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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쉽게 익히는 조경설계 프로그램(1)
    e-매거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아시아 환경도시·건축디자인 2002
    The Asian Environmental Urban & Architecture Design 2002 지난 7월 16일부터 21일까지 중국 연변예술대학 예술갤러리에서 "아시아 환경도시·건축디자인 2002 (The Asian Environmental Urban & Architecture Design 2002)"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는 현재 아시아 전지역에서 빠른 속도로 도시가 확장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자칫 개발위주의 계획이 환경을 파괴하고 여러가지 도시 문제들을 야기할 것을 우려하여 환경친화적인 도시개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개최되었는데, 평소 환경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이 분야의 작품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한·중·일 작가들의 작품들이 다수 전시되었다. ▲ 구주대학 캠퍼스 조성계획/데구치 아추시(일본) 이번 전시회에는 중국에서 우지강 Wu, Zhi Qiang 교수(상해 동지대학), 조원섭 Zhao, Yuan Xie 원장(연변시 도시설계원), 김준봉 교수(연변과학기술대학)가 참여하였으며, 일본에서는 데구치 아추시 Deguchi, Atsushi 교수(구주대학), 기타자와 다께루Kitazawa, Takeru 교수(동경대학), 니시무라 유끼오 Nishimura, Yukio 교수가 참여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김홍규 교수(연세대 도시공학전공), 고원용 박사(연세대 도시교통과학연구소), 주영정 대표(예조대표, 전주대 겸임교수), 최신현 전무(우대기술단 전무, 영남대 겸임교수)가 참여하여 중국 3인, 일본 3인, 한국 4인으로 동북아시아 지역 3개국의 건축 도시 조경학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전문가들이 주축이 되었다.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거단지와 마을을 조성하는데 있어서 환경을 고려한 계획과 설계를 해 왔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현재는 환경친화적인 계획 설계가 실질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최근의 한국도 환경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면서 환경친화적인 작품이 시대적인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급속한 성장과 개발의 과정을 거치고 있고, 탈역사성과 더불어 현대적 발전모델을 상당부분 수용하면서, 환경 문제를 취약하게 다루고 있는 측면이 있다. 도시개발의 발전적 인 측면만을 강조하다가 도시환경의 피폐성을 경험한 후에 이를 다시 복원하려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직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발의 열풍이 불고 있는 중국에서 환경도시·건축디자인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계획과 설계분야에서 환경적인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리고, 또 그런 환경적인 요소가 물리적 환경으로 표현되고 강조된 작품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계획 설계에 있어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소기의 목적을 두었다. 김 홍 규 Kim, Hong Kyu·연세대학교 도시공학전공교수, 도시단지설계가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5) - 16세기 Veneto지방 정원: Padova, Trevis
    Nature Perfected: Italian Renaissance Garden(5) Palladian 정원의 조영배경16세기 초반, 지중해 무역과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인한 베네토 지역경제는 매우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에 베네토지방의 각 도시의 귀족들은 기존의 지중해의 해상무역에서 얻었던 경제적 이익을 그들의 주거지인 베네토 지방의 농업에서 그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이는 해상무역을 통해 얻어진 자본을 농업에 투자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로 인해 도시 외곽지역을 개간하게 되고, 여기에 거대한 농장으로서의 전원한거주택(이하 Villa)을 조영하였다. 그리하여 베네토 지방의 농업의 발달은 짧은 시간에 오지의 땅을 개간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이러한 지역에서의 빌라 및 정원조영은 베로나(Verona), 베네치아(Venezia), 파도바(Padova), 트레비조(Treviso), 비첸차(Vicenza)와 같은 중세도시근교에서 조영하게 되었으며, 조영된 빌라가 그 지역의 중심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조영실제 16세기 중반 후반 베네토 지방을 중심으로 조영된 빌라는 Potere(포데레: 농장)이다. 이러한 빌라의 조영에는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라는 건축가의 역할이 매우 크게 나타나는데, 그는 조영자 요구를 수용하면서, 베네토 지방의 특수한 지역성을 자기스스로의 건축언어로 소화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평지에 조영한 그의 초기작품인 V.Badoer, V.Cornaro, V.Emo가 있으며, 후기작품으로는 구릉, 경사지에 조영한 V.Maser, V. Rotonda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의 빌라조영에서는 그의 개인적 건축적 해석과 주변경관의 조화라는 전체조영원칙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한 결과, 16C 당시 팔라디안 빌라에서의 정원조영은 겨우 귀족들의 의식을 거행할 정도의 공간확보와 채원정도가 고작이었으며, 주변의 전원적 풍경이 정원의 역할을 대체하였다. 이러한 빌라는 17C 정치 사회 문화상의 변화로 인해 유희의 중심지로 변모되어간다. ▲ V.Rotonda 전경 입지조건과 주변경관과의 관계 15, 16세기 이탈리아 Villa의 입지를 우르바나(Urbana:도심), 수브우르바나(Suburbana:도심부근), 도심근교에 위치하고 있는 루스티카(Rustica)로 구분하는데, 1570년 Vicenza에 조영된 V. Rotonda의 경우 Suburbana의 성격을 가진반면, Venezia 인근지역의 파도바, 트레비조, 로비고 등에 조영된 V.Badoer, V. Cornaro, V. Emo, V. Maser의 경우 Rustica 성격을 가진다. 이들 빌라정원은 15, 16세기 여타의 지역에 조영된 빌라 및 정원조영과의 주변경관과의 비교에서 특이성을 가지는데, V. Rotonda, V. Maser의 언덕에 위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V. Cornaro, V.Emo, V. Badoer 경우는 모두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들 빌라 및 정원은 도심의 외곽지역에 광활한 농토를 중심으로 주변의 자연경관을 빌라 및 정원의 통합적 시계 내에 포함시켜 건물과 정원, 농토와의 강한 시선축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Villa와 주변의 水原과의 관계에서도 주변에 강인 경우는 V.Badoer, V. Cornaro, V. Emo, V. Rotonda가 있으며, 수원이 빌라 및 정원이 입지한 산인 경우 V. Maser가 이에 해당된다. 공간구조 16C 중반이후 베네토지방의 귀족의 거주지로서의 기반이 된 빌라 및 정원의 공간구조 및 구성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빌라 건물의 중앙을 통과하는 건물의 주축이 정원의 비례, 대칭적 공간분할의 형태를 띠면서, 건물공간은 빌라가 위치하는 장소로서, 전체공간의 중심을 이루며, 정원공간은 화단, 조각 등의 점경물을 중심으로 빌라의 부속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Villa의 형태와 정원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공간배치 형식상의 평면적 의장에 관해 정형성을 띠는 것과 비정형성을 갖는 것으로 대별하여 볼 때, 16C 중 후반 베네토지방에 조영된 빌라 및 정원경우는 공히 16C 초반 Cortile del Belvedere, V. Madama의 정원조영과정에 나타난 하나의 건물을 기점으로 하는 직선, 혹은 직교축을 형성, 대칭적인 공간구성형태를 나타나고 있다. 단일축의 경우는 V. Badoer, V. Cornaro, V. Emo, V. Maser가 이에 해당되며, 직교형의 경우 V. Rotonda 가 이에 해당된다. 또한 베네토 지방의 빌라의 경우, Villa의 건축적 외관을 표현하는, 공간배치 형식상의 입면적 의장에 대해서는 축선을 강조한 평면적 조영원칙과 무노단을 도입한 구릉성 입면적 조영원칙은 지켜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베네토 지방이 가지는 지형조건 등의 자연적인 요소와 경제 사회적 상황과 관련된 당시의 정치체제 등의 인문적 요소와 상호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사료되어진다. 최종희 Choi Jong Hee 성균관대학교 건축조경토목공학부 강사, 이탈리아 제노바 대학교 박사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북해 공원 -중국 북경의 호수가 있는 공원
