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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레드릭 스타이너(Frederick R. Steiner)
    Frederick Steiner는 그의 저서 “Human Ecology"에서 ‘소속’(Belonging)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서로 다른 생물군집들 사이에서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지점을 그는 ”Ecotone"이라 부르며 이를 조경가, 도시계획가, 건축가 등 관련된 분야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경계 영역에 비유한다. 이처럼 그는 배타적 영역을 거부함으로써 각 영역의 체제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세 영역 모두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한다. 그가 말하는 Human Ecology 역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 즉, 가깝게는 우리 집 주위의 생태계와 멀리는 지구적 차원의 글로벌 생태계와 인간의 관계성, 그리고 그 상호작용의 이해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우리의 Identity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그간 관습적으로 수행해 온 계획의 프로세스를 재조명하는 중요한 열쇠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Steiner 교수는 그의 저서 “Human Ecology"의 머리말에서 한국 인사동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는 그곳에서 인간의 정주환경 속에서의 자연과 문화와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 관계성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다시 우리의 주거환경과 조경, 도시, 지역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조경계획 및 교육자로서의 길 Frederick Steiner는 현재 미국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조경계획전공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건축대학 학장(Dean)을 맡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미국 조경가협회(American Society of Landscape Architecture)와 미국 계획가협회(American Planning Association)를 비롯, 다수의 저널에서 편집위원과 자문위원을 맡아오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많은 연구활동과 자문역할을 담당해왔다. 특히 지난 3월 그는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Landscape Ecology 미국지회(US IALE)로부터 올해의 ‘Landscape Practitioner’ 수상자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 1997년과 2000년엔 한국조경사회와 세계환경디자인대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생태적 조경계획 및 디자인에 관한 심포지엄에 각각 발표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신시내티 대학(University of Cincinnati)에서 그래픽 디자인과 도시계획을 전공한 Steiner는 1975년 당시 생태적 조경계획의 거장 Ian McHarg에 매료되어 펜실바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생태적 계획가로서의 눈을 뜨게 된다. 박사학위 취득후 그는 Washington State University에서의 교수생활을 시작으로 University of Colorado at Denver를 거쳐 Arizona State University에서 학과장(Director)으로 활동하며 조경 및 도시계획 프로그램의 활성화와 지역사회 발전에 노력해왔다. 특히 지난 1997년 안식년에는 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Rome Prize Fellowship에 선정되어 로마의 생태적 계획에 관해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2001년 Steiner는 12년간의 애리조나 생활을 접고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이하 UT) 건축대학 학장으로 새로이 부임했다. Steiner의 학장부임은 전통적으로 건축분야의 입지가 강한 이곳 UT에서는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부임후 Steiner는 건축과 도시계획, 조경 분야의 밀접한 커뮤니케이션을 줄곧 강조해왔으며 지난해엔 UT 건축대학내 처음으로 조경학 석사과정 프로그램을 개설해 화제를 모았다. 미국 대부분의 주립대학들이 재정문제로 유래없는 어려움을 겪고있는 데다 일부 대학에선 조경 및 도시계획학과들의 축소 또는 폐지가 화두로 떠오르는 마당에 Steiner의 조경학과 대학원 과정 개설은 미국 조경분야에서도 매우 고무적인 일로 평가되었다. 도시계획과 건축의 가교역할을 맡게 될 조경프로그램은 많은 교수들의 지지속에 개설, 지난해 첫 석사과정 신입생을 모집했으며 오는 가을 Harvard 대학의 Hasbrouck 교수를 비롯, 새로운 교수진들의 가세로 프로그램이 더욱 활성화될 전망이다. 김 진 오 Kim, Jin Oh ·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도시 및 지역계획 박사과정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잘츠부르크의 정원
