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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조경수리기술자 시험정보(1)
    문화재조경수리기술자 시험정보 본지는 2000년의 조경기사·기술사 시험정보, 2001년의 실내조경기사 시험정보 소개에 이어, 이번호부터 문화재조경 수리기술자 시험에 관한 정보를 소개한다. 이번호는 그 첫 번째로 문화재조경 수리기술자 시험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가 소개되고, 다음호부터는 기출문제를 중심으로 한 과목별 출제경향이 소개될 예정이다. 관심 있으신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 편집자 주 - 1. 시험자격 문화재보호법 제18조의 3의 결격사유(미성년자, 금치산자 또는 한정치산자, 파산자로서 복권되지 아니한 자)가 없어야 함(기준일:최종합격자 공고일) 2. 시험과목 : 5과목 문화재보호법, 한국사, 조경사, 전통조경, 조경설계 및 시공 3. 과목별 출제 형식 객관식 : 문화재보호법, 한국사, 조경사 (과목별 25문항 총 75문항) 논술식 : 전통조경, 조경설계 및 시공 (과목별 논술형 1문항, 서술형 2문항) 4. 과목별 출제범위 가. 문화재보호법 :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시행규칙, 문화재전문위원회 규정 나. 한 국 사 : 선사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사 전반에 걸쳐 출제 되며, 시사성 있는 사항 정리 (유물, 유적 발굴사항) 다. 조 경 사 : 한국조경사는 원시시대부터 근세까지 자세하게 정리 서양조경사와 동양조경사 의 대강 라. 전 통 조 경 : 궁궐조경(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안압지), 별서, 서원, 사찰, 능원, 민가조경을 사례별로 특성을 정리 마. 조경설계및시공 : 일반 및 문화재공간의 설계 및 시공 전반 5. 시험시행 · 시험일정 발표는 9월 초순경 대한매일(구 서울신문)에 공고/ 2001년도는 9월 7일 공고됨 · 1차 시험은 10월 넷째 주 일요일 (2001년도는 10월 28일)( 장소 : 대전시 ) · 시간 1교시 : 09 : 00 ∼ 10 : 20 (80분) → 문화재보호법, 한국사, 조경사 2교시 : 10 : 30 ∼ 12 : 40 (130분) → 전통조경 중 식 : 12 : 40 ∼ 13 : 40 (60분) 3교시 : 13 : 40 ∼ 15 : 50 (130분) → 조경설계 및 시공 · 2차 시험은 1차시험 6주일후에 시행 (2001년도의 경우 12월 14일 시행 / 장소 : 문화재청 - 대전3청사) · 면접내용 : 전문지식 및 응용능력, 역사 및 문화재에 대한 이해, 문화재 수리기술자로서의 사명감 및 역할에 대한 인식 · 최종합격자 발표는 2차 시험후 10일 뒤 (2001년도의 경우는 12월 26일 ) 문화재 조경 수리 기술자 시험에 대하여 문화재 조경 수리 기술자 시험은 문화재청 주관으로 1981년에 처음 시행되었고, 매년 1회 실시되고 있다. 합격자는 매년 평균 7∼8명 정도이나, 2001년에는 1명만이 합격하였다. 작년까지 합격한 기술자는 총 87명이며, 대부분 조경시공회사와 설계사무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 문화재조경업체(문화재수리기술자)가 참여하고 있는 대표적인 공사를 살펴보면, 현재 진행중인 경복궁내 태원전 복원 조경공사가 시공 중에 있고, 작년에는 창덕궁 후원 반도지의 복원을 위한 실측설계를 문화재조경기술자가 있는 조경설계업체가 주도하여 완료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기타 지방자치단체에서 문화재보호구역내에 조경공사를 시행하고 있다. 문화재 조경업을 하는데 필요한 인력은 문화재수리조경기술자와 문화재수리조경기능자 각 1명이 있어야 하며, 매년 1월말에 문화재청에서 등록을 받고 있는데, 현재 등록된 업체는 대략 20여개 업체 정도이다. 문화재 조경 수리 기술자 시험은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맞이하여 선조들의 소중한 문화유적을 보존 및 복원하고 전통조경공간을 조성하는데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ocp.go.kr
  • 어제의 조경에서 21세기 환경조경으로
    어제의 조경에서 21세기 환경조경으로 미국 에너지성 에너지기술개발분과 도시열섬현상연구관련 홈페이지 저자는 도시환경계획과 정책을 전공한 조경가로서 도시환경문제의 해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시조경의 역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있다. 조경가는 과거에 단순히 한정된 공간의 미적인 표현을 위주로 한 계획이나 설계를 하여 왔다. 하지만 현재 도시화와 이에 따라 수반된 각종 환경문제를 고려한 조경계획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조경가의 역할도 전통적인 계획이나 설계에 의한 미적인 고려뿐만 아니라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계획 및 설계가 요구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 사람의 조경가로서 도시환경문제의 해결책으로 친환경적 도시조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본인의 경우 현재 조경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전문가들을 위해 환경계획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추천하고 싶은 사이트는 미국 에너지성 에너지기술개발분과(Environemtal Energy Technologies Division)의 도시열섬현상연구관련 홈페이지(Heat Island Group Home Page, http://eetd.lbl.gov/HeatIsland)이다. 이 사이트는 도시환경문제 중 도시열섬현상의 원인과 해결책을 연구하는 곳이다. 이 사이트를 소개함으로써 도시환경과 조경의 관계 및 21세기 조경의 역할에 대해서 한 번 검토해 보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도시열섬현상의 원인과 문제점 더운 여름에 도시 한 복판에 서 있으면 도로와 건물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야간에도 도시외곽 지역이 빠르게 기온이 내려가는 것에 반해, 도시 내부에서는 도로와 건물 등에 축적된 열이 지속적으로 뿜어져 나오게 되어 야간에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고 열대야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요즘 세계의 대부분의 도시들은 주변의 외곽지역보다 보통 1℃에서 4℃ 더 기온이 높다. 또한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고층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 중심지에서 인접한 교외 지역에 비하여 평균 기온이 최소 0.3℃, 최대 10℃가 더 높은 기온 현상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바로 도시열섬현상(Heat Island Phenomena, 이하 도시열섬)이다. 포장도로가 많은 도심 지역은 열을 보유할 수 있는 비율이 높아서 낮에는 시골 지역보다 태양에너지를 더 많이 흡수하고, 밤에는 시골 지역보다 열 배출량이 많기 때문에 도시의 대기기온이 시골 지역보다 높게 되는 것이다. 교외 시골 지역은 식물과 포장이 되지 않은 토양에 의해 태양 에너지의 대부분이 물의 증산작용에 의해 사용되기 때문에 공기의 온도는 올라가지 않는 것이다. 즉, 도심은 고층 건물과 도로들이 일몰 후 지표 복사 에너지의 대기 방출을 방해함으로서 기온이 계속 높으며, 난방 열에 의한 인공 열이 더해지는 겨울철의 밤에는 주변 교외 지역과 더 큰 기온 차가 나타난다. 이러한 도시열섬은 특히 여름철에 심각하게 발생하는데, 야간에 심한 불쾌 유발과 함께 에어컨의 사용 급증 그리고 도시 스모그 현상을 가중시킨다. 