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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마르조
봄마르조의 추억, 2000년 이태리 여행은 매혹적이다. 기차 창 밖으로 펼쳐지는 투스카니 지방의 굽이치는 언덕과 불쑥 불쑥 솟아 있는 사이프러스의 풍광은 지극히 아름답다. 필자가 보마르조를 찾은 것은 2000년 대학원생들과 함께 떠난 답사여행에서였다. 여행에서는 늘 예기치 못한 돌발사건이 일어난다. 로마에서 훤한 대낮에 지갑을 도둑맞았다. 허탈했지만 어찌하나 답사는 계속되었다. 다음날 로마에서 빌라란테가 있는 바냐나로 갔다가, 다시 보마르조를 찾아 갔다. 동네 어귀에서 sacro bosco(신성한 숲)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했다. 입장료는 생각보다 비싸 우리가 환전한 돈으로는 4명의 일행 중 2명의 입장료 밖에는 안되었다. 궁여지책으로 필자와 한 남학생은 숲 뒤쪽의 허름한 철조망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월담은 무사히 성공하였고, 정원 안에서 만난 우리 일행은 무언의 미소를 나누었다. 그 곳은 상상했던 것보다 기괴하였다. 거대하고 섬뜩한 분위기의 조각들, 기울어진 집. 마치 놀이공원의 귀신 집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한 여학생이 어지러워서 더 이상은 못 있겠다고 할 정도였다. 충격적이라 할 만큼 묘한 분위기의 정원을 뒤로 하고 우리는 보마르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비테르보 역까지 3-4시간을 한참이곤 걸었다. 시골길에 널려진 산딸기를 따먹으며, 한적한 풍광을 즐기면서. 서리한 사과 맛은 달콤했다. 달리의 방문, 1949년 괴짜는 괴짜를 알아본다. 2차 세계대전 후 달리와 프라츠는 입소문으로 듣던 보마르조를 찾는다. 덤불 숲 속 폐허 속에서 괴기한 조각상들을 보면서 달리는 그의 작품세계의 진정한 동지를 만난 희열을 느꼈으리라! 팜므 파탈에 매료되었던 마리오 프라츠도 이 정원의 감흥을 ‘시간(tempo)’라는 글에서 초현실적이고 마술적인 아우라를 그려내었다. 이들 보다 조금 먼저 이 곳을 방문한 쟝 콕토도 그의 영화인 ‘미녀와 야수(La Belle et la Bete)’의 배경작업 이미지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 보마르조는 세인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1954년 정원의 주인이 바뀌면서 부분적 복원 작업을 하였고, 정원 주인인 비치오와 그의 친구 드라우헤와의 서신이 1963년 출간되면서 정원의 신비는 서서히 풀려간다. 1967년 무치카 라네즈는 신비의 인물인 오시니에 대한 소설 『보마르조』를 썼고, 같은 해 지나스테라는 같은 제목의 불협화음의 음악과 에로틱한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미술, 문학,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어준 보마르조 정원의 매력과 힘은 무엇일까? 워낙 특별하기에 모작을 찾기 힘든 이 정원은 소수 매니아들에게만 어필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숨겨진 이면의 본성을 건드리는 것일까? 차근차근 보마르조의 신비를 풀어보도록 하자. 보마르조의 탄생, 1552년에서 1583년까지 보마르조는 이태리 정원의 이단아이다. 이 곳에서는 이태리 르네상스 정원의 기하학과 대칭적 질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세련되고 정제된 아름다움을 지난 빌라란테나 도도하면서도 웅장한 빌라에스테와도 확연히 구별된다. 숲 속의 언덕 이곳 저곳에 놓여진 조각상과 정원장식물, 테라스, 신전들은 이태리정원이라기 보다 공간 구성 면에서는 영국의 풍경식 정원에 가깝고, 몇몇 조각상은 동양적인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보마르조는 스스로의 독창성을 뽐내고 있다. “이 매혹적인 숲은 멤피스도 아니고, 세계의 다른 경이로운 곳과도 다르다. 여기는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곳이다.” 정원을 만든 비치오 오시니는 세계의 7대 불가사의에 버금가는 경이로운 세계를 만들하고자 하였고, 그의 의도는 성공하여 누구도 완벽하게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의 정원이 창조되었다. ‘신성한 숲’ 혹은 애칭인 ‘괴물의 정원’으로도 불리는 보마르조는 명문가문 출신 비치오 오시니가 1542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으면서 터를 잡는다.