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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도가 만든 도시] 도시 공간의 생로병사
    건축물을 비롯한 도시를 구성하는 공간 요소들은 새로 만들어지면 역사 유적이 아니어도 내구재로서 일반적으로는 수십 년에서 백 여 년, 꽤나 긴 수명을 갖는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노후하든 사회적으로 노후하든, 이런 저런 한계에 다다라 종국에는 해체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우리 몸의 세포가 우리가 태어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고 죽는 것과 같다. 도시 공간 요소가 새로 태어나고 쓰이다 낡고 죽는 생로병사, 혹은 신진대사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며, 그 도시의 긴 역사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가 건강한 도시 공간의 생로병사 주기일까. 즉, 건물이 어느 정도 노후했을 때 다시 새로 지어야 할까. 한국의 도시 건조 환경 생로병사 주기가 짧은 것은 분명하다. 아파트는 10여 년만 지나도 ‘구축’이라는 오명이 붙고, 30년도 지나지 않아 재건축이 거론된다. 아파트보다 시공 수준이 낮고 당연히 시공비도 낮은 저층 주거지 주택들은 대사주기가 더 짧아 20년도 안 되어 밭을 갈아엎고 새 작물을 심듯 새로운 주택 유형으로 재건축되곤 한다(그림2). 연말 예산 낭비의 대표격으로 공격받는 보도블록은 수년마다 한 번씩 파헤쳐진다. 왜 이렇게 짧은 것일까. 지난 반세기 급격한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의 궤적에서 우리 사회의 공간 수요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빠르게 바뀌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공간을 만드는 계획 수준과 시공 수준 모두 급격히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미 만들어진 공간을 고쳐 쓰는 정도로는 한계가 많다. 또한 새로 만드는 비용, 즉 공사비가 상대적으로 낮게 유지된 점도 생로병사 주기를 줄이는 요인이다.(각주 2) 돈과 시간을 더 들여 길게 쓰도록 만들지, 적게 들이고 자주 교체할지는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건조 환경의 적정 수명이라는 기준에 영향을 미친다. 도시 공간의 삶과 죽음, 그 임계점 도시 공간을 이루는 수많은 물적 요소들이 태어나고 죽는 생로병사가 반복되는 가운데, 어떤 한개체가 오랫동안 존재하다 해체되고 다시 짓기로 결정되는 때는 언제일까. 여러 연구자가 이를 수학적으로 또는 통계적으로 설명하고 확인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아주 간략하고 거칠게 표현하자면, 도시 공간의 삶과 죽음의 임계점은 현재 상태의 공간에서 얻는 수익이 (재개발에 들어가는 비용을 고려하고도) 재개발 후 기대되는 수익과 같아 질 때다.(각주 3) 여기서 수익은 현재의 사용 가치에 기반을 둔 임대료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선 부동산 가치 상승에서 오는 수익이 더 클 수 있다. 비용은 기존 공간을 해체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건설비가 기본이지만, 재개발을 결정하고 진행하는 모든 단계의 지연에서 비롯되는 ‘전환 비용’(각주 4)을 무시할 수 없으며 예측하기도 어렵다. 결국 현재의 사용 가치가 공간의 노후로 인해 얼마나 감소하는지, 재개발 과정에 들어가는 직간접 비용이 얼마나 높은지,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공간이 창출하는 사용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가 도시 공간의 생로병사 속도를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도시 공간의 삶과 죽음의 구조 안에 우리의 제도가 어떻게 개입해 도시의 생로병사를 조절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환경과조경429호(2024년 1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제인 제이콥스, 유강은 역,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그린비, 2010. 2. 최근 공사비 상승은 우리 도시의 생로병사와 신진대사가 일어나는 전제 조건을 바꾸고 있다. 3.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자율을 고려한 공간 운영 이익의 순현재 가치와 재개발하여 얻게 되는 이익의 순현재 가치가 같아질 때다. 브뤼크너(Brueckner, 1980), 휘턴(Wheaton, 1982) 등 도시 성장 모형 연구 이론에 기초한다. 또 다른 재개발 결정 이론인 닐 스미스(Neil Smith, 1979)의 지대차 이론(Rent-gap theory)에서도 현 지대와 재개발 후 잠재적 지대 간의 격차가 커질 때 젠트리피케이션을 촉발하는 도시 공간의 물리적 재투자가 발생하는 조건이 된다고 설명한다. 4. 박성식, 『공간의 가치』, 유룩출판, 2015.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 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기술사사무소 예당 아름다운 이상을 꿈꾸며 마음으로 느끼는 공간을 만들다
    이런 오피스 예당(藝堂), 그 이름 18년 전 사무실을 열 때, 다들 그렇듯 회사 이름을 고민했다. 예당이라는 다소 전통 음식점 같은 분위기의 이름은 조금 구태의연해 보였지만, 예술의 전당의 약자로 재주藝를 가진 사람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장堂이란 뜻을 담았다. 프로젝트마다 장인의 손길이 스미기를 기대하며 작은 시작을 알렸다. 초창기에는 디자인보다는 작품의 완성도를 지향했는데, 언제부턴가 먹고 살기 위한 설계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된다.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욕심과 현실의 사이에서 매번 고민하지만, 결국 생존이 앞선다. 잘한다는 소리보다 못한다는 소리는 절대 듣지 말자고 스스로 되뇌며 살아왔다. 클라이언트에 대한 책임과 신뢰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덧 중견이라는 말을 듣는 자리에 왔다. 나보다는 젊은 소장들이 자리를 이어주면서 조금 더 발전적인 모습으로 나아가리라 기대한다. 늘 그렇듯 초심을 잃지 않는 예당이기를 바라면서. (오두환 대표) 애증의 시간 조경설계를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 시간 대부분을 예당에 머물렀다. 예당은 내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준 곳이다. 조경설계를 처음 시작하고 컴퓨터 앞에서 열심히 도면 작업을 했던 나에게 종이와 펜을 주었다. 디자이너로 첫 발걸음을 뗄 수 있게 해줘서 고맙지만 때로는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었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디자인을 고민하느라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고, 때로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둘 프로젝트를 완성할 때마다 느끼는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시간을 이겨내며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모두 곁에 있었던 동료들 덕분이었다. 오래도록 함께 일할 수 있는 오피스를 꿈꿔왔다. 한때 매일 반복되는 야근과 철야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일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오피스를 만들고 싶었다. 다행히 대표님의 이해와 직원들의 노력으로 과거와 다르게 많은 것들이 변했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모든 직원의 출퇴근길 발걸음이 가볍고 즐거운 행복한 오피스를 꿈꾼다. 함께하는 대표님, 직원들에게 감사하고 새롭게 맞이할 미래의 직원들과 더 나은 행복한 오피스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 (김종민 소장) 예술의 전당 “예당 뭔가 설계 회사 이름치고는 촌스러운데, 무슨 뜻이죠? 진짜로 ‘예술의 전당’ 뭐 그런 건 아니죠?” 대표님은 맞다고 했다. 그렇구나! 예술의 전당이구나. 2013년에 입사해 10년 넘게 매일 예술의 전당에 다니고 있다. 턴키, 기술제안, BTL, CMR, 현상설계, 제안설계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하다 보니 예술을 지향하는 줄은 뒤늦게 알았다. 턴키 위주로 하던 시절엔 별명이 합사돌이었다. 분명 기능에 충실한 설계를 주로 해왔는데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예술적 감각이 필요한 디자인까지 총괄하는 위치에 왔다. 머릿속에 쌓아놓은 폐품들을 꺼내 좋은 디자인이라 말할 때 지지해 주는 동료가 없었으면 아마 안됐겠지. 편한 분위기, 약간 느슨한 출근, 긴 점심시간, 하루 종일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조잘조잘 나누는 잡담 등 예당을 소개할 수 있는 것이 여러 개 있지만 하나를 꼽자면 서로에 대한 강한 믿음이다. 물론 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박태윤 이사) 즐거운 출근길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출근길은 행복한가요?’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즐겁다고 답할 것이다. 출근길에 오늘은 동료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혹은 어떤 재미있는 대화를 나눌지 생각하면 지루하고 힘든 출근길은 즐거운 시간이 된다. 물론 출근 후 힘든 일이 주어질 때도 있지만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하는 동료들과 함께라면 오늘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예당의 좋은 분위기와 좋은 팀워크가 있기 때문이다. (오재선 과장) 해피 해피 예당 신입 때부터 현재까지 모두가 즐겁게 일하는 곳이다. 예당은 내가 머무른 5년 동안 항상 웃음이 가득하고 서로 칭찬이 넘쳐나는 사무실이었다. 그래서 의견도 자유롭고 편하게 낼 수 있고 다양한 피드백이 돌아와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매일 점심시간 다 같이 모여 보드게임도 하고 수다도 떨고 가끔은 각자 낮잠도 자고 그만큼 화기애애한 예당. 지금처럼 행복하고 재미있게 일하는 멋진 사람들이 되길 바라요. (유다성 과장) 시너지 무언가를 창조하는 직업 특성상 생각과 표현의 방식에 있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예당의 가장 큰 장점이다. 동료들과 함께 대화하며 나누던 고민은 성취를 함께 기념할 수 있는 긍지를 주기도 한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나누는 대화는 즐거움과 에너지를 만드는 동시에 일할 때 시너지를 발휘한다. 이러한 시너지가 모여 우리가 만든 공간 속에 있는 모두가 또 다른 시너지를 만들어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바란다. 예당에 새로운 시너지를 부여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박채연 과장) 내가 좋아하는 우리의 바이브 사무실에 처음 들어서며 생각했던 건 ‘오 여기 분위기 좋은 걸’이었다. 회의실에 둘러앉아 웃고 있는 사람들과 면접 때 소장님의 재치 있고 진심 어린 상담(?)에 느낀 감정이랄까. 듣고 싶은 노래로 하루를 맞이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 업무를 시작한다. 머리 식힐겸 산책이나 서점을 종종 가는데 서로의 일상과 사색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함께하는 영감의 답사, 국내외를 누비는 즐거운 워크숍은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와 유연한 사고, 각자의 책임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편안함을 주는 분위기와 함께하는 어벤져스 동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정예시 대리) 간식이 전부는 아니에요 예당으로 이직했을 때 첫인상은 ‘사람들 분위기가 참 밝다’였다. 어떤 일이든 반복되다 보면 지루해질 수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밝은 분위기 속에서 일하다 보니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틈틈이 재미를 찾아가고 있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다 같이 게임을 하고 웃다 보면 밝은 에너지가 생기는데 ‘그럼 오후에도 잘해보자’라는 마음이 든다. 일하면서 먹는 맛있는 간식들도 좋은 복지 중 하나다. 앞으로도 다양한 걸 배우고 함께 웃으면서 즐거운 날을 만들어 가고 싶다. (조혜빈 대리) 첫 번째 스테이지 올해 2월 대학 졸업 후 3월부터 예당과 함께하게 됐다. 예당에서의 시간이 누적되면서 조경설계를 즐겁게 배우는 지금, 하나둘 나만의 루틴이 생기고 있다. 매일 아침 프로젝트를 마주하고 어제 내가 못 했던 프로세스를 해결했을 때 얻는 소소한 만족과 성취에서 출발해 점심에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한다. 이 루틴의 안정감 속에서 쌓이는 새로운 프로젝트 경험은 조경 디자이너라는 목표를 향한 좋은 양분이 된다. 반복되는 하루 속에 성공도 실패도 있지만 좋은 선임들 덕분에 ‘예술의 전당’이라는 스테이지에서 업무와 생활 전반에 걸친 값진 경험을 배워가고 있다. (김인 사원) 예당의 봄 입사할 당시만 해도 따뜻한 봄이었는데, 어느덧 추운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9개월을 보내고 한 해의 끝을 달려가고 있는 셈이다. 학부생활과 다른 새로운 실무 환경에서 모르는 것도 많았고 배워야 할 내용은 끝이 없기에 매일이 녹록치 않았지만, 다정하고 좋은 선임들 덕분에 차분히 적응해 나가고 있다. 