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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 상상적 시민들의 공모전 설계 교육의 단면들
    어째서 모두는 이 프로젝트의 주인을 박원순 시장으로 전제하고 있는가? 공론화는 시민의 몫이 아닌 서울시의 책임인가? 과연 서울역 고가에서 지역 전문가와 시민들의 내부 성찰은 무엇인가? 그러한 것이 있기는 한가?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앞서 이 프로젝트에서 시민들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축제의 끝에서 남은 질문들 또 하나의 축제가 끝났다. 공모전 때문에 며칠째 집에 못 들어가는 누군가나 당선작의 선정 결과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누군가는 공모전이 축제라는 말에 공감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모전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진지한 고민을 할 기회는 없기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공모전은 우리 도시와 공간의 담론을 풍성하게 해주는 축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축제에 누가 참여했는지 주인공들이 무엇을 했는지가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지만, 정작 축제의 성공 여부는 어떻게 축제를 기획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공모전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 『환경과조경』은 서울역 고가 설계공모의 방식과 절차에 대해 공모전 기획을 지휘한 김영준 전문위원에게 몇 가지 비판적인 질문을 제기한 바가 있다. 우선 굳이 소수의 작가들만 참여할 수 있는 초청공모 방식을 택한 이유를 물었다. 프로젝트 특성과 작품의 질을 고려할 때, 응모작 수는 많지만 정작 좋은 안들은 소수에 그치는 공개공모보다는 초청공모 방식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확실히 지명초청 방식이 저명한 작가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는 유리하다. 물론 저명한 작가의 안이 반드시 좋은 안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공개공모의 방식일 경우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작가들이 참여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지며, 국내의 저명한 작가들의 참여마저도 이끌어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서울역 고가 공모전이 서울시가 추진하는 유일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큰 구상의 일부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미 ‘서소문밖 역사유적지’와 ‘마포석유비축기지’가 공개공모 방식으로 치러졌다. 서울역 고가에 이은 ‘세운상가 활성화’와 ‘잠실종합운동장 일대 도시재생 구상’ 역시 공개공모로 진행된다. 따라서 이 많은 공모전 중에 하나쯤은 확실히 흥행을 보장할 주연 배우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시기적으로나 화제성에 있어서나 서울역 고가를 초청공모로 진행한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음은 폐쇄적으로 진행된 지명 과정의 적절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일단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번에 초청된 작가들의 구성은 꽤 흥미롭다.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든 작가들이 명단에 없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장들이 국내 무대에서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를 보았을 때 차라리 국내의 여건을 충분히 존중해줄 만한 작가들을 선정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번 공모전에 참여한 국내외의 작가들이 지명도가 낮다는 말은 아니다. 선정 과정이 투명하지 못했다는 문제 제기는 할 수 있어도 초청받은 작가들이 자격 미달이거나 특정한 분야나 국가에 편중되었다고 비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또한 지난 공모전의 참여 자격에 대한 논란을 의식한 듯 처음부터 공모전의 조건으로 건축, 조경, 구조의 협업을 전제했고, 그 때문인지 염려되었던 특정 분야의 독단과 독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적극적인 소통의 과정이 간과된 성급한 진행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장황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게 해결되었다고 느껴지지 않는 이질문은 여전히 진행 중인 논란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비판적 견해를 반영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정작 설계공모의 기획책임자가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는 공모전의 방식과 절차 이전에 이 프로젝트의 당위성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울역 고가의 주인 2014년 9월 미국을 순방 중이던 박원순 시장은 뉴욕의 하이라인을 시찰한 뒤기자간담회를 열어 서울역 고가를 재생하는 공모전을 개최하겠다고 발표한다. 발표 직후 호평보다는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 일간지에는 전문가들의 비판적인 의견이 담긴 칼럼들이 실리기 시작했으며,2 남대문시장 상인들과 인근 주민들은 공원화 계획에 거세게 반발했다. 서울시 의회에서도 시장이 절차를 무시했다며 일부 의원들이 제동을 걸었다. 공모전이 끝나고 당선안이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역 고가 공원화는 모두의 동의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서울역 고가는 이제 더 이상 가치중립적인 도시의 공간으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이명박 전 시장에게 청계천과 서울숲이 그러했고 오세훈 전 시장에게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한강 르네상스가 그러했듯이, 서울역 고가는 박원순 시장의 미학적인 정치 도구라는 사실이 이미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서울역 고가에 대한 모든 평가는 아무리 신중하게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을 하더라도 어떤 지점에서 반드시 본의 아니게 정치적인 함의 속으로 미끄러지게 된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은 결국 서울시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고, 상찬 역시 박원순 시장의 정책에 대한 지지와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되는 묘한 동조 현상이 나타났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했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 [칼럼] 담장에 갇힌 늙은 거인
    불안감에 쌓기 시작한 담장에 스스로 갇혀 버린 사람의 얘기는 더 이상 우화가 아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 거주자가 도시의 절반이 넘고 그나마 남은 골목은 주차장이 되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은 지 오래다. 행여나 뭐라도 훔쳐 갈까 집집마다 보안 시설을 설치하고 도로 곳곳에 CCTV를 단다. 서울의 아이들이 바깥공기를 맡는 시간이 하루 평균 7분이라는 통계는 담 정도에 갇힌 게 아니라 벙커에 사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게할 정도다. 담은 궁극적으로 단절을 말하는 것인데, 도시민들이 스스로 쌓은 담은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불안감에서 기인하지만 도시의 단절은 자본의 욕망에 기인한다. ‘더 많이’ 벌고 싶은 욕구는 ‘더 빨리’를 요구했고 결과적으로 더 넓은 도로와 더 많은 철도가 만들어진 셈이다. 서울의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려고 할때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단연 자동차다. 필자는 건강과 다이어트를 이유로 걷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있지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여전히 걷기 힘든 도시다. 그래서 결국 다시 자동차 열쇠를 찾는다. 