    오스트리아의 서쪽 끝에 위치해 독일국경과 접하고 있는 잘츠부르크(Salzburg)는 모짜르트와 음악의 도시로 유명한 곳이며 또한 뮤지컬 영화 "Sound of Music"의 무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상깊은 도시이다. 잘츠부르크(Salzburg)는 "소금의 성"이란 뜻으로 아직도 부근에서는 암염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잘츠부르크와 접하고 있는 독일의 국경도시인 베리히테스가든에는 지금은 생산이 중지된 암염광산이 관광객들에게 특별한 구경거리로 제공되어 지고 있다. 잘츠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독일국경과 오스트리아 국경이 접하고 있는 지역은 휴양지로 외국인뿐 아니라 내국인도 많이 방문하는 유명한 관광지역이다. 보통 잘츠부르크를 방문하면 구시가지의 대성당이나 모짜르트의 생가 등 잘 알려진 관광지만을 방문하게 되는데 다음에 소개하는 두개의 공원도 꼭 찾아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미라벨 궁전 (Schloβ Mirabell)의 정원 관광지들이 모여있는 구시가지를 벗어나 잘츠부르크 시내를 관통하여 흐르는 잘츠아흐강을 건너 5분정도 걸으면 미라벨 궁전의 정원에 이르게 된다. 이 정원은 유명한 음악학교 잘츠부르크 모짜르테움과 바로 접하고 있어 이 학교의 정원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1606년 잘츠부르크성 밖에 조성된 이 정원과 궁전은 당시의 대주교였던 Wolf Dietrich von Raitenau에 의해 자신의 정부였던 Salome Alt와 그 사이에 태어난 15명의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원래는 Altenau 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대주교였던 Markus Sittikus가 과거의 이러한 사실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없애버리려고 Mirabell로 궁정과 정원의 이름을 고쳐지었다. 김 인 수 Kim, In Su 환경조형연구소 그륀바우 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도시환경과 공공미술의 경계에서[1]
    - 건축물 미술장식 개선방안을 보는 小姑 - 올 하반기부터 퍼센트법(percent for art ordinance)에 근거한 1만㎡ 이상의 신축, 증축건물에 적용되어 온 건축물 미술장식 설치제도가 공공미술(Public Art)기금으로 대납 할 수 있게 될 예정이다. 또한 현행상 민간건축에 주로 해당 되었던 관련법규의 대상 적용범위도 그동안 제외되었던 공공기관에 대해 건축비의 1%이상을 의무적으로 시행하게 될 전망이다. 이는 1982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약 21년 동안 몇 차례의 미술장식관련 제도개선 중 도시환경과 문화환경의 총체적 계획을 한 단계 향상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변화의 가치가 두드러진다. 이에 화자는 앞으로 3回에 걸쳐 첫째, 도시계획과 건축물, 환경디자인과 조경공간에서 우리나라 공공미술(미술장식을 포함한)의 현 위치를 재조명하고 둘째, 앞으로 전개될 미술장식 개선안에 따라 street furniture, 조경시설물 등이 미술장식 종류에 해당되어 공공미술 범주가 종합적인 환경 디자인개념으로 확대됨에 앞서 국내와 해외의 사례를 비추어 우리가 추구해야 할 美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셋째, 현대공공미술과 현대조경의 경계에서 새롭게 시도 되는 참신한 작품세계를 소개하여 보다 독창적이고 다양하게 전개 되어야 할 오픈스페이스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건축물 미술장식의 개요 1930년대 미국과 프랑스에서 시작된 공공미술제도는 건축과 조경, 조형물의 종합적인 환경디자인으로 자리잡은 가운데 라 데팡스와 같은 아름다운 삶의 질적 향상을 이루는 도시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50년대 戰後로 폐허화 된 땅에 친환경이나 친인간이란 개념이 배제 된 채 도로와 상가가, 공장과 학교가, 연립주택과 공원(공터라 함이 맞겠다)이 개발명분 아래 조속으로 재건되었고, 1970년대 후반에 도시계획에 따른 삶의 환경이 변화 되었으며, 1980년대 문화향수와 도시디자인에 대한 의식과 더불어 1982년에서야 도시문화환경 개선과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건축물 미술장식제도가 마련되었다. 초기에는 문예진흥법에 의해 실행되었으나 건축법시행령과 건축조례가 뒷받침되지 않아 법적 효력이 없는 권장사항이었다. 