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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자의 서재]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편집자의 서재에 쓸 책을 고민하다가 나의 서재를 확인했다. 독서 패턴을 알아보기 위함이랄까. 디자인과 관련해서는 형태와 도구에 대한 실험 또는 기술에 대한 관심에 따라 구매한 책들이 대부분이었고 2000년대 나온 책이 상당수였다. 고전으로 분류할 만한 건 찾기 어려웠다. 항상 새롭다는 것들 중에 이상하거나 특이한 것이 좋았고, 떠오르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작업과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 집중했다. 사들이는 책도 마찬가지였고, 대개 화려한 이미지가 가득했다. 두 달 전쯤 그달의 눈요기를 책임져줄 책을 찾고 있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나의 검색 습관에 따라 이런 저런 책을 추천했는데, 그날은 까만 바탕의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폰트로 제목만 달려 있는, 처음엔 ‘이게 뭔가 싶은’ 책을 추천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출판사 로고에 불과했지만, 『디자이너란 무엇인가』(노먼 포터, 최성민 역, 작업실유령, 2015)라는 질문을 던지며 아랫입술을 깨물게 했다. ‘그러게. 내가 좋아한다고는 하는데, 도대체 그게 뭐지’싶은 거다. 충격이었다. 노먼 포터Norman Potter가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논하는 그 독특한 방식은 그동안의 환상을 처참히 무너뜨렸다. 힘든 일이라는 건 질릴 만큼 들어왔지만, 그럼에도 디자이너가 된다는 것 자체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마치 10대 청소년이 아이돌에 갖는 환상처럼 말이다. 내지의 절반 이상을 실무에서의 디자인 노동 과정과 그 고뇌에 할애하고, 그 부분을 짙은 주황색 내지에 담아낸 책의 편집 방식부터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다.1 “디자인작업의 10%는 영감에 의존하고 나머지 90%는 고된 노동, 즉 일종의 예술적 업무행위로 이루어진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그렇다는 거지, 책의 형식과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넌 아무것도 모른다.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미친 짓임에도 이 책에 언급된 내용을 잘 해낼 수 있으면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 더 나은 디자인 교육(수습)의 기회를 찾아 나서야 한다. 찾아낸다 해도 넌 웬만하면 실패할 것이다.’ 자주 들어왔던 이야기 아닌가? 처음 이 책을 받아들면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한 책으로만 읽힐 수 있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눌 때처럼 가끔은 논점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튀기도 하지만, 결국엔 끊임없이 디자인의 사유와 산물에 숨은 (노동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나아가 디자인을 공부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단순히 도면 위의 스케치 아티스트가 아닌 실천적 디자인을 갈구하는 이들이 가져야 할 ‘직업적’ 소명을 열렬히 설명한다.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라고 말이다. 두 달간 거의 매일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이런 저런 생각을 끄적이고 밑줄을 그어대어 지저분해진 책을 다시 펼쳤다. 밑줄 친 부분은 “믿지 말아야 한다”, “~하기 어렵다”, “바람직하지 않다”, “착각이다”, “~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절대로 안된다”까지 상당수가 부정적인 서술어로 마무리 짓는 문장이다. 얼마 전 나를 가르쳤던 교수가 한 말이 오버랩 되었다. “어쩌면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들이 쉽게 갖게 되는 (변화를 이끌겠다는 식의) 영웅 심리를 버리지 못하거나 마음 한 구석에 숨겨 놓는 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쉽게 스스로를 포기할지 모른다.” 포터는 그런 영웅 심리를 끌어내리려고 한 것일까? 끊임없이 겸손의 태도를 갖길 바라며 학교에서 배운 건 디자인의 몇 가지 기본 사항을 확인한 데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 지난 1년 간, 타협과 양보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고백(?)’하는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를 만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그들이 설계하는 법’의 담당 에디터로 있으면서 이 연재를 ‘그들이 설계하는 법: 화려한 모습 편’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다. 기획 의도가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는 초년생 디자이너와 학생을 주요 독자층으로 한다’는 것이긴 하지만, 실패한 경우보다는 잘된 프로젝트나 남에게 보여주기에 좋은 경우를 보여주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던 건 아닌지. 또 주관적인 편집을 거친 이야기에 현실을 잘 모르는 목표 독자층은 글로는 표현될 수 없는 (90%의) 노동을 배제한 채, (10%의) 영감과 화려함만을 읽어내는 것은 아닌지. 지나친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질문’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60세를 훨씬 넘긴 어느 유명 디자인 스쿨의 교수를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두 시간의 인터뷰를 마무리하기에 앞서 이 책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공식적인 자리였음에도 결국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 그 갈피를 잡는데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던진 “디자이너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나도 모른다. 그럼에도 매일 스스로에게 묻는다”라고 짧게 답할 뿐이었다. 그때서야 ‘요약: 학생은 디자이너이다’라는 8장의 제목을 시작으로 조각난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는 듯했다.2 “우리를 기다려 주는 역할 따위는 없다. …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되묻는 … 학생이 확신할 수 있는 바가 하나 있다면 … 창의적 도전이 어떤 속성을 띨지는 닥쳐 보아야 알지, 예견할 수는 없다 … 단지 ‘근본 원리’를 바탕으로 적절한 결정을 내리려는 태도, 직업윤리에 관해 진솔하고 현실적인 태도를 스스로에게 촉구할 뿐이다.” 포터가 책의 첫 문장으로 “당신은 제도판 위의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라 조직하는 사람이다”라는 르 코르뷔지에의 말을 인용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본문에서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던 저 일련의 조각들을 어떤 순서로 읽느냐에 따라 실망과 좌절을 느끼기도 했으며, 희망과 도전의 실버라이닝silver lining(밝은 희망)을 찾아낼 수도 있었다. 포터와 그 ‘60대 교수’가 쉬운 답을 기대하지 말 것을 주지시키면서도 한 가지에는 분명한 답을 제시했다. ‘정신과 태도가 기술과 도구를 앞선다.’ 즉 유행을 타지 않고 행동의 중심이 되는 소명 의식과 직업적 윤리의식을 갖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읽어낸 걸까. 몇 날 며칠 이어진 야근에 지친 어느 인턴 사원은 실무를 전혀 경험해 보지 않은 이가 고작 디자인 고전 하나 읽고 내뱉는 ‘끄적임’에 불과한 외침을 향해 차가운 미소를 띠워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당신의 서재 또한 10%의 화려한 기술로만 가득 차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아무튼 저자가 강조한대로, 이 책에 담긴 그 어떤 권고나 처방도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현대 운동의 정신과 손을 맞잡고 싶다 해도, 그 정신이 그냥 찾아와 주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밖에 나가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 [시네마 스케이프] 암살 근대의 풍경
