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금 조경작업소 울 대표
독립산책을 할 수 있는 곳
미경 씨와 선희 씨는 주말이면 가끔 남산 북측순환로를 산책한다. 미경 씨는 대림동에 살고 선희 씨는 구로동에 사는데, 중간지점에서 만나 시각장애인과 신장장애인에게 제공되는 지원 차량 ‘복지콜’을 이용하여 남산케이블카 정류장 맞은편의 순환로 입구까지 온다. 그리곤 국립극장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시작점으로 온다. 그들뿐만 아니라 남산을 산책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주로 이 코스를 이용한다.
선희 씨는 청주에 살았었는데 얼마 전 직장 구하기 쉽고 복지시설도 많은 서울로 이사 왔다. 이 산책로는 서울로의 이사를 결정할 때 중요한 변수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서울에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차가 다니지 않는 넓은 길,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 가운데 놓여 있는 점자블록, 화장실이며 휴식시설, 길을 안내하는 음성유도기. 시각장애인들이 ‘누구의 도움 없이’ 산책할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추어졌다. 시각장애인들도 도시의 어느 곳이나 산책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적으로’ 산책할 수 있는 길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시각장애인들에게 이 산책로는 무엇보다 귀하다.
물론 불편한 점도 없지 않다. 봄꽃이 만발할 때나, 낙엽으로 산이 알록달록해질 때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부딪칠까 봐 걱정된다. 또 소리에 예민한 미경 씨에게 개 짖는 소리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개는 줄에 묶여 있을 것이고 줄을 잡은 보호자 있을 테지만 뒤에서 개가 짖으면 움츠러든다. 음성유도기가 없는 화장실을 이용할 때면 남자화장실로 들어갈까 봐 매번 긴장한다. 갖고 다니는 개인 리모콘을 아무리 눌러도 작동하지 않는 고장 난 음성유도기도 불편 요소 중의 하나다.
우리가 만든 우리의 산책로
남산 북측순환로가 시각장애인들이 사랑하는 길이 된 데에는 여러 배경이 있다. 회현시민아파트에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게 시작일 것이다. 회현시민아파트에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살게 된 건 남산 근처에 시각장애인협의회가 있어서인지, 관광객이 많아 안마사라는 직업 수요가 높은 명동이 가까워서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서로 간에 상관관계는 있을 것이다. 회현시민아파트 거주자들은 주변의 지인들에게 남산에 멋지고 안전한 산책로가 있다가 자랑했고, 이 자랑이 시각장애인 커뮤니티 내로 확산하면서 찾는 이들이 늘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들은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편의시설 설치를 요청했고, 1990년에 시작된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다.
선희 씨는 시각장애인들 스스로가 이 길을 자신들의 명소로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장애인들에게 그냥 주어지는 건 없다. 장애인 콜택시도, 지하철역의 엘리베이터도, 저상버스도, 장애인화장실도 끊임없이 요구하고 안 되면 싸우면서 만들었다. 선희 씨는 시간만 허락한다면 장애인들이 독립적으로 산책하고, 출퇴근하고, 밥을 먹기 위해 목소리 내는 곳을 찾아가 기꺼이 함께한다. 그렇다고 선희 씨가 세상을 싸워야 하는 대상으로만 보는 건 아니다. 혼자 산책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만큼, 함께 살기 위해 애쓴다. 산책할 때 흰지팡이를 가능한 한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걸려서 넘어질까 봐 염려되기 때문이다.
꽃비 오는 소리를 들었어요
미경 씨와 선희 씨는 온라인 게임을 하며 만났다. 미경 씨는 50대이고 선희 씨는 30대로 나이 차가 나지만, 시각장애인이라는 정체성 이외에도 통하는 게 많아 이렇게 함께 산책까지 하는 관계가 되었다. 선희 씨는 미경 씨가 엄마 같기도 하고 언니 같기도 해, 엄마라고 부르기도 하고 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희 씨가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미경 씨라는 비빌 언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산책을 하는 내내 쉬지 않고 수다를 떤다. 이 수다의 역사는 길어서 게임을 함께 하던 시절에도 게임보다는 채팅을 더 열심히 했다. 이 두 사람이 산책을 즐기는 방식이다.
반면 인규 씨는 향기와 촉감과 온습도와 바람으로 산책을 즐긴다. 기분을 좋게 하는 향기나 사색을 이끄는 향기를 맡게 되면 너무나 반갑다. 그는 느낌에도 민감하다. 땅바닥의 느낌, 손에 닿는 사물의 느낌, 앉는 의자가 주는 느낌. 항상 기대하며 몸을 움직이고 사물을 만진다. 나무 그늘이 주는 서늘함과 바람이 가져다주는 상쾌함도 그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산책할 때는 충분한 햇살을 받기를, 쉴 때는 시원하면서도 습하지 않기를 바란다. 간혹 물소리라도 들린다면 금상첨화다. 꽃이 만발했던 4월의 어느 날에는 꽃비를 들었다. 봄바람이 살갗을 살짝 스쳐 지나가는 듯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꽃비다!’라고 외쳤다. ‘아! 벚꽃이 만발했구나!. 아! 봄바람에 꽃이 후두두 떨어지는구나!‘
곧 뜨거운 여름이 시작될 텐데, 인규 씨는 또 어떤 풍경을 듣게 될까? 일단 그의 말처럼 햇살은 빛나되 시원했으면 좋겠다. 또 너무 습하지 않은 여름이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