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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la Reale의 정원
이태리 북부 토스카나지방의 Lucca시 부근 Marlia에 위치하고 있는 Villa Reale는 1651년 Orsetti가족에 의해 처음 건립되어 150여년간 그들의 소유로 되어 있었으며 그 후에도 계속해서 좋은 소유주와 만나게 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19헥타르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숲으로 둘러싸인 Villa Reale의 정원은 각기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Villa를 중심으로 구성된 바로크식 정원, 낭만주의 형식의 정원, 그리고 1920년대에 조성된 아르데코 양식의 정원 등 크게 3개의 정원양식을 볼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Villa Reale의 정원은 19세기 초에 풍경식 정원으로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이태리 양식의 예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보존되어 있는 정원의 중요한 부분들을 거의 1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특히 1652년에 만들어져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야외극장은 이 분야에서는 이태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를 보여주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원은 18세기 중반부터 이미 유럽에서 아름다운 정원으로 소문이나 오스트리아의 수상이었던 Wenzel A. Kaunitz-Rietberg 공작은 이 정원을 그대로 모방한 정원을 만들기도 했다. -중략 - Baciocchi 이후 몇 번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Villa와 정원은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경제사정 등에 의해 정원의 조각물들이 경매처분 되는 등 황폐한 상태로 남겨지게 된다. 그러나 1923년 새로운 소유주인 Pecci-Blunt공작을 만나게 되어 많은 부분을 적시에 보호할 수 있게 된다. Pecci-Blunt 가문은 현재까지 Villa 및 정원의 소유주이다. Pecci-Blunt 공작은 프랑스의 조경건축가인 Jacques Greber와 함께 아르데코 양식에 근거하여 이슬람 풍의 평범하지 않은 수영장으로 이루어진 물의 정원과 꽃의 정원을 조성하였다. 김 인 수 Kim, In Su환경조형연구소 그륀바우 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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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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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디자인 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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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Van Valkenburgh
빨간 머리의(Red-Haired), 집중력 강한 혹은 진지한 (Intense), 콧수염이 있는 (Mustache), 명확한 논리를 가진(Articulate), 끊임없이 변하는 혹은 변덕스러운(Volatile), 네모난 얼굴의(Square Face) 등으로 신문기사에 적힌 것을 보았다. 필자가 보기에는 아주 그의 특성을 잘 끄집어낸 단어들이라고 보여진다. 좀 더 붙여보자면 유머가 많고(Humorous), 열정적이고(Passionate), 괴팍한 정도?
발켄버그는 뉴욕주의 농가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립대에서 역사를 공부하다가 Cornell University로 학교를 옮겨 식물과 디자인 그리고 미술사를 배우게 된다. 한 때 Dan Kiley 의 심플함과 공간의 크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22세 되던 해에 미국의 모든 Dan Kiley 의 작품을 돌아볼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된다. Cornell을 졸업한 후 그는 University of Illinois-Champaign/Urbana에서 M.L.A를 받고 Carr, Lynch Associates1을 포함한 캠브릿지(Cambridge)의 여러 곳에서 실무 경험을 쌓게 된다. 1982년 그는 자신의 사무실을 차리고 그때부터 하버드 대학의 줄을 타게 되어서 1991년에서 1996년에 걸쳐서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Graduate School of Design, 이하 GSD) 의 조경학과 과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지금은 Charles Eliot Professor of Landscape Architecture로 재직하고 있다. 주택정원(Residential)부터 대기업(Cooperate)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스케일의 작고 큼에 상관없이 작업을 하던 그에게 규모가 큰 프로젝트로 도약하게 된 계기는 인디아나(Indiana)주의 콜럼부스(Columbus)에 있는 65에이커(이 프로젝트는 후에 85에이커의 규모가 된다)의 밀 레이스 공원(Mill Race Park 1989-1993)이다. 그 후로 펜실배니아(Pennsylvania)주의 피츠버그(Pittsburgh)에 있는 앨리게니 강변 공원(Allegheny River Front Park)를 비롯, 미국 최고의 여자 대학교인 월슬리 대학 매스터 플랜(Wellesley College Master Plan), 맨하탄(Manhattan) 안에 있는 티어드롭 공원(Teardrop Park), 그리고 최근에 결정된 뉴욕의 브룩클린 브리지 공원(Brooklyn Bridge Park-이 프로젝트는 브룩클린(Brooklyn)의 센트랄 파크(Central Park)라고 여겨진다)에 이르기까지 그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한국의 조경에도 관심이 있었던 그는 1993년도 미국에서 활동중인 한국 건축가 우규승씨와 함께 호암재단의 한국 전통미술관과 현대미술관을 위한 매스터 플랜 프로젝트에 프로포잘을 내기도 했었다.