    작년 한 해 동안 중국 북경에 머물면서 시작한 첫 작업이 북경의 호수가 있는 공원을 답사하며 조사하는 일이었다. 북경의 지도를 입수해서 살펴보니 도면의 에서 볼 수 있듯이 북경시가 근대 도시로 변화 발전하기 이전에 북경시내가 운하로 연결되어 수계를 형성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부 2구간은 현재 복구되어 있지만 수계로 연결되었던 흔적을 알 수 있는 호수가 곳곳에 분포되어 있고 이러한 호수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공원이 형성되어 있었다. 중국에서 수(隋)나라 양제(煬帝) 때에 대규모의 운하를 만드는 토목 공사가 있었다. 지금의 절강성(浙江省)의 항주(杭州)와 북경의 북해 공원까지를 연결하는 대운하가 이 때에 만들어졌고 북해에는 강남의 물자를 싣고 와서 부리는 선착장도 있었다 한다. 북해 공원 북해 공원은 청 건융(淸 乾隆) 시기에 1차 개건 완성된 서원(西苑)의 일부이며 서원은 황궁(皇宮)이 있는 자금성(紫禁城)의 서쪽에 위치한 황궁의 후원이다. 현재 서원의 중해와 남해 지역은 중국 정부의 관저로 사용되고 있어서 개방되지 않고 있고 북해 지역의 북해 공원만 개방되어 있다. 북해 공원은 1179년에 황궁의 후원으로 조성되었고 면적은 68경(頃 : 1경=2만여평)이며 북경시 서역 문진가(西域 文津街) 1호에 위치한다. 북해 공원 호수에 조성되어 있는 1개의 섬인 경화도( 華島)에는 선인전(善因殿), 남취헌(攬翠軒) 등 많은 전(殿)과 누(樓), 정(亭), 당(堂), 각(閣), 재(齋), 헌(軒), 낭(廊) 등이 배치되어 있고 정상의 중앙에 위치한 백탑(白塔)은 매우 아름다워 북해의 호수와 함께 북해 공원의 상징이 되고 있다. 경화도 북단 회랑에서 북해의 북쪽을 조망하면 호숫가의 숲 사이로 북경 시내의 고 건축물과 근래에 건축된 건축물들이 조화롭게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하고 있어서 경화도 북단 호안의 난간석 너머로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는 풍경과 함께 위락 공간으로서 호수가 있는 북해 공원의 여유롭고 낭만이 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이곳은 동절기를 제외한 계절에는 밤늦게까지 개방되어 북해 호숫가의 아름다운 야경(夜景)을 즐길 수 있고 많은 사람이 밤 뱃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백탑이 보이는 경화도 북해 공원의 입구를 거쳐 경화도를 답사한 후 북해의 동쪽 호안을 따라가면 호수변에 수양버들 등의 고목이 줄지어 서 있고 다시 북해의 북쪽 호안에서 서쪽으로 돌아가게 되면 중국 강남의 사가원림(私家園林)을 재현한 정심재(靜心齋)에 도착한다. 정심재는 원래 청 건융(淸 乾隆) 23년(1758)에 조성된 경청재(鏡淸齋)이며 광서(光緖) 년간 정심재로 개명했다. 이곳은 북해 공원이라는 후원 내에 조성된 원중원(園中園)으로서 황제가 독서하고 거문고 타고 차를 즐기기 위한 곳으로 만들어 졌다. 정심재는 중국 사가원림의 전형적 배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북경 근교에서 산출되는 기묘한 형태의 태호석(太湖石)으로 쌓은 철산( 山)기법의 가산(假山)과 계단석, 계단 주변의 태호석 처리가 빼어난 것을 볼 수 있고 건물 기단을 태호석으로 쌓아 처리한 뛰어난 철산기법도 볼 수 있다. 호안을 태호석으로 처리한 연못과 연못가에 작은 가산과 태호석을 독립석으로 세운 것도 볼 수 있고 연못 안에 산봉우리 모양의 돌을 배치한 것과 연못에 설치된 석공교(石拱橋)를 볼 수 있다. 연못은 정심재 원림공간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연못에는 연꽃을 중심으로 한 수초들이 아름답다. 중국의 강남 고전 원림에서는 문, 누창(漏窓), 다리, 담장, 포장 등 독특한 원림 구조물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곳 정심재에서도 둥근 문과 석공교 등의 아름다운 원림 구조물을 볼 수 있다. 북해 공원 북단에 있는 또 하나의 뛰어난 구조물은 구룡벽(九龍壁)이다. 구룡은 황제를 상징하며 중국에는 구룡벽이 3곳 분포되어 있는데 산서(山西) 지방 태원(太原)의 구룡벽과 강남지방의 무석(無錫)의 석혜(錫惠) 공원 내의 구룡벽과 이곳 북해 공원의 구룡벽이 있다. 중국 건축 장식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동물은 용과 사자이며 용은 각종 건축물 장식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고 특히 자금성(紫禁城)은 용을 건축물 곳곳에 장식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용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용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사자는 주로 궁전, 능묘, 사당의 입구 전면에 배치되며 건축물 장식 조각으로도 사용된다. 위와 같이 북해 공원은 북해의 넓은 호수와 경화도의 백탑, 정심재의 원림, 구룡벽 등으로 이루어진 황가원림 성격의 호수가 있는 공원인 것이다. 박 경 자 Park, Kyung Ja·한양대학교 도시대학원 겸임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현장수첩(1) : 대형목 이식공사
    - 인천시 명물로 재탄생한 120년 수령의 노송 이식 - 인천광역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의 개최를 맞이하여, 기존의 시청 앞 전면 광장을 새롭게 단장하여 대회개최의 의미를 더하고 시민들의 편의공간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인천시의 상징성을 극대화시키는 방안을 마련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 실행안의 하나로, 인천지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약 120년 수령의 노송을 이식하는 작업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대상 노송은 승기하수처리장내의 노거수로서 차후 이식할 목적으로 1995년에 단근작업을 실시하고 적당한 지역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후 중앙공원, 시민회관 광장 등 인천시의 상징성 부여를 위한 이식을 고려했으나, 운반 경로상의 고가도로 및 고속도로 등의 제약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 이식대상지는 시청 미래광장 전면부로서 시청을 중심으로 이동하는 보행자 및 차량에서의 우수한 초점경관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되어 사업 초기의도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본 사업은 2002년 5월 10일부터 5월 29일까지 20일의 공기로 진행되었다. 문제의 등장 본 용역은 당년 5월 10일 착공계를 제출함과 동시에 현장조사를 실시한 후 구체적 이식방안에 대한 협의에 들어갔다. 첫 번째의 난관은 어떻게 노거수를 이동시킬 것인가 이었다. 왜냐하면, 이식할 노거수의 위치가 도로측에서 1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초기 운반로 개설이 첫 번째 문제로 떠올랐다. 두 번째의 난관은 이동로상의 지장물에 대한 문제였다. 이동예상로인 시내도로의 경우 각종 신호등과 도로표지판, 그리고 지상부로 노출된 각종 전기, 통신에 관련된 선들이 그 문제의 중심이었다. 마지막 난관은 이동예상로에 고가고속도로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 도로의 통과허용 높이가 4.5m 인데 반해 트레일러에 수목적재시 그 높이가 10 ~ 12m이상으로 예상되어 고가고속도로 하부를 통과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제를 풀기 위해 백방의 의견이 쏟아지는 가운데, 5월 13일부터 이동예상로를 작성하고 관계기관과 협의를 실시했다. 문제의 해결 첫 번째 문제는 대상지역과 시내 도로사이의 녹지대를 관통하는 방안으로, 두 번째의 문제는 관련 기관의 협조를 얻어 문제가 되는 전력선 및 통신선들은 해체 후 복원하는 방안으로, 세 번째의 문제는 크레인과 트레일러를 이용하여 운반하는 방법 등으로 그 해결책을 모색했다. 이렇게 저렇게 무수한 의견들과 관계기관과의 협의 문제로 시간을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가도록 지켜만 볼 수 는 없는 상황에 5월 16일부터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즉, 대상지역은 승기하수처리장내의 도로와 이격되어 있고, 노거수의 규모로 보아 기존 출입구를 이용한 운반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어 도로측 사면을 개통하기로 하고 개통 예상로상의 수목과 철책 등 현황조사를 실시했다. 5월 13일부터 해송, 버즘나무, 무궁화 등, 개설예상 작업로상의 기존 수목에 대한 이식작업이 선행되어졌다. 도로의 표고와 사면 상부의 고저가 6-7m이상의 차이를 보임으로서 기존 수목의 이식은 물론, 일정부분 사면의 절토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에 대한 작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진행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다른 1개의 팀은 이동 예상로상에서 작업차량이 진행할 경우 장애가 될 지장물의 확인과 이에 대한 해결을 위해 관계기관과 협의를 진행시켰다. 이러한 작업이 인천시에서는 처음으로 시행되는 터라 초기에 반신반의하며, 안이하게 대처하던 관계기관들도 구체적인 이동방안과 해결에 대한 의욕을 보이자 적극적인 협조의사를 보였다. 또한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식 D-day를 토요일 저녁시간부터 일요일 오전으로 계획하고, 이에 다른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이동로 확보를 위한 교통통제가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으로 이를 알리는 현수막을 제작, 부착하고, 케이블TV 안내 등의 작업이 동시다발적으로 실행되었다. 5월 18일 승기처리하수장 내 현장, 날씨는 구름낀 선선한 날씨를 보여 며칠 전부터 작업 현장 근처에 풀어놓은 양봉업자의 50여개가 넘는 벌통들도(?) 문제가 되지 못했다. 굴취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이식작업에 모두들 긴장반 호기심반의 표정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그간의 사전작업을 충실히 한 덕분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굴취를 위해 파놓은 표토는 시청 앞 현장으로 운반하고, 굴취도중 전도를 우려한 버팀줄 작업이 진행되고, 상차를 위해 인양능력 150톤, 100톤 하이드로크레인 2대와 적재하중 50톤 트레일러가 속속 도착하고, 현장은 더 한층 활기를 띄어갔다. 