역시 자동차가 답이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교통이 좋아야 장사도 잘 됐고 집값도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월세를 사는 한이 있어도 차는 꼭 샀다. 시작은 달콤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교통사고는 늘고 공기의 질은 지속적으로 나빠진 데다 아스팔트의 열기는 숨이 턱턱 막히게 했다. ‘더 빨리’가 무색하게 길에서 낭비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천정부지로 치솟은 기름값은 지갑을 얇게 만들었다. 그뿐인가 개인이 쌓은 담과 도시가 쌓은 수많은 담들에 갇힌 시민들은 급속도로 개인화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한국 사회를 휩쓸고 간 키워드는 ‘불不’이었다. 불통, 불신, 불안, 불확실 등의 단어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수준으로 다가왔고, 결국 우려했던 단계로 접어들었는데 그것은 ‘무無’다.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로 지금의 메르스까지 우리는 무책임, 무능력, 무관심으로 인한 무기력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개인화가 낳은 소외와 단절이 가져온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린 서울은 세계의 대도시가 다들 그랬듯이 육교와 고가를 허물고 보도를 넓히고 더 나아가 차량이 다니지 못하는 보행 전용 도로나 대중교통 전용 도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담을 허무는 서울의 도전이 시작된 셈이다. 그 한복판에 서울역 고가가 놓여 있다. 남대문시장의 상인들은 시장이 망할 것이라고 하고, 고가 주변 주민들은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고 걱정이 태산이다. 과거의 경험이 주는 믿음은 견고했고 갈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것에 있음에도 여전히 화살의 방향은 교통을 향한다. 꽉 막힌 도시에서 자본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길을 뚫어 소비의 물꼬를 돌렸고 더 이상 좋은 땅을 찾지 못한 현대판 지관들인 투기꾼들은 수도권 곳곳에 욕망의 신기루를 만들어 배를 불렸다. 그러는 동안, 정부와 서울시의 무책임, 시민들의 무관심, 소위 전문가 집단의 무능력은 상인들을 무기력 상태에 빠뜨렸고 분노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서울역 고가로 향했다. 서울역 뒤편의 상황은 더 처참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시의 중앙 역사의 뒤편은 허름했다. 서울역도 예외가 아니었고 한 발 더 나아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병폐인 부동산 투기와 만나 상황은 더욱 처참해졌다. 지난 30년 동안의 선거에서 모든 후보들은 개발을 약속하고 파기하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요동을 친 땅값은 2008년 북부역세권 개발 계획 발표 시 평당 6천만 원이라는 정점을 찍었다. 800여 명이었던 소유주는 그새 2,200여 명으로 늘었는데, 소위 딱지 거래가 성행한 결과 한 집에 소유자가 무려 20명에 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이제 주민들은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 말기 암환자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대체 의학을 찾듯 “그나마 박원순이니까…”하는 마음으로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중이다. 늙은 도시, 600살을 넘긴 무기력한 거인의 현재 모습이다. 그렇다면 진정 답은 없는 것인가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에 답이 있을 것 같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어미닭이 쪼아주듯이 주민과 시민들이 스스로 깨려고 할 때 행정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 서울의 활력은 애초부터 사람에 있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서울은 언제나 도전하는 사람들의 활력으로 발전해 온 도시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역량이 지속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 정책의 결정 과정에 참여시켜야 근육이 생기고 힘이 붙어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법이다. 네덜란드의 세계적 건축가인 비니 마스가 서울역에 말을 걸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시민이 할 것인가, 서울시가 할 것인가. 앞으로 남은 설계 과정에 얼마나 많은 시민이 참여할 것인가가 이 사업의 관건이다. 앞으로 3개월 여, 고가산책단은 이 과정의 퍼실리테이터facilitater가 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서울역 고가의 당선 작가인 비니 마스의 인터뷰는 눈여겨볼 만하다. “도시재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산물입니다.” 이제 선택은 서울 시민들에게 달렸다. 담장을 허물어주길 기다릴 것인가, 스스로 깨고 나올 것인가. 조경민이라는 이름보다는 조반장이라는 별명이 더 익숙해졌다. 지금은 사단법인 서울산책의 대표이자 고가산책단의 일원이지만 이전까지는 각종 문제 연구소장으로 불릴 정도로 얇고 넓게 그리고 복잡하게 살아왔다. 건축을 전공했으나 아직 자기 집이 없고 남자 평균수명의 절반을 넘었으나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많으며 현재 가장 큰 고민의 주제는 ‘서울’과 ‘길’이다. 고가산책단은 서울역 고가에 대한 걱정이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모임이다. 지금은 고가에 대한 시민들의 마음을 듣고 모으고 전하는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설계공모의 이면
    예고한 대로 이달에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당선작과 출품작들을 세 편의 비평과 함께 엮은 특집을 싣는다. 너무 당연한 말이 겠지만 설계공모의 목적은 좋은 설계안을 뽑는 데 있다. ‘좋은’의 자리에는 실험성이나 독창성처럼 가슴 뛰는 단어가 들어갈 수 있다. 경제성이나 공공성 같은 가치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어느 경우든 설계공모의 주인은 당선작에 따라 구현될 현실 공간의 사용자들이어야 하지만, 그들이 공모전의 실제 과정에 개입할 기회는 거의 없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는 주최자(또는 전문위원), 출품자, 심사위원 정도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 세역할을 모두 경험하며 설계공모의 이면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모든 게임의 주인공은 직접 뛰는 선수다. 스스로를 조경가가 아니라 이론가나 비평가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공모전에는 출품한 적이 몇 번 있다. 연합팀의 일원으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거나 전반적인 디자인 개념이나 전략을 잡는 일을 했다. 설계공모에 도전한다는 건 경쟁의 장에 뛰어드는 일이다. 시간과 노동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안감이나 피곤함보다는 흥분감과 초조함이 절묘한 비율로 혼합된, 매우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공모전을 한번이라도 해보면 바로 그 “기쁨을 아는 몸”이 된다. 자신의 디자인 아이디어와 해법을 실험하고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거나 적어도 공론화될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부르디외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루지오illusio”(장場의 환상)에 빠져 “인정 투쟁”을 하는 셈이다. 당선작을 내는 기쁨을 맛본 적은 없다. 매번 아쉬울 수밖에 없었는데, 경쟁에서 이기지 못해 억울한 건 아니었다. 패인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패인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주최자나 심사위원회가 제출작이나 최종 경쟁작에 대해 상세한 리뷰를 제공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A4 한쪽 미만의 형식적인 심사평이라도 발표되면 다행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패자는 작품 외적인 모종의 어떤 상황이나 관계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당선되지 못했다고 굳게 믿으며 분루를 삼킨다.