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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나무를 추억하다
    Reminisce about Pine Tree (상략)솔수펑이에 소나무들이 팔려가면서 놀란흙이 드러난 솔숲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경우가 숱했으므로 멀리서도 소나무가 없는 휑한 자리는 한눈에 들어왔다. 소나무들로 숲을 이루던 때를 떠올리는 일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 테지만, 저녁 빛이 비껴들 때 솔숲은 가던 길을 멈추게 했다. 붉고 늙은 소나무 보굿에 맑고 밝은 볕뉘가 스며들면 마치 관능적인 관음보살상을 보듯, 어디에서도 다시 볼 수 없는 구경거리였지만, 소나무들이 매우 흔했으므로 때때로 무관심했다. 우리 마을 숲정이를 돌이켜보면 소나무들로 빽빽했던 시절도 한때였다. 지금은 참나무류가 소나무들 보다 더 너른 영역을 차지했다. 넓은잎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는 겨울이면 왜소해진 솔숲은 한결 더 도드라져보였다. (중략)어느 집 마당에 숲에서 잘라낸 소나무들이 발구에 실려와 쌓이기 시작하면 굳이 ‘성주풀이’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그 집에서 집칸을 늘리거나 아니면 헛간이라도 짓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붕에 볏짚이엉을 올리든 기와를 올리든 집에 뼈대가 되는 것은 틀림없는 소나무들이었다. 대들보는 물론이거니와 하다못해 작은 서까래까지 모든 소나무들은 숲에서 베어다 썼다. 왕실은 물론 서민들이 짓는 집까지 소나무로 지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나무가 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먹을거리를 제사상에 올리는 까닭에 지역마다, 집집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략)마찬가지로 삼국시대부터 고분이든, 선비들 그림이든, 심지어 자주 쓰던 그릇에 등장했던 소나무도 많았던 만큼 어쩌면 제값을 받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명품’이란 이름으로 값비싸게 거래되고 있었다. 솔숲에 소나무들을 그저 바라만 보는 일이 잘하는 일은 아닐 것이지만, 어느 한쪽을 거덜 내는 짓 또한 잘하는 짓은 아닐 것이다. 깊은 산골 소나무는 방구들을 덥히는 땔감으로도 쓰여야 하고, 또 누군가의 집을 짓는 부재로도, 가구를 제작하는 데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문제는 소나무를 파낸 다음 뒤처리 문제였다. 도심의 공원이나 도시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저택으로 팔려갈 때, 소나무를 파낸 자리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일이 잦았다. 하다못해 꼴풀이라도 길러야 했지만, 도무지 산주인들은 무관심했다. 한겨울 마루에 놓인 무쇠난로에 소나무를 땔감으로 넣을 때면 사람보다 오래 사는 나무들이 내뿜는 어떤 향기는 온전히 나무 냄새만은 아니었다. 인간은 그 비밀을 영영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당장은 나무 타는 냄새만으로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 넉넉하게 기뻤다. 숲에서 사라지는 것이 어디 소나무뿐이겠는가 마는 조금 더 오랜 세월 청정한 소나무들과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을 끝내 놓지 못했다. 솔숲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어떤 묵시록은 아닐까.
  • 식영정
    Sigyongjeong 식영정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1 일원면적 28,039㎡에 위치하며, 조선 명종 때의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조영한 정자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주변에 자리한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산실인 환벽당, 취가정, 소쇄원 등과 함께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79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이후 2009년 9월 18일 명승 5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Sigyeongjeong which is located in San 75-1, Jigok-ri, Nam-myeon, Damyang-gun, Jeollanam-do was constructed by a great scholar Kim, Sung Won and his father-in-law Im, Eok Ryeong in the King MyeongJong’s reign of Joseon dynasty. It is 2gan(front) by 2gan(side) size on the center of the turtle-shaped rock. The aesthetic of adaption is connected spatially, topographically, and functionally with Sigyeongjeong, the valley and the lake. It was appointed as Scenic Spots and Places of Historic Interest no.57.
