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경조형과 도자예술
e-매거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Hidcote Manor 정원
영국 Gloucestershire 지방에 자리 잡고 있는 Hidcote Manor 정원은 20세기 정원예술의 경계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늘날까지 정원사에서 중요한 역할과 함께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매우 매력적인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원이 위치하고 있는 Cotswolds 지역은 해발 180m 정도로 바람이 심하고 쌀쌀한 날씨로 정원이 자리 잡기에는 그리 이상적인 장소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정원이 자리 잡고 있는 Chipping Campden 마을이나 주변의 Broadway 등 조그만 마을들은 방풍림을 겸한 생울타리 수벽이나 수려한 자연환경으로 영국 내에서도 매혹적인 풍광으로 유명하며 그 중심에 정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매혹적인 자연풍광 속에 새로운 문화풍경으로서의 정원에 Genius Loci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 정원 조성개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테마별로 조성된 각각의 공간이 생울타리 수벽 등으로 둘러싸여 느슨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짜임새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는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200m에 이르는 Long Walk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주변의 자연환경과는 구별되는 절제되고 균형감 있는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17세기의 건물인 Manor House는 특별히 지배적으로 돋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띠지 않게 정원구성의 중요한 시각적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정원관람을 시작해서 처음 접하게 되는 부분은 Old Garden이며, 이곳에서 원형의 수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연결되어 계속해서 만나게 되는 붉은색의 화단이 이 정원에서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잔디로 포장된 길 양쪽으로 조성된 붉은색의 화단은 계절별로 각종 붉은색의 꽃과 붉은 잎을 가진 소관목들을 만날 수 있는 아름답고 인상적인 공간으로 후에 설명하는 하얀색의 정원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붉은색의 정원 끝부분에 낮은 계단과 접하여 좌우로 두 개의 파빌리온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Hidcote Manor의 특징적인 장소 중의 하나인 사각형으로 다듬어진 수벽 형태의 소규모 Allee로 구성된 Stilt Garden이 계속 연결되어져서 그 끝부분은 마치 보행로의 종점처럼 보여진다. 붉은색 정원과 Stilt Garden은 파빌리온을 중심으로 하나의 축을 형성하듯 이루어 있으며 좌우가 서로 다른 형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붉은색 벽돌건물과 하얀색의 창문틀로 조화를 이루는 두 개의 파빌리온은 Hidcote Manor의 상징물로써 뿐 아니라 전체 정원에서 T자 형태의 축을 이루는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정교하고 세심한 배치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관람객들은 파빌리온을 통해서 또 다른 하나의 축으로 이루어진 200m 길이의 잔디로 포장된 Long Walk를 인상적으로 만나게 된다. 김 인 수 Kim, In Su 환경조형연구소 그륀바우 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이란 쉬라즈
-시와 장미로 대표되는 페르시아(Persia)문화의 심장- 수도 테헤란(Teheran)에서 남쪽으로 935km 떨어진 인구 120만의 쉬라즈(Shiraz)는 이란(Iran) 남서부 파르스(Fars)주의 주도(州都)이다. 파르스주는 한때 세계를 향해 강력한 힘을 과시했던 고대 페르시아(Persia)제국이 탄생한 곳이다. ‘페르시아(Persia)’라는 이름은 이 ‘파르스(Fars)’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파르스지역이 최초의 통일왕조인 아케메네스(Achaemenes)왕조의 발상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대 제국의 명칭이 된 것이다. 