    “경성,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올 여름 대중적 성공을 거둔 영화 ‘암살’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주인공 안옥윤(전지현 분)은 경성 암살 작전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이 대사에서 경성은 커피라는 것을 마실 수 있는 곳, 즉 근대화된 도시를 의미한다. 그녀는 아기 때 유모의 품에 안긴 채 만주에 온 후 간도 학살을 목격하고 독립군의 명사수가 되었다. 그녀가 처음 접하게 될 경성의 낯선 근대 풍경은 영화에서 어떤모습일까. 1930년대의 경성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정치, 경제, 종교, 군사, 교육의 중추 기능을 집중시킨 도시다. 1940년 조선총독부의 외주로 만든 영화 ‘경성’은 경성의 하루를 담은 다큐멘터리로, 당시의 실제 풍경을 볼 수 있다. 새벽에 기차가 경성역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다큐멘터리에는 활기찬 일상과 화려한 본정의 밤거리가 담겨 있지만, 지배자의 시선으로 대상화한 경성 풍경이 주를 이룬다. 최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몇 편 발표되었지만 당시의 풍경을 엿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영화 ‘암살’은 1910년대의 손탁 호텔부터 영화 속 주요 배경인 1933년의 경성역, 미쓰코시 백화점과 선은전 광장, 명치정과 아네모네 카페, 서소문거리와 주유소를 비교적 세심하게 재현하고 있다. 남산에서 벌어지는 자동차 추격신사이로는 만리재와 경성역의 원경까지 볼 수 있다. 선전용 영화가 아니면 엽서나 사진 같이 박제된 이미지로만 접했던 근대 태동기의 풍경이 담겨 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고대의 유산, 물
    #57 로마 시민을 위한 물 - 기원전 4세기, 아콰에둑투스 에어컨은 물론 없고 선풍기도 잘 모르는 베를린에서 35도를 오가는 폭염이 2주일 이상 계속되고 있다. 더위에 멍해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 ‘물’이다. 조경사에서 물이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서구의 정원은 물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식물이 가장 중요했겠지만 물 없이 자랄 수 있는 식물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물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금껏 보아 온 드넓은 풍경 호수의 잔잔함이 아니라솟구치고 쏟아져 내리며 물보라를 뿌리는 시원함에 대한 이야기가 좋을 것이다. 오백 개 넘는 분수가 마구 솟구치는 빌라 데스테Villa d’Este가 떠오른다. 그러나 정원에 물을 정성스럽게 담아낸 것은 이미 고대부터 시작되지 않았던가. 잠시 고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다. 아득한 옛날, 정원의 역사가 시작된 곳은 하필 건조하고 더운 지역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물론이고 그리스와 로마 역시 더운 곳이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자연적인 오아시스에 만족하지 않고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산의 원천에서 물을 끌어다 마른 땅을 적셔 평야를 만들었고, 도시가 형성된 후부터는 고도의 관수 시스템을 완성했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파라다이스 정원이 가능했던 것도 이런 관수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 정원의 기원이 메소포타미아에 있고 메소포타미아 정원의 구조를 결정한 것이 관수 시스템이었으므로 서구 정원의 기하학이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해석도 있다.1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면적을 고루 적시려면 수로를 격자형으로 정연히 배치하는 것이 가장 합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원에 가장 먼저 수로가 등장했다. 더불어 수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샘 혹은 분수가 있었고 수로의 물이 모이는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연못의 물은 다시 지하나 지상의 수로로 빠져나가 정원 밖의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천 시스템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려면 정원 밖에도 수로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베를린처럼 땅만 조금 파면 물이 나오는 곳이라면 정원에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퍼 올렸을 것이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곳이라면 뒷산 골짜기에 졸졸 흐르는 계류를 끌어다 썼을 것이다. 그러나 사막에 도시를 세웠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참 많은 수고를 하여 물을 끌어다 대었으므로 그 덕에 엔지니어링이 남다르게 발달할 수 있었다. 기왕 수고하는 김에 돌을 반듯하게 깎아 수로를 만들어 보기 좋게 했으며 물이 흘러나오는 샘도 동물 모양이나 꽃 모양으로 아름답게 장식했다. 수압을 이용해 물을 역류시키는 기술도 터득했던 사람들이었기에 분수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상하수도 시스템이 농경 문화와 함께 발달했고 도시를 존재하게 했다. 흥미로운 것은 고대의 물 공급 시스템이 현재의 상하수도 시스템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 기술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리스로 전해지고 그리스에서 다시 로마로 전해지면서 극치를 이루었다. 아콰에둑투스aquaeductus2라고 불리는 로마의 물 공급 시스템은 가히 기적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며 로마 엔지니어링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지금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를 다니다 보면 계곡에 교량처럼 생긴 석조 구조물이 더러 남아있는데, 많은 이들이 이 교량을 아콰에둑투스라고 이해하고 있다(가르교 사진 참조). 그러나 아콰에둑투스는 본래 샘, 수로, 저수지 등을 포함한 물 공급 시스템 전체를 말한다. 펌프가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가장 높은 곳에서 시작해 낮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했다. 속도를 조절해야했으므로 근소한 경사(0.035~0.37%)를 주면서 수로를 연결했는데, 물을 보호하고 증발을 막기 위해 전 연장의 85%는 지하에 터널을 만들어 흐르게 했다. 