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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드로잉 마스터하기: 보기, 생각하기, 만들기
알리스테어 맥인토시(ASLA)의 조경스케치조경가 알리스테어 맥인토시(Alistair McIntosh, 이하 맥인토시)의 갖가지 스케치북들이 작업준비를 위해 책상에 놓여있다. 색연필, 먹칼, 흑연, 목탄, 붓, 노란 트레이싱지 뭉치, 몽블랑 만년필, 그리고 제도용 스케일도 함께 보인다. 작은 계산기와 블랙베리 휴대폰만이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전자장치이다. 화면을 완성해주고 있는 커피 한 잔과 두 개의 사과가 하루를 위한 영양소이다. 그의 책상에 보이는 작은 포켓 크기에서부터 풍경화 판형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네다섯 개의 스케치북들은 그가 그의 동료들이나 더 나아가 세계 조경가들이 하는 일과 다른 독특함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과 함께 다른 사람이 출력해놓은 캐드 도면들도 책상의 한켠을 채우고 있다. 그는 과거에서 해왔던 스케치와 연습 방식을 통해서 세심하고 계획적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필자는 그가 과거 수세기 동안 조경가, 화가, 그리고 다자이너들이 해왔던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면서 그것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형태로 변화시켜 묘사가 가능한 디자인 도구나 미래를 위한 프로세스로 삼음으로써, 조경 설계의 진보 적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그림 1).
The many and varied sketchbooks of landscape architect Alistair McIntosh lie open across his desk ready for work alongside collections of colored pencils, ink pens, graphite sticks, charcoal, brushes, rolls of yellow trace, Mont Blanc fountain pens and drafting scales. A small calculator and a blackberry cell phone are the only electronic devices intruding on the scene. A cup of coffee and two green apples for nourishment during the day complete the ensemble. But it is the four or five sketchbooks of all sizes from pocket to landscape format that mark his desk as quite different from his colleagues and indeed unique from many landscape architects working around the world. There is little sign of a computer screen, although printed construction CAD drawings by others also litter his desk. He is giving studied attention to the daily work of landscape architecture through the ancient act of personal sketching and study. He represents, in my opinion, a forward looking and projective view of landscape design as one that still follows in the traditions of landscape architects, painters and designers from previous centuries yet manages to transform it into a personal yet accessible form of communication and representational design tool and set of processes for the future.(Figur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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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
Museong Seowon무성서원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에 위치하며, 면적은 5,507㎡으로 고려시대에 고운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태산사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후 조선조 숙종 22년(1696)에 신잠의 사당과 병합하여 “무성武城”이란 이름으로 사액된 이후 신개, 정극인, 안세림,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의 위폐가 봉안되는 등 필암서원, 표충서원과 함께 호남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경내에는 태산사, 현가루, 명륜당, 강수재, 전사청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68년 12월 19일에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Museong Seowon which is located in 500, Museong-ri, Chilbo-myeon, Jeongeupsi, Jeollabuk-do is 5,507㎡ area. It origins from Taesansa that was constructed to praise Choi Chi-Won, and it was merged with the shrine of Shin Jam in the 22th year of King Sukjong’ reign(1696) and was named “useong” Shin Gae, Jeong Guk-In, An Se-Rim, Jeong Eon-Jung, Kim Yak-Muk, Kim Gwan is enshrined in Museong Seowon, and it represents Jeolla province with Piram Seowon and Pyochung Seowon. The aesthetics of adaption is connected spatially, topographically, and functionally with Hyeongaru, Myeongnyundang, Gangsujae and Gojiksa. It was appointed as national historical relics no.166 in 19th of December,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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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기 환경과조경 통신원 간담회