점심시간에 같이 모여 즐겁게 보드게임을 하는 모습만 봐도 우리 회사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예당의 두 번째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한다. (윤병훈 사원) 이런 프로젝트 디에이치 아너힐즈 디에이치 아너힐즈는 예당에서 진행해온 공동주택 설계의 틀을 깬 프로젝트다. 이전까지 공동주택 프로젝트는 작품으로서의 디자인 가치보다는 각종 법규와 주민들의 보편적인 니즈를 충족시키는 정도로 계획했다. 이와 달리 아너힐즈는 공동주택의 상품성과 디자인 가치를 함께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프로젝트다. 현대건설이 기존 브랜드 ‘힐스테이트’의 프리미엄 브랜드 ‘디에이치’를 새로 만들며 강남권 최고급 공동주택을 구현하기 위해 처음 진행한 프로젝트라 오랜 기간 협업했다. 단지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생각한 ‘현대미술관’ 콘셉트를 통해 조경설계의 필수 요소인 수목, 시설, 공간을 명작으로 해석했으며, 대모산과 개포근린공원의 자연과 강남권 도시의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조화를 꾀했다. 공동주택을 단순히 기능적, 이용적 측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의 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콘셉트 정립부터 공간의 설계, 작은 디테일까지 설계사무소뿐만 아니라 시공사와 국내외 작가들의 도움과 노력으로 완성한 프로젝트라 더욱 기억에 남는다. 울산 남구 B-07 재개발정비사업 코로나19로 인한 변화를 겪던 2021년, 미 연준의 양적 완화를 계기로 세계적으로 유동성이 폭발하기 시작하고, 전국 각지의 재정비·재건축 사업이 활발히 이뤄졌다. 경남의 대표 부자 도시 중 하나인 울산의 남구도 예외일 수 없었고 우리도 재개발정비사업의 설계를 맡게 됐다. 도로로 분절된 두 개의 필지 중심에는 기부채납 예정인 공원이 위치해 있어, 크고 화려한 유선형 메인 동선으로 대단지를 하나로 통합해 기능적, 심미적 연출 효과를 강화하고자 했다. 태화강의 크게 굴곡진 물의 흐름을 디자인 모티브로 설정하고 다양하고 과감한 물의 사용과 공간의 비례를 강력하게 설계에 반영했다. 극단으로 치닫는 더운 여름에 설계해서 그랬을까. 물의 활용에 매우 집착했던 것 같다. 송도 마스터플랜 송도 프로젝트는 오랜 기간 전체 마스터플랜부터 단지별 설계, 완공(힐스테이트 레이크 송도 1~3차)까지 인연이 깊은 프로젝트 중 하나다. 기존 송도 신도시의 확장을 위한 송도 마스터플랜 프로젝트는 서해와 서해대교, 송도 워터프런트 호수와 이미 조성된 공동주택, 학교 등 주변의 다양한 경관 요소와 도시 인프라와 관계성 측면에서 건축 부문과 이견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서해 쪽 통경축 형성, 각 인프라와의 에지 프로그램 설정, 블록별 아이덴티티 등 보편적인 개념으로 정리됐다. 전체 마스터플랜을 완성하고 그 안에 단지를 설계하고 완공까지 하며 처음과 끝을 지켜본 프로젝트라 의미가 크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대규모가 아니라서 소개를 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한 프로젝트다. 기술제안으로 당선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그동안 진행했던 기술제안 중 규모는 작지만 가슴이 뜨거워지는 프로젝트 중 하나다.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임시정부기념관에는 대단한 조경 공간이나 자랑할 만한 디자인 요소가 있지는 않다. 다만 역사적인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에 동료들과 함께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옥상, 벽면, 건축물 기둥, 포장 패턴 등 디테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애국심 가득한 동료들의 다양한 디자인을 볼 수 있었다.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매우 부족해 많은 것이 반영되진 않았지만 진행하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국방대학교 이전 사업 국방대학교 이전 사업은 개교 60주년을 기념해 서울 은평구 수색동의 노후한 기존 학교를 논산으로 이전하는 턴키 프로젝트다.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사업이었기에 합동 사무실에서 계룡건설을 비롯해 모든 공종과 전 직원이 열심히 수행했다. 군 교육기관의 특성상 일반 학교와는 다르게 학교, 주거, 종교, 공원, 체육, 군사 시설 등 다양한 시설이 배치되기 때문에 각시설의 니즈를 충족시키고 시설 간 연계성을 찾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다소 위압감이 느껴지는 장군들, 꼼꼼한 CM단, 동네 주민들의 텃세 등 여러 요구 사항을 수렴하느라 쉽지 않았다. 이전 부지의 개발로 인한 기존 자연의 훼손을 고려하고 기존 생태계 보존을 위해 낮에는 주변 숲, 기존 물길, 대상지 내 저류지 현장 조사를 수없이 하고, 밤에는 이러한 것들을 보존 및 활용하기 위한 친환경적 설계 기법을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전 직원이 밤낮으로 열심히 한 결과로 다행히 당선돼 국가 사업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 전남도립미술관 예당이 계획한 첫 미술관이자 현상설계부터 완공까지 참여한 프로젝트다. 전라남도 영산강과 섬진강 주변의 지문(地文)을 디자인 콘셉트로 남도의 예술과 문화를 담는 공방 개념을 적용했다.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을 최대한 강조하고 이용자들의 다양한 행태를 수용하기 위해 중심 공간에 풍요로운 평야를 상징하는 뜰을 조성하고, 가로변으로 일반 시민들의 공공성 확보를 위한 가로공원을 계획했다. 흥미로웠던 점은 대상지 내에 철거 직전의 구 광양역과 연계한 창고를 재활용하는 것이었다. 항상 새로운 공간만 디자인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 쓰러져가는 건축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현재 광양예술창고라 불리는 이곳은 미술관의 특성을 고려해 공방 개념을 적용하여 리모델링했고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있다. 부산국제아트센터 땅의 에너지는 공원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부산국제아트센터는 일제강점기 경마장에서 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가 점유하고 부산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100년의 기다림 끝에 만들어진 프로젝트다. 기존에 해왔던 공간을 한정하는 디자인에서 벗어나 공간의 형태와 경계 없이 건축물과 하나 되는 디자인을 고민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부산시민공원에 오래도록 뿌리내릴 기억인 ‘어반 루트(Urban Root)’ 개념은 건축물이 한 그루의 나무처럼 도시와 공원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수많은 길은 주변의 자연과 시민들을 연결하고 흡수하며 다양한 크기의 프로그램 패치들은 새 로운 생장의 공간이 된다. 추상적 개념을 형태 디자인으로 변경하기 까다로운 프로젝트였지만 새로운 시도가 좋은 경험으로 자리 잡았다.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제주 첫 번째 6성급 호텔을 지향하면서 지은 해비치호텔은 표선 해변 마을에 위치한다. 제주 중문과 달리 조용한 휴양과 힐링을 테마로 요란하지 않은 차분한 경관을 연출하고자 했다. 전체적으로 단순한 색상과 조형성을 기반으로 시각적 복잡성을 최소화하고 경계를 최소화해서 주변과의 경관적 연계를 도모했다. 호텔 전면 잔디마당과 표선의 바다를 시각적으로 연계하기 위해 전면부를 자동차 도로보다 1.5m 들어 올려 조성했다. 덕분에 도로에 의해서 경관이 단절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바다 풍경이 호텔 로비로 이어진다. 테니스 코트는 1.5m 낮게 조성해 펜스의 노출을 최소화했다. 국내 호텔 중 최대 규모인 아트리움은 규모에 걸맞게 제주 느낌을 살린 대형목을 심고자 했으나 생육 환경을 고려해 여우꼬리야자를 심었다. 다행히 풍부한 녹음을 연출할 수 있었다. 당초 하부에는 다양한 화목과 지피식물을 식재했으나 역시 단일 수종으로 교체해 단순한 경관으로 조성됐다. 내부의 시설은 조경과 인테리어의 협업으로 시설과 바닥 패턴까지 현장에서 도면 작성 및 샘플 시공을 통해 디테일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기술사사무소 예당(Yedang)은 조경설계를 통해 보다 나은 미래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2006년 설립됐다. 설계 구성원 개개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타 분야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지향하며 주거, 공공, 호텔, 리조트 등 공간 설계부터 경관 설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www.yedangla.com
  •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돌아보면 공원이 있었다
    에피소드 1 조경학 전공자가 아니고서야 도시 인프라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공원’을 그 자체로 들여다보는일은 거의 없다. 일상의 한 조각, 매일 지나가는 하루의 어떤 배경. 그래서인지 조경학과로 넘어오기 전 내가 공원을 특정한 공간이자 장소로 인지한 날은 매우 뚜렷하게 남아 있다. 2013년 봄, 뉴욕 하이라인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뒤 계획서 초안을 들고 지도교수를 찾아간 어느 오후. 약 한 시간에 걸쳐 좀 더 재미있는 연구가 될 만한 주제로 다시 가져오라는 조언을 듣고 발걸음도 무겁게 학교 건물을 나왔다. 지난 두 달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건만, 한숨 가득 꿉꿉한 기분으로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일부러 센트럴파크로 돌렸다. 80번가 인근 게이트를 넘어 작은 소로를 따라 15분을 걷다 보면 터틀 연못(Turtle Pond)이 나온다. 허벅지까지 오는 낮은 펜스가 있는 명상 공간으로 그 용도가 명확히 정해져 있다. 센트럴파크에는 여덟 개 명상 공간이 있는데, 활동적인 프로그램으로 촘촘히 짜인 공원의 다른 지역과 달리 휴식을 취하며 주변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공원 초창기 옴스테드의 의도가 남아 있는 지역이다. 펜스를 조심히 밀고 들어가 노트북으로 무거운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잔디밭에 주저앉아 무작정 연못을 한참 바라보다 잔잔한 수면이 지겨워 주변 사람들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이곳은 명상의 공간이기보다는 ‘시끄러우면 안 되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책을 한 손에 쥐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고, 그 옆에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브라운 백에서 조심스레 음료를 꺼내 순식간에 마시고 다시 집어넣는 것을 보니 분명 술이다. 각자의 행동은 다르지만 공통점 한 가지가 있다. 집으로 가는 대신 공원의 이 조용한 공간에서 자신의 시간을 보내겠다고 결정했다는 점. 뒤편 낮은 둔덕 위 이리저리 겹치는 소로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그 사이사이에 깔린 잔디는 공원을 향유하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의 임시 거처가 된다. 그 밑으로는 다리 아랫길이 있어 돌벽을 울림판 삼아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펴 석사학위 논문 계획서 파일을 새로 열었다. 대단한 발견도, 의미심장한 마음가짐도 없이 무작정 센트럴파크를 주제로 잡았다. 그렇게 내 첫 석사논문을 썼다. 공원, 무엇이 떠오르는가? 이른 새벽 양팔을 열 맞춰 흔들며 공원을 거니는 어머니들, 점심시간 삼삼오오 회사 출입증을 목에 건 채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는 회사원들, 자전거 타고 공원을 통해 학원으로 향하는 학생들, 주말이면 으레 손을 꼭 붙잡고 공원을 거니는 예쁘게 차려입은 연인들. 물론 종종 시끄럽고 환경에 저해되는 행동도 목격되지만, 그조차도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목적이 무엇이든, 공원은 분명 바쁘고 정신없는 도시 일상에서 순간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공간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도시공원에서 여가를 보내는 것을 ‘자연스러운 행위’로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그 전에, 도시공원이 대체 왜 우리에게 이렇게 의미 있는 곳이 되었을까? 일련의 질문 끝에 결국 답은 내 자신, 즉 나의 경험과 지금까지의 일상에 놓여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렇게 시작한 기획이 이 글,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다. 아파트 공화국의 공원 1988년 9월 제24회 서울올림픽이 서울의 구석구석을 뒤집어 놓았다.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아보 자면, 올림픽대로가 뚫렸고, 한강 정비 사업이 진행됐으며, 잠실주경기장이 완공됐을 뿐 아니라 올 림픽공원이라는 대규모 기념 녹지가 문을 열었다. 대한민국에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별명이 따라 오기 시작했고, 아파트 숲에서 태어나 아파트로 은퇴하는 라이프 사이클이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나 자신을 포함, 이 시기에 태어난 대한민국의 밀레니얼은 그 전의 세대와 분명 다른 도시를 경 험했다. 