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 [그들이 설계하는 법] 같이 하기
    이번 마지막 글에서는 여성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던 내가 디자인으로 진로를 바꾼 후 그 초기부터 현재까지 디자인 프로젝트는 물론 연구와 강의까지 모든 활동을 함께 해 온 건축가 파트너이자 남편인 매튜 줄Matthew Jull과의 대화를 담고자 한다. 설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공동 작업의 과정과 팀의 시너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작은 회사의 특성상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팀 자체가 바뀔 때가 많고 학교에서 직접 가르치는 학생들도 많이 참여시키다보니 그렇게 만들어진 팀원간의 궁합까지 매번 다른 것이 사실이다. ‘같이 하기’는 쿠토노톡KUTONOTUK과 북극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ADG)의 공동 대표로서 나와 매튜 줄이 디자인과 연구를 병행하는 방법과 방향에 대한 이야기다. 영어대화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뉘앙스가 조금 달라지기도 했지만, 되도록 평소 대화할 때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조리나(이하 조): 우리 둘만의 돋보이는 공통점은 일종의 아웃사이더였던 게 아닐까? 지금은 디자이너로 인정받으며 활동하고 있지만, 다른 대학원생들과 비교하면 디자인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디자인 비전공자들이었잖아. 결국 대학원에서 각각 건축과 조경 학위를 수여받긴 했지만 디자인은 우리에게 두번째 길이었어. 너는 물리학 박사를 마치고 연구원 생활까지 하다가 건축으로 진로를 바꾼 경우고, 나 역시 정치학과 여성학을 공부하고 NGO에서 일하다가 조경의 길을 선택한 거잖아. 학부 때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점이 현재 우리 설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해? 매튜 줄(이하 줄): 글쎄. 하나 확실한 건 주변에 아는 사람이 학부 전공으로 건축이나 조경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러지 않도록 말리겠다는 거야. 우리의 배경이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자인은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 특히 지금 시대의 건축가나 조경가는 다방면에 걸쳐 많이 알아야 하는 제너럴리스트임이 분명한데다 서로 다른 가치와 사고 방법을 연결하고 종합할 수 있는 지혜를 요구하잖아. 물론 도시의 물 순환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다거나 공공 건축을 위주로 설계를 진행했다거나 구체적인 전문 분야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조: 하지만 우리의 그런 배경이 디자인에 매번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것은 아니잖아. 줄: 그게 아이러니한데,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아. 하지만 공간 또는 디자인을 정의하고 해석하는 방향에서 묻어나오는 것 같아. 우리가 북극 디자인 그룹을 만든 이유 중의 하나도 디자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과 디자인을 이야기해 보기 위해서잖아? 조: 뭐.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난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개념 중의 하나가 세상의 모든 것이 문화적 구성체cultural construct라는 점이었던 것 같아. ‘태생적 운명’이라는 개념에 도전하면서 무엇이 되었든 인간 사회에서는 역시 각자 생각하고 말하기 나름이라고 주장하는 거지. 진리도 언젠가는 변할 문화적 사상이라는 얘기잖아. 조경을 하면서 특히 ‘자연’에 관한 정의를 내릴 때, 이런 여성학의 배경이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 ‘자연’ 또한 언제 어디서나 색다르게 제조manufacture될 수 있는 문화적인 매체라는 거지. 또 한 시대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달픈지 NGO에서 일하면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꾼다’거나 ‘바꾸겠어!’ 같은 슬로건을 보면 오히려 사기가 떨어져. 안 믿겨지더라고. (웃음) 조리나는 1982년 생으로, 미국 웰슬리 대학교(Wellesley College)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미국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츠(Michael Van ValkenburghAssociates)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맥스완 아키텍트 + 어바니스트(Maxwan Architects + Urbanists)에서 다양한 도시설계, 조경,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Virginia) 조경건축학과 대학원 강사로 있으며, 하버드 GSD에서 초청강사로 가르친 바 있다. 건축가인 매튜 줄(Matthew Jull)과 쿠토노톡(KUTONOTUK)의 공동 대표로서 헬싱키 구겐하임(HelsinkiGuggenheim)과 헬싱키 공공 도서관(Helsinki Public Library),MoMA PS1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MoMA PS1 Young ArchitectsProgram), 유로판(Europan) 등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수상한바 있다. 또한 북극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의 대표로서 미국 워싱턴 D.C.의 정책 연구 기관과 협력하여 북극 도시와 극한 랜드스케이프(extreme landscapes)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www.kutonotuk.com | www.arcticdesigngroup.org 매튜 줄(Matthew Jull)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지구물리학(Theoretical Geophysics)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파리의 지구물리학 연구소(Institut de Physique du Globe)와 미국의 우즈 홀 해양 연구소(Woods Hole Oceanographic Institution)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하버드 GSD에서 건축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SOM(Skidmore, Owings & Merrill LLP), 스티븐 홀 아키텍트(Steven Holl Architects), MIT 센서블 시티 랩(SENSEable CityLab)에서 건축과 도시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2008~2012년에는 네덜란드 OMA/Rem Koolhaas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건축학과 조교수(Assistant Professor)이자 조리나와 쿠토노톡 및 북극 디자인 그룹의 공동 대표로 있다. www.kutonotuk.com | www.arcticdesigngroup.org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로리 올린 Beyond the Limits of Landscape Architecture, and into the Heart of Landscape Architecture: Laurie Olin
