 의외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토론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비평 필자를 팔방으로 찾던 중 페이스북에 올라온 건축 전문 번역가 조순익의 글을 발견했다. 급박한 원고 청탁에도 조순익 선생이 흔쾌히 수락해준 덕분에 포스팅 글을 확장한 평문을 지면에 실을 수 있게 됐다. 그의 글은 피로감을 주는 서울시 랜드마크 사업의 의도 자체를 다시 따져 묻는 피로를 행간에 감추고, 오히려 출품작들의 형태에 내재된 의미를 질문하고 탐사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토론의 방향을 제시한다. “헤더윅의 당선작은 서울시의 아이콘주의에 동원된다는 의심을 피해갈 수 없지만, 작품 자체는 단순한 아이콘을 넘어 사회적 자연의 매력을 보여준다”(94쪽)는 그의 관점은, “ ……헤더윅의 안은 자연과의 유비 속에 비교적 자유로운 인공을 녹여낸다. …… 인공이 자연을 모방하는 충동으로 나타난다. …… 이번 공모의 결과는 인간-자연 이분법에 기초한 자연중심주의보다 자연 속에서 공생하려는 인간의 유토피아적 충동, 말하자면 인간의 자유와 자연의 적극적인 어울림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96쪽)라는 의견으로 이어진다.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피드백을 초대한다.
노들섬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영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이미지대로 한강대교 위에 한국의 산을 형상화한 환상적인 경관이 만들어질까. 우리는 그 위를 산책하며 한강의 매력적인 노을을 감상하게 될까. 서울시는 헤더윅 팀과 오는 7월 설계 계약을 체결하고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를 진행한 뒤, 내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해 2025년까지 1차 조성(수변부 팝업 월, 수상 예술 무대, 생태 정원), 2027년까지 2차 조성(공중부=‘한국의 산’, 지상부 보행로와 라이프 가든) 완료를 목표로 사업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간의 반복 경험에 비춰 예상해본다면 수변부 일부를 고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예감. 예감이 아닌 소망인가?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라 독자들에게 피로감을 주겠지만 그래도 한번 더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오래, 계속, 많이 토론해야 한다.
조경가는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정리하고 보관할까. 7월호 특집 ‘조경가의 기록법’에 열 명의 조경가를 초대했다. 소중한 글과 그림으로 기억과 기록의 켤레를 선보여준 조경가 김기천, 김지환, 박승진, 신영재, 안동혁, 이수학, 이홍인, 조용준, 최재혁 그리고 비평가 정평진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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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감각] 힘을 내요, 보험이
지난 5월 말 나팔꽃을 심었다. 물에 적신 키친타월에 올려둔 씨앗 세 알은 이틀도 되지 않아 껍질을 채 벗지 못한 머리를 들어 올렸다. SNS 속 친구들의 정원에는 벌써 나팔꽃이 피었던데. 봄 한철인 프리지아와 수선화가 늦게까지 베란다 자리를 비워주지 않아서 여름 꽃 준비가 늦고 말았다. 벌써 반쯤 새싹이 된 씨앗을 보니 놓친 계절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바로 플라스틱 포트로 옮겨주었다.
다시 이틀이 지나자 V자를 그리며(나팔꽃 떡잎은 V자 모양이다) 새싹 두 개가 불쑥 솟아올랐다. 역시 나팔꽃이라서, 그리고 더운 계절이 되어서 빠르구나. 그런데 돋아난 싹이 새잎을 펼치며 자라는 동안 나머지 하나가 감감무소식이었다. 기다리다가, 궁금해하다, 마침내 땅 속을 파헤쳐볼 결심이 섰을 때 막내가 돋아났다. 떡잎 대부분을 잃고 줄기만 남은 모습으로.
뿌리파리의 소행일까. 나팔꽃에는 수선화 화분의 흙을 재활용했는데, 지난 봄 수선화가 뿌리파리를 겪었다는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보드라운 떡잎과 연약한 새 뿌리를 갉으며 얼마나 신났을까. 어쨌든 불상사를 대비해 세 개나 심은 거니까 허름한 녀석은 솎아내고 튼튼한 녀석만 기르면 된다. 식물을 뽑아내는 일은 필요할 때마다 해왔고 어렵지도 않다. 식물에는 사람의 신경계나 뇌와 같은 부분이 없으며, 따라서 통증을 느끼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을 테니까.(각주 1) 그렇지만 올해는 막내를 끝까지 기르기로 했다.
나팔꽃은 잃어버린 떡잎에 아파하지 않는다. 작은 잎 조각으로도 다음을 준비하고 줄기를 뻗을 것이다. 다른 형제보다 느리고 작고 볼품없겠지만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뽑아버리거나 또다시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 나팔꽃 덩굴을 시들게 하는 찬바람은 11월에야 불어온다. 꽃과 열매를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있다고, 막내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다. 나팔꽃에게는 응원도 무의미하겠지만. 참, 막내에게 이름도 붙여주었다. 보험을 들듯 여분으로 심었던 것이니 보험이라 부르기로 했다. 짓궂은가 싶지만 보험이는 모르니까 괜찮다.
