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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로마, 헬레니즘을 만나다- 키케로의 증언
#63
농자 로마지 대본
중국 고사에 현인들이 농사를 짓다가 재상으로 등용된 사례가 종종 전해진다. 고대 로마에도 그런 고사가 있다. 로마의 군자軍者이자 농자였던 킨키나투스Cincinnatus(B.C. 519~430) 역시 밭을 갈던 중 로마 원로들이 모셔다가 독재관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독재관이란 외침 등으로 인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임명되는 임시직으로서 절대적인 통수권이 주어졌지만 임기가 6개월로 제한되어 있었다. 킨키나투스 장군은 불과 16일 만에 외적을 물리쳐 임무를 완수했다. 시민들은 장군이 그대로 눌러앉아 권력을 휘두를까 은근히 걱정했으나 그는 곧바로 밭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이후 킨키나투스는 로마의 덕목을 상징하는 인물로 길이 추앙되었다.1 킨키나투스 장군의 연대가 말해주듯 지금 우리는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로마가 시작되었던 무렵으로 더듬어 가고 있다.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에 도시 국가를 건설하고 왕이 되었을 때 그를 도왔던 건국 공신들이 있었다. 이들이 파트리키라는 귀족층을 형성하고 원로원이 되었으나 본업은 모두 농자였다. 로마인들은 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로마가 농경 사회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힘겹게 일하는 농자야말로 고귀한 로마인의 유일한 직업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 사실은 우선 원로원을 비롯하여 모든 로마의 정치가, 법관들이 녹봉 없이 근무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신흥 세력으로서 로마 토착 세력의 철통같은 방어선을 뚫고 마침내 성공한 키케로의 경우, 로마 근교 아르피눔―지금의 아르피노(Arpino)―에 있는 자신의 빌라를 찾을 때면 가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에 내 선조들의 근본이 있고 그들이 찾던 성소가 있으며 곳 곳에 그들의 자취가 가득하다.”2 거대한 제국의 건설, 전쟁과 뛰어난 군사력, 엔지니어 기술, 콜로세움의 전투사들, 웅장한 건축물 등 지금 우리가 로마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로마 문화의 꽃이라면 그 뿌리는 농업이었다. 이는 로마의 유력한 사상가들이 농업에 대한 저술을 적지 않게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그 중 네 명의 작가가 가장 주목받고 있다. 최초로농업서를 집필한 인물은 ‘대大 카토Marcus Porcius Cato(B.C. 234~149)’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정확한 집필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개 기원전 170~60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로부터 백 년도 넘게 지난 기원전 37년경,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Marcus Terentius Varro(B.C. 116~27)라는 인물이 농업론 혹은 농사론De re rustica을 집필했고 그로부터 또 다시 백 년가량이 흐른 뒤 콜루멜라Columella의 방대한 농사서De re rustica libri 13권이 발표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는 팔라디우스가 14권 분량의 ‘농가월령가’3를 지었다. 그 중 처음의 두 작가, 대 카토와 바로의 작품을 한번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대 카토의 농업론의 경우, 시대적으로 보아 로마의 토지 분배에 큰 변화가 있던 때에 집필되었다는 사실이 주목을 끈다. 전설에 의하면 처음 로물루스 왕이 국가를 세운 뒤 모든 로마인들에게 공평하게 농토를 나눠주었다고 한다. 가구당 약 1,700평 정도의 규모였다.4 온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는 작은 땅이었으나 공용지가 있어 모자라는 분량은 거기서 충당했다. 이렇게 소규모 의 농토를 나눠주던 전통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던 것이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영토 확장과 함께 소농 기본의 원칙이 무너지고 대지주 세력이 형성되었다. 점령한 땅은 일단 국유지5로 지정되었으나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운영하기 위해서는 소규모 농지 시스템을 고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영유지에 대한 처분 법을 제정하고 이 법을 집행하기 위해, 즉 땅을 분배하고 관리·감독하기 위해 ‘감찰관’이란 직분을 만들었다. 