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 냉소를 짓지만 이미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기에 멈출 수 없다. PAProfessional Advisor라는 조금은 생소한 약자로도 불리는 전문위원은 설계공모 주최자의 대리인이다.설계공모의 풍년이던 2000년대 중반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제도다. 같은 학과 원로 교수를 도와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광교신도시 호수공원, 동탄신도시 워터프런트공원, 용산공원 등 대형국제 설계공모의 전문위원 역할을 하게 됐는데, 복잡하지만 도전적인 일이었다. 설계공모 전반을 기획하고 설계 지침을 쓰고 제공 자료를 만들고 심사위원을 섭외하고 심사를 진행한다. 초청 공모인 경우에는 지명 초청자를 선정하는 일도 해야 한다.홍보, 의전, 전시 기획, 출판까지 관장해야 한다. 교수 몇 사람이 하기에는 벅찬 일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 인력 풀이 필요함을 깨닫곤 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주최자가 설계공모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였다. 설계 대상지를 무엇으로 어떻게 쓰겠다는 명확한 목적 없이, 원하는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바람도 없이 행정 절차의 하나로 진행되는 공모전. 설사 좋은 작품을 뽑는다하더라도 현실로 구현되기 어렵다. 주최자를 대리하는 입장에서 공들여 설계 지침을 작성해도 머릿속에 그렸던 작품이 제출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전문위원이 설계 지침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사를 진행하는 과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심사위원회에 모신 내로라하는 세계적 전문가들이 합리적인 토론보다는 난데없는 국가대항전이나 감정적인 민족주의의 대리전을 펼친다. 작품 자체보다는 태도나 스타일이 심사의 초점이 되기도 한다. 심사위원은 다시 하라면 가장 하기 싫은 역할이다. 다른 분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나에겐 몇 달씩 뜬눈으로 밤을 새워 제출한 노력과 성과를 단 몇 시간 안에 감식할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첨예한이권이 걸린 설계공모에서는 심사위원간의 토론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미명 하에 심사장의 상황이 옆방에 앉은 제출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심사위원은 마네킹처럼 다소곳이 앉아 자신의 채점표에 점수만 매기는 진풍경도 펼쳐진다. 토론을 하더라도 “이 작품은 직선이 많아 생태적이지 않다”, “저 작품은 정자가 있으므로 전통적이고 한국적이다”는 수준의 주장이 난무한다. 심사위원 노릇이 난감하고 피곤한 더 큰 이유는 인간관계 때문이다. 심사위원으로 예상되거나 발표되면 선후배,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 생전 본 적 없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친다. 찾아오지 마시라고 간청을 해도 소용없다. 연구실 문을 잠그고 없는 척해야 한다. 작품 제목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는 사람도 있고, 패널 이미지 파일이 카톡으로 날아오기도 한다. 2015년의 서울은 때 아닌 공모전의 르네상스다. 지난 한달 동안만 하더라도 설계공모 뉴스가 줄을 이었다. ‘잠실운동장 도시재생 구상 국제공모’의 참가 등록이 끝났고, ‘노들꿈섬 운영구상(1차) 공모’의 설계 지침이 발표됐으며,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국제공모’의 수상작들이 공개됐다. 세종대로의 국세청 별관을 허물고 역사문화 광장을 조성하는 설계공모도 곧 시작될 예정이다. 공공의 도시 공간을 재발견해 지혜롭게 고쳐 쓰는 일이야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 프로젝트들의 목표 시점이 정치적 일정과 무관하지 않으며, 일련의 설계공모가 ‘공간 정치’의 전시적 이벤트로 동원되고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공모전이 많아질수록 조경, 건축, 도시 전문가의 일거리가 풍족해진다고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설계공모는 생각처럼 낭만적인 제도가 아니다. 잡지 첫 쪽에 부끄러운 개인적 경험담을 늘어놓은 건 설계공모의 관행적인 형식과 내용을 다시 돌아보자는 뜻에서였다. 설계공모의 과정 자체를 다시 디자인하고 그 과정에 사용자(시민)가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시점이다.
  • [CODA] 여행의 기술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때는 어딘가로 떠나기를 결정하고 출발을 기다리며 기대를 부풀리는 시간일 것이다. 무려 6개월 전부터 비행기 티켓을 끊어두고 동행과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만날 때마다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볼지, 어떤 맛있는 음식(술)을 먹을지 등을 이야기했다. 바르셀로나나 파리, 런던 등 대도시와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프로방스나 지중해의 도시를 따라가는 여행. 가보고 싶은 장소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들뜨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통장에서 따박따박 빠져나가고 있는 여행 경비 따위는 외면하고 말이다. 이런 흥분 상태는 먹고사는 일을 잠시 제쳐 두고 익숙한 공간을 떠나 벌어질 미지의 일들에 대한 기대와 상상 때문에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우리에게 이번 여행은 현실 탈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여행을 떠날 때가 되자 (“꿈이 현실로 바뀔 시간”이 다가오자) 그전에 마쳐두어야 할 일들에 대한 부담과 준비 부족으로 인한 걱정이 여행에 대한 기대를 슬그머니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상향이 부담스러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출발 전부터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 생각났다. “늘 제기되는 한 가지 문제는 여행에 대한 기대와 그 현실 사이의 관계이다.”1 여행 전에 가졌던 기대와 달리 새로운 곳에서 느끼는 환희의 시간은 매우 짧다는 그의 예민한 관찰에 열렬히 동의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감동적인 풍경의 사이사이는 낯선 환경의 고달픈 현실이 채운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예상치 못한 현실이란, 답사를 위해 준비한 새 신발은 길이 들지 않아 걸을수록 상처만 내고, 기상이변으로 기온은 40도까지 치솟는데 한국에서는 흔하게 팔고 있는 아이스 커피가 없는 식이다(카페에서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면 점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뜨거운 커피가 담긴 잔과 딸랑 얼음 두 조각이 담긴 유리잔을 함께 내밀곤 했다. 얼음이 든 음료를 잘 마시지 않는 유럽 문화의 체험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더위를 견디기 힘들었던 우리는 사방에 널려 있는 매력적인 노천 카페를 두고 결국 익숙한 스타벅스에 찾아들곤 했다. 예전에는 전 세계의 맥도날드화를 우려했다면 지금은 스타벅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같다. 여하튼 우리에게 스타벅스 커피는 고향의 맛이었다. 낯선 것을 열망해 떠난 여행에서 다시 익숙한 것을 소망하는 아이러니라니!). 신체적 욕구의 충족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부분도 여행의 질에 영향을 미쳤다. “아름다운 대상이나 물질적 효용으로부터 행복을 끌어내려면, 그 전에 우선 좀더 중요한 감정적 또는 심리적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 따라서 중요한 인간관계 속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몰이해와 원한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은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목조 오두막을 즐기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즐길 수가 없다.” 긴 여정에 몸이 피곤해지니 사소한 의견 차에도 감정이 예민해졌다. 관심사와 스타일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함께 여행을 다니다 보니 보고 싶은 것도 제각각이어서 아무리 팀을 나누어도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돌발 상황도 속출했다. 어느 순간 우리는 희망한 그 모든 곳에 갈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답사 리스트에 올려 두는 것과 치밀하게 동선을 짜는 것은 다른 일이다. 