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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와 디테일] 보이는 물과 보이지 않는 물
조경사에서 접하는 이집트 정원의 장방형 연못, 이탈리아 빌라 정원의 노단식 분천, 프랑스의 기하학적 수로 등 인류 문명과 함께 한 수많은 물의 모습은 애초부터 ‘보이는 물’1이었을까? 아니면 자연이 만든 ‘보이지 않는 물’2일까? 경관용 꽃과 나무를 가꾸고 물고기를 기를 수 있도록 조성한 인공적 수경 공간이었을까? 아니면 농사에 필요한 물을 자연적으로 공급하고 흘려보내기 위한 기능적 수로일 뿐인가? 아마도 이 두 가지는 굳이 분리할 필요가 없는 합목적의 결과물일 것이다.
스테이트타워 남산, 서울시 중구 회현동2가에 있는 이오피스 빌딩의 외부 공간에서 ‘보이는 물’과 ‘보이지 않는 물’을 살펴보자. 공개 공지인 이곳은 정방형 매스와 유리 파사드의 단순한 건축과 그에 걸맞은 단정한 외부 공간으로 예사롭지 않은 수 공간 디테일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물이 기능에 따라 하나는 잘 보이는 곳에, 다른 하나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곳에서 공존한다. 습관적으로 ‘보이지 않는 물’은 뚜껑을 덮어 가리고 ‘보이는 물’은 치장하기 바쁜데 둘 다 여름 한 철 바삐 기능할 뿐 겨울만 되면 하릴없이 건조할 따름이다. 이 두가지 물은 분리할 이유가 별로 없다. 화강석 뚜껑(땅에 파묻힌 U형 측구의 덮개)을 열어 버리고, 거울못의 모서리(수조 마감부)를 잘라 측구 수로관 쪽으로 길만 터주면, ‘보이지 않는 물’과 ‘보이는 물’이 동시에 기능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그림1).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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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합천영상테마파크
이번 달의 대상지는 합천영상테마파크다. 천만 흥행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촬영할 목적으로 조성된 곳으로, 이후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쓰이고 있다. ‘공간 공감’은 주로 외부공간을 설계적 언어로 풀이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질적 관점보다는 독특한 공간 성격에 대한 단상을 모아보았다.
영화 세트장은 기본적으로 내부 지향적이다. 이 공간안에 들어서면 바깥 세상을 잊고 오로지 기획자가 준비한 주제에만 몰입하게 된다. 차경에 익숙한 조경가에게는 당황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외부 경관의 간섭을 찾아볼 수 없는 위요된 공간 속의 도시는 확연히 무대로서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방문객들은 이 페이크fake의 경관과 디테일에 몰입할수록 공간에 빠져드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오래된 건축물의 파사드, 간판, 전봇대, 벽보, 낡은 가로등에 이르기까지 특정 시대를 재현하기 위해 신경 쓴 요소들이 즐비하다. 이러한 페이크의 소품은 영상물의 시대 고증과 무대 미술 수준을 드러내며, 동시에 방문객에게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장치가 된다. 국립민속박물관 내의 추억의 거리와 유사한 전시 콘셉트라고 할 수 있다. 몰입과 페이크의 경관 외에도 이곳은 시간과 생활의 축적에 의한 장소성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연출된 1960~70년대 풍경이 향수를 자극하지만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는 공간이기에 공허한 느낌마저 전해진다.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배경이지만 실제 풍경에선 그러한 느낌을 가질 수 없는, 확실히 2D를 위한 공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특정 드라마나 영화에 의해 부여되었던 장소성이 약화된다고도 할 수 있다. 새로운 장소성은 또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 의해서 충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계속 촬영 장소로 활용되면 장소의 생명력이 유지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폐허가 되기 십상이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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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발의 소리 없는 총성
엔씨소프트 R&D 센터를 이야기하다
동갑내기 조경설계사무소 소장 두 분을 한 테이블에 모셨다. 둘은 같은 시기에 조경학과를 다녔고, 우연이지만 같은 해(2005년)에 오피스를 설립했다. 그리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조경 교육을 받았고, 설계 실무를 익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디자인 오피스를 몇 개월 차이로 오픈했다. 섭외가 끝난 후 맞장구만 난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지만, 기우였다. 비슷한 관점에서 동어반복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예상은 다행히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둘은 화법도 상이하다. 고스란히 옮겨야 할까, 조금이라도 정제된 표현으로 (속칭) 마사지를 해야 할까, 고민이 컸다. 이어지는 대담 내용은 그 고심의 어정쩡한 결과물이다. 엔씨소프트 R&D 센터(이하 엔씨 사옥)에서 오전 11시에 만난 우리는 그날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게다가 둘은 에디터가 떠난 이후에도 뭔가를 정산(?)해야 한다면서 만남을 이어갔다. 생뚱맞은 제목인 ‘다섯 발의 총성’은 오형석 소장의 코멘트에서 따왔다. 조각 미남의 대명사인 브래드 피트가 ‘머니볼’이란 영화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머리에 한 방을 쏠래? 가슴에 다섯 방을 쏠래” 때로는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였다. 비평이든 비판이든 조언이든, 뭔가 이야기를 거들려고 나왔다면 솔직히 서로 느낀 점을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다짐으로도 읽혔다. 오소장은 원래 머리에 딱 한 발만 쏘겠다는 마음으로 나왔다고 했다. 모질게 마음먹고….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대화를 끝까지 읽다보면 왜 ‘가슴에 다섯 발’로 타깃이 바뀌었는지 느껴질 것이다. 무엇이든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니까!
하나, 빗나간 불발탄
안타깝게 (혹은 다행히) 첫 번째 총알은 과녁을 빗나갔다. 불꽃 튀는 접전 없이 둘은 쉽게 의견 일치를 보았다. 지하 1층에 자리 잡은 피트니스 센터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은 선큰 가든의 색다른 시도에 대해서만큼은 이견이 없었다. 박준서 소장은 건축 설계가 계속 바뀌는 과정에서 “왜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힘든 공간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이라는 부연 설명을 했다. 사진으로만 보면 완벽한 실내 공간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외기에 노출된 곳이다. 문을 여는 순간, 세찬 바람이 먼저 다가와 인사하는 곳이다.