다만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곳에는 교량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같으면 펌프를 써서 끌어올렸겠지만 당시의 역류 기술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치형으로 운치 있게 만든 것은 미학적 이유보다는 구조적 이유 때문이었다. 2층이나 3층으로 지은 것 역시 골짜기의 깊이, 즉 교량의 높이에 따라 기둥의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3 그 결과로 숨을 죽이게 하는 건축 미학이 탄생했다. 수로의 폭은 대개 1m 남짓, 깊이는 평균 1.5m 정도였으니 상당한 양의 물이 흘렀다. 산 위의 샘물을 우선 저수지에 모았다가 이를 수로로 흘려보냈으며 물이 도시에 도착하면 다시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하 탱크에 모았다. 말이 지하 탱크이지 그 규모나 축조 양식은 대형 성당을 방불케 했다. 그래서 이를 카스텔 룸, 즉 ‘성’이라고 불렀다. 이 카스텔 룸에서 다시 세 개의 용수로가 각각 갈라져 나갔다. 하나는 도시 곳곳에 설치된 공용 수도에 공급되었고, 그 다음 테르메라고 불리는 공중목욕탕에 공급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각 주택에 보내졌다. 이런 시스템이 처음 만들어진 때는 기원전 312년, 아직 공화정이던 시절이었다. 이후 인구가 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물의 수요도 증가했으므로여러 개의 아콰에둑투스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약 700년이 지난 서기 400년경에는 로마 시에만 11개의 시스템에 총 연장 504km의 수로가 연결되었다. 공중목욕탕이 11개소, 사설 스파가 856개소, 그리고 도시 전역에 1,352개의 공공 분수가 있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 가면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분수는 본래 장식용이 아니라 공공 수도 시설이었다. 여기서 종일 물이 졸졸 흘러 누구나 마시고 쓸 수 있었다. 주택 대부분에 별도의 수도가 연결되어 있었으나 서민 연립 주택의 경우 1층에만 수도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위층에 사는 사람들은 여기서 물을 길어다 썼다. 이렇게 하여 고대 로마인들은 매일 목욕을 하며 물을 펑펑 썼고 물 소비량으로 문화적 수준을 가늠했다. 당시 1인당 하루 물 소비량이 현재 유럽인들 소비량의 두 배 이상이었다.4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게르만족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게르만족에 속하는 고트족이었다. 서기 537년 로마를 포위하고 공략했던 고트족은 도시로 들어가는 모든 수로를 메우거나 파괴해 버렸다. 이후 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그들의 화려한 물 문화 역시 말라버렸다. 로마의 모든 문화와 문명은 멀리 비잔틴 제국으로 이사 갔고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는 서서히 퇴색해 갔다. 이후 바티칸에 교황청이 세워지면서 교황들이 아콰에둑투스를 일부 복원하긴 했지만 그때의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물론 아콰에둑투스는 로마 시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 곳곳은 물론 점령지에도 수로를 놓고 스파를 만들어 로마 제국의 위상을 높였다. 지금도 동으로는 터키, 서로는 영국, 북으로는 독일까지 아콰에둑투스와 로마의 분수, 테르메의 흔적이 수없이 남아 있다. 조경이나 건축을 하는 사람치고 아콰에둑투스의 높은 교량을 보고 가슴 뛰지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파리 시트로앵 공원의 디자이너들 역시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아콰에둑투스에서 영감을 받아 수로 시스템을 만들고 공원의 동쪽 경계로 삼았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취약한 도시, 회복탄력적인 도시
    취약한 도시 화재, 화산 활동, 산사태, 질병, 오염, 지진, 쓰나미, 홍수, 태풍, 폭염. 현대 사회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대표적인 열 가지 환경 재해다. 최근 발생한 국내의 메르스 사태부터 2012년 가을 초대형 허리케인 샌디Sandy로 인한 미국동부의 초토화,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 사회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도호쿠東北 대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 붕괴에 이르기까지 각종 재해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그림1). 특히 제한된 공간 안에 많은 사람과 자산이 밀집해 있는 도시에서는 한 번 재해가 발생하면 그 피해가 증폭되기 쉽고 이에 따른 트라우마도 깊다. 더욱이 개발이 완료된 도시를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덜 취약한 지역으로 도시의 일부를 옮기기 위해서는 보상과 이주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한 도시의 취약성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그림2). 여기서 ‘취약성vulnerability’이란 특정 재해 위협에 대해 한 사회가 대처하거나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위험성의 정도를 말한다. 이렇게 보면 취약성은 재해 자체의 규모나 지속 시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충격이나 스트레스에 대한 지역 사회의 민감도, 피해 후 정상 상태로 회복하는 속도와 역량, 과거의피해 경험을 기억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학습 능력, 그리고 재해와 관련된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관용과 사회적 시선까지도 총체적인 취약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잠재적 위험, 확률, 리스크 2013년 3월, 포항시 용흥동 주택가에서 작은 산불이 일어났다. 한 초등학교 뒷산에서 점화된 불씨는 강한 바람을 타고 주변 산림에 옮겨 붙었고 이후 많은 수의 학교와 주택이 밀집한 지역까지 4km 이상 이동하며 대형 산불로 번졌다. 진화를 위해 소방 인력 약 2,500명이 동원되었으나 그 피해는 엄청났다. 주택 50동 이상이 폐허로 변했고 주민1,500여 명이 대피해야 했다.1 용흥동 산불의 발생 과정을 재구성해봄으로써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재해의 여러 개념을 정리해 보자. 우선 도심지에서 산불은 왜 발생하는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누군가의 고의적인 또는 부주의한 발화다. 물론 자연 현상에 의해 불씨가 생길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용흥동에서는 한 중학생의 불장난이 대형 화재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발화가 도시 공간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주 불을 사용하는 외부 공간, 이를테면 주택지 인근에서 논밭두렁을 태우는 곳,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 빈번한 흡연이 이루어지는 공터가 잠재적으로 도심 산불의 원인을 제공한다. 이러한 행태와 장소 특성을 포괄하여 잠재적 위험hazard이라 부른다. 하지만 잠재적 위험이 늘 대규모 피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 상태의 산림과 달리 도심지에서는 발화 지점에 낙엽이나 건조한 잡초가 집중적으로 축적되어 있거나 그 주변에 목조 주택과 슬레이트 구조물처럼 불에 타기 쉬운 시설이 분포할 때, 그리고 건조한 날 발생한 불이 큰 산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요소가 모여 발생 확률probability을 결정한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 위험이 높은 발생 확률을 만나 대형 인명·재산 피해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즉 원인이 결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방아쇠가 필요하다. 용흥동에서는 산불이 확산되는 경로를 따라 가연성 물질이 연속적으로 있었다. 그리고 다수의 주택과 학교 시설이 경로를 따라 위치해 있었고, 특히 1980년대 이후 야산을 따라 무허가 주택이 집중적으로 지어지면서 사회적 약자와 노인 계층이 거주하기 시작했다.3 산불발생지 주변에는 불법 노상 주차가 협소한 골목을 막고 있어 소방차의 신속한 접근과 진화 작업이 어려웠다. 이렇게 당겨진 방아쇠가 일으킨 결과인 대형 산불과 관련 피해를 리스크risk라고 부른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그들이 설계하는 법] 같이 하기