꼼꼼한 답사 계획을 짜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을 접어두고) 여건이 되는대로 또는 그날의 리더가 이끄는 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여러 지역을 단체로 움직였던 이번 여행에서 습득한 ‘여행의 기술’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하나의 도시를 차근차근 둘러보거나 한 공간을 음미하며 답사하기보다는 빠르게 둘러보고 파악하기, 그리고 대책 없이 나열해 놓은 답사지 리스트를 다음 방문을 기약하며 포기하기가 주요 포인트였다. 그런데 여행의 빛나는 순간은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순간에 찾아오곤 했다. 이를테면 주요 스팟을 징검다리 건너듯 답사하다가 누군가의 의견에 따라 큰 기대 없이 돌아선 길에서 마주친 길거리 풍경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식이다. 그리고 보면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거리나 광장 혹은 공원의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좋은 계절 탓인지 공원이나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극성수기 해변 모래사장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파라솔들처럼 낯선 사람들과 큰 거리를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딱히 특별한 일을 하는것도 아니다. 그저 대화를 나누거나 누워서 햇볕을 즐기거나 홀로 앉아 있다. 서양인들은 햇볕을 종교처럼 여긴다는 상식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잘 꾸며진 공원뿐만 아니라 어디든 자리만 있으면 그렇게들 앉아 있다. 하다못해 파리 센 강의 더러운 지천 양편에도 맥주 한두 병을 든 젊은이들이 마치 술집의 바인 양 줄지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치 많은 실내 공간을 오픈스페이스가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달 전 편집부 카톡방에서 나눈 이야기가 떠오른다. 가을이 되면 소풍을 겸해 ‘공원’ 특집을 기획하자는 내용이었다. 실제 공원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미세하게 들여다보자고 했다. 공원의 원조인 서구의 공원과 우리의 공원 문화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공원이나 거리가 어떻게 받아주어야 할지도 고민해보자고 했다. 아마 올 가을에는 ‘즐거웠던’ 이번 여행을 추억하며 한국의 공원과 거리를 쏘다닐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그때쯤이면 고달팠던 현실은 생략된 채 감동적인 장면을 이어 붙여 편집한 여행이 남아 있을 것이다.
  • [편집자의 서재]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조경학과 학생들이 대상지를 이해하기 위해 답사를 다녀오는 것처럼 국문학과 학생들도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혹은 밤샘 술자리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를 대기 위해) 문학의 고향을 찾는다. 하지만 의도한 것과 반대의 경험을 하기도 한다. 지난해 나는 우연히 청양에 들렀다가 내가 사랑하는 시의 고향을 영영 잃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얼어붙은 호수에 헛되이 돌멩이를 던지며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나희덕의 시 ‘천장호에서’를 읽으며 과거에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천장호에는 적막 대신 거대하고 시뻘건 청양고추·구기자 조형물과 뜬금없이 하늘로 승천하고 있는 용 한 마리가 세워져 있다. 이 끔찍한 기억 덕분에 나는 이번 달에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국제공모를 다루면서 늦기 전에 세운상가를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줄곧 시골에서 살았던 터라 아쉽게도 세운상가에 대한 추억도, 찾아가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골뜨기에게 유하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의 시집이었다. 지금은 시인보다는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그는 자신의 시와 영화에서 줄곧 과거의 서울에 대한 향수를 노래해왔다. 최근작 ‘강남 1970’에서는 1970년대 초 강남의 재개발을,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1970년대 말죽거리(양재동) 일대의 풍경을,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에서는 1990년대의 압구정동을 스케치했다. 하지만 그가 묘사하는 도시의 풍경은 사실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욕망의 통조림 공장’1이나 ‘쩝쩝대는 파리크라상, 흥청대는 현대백화점, 느끼한 면발 만다린, 영계들의 애마 스쿠프, 꼬망딸레부 앙드레 곤드레 만드레 부띠끄, 무지개표 콘돔 평화이발소, 이럇샤이마세 구정 가라, 오케’2 등으로 표현되는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욕망으로 넘쳐나는 공간이다. 그가 영화에서 묘사하는 공간에도 언제나 폭력과 부패가 넘친다. 그런데도 그의 시를 읽다보면 혐오의 감정 속에 왠지 모를 그리운 마음이 뒤섞인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운상가에 대해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3, ‘고담시市에 뒹구는 쓰레기들의 환희, 유혹’4이라고 표현하면서도 ‘난 모든 종류의 위반을 사랑했고 버려진 욕설과 은어만을 사랑했다’5고 고백한다. 이 모순된 감정은 특히 시집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시 ‘모텔, 카사블랑카’에서 ‘세월의 불안, 경멸과 모독, 기다림 따위들을 견디며 난 길 위의 먼지 묻은 사과를,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산다’는 구절로 압축된다. 시금털털할 것이 분명한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사는 시인의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공존할 수 없는 양가감정 사이에서 헤매다가도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6라는 아름다운 시구에서는 알듯 말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지난 주말 세운상가를 답사하면서 시인이 표현한 감정을 어렴풋이 느꼈다. 페인트칠이 누더기처럼 지저분하게 벗겨진 건물 외벽, 많이 훼손되어 바스라질 것 같은 시멘트 계단, 비아그라, 흥분제, 도청장치, DVD, CCTV를 모두 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으슥한 상점,건물 주변으로 다닥다닥 붙은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길게 누워있는 세운상가는 과거라는 행성에 불시착한 은하철도999를 현실 세계에 옮겨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처음 세운상가 입구에 들어설 때는 ‘여기서 걷다가 어디 이상한 골목에 끌려가 장기를 떼이고 버려지는 게 아닐까’하는 무서운 상상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안쪽으로 진입하니 좁은 골목 사이로 오토바이와 트럭이 끊임없이 들락날락 거리며 무언가를 날랐다. 칼빵(?)이 한두 개쯤 있는 무서운 얼굴일 것이라 생각했던 정체불명의(?) 상점 상인들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세운상가 건물 중 가장 낡고 허름한 진양상가에서는 그 어둡고 쇠락한 건물 속에서 꽃을 팔고 있었다(세운상가 일대에서 본 가장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한동안 세운상가는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인 성급한 행정과 건축가의 의도가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실패한 건축으로 인식되었다. 지역 슬럼화의 원인으로 지적되며 철거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일정 부분 맞는 평가다. 하지만 그 B급의 정서가 없었다면 세운상가가 지금처럼 영세한 부품 가게, 특수 용품점, 소규모 작업공장 등을 하나로 품는 독특한 장소성을 가진 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오피스텔 단지와 공원으로 바뀐 세운상가를 상상하는 것은 천장호에 세워진 고추와 용 조형물을 보는 것만큼이나 어색하다. 더디고 완벽하진 않겠지만 철거 대신 활성화를 택한 세운상가의 미래를 응원한다. 그리고 활성화 과정에서 특유의 B급 정서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세운상가엔 ‘시금털털한 푸른 사과만큼의 희망이 있’7으므로.