백호우 굴삭능력 0.6W, 0.8W 2대가 번갈아가며, 분 주위를 파 내려갔다. 활기를 더해가던 작업현장은 차츰 우려의 분위기를 띄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초 예상했던 뿌리분의 크기인 깊이 2,5m, 폭 2.5m를 훨씬 넘는 깊이 2,5m, 폭 4m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덩이에서 트레일러 위까지 운반하는 방법과 초기의 수송방법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크레인으로 굴취한 노거수를 트레일러위에 눕히고, 버팀줄을 트레일러에 부착하여 이동시키기로 한 상태였기 때문이어서, 또 다른 해결책들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이만한 중량과 체적을 가진 수목과 그 분을 눕힐 경우 분 자체의 무게로 쉽게 눕혀질 수 도 없을뿐더러, 눕힐 경우 수간은 물론 분 자체의 파열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어떻게 분을 지상으로 올리느냐는 것이었다. 애초 강관을 이용한 박스형태의 틀을 제작해 크레인으로 올리려던 계획과 운반용 바를 이용하려던 계획이 있었으나, 바를 이용할 경우 좁은 폭의 바가 분 자체의 중량에 의해 분 내부로 파고들어가 분을 손상시킬 수도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강관의 경우 분 중량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현장에서 즉각적인 회의가 벌어졌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했던가. 한 가지 병에 약은 백가지라는 옛말처럼 무수한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시간은 흐르고, 오후 들어 맑은 하늘과 쏟아지는 햇살, 그리고 계속되는 소음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벌들이 저마다의 임무를 수행하러 밖으로 뛰쳐나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결국 결론은 하나, H 형강을 이용하여 우물정자형의 틀을 분 하부에 설치하기로 하고 즉각 실행에 옮겼다. 용접기가 등장하고, H 형강이 내려졌다. 구조분야 베테랑 기술자의 손은 자를 잰 듯이 움직였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 틀은 완성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트레일러위에 분을 눕힐 것인지, 세울 것인지의 의견 속에서 시간은 자꾸 흘렀다. 시간은 중요했다. 더욱이 이번 일은 주말 저녁과 새벽시간대에 시내 도로를 관통해야하는 관계로 교통순찰대와 한전, 기타 통신회사의 관계자들이 예상시간대에 맞추어 각각의 이동로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과 교통흐름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정된 공정시간의 준수가 필수적이었다. 송 동 섭 Song, Dong Sub·동림조경 대표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쉽게익히는 조경설계 플로그램(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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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조경수리기술자 시험정보(5)-최종회
    지난 호까지는 공통과목으로써 객관식 과목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이번호에는 전공과목에 대한 출제경향과 기출문제, 설계기준, 시설기준 등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시험정보를 마무리하려 한다. 전공과목으로는 "전통조경"과 "조경설계 및 시공"이 있는데 논술(1문항) 및 약술(2문항) 문제 각 3문항씩 출제된다. 그 중 50점 배점으로 한 문항이 출제되고, 나머지는 각 25점 배점으로 두 문항이 출제된다. 답안지 규격은 B4이며, 50점 배점 문항은 3장, 25점 배점 문항은 1장이 주어진다. 전통조경은 통일신라시대 이후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통조경구조물과 전통조경유적지, 전통조경에 미친 사상에 대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전통구조물로써는 옛다리, 정자, 루, 지당의 종류, 궁궐이나 민가의 담장과 화계 등에 대하여 정리를 하고, 전통조경공간에 식재된 수목에 대하여 정리해야 할 것이다. 전통조경유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안압지, 고려시대의 안학궁, 청평사 문수원정원, 맹사성고택의 정원, 조선시대는 경복궁 궁제와 조경, 공간배치, 연조공간, 아미산, 향원지, 창덕궁 후원, 낙선재, 연경당 건물배치와 조경양식, 부용지와 주합루 공간, 별서정원, 사찰, 서원의 공간배치, 부용동정원, 민가주택정원의 공간분할, 상류주택의 마당 공간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전통조경유적은 현장을 직접 답사해 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는데 전통조경유적을 답사함으로써 알고 있는 바를 확실히 정리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참고로 환경과 조경의 후원 아래 문화재조경기술자회와 한국정원학회가 공동으로 매월 전통조경 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전통조경 분야 교수님들이 설명을 해주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필기시험 합격 후에 있는 면접시험은 보통 20∼30분 동안 하게 되는데 조경유적 현장을 답사하신 분은 어렵지 않게 면접시험을 치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조경 기출문제 1. 조선시대 한국조경의 대표적 유적이라 할 수 있는 창덕궁 후원의 전통성을 논하고 한국적 도시 녹지공간 조성의 방향을 제시하라. 2.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옛 다리와 정자를 열거하고 그 성격에 대하여 논하라. 3. 연경당의 건물배치와 조원양식에 대하여 논하라. 4. 풍수지리설이 조경에 미친 영향과 식재 기법에 준 영향에 대하여 논하라. 5. 경복궁 궁지와 정원에 대하여 논하라. 6. 한국·일본·중국 삼국의 정원에 대하여 고찰하고 발전 방향에 대하여 모색하고 제시하라. 7. 한국 민가조경에 영향을 끼친 민가건축의 규제에 대하여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를 기술하라. 8. 전통정원에 있어서 지당 형태를 5종류 이상 기본약도와 함께 제시하고 그에 해 당하는 사례 대상 지당을 각각 2개씩 선정하여 약술하라. 9. 한국전통사회의 인생관, 종교관에 반영되어 우리 나라 조경양식에 영향을 끼친 주요사상 6가지를 열거하고 요약하라. 10. 창덕궁 비원내의 부용지와 주합루 공간에 대하여 아는 바를 쓰시오. 11. 민가 주택정원의 공간분할과 그 요소, 공간의 연계성 및 그 요소에 대하여 논하라. 12. 부용동 정원에 대하여 논하라. 13. 신라의 안압지가 일본에 영향을 준 기법에 대하여 논하라. 14. 중앙청 철거와 관련하여 경복궁 복원에 대하여 공간배치를 중심으로 논하라. 15. 별서 정원에 대하여 논하시오. 16. 전통 조경공간 내에 있는 조경수목의 전지, 전정, 시비에 대하여 연중 관리를 쓰시오. 17. 백제시대의 조원양식의 특색을 논하고 조원기술이 외국에 미친 영향을 약술하시오. 18. 우리 나라 궁원 및 양반가 담장의 종류를 열거하고 그 특징에 관하여 약술하시오. 19. 다음에 대하여 아는 바를 쓰시오. ①십장생 ②향원정 ③낙선재 ④아미산 ⑤주합루 ⑥영호정 ⑦방화수류정과 흥화문 20. 신라시대 안압지의 배석기법에 대하여 논하시오. 21. 경복궁 아미산 정원의 특징을 쓰시오. 22. 한국과 일본의 조경양식을 비교 설명하시오. 23. 한국의 조경은 자연풍경식 이다. 자연풍경식으로 조성하게 된 이유를 서술하고 대표적인 사례지역을 통일신라시대 1개소, 고려시대 1개소, 조선시대 4개소를 열거하시오. 24. 서석지 사우단에 식재된 수종을 쓰시오. 25. 유상곡수연에 따른 곡수시설 중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의 시설을 예를 들고 서로 비교하여 설명하시오 26. 우리 나라에는 樓와 亭子가 많다. 루와 정자에 영향을 준 사상적 배경과 환경적 차이점, 설치위치의 차이점을 서술하시오. 27. 전통사찰에서 九品蓮池의 조성에 영향을 준 사상은? 28. 안압지의 入水施設을 서술하라. 29. 조선조 주택의 공간구조에서 조경영역을 확인하고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조경원 칙을 논하시오. 30. 조선조실록과 지리관계도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전통조경시설인 수(藪,林藪, 邑藪)의 의미 와 조성원리에 대하여 약술하시오. 31 『고려사』, 『동국이상국집』등 사서에 기록된 고려시대의 정원식물에 관하여 10가지 이상 기술하시오. 32. 조선시대 상류민가의 7개 마당공간에 대하여 논하라. 33. 경복궁 연조공간에 대하여 논하라. 34. 조선시대 궁원에 화계가 많이 설치되었었다. 화계의 재료, 설치방법과 설치 위치를 예를 들어 설명하라. 35.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마당을 세분하고 설명하라. 36. 조선시대 전통 화,목(花, 木)중 음수를 10종 써라.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어촌체험 관광마을 조성
