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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 이스파한(1)
    -회교의 화려한 정원문화를 꽃피운 정원도시 -이란(Iran)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도시 중의 하나인 이스파한(Isfahan)은 회교의 화려한 정원문화를 꽃피운 정원도시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인 이스파한에서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줄지어 늘어선 플라타너스(Platanus orientalis L.) 가로수였다. 플라타너스는 단순한 가로수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스파한의 중앙대로에 해당하는 남북방향의 ‘차하르 바그로(Chahar Bagh Avenue)’는 양쪽으로 난 차도(車道) 중간에 보행자 전용의 인도(人道)가 있다. 차하르 바그로는 차량이 통행하는 주간선도로의 역할과 함께 도시의 남북을 잇는 거대한 녹지축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도로공원(道路公園)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이 도로는 사분원의 형태를 지닌 작은 정원들을 연속적으로 이어 가면서 도시의 거대한 녹지축으로 전개시켰기 때문에 차하르 바그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나무와 숲이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물이 충분해야 한다. 사방으로 연결되는 플라타너스 가로수 옆으로는 물을 공급하는 수로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요즘 용어로 ‘그린 네트워크(Green Network)’와 ‘블루 네트워크(Blue Network)’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곳에서 수로로 연결되어 나무에 공급되는 물은 모두 이스파한의 젖줄인 자얀데강에서 나온다.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이슬람건축의 자취를 차하르 바그로에서 찾을 수 있다. ‘종교학교(宗敎學敎)’인 ‘마드라사(Madrassa of Shah’s Mother)’가 바로 그것이다. 사파비왕조의 마지막 왕인 후세인(Hussein)이 1704년에서 1714년에 걸쳐 축조한 것으로, 요즘의 신학대학에 해당하는 마드라사는 학생들이 거처했던 방이 150개에 이를 정도의 거대한 규모였다. 이곳에서는 이슬람건축에서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을 연결하는 기법이나 건물의 마감기법 그리고 정원의 조성원리 등을 쉽게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신정일체(神政一體)를 주장하는 엄격한 율법국가(律法國家)도 자본주의의 물결에는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근엄하게 이슬람교리를 가르쳤던 마드라사의 일부는 현재 ‘압바시 호텔(Abbasi Hotel)’로 개조되어 있다. 동서방향으로 도시를 가르는 자얀데강에는 현재 11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다. 이 다리들 중에서 5개는 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풍스런 다리들인데, 12세기로 추정되는 ‘폴레 샤레스탄(Pol-e Shahrestan)’ 즉 ‘샤레스탄다리’가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현재 사람들의 통행만 허용되는 이러한 유서깊은 다리들은 강과 어우러져 대단히 운치있는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꽃밭과 수림대가 조성된 강변의 둔치에는 특별한 시설을 설치하지 않고 주로 산책이나 휴식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는 중앙대로인 차하르 바그로에서 바로 연결되는 ‘시오세 폴(Si-o-se Pol)’즉 ‘시오세다리’이다. 압바스 1세가 1602년에 축조했는데 폭은 14m이고 길이는 160m이다. 벽돌을 쌓아 2층 구조의 다리를 만들어 1층은 전통 찻집으로 활용하고 있고 교각은 아름다운 아치(Arch)형상을 취하고 있다. 교각은 33개의 아치로 연결되는데 다리의 이름인 ‘시오세(Si-o-se)’는 아치의 개수인 ‘33개’에서 유래된 것이다. 자얀데강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고 알려진 이 다리를 건너면 강변의 풍광이 아치 사이로 드러났다 숨겨지고 숨겨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한다. 