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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전적인, 너무나 도발적인 마르틴 라인-카노와의 대화
    토포텍 1Topotek 1의 베를린 오피스에서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를 만났다. 그는 그의 작품만큼이나 도발적이고 강렬했고, 그의 오피스는 그의 작품 이상으로 절제된 표면이었다. 즐거움과 에너지로 가득했던 그와의 대화를 옮긴다. 고정희(이하 G): 지난 주말에 한국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아직 여독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인터뷰에 응해주어 감사하다.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땠는가? 마르틴 라인-카노(이하 R): 열흘 동안 인도를 경유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니고 마지막에 한국에 머물렀다. 젊은이들의 팝 문화의 수준이 대단히 높다고 느꼈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음식이다. 몹시 독특하고 강렬하더라. 각종 김치 종류, 불고기에 미끄러운 홍합 미역국까지 모두 먹어보았다(웃음). 너무 강렬하고 독특해서 좋다 싫다 말하기 어렵다. ‘나중에 집에 가면 익숙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테니까’라는 마음으로 일단 모두 시도해 보았다. G. “집에 가면”이라고 했는데 어디를 말하는가? 베를린? 아르헨티나? 스페인? R. 일단은 베를린을 집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는 유대인이고 어머니는 스페인계 가톨릭인데, 열세살 때 독일로 이주했다. 그래서 독일 개신교에 대해서도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문화적으로 좀 복잡하게 섞였다. G. 더 이상 복잡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인지 토포텍 1의 작품을 보면 다원적인 점이 눈에 띈다. 토포텍 1이란 이름을 제공한 토포텍처와 도시 광장이 다르고 공원이 또 다르다. 최근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수퍼킬렌Superkilen의 도시 구역은 대단히 강렬하다. 사회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R. 그렇다. 내 개인적인 출신과 성장 배경으로 인해 다원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은 무신론자이지만 가톨릭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특히 외할머니는 아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은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종교다. 그 반면에 아버지의 유대교나 독일의 개신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종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는지나 자신도 잘 모른다. 이렇게 복잡한 종교적·문화적 배경과 이주자라는 사실이 내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것을 동시에 보고 이해하는 다원적 능력이 키워진 것 같다. 내게는 ‘낯선 것stranger’과 ‘이주migration’가 중요한 테마다. G. ‘낯선 것’이라는 테마는 도처에 나타난다. 특히 정원 자체를 낯선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매우 독특한 견해인 것 같다. ‘이주자들’이라는 테마의 경우, 특히 덴마크 코펜하겐의 수퍼킬렌 프로젝트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점은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토포텍 1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정되고 있는 ‘표면 전략surface strategy’에 대해 듣고 싶다. R. 표면 전략은 우리 디자인의 가장 핵심이다. 나는 대학에서 처음에 미술사를 공부했었다. 미술사 중에서도 정원의 역사에 관심이 컸고 나중에 정원 문화재 관리사가 되고 싶었다.1 그때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정원으로 답사를 갔던 것이 계기가 된 것 같다. 그 다음 프랑스 정원과 영국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의 역사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함을 알게 되었고, 현대 조경에서 역사적 맥락이 사라져간다는 것을 느꼈다. 학문도 좋지만 직접 작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조경학과로 옮겼다. 처음부터 정원의 회화적인 면에 매료되었다. 그래픽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예를 들어 바로크 정원의 파르테르, 소위 자수화단이라는 것을 보면 결국 표면에 수를 놓은 것인데, 나는 이를 평면 그래픽으로 이해했다. 영국 정원은 풍경화를 모델로 삼았으며, 현대에 와서는 로베르토 부를레 막스Roberto Burle Marx, 마사 슈왈츠Martha Schwartz 등이 그래픽적으로 작업했다. 거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학 때 피터 워커Peter Walker와 마사 슈왈츠의 설계실에서 6개월간 실습한 적이 있다. 그때 두 사람이 실험하던 랜드 아트 혹은 대지 예술을 보고 이야말로 예술적인 것과 조경적인 것을 연결하는 교량임을 깨달았다. G. 그렇지만 마사 슈왈츠의 작품을 보면 조경을 공간적인 것으로 다루는 면이 강하다. 그 밖의 모든 사람들도 조경을 3차원의 예술로 파악하고 있다. 당신만은 유독 정원과 경관의 2차원성을 주장한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R. 3차원은 건축의 영역이다. 벽을 세우고 지붕을 덮으면 그 내부에 3차원의 공간이 형성된다. 그 반면에 우리가 하는 작업은 외부의 표면, 즉 2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 산, 언덕, 호수, 모두 표면의 일부다. 3차원이 아니다. 지표면은 하늘과 직접 맞닿아 있다. 농담반 진담 반으로 신은 최초의 조경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구 전체의 표면과 지형을 다루는 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조경이다. 어떻게 보면 과대망상증에 가깝다(웃음). 지구 전체를 놓고 본다면 우리 인간은 표면에 붙어서 살며 표면을 통해 우주와 소통한다. G. 그렇다면 표면에 그리는 그래픽은 하늘과 소통하기 위한 기호인 셈인가. R. 바로 그렇다. 예를 들어 페루 나스카Nazca의 지상그림geoglyph을 보면 우리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지표면에 부호를 그려 하늘과 소통했다. 나는 바로크 정원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바로크 정원은 거대하게 비어 있다. 채운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채워진 것들에 집중하지만, 빈 외부 공간에 들어서면 위를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 지붕 덮인 건축의 폐쇄적 속성과 외부공간이 다른 점이며 외부 공간의 매력이자 강점이다. 하늘은 매우 흥미로운 요소다. 볼 것도 많고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이를 체험할 수 있게 하려면 공간을 비워야 한다. 대개는 빈 공간을 보면 채우고 싶어 한다. 빈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 모르겠다. 바로크 정원의 평면 기하학과 더불어 대형 연못은 하늘을 인지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하늘과 지표면이 닿아 있다는 것을 이처럼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도 없다. 평면과 하늘로 압축한 것이다. 20세기의 바우하우스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환원reduction하고 절제한다는 점이 그렇다. 단지 비율만으로 승부한다. 사실상 바우하우스 디자인이나 바로크 정원 모두 ‘비움’이 특징이다. 나는 빈 것에 관심이 많다.
