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형주 ([email protected])
조경분야 위기 공감, 학계는 묵묵부답
‘조경에 대한 인접분야의 업역 침범이 심화되면 결국 조경학이 없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 될 위기에 처했다. 최근 한국연구재단의 평가학문분야와 통계청의 한국표준교육분류는 조경을 독자적인 학문영역으로 인정하지 않고 산림과 통합하거나 건축과 원예에 속한 기술 수준으로 분류한 것으로 드러났다.
통계청, 조경을 건축과 원예의 하위 영역으로 구분
통계청은 한국표준교육분류 영역부문 제정을 추진하면서 조경을 원예와 건축분야의 하위로 분류했다. 조경 관련 학과는 한국조경학회에 등록된 것만 53개 학교(대학원 포함)에 달하는데 이를 무시한 채 조경분야를 단순히 원예와 건축분야가 가진 ‘기술’로 취급한 것이다.
한국표준교육분류 영역부문 조정안에 따르면 ‘건축 및 도시 설계’(대분류 ‘공학, 제조, 건설’, 중분류 ‘건축 및 건설’)분야의 예시로 조경술, 토목조경학이 언급됐다. 또 ‘원예’(대분류 ‘농립어업 및 수의학’ 부문에 중분류 ‘농업’)분야를 설명하는 하나의 기술로서 조경이 구분돼 있다. 원예기술 및 관리, 화초재배, 온실, 묘목 관리 등과 동급으로 구분됐다. 조경의 영역인 공원과 정원 만들기, 정원가꾸기, 골프장관리, 녹화, 공원과 정원의 배치와 건설이 원예로 둔갑하고 그 안에 조경이 포함돼 있다.
법과 정책에 정통한 한 조경전문가는 “조경은 국토부 편제상 건축도시부문에 있고 국토부에는 조경설계기준도 마련돼 있다. 공공기관 및 지자체에는 공원녹지 관련 부서가 별도로 있는 상황에서 원예에 맞춰서 임의로 분류에 넣는 것은 맞지 않다. 국가적 체계가 있는 상황이라면 조경학이 별도로 구분되거나 조경과 관련된 것이 원예 수준에서 같은 위계 혹은 건축·도시·조경으로 분명하게 분야를 구분해야 한다”며 조정안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다.
용어도 문제가 됐다. ‘건축 및 도시 설계’의 예시로 ‘조경 건축’이 명기돼 있다. 국제표준교육분류에 있는 ‘Landscape architecture’란 용어를 ‘조경 건축’으로 번역했다는 것이 통계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안명준 조경시공연구소 느티 소장은 “Landscape architecture는 국내에 조경으로 번역돼 40년 이상 이어져온 학문이고 국어사전에도 조경이란 용어가 등록돼 있다. 심지어 조경 건축은 국어사전에도 없는 용어인데 임의로 번역하는 것은 오류다. 조경이란 학문이 있고 학과가 있다. 조경진흥법까지 제정돼서 국가적으로 지원하려 하는데 국가정책에도 맞지 않고 충돌된다”며 통계 관리의 편의를 위해서 분류하더라도 용어는 바로 쓸 것을 권고했다.
통계청은 지난 2014년 1월 한국표준교육분류 수준부문 개정을 완료했고, 지난 2013년 11월 국제표준교육분류ISCED가 11개 부문으로 개정됨에 따라 영역부문에 대한 제정을 추진 중으로, 지난 2014년부터 공동연구협의체를 구성해 의견수렴 및 연구를 진행해 왔다. 협의체는 전문가와 실무위원회를 비롯한 교육부, 한국교육개발원, 한국직업능력개발원,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 관계자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이번 교육분류는 통계청의 업무 목적만이 아니라 교육과 관련한 여러 기관과 분야에 폭넓게 적용될 전망이다.
한국표준교육분류 영역부문 제정안은 오는 9월 30일에 고시돼, 2018년 1월에 시행될 예정이다. 분류는 5년 단위로 개정된다.