정원은 1552년부터 1583년에 30여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오시니는 전쟁 중인 1553년에서 1557년사이 이 곳을 떠나 있었고, 나머지 시간은 이 곳에 머무르며 정원을 만들었다. 보마르조는 의도된 설계도 없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덧붙이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정원을 만든 사람들도 여럿이고, 그 면면에 있어도 화려하다. 빌라에스테를 설계한 리고리오, 빌라란테의 디자이너 비뇰라, 조각가 아만나티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내놓으라는 예술가는 총출동하였다. 그럼에도 보마르조는 빌라란테와 빌라에스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오시니가 정원의 연출을 도맡은 총감독이다. 쟁쟁한 디자이너들은 지극히 제한적인 스탭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보마르조의 현재의 모습은 조성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 1558년 이후 분수가동이 중단되었다. 16세기의 정원은 물이 중요한 요소이자 테마였다. 계류가 정원을 관통하고 있었고, 복잡한 수도관망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조각상들은 물 혹은 바다와 관련된 넵튠, 사이렌, 고래, 거북이, 페가수스 등이 주를 이룬다. 현재의 모습은 폐허 속의 유적과 같아 묘한 페이소스를 자극하지만, 당대에는 신기한 조각들과 여러 모습의 물의 잔치로 화려한 스펙타클이 벌어졌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정원을 변화시킨 것일까? 유일한 건축물인 기울어진 집은 지진이 일어나 더욱 기울어지면서, 초현실적 분위기를 강화시키는 매력적인 요소가 되었다. 우연의 결과치곤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연출이었다. 조 경 진 Zoh, Kyung Jin 서울시립대학교 건축도시조경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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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대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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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자연 건축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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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 사람과 땅이 어울린 이야기 (19) - 12월 ; 생태(生態), 가깝고도 먼 그대
하와이 섬의 생태계
옛날 옛적에 태평양의 어디에선가 바다화산이 폭발했다. 바다 속에서 분출된 마그마는 바닷물과 만나면서 급격히 굳어 바다 한가운데 봉긋한 모양의 섬으로 남았다. 섬에 고인 빗물은 이곳을 지나던 철새들을 쉬어 가게 했다. 이들 철새의 깃털 속에는 뭍에서 묻어 온 식물 씨들이 있는 법이어서 철새가 노닐던 섬 여기저기에 작은 풀과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식물이 자라면서 곤충도 같이 자라기 시작했고 땅위를 기는 포유류도 여기 저기 생겨났다. 비록 뭍의 식물 씨로 시작되기는 했지만 바다로 고립된 탓에 뭍의 다른 지역과는 전혀 다른 이 섬만의 독특한 생태계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되며 자리 잡았다. 이 모두가 하와이 섬이 생겨나고 하와이 섬의 생태계가 자리 잡은 과정이다. 누구의 상상이 아니라 물증에 충실한 디스커버리채널이 재작년 겨울 어느 프로그램에 소개했던 것이니 믿어도 좋을 것이다. 요약한다면, 바다로 격리된 구조 속에서 하와이 섬 태생 고유의 생태계가 진화하고 발전한다는 얘기였다. 단지 폴리네시아인들이 이 섬을 발견할 때까지 한정되었던 것이긴 하지만.