  • [칼럼] 한국 조경과 리얼리티의 회복
    “레알이야” 리얼이 리얼로 보이지 않는 세태에 대해 청춘들은 ‘리얼’ 대신 ‘레알’로 말한다.“레알리!” 나도 믿기 어려운 꿈과 같은 현실이다. 조경 40년의 숙원이던 ‘조경진흥법’을 우리는 작년 말에 제정해냈다. 조경 공동체는 재작년 말에 조경 가문의 가훈이라 할 ‘한국조경헌장’을 제정한데 이어 드디어 법이라는 제도적 집을 갖게 되었고, 대한민국에서 조경은 더 이상 임의적 분야가 아닌 정규적 분야로서의 지위를 공인받았다. 이제 조경은 조경진흥법 이전과 구분되는 진흥법 이후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다. 이제 이 ‘집’의 구성원인 조경 가족과 함께 리얼한 실천을 통해 가정을 이루고 주변 세상의 행복에 기여해야 할 차례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서 한국조경의 대내외적 현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반성하고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대외적으로 보자. 조경의 인접 분야들은 21세기의 전환기에 시대 정신을 꿰뚫는 담론과 개념들을 창출하여 해당 분야의 사회적 위상을 제고하고 이들 담론을 국가적 어젠다로 추동하여 중장기적인 공공 수요를 창출한 선례들을 내보였다. 도시 쪽은 일찍이 1990년대 후반에 ‘걷고 싶은 도시’나 ‘살고 싶은 도시’ 담론을 시민 운동으로 추진하여 근 10년 이상 국가적, 지역적인 연구와 사업 수요를 창출해 왔다. 이에 따라 도시 곳곳에 보행 전용 가로와 공원, 광장 등 보행 공간들이 증설되었으며, 조경 분야 또한 이의 시행 단계에서 수혜를입었다. 산업디자인 분야도 2000년대에 들어 ‘공공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 도시 환경의 새로운 분야로서 입지를 확보한 바 있었고, 건축 분야는 더욱 저돌적으로 ‘건축기본법’ 속에 ‘공간 환경’이라는 전대미문의 개념을 만들어 도시와 조경까지 건축의 영역에 포섭하려는 전략을 제도화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그동안 지속적인 애증관계를 가져왔던 산림 분야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업역 경쟁은 가히 담론 전쟁과 개념 전쟁의 형태로까지 가열되고 있다. 이에 비해 조경 쪽에서는 그간 이들에 필적할 만한 정책적 담론 제시가 미약했다. 뼈아픈 고백이지만 조경의 기원에서 최근의 급성장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외부의 정치·경제적 계기와 여건에 편승하여 발전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 스스로 창출한 가치와 담론, 그에 의한 사회적 수요의 견인은 상대적으로 희박했던 것이다. 그 이면에는 조경 지성의 현실 인식의 부재, 이론 연구의 부재가 있었다. 이것이 과거 한국 조경의 대외 정책의 리얼리티였다. 다음으로 대내적 현실을 보자. 교육·연구 분야와 계획·설계 분야의 현실에 대한 많은 지적이 있어왔으나, 주요 쟁점들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문제가 계속 잠복되어 온 상태다. 특히 현재 50여 개 대학에서 행해지는 교육·연구의 틀은 조경 40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고식적·획일적이며 실무와 연동되지 못하여 개혁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대표적인 지적이었다. 계획·설계에 있어서는 생태적 접근이든 예술적 접근이든 아직도 ‘그림 같은’ 녹색 낭만주의에 머물러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반복되어 왔다. 내가 보기에 조경 교육과 연구의 기본적인 한계는 조경의 본질적 가치인 지역성과 현장성을 등한시한 데 있었다. 특히 이론 연구에 있어서는 1980년대 이래 미국발 실증주의의 프레임에 의한 추상적논리가 아직도 연구 방법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또한 지적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생생한 현장의 구체성을 수리적 예측 모형으로 추상화시키는 반면 조경의 전통적인 인문적·예술적·미학적 가치를 위축시킴으로써 조경 교육과 연구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이론 연구와 계획 설계의 연동성을 약화시켜 왔다. 계획·설계의 경우, 새로운 프로세스와 표현 방법에도 불구하고 많은 결과물이 반복해서 낭만적 자연주의에 그치고 있다. 이는 수요층의 완고한 보수적 관점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결국 냉정하게 말하자면 조경가들의 시대 정신의 인식 부족과 실험 정신의 부족 때문이라고 기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조경 문화의 정체성 결핍을 타개할 수 있는 한 방안으로 새삼스럽게 사실주의의 회복, 리얼리티의 복권을 거론하고 싶다. 사실주의란 문예사에 있어서 낭만주의와 근대주의 사이에 위치하여 후자를 태동시킨 계기적 사조로서 근대 이전의 이상주의를 타개하고 동시대의 사회문화적 현실 그 자체에서 미적 가치를 발견하고 표현하려 한 태도를 말한다. 미술의 여러 인접 장르 중에서 유독 조경 디자인은 사실주의를 건너뛰었다. 조경사조에서는 이 부분이 공백이었는데, 최근에 이르러 설치 미술이나 팝아트 등을 적용한 조경의 등장과 함께 일상의 세속 환경을 모티브로 채택하는 작품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신사실주의적 조경이 대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피터 라츠가 설계한 철강 공장 공원의 장중한 회고적 리얼리즘을 지나서, 최근 세상을 크게 한방 때린 아르헨티나 출신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의 수퍼킬렌Superkilen 공원이 대표적인 예다. 바닥에 그린 전위적 페인팅, 다문화적 낙서 그림과 같은 이 공원은 마치 미국 지하철의 낙서 화가 바스키야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실험적 경관을 통해서 주변 문화 집단의 다양한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한다. 나는 다른 글에서 한국 최초의 사실주의적 공원으로 쌈지공원을 든 바 있는데, 최근의 도시재생 운동과 함께 도시 가로와 골목길의 생활 환경을 주민과 함께 재탄생시키는 현장 지향적 리얼리즘이 점차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는 시대 정신의 반영으로 보인다. 조경 운동도, 교육과 연구도, 설계도 이러한 최근의 리얼리스틱한 흐름을 주의 깊게 보고 현장 연구를 통해 조경 독자적인 창의적 방법론을 세울 필요가 있다. 당장 큰 사업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나 이 속에서 그동안의 조경의 거품과 리얼리티의 빈곤을 반성하고 보다 윤리적인, 그래서 조경인과 시민이 함께 행복한 차세대 조경의 싹을 키울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이를 도시 전역으로 확장시키면서 새로운 도시의 경관 양식의 창조를 조경이 주도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이 글이 아직 레알에 이르지 못한 가설이라 하더라도. 