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혜인 해외 리포터 ([email protected])
인류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1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는 인류가 지구 기후와 생태계를 변화시켜 만들어진 새로운 ‘인문적’ 지질 시대다. 산업 혁명 이후 250년 만이다. 그렇다. 가장 최근의 지질학 시대인 충적세는 약 1만 년 전이었지만 인류는 단 250년 만에 새로운 지질 시대를 열어젖혔다. 인류세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에 의한 환경 파괴다. 끊임없이 환경을 훼손하고 파괴함으로써 인류가 이제까지 진화해 온 안정적이고 길들여진 환경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엘니뇨, 라니냐, 라마마와 같은 해수의 이상 기온 현상, 지구 온난화 등 기후 변화로 인해 물리·화학·생물 등 지구의 환경 체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며 현재 진행 중이다.
인류세의 시작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종(種)의 개체로서, 어느 누가 이 현상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느 누가 혹독한 환경 훼손의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도시 행성을 향한 낙관론
세계 디자인 회담(WDS, World Design Summit)에 초대된 기조연설자 중 한 명인 조경가 더크 시몬스(Dirk Sijmons)는 낙관적이다. 그는 인류세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와 세계를 묘사하는 적절하고 도발적인 용어라 인정하며, 이러한 개념 덕분에 환경에 끼치는 인간의 영향력에 대한 심도 깊은 관찰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2
또한 그는 21세기 도시 행성(urban planet)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인류가 이 행성에 못 할 짓을 했다며 자책하며 감상에 빠지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다는 완강한 입장이다. 인류세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좋든 싫든 간에 현재에서 진전해야 하며,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의 창의력이다. 창의력은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도 하지만 곤경에서 구해 줄 수도 있다. 인류의 최대 과제는 이 시대의 과제를 풀기 위해 인간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2000년 폴 크뤼천(Paul Crutzen)이 인류세라는 용어를 처음 소개한 뒤 17년 만이다. 인간의 창의력 활용이라는 주어진 숙제를 시작하기 위해 캐나다 퀘벡 주 몬트리올에서 2017년 10월 16일부터 25일까지 열흘간 디자인의 역할을 곱씹어보고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바로 WDS다.
첫 번째 세계 디자인 회담
WDS는 그야말로 회(會, 모일 회)하여 담(談, 말 혹은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WDS는 건축, 그래픽 디자인, 인테리어 디자인, 산업 디자인, 조경, 도시계획 등 여섯 개 분야의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관련 기관이 모인 자리다. 이들이 전 지구적으로 당면한 문제에 대해 디자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첫 번째 자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국제디자인협회(ico-D, International Council of Design), 국제 주택 및 도시계획회의(IFHP, International Federation for Housing and Planning), 세계조경가협회(IFLA, 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를 주축으로 WDS 조직을 구축하고, 캐나다 국가 수립 150주년과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 5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캐나다 정부와 퀘백 주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개최되었다. WDS 측은 네 가지 큰 틀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주제를 효율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고, 경제적으로 실현 가능하며, 사회적으로 평등하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세계 만들기” _ 이음 선언(Eeum Declaration), 대한민국 광주, 2015
2015년 광주에서 WDS의 준비 회의 격인 국제 디자인 총회가 “이음: 연결하는 디자인(Eeum: Design Connects)”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WDS는 이 국제 디자인 총회의 종착지이자 향후 10년을 향한 시작이다. 전 지구적으로 당면한 과제 해결을 위해 디자인의 힘을 활용해 전 세계적으로 통합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50여 개 국제기구가 모였다. 여기에는 유네스코, 경제협력 개발기구(OECD,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유엔환경계획(UNEP,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 지속가능성을 위한 세계지방정부(ICLEI, International Council for Local Environmental Initiatives)와 같은 정부간기구, 초국가적 기구와 전문 기관뿐 아니라 디자인, 건축, 도시계획, 조경·건축을 대표하는 국제기구가 참가했다.