    조경가 로리 올린은 최근 조지 루카스 등과 함께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예술훈장National Medal of Arts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미국 정부가 예술가에게 주는 가장 영예로운 상이다. 역대에 국가예술훈장을 받은 조경가는 단 세 명, 댄 카일리, 로렌스 핼프린, 그리고 이안 맥하그가 있다. 조지 루카스는 누구나 알지만 일반인 중에 로리 올린을 들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조경가의 사회적 기여와 개인적 성취가 현대 문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영화감독과 나란히 거론되었다는 점에서 조경계에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만큼 올린은 단지 훌륭한 조경 디자인을 넘어, 대중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사회의 문화적 토대 자체를 구축해 온 인물이다. 브라이언트 파크, 콜럼버스 서클, 배터리 파크 시티, 게티 센터, 워싱턴 모뉴먼트 등 기념비적인 작업을 해 왔으며, 50여 년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가르쳤고 하버드 대학교와 칭화 대학교 조경학과의 학과장을 역임하는 등 실무와 교육의 병행을 통해 현재 세계 조경계를 이끌고 있는 수많은 중요한 디자이너를 길러냈다. 어떤 평론가들은 올린을 옴스테드 이후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조경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관심과 주제는 대부분 미국 도시의 이야기지만, 반세기에 걸친 통찰과 지혜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과 문화적 가치에 기반한 것이기에 우리 도시에도 큰 교훈을 준다. 개발과 산업, 성장의 시대를 쉼 없이 달려 온 한국 사회도 이제 저성장과 청년 실업, 다양성과 복지를 화두로 국면을 전환하고 있고 조경 및 관련 산업 또한 여기에 발맞추어 변하고 혁신해야 함을 누구나 느끼고 있다. 로리 올린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미국사회가 이미 1970~1980년대를 거치며 혹독히 겪은 사회적 혼란과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관찰할 수 있다. Q. 알래스카 출신이라는 개인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해 달라. A. 대학에서는 원래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어릴 적 나의 눈으로 봤을 때 알래스카에서 유일하게 무언가를 만드는 직업은 토목 엔지니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한두 해 다녀보니 토목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예술적이지 않았다. 이미 학기가 지나고 있었고 장학금도 받고 있었지만 뭔가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건축을 해보자는 결심이었다. 본토에 와서 고향과 가장 가깝고 가장 비용이 적게 들어 택한 학교가 워싱턴 주립대학교였다. 당시 알래스카가 주로 승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워싱턴 주, 오레곤 주, 아이다호 주는 알래스카 학생에게 주민 수준의 등록금 혜택을 주고 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학비 보조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매년 여름마다 다음 학기를 위한 등록금을 벌어야 했다. 알래스카 도로건설국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결과적으로 워싱턴에서 4년을 보낸 것은 참으로행운이었다. 당시 건축학부에서 도시계획과 조경학과를 신설했기 때문이다. 명문 학교인 하버드, 버클리, 미시간 등을 모델로 삼으려 했다. 또 하나의 행운은 보자르의 전통 속에서 훈련 받은 노교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어 워싱턴 주립 대학교는 역사적인 안목을 갖춘디자인을 교육하는 데 매우 뛰어났다는 점이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혹독하게 드로잉 연습을 시켰다. 4년 내내 거의 매일같이 그리고 또 그렸다. 2학년 때 워싱턴대학교는 리차드 하그Richard Haag를 영입해 조경학과를 신설했다. 그가 커리큘럼을 짜고 이사회의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조경학과에 속한 학생들이 없었기때문에 우리 학년의 스튜디오를 담당하게 되었다. 나는 일 년 동안 리차드 하그 스타일의 이론과 역사 수업에 푹 빠졌고 그것은 정말 좋았다. 그는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스탠 화이트Stan White의 제자였는데 화이트는 옴스테드의 사무실 출신이었다. 히데오 사사키 등이 그의 동료였다. 리차드 하그는 대단한 선생이었다. 그것이 세 번째 행운이다. 리차드는 사무실을 열었는데 학생 중 드로잉에 능한 몇 명을 뽑았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실무와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나에게 무척 자연스런 일이었다. 졸업 후엔 캘리포니아에서 육군에 복무했고 시애틀의 한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리차드 하그 사무실과 자주 협업했고 나의 학교 친구들이 리차드의 직원이었기에 건축과 조경의 협업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1964년도에 나는 뉴욕으로 이주해 당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중 한 사람이었던 에드워드 라라비 반스Edward Larrabee Barnes의 회사에서 건축가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이미 알래스카에서 일하면서 지형을 만들고 도로를 설계하는 데 익숙했고 조경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 캠퍼스 등의 대규모 마스터플랜 등을 집중적으로 맡게 됐다. 때는 1960년대였다. 당시의 상당수 젊은이처럼 나 또한 사회적으로 공인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여행을 시작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오두막에서 생활하고 돌아다니다가 돈이 떨어지면 이런 저런 일을 하는 식이었다. 결국 시애틀로 돌아왔는데 이제 정말 그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많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유럽을 보고 싶어 장학금을 신청했다. 풀브라이트, 롬 프라이즈Rome Prize, 구겐하임 재단에 지원했다. 어느 것 하나라도 합격하게 되면 고향을 벗어날 이유가 되기 때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셋 다 합격하게 되었다. 결국 구겐하임과 로마의 미국 재단을 설득해 양쪽의 프로그램을 모두 누리는 것으로 조정했다.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 기반을 두고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해 왔다.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고, 주요 작품이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 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이며, 저서로 『시티오브뉴욕』(공저)이 있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서 조경 설계를 연구하며 학생들이만드는 것의 기쁨을 알아가도록 돕고 있다.