키루스대왕(Cyrus the Great, 재위 BC 559-529)에 의해 첫 수도로 정해졌던 파사르가드(Pasargadae),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다리우스대왕(Darius the Great, 재위 BC 522-486)의 영화를 한껏 드러내고 있는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영원히 지속될 제국의 번영을 꿈꿨던 역대 제왕들이 묻힌 바위산 암벽묘(岩壁墓)가 있는 낙쉐루스탐(Naqsh-e Rustam)과 같은 페르시아제국의 고대 유적지들을 구경하려면 반드시 쉬라즈를 거쳐야 한다. 쉬라즈는 이러한 유적지들의 관문이자 거점의 역할을 하는 도시이다. 이 도시 외곽의 길목에는 ‘코란 게이트(Koran Gate, Darvaazeh Quran)’라 불리는 조형문을 설치하고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하여 관광도시로서의 상징성을 높이고 있다. 페르세폴리스의 석판(石板)에 새겨진 ‘SHIRA-ITS-TSI-ISH’가 당시 쉬라즈의 지명으로 알려지는 등, 이 도시의 역사는 대단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이 도시가 파르스지역의 중심도시로 성장한 것은 3세기 무렵인데, 이후 역사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중심도시로서의 위상을 이어오고 있다. 흔히 쉬라즈를 “시와 장미의 도시”로 지칭한다. 이는 이 도시가 13-14세기에 사디(Saadi, 1190-1290)나 하페즈(Hafez, 1320-1389)와 같은 유명한 시인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그들로 인해 쉬라즈는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 그들은 없지만 그들이 안치된 묘소는 그들을 추념하는 사람들과 항상 함께 하고 있다. ‘사디의 묘(Aramgah-e Saadi)’와 ‘하페즈의 묘(Aramgah-e Hafez)’는 이 도시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유적지에 해당하는데, 묘소라는 암울한 공간이라기 보다는 잠시 시의 세계에 빠지게 되는 일종의 정원이나 공원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100년을 살았다는 사디는 ‘과수원(Orchard)’이란 뜻의 ‘부스탄(Bustan)’과 ‘장미정원(Rose Garden)’을 뜻하는 ‘골레스탄(Golestan)’을 저작한 인물이다. 현재 도심의 북동쪽에 있는 사디의 묘는 이란의 근대화와 개방화에 주력했던 팔레비(Phalevi)왕조가 통치하던 1952년에 개축된 것이다. 시신이 안치된 석관(石棺)은 회랑(回廊)과 둥근 돔(Dome)의 지붕이 시각적으로 돋보이는 대리석 건물의 중앙에 있다. 석관과 주위 벽면에는 그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는 문맹(文盲)이 따로 없다. 아라비아(Arabic) 서체로 휘갈겨 새겨진 그의 시구(詩句)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입체감이 돋보이는 시구는 건물 내부를 장식하는 화려한 문양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주변은 울창한 숲과 장미를 비롯한 화려한 꽃들의 화단으로 꾸며져 있고, 건물 지하층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휴게실로 사용되고 있다. 지하 휴게실에 조성된 우물 형상의 연못에는 고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이처럼 지하층에다 연못을 설계한 사례는 좀처럼 보기가 어려운데, 연못은 지하수로인 카나트(Qanat)로 연결된다. 카나트는 강수량이 매우 부족한 지역에서 물을 공급하는 시설로, 땅 속으로 깊게 판 우물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지하수로이다. 우물의 깊이는 수십 미터에 이른다. 깊게 판 우물에는 땅 속의 주변 습기가 모이게 되고, 이러한 습기가 모여 물이 고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로 믿기에 어려운 이야기가 이곳의 신비함을 더하고 있다. 연못 속의 고기들은 사디의 시심(詩心)을 좇아 이름모를 먼 곳에서 카나트를 따라 이곳에 모인 것이라 한다. 아름다운 운율의 서정시(抒情詩)인 가잘(Ghazal)의 대가인 하페즈는 세계 각국을 떠돌았던 사디와는 달리 일생을 쉬라즈에서 보냈다. 그는 이란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국민적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Goethe)는 위대한 시인의 영혼으로 채워진 그의 시를 “별빛이 반짝이는 우주와 같은 신비한 구성(Turning like the starry spheres)”으로 격찬했다. 현재 도심에 위치해 있는 하페즈의 묘는 사디의 묘와 같이 팔레비왕조가 통치하던 1953년에 개축된 것이다. 울창한 숲과 시원스런 연못으로 정원을 꾸미고, 그 중앙의 화려한 원형 정자에다 석관을 안치했다. 강 철 기 Kang, Cheol Gi 경상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Westonbirt 가든 페스티벌