하얀 포말을 곳곳에 드러내며 흐르는 강물에는 먹이를 찾아 모여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이름모를 새들이 나래를 펼치고 있다. “사람과 새가 함께 하는 생태하천이 바로 이런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만난 시오세다리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음산하다고 할까? 황홀하다고 할까? 아니면 신비롭다고 할까? 그도 아니면 환상적이라고 할까? 묘한 느낌의 불빛에 비춰진 다리의 야경은 적절한 수식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시오세다리와 함께 이스파한을 대표하는 다리는 ‘폴레 카쥬(Pol-e Khaju)’ 즉 ‘카쥬다리’이다. 압바스 2세가 1650년에 축조했는데 폭은 12m이고 길이는 160m이다. 시오세다리와 같이 벽돌을 쌓아 2층으로 다리를 만들었는데, 다리는 수량을 조절하는 댐(Dam)의 역할을 겸하기도 했다. 강 철 기 Kang, Cheol Gi 경상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켄 스미쓰
    Ken Smith, Principal, Ken Smith Landscape Architect Medium of the Craft 켄 스미쓰 사무실은뉴욕 맨하탄의 다운타운에 위치한 조그만 규모의 스튜디오형 설계사무실이다. 하바드 대학 졸업후 피터 워커 (Peter Walker)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마싸 슈왈츠(Martha Schwartz),데이빗 마이어2(David Meyer)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각자의 성을 딴Schwartz Smith Meyer Inc.라는공동사무실을 시범적으로 운영하기도 하였다.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한 이 사무실은 오래가지 못했고 92년 자신의 사무실을 운영하기위해 뉴욕으로 옮겨왔다. 토론토에 위치한 요크빌 공원 (The village of Yorkville Park) 국제 설계 컴피티션 당선과 이공원의 완공으로 96년 미국 3조경가협회(ASLA)에서주어지는 President’s Award of Excellence 를 수상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켄 스미쓰는 조경을 예술의 형태로 실천하고 또한 현대문화를 반영하는표현수단(Medium)으로써 조경을 연구한다 .(“I practice landscape as an art form and explore landscape as an expressive medium reflecting contemporary culture”) 그는 특히 도심속의 버려진(abandoned) , 이용되지 않는(unused), 혹은 여백의(maginal)공간에 관심이 많은데, 대도시에서 흔히 존재하는 이러한 공간들은 조경에 대한 자신의생각들을 실천해 볼수있는 공간적 기회를 제공하며 이것은 거대한 도시 인프라와 다양한 민족의 일상적인 삶이 혼성된 뉴욕에서 독특한 실험적인 조경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무실에서는 조경을 주제로한 설치미술 (Landscape Art Installation)프로젝트도 함께 진행되며 갤러리에서의 전시가 많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조경이 대중들에게 예술 작품으로서 좀더 가까이 접근할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켄 스미쓰 사무실은 항상 처음보는, 아니면 어디선가 보았지만 조경의 재료로 쓰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각종 재료들로 가득차 있다. 실제로 프로젝트 시작단계 부터 재료에 대한 리서치가 이뤄지고 수집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데, 이는 보통, 공간 디자인이 먼저 이뤄지고 재료의 선정이 마지막 단계까지 유보되는 일반적인 프로세스에 비하면 사뭇 다른 점이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자유로운 상상의 콜라쥬를 시작으로 모형 제작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사이트 모형에서 실제크기의 오브제 모형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변화는 항상 새로운 발견과 함께 디테일 처리에 큰 도움을 주며, 더욱이 클라이언트나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디자인에 대한 확신을 준다. 또한 켄 스미쓰는 조경과 패션디자인은 그 프로세스나 표현방법에 있어서 유사한 점을 인식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찾고자하였고 그것은 설계 과정에 신선한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다양한 패브릭 재료, 박음질,마감처리등이 관심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프로젝트에 상당부분 응용 되었다. 