  • [재료와 디테일] 화분, 장식을 넘어 생활로
    아침 출근길에 버스를 타기 전에 늘 집 앞 식당을 거치곤 한다. 맛이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곳이었지만 글의 재료를 찾기 위해 고민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식당 앞 풍경은 훌륭한 영감을 주었다. 상도동 급경사지의 지형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콘크리트 옹벽 앞에서 홀로 외롭게 그러나 당당하게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작은 화분과 꽃은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흙을 담을 땅조차 부족한 곳에 억지로 공간을 만들어 식물을 심는다고 잘 자라줄지도 의문이고, 이런 경우엔 관리의 어려움도 뒤따른다. 큰 나무가 필요하지 않다면 이렇게 작은 화분을 이용하는 것이 녹시율도 높이고 경관용으로도 손색이 없는 좋은 방법이란걸 식당 주인의 지혜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주위에 화분은 흔하다. 관리가 용이하면서 실내분위기를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좋은 인테리어 소재이기도 하다. 도심의 흔한 찻집에서도 실내에 녹색을 들이려는 노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큰 나무에서 작은 나무 또는 인조목까지 화분을 채우는 식물을 다양화할 뿐만 아니라, 화분을 바닥에 그냥 내려놓거나 벽이나 테라스 난간에 걸어두는 등 활용법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화분의 활용은 실내에서 흙으로 식물의 생육 조건을 만드는 것이 힘들다는 걸 방증하기도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유지 관리의 어려움에 있을 것이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공간 공감] 박수근미술관
    박수근미술관이 그의 고향 강원도 양구에 문을 연 지 14년이 지났다. 대표적인 작가 중심 미술관으로 자리 잡은 이 미술관은 박수근기념관, 현대미술관, 박수근파빌리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 건물 모두 건축가 이종호가 설계했다. 미술관 건립 후 뜻있는 여러 사람들이 박수근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한국 근현대 미술 작품을 기증하여 미술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낮은 언덕에 둘러싸여 있는 세 전시관은 각각의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주변 풍광을 거스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특히 기념관과 파빌리온은 박수근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인 ‘마티에르’를 건축적으로 해석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종호는 설계 노트에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박수근의 작업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드는 일련의 전개 과정이 중요하다. 대지에 미술관을 새겨 나갔다. 박수근의 그림은 그려진 것이 아니라 새겨진 것이다.” 미술관의 외벽으로 화강석 깬돌을 성곽처럼 쌓았다. 여기에서 박수근 고유의 무채색의 거친 마티에르를 조우할 수 있다. 이 석축은 건축 외벽이라기보다는 성곽처럼 보이며 박수근 그림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관람객은 이 석축을 강렬하게 경험하며 미술관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누구든 박수근 회화의 이미지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미술관 내부에 들어서면 박수근의 그림들이 생각보다 작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크기가 작다고 해서 결코 감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림의 소박함과 진실함에 감동받게 되고 그런 감동이 건축적 체험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기념관의 지붕 위를 걸어 박수근파빌리온에 이르는 길은 성곽에 닿아 있는 기다란 산기슭을 따라 나 있다.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 [칼럼] 노들섬에 그리는 꿈 Column: A Dream on the Nodeul Island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사회를 꿈꾸는 노들섬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아키토피아의 실험’은 전쟁 이후 한국 사회가 꿈꿔온 건축·도시의 이상향을 잘 보여준다. 전시에 소개된 세운상가, 파주출판도시, 파주 헤이리아트밸리, 판교 신도시 등은 더 나은 곳을 꿈꾸는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욕망이 투사된 장소들이다. 이들 장소에서 건축가와 정치인은 국가 개발의 이상을 탐색해 보았고(세운상가), 코디네이터가 된 건축가는 이상적인 문화 공동체를 실험해 보았다(파주출판도시). 한편 중산층의 개별 욕망이 집적된 최근의 판교 신도시는 국가 주도의 유토피아가 개인적 유토피아로 옮아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난 6월 10일 공고되어 진행 중인 ‘노들꿈섬 공모전’ 또한 이처럼 지금보다 더 나은 장소를 그리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한때 중지도中之島라 불리고 시민들이 강수욕을 즐겼던 곳, 지금은 백로(鷺)가 노닐던 징검돌(梁)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노들섬에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사회의 이상을 구현해 보겠다는 것이다. 이 공모전의 MP 서현 교수(한양대학교 건축학과)가 공모 지침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그것은 조선 개국 초기 우리 선조가 내다보았던 도시 천 년의 꿈과 희망의 그림이며 여전히 ‘서울’이 꿈꿔야 할 이상이다. 한강예술섬이 노들꿈섬이 되기까지 노들섬이 우리의 꿈을 그려낼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노들꿈섬’이란 이름을 얻고 공모전을 시행하게 된 배경에는 이 섬을 기념비적 문화 장소로 탈바꿈하려는 거듭된 시행착오가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2005년의 문화 단지 조성 계획은 설계비 과다 요구 등으로 무산되었고, 2008년 재추진된 한강예술섬 조성 사업 또한 지나친 사업비로 찬·반 논란만 지속해 오다가 2012년 최종 보류된 바 있다. 