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명준 조경평론가 ([email protected])
05. 집들이 춤추는 선유도공원
아래의 나무를 먼저 보자. 나무는 사연을 가지고 있다.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 모습만으로도 세월의 풍파가 느껴진다. 나무는 이곳에 자리 잡기 전 새로운 개발로 베어 없어질 위기에 놓인 적이 있다. 기회가 있어 이 나무만은 터의 주인공으로 남겨 달라 부탁 아닌 부탁을 했었다. 다행히 나무는 터를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기회가 되면 이곳에 들러 그 세월의 흔적을 나무와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선유도공원은 본래 공원 전체가 이 나무와 비슷했다. 지워 없애고 진한 화장의 산뜻한 현대 도시공간으로 흔적 없이 변모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다행히 장소는 재활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처음의 낯설면서 새로웠던 ‘문화적 충격’을 소화한 듯 ‘인문학적 공원’으로 진화하고 있다. 마셜 맥루한이 말했다든가 “구텐베르크가 모든 사람을 독자로 만들었듯”. 선유도공원은 드디어 우리에게 공원을 생활(lifestyle)로 선물하고 있다.
알다시피 선유도공원은 정수시설이었다. 산업시설이자 보안시설이었던 셈이다. 우리에게 예전 그곳 모습이 좋든 싫든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도시에, 저 너머 강 가운데 있지만 가볼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자 너머의 장소였던 것이다. 장소의 기억과 이미지는 그렇게 통제되기도 한다.
시설물의 특성이 그렇듯 활용이 달라지고 마침 2000년대로 들어선 시대와도 맞물려 용도를 바꾸어야 했다. ‘일방적이지 않은 의사결정(bottom-up decision making)’이 보편화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곳이 공모를 통해 ‘작품’인 설계안을 선정하여 공원으로 만들어진 배경이다. 이후 여러 상을 휩쓸다시피 하고 그 전략이 다른 공원에도 이식되며 하나의 문화적 트렌드이자 대표성(특이점)을 가지게도 된다.
선유도공원은 그렇게 탄생한 우리 역사 최초의 ‘본격 장소 재활용 공원’이다. 공원을 걷다보면 이제는 과하게 느껴질 만큼 장소의 역사와 흔적이 빼곡하게 꽉 차 있다. 시간이 흘러 새로 자리 잡은 자연물이 그 강렬함을 새로운 차원으로, 새로운 인식으로 이끌어 간다. 아류보다 진품이 깊이가 있다는 것은 공원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 만큼 선유도공원은 여전히 시대적 화두처럼 문화의 한 시점(viewpoint)으로 작용하고 있다.
21세기의 5분의 1이 지나는 시점에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 만큼의 ‘경험과 생활’(文化)이 쌓였다면 이제 새로운 성찰과 통찰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한다. 선유도공원이 준 문화적 충격은 어떤 의미였고 새로운 논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우리에게 남겼는지 생각의 깊이를 더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는 공원을 살펴보기 보다는 몇 가지를 돌아보면 어떨까 한다. 앞 편에서 얘기했듯 공원이 우리에게 이식된 문화의 하나임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첫 번째로 선유도공원은 조경이 만든 공간이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조경이 딱딱하고 무거운 도시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경관과 풍경을 다루는 전문가가 도시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 세계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공원이기도 하다. 혹자는 건축물로 오해하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 조경공간이다. 조경공간에 건축물과 구조물이 집처럼 뒤섞여 있는 것이다. 공원이 도시기반시설이라고는 하지만 그 전에 조경공간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건축물로 착각하는 배경에는 건축이라는 개념의 포괄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물리적으로 만들고 경계 짓는 것에 익숙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내외부 풍경이 보이고 보여지며 만들어지는 독특한 공원의 풍경은 기존의 낡은 구조물과 공간들로 인해 은연중 경계가 생기며 다채로우면서도 독립적인 공간 특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당시의 설계는 그것이 중요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한 공원은 그런 경계진 공간들이 저마다 각각의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공간들이 도시의 집처럼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는 장소로 성장한 것이다.