영국은 세계적으로 정원이 많은 나라로 유명하다. 영국인들 누구나 정원이 딸린 집에서 Gardening을 취미로 살고 싶어한다. 영국의 어느 공공정원을 가봐도 한 손에는 메모지와 한 손에는 필기도구를 가지고 식물 하나 하나를 열심히 살피며 메모를 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이토록 영국이 정원의 나라라는 명성을 얻는 데에는 Flower Show, Garden Show의 역할이 많은 영향을 미쳐왔고 중요한 부분이었다. 1년 중 영국 전역에서는 크고 작은 정원관련 행사가 120여 회가 넘게 개최된다. 형태는 다양하다. 영국왕립식물원이 개최하는 세계적인 플라워 쇼인 Chelsea, Hampton Court와 같이 여러 정원과 화훼 그리고 정원관련 물품을 전시 판매하는 형태부터 정원관련 산업에 관한 박람회 그리고 Westonbirt와 같이 정원만 전시되는 형태가 있다. Westonbirt International Festival of Gardens은 영국 남서부 브리스톨 북쪽에 위치한 Westonbirt 식물원에서 개최되는 정원 전시회이다. 이 행사는 영국에서 첫 번째로 열린 오직 하나뿐인 최신 현대 정원 디자인 축제이다. 이 행사의 안은 TJM Associates 2명의 중역에 의해서 계획되었고 Forestry Commission (산림청)의 공동작업으로 2002년에 탄생하였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하는 Westonbirt International Festival of Gardens는 다른 전시회처럼 많은 수의 관련업체가 참여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건축, 조경, 미술, 조각 그리고 사진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서 200개가 넘는 작품이 접수 되어 13개의 정원이 선정 되어 전시된다. 이것은 프랑스의 Chaumont-sur-Loire의 정원전시회와 캐나다 퀘벡주의 International Garden Festival of Metis와 같은 정원전시회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태의 영국식 정원전시로 다시 만들어졌다. 선정된 13개의 정원은 현대적이며 새로운 스타일의 정원을 소개하고 있다. 1, 2회 전시를 보면 약 3개월에 달하는 전시기간 동안에 10만 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갔고 약 2백만 파운드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비록 3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해가 거듭 될수록 성장하고 있으며 인지도가 높아지고 홍보가 되면서 올해는 더욱 많은 내방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광활한 Westonbirt식물원을 배경으로 한편에 조용히 마련된 행사장에는 독창력, 표현력, 재료의 사용, 자연에 대한 이해와 영감 등에 의해서 13개의 정원이 선출되어 전시되고 있다. Westonbirt International Festival of Gardens은 단순 정원 전시 차원이 아닌 현대정원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도전, 다양한 분야의 참여와 정원이 예술의 한 장르로 승화하는 차원에서 가치 있는 큰 행사이다. 이 행사의 특색은 전통재료와 공간의 사용, 현대적 디자인 그리고 폐기물의 재활용이 두드려져 보이며 3개월이라는 전시기간을 통하여 정원이 사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하나의 큰 특색이다. 이 정원전시회는 전적으로 정원디자인의 독창적인 방법을 경험할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윤 상 준 Yoon Sang Jun Sheffield 대학 박사과정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가로림만(加露林灣)
Caroline Bay
“Prince Jerome Gulf를 목표로 하여 항해한 지 이틀 만에 도착한 곳은 Prince Imperial Archipelago의 남단에 돌출해 있는 해안선으로, Joachin Bay, Caroline Bay, Deception Bay가 서로 인접해 있는 곳이었다. 프랑스 정찰자들의 정보에 의하면 이 일대에 4,000명의 주민이 있는 촌락이 있다고 했다. 가능한 곳까지 만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으나 해안에는 촌락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의 어느 항해기록의 첫머리 일부다. 미지의 땅을 항해하다가 이들이 최초로 상륙한 곳은 Caroline Bay의 어느 한 어촌마을이었다. 어느 나라의 어느 해안인지 이 글만으로는 알 수 없다. 이 여행기에는 항해를 하면서 작성한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이 지도를 우리나라 서해안 일대의 지도와 맞추어 놓고 보면, Prince Jerome Gulf는 아산만이며, Prince Imperial Archipelago를 비롯하여 Caroline Bay, Deception Bay 등 영문으로 표기된 곳은 각각 덕적군도, 가로림만, 대호지만으로 불리는 태안반도 북쪽해안 일대임이 드러난다. 이들이 처음 상륙했다는 마을이 있는 Caroline Bay는 태안반도 북쪽해안의 가로림만을 말한다.