이후 이 섬은 사업 장기 보류와 함께 텃밭으로 임시 활용되어 왔다.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매력적인 장소야말로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공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에 2012년 서울시는 이 섬의 활용 방안에 대한 논의를 재개했고, 2013년에는 전문가 의견을 조사하여 “오페라하우스 건립은 반대하지만 섬 자체는 잠재적 가치가 크므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활용 방법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노들섬 포럼’(2013년 8월)을 필두로 시민토론회, 워크숍 등 시민·전문가들이 함께하는 다양한 논의가 지속되었고, 사진 공모전, 학생 디자인 캠프, 온라인 시민 투표, 전문가 아이디어 스케치, 시민 아이디어 공모 등의 참여 프로그램이 노들섬의 새로운 활용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방편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이로써 노들섬의 조성 방향은 크게 두 가지의 가치로 수렴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시민 모두가 언제나 함께 가꾸고 즐기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단계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획·운영 계획 선행 후 공간·시설 계획을 추진하는 단계적 공모 방식 노들꿈섬 공모의 지침은 공모전 주제어를 ‘시민’과 ‘역사’로 제시하고 있다. 즉 시민의 참여로 완성되는 섬, 적정한 규모로 시작하여 시민의 경험과 기억이 적층되는 섬을 지향한다(노들꿈섬 조성 사업은 2015년 시나리오 플랜, 2017년 1단계 완성, 2037년 최종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 따라 공모전 형식 또한 기존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번 공모전이 ‘기획·운영 중심의 단계적 공모 방식’을 통해 섬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기획안부터 운영 전략, 전략에 최적화된 공간 계획, 그리고 탁월한 최초 운영자 모두를 선정하게 된 것은 필연적이다. 서울시가 총 3차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는 노들꿈섬 공모 방식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참신하고 유연한 아이디어를 다양하게 받아 다수의 팀을 선정하는 1차 운영구상(기획·운영안) 공모단계를 마치면, 선정된 팀들은 2차 운영 계획·시설구상 공모에서 실현가능성이 담보된 운영계획서와 공간 및 시설에 대한 대략 구상안을 겨루게 된다. 이 2차 공모를 통해 운영자와 운영계획안이 최종선정되면, 선정된 안을 기반으로 시설 설계 지침을 마련하고 이 안에 따라 3차 공간·시설 조성 공모를 별도 추진한다. 이것은 건축, 조경, 도시 전문가가 참여하여 진행하는 전통적인 설계공모 형식이다. 이렇듯 대규모 공공 공간의 기획과 운영을 최초 제안자가 책임지고 맡는 것은 전례 없는 시도로, 꼭 필요한 시설을 점진적으로 완성해 나감으로써 과도한 재정 부담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시설 조성 후에는 공공의 운영비 보조 없이 자체 수익으로 운영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의의를 갖는다. 한수의 비어있는 섬에 그리는 소통과 화해의 공간 그런데 왜 하필 노들섬일까? 접근성이 좋지 않아 그저 멀리 바라보며 스쳐 지나가던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 삶 가까이 끌어오려는 시도, 주변과 동떨어져 있어서 오히려 선도적 사업 방식을 적용하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이점 등은 이 질문의 충분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신영복의 글씨 ‘서울’의 방서傍書 ‘북악무심오천년北岳無心五天年 한수유정칠백리漢水有情七百里’에서 조금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작가는 해설에서 “북악은 왕조를 상징하고 한수는 민초를 상징한다. 북악은 5천 년 동안 백성들의 고통에 무심하였지만 한수는 민초들의 애환을 싣고 700리 유정하게 흐르고 있다”고 쓴 바 있고, 이후 책을 통해 “북악이 권력의 상징이라면 멀리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한강이야말로우리가 회복해야 할 소통과 화해의 상징”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1 물론 이것은 시정市政이 지향할 바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겠지만, 이로써 함께 나누고 즐기면서 소통하는 공간을 한수의 비어있는 섬에 구현하려는 시도가 전혀 맥락 없어 보이지 않는다. 이 새로운 방식의 공모는 지난 7월 31일 1차 운영구상 공모 참가 접수를 마감하고 작품 접수를 기다리고 있다. 사례 없는 첫 시도이니만큼 리스크가 전혀 없진 않을 테지만, 그동안 전문가들과 서울시 공무원들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부단히 애써 온 결과가 한강의 작은 섬에 새로운 장소적 의미와 시민이 공유할 수 있는 미래가치로 드러나길 기대해 본다. 그래서 과정과 결과 모든 것이 이 시대의 이상향이 되기를. 정귀원은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서울건축에서 건축 실무를 익혔다. 『공간(SPACE)』, 『건축인 포아(poar)』 등의 건축 전문지를 거쳐 현재 건축리포트 『와이드(와이드AR)』 편집장으로 한국의 건축과 도시를 폭넓게 바라보고 있다.
  • [에디토리얼] 빅데이터 인문학 Editorial: Big Data as a Lens on Human Culture