김한배는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한국조경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우리 도시의 얼굴 찾기』 외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고, ‘도시 환경 설계의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사조에 관한 고찰’,‘혼성적 환경 설계의 기원과 전개’, ‘동양 그림의 경관관이 작정원리에 미친 영향’ 외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미술과 조경, 도시경관 양식의 상호 관계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 [에디토리얼] 편집된 공간
    방배동에 짐을 푼 지 한 달 반이다. 『환경과조경』 식구들의 행동 반경이 슬슬 넓어지기 시작했다. 마감에 쫓기더라도 매끼를 배달 음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주일 전에는 요즘 뜨고 있다는 ‘사이길’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간식이라고는 맥주밖에 모르는 남기준 편집장도 이곳에서는 수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방배동 사이길은 함지박사거리 근처에서 서래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작은 골목길이다. 입에 쉽게 붙는 길 이름은 도로명 주소 ‘42길’을 그대로 사용한 것인데, 20세기 초의 옛 지도에서도 이 길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강남에서는 보기 드물게 시간의 흔적이 쌓인 장소다. 300미터 남짓한 거리지만 느긋하게 산책하며 커피 한 잔 하거나 아이 쇼핑을 즐길 수 있는 골목이다. 당근 케이크로 유명한 동네 빵집, 개성 강한 가죽 수제품 가게, 발길을 유혹하는 아트갤러리, 제작과 판매를 같이 하는 향수 공방, 빈티지 소품 가게와 디자인 편집 숍이 적당한 여유와 밀도 속에 늘어서 있다. 건축가나 조경가가 폼 잡고 설계한 공간이 아니다. 과하지 않게 디자인된 잡지처럼 자연스럽게 잘 “편집된 공간”이다. 허나, 아쉽지만, 뻔하다. 매체를 조금 더 타고 셀카족 언니들이 더 많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이 사이길도 예의 ‘길 시리즈’처럼 대기업 프랜차이즈 숍에 점령당할 것이다. 가로수길처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더 세련되고 쾌적하게 개선하자는 심산으로 조경가를 불러 가게 앞에 녹지를 끼워 넣으면, 건축가가 폼잡고 손을 대면, ‘걷고 싶은 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보차를 분리하거나 없던 인도를 억지로 만들면,이런 길이 오히려 망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전문가의 디자인이 자연발생적인 공간 편집을 망쳐놓은 사례를 무수히 목격해 왔다. 진한 농도의 수제 밀크 아이스크림콘이 녹아내릴 때쯤, 토포텍 1Topotek 1의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에게 사이길을 설계 사이트로 맡기면 어떤 기막힌 아이디어를 내놓을지 궁금해졌다. 이번 호 특집을 위해 몇 달째 토포텍 1을 붙잡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례적으로 100쪽의 지면을 할애한 토포텍 1의 작품들에 독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기다려진다. 토포텍 1처럼 평가가 엇갈리는 동시대의 조경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생태, 과정, 작동 등과 같은 최근의 설계 이슈가 이제 지겨우시다면, 라인-카노라는 쟁점적 인물과 그의 문제작들을 놓고 모처럼 신선한 토론을 즐겨보시길 권한다. 강렬한 패턴과 고채도의 색과 굵은 선으로 가득한 토포텍 1의 작품은 과격하고 도발적이다. 꼭 포르노그래피를 보는 느낌이다. 재작년 여름에 만났던 코펜하겐의 수퍼킬렌Superkilen은 숨이 막힐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데뷔작인 스카이 가든Sky Garden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라인-카노의 많은 작품들은 ‘시각적’ 어필만을 위해 원색과 강한 선으로 ‘바닥’에 마음껏 그림을 그렸군, 하는 첫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렇게 한방에 단언해 버리며 책장을 덮을 일은 아니다. 토포텍 1의 작업을 가로지르는 핵심은 ‘표면 전략surface strategy’이다. 3차원의 공간에 대한 관심보다는 지구의 표면, 즉 바닥에 주목한다. 설계의 대상이 정원이건 공원이건 광장이건 넓은 대지이건 간에, 라인-카노는 그것을 무언가를 채워야 하는 공간이 아니라 하늘과 만나는 이차원의 표면, 즉 바닥으로 환원한다. 표면으로 환원된 공간을 그는 시각적으로 ‘편집’한다.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때로는 통제된 규칙을 허물고 자유를 얻기 위해. 이러한 편집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 그의 일관된 ‘그래픽 비전graphic vision’이다. 토포텍 1의 작품들은 물리적 스케일이나 표면 질료의 성격과 상관없이 늘 그래픽적이다. 의도적인 선형 패턴의 그래픽을 통해 시각적 편집을 넘어서는 역사적·문화적 편집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리스의 신전, 모로코의 분수, 팔레스타인의 토양, 프랑스 정원의 자수화단, 영국 풍경화식 정원의 낭만, 일본 정원의 사색, 중국 정원의 정자 등 이질적 역사와 문화의 성분이 편집된다. 라인-카노의 작업은 표면이라는 같은 텍스트에 그래픽이라는 같은 매개체를 투입하여 이종의 가치와 복수의 문화가 교배된 새로운 콘텍스트를 편집해낸다. 그의 디자인에 단 하나의 개념을 달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편집’일 것이다. 편집 앞에 조금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자면 ‘미학적’보다는 ‘사회학적’이 오히려 나을 것 같다. 잘 편집된 공간 사이길에 토포텍 1의 편집된 공간들을 엎고 섞다 보니, 불현듯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편집”이라는 김정운의 구라가 그럴듯하게 와 닿는다. 이번 마감이 끝나면 요즘 잘 팔린다는 그의 신간 『에디톨로지』를 날라리 책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한번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그나저나 이번 호가 잘 편집된 잡지일지, 근심이다.