어느 날 바다를 표류하던 폴리네시아인들이 하와이 섬을 발견한다. 다른 곳에서 살 곳을 찾던 폴리네시아인들의 이주가 시작됐다. 더불어 갑작스런 생태계의 변화가 하와이 섬에서 시작됐다. 이주민을 따라온 여러 생물 종들이 기존의 생태계를 교란시켰기 때문이었다. 섬에 있던 기존 재래종과 이주민을 따라온 외래종과의 혹독한 전투가 시작되고 약한 재래종은 도태되고 사라졌다. 물론 재래종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섬만의 독특한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외래종들도 자취를 감췄다. 처음만큼이나 또 오랜 시간이 흘러 태생의 원래 생태계와는 다르지만 폴리네시안 생태계란 이름으로 새로운 생태계가 자리 잡고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칙 속에서 다시 진화와 발전을 시작했다. 아직도 바다와 격리되어있는 구조는 여전했으므로 하와이 섬의 폴리네시안 생태계는 뭍의 다른 곳과는 전혀 다른 고유의 생태계로 발전했다. 이 폴리네시안 생태계도 매우 오랜 시간을 지속했다. 단지 전 세계의 관광객이 몰려들 때까지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청계천 하류부 - 콘크리트 위의 자연
물론 자연의 힘은 꼭 강원도나 옐로스톤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복원되고 있는 청계천에는 종점부인 마장동의 신답철교에서 청계천이 중랑천으로 합류하는 지점(한양대 인근 살곶이다리가 있는 쪽) 까지 약 2킬로미터가 더 있다. 그러니까 청계천의 최종 하류부가 되는 구간인데, 이 구간은 워낙 복개된 적이 없이 원래부터 열려있었던 청계천의 일부였다. 하천의 제방은 통상 고수부지(高水敷地 ; 간혹 둔치라고도 표현하지만 둔치는 물과 만나는 경사면을 지칭하는 다른 말이라고 한다)를 사이에 두고 위쪽 제방과 아래쪽 제방으로 나뉜다. 위쪽 제방을 고수호안(高水護岸), 아래쪽 제방을 저수호안(低水護岸)이라 부르고 있는데 일본의 하천용어에서 온 듯한 느낌이 짙지만 친근한 우리말로 풀기가 어려워 그냥 적는다. 청계천 하류부의 고수호안이나 저수호안은 모두 콘크리트호안으로 조성되어있다. 보통 최근 조성되는 하천의 경우 저수호안 대부분 자연 친화의 성격이 강하도록 자연석 쌓음이 주로 적용되고 있다.
현재 청계천 하류부 호안의 재료는 콘크리트이고 그렇다면 분명 반(反)자연적인 것이다. 그런데 실제 그곳을 가보면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단 모든 고수호안이 녹지로 덮여 있다. 그래서 당연히 콘크리트호안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가까이 다가서서 풀을 휘저으면 그제야 풀 밑으로 콘크리트 블록이 보인다. 풀만이 아니다. 가죽나무와 갯버들, 수양버들이 자연스레 날아와 자리 잡고 뿌리를 내린 다음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 콘크리트 호안블럭이 촘촘히 엮인 틈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저 강인한 힘. 콘크리트호안블럭을 비집고 줄기를 틔우고 있는 저 빛나는 생명력. 순간 이건 뭐지 하고 혼동이 온다. 이론대로라면 이건 자연이 아니고 잘못된, 즉 학술적인 용어로 비체계적인 생태계의 비틀린 상황이어야 하는 건데. 그렇지만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이걸 자연이지 않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이것들이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씻을 수가 없다. 어느 누가 이렇게 열심히 콘크리트 블록을 비집고 자라는 가죽나무와 잡풀을 자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이들의 자리 잡음이 사람의 손길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순수하게 자연만이 묵묵히 작업한 결과에 의해서임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더욱이나.
자연과 문화의 동질적 구조
지난달에 다룬 전통과 이번 달의 주제인 생태는 전혀 딴판의 다른 얘기이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선 둘 사이에 유사한 맥락이 존재한다는 것을 첨언해두자. 사투리의 분화가 그렇듯이 어떤 장소의 문화가 다른 장소의 문화와 달라지려고 일부러 노력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누가 여행을 통해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문화를 접했다고 치자. 자신의 문화와 다르기 때문에 신기해서든 또는 자신의 문화보다 더 발전된 까닭에 돈벌이가 될 것 같아서든 어떤 이유에서건 그 사람은 여행지의 문화를 자신의 고향으로 가져온다. 이때 백이면 백 틀림없이 오차가 발생한다(옛날의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을 생각해보라). 즉, 문화나 사투리의 차이는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전달자의 실수에 의한 잘못된 전달에 가까울 수 있다는 얘기다. 설사 오차가 발생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되었다하더라도 새로 가져온 문화는 현 장소의 주변 맥락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변하게 된다. 이게 외국문화가 토속문화와 절충되고 정리되는 과정의 본질이다.