이후 1984년,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건축법시행령에 근거조항을 마련하여 건축과 소관의 의무조항이 되었다. 1995년 이후로 문화과 소관으로 위임되었으며 현재는 이 제도의 결과로 어느 나라, 도시와도 비교 할 수 없는 수많은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 고층으로 늘어 선 도로에 서면 어느 신문기자의 이란 냉소적 키워드처럼 정렬이라도 해 놓은 듯 일정간격으로 조형물이 기립하고 있으며, 이제는 그 어느 곳도 조형물이 없는 거리는 찾아 보기 힘들다. 결국 이번 미술장식 제도의 개선은 1997년 건축비용의 일정 퍼센트 미술품 설치를 의무화 한 법령이 민간의 자율적인 활동을 제약 한다는 판단으로 공정거래위원회 산하 [규제 작업단]의 규정삭제 혹은 완화에 대한 요구가 시발점이 되었으며, 현 제도의 말 많고 탈 많은 운영실태 및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문화체육부에서 한국문화정책개발원에 [건축물 미술장식 실태 및 개선 방안]을 연구, 의뢰하게 된 결과이다. 심 현 주 Shim, Hyunjoo · needland 조형자문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소와 생-클루
    Sceaux & Saint-Cloud Le Notre의 Sceaux와 Saint Cloud 소가 있는 부지는 1597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곳을 루이 14세의 재무 대신인 콜베르가 소유하게 되었고, 르 노트르가 정원을 설계하였다. 노트르는 성과 교차하여 만나는 두 개 축의 소로를 구상하였다. 하나의 축에는 경사지를 거쳐 내려오는 캐스케이드를 조성했다. 노트르의 초기 설계안은 이와 평행하는 대규모 수로를 구상했다. 그러나 전임자인 푸케가 보르 비 콩트를 너무 화려하게 만들어 실각한 것에 겁을 먹고, 당장 실현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후 그의 아들인 마르케스 드 시녀레이가 대규모의 수로를 완공하게 된다. 소의 단순하고 간결한 매력은 어찌 보면 지나친 화려함을 배격한 콜베르의 우려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1677년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대본작가인 필립 끼노는 소의 수수한 매력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소의 아름다움은 결코 거만하거나 화려하지 않은데 있다. 주인의 사례 깊은 겸손함과 고귀함의 균형 감각이 정원에 잘 나타나 있다. 16세기말 피렌체의 대주교인 곤디가 생-클루 터에 건축물과 정원을 조성하였다. 그 후 1658년 루이 14세의 동생인 필립 오르레앙이 이 곳을 차지하게 된다. 오르레앙은 건축가인 르 포트레에게 생-클루의 건축을 맡긴다. 몇 년 후 노트르가 정원을 재설계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일의 시작 무렵에 노트르에게 주어진 과제는 캐스케이드의 설계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1965년 방문한 이태리 조각가인 베르니니는 캐스케이드가 보다 자연적인 모습을 띠어야 한다고 자문하였다. 그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르노트르의 설계안은 이태리풍의 전원형 캐스케이드를 구상하나 실현되지 못한다. 정원의 캐스케이드는 건축가 포트레에게 맡겨졌고, 나중에 망사르가 화려하게 개조하였다. 전원풍이 아니라 화려한 바로크적 건축양식의 캐스케이드가 만들어졌다. 아마도 이 때 노트르도 자존심이 조금은 상했나보다. 몇 년이 지난 1679년 그는 루이14세의 명을 받아 이태리를 방문한다. 방문 목적은 베르니니에게 일을 맡긴 루이14세의 기마상을 작업 진척을 점검하는 것이었다(후에 베르니니의 작품은 루이14세의 취향에 맞지 않아 베르사이유의 스위스 호수에 설치하였다), 노트르는 프랑스로 돌아온 후 "이태리인들은 정원예술에 전적으로 무지합니다"고 말했다한다.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이태리방문 후에 설계한 마리의 캐스케이드 디자인에서는 이태리풍의 영향이 발견된다. 위대한 디자이너도 가끔씩은 곁눈질하곤 하나 보다.조 경 진 Zoh, Kyung-Jin 서울시립대학교 건축도시조경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르 꼬르뷔제의 찬디가르 신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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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꽃과 함께하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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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 이스파한(1)