이 감찰관이 원로원들 사이에서 선발되었으므로 자기들끼리 토지를 나눠가졌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 카토는 재무관, 법무관, 원로원, 집정관을 거쳐 감찰관을 고루 지낸 정치가였다. 불어난 토지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농업론은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어야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제안으로 점철되어 있다. 결국 땅을 이용하여 수익을 올리자는 투자 제안서이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도시 개발로 한몫 챙겼을 터다. 서문에서 그는 농업이야말로 상업이나 금융업에 비해 유일하게 정직하고 명예로운 수입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자신은 노예 매매와 무역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여기서 얻은 수익을 다시 토지에 투자했으니 모순될 것 없다는 주장인 듯하다. 그러므로 카토가 농업서를 집필한 진정한 이유는 투자 사업으로 인해 실추된 명예를 만회하기 위해 자신을 농사꾼으로 포장한 것이라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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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쾌락의 도시, 절제의 도시
도시와 쾌락
1990년대 대한민국은 여러 측면에서 돌이키기 어려운 변화를 겪었다. 나라 밖에서는 냉전과 이념 대립의 시대가 저물어 갔고, 안에서는 정치 민주화를 향한 힘겨운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체제의 정당성 확보보다는 폭등하는 집값 안정이, 사회적으로는 공동체 재건보다는 개인의 정체성 발견이 더 시급한 과제였다. 이와 함께 새로운 종류의 놀이 문화에 대한 갈망, 때로는 억눌린 욕망의 분출과 퇴폐적인 즐거움에 대한 추구가 도시 공간 깊숙이 파고들었다. 1990년대 초 부산에서 첫선을 보인 ‘노래방’이 짧은 시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국민 유흥의 장소로 자리매김했고,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로 대표되는 야하거나 관능적인 여자(혹은 남자)―나아가 이들을 향한 시선―에 대한 재발견이 ‘압구정 오렌지족’으로 상징되는 젊은 세대의 거침없는 자기표현과 향락적 판타지 위에 묘하게 포개지곤했다. 그뿐인가. 각종 ‘러브 호텔’과 ‘변종 카페’가 우후죽순처럼 도시 경관을 잠식했고, 재벌 2세와 유명 연예인들이 환각 상태에서 벌인 ‘마약 파티’가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것도 1990년대에 일어난 현상이다.1 각종 즐거움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이에 따라 도시 공간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 자체가 이상할 까닭은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를 도는 존재 아니었던가2 소득 수준이 높아지거나 과거 갈망했던 즐거움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다시 새로운 종류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계속 쳇바퀴를 돌리고, 때로는 사회적 금기로부터의 일탈과 탈주를 꿈꾼다. 이러한 일탈적 도시 경험에는 국경이 없다. 16세기 후반으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쿠바 하바나의 칼레 오비스포Calle Obispo 거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라틴 음악과 술,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수도이자 카지노의 본산인 라스베이거스의 쇼와 도박, 그리고 필리핀 앙헬레스와 같은 ‘죄악의 도시Sin City’에서 벌어지는 퇴폐적 밤 문화와 이를 향한 어른들의 낯뜨거운 호기심도 여기에 포함된다(그림1). 쾌락의 쳇바퀴가 굴러감에 따라 각종 유희는 때로는 합법적으로, 때로는 느슨한 규제를 틈타 도시 공간에 침투하게 되며, 익숙함과 일탈이라는 두 경험의 축은 도시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
-방, -룸, -탕, -텔, -장
적어도 지난 20여 년간 각종 ‘-방’, ‘-룸’, ‘-탕’, ‘-텔’, ‘-장’은 한국 도시에서의 밤 문화를 바꾸는 데 공헌한 단역 배우들이다(그림2). 그 기원은 다르지만 이들 공간은 다양한 종류의 술과 음료, 음식과 노래, 춤과 휴식, 게임과 스포츠, 때로는 낯선 타인과의 교류 혹은 은밀한 만남의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20세기 초 서울에 등장한 유곽이나 1960~70년대 무교동을 비롯한 각종 유흥가도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만, ‘-방’, ‘-룸’, ‘-탕’, ‘-텔’, ‘-장’은 그 가벼운 몸집과 다채로운 서비스를 무기로 끈질긴 생명력을 보인다. 