    이번 마지막 글에서는 여성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던 내가 디자인으로 진로를 바꾼 후 그 초기부터 현재까지 디자인 프로젝트는 물론 연구와 강의까지 모든 활동을 함께 해 온 건축가 파트너이자 남편인 매튜 줄Matthew Jull과의 대화를 담고자 한다. 설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공동 작업의 과정과 팀의 시너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작은 회사의 특성상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팀 자체가 바뀔 때가 많고 학교에서 직접 가르치는 학생들도 많이 참여시키다보니 그렇게 만들어진 팀원간의 궁합까지 매번 다른 것이 사실이다. ‘같이 하기’는 쿠토노톡KUTONOTUK과 북극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ADG)의 공동 대표로서 나와 매튜 줄이 디자인과 연구를 병행하는 방법과 방향에 대한 이야기다. 영어대화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뉘앙스가 조금 달라지기도 했지만, 되도록 평소 대화할 때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조리나(이하 조): 우리 둘만의 돋보이는 공통점은 일종의 아웃사이더였던 게 아닐까? 지금은 디자이너로 인정받으며 활동하고 있지만, 다른 대학원생들과 비교하면 디자인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디자인 비전공자들이었잖아. 결국 대학원에서 각각 건축과 조경 학위를 수여받긴 했지만 디자인은 우리에게 두번째 길이었어. 너는 물리학 박사를 마치고 연구원 생활까지 하다가 건축으로 진로를 바꾼 경우고, 나 역시 정치학과 여성학을 공부하고 NGO에서 일하다가 조경의 길을 선택한 거잖아. 학부 때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점이 현재 우리 설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해? 매튜 줄(이하 줄): 글쎄. 하나 확실한 건 주변에 아는 사람이 학부 전공으로 건축이나 조경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러지 않도록 말리겠다는 거야. 우리의 배경이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자인은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 특히 지금 시대의 건축가나 조경가는 다방면에 걸쳐 많이 알아야 하는 제너럴리스트임이 분명한데다 서로 다른 가치와 사고 방법을 연결하고 종합할 수 있는 지혜를 요구하잖아. 물론 도시의 물 순환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다거나 공공 건축을 위주로 설계를 진행했다거나 구체적인 전문 분야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조: 하지만 우리의 그런 배경이 디자인에 매번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것은 아니잖아. 줄: 그게 아이러니한데,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아. 하지만 공간 또는 디자인을 정의하고 해석하는 방향에서 묻어나오는 것 같아. 우리가 북극 디자인 그룹을 만든 이유 중의 하나도 디자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과 디자인을 이야기해 보기 위해서잖아? 조: 뭐.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난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개념 중의 하나가 세상의 모든 것이 문화적 구성체cultural construct라는 점이었던 것 같아. ‘태생적 운명’이라는 개념에 도전하면서 무엇이 되었든 인간 사회에서는 역시 각자 생각하고 말하기 나름이라고 주장하는 거지. 진리도 언젠가는 변할 문화적 사상이라는 얘기잖아. 조경을 하면서 특히 ‘자연’에 관한 정의를 내릴 때, 이런 여성학의 배경이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 ‘자연’ 또한 언제 어디서나 색다르게 제조manufacture될 수 있는 문화적인 매체라는 거지. 또 한 시대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달픈지 NGO에서 일하면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꾼다’거나 ‘바꾸겠어!’ 같은 슬로건을 보면 오히려 사기가 떨어져. 안 믿겨지더라고. (웃음) 조리나는 1982년 생으로, 미국 웰슬리 대학교(Wellesley College)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미국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츠(Michael Van ValkenburghAssociates)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맥스완 아키텍트 + 어바니스트(Maxwan Architects + Urbanists)에서 다양한 도시설계, 조경,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Virginia) 조경건축학과 대학원 강사로 있으며, 하버드 GSD에서 초청강사로 가르친 바 있다. 건축가인 매튜 줄(Matthew Jull)과 쿠토노톡(KUTONOTUK)의 공동 대표로서 헬싱키 구겐하임(HelsinkiGuggenheim)과 헬싱키 공공 도서관(Helsinki Public Library),MoMA PS1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MoMA PS1 Young ArchitectsProgram), 유로판(Europan) 등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수상한바 있다. 또한 북극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의 대표로서 미국 워싱턴 D.C.의 정책 연구 기관과 협력하여 북극 도시와 극한 랜드스케이프(extreme landscapes)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www.kutonotuk.com | www.arcticdesigngroup.org 매튜 줄(Matthew Jull)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지구물리학(Theoretical Geophysics)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파리의 지구물리학 연구소(Institut de Physique du Globe)와 미국의 우즈 홀 해양 연구소(Woods Hole Oceanographic Institution)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하버드 GSD에서 건축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SOM(Skidmore, Owings & Merrill LLP), 스티븐 홀 아키텍트(Steven Holl Architects), MIT 센서블 시티 랩(SENSEable CityLab)에서 건축과 도시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2008~2012년에는 네덜란드 OMA/Rem Koolhaas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건축학과 조교수(Assistant Professor)이자 조리나와 쿠토노톡 및 북극 디자인 그룹의 공동 대표로 있다. www.kutonotuk.com | www.arcticdesigngroup.org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로리 올린 Beyond the Limits of Landscape Architecture, and into the Heart of Landscape Architecture: Laurie Olin