“WDS에서 나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쉽게 풀리지 않을 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더욱 견고한 협업이 필요하다. 디자인에 어떤 힘이 있다면 그것은 협업의 힘이다.” _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 WDS 기조연설자, 2016년 프리츠커상Pritzker Prize 수상자)
위의 문구는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의 WDS 초대장이다. 디자인의 힘을 확인하고 공유하기 위해 3,500명의 관련 전문가가 모였다. 지구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earth), 참여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participation), 변화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transformation), 아름다움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beauty), 판매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sale), 위기 극복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extremes) 등 여섯 가지의 디자인 분류 아래 108가지 주제에 관한 생각을 500명의 발표자가 나름의 방식으로 공유하고자 했다.3
박람회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
박람회는 진입 광장(Reception Square), 판지 거리(Cardboard Main Street), 여섯 개 학문의 광장(6 Disciplines’ square), 사계절 언덕(Hill of the Four Seasons), 웨스턴 디스트릭트(Western District), 순간의 정원(Ephemeral Garden)의 여섯 개 공간으로 나뉜다. WDS의 참가자가 혁신적인 디자인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최신 기술과 제품을 직접 경험해 보고 타 분야의 전문가와 교류할 수 있도록 했다. 일반에게도 공개해 디자인과 사회 전반에 걸쳐 활약하는 창의적 리더로서 디자이너의 역할을 환기했다. 또한 디자인은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을 확산하고, 참여와 공감 유도를 통해 적극적인 경계 허물기를 시도했다.
공식 행사 외에도 WDS는 컨벤션센터를 벗어나 몬트리올이라는 도시를 유랑하기를 권한다. 박물관, 갤러리, 미술관과 디자인 관련 장소가 표시된 지도를 따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으며, WDS 기간 동안 참가자와 일반에게 디자인 사무실을 개방해 방문할 수 있게했다.
인류세 디자인
디자인은 무엇인가. 원론적인 의문이다. WDS는 “그렇다면 인류세의 디자인은 무엇인가”라는 업그레이드된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답을 제시했다.
첫째, 디자인은 의도를 구체화한다. 기술과 재료의 진보에 따라 급격히 변화하고, 걷잡을 수 없는 개발의 영향에 점점 취약해지는 세계에서 물질적, 공간적, 시각적, 경험적 환경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둘째, 디자인은 혁신과 경쟁, 성장과 발전, 효율성과 번영의 원동력이다.
셋째, 디자인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우리가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구를 보호하는 지속가능한 솔루션을 위한 주체다.
넷째, 디자인은 문화를 표현한다. 디자이너는 직면한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문화유산과 다양성을 창조하고, 보호하고, 활성화하고, 향상하며, 기념하는 강력한 역할을 한다.
다섯째, 디자인은 기술에 가치를 더한다. 인간의 관점과 인터페이스를 고려하고 우선 개인의 상호 작용에 초점을 맞춰 디자인은 인간의 요구와 기술을 연결한다.
여섯째, 디자인은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디자인은 사회, 공공과 민간, 정부와 비정부, 사회와 개인의 변화를 통해 삶의 질을 향상한다.
일곱째, 디자인은 도시의 활성화된 소통 방식, 개선된 환경, 좀 더 풍요로운 지역 사회와 삶의 질을 다지는 기반으로 기능한다.
여덟째, 디자인은 포괄적인 연구, 견고한 방법론, 표본화(prototyping) 및 생활 주기의 결과 등을 고려해 위험 요소를 관리하고 탄력성을 고심한다.
재정의한 디자인에는 재정의된 행동이 따라야 하는법. WDS는 인류세 디자이너의 역할과 디자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디자인 진흥: 디자인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좀 더 효과적인 의사소통과 디자인 프로세스를 이해한다.
디자인 지표 개발: 자료 수집과 디자인의 영향 평가를 좀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법론을 수립한다. 이를 통해 조직 또는 기업에서 디자인의 전략적 가치를 입증하고 공공의 이익을 제공한다.
