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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걷고 싶은 도시, 질주의 도시
    난폭 운전자가 본 보행 친화 도시 15년 전, 처음 자동차 주행 연습에 나선 날이었다. 차에 동승한 베테랑 강사는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내 안에 잠재된 난폭 운전자의 자질을 발견하고야 만다. 이와 함께 방어 운전이 중요하며 한국에서는 특히 오토바이를 조심하라는 진심 어린 조언도 해 주었다. 늘 이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아서인지 아직 난폭 운전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지만, 문득 ‘잠재적 난폭 운전자’의 눈으로 본 현대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특히 이들이 보기에 보행 친화적인 도시는 대단히 억압적이고 불편한 장소가 아닐까? 최근 조사에서 미국 도시 중 가장 좋은 보행 환경을 가진도시 3위로 선정된 보스턴이 적절한 예다.1 잠재적 난폭 운전자에게 보스턴은 아주 불편한 장소다(그림1). 우선 차선의 폭이 통상 10피트(약 3m)로 국내 3.2~3.5m 기준보다 좁고, 차선 우측에 있는 자전거 도로와 그 옆의 가로 주차 공간에 출입하는 자전거와 저속 주행 차량에 대해 늘 신경을 써야 한다. 더욱이 도심에서는 무단 횡단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좁은 폭의 일방통행로가 많아서 고속 주행 자체가 어렵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격자형 가로망이 드물어 방향감각을 잃기 쉽고, 주차 요금이 비싸기도 하거니와 빈 공간의 주차 가능 여부를 판단하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 대부분의 미숙한 운전자—여기서의 미숙함은 운전 경력과는 관계가 없다—는 거의 예외 없이 자가 운전자가 된 지 얼마지나지 않아 주차 위반 고지서나 견인 통지서를 받는다. 잠재적 난폭 운전자에게 보행 친화 도시는 곧 무덤이다. 도로는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난폭 운전이 결코 바람직한 행태는 아니므로 보행 친화 도시에 대한 이와 같은 불편함은 응당 감수해야 할 몫이다. 그럼에도 이 대목이 흥미로운 이유는 보행자, 혹은 최단 경로를 따라서 가로를 자유롭게 횡단하려는 사람jaywalker과 자동차 운전자, 특히 고속 주행을 즐기는 조이 라이더joyrider 사이에 종종 갈등 관계가 형성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난폭 운전자에게 보행 친화 도시가 불편한 것처럼 보행자에게 자동차 중심 도시는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다양한 계획 기법을 통해 보행성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동차 의존도가 높은 근·현대 도시에 대한 비판은 이미 20세기 초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피터 노튼Peter D. Norton 교수에 따르면 적어도 미국에서는 이미 1910~1920년대 이후 ‘돼지 같은 난폭 운전자road hog’나 ‘미친 속도광speed demon’ 같은 용어가 보행자 안전을 위협하는 운전자를 비난할 때 널리 쓰이게 되었다.2 같은 시기 보행 중 교통사고 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서는 대체로 보행권을 옹호하는 판결이 우세했으며, 이에 따라 자동차의 속도를 제한하고 운전자를 계몽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3 도로라는 공간을 합법적으로 활보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느냐라는 문제에 대한 다양한 이용자 간의 신경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 시카고에서 옐로우 캡Yellow Cab Company이라는 택시 회사를 설립한 헝가리 태생의 사업가 존 헤르츠John Hertz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우리는 자동차의 시대motor age에 살고 있다. … 이에 따른 교육이 필요하며 자동차 시대에 맞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4 여기서 말하는 책임감에는 아마도 보행자의 안전이 중요한 것처럼 운전자가 신속하게 주행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 역시 포함될 것이다. 헤르츠에 따르면 차량의 주행 공간인 차도에 예고 없이 보행자가 걸어 들어오는 것은 범죄 행위이므로 자동차에 대해 일방적으로 속도 제한을 요구하거나 교통사고 발생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도시에서 점차 확고해진 자동차의 우월적 지위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지속되었다. 이를테면 1960년대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는 자동차가 다른 저속 이동 수단 모두를 대체해야 한다는 잘못된 이념에 따라 많은 도로가 도시의 시공간을 집어 삼켜버렸다고 표현했다. 이와 함께 그는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그럴듯한 예시를 덧붙인다. “만약 도로에 차가 없다면 보스턴 역사 지구의 인구 모두가 걸어서 한 시간 이내에 보스턴 공원에 모일 수 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동차를 이용한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 영영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5 국내에서도 자동차 중심 도시에 대한 비판은 예외가 아니다. 강병기 전 도시연대 대표는 “(현대) 도시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아스팔트 정글로 바뀌었고, 자동차는 정글의 맹수처럼 엄청난 사람을 살상하고 있다. …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는 … (사람을) 소외시키며 왜소하게 만들고 있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했다.6 가해자와 피해자 이처럼 가해자로서의 ‘자동차’와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보행자’ 혹은 ‘도시민’을 대립 구도로 보며 보행 친화 도시로 의 전환을 주장하는 입장은 오늘날 많은 공감대를 얻고 있다. 소위 “보행삼불步行三不의 도시”—보행이 불안(不安)하고, 불편(不便)하며, 불리(不利)하다—라고 일컬어지는 서울의 가로를 한번 관찰해 보자.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 서서 언제 길을 건너야 할지 노심초사 기다리는 노약자, 배달 음식을 싣고 횡단보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와 이를 보며 아이에게 선 주행 후 보행의 슬픈 현실을 알려주는 부모는 물론, 프루인John J. Fruin이 제시한7 보행자 인체 타원만큼의 공간은 고사하고 서로 몸을 완전히 밀착한 상태로 달리는 만원 버스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승객을 흔히 목격할 수 있지 않은가.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전문가의 품격
    13 The Buck Stops Here 클라이언트와의 만남 약속 시간보다 30분에서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있다. 차가 막혀서, 내비게이션이 거지 같아서, 길눈이 어두워서, 사무실에 있기 싫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긴 시간이었다, 을로 산 것이…’라는 생각이다. 클라이언트와의 교류 클라이언트(대형 건축설계회사, 회장님, 친구들)는 순수한 영업의 대상인가? 비즈니스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그림이 아닌 술과 골프로 일을 따내야 하나? 그 해답이 이젠 조금 보이는 것 같다. 요즘은 고령화 현상으로 외로운 독거 노인이 많이 생기는 나이 60이 넘어서도 이들과 친구로 지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다. 프로젝트를 같이 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공유한 적이 있었으니 친구 되기에 더 쉽지 않을까? 클라이언트의 두 타입: 정신적으로 독립심을 주는 부류와 업무적으로 독립심을 주는 부류 정신적 독립심을 필요로 하는 요구 사항 “드라마틱하고 다이내믹한 그런 거 있잖아요” “뭐랄까…, 싸면서도 임팩트 있고 사람들의 눈을 확 사로잡는 그런 공간” “이 예산으로 10배 아니 100배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어야 전문가 아닌가요” “이걸 내가 할 줄 알고 결정할 줄 알면 왜 전문가한테 맡깁니까” “뭐라고 말씀 드리긴 뭐한데, 그냥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오늘 회의 내용 반영해서 내일 다시 봅시다.” “제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요? 기억이 안 나는데요.” 때려치우고 싶은가? 아니면 그냥 때리고 싶은가? 디자이너라면 흔들리면 안 된다.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 필요하다면 선禪에 입문이라도 해야 한다. 인간의 진정한 힘은 관점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지 아니한가. 