**각주 정리
1. “식물은 접촉을 느끼지만 통증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리고 동물과 달리 식물의 반응은 주관적이지 않다 …… 식물은 뇌가 없기 때문에 주관적 제약에서 자유롭다.” 대니얼 샤모비츠, 『식물의 감각법』, 도서출판 다른, 2019,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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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만든 도시] 도시의 기능
도시라고 부를 만한 맹아가 나타난 수천 년 전이나,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각주 1)이 도시에 살고 있는 공히 도시의 시대인 현재나, 우리는 도시의 어떤 곳에서는 생산하고 거래하며, 어떤 곳에서는 교류와 유흥을 즐기고, 어떤 곳에서는 쉬면서 사적인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구분되는 서로 다른 활동, 즉 도시의 기능이 도시 내 특정 위치를 점한 모습은 당연히 사회적 결과물이며 임의적이거나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도시 기능의 특정한 공간 배열은 여러 곳에서 유사하게 반복된다.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 앞에는 달달한 냄새를 풍기는 빵집과 사은품을 쌓아둔 핸드폰 가게가 있고, 골목길 어귀 편의점에 꼬맹이와 편맥족(편의점 맥주+족)이 모여드는 저층 주거지의 흔한 풍경이 그런 예다.
도시 스케일에서도 마찬가지다. 구분되는 서로 다른 도시 기능의 배열을 ‘도시 공간 구조’라고 하며, 특정한 패턴이 다수의 도시에서 발견된다.(각주 2) 예를 들어 모든 도시 기능이 옅어지고 있는 구도심, 그에 인접한 기차역·버스터미널 주변으로 병원·상가·재래시장이 모여 있는 상업 지역, 그 밖으로는 1980~1990년대 구도심에서 옮겨온 시청과 금융·세무·법무 사무실 등이 모인 (이제는 오래된) 신시가지의 중심과 그 주변을 둘러싼 아파트 단지, 시가지에서 벗어나 고속도로 나들목 근처에 위치한 산업 단지와 그곳의 젊은 근로자가 사는 원룸촌 등은 한국 많은 지방 중소 도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형적인 도시 기능의 배열이다.
도시에서 특정한 기능의 위치는 다수의 도시
구성원에 의해 긴 시간에 걸쳐 자연스레 결정되기도 하지만, 소수에 의해 매우 의도적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전자의 예로 세계의 오래된 많은 항구 도시는 항만을 바라보는 경사지에 형성된 주거지와 같은 전형적인 도시 경관을 공유한다(그림 2). 사람의 힘으로 바꾸기 어려운 지리·기후적 특성과 특정 도시 기능에 요구되는 사회·공간적 조건을 따르는 집합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후자는 비단 근대 이후 도시계획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세계의 여러 역사 도심에는 그 시대의 관념적 가치와 위정자의 정치적 의도가 투영되어 있고(그림 3), 왕조가 사라진 현대 도시 공간에서도 공간을 매개로 한 정치가여전히 시도된다.(각주 3)
현대 도시계획에서 도시 기능의 위치를 인위적으로 정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물론 공적 이익이다. 산업 단지나 위락 시설로부터 주거와 교육 시설의 환경을 보호하고, 접근성이 높은 지역은 고밀도의 상업 및 업무 시설을 짓도록 하는 등 토지의 ‘합리적 이용’이 그 공적 이익에 해당한다. 공적 이익을 위해 특정 도시 기능이 도시 내 적정 위치에 들어서도록 하기 위한 대표적 제도가 제2종 일반주거지역, 근린상업지역 같은 용도 지역, 즉 조닝(zoning)이다. 한국 국토의 모든 부분은 예외 없이 9개 용도 지역(각주 4)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종류에 따라 어떤 용도의 건물을 지을 수 있는지 혹은 지을 수 없는지, 어떤 규모로 지어야 하는지가 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제 도시 공간의 기능 배열은 용도 지역의 배열과 일치할까?
그림 3. 청의 수도였던 북경(베이징)은 무려 우주의 중심으로서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 우주관을 따라 자금성을 중심에 두고 환이라 불리는 사각형의 위계 구조를 이룬다. 내부는 격자형 블록인 리방(里坊)과 일정한 간격의 내부 도로인 호동(胡同)으로 분할된다. 호동은 사회 통제의 공간 단위이며, 호동에 면한 획지의 너비는 곧 신분과 권력 혹은 부의 가늠자다. 전봉희, 『中國 北京 街家 風景: 2000년 북경 서구렴자호동 현장기록』, 서울:공간, 2003.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2050년경에는 인류의 70%가 도시에서 살 것으로 예상된다. www.worldbank.org
2. 버제스(Burgess), 호이트(Hoyt)를 비롯한 여러 학자는 도시에서 나타나는 CBD와 사회경제적 계층에 따른 주거지 및 소비 공간, 산업 단지, 느슨한 교외 주거지 등이 이루는 특정한 배열을 유형화한 토지 이용 모델(land use model)을 제시했다.
3. 지금은 없어진 여의도광장, 서울 이곳저곳에 추진되고 있는 국가 상징공간이 그 예다.
4. 도시지역 4종(주거, 상업, 공업, 녹지)과 관리지역 3종(보전관리, 생산관리, 계획관리), 농림지역, 자연환경보전지역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 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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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랩디에이치
하늘을 공경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사람을 섬기는 탁월한 조경 작업
조경에 대한
진심과 믿음으로
그래도 나름 (조경에) 진심입니다
조경을 한다는 것. 어느 일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아직 조경의 불모지라 불리는 한국에서 조경 그리고 조경 설계를 계속해 나간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일생 전부를 걸 정도의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에 임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조경을 향한 진심을 마음 한편에 품지 않으면 때로는 버티는 것조차 힘에 부칠 때가 있다.
랩디에이치 서울(Lab D+H Seoul)(이하 랩디에이치)은 조경에 진심을 품은 사람들이 모인 디자인 그룹이다. 물론 각자 마음에 품은 진심의 크기와 형태는 제각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상 중에 그리고 프로젝트에 임할 때 틈틈이 같이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가 각자 나름의 모양새로 진심으로 조경을 대하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협력 과정을 통해 조경설계라는 방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동참하고 있다.