  • [CODA] 오답
    “『환경과조경』이 토포텍 1TOPOTEK 1(이하 토포텍)을 밀어주는 이유가 뭐죠” 토포텍 특집이 장장 100여 쪽에 걸쳐 수록되었기 때문에 나온 물음은 아니다. 2월호 잡지가 막 서점에 깔리기 시작한 1월 29일 열린 ‘서울역 7017 프로젝트’ 기자회견장에서 공식 발표된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 탓이다. 지명 초청된 일곱 명의 작가 중 토포텍의 수장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가 포함되었는데, 누가 봐도 시기가 참 공교로웠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첫 번째, ‘저의가 뭐냐’는 의심의 눈초리파. 잡지 리뉴얼 이후는 물론이고 그 전에도 이 정도 분량으로 특정 오피스를 다룬 적이 없는데,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서울역 고가의 초청 작가가 발표된 시기에 맞춰서 이렇게 상세하게 토포텍을 다룬 의도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두 번째, ‘안 그래도 궁금했다’는 호기심 해소파. 국내 작가 3인(조민석, 조성룡, 진양교)과 MVRDV의 비니 마스Winy Maas는 알겠는데, 장영호Chang Yung Ho(Atelier FCJZ)나 후안 헤레로스Juan Herreros(estudio Herreros), 마르틴 라인-카노의 작품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아서 어떤 성향의 작가인지 궁금했는데, 그중 한 명이 특집으로 다루어져서 궁금증이 일부 풀렸다고 했다. 이외에 ‘서울역 고가와 토포텍이 무슨 관계가 있죠’라고 되묻는 이들도 적지않았다. 2월호의 코다CODA 지면을 통해 김정은 팀장이 밝혀놓았듯, 토포텍 특집은 다섯 달 전부터 이른바 겨울 춘궁기용으로 저장해 놓은 아이템일 뿐이다. “사진은 가을 풍경인데, 왜 대담에서는 겨울철에 방문했다는 대목이 나오는 거죠” 디자인 엘의 작품과 박준서·오형석 소장의 대담이 편집된 교정지를 본 어떤 이가 물었다. 조경 잡지는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가 국내 작품 춘궁기에 해당한다. 한겨울 풍경을 선호하는 이들도 일부 있겠지만, 아무래도 겨울철 외부 공간 촬영은 여러 이유로 꺼려진다. 국내 작품 촬영은 이 시기에는 올스톱된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9월부터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한 궁리와 섭외가 시작된다. 토포텍 특집은 단행본 출간 제의가 특집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겨울로 미뤄둔 경우이고, 이번호에 실린 디자인 엘의 한국동서발전 신사옥과 엔씨소프트R&D 센터는 미리 섭외와 촬영을 해놓은 케이스다. 판교에 있는 엔씨소프트는 작년 10월 15일에, 울산에 위치한 한국동서발전은 10월 28일에 촬영해 놓았다가 이제야 소개한다. 하지만 대담은 본격적으로 3월호 작업에 돌입하기 시작한 1월 30일에 이루어졌기에, 가을 사진임에도 겨울 이야기가 등장했다. “뭐, 재미있겠네요. 그런데 이런 형식이 전에도 있었나요” 대담자로 모신 오형석 소장(디자인로직)이 섭외에 응하며 던진 질문이다. 최소한 내 기억으로는 처음이라고 답했다. 작품을 소개하며, 그 작품을 주제로 설계자와 또 다른 조경가가 일대일로 이야기를 나눈 경우는…. 가장 비슷했던 경우는, 작년 2월에 실린 김이식 소장(이화원)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힐 가든’과 그에 대한 허대영 소장(스튜디오 테라)의 비평인 ‘가장 보통의 미술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우리는 허소장을 섭외하며, 이른바 ‘동료 비평’ 콘셉트라고 소개했다. 같이 설계를 하는 입장에서만 할 수 있는 코멘트가 분명히 있지 않겠느냐고 꼬드기면서…. 박준서·오형석 소장의 대담과 마찬가지로 김이식·허대영 소장도 한 테이블에 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다만 허소장이 이야기를 듣고 별도로 에세이를 써 내려간 것과 달리, 이번 대담은 그 자체가 고스란히 지면에 옮겨졌다. “이번호는 왜 유난히 마감 일정이 빠른 건가요” 어느 필자의 하소연이다. 하소연은 정말이지 우리가 하고 싶다. 하필, 설 명절이 마감이 절정으로 치닫는 2월 중순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어서다. 빼도 박도 못할 일정이다. 더구나 5일 연휴다. 엎친 데 덮친 까닭은 2월 달이 28일까지밖에 없다는 슬픈 사실이다. 게다가 올해는 28일이 토요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27일에는 잡지가 나와야 한다는 의미다. 지난달보다 5일 빨리 마감을 시작했지만, 일정을 맞추기가 녹록치 않다. 결국 편집주간부터 막내인 양다빈 기자까지 모두가 연휴 마지막 날인 일요일 출근부에 도장을 찍었다. 10년 넘게 잡지를 만드는 동안 2월이 되면 늘 누구에게랄 것 없이 하소연을 쏟아냈다. “도대체 누가 2월 달은 28일로 달력을 만든 거야” “편집주간이 일요일에도 나오세요” 지면에 담기에 적절한 소재는 아니지만, 은근히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한다. 작년 1월호부터 에디토리얼을 쓰며 등장한 ‘편집주간’이란 직함을 갖고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잡지 제작에 실제 참여하고 있는지를…. 구구절절 써놓으면 교정 단계에서 이 대목이 통째로 날아갈 수 있으니, 특집 기획, 필자 섭외, (간헐적으로) 국내 작품취재, 수록되는 모든 원고의 교정 정도를 하고 계시다고, 짧게 답해 둔다. 제목인 ‘오답’은 5문 5답에서 ‘5문’을 생략한 의미이기도 하지만 오답誤答, 즉 잘 못된 대답이란 뜻도 있다. 독자들이 정작 궁금해 하는 것은 이런 시시콜콜하고 시답잖은 뒷이야기가 분명 아닐 터이니 말이다. 언젠가 정색하고, 한 번 답해볼까 한다.
