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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조경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인가? Editorial: Is ‘Jogyeong’ Landscape Architecture?
    창문을 통과한 햇살이 이마에 떨어진다. 봄이다. 새봄이 거짓말처럼 다시 찾아왔다. 이 지면 메울 일만 없다면 내 마음도 봄일 텐데. 대강 생각만 하면 알파고가 알아서 글 써줄 그날이 어서 오길 염원하는 오후,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유학 준비 중인 제자 S다. 수다거리가 떨어질 즈음, 그의 시선이 핑크색 표지의 신간에 멈췄다. “요즘도 책 많이 사시나 봐요” “여전히 책값과 술값은 안 아끼는데, 알다시피 사기만 하고 거의 읽지는 않아.” “찰스 왈드하임이 쓴 새 책이네요.” “2월 말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이야, 『Landscapeas Urbanism』. 왈드하임이 자신의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관련 글과 논문들을 다시 구성해 엮은 책이야.” “이제 한 20년 됐죠? 아직도 실체를 잘 모르겠지만, 참 희망을 많이 걸었던 개념이에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그래도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우리 시대의 조경 담론인 건 분명한데, 그 이론적 체계와 실천적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도 물음표가 공존하지.” “이제 한때의 유행이라고 평가하고 폐기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글쎄, 난 여전히 기대를 걸고 있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이면의 역사적, 이론적, 문화적 조건을 광범위하게 탐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동시대 도시의 쟁점을 조경의 시선으로 탐색하는 기획이라는 점에서, 이번 책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번역하시게요” “출판사 편집장님 설득할 겸 우선 서문과 서론 번역을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난관이야.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라는 용어 자체의 번역이 제일 문제야.” “선생님은 계속 그렇게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해 오셨잖아요.” “내 책임이 커. 2000년쯤인가 『환경과조경』 지면에 처음 소개하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확한 번역어를 짜냈어야 하는데, 무책임하게 발음 그대로 표기해버렸어. 그대로 통용되면서 가뜩이나 모호한 개념이 더 혼란스러워졌어.” “잘 알려진 언어학 이론을 살짝 대입해 보면, 활자화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라는 기표signifiant를 보고 어떤 기의signifié를 일치시킬 수 있는 독자가 몇 명이나 있을지 의문이긴 해요.” “게다가 한글로 된 책 곳곳을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라는 말로 반복해서 도배하면 아무리 유려하게 번역을 해도 읽는 게 거의 불가능해져. ‘보그병신체’가 따로 없는 우스꽝스러운 글.” “저는 조경과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함께 나오는 부분에서 특히 황당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았어요. 조경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번역한 말인데,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은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어색함을 넘어서 이상해요.” “아주 중요한 포인트야. 사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의 핵심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의 아키텍처 자리를 어바니즘으로 대치한 데 있어. 가치, 지향점, 태도, 방법 모두를 아키텍처에서 어바니즘으로 돌리고자 한 거지. 마치 랜드스케이프 가드닝landscape gardening 이라는 전통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19세기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가 탄생한 것처럼.” “그런데 랜드스케이프 가드닝은 풍경(화)식 정원술(이나 조원),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는 조경,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은 그냥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으로 쓰니, 그 관계와 함수를 읽어낼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아요.” “너무나 아쉬운 일이지만 ‘조경’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큰 문제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 학부생 때였던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공이 조경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잘 이해하질 못해. 기표와 기의가 불일치하는 거지. 아, 나무랑 꽃 심고 정원 만드는 거, 그럼, 나무 잘 알고 좋아하시겠네요, 정도로 반응해. 그러면 말문이 막혀서, 아뇨, 공원을 설계하고 단지도 계획하고… 정도로 얼버무리게 돼.” “저는 조경이라고 말한 다음에 꼭 ‘영어로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에요’, 이렇게 덧붙여요. 그러면 사람들이 뭔가 알아듣는 표정을 짓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방법이 있구나. 그런데 조경에 해당하는 영어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조경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가 아니고,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조경으로 번역한 거지. 이 번역어 ‘조경’이 문제의 핵심이야. 1970년대 초반 우리의 제도권 조경(학) 창립자들은 미국식 개념인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수입해 고심 끝에 조경이라는 말로 옮겼어. 