  • 전설이 되어 가는 여행
    Travellers going to be legendary 몇 달 전 나에게 이상한 프로젝트가 하나 생겼다. 폐교의 조경설계이다. 언제부터인가 폐교는 미술관, 동호회장 등으로 다양하게 변모되어 갔다. 대개 폐교를 인수한 사람들은 공공의 건물을 인수해 자신들의 취미 또는 개인적 공간으로 바꾸기를 원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주인장과의 첫 번째 회의 주제는 ‘나무의 이용가치’였다. 2차 회의 결과, 장소성을 유지하되, 나무를 살리기 위해 위치변동을 하기로 했다. 나무의 뿌리를 걷어 보니, 서로가 살기 위해 뿌리가 한 쪽으로만 뻗고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치 서로가 부부인 것 같았다. 순간 나는 “할배나무, 할매나무야” 라고 외쳤다. 조경팀이 뿌리돌림 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마지막 날 위치이동을 위해 25톤 크레인을 섭외했다. 느티나무를 드는 순간, 동네사람들이 몰려 왔다. 나무를 옮기지 말라고 항의를 했다. 자신들의 소유라고. 사실 동네의 소유는 아니다. “나무가 아파서, 잘 살리려고 잠깐 앞으로 위치 변동하는 거예요. 어르신.” “하지마. 죽든지 살든지. 그 자리에 놓아.” 어르신의 답이었다. 순간 인간의 욕심이 야속해지는 순간이었다. 알고 보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속셈이었다. 주인장은 나무를 생명으로 살리려고 하고, 어떤 이들은 단지 소유물로 보려하고, 인간들의 관점에 따라 말없는 자연생명이 어떻게 생존되는지를 아는 순간이었다. 할 수 없이 느티나무를 그 자리에 다시 묻었다. 다행히 약간 서로의 간격을 떨어뜨렸다. 세 번째 회의주제는 학교본관 앞에 있는 향나무였다. 등나무로 인해 그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었다. 처음은 살리기보다는 없애는 것이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장님의 생각은 역시 달랐다. “작업비 생각하지 말고 생명이 있는 것이니, 어떻게든 한번 살려봐” 어떻게 보면 나도 느티나무를 소유로 바라보았던 동네 어르신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 졌다. 향나무를 살리는 작업은 은단풍과 느티나무 보다 힘들었다. 등나무를 걷어내고 하루가 지나서 서서히 그 자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가려서 보이지 않는 나무들이 용처럼 보였다. 특별한 안목의 건축가가 나무들의 생명을 살렸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향나무, 호랑가시, 석류, 산수유, 동백, 목련, 소나무 등을 살려 학교 운동장에 이식하니 하나의 정원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토목이다. 학교본관과 운동장과는 약 5m 정도의 단차가 발생되었다. 내 생각은 그 단차를 완만히 하려 했다. 토목장비에게 단차를 무너뜨리라고 지시하고, 나는 식재에 집중했다. 그런데 토목장비는 단차를 무너뜨리지 않고 마치 논두렁 조성하듯 스탠드 단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공사 중지를 시켰고, 그 다음날 단차를 무너뜨렸다. 하나의 장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심한 신경이 쓰인다. 잠시라도 한 눈을 팔게 되면 의도하지 않는 일들이 발생된다. 순간의 판단력도 중요하다. 그래서 조경가는 경관위에 글을 쓰는 시인이다. 어느 정도 공사가 마무리 될 무렵, 성균관대 정기호 교수과 이 소장님이 방문하셨다. “그래. 이 소장 여기다 뭘 짓을 건데?.” “허참. 안 짓는 다니까” 이 소장님의 답이었다. 공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동네사람들도 말이 많았다. 요양원이 들어선다, 별장이 들어선다… 별 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이 소장님과 나 그리고 주인장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단지 건물 철거와 나무를 살리자는 것이었다. “그래. 정말 아무것도 안 해?” 정교수는 다시 친구에게 물었다. “그래 그대로 둘 거야. 그냥 정원부터 조성할거야. 주민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게. 앞으로 김 박사가 다 알아서 해야지.”새로운 조경시대의 서막이었다. 건축을 하고 조경이 마무리 하는 것이 보통은 관례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무엇인가 독특하다. 마을주민을 생각하는 주인장과 건축소장의 마음이 아름답다. 나무 하나도 생명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아름답다. 이번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전설이 되어가는 실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앞으로 그 땅이 어떻게 변해갈지 아직 모르겠다. 단지 나도 시나브로 생각할 것이다. 사계절, 아침과 밤, 그리고 별과 달과 바람. 이 모든 것을 느낀 후에 계획할 것이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최대한 비워둘 것이다. 진정한 대지예술은 자연이 지니고 있는 본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지금 그 곳에 가면 산수유와 목련이 봄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 벤치에 대한 불만