“공원은 삶을 반영한다. 공원은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 다시 말해 기품과 공간, 선택, 전망을 보여준다… 우리는 변하고 나이 들고 머물렀다 떠나가고 종국에는 죽는다. 하지만 공원은 이 모든 것을 견뎌낸다. 언제나 그것에 있을 공원이 슬픈 우리의 영혼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_ 케이티 머론 저, 오현아 역, 『도시의 공원』, 마음산책, 2015.
그런 점에서 선유도공원은 여전히 화두가 된다. 공원이 살아 있는 도시공간으로 성장해갈 것이라는 점은 처음부터 고려되었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공원은 도시의 삶으로 성장하고 진화할 숙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조경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옥외환경에 조성하는 역할만 해서는 안 된다. 조경은 특히 경계 없는 식물 공간을 주 무기로 한다는 점에서 여타 전문분야와 차별되는 독특한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조경전문가의 사회문화적 기능과 가치를 획기적으로 보여준 사례는 국내에서 많지 않다. 여러 면에서 선유도공원은 그 첫 사례로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한국 조경에서의 아방가르드(the vanguard)라 해도 무방하다. 기획, 계획, 설계, 시공, 관리 모든 측면에서 말이다. 보다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한국에서 장소의 역사를 제대로 활용한 대표적인 곳이 선유도공원이다. 맥주 담금솥 하나로 수줍게 장소를 기억하던 시도(영등포공원)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기처럼 터의 이야기를 과감하게 주인공으로 삼은 공원은 우리에게 이전에는 없었다. 환경 재생 공원, 장소 재활용 공원 등의 레토릭은 실은 이를 모두 표현할 수 없는 설명이다. 이곳의 역사와 문화가 외부와 직접 연결된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원에 펼쳐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장소의 특수성이 아니라 시대의 특수성, 시대적 공통감을 먼저 활용했다고 보는 것이 우선이다. 여기에는 터에 담긴 이야기를 뽑아 버릴 수 없는 무엇으로 보는 시각을 모두에게 인식시켰다는 성과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잊고 있지만 그렇게 되살아난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성으로 복기되며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선유도공원은 한강과 위아래 강 너머 풍경, 산업시설과 최신 문화시설, 생태환경과 자연공원 등이 새로운 감성이자 본성으로 체득되었을 것이다. 공사판 같았던 도시 풍경과 빽빽한 철문 사이의 골목길 풍경의 우리들 낡은 도시 기억이 아니라 그들만의 새로운 도시 풍경이 ‘그리운 옛 기억’으로 이미 자리 잡은 것이다. 선유도공원의 가치는 이런 점에서 심도 있게 재탐구 될 필요가 있다.
2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세대에게 기억되는 서울을 기성세대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공원을 생활의 하나로 즐기며 성장한 그들과 행락을 특별한 무엇으로 여겨야만 했던 우리들의 도시 이미지가 선유도공원을 통해 만나고 겹쳐지며 새로워지기를 꿈꾸어 보자.
세 번째로 선유도공원에는 우리 도시의 본성이 그대로 담겨 있다. 도시는 집들이 춤추는 터이다. 근대 도시계획은 단단한 공간들로 우리의 일상을 꽉 차게 구축한 바 있다. 그래서 도시는 딱딱하고 무겁고 힘들다. 게다가 생산이 멈춘 도시는 이제 시민들이 뛰노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은 정보(IT)가 유목민도 못된 채 그 사이를 날아다닌다. 사유의 실로(失路)가 보편화된 시대에 선유도공원은 옛 구축물로 꽉 채워진 산업시설의 바탕 위에 연하고 하늘거리는 생명이 가득 들어차 묘한 대조의 미, 숭고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임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선유도공원을 통해서 서울만의 독특한 ‘단자화 된 사람들, 무리로 사는 인간’을 볼 기회를 가진다. 선유도공원은 그런 점에서 인문(학)적이고 감성적인 공원이자 장소인 것이다. 수많은 집들과 공간들이 시간까지 얽어가며 섞인 이 공원은 그런 점에서 다시 보고 다시 보아야 할 고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도시의 모습을 단순히 축소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감성을 다각도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모든 것을 지을 수 있지만 사는 일을 강요할 수 없다는 아래와 같은 반성은 공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누구나 건축가다. 모든 것이 건축이다. All are architects. Everything is architecture.(한스 홀라인, Hans Hollein, 오스트리아 건축가)…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사람의 삶은 건축보다 훨씬 중요하고 또 어려워서,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삶이라 할지라도 건축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거나 디자인할 수는 없다. 건축가에게는 사는 이의 생활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_ 김광현,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 뜨인돌출판사, 2018, pp.68~71.