진심은 믿음을 동반한다
조경에 진심인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몇 가지 믿음을 바탕으로 프로젝트에 임한다. 조경설계가 환경의 근간을 형성하고 도시의 작동을 돕는 적극적 역할을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조경의 업역이 물리적 공간의 설계와 단순한 구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조경의 사회적·환경적 책무와 문화적 중요성을 믿는다. 조경설계라는 창조적 행위가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오길 바란다.
랩디에이치는 조경에 대한 믿음을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대상지의 고유한 맥락을 고려해 정교하고 결정적인 맞춤형 설계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각 프로젝트는 대체 불가한 독창적인 의미를 가지며, 이용자에게 새로운 공간 경험을 제공하리라 기대한다. 우리가 만든 공간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지역과 사회,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더 나은 생활 환경과 지속가능한 향상된 도시 기능을 제공하기를 바라며 매일 작업에 임한다.
랩디에이치의
랜드그라피(각주 1)
한강에 만든 456개의 앉는 쉼터
2020년 한강변 보행네크워크 설계공모 당선을 시작으로 다양한 성격과 규모의 한강변 프로젝트를 연속으로 진행했다. 일종의 프랜차이즈 시리즈 성격의 ‘한강변 공공 쉼터 만들기’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들 프로젝트는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을 통해 연속된 소규모 대상지 꾸러미에 적절한 창의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한강공원을 이용하는 서울 시민에게 한강의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수많은 접점을 제공해 일상 속 삶의 질을 높이고 나아가 지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외부 공간 기획과 브랜딩으로서의 조경
개업 초창기 진행한 중국 대형 개발 사업은 한국과 달리 프로젝트의 색과 방향성을 정하는 기획 과정이 일반적으로 수반됐다. 그런데 최근 한국 시행사와 진행하는 개발 사업에서도 이러한 기획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외부 공간 브랜딩의 완성도와 개성에 따라 프로젝트의 생명력이 결정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성공 사례의 힘을 함께 목도한 결과로 보인다.
우리도 과업의 기획이 결정된 뒤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설계 전 선행 작업이라 여겨지던 기획 및 브랜딩 과정부터 참여한 적이 있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프로젝트들은 이러한 참여 방식을 통해 조경적 관점을 기반으로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요소를 발굴하고 프로젝트의 성격을 규정하는 앞 단계와 준공 후 이용 행태 예측까지를 포괄하는 전체 단계를 조화롭게 아우르려 노력한 결과물들이다.
S사 복합상업시설은 새로 만들어질 대형 상업 공간 옥상 조경 프로젝트로 실내 리테일의 보조적 역할로만 규정된 기존 옥상 외부 공간을 하나의 매력적인 목적지로 재설정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고메 포레스트(Gourmet Forest)와 키즈 와일더니스(Kid’s Wilderness)라 명명하고 구성한 두 층의 옥상정원을 실내외와 두 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고유한 장소성과 목적성을 가지는 입체적인 옥상 공간으로 기획 및 디자인했다.
평창 청옥산 지방정원은 만개한 샤스타데이지 군락이 매력적인 평창군 청옥산 정상부 고원 들녘에 새로운 지방정원을 기획·설계하는 프로젝트다. 현재의 고유한 경관의 조건과 매력을 면밀하게 존중하면서 다채로운 매력을 더하는 정원 브랜드와 공간 배치, 프로그램부터 제안했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실시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공공 오픈스페이스의 질은 도시의 품격이다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 그 도시의 품격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팁은 가장 일상적 공간인 공공 오픈스페이스를 방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실현의 완성도가 보장되지 않는 공공 공간을 다룰 때도 세심한 조경설계를 통해 완성도를 높이고 문화적으로 성숙한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도시 속 공공 공간의 인접한 도시 맥락, 주변 경관과의 조화 등 거시적인 부분부터 손스침의 높이, 너비, 각도, 소재 및 마감의 부드러움 정도 등 디테일한 부분에 이르는 모든 사항을 고려하며 디자인한다. 제반 조건과 실익보다는 공공성에 의미를 두고 공공 프로젝트 설계공모 참여나 지자체의 요청 등에 호응해 왔고, 프로젝트에서 공개 공지의 완성도를 본 설계 영역에 못지 않게 신경써왔다.
석남완충녹지 도시바람길 숲 조성사업에서는 완충녹지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도시 바람길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환경적 역할의 숲을 조성했다. 동시에 인접한 구도심의 고질적 문제였던 주차난을 해소하고 지역 주민의 일상 속 필요를 채우는 복합 커뮤니티 장소를 조성해 질 높은 도시 속 공공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이용의 숲을 디자인했다.
성수동 오피스 타워 공개 공지 시리즈는 새로운 공개 공지에 성수동만의 고유한 특별함을 부여하는 프로젝트다. 성수동의 혼란한 변화 속에서 건물 외형의 독창성에만 매달리다 보면 자칫 공공 공간의 질은 뒷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역 주민의 일상을 뒷받침하는 열린 공공 공간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은 건축의 특별함을 배가하는 중요한 무기가 된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각각에 걸맞은 고유한 특별함을 찾아가며 성수동에 위치한 일련의 오피스 타워 공개 공지와 조경 공간의 디자인을 제안했다.
6개월에 한 번은 호미를 들자
현장 연출이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경우, 우리는 가능한 시공 현장을 찾아 도면 위 선들이 현실에 구현되는 과정을 눈으로 지켜본다. 단순히 지켜보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며 현장 상황에 맞게 설계를 조정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식물을 나르고 배열한 뒤 호미를 들고 손에 흙을 잔뜩 묻히며 땅에 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생생한 현장감과 설계안에 대한 반추의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현장과 끊임없이 마주하는 경험.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최저선의 태도다.