그런데 이 전문 분야의 역할과 가치는 새로웠던 데 반해, 분야 명칭으로 선택된 조경은 이미 다른 뜻으로 통용되던 말이었어. 1920년 일간지부터 원문을 제공해주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검색해 보면 1962년부터 조경이라는 단어가 기사에 등장하기 시작해. 1960년대에 쓰인 조경이라는 말의 뜻은 대략…” “말할 필요도 없겠죠. 나무랑 꽃 심고 돌 놓는 것, 관상수 재배, 가드닝…” “그래,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언어 속에서 조경은 바로 그 조경이야. 조경을 하나의 학제discipline이자 전문 직능profession인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의 번역어로 삼기에는 조경이라는 말의 뜻이 너무 굳어져 있었어. 1970년대 이후의 새로운 한국 조경은 늘 목 놓아 소리치며 조경은 그게 아니라고, 다른 거라고 강변하고 주장해왔지만, 조경은 결국 조경이야. 조경은 조경이라는 말에 갇힌 셈이야.” “흔히 사회적 인식의 문제라고 진단하죠.” “그럴까? 그렇다면 사회적 인식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스타 조경가가 탄생하면? 법 만들고 제도 고치고 공무원 직제 만들면? 물론 당면 과제인 건분명한데, 다 해결하고 나도 조경은 결국 조경이야. 2013년에 제정한 ‘한국조경헌장’에서 조경을 정의한 부분 좀 검색해 주겠니.” “아름답고 유용하고 건강한 환경을 형성하기 위해 인문적·과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토지와 경관을 계획·설계·조성·관리하는 문화적 행위다.” “한국 조경이 마흔 살을 넘어서며 세상에 던진 다짐이야. 가치와 목표, 대상과 수단, 그리고 의의를 담은, 손색없는 정의야. 그런데 역으로 이 정의를 보고 조경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야. 이름을 고쳐야 하는 거 아닐까? 늦었지만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다른 말로 번역해내면 실타래처럼 뒤엉킨 문제들이 조금씩 풀리지 않을까?”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창업, 그러니까 그럼에도 New Start
    2010년 10월 1일의 일이다. 전날의 숙취가 남아있었지만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기계적으로 씻고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고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는 하루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주 잠깐 망설인 순간은 자동차 문을 열고 핸들을 잡았을 때다. ‘아, 오늘부터는 파주가 아니라 일산으로 출근해야지!’ 경로를 머릿속에 한 번 그려보고는 액셀을 ‘힘껏’ 밟았다. 내 사무실로 출근하는 첫 날이니까. 그렇게 환경과조경이 아니라 나무도시 편집장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구청에 가서 서류 접수를 하고 받아든 나무도시의 사업자등록증에는 아내의 이름 석 자가 박혀 있었다.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편집장을 하고 싶다는 소박한(요즘 같은 종이책 멸종위기 상황에서는 원대한) 꿈을 지키기 위해 발행인 직함을 아내에게 양보(?)한터였다. 딸아이의 주민번호를 외울 때처럼 사업자등록번호를 되뇌었다. ‘일사일영삼… 일사일영삼… 일사일영삼…’, 업태는 제조업, 종목은 출판. 조경설계사무소는 업태가 서비스업이지만, 잡지나 출판은 제조업이다. 그 차이는 쉽게 말하자면, 조경설계사무소는 사무실 임대료와 직원 인건비만 해결하면 되지만, 출판사는 임대료와 인건비는 물론이고 제작비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책이라는 물리적인 제품을 제조하려면 저자 인세, 인쇄비, 용지비, 출력비, 제본비 등을 지불해야 하니까. 편집장 명함을 (생전 처음) 내 돈 주고 팔 때만 해도 참 신이 났었는데, 첫 책의 제작비 지급 시점이 다가오니 제조업의 숙명이 실감났다. 언제였더라?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 ‘화장을 글로 배웠어요’ 따위의 유머가 유행한적이 있다. 나는 출판사 창업을 책으로 배웠다. 『편집자란 무엇인가 - 책 만드는 사람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하여』,1 『출판편집자가 말하는 편집자 - 23인의 출판편집자들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편집자의 세계』,2 『편집에 정답은 없다 - 출판 편집자를 위한 철학 에세이』,3 『유혹하는 에디터 - 고경태 기자의 색깔 있는 편집 노하우』,4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5 『편집자 분투기』,6 『그대로 두기 - 영국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 여성 편집자의 자서전』,7 『소설거절술 - 편집자가 소설 원고를 거절하는 99가지 방법』8 (이 책은 도대체 왜 샀는지 모르겠지만, 은근히 읽는 재미가 있다)을 비롯해서 ‘편집자’를 키워드로 한 책들이 지금도 내 책장 한 칸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대부분 창업을 목전에 둔 시기에 사들인 책들이다. 그런데 그게 결정적 패착이었다. 무엇보다 키워드 선택이 옳지 않았다. ‘출판 마케팅’을 키워드로 한 책을 주야장천 읽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제대로 잘 만들면 잘 팔린다’는 명제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아름다운 문구가 아니었다. 편집자가 출판사를 차리면 10명 중 7~8명은 망하고, 영업자가 출판사를 창업하면 10명 중 7~8명은 성공한다는 속설이 유독 내게는 해당하지 않을 거란 기대 역시 허황된 것이었다. 잘 만드는 것보다 잘파는 것이 중요했다. 잘 팔아야 다음 책도 만들 수 있으니까. 물론 내가 책을 잘 못 만든 탓은 아닐까 하는 반성은 새 책이 나온 후 3개월 뒤에는 어김없이 했다. 다음 책은 꼭 잘 만들어보리라는 다짐과 함께. 이번 호 특집을 준비하며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연 9인에게 부가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창업에 필요한 준비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거기에 이런 예를 덧붙였다. ‘예: 꿈, 첫 번째 일거리, 10년의 사업계획서, 재무 지식, 동업자, 플로터, 책상 등등.’ 창업 자금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준비물이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가지고…. 