일반적으로 도시열섬의 원인은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자동차 배기 가스등에 의한 대기 오염과 도시 내의 인공열의 발생, 건축물의 건설이나 지표면의 포장 등에 의한 지표 피복의 상태 변화 그리고 인간 생활이나 산업 활동에 수반된 복잡한 요인 등을 들 수 있겠다. 도시열섬으로 인한 문제는 현재 도시환경문제와 직결하고 있다. 첫째로 전력소비의 증가이다. 여름철 기온의 심각한 상승에 의해 에너지 소비량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 에너지의 대부분은 에어컨에 의한 인공열에 의한 것이다. 또한 에너지 소비가 늘어난다고 하는 것은 화석 연료의 사용이 증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오염수준과 에너지 비용이 증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에너지성 에너지기술개발분과에 의하면, 100,000 이상의 인구가 있는 도시에서는 0.6℃의 온도가 올라갈 때마다 냉방 소비 전력이 1.5%∼2% 오른다고 한다. 미국의 주요 도시들의 온도는 지난 40년 동안 평균 1.1℃에서 2.2℃가 올랐고 이것은 여름에 냉방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미국의 전력 소비의 1/6은 냉방을 위한 것으로 일년에 40억불(52조원)이 냉방비로 쓰여지는 것이다. 두 번째로 스모그 현상 가중을 들 수 있다. 스모그는 광화학 반응에 의해 공기 중에 만들어진다. 이 반응은 높은 온도에서 더 많이 발생하고 활동이 더 강렬해 진다. 도시열섬에 의한 온도상승은 에어컨 사용을 증가시키고 이는 화석 연료 사용의 증가를 의미하는데 이는 오염 수준과 에너지 비용을 증가시키며 이 오염의 증가는 스모그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높아진 기온에 의해 그 영향은 더욱 크게 증폭되는 악순환의 연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로스엔젤리스에서 기온이 21℃ 이하 일 때는 스모그의 형성은 일반 평균 보다 낮다. 그러나 21℃ 이상의 온도에서는 0.6℃ 오를 때마다 스모그는 3% 증가하며 기온이 35℃ 일때는 스모그가 아주 많이 증가한다. 로스엔젤리스의 도시열섬현상은 오존 레벨을 10-15% 상승시키며 이로 인해 수백만 달러의 의료비가 지불되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건강상의 심각한 위해(危害)를 가져온다. 1995년, 시카고에서는 도시의 높은 기온으로 인해 700명의 노인들이 사망하였다. 도시열섬으로 인한 기온의 상승은 에너지 사용 증가뿐만 아니라 인간의 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여름밤의 더운 날씨는 낮 동안에 사람들이 받은 열 스트레스를 가라앉혀 줄 수 없다. 그 결과, 도시에서 사망률은 열파동(Heat Wave)의 최고점에서 가장 높다. 예를 들면, 미국의 도시에서는 공격적인 행동(거리 범죄, 폭동 등)들이 더운 날씨에 증가한다는 것이다. 최근의 호주에서의 연구 또한 공격적인 행동과 더운 날씨는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도시열섬현상으로 인한 오존농도의 증가는 눈을 자극하고 폐에 염증과 천식을 일으키며 세균에 대한 면역력을 저하시킨다. 대기 오염으로 인해 로스엔젤리스에서는 매년 건강과 연관된 비용으로 30억 불이 지출된다고 한다. 김 수 봉 Kim, Soo bong · 계명대학교 환경학부 환경정책전공 책임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조경설계프로그램(12) - Masterplan 및 판넬만들기(1)
    시작하며 하얀 종이가 놓여있다. 조심스레 연필로 끄적인다. 선을 찾고, 형태를 만들고... 겹겹이 쌓인 낙서들이 정리되면 하나, 둘씩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지금 곱게 색을 입히려한다. AutoCAD 2000으로 작업된 도면이 생각을 정리해주었다면 Photoshop 6.0 은 정리된 생각의 골격에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기본명령어] 에서는 옷을 입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바지는 어떻게 입고 셔츠는 어떻게 입는지... 이번 호부터 다루는 [Masterplan 및 판넬만들기]에서는 옷을 폼나고 멋지게 입는 코디방법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cad 도면 layer 정리하기 photoshop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cad 도면의 layer가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적어도 line, text, tree symbol 등으로 layer가 구분되어 있어야 한다. text와 tree symbol 같은 경우는 위치정보 값을 위한 것이지만, line은 영역을 선택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므로 반드시 구분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layer 정리 외에도 최종으로 작업된 cad도면을 photoshop에서 masterplan을 작업하는데 필요한 도면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hatch 나 포 장패턴 등 오히려 세부적으로 표현된 부분들을 삭제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지나치게 자세한 표현들은 오히려 영역을 선택하는데 번잡할 뿐이다. 가령 line 속성을 지닌 layer는 차도, 보도, 포장경계면, 시설물 등의 외곽 경계정도의 정보값만 있으면 된다. EPS 파일 cad 도면의 layer 정리를 마치면 eps 파일로 출력을 하여 photoshop에서 불러들이면 된다. eps 파일 출력은 [AutoCAD2000 인쇄]에서 다루었던 내용이므로 간단히 설명하면, Adobe사에서 만든 출력파일이다. AutoCAD에 plt 파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신 eps 파일은 종이에 바로 출력하기 보다는 다른 프로그램에서 활용하기 위해 파일로 출력하는 것이다. ① 출력크기와 Resolution eps 파일을 불러들일 경우 파일의 출력크기, resolution, mode, anti-aliased 등을 설정해야하는 데, 우선 파일의 출력크기와 resolution은 생성되는 파일의 용량 크기를 설정하므로 작업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즉, 최종으로 작업된 masterplan을 A1, A2 등 어떤 크기의 출력물로 인쇄할 지를 고려하여 크기를 설정해야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A1(841*594)일 경우에는 resolution을 72∼100 pixels/inch 정도로 설정하면 작업시간 뿐만 아니라 최 종 출력물의 해상도도 보장받을 수 있다. 출력 해상도에 지나치게 고려하여 150 이상으로 설정할 경우, 말 못한다고 컴퓨터에게 과중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해상도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A1일 경우 100 pixels/inch 나 150 pixels/inch 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knowhow : A1 size, resolution 72 pixels/inch = A3 size, resolution 150 pixels/inch) ② anti-aliased anti-aliased는 [기본명령어]에서도 잠깐 다루었지만 영역의 선택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anti-aliased가 check 된 상태에서 파일을 불러들일 경우, 이미지 크기 100%에서 보면 선이 부드럽고 깨끗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영역을 선택하는 데 있어 중복되어 불리하다. 