하와이 섬의 초기 생태계와 이후 폴리네시안 생태계으로의 발전, 그리고 최종적으로 현대의 하와이생태계로의 변화를 생각해 볼 때, 사실상 새로운 문화의 도입과 전통문화와의 협상 그리고 문화재정립과 발전의 과정은 생태계의 발전과정과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내가 갖고 있는 얄팍한 전통과 생태계에 대한 지식으로 그런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리기는 무리가 따르는 일이다. 따라서 전통문화와 자연생태에 관한 내 얘기는 그리 탄탄한 이론적 기초 하에 쓰인 것이 아니니 일종의 발제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하시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늘 일관된 소신으로 자신의 학문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 참 좋다. 서울시립대의 이경재교수님에게서도 늘 그런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분의 입장과 논리가 그냥 자연을 그냥 버려두기보다는 사람의 개입으로(물론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서) 빠르게 생태계를 복원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계신 것으로 안다. 나는 다른 생각을 이 지면에서 전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꼭 균형을 가지고 이런 얘기들을 생각해 보시기를 부탁드린다.
진 양 교 Chin, Yang Kyo · (주) 토문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무소 부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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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정수도의 풍수지리적 입지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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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무 노구치의 모에레누마공원
모에레누마로 가는 길 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8월, 일본 홋카이도의 삿포로에서 모에레누마(モエレ沼)를 찾아가고 있었다. 약 10년 전,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파리의 라빌레트공원(La Villette Park)을 찾아가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빨강색 폴리와 초록색 녹음이 어우러진 감각적인 라빌레트를 보면서 “이것도 공원이구나, 공원을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2003년 8월, 지금도 비슷한 설레임 속에서 또 다른 공원을 찾아가고 있다. 왜일까? 나는 모에레누마공원에 대해 몇 가지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공원의 조성기간이 무려 20년이 넘었을까? 60만평(189ha)에 이르는 대규모 평지공원을 왜 시가지 외곽에 만들어야 만 했을까? 이 공원을 디자인한 이사무 노구치(イサム?ノグチ)는 분명 조각가 인데 어떻게 공원을 디자인하게 되었을까? 과연 조각가가 디자인 한 공원은 어떤 모습일까? 세 번째와 네 번째 의문은 본 글의 핵심부이니 뒤로 미루자. 원래 모에레누마는 삿포로의 북동부를 흐르는 토요히라강(豊平川) 지류의 범람원이자 늪지대였다고 한다. 요즘의 우리 상식으로는 당연히 친환경적인 보전을 하여야 할 대상인데도 삿포로시는 이 곳을 쓰레기매립장으로 사용함과 동시에 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엉뚱한 발상을 한다. 아마 삿포로 북동지역의 새로운 거점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생각한다. 1979년부터 매립을 시작하여 1982년부터 공원의 기반공사를 개시하고 270만 톤의 쓰레기가 매립된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원 조성을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이곳은 삿포로시 Leading Project의 일환으로 삿포로시 환상그린벨트 중 북동부 녹지벨트의 거점으로 계획한 것이다. 모에레누마공원과 이사무 노구치 내가 알고 있는 이사무 노구치는 세계적인 조각가이다. 일반적으로 조각은 일상생활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할 경우가 많고, 조각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기획적인 이벤트나 특정을 목적을 위해 녹지나 공원 속에 조각들이 놓여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왜 조각가가 공원을 설계하였을까? 그것도 60만평이라는 큰 땅을....”이라는 일련의 의문은 노구치에 대한 몇몇의 평전을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 노구치는 1904년 미국 LA에서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924년 레오나르도 다빈치 스쿨에 입학하여 조각을 배운 후 세계적인 조각가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태생에 대한 배경과 어린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근거로 하는 “귀속으로의 소망”은 노구치의 예술적 철학이 되었고, 이것이 모에레누마공원의 디자인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구치는 돌과 흙을 통해 여러 가지 모양을 가진 자신의 고향을 찾았던 것 같다. 이 때문에 어떤 평전에서는 노구치는 인생과 일을 떼어 놓고 보아서는 안되며, 그를 과감히 “지구인”이라 칭하고 있다. 