그러면서 잠시 시계를 거꾸로 되돌렸다. 한창 창업 준비를 하던 2009년의 어느 날로 말이다. 나는 무엇을 준비했더라? 아마 이런 것들이었을 거다. “적극적 지지까지는 아니지만 대놓고 말리지는 않았던 아내의 불안한 동의, 그 불안을 해소하고자 준비한 20종의 출판 아이템과 10명의 필자 리스트,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서가 한 칸을 내가 편집한 책으로 채우고 말겠다는 (불가능하지만 이루고 싶은) 꿈, 누가 봐도 근사해 보이는 원목 테이블, 사무실 2면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책꽂이….” 아 그렇지, 제작비 부담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는 마이너스 통장도 빼놓을 수 없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내가 창업을 고민하며 샀던 책들은 대부분 2009년에 출간되었다(각주 1번부터 5번까지). 전후 10년 동안의 데이터를 아무리 검색해 보아도 ‘편집자’를 키워드로 한 양질의 책이 그렇게 1년 동안 쏟아진 해가 없었다. 어떤 모종의 세력이 나의 출판사 창업을 부추기기 위해 작정한 것이 아닌가 싶은, 허황된 음모론을 지금까지 내가 주장하는 이유다. 그게 아니라면 결국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정성껏 욕심껏 오래 하고 싶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창업을 꿈꿨던 까닭은. 누군가 ‘그래서 창업을 권하는 것이냐’라고 정색하며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배움을 주었던 어떤 책에는 이런 대목이 쓰여 있었다. “과연 출판 창업에 모범 답안이 있을까. 대개 있다고들 한다. 창업 자금 3억 원, 첫 책을 출간하기전에 완성 원고를 세 가지 정도 준비하고 첫 책 출간 이후 1년 안에 열 종(혹은 3년 안에 서른 종) 이상 낼 자신이 있다면 창업해도 된다. … 창업 자금이 많을수록, 완성된 원고를 많이 확보할수록 성공 확률은 높아진다.”9 단, “완성된 원고” 앞에 생략된 단서가 있다. ‘일정한 독자층이 있는 완성도 높은’ 원고여야 한다. 그것이 가장 기본이니까. 그런데 불행히도 이 모범 답안은 7년 전 상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출판동네는 ‘해마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을 기록적으로 경신’하고 있으니 현재의 상황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출판사 창업을 꿈꾸며 관련 도서를 사들이고 창업 강좌를 듣고 선배를 만나 꼬치꼬치 캐묻고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답변이 잿빛 일색이더라도 말이다. 나만은 다를 거란 확신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하고 싶은 일이니까(실제로는 할 줄 아는 일이 그것뿐이어서 창업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할 줄 아는 일’은 ‘하고 싶은 일’로 포장된다. 물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인 경우도 많다). 조경설계사무소를 새로 연 9인의 좌충우돌 창업기를 읽고 있노라니 자연스럽게 6년 전의 고민과 떨림과 설렘이 오버랩됐다. 별 재미도 없는 해묵은 기억을 끄집어낸 이유다. 참, 각주 9번의 글을 쓴 김홍민 대표는 저런 모범 답안을 일러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창업 자금 9,000만 원, 준비된 원고 한 종”10만 달랑 들고 북스피어란 출판사를 차린 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신나게 흥이 넘치게 회사를 꾸려가고 있다.
  • [편집자의 서재] 달려라, 아비 Editor’s Library: Run, Daddy, Run
    불효의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고향에 내려가는 횟수는 줄어든 지 오래고, 최근엔 전화도 통 드리질 못했다. 특히 2주 전에 집에 내려가겠다는 계획을 취소해 버린 것이 영 찜찜하다. 분명 엄마는 전날부터 (엄마 눈에만 핼쑥한) 딸을 살찌우려고 상다리가 휘도록 음식을 준비하고 계셨을 텐데. 어버이날까지 이어지는 5월 초의 황금연휴 기간에도 고향에 다녀오지 못할 것 같다. 할 수 없이 꼼수를 부렸다. ‘5월에는 ‘편집자의 서재’ 꼭지를 빌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지, 특히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는 ‘부모님 전상서’를 올려 점수 좀 따야겠다.’ 그런 이유로 선택한 소설은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 하지만 애초에 효도를 글로 하고자 한 심보 때문이었을까? 아무래도 글이 영 써지질 않아 원래 쓰려고 했던 책을 막판에 바꾸어 버렸다. 우선 구구절절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는 글을 쓸 자신도 없거니와, 우리 엄마는 『엄마를 부탁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불멸의 첫 문장―“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에 도저히 이입할 수 없게 하는, 오히려 시골이라면 몰라도 도시에서는 절대로 잃어버릴 리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에 따르면 엄마는 ‘시골 흙바닥보다 도시 아스팔트길을 걸을 때 신이 나는 사람’이고, 삼촌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가장 무서운 큰누나’이며, 아빠의 푸념에 따르면 ‘절대 지고는 못 참는 여편네’다. 그러니 제아무리 신경숙 작가가 2인칭 시점을 써서 독자를 소설 속으로 밀어 넣고, 그녀 특유의 섬세한 표현으로 눈물샘에 십자 포화를 퍼부어도 나는 여간해서는 소설에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 3년 전(2005년) 출간된 김애란 작가의 『달려라, 아비』에서 엄마의 모습을 찾았다. 소설을 발표했을 당시 스물다섯이던 김애란 작가는 젊은 작가답게 기발한 상상력과 경쾌한 문체로 이 시대의 새로운 ‘어머니’를 창조했다. 주인공 ‘나’는 반지하방에 사는 미혼모 택시 운전기사의 딸. 분홍색 야광 반바지를 입고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달리는 아버지에 대한 상상을 끊임없이 전개하면서 자신의 탄생과 아버지의 가출, 외할아버지와의 일화 등의 신변잡기를 풀어놓는다. 