가슴 뛰는 우리들의 힘찬 행보를 위해지난 4월 3일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에 위치한 환경과조경 사옥에서는 2010년‘<환경과조경>제26기 통신원 간담회’가 환경과조경, (주)랜트의 주관아래 개최되었다. 이번 간담회는 오 휘영 환경과조경 편집인 겸 발행인을 비롯 전국 31개 대학의 신임 통신원과 전임 통신원, 환경과조경 및 랜트 주식회사 직원 등 약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지난 2월 신년회 모임 이후 두 번째로 갖는 모임이었지만, 모든 통신원들이 참여한 첫 공식행사 였다.오전 11시, 서울역에 집결한 26기 통신원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탑승하여 행사 장소인 파주출판단지로 향했다. 처음 보는 설레임과 다시 만난 기쁨 속에서 서로에게 정다운 인사를 나누었다. 이후 파주출판단지에 도착하여 4조로 나뉜 26기 통신원들은 손석범, 강진솔 기자의 인솔아래 파주출판도시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듣고 1시간 동안 답사를 하였다.답사를 마친 후에 환경과조경 사옥으로 향했으며 사옥에 도착해서는 잠깐의 휴식을 가진 후 조별로 편집·출판기획실, 총무·관리실, 업무기획실, 인터넷사업부, 디자인부 등을 차례로 이동하면서 사옥을 견학하였다. 우리가 매달 접하는 월간 <환경과조경>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또 어떻게 우리들 손에 들어오게 되는지를 직접 볼 수 있었던 뜻 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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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회장에게 듣는다
(사)한국조경학회 차기회장(제20대) 양홍모전남대학교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10년 3월 26일 (사)한국조경학회 이사회에서 차기 학회장에 당선된 전남대학교 교수 양홍모입니다. 차기 학회장으로 선출해 주신 학회 고문, 임원, 회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조경학회 회원 여러분들과 한국조경의 비전을 공유하고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면서, 조경의 큰 꿈을 나누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의 임기 중에 회원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하는 중요한 일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한국조경사회 차기회장(제16대) 이민우(주)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대표이사(사)한국조경사회(이하 조경사회)의 고문, 임원들을 비롯한 회원들의 격려와 성원 속에 차기 회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조경에 대한 식견이 아직 미흡한 저를 믿고, 열심히 일하란 뜻으로 밀어주신 여러분께 송구스럽지만 미약하나마 최선을 다해 봉사와 희생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동안 전임 회장들의 활동을 보면 조경사회의 회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부회장, 수석부회장을 마치고 현재 감사직을 수행하면서 조경사회를 이끌고 나가는 회장단의 노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장이라고 해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조경계 선후배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 속에서만이 조경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취임 전까지 남은 기간 동안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30년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발전전략을 세워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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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Oksan Seowon옥산서원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58에 위치하며, 면적은 26,075㎡로 선조 5년(1572) 경주 부윤 이재민李齋閔(1528~1608)과 유림의 공의로 문원공 회재晦齋이언적李彦(1491~1553)을 배향하기 위해 서원의 입지가 정해지고, 선조 6년(1573) 경주의 서악西岳향현사鄕賢祠에 있던 위패를 모셔와 창건하였다. 이후 선조 7년(1574“) 옥산玉山”이름으로 사액된 이후, 주향자인 이언적이 동방 5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는 등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2대 서원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경내에는 체인묘, 구인당, 민구재, 암수재, 무변루, 역락문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67년 3월 8일 사적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造營_ 조선조 선조 5년(1572) 경주 부윤인 서간 이재민과 유림의 공의로 회재1 이언적2을 배향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선조 7년(1574) 선조로부터 사액을 받게 되었다. 이후 조선왕조의 서원 진흥책에 힘입어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특히 주향자인 이언적이 동방 5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자, 그 영향력은 크게 증대되었다. 동서·남북 분당 이후 이언적이 이황과 함께 남인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하자, 옥산서원은 도산서원과 더불어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자리 잡았고, 남인의 세력이 약화된 인조반정, 갑술환국 이후에는 집권 서인 또는 노론계에 비해 세력이 많이 위축되었다. 옥산서원이 중앙정계로부터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영·정조 때이다. 이후 서원의 남설濫設과 부패로 고종 5년(1868)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게 된 서원이 47개가 있는데 그중에 옥산서원도 포함이 된다.3 현재 서원 내에는 정문인 역락문亦樂門,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한 체인묘體仁廟, 화합·토론 등 서원 내의 여러 행사 때 사용하는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제기를 보관하는 제기실祭器室,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학문을 닦는 곳인 민구재敏求齋·암수재闇修齋,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 이언적의 신도비神道碑를 모신 신도비각神道碑閣, 내사전적內賜典籍과 이언적의 문집 및 판본을 보관하던 경각經閣·판각板閣4 등이 있다.立地_ 옥산서원은 동북쪽의 화개산華蓋山이 주산, 서쪽의 무학산舞鶴山, 북쪽의 자옥산紫玉山으로 둘러싸인 지형적인 조건과 전망 때문에 서향을 하고 있으며,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자계5 내 징심대와 세심대 일원에 입지하고 있다. 주변 환경으로는 양동마을, 독락당6 등이 있다.