재빨리 클라이언트로 ‘변신’해서 다시 바라봐야 한다. 클라이언트는 잘 모른다. 우리도 우리가 뭘 하는지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잘 모르는데 클라이언트는 오죽하겠는가.헌데 놀라운 사실은 (솔직히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말이 하나도 안 통하는 외국인도 자기 욕하는 건 느낄 수 있듯이, 일을 잘 모르는 순수한 클라이언트도 우리가 대충하는거 다 안다는 거다.이런 클라이언트는 프로젝트 진행에 따라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서 마감 시간에 대해 어느 정도 관대해지는 편이다. 자신이 초기에 잘 모르고 한 일에 대해어떤 보상을 하고자 하는 심리가 아닐까? 어쩌면 클라이언트도 디자이너의 관점을 점차 이해하게 되는 것일 수도…. 업무와 관련된 독립심을 필요로 하는 요구 사항 “내가 원하는 결과물의 이미지는 ‘이것’이고 ‘이런’ 분위기가 나왔으면 합니다.” “이 예산 안에서 당신이 만들 수 있는 대안을 보여주십시오.” “당신이 전문가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내가 결정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계획은 명확해진다. 시작과 끝이 있으며, 소위 ‘수정’이 상대적으로 적다.단,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며 시간에 대해 엄격하다(클라이언트의 관대함은 프로젝트 초기에만 기대하는 것이 좋다. 특히 시간을 엄수하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없다). 이렇게 아주 상반된 두 클라이언트의 공통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쉬운 선택은 클라이언트가 하고, 어려운 선택과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은 디자이너가 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의 선택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실현 가능한 범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줘야 한다.왜? 책임은 디자이너가 모두 지게 되므로. 디자이너라면 언제나 다음의 문구를 염두에 둬야 한다. “THE BUCK STOPS HERE(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 쓰여 있는 말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뜻이다).” 14 무너지는 경계 요즘 클라이언트는 도시·조경·건축·인테리어 등 유관 분야를 분야별로 접근한다거나 별도의접촉을 취하지 않는다. 일 자체의 목표에 부합하기 위해서라면 무기(분야)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분야의 구분은 무의미함’을 전제로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건축가에게 외부 공간을 의뢰하고, 조경가에게 건축에 대한 조언을 받는다. 그러다 어떤 분야에 대해 모르는 것이 나타나면, “당신의 능력으로 해결해 줘요”라는 주문을 듣게 된다. 여기서 능력은 ‘당신의 인맥을 총동원하고, 가능한 모든 역량으로 주변 분야를 섭렵하여 어떻게든 결과물을 만들어 내라’는 의미다.조경 설계 역시 업무 범위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때문에 업무 역량을 일반화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래도 조경 분야와 밀접한 디자인 문제 해결 능력과 함께 인접 분야―도시, 건축, 토목, 인테리어, 친환경기술, 경관―와 코웍collaboration work하는 스킬은 반드시 요구된다. 오형석은 새로운 조경 문화를 고민하던 젊은 조경가 7인과 의기투합해만든 프로젝트 그룹을 기반으로, 2005년도에 디자인로직을 설립했다.만 10년 동안 디자인로직을 이끌며 새로운 외부 환경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으며, 또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을 갈구하고 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 후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서인조경과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LH 조경 부문 자문위원,인천시 도시디자인 자문위원, 코레일 조경 심의위원을 역임했고, 한국도로공사 사옥, 한남더힐 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되었으며, 세종문화회관예술 정원, 호텔 롯데 제주, 용현 SK VIEW 등을 설계했다.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캐서린 구스타프슨 구스타프슨 앤 포터(런던) / 구스타프슨 거스리 니콜(시애틀) 설립자 겸 소장
    오늘날의 조경은 캐서린 구스타프슨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30년이 넘는 실무 경력을 통해 그녀가 현대 도시의 공적 경관에 지난 세기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감수성의 지평을 열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프랑스 쉘 본사Shell Petroleum Headquarters의 물결치듯 아름답게 흘러내리는 조형적 사면은 모든 조경가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녀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왕성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점토 모델을 이용한 디자인 과정, 원예 전문가와의 협업, 3D 밀링머신 CNC, 바닥 분수, 스크림scrim 사용 등 조경 디자인에 있어서 방법론적 혁신을 주도했다. “하늘로 열린 모든 것은 조경가의 영역The sky is mine. For all landscape architects, anything under the open sky is a landscape architecture issue”이라는 그녀의 강렬한 매니페스토는 그녀야말로 세계 조경을 이끌어갈 실력과 담대함을 가진 리더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한다. 최근 대표작인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아메리칸아트 뮤지엄 중정이 보여주는 섬세함과 고상함의 깊이는 놀랍다. 1,000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공간은 완전히 비워졌을 땐 ‘스크림’에 의해 더욱 풍부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스크림이란 마치 투명한 막과 같이 얕은 물을 포장면 위에 흘리는 기법이다. 2000년 뉴욕 자연사 박물관 정원에 처음 도입된 이후,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스미스소니언에서 네 곳에 배치된 0.25인치 깊이의 수막은 공간에 통일적인 느낌을 구축하는 한편, 행사가 있을 때에는 마른 포장면이 되어 복합적인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신발에 묻은 물이 갤러리 입구에 진입하기 전에 마르도록 거리까지 계산하는 철저함도 보였다. 건물의 역사와 기능을 깊이 연구하고 원예 전문가와 협업해 온실과 같은 공간임에도 난대성 식물이 아니라 워싱턴의 온대성 기후에 어울리는 식물로 공간을 구성해 중정의 성격을 지켜냈다. 아이코닉한 조경 공간을 조성하는 디자이너의 대표 주자로 알려졌으면서도 고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대상지의 특수성과 개성에 부합하는 디자인을 주장하는 구스타프슨은 개념적인 면에서 조경 설계의 앞선 이론을 개척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뉴욕 패션기술대학교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FIT)에서 패션을 전공하고 파리에서 활동했다. 프랑스에서 조경이라는 분야에 눈을 뜬 그녀는 베르사유에서 조경을 공부하고프랑스에서 17년간 설계가로 활동했다. 이후 영국 런던과 미국 시애틀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지금까지 실무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영미권과 프랑스어권 문화와 역사에 두루 해박한 보기 드문 경력을 지녔다. 그녀에 의하면 디자인의 참신함과 신선함은 사회적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할 때 가능하다. 구스타프슨의 디자인에서 언제나 휴먼스케일과 강한 사람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Q. 당신과 같이 섬세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워싱턴 주 야키마Yakima 출신이라는 점이 좀 의외였다. A. 내가 조경가로 전환하기 전 패션 디자이너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종종 나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매끄러운 곡선의 지형을 직물의 결에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패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 작업의 영감은 고향인 야키마의 풍경에서 온 것이다. 