포옥 정원은 포천에 위치한 대형 카페의 정원을 만드는 디자인빌드 프로젝트였다. 카페 건물은 간선도로에서 꽤나 내측으로 깊숙이 감춰진 위치에 있었지만, 그만큼 앞산과 지천을 정면으로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좋은 배경이 있었다. 건물 1층의 80% 이상을 필로티 구조로 수평적으로 열어놓았고, 하천변으로는 계단식 테라스를 내렸으며, 중정은 2층 위 옥상층까지 수직적으로 열려 있어 입체적 성격을 띤 여러 정원이 공간에서 주연과 조연 역할을 했다. 공간시공 에이원과 시공에 함께 참여하고 현장 식재를 주관하면서 서로 다른 자연 설정의 정원을 연출하는 경험은 책상 위에서의 설계만큼이나 즐거운 과정이었다.
노태우 대통령 메모리얼 파크는 서쪽 지근거리로 북한 지역이 보이는 파주 동화경모공원 내 위치한 고 노태우 대통령의 묘역이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현장을 방문하여, 현장 사진과 현황 측량도만 계속 들여다보다 자칫 대상지가 위치한 주변의 맥락을 놓치게 되는 경우를 방지하고자 했다. 직접 현장에 가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추모공원의 전경은 아직 진행되지 않은 메모리얼 파크 2단계 설계안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동빙고동 옥상정원은 고급 빌라 개인 정원의 디자인빌드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때론 오래 고민한 도면 위의 배열보다 감각에 의존한 현장에서의 직관적 결정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음을 다시금 느꼈다. 특히 소규모 정원에서 식물을 식재할 경우 직관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수급 불가로 대신 들여 온 식물과 발주서와 너무 다른 크기의 식물을 마주하면 막막함이 앞서지만, 직관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배열하고 심다 보면 이윽고 새로운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된다.
불경기에 표류하는 프로젝트
자재비 인상과 금리 불안정으로 건설 경기가 악화된 지 오래다. 지난 몇 년간 설계한 몇몇 프로젝트도 변화한 건설 시장의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재작년에 설계한 오피스 프로젝트는 투자사의 사정으로 착공에 들어가지 못하고 프로젝트 자체가 대폭 축소되었으며, 작년 말 설계를 마친 또 다른 업무 시설은 공동 투자사의 경영 악화로 착공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공공 프로젝트의 사정도 그리 나은 것은 아니라서 겨우 착공은 들어갔으나 원자재비 급상승 등의 이유로 설계안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시공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남산스퀘어 오피스 대수선 프로젝트는 충무로역(CBD)에 위치한 48년 된 오피스 빌딩을 재구성하는 프로젝트다. 리모델링되는 기존 건물과 수평 증축 신축동 사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아트리움 공간에 두터운 녹색의 실내형 공개 공지를 설계했고, 기존 동 옥상에 명동과 남산을 직접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정원을 제안했다. 착공 직전 프로젝트가 축소되면서 아쉽게도 우리의 제안은 페이퍼 워크로만 남게 됐다.
수송동 도화서길 업무시설 개방형 녹지는 열린송현녹지광장 바로 맞은편 율곡로와 도화서길 가로에 연접하여 서울 중심부 랜드마크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 이곳에 지상층 공공 영역을 확장하는 넓은 폭의 생태적으로 건강한 시민 휴식 공간인 개방형 녹지를 제안했으며, 높은 공공성을 인정받아 작년 8월 서울시 도시건축 창의·혁신디자인 시범사업으로 선정됐다. 하지만 이후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
설계공모 폴더를
백업하며
우리에게 설계공모는 현실에서 꿈꿔오던 흐릿한 상상을 설계안으로 또렷하게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지난 한 공모의 과정을 거치며 또렷해진 설계안은 공모 마감에 맞춰 제출되고 심사를 거친다. 어떤 설계안은 당선되어 물리적 공간에 실체화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대다수는 낙선의 아픔을 겪고, 잠시 세상의 빛을 본 것에 만족한 채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계 공모에 도전한다. 언젠가는 또다시 당선의 영예를 안고 우리의 디자인을 현실 공간에 구현하리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설계공모에 도전을 멈추지 않는 다른 이유도 있다. 공모를 준비하며 벼려지는 디자인 고민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어 우리를 발전시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축적되어 잘 숙성된 고민은 다른 공간을 설계할 때 불쑥불쑥 튀어나올 새로운 아이디어의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대전아트파크 기획디자인 국제지명공모, 얼루비얼 아트 파크, 오픈 스레시홀드(Alluvial Art Park, Open Threshold)
삼면이 도로와 철도로 둘러싸인 한계를 가진 대지의 경계를 ‘다층적 통과’, ‘매개’, ‘중첩하는 면과 공간’으로 설정함으로써 새로운 아트파크와 공원의 외부가 다수의 관계를 맺게 하도록 제안했다. 다양한 연결 전략을 통해 고립된 부지의 조건을 도시에 기여하는 새로운 전이 공간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제시했다.
노들 글로벌 예술섬 조성 국제지명 설계공모, 프롬나드 링(Promenade Ring)
노들섬이 한강공원의 새로운 지구로 작동할 수 있도록 노들섬의 단절된 순환과 고립된 장소, 조각난 섬을 하나의 섬으로 이어주는 프로그램의 순환 고리와 동선 전략을 설정했다. 인공화된 현재 노들섬 하단부의 재자연화를 제안했으며, 다양한 하천 전략과 이를 통한 섬 안팎의 상호 전이를 바탕으로 무수한 경험이 가능하도록 공간 프로그램들을 배치했다.