空間構成_ 1)配置形式서원의 배치는 전면에 강학처講學處를 두고 후면에 사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서원 건축구조로 되어 있는데, 중심축을 따라서 문루·강당·사당이 일직선을 이루며, 중심축선상의 마당을 중심으로 공간감을 가지며, 각각의 고유의 영역을 구성하면서,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전체적인 배치의 구심점이 되는 무변루, 구인당, 체인묘 일대의 공간을 핵으로 하며, 경각, 문집판각, 신도비각, 고직사 등이 지반의 차이를 두며 개별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7 특히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은 사람 키보다 높지 않게 조성되어 아늑한 위요감을 주며, 한편으로는 건축물과 자연 사이의 완충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를 공간 전이적인 면에서 보면, 서원의 진입로에서 먼저 측면의 담장과 함께 고직사로 통하는 문이 보이고, 우측에는 1972년 새로 건축된 청분각이 보이며, 좌측의 자계계곡과 함께 서향의 정문인 역락문 앞의 넓은 공간이 사야에 들어온다. 역락문을 통해 들어서면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이곳을 건너면 무변루라는 누각이 나타나고, 이어서 계단을 오르면 마당이 펼쳐진다.8 정면에는 구인당이란 당호의 강당이 있고, 좌우에는 원생들의 기숙사격인 민구재, 암수재가 강당의 기단보다 낮은 단 위에 있으며, 동·서 재실은 서로 마주보며 대청과 온돌방의 위치가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강당 앞마당에는 야간조명을 위하여 관솔불이나 기름을 올려놓고 태우던 정료대가 위치하고 있다. 한편 강당을 옆으로 돌아서서 뒤로 가면 이언적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체인묘라는 사당이 나타나는데, 사당의 주변에는 장판각·전사청·신도비 등이 있다.
주석1.“회재(晦齋)”라고 한 것은 주희의 호인 회암(晦菴)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으로, 회재의 성리학은 퇴계에게 이어져 영남학파의 선구가 되었다. 한편 회재의 시호인“문원(文元)”은 조선조 도학의 선구자임을 나타낸다.2. 이언적은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으로 본래 이름은 적(적)이었는데, 후에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덧붙여 언적으로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언적은 주희의 주리론(主理論)적 입장을 성리학의 정통으로 밝힘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설서(說書), 이조 정랑, 홍문관 교리, 직제학, 전주 부윤, 이조, 예조,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명종 2년(1547) 이른 바“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江界)에 유배된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3. 일반적으로 서원에는 연혁을 간단하게 기록한 고왕록(考往錄)이 있는데, 옥산서원의 경우 19세기「고왕록 1집(1816-1873)」만이 전하고 있는 바, 최초 창건 당시 전사청 및 고직사 부분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최초 40여 칸이었다는 것과 1816년 고청에 대한 중수기록이, 1835년에는 판각(板閣)에 대한 개축이, 1839년에는 강당에 불이 나 이듬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4. 옥산서원은 현존하는 서원 문고 가운데 많은 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현재 두 곳에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하나는 서원 경내에 있는 어서각(御書閣) 소장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언적의 사저에 있는 독락당에 있는 소장본이다. 보관된 책 중에서 1513년에 간행된《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은 현재까지 발견된 활자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책으로 보물 제52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밖에《삼국사기》《해동명적》《이언적수필고본일괄》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5. 서원은 앞으로 흐르는 자계(紫溪)의 너럭바위 위에 위치하며, 너럭바위는“세심대(洗心臺)”라고 불리는데, 계곡물이 이루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6. 독락당(獨樂堂)은 회재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의 사랑채이다.조선 중종 11년(1516년)에 건립된 독락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온돌방(1칸×2칸)과 대청(3칸×2칸)으로 되어 있다. 특이사항으로는 독락당 옆쪽 담장에 살창을 달아 대청에서 살창을 통하여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특출한 공간구성과, 독락당 뒤쪽의 계정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보여준 것이다.7. 역락문에서 체인묘까지는 크게 4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심에 강학공간인 구인당이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낮은 단부터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1개의 축에 놓여있어, 상, 중, 하의 위계성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정신적으로도 제일 높은 곳에 사묘를 두어 성현에 대한 존엄과 외경심을 높이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이는 성리학의 근본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경(敬)”의 공간이 위계적 질서체계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8. 역락문과 마당과의 1.6m의 단 차로 인해 루 하부의 문을 통해서도 마당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며, 누하(樓下) 진입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무변루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강당인 구인당이 시야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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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PRA 한국위원회 창립총회 및 국제 심포지엄
‘국제공원 및 레크리에이션 행정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Park and Recreation Administration) 한국위원회(IFPRA Korea)’의 창립총회 및 국제 심포지엄이 지난 2월 26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되었다. IFPRA는 “공원, 레크리에이션, 어메니티, 여가 대책과 관련되는 서비스의 진흥을 위한 국제적 네트워크 촉진”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공원의 경영과 관리 분야에 대한 국제 조직으로서, 한국위원회는 지난 1월 27일 개인 85명, 지방자치단체 5곳, 기업 및 단체 18개, 언론사 5개가 참여한 가운데 발기인대회를 갖은바 있으며, 이번 창립총회를 계기로 공식 출범하게 되었다.이 자리에는 조세환 회장((사)한국조경학회), 김영수 공동대표(녹색건축청색도시시민디자인연대, 이하 녹청련), 최광빈 국장(서울시 푸른도시국), 홍기문 처장(LH공사 녹색경관처) 등 국내 인사를 비롯해 IFPRA의 Rob Small 회장, Alan Smith 사무국장, Yoritaka Tashiro 일본 커미셔너, Paul Wilson 아시아태평양지역 회장 등 주요 인사가 직접 방한해 참석함으로써 IFPRA 한국위원회의 출범을 격려하고 축하해 주었다.전영창 IFPRA 한국 커미셔너의 사회로 진행된 창립총회에서 IFPRA 한국위원회 위원장에 조세환 회장((사)한국조경학회), 자문위원에 권영걸 회장((사)공공디자인학회), 김영수 공동대표(녹청련), 양병이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 등 3명, 부위원장 9명, 운영위원 30명의 임원진이 구성됐으며, 또 커미셔너는 그동안 IFPRA 한국위원회가 창립되기까지 산파 역할을 한 전영창 사무국장(전국파크골프연합회), 간사는 창립총회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안승홍 교수(한경대), 감사는 이창환 교수(상지영서대)가 맡게 되었고, 회장단회의를 통해 감사 1인을 추가 선출하기로 했다.