그러나 anti-aliased가 check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선이 거칠게 보이기는 하지만 영역을 선택하는데 매우 유리하다. (knowhow : 같은 eps 파일을 anti-aliased가 check된 상태에서, check되지 않을 상태에서 불러들인 후, 영역을 선택할 시에만 사용한 후에 마지막 출력 시 check된 상태의 이미지를 layer on / checke되지 않은 상태의 이미지를 layer off 하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③ eps 파일 불러오기 eps 파일을 photoshop에서 불러들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place]명령과 [ctrl+shift+마우스 왼쪽버튼]을 이용하여 불러들이는 방법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place 명령은 각각의 layer 별로 출력된 eps 파일을 하나의 image 파일로 불러들이는 방식이고 ctrl+shift+마우스 왼쪽버튼은 layer별로 각각의 eps 파일을 불러들인 후, 하나의 image 파일로 만드는 방식이다. 두 방식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영역을 선택하는 데 있어 큰 차이가 있다. place 명령은 eps 파일을 anti-aliased가 check 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러들인 후, [MENU BAR의 FILE / PLACE]를 실행한다. 그러면 기존에 불러져 있던 eps 파일에 새로운 layer로 eps 파일이 삽입된다. ctrl+shift+마우스 왼쪽버튼 방식은 실제적인 open 방식이 아니고 layer copy 방식이다. image의 size가 동일할 경우 ctrl+shift+마우스 왼쪽버튼으로 layer를 다른 파일로 복사하면 정중앙으로 복사되는 것을 응용하는 것이다. 즉, 각각 eps를 불러들인 후 ctrl+shift+마우스 왼쪽버튼으로 layer를 복사하여 하나의 파일로 만드는 것이다. 차이점은 place 명령을 통한 open 방법은 처음에 불러들이는 eps파일은 anti-aliased를 check 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러들일 수 있으나, 그 후에 place 시킨 파일들은 anti-aliased가 check 된 상태에서 불러들여지기 때문에 영역을 선택하는데 있어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나 , 후자의 경우 모든 파일을 anti-aliased를 check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러들인 후, layer를 복사하므로 영역을 선택하는 데 있어 매우 유리하다. 영역구분하기(Layer 나누기) eps 파일을 모두 불러들였으면 masterplan을 위한 기초 작업은 끝났다. 이제는 layer를 구분하여 영역을 선택하여야 하는 데 photoshop에서 영역을 선택하는 방법에는 marquee tool(M), lasso tool(L), magic wand tool(W) 등이 있다. 기능 및 방법은 [기본명령어]부분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생략하고, 여기에서는 magic wand tool을 사용한다. eps 파일을 불러들일 경우에 anti-aliased를 check 하지 않고 불러들이는 이유가 바로 magic wand tool를 사용하여 영역을 선택하기 위해서이다. 위의 그림과 같이 magic wand tool을 설정하고 eps layer에서 선택한 후, 미리 만들어 놓은 보행로, 차도, 데크와 같은 layer에 color 나 pattern을 입혀주면 된다. 이번호에서는 AutoCAD에서 작업된 도면을 eps 파일로 출력, Photoshop에서 불러들인 후, 선택하여 영역을 설정하는 masterplan을 위한 기초작업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기본이 되는 바지를 입고 셔츠를 입었으니 어디에 포인트를 주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볼 것이다. 선택된 영역에 pattern을 주고 effect를 통해서 멋진 악세사리를 달 수 있을 것이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조경공간에서 만나는 점토벽돌(3) - 점토벽돌의 다양한 활용방안
    e-매거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풍수사상과 입지선정(1) -주거환경과 풍수
    홍강, 풍수와의 인연 축축한 습기가 묻어져오는 1996년의 여름, 홍강 - 중국에서 발원하여 하노이시를 가로지르는 대단히 규모가 큰 강이다. 서울의 한강과 같은 모습으로 강폭이 2-3km에 이른다. 침식된 토사의 영향으로 항상 붉은 물이 흘러 홍강(Red River)이라고 부른다 - 의 둑 위에서 끝없이 펼쳐질 미래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밭과 습지, 벼를 재배하는 논들이 신도시로 적합한가에 대한 의문은 계속 되었다. 2,500만평 규모의 하노이 신도시 계획에는 한국의 대우를 포함하여 세계 최고의 설계회사들이 참여하였다. 미국의 Bechtel사와 SOM사, 일본의 Nikken Sekkei사, 네델란드의 OMA사 등으로 그 이름만 들어도 명성이 자자한 곳들이다. 이곳이 신도시의 적지임을 베트남의 최고위층에 설명하기 위한 자료를 준비하였다. 공항과 항구 그리고 도시가 Golden Triangle를 형성하는 곳, 기존도시와 접근성이 좋은 곳, 장애물이 비교적 적고 넓은 부지의 확보가 가능한 곳 등이 적지임을 설득하는 모든 것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만큼이나 지루한 설득과정이 이어져갔다. 홍수의 위험은 없는지? 다른 지역보다 좋은 이유는 무엇인지? 군사적 방어에 적합한 지역인지? 끝없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주기가 어려웠다. 여기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였다. 수천 년을 이어오는 동양의 도시입지는 어떻게 선정되었던가? 동양의 입지선정이론으로서 풍수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세계적인 설계회사들의 현대적 접근으로는 만족할만한 답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풍수연구의 의미 주거환경은 인간의 외부환경으로서 도시환경의 일부를 구성하며 인간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인간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지속시켜 주는 여러 가지 물리적 조건을 뜻한다. 주거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자연적 요소와 인위적 요소로 구분 할 수 있다. 특히 주거환경의 자연적 요소인 지형지세, 향과 일조, 미기후 등에 많은 영향을 주는 입지선정과 공간구성에 대해 그 동안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으나 한국의 전통사상 중 풍수가 주거의 입지(이하 "주거입지"라 함) 및 건축의 외부공간 배치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주거입지와 관련된 풍수의 연구는 단편적이고 편향된 풍수의 이론을 적용하여 연구되고 있거나 지형의 물리적 형태분석에 그치고 있어 한국의 주거입지가 갖는 풍수적 특성을 바르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 중의 하나는 주택의 입지선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이유로는 풍수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입지에 대한 해석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전통가옥의 안채공간은 대문과 안방, 대문과 부엌의 배치가 주역의 팔괘를 기준으로한 동서사택론에 부합하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월성 손동만 가옥) 조선시대의 주거건축 조선시대는 절대왕권을 전제로 한 전제군주국가였던 만큼 이에 부응하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사회적 지위는 물론 주택에 있어서도 신분제의 제약을 받게 되었다. 