아파트 중심의 도시 구조에서 태어나 그 확장을 지켜보며 자랐고, 여러 신도시의 흥망성 쇠를 지켜보며 도시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대중매체에서 말하는 대단지 아파 트의 부정적 측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유년 시절을 다시금 생각해보면, 텔레비전 속 ‘아파트 112 perspective 공화국’과 내가 살았던 대단지 아파트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 결국 이 아파트 공화국에 살아가던 내 어린 시절이 그렇게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다. ‘아파트 공화국’ 서울과 내가 설던 서울은 무엇이 달랐을까? 지금도 콘크리트 숲을 사랑하는 조경 이론 연구자로서 생각해 보건데, 그 간극에는 ‘조경’이 존재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아파트 공화국은 직사각형 상자의 끝없는 연속으로만 존재하는 장면이었고, 내가 사는 아파트 도시는 공 원과 수공간, 광장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그 사이를 채우는 아파트 단지들의 연속이었다. 땅에 발 을 딛고 천천히 ―물론 딴에는 재빠르다고 느낄 것이 분명하지만― 걸어 다니는 어린아이에게 아파트는 그저 집의 한 형태에 불과했고, 도시란 바깥의 공간, 즉 오픈스페이스였다. 단지 밖을 나가 중앙 길을 걷다 보면 동그란 소나무 조경 공간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큰 도로를 향해 걷다 보면 올림픽 광장 이 나왔으며, 또 한 번 큰 길을 건너면 올림픽공원에 도착했다. 내가 살던 동호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걸어 다니는 길과 공원은 기억하다니. 랜드마크라는 개념을 배우기 전이기에, 어떤 일상의 경험이 조합되어 공원을 도시의 방점으로 인지했을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공원, 어떤 목적을 지닌 땅 그래서일까. ‘자연’은 공원과 동의어였다. 아니, 적어도 그 당신의 나에게는 공원이 자연의 원형 (prototype)에 더 가까웠을지 모른다. 학교에 다니고 지역을 옮기며 점차 공원과 자연의 구분이 생겼 지만, 학교에서 배운 자연은 그림 속에 나오는 산이라는 것에 불과했고 공원의 자연은 내가 살아 가는 공간이었다. 학교에서 백일장을 여는 곳도 공원, 체육대회를 여는 곳도 공원, 교내 마라톤 대 회조차 공원에서 했으니 익숙함의 정도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대자연의 원형 을 실제 자연이 아닌 풍경화(landscape painting)에서 찾았던 18세기 영국의 정원가들처럼, 또는 자연 스러운(nature-like) 공원 형태를 미국의 황야가 아닌 영국 정원에서 찾은 미국의 조경가들처럼, 자 연의 원형을 심상image으로 존재할 수 있다. 오히려 실제가 아닌 심상에 기반했기에 공원은 도시 의 새로운 공간 유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연을 닮기를 바라면서도 자연과 완전히 다른,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공간이 정원이라면, 공 원은 그 개념을 도시로 확장하는 동시에 ‘도시의 다른 곳과 구분되는 특정 기능’을 지는 곳으로 세부화 됐다. 공원(park)의 어원은 ‘위요된 일정 규격의 땅’을 의미하는 4세기 이전 옛 서부 게르만 어 ‘파루크(parruk)’로 거슬러 올라간다.1 이후 중세 프랑스어와 중세 영어로 발전하며 보다 주체적 으로 ‘왕의 숲royal forest 등에서 사냥에 쓰이기 위한 짐승을 키우는 곳’으로 의미하게 됐다. 여기서 분화해 군사적 목적을 위해 구획된 자연을 의미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는데, 여기서 나온 것 이 ‘주차하다’라는 의미의 ‘파킹parking’이다. 설핏 보면 굉장히 다른 의미 두 가지가 공존한다고 보이지만, 사실은 그 뿌리에 ‘어떤 특정한 목적을 지닌 땅’이라는 공통분모가 남아 있다. 공원 내부만을 본다면, 특정한 목적 없이 여가를 보내는 공간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서너 걸 음 뒤에서 시야를 넓혀 보면, 공원은 그것을 포괄하는 도시와 분명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 이 드러난다. 여기서 목적이란 ‘현대 도시의 생산적 기능과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즉, 공원 이란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고, 강아지와 프리스비를 ‘던질 수 있는’ 공간이며, 돗자 리를 펴고 한강을 바라보며 뜨거운 라면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생산적 효율성과 기능이 켜켜 이 쌓아 올라간 도시 한복판에서 이처럼 자유로움이 넘실거리는 공간이자 내가 하고 싶은 것 혹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음을 매 순간 체험하게 만드는 도시의 고유한 공간이다. 에피소드 2 완성된 작품은 과연 작가의 것일까? 미술관 큐레이터가 되겠다며 한창 미술사 공부에 열을 올리 던 내게 울림처럼 다가온 어느 교수님의 화두였다.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에게 저작권이 있을지언 정, 그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때문에 작품은 여러 개의 삶(multiple lives of a work of art)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작품이 거쳐 가는 여러 삶은 과 연 작가의 것일까? 에피소드 3 1998년 겨울, 매주 토요일 오후는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서 보내는 시간이었다. 워싱턴 DC 몰(The Mall)을 따라 걸으며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고전주의 특유의 하얗고 높은 계단을 뛰어 올라가면 고풍스러운 갈색 현관이 있었고, 로비에 들어서면 나를 반겨주던 공룡 뼈 전시가 있었다.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특별전을 제외하면 모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데, 당시 언어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었던 우리 가족에게 박 물관만큼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 없었다. 박물관을 나와 워싱턴 기념비(Washington Monument)를 향해 천천히 걷곤 했다. 날이 좋으면 멀리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까지도 도전하곤 했다. 특히 날이 풀리기 시작하는 5월이면 잔디밭 광장에 피크닉 돗자리를 펴놓고 따스한 햇빛 아래서 시간을 보내는 인파가 몰렸는데, 햇빛은 무조건 피하라는 조언을 듣고 자란 내게 그렇게 신기한 광경이 없었다. 태양을 피하지 않는 사람들의 존 재란 태양볕을 쐬면 안 되는 사람의 존재만큼이나 놀라웠다. 그러니까, 먹물 뺀 공원 썰 여러 국가의 공원에서 일상을 보내던 것이 대학원에 가서야 어떤 구분할 수 있는 특정한 경험으로 인지됐다. 일상의 놀라움 혹은 무서움이 아닌가 싶다. 그 어떤 놀라운 스펙터클도 그것이 일반화 되어버리는 순간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데, 공원이란 곳은 완전히 반대였다. 물론 그만큼 일 상에서 편하게 향유하던 공원이 더 이상 편안하지 않는 분석과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도 사 실이다. 필자는 공원이 일상의 한 부분이었던 예전의 관점과 공원이 연구의 대상인 현재 사이, 어느 중 간 지점에서 양쪽을 모두 살펴보고자 한다. 일상의 부분들이 모두 깨달음으로 다가오고 그 배경 에 공원이 있었던 개인적 기억과 연구자로서 공원을 살펴보는 층위적 시야가 합쳐지면 무언가 재 미있(을 수 있)는 것이 나오지 않을까. 소위 먹물을 뺀 이야기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어떤 그림이 나타 날까. 공원이 일상의 장에서, 관심의 공간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필자에게 의미 있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순간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각주 정리 1."Park”, Merriam-Webster Dictionary.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 신명진
  • [에디토리얼] 모던스케이프
    19세기 말, 근대 도시로의 진입을 알린 신문물 중 하나는 전차였다. “수백 년을 이어 온 도시 경관에 전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느낀 충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도시의 균열”을 가져온 전차가 “우리의 불안한 근대 풍경”의 서막을 연 셈이다(405호). “근대 도시의 아이콘인 방사형 가로”도 도시 구조와 형태의 개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412호). 한강의 전원풍 “심미적 가치는 서울의 근대화와 함께 사라지거나 변질됐”다. “자원 수송을 위한 철도 부설과 치수의 수단으로서 제방 조성, 수해로 재편된 백사장의 낯선 풍경”은 전원에서 도시로 한강을 급변하게 했다(426호). 변화의 급류에 던져진 것은 도시의 물리적 바탕만이 아니었다. 여러 열강과 통상 조약을 맺으면서 국경의 빗장이 열렸고, “외국인 거류지가 만든 이국적인 근대 풍경” 속에 “혼란과 잡거(雜居)의 도시”가 형성되면서 “조선인들은 자신의 땅에서 역차별받는 불우한 시대를 겪어내야만 했다”(406호). 서구 근대 도시의 발명품인 공원이 이식되었다. 공원은 당시 도시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대한제국기를 거치며 계획된 두 개의 공원, 즉 독립공원과 탑골공원은 “자주적 시도였지만 미완에 그쳤고 공원을 매개로 근대화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닮았다”(407호). “일본 최초의 근대 도시공원인 도쿄 히비야 공원을 설계하고 국립공원을 지정하는 기틀을 잡은 혼다 세이로쿠”는 “경성부 남산공원 설계안”을 수립했을 뿐 아니라, “한국 주요 도시에 대공원 설계와 국립공원 지정, 풍경 활용 계획 등”을 마련하는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411호). “개항 이후 가장 급진적으로 변한 곳은 궁궐”이었는데, 창경궁의 공원화, 즉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건립이 결정된 이후 가장 먼저 만든 시설”은 “대온실”이었다(416호). 식민지기 경성에서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자 “사직(社稷)과 함께 수도 한양 건설의 핵심이었던 종묘”의 공원화까지 논의되었다(415호). 현재의 효창공원 자리는 원래 원묘園墓였으나 “묘역 일대에 근대의 성격이 간섭되기 시작”하면서 공원을 비롯한 “여러 시설의 층위가 중첩되어” 복합적 공원으로 진화했다(420호). “도시의 자연 대체제로서의 공원”은 “근대 초기에 도덕과 문화, 윤리가 박탈된 도시를 구원할 …… 이상적인” 공간으로 여겨졌지만, 공원이 “생각처럼 순수하게 이용된 것만은 아니”었다. 공원은 “근대 도시의 암울하고 야만적인 민낯을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의 주요 제례처인 사직단을 품고 있는 사직공원은 …… 아편과 모르핀 따위에 중독된 부랑자들이 유독 많이 이용한 곳”이었으며, “옴스테드가 꿈꾼 공원의 목가적 이상향은 실제 세상에는 없는 신기루였음을 일찌감치 보여주고 있었다”(422호). “지금은 마땅하다고 알고 있는 개념 중에는 근대기에 처음 등장한 것이 생각보다 많다. …… ‘어린이’도 그중 하나다.” “유치원, 아동 운동장, 유희 시설 등 어린이 시설이 조성되면서 어린이에 대한 사회상이 공간에 투영되기 시작했다”(409호). 1950~1960년대에 활발했던 “아동공원 조성”도 이런 맥락의 연장선 위에 있다(423호). 정원은 근대의 풍경 속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개항기와 식민지기에 “공원과 공공 정원이 함께 들어왔”지만, 그 기능과 성격이 정확하게 구별되지는 않았다. “동아시아의 여느 국가처럼 근대 도시 시설의 이식 과정이 단순했”던 당시, “공원이 파크와 퍼블릭 가든의 구분 없이 모두를 아우르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되면서 퍼블릭 가든은 파크와 혼성되고 사라져 버렸다”고 볼 수 있다(421호). 1930년대에는 “일부 계층에서 주택에 정원을 두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이들의 주택 정원이 대중매체를 통해 소개되면서 정원 딸린 주택이 점차 이상적인 주거 환경으로 정착했다.” “주택 정원은 개인의 취미와 취향을 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대적 환경이었다”(417호). 옥상정원은 “백화점이나 호텔에 처음 설치”됐다. “사람들은 도시 한복판 건물 최고층 높이에서 일상 공간을 내려다보면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생소한 개방감과 낯선 시선을 경험했다.” “세련된 장식과 시설, 최고급 서비스를 향유하는 서양식 사교 활동이 가능했기에, 자본과 권력을 가진 상류 계층은 물론 진보적 성향의 모던걸과 모던보이는 옥상정원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418호). 근대 도시는 새로운 여가 문화와 공간을 낳았다. “대중을 위한 공공의 오락 장소로 발전”한 동물원은 “도시 근대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시설”이었다. 하지만 창경궁에 들어선 최초의 동물원은 “근대 정신 대신 식민지기의 상흔이 다른 어느 곳보다 짙게 밴 공간”이었다(413호). “군마 개량과 위락 기능”을 합한 경마장이 곳곳에 건설되기도 했다(410호). 서구의 경우와 유사한 본격적인 관광 개념도 자리 잡는다. “근대 관광은 국토 곳곳에 명소라는 권위를 부여했지만, 식민 국가에서 지배자의 왜곡된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기에 여행의 진정한 즐거움”을 취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414호). 관광은 해변을 변화시키기도 했다. “관광지로 낙점된 해변 지역의 개발은 철도 부설 및 역사 건설과 짝을 이뤄 진행됐다. 해변에는 치유와 요양을 위한 숙박 시설, 오락과 사교를 위한 구락부 …… 등이 들어섰”으며, “유럽에서 건너온 해변의 여가 문화와 풍경”이 이 땅에 서서히 스며들었다(424호). 이미 알아채셨겠지만, 앞의 내용은 이번 호로 막을 내리는 ‘모던스케이프’의 여러 부분을 이어 붙인 것이다. 따옴표 안의 문장 혹은 구절은 모두 연재 글에서 가져왔다. 