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인 HLD 대표 ([email protected])
지난해 겪은 조금 희한하고 황당한 에피소드를 이어 모았다. 사실관계를 되도록 있는 그대로 적기 위해 지명, 기관명, 프로젝트명, 직함은 각색했다.
기묘한 이야기 #1: 공원, 도로공원
공원은 조경가가 설계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그런데 엔지니어링 협회를 통해 경력관리를 하는 조경기술자라면, 경력을 추가하기 위해 ‘엔지니어링 사업종류’를 고를 때 ‘공원’이란 항목이 없는 황당한 일을 겪어봤을 것이다.
엔지니어링 사업종류는 기술분야별로 구분되어 있지 않아 엔지니어링 업계 전체의 선택항목이 하나로 목록화되어 있어 뭐 하나 찾기가 정말 어렵다. 그래서 어딘가 다른 이름으로라도 있을 것 같아 리스트를 두서너 번 위아래로 스크롤 해보게 되지만 확신은 서지 않는다. 가나다순으로 되어있으니 맛보기로 ‘ㄱ’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스공업, 가스사업, 가스설비, 가스안전, 가축 육종, 가축생산, 각종 전원장치, 간척, 간척 외곽시설, 감리, 감시제어 설비, 감전 방지, 개간, 개폐기, 객·화차, 건널목 보안장치, 건설안전, 건설화약산업, 건설작업환경, 건설재해방지사업, 건조 공법, 건축 부대시설, 건축구조물, 건축기계장치, 견방적, 경작도, 경정화용 나노소재, 경지정비, 계약관리 계획, 고분자 공업, 고속도자동차도로, 고속전철, 고압기술, 고압설비, 고정무선통신설비, 고치삶기, 고탄성재료, 고효율 열전소재, 공기조화설비, 공기조화장치설비, 공기청정장치설비, 공업계획제어, 공업단지, 공업용 계측계기, 공업화학 안전, 공장 자동화 기기, 공장관리, 공항, 공항 및 항만, 공항부대시설, 관개배수, 관광단지, 관정 개발, 광물, 광물 채취시설, 광산, 광산 환경, 광업 피해, 광업화약, 교량, 교류기, 교차로시설, 교통 부대시설, 교통구조물, 교통안전시설물, 교통체계시스템, 교환설비, 구근, 구근삽수, 구내통신설비, 구조 및 표면디자인, 구조물안전진단, 국가지리정보체계(NGIS), 굴뚝설비, 궤도회로, 귀금속 제련, 극미세 오염물질, 금속재료 분류, 금속재료 열처리, 금속재료 용도, 금속재료 재료시험, 금속재료 제조장비, 금속재료 파괴 및 비파괴시험, 금속재료 표면처리방법, 금형 생산기술, 금형 제작기계, 급수배수설비, 기계 및 기계장치, 기계공정시스템, 기계안전사업, 기상예보, 기술지원, 기술프로그램, 기억장치, 기초구조물, 기타 계측기기 및 제어기기 제어, 기타 금속가공, 기타 발송배전, 기타 수자원개발시설물, 기타 열차, 기타 장치 및 시스템, 기타 전자계산기, 기타 차량, 기타 측정 시스템, 기타 토목구조물, 기타 항공기 기체, 기타 항공기 추진장치 이상 115가지. 때론 ‘고치삶기’나 ‘극미세 오염물질’처럼 상당히 구체적이다.
이 중 ‘조경’ 기술 분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사업종류는 밑줄로 표시했다. ‘공원’은 없다. 어쩔 수 없이 ‘도로공원’을 고르지만 찝찝하다. 위의 예시에서 볼 수 있듯, 두 단어 이상을 합성한 경우 띄어쓰기를 하거나 중점을 쓰기도 하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도로공원’은 한 개 단어로 붙어있다. ‘정원’도 없다.
개인적으로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의 사업종류를 가장 명쾌하게 고른 경우는 ‘댐자원을 활용한 스마트레벨업 기본구상 및 기본계획 수립 용역’의 ‘댐’이다.