하지만 자신과 어머니를 버려두고 무책임하게 떠난 아버지에 대해 원망이나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딘가 어리숙하고 철없는 아버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상상했던 십수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 아버지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워드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먼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기대감에 부푼,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작게 웃고 있다. 아버지가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다.”1 이전의 한국 문학에서 결핍과 상처로 그려지곤 하는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주인공이 보여주는 긍정의 태도에서 단순한 경쾌함과 발랄함을 넘어서 깊은 성숙미가 느껴진다. 주인공의 따뜻하고 긍정적인 세계관은 주인공의 어머니 조자옥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소설은 아버지에 대한 상상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전부 주인공이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기에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조자옥의 삶에 주목하게 된다. 조자옥은 만삭인 자신을 두고 애인이 도망갔을 때에도 홀몸으로 아이를 낳고 스스로 탯줄을 자른 강인한 ‘어머니’이고, 고집 세고 욕도 잘하는 ‘택시기사’이며, 동시에 ‘여성’적인 매력2도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3 주인공이 어머니가 자신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대목은 미혼모 택시기사 조자옥의 삶을 위대하고 존엄하게 그려낸다. 『달려라, 아비』의 가장 큰 미덕은 심각하게 내용이 전개되는 상황에서도 유쾌한 농담을 건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농담과 유머는 가벼움이나 경박함이 아니라 자기긍정에서 비롯된다. 이혼한 아내의 새 남편을 피해 잔디 깎기 기계를 타고 최고 시속으로 도망가는 아버지, 자신을 버리고 간 옛 애인의 부고 소식에 상심하며 잘 썩고 있을지 궁금해 하는 어머니 등 소설 전반에 따뜻한 유머 코드가 넘친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은 누구 딸이냐고 묻는 외할아버지의 능청스런 질문에 ‘나’가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며 “조자옥이! 조자옥이 딸이오”라고 온힘을 다해 소리치는 부분이다. 내게 누구 딸이냐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쩌렁쩌렁 엄마 딸이라고 외칠 텐데. 아쉽게도 나는 엄마와 너무 똑 닮아서 누구 딸인지 이미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사회적 실천으로서 모바일 건축
    임시적이고 가변적인 주거 공간은 역사 속에서 ‘건축가 없는 건축’으로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움직이는 집은 역사적으로 유목민의 천막 구조로부터 비롯한다. 몽고 유목민의 텐트형 공간, 미국 인디언의 티피 천막, 집시의 왜건 마차 등이 그 예다. 이동 가능한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20세기 운송 수단의 발전과 여행의 확산에 따라 여행용 카라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오늘날 움직이는 집의 형태는 바퀴 달린 공간, 임시적 구조, 조립식 건축, 텐트 구조 등 이동과 변형이 자유롭고 어느 환경에나 유연하게 적용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삶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이동형 공간은 196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건축적 실험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모바일 건축mobile architecture’의 등장은 획일적인 주거 공간과 권위주의적이고 형식적인 건축 양식에 반발하는 비판적 의식을 배경으로 한다. 이번 지면에서는 ‘모바일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실천에 주목해 동시대 건축가와 예술가의 프로젝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1960~70년대 건축 분야에서 실험적으로 등장한 모바일 건축은 재료, 기능, 테크놀로지, 공상 등 다양한 측면의 실험을 거쳐 왔다. 오늘날에는 건축뿐만 아니라 미술, 연극, 퍼포먼스 등 시각 문화 전반에서 상호 융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동시대 예술에서 임시적 공간은 건축, 디자인 등 타 분야와의 교류 속에서 전시와 비엔날레, 게릴라성 프로젝트 등 확장된 형태로 펼쳐진다. 그 대표적인 예로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의 파빌리온 프로젝트, 파리 퐁피두센터의 이동형 천막으로 구성된 모바일 미술관, 잘츠부르크의 템포러리아트 파빌리온 외 세계적인 아트 페어와 미술관의 팝업 공간이 있다. 모바일 건축은 동시대 문화에서 트렌디한 공간으로 주목 받고 있으나 사실 오랜 시간 삶 속에서 구축, 변형, 확장되고 있는 자생적 공간이다. 노숙자들의 박스와 텐트, 파리근교 비동빌Bidonvilles의 대규모 카라반 집시촌, 소비에트 시기에 제작된 폴란드의 키오스크Kiosk, 유대교의 임시적 공간인 수카Sukkah, 암스테르담 운하의 보트하우스, 오사카의 집단 판자촌인 부라쿠민Burakumin과 서울 도곡동의 구룡마을, 한국의 불법 노점상과 가판대 구조물 외에도 다양한 임시적 공간을 찾아볼 수 있다. 일상 속 모바일 건축의 다수는 정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삶을 지키기 위한 임시적구조로 드러난다. 숲 속의 건축가들 파리에서 기차로 1시간가량 가면 시 외곽에 뱅센 숲Bois de Vincennes이 나온다. 주말이면 시민들이 피크닉이나 나들이로 찾는 장소다. 그런데 평소에는 인적이 거의 드문 이곳에 비밀스럽게 모여든 사람들이 있다. 바로 파리의 노숙자들이다. 도시를 부랑하던 노숙자들이 숲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노숙자들은 머물 곳을 찾아 도시의 거리로,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와 급기야 숲으로 오게 되었다. 도시의 혼란과 불안에서 벗어나 숲 속에 은밀히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들의 거주지는 우선 쉽게 이동 가능한 텐트를 기본 골격으로 한다. 