조선은 개국과 더불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땅이 한정되어 정 일품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계급에 따라 나누어 줄 집터[家垈]와 간수(間數), 장식을 제한하였다. 조선시대는 태조이래 유교를 정교의 최고원리로 숭봉한 결과 국민정신의 이상이 되고 조상숭배가 민간정신의 핵심이 되었다. 사회의 기본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그것도 가부장적인 가족으로 대가족제를 이루는 것이었다. 가부장적인 대가족제도는 하나의 주택 속에서 여러 대(代)가 모여 살게 되었고 특히 대가에서는 3대, 혹은 4대에 이르는 여러 식구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주택건축은 큰사랑, 작은사랑, 안채, 아랫채, 별당 등 여러 채[棟]의 건물들이 지어져 하나의 커다란 주택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숭유억불정책은 남존여비사상과 엄격한 남녀구별의식을 가져와 내외법(內外法)에 의한 공간분화가 이루어졌다. 즉, 안채와 사랑채의 구별, 안방과 사랑방의 구별, 내측(內 )과 외측(外厠)의 구별 등 같은 주택 안에서도 남녀의 공간을 따로 마련하였다. 한양으로의 천도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풍수사상은 주택건축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어 동족촌의 입지선정, 집터의 선정과 배치, 좌향(坐向)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본래 주거건축에 있어서 풍수의 적용은 택지의 선정에 한정된 것이었다. 땅의 길흉이 사람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하는 풍수의 관점과 방법으로 볼 때 건물 자체보다는 건물이 들어설 자리를 판단하는 일이 본래의 기능이었다. 조선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山川條)에는 진산(鎭山)風水的 觀點에서 마을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산으로 마을 뒤편에 위치을 명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입지 또한 사신도(四神圖)의 기본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읍지에 수록된 강계, 산천, 형승조 등의 항목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물리적 형상물을 서로 통합하고 유기체적인 관계를 이룬다는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는데, 이러한 환경인식은 홍만선의 산림경제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풍수사상에 입각한 마을의 포치모습은 소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으로 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앉아서 앞에 경작지와 명당수(明堂水)로서의 생활하천을 마주하는 형태이다. 이에 더하여 장풍득수형(藏風得水形)이 우수한 지형으로 선호되었는데 뒷산과 이어져 마을 주위를 좌우로 감싸고 맞은쪽의 경작지와 물을 건너 마주 보이는 산이 있는[北玄武, 南朱雀, 左靑龍, 右白虎]지형을 말한다. 한편, 주거건축물의 배치와 관련해서는 양택삼요론(陽宅三要論)에 따르고 있다. 삼요(三要)란 출입이 이루어지는 대문[門]과 주인이 거처하는 주실[主], 그리고 먹을 것이 만들어지는 부엌[ ]을 말하며, 이 세 가지를 주택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세가지 요소의 좌향과 배치관계를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주역(周易)의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권영휴 Kwon Young Hyoo 조경학박사, 조경기술사, 문화재기술자, (주)대우건설 부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동시대 조경 이론과 설계의 지형(9) - 공감각의 조경미학
    예술의 굴레, 화장술 조경 엘리자베스 마이어가 명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부지 분석과 디자인 표현 사이의 단절, 즉 환경적 가치와 형태 생성 사이의 단절" 은 동시대 조경의 가장 큰 환부 중 하나이며, 이는 곧 조경을 둘러싸고 있는 예술과 과학, 디자인과 생태학의 대립으로 치환될 수 있다. 최근의 이러한 대립 양상은 1960년대 말 이후 환경론의 대두와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동의 하나로 형성된 1980년대 이후의 조경예술(landscape architecture as art)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이 지점에 대한 정교한 분석은 이 지면의 영역을 벗어난다. 정작 이 글에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픽춰레스크의 진부한 낭만을 거부한, 광역 생태계획의 건조함에 도전한 조경예술운동의 성과가 아니라 그것이 노출해 온 난점들이다. 피터 워커와 마샤 슈왈츠로 대표될 수 있는 이러한 흐름의 한계는 지극히 형태중심적이라는 데 있다. 현대 미술의 언어를 적용하고 동시대의 문화적 감각을 조경에 결부시키고자 한 시도는 물론 긍정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시도가 겉모습의 복제에 그치고 있다는 점, 즉 종래의 디자인과 달라야만 한다는 강박증 내지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 한다는 "형태적 튀기 전략"의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자면 예술이라는 새옷에 감추어진 조경의 몸체는 결국 장식과 화장에 골몰했던 전통적인 조경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즉 동시대 조경 행위의 주류는 자연과 문화의 대화를 중개하는 "관계의 예술"이기보다는 예술이라는 허사로 포장된 미장원 내지 피부클리닉이라는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 "예술로서의 조경은 곧 눈에 보기 좋은 조경"이라는 등식을 거짓 명제라고 부정해 버리기 어려운 형편인 것이다. 조경미학의 비판적 앵글이 요청되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조경미학의 과제 중 하나는 가시적 형태 장식에만 치중해 온 화장술 조경을 극복할 수 있는 미학적 전략을 모색하는 데 있으며,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것에 접근할 수 있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 할애할 것은 그 다양한 경로 중 "지각"의 측면이다. 예술의 굴레 속에서 형태 중심의 화장술로 부유하고 있는 조경의 이면에는 "시각 중심적 지각"이라는 전통이 자리잡고 있다는 강한 의심, 그리고 그러한 단편적 지각 모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실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의 탐색이 뒤를 이을 것이다. ▲ james Corner/Field Operations, Lifescape, Fresh Kills(그림제공 : Field Operations 정옥주) 공감각, 삶과 경험의 확장 시각만을 통해 어떤 환경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체가 환경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고 환경이 우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에서 우리는 표면의 형식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시각은 환경의 미적 경험에 필요한 하나의 감각에 불과하다. 