    Complaint about Bench (중략) 공원을 만났습니다. 아이들 놀이터가 있고 화장실과 벤치 몇 개가 놓여 있을 뿐인 공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반가웠습니다. 화장실이나 놀이기구나 벤치 등이 모두 새것이었습니다. 그곳이 공원으로 조성된 지 얼마 안 되어 보였습니다. 공원 둘레에 서 있는 나무들은 빈약해 보였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팍팍한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된 공원은 반갑기 그지없었습니다. 한숨을 내쉬면서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화장실에도 다녀왔습니다. 다리쉼을 하기 위해 빈 벤치에 걸터앉았습니다. 벤치는 등받이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한 사람씩 따로따로 떨어져 앉으라는 듯 세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쇠로 만든 낮은 팔걸이로 칸을 나눴습니다. 등을 편하게 기대고 앉아 어깨의 긴장을 풀고 싶은 사람은 앉을 수 없는 벤치였습니다. (중략)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습니다. 등받이가 없어서 어깨를 옹송그린 채 잠시 걸터앉는 것만이 허용된 벤치였습니다. 공원의 벤치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화단 턱에 걸터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노인들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나 연인들 심지어 그 동네 주민들의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벤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드러눕는 것은 안 됩니다. 입을 맞추거나 끌어안고 있는 것도 안 됩니다. 옆 사람과는 적당히 떨어져 앉아 있어야만 합니다. 오래 앉아 있어도 안 됩니다. 잠시 걸터앉아 있는 것만허용됩니다.” (중략) 늦도록 노닥거릴 수 있는 여름밤 공원을 상상해 봅니다. 도시 공원에서 잠든 아이를 안은 채 말놀음을 놀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부질없는 상상인 줄은 압니다. 그래서인지 느리게 노닥거릴 수 있는 여름날밤 공원에 대한 상상은 가닿을 수 없는 낙원의 꿈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공원을 나서기 전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벤치들은 여전히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벤치의 말이 아니라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말이 들리는 공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저귀를 찬 갓난아기와 그를 돌보는 엄마가 돋보이고 그들의 말이 들리는 환경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노인들처럼, 느리게 걷는 것이 가능한 구역이 어딘가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연구하는 정원. 파도바 대학 식물원
    L’Orto Botanico dell’Università 야 Padova 파도바 대학 식물원이탈리아 북부 Veneto(베네토)주에 위치한 Padova는 Sant’Antonio산 안토니오로 인해 전 세계에서 몰려 온 독실한 기독교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지이다. 1222년에 설립된 파도바대학6은 Bologna볼로냐대학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들 중에 하나이기에 배움에 목마른 젊은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온 도시를 누비는 활기찬 도시이기도 하다. Padova는 Breda(브레다)강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고 Venezia와 겨우 30㎞의 거리에 있어 베네치아의 영화(榮華)를 함께 누리게 된다.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베네치아의 항구를 통해 들어온 신기한 물품들 중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도 끼어 있었다. 필자가 처음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도 우리나라에서는 보지 못했던 식물들에 매료되어 종종 편지에 말린 잎을 동봉해서 보냈던 기억이 있다. 씨앗들을 가져다가 키워보려고 애쓰기도 했는데 기후의 차이와 미숙함으로 인해 성과는 낮았고, 겨우 수확한 것조차도 미니어처 수준이었다. 1997년 UNESCO에 의해 “파도바 식물원은 전 세계 식물원의 원형이고 과학의 요람이며, 과학 교류와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현대 과학, 특히 식물학, 의학, 화학, 생태학과 약학 등 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는 평가를 받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또 하나 이탈리아9에게 안겨준 이 식물원은 1545년 베네치아 공화국 상원의 결정으로 조성되었는데, 식물 연구의 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건축적 가치 또한 높다. 그 당시 식물연구에 관해 파도바 대학은 이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Theophrastos(테오프라스토스)와 같은 그리스 학자들의 식물학에 관한 작품들이 읽혀지고 토론되었다. 독일의 Albertus Magnus(알베르투스 마그누스, 1193~1280)와 고대 의학을 집대성한 Claudius Galenus(클라디오스 갈레노스)의 의학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한 Pietro D’Abano(피에트로 다바노, 1253~1316) 등 많은 학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당시는 무지無知에 의한 약물 오용이 난무했던 시대였는데 이를 바로 잡기 위해 Francesco Bonafede(프란체스코 보나페데)는 학생들에게 약용식물을 식별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 사천향교