기묘한 이야기 #2: 오늘도 무사히, 내 인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댐은 참 특별한 공간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사는 3년째, 수자원공사와 함께 전국의 28개 댐 공간에 우리 시대에 적합한 공간 역할을 부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런 비전 수립 프로젝트는 당연히 현장이 매 순간 겪고 있는 눈앞의 문제만을 다루지 않기에, 이를 발주한 수자원공사 중앙본부의 의지와 이를 지켜보고 있는 지사의 생각 역시 심히 다르다. 어느 것이 더 옳고 우선한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때론 그 간극이 너무 심할 때가 있다. 환경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이끄는 문화적 공간으로의 탈바꿈을 고심하고 있는데, ○○댐 지사장이 조압수조 구조물에 트릭아트 그려달라는 식이다. 있는 트릭아트를 지워도 시원찮은데 하나 더 만들 수는 없어, 자문비 정도 받고 시작한 일임에도 회사 내 공모전도 열어가며 열정적으로 대안을 만들고, 없는 예산과 공사기간을 고려해 실현성 있게 계획안을 정리했다. 스위스나 스페인 댐에서나 보던 환상적인 장면(moment)이 만들어질 것 같아 잠시 설레었다.
두 시간 가까이 쏟아낸 제안을 듣고 우리처럼 매우 상기되어 보였던 지사장은,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고 이렇게 말했다. “정말 좋은데, 제 임기 끝나고 하면 안 될까요? 우리는 지금 내년에 있을 ○○댐 30주년 행사 준비하기도 바쁘잖아.”
나를 배웅하는 길에 그는 관리동 앞 녹지에 있던 나무 철거 현장을 보여주면서 직원들이 휴식할 수 있는 퍼걸러를 하나 설치하려는데, 그 옆에 향나무 심는 건 어떠냐고 전문가로서의 의견을 물어왔다.
기묘한 이야기 #3: 조경의 탈
한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하천 복원 기본계획 용역을 땄는데, 자기네는 조경 부서가 없어서 함께할 업체를 찾고 있다며 설계 견적을 요청받았다. 조경이 없는데도 일을 수주할 수 있게 발주가 된 것이 이상해서 나라장터를 뒤져보니 입찰 조건은 아래와 같다. 참여 자격요건에는 잘못된 게 없다.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제21조에 의하여 건설부문(수자원개발, 도시계획, 상하수도, 조경, 교통)과 환경부문(수질관리 분야)의 엔지니어링사업자로 신고한 업체 또는 「기술사법」 제6조에 의하여 같은 분야 기술사 사무소로 등록한 업체로서, 「건설기술진흥법」제26조에 따라 건설엔지니어링(종합 또는 설계·사업관리-일반 또는 설계·사업관리-설계등용역-일반)을 등록한 업체
이상하게도 이런 일은 공공연하게 묵인되고 있다. 조경전문가와 전문업체에 대한 자격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조경의 입지는 계속 좁아질 것이다.
기묘한 이야기 #4: 꿀이나 발암물질이냐, 사기 혹은 미필적 사기
나라장터에 입찰공고가 뜨면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것이 금액, 자격(자격 구성), 그리고 기간이다. 프로젝트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운영해서 수익을 남길 수 있느냐에 용역비만큼 중요한 게 기간이다. 단기간에 마치려면 그만큼 과정이 강도 높고 힘들 수 있지만 대신 줄어드는 리스크도 많다. 같은 일을 3년 하면 노예계약이 될 수 있고, 9개월이면 소위 ‘꿀’일 수 있다. 3년으로 시작한 일이 갖가지 중지, 연장을 겪어 10년이 되면 발암물질이다.