켄 스미쓰의 클라이언트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은 재미가 있다. 벽면을 가득 매운 아이디어 콜라쥬와 차근차근 풀어가는 이야기와 함께 테이블 위에 하나씩 꺼내지는모형들의 조립으로 나중에는 분위기를 압도한다. 그는 어떤 프로젝트건 평범함을 절대로을 싫어하는 성격이며 스스로 직접 만들기를 무척 즐긴다. 벽 뒤편에서망치소리에 전기톱 소리가나서 가서보면 뚝딱하고 스트럭쳐 스터디 모형을 직접 만들고 있는 모습등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금요일 오후면 맥주를 들고 방문하는 인근의 예술가,건축가,사진작가들과의 유쾌한 교류가 사무실을 항상 활기차게 만들기도 하며 99년 한국을 방문한 이후론 부인과 함께 김치 애호가가 되어 뉴욕의 한국 식품점을 자주 찾곤한다. 현재 뉴욕 건축위원회의 위원,하바드대학의 디자인 크리틱으로, 그 외에도여러대학의 스튜디오를 맡아 실무와 강의를 병행하고있다. 최근엔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와 함께 월드 트레이드 센터 설계 컴피티션에서 최종2안의 경합까지간 스카이 가든 (Sky Garden)4을 제안하였고, 55 워터 스트릿 플라자(55 Water Street Plaza) 국제 설계 컴피티션 당선, 산타페 철도공원(Santa Fe Railyard Park) 국제 설계 컴피티션 당선, 뉴욕 현대미술관 옥상 정원 (MoMa Roof Garden), 타임워너 센터 환경설계(Aol-Timewarner Center),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9.11 메모리얼 ( American Express 9.11Memorial)등이 진행중이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전통조경, 현대조경 하듯 합시다
    경복궁, 그리고 문화재 보존의 국가적 사업에 대한 생각들 조선총독부청사를 해체하던 일은, 일제잔재를 없애며 동시에 경복궁 일대의 대대적인 문화재복원사업의 단초로 떠오른 일이었다. 국가적인 사업이자 민족적인 대원(大願)의 일이었을 것이지만, 나는 그 일에 대해 좀 어긋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총독부청사 해체 사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너무 복원하는 일에만 매달려 추진되는 것처럼 보이던 것도 못마땅했다. 후자의 일 때문에 전자의 생각이 든 것이므로 결국 둘은 하나로 귀착된다. 즉 철거와 복원으로 치닫는 일사천리의 사업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놓고 나의 의견을 이야기할 기회나 장소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나서서 무슨 이야기를 하기 좋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들여다보지도 않았을 논문 하나를 덜렁 내놓은 외의 어떤 의견도 공식화된 적은 없었다. 경복궁 복원과 맞물려 조선총독부청사 해체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을 때, 사실 논의가 아니라 무조건 찬성하고 있어야 하는 분위기였고, 그 일을 반대했다가는 친일파 신세가 되기에 딱 좋은 분위기였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 중략 - 조선총독부청사의 건축물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라거나 일제 잔재를 없애야 하는 것이라는 등의 찬반 의견들이 있을 수 있지만, 무슨 한 가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두루두루 연관된 일을 냉철하게 살피고 선후를 가려 일을 추진해야 할 일이다. 대상의 규모나 영향력이 클수록 선후와 주위를 세심히 살펴야하는 일은 제곱비로 증가하는 법이다. 총독부청사 해체문제는 광화문의 처리와 관련되고 광화문의 처리는 세종로 문제와 이어지며 세종로 문제는 서울 사대문의 도시경관과 무관하지 않게 되어있다. 아무도 공개석상이나 매스컴에서 광화문 문제를 거론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과 맞물려 참으로 많은 사연을 간직한 구조물이었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 청사건립이 구체화되고 있었을 즈음, 광화문은 헐려나갈 참이었다. 다행히 행동하는 일인(日人) 지식인의 호소에 의해 겨우 되살아나 지금 국립민속박물관 전용 출입문이 있는 곳으로 옮겨 놓았었다. 그리고 6.25를 겪으면서 지붕이 날아간 채 석조의 홍예부분이 앙상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1960년대의 모습이었다. 그 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왔다. 1970년대였다. 당시 유행하던 방법을 따라 시멘트 콘크리트 방식으로 문루도 복원되었다. 