    Sacheon Hyanggyo 사천향교는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인리 119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면적은 3,455㎡로, 세종 22년1440 치성재(致誠齋)·동재(東齋)·서재(西齋)·명륜당(明倫堂) 등의 건물을 짓고 수학원 학사서재(修學院 學舍書齋)라고 칭한 것이 효시이다. 이후 임진왜란1592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23년1645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고, 현종 5년1664 대성전(大成殿) 등을 건립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 건물로는 외삼문, 풍화루, 동재, 서재, 전사실, 명륜당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83년 8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0호로 지정되었다. Sacheon Hyanggyo which is located in 119, Seonin-ri, Sacheon-eup, Sacheon-si, Gyeongsangnam-do is 3,455㎡ area. After constructed in the 22th year of King Sejong’s reign(1440), it was used for a religious service to ancient sages as a emotional support of the Joseon dynasty. The aesthetics of adaption is connected with Daeseongjeon, Gongbansil, Chiseongjae, Myeongnyundang, Dongjae, and Seojae spatially, topographically and functionally. It was appointed as tangible cultural properties of Gyeongsangnam-do 220 in 12th of August, 1983.
  • 춘향의 전설2-초등학교의 기억
    The Legend of Chun Hyang(2) 사람들에게 정원이 있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없다고 이야기한다. 정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넓은 잔디마당과 고급스러운 나무들, 연못 등이 연상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린왕자의 정원은 장미 한 송이가 전부였다. 김 교수님의 정원은 어린왕자와 같은 장미 한 송이는 아니다. 가냘픈 시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가슴속으로는 자연을 품었다. 그의 정원에는 자유롭게 날아오는 새가 있고, 바람이 있고, 달과 별이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자연의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이 있다. 나는 그 정원을 시정(詩庭)이라 표현한다. 격식 없는 시골의 정원, 말끔하게 가꾼 텃밭에는 ‘그곳만의 영혼’이 있으며 자연의 언어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다. 그의 정원에 앉아 있으면, 자연의 색과 소리에 매료되며 그 순간 시인의 정원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시정을 거닐고 있으면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산책하는 커플과 공공 정원>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의 정원은 시인을 만드는 정원이며 예술적 영감을 주는 정원인 동시에 사랑을 꽃피우는 정원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수많은 정원을 경영해 왔다. 민가, 별서, 정자와 누 등 장소 특성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주위의 낮은 구릉지나 계류, 뒷산에 의해 자연스럽게 영역이 설정되고 정자와 연못, 샘과 경물이 적절히 배치되어 풍류공간을 조성했다. 자연이 만든 선형線形과 더불어 직선적인 요소를 가미해 화계와 방형의 연못을 만들었다. 조선시대의 정원을 경영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이상향과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자연의 순리를 근본으로 삼아 지세를 함부로 변형하지 않았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순리이기에 정원을 조성함에 있어서 물을 돌아 흐르게 하거나 폭포를 떨어지게 하거나 넘쳐나게 하였다. 조선시대 정원에는 계절의 변화가 민감하게 반영되었다. 봄이면 꽃과 신록이 움트는 것을 보며 생의 신비를 느낄 수 있고, 여름이면 시원한 녹음 밑에 한 낮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가을이면 단풍과 열매가 풍성한 결실의 시간을 만끽하며, 겨울이면 고독을 맛볼 수 있다. (중략) 달빛을 탐내다 _ 이규보 산에 사는 중이 달빛을 탐내더니물 긷는 병에 달까지 담았네절에 가면 금세 알게 될 거야물 쏟으면 달도 없어진다는 걸 우주의 세계가 펼쳐진 조선시대의 최고의 스토리텔링이다. 아마도 광한루에 담겨진 뜻이 있기에, 춘향과 몽룡의 사랑 이야기가 전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원의 묘미는 시인의 마음이 펼쳐질 때 그 의미가 풍부해진다. 비록 선현들의 호연지기와 호방함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광한루를 단순히 춘향으로만 도배하기에는 너무도 값진 문화유산이다. 