  • [시네마 스케이프]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소 매력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나라국제영화제의 지원을 받은 한일 공동 제작 영화다. 영화제측은 나라 현 고조五條 시에서 촬영할 것, 일본인 스태프와 배우를 기용할 것, 고조의 지역 축제인 불꽃놀이를 포함시킬 것을 조건으로 제작비를 지원했다. 조건은 창작자에게 제약이 될 수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내가 감독이라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도시에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주변에 고조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고, 검색을 해봐도 무엇 하나 특별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 난감하다. 무엇을 제일 먼저 해야 할까. 우선 답사를 가야지.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시청 직원이 제일 좋겠다. 시에 대한 기본 정보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흔히 하는 인문·사회 분석을 하는 거지. 만약 시청직원이 타지 사람이라면 그 동네 사람을 소개받아서 그곳 사람들만 아는 오래된 이야기부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듣는 거야. 이런 자료들이 모아져서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 장건재 감독은 영화를 두 개의 챕터로 나누었다. 흑백 영화인 첫 번째 챕터에서는 감독이 겪었던 낯선 도시에서의 사전 답사 내용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다. 영화감독 태훈이 통역과 함께 고조에 답사 가서 시청 직원을 만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고조는 나라 현 남서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400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소박한 고조 역 앞, 오래된 가옥, 좁은 골목, 여관, 동네 카페 등의 장소는 예전의 정취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지극히 서민적인 독일의 풍경
    #54 뮌헨의 영국정원 - 유럽 최초의 ‘민주적’ 정원 프랑스에서 풍경화식 정원은 마치 잠시 스치고 지나간 유행병과 같았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는 좀 달랐다. 프란츠 공의 작은 정원 나라를 선두로 하여 서서히 전역에 확산되어 19세기 중반에 그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으며 독일 조경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 시기에 영국과 마찬가지로 굵직한 풍경 전문가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한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스켈Friedrich Ludwig Sckell(1750~1823), 베를린·포츠담의 문화 경관을 만든 페터 요셉 르네Peter Joseph Lenné(1789~1866), 동쪽 폴란드와의 접경 지역에 있던 자신의 영토를 모두 풍경화로 바꾸어 놓은 퓌클러-무스카우Pückler-Muskau(1785~1871) 공 등이다. 풍경화식 정원이 독일에서 이렇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서로 맞물렸기 때문이다. 우선 느릿느릿한 독일인의 정서에 맞았을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잊고 있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자연 종교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1 그에 더해 18세기 말, 독일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낭만주의를 구현하기에 풍경화식정원만한 것이 없었다. 지난해 9월호 연재 ‘26.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히의 정원 풍경화’에서 미학자 히르시펠트를 잠깐 언급했다. 그가 드레스덴에 있는 어느 풍경화식 정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 미학자 요한 게오르크 줄처Johann Georg Sulzer(1720~1779)의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렇게 묘사했다. “외로운 산책을 즐기는 현자 중 발길이 숲 속에 이르러 문득 이 웅장한 기념비를 발견하고 전율을 느끼지 않는 이가 과연 있을까? 내가 흠모해 마지않던 인물이 여기 이렇게 높이 기려지고 있다니. 마침 보름달이 둥실 떠 이를 환히 밝히고 사위는 죽은 듯 고요하다. 떡갈나무 등걸에 몸을 기대니 깊은 한이 서려온다. 다시 눈을 들어 그 고귀한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바라보며 눈물짓는다.”2 조선의 방랑 시인 뺨치는 이런 시구들은 당시 독일 문학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다. ‘외로운 방랑자’, ‘죽음 같은 고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풍경화식 정원을 널리 퍼지게 한 1세대의 감성이었다면 그 다음 세대에서는 폴크스파크volkspark라는 건조한 개념이 등장하여 풍경화식 정원의 키워드가 되었다. 폴크스파크라는 단어를 풀이해 보면 ‘백성을 위한 커다란 정원’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공원이다. 이 역시 히르시펠트가 던진 개념이다. 이후 독일의 풍경화식정원은 곧 시민 공원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공원을 조성할 때 풍경공원Landschaftspark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1789년, 바이에른 공국의 군주 칼 테오도르는 뮌헨에 있는 자신의 넓은 수렵원을 개조하여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유럽에서 최초로 시민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한 공원이 뮌헨에 탄생했다. 공원의 면적은 총 375헥타르로 뵈를리츠 정원의 3배가 넘는다. 처음엔 왕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르 정원이라고 불렀다가 영국풍을 따랐다고 해서 ‘영국정원’으로 개명되었다. 물론 영국의 왕립 정원들도 이미 백성들에게 ‘개방’되긴 했지만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왕실에 있었다. 처음부터 시민들을 위해 만든 것은 뮌헨의 영국정원이 처음이라고 뮌헨 사람들은 자부하고 있다. 얼핏 듣기에 칼 테오도르가 무척 훌륭한 군주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파리에서 대혁명이 일어난 해의 일이었으니 그 저의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공원을 만들어주어 민심을 한 번 다독여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참모였던 미국인 벤자민 톰슨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뮌헨의 영국정원이 자리 잡은 곳은 오래전부터 군주들이 사슴 사냥을 하던 곳으로서 이자르 강을 따라 깊은 숲과 평야가 번갈아 펼쳐진 매력적인 곳이었다. 혁명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런 매력적인 땅을 백성에게 내준들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는 이곳에 군인들을 위해주말 정원을 지을 생각이었다. 