원 자리에 옮겨온 것이 아니라 중앙청으로 사용되던 총독부청사 바로 앞에 반듯하게 건립되었다. 세종로에서 광화문을 보면서 진행할 때 세종로와 축이 맞아 총독부청사와도 잘 균형이 맞게 자리 잡은 것이었다. 원래 자리로 가게 되면 세종로 축과도 총독부청사와도 반듯하게 어우러지지 않게 되어 있었다. 즉 총독부청사는 정남향을 하였고 세종로는 그 축 방향으로 반듯하게 나 있다. 경복궁의 주축은 약 4도 가량 튼 방향으로 앉아서 남대문과 관악산 정상부를 향하게 되어 있다. 총독부청사는 경복궁을 가려놓고 있으면서 세종로와 어긋난 부분을 차폐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일이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현재의 광화문의 간략한 내력이다. 한창 총독부청사 해체문제가 거론되고 있던 즈음 어느 TV 방송사 뉴스에서 청사해체와 근정전 일곽의 복원이 이루어졌을 경우를 시뮬레이션 한 모습을 비쳐주면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었다. 눈 깜짝할 만큼의 순간처리로 슥 지나가긴 했지만 세종로 일대와도 반듯하게 조감되어 있었다. 약간의 눈속임이었든지 별 생각 없이 미숙하게 처리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강의시간에서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해주면서 ?장차 여러분들의 몫?임을 강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총독부청사를 해체하고 근정전 일대를 원형으로 복원하려면 광화문까지 이어지는 부분으로 계속 확대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지금 현재의 세종로와의 축의 문제와 이 일대의 도시경관 차원에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충분히 검토한 종합계획으로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었다. 어도와 맞지 않는 광화문을 놓고 나눈 두 남자의 이야기. 이제는 누구에게나 그런 모습이 훤히 들어나게 되어 있다. 어떻게든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할 일이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네덜란드의 진주, 헤트루 궁전과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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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illa Reale의 정원
    이태리 북부 토스카나지방의 Lucca시 부근 Marlia에 위치하고 있는 Villa Reale는 1651년 Orsetti가족에 의해 처음 건립되어 150여년간 그들의 소유로 되어 있었으며 그 후에도 계속해서 좋은 소유주와 만나게 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19헥타르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숲으로 둘러싸인 Villa Reale의 정원은 각기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Villa를 중심으로 구성된 바로크식 정원, 낭만주의 형식의 정원, 그리고 1920년대에 조성된 아르데코 양식의 정원 등 크게 3개의 정원양식을 볼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Villa Reale의 정원은 19세기 초에 풍경식 정원으로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이태리 양식의 예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보존되어 있는 정원의 중요한 부분들을 거의 1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특히 1652년에 만들어져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야외극장은 이 분야에서는 이태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를 보여주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원은 18세기 중반부터 이미 유럽에서 아름다운 정원으로 소문이나 오스트리아의 수상이었던 Wenzel A. Kaunitz-Rietberg 공작은 이 정원을 그대로 모방한 정원을 만들기도 했다. -중략 - Baciocchi 이후 몇 번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Villa와 정원은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경제사정 등에 의해 정원의 조각물들이 경매처분 되는 등 황폐한 상태로 남겨지게 된다. 