지난 2년간 24회에 걸친 긴 여정을 안내하며 근대 여명기의 도시 풍경을 상상하고 이해하게 해준 박희성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 글 마지막 문단에서 그가 말하듯, “암흑기이자 단절기로만 단정해왔던 20세기 전후 시기가 사실은” 도시 풍경의 현재를 “있게 한 중요한 토대였음을 공감”(428호)한다. 다시 한 해를 통과한다. 함께해주신 여러 독자와 필자 덕에 본지는 소통과 공론의 장을 자임하며 조경 저널리즘의 최전선을 걸을 수 있었다. 『환경과조경』의 친구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 [칼럼] AI시대 조경가의 미래, 인공지능과의 대화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의 고금리 기조와 이스라엘-하마스 사태 등 대외 여건의 불확실성이 반영되면서 국제통화기금과 한국개발연구원이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1.5%에서 1.4%로 하향했다. 내년 성장률 전망치 또한 2.2%로 종전보다 0.1% 낮춰 잡는 등 한국의 경제 저성장이 가시화되고 있다. 건설 경기 또한 선행 지표인 건설 수주(-13.6%)와 주택 착공(-63.6%)이 큰 폭으로 감소세를 지속하며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국내 건설시장의 향방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조경계의 전망도 녹록치 않다. 대부분 소규모 영세 사업자인 조경설계사무소들도 몇 년 전부터 설계대가는 오르지 않고 늘어난 임금과 줄어든 근무 시간으로 인해 한계에 직면해 있다. 더구나 인공지능(AI) 시스템은 일반 작업에서 인간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건축계는 이미 AI를 다방면에서 활발히 응용하고 있고, 조경 분야에서도 이제 모른 척 할 수 없는 중요한 이슈로 회자되고 있다. 컴퓨터가 도면을 그려줄 수 있다는 소식에 신기해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오토캐드 시대를 넘어 미래에는 AI가 조경가의 일을 대신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느낀다. 도구와 수단에 불과했던 컴퓨터의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AI가 조경설계의 전반 과정을 수행한다면 조경가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대화형AI 서비스인 챗GPT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AI가 조경설계 업무를 할 수 있을까. 다양한 기술과 알고리즘을 활용해 AI는 일부 조경설계 작업을 자동화하고 지원할 수 있습니다. 아래는 잠재적 기능과 이점에 대한 몇 가지 예시입니다. 1. 데이터 분석과 예측: AI는 지리 데이터, 기후 조건, 토양 특성 등 다양한 정보를 분석하여 어떤 식물이 특정 지역에서 가장 적합한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2. 자동화된 디자인 생성: AI는 조경 디자인을 자동으로 생성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의 목표와 제약 조건을 고려해 여러 디자인 옵션을 제시하고, 심지어는 디자인을 최적화할 수 있습니다. 3. 환경 모의실험: AI는 조경 디자인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모의실험을 통해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생태학적 효과를 최소화하거나 지속가능한 옵션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4. 자원 최적화: AI는 특정 지역의 기후와 토양 조건을 고려하여 물, 비료, 및 에너지 사용을 최적화하는 조경 계획을 수립할 수 있습니다. 5. 시각화 및 가상 현실 활용: AI는 디자인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가상 현실을 통해 디자인을 실제 환경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6. 지속가능성 측면 강화: AI는 지속가능한 디자인 옵션을 식별하고, 재생 가능 에너지 및 자원 효율성을 고려해 조경설계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AI는 전문 지식 없이는 사용자의 목표와 제약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인간의 창의성과 지역적인 특수성을 반영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AI가 조경설계를 지원하는 경우에도 전문가의 감독과 협력이 중요할 것입니다. 또한, AI의 사용은 윤리적인 측면과 환경적 영향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AI가 조경설계를 한다면 조경 전문가는 어떤 일을 해야 하나. 다음은 AI가 조경설계를 수행할 때 조경 전문가가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한 몇 가지 예시입니다. 1. 데이터 입력 및 초기 설정: 조경 전문가는 AI에게 필요한 초기 데이터를 제공하고, 프로젝트의 목표, 제약 사항, 사용자의 요구 사항 등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2. 알고리즘 튜닝 및 교육: AI 모델의 학습을 지원하고, 모델의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알고리즘을 조정하거나 추가적인 훈련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3. 디자인 가이던스 제시: AI가 생성한 디자인 결과물에 대한 전문적 평가를 제공하고, 사용자의 취향, 지역적 특성, 환경적 영향 등을 고려하여 디자인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4. 환경적 고려 사항 추가: AI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디자인을 생성하므로, 전문가는 더 깊은 환경적 고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특정 식물의 성장 특성, 지형 특이성 등을 고려하여 디자인을 최적화할 수 있습니다. 5. 사용자 상호 작용 및 피드백 수집: AI가 생성한 디자인을 사용자와 상호 작용하여 피드백을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정하여 보다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6. 지속가능성 및 생태학적 평가: 전문가는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AI 결과물을 평가하고, 생태학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추가 지침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7. 지역적 특수성 및 문화적 고려: 지역의 문화, 역사, 풍경 등을 고려하여 디자인을 지원하고, 지역 특수성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8. 윤리적 측면 감독: AI가 생성한 결과물이 윤리적인 측면에서 적절한지 감독하고, 필요한 윤리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조경 전문가의 역할은 AI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전문적인 통찰력과 창의성을 통해 디자인을 보다 풍부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협력적 방식으로 AI와 조경 전문가가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하면, 높은 수준의 조경설계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조경설계가는 변화하는 AI시대에 대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다양한 전략과 준비 과제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1. AI 기술 이해: AI 관련 기술 동향을 파악하고, 조경설계 분야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이해합니다. AI의 기본 원리와 작동 방식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쌓아둡니다. 2. 자동화된 도구 활용 능력 향상: 자동화된 도구 및 소프트웨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웁니다. 3D 모델링, 가상현실, 시뮬레이션 등의 도구를 습득합니다. 3. 데이터 기반 의사 결정 강화: 데이터에 기반을 둔 의사 결정 능력을 향상시켜 AI의 결과를 더욱 효과적으로 평가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4. 창의성 및 디자인 감각 강화: 창의성과 독창적인 디자인 감각을 강화해 인간적인 감성과 차별성을 부여하고, AI 결과물을 보완합니다. 5. 지속가능성과 환경 고려: 지속가능한 디자인 및 환경 고려 사항을 강조하고, AI의 결과물이 지속가능한지를 평가해 생태학적 영향을 최소화합니다. 6. 소통 및 협업 능력 강화: 다양한 전문가와의 소통과 협업 능력을 강화하여, 효과적인 팀워크를 구축하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도록 합니다. 7. 업무의 다양화와 전문화: 자동화가 가능한 부분을 이해하고, 특화된 분야에 집중해 전문성을 발전시킵니다. 8. 윤리적 고려와 책임: AI의 결과물이 지닐 수 있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설계 과정에서 윤리적 책임을 다하도록 합니다. 9. 지속적인 학습과 업무 평가 : 지속적인 학습 습관을 기르고, 자신의 업무와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평가해 개선의 여지를 찾아나가도록 합니다. 10. 비기술적 역량 강화: 소통 능력, 문제 해결 능력, 리더십 등과 같은 비기술적 역량도 향상시켜 프로젝트를 더욱 효과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11. 커뮤니티 참여 및 지식 공유: 조경설계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지식을 공유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경험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챗GPT는 단 몇 초 안에 일련번호까지 달아서 답변을 해주었다. 놀라운 속도는 물론 논리적이고 정돈된 답변 내용에 말문이 막힌다. ‘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처럼 조경설계를 할 수 있을까?’란 의문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인간만이 가지는 고유의 감각과 감수성, 창의성의 영역에서 분명히 인공지능을 능가하리라 자신한다. 하지만 작품을 판정할 때 이러한 영역은 완벽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주관적 의견일 수 있다. 언젠가는 무수한 통계와 축적된 데이터로 무장한 AI의 작품이 더 선호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경설계 과정은 수많은 전문가의 협업과 의사소통, 클라이언트와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창조 작업으로, 문제 해결 과정에서 AI가 해낼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설계 과정에 동반되는 수많은 작업을 AI가 해결하고 조경가는 좀 더 창의적인 디자인과 소통에 집중할 수 있어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눈앞으로 다가온 인공지능의 세상에서 조경가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 [풍경감각]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라고 하기에 궁금했다. 받고 싶은 선물을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아내는지. 그래서 실험하기로 했다. 부모님이 귀띔을 해주는 것 같으니, 갖고 싶은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무엇을 받고 싶은지 자꾸 물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니 부모님이 산타의 스파이인 게 확실했다. 그래서 산타 할아버지는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라며 씨익 웃기만 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책상 위에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 있었다. 우리집 산타는 머리맡이 아니라 책상 위에 선물을 두고 갔다. ‘다이아몬드’라는 보드게임이었는데 엄마는 산타가 주고 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물건을 바란 적이 없다고 하자, 산타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잘못 고른 것 같다고, 다음엔 산타에게 미리 연락할 테니까 갖고 싶은 선물을 엄마한테만 살짝 말해달라고 했다. 부모님이 스파이일 거라는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다음부터는 갖고 싶은 것을 꼭 말했고, 크리스마스 아침에 원하던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성탄절을 서너 번 거치면서 부모님이 산타일 거란 의심이 싹텄지만 실험은 하지 않았다. 대신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산타를 믿는 어린이가 되기로 했다. 선물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열한 살 즈음인가. 이번에는 내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산타에게 들켰고, 선물은 끝났다. 실험을 했던 크리스마스에 원래 받고 싶었던 선물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지만, 그해 산타가 잘 못 주고 간 다이아몬드 게임은 선명하다. 책꽂이에 버리듯 꽂아 넣었더니 엄마는 선물이니까 한번 해봐야 한다고 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지만 엄청 좋아하지는 않아서 종종 친구들이 놀러 오면 꺼내서 한 판씩 했다. 그리고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너, 산타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니?” 나는 아무래도 나쁜 애였던 것 같고, 산타도 이 점만큼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어제의 대화, 오늘의 재구성] 조현진 여리고 애틋한 아름다움에 대한 기록