    -회교의 화려한 정원문화를 꽃피운 정원도시 -이란(Iran)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도시 중의 하나인 이스파한(Isfahan)은 회교의 화려한 정원문화를 꽃피운 정원도시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인 이스파한에서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줄지어 늘어선 플라타너스(Platanus orientalis L.) 가로수였다. 플라타너스는 단순한 가로수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스파한의 중앙대로에 해당하는 남북방향의 ‘차하르 바그로(Chahar Bagh Avenue)’는 양쪽으로 난 차도(車道) 중간에 보행자 전용의 인도(人道)가 있다. 차하르 바그로는 차량이 통행하는 주간선도로의 역할과 함께 도시의 남북을 잇는 거대한 녹지축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도로공원(道路公園)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이 도로는 사분원의 형태를 지닌 작은 정원들을 연속적으로 이어 가면서 도시의 거대한 녹지축으로 전개시켰기 때문에 차하르 바그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나무와 숲이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물이 충분해야 한다. 사방으로 연결되는 플라타너스 가로수 옆으로는 물을 공급하는 수로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요즘 용어로 ‘그린 네트워크(Green Network)’와 ‘블루 네트워크(Blue Network)’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곳에서 수로로 연결되어 나무에 공급되는 물은 모두 이스파한의 젖줄인 자얀데강에서 나온다.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이슬람건축의 자취를 차하르 바그로에서 찾을 수 있다. ‘종교학교(宗敎學敎)’인 ‘마드라사(Madrassa of Shah’s Mother)’가 바로 그것이다. 사파비왕조의 마지막 왕인 후세인(Hussein)이 1704년에서 1714년에 걸쳐 축조한 것으로, 요즘의 신학대학에 해당하는 마드라사는 학생들이 거처했던 방이 150개에 이를 정도의 거대한 규모였다. 이곳에서는 이슬람건축에서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을 연결하는 기법이나 건물의 마감기법 그리고 정원의 조성원리 등을 쉽게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신정일체(神政一體)를 주장하는 엄격한 율법국가(律法國家)도 자본주의의 물결에는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근엄하게 이슬람교리를 가르쳤던 마드라사의 일부는 현재 ‘압바시 호텔(Abbasi Hotel)’로 개조되어 있다. 동서방향으로 도시를 가르는 자얀데강에는 현재 11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다. 이 다리들 중에서 5개는 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풍스런 다리들인데, 12세기로 추정되는 ‘폴레 샤레스탄(Pol-e Shahrestan)’ 즉 ‘샤레스탄다리’가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현재 사람들의 통행만 허용되는 이러한 유서깊은 다리들은 강과 어우러져 대단히 운치있는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꽃밭과 수림대가 조성된 강변의 둔치에는 특별한 시설을 설치하지 않고 주로 산책이나 휴식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는 중앙대로인 차하르 바그로에서 바로 연결되는 ‘시오세 폴(Si-o-se Pol)’즉 ‘시오세다리’이다. 압바스 1세가 1602년에 축조했는데 폭은 14m이고 길이는 160m이다. 벽돌을 쌓아 2층 구조의 다리를 만들어 1층은 전통 찻집으로 활용하고 있고 교각은 아름다운 아치(Arch)형상을 취하고 있다. 교각은 33개의 아치로 연결되는데 다리의 이름인 ‘시오세(Si-o-se)’는 아치의 개수인 ‘33개’에서 유래된 것이다. 자얀데강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고 알려진 이 다리를 건너면 강변의 풍광이 아치 사이로 드러났다 숨겨지고 숨겨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한다. 하얀 포말을 곳곳에 드러내며 흐르는 강물에는 먹이를 찾아 모여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이름모를 새들이 나래를 펼치고 있다. “사람과 새가 함께 하는 생태하천이 바로 이런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만난 시오세다리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음산하다고 할까? 황홀하다고 할까? 아니면 신비롭다고 할까? 그도 아니면 환상적이라고 할까? 묘한 느낌의 불빛에 비춰진 다리의 야경은 적절한 수식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시오세다리와 함께 이스파한을 대표하는 다리는 ‘폴레 카쥬(Pol-e Khaju)’ 즉 ‘카쥬다리’이다. 압바스 2세가 1650년에 축조했는데 폭은 12m이고 길이는 160m이다. 시오세다리와 같이 벽돌을 쌓아 2층으로 다리를 만들었는데, 다리는 수량을 조절하는 댐(Dam)의 역할을 겸하기도 했다. 강 철 기 Kang, Cheol Gi 경상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켄 스미쓰