오형석(이하 오): 엔씨 사옥은 시작 단계부터 박준서 소장에게 이야기를 지겹게 많이 들었다. (웃음) 그런 과정을 감안하고 보면 정말 고생을 많이 한 점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얼마나 큰 애착을 갖고 있는지도 절절히 느껴진다. 그런데, 디자인 코드는 확실히 나와 다르다. 둘러보고 나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식물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지하 1층 피트니스 센터의 선큰 가든이다. 내가 흔히 ‘조경가들의 착한 감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조경 설계를 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연을 최대한 끌어들이려고 한다. 이용자들이 조금이라도 생활 공간 가까이에서 쾌적한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해주려고 골몰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생각이 조금 다르다. 조경가라고 해서, 자연을 무기로 내세운 디자인만 해야 할까?
당연히 그런 설계가 좋은 디자인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정말 좋은 디자인은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이어야 한다. 물론 식물을 이용해서도 얼마든지 그런 영감을 줄 수 있겠지만, 식물이라는 틀에 갇혀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피트니스 센터의 선큰 가든은 신선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여기는 지하층이어서 하늘을 곧바로 쳐다 볼 수 없다. 그런데 박소장이 설계한 투명한 물이 하늘을 고스란히 지하로 가져왔다. 순환하고 있는 물이 마치 고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처리한 점과은은한 조명 연출도 돋보인다. 활동적인 피트니스 센터와 대비되는 정적인 공간이 이용자들에게 분명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외기가 통하는 곳이어서 바람도 느낄 수 있다. 땀 흘려 운동하고 쐬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하겠는가. 풀 한 포기 없는 공간이지만, 확실히 색다르다. 바로 이런 디자인을 조경가가 해야 한다. 보기 좋은 나무만 심을 것이 아니라.
2005년 가을, 박준서는 숲을 사람들의 삶 가까이로 끌어들인 총체적 삶의 환경으로서의 ‘경관(landscape)’을 구현하겠다는 꿈을 실천하고자 디자인 엘을 설립했다. ‘Link Landscape with Life’가 모토다. 그는 설계가 설계 자체로만 그치지 않고 현실 공간으로 구현되어야 그 진정한 가치가 발현된다고 믿고 있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박사 과정을수료했다. 삼성에버랜드, 서인조경 등에서 실무 경력을 쌓았다.
2005년 봄, 오형석은 새로운 조경 문화를 고민하던 젊은 조경가 7인과 의기투합하여 만든 프로젝트그룹을 기반으로 디자인로직을 설립하였다. 만 10년 동안 디자인로직을 이끌며 새로운 외부 환경에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으며, 또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을 갈구하고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 후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서인조경과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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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가르치기와 가리(르)키기
“뭐 가르치냐”는 물음에 “설계 가르킨다”고 하자이내 지적이 돌아온다. ‘가르치다’는 (지식이나 기술을)깨닫거나 익히게 하는 것이고, ‘가르키다’는 (무엇을)짚어 보이거나 알리는 것이란다. 맞다. 그런데 설계를 가르칠 수는 있는 건가? 가르친다면 무엇을, 어떻게, 왜 가르쳐야 하는가?
돌아보면, 우리의 선배들은 손이 좋았다. 그만큼 교육 방법도 명확했던 것 같다. 좋은 드로잉이 좋은 설계로 인정받았다. 그런 설계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복과 숙련이 요구되었다. 칭찬보다는 잘못을 지적하는 훈육을 통해 성장을 유도했다. 도제식에 가까웠다. 오래전부터 훌륭한 디자이너들을 배출한, 뼈대 있는 교육 방식이기도 했다. “발로 그려도 이것보다 낫겠다”면서 밤새워 그린도면을 찢어버렸다거나, “아닌 것 같은데” 한마디에 달포 가까이 고민한 결과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일화들은 이런 교육 과정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
닌 것 같다면 ‘왜’ 아닌 건지? 설계 수업은 교육자의 취향과 경험을 배우는 건지? 같은 질문보다는 “괜찮은데” 정도의 사인을 얻기 위해 교수의 스타일과 취향을 파악하는 선택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떤 이는 의식 있는 설계가로 성장했지만, 어떤 이들은 좌절하고, 어떤 이들은 앙금을 가졌다. 이들 가운데는 갑이 되어, 잘해야 을이나 병인설계가를 좌지우지하는 위치가 되었다.
설계를 배우는 것이나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다. 설계라는 작업 자체가 녹녹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늘 새로운 것을 고민해야 하고 개인적 시간을 줄여야하는 고단함이 있다. 그 고단함의 대가가 큰 것도 아니다. 자긍심이 이를 상쇄하곤 하지만, 앙금을 가진 갑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게다가 일감마저 줄어드는 상황이 그들을 떠나가게 한다. 이들에게는 절실한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병풍이 되기도 한다. 설계 시장이 불황인데 “설계를 왜 이렇게 많이 가르치느냐”는 말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 된다. 대학의 커리큘럼이 모두 직무와 관련되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독립적 업이 없는 미학이나 역사, 생태학 같은 과목은 가르치지 말아야하나? 조경 분야가 설계 시장이 어려워지면 다른 부문은 좋아지는 제로섬 게임인가? 혹시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집단을 동원하는 것은 아닌가? 아카데미즘으로서 조경의 지향을 거론하기 이전에 드는 우문들이다. 교육의 성과를 취업률로 평가하는 시대인 것은 분명하다. 취업을 위해서는 실무에서 요긴한 실시설계, 시공과 적산 등을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취업을 위해서는 조경기사가 필수고, 기사 시험에 합격하려면 설계 기법 연습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직까지 기사 실기는 제도판과 T자를 이용한 수작업이기 때문이다. 사십 년 전부터 해오던 선 긋기, 심벌 그리기, 방위와 범례 그리기, 스케치 등이 지속되고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한다. 학생들은 기법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사고 과정은 생략된다. ‘어떻게’ 그리는지는 알지만, ‘왜’ 그리는지는 모른다. 간혹 이런 단순 반복 작업을 왜 시키느냐고 묻는 학생도 있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다. 교육받은 시대의 프레임 안에 있는 교육자와 학생 사이에는 삼사십 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교육 내용은 거의 같다.