원래 과업기간 6개월로 시작된 한 프로젝트가 결국 14개월로 연장되었다. 프로젝트 기간이 연장되면 그에 따라 과업이 증가하는 경우가 많고, 과업 내용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기간 연장에 따른 기회비용이 뒤따르기 때문에 용역비 변경의 사유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조항은 지난 해 ‘조경설계협의회’에서 발표한 조경설계표준계약서에도 명시되어 있다. 발주처인 ○○시에 증액을 요청했더니, 예산이 없기도 하고 원래부터 이 프로젝트는 6개월만에 끝날 것이라 판단해서 낸 건 아니라고 한다. 6개월짜리가 아니지만 그 해 예산으로 편성했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6개월로 발주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사실 이렇게 된 제반의 상황(이를테면 회계연도를 기준으로 한 예산 편성 절차상의 문제 등)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6개월 아닌 일을 6개월로 발주할 때는, 용역사 뿐 아니라 발주처 역시 이를 6개월 내 진행할 의무가 있고, 발주처의 사유로 기간이 연장될 경우 이 연장에 따른 기회비용을 보상할 리스크를 발주처가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한 비용을 전부 을에게 전가하는 것은 갑질이다. 갑의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해서 면책되지는 않는다.
기묘한 이야기 #5: 시뮬레이션 안 해보냐?
얼마 전, ○○시 입찰 시 정량적 평가에 적용되는 가산점의 기준이 업데이트되었다. 가산점은 가. 중소기업, 나. 지역업체, 다. 고용창출 (신규/청년/여성/장애인), 라. 약자기업 지원 및 정책적 지원 (사회적기업, 모범납세자 등), 마. 안전보건 확보 정도, 바. 근로 및 하도급법 등 준수 정도 (바의 항목은 가산점이 아니라 감점 적용) 등 크게 여섯 항목이 인정된다. 새로 업데이트된 기준에는 모순이 있다.
다. 고용창출 2. 청년고용 우수기업 기준을 따르면 “청년고용률이 20% 이상이면서 청년고용인원이 10인 이상인 기업” 또는 “청년고용률이 5% 이상이면서 청년고용인원이 5인 이상인 기업”이어야 가산점을 얻는다. 전자를 만족하려면 총 청년/비청년을 합한 총 고용인원이 최소 50인 이상이어야 하고, 후자를 만족하려면 총 고용인원이 100명이어야 한다. 즉, 애초에 고용인원이 50인 이하인 대부분의 중소 설계사는 청년고용을 아무리 많이 해도 가산점을 받을 수 없다. 이 기준은 중소기업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과 정확히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 고용창출 3. 여성고용 우수기업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50인 미만의 기업은 여성고용률이 아무리 높아도, 극단적으로 모두가 여성이어도 가산점을 받을 수 없다. 라. 약자기업 지원 및 정책적 지원의 2. 여성기업(중소벤처기업부 발급)은 대표이자 최대주주가 여성이면 인정받을 수 있다. 실질적 오너나 리더인지는 검증하기 어렵다. 이러한 허점을 이용해 많은 기업들이 실제 기업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 ‘실질적 오너나 대표’의 배우자를 대표 및 최대주주로 두고 활동하고 있다. 운영실태를 반영하지 못하고 지정이 남용되는 ‘여성기업’은 ‘공공이 약자로서 지원해 줘야 하는 대상’일까? 허술한 제도가 낳는 부작용은 오히려 여성의 평등한 권익 찾기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내가 대표로 있는 회사는 굳이 여성기업 인정을 받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수의계약 범위는 2000만원 이하이다. 급히 처리해야하는 일을 맡기려던 여러 발주처가 우리 회사가 여성기업이 아닌 것에 놀라면서, 제발 여성기업 좀 지정받으라고 권유했다. 여성기업이 아니라 좋은 점도 있다. 발주처가 ‘수의계약 범위’라는 것을 용역비 축소의 핑계로 삼을 때도 있는데 여성기업이 아니니 이를 쉽게 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 입찰의 세 부분 (정성적 평가, 정량적 평가, 가격 평가)은 모두 당해 사업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우수한 업체를 공정하게 선발하기 위한 장치다. 이들에 학점을 준다면 C+ 정도 주고 싶다. D가 사실상 마음 약해서 F 대신 주는 거라 하면, C+는 재수강하라는 분명한 의사전달이라고 볼 수 있다.