    조경가 로리 올린은 최근 조지 루카스 등과 함께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예술훈장National Medal of Arts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미국 정부가 예술가에게 주는 가장 영예로운 상이다. 역대에 국가예술훈장을 받은 조경가는 단 세 명, 댄 카일리, 로렌스 핼프린, 그리고 이안 맥하그가 있다. 조지 루카스는 누구나 알지만 일반인 중에 로리 올린을 들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조경가의 사회적 기여와 개인적 성취가 현대 문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영화감독과 나란히 거론되었다는 점에서 조경계에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만큼 올린은 단지 훌륭한 조경 디자인을 넘어, 대중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사회의 문화적 토대 자체를 구축해 온 인물이다. 브라이언트 파크, 콜럼버스 서클, 배터리 파크 시티, 게티 센터, 워싱턴 모뉴먼트 등 기념비적인 작업을 해 왔으며, 50여 년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가르쳤고 하버드 대학교와 칭화 대학교 조경학과의 학과장을 역임하는 등 실무와 교육의 병행을 통해 현재 세계 조경계를 이끌고 있는 수많은 중요한 디자이너를 길러냈다. 어떤 평론가들은 올린을 옴스테드 이후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조경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관심과 주제는 대부분 미국 도시의 이야기지만, 반세기에 걸친 통찰과 지혜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과 문화적 가치에 기반한 것이기에 우리 도시에도 큰 교훈을 준다. 개발과 산업, 성장의 시대를 쉼 없이 달려 온 한국 사회도 이제 저성장과 청년 실업, 다양성과 복지를 화두로 국면을 전환하고 있고 조경 및 관련 산업 또한 여기에 발맞추어 변하고 혁신해야 함을 누구나 느끼고 있다. 로리 올린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미국사회가 이미 1970~1980년대를 거치며 혹독히 겪은 사회적 혼란과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관찰할 수 있다. Q. 알래스카 출신이라는 개인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해 달라. A. 대학에서는 원래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어릴 적 나의 눈으로 봤을 때 알래스카에서 유일하게 무언가를 만드는 직업은 토목 엔지니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한두 해 다녀보니 토목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예술적이지 않았다. 이미 학기가 지나고 있었고 장학금도 받고 있었지만 뭔가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건축을 해보자는 결심이었다. 본토에 와서 고향과 가장 가깝고 가장 비용이 적게 들어 택한 학교가 워싱턴 주립대학교였다. 당시 알래스카가 주로 승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워싱턴 주, 오레곤 주, 아이다호 주는 알래스카 학생에게 주민 수준의 등록금 혜택을 주고 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학비 보조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매년 여름마다 다음 학기를 위한 등록금을 벌어야 했다. 알래스카 도로건설국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결과적으로 워싱턴에서 4년을 보낸 것은 참으로행운이었다. 당시 건축학부에서 도시계획과 조경학과를 신설했기 때문이다. 명문 학교인 하버드, 버클리, 미시간 등을 모델로 삼으려 했다. 또 하나의 행운은 보자르의 전통 속에서 훈련 받은 노교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어 워싱턴 주립 대학교는 역사적인 안목을 갖춘디자인을 교육하는 데 매우 뛰어났다는 점이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혹독하게 드로잉 연습을 시켰다. 4년 내내 거의 매일같이 그리고 또 그렸다. 2학년 때 워싱턴대학교는 리차드 하그Richard Haag를 영입해 조경학과를 신설했다. 그가 커리큘럼을 짜고 이사회의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조경학과에 속한 학생들이 없었기때문에 우리 학년의 스튜디오를 담당하게 되었다. 나는 일 년 동안 리차드 하그 스타일의 이론과 역사 수업에 푹 빠졌고 그것은 정말 좋았다. 그는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스탠 화이트Stan White의 제자였는데 화이트는 옴스테드의 사무실 출신이었다. 히데오 사사키 등이 그의 동료였다. 리차드 하그는 대단한 선생이었다. 그것이 세 번째 행운이다. 리차드는 사무실을 열었는데 학생 중 드로잉에 능한 몇 명을 뽑았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실무와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나에게 무척 자연스런 일이었다. 졸업 후엔 캘리포니아에서 육군에 복무했고 시애틀의 한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리차드 하그 사무실과 자주 협업했고 나의 학교 친구들이 리차드의 직원이었기에 건축과 조경의 협업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1964년도에 나는 뉴욕으로 이주해 당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중 한 사람이었던 에드워드 라라비 반스Edward Larrabee Barnes의 회사에서 건축가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이미 알래스카에서 일하면서 지형을 만들고 도로를 설계하는 데 익숙했고 조경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 캠퍼스 등의 대규모 마스터플랜 등을 집중적으로 맡게 됐다. 때는 1960년대였다. 당시의 상당수 젊은이처럼 나 또한 사회적으로 공인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여행을 시작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오두막에서 생활하고 돌아다니다가 돈이 떨어지면 이런 저런 일을 하는 식이었다. 결국 시애틀로 돌아왔는데 이제 정말 그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많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유럽을 보고 싶어 장학금을 신청했다. 풀브라이트, 롬 프라이즈Rome Prize, 구겐하임 재단에 지원했다. 어느 것 하나라도 합격하게 되면 고향을 벗어날 이유가 되기 때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셋 다 합격하게 되었다. 결국 구겐하임과 로마의 미국 재단을 설득해 양쪽의 프로그램을 모두 누리는 것으로 조정했다.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 기반을 두고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해 왔다.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고, 주요 작품이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 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이며, 저서로 『시티오브뉴욕』(공저)이 있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서 조경 설계를 연구하며 학생들이만드는 것의 기쁨을 알아가도록 돕고 있다.