늘 실무를 의식한다고 하지만, “실무에 나온 학생들이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오래된 불만은 여전하고, 학교가 철지난 것을 가르친다는 불만도 제기된다. 삼사십 년 된 조경 교과서들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조경은 시대 변화와 함께 그 역할과 정의가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경향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조경의 운명이다. 그러나 조경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고 믿는 교육자는 불편하다. 본질을 가르쳐야지 경향을 가르치려 하냐고 힐난한다. 기본을 탄탄히 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기본이 삼사십년 전의 방법이라면 동의하기 어렵지 않은가교육은, 교육자들이 교육받은 시대의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성장해서 활동할 시대를 염두에 두어야하는 것 아닌가. 꿈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수도 꿈을 꾸어야 한다. 같은 이유로 설계 교수는 설계 참여를 통해 최소한의 설계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설계 교수의 아이덴티티이자 경쟁력이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주당 수업 부담은 많고, 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않다. 논문보다는 공모전이나 작품 발표, 전문지게재를 통해 실적을 평가받고 싶어 하지만, 공모에 당선된다고 해도 인정 실적은 SCI 논문의 1/10에 불과하다. 설계를 연구 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실증적 평가 관행도 건재하다. 게다가 실기 실적이 논문에 비해 수월하지 않느냐는 위협구가 날아온다. 설계 시장에서는 “교육이나 하지 왜 설계에 참여하느냐”고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다.
그러는 사이 설계가로서 경쟁력은 사라진다. 이미 대학에 오면서 예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는 생각이라고, ‘왜’ 그래야 하는지, 적어도 “아닌 것 같다”면 ‘왜 아닌 것 같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가져보려는 노력이 한낮 학생들을 부추기는 관념의 유희로 치부되는 것은 참담하다. “설계는 답이 없다”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설계를 경험과 취향의 세계로 몰고 간다. 그렇다면 힘센 사람의 취향에 맞추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인가?
거의 모든 교과목이 그렇듯이, 설계 과목이 모두를 설계가로 키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될 수도, 될 필요도,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누구는 좀 더 잘할 수 있고, 누구는 조금 못할 수도 있지만, 열등감과 앙금을 남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젊은 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바쳐 공부한 자신의 전공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지 못하고 앙금만을 가진다면 얼마나 불행한가. 여러 교과목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왜곡되지 않은 교육이 자긍심을 가지게 해야 할 것이다. 조금 못하더라도 학생의 생각을 읽으려 애쓰고 그 생각이 발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 생각이 자의적이라면 논리를 가질 수 있게, 개인적이라면 다수를 위할 수 있게. 그것은 위계적이고 훈육적인 ‘가르치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눈높이에서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설계 수업이기에 할 수 있고, 설계 수업이기에 필요하다.
최정민은 순천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설계 실천과 교육 사이의간극을 고민 중이다. 대한주택공사에서 판교신도시 조경설계 총괄 등의 일을 했고,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다양한 프로젝트와 설계공모에 참여했다. 제주 서귀포 혁신도시, 잠실 한강공원, 화성 동탄2신도시 시범단지 마스터플랜 등의 설계공모에당선되었다. 조경비평 ‘봄’ 동인으로 현실 조경 비평을 통해 조경담론의 다양화에 기여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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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조경(가)의 탄생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건 공부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시험, 입시, 자격증, 학위, 취직, 승진 같은 인생의 짐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 다음부터는 더 하기 싫은 게 공부다. 아주 가끔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기도 하지만 결코 지속가능한 감정은 아니다. 그래도 직업은 못 속여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그래서 방학 때면 오히려 이 의무감에 족쇄를 채우기 위해 세미나라는 멋진 이름으로 포장된, 일종의 집단 행동을 하곤 한다.
이번 겨울에는 ‘조경의 탄생’이라는 허세 가득한 세미나 제목을 달아놓고 대학원생들과 함께 조경이 근대적 전문 분야의 하나로 성립되던 19세기의 상황과 쟁점을 되짚어 보았다. 허구한 날 조경의 위기 타령을 반복하는 최근의 분위기가 오히려 위기인 것 같아 거꾸로 조경 태동기의 사정을 살펴야겠다는 게 하나의 이유였고, 때마침 이 시기와 관련된 새로운 연구 성과가 최근 활발하게 발표되고 있다는 게 또 다른 이유였다. 대표적인 조경 역사 저널 『Studies in the History of Gardens & Designed Landscapes』 34권 4호(2014년)의 특집 ‘조경(가)의 기원’에 실린 일곱 편의 논문, 그리고 최근 19세기 조경의 역사와 이론에 관한 새로운 시각의 탐구를 전개하고 있는 조셉 디스폰지오Joseph Disponzio의 글 몇 편을 읽었다. 짐작하시겠지만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새롭게 발굴된 사실史實 몇 가지에는 독자 여러분도 흥미를 느끼실 것 같아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
첫째, 우리가 ‘조경가’로 번역해 쓰고 있는 영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landscape architect’에 해당하는 표현이 적어도 19세기 초 프랑스어에 존재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영국 풍경화식 정원landscape garden을 프랑스에서 유행시킨 건축가이자 풍경화가였으며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장-마리 모렐Jean-Marie Morel이 자신의 새로운 업역을 표현하기 위해 정원사 대신에 건축가를 경관과 결합시킨 합성어 ‘아르시텍트 페이자지스트architecte paysagiste’
라는 직업명을 1804년부터 사용했다.