    Ken Smith, Principal, Ken Smith Landscape Architect Medium of the Craft 켄 스미쓰 사무실은뉴욕 맨하탄의 다운타운에 위치한 조그만 규모의 스튜디오형 설계사무실이다. 하바드 대학 졸업후 피터 워커 (Peter Walker)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마싸 슈왈츠(Martha Schwartz),데이빗 마이어2(David Meyer)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각자의 성을 딴Schwartz Smith Meyer Inc.라는공동사무실을 시범적으로 운영하기도 하였다.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한 이 사무실은 오래가지 못했고 92년 자신의 사무실을 운영하기위해 뉴욕으로 옮겨왔다. 토론토에 위치한 요크빌 공원 (The village of Yorkville Park) 국제 설계 컴피티션 당선과 이공원의 완공으로 96년 미국 3조경가협회(ASLA)에서주어지는 President’s Award of Excellence 를 수상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켄 스미쓰는 조경을 예술의 형태로 실천하고 또한 현대문화를 반영하는표현수단(Medium)으로써 조경을 연구한다 .(“I practice landscape as an art form and explore landscape as an expressive medium reflecting contemporary culture”) 그는 특히 도심속의 버려진(abandoned) , 이용되지 않는(unused), 혹은 여백의(maginal)공간에 관심이 많은데, 대도시에서 흔히 존재하는 이러한 공간들은 조경에 대한 자신의생각들을 실천해 볼수있는 공간적 기회를 제공하며 이것은 거대한 도시 인프라와 다양한 민족의 일상적인 삶이 혼성된 뉴욕에서 독특한 실험적인 조경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무실에서는 조경을 주제로한 설치미술 (Landscape Art Installation)프로젝트도 함께 진행되며 갤러리에서의 전시가 많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조경이 대중들에게 예술 작품으로서 좀더 가까이 접근할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켄 스미쓰 사무실은 항상 처음보는, 아니면 어디선가 보았지만 조경의 재료로 쓰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각종 재료들로 가득차 있다. 실제로 프로젝트 시작단계 부터 재료에 대한 리서치가 이뤄지고 수집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데, 이는 보통, 공간 디자인이 먼저 이뤄지고 재료의 선정이 마지막 단계까지 유보되는 일반적인 프로세스에 비하면 사뭇 다른 점이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자유로운 상상의 콜라쥬를 시작으로 모형 제작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사이트 모형에서 실제크기의 오브제 모형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변화는 항상 새로운 발견과 함께 디테일 처리에 큰 도움을 주며, 더욱이 클라이언트나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디자인에 대한 확신을 준다. 또한 켄 스미쓰는 조경과 패션디자인은 그 프로세스나 표현방법에 있어서 유사한 점을 인식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찾고자하였고 그것은 설계 과정에 신선한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다양한 패브릭 재료, 박음질,마감처리등이 관심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프로젝트에 상당부분 응용 되었다. 켄 스미쓰의 클라이언트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은 재미가 있다. 벽면을 가득 매운 아이디어 콜라쥬와 차근차근 풀어가는 이야기와 함께 테이블 위에 하나씩 꺼내지는모형들의 조립으로 나중에는 분위기를 압도한다. 그는 어떤 프로젝트건 평범함을 절대로을 싫어하는 성격이며 스스로 직접 만들기를 무척 즐긴다. 벽 뒤편에서망치소리에 전기톱 소리가나서 가서보면 뚝딱하고 스트럭쳐 스터디 모형을 직접 만들고 있는 모습등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금요일 오후면 맥주를 들고 방문하는 인근의 예술가,건축가,사진작가들과의 유쾌한 교류가 사무실을 항상 활기차게 만들기도 하며 99년 한국을 방문한 이후론 부인과 함께 김치 애호가가 되어 뉴욕의 한국 식품점을 자주 찾곤한다. 현재 뉴욕 건축위원회의 위원,하바드대학의 디자인 크리틱으로, 그 외에도여러대학의 스튜디오를 맡아 실무와 강의를 병행하고있다. 최근엔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와 함께 월드 트레이드 센터 설계 컴피티션에서 최종2안의 경합까지간 스카이 가든 (Sky Garden)4을 제안하였고, 55 워터 스트릿 플라자(55 Water Street Plaza) 국제 설계 컴피티션 당선, 산타페 철도공원(Santa Fe Railyard Park) 국제 설계 컴피티션 당선, 뉴욕 현대미술관 옥상 정원 (MoMa Roof Garden), 타임워너 센터 환경설계(Aol-Timewarner Center),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9.11 메모리얼 ( American Express 9.11Memorial)등이 진행중이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전통조경, 현대조경 하듯 합시다