좀 더 건전하고 생산적으로 여가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군 주말 정원 위원회를 결성하고 톰슨에게 럼포드 백작의 작위를 주어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공사가 막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고 럼포드 백작이 발 빠르게 대응하여 시민 공원을 짓는 것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럼포드 백작은 이제 공원 조성 위원장의 자격으로 루드비히 스켈을 불러 조언을 구했다. 스켈은 당시 바이에른 공국에서 가장 재능 있는 정원 예술가였다. 대대로 왕실 정원사를 지내던 집안에서 태어나 정원사 교육을 착실히 받았다. 일찍이 그 재주를 인정받아 ‘국비 유학생’으로 파리 식물원과 베르사유에서 수학했다. 풍경화식 정원이 유행하자 다시 5년 동안 영국에서 풍경화식 정원을 공부하고 돌아와 슈베칭엔의 바로크 정원 담당자로 부임했다. 기존의 바로크정원 주변에 풍경화식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당시는 왕실 소속 정원사들이 왕실 비용으로 외국에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다. 스켈에게는 그동안 영국에서 공부하고 슈베칭엔에서 일하는 동안 성숙해갔던 아이디어를 구현해 볼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캐퍼빌리티 브라운의 작품 세계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켈뿐만 아니라 독일의 조경가들은 하나같이 브라운의 커다란 ‘한 획’과 명상적인 정서에 이끌렸다. 스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공원과 도시와의 화합을 꾀한 것이다. 그는 공원이 도시 안에 섬처럼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멀리 보이는 성당의 첨탑과 웅장한 궁의 높고 낮은 실루엣이 공원의 녹색 실루엣과 서로 중첩되었다가 다시 풀어지는 관계에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지금도 뮌헨 영국정원 안에서 바라보면 도시 실루엣이 ‘가장 아름다운 녹색 의상’을 입고 있는 듯 보인다. 이렇게 도시와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속에서 계층 간의 구분 없는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스켈이 추구했던 풍경화식 정원의 이상이었다.3 이 점은 지금도 뮌헨 영국정원의 커다란 특징으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페터 요셉 르네를 포함한 후배 조경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도시와 녹지가 하나로 얽혀 시민의 집과 정원이 된다는 생각은 이후 독일 도시 설계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어째서 독일에서는 고층 건물을 거의 짓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건물 몸체의 높이가 30m를 넘어가면 녹색 의상을 제대로 갖춰 입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어떤 동기로 시작되었든 간에 영국정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테오도르 공의 정치적 이념 역시 변화를 겪었다. 그때까지 주종 관계로만 이해했던 ‘군주와 백성’의 관계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가관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 대륙 최초의 이 ‘민주적인 그린’은 독일 조경사와 도시설계사뿐만 아니라 사회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런 중요한 정원이 1960년대 외곽 순환 도로가 건설되면서 남북으로 단절되었다. 지난 2010년부터 ‘영국정원 통일’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뮌헨 영국정원 운영 재단에서 발의하고 알리안츠 환경 재단에서 후원하는 프로젝트로 도로를 지하로 집어넣고 그 위에 남북으로 갈라졌던 정원을 다시 만나게 한다는 계획이다. 여론도 긍정적이므로 영국정원은 조만간 스켈의 원안대로 복구될 가능성이 크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다양성의 도시, 단조로움의 도시
    도시 다양성이란 무엇인가 눈을 감고 한 번 떠올려보자. 지난 몇 년간 경험한 도시 중 ‘다양성의 감각’을 가장 풍부하게 담고 있는 가로 환경은 어디인가? 다양성의 대상은 눈에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물리적 대상일 때도 있고 사람이나 커뮤니티, 혹은 문화 환경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뉴욕을 다녀온 독자라면 태피스트리tapestry처럼 촘촘하게 짜인 맨해튼 도시 블록의 한 가로를 떠올릴 수도 있고, 어떤 독자는 업종 분화가 활발하게 진행 중인 신사동 가로수길과 세 로수길의 교차점에서 만난 십인십색의 사람들을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 어느 곳을 떠올렸든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해당 가로에서 경험한 ‘무엇’이 그토록 다양하다고 느꼈는가? 나아가 이러한 다양성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다양성인가, 아니면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특성인가 도시 공간에서 다양성이란 한 지역 내에 서로 다른 성격의 건축물과 가로, 용도와 사람, 서비스나 지역 문화가 그 고유성을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한 채 섞여 있는 특질이다. 여기에는 다양성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에 대해 접근하고 누릴 수 있는 ‘물리적 경험’의 차원과 함께 차이에 대한 관용이나 상호 존중 같은 ‘비물리적 인식’까지 포함된다(그림1, 2). 나아가 한 장소에서 누릴 수 있는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이나 이국적인 행태가 오랜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전통적 환경과 대비를 이룰 때도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차이와 다름의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은 이해하기 쉬운 개념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나 상호 존중이 다양성을 위한 전제 조건이긴 하지만, 때로는 한 커뮤니티가 외부로부터의 영향에 대해 상당 기간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즉 수용하기 어려운 차이를 문화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에—고유한 문화가 한 장소에 온전하게 정착하고 결국 지역 다양성의 한 요소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커뮤니티 일부가 문화적 동질성을 갖는 모집단으로부터 분리·독립함으로써 다양성이 시간에 따라 분화되고 공간적으로 확산되는 경우도 있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실제 도시 공간에서 다양성의 감각을 일으키는 요소가 무엇인지 좀 더 따져보자. 