문화적 자연으로서의 환경에 참여(engagement)하기 위해서는 그 내부의 모든 상황을 포괄하고 연결할 수 있는 다른 감각들의 역할이 시각 못지 않게 중요하다. 개념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의 환경 경험을 기억해 보자. 멀리서 어떤 경치를 보는 것만으로 미적 경험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신체는 그러한 환경에서 환경과 함께 움직이며 그것에 따라 행동하고 반응하지 않는가? 우리는 눈을 통해 환경의 색과 질감과 형태를 파악할 뿐만 아니라 땅과 풀을 만지고 밟거나 바람과 물의 소리를 듣거나 고유한 어떤 냄새를 맡고도 환경을 파악하고 구별하지 않는가? 환경의 미적 경험을 설득력 있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시각에 비해 조명을 받지 못해 온 청각, 후각, 촉각, 근운동감각 등 여타 감각들의 가능성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환경의 소리는 생동감과 역동성을 가져다준다. 바람이나 파도 소리처럼 리듬이 있는 소리는 생명의 기본적 파동―심장의 박동과 호흡―과 비슷하다. 소리는 환경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성분이며, 따라서 귀를 통한 음의 지각은 환경의 미적 경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각 방식이다. 저급한 감각으로 여겨져 온 후각은 환경의 숨겨진 차원을 드러내 주며 우리의 감성에 영향을 준다. 사람마다 냄새가 다르듯이 환경의 냄새도 서로 다르다. 음식 맛도 냄새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듯이 환경의 냄새는 환경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촉각은 사물의 표면 결, 윤곽, 압력, 온도, 습도 등에 대한 지각을 담당하는 것으로, 환경의 특질을 파악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연을 만지며 즐거워하는 행위는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을 보장해 주지만, 우리는 주로 자연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연을 향유했다고 만족한다. 그러나 촉각은 가장 속이기 어려운 감각이며 인간이 가장 신뢰하는 감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또 하나의 감각은 근육과 골격 및 신체의 운동과 관련되는 근운동감각(kinaesthesia)이다. 근운동감각을 통해 우리는 신체 운동의 속도, 회전 각도의 정도, 방향 변화의 정도 등을 지각할 수 있다. 근운동감각은 정태적 자연 경험을 대치할 수 있는 생동감 있는 자연 경험의 전제 조건이다. 신체의 운동은 생명의 증거이다. 시각의 그림자에 묻혀왔던 청각, 후각, 촉각, 근운동감각 등 각각의 감각 영역에 주목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감각들이 환경의 경험에서 동시에 작동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른바 공감각(synaesthesia)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색깔을 연역하는 상황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공감각의 보편적 형식이다. 예컨대 음의 높이는 이미지의 밝기와 관련된다. 굵은 목소리, 드럼 소리, 천둥 소리 등과 같은 저음은 어두운 이미지를 느끼게 하는 반면, 아기의 울음 소리, 바이올린 소리, 소프라노 음 등은 희거나 밝은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음의 높이는 또한 이미지의 크기 및 형태를 연상시키게 한다. 고음은 작고 날카로운 각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저음은 어둡고 둥근 양감을 준다. 이처럼 우리의 지각은 단일한 감각 경로에 의존하기보다는 여러 감각의 통합적 기작을 통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 예술은 단일 감각에 의존해 왔다. 미술과 음악은 가장 전형적인 단일 감각형 예술이다. 이처럼 시각과 청각만이 고유의 예술 형식과 표현 언어와 기교를 가지고 있는 세련된 감각으로 여겨져 왔는데, 그러한 전통의 배경에는 시각과 청각을 이성의 활동과 관련되는 감각이라고 간주해 온 전통이 내재해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예술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고 지각할 때는 다른 감각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각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또 콘서트홀에서 교향곡을 감상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장소의 시각적 분위기, 연주자의 모습, 홀 내부의 온도, 옆 사람들과의 접촉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환경의 미적 경험과 지각은 예술의 경우보다 한층 더 총체적이며, 여러 감각들이 동시에 동원된다. 이런저런 이론과 개념을 떠나 실제의 경험을 생각해 보기만 하더라도, 환경에서는 하나의 감각―특히 시각―만이 상황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들이 동시에 개입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환경의 미적 지각은 "여러 감각 또는 모든 감각의 연합 작용에 의해 형성되며 모든 감각이 서로 관련된다." 보기, 만지기, 듣기, 냄새맡기, 맛보기, 근육의 움직임 등과 같은 복합적 지각 행위가 경험 과정에서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미학자 아놀드 벌리언트가 적절히 분석하고 있듯이, "환경의 경험은 단순히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 양태를 공감각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동시에 작용하는 감각들을 분리하여 분석하는 일은 시각에 대한 강조가 갖는 문제 이상으로 허구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감각은 한층 더 설득력을 지닌다. "환경 지각에서……공감각은 ……감각 양태의 혼합을 뜻한다.……환경 지각은 전체적이자 상호적인 인간의 감각 중추와 엉켜있다. 우리는 신체와 장소의 상호 침투를 통해 환경의 일부로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 개개인을 자연적·문화적 조건과 결합시키는 연속성을 지향해야 한다면 공감각에 대한 강조는 필연적이다. 공감각은 또한 "문화의 상상력"을 "지각하고 창조하는 새로운 방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마라 밀러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감각들을 배제한 시각 위주의 "이차원적" 환경 경험은 "환경에 대한 우리의 향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감각의 전체 영역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곧 환경의 미적 경험은 물론 우리의 삶을 확장시키는 의의를 지닌다. 공감각에 대한 인식은 환경이라는 미적 장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삶에 다양한 미적 경험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전환적 사고의 하나일 것이다. 배정한 Jeong-Hann Pae 조경비평가, 조경학 박사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뻬쩨르브르그- 에르미따쥐 박물관과 시민혁명으로 유명한 바로크식 도시