그런 흔적은 선유도공원에 담겨 있다. 선유정으로 대표되는 본능처럼 작용한 한국성이라는 화두는 그렇게 집들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상징적 전통이 오브제처럼 놓여 있지만 이름이든 공간이든, 의도였든 강요였든 이것은 이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지점이다. 불편하고 어색하다는 처음의 목소리가 어떻게 변화했으며 특히 공원을 생활로 즐기는 우리에게 어떤 목소리를 내게 하는지 장소의 관점에서 시계열적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거기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녹아 있다고 믿는다.
네 번째로 선유도공원은 생활공간의 예술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간간이 들리는 공공예술의 문제와는 달리 작품으로서의 공원은 전혀 다른 위상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선유도공원은 그 중에서도 아방가르드적이라 할 만큼 커다란 공원미학적 충격을 주었다. 우리 사회는 그러나 그 충격을 재치 있게 소화하였다. 선유정은 그 표징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마크 로스코의 예술관에서 새로운 힌트를 찾아보자. 그는 표현보다 소통에 중점을 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이고 “소통을 위한 표현성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도 울릴 수 있는 나름의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는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감정들(human emotions), 즉 비극(tragedy)과 환희(ecstasy), 그리고 숙명(doom)과 같은 감정들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그림과 직면했을 때 주저앉아 운다는 사실은, 제가 그런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감정들을 ‘소통시켰다(communicate).’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기표현(self-expression)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행해지는, 즉 세계에 대한 소통(communication)입니다. 이러한 소통이 있은 후 세계가 납득된다면, 우리 세계는 변하게 될 것입니다. 피카소나 미로가 있은 후의 이 세계는 결코 과거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그림은 사물을 보는 우리의 시선을 변형시켜 주는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_ 강신주, 『마크 로스코(Mark Rothko)(VOL.2:TEXT)』, 민음사, 2015, pp.85~87.
그런 점에서 선유도공원은 조경을 공공을 위한 예술의 하나라고 할 때 무엇을 남겨주었고 보편화하였나, 형태만 좆는 아류 설계 또는 이전 시대 이름만 커다란 설계에 어떤 성찰을 주었나 돌아보게 한다. 아니다, 이제는 무엇을 남겼고 어떻게 진화했는지 꼭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앙리 마티스의 이야기는 예술을 추구하는 모든 이에게 조언이 될 수 있고 선유도공원을 예술로 다룬 모든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모든 예술가에게는 시대의 각인이 찍혀 있다. 위대한 예술가는 그러한 각인이 가장 깊이 새겨져 있는 사람이다. 좋아하건 싫어하건 설사 우리가 스스로를 고집스레 유배자라고 부를지라도 시대와 우리는 단단한 끈으로 묶여 있으며 어떤 작가도 그 끈에서 풀려날 수 없다.” 앙리 마티스, “어느 화가의 노트” 중(이광래, 『미술 철학사』 3권, 미메시스, 2016, p.4)
집들이 들어앉아 이제 제 안방인 양 춤추는 공원의 모습을 우리는 인문(人文)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집들이 여기에 들어앉았는지 체험하고 체현하며 새로움은 언제나 낡음으로부터 진화된 것임을 또 하나의 사례로 되새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 이식된 근대 공원은 생활로 소화되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집은 인간의 가장 작은 생활의 단위, 진화의 단위이다. 오늘날 새 시대의 선유도공원은 어떤 집들이 춤추고 있는지 직접 보고, 자주 보고, 돌아보며 즐기고 느끼는 인문 공원으로 재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를 분별하는 새로운 시점이라는 성찰로 기억될 수 있어야 한다.