이들은 한때 심각한 사회적 유해성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터키탕’처럼 한 국가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항의가 제기될 만큼 불명예스러운 서비스 공간이기도 했다.3 그럼에도 적어도 일부 용도에 대해서는 그 규제가 완화되거나 때로는 적법한 시설로 전환되는 데 성공했다. 노래방이 그 좋은 예다. 등장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 노래방의 인기에 다소 놀란 듯 정부는 1992년 ‘풍속영업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 따라 노래방 심야 영업과 미성년자 출입을 전면 금지했다.4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 규제는 불필요하게 국민 생활을 구속하는 정책으로 낙인찍혔다. 곧이어 영업 시간 규제가 철폐되었고, 청소년 출입은 심야 이전에 한해 전면 허용되었다. 노래방에 대한 유해성 논란은 채 10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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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경관편집자는 발견하고 엮는다
2014년, 부천의 한 공단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경관에디터’라는 단어를 조어했다. 잡지 편집자가 여러 저자의 글로 하나의 잡지를 만들어내듯이 내 스스로 새로운 경관을 창조하기보다는 편집하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역할에 대한 설명을 위해 ‘경관(혹은 landscape)’이라는 단어와 ‘편집(혹은 editing)’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놓고 경관편집자, 경관에디터, 랜드스케이프에디터 등 이런 저런 조합을 해보았는데 어떠한 것도 적당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서도 어떤 의도인지는 알겠지만 어감이 좋지 않다고들 했다. 그러다 경관을 영어인 ‘랜드스케이프’로 쓰면 너무 길어 ‘경관’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니 뒤의 단어도 같은 한글인 ‘편집자’가 적당했다.
작가로서 작업해 주세요? 그리고 경관편집자
경관편집자라는 단어를 조어하도록 한 프로젝트의 명칭은 ‘예술이 흐르는 공단 공공미술(이하 예술 공단 프로젝트)’이다. 경기문화재단과 부천테크노파크가 3년 동안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로, 2014년이 마지막 해였다. 첫 해에는 최정화 작가와 조민석 건축가, 김형관 미술가가 참여했다. 최정화는 공단에서 나온 고철을 이어 붙여 ‘당신은 꽃입니다’라는 조형물을 만들었고, 조민석은 조형물이 놓이는 꽃방석을 만들어 공단 외부 공간한쪽에 설치했다. 김형관은 ‘달리는 파사드’라는 제목으로 건물 내부 공간을 벽화로 연출했다. 두 번째 해에는 박은선 작가가 참여했다. 그는 공단 내 건물 외벽을 대상으로 ‘유기적 공간’이라는 이름의 벽화 작업을 했다. 이 작품에는 ‘가로 24m, 높이 36m로, 작업 기간만약 2개월 이상 소요된 국내 최대의 공공미술 벽화’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마지막 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내게 주어진 역할은 ‘작가’로서 그동안의 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조경 분야에서의 작가라? 작가라는 단어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경기도 문화재단과도 이 작가라는 단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에게 ‘조경’이라는 분야는 낯설었고, 특히나 나는 한평공원처럼 개인의 감성이나 조형적 감각을 표현하기보다는 주민들의 의견에 좌지우지 된다고 여겨지는 참여 디자인 작업을 많이 해왔기에 그들의 우려는 더욱 컸다. 조경 분야에서의 작가? 조경가? 작가의 자의식? 그리고 이용자? 같은 단어들 사이를 오고가다, 큰 개념 정리는 접어두기로 했다. 대신 이 프로젝트에서의 나의 역할을 앞서 언급한 ‘경관편집자’로 스스로 규정했다. 지난 2년 동안 조성된 조형물과 벽화, 광장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연못, 여러 조각상 등, 이미 많은 조형적 요소들로 꽉 차 있는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이 요소들을 엮어주는 역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연금은 조경작업소 울을 운영하고 있으며, 커뮤니티 디자인 센터의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커뮤니티 디자인, 마을만들기를 일과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을 발전시킨 『소통으로 장소 만들기』(한국학술정보, 2009), 일상의 경관에서 이루어지는 거시적 구조와 미시적 요소와의 상호 관계를 관찰하고 기록한 『우연한 풍경은 없다』(나무도시, 2011)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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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무나 안드라오스