    어촌체험관광의 개념 어촌체험관광이란 해양과 도서, 어촌, 해변 등을 포함하는 공간에 부존하는 자원을 활용하여 일어나는 관광목적의 모든 활동으로서 방문자 스스로의 흥미와 관심 등에 따라 다양하게 준비된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보고, 듣고, 참가하면서 즐기는 것으로 어촌지역의 특성과 방문자의 개성에 따라 창조하며 즐기는 독창적인 관광을 의미한다. 어촌체험관광의 특징 어촌체험관광은 해역과 연안에 접한 단위지역인 어촌사회에서 어민이 수행주체가 되어 이루어지며 직·간접적으로 어촌공간에 의존하거나 어촌자원이 결합되어 일어난다. 특히, 어촌이 중심이기 때문에 상당수 국내 어촌지역의 경우에 영세성을 벗어날 수 없지만 어업활동과 연계하여 소득을 높일 수 있고 최근의 WTO 체제하에서의 어촌지역 경제의 위기 및 해양관광의 잠재성을 고려한다면 정부차원에서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분야이기도 하다. 연안어촌은 바다와 육지가 만나 기수역(汽水域)을 형성하는 생태적인 점이지역으로서 다양한 해양 동·식물의 생물종이 서식하고 개발의 압력에 의해 파괴되기 쉬운 생태환경을 가지고 있어 최근 교육적인 측면(Education)과 오락적인 측면(Entertainment)의 효과를 동시에 거둘 수 있는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통하여 풍요로운 자연환경과 독특한 어촌지역에서의 일상생활을 체험할 수 있고, 지역주민들과의 교류 등을 통해 다양하고 흥미로운 여가활동이 가능하며 도시민의 몸과 마음의 휴식을 할 수 있는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 해안가의 낙조 어촌체험관광의 필요성 오늘날 상당수의 국내 어촌지역은 전통적인 어촌사회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문제가 점점 대두되어지고 있으며 어업자원의 감소현상과 해양오염의 심화에 따른 어장생산성 및 어획물의 상품성 저하, 인건비 상승에 따른 어업경영비의 급격한 증가, 국내 수산물시장의 개방화에 따른 어가의 하락 등으로 어업소득은 지속적으로 정체되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어가와 도시근로자 및 농가와의 소득격차가 갈수록 심화되어지는데, 이러한 어가의 낮은 소득수준은 많은 어민들이 어촌을 떠나는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WTO 등 국제기구들은 정부가 가격지지, 생산지지 등을 위해 어민들에게 지급하던 정책 보조금을 지급하는 제도에 대하여 철폐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원가 절감을 위한 어항·어촌개발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전환 및 관광활성화 등을 통한 새로운 어업외 소득원 개발이 정부차원에서의 정책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최근에는 어촌체험관광 여건이 성숙되어 가면서 어촌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예전에 비해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어촌관광개발에 대한 지역주민이나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의 관심도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감안하여 볼 때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됨과 동시에 사회 전반의 여건 변화에 기인한 관광시장의 질적인 욕구가 높아짐에 따라 국민관광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지역개발 차원에서도 어촌체험관광마을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투자·육성하여 지속적인 개발을 유도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국민관광패턴의 변화와 어촌관광의 수요를 고려해 볼 때, 어촌관광기반시설 조성, 체험프로그램 개발, 어업인의 관광마인드 및 리더쉽 육성을 통한 어촌관광 활성화를 꾀하고 이에 따른 어업외 소득증대로 인한 어가의 안정과 취업기회 확대로 어촌지역에 젊은 연령층의 인구유입 및 정착을 유도할 수 있다. (박상우 · 해양수산개발원 어촌관광팀)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창간 20주년 기념 조경비평 공모전 가작 - 장소의 상실과 회복
    - 탑골 공원에 대한 비평 - 실어증 (Aphasia) 서울은 실어증에 걸렸다. 이 거대하고 역동적인 도시는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기억들을 간직해왔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 기억들을 잊어갔고 우리의 도시는 박제된 시간의 파편만을 드러낸 채 침묵 속으로 침전해간다. 무엇이 이 도시를 침묵하게 했는가? 현대 한국 조경은 기능에서 출발하였다. 이 땅에서 조경은 성장 위주 경제 정책의 산물로서 시작되었으며 그 주된 역할은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개발의 치유에 있었다. 자연히 도시 외부공간에 있어서도 쾌적한 환경 조성이 제 일의 목표가 되었고 디자인 역시 기능의 면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였다. 양적, 질적 성장을 거치면서 조경 설계의 영역에서는 옴스테드 양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서구 아방가르드 조경가들의 이론과 맥하그가 주창한 생태적 방법론을 받아들여 새로운 형태를 찾고자 하는 여러 가지 연구와 실험들이 시도된다. 하지만 형태상의 다양성과 변화가 나타났을지언정 모든 프로젝트의 근본 목표는 여전히 [공원 운동(Public Park Movement)]으로 대변되는 옴스테드의 이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90년대 들어 근린공원, 가로환경, 대규모공원 등 성격이 상이한 프로젝트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목표는 "쾌적한 환경 조성"이라는 동일한 모토 아래 놓여있었고 그 결과물의 성격 역시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 급속한 근대화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 현대 조경은 기능주의라는 거대한 명분 앞에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도시는 많은 것을 얻은 반면 많은 것을 놓치고 말았다. 조경이 처음 이 땅에 도입되었을 시기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선진국과 비교한다면 양적, 질적인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공원들은 그 기능들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도시는 과거처럼 절대적인 녹지의 부족으로 신음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친 것 역시 작지는 않다. 도시는 물리적 실체이면서 문화적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도시를 하나의 물리적 실체로만 간주하여 기능의 측면만을 고려해왔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문화적 텍스트로서의 도시는 우리에게 잊혀져 갔다. 서울은 역동적이고 활기찬 도시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서울은 우리에게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지금 서울이라는 도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도쿄, 뉴욕, 상해의 이야기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현재 서울에는 공식적으로 176개의 문화재가 등록되어 있으며 97개의 문화유적지가 있다. 이 외에도 관심을 기울인다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장소들을 서울 곳곳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소수의 장소만을 제외하고 이들은 우리에게 그 어떠한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서울은 600년의 기억을 간직한 채 입을 닫았고 우리는 장소(Place)를 잃어버렸다. 장소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우리는 정체성과 고유성을 상실하였다. 이제 고속성장의 시대는 끝났다. 우리가 70년대와 다른 가치관 속에 살고 있듯이 우리의 장소도 다른 가치관 속에서 성장해야 하다. 서울은 갑갑한 실어증의 상태에서 벗어나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되찾아야 한다. 이제 장소의 상실과 그 회복에 대한 논의를 탑골 공원을 통하여 진행해나가고자 한다. 과거 (Past) 일년 여 동안의 설계기간과 공사과정을 거쳐 탑골 공원은 지난 3월 1일 새로운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탑골 공원 재정비 계획의 공식적인 명칭은 [탑골 공원 성역화 공원 재정비 계획]이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탑골 공원은 두 가지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3. 1운동의 의미를 상징할 수 있는 성역화된 장소로의 재탄생이고 하나는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의 재정비였다. 이를 거꾸로 유추하자면 재설계 이전의 탑골 공원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과거의 탑골 공원이 단순히 상징적 공간으로서, 그리고 쾌적한 공원으로서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공간이며 잃어버린 장소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 장소가 지니는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설계 이전부터 탑골 공원은 이미 한국인들에게 3. 1운동과 독립정신을 상징하는 기호로 받아들여져 왔다. 탑골 공원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명백하게, 그리고 비교적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탑골 공원은 역사를 상징하는 매개물로서의 공간이 아닌 실제로 3. 1운동이 일어났던 역사적 장소이다. 그리고 공원 안에는 그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공원 자체는 직접적으로 역사적 사건을 지시한다. 3. 1운동과 파고다 공원의 역사적 의미도 한국인들에게 상식의 수준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일정 수준 이상의 동의를 얻고 있다. 때문에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굳이 3. 