Park 04. 집들이 춤추는 공원들, “확장하는 도시와 공원, 그리고 재생”
우리 사회는 이제 좀 인문학 열풍이 수그러든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느 정도 사람과 인간에 대한 생각들이 생활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그것이 수평적 보편화가 아니라 수직적 특수화(개성화)로 깊이를 달리할 것이다. 이때는 경제로 치환되지 않는 역사와 문화, 공동체성이 깊게 작용한다. 문명이 나뉜 것도 그 때문이다. 인문의 보편화는 진화의 초석이고 새로운 문명의 시점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미 그것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빨리빨리와 모두가 함께 라는 동질화가 작용하고 있다. 유행이라지만 몸에 밴 상호작용이라 낙관할 부분이라고 본다. 그리니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은 얼마든지 인류의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선유도공원은 그 트리거였다. 월드컵공원도 그러하였다. 하늘공원, 서울숲, 북서울꿈의숲 등 대형공원들도 그러하였다. 우리의 인문(人文)은 그렇게 집들과 공간들 사이를 오가고 있는 셈이다. 공원이 인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공원은 언젠가 “도시의 문양”(都市文)으로 기억되고 활용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그런 개인적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경공환장’ 시리즈의 핵심이라고 할 만 하다. 우리는 집을 중심으로 사고하기 마련인데 그것에 대한 평소의 생각이 여기에 압축되어 있다. 기술사(史)가 아닌 문화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강연을 통해서 틈틈이 설명해오던 요약 같은 결론만 몇 가지로 도표화하였다. 이는 공원과 조경을 이해하는 좀 더 넓은 시야를 획득하기 위함이다.
앞 편에서 우리는 공원과 산책 사이의 관계를 조경 개념을 매개로 이해해보고자 하였다. 보기에 따라 무리함이 있고 다소 긴 내용이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모두 이해할 필요는 없더라도 한 번의 일별을 권유한 것은 그것을 바탕으로 확장되는 우리 도시와 삶터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시야를 위해서였다. 한 번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것을 이번에는 밑그림 식으로 전체를 보고자 하는 것이며, 차차 이것들을 하나씩 심도 있게 살펴보기를 기대한다. 물론 그것은 공원을 통해서이다.
1. 자연(origin)과 파생어들(originality), 본연을 구분짓기
우리 문명에 대해서는 수많은 설명이 있지만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류가 물리적 공간과 일상적 활동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쉽게 말해 현대 도시는 공간과 삶이 분리된 채 물리적으로 채우는데 급급한 도시로 성장하였다는 것이고 이제는 그렇게 분리된 두 가지가 장소라는 개념을 통해 본능으로 남아 있는 삶터에 대한 욕구를 되살리려 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장소성은 그런 맥락을 통틀어 부르는 가벼운 이름일 뿐이다. 여러 사례들이 전문가의 손을 거치지 않고 도시 생활공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본능의 측면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 그림은 이런 생각을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학자들이 말하는 혁명적 사건의 발생에 따라 도시공간과 인간활동은 점점 더 거리를 두며 멀어지게 되었다. 거기에 적응하는 인류의 노력은 여러 문화적 현상으로 뒤따르기는 하였으나 그 힘이 결국에는 우리 도시의 미래를 새롭게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본연이라 할 수 있는 자연이 어떻게 이해되고 분해되느냐에 따라 많은 전문분야가 파생되었고, 심지어는 의도적인 구분짓기를 통해 개념을 강화하고 새로운 사고의 방향성을 발명처럼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런 모든 것이 공간과 활동의 새로운 통합을 지향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시점이다. 우리는 나누고 구분하고 분석하며 보낸 20세기를 그렇게 반성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2. 실천(practice)과 실행들(making), 지식을 구별하기
도시가 복잡해지면서 그에 따르는 행위도 복잡해졌다. 그러나 행위의 표현과 소통은 해당 행위 이전에 만들어진 개념과 사고를 통해 이루어진다. 쉽게 말해, 말을 통해 행위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느끼지만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으면 행위가 의도와는 다르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언어의 세계는 수학이 아니어서 말이 하나의 행위에 하나의 어휘로 대입되지 않기 때문에 말은 저마다 다른 뜻을 내포한 채 새롭게 필요로 하는 행위에 따라 조합되어 사용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각자가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는 같은 어휘라 하더라도 저마다의 경험과 사고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곤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어는 본성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시는 항상 탈이 많을 수밖에 없다. 도시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며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같은 언어라도 위계를 두고 체계를 두어 곤란해질 수 있는 행위들에 기준을 세워두었다. 대체로 “일상어, 전문어, 법률어”로 나뉘는데 사용하는 문자가 다른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경우에 따라 아주 복잡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전문어와 법률어를 모두 우리가 알고 구별하며 사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대부분 일상생활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일상을 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두 또는 대부분 직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직업이 아니더라도 저마다의 전문 분야에 몸담고 저마다의 생산활동으로 삶을 영위한다. 이 생활과 저 생활을 오가는 이때 우리의 일상어와 전문어는 뒤섞이곤 한다. 그런 날들이 많아지면 그 경계는 더욱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 대부분은 그 사람의 말투에 따라 그가 어디에 더 방점을 두고 사는지 알 수 있다.
