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무 노구치의 모에레누마공원
모에레누마로 가는 길 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8월, 일본 홋카이도의 삿포로에서 모에레누마(モエレ沼)를 찾아가고 있었다. 약 10년 전,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파리의 라빌레트공원(La Villette Park)을 찾아가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빨강색 폴리와 초록색 녹음이 어우러진 감각적인 라빌레트를 보면서 “이것도 공원이구나, 공원을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2003년 8월, 지금도 비슷한 설레임 속에서 또 다른 공원을 찾아가고 있다. 왜일까? 나는 모에레누마공원에 대해 몇 가지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공원의 조성기간이 무려 20년이 넘었을까? 60만평(189ha)에 이르는 대규모 평지공원을 왜 시가지 외곽에 만들어야 만 했을까? 이 공원을 디자인한 이사무 노구치(イサム?ノグチ)는 분명 조각가 인데 어떻게 공원을 디자인하게 되었을까? 과연 조각가가 디자인 한 공원은 어떤 모습일까? 세 번째와 네 번째 의문은 본 글의 핵심부이니 뒤로 미루자. 원래 모에레누마는 삿포로의 북동부를 흐르는 토요히라강(豊平川) 지류의 범람원이자 늪지대였다고 한다. 요즘의 우리 상식으로는 당연히 친환경적인 보전을 하여야 할 대상인데도 삿포로시는 이 곳을 쓰레기매립장으로 사용함과 동시에 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엉뚱한 발상을 한다. 아마 삿포로 북동지역의 새로운 거점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생각한다. 1979년부터 매립을 시작하여 1982년부터 공원의 기반공사를 개시하고 270만 톤의 쓰레기가 매립된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원 조성을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이곳은 삿포로시 Leading Project의 일환으로 삿포로시 환상그린벨트 중 북동부 녹지벨트의 거점으로 계획한 것이다. 모에레누마공원과 이사무 노구치 내가 알고 있는 이사무 노구치는 세계적인 조각가이다. 일반적으로 조각은 일상생활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할 경우가 많고, 조각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기획적인 이벤트나 특정을 목적을 위해 녹지나 공원 속에 조각들이 놓여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왜 조각가가 공원을 설계하였을까? 그것도 60만평이라는 큰 땅을....”이라는 일련의 의문은 노구치에 대한 몇몇의 평전을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 노구치는 1904년 미국 LA에서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924년 레오나르도 다빈치 스쿨에 입학하여 조각을 배운 후 세계적인 조각가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태생에 대한 배경과 어린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근거로 하는 “귀속으로의 소망”은 노구치의 예술적 철학이 되었고, 이것이 모에레누마공원의 디자인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구치는 돌과 흙을 통해 여러 가지 모양을 가진 자신의 고향을 찾았던 것 같다. 이 때문에 어떤 평전에서는 노구치는 인생과 일을 떼어 놓고 보아서는 안되며, 그를 과감히 “지구인”이라 칭하고 있다. 원래 지구에는 국가, 국경, 인종의 구별이나 차별, 이데올로기 등이 없고, 인간, 동물, 물고기, 새, 벌레, 식물, 돌, 등 모두가 그것을 거처로 하는 모체이자 인간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활동의 장소이듯이, 그는 평생을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묶는 일에 골몰했던 것 같다. “나의 창작에 대한 정열의 뿌리는 공간과 조각에 사람의 감성을 스며들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심미적인 목적만이 아니며 환상적 이미지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 즉 일상생활에 어떤 의미를 주고 역할을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1986년 10월, 이사무 노구치 이런 예술적 철학을 가지고 있던 노구치는 1988년 봄 우연히 모에레누마를 만나게 된다. 모에레누마공원은 어떻게 보면 60여 년 동안 어린시절을 동경하며 자신이 품고 있던 자연과 조각의 만남을 통한 새로운 Playscape 창조를 위해 모든 것을 쏟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마치 곧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노구치는 1988년 5월부터 7여 개월 동안 작업을 마치고, 한 달 후인 12월에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모에레누마공원은 노구치의 유작이 되었다. 강 동 진 Kang, Dong Jin 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조경 ; 사람과 땅이 어울린 이야기 (17) - 10월 ; 물, 그 허허로움의 존재여
물은 조경가가 다루는 소재들 중 수목, 지형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3대 소재의 하나이다. 물은 흐르기도 하고 고이기도 한다. 주변의 상황에 순응하는 까닭이다. 또한 물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원형의 그릇에 담으면 원형 못이 되고 정방형의 그릇에 담으면 정방형의 못이 된다. 정해진 모습이 달리 없다는 얘기다. 물의 다양한 속성과 그 속성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는 일과 물이 외부공간에서 실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도 그리 재미없는 일은 아니지 싶다.