  • [재료와 디테일] 화분, 장식을 넘어 생활로
    아침 출근길에 버스를 타기 전에 늘 집 앞 식당을 거치곤 한다. 맛이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곳이었지만 글의 재료를 찾기 위해 고민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식당 앞 풍경은 훌륭한 영감을 주었다. 상도동 급경사지의 지형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콘크리트 옹벽 앞에서 홀로 외롭게 그러나 당당하게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작은 화분과 꽃은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흙을 담을 땅조차 부족한 곳에 억지로 공간을 만들어 식물을 심는다고 잘 자라줄지도 의문이고, 이런 경우엔 관리의 어려움도 뒤따른다. 큰 나무가 필요하지 않다면 이렇게 작은 화분을 이용하는 것이 녹시율도 높이고 경관용으로도 손색이 없는 좋은 방법이란걸 식당 주인의 지혜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주위에 화분은 흔하다. 관리가 용이하면서 실내분위기를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좋은 인테리어 소재이기도 하다. 도심의 흔한 찻집에서도 실내에 녹색을 들이려는 노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큰 나무에서 작은 나무 또는 인조목까지 화분을 채우는 식물을 다양화할 뿐만 아니라, 화분을 바닥에 그냥 내려놓거나 벽이나 테라스 난간에 걸어두는 등 활용법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화분의 활용은 실내에서 흙으로 식물의 생육 조건을 만드는 것이 힘들다는 걸 방증하기도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유지 관리의 어려움에 있을 것이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공간 공감] 박수근미술관
    박수근미술관이 그의 고향 강원도 양구에 문을 연 지 14년이 지났다. 대표적인 작가 중심 미술관으로 자리 잡은 이 미술관은 박수근기념관, 현대미술관, 박수근파빌리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 건물 모두 건축가 이종호가 설계했다. 미술관 건립 후 뜻있는 여러 사람들이 박수근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한국 근현대 미술 작품을 기증하여 미술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낮은 언덕에 둘러싸여 있는 세 전시관은 각각의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주변 풍광을 거스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특히 기념관과 파빌리온은 박수근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인 ‘마티에르’를 건축적으로 해석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종호는 설계 노트에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박수근의 작업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드는 일련의 전개 과정이 중요하다. 대지에 미술관을 새겨 나갔다. 박수근의 그림은 그려진 것이 아니라 새겨진 것이다.” 미술관의 외벽으로 화강석 깬돌을 성곽처럼 쌓았다. 여기에서 박수근 고유의 무채색의 거친 마티에르를 조우할 수 있다. 이 석축은 건축 외벽이라기보다는 성곽처럼 보이며 박수근 그림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관람객은 이 석축을 강렬하게 경험하며 미술관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누구든 박수근 회화의 이미지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미술관 내부에 들어서면 박수근의 그림들이 생각보다 작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크기가 작다고 해서 결코 감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림의 소박함과 진실함에 감동받게 되고 그런 감동이 건축적 체험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기념관의 지붕 위를 걸어 박수근파빌리온에 이르는 길은 성곽에 닿아 있는 기다란 산기슭을 따라 나 있다.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 [칼럼] 노들섬에 그리는 꿈 Column: A Dream on the Nodeul Island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사회를 꿈꾸는 노들섬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아키토피아의 실험’은 전쟁 이후 한국 사회가 꿈꿔온 건축·도시의 이상향을 잘 보여준다. 전시에 소개된 세운상가, 파주출판도시, 파주 헤이리아트밸리, 판교 신도시 등은 더 나은 곳을 꿈꾸는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욕망이 투사된 장소들이다. 이들 장소에서 건축가와 정치인은 국가 개발의 이상을 탐색해 보았고(세운상가), 코디네이터가 된 건축가는 이상적인 문화 공동체를 실험해 보았다(파주출판도시). 한편 중산층의 개별 욕망이 집적된 최근의 판교 신도시는 국가 주도의 유토피아가 개인적 유토피아로 옮아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난 6월 10일 공고되어 진행 중인 ‘노들꿈섬 공모전’ 또한 이처럼 지금보다 더 나은 장소를 그리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한때 중지도中之島라 불리고 시민들이 강수욕을 즐겼던 곳, 지금은 백로(鷺)가 노닐던 징검돌(梁)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노들섬에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사회의 이상을 구현해 보겠다는 것이다. 이 공모전의 MP 서현 교수(한양대학교 건축학과)가 공모 지침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그것은 조선 개국 초기 우리 선조가 내다보았던 도시 천 년의 꿈과 희망의 그림이며 여전히 ‘서울’이 꿈꿔야 할 이상이다. 