둘째,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는 프랑스어 표현 ‘아르시텍트 페이자지스트’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1858년의 센트럴 파크설계공모 당선 이후인 1859년, 옴스테드는 사례조사를 위해 유럽의 공원을 순회하던 중 파리에 머물렀고 불로뉴 숲을 여덟 차례 이상 방문했다. 당시 불로뉴 숲의 개선 계획 책임자였던 아돌프 알팡Jean Charles Adolphe Alphand은 불로뉴 숲은 물론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파리의 도시 개조·정비 프로젝트를 옴스테드에게 소개했는데, 그는 파리의 조경국Service de l'architecte paysagiste(Office of the Landscape Architect) 소속이었다. 이 조직 명칭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알팡의 전임자였던 루이-쉴피스바레Louis-Sulpice Varé가 근무하던, 1854년의 불로뉴숲 도면 직인이 최초다. 따라서 옴스테드는 자신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라 지칭되던 1860년대 이전에 이미 파리에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명칭, 그리고 대형 공원과 ‘도시개선’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의 직무 영역을 인지했을 것이다. 셋째, 1860년 4월, 맨해튼 155번가 위쪽으로 도시를 확장하는 계획 책임자로 옴스테드와 그의 파트너 칼베르 보Calvert Vaux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로 임명된 것이 미국에서 전문가의 직함으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가 명시된 최초의 기록이다. 이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에게 주어진 최초의 담당 업무가 공원의 설계가 아니라 도시의 계획이라는 점을 뜻한다. 이제까지는 센트럴 파크 조성책임자였던 옴스테드와 보가 1863년 5월 14일 공원위원회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그들의 이름 앞에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라고 쓴 것을 첫 기록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몇 가지 사실은 초창기 조경(가)의 전문성과 업역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초대한다. 예컨대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스트인 찰스 왈드하임Charles Waldheim은 ‘건축으로서 조경’이라는 글에서 옴스테드는 경관과 건축가의 합성어인 랜드스케이프아키텍트가 랜드스케이프 가드너보다 대중적으로 더 호소력을 지니고, 조경이 정원을 넘어 도시의 계획과 개선을 다루는 전문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릴 수 있으며, 건축과의 잠재적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이러한 적극적 해석은 논쟁적이다. 조경의 역사에서 건축이나 도시를 둘러싼 갈등과 충돌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라는 용어의 사회적 공인은 이 분야의 업무 영역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오히려 옴스테드를 필두로 한 출중한 전문가들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landscape architect라는 직명으로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성과를 거두면서 사회적인식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19세기 말과 20세기초의 여러 기록에서 조경 전문업profession과 학제discipline의 불안정성을 둘러싼 고민과 논란을 반복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조경(가)이라는 용어의 문제였다기보다는 조경(가)이 다루는 대상과 업무의 정체성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라는 말이 진부해질 정도로 조경의 정체성은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겨울 세미나를 마무리하는 토론에서 개진된 의견 몇 구절을 옮긴다. “작은 느낌표와 커다란 물음표를 동시에 얻었다.”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전문분야를 지칭할 적절한 용어를 찾으려 고심하던 옴스테드의 ‘머뭇거림’은 어쩌면 조경의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것 또 하나는 글쓰기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다른 달보다 사흘이나 짧은 2월에 닷새짜리 기나긴 명절까지 겹쳐 에디터들과 디자이너들은 연휴 마지막 날임에도 밤샘 사투를 벌이고 있다. 다른 필자들의 글을 다듬고 고치는 건 거의 마무리되었고, 누구나 가장 하기 싫은 일, 자기 글 쓰는 일이 아직 남은 것 같다.
나야 이제 여느 달보다 지루한 에디토리얼을 겨우 끝냈지만…. 야식으로 시킨 치킨과 맥주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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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비평(가)의 자리
추위도 잠시 주춤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던 3월 중순, 이종건 교수를 만났다. 새 봄에 『건축평단』이 세상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꽤 오래 전부터 비평지 창간을 준비한다는 소식은 들어왔지만, 솔직히 녹록치 않은 일이라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비평가 개인이 비평집을 내는 일이야 상대적으로 손쉽겠지만 (물론 이 역시 요즘과 같은 출판 시장의 불황 앞에서는 쉽지 않지만), 지속성을 담보로 해야 하는 정기간행물은 의외였다. 잡지가 유지되려면 필자와 독자, 그리고 책을 출간하고 배포하는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자본(가)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우려를 담아 이종건 교수에게 점점 더 짧고 쉬운, 이미지 위주의 지면을 (아니 화면을) 원하는 시대에 비평 전문지의 독자는 어디에 있겠느냐, 비평가들은 어떻게 모였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이 잡지를 유지할 것인지 등등을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가장 기본적인 건축적 문제를 다룰 것이며, 이러한 핵심 과제를 간과한다면 건축이라는 분야와 건축가라는 직능은 바로서기 어렵다고 일갈한다. 독자의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이 ‘주인 없는 책’임을 강조했다. 모든 자금은 책을 만드는 데 쓰여야 하며 (그래서 원고료가 없는 것 같다) 이 책의 존재 가치와 운영 방식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참여한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세상은 주인(자본가)의 입맛에 맞게 재단되지 않는 비평이 자리 잡은 사회다. 주인은 없지만 후원자는 있다. 아무 조건 없이 비평서의 존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후원금을 보내고 구독을 약속한 것이다.