용성관, 남원 구도심, 우주의 세계를 표현한 광한루, 삼신산과 오작교 등은 춘향과 추어탕에 눌려 그 본질이 사라지고 있다. 공간과 장소는 생성, 변화, 쇠퇴, 소멸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하지만 역사물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 태생적 의미와 정신세계에 대한 탐색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퇴색한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그 변화상과 본질을 찾는 여정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 둥구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여름,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신작로를 걸어온 할머니는 마을 어귀 서낭당이 보이자 비로소 허리를 폈다. 숲 기스락을 개개면서 휘돌아나가는 개울에는 난간 없는 콘크리트다리가 있었으며 그 다리를 건너기 전 숲 기스락 한편에는 당산나무가 시원하게 그늘을 펼치고 있었다. 지난 정월 초이틀 동제를 지내고 나무 밑동에 둘러놓은 하얀 한지는 한여름 뙤약볕에도 눈부셨다. 넉넉히 두 아름은 넘을 듯한 당산나무는 고묵은 소나무였다. 소나무 보굿은 지난 세월만큼 깊게 패이고 또 그만큼 켜켜이 도드라졌다. 할머니는 자잘한 돌멩이들로 울멍줄멍 탑을 쌓아놓은 당산나무 앞에 서자 가만히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친 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숙하게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하얀 코고무신에는 흙먼지가 뽀얗게 앉았다. 그렇게 잠깐 멈춰 서서 땀을 들이고 숨을 고른 할머니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기다랗게 가로놓인 콘크리트다리를 건넜다. (중략) 마을이 평안하고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한해가 시작된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정갈한 마음으로 모여 평안과 안녕을 정성들여 빌며 제사지내던 마을 입새에 있던 서낭당 당산나무는 그러나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흔적조차 없었으며 당산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난간을 두른 거대한 콘크리트다리가 들어섰다. 또한 그 개울에는 콘크리트 옹벽 같은 보가 만들어져 물길을 가두면서 그예 늙은 소나무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누구도 마을이 생긴 어느 해부터 세세연년 자리를 지켜오던 서낭당이 그곳에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숲정이 깊은 어느 계류 기스락 말라죽은 소나무 앞에서 여전히 그 옛날처럼 정월 초이튿날이면 모여서 동제를 지냈지만, 어린 사람들은 마을제사를 지내는지조차 까맣게 몰랐다. 당산나무 한 그루가 사라지면서 정결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모였던 마을 사람들 자취뿐만 아니라 풍습이 없어지면서 언어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한 마을에 살면서 골목길에서건 마을 신작로 안길에서 먼발치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사람 사이에 흔한 예의였지만 지금은 자주 볼 수 없게 되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누가 누군지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마을 당산나무, 둥구나무가 있었던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몰풍스러운 풍경이었다. 어쩌면 당산나무 한 그루가 있어 마을 사람들은 그곳으로 모여들 수 있었고, 서로 얼굴 맞대고 장기도 두고, 장기 두는 곁에서 훈수도 두면서 또 한편으로는 끼리끼리 속살거리기도 하면서 서로들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을 것이었다. (중략) 외지고 구석진 우리 동네를 비롯한 시골 마을, 많아야 30~40가구이고, 대부분 운동할 기력조차 없는 나이든 어르신들이 살고 있음에도 언제부터인가 ‘지자체’에서는 운동기구를 갖춘 공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원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느티나무며 크게 자란 소나무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어느 공원에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하얀 꽃을 피우는 해당화를 심어놓기도 했다. 나무든 꽃이든 나라 밖에서 들어오기도 하고, 나라 밖으로 나가기도 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품종조차 굳이 외국에서 들여온 식물을 심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을 안팎에 공원을 만들 때에라도 그 지역에서 자생하는 품종을 선택하면 좋지 않을까. 어느 도시를 가든 똑같은 벚나무 가로수길, 똑같은 소나무 명품길로 통일하지 말고. 요즘은 또 이팝나무 가로수길이 유행이었다. 마을 사람들 안녕을 바라며 모자라고 빈 곳을 채우기 위해 흙을 돋워 숲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던 조상들이 있었다. 거창한 비보풍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콩 세알을 심었던 그 심정으로 인간과 자연이 서로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으면 그 아니 넉넉하고 좋지 않을까.