1운동이나 독립을 연상하게 할 매개물이 없어도 탑골 공원은 그 자체로 역사적 의미와 사건을 상징하는 기호가 된다. 탑골 공원의 입지와 주변 장소와의 인문적 관계 또한 탑골 공원이 지니는 의미에 기여를 한다. 탑골 공원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나의 기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탑골 공원이 시민들이 매일 마주치는 일상의 장소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탑골 공원은 입장권을 내고 방문해야 할 장소도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야 할 장소도 아니다. 탑골 공원은 서울의 최대 번화가 중 하나인 종로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시민들을 위해 공개된 공공장소이다. 때문에 탑골 공원의 의미가 가벼운 것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리 없이 이를 일상 속의 기호로 받아들인다. 공원으로서의 탑골 공원 역시 반드시 실패작이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분명 디자인의 측면에서 볼 때 과거의 탑골 공원은 훌륭한 공원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기존 탑골 공원의 디자인에 대한 진양교 교수의 평을 들어보자. "파고다 공원을 잘 들여다보면 (아니 자세히 볼 필요도 없다.) 설계의 서투름이 역력하다. 각 공간들의 용도와 기능이 분명찮고 왜 그 공간들이 나누어졌는지도 확실치 않다. 녹지들은 조각조각 나있고 녹지들 사이의 공간은 길인지 마당인지 불분명하다. 한마디로 공간가름의 기초가 안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나마 그런대로 괜찮은 것이 있다면 공원 부지의 북단 즉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는 곳 뒤쪽을 돌아가는 보행로 정도이다." 그러나 설계의 측면에서 볼 때 그 조악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공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용자 수의 측면에서만 보면 탑골 공원은 가장 성공적인 서울의 소공원 중 하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탑골공원은 빈약한 설계내용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아야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이다. 이러한 결과는 공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재설계 이전의 이용자가 대부분 노인층이었다는 탑골 공원만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하여 탑골 공원을 노인들만이 북적거리게 되었는지는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져있지는 않다. 하지만 "한강"이라는 소설을 통해 본 파고다 공원의 이러한 독특한 모습은 60년대 초부터 있었음은 분명하다. 다른 세대들에게는 배타적인 성격을 갖는 노인들만의 공간이 된 탑골 공원의 모습이 고쳐져야 하는지 유지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분명 "노인들의 장소"로서의 특징이 탑골 공원이 제시하는 또 다른 기호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탑골 공원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는 공간이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탑골 공원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상징적 기호가 명백하게 나타났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의 장소가 명확한 기호를 지닌다고 해서 그 장소가 생명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탑골 공원은 거대한 의미를 지닌 채 우리에게 침묵을 지켜왔다. 사람들은 탑골 공원을 지나치며 3. 1운동을 머리 속에서 떠올렸을 뿐 그 정신이나 의미를 체험하지는 못했다. 지난날의 탑골 공원은 3. 1운동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박제된 유물 이상은 아니었으며 탑골 공원이라는 장소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공허한 지식에 불과하였다. 하나의 역사적 장소가 존재한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1919년 3월 1일의 감동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게 그 때의 정신을 느끼라고 하는 것은 무리이다. 1902년 탑골 공원이 세워졌을 때 탑골 공원은 독립정신이나 민족정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그 후 역사를 통해 이 장소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고, 독립 선언서가 탑골 공원에서 낭독된 지 8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이제 장소는 그 이야기를 잃어가고 말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자연히 오늘날에 탑골 공원이 살아있는 장소로서 생명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또한 이용자의 수가 많다고 하여 공원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고는 볼 수가 없다. 빈약한 설계 내용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넘쳐나는 이용자는 공원자체의 성격보다는 다른 요소에 기인한다. 노인층이라는 특수한 집단이 한 장소를 점유함으로써 나타나는 효과와 공원이 서울의 가장 번화가인 종로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입지적 특징이 이러한 탑골 공원의 불가사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용자의 수의 측면에서 공원의 성공여부를 판가름한다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셈이다. 탑골 공원이 서울 시내 최초의 근대 공원으로서 문을 열었을 100년 전과 현재의 탑골 공원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탑골 공원이 자리잡고 있는 종로 거리의 성격 자체가 크게 변화했으며 탑골 공원 바로 옆에 위치하는 인사동 거리는 문화의 거리로 선정되어 서울 제 일의 관광명소가 되어있다.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기에 J. M 브라운이 설계한 100년 전의 탑골 공원은 힘겨워 보인다. 과거의 탑골 공원이 현재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할 수가 없는 모습이라면, 그리고 원래의 설계가 열악하여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면 탑골 공원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 탑골공원의 기본 구상안 변신 (Metamorphosis) 탑골 공원의 재설계 작업은 분명 어려운 작업이다. 탑골 공원 내에는 하나하나 무시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유물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장소가 갖는 기호들은 중첩되고 얽혀있어 접근자체가 용이하지 못하다. 이러한 장소에 서울시는 탑골 공원의 역사적 상징성과 위상의 회복을 재설계의 제 일의 목표로 제시하였고 지난 11월 25일부터 현상공모를 실시하여 그 중 하나의 안이 채택되었다. 실제 시공되어 모습을 드러낸 탑골 공원의 모습은 설계안이 제시한 모습과 다른 점도 있으나 전체적인 구성이나 개념들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탑골 공원이 어떠한 방식으로 과거의 탑골 공원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잃어버린 장소를 회복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탑골 공원 재설계에 있어서 설계가는 3. 1 운동의 발생지로서의 장소가 지니는 역사성을 전체 설계의 핵심 주제로 삼고 있다. 탑골 공원은 다중적인 기호를 갖는 장소이다. 설계가는 이 모든 기호를 수용하기보다는 하나의 기호를 선택함으로서 다른 기호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이러한 설계가의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특히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원각사비의 문제에 있어서 논란의 여지는 커진다. 실제로 탑골 공원은 3. 1 운동의 발생지이기 전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원각사가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원각사는 세조의 명에 의해 1464년 건립되어 조선 초기에는 조계종 본사로 번성한 사찰로서 현재 탑골 공원 내에는 원각사와 관련된 두 개의 유물이 있다. 문제는 그동안 독립운동의 발상지로서 탑골 공원이 지니는 역사성에 가려있었을 뿐, 두 유물을 통해 드러나는 탑골공원과 원각사의 관계는 무시하지 못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이와 관련하여 탑골공원 재정비 사업에서 그 동안 간과되어왔던 원각사의 역사성을 독립운동의 발상지로서의 역사성과 동등하게 부각시켜달라는 불교계의 계속적인 요구가 있어온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안에 있어서 이러한 탑골 공원과 원각사와의 관계는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다. 원각사비는 산책로 구석으로 물러나 버렸고,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설계의 중심에서 빗겨나 있다. 