자본과 독자는 둘째 치더라도, 또 글을 쓰는 비평가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너무 자조적인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예전 건축 잡지사에 다니던 시절, 잡지에 게재될 작품의 비평가를 찾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주로 교수님들이) “저는 비평가가 아닙니다” 혹은 (대개 설계를 시작한 교수님들이) “저는 이제 비평을 하지 않습니다” 혹은 심지어 “건축계에는 발언하지 않을 생각입니다”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는데, 겸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전문 분야 내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지 못한 비평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따라서 매체에서는 젊은 건축가를 발굴하는 것 만큼 새로운 비평가를 발굴하는 일도 항상 지난했다. 한편으로는 작품을 게재하기로 한 건축가가 비판적인 비평 원고가 실릴 예정이란 이야기에, 작품을 싣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간신히 설득해 원고를 내보낸 일도 있었다. 반대로 비평가의 날선 (혹은 독단적) 비평에, 편집부에서 필자에게 수위 조절을 요청하는 씁쓸한 일도 있었다. 그만큼 비평의 영역은 마이너한 것이었고, 비평 문화는 좀처럼 성숙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건축계에서 『건축평단』의 탄생 배경이 짐작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최근 건축 동네에는 오래된 매체 몇몇이 저물어간 대신, 지난 몇 년간 기존의 매체와 차별화된 몇 가지 매체가 등장했다. 2008년 창간된 격월간 『와이드 AR』은 ‘심원건축학술상’과 ‘건축비평상’ 등을 운영하며 비평과 연구를 독려하고 있으며, 젊은 비평가와 필자, 건축가의 발굴에 힘쓰는 잡지다. 건축을 통한 사회 공동체 활성화를 꿈꾸는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 발행하고 있는 「건축신문」은 2012년 창간(연 4회 발행)하여 참신한 기획으로 건축과 다양한 문화예술을 가로지르고 있다. 김용관 건축 사진작가가 이끄는 아키라이프에서 발행하는 『다큐멘텀』은 건축 과정을 이미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하는 건축 전문지로 2014년에 창간되었다.
건축 잡지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중반까지 건축계에서는 월간지 형식의 10여 종의 잡지들이 비슷비슷한 콘텐츠로 잡지를 만들었다면, 최근 새로 만들어진 대안적 성격의 잡지들은 그 형태나 발행 횟수, 콘텐츠의 방향 등을 다양화하며 (형편껏) 꾸려가고 있다. 이 매체들이 모두 비평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매체 성격의 다변화는 문화의 다양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분야의 여러 사람들의 활동 무대가 되어 풍요로운 토양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건축 이론과 역사 관련 모임의 활동도 눈여겨 볼만하다. 2012년에는 목천건축아카이브와 한국 현대 건축 연구를 위한 학술모임인 현대건축연구회가 함께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이란 이름의 포럼으로 연구 성과를 공유하기도 했다. 매주 토요일 모여 건축 이론서를 강독하는 토요건축강독 역시 젊은 연구자들이 여럿 참여하며 몇 년째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건축평단』에 참여한 비평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러한 매체나 모임에서 활동하는 젊은 이론가·비평가들을 꽤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젊은 이론가·비평가들의 건축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활동이 『건축평단』의 탄생에 동력이 되었을 것이고, 미래의 가능성도 꿈꾸게 했을 것이다.
이종건 교수와의 자리가 파할 무렵, 조경 비평의 미래를 위해 한 말씀 부탁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이지만, 건강하고 비판적인 지식인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반동·저항·이질적 분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토양을 분야의 원로와 주전 멤버들이 만들어 주어야 한다. 우리 바깥에서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우리의 생각도 바깥에 알려야 한다. ‘생각하는 조경가’가 나오도록, 생각할 수 있는 자극을 주어야 한다. 왜 조경이 필요한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우리 고유의 조경·정원 문화·외부 공간을 고민하고 끊임없이 역사와 대화하는 그런 긴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 이 글을 마무리할 무렵 『건축평단』의 강권정예 편집장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건축평단』 정기구독자들의 95%는 건축 관련자들이지만, 그 나머지는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 교육 공무원, 미술 선생님, 카페 운영자 등 ‘일반인’이라고 한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항상 궁금해 하는 ‘독자의 실체’를 엿보고 잠시 놀랐다. 이를 두고 여전히 책은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너무 낭만적인 자기합리화일까. 강권정예 편집장은 한때 건축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건축 전문 출판사 정예씨(JEONGYE publishingCompany)를 열었다. 대표적 책으로 열정적 건축 저널리스트였던 고 최연숙 편집장의 유고집 『사람의 가치』, 『부산 홍티문화공원 공공예술 프로젝트』 등이 있다. 미리 홍보하자면 부산의 홍티문화공원은 『환경과조경』 5월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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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뿌리 이야기
2년 전, 김숨 작가를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한 통신사의 영상 뉴스 팀 인턴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정치, 사회, 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그림이 된다’ 싶은 이슈를 따라다니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는 1차원적인 (그리고 명쾌한) 이유로 대산문학상 수상작 발표 기자간담회를 취재하게 되었다. 한때 문학에 대한 낭만을 불태웠던 시절이 있었건만 그날 나의 정신은 온통 ‘그림을 만드는 데’ 팔려 있었다. 문학상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행사는 유명 연예인이 참석하는 화려한 행사나 정치인들이 핏대 세우며 갑론을박하는 공청회 등에 비하면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포인트가 부족했다. 영상을 채우기 위해 고급스러운 식기, 하얀 테이블 보 등을 클로즈업 하면서 시작한 나의 뉴스 영상을 보고 동료들은 ‘물잔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신’이라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문학상 기자간담회에서 작가 인터뷰보다 조명, 식기 등을 먼저 찍고 있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숨 작가는 답변을 할 때마다 정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깊고 고요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작게 소곤거리는 듯한 말투, 극적인 표정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겸손한 표정, 답변을 하기 전 오래 생각하는 진중한 태도는 내 속을 까맣게 타들어가게 만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말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결국 집에 돌아와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그녀의 소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을 읽었다. 평소에는 내가 잘 읽지 않는 스타일―평범한 소재의 이야기를 집요하게 파헤치는―의 소설이었지만 잘 벼린 날처럼 선뜩함이 느껴지는 문장에 홀려 집중해서 읽었다. 나직하고 섬세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것처럼.