오페르트와 남연군묘 굴총
위의 글은 대원군 집권시절 우리나라 서해안을 항해한 유태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여행기다. 우리에게는 남연군묘 도굴하려 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나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는 세 차례 서해안에 왔다. 그의 세 번째 항해는,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왕실의 보물을 감추어 둔 보물창고를 털려던 것”이었으니, 결국 남연군묘를 도굴하려던 것이 주 목적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왜 그랬을까? 그 이전에 두 차례 서해안에 온 것은 무엇을 하려던 것이었을까?
오페르트의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서지적으로 또는 역사학이나 사회학적으로 따지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이 글을 통하여 내가 다룰 바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다만 오페르트는 순수한 민간차원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유럽인이자 서해안의 한적한 어촌과 해안을 두루 항해한 최초의 사람이었던 점을 주시하게 된다.
오페르트의 여행기를 잘 들여다보면, 근대 이전의 서울이나 도시가 아닌, 서해안 일대의 어촌의 경관과 사람들 그리고 풍습 같은 것을 생생히 전해 받을 수 있다. 굳이 전통조경이야기에서 오페르트를 들고 나온 것은 바로 그 점을 위해서이다.
오페르트의 여행기는 독일어와 영어 판으로 발간되었던 모양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은 독일어판인데, 영어 판을 원본으로 한 번역본이 시중에 나와 있다.
오페르트의 세 번째 항해는 애초에 남연군묘를 굴총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고, 오페르트 일행은 아산만의 행담도에 정박한다. 행담도란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서해대교 중간 즈음에 맞게 되는 휴게소가 있는 곳이다. 오페르트 일행은 행담도에서 작은 배를 타고 지금의 삽교호가 있는 쪽으로 삽교천을 따라 들어와 구만이라는 곳에서 배를 내린다. 거기서 육로를 통하여 남연군묘로 향한다. 남연군묘에 도착한 오페르트는 “참으로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을 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세 번째 여행기록에서는 별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에서는 첫째 항해와 두 번째 항해의 기록을 중심으로 다루어 볼까한다. (중략)
Verfremdungseffekt, 또는 우리 경관 “낯설게 보기”
아직 오페르트의 여행기를 따라 답사여행을 시작하지 않던 즈음, 우연히 우석대의 김두규 교수와 오페르트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오페르트에 관한 한 역사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는 굴총사건이 어떨지 모르지만 경관을 다루는 입장에서 그의 여행기는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우리의 경관을 다른 시각으로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싶다는 식으로 나의 견해를 피력했던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나는 김교수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Brecht란 독일의 한 현대작가가 주창한 Verfremdungseffekt라는 중요한 개념이 있다고 했다. Verfremdung이란 대략 “낯설어지기” 정도의 뜻이 될 것 같다. 낯설어지기, 이미 우리 주변에 있어왔기에 너무 익숙하여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새삼 낯설어질 필요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나는 문학이든 문학이론이든 전혀 문외한이지만 평소 경관을 대하면서 항상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바로 낯설어지기라는 현대문학이론과 맞닿아 있었구나 싶다. 매일 보아온 일상 주변의 경관, 또는 자주 가 보지는 않았지만 워낙 우리 눈에 익어있는 우리의 산천이기에 자칫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않고 지나칠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정말 그런가 싶다. 그 며칠 후, 집사람한테 Brecht의 Verfremdungseffekt를 아는가 하고 물어보았는데 (딴은 어찌 그런 걸 알겠나 싶었지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브레히트 희곡의 소외효과!”라는 것이란다. 물론 소외효과란 희곡 장르상에서는 그렇게 통용되지만 오히려 낯설어지기란 의미가 더 적합할 것 같다고 했다. 아주 가까이에 나름대로의 전문가를 두고 나는 머나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역사경관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우리가 역사경관을 가까이하고 이를 보다 근접된 연구를 하며 보다 실제에 다가가는 이해를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주 처음 만나는 듯 낯선 대상인 듯 다가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굴범) 오페르트는 (참으로 묘하게도) 우리에게 우리의 경관을 새롭게 만나도록 자극을 주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오페르트를 역사학적으로는 어떻게 평가하여야 할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야 어떻게 평가되고 또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하는 점과 무관하게 그가 남겨 놓은 글을 통하여 우리는 구한말의 우리 옛 경관을 새롭게 접하는 기회를 삼을 수 있음이 틀림없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절서·조화·통합……
e-매거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경주 남산
나는 듯이 안압지에 내려앉았다. 안압지에는 언제 가 봐도 사람들이 많다. 복원해 놓은 전각들을 둘러둘러 호안을 따라 한바퀴 돌면서 기념촬영도 하고 호젓하게 데이트도 하곤 한다. 대개 한바퀴 도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더 돌아보기에는 이미 다 본 것 같고, 그냥 나가자니 뭔가 아쉬움이 남고. 대개들 약간의 미련을 남겨 놓은 듯 머뭇거리며 발길을 돌린다.