그러나 1923년 새로운 소유주인 Pecci-Blunt공작을 만나게 되어 많은 부분을 적시에 보호할 수 있게 된다. Pecci-Blunt 가문은 현재까지 Villa 및 정원의 소유주이다. Pecci-Blunt 공작은 프랑스의 조경건축가인 Jacques Greber와 함께 아르데코 양식에 근거하여 이슬람 풍의 평범하지 않은 수영장으로 이루어진 물의 정원과 꽃의 정원을 조성하였다. 김 인 수 Kim, In Su환경조형연구소 그륀바우 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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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디자인 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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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chael Van Valkenburgh
    빨간 머리의(Red-Haired), 집중력 강한 혹은 진지한 (Intense), 콧수염이 있는 (Mustache), 명확한 논리를 가진(Articulate), 끊임없이 변하는 혹은 변덕스러운(Volatile), 네모난 얼굴의(Square Face) 등으로 신문기사에 적힌 것을 보았다. 필자가 보기에는 아주 그의 특성을 잘 끄집어낸 단어들이라고 보여진다. 좀 더 붙여보자면 유머가 많고(Humorous), 열정적이고(Passionate), 괴팍한 정도? 발켄버그는 뉴욕주의 농가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립대에서 역사를 공부하다가 Cornell University로 학교를 옮겨 식물과 디자인 그리고 미술사를 배우게 된다. 한 때 Dan Kiley 의 심플함과 공간의 크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22세 되던 해에 미국의 모든 Dan Kiley 의 작품을 돌아볼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된다. Cornell을 졸업한 후 그는 University of Illinois-Champaign/Urbana에서 M.L.A를 받고 Carr, Lynch Associates1을 포함한 캠브릿지(Cambridge)의 여러 곳에서 실무 경험을 쌓게 된다. 1982년 그는 자신의 사무실을 차리고 그때부터 하버드 대학의 줄을 타게 되어서 1991년에서 1996년에 걸쳐서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Graduate School of Design, 이하 GSD) 의 조경학과 과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지금은 Charles Eliot Professor of Landscape Architecture로 재직하고 있다. 주택정원(Residential)부터 대기업(Cooperate)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스케일의 작고 큼에 상관없이 작업을 하던 그에게 규모가 큰 프로젝트로 도약하게 된 계기는 인디아나(Indiana)주의 콜럼부스(Columbus)에 있는 65에이커(이 프로젝트는 후에 85에이커의 규모가 된다)의 밀 레이스 공원(Mill Race Park 1989-1993)이다. 그 후로 펜실배니아(Pennsylvania)주의 피츠버그(Pittsburgh)에 있는 앨리게니 강변 공원(Allegheny River Front Park)를 비롯, 미국 최고의 여자 대학교인 월슬리 대학 매스터 플랜(Wellesley College Master Plan), 맨하탄(Manhattan) 안에 있는 티어드롭 공원(Teardrop Park), 그리고 최근에 결정된 뉴욕의 브룩클린 브리지 공원(Brooklyn Bridge Park-이 프로젝트는 브룩클린(Brooklyn)의 센트랄 파크(Central Park)라고 여겨진다)에 이르기까지 그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한국의 조경에도 관심이 있었던 그는 1993년도 미국에서 활동중인 한국 건축가 우규승씨와 함께 호암재단의 한국 전통미술관과 현대미술관을 위한 매스터 플랜 프로젝트에 프로포잘을 내기도 했었다. 발켄버그의 사무실 (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 에서 일하면서 가장 놀라왔던 점은 그의 수목 재료에 관한 열정이다. 학창시절에 디자인 수업과정에서 수목 디자인 부분에 많은 고려를 두지 않았던 필자로서는 그의 이러한 열정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많은 조경가들이 건축가와의 보이지 않는 긴장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자, 혹은 좀 더 지적으로 보이기 위해 수목재료 보다는 형태(Form)가 중심이 되는 작품을 추구하는 경우를 간간히 봐왔던 터라 그의 수목에 대한 논리와 생각은 왜 그가 다른 조경가와는 다른 지가 더욱 뚜렷해진다. 