원래 지구에는 국가, 국경, 인종의 구별이나 차별, 이데올로기 등이 없고, 인간, 동물, 물고기, 새, 벌레, 식물, 돌, 등 모두가 그것을 거처로 하는 모체이자 인간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활동의 장소이듯이, 그는 평생을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묶는 일에 골몰했던 것 같다. “나의 창작에 대한 정열의 뿌리는 공간과 조각에 사람의 감성을 스며들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심미적인 목적만이 아니며 환상적 이미지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 즉 일상생활에 어떤 의미를 주고 역할을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1986년 10월, 이사무 노구치 이런 예술적 철학을 가지고 있던 노구치는 1988년 봄 우연히 모에레누마를 만나게 된다. 모에레누마공원은 어떻게 보면 60여 년 동안 어린시절을 동경하며 자신이 품고 있던 자연과 조각의 만남을 통한 새로운 Playscape 창조를 위해 모든 것을 쏟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마치 곧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노구치는 1988년 5월부터 7여 개월 동안 작업을 마치고, 한 달 후인 12월에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모에레누마공원은 노구치의 유작이 되었다. 강 동 진 Kang, Dong Jin 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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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삼림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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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 사람과 땅이 어울린 이야기 (18) - 11월 법규(法規)와 전통(傳統)
법규와 공간 - 모든 땅엔 임자가 있다
세상의 모든 땅에는 주인이 있다. 땅 주인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개인(민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이 아니면 공공(公共)이다. 여기서 민간이라 함은 개인일 수도 있고 개인들이 같은 이익을 위해 모인 집단일 수도 있다. 민간의 땅은 개인에게 속해있고 공공의 땅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속해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속해있다는 말은 결국 그 땅이 특정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소유라는 얘기다. 주택과 주택에 속해있는 정원은 민간의 땅이다. 몇 천 세대가 몰려 살건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도 민간의 땅이다. 집 대문을 벗어나자마자 만나는 도로와 공원 등은 모두 공공의 땅이다. 하천이나 강 그리고 바다도 공공의 땅이다. 잘 아시겠지만 땅의 소유문제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국가와 일반 민주주의 국가를 구분하는 단초가 된다. 물론 영국처럼 민주주의 국가의 경우에도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땅의 공개념을 강조하며 땅에 관한한 민간의 소유보다는 공공의 소유에 가치를 더 부여하는 국가도 없진 않다. 법규는 민간의 땅이라 할지라도 개인이나 집단이 마음껏 재산권 행사를 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 중략 …
전통의 계승 - 모든 것엔 뿌리가 있다
설계란 전문분야에서 전통적인 양식을 적용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전통적인 양식이란 말 자체에 이미 현 시대에서는 아웃데이트(outdate)되어있는 낡은 문화라는 의미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양식과 우리가 현재 몸을 담고 있는 현(現) 문화와의 상충은 언제나 예정되어 있다. 일본의 민속주거가 그랬듯이 우리의 전통주거들도 그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그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현 문화와의 타협을 통해 살아남은 것들은, 그러니까 현 시대의 요구에 따라 모습을 조금씩 바꾼 경우겠는데, 이럴 경우 현 시대 문화의 강력한 색깔에 가려져 전통이란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경우가 십상이다. 전통의 순수한 성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 시대에 그것이 적응할 가능성이 오히려 적어진다. 이러니 전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쉬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동안 설계분야에서 전통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두 가지의 방법이 적용되어왔다. 하나는 전통의 문화에서 전해지는 옛 공간언어들을 변경 없이 적용하는, 즉 다시 말하면 옛 형태나 무늬, 패턴 또는 재료를 그대로 다시 모방해 쓰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옛 전통의 공간언어들을 현대의 시각으로 다시 변형해 쓰는 방법이다. 두 번째의 방법은 옛 공간의 형태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옛 공간의 개념은 빌려오되 그 형태와 재료는 현대적인 것들을 사용한다는 얘기다. 첫 번째의 방법인 복사(複寫)가 두 번째의 방법인 원용(援用)에 비해 훨씬 쉽다. 그래서 적지 않은 설계가들이 복사 쪽을 택한다. 그리고는 많은 비판을 받는다. 쉽긴 하지만 첫 번째의 방법은 나쁘게 말해 시간을 속이는 것이 된다.