만약 한 바퀴 정도 더 돌면 어떻게 될까? 한바퀴는 그냥 보통 관람하듯 돌고 두 바퀴 째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돌아보면 재미가 한층 더 할 것이다.
해목령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안압지를 만났으니 안압지에서도 해목령을 한번 살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정작 안압지에서 남산이나 해목령을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반월성의 높은 언덕과 숲에 가려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곡선 호안의 크고 작은 돌출부 중 한 곳에서 어렵사리 해목령을 만난다. 나침판을 들여대 보니 정확히 남북방향을 가리킨다. 해목령에서 북쪽으로 바라보이던 안압지 방향으로의 시선은 곧바로 이리로 달려온 것이다.
안압지를 일주하면서 이렇듯 미세한 계획적인 구성이 눈에 여럿 띄는데, 이러한 일들은 실제 조원의 과정에서 시공 상의 편리함과 같은 기준점이나 기준 선으로 설정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 되는 것들이다.
역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이렇듯 디자인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제반 과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제반 사항은 결국 오늘날 현대조경을 위한 좋은 착안이 되기도 할 것이다.
여하튼 남북 방향으로 한 선상에 놓인 안압지와 해목령. 일단은, 참으로 묘한 우연인가 싶다. 만약 이러한 시선축이 안압지를 조성하던 당시 남북방향으로 설정해 두었을지 모르는 축을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면, 동서방향의 축의 흔적도 확인될 수 있는 일이다. 말을 바꾸면, 혹 동서방향으로 그 비슷한 우연한 현상이 발견되어, 우연과 우연이 서로 만나는 경우가 발생되면 이는 필연이 되어 간다. 혹시나 해서 동서방향으로 좌우를 살피며 어림잡아 본다. 길게 계곡을 이룬 호안부 일대의 돌출된 부분과 그 끝부분에 놓여 있는 바위들을 기준으로 눈가늠을 해 보면서, 만약 동서축이 있다면 이들 간에 엮여 있겠거니 싶은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언젠가 측량기를 가지고 와서 확인작업을 해 보아야 할 일이지만, 우선 그런 정도로 짐작해 놓고 본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자연이 준 아름다운 선물
e-매거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독일 슈베찡엔의 로코코 정원
슈베찡엔은 우리에게 “황태자의 첫사랑”으로 잘 알려진 독일의 옛 도시인 하이델베르그로부터 서쪽으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16세기의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풍성한 정원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정원 발달사에 기여한 공로는 그리 크지가 않다고 할 수 있다. 독일에 있는 역사적인 정원들은 독일 고유의 양식을 가진 것은 없고 영국, 이태리, 프랑스 등으로부터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 양식을 전수받은 다른 유럽의 여러나라들을 경탄하게 하는 많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다. 슈베찡엔의 정원도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런 정원 중의 하나이다. 슈베찡엔 궁전과 정원의 역사는 1350년경 해자(垓字)를 두른 성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러 역사물에서 밝혀지고 있다. 그 후, 16세기에 팔츠지방의 선제후에 의해 사냥을 위한 성으로 개조되면서 이미 정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30년 전쟁시 상당부분이 파괴된 후 18세기에 이르러 팔츠지방의 선제후 Karl Theodor가 당시 팔츠지방의 주정부가 있었던 부근 만하임의 여름 별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보수하거나 새로 조성하여 현재의 기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궁전건축은 당시 만하임과의 연결 관계를 고려해 만하임 궁전의 외관을 많이 흉내내었다고 한다. 슈베찡엔 궁전과 정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Karl Theodor의 의도는 옛 사냥성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정원과 궁전을 새롭게 구성하려는데 있었다. 그 후 본격적인 정원공사와 궁전 전체를 조화시키기 위해 Karl Theodor는 프랑스에서 건축가 Nicolas de Pigage를 초청해 정원 총감독에 임명한다. 1761년부터 시행된 Pigage에 의한 슈베찡엔 정원의 두 번째 단계 공사는 원래 1753년 독일의 궁중 조경가인 Ludwing Petri가 마련한 기본 계획에 근거해 이루어졌다. 당시 Karl Theodor는 Pigage에게 당시 유행이던 프랑스식 로코코 정원의 양식과 기타 여러 형식의 새로운 아이디어의 정원이 함께 조화를 이루기를 원했는데 Pigage는 규모가 큰 정원의 전체적인 연결 시스템을 16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조경가인 Le Norte의 방법을 인용해 역사적인 것과 새로운 형식이 잘 조화를 이룬 형태의 정원으로 조성했다. 매년 5월부터 6월까지 음악제가 열리는 정원 내의 아름다운 로코코양식의 극장과 목욕장 등도 Pigage가 설계한 건물이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대지조형