    이 도시는 바로크식 도시이다. 전제왕권 스타일의 바로크 건물로 지워진 도시이다. 바로크는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민주주의의 이념을 추구하는 바로크식 도시가 되었고, 파리, 런던도 마찬가지이다. 뻬쩨르브르그는 바로크를 파리, 런던 등 유럽 주요도시에서 가져왔다. 브라질의 행정수도 역시 원시림을 개발하여 만든 인스탄트 바로크 도시가 아닌가? 뻬쩨르브르그는 이 시기의 신도시이다. 모스크바로부터 무려 7백여 킬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신도시를 만든 것이다. "유럽으로 난 창문"으로 우리에게 레닌그라드로 알려졌던 도시. 이 도시가 1703년 5월에 세워지고 정식으로 러시아의 수도가 될 때까지 9년을 기다려야 했다. 왜냐하면 로마노프왕조가 대법원과 연방정부청사를 이 곳으로 옮기는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뾰뜨르(1672-1725)는 선진문화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유럽으로 떠난다. 쿠데타 소식을 접하고 겁이나 1년 6개월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끼가 가득 찬 습지와 진흙탕에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하나 하나 실천에 옮긴다. 발트해를 거머쥐고 유럽을 자유롭게 왕래하고자 하는 그의 염원은 유럽에서 내로라 하는 큰 도시를 만드는 길이라는 의지를 불태우게 하였다. 이 길만이 러시아가 서유럽에 대한 콤프렉스를 벗어 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웨덴이 발트해를 떡 버티고 있는 바람에 유럽통로가 봉쇄되자 그는 스웨덴과 북방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게 된다. 승전은 국민들을 도시건설에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을 제공할 수 있었다. 우선 뾰뜨르는 네바강 하구에 외침에 대한 든든한 방어의 수단으로 요새 구축을 서두른다. 요새를 필두로 하여 도시는 서서히 그 거대한 위용을 들어내기 시작한다. 뾰뜨르대제는 유럽 선진도시의 계획방식과 건축양식을 골고루 받아들여 도시를 계획하되, 건축물은 모두 돌로 만들라고 명령한다. 이 당시 뽀뜨르대제는 테크로크랏을 비롯한 수 만 명의 농민을 전국에서 차출하여 운하를 구축하고 다리를 놓고 건물을 짓는다. 마치 황량한 사막에 도시를 세우는 것처럼… 1703년에 단추를 낀 사업이 한 세기에 걸쳐 진행된 것이다. 18세기에 이렇게 거창하고 화려한 신도시가 만들어 진 것은 유럽의 도시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역사인 것이다.▲ 저녁노을과 햇살이 깔리는 네바강의 풍경 진흙탕과 밀림이 전부였던 습지대가 도시적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동원된 국민들(주로 농민)은 중노동, 그리고 배고픔과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다. 도시건설 현장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게 되었다. 마치 전장에서 죄 없는 병사들이 쓰러지듯이… 이 도시건설에 묻힌 많은 희생자들 때문에 이 도시의 별명 같은 이름 "사람의 뼈로 이루어진 도시"가 생겨나게 되었다. 서유럽과 북유럽 사람들은 짧은 기간에 이토록 유럽형의 아름다운 도시가 만들어진 것을 보고, 경외의 찬사를 보내는 한편 적지 않은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도시가 형성되자 유럽에서는 뻬쩨르브르그를 유럽의 일원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도시 하나가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이다. 북방전쟁의 승리에다 유럽형 도시의 건설로서 유럽을 오가는 길목인 발트해를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된 셈이다. 백야를 지나 잠시 어두워 지더니만 이내 아침해가 둥그러니 솟아 오른다. 구두끈을 고쳐메고, 손가방을 챙기고 길을 나선다. 나직하고 완강한,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아침해를 두팔로 끌어 안으며 어제와는 다른 길을 간다. 또 다른 곳에 우리의 발자국을 찍으러... 네프스키 거리를 간다. 이 도로는 역시 뻬쩨르브르그의 상징가로이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이 뻬쩨르브르그의 길은 모두 네프스키로 통한다. 이 도로는 역사성, 상징성, 그리고 중심성을 지니고 있다.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고, 상가, 은행, 공공건물, 그리고 도로 이면에는 주택등이 포진하고 있다. 18세기와 19세기 문호 도스도예프스키, 고골리, 푸시킨 등이 이 도로를 무대로 글을 쓰고, 이데아를 논하고, 시상을 떠올렸다. 이 길을 통해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이 길에서 시민들이 외치는 혁명적 요구가 러시아 뿐만이 아니라 유럽까지 퍼져 나갔다. 뻬쩨르브르그의 길을 모두가 넓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로들은 사람보다는 대제를 위하고, 권위를 자랑하기 위함이다. 대로 중심의 이 도시는 중세도시의 모습을 간직한 대부분의 유럽도시들과는 엄연한 차별성을 지닌다. 중세형 유럽도시에는 큰 길이 없다. 똑바른 길도 드물다. 기하학적 질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어느 중세형 도시의 도로는 도로 폭이 일정하지 않고, 방향성도 모호하다. 구불구불한 길은 도시 어느 곳에서라도 중심광장으로 사람들을 안내해 준다. 그러면 성당이나 시청사는 마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타나게 마련이다. 원 제 무 Won, Jaimu한양대학교 도시대학원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 입니다)
  • 조경공간에서 만나는 점토벽돌(2) - 점토벽돌의 다양한 활용사례
    이번호에서는 점토벽돌을 녹지경계석, 배수로, 플랜터, 앉음벽, 계단 등에 활용한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고, 점토바닥재의 응용방안으로 켜쌓기 방법을 살펴본다. 더불어, 점토바닥재의 기본적인 포장방법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녹지경계석 경계석은 다양한 재료와 만나 녹지경계석, 포장분리경계석(재료분리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에는 녹지와 만나는 곳에는 어김없이 녹지경계석이 사용되었으나 최근들어서는 특별한 경계석을 사용하지 않고 바닥재 그대로 마감하는 현장도 눈에 띄고 있다. 그만큼 다채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종류와 방법으로 바닥재가 시공되고 있는 만큼 녹지의 경계와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났을 때의 경계부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녹지경계석의 경우 녹지와 만나는 포장재를 고려하여 꼭 기성제품의 콘크리트나 화강석 경계석을 사용해야 하는지, 미처 세밀하게 살펴볼 여유가 없어 녹지와 만나는 라인에는 무조건 경계석을 사용하여 과잉설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건축과 토목에 비하여 늘 부족한 공사비를 사용해야 하는 조경공사의 현실을 고려할 때, 경계석에 사용되는 만만치 않은 공사비를 다른 공정에 사용하여 전체적인 공간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점도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해 봐야 할 일이다. 