설계안에 의하면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상징 기호로서 설계에 반영하려는 의도가 나타나기는 하나, 실제적으로 석탑은 사라져도 전체 설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부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설계안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노인들의 공간으로서의 상징성 역시 탑골 공원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였다. 과거의 탑골 공원은 40년 이상이나 노인들의 공간이었으며, 노인들이 유일한 만남과 정보교환의 장으로서 이용되어 왔던 장소였다. 3. 1운동과 원각사가 역사적 기호로서의 탑골 공원을 상징한다면, 노인들은 사회적 기호로서의 탑골 공원을 상징해왔다. 그러나 재설계된 탑골 공원에서는 특별히 노인들을 고려한 요소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기념적 공간을 조성하면서 노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은 더욱 줄어들었고 이는 관리 측의 의도와 맞물려 결과적으로는 탑골 공원은 더 이상 노인들의 장소가 아니게 되었다. 탑골공원의 다른 기호들을 부수적인 요소를 돌리면서 한가지 기호만을 선택한 설계가의 결정은 후에 이용자들이 어떠한 해석을 내리며 새로이 태어난 탑골 공원이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줄 지에 따라서 그 정당성이 판가름 날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설계가의 선택이 옳았다는 편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왜냐하면 탑골 공원이 지니는 다중적인 기호들을 모두 수용하다가는 자칫 의미의 과부하가 걸릴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탑골 공원은 그리 큰 장소가 아니다. 그에 비해 탑골 공원의 의미들은 너무나 다양하며 무겁다. 이 협소한 장소에서 모든 의미들을 동등하게 말하려한다면 장소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두서를 잃고 결국 아무런 것도 전달할 수 없게될 가능성이 크다. 어차피 설계는 선택의 문제이다. 설계가의 판단에 의해 필요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요소들은 제거되고 선택된 요소들은 기호로서 받아들여져 하나의 장소를 구성해나간다. 이렇게 볼 때 독립운동의 발생지로서의 역사성은 탑골 공원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기호이고, 이를 설계의 중심으로 선택한 설계가의 선택은 최선의 것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하나의 기호를 선택한 설계가는 자신의 설계언어를 동원하여 장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장소의 실어증을 치유해 간다. 설계가는 탑골 공원의 전체적인 공간을 기념광장과 상징광장이라는 두 개의 공간으로 분절하고, 두 공간이 3. 1운동과 독립정신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기념광장은 전형적인 기념 공간(Memorial)의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공간은 전쟁기념관이나 독립기념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형적이고 대칭적인 구도를 갖는다. 입구에서부터 팔각당까지 이어지는 축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기념비가 놓여있고 반대쪽에는 손병희 동상이 놓인다. 이 곳은 손병희 선생 동상, 3. 1운동 기념비, 기념탑, 성역화 취지문 등을 통하여 3. 1운동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들려준다. 반면 또 하나의 공간인 상징광장은 비유와 은유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상징광장은 팔각당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주변으로 마사토 포장이 된 광장이 있고 다시 광장을 탑골 공원 전체를 순환하는 산책로가 둘러싼다. 이러한 형태는 브라운이 조성한 탑골 공원의 원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를 통하여 새로운 탑골 공원은 과거의 탑골 공원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단절되지 않은 역사성을 표현한다. 공간의 구심점이 되는 팔각당은 탑골 공원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유물로서 3. 1운동의 정신을 대변하며, 그 주위로 광장 바닥에 설치된 무명석은 이차적으로 장소의 역사성을 전달한다. 광장은 전체적으로 자연석 1개의 높이만큼 올려져있어 당시의 군중 집회를 원형으로 상징하며 주변과는 다른 성역을 암시한다. 이러한 상징의 요소들이 이용자에게 올바로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걱정했던 것인지 광장 한편에는 10개의 부조상이 설치되어 3. 1운동의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 아래로 절개를 상징하는 자생 국화류를 식재함으로써 헌화의 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기념광장과 상징광장은 하나의 강한 축으로 묶여져 있지만 두 공간의 분리는 명확하다. 바닥의 포장, 식재의 밀도, 구성에 있어서 두 공간은 대비를 이루며 공간적으로 구분이 된다. 여기에 두 공간의 경계를 전시벽이 수직적으로 가름으로 다시 한번 두 공간의 다른 성격을 나타낸다. 왜 설계가는 이토록 두 공간의 구분에 집착을 하는가? 두 공간상의 명확한 차이만큼이나 두 공간의 화법은 다르다. 설계가는 이 두 가지 화법을 통해 동일한 주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려 했고, 여기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성격의 상징성을 통해 전체적인 탑골 공원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점은 기념광장이 지니는 직접적 화법이 상징광장이 상용하는 간접적 화법을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 때문에 오히려 상징광장이 지니는 상징성은 퇴색해버리고 기념광장의 강한 언어가 전체적인 탑골 공원의 상징성을 표현한다. 의미의 무게중심이 기념광장으로 몰리면서 탑골공원 전체의 상징 체계는 큰 결함을 갖게 된다. 상징광장은 탑골 공원의 장소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3. 1운동의 의미를 구현하고 있는 반면, 기념광장은 직접적으로 장소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기념비, 동상 등 실제적으로 탑골 공원과 무관한 요소들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기념광장이 탑골 공원 전체의 의미를 지배하게 된다면 결국 탑골 공원은 그 장소를 통해서가 아닌 전혀 무관한 요소들로부터 상징성을 이끌어내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탑골 공원의 의미 구현 방식은 안내판의 글을 통해 장소에 의미를 강요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계획상으로 상징광장에서 장소의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 도입된 요소들이 실제 현장에는 설치되지 않았거나 변경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상징광장에 방사형으로 설치될 계획이었던 무명석과 광장주변의 원형단은 실제 공원에서는 설치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팔각단을 둘러싼 광장의 성역으로서의 상징적 의미는 거의 퇴색해버렸으며 팔각단의 상징성 역시 약해졌다. 또한 광장 전면에 설치될 계획이었던 10개의 부조상이 산책로 안으로 들어가면서 부조상은 광장의 상징성에 기여하는 요소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상징광장 내의 설계요소들이 기념광장내의 요소들보다 의미전달의 기능이 불분명했다는 점에 있다. 조경공간의 기호들에 있어 상징은 직접적으로 의미를 지시하는 지표나 유상에 비해 그 의미의 전달 정도가 떨어진다. 따라서 상징의 기호들은 다른 직접적 기호들에 비해 더 강력한 상위의 의미를 내포하거나 형태나 규모에 있어 보다 명백히 인지되어야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상징광장에서 사용된 상징의 요소들은 그 의미의 비중에 있어 기념광장의 기호들과 큰 차이가 없으며 인지의 가능성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 정도가 더 떨어진다. 기념광장의 의미구현 요소들이 공간 전체의 의미를 지배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면 상징광장의 요소들은 소품이나 장식 수준의 미약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상징광장에서 사용된 의미의 기호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주제를 형성하고 있기보다는 기능적 장소를 꾸며주는 이차적인 요소처럼 받아들여지며 당연히 전체적인 의미의 무게중심은 기념광장 쪽에 실리게 된다. 새로운 이야기 (New Story) 이러한 설계가의 선택과 결과는 이용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흥미 있는 사실은 이용자들의 반응이 연령층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노인층에게 있어 기념광장이 주는 상징성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며, 이를 통한 3. 1운동의 정신은 탑골 공원 전체에 훌륭하게 반영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반면 젊은층은 기념광장의 언어를 다소 권위적이고 식상한 것으로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젊은층에게 상징광장이 각 상징적 요소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제대로 해석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상징광장 자체는 일반 근린공원과 큰 차이가 없는 기능적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젊은층은 탑골 공원은 상징적 공간으로서는 실패했으나 기능적 공간으로서는 성공한 장소로 평가한다. 