    가을을 여는 첫 페이지다. 산들바람 같은 글감이 없을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9월호를 마감하고 있는 지금은 아직 한여름 폭염의 절정이다. 청량한 가을 맞이 에디토리얼을 쓰기에는 더워도, 너무, 덥다. 독자 여러분은 숨 막히는 무더위를 무엇으로 이겨내셨는지. 부지런하다면 이번 호 특집으로 소개하는 ‘경의선숲길’이라도 거닐며 여름밤의 후끈한 기운을 즐기겠지만, 밖에 나가 몸 쓰기를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나에겐 가만히 앉거나 누워 뒹굴며 닥치는 대로 책 읽기가 최선의 피서 방법이다. 아니 책장 넘기기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며칠째 산만한 잡식성 독서를 이어가다 연초에 샀으나 묵혀두었던 노란색 표지의 책 한 권에서 모처럼 몰입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다. 수학, 진화생물학, 언어학, 컴퓨팅을 넘나드는 젊은 과학자 에레즈 에이든Erez Aiden과 장바티스트 미셸Jean-BaptisteMichel이 지은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사계절, 2015). 『빅데이터 인문학』은 “인문학이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의 혁명적 전환을 제안”하며 두 저자가 개발한 프로그램인 ‘엔그램 뷰어Ngram Viewer’에 대한 책이다. 빅데이터는 이제 낯설지 않은 용어다. 현재 보통 사람의 데이터 발자국, 즉 전 세계적으로 한 사람이 연간 만들어내는 데이터의 양은 거의 1테라바이트에 가깝다고 한다. 이것은 약 8조 개의 예-아니오 질문(1비트)과 맞먹는 양이다. 빅데이터는 더 커지고, 더 커지고, 더 커지는 중이다. 단순히 정보량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 빅데이터는 이전 방법으로는 ‘다루기에 너무 크다too big to handle’는 개념에서 나온 말이다. 두 저자는 넘쳐나는 데이터, 즉 디지털 지문을 분석하여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볼 수 있는 렌즈를 고안했다.“인간 문화의 역사적 변화를 관찰하는 새로운 도구”임을 자처하는 ‘엔그램 뷰어’는 검색창에 특정 단어를 입력하면 단1초 만에 800만 권의 책을 검색해 그 단어가 지난 500년간 사용된 빈도의 추이를 그래프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즉 어떤 단어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책에 매해 몇 회 등장했는지 그 결과를 빈도로 변환시켜 시각화해서 알려주는 놀라운 도구다. 쉼표를 사용해 여러 단어를 함께 입력하면 그 단어들의 사용 빈도를 동시에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언어는 인간의 생각과 욕망을 대변하고, 언어를 집적한 기록이 책이다. 엔그램 뷰어에 쓰인 800만 권의 책은 2004년부터 추진되고 있는 ‘구글 북스’ 프로젝트에서 추려낸 것이다. 구글은 이 세계의 모든 책을 디지털화한다고 선언한 후 지구상에 존재하는 1억 3000만 권 가운데 3000만 권 이상의 책을 스캔하여 디지털 텍스트로 만들었고, 2020년이면 이 거대 프로젝트가 완결될 전망이다. 에이든과 미셸은 이 방대한 자료를 1초 만에 읽어주는 독서왕 로봇을 만들어낸 셈이다. 만약 인간이 밥을 먹거나 잠을 자기 위해 중단하는 일 없이 분당 200단어씩 읽는다면 총 1만 2000년이 걸릴 분량을 순식간에 무료로 읽어준다. 충분한 설명이 됐는지 모르겠다. 무협지 이상으로 재미있지만 그래도 책 읽기가 번거롭다면 지금 바로 웹 브라우저 주소창에 books.google.com/ngrams를 쳐보시길 권한다. 직사각형 검색창에 관심 있는 어떤 단어를 넣고 엔터키를 누르기만 하면 엔그램 뷰어의 놀라움을 실감할 수 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landscape를 넣어보실 것 같다. 언제부터 경관이라는 단어가 책에 등장했는지, 어느 시기에 이 단어의 사용이 급증했는지, 지금은 어떤지, 그 빈도의 추이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그래프가 뜬다. 랜드스케이프 가드너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를 비교해 보는 분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쉼표를 사이에 두고 landscape gardener와 landscape architect를 넣으면, 전자는 1770년대에 처음 등장하고 후자는 1850년대에 처음 쓰이는데 1910년대를 기점으로 둘의 사용 빈도가 완전히 역전됨을 쉽게 알 수 있다. 엔그램 뷰어에 따르면 내가 태어난 1968년부터 ‘커피’가 ‘차’를 앞질렀다. 도넛의 철자가 doughnut에서 donut으로 변하기 시작한 건 던킨도너츠Dunkin’ Donuts가 창립된 1950년대부터라고 한다. 지난 2세기 동안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물론 여기서 ‘유명한’은 책에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했다는 뜻이다― 사람 열 명은 히틀러, 마르크스, 프로이트, 레이건, 스탈린, 레닌, 아이젠하워, 찰스 디킨스, 무솔리니, 바그너 순이다. 일주일째 나는 이 강력한 장난감에 별의별 단어를 다 입력해 보고 있다. 당연히 19금 단어들도 넣어 본다. 조경사 연구에 뭔가 단서를 얻을까 싶어 18세기 조경가들의 이름을쳐 본다. 그냥 이유 없이 이안 맥하그와 피터 워커를 비교해 본다. 환경미학과 환경윤리학은 환경철학의 부분 집합이라는 게 교과서의 설명이지만, 입력해 보니 환경윤리학의 출현 빈도가 환경철학의 세 배 이상이다. 한여름 무더위는 물론 소중한 점심시간도 잊게 해주는 중독성 강한 장난감이다. 데이터 세트를 다운받으면(books.google.com /ngrams/datasets) 시각화된 그래프를 통해 대강의 감을 잡는 것을 넘어 상세한 통계 분석도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엔그램 뷰어에 대한 폭발적 반응에 이렇게 능청을 떤다. “우리는 이 시간 집어먹는 괴물을 만든 데 대해 모든 이에게 사과하고 싶다.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시간을 허비하도록 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의도가 아니었다. 방법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생산성 저하로 야기된 모든 손해를 원상복구하고 싶다.” 엔그램 뷰어는 누구나 가지고 놀 수 있는 빅데이터 장난감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저자들이 “컬처로믹스culturomics”라고 말하듯, 그 목표는“빅데이터를 통해 언어, 개념, 문화의 진화를 탐구하는 인문학”이다. 물론 우리가 인문학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적확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이 피서용 장난감은 빅데이터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원제는 ‘Uncharted’, 말 그대로 ‘전인미답’이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천변 풍경