주로 상용화된 텐트를 각자의 필요에 맞게 변형해 사용하고 있는데, 천막형, 이글루형 등 제각각 창의적인 구조가 인상적이다. 숲에서 거주하는 노숙자들의 텐트는 비좁은 도시 공간과는 달리 여유 있는 숲의 조건을 활용해 복합적 기능을 가진 독특한 공간을 창출한다. 음식을 구해 숲으로 귀가하는 노숙자들은 도시 시스템에 기생하지 않아도 되는 나름의 자립적인 공간과 삶을 모색한다. 이들의 변형된 텐트 공간은 거주하고자 하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주거 형식이다. 노숙자들의 텐트와 같이 임시적 형태의 공간에는 정주할 수 없는 삶을 꾸려나가고자 하는 인간의 강한 의지가 담긴다. 난민, 소수자, 거리의 부랑자, 노숙자 등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추방된 사람들에게 임시 공간은 물리적인 정주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소외된 삶의 존속 여부와 직결된다.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건축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송원아트센터, 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송원아트센터, 2014), ‘Hidden Dimension’(갤러리 스케이프, 2013)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갤러리 스케이프 책임큐레이터, 갤러리킹 공동디렉터,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2015년 동북아시아 도시 리서치(예술경영지원센터 후원)를 진행했으며,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 [시네마 스케이프] 조이 커리어우먼을 꿈꾸는 그대에게
    영화 ‘조이’를 보고나서 힘겨운 상황에 처한 여성이 어느 날 갑자기 성공하는 데에 방점을 둔 이야기가 아니라서 안심했다. ‘성공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고비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꿈 많은 소녀가 어떻게 한 가정의 고단한 주부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조이는 무책임하고 게으른 남편과 이혼한 후 두 아이를 맡아 키운다. 전 남편은 조이네 집 지하실에 얹혀산다. 조이의 부모도 이혼했는데 어머니는 우울증으로 온종일 텔레비전만 본다. 아버지는 애인과 헤어지고 무작정 조이네 집에 들어와 전 남편과 지하실에서 매일 다투며 지낸다. 이 집에서 제일 멀쩡한 사람은 조이를 믿고 항상 응원해주는 할머니와 5살짜리 딸이다. 다니던 회사에서 감봉당한 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물 새는 배관을 고치려고 마룻바닥을 뜯다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은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워킹맘의 고단함을 전한다. 왜 쓸데없이 꿈 따위를 강요했냐고 할머니에게 불평하는 장면에서는 마음이 아팠다. 조이는 우연히 깨진 와인 잔을 치우다가 손대지 않고 물기를 제거할 수 있는 걸레를 발명한다. 제품으로 만들어지기까지, 홈쇼핑으로 ‘대박’이 나기까지, 특허를 안정적으로 쓰기까지 파산의 위기로 매번 벼랑에 내몰린다. 하지만 제품에 투자한 아버지의 새 애인이 하필 부자였고, 무작정 찾아간 대형 홈쇼핑 회사의 최고 결정권자는 대뜸 그녀를 밀어주기로 한다. 특허 분쟁으로 사업을 이어나가기 어려워지자 머리를 손수 자르고 혈혈단신 찾아가 담판을 짓는다.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지만 다소 비현실적인 면이 있고 매력적인 조연 배우들을 병풍 역할로만 그린 점은 아쉽다. 그러나 성공 신화의 핵심이 달콤한 결과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지난한 과정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기에 볼 만한 영화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페르시아 정원과 이슬람 정원
    #81 파라다이스와 사분원의 원작자를 찾아서 ‘파사르가다에’에 가다 지금 이슬람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바로 그 지역에서 ‘파라다이스’라는 개념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동쪽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서쪽의 스페인 안달루시아까지 보석 같은 이슬람의 파라다이스 정원들이 수없이 흩뿌려져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다. 인간의 가슴 속에는 천국과 지옥이 늘 공존해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기후 조건이 가장 험난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한반도의 경우, 봄부터 가을까지 사실상 반도 전체가 낙원과 같았다. 뒷동산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면 낙원이 따로 없었다. 고대 그리스 등 지중해 유역은 물론이고 온화한 기후대의 숲 속에 자리 잡고 살았던 유럽인에게도 자연 환경이 그리 험난하지 않았다. 굳이 사방에 담을 두르고 지하수를 퍼 올려 연못에 물을 대고 큰 나무들을 심어 그늘을 만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살 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낮이면 지옥의 불구덩이로 변하는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정원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지옥 불과 낙원의 개념이 모두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불구덩이와 모래바람을 피해 사방에 담을 두르고 별개의 세계를 구축하려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왜 하필 그런 곳에서 살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시작은 까마득한 옛날,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정주하여 농사를 짓고 부족 국가를 형성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실제 남아 있는 흔적은 기원전 6세기경 고대 페르시아 제국 때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이 지금의 이란이다.