전통조경을 위한 Earthwork
지난번 이야기에서 전통조경을 위해 아주 세심한 경관 읽기와 새로운 개발에 따른 신중한 Earthwork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조경설계를 하면서 도면에 등고선을 그려가며 마운딩 처리를 하곤 하지만, 등고선을 그려가며 아주 자연스러운 지형을 만들어 내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는 일이다. 보다 자연스럽고 변화무쌍한 지형을 만들어 가는 좋은 방법은 현장에서 직접 조형작업을 하는 것이지만 그건 특별한 작업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좀처럼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도 없다. 설사 그럴 기회를 만났다 하더라도, 생각과는 달리 지형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기에 등고선을 그려가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형설계를 해 갈 것인가?
지형의 처리가 매우 자연스러운 우리의 전통조경 기법으로부터 Earthwork에 대해 배울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이 아닐까 싶지만, 매우 아쉽게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한, 전통조경에서는 어떻게 지형처리를 해 갔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도, 그에 관한 연구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의 전통조경에서 인공적으로 지형을 만들어 가거나 조작한 경우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두어 최소한의 인공을 가미한 것이라 하니 결국 그럴 수밖에도 없지 않겠나 싶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전통조경의 기법으로부터 Earthwork의 모델을 삼아 전통을 계승할 기회도 애초에 차단되어 버린다.
전통조경에서 살펴 본 Earthwork
어떻게든 Earthwork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터이니 그 해법(?)을 하나쯤 제안해야 할 일인가 싶다. 어느 산이든 상관없다. 힘겹게 산 정상에 올라 발 아래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산과 들판을 바라본다고 생각해 보자. 그 중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모습을 뚝 떼어다 내 정원에다 옮겨 놓아 본다거나 아니면 공원의 한 부분을 그 형상으로 재현시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고 치자. 말이 될 것도 같고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만약 그게 어떻게든 가능하다고 친다면 한번쯤 시도해 볼 만한 일이 아닐까 싶다.
조금 오래 전의 일이지만, 경주의 남산에 올라 선도산 일대의 경관을 내려다보면서 겹겹이 겹쳐 있는 크고 작은 산과 능선의 아름다운 실루엣을 어느 사이트에 통째로 옮겨 놓는 일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얼핏 생각하면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할까 싶지만, 생각을 바꾸어 보면 그게 그리 불가능할 일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안압지의 무산십이봉이라 일컫는 Earthwork는 남산에서 바라본 선도산 일대의 경관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뚱딴지같은 이야기인가 생각할 수도 있기에, 우선은 그렇게 가정해 놓고 보아도 좋다. 여하튼 나는 경주 남산에 올라 간 그 즈음, 이미 여러 해 동안 경주의 안압지를 다루고 있던 참이었다. 필요한 만큼의 결과를 도출하기까지는 한 7-8년 정도의 상당히 오랜 세월이 필요했었는데, 물론 그 대부분의 시간은 착각과 시행착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반복된 허송세월이었다. 오늘 이야기는 그 과정에서 있었던 Earthwork, 즉 선도산 일대의 파노라마를 모형으로 옮겨오는 작업에 관한 부분이다.
정 기 호 Jung, Ki Ho·성균관대학교 건축·조경 및 토목공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