  • [편집자의 서재]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도시의 사람들
    텍스트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하지만, 사실이 세상엔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다. 때로는 텍스트가 가장 적절한 매개medium가 아니기도 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도시의 사람들Citizens of No Place』은 그러한 “감수성 강한 생각들”을 만화라는 매력적인 방법을 통해 표현한다. 그렇다. 이 책은 ‘만화책’이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대사로 시작된다. “잠깐, 자네말은 잔디가 나쁘다는 건가” 당신이 들고 있는 ‘이 잡지’에 가장 많이 나오는, 그래서 이젠 텍스트에 언급조차 되지 않는 그 잔디를 ‘까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갑자기 지구가 멸망한다(물론 잔디 탓은 아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1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찾아 떠난다. 시나리오만 보면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지구를 찾는 일에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중력이 없다는 것, 그런 조건에 맞는 새로운 주거 형태가 필요하다는 것과 같은 플롯plot의 기본 바탕이 되는 설정일 뿐이다. 제2의 둥근 땅을 향하고 있는 ‘노아의 방주 우주선’에서 어린 건축가는 그의 인스트럭터instructor에게 자신이 포인트 클라우드point cloud1 기법을 통해 만들어낸 새로운 주거 형태를 제시한다. 그는 34컷에 걸쳐 복잡한 수식과 ‘있어 보이는’ 다이어그램을 설명하지만, 인스트럭터는 단 두 개의 문장을 덧붙일 뿐이다. “직관적인 것에 대해 그렇게 객관적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네. 그냥 마음 편하게 그렇게 하고 싶어서 했다고 인정하면 어떨까” 젊은 건축가의 동공이 확대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여기서 만화라는 매개의 장점을 찾아낼 수 있다. 히메네즈 라이Jimenez Lai는 만화의 형식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려 한다. 텍스트가 아닌 ‘그림과 대사’를 통해 서술과 묘사, 그리고 비판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이 어떤 관계이고 무엇에 관심이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양한 질문을 하도록 유도한다. 많은 설계가가 단편적인 조사 결과를 일반화하고 모듈module화시켜 적용하려는 성급한 태도를 지적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설계를 하는데 있어, 논리가 직관적인 결과물의 ‘설명을 위한 설명’으로 ‘생산(혹은 편집)’되는 현실을 비꼬고 있는 것일까(젊은 건축가는 직관적 결과물을 소개하기 위해 ‘논리’를 끼워 맞췄을 수도 있다)1,187일 하고도 17시간이 지난 어느 날. 이 젊은 건축가는 다시 한 번 인스트럭터를 마주하게 된다. 인스트럭터는 젊은 건축가가 들고 온 ‘단면 위주의 계획’을 비판하며, “(평면은) 전일주의Holism적으로 생각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현명하게 콘텍스트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젊은 건축가의 답변이 이어진다. “하지만 평면은 인간은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신의 시각으로 보게 되잖아요.” 옳고 그름을 떠나 나는 이 순간 ‘통쾌함’을 느꼈다. 물론 평면은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데 있어보다 편리하고, 조건 별로 구분하여 공간을 더욱 잘 알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객관성이 진정으로 객관적인가? 평가를 위한 매개가 경험의 질을 보장해 주지 않는 다면 그 매개는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분명 흥미로운 평면은 정리된 모습이고, 많은 정보를 담고 있지만 (1인칭 관점에선) 재미없는 모습이 되기 쉬운 것은 아닐까? 그에 반해 흥미로운 단면은 정보가 부족할 수는 있지만, ‘공간에서의 경험’으로서는 보다 많은 가능성을 가진 것이 아닐까? ‘내 이야기’로 돌아오면, 설계를 공부하면서 많은 의구심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런 의구심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받아본 적이 없다. 35세의 젊은 건축가 라이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일까? 그는 그의 의구심을 서로 다른 (그러나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10개의 이야기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며 말 그대로 ‘별 말 없이’ 풀어놓는다. 이 ‘만화책’은 건축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공간을 다루거나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으며 당신이 들어왔던 것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 글을 읽고 페이퍼 프로젝트paper project만을 진행해 온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네려 할 수도 있겠지만. “이봐. 그건 네[니] 생각일 뿐이야.