데일리 뚜레쥬르 창립자 및 대표
‘매일’이라는 뜻을 가진 ‘데일리 뚜레쥬르’(캐나다에서 영어와 불어를 병기하는 문화를 표현했다)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별난 디자인 회사다. 특별히 어떤 일을 한다고 정의하기에는 너무나도 자유로운 작업을 해 온 집단. 굳이 말하자면 인터랙션interaction 디자인을 이용해 도시 공간(주로 외부 공간)에 공공 설치예술 작품을 해온 아티스트들이다. 그들의 작품은 부드러우면서도 감동적인 사회적 아젠다, 즉 ‘함께 사는 세상, 더불어 사는 우리’라는 메시지를 매우 세련되고 참신한 방식으로 전한다는 특징이 있다. 하나로서는 지극히 단순한 소리일 뿐이지만 여러 개가 어울렸을 때에는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화음을 연출해 내는 ‘21개의 그네21 Balançoires’, 한 명이 부르는 노래는 그저 음치일 뿐이지만 수십 명이 함께 부르면 그 어떤 합창보다도 멋진 감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거대한 합동 노래방Giant Sing Along’ 프로젝트 등이 대표적이다. 공동의 삶, 타인과 함께 함으로써 평범함이 특별함으로 전이되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공감empathy이 화두가 되는 시대에 과연 조경과 도시설계가 만드는 공간은 충분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 일까? 이용자의 마음과 시대적 성향, 사회적 요구를 과학적으로 충분히 검토하고 있는가? 우리의 디자인은 진정 창의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멜리사 몽지아Melissa Mongiat와 함께 데일리 뚜레쥬르를 창립해 이끌어 온 공동 대표 무나 안드라오스를 만나 확인해 보자.
Q. 데일리 뚜레쥬르의 작업 영역은 매우 넓은 것 같다. 여러 분야의 경계를 넘나드는 포괄적인 프로젝트를 해왔는데 당신의 일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A. 우리 회사에서 주로 다루는 일은 인터랙션 디자인Interaction Design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의 경험에 집중하며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따라서 중간에서 서로 다른 영역들을 이어주는 매체medium 자체가 우리의 프로젝트가 다루는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대부분의 작업은 공적 장소나 대중과의 직접적인 상호 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에 설치되었다.
Q. 데일리 뚜레쥬르의 사명이 있는가? 그러한 작업을 하는 이유를 밝힌다면?
A. 우리의 관심은 ‘대화’와 ‘교류’다. 우리 회사의 핵심 멤버들은 최근 몇 년간 건강한 시민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공유 공간shared space과 공유하는 삶shared common life의 중요성과 그 역할에 대해 알려주는 여러글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 우리 프로젝트를 통해좀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궁극적으로 진심이 담긴 대화를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개인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Q. 무척이나 도시적urbanistic이고 공적인 사업 목표인 듯하다. 이런 회사를 운영하게 된 개인적 배경과 회사를 설립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한다면?
A. 원래 전공은 인문학과 영화학이다. 2000년대 초반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영화학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매체로서의 웹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인터넷엔 그 어떤 규율도 없었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을 통해 인터랙션 디자인 회사를 설립했는데 초반에는 주로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을 연구하다가 점차 물리적 형태를 가진 것들로 옮겨갔다. 가상 공간에서 실험한 아이디어를 현실의 3차원 공간에 적용하면서 공동 창업자인 멜리사를 만났다. 멜리사의 전공은 환경 그래픽 디자인이고 주로 전시 디자인narrative environments쪽의 일을 해왔다. 그녀는 런던에서, 나는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몬트리올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서로의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함께 회사를 창업하게 되었다.
Q. 데일리 뚜레쥬르의 프로젝트는 음악, 무용, 시를 매우 빈번히 사용하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가 아니면 프로젝트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인가?