물의 속성 - 흐르는 물과 고인 물
물은 흐른다. 물은 늘 어느 곳을 향하고 있다. 도랑을 흐르는 물이 그렇고 하천과 강을 흐르는 물이 그렇다. 빗물의 형태로 하늘을 떠난 이후 물은 줄기차게 낮은 곳을 향한다. 우리가 외부공간에서 만나는 물은 그 물이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건 물이 겪을 또는 이미 겪어 온 긴 여정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간혹 물은 증산(蒸散)의 형태로 나머지 과정을 생략하고 다시 하늘로 오르기도 하지만 그 양은 많지 않다. 물의 끊임없는 움직임은 피할 수 없는 물의 숙명처럼 보인다. 또한 흐르는 물은 소리를 낸다. 물은 흐를 때보다 떨어질 때 더욱 큰 소리를 낸다. 개울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한편 물은 흐르지 않는다. 연못의 물이 그렇고 호수와 바다의 물이 그렇다. 어쩌면 그동안 끊임없었던 물의 움직임은 이곳에 와 지친 몸을 가누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움직임을 멈추고 다소곳이 고인 물은 면(面)을 만든다. 그 면은 이름그대로 완벽한 수평면(水平面)이다. 몸은 뉘였으되 물의 표피는 주변의 변화에 반응한다. 바람의 움직임을 받아들여 몸을 떨기도하고, 바람이 없는 경우에는 거울처럼 주변의 모습을 비추어낸다. 마치 자신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물의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속성, 움직임을 멈춘 채 면을 만드는 속성, 주변사물을 비추어내는 속성, 소리를 내는 속성 등은 오래 전부터 외부공간을 만드는 이들로 하여금 물을 주의 깊게 바라보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돼왔다. 물은 다양한 속성만큼이나 사람들에게 다양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고인 물은 사람들에게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마음이 번잡할 때 연못가나 호숫가를 따라 걸으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정방형이나 장방형 또는 원형 등 기하학적 형태의 그릇 또는 수조(水槽)에 담긴 물은 경건함과 엄숙함을 전달한다. 반면 흐르는 물은 즐거움을 준다. 물의 생동하는 활력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흐르는 물이 내는 소리도 먼 길을 떠나 물을 찾아 온 사람들의 지친 심성을 끌어올리는데 적격이다. 물은 사람들의 심성을 자극하기도 하고 흥분된 심성을 갈아 앉히기도 하는 묘한 존재다. 외부공간에 물을 쓸 수만 있다면, 그리고 흐르는 물을 쓸지 고인 물을 쓸지를 제대로 결정만 할 수 있다면 외부공간의 성공은 어느 정도 예약되어있다고 보아도 좋다.
이슬람제국의 물 - 경건한 물
이슬람제국의 문화는 물이 귀한 곳에서 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문화였다. 이베리아반도 (지금의 스페인)의 남부 그라나다지방은 7세기 무렵부터 이슬람의 무어왕조가 자리를 잡았던 곳인데, 무어왕조에 의해 14세기 때 만들어진 알함브라(Alhambra) 궁(宮)은 물의 온갖 속성이 모두 이용된 장소로 유명하다. 파티오(patio)라고 부르는 중정(中庭)에 놓인 장방형 또는 정방형의 못은 화려하고 섬세한 이슬람양식의 건축물을 있는 그대로 아니 더 아름답게 투영하고 있다. 좁고 긴 수로들은 건물을 연결하는 수단이었고 사람들의 동선을 따라 적절히 놓여졌다. 게다가 당시 이슬람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끌어 온 물을
낮은 곳으로 보낼 때 물을 관으로 보내고 낮은 쪽 출수구(出水口)의 입구를 좁게 만드는 방식, 즉 자연유압을 이용해 물을 분출시키는 효과도 낼 줄 알았다. 그게 분수(噴水)의 효시였다. 자연유압을 이용한 알함브라궁의 분수는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에 전달되어 훨씬 더 화려해졌다. 시간이 있으면 해 볼 일이지만 알함브라궁의 배치도에서 건물과 녹지를 그대로 두고 물만 지워보면 이상하게도 건물과 녹지가 별 연관 없이 따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물을 원래대로 그려보면 전체의 궁 배치도가 활발하고 완전해진다.
알함브라 궁에서 물은 건물과 외부공간을 일체화시키는 촉매이고 수단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이에 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17세기 인도 무굴제국의 타지마할(Tadsch Mahal) 궁(宮)도 이슬람 문화에 속해있다. 궁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종묘처럼 마할이라는 왕비를 추모하기 위한 일종의 묘지건축물이긴 하지만 어쨌든간에 궁의 정면에 놓인 좁고 긴 장방형 못은 궁의 모습과 양 옆의 수목을 투영하고 있는데 그 아름다움이 가슴 뻐근할 정도다. 달밤에 물에 비친 타지마할은 과히 압권이라고 전해진다. 이 장방형의 수조는 마할왕비를 흠모한 샤자한 왕의 기대답게 방문자들에게 경건함을 주는데 크게 성공하고 있다. 알함브라와 타지마할에서 물의 존재는 그 크기는 작을 지라도 궁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타지마할의 좁고 긴 장방형 못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재현된다. 링컨기념관과 오벨리스크 모양의 워싱턴기념탑을 연결하는 폭 40미터, 길이 2킬로미터 (정확한 수치인지는 모르겠다)의 장방형 못은 워싱턴 디시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링컨기념관과 워싱턴기념탑을 투영시키고 있는 워싱턴의 장방형 못은 그 엄숙함과 강인한 힘이 자못 대단해서 마치 미국의 국력을 상징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 양 교 Chin, Yang Kyo·(주) 토문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무소 부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