    경복궁, 그리고 문화재 보존의 국가적 사업에 대한 생각들 조선총독부청사를 해체하던 일은, 일제잔재를 없애며 동시에 경복궁 일대의 대대적인 문화재복원사업의 단초로 떠오른 일이었다. 국가적인 사업이자 민족적인 대원(大願)의 일이었을 것이지만, 나는 그 일에 대해 좀 어긋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총독부청사 해체 사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너무 복원하는 일에만 매달려 추진되는 것처럼 보이던 것도 못마땅했다. 후자의 일 때문에 전자의 생각이 든 것이므로 결국 둘은 하나로 귀착된다. 즉 철거와 복원으로 치닫는 일사천리의 사업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놓고 나의 의견을 이야기할 기회나 장소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나서서 무슨 이야기를 하기 좋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들여다보지도 않았을 논문 하나를 덜렁 내놓은 외의 어떤 의견도 공식화된 적은 없었다. 경복궁 복원과 맞물려 조선총독부청사 해체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을 때, 사실 논의가 아니라 무조건 찬성하고 있어야 하는 분위기였고, 그 일을 반대했다가는 친일파 신세가 되기에 딱 좋은 분위기였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 중략 - 조선총독부청사의 건축물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라거나 일제 잔재를 없애야 하는 것이라는 등의 찬반 의견들이 있을 수 있지만, 무슨 한 가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두루두루 연관된 일을 냉철하게 살피고 선후를 가려 일을 추진해야 할 일이다. 대상의 규모나 영향력이 클수록 선후와 주위를 세심히 살펴야하는 일은 제곱비로 증가하는 법이다. 총독부청사 해체문제는 광화문의 처리와 관련되고 광화문의 처리는 세종로 문제와 이어지며 세종로 문제는 서울 사대문의 도시경관과 무관하지 않게 되어있다. 아무도 공개석상이나 매스컴에서 광화문 문제를 거론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과 맞물려 참으로 많은 사연을 간직한 구조물이었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 청사건립이 구체화되고 있었을 즈음, 광화문은 헐려나갈 참이었다. 다행히 행동하는 일인(日人) 지식인의 호소에 의해 겨우 되살아나 지금 국립민속박물관 전용 출입문이 있는 곳으로 옮겨 놓았었다. 그리고 6.25를 겪으면서 지붕이 날아간 채 석조의 홍예부분이 앙상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1960년대의 모습이었다. 그 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왔다. 1970년대였다. 당시 유행하던 방법을 따라 시멘트 콘크리트 방식으로 문루도 복원되었다. 원 자리에 옮겨온 것이 아니라 중앙청으로 사용되던 총독부청사 바로 앞에 반듯하게 건립되었다. 세종로에서 광화문을 보면서 진행할 때 세종로와 축이 맞아 총독부청사와도 잘 균형이 맞게 자리 잡은 것이었다. 원래 자리로 가게 되면 세종로 축과도 총독부청사와도 반듯하게 어우러지지 않게 되어 있었다. 즉 총독부청사는 정남향을 하였고 세종로는 그 축 방향으로 반듯하게 나 있다. 경복궁의 주축은 약 4도 가량 튼 방향으로 앉아서 남대문과 관악산 정상부를 향하게 되어 있다. 총독부청사는 경복궁을 가려놓고 있으면서 세종로와 어긋난 부분을 차폐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일이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현재의 광화문의 간략한 내력이다. 한창 총독부청사 해체문제가 거론되고 있던 즈음 어느 TV 방송사 뉴스에서 청사해체와 근정전 일곽의 복원이 이루어졌을 경우를 시뮬레이션 한 모습을 비쳐주면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었다. 눈 깜짝할 만큼의 순간처리로 슥 지나가긴 했지만 세종로 일대와도 반듯하게 조감되어 있었다. 약간의 눈속임이었든지 별 생각 없이 미숙하게 처리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강의시간에서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해주면서 ?장차 여러분들의 몫?임을 강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총독부청사를 해체하고 근정전 일대를 원형으로 복원하려면 광화문까지 이어지는 부분으로 계속 확대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지금 현재의 세종로와의 축의 문제와 이 일대의 도시경관 차원에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충분히 검토한 종합계획으로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었다. 어도와 맞지 않는 광화문을 놓고 나눈 두 남자의 이야기. 이제는 누구에게나 그런 모습이 훤히 들어나게 되어 있다. 어떻게든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할 일이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네덜란드의 진주, 헤트루 궁전과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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