발켄버그의 사무실 (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
에서 일하면서 가장 놀라왔던 점은 그의 수목 재료에 관한 열정이다. 학창시절에 디자인 수업과정에서 수목 디자인 부분에 많은 고려를 두지 않았던 필자로서는 그의 이러한 열정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많은 조경가들이 건축가와의 보이지 않는 긴장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자, 혹은 좀 더 지적으로 보이기 위해 수목재료 보다는 형태(Form)가 중심이 되는 작품을 추구하는 경우를 간간히 봐왔던 터라 그의 수목에 대한 논리와 생각은 왜 그가 다른 조경가와는 다른 지가 더욱 뚜렷해진다. 발켄버그와 함께 어떤 프로젝트에 대해서 수목 디자인을 하는 시간이 되면 그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생기 있는 목소리로 변하고 얼굴에 미소가 돈다. 그가 이 디자인 시간에 나열하는 많은 나무와 관목의 이름들은 듣고만 있어도 헷갈리는 데 발켄버그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어느 곳에 무엇을 배치 하면 좋을지를 마치 눈 앞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이 이야기 한다. 나중에 그가 말한 나무와 관목들의 이미지를 다 찾아서 콜라쥬를 해보면 그의 감각에 한 마디로 입이 딱 벌어진다. 그의 이런 능력은 매일 일상생활에서 관찰하고, 읽고 주변의 전문가들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욱 더 깊어진다. 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이하 MVVA)에서 발간되는 매일 신문이 있는데 일주일에 다섯 번씩 그의 수목 칼람이 연재된다. 주로 자신이 좋아하는 수목이나 주말 동안 다니면서 본 감명 깊었던 나무나 관목에 대한 이야기 또는 그 수목에 관련된 그의 사연들을 적는다. 매일 다른 도시로 여행하면서 매일 이렇게 칼람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열정이 남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여러 군데로의 출장이 그의 수목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작년 봄에 GSD에서 개최되었던 Large Parks - New Perspective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조경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재료는 수목이다. 이는 시간을 초월한 재료(Timeless Materials)이다". 이러한 발켄버그의 면모는 최근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에 나온 그의 기사를 보면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완성된 조경공간은 그 공간에 속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원에서 시작된다. 정원에 무엇을 심어보지 않은 조경건축가는 재료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직업의 본질은 재료에 있다. 다시 말하면 단지 벽돌이나 돌, 물 같은 것이 아닌 조경의 매체, 식수 재료들, 그 향기, 벌레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경험했을 때 느끼게 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김 소 형 Kim, Soheyung · 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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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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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마르조
봄마르조의 추억, 2000년 이태리 여행은 매혹적이다. 기차 창 밖으로 펼쳐지는 투스카니 지방의 굽이치는 언덕과 불쑥 불쑥 솟아 있는 사이프러스의 풍광은 지극히 아름답다. 필자가 보마르조를 찾은 것은 2000년 대학원생들과 함께 떠난 답사여행에서였다. 여행에서는 늘 예기치 못한 돌발사건이 일어난다. 로마에서 훤한 대낮에 지갑을 도둑맞았다. 허탈했지만 어찌하나 답사는 계속되었다. 다음날 로마에서 빌라란테가 있는 바냐나로 갔다가, 다시 보마르조를 찾아 갔다. 동네 어귀에서 sacro bosco(신성한 숲)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했다. 입장료는 생각보다 비싸 우리가 환전한 돈으로는 4명의 일행 중 2명의 입장료 밖에는 안되었다. 궁여지책으로 필자와 한 남학생은 숲 뒤쪽의 허름한 철조망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월담은 무사히 성공하였고, 정원 안에서 만난 우리 일행은 무언의 미소를 나누었다. 