오후에 시작된 IFPRA 한국위원회 창립 기념 국제 심포지엄은 “녹색경영과 한국 도시공원의 미래”를 주제로 기조연설과 주제발표, 토론의 순으로 진행되었다.먼저 IFPRA의 Rob Small 회장은 ‘21세기의 도시공원’이라는 주제의 기조연설에서 최근의 기후변화, 도시과밀, 다문화주의, 건강 및 웰빙, 생물종 다양성, 노년 및 유년인구 등 6개의 사회적 이슈를 화두로 던지며 “Global & Local Agenda 점검을 통해, 현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 경제 및 환경적 도전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공원서비스를 재정의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역설하였다.주제발표 이후 토론회는 엄서호 교수(경기대)를 좌장으로 김덕삼 교수(경원대), 박정숙 교수(경희대), 배상우 교수(고려대), 윤진환 과장(국토해양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전영창 커미셔너(IFPRA Korea)가 참석한 가운데 ‘21세기 도시공원의 변화와 공공 서비스의 역할과 경영’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대부분 공원의 ‘이용프로그램의 다양성 확보’,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 ‘시민참여의 확대’ 등을 강조하였다.
이번 IFPRA 한국위원회의 창립은 그동안 공원의 조성에만 몰두해오던 우리나라가 이제 이용자 중심의 공원 경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더욱이 조경가는 물론 정책을 뒷받침할 행정가, 다양한 문화적 컨텐츠를 담아낼 문화·예술인 등 공원의 조성과 운영 및 관리의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글로벌 네트워크와 교류를 통해 새로운 공원문화를 창출하게 될 전기를 마련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다. 앞으로 IFPRA 한국위원회가 한국의 도시공원과 세계의 도시공원을 연결하는 네트위크를 이루면서 명실공히 공원의 질적 성장을 이끌어 내는 기구가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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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공원과 정원만들기 국제 심포지엄
도시, 정원을 꿈꾸다지난 3월 11일 경기도, 시흥시, 경기농림진흥재단 주최, (재)희망제작소 주관, 산림청, (사)한국조경학회 후원으로 창조적인 공원과 정원만들기 국제 심포지엄‘도시, 정원을 꿈꾸다’가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국제 심포지엄은 도시 안의 정원을 꿈꾸는 일반 시민들과 함께 정원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진정으로 도시 내 정원의 주인이 누가 되어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 심포지엄은 경기도가 2010년 10월 2010경기정원박람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하여 정원박람회가 지역사회와 어떻게 연계되는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국외 사례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개최한 것이었다. 2010경기정원박람회의 개최를 앞두고 비전과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을 당부한 안양호 지사(경기도 행정1부) 의 개회사로 시작한 이날 행사에는 많은 환영사와 축사가 있었는데, 환영사를 위해 시흥시 김윤식 시장과 (재)희망제작소 유시주 소장이, 축사를 위해 조정식 국회의원과 (사)한국조경학회 조세환 회장이 각각 단상에 올랐다. 이날 조세환 회장은 축사를 통해 경기정원박람회가 도시 행사로 기록될 수 있는 전초작업이 될 것을 기대하고,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정원박람회의 성격과 방향, 디자인, 실천전략, 기술, 산업화, 마케팅 등 다양한 주제가 종합적 관점에서 폭넓게 논의되기를 당부하였다. 또 행사 이후 정원박람회 장소인 시흥시 옥구 공원을 도시전략적 관점에서 어떻게 시민과 함께 최고의 브랜드로 경영하고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준비도 잊지 말아야 함을 덧붙였다.