    대학교 2학년 시절, 대학 동기인 조현진이 동네 골목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시선의 끝이 향한 곳은 담벼락을 따라 놓인 각양각색의 화분들이었는데, 알고 보니 주변 경관 속 미적 요소를 분석하는 과제를 하는 중이었다. 조현진은 화분의 개수와 형태, 그 속에 심긴 식물의 종류를 기록했다. 평범한 화분도 있었지만 본래의 용도에서 벗어나 식물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된 물건들도 모조리 적혔다. 빨간 고무대야, 귀퉁이가 깨진 욕조와 항아리, 우유팩까지. 그 주제가 참 독특해서 과연 교수님을 설득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과제는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좋은 학점까지 받았다. “마스터플랜 없이 만들어진 정원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보통은 어떤 조경가가 그은 선을 따라 공간이 조성되지만, 화분들이 만든 그 풍경은 실제 머무르는 주민들이 식물을 심고 싶다는 마음을 따라 천천히 완성된 결과물이에요. 사실 그곳의 생활환경이 쾌적하지는 않았는데, 고추나 깻잎 같은 작물을 길러먹고 주민들이 계속해서 주변 환경을 가꾸어 나가는 모습과 마음이 애틋해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그린다는 건 어떤 순간을 포착해 영원으로 남기는 일이기도 하다. 조현진은 그 순간을 ‘마음이 머무는 자리’라고 이야기했다. 그 자리의 형태를 짐작해보고 싶어서 그간의 ‘풍경 감각’(14쪽)을 읽으며 몇몇 표현과 단어를 건져 올렸다. 우연, 잠시, 어슴푸레, 멀어지는 것, 사라지는 것, 돌아오지 않는 것, 존재할 수 없는 풍경, 산들거리는, 햐얗고 보송한, 상상하지 못하는 풍경, 환상, 뿌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조곤조곤, 발걸음을 붙잡아주길 바라는 마음. 어제는 뭐했나요? 마지막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왔습니다. 그간 MBC 라디오 ‘세상을 여는 아침’에 격주 목요일마다 게스트로 출연해 식물 이야기를 하는 코너를 진행했어요. 1년하고도 8개월 정도의 시간 동안 함께해서인지 좀 허전하네요. LH가 발간하는 소책자에 수록될 그림의 스케치를 하는 중인데, 정원 공간에 심긴 식물을 소개하는 지면에 실릴 세밀화 작업이에요. 12월에 코엑스에서 개최되는 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에서 선보일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식물 세밀화’가 단순히 식물을 상세하게 그리는 작업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관찰과 연구에초점을 맞춘 그림을 식물 세밀화라고 부르더라고요. 넓은 의미로는 식물을 상세하게 그린 그림을 뜻할 수도 있지만, 좁게는 식물 한 종의 분류학적 특징을 정확하게 그려낸 그림을 식물 세밀화라고 불러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절 소개할 때 식물 세밀화가라는 표현은 쓰지 않아요. 식물을 소재로 삼지만 연구보다는 ‘덕질’하는 마음으로 관찰하고 그리거든요. 식물학적으로 중요한 식물 종의 특징도 바르게 다루려고 하지만, 이파리가 떨어진 자리에 나는 자국처럼 제가 식물에서 흥미롭다고 느낀 부분, 예쁘고 귀엽다고 느낀 부분이 잘 보이게 그리려고 해요. 사람들이 식물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린다는 점이 표현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식물 소재로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태니컬 아티스트라 불러요. 그런데 저는 식물뿐 아니라 다른 소재를 그리기도 하고, ‘풍경 감각’ 같은 에세이를 쓰기도 해서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주로 소개합니다. 대부분이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 성적에 맞추거나 진학하면무엇을 배우는지 구체적으로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브런치(brunch.co.kr/magazine/we-are-tree)에 연재한 글을 보니 어렸을 적부터 식물에 애정이 깊었더라고요. 그 애정이 바탕이 되어 조경학과를 선택했나요. 식물이 좋아서 조경학과를 선택한 게 맞지만 성적에 맞춰 입학한 게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한 가지 이유로 어떤 일을 선택하지는 않으니까요. 어릴 적 꿈은 화가였고, 중학생 때부터는 식물학자를 꿈꿨어요. 좋아하는 식물의 계통이 한국에서 자생하는 초본 종류였거든요. 공부해보니 정작 한국에서 심어 가꾸는 화초는 외국에서 들여와 개량한 것이 많더라고요. 자생 식물을 연구하고 정원 식물로 쓸 수 있게 개발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입시 준비를 하다 보니 수험 공부도 이렇게 힘든데 연구를 평생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조경이라는 분야를 발견했어요. 사실 입학 당시만 해도 ‘조경’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차를 타고 교외에 나가면 볼 수 있는 ‘○○조경’이라는 간판을 단 조경수 농장이었어요. 그래서 막연히 조경은 정원을 만드는 일이겠거니 생각했죠. 조경을 배워서 내가 좋아하는 자생 식물을 듬뿍 심은 정원을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입학했는데, 조경은 정원보다 훨씬 큰 영역을 다루는 학문이더라고요. 식물을 소재로서 공부하지만, 식물보다 사람의 이용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설계도 많았고요. 예상과는 달랐지만 재미있는 학문이었습니다. 조경학과 하면 식물을 주로 공부하고 잘 알 거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식물과 관련된 수업량이 설계보다는 적고, 특히 초본이나 화훼류를 다루는 경우가 드물죠. 수목학 수업을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해요. 식물을 공부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중학교 때 만난 선생님이 환경운동가였는데, 늘 꽃만 들여다보는 저에게 “지금은 꽃과 풀만 좋아하지만 계속 관심을 갖다보면 나무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될 거야”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과연 관심을 갖게 될까 의구심이 들었어요. 꽃과 초본을 좋아했던 이유가 여린 느낌에서 오는 아름다움 때문이었거든요. 그런데 대학에서 수목학 수업을 들으며 나무 공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어요. 초본의 경우 보통 구별하는 포인트가 꽃에 있거든요. 그런데 나무는 꽃이 너무 높은 곳에 달려 있거나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도대체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궁금했는데, 수피, 잎맥, 잎 끝의 모양, 잎이 나는 방식, 줄기의 생김새 같이 섬세한 부분으로 구별할 수 있더라고요. 대상의 스케일은 커졌는데 오히려 작은 부분에 집중해야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또 초본은 종류도 많고 이를 구분하는 방식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정말 분분해요. 물론 수목 공부도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초본에 비해 좀 명쾌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초본보다는 종수가 적어서 그런지 공부하는 만큼 지식이 금방 쌓이는 기분이고요. 혼자 공부할 때는 식물을 감으로 구분했었는데, 수목학 수업을 통해 교수님과 명확한 근거를 통해 수목을 구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어요. 한 교수님은 도감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동정(생물의 분류학상의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 포인트를 만들어보라고 했는데, 이 조언이 큰 도움이 됐어요. 나만의 구분 방법을 만들어 내니 식물과 굉장히 친해진 기분이 들더라고요. 학교 다니며 가장 재미있게 들은 수업이나 흥미롭게 한 과제가 있다면요. 1학년 때 들었던 ‘미술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이 떠올라요. 강의를 들을 때마다 교수님이 그림을 사랑한다는 감정이 절절히 느껴졌거든요. 스크린에 자료를 띄울 때마다 “너무 예쁘죠” 하고 말을 건네는 표정을 보면 덩달아 행복해졌어요. 교수님이 강조했던 게 그림을 억지로 외우려고 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수업에서 만난 그림을 광고나 미술관에서 마주치고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좋아지게 될 거라고 했죠. 이 수업 덕분에 그림이 더욱 좋아졌어요. 식물을 이야기할 때마다 이 교수님을 떠올립니다. 식물의 이름과 학명, 특징을 다 알려주고 나서, 그 교수님처럼 모든 것을 꼭 외워야 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해요. 이 식물을 누구와 함께 봤는지, 그날의 날씨는 어땠는지를 기억해도 좋다고 말해요. 그런 기억이 모여 사람들이 식물을 좋아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정원 설계 수업도 기억나요. 가상의 클라이언트를 정해 그를 위한 정원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정원 파워블로거를 클라이언트로 삼았어요. 아파트 베란다에 자신만의 정원을 꾸리던 사람이 주택 정원을 갖게 되면 어떨까 상상하며 정원을 설계했지만 교수님이 탐탁지 않아했죠.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하다 블로그의 게시물들을 다시 찬찬히 읽어 내려갔어요. 블로거의 본업은 교사이고 남편은 직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고 딸이 하나 있는데, 가족이 다 모이는 시간이 적은 게 아쉽다는 글이 눈에 띄었어요. 정원에 가족이 모두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 주변을 화단으로 둘렀어요. 화단은 블로거가 가족과 함께 원하는 식물을 심어 꾸려나갈 수 있도록 비워두었죠. 그제야 교수님에게 좋은 피드백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때 조경가는 정원을 만드는 게 아니라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고, 정원은 집 주인이 직접 꾸미고 가꿔나가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조경설계를 할 때도 일종의 그림을 그리죠. 인상 깊었던 드로 잉 방법이나 표현 기법이 있나요. 도면에 그리는 식물 심벌이 설계 내용을 전달하기에 적절한 표현 기법이라고 생각하는지도 궁금해요. 사실 설계사무소를 다닌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 식물 심벌이 시공에 적절한 표현 방법인지는 깊게 고민해보지 못했어요. 식물 심벌의 형태는 늘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정해진 표현법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형태를 보면 그린 사람이 느낀 식물의 특성을 알 수 있거든요. 황매화 관 목을 그 꽃의 색을 따라 노란색으로 표현한다든지, 침엽수를 나타내는 심벌은 잎의 특성을 따 강조하는 말풍선 모양처럼 끝을 뾰족하게 그린 다든지 하는 점이 재미있어요. 소나무처럼 기우뚱하게 기울어 자라는 나무는 감자처럼 조금 찌그러진 원으로 그리고요. 늘 눈높이에서 바라 보는 나무들을 하늘에서 바라보는 시점으로 관찰해 표현한다는 점이 독특했어요. 졸업 직후에는 조경설계사무소를 다녔죠. 처음 맡았던 일 기억하나요. 막내로서 처음 맡았던 일은 제주도에 있는 한 호텔에 돌을 배치하는 일이었어요. 구획마다 다른 인공지반 제한 하중을 고려하면서 리듬감이 느껴지도록 경관석을 놓았죠.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맛본 건 어 린이대공원 안의 작은 정원을 만드는 일이었어요. 선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보고용 파워포인트도 만들고 도면도 정리하며 책임감을 갖고 임했던 프로젝트에요. 그중 카페 앞에 ‘커피 앤 티가든’이라는 정 원을 꾸렸던 게 기억나요. 공간 이름처럼 커피나무와 차나무, 그리고 세이지처럼 향기가 나는 허브류를 심었어요. 방문객들이 음료의 원재료를 보면서 마시길 바랐거든요. 커피와 차, 그리고 허브티는 우리가 일상 적으로 마시지만 그것의 원재료가 식물이라는 사실을 곧잘 잊게 되니까요. 내한성이 나쁜 수목은 화분에 심어 두고 겨우내 어린이대공원 온실에 옮겨두었다가 날이 풀리면 다시 꺼내오도록 했어요. 야외 테이블 가운데 홈을 파서 허브를 심은 화분을 쭉 놓을 수 있게 했는데, 그 테이블 이 마음에 들었어요. 식물이 바닥에 심겨 있으면 한 덩이로 보이지만 눈 높이에 놓으면 자연스럽게 눈 맞춤을 하면서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들 수 있거든요.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인 만큼 시공이 끝나 현장에 가니 뿌듯하기는 했는데, 첫 사회생활이기도 했고 당시 야근을 많이 했던 터라 기쁨이 그 피로를 이기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그때부터 조경설계를 내가 오래 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 같아요. 흔히 글쟁이, 그림쟁이는 굶어 죽기 딱 좋다는 말을 하잖아 요.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을 택했을 때 두렵지 않았나요. 전 공이 미술이 아니라 기반이 부족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고요. 잘 몰라서 용감했던 것 같아요. 그냥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현실감 없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그래서인지 일을 막 시작할 때도 막막했고, 지금도 어려워요. 