그곳의 언덕은 마치 물결치듯 흐르면서 매우 조형적인 형태를 띠는데 나에게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가르쳐주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고원의 사막에서 자랄 수 있는 식물은 오직 세이지브러쉬 뿐이며 얼마 되지 않는 빗물은 수로망을 통해 모여 관개에 이용된다. 야키마 밸리는 미국의 대표적인 사과 산지로서, 이 지역은 물을 저장하고 집약적으로 활용하는 데 매우 능숙하다. 나의 작업들이 물을 세심하게 통제하는 것은 야키마의 인공적인 수자원 활용에서 배운 것이며 땅을 하나의 형상form으로 이해하는 방식 또한 고향에서 자라며 습득한 것이다. Q. 당신의 작업에는 ‘기억’이라는 요소가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 A. 약 10여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기억에서 디자인의 영감을 얻어왔다. 기억이란 대상지에 대한 역사를 주조해내며 사람들이 그 장소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뜻한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당신의 부모님장미를 키우는 데 각별한 정이 있었다면, 당신은 장미 화단을 걷거나 장미의 냄새만 맡아도 과거에 일어났던 풍경과 사건들을 회상하게 되고, 그것들이 지금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많은 식물이 그런 역할을 한다. 일례로, 미국 동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는 단풍나무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 집 주위나 동네를 물들였던 붉고 노란 색의 변화를 기억한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조건이 조성되면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낀다. 개인사에서 어떤 변하지 않고 지속하는 것들에 관한 것이다. 영국 런던의 한 정원 프로젝트에서 나는 소위 ‘기억의 식물’이라는 식재 계획을 세웠다. 영국의 평범한 농가에서 흔히볼 수 있는 초화류나 관목들로 구성한 것이다. 그때 이용한 식물은 블루벨bluebells, 수국, 동백 등이다. 할머니와 함께 차를 마시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Q. 패션에서 조경으로 전환한 계기는 무엇인가? A. 나는 베르사유의 프랑스 국립조경학교Ecole Nationale Superieure du Paysage in Versailles를 다녔는 데, 그것은 순전히 학교가 루이 14세의 채소 정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르 노트르Le Nôtre의 걸작 한가운데 있는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나는 패션 디자인 일을 하면서 조경이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 순간적으로 그것이 나의 길임을 직감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재료와 디테일] 불의 아들, 화강석
    지구는 거대한 돌덩이다. 우리는 어디서든 돌을 볼 수 있다. 돌과 함께 한 인류의 역사는 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석과 돌무덤 등 기념비적 이용부터 시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석조 건조물에 이르기까지 석재 문화는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로마의 판테온, 중세의 교회 건축 등 석조 건조물에는 그 시대와 민족의 생활 양식과 풍토가 표현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불교문화의 산물인 신라의 석굴암과 다보탑,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 등이 있다. 석재 기술은 기념비를 넘어서 일반 서민의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맷돌 등 일상 생활에 필요한 도구에서부터 돌확, 석등 등 정원 점경물과 교량의 상판과 기둥, 화단의 마감벽 등 구조재를 포함해 그 종류가 다양하다. 서양 문화의 수입과 경제 발전을 겪으며 이러한 장식재로서의 쓰임이 더욱 본격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석재의 대부분을 이루는 화강석의 강도가 워낙 강해서 실용성이 높다는 점이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강화했을 것이다. 가공이 어렵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근래에는 특유의 장중함과 미려함을 살릴 수 있는 가공 기술의 발달로 인해 석재의 이용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흔하게 볼 수 있던 돌이 고급 재료의 가능성을 보여주게 되면서 구조재 보다는 장식재로 더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돌은 그 생성 기원에 따라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조경용으로 쓰이는 대표적인 석재는 화성암의 일종인 현무암과 화강암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화강석(화강암)이다. 현무암은 마그마가 땅 위로 분출되거나 지표 부근에서 빠르게 굳어서 생긴 암석인데 반해, 화강암은 땅 속 깊은 곳에서 마그마가 서서히 굳어져 생긴 암석으로 그 결정 입자가 현무암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고 강도 역시 높다. 또한 문양으로 나타나는 결정 입자의 크기나 모양 또는 구성 물질이 다양하다는 측면도 화강석이 자재로서 갖는 장점이다. 이 화강석을 쓰임에 알맞게 쪼개어 가공하는 방법에는 돌눈에 따라 구멍을 일렬로 파고 쇄기를 박아서 쳐내는 방법과 기계톱으로 얇게 켜내는 방법이 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결의 무늬는 시간을 거스르는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돌 자체가 갖고 있는 생성과정의 유구함이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공간 공감] 석파정
    흥선대원군의 별서로 잘 알려져 있는 석파정石坡亭은 개인 소유의 서울시 유형문화재다. ‘석파정’이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거대한 암반 비탈의 자연 경관을 적극적으로 감상 요소로 끌어들인 공간이다. 소재가 석파정이다보니 한국 전통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서술로 흐르기 십상이지만, 그러한 관점은 다른 글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니 자연과 인공 간의 균형감을 중심에 놓고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자연스러움’은 한국의 조경가에게 부여된 의무 같은 덕목이다. 자연 소재를 활용하는 설계 분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경관이라는 공공재를 다루는 분야이다 보니 억지스러움을 피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간의 자연스러움을 어떤방식으로 구현하고 있을까? ‘자연은 직선을 싫어한다. Nature abhors a straight line’는 명제는 18세기의 한 영국인이 처음으로 제시했지만, 우리 설계 동네의 가이드라인처럼 통용되고 있다. 이 문구는 조금 더 확장되어 자연과 인공, 곡선과 직선의 이분법적 인식에 대한 토론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흥미로운 건 은연중에 곡선이 자연 혹은 자연스러움의 대변인의 지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직선과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곡선이 자연과 밀접하다는 인식은 논리적으로 명쾌하지 않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그린다는 것, 만든다는 것 그 즐거움을 이야기하다
    대담 김용택·이홍선 소장 “조경설계사무소 소장 두 분을 한 자리에 모셨다”라고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 두 분 모두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과 관리까지, 마치 원스톱 서비스처럼 제공하고 있어서다. 게다가 별도의 시공팀도 꾸리고 있고, 한 분은 가식장까지 갖고 있다. 사무실 풍경은 다른 설계사무소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두 분의 동선은 사뭇다르다. 특히 현장이 한창 바쁘게 돌아가는 봄부터 가을까지의 동선은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보다 현장에 있을 때가 더 많고, 나무를 구하러, 새로운 소재를 찾으러 전국을 누빈다. 주말도 따로 없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아침 6시 30분부터 현장이 돌아간다. 그 여파로(?) 이번 대담을 위한 답사도 토요일 오전 7시부터 시작되었다(사실은 개인 정원이다 보니 집 주인의 일정에 맞춰 토요일에 방문했다). 게으른 에디터에겐 꼭두새벽에 가까운 아침 7시에 만난 까닭은 길에서 버리는 시간을 줄여보고자 한 것. 그렇게 분당에서 출발해 가평을 거쳐 판교로, 다시 분당으로 돌아와 대담이 마무리된 시간은 오후 3시. 정원 두 곳을 둘러보고 식사도 하고 대담도 2시간여 진행했지만,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 있었다. 