    길고 긴 여행을 다녀오니 힘들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여행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지난 8월호 코다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썼던 것 같다. “아마 올 가을에는 ‘즐거웠던’ 이번 여행을 추억하며 한국의 공원과 거리를 쏘다닐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그때쯤이면 고달팠던 현실은 생략된 채 감동적인 장면을 이어 붙여 편집한 여행이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 지금쯤 공원을 쏘다닐 것 같다던 예감이 맞아 떨어졌고, 지난 여행을 그리워할 것이란 예상 또한 그렇다. 예정대로 이번 10월호 특집의 주제는 ‘공원’이다. 편집주간과 편집장은 내가 휴가차 자리를 비운 사이 매년 10월호 특집은 작년 ‘활자 산책’의 바통을 이어 받아 외부 원고 없이 편집부 전체가 원고를 쓴다는 멋진(!) 전통을 만들었다.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 같은 열린(모호한) 주제가 정해진 결과 편집부는, 말년 병장인 양다빈 기자부터 신입 사원인 박인수 기자까지 예외 없이 각자의 주제를 찾아 고민을 거듭하고, 편집회의 때마다 생각이 바뀌고, 주말이면 공원을 헤매고 다녔다. 아무튼 다시 여행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지난 여름 파리에서 이번 호에 소개되는 레퓌블리크 광장을 찾았다.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아서였는지 이상하게도 파리 시 3구와 11구 경계에 위치한 이 광장 쪽으로 답사 루트를 짜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해외 작품은 가볼 수 없으니 그 사정을 소상히 알지 못한 채 소개되는 것이 늘 아쉬웠던 터라 놓치기는 싫었다. 가까스로 돌아오기 이틀 전 저녁 무렵 광장에 가볼 수 있었다. 도착하고 보니 이곳이 내가 사진으로 미리 본 그 광장이 맞는지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사진 속 광장의 밝은 모습은 모두 햇빛의 장난이었던가. 눈앞에 펼쳐진 광장은 마침 해가 지고 있기도 했지만, 잿빛 바닥에 쓰레기와 낙엽이 함께 굴러다니는 우중충한 모습이었다. 한쪽 계단에 걸터앉아 휑한 광장을 보고 있자니 눈앞의 높다란 동상에는 낙서와 뜯긴 포스터 자국이 가득했다. 동상의 기단에 붉은색 라커로 ‘정의와 보상justice & reparations’이라고 휘갈겨 쓰인 글씨는 음산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지역에 저소득층과 유색 인종이 많이 산다던데, 또 근처에 올해 초 테러가 있었던 주간지 샤를리 엡도 사무실이 있다던데,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행동거지가 거칠게 느껴지기도 했다. 동상의 주인이 프랑스혁명을 상징하는 마리안느이고 그 밑에 쓰인 문구가 ‘자유, 평등, 박애’라는 것, 그리고 이 광장이 공화국 헌법이 선포되었고 각종 정치·추모 집회가 열리는 상징적인 장소라는 것은 한국에 돌아와서야 알았다. 광장을 처음 마주한 순간에는 ‘도대체 재작년 리노베이션했다는 이 광장은 무엇이 바뀐 것일까’ ‘과연 이 작품을 게재할 수 있기는 할까’ ‘그런데 이 별것 없어 보이는 광장에 사람들은 꽤 많은걸’, 그런 생각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탕플 거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광장의 북쪽 도로는 보행자우선도로로 광장과 도로 사이의 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보니 자전거는 광장과 도로의 경계 없이 자유롭게 달리고 있었고, 광장 안에는 넘어지고 구르며 스케이트보드를 연습하는 소년, 소녀들이 유난히 많았다. 탕플 거리를 따라서는 프랑스의 공유 자전거인 벨리브의 스테이션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광장의 예전 사진을 찾아보니 2011년까지만 해도 마리안느 동상 주변은 자동차가 다니던 도로였다. 보행자나 라이더, 스케이트보더의 입장에서 보면 기존의 교통 광장이 탕플 거리까지 확장된 시민들의 광장으로 돌아온 셈이니 리노베이션은 격변에 가까운 일이었다. 광장 북쪽으로 뻗은 탕플 거리를 따라가면 생 마르탱 운하와 만나게 된다. 이 운하는 영화 ‘아멜리에’ 속 오드리 토투가 물수제비를 뜨던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고 유람선이 떠다니는 운치 있는 관광지라고 한다. 저녁이면 그곳에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다는데, 접근하기 편하도록 광장에서부터 바닥 포장까지 연결한 것을 보니 운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200여 미터쯤 걸어서 도착한 생 마르탱 운하는 생각보다 좁은 수로였고, 물이 깨끗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수로의 양변에는 맥주 한두 병을 사이에 두고 젊은이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관광객은 아닌듯 싶고 딱 동네 청년들이 마실 나온 분위기였다. 이런 고즈넉한 저녁 분위기의 열쇠는 공간의 스케일에 있는 듯했다. 수로의 턱에 걸터앉으면 발이 물에 닿을 듯 가깝다. 그러니까 가까스로 1차선이 됨직한 도로와 보도 그리고 운하의 수면 높이가 거의 비슷하고 양 편으로 빈틈없이 들어찬 오래된 건물들이 위요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쉽게 모일 수 있는 부담 없는 공간이 된 듯 싶었다. 생 마르탱 운하는 인공 운하다. 19세기 초 파리 시민들의 식수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간선도로를 만들면서 지금은 일부 구간이 복개되어 있다. 이 운하도 개발의 물결에 밀려 사라질 뻔 했다는데 유람선을 띄우고 몇몇 오래된 호텔 등을 보존하는 등 관광자원화 하면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센 강으로 이어지는 이 수로의 복개 구간에는 녹지가 조성되어 있고 광장이나 소공원이 징검다리처럼 연결되면서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파리 시민들의 일상에 얽혀 들어간다. 레퓌블리크 광장 리노베이션 설계안이 광범위한 지역 주민들과 주변 상인들의 요구를 수용해 만들어졌다는데, 일견 평범해 보이는 광장의 모습은 이러한 시민들의 솔직하고 실제적인 요구가 만들어 낸 것이리라. 이런 눈으로 그날 찍은 광장 사진을 살펴보니, 나름 친근함도 느껴지고 뭘 해도 좋을 것 같은 자유로움도 느껴진다. 이제 10월이다. 10년 전 이맘때 청계천 ‘복원’ 사업이 마무리되며 ‘도심 속 자연’이라는 이미지로 새로운 청계천 시대가 열렸다. 덕분에 당시 서울시장은 대통령이되었고, 전국의 지자체에는 생태 하천 조성이 유행처럼 번졌다. 10년 전 청계천프로젝트를 취재하던 나는 이 인공 하천이 개장 10일 만에 전국에서 330만 명의 사람들이 다녀갔을 정도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데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요즘도 각종 축제의 무대이자 서울에 가면 한 번쯤 방문하고 싶은 장소로 꼽히는 청계천의 인기는 여전히 전국구인 듯싶다. 그런데 그 많던 청계천 상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10주년을 맞은 청계천 ‘복원’ 사업. 과연 청계천은 누구의 삶을 반영하고 있을까?