한강예술섬이 노들꿈섬이 되기까지 노들섬이 우리의 꿈을 그려낼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에서 ‘노들꿈섬’이란 이름을 얻고 공모전을 시행하게 된 배경에는 이 섬을 기념비적 문화 장소로 탈바꿈하려는 거듭된 시행착오가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2005년의 문화 단지 조성 계획은 설계비 과다 요구 등으로 무산되었고, 2008년 재추진된 한강예술섬 조성 사업 또한 지나친 사업비로 찬·반 논란만 지속해 오다가 2012년 최종 보류된 바 있다. 이후 이 섬은 사업 장기 보류와 함께 텃밭으로 임시 활용되어 왔다.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매력적인 장소야말로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공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에 2012년 서울시는 이 섬의 활용 방안에 대한 논의를 재개했고, 2013년에는 전문가 의견을 조사하여 “오페라하우스 건립은 반대하지만 섬 자체는 잠재적 가치가 크므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활용 방법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노들섬 포럼’(2013년 8월)을 필두로 시민토론회, 워크숍 등 시민·전문가들이 함께하는 다양한 논의가 지속되었고, 사진 공모전, 학생 디자인 캠프, 온라인 시민 투표, 전문가 아이디어 스케치, 시민 아이디어 공모 등의 참여 프로그램이 노들섬의 새로운 활용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방편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이로써 노들섬의 조성 방향은 크게 두 가지의 가치로 수렴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시민 모두가 언제나 함께 가꾸고 즐기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단계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획·운영 계획 선행 후 공간·시설 계획을 추진하는 단계적 공모 방식 노들꿈섬 공모의 지침은 공모전 주제어를 ‘시민’과 ‘역사’로 제시하고 있다. 즉 시민의 참여로 완성되는 섬, 적정한 규모로 시작하여 시민의 경험과 기억이 적층되는 섬을 지향한다(노들꿈섬 조성 사업은 2015년 시나리오 플랜, 2017년 1단계 완성, 2037년 최종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 따라 공모전 형식 또한 기존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번 공모전이 ‘기획·운영 중심의 단계적 공모 방식’을 통해 섬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기획안부터 운영 전략, 전략에 최적화된 공간 계획, 그리고 탁월한 최초 운영자 모두를 선정하게 된 것은 필연적이다. 서울시가 총 3차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는 노들꿈섬 공모 방식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참신하고 유연한 아이디어를 다양하게 받아 다수의 팀을 선정하는 1차 운영구상(기획·운영안) 공모단계를 마치면, 선정된 팀들은 2차 운영 계획·시설구상 공모에서 실현가능성이 담보된 운영계획서와 공간 및 시설에 대한 대략 구상안을 겨루게 된다. 이 2차 공모를 통해 운영자와 운영계획안이 최종선정되면, 선정된 안을 기반으로 시설 설계 지침을 마련하고 이 안에 따라 3차 공간·시설 조성 공모를 별도 추진한다. 이것은 건축, 조경, 도시 전문가가 참여하여 진행하는 전통적인 설계공모 형식이다. 이렇듯 대규모 공공 공간의 기획과 운영을 최초 제안자가 책임지고 맡는 것은 전례 없는 시도로, 꼭 필요한 시설을 점진적으로 완성해 나감으로써 과도한 재정 부담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시설 조성 후에는 공공의 운영비 보조 없이 자체 수익으로 운영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의의를 갖는다. 한수의 비어있는 섬에 그리는 소통과 화해의 공간 그런데 왜 하필 노들섬일까? 접근성이 좋지 않아 그저 멀리 바라보며 스쳐 지나가던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 삶 가까이 끌어오려는 시도, 주변과 동떨어져 있어서 오히려 선도적 사업 방식을 적용하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이점 등은 이 질문의 충분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신영복의 글씨 ‘서울’의 방서傍書 ‘북악무심오천년北岳無心五天年 한수유정칠백리漢水有情七百里’에서 조금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작가는 해설에서 “북악은 왕조를 상징하고 한수는 민초를 상징한다. 북악은 5천 년 동안 백성들의 고통에 무심하였지만 한수는 민초들의 애환을 싣고 700리 유정하게 흐르고 있다”고 쓴 바 있고, 이후 책을 통해 “북악이 권력의 상징이라면 멀리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한강이야말로우리가 회복해야 할 소통과 화해의 상징”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1 물론 이것은 시정市政이 지향할 바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겠지만, 이로써 함께 나누고 즐기면서 소통하는 공간을 한수의 비어있는 섬에 구현하려는 시도가 전혀 맥락 없어 보이지 않는다. 이 새로운 방식의 공모는 지난 7월 31일 1차 운영구상 공모 참가 접수를 마감하고 작품 접수를 기다리고 있다. 사례 없는 첫 시도이니만큼 리스크가 전혀 없진 않을 테지만, 그동안 전문가들과 서울시 공무원들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부단히 애써 온 결과가 한강의 작은 섬에 새로운 장소적 의미와 시민이 공유할 수 있는 미래가치로 드러나길 기대해 본다. 그래서 과정과 결과 모든 것이 이 시대의 이상향이 되기를. 정귀원은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서울건축에서 건축 실무를 익혔다. 『공간(SPACE)』, 『건축인 포아(poar)』 등의 건축 전문지를 거쳐 현재 건축리포트 『와이드(와이드AR)』 편집장으로 한국의 건축과 도시를 폭넓게 바라보고 있다.