김용택 소장은 다음날 여주 주택정원에 심어야 할 나무를 사러가야 한다며 대담이 끝나자마나 과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이른바 ‘디자인-빌드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는 설계사무소 소장의 일과를 엿볼 수 있는 하루였다. 이번 대담은 잡지에 연재되고 있는 ‘공간 공감’이 촉매가 되었다. ‘공간 공감’ 멤버(김아연, 김용택, 박승진, 이홍선, 정욱주)들의 답사를 몇 차례 따라간 적이 있는데, 두 분의 설계관이 비슷한 듯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미묘한 ‘차이와 다름’의 실체가 궁금해진 것이다. 회사 설립 이후, 설계한 곳을 직접 시공하는 원칙을 지켜나가는 공통점도 있어서 대담자로 적격이었다. 특히 김용택 소장은 정영선 대표의 조경설계 서안에서 10년을, 이홍선 소장은 이교원 대표의 이원조경에서 18년을 근무하고 독립한 점도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이원조경과조경설계 서안에서의 경험이 지금과 같은 시스템의 디자인 오피스를 만들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을 터. 더구나 이교원·정영선 대표는 인구에 회자되는 뚜렷한 작품을 남긴 조경가이니 만큼 그에 얽힌 이야기도 궁금했다.1 담백하다 vs 단단하다 남기준(이하 남): 김용택 소장님이 설계·시공한 가평주택정원(이하 가평)과 이홍선 소장님이 설계·시공한 운중동 주택정원(이하 운중동)을 둘러보았다. 먼저 가평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 그동안 ‘공간 공감’ 답사를 여러 차례 같이 다니셨지만, 서로의 작품을 보신 적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홍선(이하 이): 건축과 정원의 조화가 돋보였다. 세컨드하우스로서의 장소성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건축 설계도 주변과 잘 어울렸다. 정원을 소개해주시면서 김 소장님이 ‘설렁설렁 했다’고 하셨는데, 꽉 채우려하지 않고 절제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담백하고 공간감이 좋은 정원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과하게 채우려 했다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됐을 것이다. 여러 디테일에서 여백이 느껴지도록 한 점이 경관을 확장시킨 효과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은 식재 패턴이다. 컬러나 높이, 질감의 조화가 좋고, 무엇보다 심플한 점이 매력적이다. 남: 장점만 이야기하는 것은 반칙이다. (웃음)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 이: 주차장과 주택 사이에 꽤 단차가 있는데,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동선에서 (건축가의 의도도 있었겠지만) 자작나무가 심긴 화단 때문에 약간의 중압감이 느껴졌다. 그 부분을 좀 감추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리고, 아쉬운 점은 아니지만 나와 스타일이 좀 다르다고 느낀 곳은 건축 전면부다. 만약 내가 설계했다면, 건축 매스가 작은 편이 아니니까 건물 앞에 나무를 대서 좀 가렸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단풍나무나 산딸나무, 벚나무 등 의 교목이 적절히 자리 잡고 있지만, 좀 더 적극적인 제스처를 썼을 것 같다. 물론 건축가들은 굉장히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꼭 나무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이들 때면 설득을 한다. 김용택(이하 김): 건축가들과 작업 할 때, 미리 조심하는 부분도 있다. 건축가가 좋아할만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원칙은 전체 공간의 조화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작은 디테일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성향 탓이 더 클 것이다. 좀 더 돋보이고강하게 연출하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작업을 하다보면 늘 줄이게 된다. 이: 그래서인지, 건축과의 호흡이 좋아 보인다. 예를 들어, 노출 콘크리트 가벽이 정원에서 오브제 역할도 해주고 적절히 외부를 가려주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건축 설계가 정원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느낌도 든다. 건축가와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가 궁금하다. 김: 가평 정원을 함께 한 건축가 같은 경우, 첫 프로젝트는 꽤 힘들었다. 건축가는 별 말이 없었는데, 직원들이 미리 걱정을 해서 대안 요구를 상당히 많이 했다. 하지만 첫 번째 결과가 만족스럽게 나온 후로는 전적으로 내게 맡기고 있다. 지금은 건축주만 설득이 되면 내 의견이 거의 반영된다. 그리고 건축가라고 해서 모두가 건축물 앞에 나무 심는 걸 꺼려하는 것도 아니다. 단독 주택에 살고 있는 건축가들은 특히 그렇다. 설계자가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주택에 살아보면, 집 가까이 있는 나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일도 건축가의 집 바로 앞에 나무를 심으러 가야 한다. 이 소장님이 ‘적극적인 제스처’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렇게 프레임을 강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요즘은 많이 든다. 최근에 경기정원박람회나 세종시 푸르지오의 작가정원, 국립수목원 내의 정원 등 공공적인 성격의 정원을 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그에 대한 고민이 더 커졌다. 건축과 별개의 공간에 정원만 자리 잡는 경우인데, 임팩트 있는 디테일이나 프레임이 없으제스처를 썼을 것 같다. 물론 건축가들은 굉장히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꼭 나무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이들 때면 설득을 한다. 김용택(이하 김): 건축가들과 작업 할 때, 미리 조심하는 부분도 있다. 건축가가 좋아할만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원칙은 전체 공간의 조화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작은 디테일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성향 탓이 더 클 것이다. 좀 더 돋보이고강하게 연출하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작업을 하다보면 늘 줄이게 된다. 이: 그래서인지, 건축과의 호흡이 좋아 보인다. 예를 들어, 노출 콘크리트 가벽이 정원에서 오브제 역할도 해주고 적절히 외부를 가려주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건축 설계가 정원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느낌도 든다. 건축가와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가 궁금하다. 김: 가평 정원을 함께 한 건축가 같은 경우, 첫 프로젝트는 꽤 힘들었다. 건축가는 별 말이 없었는데, 직원들이 미리 걱정을 해서 대안 요구를 상당히 많이 했다. 하지만 첫 번째 결과가 만족스럽게 나온 후로는 전적으로 내게 맡기고 있다. 지금은 건축주만 설득이 되면 내 의견이 거의 반영된다. 그리고 건축가라고 해서 모두가 건축물 앞에 나무 심는 걸 꺼려하는 것도 아니다. 단독 주택에 살고 있는 건축가들은 특히 그렇다. 설계자가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주택에 살아보면, 집 가까이 있는 나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일도 건축가의 집 바로 앞에 나무를 심으러 가야 한다. 이 소장님이 ‘적극적인 제스처’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렇게 프레임을 강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요즘은 많이 든다. 최근에 경기정원박람회나 세종시 푸르지오의 작가정원, 국립수목원 내의 정원 등 공공적인 성격의 정원을 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그에 대한 고민이 더 커졌다. 건축과 별개의 공간에 정원만 자리 잡는 경우인데, 임팩트 있는 디테일이나 프레임이 없으면 영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 건축적인 요소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고 있다. 또 그동안 상당히 많은 정원을 디자인했는데, 대부분 비슷한 패턴으로 하다보니까 내 정원이 스스로 식상해지기도 했다. 이 소장님은 건축을 전공하셔서 그런지 나와는 스타일이 꽤 달라 보인다. 이: 반대로 내가 만드는 정원에는 잔잔한 터치가 부족한 점이 항상 아쉽다. 다양한 요소를 활용한 연출 방식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김 소장님과 작품을 함께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전반적으로 느슨하고 비어보이지만, 소재와 물성의 믹스가 자연스럽고 거기서 나오는 공간감이 좋다. 가평 정원을 보면서 부족한 점을 많이 배웠다.