오목공원 맞춤형 리모델링 지명 설계공모, 둥그런 능선의 재탄생
오목공원의 둥그런 능선을 품은 나지막한 둔덕과 오목한 중앙부 광장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땅의 매무새와 분위기를 담는 공간이다. 이 원형의 능선을 평평하고 굴곡진 고리 형상의 광장으로 재탄생시켜 기존의 다단과 벽 중심 공간에서 무장애의 유려한 땅의 생김새로 조형했다. 말 안장 형상의 쌍곡포물면 광장의 높은 부분은 기존 지형의 높은 지대와 연결되고, 낮은 부분은 공원의 지면과 연결되어 입체적인 보행 경험과 개방감, 위요감을 제공하고 가로 경관에서 공원의 내부로 진출입을 자유롭게 하도록 제안했다.
당진종합체육관 및 반다비국민체육센터 건립사업 설계공모, 다섯 운동장과 여섯 공원
체육센터 외부 공간의 지형적 다양성을 야외 활동의 다채로움으로 승화시켜 하나의 체육공원이 아닌 여섯 개의 특징적 조경 영역인 ‘여섯 공원’으로 구분했다. 개별 공원은 이용 계층 간의 적절한 분리 및 교차를 유도하는 전략으로 두 가지 이상의 야외 활동 프로그램을 혼성시켰으며, 이를 통해 도시 중심에서 이격된 대상지를 방문하는 여러 계층 간의 통합 및 커뮤니티 형성을 촉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양천 목동교 하부 MZ스포츠플라자 조성 설계공모, 커플링 멀티-셰드(Coupling Multi-Sheds)
목동에 거주하는 다양한 세대의 도시·문화적 잠재력과 안양천을 따라 형성되는 자연의 생태적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엮고 연결하는 제안을 했다. 젊은 세대와 다른 세대가 함께 어울리고 동시에 사람과 자연이 어울리도록 다양한 수변 프로그램 공간을 제안했다. 활기와 생기가 넘치는 장소이자 젊은 세대의 새로운 외부 공간 문화를 창출하는 그릇으로 기능하도록 세심하게 매만진 공간 프레임워크를 제시했다.
아웃트로
그래서 이렇게 쭉 간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20년이 늙는다면? 설계사무소를 못하게 된다면? 수많은 멀티버스의 가능성 중 하나를 살짝 들여다보자.
1,400만 605개의 가능성 중 하나. 아마도 그 안에는 조경문화재단 설립을 시작하고 부족한 기부금을 충당하기 위해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스케치를 그리고 광속 라이노 모델링 알바를 하는 파운더 YJ와 그 옆에서 일 좀 적당히 하라며 나무라는 BW, 자신이 모은 5만 권의 책을 돌보며 재단 도서관의 책을 또 주문하고 있는 84년생 사서 JH, 재단 건물 안팎에서 식물을 가꾸고 가든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는 88년생 가드너 BG, 글로벌 답사 프로그램을 짜고 있는 99년생 해설가 JN이 있을 것이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조경의 경계 안에서 느슨한 연대의 형태로 함께 하고 있을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줄인다.
각주 1. 그간 『환경과조경』에 특집 등으로 이미 소개된 프로젝트를 제외한 최근 3~4년간의 근작 위주로 담았다.
랩디에이치(Lab D+H)는 201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설립해 현재 서울과 상하이에 오피스를 두고 있다. 서울 오피스는 동시대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외부 공간 기획 및 리서치부터 실시설계 너머의 시공 및 완공 후 모니터링, 관리 및 운영에 이르기까지 외부 공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 조경적 관점을 바탕으로 외부 공간의 지속적인 생명력을 책임지고 분명한 정체성으로 브랜딩하는 전문가 집단을 지향한다. 인스타그램 @labdh_seoul, 웹 포트폴리오 labdhseo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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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알아서 척척척, 신도시 어린이
에피소드 1. 깨진 무릎
올림픽공원 앞에서 배운 두발 자전거는 일산신도시에서 내 두 발이 되어주었다. 집에서 학원으로 가는 길, 넓게 그려진 그리드가 아닌 하나로 쭉 뻗어나가며 광장과 육교가 사슬처럼 엮여 주요 공간을 잇는 근린 녹지대는 힘차게 굴리는 바퀴 소리와 땅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교차하는, 그리고 어른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어린이들의 공간이었다.