그 곳은 상상했던 것보다 기괴하였다. 거대하고 섬뜩한 분위기의 조각들, 기울어진 집. 마치 놀이공원의 귀신 집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한 여학생이 어지러워서 더 이상은 못 있겠다고 할 정도였다. 충격적이라 할 만큼 묘한 분위기의 정원을 뒤로 하고 우리는 보마르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비테르보 역까지 3-4시간을 한참이곤 걸었다. 시골길에 널려진 산딸기를 따먹으며, 한적한 풍광을 즐기면서. 서리한 사과 맛은 달콤했다. 달리의 방문, 1949년 괴짜는 괴짜를 알아본다. 2차 세계대전 후 달리와 프라츠는 입소문으로 듣던 보마르조를 찾는다. 덤불 숲 속 폐허 속에서 괴기한 조각상들을 보면서 달리는 그의 작품세계의 진정한 동지를 만난 희열을 느꼈으리라! 팜므 파탈에 매료되었던 마리오 프라츠도 이 정원의 감흥을 ‘시간(tempo)’라는 글에서 초현실적이고 마술적인 아우라를 그려내었다. 이들 보다 조금 먼저 이 곳을 방문한 쟝 콕토도 그의 영화인 ‘미녀와 야수(La Belle et la Bete)’의 배경작업 이미지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 보마르조는 세인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1954년 정원의 주인이 바뀌면서 부분적 복원 작업을 하였고, 정원 주인인 비치오와 그의 친구 드라우헤와의 서신이 1963년 출간되면서 정원의 신비는 서서히 풀려간다. 1967년 무치카 라네즈는 신비의 인물인 오시니에 대한 소설 『보마르조』를 썼고, 같은 해 지나스테라는 같은 제목의 불협화음의 음악과 에로틱한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미술, 문학,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어준 보마르조 정원의 매력과 힘은 무엇일까? 워낙 특별하기에 모작을 찾기 힘든 이 정원은 소수 매니아들에게만 어필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숨겨진 이면의 본성을 건드리는 것일까? 차근차근 보마르조의 신비를 풀어보도록 하자. 보마르조의 탄생, 1552년에서 1583년까지 보마르조는 이태리 정원의 이단아이다. 이 곳에서는 이태리 르네상스 정원의 기하학과 대칭적 질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세련되고 정제된 아름다움을 지난 빌라란테나 도도하면서도 웅장한 빌라에스테와도 확연히 구별된다. 숲 속의 언덕 이곳 저곳에 놓여진 조각상과 정원장식물, 테라스, 신전들은 이태리정원이라기 보다 공간 구성 면에서는 영국의 풍경식 정원에 가깝고, 몇몇 조각상은 동양적인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보마르조는 스스로의 독창성을 뽐내고 있다. “이 매혹적인 숲은 멤피스도 아니고, 세계의 다른 경이로운 곳과도 다르다. 여기는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곳이다.” 정원을 만든 비치오 오시니는 세계의 7대 불가사의에 버금가는 경이로운 세계를 만들하고자 하였고, 그의 의도는 성공하여 누구도 완벽하게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의 정원이 창조되었다. ‘신성한 숲’ 혹은 애칭인 ‘괴물의 정원’으로도 불리는 보마르조는 명문가문 출신 비치오 오시니가 1542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으면서 터를 잡는다.정원은 1552년부터 1583년에 30여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오시니는 전쟁 중인 1553년에서 1557년사이 이 곳을 떠나 있었고, 나머지 시간은 이 곳에 머무르며 정원을 만들었다. 보마르조는 의도된 설계도 없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덧붙이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정원을 만든 사람들도 여럿이고, 그 면면에 있어도 화려하다. 빌라에스테를 설계한 리고리오, 빌라란테의 디자이너 비뇰라, 조각가 아만나티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내놓으라는 예술가는 총출동하였다. 그럼에도 보마르조는 빌라란테와 빌라에스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오시니가 정원의 연출을 도맡은 총감독이다. 쟁쟁한 디자이너들은 지극히 제한적인 스탭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보마르조의 현재의 모습은 조성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 1558년 이후 분수가동이 중단되었다. 16세기의 정원은 물이 중요한 요소이자 테마였다. 계류가 정원을 관통하고 있었고, 복잡한 수도관망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조각상들은 물 혹은 바다와 관련된 넵튠, 사이렌, 고래, 거북이, 페가수스 등이 주를 이룬다. 