    • 남기준
  • [칼럼] 남귤북지, 서울역 고가
    2014년 10월 12일. 서울역 고가는 무척 부산했습니다. 1970년 준공 이후 무려 44년 만에 처음으로 보행자에게 고가 도로를 개방했기 때문이었지요. 저도 이런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사진기 가방을 메고 서울역 고가로 향했습니다. 자동차가 주인이던 도로를 걷고 있자니 왠지 모를 ‘통쾌함’ 같은 것도 느껴졌습니다. 걷다보니 자동차 안에서 스쳐보기만 했던 주변의 건물들이 하나하나 자세히 눈에 들어오더군요. 역시 도시는 걸으면서 느껴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더 걸어 나가니 예전 서울역사건물이 시원스럽게 ‘내려다’ 보였습니다. 이런 건물을 내려볼 수 있는 기회라니! 옆으로는 길게 뻗은 한강대로의 모습도 보이고. 고개를 조금 더 옆으로 돌리니 세종대로 옆 고층 건물들 사이로 남대문도 볼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에게 내준 17m 높이의 고가 도로에는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아주 멋진 경관이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서울을, 그것도 서울의 가장 중심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좋은 전망 장소로 충분한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달 다시 고가 개방 행사를 진행할 때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프로젝트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가장 크게 반대하는 분들은 주변의 상인들입니다. 특히 남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중림동과 회현동 일대의 상인들은 고가 도로를 공원화할 경우 차량 유입이 중단되면서 상권이 위축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고가 도로 인근의 12,000여 개의 상가에서 일하고 있는 약 4만여 명의 생계가 이 프로젝트와 직결되어 있는 만큼 당장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올해 1월에 개최하려고 했던 고가 도로 활용에 관한 전문가 토론회는 주변상인들이 대체 도로 우선 논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여러 이해당사자가 관여된 프로젝트에서는 항상의견 조율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프로젝트의 진행을 통해 이익이 생기는 그룹과 손해를 보는 그룹간의 갈등은 매우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러한 갈등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충분한 논의 과정이라고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환경과조경』 2014년 11월호를 참조). 그리고 논의 과정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프로젝트의 방향을 잡는 초기 과정에서 주변 상인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이 반대 의견을 낳은 큰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당사자를 제외시켰다는 것에 대한 허탈감 같은 것이 반대 의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보다 ‘어떻게’가 이런 프로젝트에서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좀 더 여러사람의 의견을 충분히 담아야 합니다. ‘서울의 하이라인’ 혹은 ‘한국판 하이라인’은 서울역 고가 공원화 프로젝트를 소개할 때 흔히 붙이는 제목입니다. 도심의 고가 도로(하이라인의 경우 고가 철도 였지만)를 공원처럼 만들겠다는 공통점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비유인 셈이지요. 게다가 서울시가 당당히 하이라인을 ‘벤치마킹’했음을 내세우고 있고 박원순 시장이 미국 방문 때 이르면 2016년까지 뉴욕 하이라인과 같은 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히면서 두 프로젝트의 연관성은 더 확고해졌습니다. 그러나 정말 서울역 고가 도로가 서울의 하이라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 되어야 할까요? 우선 하이라인과 서울역 고가 도로는 상당히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뉴욕 하이라인의 경우는 고가 철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주변 공업용 건물의 구조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서 현재의 하이라인도 주변 건축물들과 물리적으로 잘 엮일 수 있는 구조입니다. 태생적으로 하이라인 철도는 주변 건물과 일체화하기 유리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역 고가 도로의 경우는 차량 통행을 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주변 건축물들과 분리해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변 건물과의 관계를 새로 맺는다는 게 현재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상태입니다. 이런 차이로 인해 뉴욕의 하이라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시민의 일상적인 이용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서울역 고가도로 위를 많은 사람이 걷기를 희망한다면 하이라인과는 전혀 다른 이유를 만들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조건에 맞는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과거 ‘서울숲’을 조성할 때에도 ‘서울의 센트럴 파크’를 지향했던 적이 있었지요. ‘서울숲’ 이전의 많은 신도시에도 ‘중앙공원’이 양산됐습니다. 브랜드를 빌려오면서 얻게 되는 이득이 분명히 있습니다. 일반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는 데에는 이만한 방법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브랜드를 수입해야 할까요? 이제 우리도 우리 브랜드를 자신있게 내 놓을 수 있어야 하지않을까요? 지난 5월 13일 서울시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당선작으로 MVRDV의 비니마스Winy Maas의 제안을 선정했습니다. ‘서울수목원The Seoul Arboretum’. 서울역 고가도로 전체를 나무에 비유하여 인근 지역으로 뻗어가는 유기적인 디자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고가 위에는 국내의 다양한 나무를 가나다순으로 심어 수목원을 만들고, 사업에 반대하고 있는 지역 상권과 연계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네요. 우선은서울의 하이라인을 꿈꾸고 있지 않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남귤북지南橘北枳’는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고사성어입니다. 강남에 심었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서로 다른 기후와 풍토 때문에 탱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즉, 주위 환경에 따라서 같은 인재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아무리 하이라인이라고 한들 태평양을 건너왔는 데 뉴욕의 하이라인이 서울에서도 같을 수는 없지않을까요? ‘프롬나드 플랑테’가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하이라인’으로 성공한 것처럼, 태평양 건너 새로운 ‘서울역 고가’로 거듭나길 기대해 봅니다.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업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Ohio State University)에서 방문교수로 지냈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에디토리얼] 열린 디자인