일상에서야 이런 상황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문 분야에서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동일한 어휘를 사용하고 충분히 소통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최종 결과물이 엉뚱한 경우를 대부분 한두 번씩 경험한 적 있을 것이다. 현장에서 지속적인 회의와 지난한 협의가 반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래 말들은 그 대표적인 것들을 모아본 것이다. 특별히 범주를 구분하지 않았으나 비슷한 유형으로 보이는 것들은 묶어보았다. 어떤가, 일상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되고 구별되는 어휘이지 않은가?
- 조경, 건축, 도시, 엔지니어링, 경관, 건물, 공간, 환경, 장소, 풍경, 지리, 문화, 유산, 복합, 융합, 통합, 융복합, 생활, 시야, 시선, 시점, 아름다움, 운치, 천연, 인공, 유적, 전원, 조망, 조망점, 진화, 축, 차경
- 토지, 지반, 기반, 대지, 경치, 통경, 풍치, 하천, 마을, 생태, 자연, 시설물, 구조물, 건축물, 문화재, 정원, 공원, 유원지
- 계획, 설계, 구조, 기능, 배치, 설치, 공간구조, 생활권, 주변, 기능, 용도, 도시, 지역, 지방, 지구, 구역, 용도, 기반시설, 공간시설, 공급시설, 교통시설, 광역시설, 공공시설, 공작물, 생활인프라, 생활환경, 자연환경, 야생생물, 습지, 생태계
- 설치, 정비, 개량, 개발, 보수, 제공, 향상, 인가, 허가, 승인, 협의, 의견, 처리, 검사, 지정, 경우, 처분, 행위, 조치, 촉진, 지정, 점용, 분할, 공유, 개발행위, 보전, 활용, 복원, 제공, 공급, 평가, 관리, 변경, 조정, 검사, 안녕, 건전, 양호, 미관, 공동번영, 균형발전, 협력
전문어로서는 그렇다면 어떤가? 그 의미와 용도를 잘 구별할 수 있을까? “개발, 정비, 개량, 보수, 조치, 조정, 변경” 이것들은 각각 무슨 의미이고 어떻게 구분하여 사용해야 할까? 전문성은 거기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전문가라면 최소한 일상어와 전문어는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법률어로 본다면 또 다른 이해가 필요해 진다.
그러나 근래 수십 년간 여러 분야들이 뒤섞이는 과정에서 전문어로 이해되고 구별되어야 할 개념과 사고가 경계 없이 뒤섞이는 경우는 많이 보아왔다. 혹자는 창의적이라 보았고 혹자는 영역의 확장이라고 보았다. 또는 여러 가지가 혼합되는 시대적 흐름이 반영된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가는 전문어에 담긴 역사성과 전문성을 무시하고 그로 인한 기술적, 문화적 깊이를 지워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었다.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깊이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이기는 하지만 겉핥기식 개념어 혼합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식으로 말하면 키치(kitsch)의 양산일 뿐이다. 단순히 저속한 작품을 양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본성 또는 전문성을 무시한 채 익숙한(일상적) 겉모양만 베껴 활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전문가라면 최소한 해당 전문 영역의 개념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인접 분야 전문어에 대해서 최소한의 이해가 필수인 시대를 지나고 있는 셈이다.
다음의 그림은 그런 용어들 중에서 중요하게 구별하고 활용해야 하는 것들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대상물을 지칭하는 말들과 실천행위를 지칭하는 말들은 결국 분야의 전문성과 깊이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통할 때 오해 없는 실천이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