다양성의 세 가지 요소: 물리적 환경, 사회적 특성, 재화·서비스의 종류 많은 도시 이론가는 도시의 물리적 환경, 사회적 특성, 그리고 제공되는 서비스나 재화의 종류가 다양성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라고 본다.1 첫째, 물리적 환경의 관점에서 작게는 가로의 표면을 덮고 있는 간판이나 건축물 크기, 건축 유형과 용도, 지어진 시기나 스타일, 외장재의 특성을 비롯해, 크게는 가로의 물리적 폭과 연속성, 필지 크기의 균질성과 도시 블록의 크기 등이 다양성과 단조로움의 차이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를테면 용도와 건축 유형 측면에서 보았을 때, 홍익대학교 입구 주변은 1957년 토지구획정리사업 대상지로 지정된 후 1960~1970년대에 걸쳐 비교적 균질한 저층 주거지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를 전후로 상업·문화·소비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면서 최근 다양한 비주거 용도와 형형색색의 건축 스타일을 접할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그림3). 그렇지만 상업화가 진행된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언제나 더 높은 수준의 다양성을 보인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같은 홍대 입구 지역이지만 도시 블록 전체가 상업화된 서교동에 비해 기존의 모습이 유지된 단독 주택 단지 환경에 게스트하우스, 공방, 제과점, 이자까야가 골목 구석구석 흩뿌려지고 있는 연남동에서 더 풍부한 다양성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2. 둘째, 다양성의 또 다른 요소인 사회적 특성은 도시 공간의 소비자이자 문화의 생산자인 사람들이 나타내는 문화적·사회적·경제적 차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거주자의 소득 수준, 직업군, 연령대, 인종과 국적, 언어와 취향이 다채로운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그림4). 반면 도시 변화에 따라 이러한 사회적 특성의 차이가 점차 옅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국내에서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1~2인 가구를 대상으로 민간 주도의 소형 주택 공급을 확대하려는 ‘도시형 생활 주택’ 정책이 2009년 도입되었다. 그런데 하나의 주택 유형이 일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지어지면서 짧은 시간에 해당 지역의 사회 구성원이 교체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강서구 화곡동에는 2014년 인허가 건수 기준으로 서울시에 지어진 전체 도시형 생활 주택 중무려 9.1%에 해당하는 1,718세대가 들어서게 되었다.3 이로 인해 화곡동의 20~30세대 1~2인 가구, 특히 젊은 직장인 부부, 전문직종 1인 가구, 취업 준비생의 비율이 갑작스럽게 늘어났으며 이는 해당 지역 거주자의 연령대나 직업군이 오히려 유사해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심각하게 놀기
    두 번째 글이다. 첫 번째 글에서는 나의 네 가지 설계태도―물어보기, 다시 그리기, 노동하기, 설계 안하기―와 설계 시작점에 관해 짧게 써보았다. 이번에는 2년 전 미국 뉴욕 MoMA PS1Museum of Modern Art PS1에서 주최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Young Architect’s Program(YAP)의 파이널리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던 작품을 바탕으로 좀 더 구체적인 설계 과정에 대해 써보려 한다. YAP은 디자인 분야 인재 육성을 목적으로 매년 다섯 팀을 선정해 미술관 방문객을 위한 야외 휴양 공간 아이디어를 공모한다. 그리고 그 중 당선작은 MoMA PS1의 여름 웜-업Warm-Up 행사 때 사용될 임시 설치물temporary installation로 구현된다. 동료 회사와 뭉쳐 템프에이전시TempAgency라는 팀을 구성했고 다섯 파이널리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비록 우리 팀의 디자인이 최종적으로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약 한 달간 혹독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설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그만큼 나누고 싶은 점이 많은 프로젝트다. 우리의 YAP 설계 과정은 놀이터 같았다. 아니, 그렇게만들려 노력했다―어떻게 보면 이것이 나의 다섯 번째 설계 태도다. My Hair is at MoMA PS1 프로젝트 이름 그대로 우리가 내놓은 설계안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으로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다. 미쳤다고, 이상하다고, 장난 아니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신기하고 색다르고 만들어지면 가보고 싶다는 사람도 많았던, 아무튼 설계안에 대한 주변 반응이 너무나 대조적이면서도 다양했던 프로젝트임에는 틀림없다. 어떻게 보면 거의 도박 수준인 아이디어였지만 우리는 정말 진지했다. 이제껏 시도해보지 않은 도전적인 설계, 한 번 해보자고 했다. 아니, 그보다는 “떨어지더라도 밋밋하지 않게 떨어지자”고 했다. 많은 공모전에 참가해 보았지만 처음부터 작정하고 놀면서 설계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노력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클라이언트가 예술을 항상 접하는 큐레이터였기에 좀 더 과감해도 되지 않겠냐는 상상 혹은 편견을 가졌던 것 같다. 여기서 잠시 템프에이전시 팀 구성을 설명해야겠다. 쿠토노톡KUTONOTUK의 나와 공동 대표 매튜 줄Matthew Jull, 그리고 맥도웰스피노자mcdowellespinosa의 두 공동 대표까지, 총 네 명이 팀의 중심이었고, 버지니아대학교 건축학과와 조경학과 학생 여섯 명―풀타임 네 명,파트타임 두 명―이 어시스트를 해주었다. 본격적인 작업은 12월 초 가을 학기가 끝나자마자 시작되었고, 겨울방학 한 달 동안 학생들과 같이 일할 작업장은 학교 건물 안의 교실 한 곳에 마련했다. 거의 눌러 앉은 셈이다.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1일, 새해를 맞았을 때도 그나마 구색을 맞춘다고 어디선가 구해 놓은 샴페인 두병을 터뜨리며 컴퓨터와 드로잉 사이에서 우리끼리 자축했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학생들과 같이 우선 아이디어부터 짜기 시작했다. 설계안 제출까지 시간이 촉박해서 아이디어를 짜내면서 리서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역시 처음엔 별의별 토픽이 다 나온다. 마네킹, 잠수 어항, 나무 쓰레기, 거인 얼음, 정글, 돌 밭, 임대 노동 등등. 한 명당 20~30개 정도의 아이디어를 내고 이미지, 논리, 내러티브 등 각 아이디어에 대한 큰 윤곽을 정리하여 3~4시간에 한 번씩 팀 멤버들과 교류하며 발전시켜 나갔다. 조리나는 1982년 생으로, 미국 웰슬리 칼리지(Wellesley College)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트(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맥스완 아키텍트 + 어바니스트(Maxwan Architects + Urbanists)에서 다양한 도시 디자인과 조경 및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조경학과 대학원 강사로 있으며 하버드 GSD에서 초청 강사로 가르친 바 있다. 건축가 매튜 줄(MatthewJull)과 쿠토노톡(KUTONOTUK)의 공동 대표로서 구겐하임 헬싱키(Guggenheim Helsinki)와 헬싱키 공공 도서관(Helsinki Public Library), MoMA PS1 젊은 건축가(Young Architects Program), 유로판 등에서 주관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아크틱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의 대표로서 미국 워싱턴D.C.의 정책 연구 기관과의 협력 아래 북극 도시와 극한 랜드스케이프(extreme landscapes)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www.kutonotuk .com | www.arcticdesigngroup.org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로버트 험버 므핀다 칼룬가 커뮤니티 가든 수석 정원사