현재의 모습은 폐허 속의 유적과 같아 묘한 페이소스를 자극하지만, 당대에는 신기한 조각들과 여러 모습의 물의 잔치로 화려한 스펙타클이 벌어졌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정원을 변화시킨 것일까? 유일한 건축물인 기울어진 집은 지진이 일어나 더욱 기울어지면서, 초현실적 분위기를 강화시키는 매력적인 요소가 되었다. 우연의 결과치곤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연출이었다. 조 경 진 Zoh, Kyung Jin 서울시립대학교 건축도시조경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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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대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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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자연 건축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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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 사람과 땅이 어울린 이야기 (19) - 12월 ; 생태(生態), 가깝고도 먼 그대
하와이 섬의 생태계
옛날 옛적에 태평양의 어디에선가 바다화산이 폭발했다. 바다 속에서 분출된 마그마는 바닷물과 만나면서 급격히 굳어 바다 한가운데 봉긋한 모양의 섬으로 남았다. 섬에 고인 빗물은 이곳을 지나던 철새들을 쉬어 가게 했다. 이들 철새의 깃털 속에는 뭍에서 묻어 온 식물 씨들이 있는 법이어서 철새가 노닐던 섬 여기저기에 작은 풀과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식물이 자라면서 곤충도 같이 자라기 시작했고 땅위를 기는 포유류도 여기 저기 생겨났다. 비록 뭍의 식물 씨로 시작되기는 했지만 바다로 고립된 탓에 뭍의 다른 지역과는 전혀 다른 이 섬만의 독특한 생태계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되며 자리 잡았다. 이 모두가 하와이 섬이 생겨나고 하와이 섬의 생태계가 자리 잡은 과정이다. 누구의 상상이 아니라 물증에 충실한 디스커버리채널이 재작년 겨울 어느 프로그램에 소개했던 것이니 믿어도 좋을 것이다. 요약한다면, 바다로 격리된 구조 속에서 하와이 섬 태생 고유의 생태계가 진화하고 발전한다는 얘기였다. 단지 폴리네시아인들이 이 섬을 발견할 때까지 한정되었던 것이긴 하지만.
어느 날 바다를 표류하던 폴리네시아인들이 하와이 섬을 발견한다. 다른 곳에서 살 곳을 찾던 폴리네시아인들의 이주가 시작됐다. 더불어 갑작스런 생태계의 변화가 하와이 섬에서 시작됐다. 이주민을 따라온 여러 생물 종들이 기존의 생태계를 교란시켰기 때문이었다. 섬에 있던 기존 재래종과 이주민을 따라온 외래종과의 혹독한 전투가 시작되고 약한 재래종은 도태되고 사라졌다. 물론 재래종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섬만의 독특한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외래종들도 자취를 감췄다. 처음만큼이나 또 오랜 시간이 흘러 태생의 원래 생태계와는 다르지만 폴리네시안 생태계란 이름으로 새로운 생태계가 자리 잡고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칙 속에서 다시 진화와 발전을 시작했다. 아직도 바다와 격리되어있는 구조는 여전했으므로 하와이 섬의 폴리네시안 생태계는 뭍의 다른 곳과는 전혀 다른 고유의 생태계로 발전했다. 이 폴리네시안 생태계도 매우 오랜 시간을 지속했다. 단지 전 세계의 관광객이 몰려들 때까지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청계천 하류부 - 콘크리트 위의 자연
물론 자연의 힘은 꼭 강원도나 옐로스톤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복원되고 있는 청계천에는 종점부인 마장동의 신답철교에서 청계천이 중랑천으로 합류하는 지점(한양대 인근 살곶이다리가 있는 쪽) 까지 약 2킬로미터가 더 있다. 그러니까 청계천의 최종 하류부가 되는 구간인데, 이 구간은 워낙 복개된 적이 없이 원래부터 열려있었던 청계천의 일부였다. 하천의 제방은 통상 고수부지(高水敷地 ; 간혹 둔치라고도 표현하지만 둔치는 물과 만나는 경사면을 지칭하는 다른 말이라고 한다)를 사이에 두고 위쪽 제방과 아래쪽 제방으로 나뉜다. 위쪽 제방을 고수호안(高水護岸), 아래쪽 제방을 저수호안(低水護岸)이라 부르고 있는데 일본의 하천용어에서 온 듯한 느낌이 짙지만 친근한 우리말로 풀기가 어려워 그냥 적는다. 청계천 하류부의 고수호안이나 저수호안은 모두 콘크리트호안으로 조성되어있다. 보통 최근 조성되는 하천의 경우 저수호안 대부분 자연 친화의 성격이 강하도록 자연석 쌓음이 주로 적용되고 있다.