통계청, 조경학회 빼놓고도 의견수렴했다 “뻔뻔”
통계청은 지난 6월 10일부터 24일까지 한국표준교육분류 영역부문 제정 조정안에 대한 의견수렴을 위해 정부기관과 공공기관, 대학, 학회 등 138곳에 공문을 발송했다. 통계청 홈페이지와 국민신문고 등에서도 제정 사실을 공고했다. 청은 국내에 1200개 정도의 학회가 있는 것으로 파악, 대분류 11개와 밀접한 학회를 중심으로 공문을 보냈으나 발송명단에 한국조경학회는 포함되지 않았다.
김도완 통계청 사무관은 “조경이란 분야를 특별하게 감안해서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대분류 중심의 영역에 속한 분야를 중심으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주요 대학 28개를 추려 공문을 발송했고, 그중 조경 관련 학과로는 동국대학교가 유일하게 의견을 보내왔다”고 말했다.
통계청의 한국표준교육분류의 대분류는 ▲일반 프로그램 및 자격 ▲교육 ▲예술, 인문학 ▲사회과학, 언론·정보학 ▲경영, 행정, 법 ▲자연과학, 수학 및 통계학 ▲정보통신기술 ▲공학, 제조, 건설 ▲농림어업 및 수의학 ▲보건·복지 ▲서비스로 구분된다. 중분류는 29개, 소분류 81개 분야로 분류돼 있다.
대분류를 기반으로 통계청이 공문을 발송한 28개 대학 중 강원대학교, 건국대학교, 경북대학교, 경상대학교,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 부산대학교,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전남대학교, 전북대학교, 한양대학교 등 12개 학교가 조경 관련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다. 이 중 동국대학교만 유일하게 의견서를 제출했다.
김 사무관은 조경을 별도의 분류로 신설해 달라는 조경분야의 요청에 대해 “전국적으로 약 2만7000개 정도의 학과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조경학과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아 하나의 소분류로 구분하기가 현재로서는 힘들다”며 “제정안은 국제표준교육분류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최종적으로 원예에서는 조경이 빠지고 건축 및 도시 설계에만 넣게 될 예정이다”고 설명했다. 향후 분야의 규모가 커진다면 신설을 검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본지에서는 분류에 참여한 전문가 의견을 받기 위해 관련 연구위원 명단을 요청했으나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예를 들어 의류나 요리 계통의 학과 교수가 의료 계통의 분류를 한다면 상식을 벗어난 일일 텐데, 혹여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일반인은 통보한 대로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통계청 관계자는 “그렇다”고 답변했다. 공모로 따지면 심사 중인 사안이므로 명단을 공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제정이 끝나도 연구에 참여한 위원들의 명단 공개 여부는 알 수 없다는 것이 통계청 관계자의 말이다.
한국연구재단 ‘조경과 산림’ 통합 분류… 연구 편의가 목적
지난 2월 한국연구재단 생명과학단이 세부학문평가분야를 산림/조경생물, 산림/조경경영, 산림/조경공학으로 통합 분류한 것이 최근 알려졌다.
한국연구재단 생명과학단에 따르면 평가분야 조정 작업은 타 학문분야와의 균형 및 연구자의 편의를 목적으로 진행됐다. 기초생명분야와 분자생명분야의 RB분야는 주로 10개 이하의 세부학문분야로 구성돼 있는 반면, 기반생명분야는 최대 35개 세부학문분야로 세분화돼 수년간 개편 필요성이 제기돼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우리 재단은 계속과제를 포함해 1년에 2만5000여 개의 R&D 과제를 운영하고 약 4조5000억 원의 연구비를 매년 관리하고 있다. 매년 떨어지는 과제를 잘 평가하고 운영하기 위해 구분을 분류한 것이다. 다른 의도는 전혀 없다”며 학회 등에서 의견을 주면 향후 세부학문분야 개편 시 참고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연구재단 책임전문위원을 맡고 있는 서주원 명지대학교 교수는 “네다섯 개 분야가 하나로 합쳐지면 단일 연구비가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이를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면 더 많은 연구비를 챙길 수 있을텐데, 조경분야에서 따지고 들면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이다. 유리한 방향을 잘 따져서 조용히 실속을 챙기는 게 낫다”고 종용했다.
이에 대해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재단의 방향과 다른 의견이라고 선을 그었다.