옛것은 옛 시간대에 속해 있어야하고 새것은 새 시간대에 속해있어야 한다. 뿌리는 이어져야 하되 다른 시간대의 언어로 다시 읽혀져야 한다. 그래야 전통의 올바른 계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복사에 가까운 전주시청사의 건물은 전주 성문(城門)에서 온 것이긴 하지만 전통을 좋아하는 사람들조차 ?저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보는 사람들에게 전해준다. 청계천의 자문관계로 한국을 들렀던 로마건축가협회의 회장인 스키야타렐라 (Schiattrallea)교수도 청계천의 설계내용 중 일부구간에 적용된 전통양식을 보고는 "그대로 베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얘기를 조심스럽게 던져 놓고 갔다. 사실 우리보다 훨씬 긴 역사를 지닌 로마는 더 오랜 시간을 전통의 문제와 싸워왔을 것이다. 로마에서 역사적 시간이 얽히지 않은 장소가 어디 있었겠는가. 곳곳의 모든 장소에서 전통의 문제와 싸워왔을 것이다. 그런 그들한테도 복사는 답이 아니었던 게다.
진 양 교 Chin, Yang Kyo?(주) 토문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무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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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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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 사람과 땅이 어울린 이야기 (17) - 10월 ; 물, 그 허허로움의 존재여
물은 조경가가 다루는 소재들 중 수목, 지형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3대 소재의 하나이다. 물은 흐르기도 하고 고이기도 한다. 주변의 상황에 순응하는 까닭이다. 또한 물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원형의 그릇에 담으면 원형 못이 되고 정방형의 그릇에 담으면 정방형의 못이 된다. 정해진 모습이 달리 없다는 얘기다. 물의 다양한 속성과 그 속성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는 일과 물이 외부공간에서 실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도 그리 재미없는 일은 아니지 싶다.
물의 속성 - 흐르는 물과 고인 물
물은 흐른다. 물은 늘 어느 곳을 향하고 있다. 도랑을 흐르는 물이 그렇고 하천과 강을 흐르는 물이 그렇다. 빗물의 형태로 하늘을 떠난 이후 물은 줄기차게 낮은 곳을 향한다. 우리가 외부공간에서 만나는 물은 그 물이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건 물이 겪을 또는 이미 겪어 온 긴 여정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간혹 물은 증산(蒸散)의 형태로 나머지 과정을 생략하고 다시 하늘로 오르기도 하지만 그 양은 많지 않다. 물의 끊임없는 움직임은 피할 수 없는 물의 숙명처럼 보인다. 또한 흐르는 물은 소리를 낸다. 물은 흐를 때보다 떨어질 때 더욱 큰 소리를 낸다. 개울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한편 물은 흐르지 않는다. 연못의 물이 그렇고 호수와 바다의 물이 그렇다. 어쩌면 그동안 끊임없었던 물의 움직임은 이곳에 와 지친 몸을 가누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움직임을 멈추고 다소곳이 고인 물은 면(面)을 만든다. 그 면은 이름그대로 완벽한 수평면(水平面)이다. 몸은 뉘였으되 물의 표피는 주변의 변화에 반응한다. 바람의 움직임을 받아들여 몸을 떨기도하고, 바람이 없는 경우에는 거울처럼 주변의 모습을 비추어낸다. 마치 자신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물의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속성, 움직임을 멈춘 채 면을 만드는 속성, 주변사물을 비추어내는 속성, 소리를 내는 속성 등은 오래 전부터 외부공간을 만드는 이들로 하여금 물을 주의 깊게 바라보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돼왔다. 물은 다양한 속성만큼이나 사람들에게 다양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고인 물은 사람들에게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마음이 번잡할 때 연못가나 호숫가를 따라 걸으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정방형이나 장방형 또는 원형 등 기하학적 형태의 그릇 또는 수조(水槽)에 담긴 물은 경건함과 엄숙함을 전달한다. 반면 흐르는 물은 즐거움을 준다. 물의 생동하는 활력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흐르는 물이 내는 소리도 먼 길을 떠나 물을 찾아 온 사람들의 지친 심성을 끌어올리는데 적격이다. 물은 사람들의 심성을 자극하기도 하고 흥분된 심성을 갈아 앉히기도 하는 묘한 존재다. 외부공간에 물을 쓸 수만 있다면, 그리고 흐르는 물을 쓸지 고인 물을 쓸지를 제대로 결정만 할 수 있다면 외부공간의 성공은 어느 정도 예약되어있다고 보아도 좋다.