두 이용자 층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상징광장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인 탑골 공원의 의미는 기념광장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공통된 인식에도 불구하고 탑골 공원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기념광장의 언어가 노인층에게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젊은층에게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잭슨(J. B. Jackson)은 라틴계 국가의 기념적 행사와 미국의 기념적 행사를 비교하면서 한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특성으로 인해 그 국가의 국민이 선호하는 기념성은 확연히 달라진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이와 유사하게 잭슨은 에릭 이삭(Erich Issac)의 글을 인용하면서 한 민족의 경관에 대한 인식은 그 민족의 종교적 성격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고 말한다. 탑골 공원에서 나타나는 두 이용자 층의 다른 평가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노인층에게 동상, 기념비와 같은 기념광장의 각 설계 요소들이 전달하는 직접적이고 안정된 의미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며, 이러한 혼란의 여지가 적은 의미 구현 방식은 전체적인 탑골 공원의 상징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에 젊은층에게 직설적인 기념광장의 언어는 구태의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현대의 정서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기념광장 밖에서 또다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고, 기념광장의 상징성을 탑골 공원 전체의 상징성으로 간주하여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호와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두 집단 간의 해석의 차이는 장소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장소의 의미는 각 집단에게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따라서 설계가가 하나의 의미만을 강요한다면 그 장소는 또 다시 침묵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새로운 탑골 공원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이곳이 노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탑골 공원에 가본다면 어린아이에서부터 젊은 연인, 중년의 부부 그리고 과거 탑골 공원의 터주대감이었던 노인들까지 거의 모든 세대가 벤치나 그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탑골 공원의 모습에는 약간 서글픈 배경이 있다. 관리자인 서울시가 의도적으로 노인들을 탑골 공원에서 몰아낸 것이다. 서울시는 일체의 장기, 바둑 등의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노인들의 오락물들을 빼앗아 버렸고, 1시간이상 탑골 공원에 머물 수 없다는 조항을 둠으로써 결국 노인들은 탑골 공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설계가는 노인의 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지켰으나 설계자가 짐작하지 못한 다른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장소의 기호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노인들의 추방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모든 세대가 공유하며 공감을 얻는 지금의 탑골 공원의 모습이 그다지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더 이상 탑골 공원은 과거의 탑골 공원이 아니라는 점이며 탑골 공원은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복을 위한 첫걸음 (The First Step to Recovery) 이제까지 탑골 공원을 통하여 장소의 상실과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다. 탑골 공원은 분명 우리가 그대로 간과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장소였고,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겪어야만 했던 장소였다. 그리고 현상공모를 거쳐 탑골공원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 변화한 모습에 대해서 나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다. 설계가의 의도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그 의도를 구현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완벽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탑골 공원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기에는 이르다. 장소는 이용자와 대화를 나누고 교감을 함으로써 그 진정한 모습을 되찾아 간다. 탑골 공원은 이제 그 첫걸음을 디뎠고 아무도 탑골 공원이 어떠한 모습으로 성장할지는 모른다. 분명 탑골 공원은 그 성공의 여부를 떠나 우리 조경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도였다. 왜냐하면 탑골 공원은 기능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성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조경 작품들은 정체성이나 역사성, 지역성이라는 주제를 다루어오기는 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주제들은 기능을 꾸며주는 하나의 장식요소로 전락했고, 그것이 하나의 목적이라고 보다는 수단이 되어왔다. 이제는 한국의 현대 조경은 기능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들은 잃어버린 장소들에 그 눈길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그 장소들이 잃어버린 이야기들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장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이젠만(Peter Eisenman)은 장소를 "팰림세스트"-깨끗한 표면을 만들기 위해 이전에 서명되었던 것이 지워진 양피지-에 비교하였다. 장소는 장소 위에 쓰여지며 장소가 갖는 기호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계속되는 지워짐과 재발견의 과정 속에서 장소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장소의 의미는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의미 위에 다른 의미를 덮어씌우게 된다. 이런 장소를 다루는데 우리의 언어는 아직 미숙하다. 때문에 우리는 탑골 공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봐야 한다. 탑골 공원은 막 그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장소의 회복에 대한 소중한 조언이 될 것이다. 우리는 탑골 공원의 불평과 자부심을 통해 다른 장소가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4월의 어느날 나는 탑골 공원의 팔각당을 바라본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어머니들을 본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들을 본다. 말없이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는 노부부를 본다. 관광책자 들고 말을 묻고 있는 독일인 관광객을 본다. 그리고 손병희 선생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팔각당을 바라본다. 그 둘은 같은 장소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나는 탑골 공원이 자랑스럽다. 100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사라지거나 박제화 되지 않고 살아있는 그 곳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 역시 이처럼 아름다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문화재조경수리기술자 시험정보(4)