  • [시네마 스케이프] 와일드 황야에서 길을 묻다
    영화가 시작되고 5분 만에 나는 후회했다. 그녀가 첫 발을 내디디며 내뱉은 첫 대사처럼.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와일드Wild’(2014, 한국에서는 2015년 1월 개봉)는 스물여섯살 먹은 여자 혼자서 자기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지옥의 트래킹 코스라불리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하 PCT)을 완주한 실화를 그린 영화다. PCT는 미국 서부 태평양 연안의 긴 등산로로 남쪽의 멕시코와 접한 캘리포니아 주에서 북쪽의 캐나다와 접한 워싱턴 주까지 이어지는 장장 4,285km의 코스다. 사막, 눈덮인 고산 지대, 광활한 평원과 활화산 지대까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자연 환경을 거쳐야 완주할 수 있다. 실재 인물인 셰릴 스트레이드Cheryl Strayed는 평균 150일 정도 걸리는 코스를 94일 만에 완주했다. 해피엔딩을 알고도 영화를 보는 이유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역경을 딛고 결국 목표를 성취해내는 주인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거나,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은 대자연의 멋진 경관을 관찰자 시점에서 감상하게 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예상을 빗나간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후회가 밀려오더니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동행이 있었다면 소주라도 한잔하면서 가슴속 돌덩이를 부숴야 할 것 같았다. 응어리를 품은 채 며칠이 지났다. 카타르시스는 대체로 관객이 주인공의 결핍에 동의하거나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할 때 충족된다. 장 마크 발레Jean Marc Vallee 감독은 주인공이 겪은 과거를 시간 순서로 설명하지 않고 현재의 여정 중간에 행복했던 기억, 지우고 싶은 순간을 파편적으로 교차시킨다. 다 자란 성인 여자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토록 스스로를 바닥까지 내몰았으며 무엇이 그녀를 지옥의 트래킹 코스로 오게 했을까. 평균 150일 넘게 걸리는 코스를 94일에 완주할 때 겪을 법한 육체적 한계에 대한 묘사는 그리생생하지 않다. 발톱이 빠져 피투성이가 된 발을 샌들에 의지한 채 다시 걸을 뿐이다. 그녀의 어깨와 등에 난 상처만으로는 배낭의 무게감을 느끼기 어렵다. 오히려 온전히 홀로인 그녀의 외로움과 그녀 내면의 상처가 그녀가 짊어진 짐보다 훨씬 무거워 보인다. 물리적인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보여주기보다는 내면의 상처를 끊임없이 노출시킨다. 관객은 그녀의 쉽지 않은 여정에 꼼짝없이 동참할 수밖에 없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젠틀맨의 놀이터
    #39 ‘하하’의 존재 이유 스토우Stowe 정원이 어느 정도 자리 잡혀 가자 윌리엄 켄트William Kent는 라우샴Rousham 정원과 스타우어헤드Stourhead 정원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은 모두 켄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정원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화식 정원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조경사를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켄트의 세 대표작, 스토우 정원, 라우샴 정원, 스타우어헤드 정원을 접하게 된다. 당시에 이들 정원은 ‘아방가르드’ 정신의 산물로 이해되었다. 완전히 새롭고 모던한 것이었다. 당시 켄트의 정원을 접한 사람이라면 모두 그의 정원을 따라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제 자신의 영지를 풍경화식으로 개조하는 젠틀맨1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1730년대 젠틀맨 클럽의 가장 큰 화제는 ‘정원 만들기’였다. 1739년에 발행된 『커먼 센스Common Sense』2라는 저널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요즘은 젠틀맨이 모이면 인사를 나눈 뒤 바로 ‘나는 요즘 시멘트와 흙을 가지고 노느라 여념이 없네’라고 자랑하기 일쑤다.” 이 무렵 풍경화식 정원은 한국에서 한창 유행하던 골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유행이 되다 보니 본래 스토우 정원에서 추구했던 정치적, 사회적 이상을 담은 이념성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누가 정원 건축물을 더 근사하게, 더 많이 세우는가 경쟁이 벌어졌고, 그림처럼 픽처레스크하게 만드는 데 모두들 주력하는 듯싶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예를 들어 페트레 남작Lord Petre (1713~1743)처럼 식물 수집, 재배와 배치에 전념하는 경우도 있었고, 캐롤라인 왕비가 켄트에게 넌지시 언질을 주었던 ‘풀 뜯는 소와 밭 가는 농부의 평화로운 장면’을 그림에 포함시키고자 애쓰는 젠틀맨도 적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를 두고 ‘장식 농장ornamental farm’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영국의 풍경화식 정원이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작게는 몇십만 평에서 크게는 몇백만평까지 이른다. 그렇다면 직업을 갖지 않고 물려받은 재산만으로도 먹고 살만큼 당시의 젠틀맨이 돈과 시간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대체 어떻게 그 넓은 땅에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정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이미 기초적인 풍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원의 이상적 모델로 부상했던 ‘목가적 풍경’이 사실은 영국의 전원을이미 지배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미 중세부터 주요한 양모 수출국이었으므로 드넓은 목초지가 있었고 사냥과 목재생산을 위한 깊은 숲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지를 적시며 흐르는 강물이 있었고 강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었으며 물을 막아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길렀다. 이러한 환경은 중세의 장원에 필수적인 요소들이었다. 게다가 이 풍경의 소유주였던 지주 계급의 젠틀맨은 이미 근사한 저택과 비록 ‘구식’이나마 넓은 정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기존의 정형식 정원을 철거하고 새로 지을 것인가 아니면 그에 잇대어 풍경화식으로 지을 것인가 등이 었다. 