아직은 자전거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상당한 경사의 육교 램프를 타고 내려오는 도전을 즐겼다. 아주 가끔은 미처 정비되지 않아 옛 주택과 노출 콘크리트 시설물이 밀접해 있어 왠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던 일산역 일대도 슬그머니 가보곤 했다. 인터넷이 막 보급되고 있던 때, 바깥 공간이 집보다 즐거웠던 시절, 공원은 어른들의 묵인 아래 ‘위험한 놀이’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실험장이었다. 공원에서 나는 총 세 번에 걸쳐 무릎이 깨졌다. 한 번은 조깅하다가, 두 번은 자전거를 타다가. 그 흔적은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내 오른쪽 다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일산의 대단지와 호수공원
1989년 4월 27일 「동아일보」 1면에 실린 ‘1기 신도시’ 두 군데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부는 최근 폭등하고 있는 서울의 주택가격을 안정시키고 주택공급을 크게 확대하기 위해 경기 성남시 분당동 일대에 5백40만 평 규모, 고양군 일산읍 일대에 4백60만 평 규모의 주택도시 두 곳을 새로 건설, 총 18만 가구의 아파트 및 단독주택을 공급키로 했다. …… 일산 지구는 한수 이북 지역 개발이 그동안 지연돼온 점을 감안, 향후 수도권 개발의 우선순위를 강남에서 강북으로 전환해 수도권 인구를 재배치한다는 정부 의지를 보이기 위해 교육문화 교통시설을 고루 갖춘 한수 이북 지역의 중심도시로 건설키로 했다.”(각주 1)
같은 해 12월 13일 「조선일보」 기사는 “일산신도시 기본계획안을 보면 우선 서울 주변 어느 도시보다 면적에 비해 인구수가 단촐한 반면, 공원 호수 등 녹지 면적이 무척 넓다는 것이 눈에 띈다”며 일산을 “인구 28만 전원도시”로 설명하고 있다.(각주 2) 호수공원뿐 아니라 기타 녹지율에 대한 언급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데, 기존 도시 개발 방식에서 탈피해 산과 공원을 중심으로 한 높은 녹지율을 지닌 자급자족형 신도시라는 점이 일산의 마케팅 포인트가 되지 않았나 싶다.(각주 3)
앞의 기사처럼 일산신도시 개발 사업의 기본 계획은 기존 도시 개발 방식에 비해 매우 높은 녹지율뿐 아니라 녹지의 분산을 제시했다. 주요 생활권은 모두 고층 아파트로 개발됐지만 그 사이에는 공원과 광장이 거미줄처럼 엮어져 녹지 그리드가 형성되었다. 즉 자가용이 없는 사람이라도 비교적 안전하고 편안하게 도시 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당시 서울의 빡빡한 주택난을 피해 일산신도시라는 새로운 주거지로 온 사람들의 결과 면면은 아마도 비슷했을 것이다. 넓은 녹지, 이제 막 새로 커지는 도시에 대한 낭만적 감상을 가진 3040 젊은 부부의 비율이 높지 않았을까. 간접적 증거도 있다. 1990년 24만 명이 조금 넘던 고양시 인구는 5년 후 50만 명을 넘어섰고, 2000년에는 80만 명으로 늘어났다. 10년 만에 3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에 더해 1990년대 초중반에는 고양시 인구의 95% 이상이 유년과 청‧장년층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각주 4)신도시 입주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기였으니, 1990년대 인구 증가의 많은 부분이 일산의 개발과 유관할 것이다.
이곳에 터를 잡았던 ‘신도시 아파트 입주민’들은 새롭게 개발하는 도시가 가진 장단점을 함께 겪으며 어떤 공통된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싶다. 각주 3에 서술한 자급자족에 대한 불만도 있었지만, 일산신도시아파트입주민회가 1998년 창간한 잡지를 보면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다.
1998년 3월 1일 첫 호를 발간하고 9월호까지 출간된 『월간 일산』에 수록된 글을 보면 ‘아파트 관리 기술’부터 ‘신도시의 소비 패턴’ 등 신도시 살이의 장단이 보이는데, 매 호 표지를 호수공원의 모습으로 꾸몄다는 점도 눈에 띈다. 짐작하건대 일산신도시에 대한 공통적인 어떤 이미지란 넓은 호수공원 뒤편으로 깨알처럼 펼쳐진 아파트 단지들이었음이 분명하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분당 성남 일산 고양에 새 도시”, 「동아일보」 1989년 4월 27일, 1면.
2. “일산 인구 28만 전원도시로”, 「조선일보」 1989년 12월 13일, 7면.
3. 물론 그 이후 1990년대 중반에는 자급자족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 불거지며 일산신도시 입주자대표협의회의 주도로 정부와 한국토지공사를 상대로 손해 배상 움직임이 있었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산신도시의 이미지는 베드타운에 가까운데, 이 ‘자급자족 도시’가 계획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4. 윤신희, 김지훈, 이세훈, 『데이터로 본 고양 변천』, 고양시정연구원 데이터센터, 2022.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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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가보지 않고 실은 프로젝트 격파하기
5월호 에디토리얼 원고를 서둘러 쓰고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딱 한 달 뒤 암스테르담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표만 예약한 채 떠난 긴 여행. 두 가지 큰 원칙만 정하고 모든 걸 열어뒀다. 첫 번째 원칙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기. 어느 도시를 다음 행선지로 할지, 내일은 무엇을 할지 미리 정하지 않았다. 두 번째 원칙은 모든 종류의 활자로부터 멀어지기. 여행 중반부에 신문 칼럼 마감이 겹쳐 어쩔 수 없이 노트북을 켰지만, 적어도 책을 한 페이지도 읽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다.
지인의 거처가 있는 베를린에서 예정에 없던 ‘보름 살기’를 하고 다음 도시로 택한 곳은 코펜하겐. 11년 만에 코펜하겐을 다시 방문한 건 『환경과조경』 지면에 담았던 여러 근작을 내 눈과 발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잡지에 해외 신작을 실을 때면 그 작품의 수준이 높고 메시지가 강하더라도 마음이 무겁고 뭔가 개운하지 않다. 책으로 연애를 배운 느낌이랄까. 여행은 작품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채 지면에 편집하는 부담감 혹은 아쉬움을 뒤늦게나마 덜어낼 기회다.
코펜하겐에 도착하자마자 찾아간 곳은 지난해 완공된 ‘오페라 공원’(Cobe 설계). 지난 4월호(432호) 표지에 올렸던 작품이다. 코펜하겐 내항의 탈산업 부지에 만든 이 공원은 왕립 오페라 극장의 정원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도시 중심부에서 낭만적인 자연 경관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뜨거운 햇살 아래 바닷바람 맞으며 공원 구석구석을 걸었다. 교정용 편집본에 빨간색 플러스펜으로 ‘엑설런트 프로젝트’라고 썼던 메모,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다.