올해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김숨의 ‘뿌리 이야기’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일었다. 매년 문단의 경향을 대표하는 개성이 뚜렷한 작품을 선정하는 이상문학상 심사위원단이 어쩌면 매우 평범한 소재인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조용한 소설을 대상으로 선정했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이기도 했다. 사실 뿌리는 작가들에겐 건드리기 쉽지 않은, 노골적으로 말해서 ‘닳고 닳은’ 소재가 아니던가. 『용비어천가』의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부터 시작해서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나희덕 시인의 신춘문예당선작 ‘뿌리에게’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미 많은 작가들이 ‘뿌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진부한 소재가 이제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뿌리’보다는 ‘노마드nomad’라는 단어가 더 섹시하게들리는 시대에 새삼 ‘뿌리’에 대해 고찰하는 그녀의 고집스러움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날 ‘뿌리’에 대해 다시 말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문학적 자서전 ‘울산, 추부, 목동 18번지 그리고 서울’에서 정착한 지 15년이 된 서울이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운 기이한 곳이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작가는 그동안 그녀가 살아왔던 울산, 추부, 대전의 목동 18번지, 서울 중 어느 곳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디에서 ‘뿌리 들린 자들의 공포와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소설에선 철거민, 위안부, 입양아 등 다양한 ‘뿌리 들린 자’들이 등장하지만 역사 문제나 사회·경제구조의 문제와 같은 거대 담론으로 이어지지 않고 온전히 뿌리들린 자들이 느끼는 ‘감정’에 끈질기게 매달림으로써 ‘뿌리’라는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풀어낸다.1 김숨은 소설에서 태풍의 영향으로 전동 드릴처럼 흔들리는 메타세쿼이아 세 그루를 묘사하면서 나무가 그리는 표정에 주목한다. 멸종된 줄 알았던 ‘화석나무’가 세계 곳곳에 이식되어 자라고 있는 극적인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전력투구로 서 있는’ 나무의 표정을 상상하는 작가의 섬세함에 2년 전 보았던 그녀의 이미지가 다시 떠올랐다. 여러 언론 매체와 SNS 상에서는 21세기형 새로운 유목민의 출현에 대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표정에 주목하지는 않는다. 늘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해야하는, 이주移住를 ‘강요’받는 시대에 살고 있는 유목민의고단함과 피로함, 낯선 곳에서 느끼는 공포감에 대해.
지난 2월호 특집으로 소개되었던 토포텍 1의 작품을 두고 사람들의 평이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과장을 통해 의도적으로 이질감을 주는 토포텍 1의 과감한 접근 방식이 자극을 주었다는 평과 국내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이었다. 순응은 지루하다며 도발하고 도전하라고 선언하는 라인-카노의 인터뷰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그들의 감각적인 디자인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그중 가장 궁금했던 점은 이주자들의 정체성을 반영한다는 수퍼킬렌의 야자수가 과연 북유럽 덴마크의 기후에서 정말로 튼튼하게 자라고 있는 지였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찍었을 보도용 사진과는 다르게 인터넷에서 본 최근 사진 속 야자수는 잎사귀가 마르고 색이 바래 볼품없었다. 특히 겨울에는 덴마크의 추운 기후에 얼어 죽지 않도록 포대 자루 같은 것을 잎사귀에 씌워 놓았는데 덴마크 사회에서 아직도 얼굴을 가리고 살아가고 있는 이주자들의 정체성을 보는 것만 같아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수퍼킬렌이 있는 덴마크의 다문화지역 뇌레브로Nørrebro에 살고 있지만 수퍼킬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한 도시설계가는 나무가 정상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조건에 야자수를 심어놓고 겨울에 포대기를 씌워놓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지적했다.2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무를 이식한 결과가 아닐까. 지난 2월 뇌레브로 인근에서 일어난 덴마크판 ‘샤를리 테러’는 또 다시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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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족구왕
재미있게 놀기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컵 차기’가 유행이었다. 조경학과가 있던 이공관 앞마당과 지금은 조경학과 건물이 된 도서관 앞이 전용 경기장이었다. 커피 자판기의 일회용 컵과 두 명 이상만 모이면 가능한 실내외 구분 없는 레저였다. 한 번은 이공관 옆에 위치한 공학관에서 건축학과 교수님께서 내려다보고는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동아리 선배에게 매일 컵 차기하는 저 키 큰 여학생은 대체 누구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나의 족구 기본기는 그렇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져졌다. 졸업 후 다니던 건축사무소는 잠원동 고속도로 완충 녹지 변에 위치해서 후면에 넓은 주차장과 공터가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농구를 하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종목이 족구로 바뀌었다. 서브를 받거나 최전방에서 공격을 하는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안정적인 패스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역할을 주로 했다. 야근을 할 때는 저녁 먹은 후 자동차 라이트를 켜 놓은 채 야간 경기도 했다. 비 온 직후 약간의 물웅덩이가 있던 어느 날 오전이었다. 일하다 창문을 보니 우리 팀 주장이 롤러로 땅을 메우고 있었다. 그의 진지한 동작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우리는 질척거리는 땅에서 신발을 망쳐가며 그날도 어김없이 족구를 했다. 그러다 앞 사무실이 이사 가는 바람에 비게 되자 그곳은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는 꽤 괜찮은 전용 족구장이 되었다. 실내에서 족구해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려나. 실내 족구는 공을 가지러 뛰어다니지 않아도 될 뿐더러 벽과 천장을 활용해서 훨씬 다이내믹한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천장의 전등이 모두 깨지고 창문까지 깨지는 바람에 우리의 실내 족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오로지 족구하기 위해 출근하는 것 같았던 그 철없던 과장님들, 지금 모두 잘 계신지 궁금하다. 족구 개인사가 길어졌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축구하고 족구한 이야기를 왜 길게 하는 지 나는 이해해야 한다.
영화 ‘족구왕’(2014)은 주인공 만섭이 군대에서 족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족구를 위해 태어난 듯한 체격을 가진 만섭은 사단장배 족구 대회 우승패를 가슴에 안고 제대한다. 다니던 대학교에 복학하자마자 제일 먼저 족구장을 둘러보지만 그곳은 군대간 사이 테니스장이 되었다. 변한 곳은 족구장만이 아니다. 기숙사 선배는 스펙에는 관심 없는 만섭에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며 공무원 시험 준비해라”라고 다그치고, 조교는 족구장을 찾는 그에게 “족구 같은 소리나 한다”라며 비아냥거린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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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경학회장·한국조경사회장 대담
한국 조경의 내일을 준비하다
침묵을 깨고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야
박명권(이하 박): 한국 조경이 큰 변곡점에 접어든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게 된 두 단체장님을 한 자리에 모셨다. 학계와 업계를 대표하는 한국조경학회(이하 조경학회)와 한국조경사회(이하 조경사회)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에, 두 단체의 행보에 많은 조경인들이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혜와 뜻을 모아 공동 대응해야 할 문제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임기 시작 후 두 달여 동안 느끼신 점이 많을 것 같은데, 그 소감을 먼저 들어보면 좋겠다.