    지난호에 이어 문화재보호법의 중요내용을 소개한다(단, 번호는 편의상 붙여놓은 것이며, 원문은 소제목 우측에 표기된 법, 시행령, 시행규칙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또한 이번호에는 문화재보호법과 함께 시험의 당락을 좌우하는 중요한 과목인 한국사와 조경사의 참고자료가 될 기출문제의 유형을 소개한다. 참고로 한국사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사까지 폭넓게 공부해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으며 조경사의 경우는 조경기사 시험준비서를 통해 정리하되, 특히 한국조경사는 동양조경사책으로 정리를 해두는 것이 득점에 유리하다. 7장. 벌칙 64. 무허가 수출 등의 죄 [법 제80조] ①지정문화재, 가지정문화재를 법21조 1항의 규정에 위반하여 국외로 수출, 반출하거나 반출한 문화재를 기한 내에 다시 반입하지 아니한 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고 그 문화재는 몰수한다. ②법76조 1항의 규정에 위반하여 문화재를 수출, 반출하거나 반출한 문화재를 다시 반입하 지 아니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고 그 문화재는 몰수한다 ③국외로 수출 또는 반출하는 정을 알고 당해 문화재를 양도·양수 또는 중개한자는 3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고 그 문화재는 압수한다. 65. 허위지정 등 유도죄 [법 제80조의2]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지정문화재 또는 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게 한 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66. 손상 또는 은닉 등의 죄 [법 제81조] ①국가지정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 제외) 지정된 문화재를 손상·절취 또는 은닉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②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1. 지정문화재 또는 지정문화재(건조물 제외) 손상·절취 또는 은익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 2. 일반동산문화재인 것을 알고 일반동산문화재를 손상·절취 또는 은닉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 ③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2천만원이상 1억5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현상변경의 허가 또는 변경허가를 받지 아니하고 천연기념물을 박제 또는 표본으로 제작한 자 2. 제1항·제2항 또는 ③항1호의 규정에 위반한 행위를 알고 당해 문화재를 취득·양도·양수 또는 운반한 자 3. 2호의규정에 의한 행위를 알선한 자 ④제1항 내지 제3항의 경우에 당해 문화재는 이를 몰수한다. 몰수하기가 불가능한 때에는 당해 문화재의 감정가액을 추징한다. 67. 도굴 등의 죄 [법 제82조] ①지정문화재 또는 가지정문화재의 보호물 또는 보호구역 안에서 허가 없이 매장문화재를 발굴한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②제1항 이외의 장소에서 허가 없이 매장문화재를 발굴한 자, 이미 확인되었거나 발굴중인 매장문화재포괄지역의 현상을 변경한 자, 매장문화재발굴의 정지 또는 중지명령에 위반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도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③제1항 및 제2항의 규정에 위반하여 발굴되었거나 현상변경된 문화재를 그 정을 알고 유상이나 무상으로 양도·양수·취득·운반·보유 또는 보관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7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④제3항의 행위를 알선한 자도 제3항의 형과 같다. ⑤법 제43조의 규정에 위반하여 매장문화재를 발견한 후 이를 신고하지 아니하고 은닉 또는처분하거나 현상을 변경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⑥제1항 내지 제5항의 경우에 있어서 당해 문화재는 이를 몰수한다. 68. 가중죄 [법 제83조] ①단체 또는 다중의 위력을 보이거나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여 법 제80조 내지 제82조의 죄를 범한 때에는 각 본조에 정한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한다. ②제1항의 죄를 범하여 지정문화재 또는 가지정문화재를 관리 또는 보호하는 자를 死傷에 이르게 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69. 사적 등에의 일수죄 [법 제85조] 물을 넘겨 문화재청장이 지정 또는 가지정한 사적·명승 또는 천연기념물이나 보호구역을 침해한 자는 2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70. 기타 일수죄 [법 제86조] 물을 넘겨 사적·명승·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 이외의 지정문화재, 가지정문화재나 그 보호구역을 침해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71. 과실범 [법 제88조] ①과실로 인하여 제85조 또는 제86조의 죄를 범한 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업무상 과실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제82조제3항·제85조 또는 제86조의 죄를 범한 자는 3년 이하의 금고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제82조제3항의 경우에는 당해 문화재를 몰수한다. 72. 구역외 무허가 반출 등의 죄 [법 제89조] ①다음 각 호의1에 해당하는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허가 없이 지정문화재 또는 가지정문화재를 그 보관 또는 연고의 장소나 구역 밖으로 반출한 자 2. 허가 없이 지정문화재 또는 가지정문화재의 현상을 변경하거나 기타 그 관리·보존에 영양을 미치는 행위를 한 자 ②제1항의 경우에 그 문화재가 자기소유에 속하는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73. 행정명령 위반 등의 죄 [법 제90조] ①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자는 3년 이하의 지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3호의 경우에는 그 물건을 몰수한다. 1. 정당한 사유없이 법25조 제1항 또는 법제71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한 명령을 위반한 자 2. 허가를 받지 아니하고 법 제20조 제1호의 행위를 한 자 3. 허가를 받지 아니하고 지정문화재의 보호구역 또는 사적·명승·천연기념물(시·도지정 문화재, 문화재자료 중 기념물 포함)로 지정 또는 가지정된 구역안에 시설물 등을 설치하거나 그 현상보호에 영향을 미칠 행위를 한 자 4. 천연기념물(시·도지정문화재 중 기념물 포함)로 지정 또는 가지정된 동물의 서식지·번식지·도래지 등에 그 생장에 해로운 물질을 유입하거나 살포를 한 자 74. 관리행위방해 등의 죄 [법 제91조]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정당한 사유없이 법 제45조의 규정에 의한 매장문화재의 발굴을 거부·방해, 기피한 자 2. 정당한 사유없이 지정문화재 또는 가지정문화재의 관리권자의 관리행위를 방해한 자 3. 정당한 사유없이 이 법에 의한 공무원의 직무집행을 거부·방해, 기피하거나 허위의 자료를 제공한 자 4. 지정문화재 또는 가지정문화재의 관리·보존의 책임이 있는 자가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당해 문화재를 멸실 또는 훼손하게 한 자 5. 이 법에 의한 보조금을 그 교부목적 외의 용도에 사용한 자 6. 허위의 신고 또는 보고를 한 자 7.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구역이나 그 보호구역의 界標를 고의로 파괴·이동·제거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구역의 경계를 식별할 수 없게 한 자 8. 허가없이 법 제20조 제3호에 규정된 행위를 한 자 75. 공개명령위반 등의 죄 [법 제92조] 문화재청에 등록하지 아니한 자로 하여금 지정문화재를 수리하게 한 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초경량 맞춤형 인공지반 녹화토양 - 과거 10여 년 동안 인공지반 녹화토양의 대명사로 알려진 펄라이트계 인공토양인 「파라소」는 투수성 보수성 등의 물리성이 우수하고, 양분보유력이 없어 수목의 과성장을 막아 하중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나, 반대로 양분보유력이 없어 초기 수목활착율이 떨어지고, 다량의 비료성분을 요구하는 초화류 및 잔디 등에 있어서는 생육이 양호하지 못하였고, 표면건조로 인해 토양입자의 비산 및 증발량 과다 등의 문제점이 대두되었다. 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위해 (주)삼손에서는 국내 및 국제 특허출원된(국내특허출원 : NO. 01-0038922, 국제특허출원 : NO. 01143467.8) 「기능성 펄라이트」를 활용하여 양분보유력(CEC ; cation exchangeable capacity) 및 비료성분의 량을 조절하여 수목의 성장조절이 가능하고, 초화류 및 잔디의 생육을 건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육성용토양 「바이오 파라소」와 토양입자의 비산 및 증발량 과다 등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표토층 「바이오 파라소탑」을 개발하게 되었다. ▲ 바이오 파라소 육성용 토양과 바이오 파라소탑 토양(좌,우) 바이오파라소 바이오파라소는 입도별 팽창펄라이트에 기능성 펄라이트를 용도에 알맞게 최적비율로 배합하여 팽창펄라이트의 단점인 양분보유력을 향상시키고, 식물별 특징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구별되는 초경량 맞춤형 인공토양이다. 특징 1. 적용용도와 식물별 특징에 맞는 양분보유력과 비료성분을 함유하여 어떠한 식물이라도 건전한 생육이 가능하고, 용도별로 일반조경용, 잔디용, 초화류용, 발코니용, 실내조경용으로 세분화하였다. 2. 인공지반상부의 열악한 환경조건 하에서도 건전한 식물생육과 건축물 보호 및 손쉬운 유지관리가 가능하도록 배수·통기·보수·경량·단열·내구성 및 수목지지력 등 각종 토양 물성이 양호하다. 3. 순수 무기질 토양으로 분해 및 소실의 염려가 없어 시간이 경과하여도 안정적인 식재기반조성이 가능하다. 4. 포화흡수시 중량이 450kg/㎥ 미만으로 기존의 파라소 600kg/㎥와 일반토양의 1800kg/㎥보다 가벼워 하중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바이오파라소탑 기능성 펄라이트를 활용한 인공지반 상부 녹화토양의 마감용 표토층 토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