  • [편집자의 서재] 파크 라이프 Editor’s Library: Park Life
    이건 순전히 분량 탓이다. 처음에는 기욤 뮈소의 『센트럴 파크』를 쓰려고 했다. 어떤 장르인지도 모른 채, 오로지 ‘센트럴 파크’라는 제목만 보고 장바구니에 담았던 책이다. 동시에 클릭한 책으로는 에릭 오르세나의 『오래 오래』가 있다. 『센트럴 파크』는 336쪽이고, 『오래 오래』는 611쪽 분량이다. 『오래 오래』에는 중국의 원명원, 파리 식물원, 프랑스의 베르사유, 세비야의 정원, 영국의 시싱허스트, 벨기에의 정원, 일본의 고산수식 정원 등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더구나 주인공이 원예가다. 저자는 파리에서 태어나 베르사유에서 자랐고, 경제학자이면서 대통령 문화 보좌관, 최고 행정 재판소 심의관, 국제 해양 센터 원장 등의 경력도 쌓았지만, 특히 국립고등 조경 학교 학장을 역임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저자 소개 문구는 “여러 공직을 역임하는 동안에도 매일 새벽 두 시간씩 글을 써가며 왕성한 사회 활동의 경험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대목이다.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이력이다. 하지만 책의 전체 분량이 만만치 않다. 결국 “사랑과 감동의 마에스트로 기욤 뮈소의 매혹적인 스릴러”란 카피가 앞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센트럴 파크』를 먼저 집어 들었다. 택배가 도착했던 그 당시에 말이다. 하지만, ‘편집자의 서재’에 뭔가를 쓰기 위해서는 둘 중의 한 권을 ‘새롭게’ 펼쳐야 한다. 문제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점이다. 그 때, 불현 듯 10년 전에 읽었던 책한 권이 떠올랐다. 요시다 슈이치가 지은 제127회(무려 127회다)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파크 라이프』다. 전체 지면은 190쪽이지만, ‘파크 라이프’는 채 100쪽이 되지 않는다. 나머지 90여 쪽은 ‘플라워스’라는 별개의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이 책은 열림원에서 2003년 3월(오유리 옮김)에 초판을 출간한 후, 노블마인에서 2010년 3월(이영미 옮김)에 다시 펴냈고, 은행나무에서도 2015년 8월(이영미 옮김)에 새로운 표지 디자인으로 개정판을 발간했다(책값은 7,800원에서 10,000원으로, 다시 12,000원으로 계속 올랐다). 즉, 꾸준히 팔리는, 여전히 읽을 만한 책이라는 의미다. 게다가, 제목이 ‘파크 라이프’라니? 바로 이번 특집을 위한 책이 아닌가. 주저 없이 노란색 건물과 공원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파크 라이프』(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열림원, 2003)의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주인공 ‘나’는 거의 매일 히비야 공원의 어느 벤치로 출근한다. 그렇다고 백수는 아니다. 자신이 지정해 놓은 공원 벤치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근처 쇼핑몰 미팅에 참석하는 게 중요한 일과다. 지하철에서 실수로 말을 걸었던 여자와 히비야 공원에서 우연히 다시 조우하게 되면서, 공원에서의 만남이 하루 이틀 이어진다. 급기야는 공원을 벗어나 사진 전시회도 함께 보러 가게 되고, 그곳에서 돌아 나오며 소설이 끝난다. 대단한 반전도, 조마조마한 갈등도 없다. 한마디로 사건이 거의 전무하다. 하지만 다음 줄을 읽게 만드는 묘사의 힘이 탁월하다. 빨간 기구를 공원상공으로 띄우는 노인을 비롯해, 저마다의 ‘파크 라이프’를 즐기는 여러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다. 굳이 이유를 따질 필요도 없다. 그들이 왜 그런지를. “‘무언가가 항상 시작되고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현대인의 존재의 불안감과, 뒤틀린 유머는 미미한 희망 같은 것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무라카미 류의 심사평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책장을 모두 덮고 나면. 그녀와 헤어져서 혼자 히비야 입구로 걸어갔다. 분수 광장 앞 벤치는 약간 지쳐보이는 회사원들로 만원이었다. 예전에 “도대체 왜 모두들 공원으로 몰리는 거죠”하고 긴토 씨에게 물은 적이 있다. 긴토 씨는 평소와는 달리 진지하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한숨 돌리려는 거 아니겠어”하고 시원스레 답했다. 딱 떨어진 대답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대꾸 없이 그대로 지나치려 하자, “보라고, 공원이란 장소에선 말이야,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랄 사람은 없잖아. 오히려 누굴 붙잡고 권유를 하거나, 연설을 하거나, 뭔가를 하려고 하면 내쫓기지”하고 덧붙였다.1 흥미로웠던 대목 중의 하나다. ‘공원에서 무언가를 하면 쫓겨날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을, 이 부분을 읽으며 처음 했다. 공원에서 어떤 새로운 걸 할 수 있을까, 공원이란 공간을 좀 더 색다르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만 고민했지, 공원의 금기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작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허락된 공간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쪽, 항상 저기 저 벤치에 앉지” 여자가 연못 건너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지를 쭉 뻗은 소나무 밑에는 확실히 내가 혼자 이곳에 올 때마다 앉는 벤치가 있다. “그쪽, 저 벤치에 먼저 와서 앉은 사람이 있으면 일부러 그 앞을 왔다갔다 하지? 요 며칠 전에도 먼저 와서 앉아 있던 커플 앞에서 일부러 휴대전화를 걸지 않았어? 큰소리로 3분 정도 계속 떠들어서 결국 그 커플이 못 버티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신나하던 그 표정, 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걸.”2 가장 신나하며 읽었던 대목이다. 참, 별거 아닌 부분인데 말이다. 공공 공간에 놓인 공공의 시설물이 순간적으로 한 개인에 의해 사적인 영역화가 이루어진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혹은 순간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게 왠지 꽤 근사해 보였다. ‘이 공원엔 나만의 벤치가 있다!’ 실제로 긴토 씨의 대답처럼 “한숨 돌리려”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 공원에 간다면 좋은 위치의 벤치를 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꼭 이 대목 때문은 아니지만, 이즈음부터 벤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그렇게 찍은 사진의 일부가 이번호 특집 원고에 실렸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의 공원이 아니라, 나의 벤치가 있었던가? 나의 ‘파크라이프’는 어떠한가?