당시 가지고 있던 그림이라고는 도면 스케치가 전부라서, 조급한 마음에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요. 미술을 전공한 사람과 비교했을 때 무엇이 제 장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명확하지 않았거든요. 다행히도 그맘때 일러스트 관련 공모가 많이 열렸어요. 네이버가 크리에이터를 위해 만든 플랫폼인 ‘그라폴리오’와 ‘밴드 오브 노들’(노들 꿈섬 운영계획·시설구상 2차 공모 당선팀)이 진행한 공모전이 눈에 띄었죠. 자연, 음악, 노들섬을 주제로 사계절을 보여주는 그림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조경을 전공해서인지 친근하게 느껴졌어요. 봄꽃의 왈츠(봄), 달맞이꽃 이 핀 여름밤(여름), 가을날의 기억(가을), 조용한 기다림(겨울)을 그려 제출 했고 당선되어 ‘2017 노들섬 캘린더’로 제작됐어요. 그 뒤로 조금씩 외주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개인 작업도 틈틈이 했어요. 식물을 좋아하니 식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식물에 관심 없는 사람의 눈길을 끌어올 수 있도록 식물을 영업해보겠다는 마음가짐이었어요. 열심히 하다 보니 『식물 문답』(눌와, 2021) 독립 출판까지 이어졌고, 라디오 게스트 출연 문의가 들어오기도 했고요.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니 참 운이 좋은 편이네요. 보통 작업을 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나요. 이제 곧 겨울인데, 식물을 관찰하며 그리는 일을 많이 하면 계절의 영향도 받을 것 같아요. 세밀화 작업은 식물 크기에 따라서 다르지만 생김새가 복잡하면 한 달 이 넘게 걸리기도 해요. 보통 아무리 빠르게 작업해도 이틀 정도는 소요 되고요. 식물을 주로 그리니 온 계절의 영향을 받아요. 꽃 핀 걸 그려야 하는데 관찰을 할 수 없으면 난감하죠. 작업하기 가장 좋은 계절은 봄이에요. 여름도 좋지만 벌레도 많고 땀이 너무 많이 나서 힘들어요. 평소에 수목원에 자주 다녀요. 되도록 실물을 관찰해 정확한 모습을 그리 려고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을 대비해 사진 촬영을 많이 해두고 필요 할 때 꺼내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그런데 이것도 쉽지 않아요. 올해에는 여러 종의 쑥 꽃을 비교해 그리고 싶어서 계속 홍릉수목원에 갔 어요. 갈 때마다 꽃봉오리만 있고 조금만 있으면 필 것 같은데 그대로더 라고요. 그런데 잠깐 바빠서 며칠 가지 못했더니 야속하게도 그새 꽃이 폈다가 진 흔적만 남아있었어요. 그래도 사진보다는 실물을 보고 정확 한 모습을 그리고 싶어요. 이제 겨울이라 그간 쓰지 못한 글들을 쓰고 내년에 준비하고 있는 신간에 수록할 그림 작업을 시작하려고 해요. 어떤 것을 마주하거나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그리고 싶다는 의지가 발동하나요.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이 가는 순간이 있어요. 막연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마음이 머무는 자리 같은 게 있다고 말하곤 해요.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기보다 신경이 쓰이고 계속 생각이 나는 장면이 있어요. 그럼 왜 계속 떠오를까 고민하기 시작하고, 그때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골몰하면서 역으로 그 이유를 추적해 나가는 편이에요. 그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거라 봐도 될 것 같아요. 일러스트를 그릴 때 가장 선호하는 재료는 무엇인가요. 디지털 툴보다 손 드로잉을 선호하는 이유도 궁금합니다. 연필, 샤프를 제일 좋아해요. 수작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디테일이 풍부하기 때문이고요. 디지털 툴에 좋은 브러시가 많기는 하지만, 수작업을 할 때 흑연이 종이에 남기는 풍부한 질감을 따라잡지는 못해요. 다양한 소재 중에서도 연필과 샤프를 가장 선호하는 이유는, 안심이 되는 재료이기 때문이에요. 과슈, 수채 물감, 색연필도 수정은 가능하지만 자유롭지는 않아요. 연필이나 샤프는 손쉽게 고칠 수 있어요. “잘못 그려도 괜 찮아”라고 얘기해주는 도구인 것 같아서 편안해요. 아슬아슬한 줄타기 를 하는 작업보다 넉넉하다는 기분이 들고, 작업할 때 느낀 이 여유로움 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어요. 흑백이라는 점도 주요하게 작용해요. 하늘을 보면 색이 시시각각으 로 바뀌잖아요. 나무 이파리도 빛을 받고 있을 때랑 해가 닿지 않는 곳 에 있을 때 색이 크게 다르고요. 색이 주는 아름다움도 있지만 순간적 이고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발 디딜 곳 없는 막연한 신기루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색이 구체적이고 만져지지 않는 느낌이라면 형태는 그에 비해 변화가 덜해요.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그 변화마저도 색만큼 다이내믹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형태를 자꾸 쫓게 되더라고요. 특히 단단한 형태를 묘사할 때 느껴지는 안정감을 좋아해요. 연필과 샤프는 흑과 백으로 형태에만 집중하기 좋고, 그 형태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는 재료에요. 채도가 높지 않은 부드러운 색을 주로 사용하는 것 같아요. 앞선 답변과 연결되는데 색이 강하면 형태와 연필 질감이 묻히게 되거든요. 그래서 연한 색을 사용하게 돼요. 기본적인 색만 깔아서 형태와 질감에 많이 집중하도록 만들어요. 생각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형태를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장미로 예를 들어볼게요. 우리는 모두 장미를 알고 있죠. 긴 줄기 끝에 여러 꽃잎이 둥글게 겹친 모습으로요. 그렇지만 그 모습을 오랫동안 들여다본 적은 없을 거예요. 다 똑같아 보이는 장미의 꽃잎은 안쪽으로 갈수록 더 작고 구겨진 형태에요. 그리고 직립하는 줄기에 항아리 모양 꽃 한 송이를 매다는 것은 꽃다발용 장미의 특징일 뿐, 덩굴로 자라는 것이나 평평한 꽃을 피우는 품종, 여러 송 이를 뭉치로 올리는 종류도 있죠. 가시의 크기, 밀도도 다르고요. 그래서 식물 세밀화를 그릴 땐 형태를 제대로 묘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되죠. 그런데 요즘은 채도 높은 색을 쓰면서도 형태와 질감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어요. 너무 옅은 색을 쓰다 보니 오히려 본래 식 물의 특징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그림으로 감상하는 즐거움이 부족하다고 느껴져서요. 한 장의 그림 안에 흑백의 식물과 색을 입힌 식물의 모습을 모두 담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있어요. 인물과 동물을 그릴 때 얼굴을 생략하거나 뒷모습을 그리는 경우가 많아요. 이유가 있나요. 얼굴은 너무 구체적인 감정을 전달해서 빼려고 하는 편이에요. 또 얼굴을 그리는 순간 사람들이 생김새를 보게 되고 그에 대한 평가가 뒤따르 게 되더라고요. 감정이나 생김새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순간 그림에 대한 해석이 너무 좁아지게 돼요. 표정보다는 그림 전체의 분위기나 은유를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얼굴을 생략하거나 가리고 있어요. 2023년 11월호 ‘풍경 감각’ 글인 ‘11월 저녁’도 얼굴 위에 구름을 올려두었는 데, 표정을 다 그린 후 구름으로 덮은 거예요. 유리병, 손과 손 사이의 틈, 큐브 같이 어떤 프레임 안에 식물 이나 풍경, 오브제를 담아 그리는 표현 방식도 즐겨 사용하는 것 같아요. 프레임을 넘나드는 느낌이 좋아요. 프레임을 사용했을 때 공간 자체가 깊어지기도 하고요. 나무를 그릴 때 캔버스에 꽉 채워서 그릴 수도 있지 만, 프레임을 두고 그 안에 나무를 그리면 공간감이 생기고 어떤 맥락이 생기기도 해요. 해석의 깊이가 깊어지고, 사람들이 프레임 속 대상에 집중하게 되는 효과도 있고요. 롤 모델이 있나요. 꼭 그림이 아니어도 분야와 상관없이 좋아 하는 아티스트,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음악이나 영화가 있다 면 소개해주세요.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들을 쫓아가는 편이라서 특별한 롤 모델은 없어요. 영화, 소설, 음악을 비롯해서 여러 분야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의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갈 수는 없으니까요. 세밀화 수업도 진행하고 있죠. 주로 어떤 사람들이 오나요. 그리는 일과 가르치는 일은 전혀 다를 텐데,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합니다. 무료 강의에는 정의 내리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사람이 오는 편이고, 유료 수업에는 그림에 진지하게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많이 와요. 선생님도 꽤 많이 수강하는데, 아이들과 함께 그림 그리기 수업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가르치는 일은 그리는 일과 또 다른 재미가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이 식물과 그림 둘 중 하나에 관심이 있는데, 식물을 잘 몰라서 혹은 식물을 잘 묘사할 자신이 없어서 그리기를 주저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기술을 가르치기보다는 주로 응원을 하다가 돌아오곤 합니다. 그리는 건 연필을 잡고 선을 긋기 시작하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연필을 잡고 선을 그을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아주는 건 쉽지 않죠. 수강생들의 그림을 보면 각자 식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게 느껴져요. 어떤 사람은 꽃을, 어떤 사람은 이파리를, 어떤 사람은 줄기의 디테일을 봐요. 세부적인 묘사보다 식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리듬감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어요. 서투르더라도 열심히 관찰해서 그리면 각자 의 시선과 개성이 담긴 그림이 완성돼요. 사실 처음에는 식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이를 확실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었는데, 3시간 남짓한 수업 시간에 전부 담기에는 턱없이 방대한 내용이더라고요. 블로그, 브런치, 그라폴리오, 트위터, 인스타그램까지 다양한 매체를 운영하고 있어요. 가장 애정을 쏟고 있는 매체는 무엇인가요. 블로그는 최근에 관리를 하지 못한 상태라 조금 머쓱하네요. 인스타그램(@jo.hnjn)에 게시물을 많이 올리고 있는데 팔로워 수가 생각보다 중요 하더라고요. 그 수가 영향력을 의미하기도 하니까요. 작품이 마음에 들 더라도 팔로워 수가 적다는 이유로 작업을 맡기지 않는 걸 본 적도 있어 요. 소통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생업을 이어나가기 위해 SNS를 열심히 운영하려고 합니다. 또 전시를 따로 열지 않는 이상 제 그림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기도 해요. 댓글 수나 좋아요 수에 연연해하지 않아야 하는데, 막상 그 수가 적으면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올린 글을 다 시 읽어보기도 해요. 제일 애정을 갖는 매체는 인스타그램과 브런치에요. 인스타그램이 이미지 위주의 매체라면 브런치는 텍스트를 보여주기 에 가장 좋아요. 한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는데 겨울이 되었으니 다시 좀 활성화를 해볼 계획입니다. 어제까지 라디오 방송을 하고 왔다고 했죠. 처음에 어떻게 연락이 닿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식물 문답』을 바탕으로 한 전시를 라디오 PD님이 보러왔었다고 해요. 책 내용 중 재미있는 꼭지의 글과 그림을 함께 전시했는데, 『식물 문답』 의 주요 내용이 “화투의 ‘똥’은 어떤 식물일까?” “라일락꽃을 먹는 이유 는 왜일까?”처럼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다 루고 있거든요. 마침 식물 기르는 것이 트렌드가 되고 있던 때였는데, 이 런 이야기를 하는 작가라면 게스트로 섭외해도 라디오 청취자들이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겠구나 생각했다고 하더라고요. 새벽 5시에 시작해 7시에 끝나는 라디오라 새벽일을 하거나 출근길에 오른 사람이 많이 들을 것 같아요. 이들이 듣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이야깃거리를 어떻게 선정했나요. 처음에는 제가 좋아하는 식물을 소개하려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PD님과 작가님이 식물 고르는 기준이 저와 다르더라고요. 두 분이 은방 울꽃은 어떻겠냐고 제안해준 적이 있어요. 알고 보니 그 즈음에 한 연예 인이 결혼할 때 은방울꽃으로 만든 부케를 들고 나와서 화제가 됐더라 고요. 또, 계절마다 주목받는 왕벚나무나 코스모스 같은 식물도 말해줬 고요. 내가 잘 알고 있는 식물도 좋지만, 무엇보다 대중이 관심을 가지 고 있는 화제를 더 중요시해야 하더라고요. 이야기의 깊이도 조절할 필요가 있었어요. 처음에는 식물에 대해 더 긴 설명이 필요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루하다는 청취자 피드백을 받았어요. 그 뒤로는 하루 일과의 시작을 준비하며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고민하기 시작했죠. 말의 속도도 조금 높이고 무엇보다 구구절절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대본을 거듭 수정했어요. 식물에 대해서는 말이 자꾸 많아져서 초고를 쓰면 1시간 넘는 분량이 나오기 일쑤였거든 요. 신청곡과 광고가 송출되는 시간을 빼면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15분 남짓이니 계속 고쳐 쓰며 분량을 절반 정도로 줄였죠. 