    당위성, 목적, 효과 모든 면에서 논란을 가득 안은 채 강행된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13일 서울시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 결과를 발표했다. 4월 29일의 심사 다음 날 당선작을 공개한다고 예고한 일정과 달리 선정 결과 발표에 2주의 긴 시간이 흘러서 『환경과조경』 편집부에는 때 아닌 비상이 걸렸다. 이미 세 달 전에 서울역 고가를 이번 호 특집으로 정하고 60쪽에 가까운 지면을 할애해 놓았으니월간지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비공식 채널로 제출작들의 패널과 설계 설명서를 구해 발표 전에 미리 편집을 해놓는 무리수를 두느냐, 발표 때까지 인내한 후 사나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느냐로 고심을 거듭하다 대책 회의 장소를 근처의 치킨집으로 옮겼다. 공모전 출품작을 지면에 담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공이 들어간다. 우선 에디터가 작품을 충분히 해석한 후 잡지에 실을 다이어그램, 도면, 이미지, 텍스트를 선별한다. 동시에 내부에서 직접 번역을 하거나 외주를 맡긴다. 이런 1차 작업이 끝난 원고가 디자이너에게 넘어가 편집 디자인된 초고가 나오고, 수정과 교정 작업이 세 차례 정도 이어진다. 그래서 공모전을 잡지에 싣는 달이면 (출품자들의 수고에야 못 미치겠지만) 편집부 모두 의욕 과잉과 심신 탈진을 동시에 경험하곤 한다. 특히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세 편의 비평을 붙이기로 했던 편집 계획이 문제였다. 오래 전에 섭외한 비평자들이 단 사흘안에 작품을 읽고 평문을 쓰기란 사실 불가능했다. 대책 회의의 소품이었던 맥주잔이 점차 쌓여가자 마침내 단순 명쾌한 해법이 나왔다. 한 달 연기! 역시 계획은 유연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환경과조경』은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당선작을 비롯한 모든 출품작을 7월호에서 보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룰 것을 약속드린다. 다음 달에 실릴 출품작과 비평을 안주 삼아 많은 토론 생산하시길. 당선작으로 발표된 비니 마스Winy Maas(MVRDV)의 ‘서울수목원The Seoul Arboretum’을 두고 페이스북을 비롯한 여러 SNS 매체에서는 이미 다양한 견해가 쏟아지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처음 구상된 작년 후반기와 다를 바 없이, 사업 자체의 당위성에 대한 의구심, 정치적 목적에 대한 의혹, 주변 상인들의 반대와 서울시의 소통 부족, 설계공모의 과정과지명 초청 방식 등에 대한 의견과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당선작 발표 후에는 비니 마스의 안에 대한 촌평도 꼬리를 물고 계속되고 있다. 대부분은 적절한 논증이 없는 단순한 취향 고백이거나 인상 비평이지만 몇 가지 흥미로운 관점도 눈에 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불투명한 설계 환경에 대처한 전략적 작품, 일견 유치한 키치kitsch로 보이지만 서울의 도시 환경을 단도직입적으로 비판한 작업, 콘크리트 환경에 가장 쉽게 대응할 수 있는 기술적 제안이라는 반응도 있고, 여러 각도의 혹평도넘쳐난다. 한 지인은 청계천 복원 프로젝트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큰 어항”이라고 비판했던 어느 외국 전문가의 말을 패러디해서 이번 당선작을 “세상에서 가장 긴 화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 조경가는 여러 일간지에 실린 분홍빛 식물로 가득한 당선작의 이미지 컷을 두고 “어느 기독교 이단 종파의 선교 책자 표지 같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다음 달 『환경과조경』에서는 당선작과 여러 출품작은 물론 공모 지침과 과정을 아우르는 보다 심층적인 분석을 만나실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자체의 비전과 실천성에 대한 평가는 다음 달로 미루지만, 이 지면에서 간단하게나마 먼저 짚어 보고자 하는 쟁점은 앞으로의 ‘과정’이다. 당선작 ‘서울수목원’은 공중 보행로를 수목원으로 조성한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서울역 고가를 하나의 큰 나무로 설정한 후 퇴계로에서 중림동까지의 고가 구간에 ‘가나다’ 순으로 국내 수목을 심는다는 구상이다. 심사위원회는 ‘서울수목원’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유를 “서울역 일대를 녹색 공간화하는 확장 가능성을 제시한 점”과 “다양한 시민 및 주체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프로세스를 중시한 점”이라고 밝혔다. ‘녹색’과 ‘확장’은 다른 제출작에서도 거의 공통적이므로 결국 당선작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시민 및 주체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프로세스”인 셈이다. 그런데 과연 그 프로세스라는 건 무엇인가? 다음의 세 가지 단서를 통해 애써 짐작해 볼 수 있다. 비니 마스는 공식 인터뷰에서 “여러 시민이 참여하는 연합 프로젝트로 진행할 것”이며 “서울에서 자생하는 식물을 선택하고 관리하는 과정에 시민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심사위원을 겸했던 승효상 서울시 총괄건축가는 “이번 당선작이 지니는 가치와 장점을 구현하기 위해선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거버넌스가 운영되어야 하며, 특히 당선작이 지향하는 ‘열린 디자인’의 정신이 프로젝트 전개 과정에서 잘 구현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서울시의 보도 자료를 보면 “이번 당선작은 확정된 설계안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 주민설명회, 분야별 전문가 소통을 통해 설계를 구체화할 것”이라고 한다. 함께 만드는 프로세스, 열린 디자인, 참여, 거버넌스 등은 명확한 의미로 쓰였다기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일종의 다짐으로 읽힌다. 그러나 서울시가 이번 프로젝트를 과정 중심적으로 끌어갈 것이라고 신뢰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번 설계공모 과정이 열린 과정보다는 닫힌 결과를 위한 하나의 절차였기 때문이다. 전문가 그룹조차도 침묵하고 지나갔지만, 이번 지명 공모전은 통상적인 지명 방식인 RFQRequest for Qualification(자격 심사)나 RFPRequest for Proposal(제안서 심사)도 생략한 채 기형적으로 진행되었다. 마치 재벌오너가 사옥을 지을 때 자신의 목적과 취향에 맞는 건축가들을 초청해 경쟁시키는 방식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경우, 과정은 빠른 결정과 진행의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다. 만일 비니 마스의 당선작이 과정 중심적인 ‘열린 디자인’을 지향하고 있고 서울시가 열린 디자인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과정을 다시 디자인해야 한다. 몇 차례 주민 설명회와 전문가 자문 회의를 거친다고 해서, 홍보 이벤트를 몇 번 더 연다고 해서 참여와 소통과 과정을 존중하는 열린 디자인이 완성될 리 없다. 공모전 당선작 발표를 일주일 앞두고 주변 상인들의 반대에 대한 대응책으로 대체 고가도로 건설 계획을 내놓은 게 지금 서울시가 생각하는 ‘과정’의 단면이다.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에 열린openended디자인이 필요하다면, 서울시의 계획과 일정 자체가 열려 있어야 한다. 토건시대를 연상시키는 속도전을 통해 박원순 시장의 임기 내에 완공하는 게 목표라면 열린 디자인은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에디터의 설계공모 도전기