발켄버그와 함께 어떤 프로젝트에 대해서 수목 디자인을 하는 시간이 되면 그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생기 있는 목소리로 변하고 얼굴에 미소가 돈다. 그가 이 디자인 시간에 나열하는 많은 나무와 관목의 이름들은 듣고만 있어도 헷갈리는 데 발켄버그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어느 곳에 무엇을 배치 하면 좋을지를 마치 눈 앞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이 이야기 한다. 나중에 그가 말한 나무와 관목들의 이미지를 다 찾아서 콜라쥬를 해보면 그의 감각에 한 마디로 입이 딱 벌어진다. 그의 이런 능력은 매일 일상생활에서 관찰하고, 읽고 주변의 전문가들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욱 더 깊어진다. 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이하 MVVA)에서 발간되는 매일 신문이 있는데 일주일에 다섯 번씩 그의 수목 칼람이 연재된다. 주로 자신이 좋아하는 수목이나 주말 동안 다니면서 본 감명 깊었던 나무나 관목에 대한 이야기 또는 그 수목에 관련된 그의 사연들을 적는다. 매일 다른 도시로 여행하면서 매일 이렇게 칼람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열정이 남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여러 군데로의 출장이 그의 수목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작년 봄에 GSD에서 개최되었던 Large Parks - New Perspective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조경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재료는 수목이다. 이는 시간을 초월한 재료(Timeless Materials)이다". 이러한 발켄버그의 면모는 최근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에 나온 그의 기사를 보면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완성된 조경공간은 그 공간에 속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원에서 시작된다. 정원에 무엇을 심어보지 않은 조경건축가는 재료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직업의 본질은 재료에 있다. 다시 말하면 단지 벽돌이나 돌, 물 같은 것이 아닌 조경의 매체, 식수 재료들, 그 향기, 벌레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경험했을 때 느끼게 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김 소 형 Kim, Soheyung · 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 Inc.
  • 제3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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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마르조
    봄마르조의 추억, 2000년 이태리 여행은 매혹적이다. 기차 창 밖으로 펼쳐지는 투스카니 지방의 굽이치는 언덕과 불쑥 불쑥 솟아 있는 사이프러스의 풍광은 지극히 아름답다. 필자가 보마르조를 찾은 것은 2000년 대학원생들과 함께 떠난 답사여행에서였다. 여행에서는 늘 예기치 못한 돌발사건이 일어난다. 로마에서 훤한 대낮에 지갑을 도둑맞았다. 허탈했지만 어찌하나 답사는 계속되었다. 다음날 로마에서 빌라란테가 있는 바냐나로 갔다가, 다시 보마르조를 찾아 갔다. 동네 어귀에서 sacro bosco(신성한 숲)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했다. 입장료는 생각보다 비싸 우리가 환전한 돈으로는 4명의 일행 중 2명의 입장료 밖에는 안되었다. 궁여지책으로 필자와 한 남학생은 숲 뒤쪽의 허름한 철조망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월담은 무사히 성공하였고, 정원 안에서 만난 우리 일행은 무언의 미소를 나누었다. 그 곳은 상상했던 것보다 기괴하였다. 거대하고 섬뜩한 분위기의 조각들, 기울어진 집. 마치 놀이공원의 귀신 집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한 여학생이 어지러워서 더 이상은 못 있겠다고 할 정도였다. 충격적이라 할 만큼 묘한 분위기의 정원을 뒤로 하고 우리는 보마르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비테르보 역까지 3-4시간을 한참이곤 걸었다. 시골길에 널려진 산딸기를 따먹으며, 한적한 풍광을 즐기면서. 서리한 사과 맛은 달콤했다. 달리의 방문, 1949년 괴짜는 괴짜를 알아본다. 2차 세계대전 후 달리와 프라츠는 입소문으로 듣던 보마르조를 찾는다. 