전문 용어를 쓰기보다는 더 알아듣기 쉬운 표현과 단어로 바꾸었고요. 풍경 감각에서 ‘손들어 볼까요?’(2022년 6월호)를 인상 깊게 읽었어요. 관엽식물을 위해 보일러를 틀고 가습기를 틀고 서큘 레이터를 틀고 전등을 달다가 문득 “도시가스를 때고 화석 연료로 생산한 에너지를 아낌없이 쓸수록 아름답게 자라나는 식물들. 어느새 이 풍경을 좋아할 자신이 없어졌다”고 했죠. 식물을 키우는 건 몸과 마음을 돌보는 좋은 취미이지만, 정원을 꾸릴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고 식물을 가꾸는 일이 꼭 건강한 지구를 만드는 일과 이어지는 것 같진 않아요. 브런치에 연재하는 글에 “안타까운 일이지만 식물을 기 르기 좋은 집은, 가난을 벗어날 확률이 낮은 그림 작가인 나 에겐 없을 것이다”(‘식물을 기르기 좋은 집에 살 수 있을까?’ 중)라는 말을 쓰기도 했고요.식물을 키우는 일이 생산적이고 친환경적으로 보이는데, 직접 키워보면 소비적인 활동이고 자연환경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많다는 걸 알게 돼요. 식물 재배에 사용하는 흙만 해도 그냥 자연에서 가져올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바깥의 흙은 벌레 알과 오염 물질 때문에 실내 정원에는 적당하지 않죠. 그래서 코코피트, 피트모스, 펄라이트, 제오 라이트 같은 여러 재료를 섞어 인공 배양토를 만드는데, 이중에는 해외에서 수입해서 쓰는 것도 많아요. 환경에 이롭지 않겠죠. 질문처럼 관엽 식물은 잘 기르기 위해 화석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집안에 들인 식물을 잘 키우기 위해 야외에 있는 식물을 기후변화에 시달리게 만드는 일일 수 있어요. 좋아하는 식물을 키우는 일이 지구 어딘가에서 자라나는 다른 식물을 죽어가게 만드는 데 일조를 한다고 볼 수도 있죠. 과연 이게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취미를 즐기는 방식인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그렇다고 식물을 키우지 말라고 강요하는 게 옳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소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걸 택하려 노력하면 어떨까 생각해요. 해가 부족하면 내음성이 강한 식물을 고르고, 높은 습도를 유지하기 어렵다면 촉촉한 공기를 좋아하는 안스리움과 고사리류를 피하는 방법 이 있겠죠. 병해충 관리를 위해서 농약을 써야 하는 순간이 있어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친환경 농약을 택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고요. 식물을 기르는 올바른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식물을 좋아한다면 자신이 식물을 기르는 방식에 대해 한 번쯤은 고민하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죠.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나요. 많은 작가가 본명 대신 작가명 을 쓰기도 하는데, 만약 작가명을 쓴다면 뭐라 짓고 싶나요. 뚜렷한 방향성은 없어요. 그냥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해내가려고 해 요. 일단 눈앞에 놓인 과제를 잘 해결해나가고, 하나하나 쌓아가다 보면 그게 제 캐릭터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름이 평범한 편이라 작가명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조언을 많이 받았어요.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대중이 이름을 잊는다면, 클라이언트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딱히 절 표 현해줄 다른 이름을 찾지 못했어요. 정작 식물을 너무 좋아해서 그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입장에서, 작가명을 쓴다는 게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제 특성과 이미지는 ‘조현진’ 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잘 드러날 것 같아요. 고수리 작가가 쓴 『마음 쓰는 밤』(창비, 2022)이라는 에세이집이 있어요. 특이해서 썩 좋아하지 않던 자신의 이름을 사랑하게 된 일화를 담은 글이 있는데, 거기서 본 문장이 위로로 다가왔어요. “내 이름이 좋아진 건 작가로 일하면서부터였다. …… 때론 다른 이름들에 숨어버릴 수 있는 조 용한 이름들, 그렇지만 아는 사람들만 알아볼 수 있는 활짝 핀 이름들, 흔한 이름들 가운데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승현, 민경, 다혜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특별했다. 다른 꽃들과 비슷하지만 나만 알고 있는 하나의 꽃을 기억하는 마음이랄까. 그런 마음으로 우리 집 아이들 이름도 평범하고 흔하게 지었다.” 작가의 말처럼 저의 이름도 어디에나 있지만, 만나면 반갑고 정겨웠으면 좋겠습니다. 때때로 익명성에 숨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또 조현진이라는 이름이 중성적이라 좋기도 해요. 몇몇 분들이 막연히 절 여자일거라고 짐작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한 클라이언트는 전화 통화까지 나누었는데도 현장에서 절 찾지 못한 경우도 있어요. 여자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마냥 흐릿한 이름인 것 같진 않아요. 여자인줄 알았는데 남자였던 작가라고 기억에 남을 테니까요. 조현진은 조경학을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다. 2017년과 2018년 서울정원박람회, 국립수목원 연구간행물 『고택과 어우러진 삶이 담긴 정원』, 세밀화도감 『오산천 자연 도감』 등의 그림을 그렸고, MBC FM4U ‘세상을 여는 아침 안주희입니다’와 교통방송 ‘아침엔 TBS’에서 식물 코너를 맡았다. 『식물 문답』을 출간했으며, 북한산 자락의 작은 방에서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JWL 고민은 깊게 생각은 명료하게 결과는 아름답게
    작동하는 공간을 고민하다 Just Working Landscape 많은 사람이 우리의 정식 명칭 JWL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한다. 이번 기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히자면 JWL은 ‘Just Working Landscape’의 약어다. 번역하자면 ‘놓아두면 알아서 작동하는 공간’ 정도일 것이다. 자칫 가벼워 보일 수도 있는 이 세 단어의 조합에 우리가 지향하는 공간에 대한 생각이 잘 담겨 있다. 보는 사람의 눈을 단번에 매혹시키는 화려한 조형 언어나 깊은 지적 탐구를 통해 도출한 형이상학적 설계 개념은 우리의 작업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특별히 설계한 것이 없어 보인다거나 너무 뻔한 혹은 소극적 디자인이라는 평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러한 평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소 심심해 보이거나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 디자인을 행하는 이유는, 그러한 디자인 행위가 결국 땅과 함께하며 가장 오래 갈 디자인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조경가의 디자인 행위는 본질적으로 땅과 사람의 속성을 잘 이해하여, 최적의 동적 평형 상태를 찾아 스스로 작동할 토대를 만드는 일이라고 믿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자아내는 좋은 술처럼, 우리가 만드는 공간도 잘 늙고(well-aging), 잘 숙성된(well-matured) 곳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있다. (원종호 소장) JWL과 함께 한 2년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느덧 벌써 2년 차 사원이 됐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JWL은 어떤 회사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었는데, 이번을 계기로 우리의 일상을 공유해 보고자 한다. 처음 입사했을 때 일반적인 설계사무소와는 다른 업무 수행 방식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JWL은 사원 때 부터 PM을 맡아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간다. 그렇다고 모두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독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업무를 파악하는 네트워크가 형성돼 혼자만의 힘으로 벅찬 순간이 올 때는 도움을 주고받기도 하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설계사무소답게 현장에 대한 이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대상지의 초기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답사를 자주 나가는 편이다. 비록 야생의 상태일지라도. 답사를 통해 얻은 자료들은 적절히 설계에 녹아들어 좀 더 합리적인 설계안이 만들어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종종 시공까지 이어지는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높은 완성도를 위해 직접 발품을 파는 등 사무실 밖에서의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시공 현장에서도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내가 설계한 시설물이 어떤 공정으로 진행되는지 확인할 수 있고, 직접 식재하면서 식물의 특성을 배울 수 있어 다음 프로젝트에서 식재 계획을 진행할 때 한번 더 고민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상당히 자유로운 사내 분위기다. 그래서 업무를 진행할 때도 모르거나 배우고 싶은 부분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는 편이다. 비슷한 나이대가 모여서 그런지 취미나 취향도 많이 겹친다. 퇴근 후 다 같이 클라이밍을 가거나 평소 가고 싶던 곳을 공유해 같이 소소하게 답사를 다녀오기도 한다. 이외에도 미식가의 회식, 운동 지원금, 해피아워, 생일파티 등의 소소한 복지가 더해져 지금과 같은 분위기의 JWL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정화 사원) 본질을 고민하는 설계 구조화된 사고 ‘주 대리, 이제 이 정도는 할 수 있지?’라는 말과 함께 600만 평에 달하는 기업도시 도면이 책상 위에 놓였다. 너무 거대한 땅이다 보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땅의 잠재 가치를 발굴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주는 방식으로 점차 진행하다 보니 결국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우리만의 답을 찾아나갈 수 있었다. 이런 일을 할 때마다 우리는 겉으론 디자인으로 설득하는 사람들이지만, 본질은 구조화된 사고로 설득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난무하는 정보를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엮어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온몸으로 겪게 해준 이 프로젝트는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사랑하는, 애증의 프로젝트로 남을 것이다. (주민수 팀장) 본질에 닿기 위한 한걸음 최근 가장 깊게 발을 담그고 있는 프로젝트는 서초역 인근에 건축 예정인 한 공연장이다. 처음 맡아보는 중형 프로젝트인 데다 주변에 엮여 있는 이슈들이 많은 탓에 애꿎은 트레이싱지 낭비를 셀 수 없이 많이 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낭비는 진행 중이다.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는 한국의 문화예술을 담는 공연장,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기대할까. 건물의 모퉁이에 난 언덕길을 오르며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감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조경 공간이 가져야 할 적정한 역할과 그 안에 담는 본질적 이야기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고민하면 할수록 머릿속 질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되고 나의 수많은 질문이 어렴풋이 해결된 어느 날 지금을 돌이켜보면, 조경가로서 한 걸음을 견고히 할 수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길 바란다. (박지현 사원) 여덟 명의 어벤져스 저녁 있는 삶 우리 회사의 장점 중 하나인 저녁 있는 삶이 나에게 다양한 취미를 경험하게 해 준 것 같다. 보통 직장인이라면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야근 때문에 한 가지 취미를 가지기도 힘든데, 입사 때부터 지금까지 퇴근 후 스무 가지 이상의 다양한 취미를 가졌다. 이런 활동이 가능했던 건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방법이 다른 설계사무소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원부터 소장까지 개개인이 각자 프로젝트를 도맡아서 진행하기 때문에 스스로 기민하게 프로젝트 일정을 관리하고 조율한다.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정이 몰려 야근하는 일이 발생하면 나머지 팀원들은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고 어벤져스가 되어 그 팀원을 돕는다. 