오페라 공원에 가기 위해 탄 여객선은 수상 버스 역할을 하는 대중교통 수단이다. 다시 배에 올라 운하 곳곳을 다닐 수 있었는데, 어디서 본 듯 익숙한 다리 옆을 지날 때 내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2016년 2월호(334호) 특집 ‘다리, 연결 그 이상’에 실은 ‘시르켈브로엔(Cirkelbroen)’이었다. 영어로 바꾸면 서클 브리지. 원판 다섯 개를 이어붙인 형태의 이 다리는 아모레퍼시픽 사옥 외부 공간의 설치 조형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작품이다. 코펜하겐의 작지만 강한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시르켈브로엔은 잡지 지면이 담아내지 못하는 기능미와 도시적 매력을 뿜어내며 보행자와 자전거를 불러 모으고 있었다.
배는 곧 ‘시켈슬랑엔(Cykelslangen)’(Dissing+Weitling 설계) 밑을 지났다. 2015년 4월호(324호) 특집 ‘자전거 타고 싶은 도시’와 함께 엮어 실었던 자전거 전용 공중 다리다. 출퇴근시 자전거 이용률을 50%로 높이는 계획의 핵심 프로젝트로 만든 이 다리는 도심과 항구를 도보와 자전거로 연결해준다. 잡지 지면에 넣었던 인상적인 사진들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자전거 탄 풍경’이 뱀 모양 오렌지색 다리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코펜하겐의 자전거는 이미 교통수단 그 이상이다. 『사이클 시크』(북노마드, 2014)의 저자 마카엘 콜빌레-안데르센이 말하듯, 코펜하겐에서는 “치마를 입고 힐을 신고 자전거로 도심을 유유히 누비는 여자, 더블 재킷에 로퍼를 신고 자전거로 출근하는 남자”가 도시의 평범한 풍경이다.
가보지 않고 실은 프로젝트 격파하기(?)는 다음 도시들에서도 계속되었고, 2021년 2월호(394호)에 담았던 로테르담의 ‘보이만스 판뵈닝언 수장고(Depot Boijmans Van Beuningen)’(MVRDV 설계)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이 미술관은 전시장과 수장고 기능을 통합한 파격으로 유명하지만, 대형 거울 화분 형태의 외벽 하나로 온 도시의 풍경을 담아내며 도시의 일상에 즐거움을 선물하고 있었다. 나 같은 여행객뿐 아니라 동네 사람, 미술관 관람객 모두 이곳을 지날 때면 사진을 찍지 않을 도리가 없다. 거울에 비친 도시와 그 속의 자기 발견하기 놀이, 재미있지 않을 수 없다.
편집주간이 한 달이나 자리를 비운 사이, 편집부 식구들은 격동의 5월을 보냈다. 본지가 주관하는 ‘2024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뚝섬한강공원에서 열렸다. 박람회 수상작들을 이번 호 지면에 옮긴다. 6월호의 또 다른 주인공은 도시공원 리노베이션의 새 장을 연 ‘오목공원’이다. “공원은 편하게 앉아 오래 머무르며 품위 있게 쉴 수 있는 도시의 라운지”(박승진, 디자인 스튜디오 loci)라는 설계자의 생각이 어떻게 공간으로 구현되었는지 직접 방문해 눈과 발로 경험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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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늦은 밤, 지하철 4호선 노선도 앞에서
이번 역은 길음, 길음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길음역이 마음에 들어. 짧아서 불만인 게 많았거든. 봐, 나는 키가 작고, 손가락도 짧아. 근데 이 역에서는 딴청을 부릴 수 있지. 키? 길음. 손가락? 길음. 무엇을 물어도 ‘나는 길음이야’ 한다고. 꽃비 날리는 봄도, 손 살랑 흔들고 돌아서는 가을도. 짧아서 아쉬운 것 모두가 여기서는 길음이야.”
“뭐야, 취했어?”
“어쩐지 이상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마장역에서는 네가 그냥 ‘마장’하고 맞장구를 쳐줬으면 해. 가능역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까? 방학은 언제나 방학이니 좋겠다. 미아에 가면 경찰서 의자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내가 있을 것 같아. 수유에는 노란 산수유 꽃이 피면 좋겠다. 길동은 고길동과 홍길동 중 누구일까. 고길동은 둘리랑 쌍문동에 살 테니까 역시 홍길동이려나. 그리고 있지, 사당행. 4호선 하행 열차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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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 북서부 풍경] 경계에서 벡터로
‘도시-지역을 위한 지도책(Atlas For a City-Region)’은 브렉시트 이후 유럽연합EU의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의 북아일랜드 사이 국경 지대의 미래를 상상해보는 프로젝트다. 이 국경 지대는 EU와 영국 사이의 유일한 육상 국경이다.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GSD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Critical Landscapes Design Lab)가 진행한 이 연구는 영국 북아일랜드의 데리(Derry) 시와 스트라반(Strabane) 지방 자치구 의회, 그리고 아일랜드 공화국의 도니골(Donegal) 자치 의회가 공동 후원했다.
이 지도책은 아일랜드 섬의 북서 지방 풍경이 브렉시트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현실로 인해 어떻게 변화할지 상상해본 결과물이다. 하버드 GSD의 조경학과 수업과 국경 양쪽의 현지 조사에 기반을 둔 이 연구는 어떻게 풍경이 초국경지역을 형성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국경은 선이 아닌 풍경이다. 미래는 마을 사이의 연결망이나 조각보 같은 땅의 무늬처럼 풍경을 만들어내는 관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브렉시트의 파급 효과, 기후 변화의 장기적 영향, 그리고 인구 변화는 이 국경 풍경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적절한 계획과 디자인이 절실하다. 미래에 대한 상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도책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일랜드 북서부에 초超국경지역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 지역을 어떻게 지도로 그릴 것인가? 그리고 향후 200년 동안 그 지역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을 세 편의 글로 다루고자 한다. 휴대 가능한 전시로 디자인된 이 지도책은 초국경지역의 증거를 제시하고, 지도로 보여주며, 어떻게 경관이 북서부 지역의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는 데 유용한지 보여준다.