  • [에디토리얼] 빅데이터 인문학 Editorial: Big Data as a Lens on Human Culture
    가을을 여는 첫 페이지다. 산들바람 같은 글감이 없을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9월호를 마감하고 있는 지금은 아직 한여름 폭염의 절정이다. 청량한 가을 맞이 에디토리얼을 쓰기에는 더워도, 너무, 덥다. 독자 여러분은 숨 막히는 무더위를 무엇으로 이겨내셨는지. 부지런하다면 이번 호 특집으로 소개하는 ‘경의선숲길’이라도 거닐며 여름밤의 후끈한 기운을 즐기겠지만, 밖에 나가 몸 쓰기를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나에겐 가만히 앉거나 누워 뒹굴며 닥치는 대로 책 읽기가 최선의 피서 방법이다. 아니 책장 넘기기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며칠째 산만한 잡식성 독서를 이어가다 연초에 샀으나 묵혀두었던 노란색 표지의 책 한 권에서 모처럼 몰입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다. 수학, 진화생물학, 언어학, 컴퓨팅을 넘나드는 젊은 과학자 에레즈 에이든Erez Aiden과 장바티스트 미셸Jean-BaptisteMichel이 지은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사계절, 2015). 『빅데이터 인문학』은 “인문학이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의 혁명적 전환을 제안”하며 두 저자가 개발한 프로그램인 ‘엔그램 뷰어Ngram Viewer’에 대한 책이다. 빅데이터는 이제 낯설지 않은 용어다. 현재 보통 사람의 데이터 발자국, 즉 전 세계적으로 한 사람이 연간 만들어내는 데이터의 양은 거의 1테라바이트에 가깝다고 한다. 이것은 약 8조 개의 예-아니오 질문(1비트)과 맞먹는 양이다. 빅데이터는 더 커지고, 더 커지고, 더 커지는 중이다. 단순히 정보량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 빅데이터는 이전 방법으로는 ‘다루기에 너무 크다too big to handle’는 개념에서 나온 말이다. 두 저자는 넘쳐나는 데이터, 즉 디지털 지문을 분석하여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볼 수 있는 렌즈를 고안했다.“인간 문화의 역사적 변화를 관찰하는 새로운 도구”임을 자처하는 ‘엔그램 뷰어’는 검색창에 특정 단어를 입력하면 단1초 만에 800만 권의 책을 검색해 그 단어가 지난 500년간 사용된 빈도의 추이를 그래프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즉 어떤 단어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책에 매해 몇 회 등장했는지 그 결과를 빈도로 변환시켜 시각화해서 알려주는 놀라운 도구다. 쉼표를 사용해 여러 단어를 함께 입력하면 그 단어들의 사용 빈도를 동시에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언어는 인간의 생각과 욕망을 대변하고, 언어를 집적한 기록이 책이다. 엔그램 뷰어에 쓰인 800만 권의 책은 2004년부터 추진되고 있는 ‘구글 북스’ 프로젝트에서 추려낸 것이다. 구글은 이 세계의 모든 책을 디지털화한다고 선언한 후 지구상에 존재하는 1억 3000만 권 가운데 3000만 권 이상의 책을 스캔하여 디지털 텍스트로 만들었고, 2020년이면 이 거대 프로젝트가 완결될 전망이다. 에이든과 미셸은 이 방대한 자료를 1초 만에 읽어주는 독서왕 로봇을 만들어낸 셈이다. 만약 인간이 밥을 먹거나 잠을 자기 위해 중단하는 일 없이 분당 200단어씩 읽는다면 총 1만 2000년이 걸릴 분량을 순식간에 무료로 읽어준다. 충분한 설명이 됐는지 모르겠다. 무협지 이상으로 재미있지만 그래도 책 읽기가 번거롭다면 지금 바로 웹 브라우저 주소창에 books.google.com/ngrams를 쳐보시길 권한다. 직사각형 검색창에 관심 있는 어떤 단어를 넣고 엔터키를 누르기만 하면 엔그램 뷰어의 놀라움을 실감할 수 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landscape를 넣어보실 것 같다. 언제부터 경관이라는 단어가 책에 등장했는지, 어느 시기에 이 단어의 사용이 급증했는지, 지금은 어떤지, 그 빈도의 추이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그래프가 뜬다. 랜드스케이프 가드너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를 비교해 보는 분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쉼표를 사이에 두고 landscape gardener와 landscape architect를 넣으면, 전자는 1770년대에 처음 등장하고 후자는 1850년대에 처음 쓰이는데 1910년대를 기점으로 둘의 사용 빈도가 완전히 역전됨을 쉽게 알 수 있다. 엔그램 뷰어에 따르면 내가 태어난 1968년부터 ‘커피’가 ‘차’를 앞질렀다. 도넛의 철자가 doughnut에서 donut으로 변하기 시작한 건 던킨도너츠Dunkin’ Donuts가 창립된 1950년대부터라고 한다. 지난 2세기 동안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물론 여기서 ‘유명한’은 책에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했다는 뜻이다― 사람 열 명은 히틀러, 마르크스, 프로이트, 레이건, 스탈린, 레닌, 아이젠하워, 찰스 디킨스, 무솔리니, 바그너 순이다. 일주일째 나는 이 강력한 장난감에 별의별 단어를 다 입력해 보고 있다. 당연히 19금 단어들도 넣어 본다. 조경사 연구에 뭔가 단서를 얻을까 싶어 18세기 조경가들의 이름을쳐 본다. 그냥 이유 없이 이안 맥하그와 피터 워커를 비교해 본다. 환경미학과 환경윤리학은 환경철학의 부분 집합이라는 게 교과서의 설명이지만, 입력해 보니 환경윤리학의 출현 빈도가 환경철학의 세 배 이상이다. 한여름 무더위는 물론 소중한 점심시간도 잊게 해주는 중독성 강한 장난감이다. 데이터 세트를 다운받으면(books.google.com /ngrams/datasets) 시각화된 그래프를 통해 대강의 감을 잡는 것을 넘어 상세한 통계 분석도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엔그램 뷰어에 대한 폭발적 반응에 이렇게 능청을 떤다. “우리는 이 시간 집어먹는 괴물을 만든 데 대해 모든 이에게 사과하고 싶다.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시간을 허비하도록 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의도가 아니었다. 방법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생산성 저하로 야기된 모든 손해를 원상복구하고 싶다.” 엔그램 뷰어는 누구나 가지고 놀 수 있는 빅데이터 장난감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저자들이 “컬처로믹스culturomics”라고 말하듯, 그 목표는“빅데이터를 통해 언어, 개념, 문화의 진화를 탐구하는 인문학”이다. 물론 우리가 인문학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적확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이 피서용 장난감은 빅데이터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원제는 ‘Uncharted’, 말 그대로 ‘전인미답’이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