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가 합세하여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켰음은 지난달에 이미 언급했다.1 그 후 융성했던 바빌로니아는 다시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했다. 페르시아는 메소포타 미아의 경계를 넘어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서쪽으로는 지금의 터키,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인더스 강까지 이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팽창했다. 이 제국을 건설한 왕이 키루스 2세(B.C. 590년경~530년)였다. 사람들은 그를 대왕이라고 불렀다.구약 성경은 유대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기도 하다. 당시 이웃 나라들의 소식은 물론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강대국의 왕들이 구약에 자주 언급된다. 공중 정원을 지었던 산헤립 왕이나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도 여러 번 악역으로 등장한다. 키루스 대제의 경우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의외로 선한 역을 맡았다. 구약에 언급되는 타국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묘사되었다. 바빌론을 정복하고 나서 마침 그곳에 끌려와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도록 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로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바빌론을 항복시켰다고 기록했다.2 이렇게 제국의 주인과 왕조가 바뀌는 사이, 에덴동산보다도 아름답다고 했던 아시리아의 정원이 바빌론을 거쳐 페르시아로 전승되었다. 도시 건설, 건축, 물 관리 기법 역시 물려받았다. 키루스 대제는 현재 이란 남서부 산악 지대의 파르스Fars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첫 수도를 건설했다. 당시에는 ‘파사르가다에Pasargadae’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시라즈에서 약 13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로써 세상의 중심이 동쪽의 이란 고지대로 이전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파사르가다에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유적지로 등재되어 있지만, 담장의 흔적과 궁터, 매머드 사이즈의 기둥, 키루스 대제의 무덤 외에는 남은 것이 많지 않다. 그런데도 조경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바로 이곳에서 이른바 ‘사분원four gardens’의 최초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분원이란, 단어 그대로 해석하자면 하나의 정원이 네개로 분열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으나 반대로 네 개의 정원이 하나로 모였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3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분원을 탄생시킨 페르시아가 동서남북의 땅을 통합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네 개의 강과 네 개의 하늘을 합쳐 웅대한 제국을 이루었노라’는 자랑과 이념이 배어 있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키루스 대왕은 처음부터 정원에 중점을 두고 설계했다. 건물에 정원이 딸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였다.4 가로240m, 세로 200m 규모의 터를 높은 담으로 둘러쌌으며 이 방대한 정원 공간을 여러 단위로 나누고 그 안에 궁궐의 전각을 드문드문 배치했다. 이런 배치법은 오히려 창덕궁 등 동양의 궁궐을 연상시킨다. 큰 전각은 사방을 주랑으로 둘렀으며 작은 건물에는 앞뒤로 거대한 문주를 만들어 붙여 정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했다. 큰 전각들은 왕의 처소 혹은 알현실로 쓰였을 것이고 작은 누각들은 연회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석조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며 전각과 누각을 서로 연결했다. 수로의 중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원형 혹은 사각형의 석조 연못들이 배치되었다. 전각들 사이의 정원은 이렇게 수로가 중심이 된 사분원으로 단정하게 장식했지만, 건물 뒤편의 넓은 땅에는 수렵원을 조성했다. 사자부터 노루, 사슴 등 온갖 사냥감이 득시글거렸다고 전해진다. 이 또한 아시리아로부터 넘겨받은 전통이었다. 키루스 대왕은 소년 시절 수렵원에서 사냥을 해야 한다는 규칙을 무시하고 친구들과 담장을 몰래 넘어가 산에서 사냥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키루스와 그 뒤를 이은 페르시아 왕들의 정원 집착증에 대해서는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가 증언한 바 있다. 페르시아 왕은 가는 곳마다 우선 정원부터 만들고 보았는데 그 정원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과 식물이 가득차 있었다고 했다.5 물론 소크라테스가 직접 글을 써서 남긴 것은 아니고 그의 제자였던 크세노폰(B.C. 430년경~354년경)이 기록으로 옮긴 것이다. 이때 ‘페르시아 왕들의 담 높은 정원’이라는 개념을 그리스어로 옮겨야 했다. 그런데 왕도 없고 담 높은 정원도 없던 그리스에 같은 뜻을 가진 단어가 있을 리 만무했다. 구 페르시아어로는 ‘pairi-daeza’라고 했다.6 크세노폰으로서는 발음을 비슷하게 하여 그리스어로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파라디소스’였다. 우리 조상들이 처음으로 영어를 번역할 때와 흡사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크림’을 ‘구리무’라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후, 약 백 년쯤 지나서 유대인들의 경전 『토라』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때는 아직 기독교가 시작되기 전이었으므로 교회와는 무관하게 순수한 학문적 관점에서 타문화의 ‘고전’을 번역한 것이다. 당시 창세기를 번역하는 데 “하나님이 에덴이라는 곳에 정원을 조성했다”는 대목이 나왔다. 히브리어로는 ‘간 에덴Gan Eden’ 정도로 발음하는 데 이에 또 갖다 붙일 그리스어가 부족했다. 번역해 본 사람은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어려움이다. 문득 예전에 크세노폰이 창조했던 파라디소스라는 단어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이를 가져다 썼다. 그래서 페르시아 왕들의 담 높은 정원이 창졸간에 에덴 정원으로 둔갑하여 구약 성서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조경의 경제학] 공원, 누가 공급할 것인가