다음으로 2010경기정원박람회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업무제휴협약서 체결식이 진행되었다. 경기도, 경기농림진흥재단, 시흥시는 도시정원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도시의 브랜드 가치향상 및 정원문화 정착을 위하여 업무제휴를 맺고 서로가 힘써줄 것을 기대한다고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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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u Seowon
소수서원Sosu Seowon which is located in 158, Naejuk-ri, Sunheung-myeon, Yeongju-city, Gyeonsangbuk-do is 7,504㎡area. After constructing in order to enshrine An-Hyang, it was given the name “aekwoondong Sosu Seowon”in the 5th year of King Myeongjong’ reign(1550). It is the first Seowon in Korea, and An-Chuk and Ju-SeBung is enshrined. The aesthetics of adaption is connected spatially, topographically, and functionally with Myeongryundang, Ilsinjae, Jikbangjae, Yeongjunggak, Jirakjae, and Hakgujae. It was appointed as national historical relics no.55 in 21th of January, 1963.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8에 위치하며, 면적은 7,504㎡으로 중종 38년(1543) 회헌晦軒안향(安珦, 243~1306)을 배향하기 위해 서원을 완성한 후, 조선 명종 5년(1550)“백운동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이후, 안축安軸, 주세붕周世鵬등을 배향하고 있는 국내 최초의 서원으로, 명륜당, 일신재, 직방재, 영정각, 지락재, 학구재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造營_조선조 중종 36년(1541)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이 곳 출신 학자인 안향1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를 설립하였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서원2을 설립한 것이 서원의 시초이다. 이후 중종 39년(1544)에 안축, 안보 형제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명종 1년(1546)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후손 안현安玹(1501~1560)의 노력으로 서원의 경제적 기반이 확충되고 운영방책이 보완되어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그후 명종 3년(1548) 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서원을 공인화하기 위해 1549년 1월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沈通源(1499~?)에게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1484~1555)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여“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紹而修之”는 뜻을 담은 소수紹修로 결정하고“백운동소수서원”이라고 명명했다. 즉‘소수’는 순흥에서 폐지된 학교를 다시 세워 단절된 도학을 잇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세조 2년(1456) 순흥으로 유배된 세종의 다섯째 아들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의 단종복위 밀모사건으로 인해, 순흥부가 풍기군의한 면面으로 편입, 강등되고 순흥향교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명종 5년(1550) 2월 21일“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는 왕명에 의해 성리학의 정통성을 서원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후 인조 11년(1633)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남설濫設과 부패로 고종 5년(1868)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현재 서원 내에는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 회헌영정(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85호), 주세붕 영정(보물 제717호) 등의 중요한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으며,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 명륜당, 일신재, 직방재, 영정각, 전사청, 지락재, 학구재, 서장각, 경렴정 등이 있다.立地_소수서원은 풍기 순흥면 동북쪽 영구봉靈龜峰아래 부석사로 가는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 동, 남, 북쪽으로는 죽계수3가 위요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송림이 위치하고 있다. 서원건립 전에는 숙수사라는 절터로서 지금도 목탑지와 당간지주(보물 제59호)4, 석등 등이 남아있다. 주변 환경으로는 부석사, 병산서원, 화천서원, 하회마을 등이 있다.1. 안향은 백이정(白正, 247~1323)과 함께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이를 표방하면서 고려문화를 혁신하고자 한 첫 세대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49년 11월 원나라에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 가지고 왔으며, 주자를 흠모하여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하여 자신의 호를 회헌으로 하였다. 1297년 12월 후원에 정사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으며, 1303년에는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 지방에 보내어 공자와 칠십 제자의 화상,그리고 문묘에 사용할 제기, 악기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1304년 국학의 대성전이 완성되자,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문묘의 제도를 갖추게 하였다. 1304년 그는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해 적극적으로 주자학을 수용하고, 국내 보급을 위해 노력한 성리학자이다. 충숙왕 6년(1319)에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문묘 동무(東) 종사(從祀)되었다.2. 백운동서원은 중국의 주희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차용한 것으로, 주세붕은 그가 편찬한“죽계지(竹溪志)”서문에 사묘와 서원을 세우게 된 동기에 대하여,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존현(尊賢)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을 모시는 사묘를 세웠고, 겸하여 유생들의 장수를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3. 주세붕은“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記)”에서“왼쪽으로는 죽계수가 휘감아 흐르고 오른쪽에는 소백산이 높이 솟아 구름과 산과 언덕과 물줄기가 실로 여산(廬山)에 못지않다”,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이곳을‘백운동’이라 하였고, 감회에 젖어 배회하다가 사당건립의 뜻을 갖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4.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은 마주보는 면의 바깥면 중앙에 세로띠를 새기고, 꼭대기에서 1.17m 밑에서 부터 2.34m 까지 사이가 면이 쑥 들어가 있어서 마치 넓은 홈을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네모난 기둥 끝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늘어지고, 맨 끝은 둥글게 경사지도록 하였다. 꼭대기 끝 안쪽 면에는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현재는 지주 양쪽으로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있으며, 전체적으로 소박하며 돌을 다듬은 솜씨가 세련되어 보인다. 현 소수서원입구 소나무 숲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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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ye Seowon
남계서원 Namgye Seowon which is located in 586, Wonpyeong-lee, Sudong-myeon, Hamyang-gun, Gyeongsangnam-do is 4,810㎡ area. It was given the name “amgye”in the 19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1566). It is the oldest seowon, the next to Sosuseowon, and it was reconstructed after burning down in the time of war, Jeongyujaeran. Gaeam Kang-Ik, Dongye Jeong-On, and Noigye Yu-HoIn are enshrined in the shrine. The aesthetics of adaption is connected spatially, topographically, and functionally with Jundo-gate, Jeonsacheong, Myeongseongdang, Gyeonpangak, Yangjeongjae, Aeryeonheon, Boinjae, Yeongmaeheon, and Pungyeongru. It was appointed as national historical relics no. 499 in 26th of May, 2009.