보통은 기존의 정형식 정원을 그대로 두고 토지를 더 할애하여 풍경화식으로 꾸미는 경우가 많았다. 본래의 경관이 워낙 훌륭하다보니 스타파주staffage를 배치하고 자연스러운 형태로 연못을 파고 수목을 적절히 심어주면 원하던 풍경이 어느 정도 연출됐다. 본래는 정원과 그 외곽에 펼쳐지는 전원 풍경을 구분하기 위하여 정원 주변에 담장을 두르곤 했으나 자연스러운 풍경을 추구하다 보니 담장이 눈에 거슬렸다. 정원과 외곽의 전원 풍경이 서로 단절되지 않도록 ‘하하ha-ha’라는 ‘선큰담장 시스템’을 도입했다. 하하는 풍경화식 정원의 발명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프랑스의 데자이에 다르장빌Antoine-Joseph Dezallier d’rgenville (1680~1765)3이라는 바로크 정원가가 처음으로 선보였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 1695년에 영국에서 일하던 어느 프랑스 정원가가 선큰 담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 미뤄 보아 프랑스에서는 이미 선큰 담장이 꽤 실용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엄격한 바로크 정원과 주변의 과수원, 농장을 구분하기 위해 적용했다. 데자이에 다르장빌은 1709년, 『정원 조성의 이론과 실제La Théorie et la Pratique du Jardinage』라는 방대한 내용의 책을 발표하고 선큰 담장의 원리를 설명했다.4 이 책은 1712년 영어로 번역되었다. 스티븐 스위처Stephen Switzer(1682~1745)라는 런던의 정원가가 그 책을 읽고 선큰 월의 아이디어가 썩 쓸모 있다고 여겼다. 당시엔 아직 ‘하하’라는 용어가 없었고 다만 ‘움푹 들어간 담장’으로 설명했다. 스위처는 1718년에 발표한 자신의 정원 서적에서 다르장빌을 인용하고 스케치까지 정성스럽게 그려서 삽입했다. 스위처는 젠틀맨 클럽에 끼지 못하는 정원가였다. 젠틀맨이 모두 두 팔 걷어붙이고 정원을 만들던 시대였으므로 스위처 같은 정원가들은 그늘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스위처 또한 위탁을 받아 조성한 여러 정원이 있지만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 랜슬롯 브라운Lancelot Brown(1716~1783)이라는 젊은 조경가가 홀연히 나타나 스위처가 만든 작품들을 쓸어버리고 자기 방식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처가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부지런히 글을 썼기 때문이다. 오랜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평생에 걸쳐 쓰고 발표한 정원 이론을 묶으니 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서적(『Ichnographia Rustica』)이 되었다. 후세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스위처의 업적이 과소평가되고 있으니 재평가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윌리엄 켄트의 전임자 찰스 브리지맨Charles Bridgeman(1690~1738)5이 스토우 정원에 처음으로 하하를 도입했고 초기에 그와 함께 일했던 윌리엄 켄트가 이를 정원 전체 경계로 확장했다. 이들의 작업을 옆에서 꾸준히 지켜보았던 호레이스 월폴 경Horace Walpole(1717~1797)6 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정원의 경계를 허물고 그 자리에 도랑을 판 뒤 그 안에 담장을 세운다는 아이디어는 실로 기발했다. 별 생각 없이 산책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움푹 들어간 담장을 만나면 ‘하! 하!’라고 감탄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7 감췄다고 해서 담장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담장이나 울타리는 본래 방목지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을 보호하기위해 세웠다(이어지는 ‘인클로저-풍경의 사유화 과정’ 참조). 정원 문화가 발달하면서 정원과 전원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가축이 정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울타리로 정원을 둘렀다. 풍경화식 정원에서는 이를 도랑 속에 감추어 마치 정원과 전원이 하나의 풍경인 것처럼 눈가림했고 이렇게 탄생한 하하의 기막힌 눈속임은 지금도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분노한 환경주의자들이 산업 재벌의 영지에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하고 서민과 권력자 사이의 경계를 ‘민주적’으로 위장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도시 밖의 도시, 도시 안의 도시
    제기동, 구로4동, 황학동 제기동 약령시장, 남구로역 주변의 빌라 지구, 황학동 중앙시장과 같은 지역을 거닐다 보면, 언뜻 유사해 보이는 서울 내 저층 고밀지의 다채로운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기동 청량리역에 인접한 약령시장과 청과물시장 일대는 1934년 6월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조선시가지계획령’에 따라 서울 밖 교외 주거지로 낙점된 곳이다.1 이후 1980년대까지 지속된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양호한 주거지 조성을 위한 기반 시설이 들어서지만, 온전한 주거지로 자리를 잡기보다는 1960년대 전후부터 전국의 약재상과 청과물 도소매 상인의 주요 활동 무대로 널리 이용된다(그림1). 황학동에는 한국전쟁 이후 벼룩시장이 개설되었고, 이는 점차 주방 기구부터 각종 식자재와 양곱창을 판매하는 초대형 재래시장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기서는 물품 판매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식당을 개점하려는 자영업자들에게간판과 메뉴, 식자재와 주방 용품을 포함한 원스톱 창업 컨설팅도 제공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왕십리 뉴타운과 청계천 변 주상 복합 개발, 그리고 동대문 패션 상가의 변용과 함께 황학동은 도심 속 변두리 공간으로 서서히 쇠퇴하고 있다(그림2). 구로동은 개발이 본격화되지 않았던 1960년대 초 서울시 정책에 따라 영등포 부도심권의 커뮤니티 센터—이를테면 불광동이나 수유동과 유사한 기능—로 지정되었다.2 비교적 영세한 주택지가 우선 개발된 후, 1990년대 다세대 주택과 아파트가 집중적으로 들어서면서 서울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남게 된다.3 그럼에도 토지구획정리가 일괄적으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격자형과 자연 발생형 가로가 혼재되어 있고, 과소 필지와 부정형 필지가 다수 남아 있다. 여기까지는 세 지역이 어떻게 서로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신시가지로 조성된 서울의 구시가지 세 지역은 이러한 차이점과 함께 흥미로운 공통점을 가진다. 