놀랍게도 발주처도 업체도, 이러한 기준을 받아들이는데 아무 저항이 없는 듯하다. 허심탄회하게 대화해 본 많은 발주처는 가장 좋은 업체 선정 방식이 수의계약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들의 평가 기준에 대한 스스로의 신뢰도를 반영한다.
기묘한 이야기 #6: 자주 말아먹으면 한번 잘한 것보다 낫다.
정량평가는 회사의 기술력 (유사용역 점수), 참여자의 기술력 (사업책임자/참여자의 경력과 자격 점수), 회사의 신인도 등을 평가한다.
공사라면 모를까 인건비가 비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설계 용역에서 기업의 신인도를 왜 이렇게까지 크게 점수화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돈을 주겠다고 약조하면서 결과물을 먼저 받아 가는 것은 발주처이니, 용역사 입장에서는 발주처의 신인도가 참으로 궁금하다. 발주처, 특히 공공 발주처는 입찰 업체가 도산 위기에 있어서 용역 수행이 중단될 우려가 있거나, 임금 또는 세금을 체불한 상황이 아니라면 용역사의 재무상태에 따라 점수를 줄 이유가 없다. 최소한의 참가자격을 정해 걸러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유사용역 수행 여부는 신인도보다는 합당한 기준처럼 보인다. 맹점은, 유사용역 수행 여부를 너무 까다롭게 본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유사용역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보다는 얼마나 많이 수행해야 만점인가 하는 기준이 더 불합리하다. 오래된 회사가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사 프로젝트를 한두 번 해봤으면 나머지 역량은 제안서 내용으로 평가하면 될 것을, 비슷한 일 10번 해봤으면 제안서 잘 쓴 것보다 더 쉽고 확실하게 점수를 준다.
유사용역을 얼마나 잘 했는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말아먹었어도 했으면 쳐준다. 자주 말아먹으면서 꾸역꾸역 실적을 채워 나가는 것이 한 번 정말 잘한 것보다 낫다.
기묘한 이야기 #7: 70%로 후려쳐 0.175점 차로 이기다.
이 가운데 C+가 아니라 F를 줘서 사라지게 하고 싶은 ‘가격점수’가 있다. 얼마 전 총 4개 업체가 참가한 ○○시 기본구상 입찰의 점수표다.
낙찰자는 업체 A다. 종합평점 0.175 차이로 아깝게 떨어진 업체 B는 기술평가점수에서 1.8점을 앞섰지만 가격점수에서 1.975를 잃었다.
업체 B가 낸 제안가격을 토대로 환산해 보면 업체 A는 약 70% 정도의 가격을 냈다. 업체 A가 조금만 더 높게 썼으면 떨어졌을 판이다. 가격을 정한 사람이 참으로 용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원래 책정된 기준금액도 과업 내용에 비해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이의 70% 금액을 가지고 과업을 수행할 수 있나 의아해하는 나에게 다른 시 공무원이 말했다. “일단 저렇게 따고, 추후에 설계변경할 거라 생각하는 거겠죠. 낙찰 차액이 있으니까.” 이럴 거면 입찰 가격은 애초에 점수화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가장 이상한 것은 이런 에피소드를 조경계에서 그렇게 희한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미 이런 일을 한 번쯤 또는 여러 번 겪어본 사람들이 인생 선배 뉘앙스로 ‘원래 그렇다’고 한다. 이런 부조리와 불합리에 놀라지 않는 그들이 가장 기묘하다.
새해를 시작하는 글이 기묘함에서 끝나기보다는 그 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할 것 같아, 다음 달 ‘탈조경 시대에 을질하기’라는 제목으로 이어가려고 한다.
이해인 / HLD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