남계서원은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번지에 위치하며, 면적은 4,810㎡로 조선조 성리학에 있어 오현의 한 사람인 일두一정여창鄭汝昌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건립을 결의한 후,조선 명종 19년(1566) “남계 溪”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이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복원하여 개암介庵강익姜翼, 동계桐溪정온鄭蘊, 임계林溪유호인兪好仁 등을 배향하고 있는 국내에서 소수서원 다음으로 오래된 서원으로, 풍영루, 명성당, 양정재, 보인재, 경판각, 애련헌, 영매헌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2009년 5월 26일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었다.
造營_남계서원은 일두一정여창(鄭汝昌, 1450-1504)1 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명종 14년(1559) 강당, 1561년 사당, 1564년 동재와 서재 그리고 연당을 완성하면서 그 후 1566년 서원 곁의 시내 이름을 따서“남계 溪”2라는 사액을 받았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선조 38년(1605)에 나촌羅村으로 터를 옮겼다가, 선조 43년(1612)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중건되었다.3 이후 숙종 1년((1675) 동계 정온,(1569~1641)이 서서西序에, 숙종 15년(1689) 강익이 동서東序에 추가 배향되었다. 그리고 별사別祠에는 임계 유호인(1445~1494)과 정홍서가 배향되었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별사는 훼철되었다. 현재는 교육적 기능이 없어지고 제향기능만 남아있으며, 『어정오경백편』·『고려사』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立地_남계서원은 연화산(443.2m)을 주산으로 백암산을 안산으로 득수 형국을 이루는 구릉에 위치하여‘신향인좌申向寅坐’‘, 전저후고前低後高’의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지형 및 수계적 측면에서는 서원 앞으로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이 흐르며, 안산인 백암산이 사원을 마주보고 있다. 한편 근경으로는 원평마을 일대가, 원경으로는 남계천 너머 개평마을 이차경된다.4 주변 환경으로는 함양 상림, 화림구곡 등이 있다.
空間構成_1)配置形式서원의 공간구성은 홍살문, 하마비, 풍영루 등의 진입공간, 애련헌, 영매헌, 연지 등의 유상공간, 명성당, 양정재, 보인재 등의 강학공간, 내삼문, 사당 등의 제향공간, 고직사 등의 지원공간을 가지는‘전학후묘前學後廟’ 의 배치구조를 보이고 있는 바,5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원 입구에는 하마비와 홍살문이 위치하고 있으며,6 이를 지나 정문이자 외문인 풍영루를 들어서면 전면에 앞뜰과 중정 마당 전면으로 두 개의 연지가 있으며 강당인 명성당을 마주하게 된다. 또한 강당과 누문사이에는 동재인 양정재와 서재인 보인재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으며,7 보인재 남측에 묘정비각이 있다. 한편 강당 좌측, 고직사 입구 전면에는 제향전날 제관들이 제례물을 올려놓고 품평을 하는 세단으로 된 석조 생단牲壇이, 강당 우측에는 경판각이 있다. 한편 명성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있고, 삼문을 들어서면 담장을 둘러 별도의 영역을 마련한 사당이 있으며, 또한 사당 내 전사청이 북향해 위치하고 있다. 전면에는 제향시 사당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기 위해 대야를 올려놓는 시설인 관세대와 정료대가 있다.