A. 직원 중 아무도 직업적인 예술 교육을 받은 경우가 없다. 우리는 이용자와 좀 더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이러한 예술적 매체를 활용한다. 예술은 시공간과 언어를 초월해 모두를 묶을 수 있는 만국 공통어이기 때문이다.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 기반을 두고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해 왔다.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고, 주요 작품이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 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이며, 저서로 『시티오브뉴욕』(공저)이 있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서 조경 설계를 연구하며 학생들이만드는 것의 기쁨을 알아가도록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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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와 디테일] 속도를 만드는 경계석
도시의 가로를 걸으며 보게 되는 가장 흔한 풍경은 무엇일까. 가로수, 건물, 도로 등등 많은 것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바닥의 포장과 그 영역을 엄정하게 규정하는 경계석들이 눈에 쉽게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직업의 특성도 있지만 늘 장소가 바뀔 때마다 바닥의 포장 재질이나 패턴은 변해도 경계석만은 고정된 모습으로 영역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도시를 논할때 늘 빼놓지 않고 회자되는 것 중 하나가 누적된 시간의 모습이다. 이때 시간의 적층은 단순히 옛것의 낡음이 겹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이 다양한 방식으로 적층되며 표출되는 다양성의 아름다움이다. 때로는 세련된 모습으로 혹은 투박하지만 두텁고 견고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의 양태야말로 열린 민주 도시가 갖는 참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경계석은 근대 도시에 가로 경관을 형성하게 한 가장 대표적인 소재이며 명확하게 공간을 구분하는 가장 기능적인 재료다. 도시의 근간을 차지하는 도로의 기초가 되는 작업이고 각각의 소유 관계를 분명하게 하여 분쟁을 억제하는 자본주의 세상에 없어선 안 될 존재다. 또 그것은 속도와 관련이 있다. 속도는 우리가 빠르게 도시를 발전시키고 성장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경계석은 이를 가능하게 만든 기본 소재이며 흐름을 만드는 재료이기도 하다. 자동차를 통한 물류, 사람의 이동, 도시의 가로 구조를 형성하는 도로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고 빗물의 운반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물의 흐름을 통제하는 도시 인프라의 기능도 수행한다. 경계석의 모양을 보면 돌이 적층된 면적인 이미지보다 턱을 만들어 분리하고 개발을 촉진하는 가속도와 어울리는 선적인 이미지로 읽힌다. 자본주의의 급속한 팽창과 산업화는 세분화된 소유의 개념을 발생시켰고 그에 따라 도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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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홍익대학교 중앙광장
2006년 홍대 인근에 사무실을 연 후 점심시간이면 가끔 직원들과 함께 건축학과 졸업전시회나 강연을 보러 다니며 홍대 캠퍼스 진입 공간인 중앙광장을 만나게 되었다. 이곳은 폭이 30m쯤 되고 길이가 300m 정도인 좁고 긴 형태이지만 홍대 내에서는 가장 넓은 오픈스페이스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고목 플라타너스와 양버들 그리고 느티나무 몇 주가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른 대학교 캠퍼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2007년부터 이 공간의 리노베이션이 시작됐고 1년 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중앙광장이 다시 태어났다. 변신과정 내내 이 광장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기대감이 컸지만 완공 후의 모습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원래 있던 나무 사이에 1~3m 키의 갖가지 나무를 두서없이 식재하여 마치 서울 근교의 그렇고 그런 수목 농장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인 공간의 스케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한창 조경 설계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던 시절, 나는 왜 멀쩡한 광장을 이렇게 만들어버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공간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 계기가 몇 년 후 찾아왔다. 2010년부터 홍대 건축학과 4학년의 조경 과목을 맡게 되면서부터 나는 광장을 매주 자연스럽게 지나다니며 변신을 거듭하는 이 광장의 매력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새로 심은 수목들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광장은 계속 변해갔다.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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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노트] 국가라는 그릇 김영민
1등작 ‘세종상징광장’ 디자인 노트
언제부턴가 나는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의심하는 습관이 생겼다. 표면적인 요구사항들이 언제나 내가 진정 해주기를 바라는 일들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더 난감한 사실은 그들도 대부분 정확히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요청된 다른 이의 욕망은 역설적으로 내가 그 욕망을 다시 정의해야만 충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차피 모든 욕망은 결국 타인의 욕망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렇듯 모호한 요구 사항들을 쏟아내지만 정작 본질은 어디론가 미끄러져서 혀끝에서만 맴도는 지침서를 두어 번 읽어보았다. 이 공모전이 요구하는 바는 세 가지라고 결론 내렸다. 광장, 상징, 현실. 그리고 실상 별다른 연관성도, 인과 관계도 없는 이 세 가지를 애초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엮을 것.