    미리 양해를 구한다. 인용이 제법 길다. 하지만 그만큼 흥미진진하다. “월요일 아침마다 하는 오피스 전체 미팅이 끝나고 회의실을 나가려는 사장님을 불러 세운다. MAC 공모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지 않느냐고. MAC? 표정을 보아하니 맥도날드 빅맥을 생각하는 눈치다. 이메일로 온 공모전 초청에 대해서 설명하니 그제야 알아듣는다. … 전화할 곳이 있어 일어나야겠다는 사장님에게 회사 차원에서 공모전을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면 개인적으로라도 참가하겠다고 말한다. 업무 외 시간과 주말을 이용하여 작업을 할 테니 회사 일에는 지장을 주지않겠다. 그러니 양해해 달라. 바빠서 일어나야 한다는 사장님이 가만히 있는다. 이 자식, 따로 공모전을 한다면 회사 일에는 소홀해질 게 뻔한데, 그렇다고 개인 시간에 한다는 공모전을 못하게 할 명분도 없고. 말투를 들어보니 목숨 걸고 할 기세인데, 혹시라도 좋은 결과가 있으면 공식적으로는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이니, 결과가 좋으면 나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한데…. 표정을 보고 짧은 순간에 대강 이런 생각이 스쳐갔으리라고 짐작해 본다. 매우 심사숙고를 한 듯한 표정으로 사장님이 입을 연다. 너의 열정을 알겠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의미도 잘 알겠다. 그렇다면 SWA의 이름을 걸고 한번 나가보자. 대신 알다시피 다른 회사 프로젝트들도 바쁘고 큰 공모전을 치른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지원은 거의 못해준다. 너를 믿을 테니 이 공모전을 함께 치뤄보자. 아 참, 그리고 참가 등록할 때 내 이름으로 등록해야 하는 거 알지? … 말은 그럴싸하지만 너 혼자 잘해보라는 의미다. 물론업무 외 시간을 주로 이용해서. 시작은 미약하지만, 일단 회사 이름을 걸고 참가한다는 것은 큰 성과다.” 『조·경·관』(임승빈 외 17인 공저, 나무도시, 2013)이란 책에 실린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조경학과)의 ‘조경 경연 이야기 - 행정중심복합도시 국제 설계공모 참가하기’의 한 대목이다. 이렇게 시작된 설계공모 참가기는 팀 구성, 작품 제출, 결과 발표(낙선), 그 이후의 에피소드까지 공모전의 전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해 놓았다. 교정을 보면서 몇몇 대목에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이다. “문제는 팀원이다. 그래픽 작업은 물론이고 디자인 개념을 만드는 단계에서도 한명 보다는 두 명이 낫다. 저녁 때 오피스 전체에 이메일을 보내본다. 디자이너로서의 역량과 아이디어를 시험해 볼 도전적인 공모전이 떴다. 한국에 센트럴 파크를 능가하는 규모의, 어쩌면 조경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도 있는 공원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우리 함께 하얗게 밤을 불살라보자꾸나. 다음날, 답 메일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일단은 나 혼자 해야겠다.” 그러다가 가끔은 이런 식으로 잡지에 공모전 이야기를 풀어내면 어떨까 하는 궁리를, 아주 잠깐 해보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맹랑한 상상을 발칙한 공상으로 발전시키게 된 건 카톡방이 발단이 되었다. ‘잠실종합운동장 일대 도시재생 구상 국제공모’가 막 발표된 때 였다. 9월 4일에 당선작이 발표되니 10월호에 지면을 잡아 놓아야겠다는 둥, 이런 공모는 제대로 된 그림보다 강력한 아이디어 한 방이 필요하다는 둥의 뻔한 이야기부터, 서울시에서 공모가 쏟아지는 배경에 대한 정치적 분석까지 흘러갔다가, 코엑스와 한전 부지를 중심으로 한 잠실 일대의 잠재력에 대한 난상토론을 거쳐, ‘설마 잠실야구장에서 프로야구를 못 보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건 아니겠지’ 같은 난데없는 취미 생활에 대한 걱정까지, 그야말로 두서없는 대화가 오고갔다. 그러다 누군가 ‘의외로 제출도서가 많지 않다’는 점에 집중했다. 그러자 ‘공개 국제 아이디어 공모’란 공모 방식에서 ‘공개’와 ‘아이디어’란 두 단어가 유독 눈에 도드라졌다. 지나가는 농담으로 흘러가버릴 수 있었던 ‘한 번 해볼까’란 멘트가 본격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건, 앞서 인용한 김영민 교수의 글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에디터의 자전거 출근기’의 뒤를 잇는 후속 기획으로 ‘에디터의 설계공모 도전기’를 한 번 해봐? 그래도 기본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경을 전공하고 지금은 부동산학과 교수가 된 A와 다수의 공모전에서 수상 경력이 있는 이른바 ‘공모의 여왕’ B를 섭외하는 것으로 팀 구성을 완료했다. 일단 김영민 교수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 세팅된 것 이다. 물론 그 전에 단체 카톡방부터 만들었다. 카톡방 이름은 ‘Project C’로 정했다. 컴피티션Competition의 약자이기도 하지만, 챌린지Challenge의 의미도 담았다. 킥오프 미팅 날짜도 정하고, 각자의 미션도 느슨하게 나누기로 했다. 내가 맡은 건, 공모와는 하등 상관없는 잡지에서 어떤 점을 부각시킬 것인가였다. 그래서 우선 계약서를 먼저 작성하자고 했다. 파주출판도시의 건축주와 건축가들이 맺었던 ‘위대한 계약서’를 카피하여 ‘상징적인 계약서’라는 타이틀부터 뽑았다. 설계공모에서 컨소시엄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지만, 막상 제대로 계약을 맺고 작업을 하는 사례가 거의 없는 상황이어서, 이에 대한 문제점을 에둘러 짚어보고자 한 것이다. 계약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1/n’을 바탕으로 하되, 합리적으로 기여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삼았다. 비용 역시 ‘1/n’의 원칙에 따라 부담하기로 했다. 만약 실제로 참가 등록을 하고 아이디어 공모안을 준비했다면, 이 글은 10월호에 수록되었을 것이다. 결과는? 과연 참가에 의의를 두는 수준을 벗어났을까? 지금도 가장 궁금한 대목이다. 결국 참가 등록 마지막 날까지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우리는 ‘Project C’를 없던 일로 되돌렸다. 만약 진행했다면, 에디터들에게 적지 않은 공부가 되었을 것이고, 설계공모의 프로세스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한두 가지 유의미한 이슈를 도출해내지 않았을까 싶지만, 설계공모 도전은 자전거 출근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 만큼 보다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10월호에 한 꼭지가 펑크 났으니, 이제 정신 차리고 그걸 때울 생각이나 해야겠다. 상금을 받아서 북유럽으로 다 같이 답사를 가자던 어느 기자의 마음도 달래주고.