이러한 방법 때문에 팀원 대부분은 저녁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요즘 퇴근 후 운동하는 재미에 빠져 있는데, 내년에는 첫 바디 프로필 촬영까지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목표를 갖게 해준 JWL에 고마움을 표하며 오늘도 헬스장으로 간다. (박태영 대리) 배우면서 채워나가는 설계 6월 전체 회의에서 팀장님이 A 아파트 실시도면 납품에 대한 추가 인력을 요청했다. 당시 뭣도 모르던 나는 바로 팀장님을 찾아가 프로젝트 참여 의사를 밝혔다. 처음 도면 목록을 봤을 땐 ‘이걸 언제 다 하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래도 기본 도면부터 차근차근 진행하다 보니 상세 도면 순서가 되었다. 상세도 경험은 많이 없었기에 시작할 땐 막막함이 가득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배웠던 것을 적용하며 도면을 작성했다. 도면을 작성하면서 헷갈리는 부분이 생기면 주변 대리님에게 물어보며 디테일한 내용들을 채워 나갔다. 작성한 뒤에는 팀장님과 소장님의 검토를 받으면서 모르던 부분들을 배우고 내 도면에서 부족한 설명을 채워나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막막하기만 했던 작업이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해결되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번 팀워크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더 열심히 공부해 다른 팀원들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 (이정화 사원) 자연과 우리의 시선이 마주할 때 자연이 주는 울림 작년 가을부터 JWL과 함께하게 되었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주시 일대의 산을 답사하게 되었다. 회사 구성원 모두 GPS 기반의 산악인 앱을 익숙하게 사용하는 것이 의아했다. 하지만 몇 번 답사를 하면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정 교수님은 언제나 사람의 손발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한다. 이번엔 가시덤불과 발이 푹 빠지는 늪지대였다. 그 이후 직원들 사이에서 ‘황천길’이라고 불리게 된다. 답사 막바지쯤 공간을 압도하는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진 숲을 만났는데, 거친 숲길에서 겪었던 고생이 희미해질 만큼 큰 울림을 준 장소였다. 우리는 대지가 제공하는 순간들 속에서 아름다운 장면을 발견하는 눈과, 그 장면의 가치를 전달하는 목소리에 힘이 있는 설계사무소다. 현재 맡은 프로젝트에서도 대상지 답사 중 얻은 인사이트와 숲의 흐름을 대상지까지 연결하는 것을 주 전략으로 삼았다. 과정 중에 매끄럽지 않은 경험도 있지만, 이곳이라면 그 끝에 마주할 결과물에 대한 믿음이 있다. 앞으로 JWL과 함께 쌓아갈 자연과의 협업이 기대된다. (김제인 대리)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베트남의 광역 부지를 계획하는 마스터플랜 프로젝트 덕분에 해외 출장을 가게 되어 우리 회사 엄청나잖아? 라는 고취에 빠진 것도 잠시, 미개발된 베트남 오지에서 정글의 법칙을 찍었다. 하지만 고군분투해 조사한 자료가 쓰이는 것을 보며 뿌듯했다. 실내에 앉아 컴퓨터로 자료를 조작하는 일에만 익숙하던 내가 부지를 직접 탐방하고 이색적인 자연환경을 공부한 좋은 기회였다. 조경설계는 조사와 설계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무에서는 현장에서 발로 뛰는 일보다는 사무실에서 단축키 두드리는 업무의 비중이 늘게 된다. 우리 회사에서는 기회가 될 때마다 원형에 가까운 자연을 답사하러 가곤 하는데, 시원한 바람을 쐬며 무성한 풀내음을 맡다 보면 아름다운 자연에 우리의 시선이 닿는 순간을 기대하게 되고 내가 이 일을 선택한 이유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정은혜 사원)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JWL)는 다양한 오픈스페이스의 계획·설계를 수행하는 디자인 오피스다. 대상지의 다양한 환경 조건을 세심하게 살피며 대지의 잠재력을 만개시키는 설계를 지향한다. 간결하고 심미적인 설계 언어를 통해 대상지의 공간적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격조 있는 문화적 산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합리적인 경관 배치와 감각적인 공간 연출을 동시에 추구한다. 이용자 모두의 다양한 요구에 절묘하게 부합하도록 작동하는 장소 구현을 중요한 임무로 삼고 있다. www.jwlandscape.net, instagram(@jwlandscape_official)
  • [모던스케이프] 도시를 보살피는 위생 경관
    통계청 기록에 따르면, 한국의 상수도 보급률은 2021년을 기준으로 97.7%다. 1960년대의 보급률이 22%였다고 하니, 반세기만에 실로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상수도上水道(waterworks)는 하수도나 공업용 수도와 구별할 때 부르는 용어이며, 일반적으로는 ‘수도’라 칭한다. ‘수도법’에서는 수도를 ‘관로管路, 그 밖의 공작물을 사용하여 원수原水나 정수淨水를 공급하는 시설의 전부’라 정의한다. 보건 위생과 소화消火를 목적으로 한 급수 설비 체계를 97.7% 갖췄다고 함은, 한국 대부분 지역에 깨끗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90%에 이르는 도시화율과도 비례한다. 도시의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양질의 식음수 공급이 우선되어야 하므로 정수장 설비 마련은 필수다. 열약한 환경에 놓인 근대기의 도시민에게 맑은 물을 생산, 공급하는 시설은 도시 공원보다 더 절실할 수 있는 중요 기반 시설이었다. 전통적으로는 우물을 파서 물을 끌어 올려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는 개인 우물을 파기도 했지만, 대체로 마을마다 공동 우물을 파서 주민이 함께 이용하고 관리했다. 여름이면 충분한 비가 내렸고 계곡과 하천이 발달한 곳에 취락지가 있었기 때문에 식음수와 생활용수를 취하는 일이 비교적 손쉬웠다. 전국에 분포한 화강암반은 좋은 여과지가 되어 양질의 지하수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상하수도 분리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개항장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 증가하는 19세기에 이르자 식음수의 부족 문제와 수질 문제가 표면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근대식 상수도 시스템은 하천수를 끌어와 침전과 여과의 정수 과정을 거친 뒤 동력을 이용해 배수지로 송수하고 배수관을 통해 급수하는 것이다. 이보다 간단하게는 차집관로를 설치해 물을 자연 여과하여 집수정에 모았다가 배수지로 송수하고 배수관을 통해 급수하는 방식도 있다. ...(중략)... 2년 간의 ‘모던스케이프’ 연재는 근대 도시의 가장 큰 근간인 ‘교통’으로 시작해 ‘위생 경관’에서 끝을 맺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단편적인 근대 경관의 소재를 동서와 고금으로 확장해 볼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독자들이 100여 년 전 이 땅의 모던스케이프를 상상하고 이해하는 데 이 지면이 조금이나마 도움 되었길 바란다. 더불어, 암흑기이자 단절기로만 단정해왔던 20세기 전후 시기가 사실은 지금을 자리할 수 있게 한 토대였음을 공감하는 기회가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환경과조경428호(2023년 12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부산 중앙공원 홈페이지 www.bisco.or.kr/jungangpark 이연경, “도시위생의 수호자, 상수도”, 『도시를 보호하라』, 2021, pp.74~167. 김백영, “일제하 서울의 도시위생 문제와 공간정치: 상하수도 우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총』 68, 2009, pp.191~226. 김재호, “식수문화의 변화과정: 우물에서 상수도까지” 『한국민속학』 47, 2008, pp.235~265. 통계청 www.kostat.go.kr/ansk/ 그림 출처 그림 1. www.visitbusan.net
  • [에디토리얼] 조경 교육의 다음 50년을 위해
    조경 교육의 다음 50년을 설계할 시점이다. 교육인증이 조경 교육의 전문성을 키우고 조경 실무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2023년 8월호 에디토리얼에서 예고한 대로 이번 달 특집의 주제는 조경학 교육인증이다. 다면적 토론과 숙의를 초대하는 난제의 첫걸음을 떼기 위해, 이번 지면에서는 주로 인증의 필요성을 논의하고 주요 사례를 검토한다. 특집을 여는 글 “조경학 교육인증 논의를 시작하는 첫 질문”에서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는 인증의 필요성을 다각도로 짚는다. 그의 진단처럼 “‘지금의 조경 교육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50년 역사를 축적해온 조경 교육이 “전적으로 교수 개인의 역량에 내맡겨져 있”는 당혹스러운 현실은 조경(학)의 전문성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조경 전문가(의) …… 기술과 지식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이를 검증하는 시스템의 부재로 해마다 …… 쏟아지는 졸업자들의 자질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 자질의 일관성은 한 분야의 전문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러한 일관성은 전문가를 배출하는 일관성 있는 교육에 근거한다.” 김아연 교수는 조경학 교육인증 논의의 “지속성을 담보하고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곧 “기성세대로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물려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성실히 응답하는 데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글 “설계 교육의 정도는 무엇인가”에서 최영준 교수(서울대)는 조경학 교육인증제의 “실현 여부에 대해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 조경설계 교육에 대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몽타주가 정해진 답 없이 흐릿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설계 교육의 위상을 “교육인증제를 기회로 바로잡고 전국의 모든 학과‧전공들이 정도正道로 삼을 만한 설계 교육의 정도正度”를 논의한다. 그는 “교육인증제를 통해 조경학과 교과 과정에서 학습한 지식과 기술을 토대로 동시대의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그 해결책을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통합적 틀을 제공하는 설계 과목의 쇄신이 이루어진다면, 조경학도 모두가 자기 브랜드를 갖는 조경 전문가로 성장해 나가는 큰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김정화 교수(네바다주립대)는 글 제목처럼 “미국 조경학 교육인증제의 현황과 시사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직접 경험한 재인증 과정을 공유한다. 그가 상세하고 깊이 있게 소개하는 바와 같이, 미국의 조경 교육인증 주체는 조경인증위원회LAAB이며, 인증제의 목적은 “조경 학위 프로그램의 교육 품질을 평가하고 지지하며 발전시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교육과 직능의 밀접한 연결이 핵심으로, 학생들이 조경 직능에서 요구되는 지식과 기술을 갖출 수 있도록 조경 분야의 고품질 교육을 보장하는 데 있다.” 그는 전공 및 학위명, 학위 과정 기간과 요건, 정보 공개 온라인 플랫폼, 교수진 규모와 임용 상태, 소속 대학의 인증 여부, 관리자, 인증 지속을 위한 의무 사항 등 미국 조경학 교육인증제의 인증 기준을 소개한다. 또한 인증 신청. 자체 평가, 방문 평가, 평가 검토와 의견 수렴 과정, 인증 결과 공표로 이어지는 인증 절차를 설명한다. 김정화 교수는 교육인증의 효과와 의미를 1)인증제를 통한 조경 교육의 핵심 가치 공유, 2)통합적 데이터 구축, 3)확장과 네트워크 등 세 가지로 제시하며, 인증제는 “매우 체계적이면서도 동시에 느슨한 구석도 지닐 필요가 있”으며 “인증 체계와 과정에서 인증을 받으려는 주체의 역할과 권한이 중요하다”는 시사점을 끌어낸다.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의 글 “IFLA APR의 조경 교육 방향과 기준”은 지난 2018년 세계조경가협회 아시아태평양지회가 마련한 ‘교육 정책과 기준, 그리고 인증 과정’의 틀과 내용을 소개한다. 교육 프로그램의 목표와 목적, 행정과 운영, 전문 교과, 교육 성과(10가지 세부 분야), 전문 성과, 시설‧장비‧정보 자원, 대외 활동 등으로 구성된 조경 교육 기준은 한국 조경 교육의 기본적 틀을 재정비하는 데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김영민 교수가 말하듯, 한국 조경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같은 조경학과이지만 대학에서 서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며 논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IFLA APR의 교육 지침이 우리가 당장“현실적으로 적용할 지침이 아니더라도 이 지침의 높은 기준과 정교한 조경 교육에 관한 규정은 우리의 교육을 뒤돌아보고 점검해 볼 ……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그의 주장처럼, “교육의 효과는 현실적이어야 하지만 교육의 지향점과 목표는 이상적이어야 한다. …… 한국 조경계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출발점은 분명 교육에 있다.” 이번 특집 지면이 조경학 교육인증제 논의의 기초 자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앞으로도 본지는 교육인증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더 심도 있는 조사와 연구, 토론을 공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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