첫째, 광장을 만들어야 한다. 광장은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에 어려운 공간이다. 우리는 광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 서구의 전통에서 광장은 도시의 정체성, 또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권력의 가장 설득력 있는 자기표현의 공간이었다.1 반면 수도 외에는 어떠한 도시적 정체성도 용납하지 않았던 우리의 중앙집권적 유교 문화에서는 광장은 존재할 필요가 없는,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되는 공간이었다.2 그래서 우리의 도시에서 광장은 어색한 공간이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친숙한 다른 종류의 공간으로 대체되기를 요구받는 공간이다. 다른 한편으로 광장은 비어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어려운 공간이다. 우리는 디자인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채우는 행위라고 교육받고 그러한 실천을 해왔다. 공간을 채우는 일을 업으로 삼아온 사람에게 채우지 않아야 하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모순이다. 그래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팀이 모여 미팅을 했을 때 판이하게 다른 디자인과 생각들이 나왔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있었다. 채워진 생각과 안. 그릇을 만들어야 하는 데 모두가 속이 꽉 찬 입방체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광장의 본질은 비움이며, 채움의 논리가 비움을 압도하는 순간 더 이상 광장은 광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자명한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도 자명하게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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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노트] 협업을 다시 생각하다
프로젝트 팀 Terminal 7의 작업 과정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디자인을 제안하기 위해서는 영역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공모전 및 실무에서의 협업은 심사 기준의 충족이나 보고서 제출을 위한 형식에 그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형식적인 협업이 아닌, 영역의 구분 없이 수평적 관계에서 세종대로 역사문화 공간 설계공모에 참여했던 플랫폼 형식의 프로젝트 팀 Terminal 7의 협업 과정을 소개한다. 이 협업에서 우리는 익숙한 사고와 디자인 방식을 확장시킬 수 있었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5명의 구성원과 5명의 리더
공모전 규모와 결과물(도판 A0 2장, 설계설명서 A3 15매 이내, 법규 검토 및 추정 공사비 내역 포함)의 양으로 미루어, 다섯 명이라는 인원은 일반 설계사무소의 인력과 비교해 다소부족하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특히 작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 기존의 설계사무소가 가지고 있는 축적된 노하우와 안정적 팀 구성은 매우 효율적이다. 우리 팀은 플랫폼 형식의 프로젝트 팀으로 5명의 전문가(뉴욕을 기반으로 한 건축가 2명, 조경가 2명, 도시설계가 1명)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원 간에 이력과 실무 경험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경력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수평적으로 협업을 진행했다. 수평적 관계 속에서 모든 구성원은 비판적이기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공모에 임했다. 이러한 접근 태도 덕택에 5명의 구성원은 자료 취합, 현황 분석, 브레인스토밍, 디자인, 프로덕션, 내러티브 구성 등 성격이 확연히 다른 디자인의 과정에서 각각 리더가 될 수 있었다.