1‘.우강(右江)함양’의 기틀을 이룬 정여창은 세종 32년(1450년)서원 북서쪽에 위치한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에게 글을 배운 후 학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의 학문은 성리학사에 있어 하나의 큰 자취를 남겨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2.남계(溪)라는 명칭은 수동의 물 수(水)자와 연관되며, 넘칠‘濫’, 계곡‘溪’명칭은 풍수적으로 남계서원이“물 위에 떠있는 연꽃[蓮花浮水形]”을 이루는 장소에 위치하고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3.서원은 조선시대 사회윤리를 보급하고 향촌 질서를 재편성하며 지역공동체를 이끌어간 핵심공간이자 도학을 이상으로 삼던 사림세력들의 관념세계가 반영된 성리학적 이상세계이다. 이에 서원은 대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산수가 뛰어나고 조용한 산기슭이나 계곡 또는 향촌에 입지하였으며, 성격에 따라 절터 또는 퇴락한 사찰을 이용하였다. 더러는 선현의 연고지에 건립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관학인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행정적으로 조정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서원 제도에 함유된 유가적 운둔사상 등과도 연계되어 있다고 사료된다.4.남계서원은 주변 자연 경사지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는 서원 배치가 풍수사신사의 형세를 반영함은 물론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완경사지 자연지형을 활용한 공간 및 시설배치를 통하여 담 밖의 경관을 효과적으로 차경함에 있다. 즉, 담으로 둘러쳐진 서원영역은 심리적 경계일 뿐 서원 안팎의 자연은 연속성을 갖고 공유되며 통합적 시계구조를 가진다.5.서원은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의 중심축을 일치시키고, 건물들이 직각과 평행을 이루도록 정연하게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남계서원은 진입공간에서 풍영루까지의 축과 풍영루에서 명성당까지의 축 그리고 다시 강당에서 사당까지의 축이 동일 직선상에 형성되지 않고 각각 1°와 2°씩 우측으로 편향된 별도의 축선 상에 놓여있다. 또한 연지 또한 직교축선상에서 약간 벗어난 부축 상에 놓여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6.풍영루를 지나면 열린 공간이 전개되며 그 너머 동·서재 측면으로 마당이 돌출된 듯 지각된다. 이는 경사진 땅에 건물을 배치하고 적정 규모의 연지를 조성하여 시각적 균형감을 확보하였음을 의미한다.7.남계서원의 강학공간은 중심성이 상하, 좌우대칭 구도로 명확하게 분리되고 있다. 특히 강당건물은 짝수 4칸의 칸수구성이 적용되고 있는데 이는 예제적 원칙이 준용된 것으로 사료된다.
2)空間構成要素식물 _서원의 현존 수목은 서원 조영 당시와는 차이가 있으며, 또한 정확한 고증을 위한 자료 또한 부족한 실정이다. 당시 동·서재 전정의 연지에는 홍백련을 심고 그 주변에 매화와 죽을 심었는데,8 현재는 은행나무 1주와 버드나무 1주가 있으며 주변에는 무궁화, 구상나무 등이 식재되어 있고 지당내는 수련과 창포가 식재되어 있다. 또한 서원 입구와 사당 후면에는 송림이 울창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사당 후면에는 소나무 등의 일부 잔존하고 있으며, 사당 입구에는 배롱나무9가 대식되어 있다.
건조물 _1. 풍영루 _ 이층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서원 내의 경물과 동산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동시에 원경으로 멀리 전개되는 산하를 차경하기 위한 경관집점 역할을 하고 있다.2. 명성당 _ 정면 4칸으로, 중앙의 2칸 마루와 양쪽 협실 각 1칸으로 되어있으며, 왼쪽 협실은 거경재居敬齋, 오른쪽 협실은 집의재集義齋이다. 강익이 쓴『남계서원기』에 의하면“강당 이름“명성明誠”은“중용”의 밝으면 성실하다明則誠”는 뜻을 취했고“, 왼쪽 협실을“거경居敬”, 오른쪽 협실을“집의集義”라 한 것은“정자가훈程子家訓”의“경敬에 거해서 이를 궁구한다”는 내용과 맹자의“의義를 모아 산다集義以生”는 뜻에서 취했다고 한다.3. 사당 _ 정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전면에 툇 칸을 두었으며, 내부에는 정여창을 주벽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4. 양정재, 보인재10 _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인데 각각 1칸은 온돌방이고 1칸은 누마루로, 서재의 경우 증자의‘이우보인以友輔仁’에서 학문수양의 인성론을, 동재의 경우 역경의‘몽이양정蒙以養正’에서 교육의 목적론을 성리학적 가르침 등과 연계하여 건물명에 표상화시켰다.5. 경판각 _ 강학공간에 부속되는 건물로 선현 등의 문집 등을 보관, 판각하여 서적을 펴내는 목판을 보관하는 곳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우진각 지붕이며, 경판을 보호하기 위해 지면의 바닥을 높여 마루를 설치하였고 벽체도 판벽을 하였다.