    ‘시장’이 공원을 공급할 수 있는가 정부는 공원을 ‘적정하게’ 공급할 수 있는가 우리 정부는 공원의 공급자 역할을 잘 하고 있는가 ‘시장’이 공원을 공급할 수 있는가 어릴 때는 공원이 좋은지 몰랐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1970년대에는 집 근처에 공원이 흔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공원에 관심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나니 어느새 공원이 삶 속에 들어와 있었다. 내 아이가 유모차를 타고 처음 산책을 한 곳은 분당중앙공원이었고, 보조 바퀴를 떼고 처음으로 두발자전거를 탄 곳은 한강공원이었다. 이제 산책을 즐기는 나이가 되고나니 집 뒤에 나지막한 근린공원이 있는 것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공원은 사람들이 집을 고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무심한 사이, 누군가는 꾸준히 공원을 만들어온 것같다. ‘이렇게 좋은 일을 한 그(녀)는 누구일까?’ 공원은 다양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도시인의 여가를 위해 조성되기도 하고, 자연을 보전하기 위해 지정되기도 한다. 근대적 의미의 공원은 권력을 잃은 왕과 귀족으로부터 빼앗은 사냥터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열악한 도시 환경에서 노동자의 생산성을 최소한이나마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가 고안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어두운 기원이 사실일지라도, 지금의 공원은 노동과 자본이 집적된 도시에서 녹색의 허파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조경가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공원의 편익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 좋은 공원을 공급하는 그(녀)는 누구일까?’ 이 글에서 공원public park은 ‘사적으로 소유되지 않고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를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자연공원보다는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조성해야만 공급되는 도시공원에 관심을 둔다. 지난 4회의 연재를 통해 우리는 ‘정원의 경제학’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정원private garden은 ‘사적으로 소유되고 소유자 임의로 사용, 수익, 처분되는 장소’다. 따라서 정원과 공원은 비록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경제학적 특성은 전혀 다르다. 정원은 이윤을 추구하는 누군가에 의해 공급될 수 있지만, 공원에 대해서는 그러한 누군가가 시장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적재화private goods인 정원과 달리 공원은 공공재public goods이기 때문이다. 매우 자주, 때로는 의도적으로 오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공공재다. 부동산 가격이 치솟을 때마다 심심치 않게 들리는 ‘토지와 주택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가격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 사례다. 토지와 주택이 다른 재화에 비해 공공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틀린 말이다. 경제학에 기원을 둔 공공재라는 개념은 상당히 엄격한 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공공재라는 단어의 오용이 심각한 문제인 것은 개념적 혼란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공재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가 사적재화와 다르기 때문이다. 사적재화는 시장기구에 의해 적절히 공급될 수 있지만, 공공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경제학자의 시각이다. 따라서 토지와 주택이 공공재로 취급되는 순간 부동산 시장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따라서 공공재라는 단어는 주의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공공재란 무엇일까? 경제학자는 경합성rivalry과 배제성excludability이라는 두 기준으로 우리 주변의 재화나 서비스를 분류하기 좋아한다. 여기서 경합성이란 어떤 사람이 한 재화나 서비스를 사용하면 다른 사람이 그 재화나 서비스를 사용할 수 없는 성질을 말한다. 내가 풀빵을 먹어버리면 당신은 그것을 먹을 수 없다. 이것을 경제학자는 ‘풀빵에 경합성이 있다’고 표현한다. 배제성이란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특정한 사람들만 사용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막을수 있는 성질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정한 사람들’이란 사용의 대가를 지불한 사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풀빵 장수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풀빵을 먹을 수 없다. 이것을 경제학자는 ‘풀빵에 배제성이 있다’고 표현한다. 다음 표는 경합성과 배제성을 기준으로 분류된 네 가지 재화나 서비스를 보여준다. 민성훈은 1994년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2년간 일했다. 그 후 경영학(석사)과 부동산학(박사)을 공부하고 개발, 금융, 투자 등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2012년 수원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가장 오래 가졌던 직업은 부동산 펀드매니저다.