현장에서 시공되는 경계석의 길이와 포장면을 생각한다면, 세심한 배려가 결과물에 있어 얼마나 다른 품질로 나타날지 생각해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점토바닥재가 최상의 방식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장 여건에 따라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기에, 몇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하지만, 점토바닥재를 경계석으로 사용할 때에는 특히 콘크리트베이스 위에 점토바닥재를 붙여야 하므로 백화현상에 유의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레미탈(시멘트, 모래가 혼합되어 현장에서 물만 부어 사용할 수 있고 해사 사용으로 인한 하자를 막을 수 있다)로 시공하는 것이 좋다. 현장에서 어떤 포장재를 어떤 느낌으로 표현할 것인지에 따라 적당한 경계석 시공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포장마감이 점토바닥재로 사용되었다면 점토바닥재를 이용한 경계석은 통일감을 줄 수 있으며 작은 단위로의 절단과 시공이 용이한 만큼 현장상황에 따른 다양한 응용이 가능할 것이다. ▲ 그레이팅 테두리 배수로 배수로에 이용 될 수 있는 점토바닥재는 크게 세가지 정도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표면배수가 되도록 하여 시공시 경사를 주어 배수의 방향을 잡아 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배수용 점토제품인 찬넬(channel)을 이용해 배수로를 만들어 주는 방법이 가능하다. 세 번째는 점토바닥재로 포장면 보다 단을 낮춰 배수로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배수로를 만들때는 전체 포장면적과 강수량을 고려하여 폭과 깊이를 정해야 한다. 플랜터(Planter) 플랜터를 만들때는 조적하여 만드는 방법과 콘크리트 구체를 치고 외벽에 점토바닥재, 점토타일, 점토벽돌을 붙여주는 방법이 있다. 포장의 재질이 점토바닥재였을 경우는 공간의 통일감을 주기 위하여 플랜터에 같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앉음벽(Sitting Wall) 앉음벽은 시설물중에서 시각적으로 중요한 구조물인 동시에 기능성도 있는 구조물이다. 1B나 1.5B 쌓기 정도의 폭을 갖게되며 다양한 길이와 형태, 다른 재료(나무, 석재)와 혼용하여 여러 가지 표정을 연출하는 시설물로 만들 수 있다. 콘크리트 구체로 만들 경우에는 점토타일이나 점토바닥재로 붙여 시공한다. 마지막 끝부분 마무리에 있어서는 무공제품으로 구멍이 보이지 않도록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담장 설치시에도 마무리는 무공제품을 사용하고 설계시 디테일에 나타내 주어야 할 부분이다. 계단 같은 점토제품을 사용해 계단을 만들더라도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 수 있는데 바닥포장을 마무리한 같은 점토바닥재로 계단을 마무리 할 수 있고, 밟는 면은 점토바닥재로 측면은 점토벽돌을 세워 시공할 수 있으며 계단마감재로 마감을 할 수도 있다. 이 방법들 모두 느낌이 다른 형태의 계단으로 시공되므로 현장의 분위기, 계단사용의 빈도, 계단 날개벽 마감 등을 고려하여 선택해야 한다. 계단의 높이가 현장상황에 따라 조금씩 차이날 수 있지만 점토바닥재나 점토벽돌은 절단이 쉬우므로 변수가 많은 현장에서 탄력적으로 이용 가능하다. 점토바닥재의 응용 - 켜쌓기 점토바닥재를 반으로 컷팅하거나 포장공사시 절단하고 남은 점토바닥재의 절단면을 정으로 쪼아 적당히 다듬어진 요철을 주어 화강석의 켜쌓기와 같은 방법으로 줄눈 없이 몰탈로 붙여 시공할 수 있다. 시공시에는 벽돌을 쌓듯이 정형적인 방법으로 쌓는 것이 아니라 길이가 서로 다른 것들을 조합하여 자연스러움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점토바닥재 색상중 투톤의 색상으로 되어있는 것은 절단된 면의 색상이 한층더 돋보이게 된다. 이러한 방법은 플랜터, 장식가벽 등에 활용될 수 있다. 이 희 경 Lee, Hee Kyung·미드랜드코리아(주) 디자인팀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장승과 이정표 및 가로수에 대한 고찰
    장승과 가로수 도로에 거리 표시로 처음에는 흙이나 돌을 무더기로 쌓아서 일정한 거리마다 설치 하다가 점차 시대의 필요성에 따라 그 돈대( )위에 나무를 깎아세워 안내기록을 새겨넣는 표목(標木)이 세워 지다가 장승과 함께 병행하는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수목을 심어서 거리의 위치표시로 삼다보니, 마침내는 그 이용효과는 거리표시는 물론 행인들의 쉬어가는 그늘로하여 쉼터로서의 다목적 효과를 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로변의 장승이 가로수로 변하게 되었는지 그 시대적 과정을 보면, 도로변에 후( )라는 명칭으로 장승을 세우면서부터 나무를 심게 되었던 최초는 앞서 언급된 바 있는 고대 중국의 남북조 시대 위효관 이라는 지방 수령이 도로변에 거리 표시로 흙장승( )을 설치했던 것을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어 그 돈대( )를 대신케하니 길가는 나그네들로 하여금 서늘한 그늘을 주는 덕을 베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본 임금(周文帝) 은 전국 각 주(州)에 명하여 이와같이 후( :장승)를 없애고 대신 나무를 심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심은 나무의 수종은 어떤 나무를 심었던가 하니, 북사(北史) 위효관전(韋孝寬傳)에 있기를 후( )대신 홰(槐)나무를 심었다.(當里處植槐以代理 也) 하였으니, 이 나무는 일명 회화나무로서 중국이 원산인 활엽교목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회화나무는 예부터 삼공지괴(三公之塊)라 하여, 공명심록(空名臣錄)에 자손이 삼공(三公)에 오르면 뜰 안에 이 나무를 심었다는 상서로운 나무로 귀애함을 받았던 나무였다.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옛 한양의 도성 궁궐내 요소마다 홰나무가 지금도 거목으로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와 관련한 연유가 있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조선 초기에 와서의 실상을 보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서는 건설사업에 주력하는 바 도성 및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 중앙의 5부로 나누어 도로건설을 시행하였는데, 도성내의 도로망은 물론 전국의 역원(驛院)제와 봉수제를 한성부 중심으로 개편하므로 하여 이 사업은 태종, 세종, 세조, 성종조를 거쳐 경국대전의 완성으로 전국적인 도로망의 정비를 보게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도로변에 심은 나무의 기록이 있는바 「도로변에 거주하는 자는 전부 도로변에 나무를 심고 하천변에 거주하는 자는 축방 양측 제방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路傍各戶皆命栽植川邊各戶各於兩岸築坊栽木)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남북조시대 위효관이 시행한 길가에 나무를 심어 행인들에게 덕한 길가에 나무를 심어 행인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것과 무관치 않은 일이며, 우리나라 가로수 역사의 효시가 아닌가 싶다. 