8.연지에 홍백련을 심었다는 문헌 기록을 통해 유추하여 보건대, 연못에 각각 홍련과 백련을 구분하여 재식한 것은‘홍동백서(紅東白西)’의 개념에 근거해 동쪽은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 떠오르는 생명탄생과 관련 있는 홍련을, 서쪽은 음향오행의 상징색인 흰색의 백련을 재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9.배롱나무는 꽃이 오래간다 하여 목백일홍 또는 자미화라고도 불리는데 수피가 맨들거려 마치 살이 없는 백골과도 같아 보인다는 함의를 담는 식물로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였던 조선조 선비들이 선호하였던 성리학의 상징목이다.10.건물구조는 기본적인 온돌과 마루 2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한 칸을 누마루로 할애하고 있다. 동·서재의 마루인 헌(軒)은 순수한‘마루’형식에서 벗어나 지면과 이격된 루(樓)의 형태를 갖춤으로써‘당(堂)’인 마루형식과 차별화되고 있다. 이 중에 방은 땅 위에, 마루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여서, 하나의 건물 안에 전혀 다른 내용의 장소가 공존하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또한 명칭도 동재인 양정재의 누마루는 애련헌으로, 서재 보인재의 누마루는 영매헌으로 각각‘연꽃’과‘매화’완상을 통해 격물지치(格物至治)할 수 있는 장소성을 갖는다.
수공간 _연지의 경우 지내로 내려갈 수 있게 자연석의 6단(W 1.5m × L 1.5m) 계단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너비 6.35m, 길이 5.5m, 깊이 1.5m(저면 5.8m×5.3m) 규모로 수련과 창포 등이 재식되어 있지만 원래 연꽃을 심어 관상하던 공간이다. 유교에서는 연꽃을 청렴의 상징으로 보았으며, 연꽃의 텅 빈 뿌리와 줄기는 학문의 관통 즉, 학문의 기초에서부터 통달에 이르기까지 대성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그것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의 모습을 칭송하여“꽃 가운데 군자花之君子者也”라 하였다.
結_ 본 고는 조선중기 주자가례와 강독의식 같은 당대의‘예제적 틀’을 적용하여 초창기 서원 형식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점유하고 있는 남계서원의 경관건축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한 조영실제, 입지·공간구성 중심으로 기술한 바,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첫째, 조영은 일두 정여창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명종 14년(1559) 강당, 사당, 동재와 서재 연지를 완성하면서“남계”라는 사액을 받았고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선조 43년(1612)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중건 이후 향사의 기능을 수행하였다.둘째, 입지는 연화산을 주산으로 백암산을 안산으로 득수 형국을 이루는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원 앞으로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이 흐르며, 안산인 백암산이 사원을 마주보고 있으며, 주변 환경으로는 함양 상림, 화림구곡 등이 있다.셋째, 공간구조은 사당, 강당인 명성당 그리고 양정재, 보인재, 풍영루, 묘정비각 등의 건물이 강당을 중앙으로 마루와 양쪽 협실로 배치되어 있는데, 왼쪽 협실은 거경재이고 오른쪽 협실은 집의재이다. 동재인 양정재와 서재인 보인재는 애련헌, 영매헌이 연결되고 중정 마당 전면으로 두 개의 연지가 있는데 전체적 배치형식은 완경사지에‘전학후묘’의 배치구조를 가진다.넷째, 구성요소는 식물과 건조물, 수공간, 점경물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식물의 경우 사당 일원에는 배롱나무, 소나무 군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연지에는 수련과 창포 등이 재식되어 있으며, 건조물의 경우 강학의 기능을 담당하는 명성당, 동·서재, 전사청, 서원의 서비스 기능을 담당하는 고직사 등이 있다. 수공간은 동, 서재 전면부의 연지 등이 있으며, 점경물로는 제향의식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정료대 등이 있다.이로 인해 16세기 중반 조영된 강학과 제향의 기능을 담당하던 공간으로서 남계서원은 조선시대의 여타의 서원과 비교하여 주자가례 등의‘예제적 틀’을 적용하여 초창기 서원 형식이 지니는 정형성을 잘 보여주면서 축선의 어긋남을 통해 구성의 변형을 꾀하고 있다. 또한 차경을 이용해 건물과 자연의 연계된 경관구조를 이루며, 구성미가 뛰어남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러한 경관건축은 해당지역의 지형조건 등의 자연적 요소와 당시의 성리학에 바탕을 둔 사상체계, 정치체계 등의 인문적 요소가 상호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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