프로젝트 초기, 대상지의 규모는 작아도 도시 맥락적으로 서울의 거대한 지하 공간의 시점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유형typology이 되어 추후 서울의 도시개발 사업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도시설계가의 거시적 안목을 바탕으로 아이디어가 전개되었고, 그 위에 조경가와 건축가의 생각이 더해졌다. 또한 디자인 과정에서 조경가는 협의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형태의 디자인 대안들을 제안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건축가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디자인 형태를 조언하였다. 이후 구체적인 지하 공간의 건축 형태와 프로그램은 건축가들이 주도했고, 지하 공간의 정원과 벽면은 조경가와 도시설계가에 의해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전반적인 그래픽 스타일과 결과물은 경험 많은 사람을 주축으로 각자 자신 있는 영역의 드로잉을 맡았다. 전반적인 과정에서, 마치 기러기의 비행과 같이 선두의 자리를 바꿔가며 모든 참여자가 유기적으로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존 설계사무소의 시스템이 아닌 수평적 관계의 상호보완적인 팀원 구성이 이번 협업의 바탕이 되었다.
각자의 영역이 아닌 통합된 장소의 디자인
이번 공모전은 국내외 건축사 자격을 요구하는 공모전이고, 일반적인 건물의 매스, 입면, 프로그램 등이 아닌, 역사문화 공간(지하 공간 포함)에 대한 설계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디자인보다는 그 복합적인 주변 맥락(성공회성당, 덕수궁, 세종대로, 서울시청, 세실극장 등)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담긴 공간을 제안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따라서 각자의 영역을 구분하여 디자인하기보다 하나의 장소로 대상지를 인식함으로써 초기 아이디어 협의에서부터 구체적인 디자인까지 건축가나 조경가가 아닌 통합적 디자이너로서 설계에 임했다. 브레인스토밍 과정에서 아이디어에 대한 비판적 자세와 구체적인 평가를 배제하면서 다양한 관점의 아이디어를 열거하였다. 서울의 수평적 경관, 현대 도시의 수직적 경관urban depth, 유형으로서 대상지의 가능성, 역사적 층위로서 지하 공간에 대한 재해석 등을 바탕으로 우리는 서울의 다층적 경관을 더 구체적으로 해석하였고, 두 가지의 디자인 원칙을 결정하였다. 첫째, 대상지의 상부는 비우고 간결한 형태의 표면을 만든다. 둘째, 서울의 수직ㆍ수평적 층위를 공간에 담는다. 이 두 가지 원칙으로부터 두 개의 다른 지붕 형태를 도출하였다. 장단점이 명확히 다른 이 두 개의 지붕 형태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조경가와 도시계획가는 연속적인 표면의 연결과 더불어 변화감 있는 지붕 쪽을 선호하였고, 건축가는 띄운 지붕의 형태를 선호했다. 이 과정에서 상부 공간과 지하 공간의 관계를 고려하여 띄운 지붕을 선택했다. 이는 팀 구성원 모두 띄워진 표면 틈 사이로 보이는 경관 및 자연환경의 유입이 지하 공간의 다양한 경험을 유도한다는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이후 작업에는 공간별로 전문성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경가와 건축가가 각 영역의 디자인 주체가 되었다.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와 유펜 디자인 스쿨을 졸업하고, 현재 뉴욕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의 프로젝트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다. Dubai Waterfront 설계에 참여하고 있으며, Milwaukee Lakefront Gateway Plaza Competition과 China DachongVillage 설계를 이끌었다. CA조경의 창립 멤버로 7년간 여러 공모전에서 당선을 이끌었으며, 올해 초 열렸던 서울역고가 국제지명 현상설계에 CA조경과 함께 참여했다. 최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IDEAS(www.groupideas.org)라는 디자인 및 리서치 그룹을 만들어 다양한 전문가들과 협업하고 있다.