현재 청계천 하류부 호안의 재료는 콘크리트이고 그렇다면 분명 반(反)자연적인 것이다. 그런데 실제 그곳을 가보면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단 모든 고수호안이 녹지로 덮여 있다. 그래서 당연히 콘크리트호안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가까이 다가서서 풀을 휘저으면 그제야 풀 밑으로 콘크리트 블록이 보인다. 풀만이 아니다. 가죽나무와 갯버들, 수양버들이 자연스레 날아와 자리 잡고 뿌리를 내린 다음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 콘크리트 호안블럭이 촘촘히 엮인 틈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저 강인한 힘. 콘크리트호안블럭을 비집고 줄기를 틔우고 있는 저 빛나는 생명력. 순간 이건 뭐지 하고 혼동이 온다. 이론대로라면 이건 자연이 아니고 잘못된, 즉 학술적인 용어로 비체계적인 생태계의 비틀린 상황이어야 하는 건데. 그렇지만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이걸 자연이지 않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이것들이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씻을 수가 없다. 어느 누가 이렇게 열심히 콘크리트 블록을 비집고 자라는 가죽나무와 잡풀을 자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이들의 자리 잡음이 사람의 손길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순수하게 자연만이 묵묵히 작업한 결과에 의해서임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더욱이나.
자연과 문화의 동질적 구조
지난달에 다룬 전통과 이번 달의 주제인 생태는 전혀 딴판의 다른 얘기이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선 둘 사이에 유사한 맥락이 존재한다는 것을 첨언해두자. 사투리의 분화가 그렇듯이 어떤 장소의 문화가 다른 장소의 문화와 달라지려고 일부러 노력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누가 여행을 통해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문화를 접했다고 치자. 자신의 문화와 다르기 때문에 신기해서든 또는 자신의 문화보다 더 발전된 까닭에 돈벌이가 될 것 같아서든 어떤 이유에서건 그 사람은 여행지의 문화를 자신의 고향으로 가져온다. 이때 백이면 백 틀림없이 오차가 발생한다(옛날의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을 생각해보라). 즉, 문화나 사투리의 차이는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전달자의 실수에 의한 잘못된 전달에 가까울 수 있다는 얘기다. 설사 오차가 발생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되었다하더라도 새로 가져온 문화는 현 장소의 주변 맥락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변하게 된다. 이게 외국문화가 토속문화와 절충되고 정리되는 과정의 본질이다.
하와이 섬의 초기 생태계와 이후 폴리네시안 생태계으로의 발전, 그리고 최종적으로 현대의 하와이생태계로의 변화를 생각해 볼 때, 사실상 새로운 문화의 도입과 전통문화와의 협상 그리고 문화재정립과 발전의 과정은 생태계의 발전과정과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내가 갖고 있는 얄팍한 전통과 생태계에 대한 지식으로 그런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리기는 무리가 따르는 일이다. 따라서 전통문화와 자연생태에 관한 내 얘기는 그리 탄탄한 이론적 기초 하에 쓰인 것이 아니니 일종의 발제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하시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늘 일관된 소신으로 자신의 학문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 참 좋다. 서울시립대의 이경재교수님에게서도 늘 그런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분의 입장과 논리가 그냥 자연을 그냥 버려두기보다는 사람의 개입으로(물론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서) 빠르게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계신 것으로 안다. 나는 다른 생각을 이 지면에서 전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꼭 균형을 가지고 이런 얘기들을 생각해 보시기를 부탁드린다.
진 양 교 Chin, Yang Kyo · (주) 토문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무소 부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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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정수도의 풍수지리적 입지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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