조경학과 교수들 뭘 했나?… 동국대만 의견 제출
통계청에서 공문을 발송하기에 앞서 지난 5월 24일 교육부 교육통계담당관실에서는 한국표준교육분류 영역부문 제정과 관련한 의견수렴을 위해 전국 400여 개 고등교육기관(전문대학, 대학, 대학원)에 공문을 발송했다. 교육부에서 1차, 통계청에서 2차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쳤으나 그 과정에서 동국대학교 조경학과만 1, 2차 모두 공문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번에 유일하게 문제를 제기한 동국대학교 조경학과의 이영경 교수는 자연대학장을 맡고 있다 보니 공문을 먼저 보게 됐는데, 이전부터 분류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어 공문을 특히 유심히 보게 돼 상황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공문을 확인하고 학과 교수들과 회의를 했다. 서비스도 한 분야로 분류됐는데 1983년 이래로 40여 년을 이어온 학과가 분류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며 “조경이란 학문이 법적으로 조경직을 뽑지도 않는 상황에 통계청이란 공식기관에서 관리하는 학문적 분류조차 배제된다면 향후 학생들의 진로와 나아가 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단초가 될 수 있어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시켰다”고 말했다.
분류는 평가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학과 입장에서는 당장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안이다.
한국조경학회는 공식적으로 통계청의 공문을 받지 못했다. 문제가 공론화된 후 8월 중 회의를 진행하고 오는 10월 환경조경포럼을 개최해 조경 관련 단체들과 대처 방안을 논의하기로 하고 안건으로 상정해 놓은 상태다. 한국연구재단의 분류와 관련해서도 10월에 예정된 포럼에서 함께 논의하기로 했다. 별도로 의견서를 내진 않았다.
안승홍 한국조경학회 부회장은 “지금으로선 의견수렴이 끝나 재개정하는 5년 동안은 달리 방법이 없다. 학교 입장에서는 국내 대학 교육 정책을 관장하는 대교협의 방향이 중요하다. 조경학과는 종합학문이다 보니 대학마다 소속된 단과대가 다르다. 산업과의 연관성을 따져 정체성을 확실히 도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통계청의 한국표준교육분류 작업에는 대교협도 참여하고 있다. 통계청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제정안은 대교협과 교육부 등 교육 관련기관들의 정책 자료로도 쓰일 예정이라 장기적인 측면에서 분류에 따른 영향이 예측되는 상황이다. 학계의 보다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해 보인다.
종합적 대처 필요… 학계·업계 또 엇박자로 가나
진승범 한국조경사회 수석부회장은 학회가 나서면 조경사회가 적극 돕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업계에서는 아직 대응에 나서지 않고 있는데, 학계에서 조경을 학문적으로 규명해 줘야 의견에 공신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진승범 수석부회장은 “국가기관의 분류는 업역을 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이번 통계청의 교육분류 제정은 국제표준교육분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전세계적으로 업역을 구분하는 대외적인 공포다. 아주 심각하고 큰 문제”라고 지적하며 학회 차원에서 먼저 대응에 나서면 조경 관련 단체들이 힘을 보탤 것이라고 말했다. 학회에는 이러한 의견을 전달한 상태다.
반면 안계동 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 회장은 “교육이나 학문분야 분류가 바뀐다 해도 설계 물량이 변하거나 일감이 다른 분야로 몰릴 일은 없기 때문에 실무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며 설계분야의 분위기를 전했다.
통계청 한국표준교육분류 영역부문 제정에 대한 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영경 동국대학교 교수는 교육분류 및 연구분야와 관련해서 조경학회와 조경사회가 위원회를 구성해서라도 체계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분류는 정체성의 기본이다. 이번 일은 우리의 자존심과 정체성이 걸린 일이다. 이번 사안은 조경분야 전체의 문제로 조경인들 모두가 나서야 할 일이다. 앞으로의 40년을 나아가는 조경의 기능과 역할을 정립하는 기회로 삼아 학생들이 사회로 나갈 발판을 닦아줘야 한다”며 조경인들이 사안을 조금 더 진중하게 받아들일 것을 부탁했다.
한 조경인은 “늦었더라도 사안을 알게 됐으면 의견을 보내고, 종합적으로 대처할 팀을 짜야 한다. 학회가 총대를 메고 관련 단체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이렇게 무관심하다면 조경의 영역이 산림청으로 하나씩 떨어져 나갔듯이 비슷한 문제로 귀결될 여지가 보인다”며 조경분야의 안일한 대처에 우려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