김성균(이하 김): 시간이 정말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다. 조경학회장직이 대내외적으로 무척 바쁘다는 것을 실감했다. 석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환영사, 축사 등을 하기 위해 관련 단체의 행사에만 벌써 10군데 넘게 참석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관심사를 갖고있는 조경인들을 만났다. 모두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작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들이 많지 않다. 일례로, 학회장 취임이후 회원들과의 적극적인 소통 창구로 활용하기 위해 밴드를 두 개나 만들었지만 반응이 거의 없다. 그래서 앞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이 침묵을 깨고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그동안의 한국 조경은 정부 주도 사업이나 아파트건설 호황에 편승해서, 큰 노력 없이 성장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 ‘어렵다’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조경 분야에 활력을 불어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터놓고 토론할 수 있는 공론장의 필요성도 느꼈다.
황용득(이하 황): 그동안 조경사회에서 임원진으로 활동하며 계속 일을 해왔기 때문에, 특별한 소감이 있다기보다는 지금까지 추진해 온 여러 사업들을 되돌아보고 18대 회장단이 무엇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방향을설정하는 시작점에 서 있다. 조경사회는 그동안 너무 외형적인 활동에 몰두해 왔다. 그러다보니 허약한 체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업계의 상황이 어려워지다 보니, 성금 마련도 녹록지 않고, 회비 납부 독려도 부담스럽고, 자연히 업계 지원도 자유롭게 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경기가 좋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 데, 상황이 나빠지다보니 내적으로 부실한 면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그래서 회장직을 맡게 된 이후, 어떻게 하면 내실을 기할 수 있을지를 가장 많이 고민하고 있다. 무리한 사업을 추진하기보다는 부실한 시스템을 과감히 개선하고, 단단한 조직을 만드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조금 전에 학회장님이 조경인들의 관심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지난 두 달은 회원들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결집시키고, 단합시키고, 공감대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시간이었다.
유목민처럼 새로운 자원을 찾아 떠나야 할 시기다.
박: 아무래도 적극적인 참여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일것 같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현재의 문제점에 대한 진단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이어서 그에 대해 논의해보면 좋겠다.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건설 경기의 불황이 장기화되고 있다. 새로운 탈출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인데, 뚜렷한 대안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조경 분야는 물론이고 사회 각 분야의 변화 속도가 전에 없이 빠르고 유동적이다. 자칫 제대로 된 대처를 적시에 하지 못하면, 크게 후퇴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한국 조경의 오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황: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어느 날 우리 앞에 뜻밖의 비옥한 옥토가 나타났는데, ‘이게 웬 횡재냐 하면서’ 정신없이 수확하기만 했다. 언젠가 바닥이 보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채, 눈앞에 보이는 노다지를 어떻게 하면 많이 캐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골몰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바닥을 드러낸 순간, 빈 손밖에 가진 게 없게 되었다. 새롭게 씨앗을 뿌리거나 별도의 자원을 발굴하려는 노력 없이 주어진 것을 파먹는 데만 열중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유목민(노마드)처럼 새로운 자원을 찾아 떠나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조경이란 분야가 영원할 것이란 안일하고 막연한 희망을 버리고, 생존을 위해 새로운 틀을 과감히 모색해야 할 때다.
박: 업계에서 활동하고 계시다보니, 현재 상황을 심각한 수준으로 체감하고 계신 것 같다. 학회장님은 어떻게 진단하고 계신지 궁금하다.
김: 분명한 것은 지난 세월처럼 가만히 있어도 국가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저절로 일감이 생기던 시대는 지났다는 점이다. 이제는 일감을 새롭게 만들어내야하고, 일감이 있는 곳으로 능동적으로 찾아가야 하는 시기다. 우리만의 실력과 기술을 개발해서 한 차원 높은 질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서 새로운 일을 창출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정책과 법제도에 대한 대응도 부실했다.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법제도와 정책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불리한지 유리한지만을 따졌다. 예를 들어, 과거 일본의 경우 이안 맥하그의 기법을 조경 분야에서 들여와 그에 따른환경 평가의 필요성을 국가에 제안해서 그것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조경 업계에서 관련된 일을 상당히 많이 수행했다. 주어진 일만을 하려 했다면 그런 성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조경 분야가 할 수 있는 새로운 업역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제도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 조경을 대표하는 양대 단체인 한국조경학회(1972년 12월 설립)와 한국조경사회(1980년 6월 설립)의 새로운 회장단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 두 달여가 흘렀다(본 대담은 3월 12일에 진행되었다). 본지는 김성균 신임 회장(한국조경학회, 서울대학교 교수)과 황용득 신임 회장(한국조경사회, 동인조경마당 대표)을 한 자리에 모셔, 각 단체가 역량을 집중하여 추진하고 있는 주요 사업에 대해 들어보고, ‘위기론’이 심화되고 있는 한국 조경의 활로 모색을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 그 해법을 모색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특히, 김성균 회장과 황용득 회장 모두 취임 후 ‘해외 진출’을 강조하고 있어, 상호 협력하여 보다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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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풍경화식 정원 퍼가기
#42
그린 핑거스Green Fingers
드높은 정치적 이상과 각종 세련된 건축물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없으면 풍경화식 정원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하ha-ha를 조성하여 전원 풍경을 시각적으로 끌어들인 결정적인 동기는 바로 그곳에 나무가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심은 나무가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이백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랜슬롯 브라운이 심었던 나무들이 진가를 발휘한다”1라는 말이 물론 과장되긴 했어도 전혀 사실무근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풍경화식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식물 수집과 재배 사업에도 가속이 붙었다. 식물 수집가들이 식민지에서 새로운 식물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으며 식물학과 식물 재배 기술이 성큼 도약한시기이기도 하다. 새로운 식재 기법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에 가장 앞장 선 인물 중 하나가 제8대 페트르 남작Robert James Petre, 8th Baron Petre(1713~1742)이었다.