덤불 숲 속 폐허 속에서 괴기한 조각상들을 보면서 달리는 그의 작품세계의 진정한 동지를 만난 희열을 느꼈으리라! 팜므 파탈에 매료되었던 마리오 프라츠도 이 정원의 감흥을 ‘시간(tempo)’라는 글에서 초현실적이고 마술적인 아우라를 그려내었다. 이들 보다 조금 먼저 이 곳을 방문한 쟝 콕토도 그의 영화인 ‘미녀와 야수(La Belle et la Bete)’의 배경작업 이미지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 보마르조는 세인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1954년 정원의 주인이 바뀌면서 부분적 복원 작업을 하였고, 정원 주인인 비치오와 그의 친구 드라우헤와의 서신이 1963년 출간되면서 정원의 신비는 서서히 풀려간다. 1967년 무치카 라네즈는 신비의 인물인 오시니에 대한 소설 『보마르조』를 썼고, 같은 해 지나스테라는 같은 제목의 불협화음의 음악과 에로틱한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미술, 문학,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어준 보마르조 정원의 매력과 힘은 무엇일까? 워낙 특별하기에 모작을 찾기 힘든 이 정원은 소수 매니아들에게만 어필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숨겨진 이면의 본성을 건드리는 것일까? 차근차근 보마르조의 신비를 풀어보도록 하자. 보마르조의 탄생, 1552년에서 1583년까지 보마르조는 이태리 정원의 이단아이다. 이 곳에서는 이태리 르네상스 정원의 기하학과 대칭적 질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세련되고 정제된 아름다움을 지난 빌라란테나 도도하면서도 웅장한 빌라에스테와도 확연히 구별된다. 숲 속의 언덕 이곳 저곳에 놓여진 조각상과 정원장식물, 테라스, 신전들은 이태리정원이라기 보다 공간 구성 면에서는 영국의 풍경식 정원에 가깝고, 몇몇 조각상은 동양적인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보마르조는 스스로의 독창성을 뽐내고 있다. “이 매혹적인 숲은 멤피스도 아니고, 세계의 다른 경이로운 곳과도 다르다. 여기는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곳이다.” 정원을 만든 비치오 오시니는 세계의 7대 불가사의에 버금가는 경이로운 세계를 만들하고자 하였고, 그의 의도는 성공하여 누구도 완벽하게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의 정원이 창조되었다. ‘신성한 숲’ 혹은 애칭인 ‘괴물의 정원’으로도 불리는 보마르조는 명문가문 출신 비치오 오시니가 1542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으면서 터를 잡는다.정원은 1552년부터 1583년에 30여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오시니는 전쟁 중인 1553년에서 1557년사이 이 곳을 떠나 있었고, 나머지 시간은 이 곳에 머무르며 정원을 만들었다. 보마르조는 의도된 설계도 없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덧붙이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정원을 만든 사람들도 여럿이고, 그 면면에 있어도 화려하다. 빌라에스테를 설계한 리고리오, 빌라란테의 디자이너 비뇰라, 조각가 아만나티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내놓으라는 예술가는 총출동하였다. 그럼에도 보마르조는 빌라란테와 빌라에스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오시니가 정원의 연출을 도맡은 총감독이다. 쟁쟁한 디자이너들은 지극히 제한적인 스탭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보마르조의 현재의 모습은 조성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 1558년 이후 분수가동이 중단되었다. 16세기의 정원은 물이 중요한 요소이자 테마였다. 계류가 정원을 관통하고 있었고, 복잡한 수도관망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조각상들은 물 혹은 바다와 관련된 넵튠, 사이렌, 고래, 거북이, 페가수스 등이 주를 이룬다. 현재의 모습은 폐허 속의 유적과 같아 묘한 페이소스를 자극하지만, 당대에는 신기한 조각들과 여러 모습의 물의 잔치로 화려한 스펙타클이 벌어졌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정원을 변화시킨 것일까? 유일한 건축물인 기울어진 집은 지진이 일어나 더욱 기울어지면서, 초현실적 분위기를 강화시키는 매력적인 요소가 되었다. 우연의 결과치곤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연출이었다. 조 경 진 Zoh, Kyung Jin 서울시립대학교 건축도시조경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