  • [재료와 디테일] 디딤돌, 장식재인가 바닥재인가
    외부 공간, 특히 조경 공간을 설계할 때 중요한 사항 중 하나는 사람의 이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그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이 사람들이 공간을 어떻게 이용하고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예측하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절대 설계가가 의도한 패턴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또 다른 어려움 중 하나는 방향, 길의 흐름을 잡는 일이다. 사람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으며 필요한 길의 폭을 예측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기본이 되는 기능적인 큰 흐름을 먼저 만들고 작은 흐름을덧붙여 공간과 공간의 연결을 도모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공간을 만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핏줄에 비유하면, 큰 동맥(큰 선)에서 뻗어나간 수만 갈래의 작은 실핏줄이 신체 기관(공간)을 연결하고 분리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본디 길이란 연결하기 위한 것이지분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길이 전체 공간에서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 공간 활용에 부담을 주는 부정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아야 하기에 길 만드는 일은 몹시 예민한 작업이다 공간을 계획하는 디자이너라면 늘 전체 공간을 적절하게 배분해 쓰임이 좋은 공간으로 만드는 데 온 신경을 곧추 세울 것이다.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기 위해 길의 부피를 줄여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간 활용이 쉬우려면 길은 단순히 연결 기능만 수행해야 한다. 디딤돌로 길을 만든다. 이 길은 많은 부피를 차지하지 않으면서 연결 기능을 충분히 수행한다. 길이 부피를 적게 차지하기 위해서는 면이 아닌 점의 개념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에 듬성듬성 놓아 부피를 줄일 수 있는 동시에 연결의 기능을 수행하는 디딤돌은 최고의 효과를 가진 재료다. 견고하며 필요에 따라 쉽게 제거하고 변경할 수 있어 가변적인 재료이기도 하다. 재료의 선정에 따라 다양한 공간 연출도 할 수 있다. 재료 선택의 폭이 이처럼 넓은 설계 언어가 또 있을까.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공간 공감] 국회의사당 사랑재
    20대 총선 직전의 긴장감과 벚꽃의 화사함이 교차하는 시기에 국회의사당을 찾았다. 국회라는 다소 중압적인장소가 상춘객으로 북적거리는 장면도 의외였지만, 더욱이 의원동산 자락 화합의 꽃밭에서 깽깽이풀의 꽃을 무더기로 본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팔도에서 모인 다양한 꽃들의 환대를 받으며 오른 의원동산의 상부에는 너른 평지가 펼쳐졌고 사랑재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재까지 이르는 시퀀스는 ‘화합의 꽃밭 → 의원동산의 경사지 계단 → 너른 마당과 사랑재’의 3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의원동산은 그 높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한강을 볼 수 있는 전망대로서의 기능을 부여받았고, 사랑재 역시 전망의 잠재력이 다분하다. 사랑재 일대를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방식이야 다양하겠지만 우선 떠오른 것은 ‘돌아들어가는 맛’을 부가 하는 것이다. 화합의 꽃밭에서 의원동산으로 곧바로 오르는 동선 대신 경사를 완만하게 즐기면서 사랑재에서 먼 쪽으로 돌아 오르게 하는 방식이다. 낮은 담이나 지형, 식재로 공간을 구분지어 두세 공간으로 나눈 후 사랑재에 다다르게 하면 어떨까? 마지막에 당도한 사랑재에서는 깔끔한 마당과 한강으로의 막힘없는 뷰를 맛볼 수 있게 하고…. 한눈에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화끈함보다는 발품을 팔면서 점진적으로 새로운 장면이 전개되는 방식은 우리의 오래된 공간에서 애용되던 기법임을 상기해본다. _ 정욱주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 [디자인 노트] 갯골에서 찾은 경관 김기천 A Landscape Discovered from Tidal Channel
    시흥시는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프로젝트 경험이 많은 도시다. 얼마 전 공원의 일부를 준공한 배곧신도시의 중앙 및 수변 공원을 비롯해 LH에서 시행한 시흥 은계지구, 그리고 이번 장현지구 조경 설계공모 등에 참여했다. 덕분에 잊을 만하면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변해가는 도시의 모습을 꾸준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시흥에 방문할 때마다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만큼 최근 몇 년 사이에 도시경관적 차원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시흥시는 전략적으로 지역성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이 상당해 도시의 특성이 분명하다. 때문에 대상지의 디자인 방향을 끌어내는 과정이 비교적 빨리 진행됐다. 갯벌 담은 공원 시청과 서해 바다의 초입을 연결하는 갯골길(늠내길 2코스), 긴 언덕인 장현長縣, 새재마을 등의 지명은 갯골, 갯등, 언덕 등 고유의 자연 환경에서 비롯됐다. 이 자연 요소를 디자인 언어로 삼아 설계를 진행했다. 과거의 지명인 ‘잉벌노仍伐奴’는 뻗어나가는 장소라는 뜻이며 ‘늠내’는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드넓은 경작지를 통해 물과 뭍으로 열려 있는 풍경은 시흥시의 경관적 특징과 스케일을 보여 준다. 현장 답사 때 둘러본 대상지는 좁은 폭 때문에 실제보다 협소해 보였다. 폭은 좁고 길이는 긴 개별 공원 부지에 기능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안 그래도 좁아 보이는 공원이 더욱 작게 느껴지리라 생각됐다. 통일된 디자인 언어를 바탕으로 대상지가 하나로 읽혀야 장현천을 중심으로 한번에 읽히던 개발 전 경관의 스케일이 유지될 수 있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공원의 상징성과 존재감을 위해서도 일체화된 디자인 언어는 필수적이었다. 김기천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룹한에 입사하여 현재 전략디자인본부를 맡아 이끌고 있다. 2007년 행정중심복합도시 국제 공모전 이후 현재까지 국내외 다양한 형태의 도시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작업으로는 서울대공원 재조성, 시흥 군자 배곧신도시 수변 공원, 브루나이 워터프런트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공공 오픈스페이스를 통한 도시 환경의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