1712년, 런던 사교계를 발칵 뒤집은 스캔들이 하나 있었다. 당시 썩 괜찮은 신랑감으로 제7대 페트르 남작이 꼽혔는 데, 어느 날 그가 사교계의 여왕, 방년 16세의 아리따운 아라벨라 페르모어Arabella Permor(1696~1737)2 양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자른 사건이었다. 그것도 사교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가면무도회에서 많은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아라벨라 양은 그때 연회장 한쪽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페트르 남작이 다가가서는 그녀의 어깨에 우아하게 드리운 머리카락을 한 줌 쥐고 가위를 꺼내 싹둑 잘랐다. 그 전에 두 선남선녀 사이에 무슨 사연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라는 설과 청년들이 짓궂은 내기를 한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둘 사이의 염문이 있었더라도 그 사건을 계기로 끝장이 난 건 물론이다. 아라벨라는 대노했고 두 가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무도회에 참석했던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가 이 사건을 목격했다는데 ―정말이지 그는 끼지 않는 곳이 없었다― ‘두 가문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그 일화를 장편 풍자 서사시로 써서 발표했다. ‘머리카락 강탈 사건’3이라는 제목의 이 장시는 하루아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두 가문을 화해시키겠다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포프의 걸작이 한 편 탄생했다.
페트르 남작은 같은 해에 부유한 웜슬레이 가문의 상속녀와 혼인했으며 이듬해에 천연두에 걸려 유복자를 남기고 죽었다. 이 아들이 커서 8대 페트르 남작이 되었는데 그 역시 아버지처럼 서른 살 생일을 맞기도 전에 천연두에 걸려 유복자를 남기고 죽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아들은 여인의 머리카락 대신 식물을 수집했고 정원 조성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소질을 보였다. 이 8대 페트르 남작은 나중에 식물학의 대부라고 칭송받는 인물이 된다. 그의 업적을 들여다보면 그 짧은 생애 동안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장난감보다 식물을 더 좋아했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는 1742년, 29세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손던 홀Thorndon Hall 장원을 수목원으로 재편성해 약 700종의 식물을 길렀으며, 4만 주가 넘는 미국 수목을 도입하여 심고, 여러 채의 대형 온실을 만들어 까다로운 남부 수목을 재배했고, 지인들의 장원 여덟 개를 풍경화식으로 바꾸어주었다. 그 역시 남들처럼 유럽 대륙으로 그랜드 투어를 다녀왔지만 돌아올 때 식물 관련 서적만 배에 가득 싣고 왔다. 이런 방식으로 페트르 주니어는 풍경화식 정원에 다양한 식물을 제공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식물학자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아 미성년자로서 이미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회원으로 추대된 특이한 경우였다.
그러나 그의 최고 주특기는 ‘마치 살아 있는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4 식물 배치법이었다고 전해진다. 수목을 S자 띠형으로 심고 상록성 참나무와 낙우송, 은빛 전나무와 키 작은 주목을 서로 조화시켰으며 호랑가시나무와 회양목을 대비시켰다. 이런 식재법은 “켄트의 조잡한 식재법에 비해 백배나 근사한 효과를 주었다”5는 평을 받게 했다. 그의 나이가 어렸음에도 그를 스승으로 본 젠틀맨들이 꽤 많았는데, 그중에 필립 사우스코트Philip Southcote(1698~1758)라는 인물도 있었다. 필립 사우스코트는 워번 농장Woburn Farm의 주인이었다. 워번 농장은 레저스 농장과 함께 영국의 장식 농장 중 쌍벽을 이루었던 곳이다.6
템스 강 남부 평야의 가장자리에 있는 워번 농장은 그 자체로는 크게 매력 있는 풍경이 아니지만 멀리 아름다운 월튼 브리지가 바라다보이고 동쪽으로 세인트 폴 대성당이 우뚝 서 있으며 북쪽 경계를 따라 번이라는 작은 하천이 흐르는 곳이다. 번 하천은 농장 전체를 적시고 저택 가까이에 와서 호수로 흘러들어 간다. 필립 사우스코트는 이런 주변 환경을 시각적으로 이용함과 동시에 “예술의 힘을 이용하여 평범한 농경지를 장식 농장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7 물론 이렇게 역사에 남을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가 들인 공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산책로 루트를 정하기 위해 수백 가지의 서로 다른 경로를 걸어보았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8 경로에 따라 보이는 장면이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풍경화식 정원의 관건 중 하나는 최적의 산책 경로를 정하는 것이다. 그 전통이 워번 농장에서 탄생했다.
사우스코트 자신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동시대의 증인들이 쓴 방문기가 여러 편 전해진다. 그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마도 토머스 훼이틀리Thomas Whately의 평론서 『고찰Observation』9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워번 농장을 소개하며 “정원의 경계 속에 농촌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아이디어가 여러 번 실천에 옮겨졌지만 워번 농장처럼 완벽하게 구현된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10 워번 농장의 3분의 2는 목초지로 소와 양을 쳤고 나머지는 경작지였다. 사실 정원을 별도로 조성할 수 있는 면적이 없었으므로 사우스코트는 순환 산책로circuit walk를 고안했고 이를 정원으로 응용했다. 즉, 산책로 변에 넓은 폭으로 식물 벨트를 조성한 뒤 이것을 정원이라 하였다. 순환로를 설정한 것은 레저스 농장도 마찬가지였지만 레저스의 경우 농장 그 자체를 목가 정원으로 해석했으므로 정원에 대한 개념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워번의 식물 벨트에는 당시 보기 힘들었던 각종 진귀한 꽃과 관목이 자랐다. 당시 심었던 식물의 목록이 전해지는데 그 중에는 패모11 등 생소하고 진기한 식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적 개념으로 본다면 지역 생태계에 어긋나는 식재법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겠으나 당대 사람들은 무척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