또한 조선왕조의 통치 법전인 경국대전에 장승에는 리(里)수와 지명을 새긴다라는 규정이 있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제도의 창립시행도 있고, 시류에 따른 변화도 있어서인지 거리표시 방법도 기존 장승에만 의존하지 않고 융퉁성 있게 시행하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태종때 까지는 후( )라 하여 토석의 단위에 거리표시를 해오다가 세종 20년(1438)때 와서는 장승의 위치에 이정표로 표목(標木)을 세우고는 나무를 심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세종 23년(1441) 8월에는 중국 사신이 들어오는 평안도 대로변에는 30리마다 로표(路標)를 하나씩 세우되 구간 내에는 단을 쌓아서 거리 표시를 하기도 하였다. 또 단종때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나무만 심게 하였으니, 단종원년(1452) 5월에 는 한성과 지방의 대로변 좌우에 나무를 심도록 하고 철저히 관리하게 하는 반면 그 심는 수종은 각 지방에 알맞은 나무로 하되 소나무, 잦나무, 밤나무, 홰나무, 버드나무 등을 심고 가꾸게 하였는데, 이는 앞서의 나무로 거리표시를 하던 방법과는 크게 변화된 시행이며, 특히 도로변 좌우에 심으라는 것으로 보아 가로수 개념에 가까운 시행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와같은 일이 단종 이후로는 기록에 보이지 않다가 현종때에 와서의 일로 반계수록에 보이는데. 「회화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잦나무, 버드나무는 성(城) 내·외에서 관도의 양쪽에 느려심고 근처에 사는 사람에게 관리하도록 했다.(槐木, 銀杏, 松柏, 楊柳則又於城內外官道兩傍列植分付傍道居人看手如有伐者治罪郞令準植)」 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동안 장승과 함께 구간마다 나무를 심어본 대체 효과가 아예 나무를 많이 심어 얻는 다목적 효과를 가져온 결과의 시도가 아니었나도 생각된다. 장승의 처음은 거리표시로 장승만이 주체이던 것이 나무를 시어 대치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의 처음 시작은 세종때부터 변화기라 하겠지만 후애로 오면서 일관성 있게 통일된 시행이 아니라 장승과 함께 나무를 식재로 병행설치 방법으로 후기에까지 이어온 것 같다. 정약용 선생도 이정표를 세우되 쉬어 갈 수 있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이 목민심서(1801∼1818)에, 나루터에 배 없는 일이 없드시 역정(驛)에 장승 없는 곳이 없음은 행인과 나그네들의 즐거워 하는 바 라고 하면서, 5리가서 표목 하나 세우고, 10리에 가서 장승을 세우되 거기에 중국의 위효관의 예를 들면서, 우리도 흙돈대를 없애고 홰나무(槐)를 심게하면 길가는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주어 덕을 베풀는 일이라 하고, 또 10리마다 작은 장승(小 )을 세우고, 30리마다 큰장승(大 )을 세운다면 거기에는 느릅나무(楡)와 버드나무를 심어야 한다.(--每十里立小 三十里立大 樹之以楡柳) 고 하였다. 이는 관의 지침이나 직접적인 지시가 아닌 선비가 관을 향한 학자적인 설문이므로 그대로의 시행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앞의 왕조간의 시행사례 몇 가지의 예로보아 도로변에 이정표로 장승을 세우기도 하고, 거기에 나무만 심어 장승을 대신 하기도 하고 장승과 함께 나무를 심어 길가는 행인들에게 그늘을 주고 신선함을 제공하게 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도로 문화에 변화의 과정이었으며, 이는 외부의 견문이 없이도, 우리만의 사고에 의해서 발전하는 고유의 우리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조의 재위기간(1776∼1800) 동안에 도로변에 심은 노송의 숲이 있으니, 수원시 북부 옛 지지대 고개 소나무 숲이 그것이다. 이는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능(陵)을 수원으로 천봉하면서 이 능을 지키는 용주사를 짓고는 부모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부모은중경을 새겨 기복케 하는 지극한 효심으로, 한달이 멀다하고 능을 찾아 행차 하셨다 하는데, 지지대 고개는 국도의 대로이며 정조가 현륭원을 봉행할 때마다 지나는 능행어로(陵行御路)이기 때문에 장승도 격이 있는 큰 장승(大 )을 세웠던 위치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나무를 심은 것은 이미 세종때부터 큰 장승 주위에 나무를 심었던 것이 관행이 아니었나 함이며, 궂이 소나무를 심었던 것은, 단종때도 그 지방에 알맞은 수종을 심도록 했던 선례도 있을 뿐만 아니라, 소나무는 옛부터 충절을 기리는 의미도 있었거니와 수장지목(樹長之木)이라 하여 나무중에 으뜸이요 조한 묘역이나 관문 입구에 심는다는(以松樹考門) 뜻을 높이 감안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다. 그러면 능원으로 가는 입구의 대로에는 장승이 어떻게 세워 있었는지 기록의 한 예를보면, 영조 46년(1770)에 관련한 도로고(道路考)의 능원묘어로 조(陵園墓御路條)에, 「厚陵在豊德長 隅自薺陵五里豊德府十里陵下五十里共二百二十里」라고 표기된 장승의 이정표다. 여기서 후능이란 정종의 능을 말함인데, 이 릉은 개성의 풍덕에 있는 능이다. 장승이 서있는데서 거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왕능 앞을 지나는 도로에는, 장승도 이정표도 격이 있고 품위가 있게 했으리라 여겨진다. 또 하나 임금이 다니는 온천길의 장승에는 어떤지 예를 보면, 같은 도로고(道路考)의 온천행궁로 조(溫泉行宮路條)에, 「---鳥山大川菁好驛前竝長 山見十里」 여기에서 보면 임금이 통행하는 어로나 관 대로에는 장승도 쌍장승으로 규모있게 세웠던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보듯이 지지대 고개 또한 왕능이 있는 관대로 이므로 큰 장승이 품위있게 세워져 조선 말기까지 있었던가, 신채효 선생의 판소리중 변강쇠가의 가사 내용에도 지지대 유사님(有司) 지지대 공원(公員) 운운하는 대목이 있다. 장승을 가리켜 유사님 공원임 하는 말은 보부상의 직책으로 장승의 기능도 이에 유사함을 빗대어 음풍한 것일 것이다. 이렇듯 큰 장승이 서있는 지지대 고개에 소나무를 심어서, 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관원은 물론 일반 행인들까지 쉬어가는 곳이었을 것이니 생각해 보면 그늘이 있고 쉬어가는 곳이라면, 우마차와 행인들의 봇짊등을 길가에 길게 늘받쳐 놓고 쉬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그러자면 나무도 길을 따라 가로수 열식으로 길게 심게 되었을 것으로 상상이 되는바, 초기에는 장승주위에 어찌 심었던지 간에, 정조임금의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질서있게 가로수처럼 길게 열식하여 심게된 것이 아닌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까지 지지대 고개 노변을 울창하게 지켜 서있는 소나무 길은 사실이 아닌가. 우리나라에 가로수가 의도적으로 심어지기는 개항기 이후인 고종 32년(1895) 3월 10일 내무아문(內務衙門)에서 각도와 각 읍에 시달하되, 「道路 左右에 樹木을 植養함을 勸하고 栽植할 事」하고, 가로수를 심도록 지시하므로 하여, 이로부터 전국에 설치되어 있는 역(驛)과 발참을 폐지하고 우체사를 신설하고 현대식 교통통신의 도입으로 하여 장승의 이정표 제도는 사라지게 되었고 관 주도로 획일적인 가로수를 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국가시책의 지침으로서 그 첫 시행의 시기와 장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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