  • [편집자의 서재] 메이즈 러너
    미로에 얽힌 설화는 그리스 신화가 유명하다. 크레타의 미노스 왕은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가두기 위해 미궁을 만들었다. 매년 7인의 소년 소녀가 제물로 바쳐졌는데,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길을 헤매다 괴물에게 먹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이 미궁에 들어가 괴물을 처치하고 아리아드네의 실에 의지해 빠져나온다. 미로의 폐쇄적인 물리 구조는 공간 선택의 자유를 제한한다. 지각 능력을 차단함으로써 공포감을 일으키는 데, 이러한 미로의 속성을 바탕으로 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위의 미궁 이야기다. 하지만 이와 같은 특성은 때로는 기대감을 안겨주고 다양한 공간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귀족들은 정원에 미로를 설치하고 밀회를 즐기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여가를 위한 공간으로 미로가 조성된다. 소설은 현실의 축소판이다. 더욱 극적인 표현을 위해 비현실의 세계를 끌어온다. 현실 세계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이 은유적으로 표현되는데, 독자들은 이를 통해 스토리에 공감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몰입한다. 우연한 탐방의 여정을 미로의 개념으로 차용하거나, 탐사와 미로의 경계에 있는 상황, 미궁을 상징하는 미로의 형식이 두루 활용된다. 『메이즈 러너』는 기억이 삭제된 채 거대한 미로에 둘러싸인 낯선 공간에서 펼쳐지는 소년들의 생존기를 그린 소설이다. 지난해 개봉한 동명 영화의 원작이다. 누군가에 의해 매달 한 명의 소년이 ‘박스’를 통해 미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단순한 탈출기가 아니다. 이 작품 속 미로에는 자연이 형성되어 있다. 기존의 미로 이야기와 다른 구조로 전개될 수 있는 단서가 ‘숲’에 있다. 미로 속이 순환하는 구조가 아니었다면 신체에 대한 구속력과 심리적 압박감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메이즈 러너』에서는 숲을 두어 그 감정을 완화하도록 했다. 생존의 여지를 둔 것이다.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는 숲이 있고 물과 나무, 열매가 식욕과 잠, 안전의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준다. 이는 작품 말미에 드러나는 인류의 질병 치료를 위한 실험이라는 설정에서 비롯된다. 단순한 감금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 변화하는 정신상태를 분석해 인류의 생존 열쇠를 찾는 것이 작품 속 미로의 목적이다. 숲이 없었다면 이 작품은 ‘큐브’ 혹은 ‘빠삐용’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사람이 스스로를 중심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삶과 죽음,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등의 양극으로 정리하는 경향을 찾아냈다. 생존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는 타자에게 기대기도 한다. 『메이즈 러너』의 핵심 배경은 미로와 숲이라는 두 개의 대립 공간이다. 숲은 삶과 빛에 해당하고 미로는 죽음과 어둠이다.이 양극화된 공간에서 두려움에 맞서 소년들은 숲에 속하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 미로에 가장 먼저 들어온 알비는 무리를 이끌기 위해 세 가지 규칙을 정했다. 토머스가 등장했을 때 규칙을 알려주는데, 미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가장 강하다. “룰이 세 개 있어. 첫째, 맡은 임무를 다할 것… 둘째, 다른 친구들을 해치지 말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절대 저 벽을 넘어가지 마!” 푸코의 눈으로 본다면 규율은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미로는 감시와 통제의 장치다. 그 안에서 또 다시 규율을 만듦으로써 이중의 감금 장치가 채워지며 공간의 지배력은 더욱 강해진다. 자연은 사람이 쉽게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이러한 환경을 외경의 마음으로 대하게 되는데, 자신의 인지 능력이나 지식의 범위 밖에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소년들은 그들을 둘러싼 숲과 미로를 상반되게 인식한다. 숲은 통제되는 즐거운 공간이지만 미로는 파악할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소년들이 미로를 대하는 태도는 인간사 초기에 산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과거 사람들은 산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라고 생각하고, 숭앙의 대상이자 위험한 미지의 장소로 바라보았다. 소년들은 벗어나려고 갖은 시도를 했지만 벽에 부딪쳤고, 미로를 파헤치려 하면 괴물들이 징벌을 가한다. 이겨낼 수 없는 미로에 굴복하고 결국 숲에 적응하는 방법을 택했다. 미로는 올림포스와 같은 영산靈山이 되고 숲은 세속이 되는격이다. 환경에 대한 태도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외경의 대상이었던 자연의 원리를 알게 되자 위험 대처법도 찾아내었고, 자연스레 산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메이즈 러너』에서는 토머스가 그 실마리를 던져준다. 처음부터 남다르게 미로에 관심을 가진 그는 부상당한 러너를 구하기 위해 미로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면서 활로를 찾았다. 토머스는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실재의 세계로 소년들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미로의 전모를 알게 되었을 때, 치열했던 사투의 공간은 의외로 초라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공간이, 규율이 행동을 지배할 수 있다. 『메이즈 러너』는 미로라는 장치를 이용해 이를 잘 보여준다. 갇힌 소년들은 벽을 경계로 안에서는 자유롭다. 미로에 저항하지 않고 숲을 즐기면 안전이 보장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도 없다. 미로는 현대 사회의 과잉 노동의 현장으로 볼 수도 있는데, 저자는 생산과 소비의 굴레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을 은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로는 피로사회로 불리는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모습일 수 있고, 숲 또한 자본이 던져주는 ‘힐링’이라는 이름의 마취제일 수 있다. 『메이즈 러너』는 미로 속의 자유를 안주하는 현대 사회의 인간 군상으로 비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