이슬람제국의 물 - 경건한 물
이슬람제국의 문화는 물이 귀한 곳에서 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문화였다. 이베리아반도 (지금의 스페인)의 남부 그라나다지방은 7세기 무렵부터 이슬람의 무어왕조가 자리를 잡았던 곳인데, 무어왕조에 의해 14세기 때 만들어진 알함브라(Alhambra) 궁(宮)은 물의 온갖 속성이 모두 이용된 장소로 유명하다. 파티오(patio)라고 부르는 중정(中庭)에 놓인 장방형 또는 정방형의 못은 화려하고 섬세한 이슬람양식의 건축물을 있는 그대로 아니 더 아름답게 투영하고 있다. 좁고 긴 수로들은 건물을 연결하는 수단이었고 사람들의 동선을 따라 적절히 놓여졌다. 게다가 당시 이슬람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끌어 온 물을
낮은 곳으로 보낼 때 물을 관으로 보내고 낮은 쪽 출수구(出水口)의 입구를 좁게 만드는 방식, 즉 자연유압을 이용해 물을 분출시키는 효과도 낼 줄 알았다. 그게 분수(噴水)의 효시였다. 자연유압을 이용한 알함브라궁의 분수는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에 전달되어 훨씬 더 화려해졌다. 시간이 있으면 해 볼 일이지만 알함브라궁의 배치도에서 건물과 녹지를 그대로 두고 물만 지워보면 이상하게도 건물과 녹지가 별 연관 없이 따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물을 원래대로 그려보면 전체의 궁 배치도가 활발하고 완전해진다.
알함브라 궁에서 물은 건물과 외부공간을 일체화시키는 촉매이고 수단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이에 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17세기 인도 무굴제국의 타지마할(Tadsch Mahal) 궁(宮)도 이슬람 문화에 속해있다. 궁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종묘처럼 마할이라는 왕비를 추모하기 위한 일종의 묘지건축물이긴 하지만 어쨌든간에 궁의 정면에 놓인 좁고 긴 장방형 못은 궁의 모습과 양 옆의 수목을 투영하고 있는데 그 아름다움이 가슴 뻐근할 정도다. 달밤에 물에 비친 타지마할은 과히 압권이라고 전해진다. 이 장방형의 수조는 마할왕비를 흠모한 샤자한 왕의 기대답게 방문자들에게 경건함을 주는데 크게 성공하고 있다. 알함브라와 타지마할에서 물의 존재는 그 크기는 작을 지라도 궁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타지마할의 좁고 긴 장방형 못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재현된다. 링컨기념관과 오벨리스크 모양의 워싱턴기념탑을 연결하는 폭 40미터, 길이 2킬로미터 (정확한 수치인지는 모르겠다)의 장방형 못은 워싱턴 디시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링컨기념관과 워싱턴기념탑을 투영시키고 있는 워싱턴의 장방형 못은 그 엄숙함과 강인한 힘이 자못 대단해서 마치 미국의 국력을 상징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 양 교 Chin, Yang Kyo·(주) 토문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무소 부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