  • 밀양향교
    Miryang Hyanggyo 밀양향교1는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733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면적은 5,068㎡로, 고려 인종 연간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는 존현공간으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조선시대 선조 25년1602 부사 최기에 의해 .대성전이, 광해군 10년1618 명륜당이 중창되었다. 특히 대성전(大成殿)은 순조 21년1821 부사 이현시(李玄始)에 의해 이건·중수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 유적으로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Miryang Hyanggyo which is located in 733, Gyo-dong, Miryang-si, Gyeongsangnam-do is 5,068㎡ area. After transferred in the 25th year of King Seonjo’s reign(1602), it was used for a religious service to ancient sages as a emotional support of the Joseon dynasty. The aesthetics of adaption is connected with Daeseongjeon, Dongmu, Seomu, Myeongnyundang, Dongjae, and Seojae spatially, topographically and functionally. It was appointed as tangible cultural properties of Gyeongsangnam-do 214 in 6th of August, 1983.
  • 춘향의 전설1-초등학교의 기억
    The Legend of Chun Hyang(1) 책을 읽는 즐거움은 나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동지가 있기에 글 쓰는 작업도 외롭지 않다. 글을 쓰면 책을 더 많이 읽게 된다. 나와 동질의 시각으로 출판된 책을 보면 내 이야기는 없어지고 그의 글을 인용하기 시작한다. 활자화된 글을 보면 왠지 세련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을 느낄 때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지면의 낭비요, 넘치는 정보의 시대에 내 글이 쓰레기가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환경과조경>에 연재하기 시작할 무렵, 신상섭 교수님(우석대학교)께서 한 권의 책을 선물해 주셨다. 지금은 선물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고 앞 페이지에 몇 자 적어 우정의 증표로 삼았던 기억이 났다. 학창시절, 서점은 약속장소였지만 대형서점으로 인해 조그만 서점들은 문을 닫기 시작했고, 급기야 대형서점도 인터넷 서점에 밀려 문을 닫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간혹 답사를 다니다 작은 서점이라도 발견하면 흐뭇한 미소를 자아내는 것, 그것은 아마도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중략) 요즘 뜬금없이 본방을 사수하는 TV프로그램이 생겼다. 일일시트콤 ‘패밀리’이다. 유전자적으로 우성인 가정과 열성인 가정이 모여 새로운 가족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내용이다. 처음에는 가족들이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 채널을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에 점차 하나의 가족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훈훈한 저녁 볼거리가 되었다. 여배우 황신혜의 변화모습이 남다르다. ‘미모의 능력 있는 이혼녀’에서 ‘가족을 배려하는 따뜻한 엄마’로 변화해 간다. 나는 이것을 장소의 원칙이라 말한다. 장소는 3인칭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1인칭 관점, 즉 실존적 장소가 되어야 맛이 난다. 전설적인 장소는 타인의 일상적 기억들을 함께 소통하고 배려할 때, 집단적 기억으로 승화되고 비로소 신화를 창출하게 된다. 우리집 동네에 신평상회가 있다. 동네의 유일한 생활필수품 창고이다. 달달한 것이 먹고 싶으면 사탕을 사러 가게에 들르곤 했다. 어느 날 나의 눈에 띄는 것은 뉴슈가와 소다였다. 달고나 혹은 띠기라고 불리는 간식의 주재료이다. 추억의 재생산이다. 그것은 초등학교 때 최고의 간식이었고, ‘사탕물고기’를 타기 위해 용돈을 투자했던 주범이었다. (중략) 흔히 역사도시, 역사경관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북촌, 전주, 안동 등의 한옥마을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 중 전주한옥마을은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전통과 상업개발주의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괴물이다. 반면 남원 구도심은 전통, 근대, 그리고 현대가 녹아든 거리 박물관이다. 일식건물의 병원, 1960~1970년대 익숙한 간판 등은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근대경관이다. 역사적 사건이 아닌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묻어져 있는 근대경관은 박물관 유리관에 전시된 문화가 아니라 시대의 정신과 한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래서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