디자인 정책 개발: 지역, 국가 및 국제적 차원에서 개발한다.
디자인 표준 개발: 전문 디자인 커뮤니티 지원, 디자인 산업 인프라 개발 및 표준, 코드, 협약, 모범 사례, 법적 보호 및 인증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디자인 교육 향상: 디자인 교육, 디자인 연구, 평생 학습, 디자이너 역량 구축과 관련된 교육 기관과 교육 방법, 교육 프로세스를 지원한다.
유연한 디자인: 신체적·사회적·문화적 환경과 자연 생태계의 악화에 따른 물리 환경적 변화, 산업화, 급속한 도시화와 소비로 인한 위협에 중점을 둔다. 또한 삶의 질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지속가능한 경제 성장에 유연하게 반응하는 디자인을 추구한다.
책임감 있는 디자인: 디자이너는 자신의 역할로 인해 초래되는 영향을 인식한다. 그것이 건설적일 뿐 아니라 파괴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이의 조경
인간이 자연과 동떨어진 존재라는 생각은 인류세 선언 이후 의미를 상실했다. 인류세 선언으로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을 떨구어 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것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에 직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 경계는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진 경계의 중심에 조경이 있다. 우리는 자연, 도시, 건물, 사람, 문화, 기반 시설의 ‘사이’를 디자인한다. 건물 밖을 나섰을 때 경험하는 모든 것을 디자인한다. 그렇기에 생기는 오해도 있다. ‘사이’를 경계를 넘나들며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요지로 보지 않고 자투리 공간으로 인식해 조경이 장식의 도구로만 인지되는 경우다.
WDS에 초대된 기조연설자 중 한 명인 조경가 클라우드 코르미에(Claude Cormier)는 그러한 오해로 기가 죽기는커녕 코웃음을 날린다. 그는 사이의 공간을 주목할 만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사이의 중요성을 일반에 적극적으로 어필한다. 그는 프레데릭 옴스테드와 마사 슈왈츠가 아들을 낳았다면 바로 자신일 것이라며 유쾌한 기조연설의 시작을 알렸다. 그의 작업들은 자연을 구현하려 했던 옴스테드와 조경의 예술적 측면을 실험해 온 슈왈츠의 하이브리드다. 주목할 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그의 연설은 조경가로서 태생적으로 ‘사이’의 주인공임을 기쁘고 유쾌하게 받아들이고, 조경의 가치와 능력을 믿고 당당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 모두는 잘 디자인된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다
작년 가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암흑 같은 모니터를 들여다 보면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놀리다가 라디오에서 한 여성의 울부짖음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모두 거지 같은 건축물의 희생자예요(We are all victims of the shitty built environment).” 어떤 주제와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뜨끔했다. 그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디자이너에게 일침을 날렸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우리는 제대로 디자인되어 풍요롭고 건강한 세상에서 살고 싶을 뿐이다. 제대로 디자인된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정답은 없다. 내가 원하는 세상과 네가 원하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WDS에서 확인했듯, 디자인이 가진 힘을 건설적으로 활용하며 창의력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1. ‘인류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2012년 6월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유엔의 ‘지속가능한 개발에 관한 주요 20개국 정상 회의’의 포문을 연 영상이다. 산업 혁명부터 회의가 열린 시점까지 250년의 지구 역사를 3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살펴볼 수 있다. 인류의 성장이 주요 지질학적 과정과 동등한 힘으로 작용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누군가는 인류가 이뤄낸 눈부신 발전에 놀랄 것이고, 누군가는 완전 망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https://www.iabr.nl/en/curator/2014antropoceen
2. 원시림보다 공원, 묘목장 등 인위적으로 조성된 장소에서 더 많은 나무가 자라며, 5억 년에 걸쳐 만들어진 생물군을 단 500년 만에 모조리 소비하고, 온실가스로 기후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원유 추출을 위해 전세계 모든 강에서 발생하는 침전물의 양에 버금가는 토양 변위를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3. https://worlddesignsummit.com/congress/themes-top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