배경
2016년 6월 23일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는 국민 투표를 했을 때부터,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 초국경지역은 브렉시트의 위기와 기회에 직면했다. 영국이 EU 탈퇴를 결정한 이유 중 하나는 국경 통제의 자유였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국경은 영국과 EU 사이의 유일한 육상 국경으로 브렉시트 협상 지연의 원인이었다. 이 국경은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 수립 이후 언제나 아일랜드와 영국 정치에서 논란의 대상이었다. 많은 이가 브렉시트로 인한 영국과 EU 사이의 국경 폐쇄가 과거 트러블 시기(각주 1)로 돌아갈 것을 우려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던 이 시기는 1998년 양 지역 사이의 국경을 개방하기로 한 ‘굿 프라이 데이 협정’으로 끝났다. 분쟁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에 브렉시트 국민 투표에서 북아일랜드 주민의 다수, 특히 북아일랜드 서부 지역 주민은 EU에 잔류하기를 선택했다.
오늘날 국경은 눈에 잘 보이지 않으며 오직 작은 방지턱이나 도로 표면의 질감 변화만이 국경의 존재를 드러낸다. 초국경지역의 주민은 공공 서비스, 식품, 사회 기반 시설, 일상생활, 공간 패턴을 국경을 넘어 공유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풍경은 종종 ‘영국-아일랜드’로, 때로는 ‘천주교-개신교’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 풍경 속에는 영국인, 아일랜드인, 얼스터-스코틀랜드인뿐만 아니라, 바이킹, 노르만, 비잔틴, 그리고 최근 중국, 인도, 파키스탄, 필리핀, 폴란드, 수단, 시리아에서 온 노동자, 학생, 난민의 정체성도 표현되고 있다.
땅의 무늬를 통해서 우리는 다양한 정체성, 토지 이용, 그리고 사람들의 포부와 소망의 기록을 읽고 그 위에 새로운 형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초원의 경계에 자라는 생울타리는 무시하기 쉽다. 그 오래된 덤불과 배수로가 사회적, 경제적 복지와 개발과 딱히 관련 있어 보이진 않을 테니까. 사실 그 생울타리는 아일랜드 시골 풍경에서 가장 중요한 생태적 통로일 뿐만 아니라 토지 재산의 경계를 구분하고 정의하는 중요한 장치다.
얼스터-스코틀랜드 시 정체성의 상징이며 최근 200~300년 사이에 도입된 상대적으로 새로운 풍경 요소다. 초원의 크기와 생울타리 관리 정도는 그 주인의 종교가 무엇인지 시사한다. 필자는 현지에서 정돈된 생울타리는 대체로 기독교인의 것이며 천주교 신자들의 것은 대체로 덜 정돈되어 있다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그 지역의 향후 개발이 무엇이든 그 형태는 바로 생울타리로 정의된 땅 속에 있을 것이다.
한편 아일랜드 공화국의 인구는 증가하고 있으며 더블린이나 코르크, 리머릭, 골웨이 같은 도시들은 이미 포화 상태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 사이 국경 지대에 150만 명이 사는 도시를 제안하는 것은 공상이라 할 수 없다. 현재 700명의 인구가 전부인 킬리아 마을은 북아일랜드의 데리-런던데리 시, 아일랜드 공화국의 레터케니 시 사이의 고지대에 있다. 50년 이내로 킬리아 마을은 지역의 새로운 수도가 될지도 모른다.(각주 2)
브렉시트와 인구 변화로 인한 풍경의 변화도 분명하지만 기후 변화는 더 큰 위협이다. 이 지역은 50년 이내에 강수량이 줄고 지중해성 기후가 될 것이다. 북서부 지방에서 감자 재배는 어려워질 것이고, 대신 오렌지와 감귤류가 새로운 작물이 될 것이다. 기후 변화를 고려했을 때, 새로운 방식의 일과 삶의 형태를 상상해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국경을 선이 아닌 풍경으로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이러한 장기적 과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다.(각주 3)
*환경과조경434호(2024년 6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역주. 1960년대 후반부터 1998년까지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의 북아일랜드 간의 분쟁. 북아일랜드가 영국에 남아있기를 바랐던 영국 통합론주의자와 합병을 지지하는 북아일랜드인, 그리고 영국을 떠나 통일 아일랜드 공화국을 바랐던 아일랜드 독립주의자와 공화당원 간의 갈등으로 약 3,500명이 죽었다. 이 중 민간인이 52%였다. Malcolm Sutton, “Sutton Index of Deaths– Status Summary”, Conflict Archive on the Internet,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4 August 2015, Retrieved 31 August 2012.
2. 더 많은 아일랜드 인구 통계는 다음을 참고. www.cso.ie/en/releasesandpublications/ep/p-plfp/populationandlabour forceprojections2017-2051/populationprojectionsresults/ (2020년 4월 1일 접속)
3. Gareth Doherty and Pol Fité Matamoros, “From Line to Landscape: The Irish Northwest Border Region”, Architectural Design 263, pp.100~105.
게럿 도허티(Gareth Doherty)는 하버드 GSD 조경학과 교수이며, 아직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조경의 내러티브와 그 실체를 탐구하고 풀어낸다. 그는 경관 현지 조사(landscape fieldwork)라고 부르는 현장 중심 연구 방법을 통해 복합 경관에서 사람과 환경을 핵심 요소로 다룬다. 본 연재의 번역을 맡은 강준호는 하버드GSD를 졸업한 뒤 도허티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Critical Landscapes Design Lab)에서 연구원으로 일했고, 현재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