전진현은 현재 뉴욕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New YorkCiti Bank Plaza 설계에 참여하고 있으며, China International Garden EXPO 설계를 이끌었다. 하버드 GSD 졸업에 앞서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후 환경대학원에서 조경을 전공했으며, 신화컨설팅에서 디자이너로서 실무를 쌓았다. 그는 휴먼 스케일의 디자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용자가 삼차원 공간을 지각하게하는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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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타이페이의 도시재생
남루한 풍경으로부터 부활되는 도시 문화
20세기 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두 나라, 대만과 한국, 그리고 두 나라의 수도 타이페이와 서울은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근대화를 맞이했다. 일제의 통치 하에서 서구의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두 도시의 근대 풍경은 흡사한 부분이 많다. 오늘날 서울과 타이페이의도시 풍경은 얼핏 보기엔 비슷해 보이나, 건물의 입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두 도시에 담긴 시간의 격차가크게 다가올 것이다. 스펙터클한 고층 건물이 화려하게 거리를 장악한 서울에 비해, 타이페이에서는 근대기에 지어진 건물뿐만 아니라 낡은 건물을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대해 변명하자면 우리에게는 한국전쟁이라는 폐허의 시간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 개발에 대한 욕망으로 노후한 건물들을 쉼 없이 철거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근대란 도시속의 삭제된 페이지마냥 드문 흔적으로 자리한다. 반면 타이페이에는 남루한 옛 건물들이 길거리 곳곳에 남아 두 도시 사이의 차이를 더욱 극명히 드러낸다. 우리에게 철거 대상인 건물들이 타이페이에서는 골조가 낡은 채로,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로, 빈 채로, 때로는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가설 지지대만으로 유지된다. 방치게는 한국전쟁이라는 폐허의 시간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 개발에 대한 욕망으로 노후한 건물들을 쉼 없이 철거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근대란 도시속의 삭제된 페이지마냥 드문 흔적으로 자리한다. 반면 타이페이에는 남루한 옛 건물들이 길거리 곳곳에 남아 두 도시 사이의 차이를 더욱 극명히 드러낸다. 우리에게 철거 대상인 건물들이 타이페이에서는 골조가 낡은 채로,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로, 빈 채로, 때로는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가설 지지대만으로 유지된다. 방치된 옛 건물들은 현대와 근대 사이의 풍경을 오버랩하며 타이페이만의 독특한 도시 풍경을 구성한다. 그 배경에는 타이페이를 도시문화적으로 재생시키고자 하는 정부 기관, 재단, 대안 공간, 소규모 예술가 그룹, 액티비스트 등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이 있다.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건축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송원아트센터, 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송원아트센터, 2014), ‘Hidden Dimension’(갤러리 스케이프, 2013)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갤러리 스케이프 책임큐레이터, 갤러리킹 공동디렉터,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2015년 동북아시아 도시 리서치(예술경영지원센터 후원)를 진행했으며,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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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하트 오브 더 씨
생의 좌표
구글 지도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종이 지도는 여행의 필수품이었다. 종이 지도와 나침반을 단숨에 대체한 구글 지도의 가장 큰 장점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준다는 점이다. 아무리 낯선 장소에 던져지더라도 나의 좌표만 알면 불안하지 않다.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새로운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해양 모험담을 그린 영화 ‘하트 오브 더 씨’는 좌표를 잃고 망망대해에 표류하면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고래의 공격에 노출된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표류나 고립을 다룬 영화는 많다. 이부류의 영화는 대개 거대한 자연에 비해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하잘것없는지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이번 영화의 특별한 점은 자연을 초월한 존재인 고래에 있다. 영화는 인간이 고래를 만나기 전, 그리고 거대한 흰 고래에게 완벽하게 TKO패 당한 이후의 두 상황으로 나뉜다.
이 영화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바탕이 된 실화를 그리고 있다. 생활고를 겪는 소설가 허먼 멜빌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한 남자를 찾아오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1800년대 초에 고래잡이는 기름을 얻기 위한 중요한 산업이었다. 야심 차게 항해를 시작한 포경선 에식스 호는 거대한 고래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94일간의 표류 끝에 소수만 살아남는다. 생존자 중 한 명이었던 남자는 멜빌의 간청에 못 이겨 지옥 같았던 체험담을 들려준다. 4D로 보았으면 멀미가 날 뻔 했다. 2D로도 심하게 흔들리는 배에 탄 것 같은 다이나믹함을 충분히 체감할 수 있다. 거대한 돛을 올리는 장면, 바람에 맞서 바닷물이 얼굴로 튀고 고래의 몸짓에 배가 산산조각이 나는 스펙터클은 그 자체로 공감각적인 쾌감을 준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