    “내가 원하는 정원은 가난하든 부자든, 덩치가 크든 작든, 노숙자이든 장님이든, 혹은 목발을 짚은 사람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뉴욕의 대표적 지역 공동체 정원, 므핀다 칼룬가 가든을 설립하고 30년 넘게 운영해 온 로버트 험버가 내비친 소망이다.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졌던 1980년대 초반의 맨해튼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그는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긋나가던 10대 청소년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면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수단으로 정원을 선택했다. “저는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도와줄 수 있냐고. 그들에겐 그러한 질문 자체가 큰 의미를 지니니까요.” 그리고 그의 생각은 어린이와 노인을 비롯한 지역 주민 전체로 퍼져 나갔다. “10대들은 농구에 관심이 있지만 모든 사람을 위해서는 식물을 함께 키우는 것이 최고죠.” 그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공원의 한 귀퉁이를 시로부터 위임받았다. 한 번도 정원 일을 해 본적 없었지만, 동네 주민, 노숙자, 부랑자, 거리의 매춘부 등에게 도움을 청해 므핀다 칼룬가 가든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원의 이름은 오래 전 이 부근에 있었던 흑인 매장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의미에서 스와힐리어로 지었다. “이전에 이 공원은 그저 빨리 걸어서 통과해야 하는 곳일 뿐이었죠.” 도시의 변방, 어둡고 위험했던 장소는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역 사회도 정원을 중심으로 마약상을 몰아내고 이미지를 바꾸었다. 노인 센터의 앞마당으로도 쓰이며 그들이 마음 편히 안전하게 채소를 가꾸고 소일할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했다. 밥 험버의 헌신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은 점차 알려졌고 커뮤니티 가든의 모범 사례로 통하게 되었다. 관광객과 미디어의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지역 주민에겐 보석과 같은 공간. 므핀다 칼룬가 가든은 오늘도 조용히 맨해튼의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밥 험버는 오늘도 여전히 그 곳을 지키고 있다. Q. 이 정원이 문을 연 첫 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A. 아, 무척 오래된 이야기다. 어느덧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원래 근처에 있는 어린이돕기협회the Children’s Aid Society에서 일했고, 주로 남자 아이들 그룹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자연스럽게 공원에서 소년들과 모임을 갖는 일이 잦았는데, 뭔가 변화가 필요함을 느낀 것도 그 즈음이었다. 협회에서 퇴직하고 난 후, 나는 여기에 좀 더 머물면서 공원 자체를 바꾸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 첫 번째 과제는 공원에서 빈번히 볼 수 있던 마약 거래상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 후 정원을 가꾸는 기술을 점차 배우면서 동네 아이들에게도 뭔가를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렇게 이 정원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Q. 어린이돕기협회의 일과 정원 일을 시작한 계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어린이협회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단체인가? A. 지역의 불우한 어린이와 청소년을 돕는 단체다. 주로 집에 아버지가 없는 소년들인데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고 운영하는 일을 했다. 우리는 뉴욕 시 전체를 교실로 이용했다.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연극이나 야구 경기도 보러갔으며 모여서 방과 후 숙제를 함께 하기도 했다. 뭐, 말하자면 그런 종류의 일들이다. Q. 이곳에 정착하게 된 개인적인 배경과 가족에 대해서 궁금하다. A. 우리 가족은 중남미 파나마 출신으로, 조지아 주로 이주했다. 나는 조지아에서 태어났고 취학 연령이 되었을 즈음 뉴욕으로 이사해 여기 맨해튼에서 평생을 살았다. 나는 스페인어를 못하지만, 내 친척 중에는 유창한 사람이 많다. 지금은 대부분 뉴저지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이번 독립기념일에도 가족들을 방문해서 휴일을 보낼 계획이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몇 있다. 자기들의 생부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심지어 아버지가 있어도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다니기도 한다.이 공원은 수십 년간 나에게 더할 수 없이 귀한 우정을 선물해 줬다. Q. 므핀다 칼룬가 가든의 초기 시절을 묘사한다면? A. 1980년대였고, 무척이나 거친 시절이었다. 공원에는 온갖 종류의 마약이 횡행했고 위험했으며 심하게 지저분하고 불결했다. 칼에 찔릴 뻔하거나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바닥에 총알이 널려있기도 했다. 한마디로, 전혀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특히 어린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게 위협적인 곳이었다.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소년들을 데리고 온 시내를 돌아다녔다. 주중에는 함께 모여서 농구를 하거나, 시시콜콜한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남자아이였는데, 지역 주민이었던 델마 프리차드Thelma Pritchard 여사가 여학생 모임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내가 공원에서 처음 그 분을 만났을 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 아이가 지금 스물서넛 정도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프리차드 여사 또한 아직도 이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돌봤던 아이들이 어느덧 커서 그들의 자녀를 데리고 오면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다. 이것이 내 인생이고 나는 그것을 즐긴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