  • [시네마 스케이프] 디올 앤 아이 충돌과 융합
    요즘 설계공모 출품을 준비 중이다. 기존에 진행하던 프로젝트들까지 갑자기 바빠지는 바람에 여유롭게 설계공모에 집중하려던 계획은 보기 좋게 깨졌다. 한쪽에서는 공개공지 녹지 면적이 부족해서 머리를 짜는 중이고 이 와중에 건축 심의 담당자는 말도 안 되는 위치에 벤치를 놓으라고 한다. 담당 스태프는 건축 실무팀과 온종일 통화만 하다 시간을 다 보내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설계공모를 위해 몇 가지 가능성을 놓고 토론 중이다. 여러 층의 역사가 쌓인 대상지에 어떻게 현대성을 담아낼지, 광역적으로는 어떤 비전을 제시할지를 놓고 논의가 한창이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서로 다른 의견을 설득하거나 절충하면서 계획안은 하루에도 몇 번씩 뒤바뀌고 있다. 실질적인 프로젝트와 설계공모, 녹지 면적 2m2와 서울시 광역 계획, 벤치와 대한제국, 역사와 현대성 등 간극이 큰 키워드 사이에서 방황하는 동안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경관을 만드는 작업은 매번 새로운 사람과 만나서 새로운 조건의 일을 수행해야 하는 일련의 프로세스 자체를 디자인하는 일이다. 홀로 앉아 디자인하는 시간보다 협의하고 수정하고 함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외적소통뿐 아니라 내부 스태프와의 협업도 중요하다. 영화 ‘디올 앤 아이’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re 컬렉션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통해 옷이든 경관이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작업이란 서로 다른 것과의 충돌에서 융합에 이르는 힘겨운 여정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고대 로마의 유산
    #60 길 혹은 쿠오 바디스 고대 로마의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우선 시간적·공간적으로 교통정리를 잠깐 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유산과 계속 혼동되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라고 하면 지금의 로마 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개는 로마 제국 전체를 일컫는다. ‘대개는’ 이라고 불확실하게 표현하는 이유는 고대 로마가 왕정에서 시작하여 공화정이 되었다가 다시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 제국’이라는 표현 역시 완전하지 않아 ‘고대 로마’라는 총칭을 쓴다.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750년경에서 기원후 5세기경까지이나 정치적·문화적으로 크게 위상을 떨쳤던 시기는 대개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정도로 본다. 어림잡아 고조선 시대 후기에서 고구려 미천왕 시기에 해당한다. 제정의 기틀을 닦아놓고 살해당한 카이사르,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신의 대접을 받은 아우구스투스, 폭군으로 악명높은 네로 황제, 티볼리에 빌라를 지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등이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통치자들의 이름이며 키케로, 타키투스, 비트루비우스, 베르길리우스 등의 소위 인문가humanitas들 역시 이 시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5세기경 게르만족이 동과 북에서 로마 제국으로 침입해 들어오며 제국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우선 동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었다가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이때부터 고트족, 랑고바르드족, 프랑크족, 반달족 등 게르만의 여러 부족이 유럽에서 영토를 나누어 가지며 국가 체계를 확립하는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이 시기가 이삼백 년가량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8세기, 프랑크족의 카롤루스 대제가 중원을 평정하면서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카롤루스 대제가 세운 프랑크 왕국이 지금 프랑스와 독일의 전신이다. 이로써 유럽의 중심 세력이 알프스 북쪽으로 완전히 이동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중세라고 한다. 기독교가 정치, 사회, 문화뿐 아니라 개인의 삶과 죽음을 모두 지배하는 시대였다. 이런 상태가 또다시 칠팔백 년 유지되었다. 기독교 문화는 그 이전의 고대 문화와 확연히 차별되기 때문에 고대와 중세 사이에 문화적으로 단층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의 별은 참으로 오랫동안 빛을 잃었다. 그러다가 15세기에서 16세기에 다시 화려하게 무대에 등장한다. 이때를 르네상스 시대라고 한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로마 제국의 한 행정 구역Dioecesis Italiae이었고 제국이 와해되자 여러 도시 국가들이 우후죽순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15세기 말경 이탈리아는 마치 퍼즐처럼 여러 과두제의 소국들과 왕국의 집합체로 구성되었다.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사보이아, 로마 교황국, 나폴리 등등 각자 통치자가 따로 존재하는 독립된 국가였다. 이 시기의 중심지는 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였으며 이때의 주역들은 메디치, 비스콘티, 스포르차 등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 보티첼리, 도나텔로, 벨리니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번 언급되었던 팔라디오 등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을 낳았다. 이렇게 로마, 혹은 이탈리아는 역사적으로 크게 두 번 유럽 문화를 지배했으며 고대와 르네상스는 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유전자를 나누고 있다. 물론 로마 시가 고대 로마의 절대적인 구심점을 이루었으나 로마 시를 둘러싸고 있는 라치오 주와 그 남쪽의 캄파니아 주까지 문화 중심권이 넓게 확장되었다. 특히 캄파니아 주의 나폴리 만을 중심으로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파에스툼, 스타비아에 등 여러 도시 문화가 꽃피웠는데 하필 베수비오 산을 등지고 있었던 까닭에 서기 79년 이 도시들은 지도에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 아니 사라졌다가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다시 나타났다. 문자 그대로 시간이 그 자리에서 멈추어버렸으므로 고대 문화가 어떠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로마 시보다 이들 박제된 화산 도시들 을 엿보는 편이 낫다. 로마 시에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에 걸쳐 정치, 종교, 문화적 유산들이 켜켜이 쌓여있으므로 이 중 고대의 것을 가려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일단 모든 길이 그리로 통했다는 로마 시를 먼저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서기 64년, 로마 시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14개의 구가 파괴되었으며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았다. 민심이 흉흉했다. 그렇지 않아도 밉상이었던 네로 황제가 불이 난 자리를 정리하고 자신의 황금궁전Domus Aurea을 거대하게 확장하자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네로 황제 방화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기독교인에게 방화의 책임을 뒤집어씌워 대대적인 학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가 ‘쿠오 바디스’다.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당시 베드로가 로마에 살고 있었는데 기독교도가 끌려가기 시작하자 무서워 도망을 친다. 성문을 빠져나가 남쪽으로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하여 약 800m 정도 갔을까? 문득 예수님이 나타난다. 놀란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쿠오 바디스 도미네)”라고 묻자 예수님은 “로마로 간다. 가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한다”고대답했다. 이에 베드로가 크게 뉘우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 결국 순교했다는 이야기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던 길이 아피아 가도Via Appia Antika다. 지금도 일부 남아있는 고대 로마의 길이다. 고대 로마가 그 넓은 제국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도로망이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