모두 20세기 중반 사대문 밖 ‘신시가지’로 개발된 21세기 서울의 저층 ‘구시가지’라는 점이다. 이들 대상지는 1920~1940년대까지 논밭이었거나 혹은 일부 가옥이 점유하고 있는 미개발지였다. 도심부 인근이라 고용 중심지로부터의 접근성이 좋았고, 넓고 평평한 배후지를 갖고 있어 해방 전후 신시가지 개발을 위한 적지로 여겨졌다. 1940~1960년대 이후 주요 시가지 개발이 시작되면서 다양한 사회적 계층의 사람들이 유입되었다. 현재 다수의 노후화된 주택과 퇴색한 상업 판매 시설이 뒤섞여 있고, 이 지역 안팎으로는 각종 뉴타운과 지식 산업 단지가 개발 중이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이러한 서울의 구시가지는 기성 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있는 ‘낀 세대’다. 수백 년에 걸쳐 역사 문화 자원을 축적한 구도심이나 현대적인 감각으로 단장한 신시가지 사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어정쩡한 주변인이다. 늘 전환기의 위기에 내몰리면서도 구도심과 신시가지가 누리고 있는 각종 혜택으로부터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는 오래 거주한 사람과 철새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뒤섞여 있어 상인들의 결속력도, 거주지의 사회적 자본도 취약한 편이다. 생활 환경에 대한 만족도가 아주 낮지는 않지만 대체로 쇠퇴가 진행 중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던 판매 시설 임차인들마저도 상권 쇠락에 따른 무력감을 호소한다(그림3). 그럼에도 전면 철거 후 재개발의 대상이 될 만큼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지는 않다. 토지 소유 구조도 매우 복잡하고, 더욱이 최근 왕십리 뉴타운과 같은 21세기형 재개발로부터 20세기의 저층 시가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신시가지의 구시가지화 이렇게 오늘날 서울의 구시가지는 대체로 전환기의 주변인으로서 정체와 쇠퇴, 그리고 가까운 과거에 대한 향수와 복고가 공존하는 장소다. 그렇지만 이 지역은 ‘개발이냐 보존이냐’는 식의 이분법적 처방전이 요구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과거의 신시가지가 오늘날의 구시가지가 되면서 때로는 낙후되고 때로는 새로운 수요에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으로 도시다운 특질을 갖게 된다고 믿는다. 도시 공간의 낡음과 닳음, 개별 건축물에 대한 다시쓰기와 고쳐쓰기, 그리고 새로운 용도를 담기 위한 점진적 재개발을 통해 소박하지만 자연스러운 멋과 일상의 격이 자리를 잡을 여지가 생긴다. 이렇게 성숙미를 더해가고 있는 지역의 사례는 국내외 여러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 맨해튼 동쪽에 있는 브루클린이 그러한 예다. 최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브루클린 브랜드Brooklyn brand’나 ‘브루클린 라이프 스타일Brooklyn lifestyle’이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4 런던에 위치한 복합 문화 클럽인 ‘브루클린 볼Brooklyn Bowl’, 스톡홀름에서 맛볼 수 있는 ‘브루클린 맥주’, 독일과 스위스 등에서 널리 판매되고 있는 ‘브루클린 스펙터클즈Brooklyn Spectacles’ 안경은 브루클린 브랜드가 해외 수출에 성공한 사례다. 더 이상 값비싼 맨해튼에 대한 저렴한 대체재로서가 아니라 재능 있는 예술가나 젊은 창업가, 스타일리스트가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여겨지면서 브루클린은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브루클린이 처음부터 이러한 지역성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다. 브루클린은 1810년대 맨해튼에서 증기선이 왕래하기 시작하면서 새로 개발된 신시가지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뉴욕 외곽에 만들어진 신규 교외 주거지이자 지금의 구시가지인 셈이다.5 1920년대 자동차의 대중화와 함께 폭발적인 도시화를 겪었지만, 20세기 후반 지역의 쇠퇴와 함께 각종 폭동과 사회 문제의 진원지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시가지가 구시가지로 변하면서 새롭게 형성된 지역성이 오래된 지역성을 대체하고, 부분적인 증축과 재개발이 이루어지게 된다. 나아가 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적 구성원이 이러한 변화를 주도할 때 비로소 모방하기 어려운 도시의 품격이 발현된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새로운 현실 SBS 프리즘 타워 조경에 대한 몇 가지 소고
    아카데미의 지원 김정윤(이하 김): 양화한강공원 프로젝트를 마치고 난후,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글림처 특훈 교수Glimcher Distinguished Professor로 방문해 달라는 내용이었죠? 박윤진(이하 박): 포트폴리오를 제출한 후 파이널 리스트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초청받고 보니 우리 같이 젊은, 그것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 작가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것에 무척 감사했습니다. 그 전 초청자들은 피터 워커Peter Walker, 켄 스미스Ken Smith, 마이클 반 발켄버그Michael Van Valkenburgh 등 미국에 주요한 업적을 남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landscape architect들이었습니다. 김: 심지어 우리 다음해에는 아드리안Adriaan Geuze이 초청되었죠? 박: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아드리안의 후학인데, 후학이 선학보다 먼저 초청받은 경우네요. 김: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오하이오 대학교의 결정에는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겠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스토스Stoss의 크리스 리드Chris Reed도 우리의 경우와 비슷한 의도에서 선정되었다고 했지요.아무튼, 친환경 재생 에너지에 관한 스튜디오를 진행했고, 우리의 강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요. 대강당이 거의 꽉 찼고, 반응도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양화 프로젝트에 관한 질문이 많았고, 당시 건축학과장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나무를 뽑는 아주 나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What a bad landscape architect!라고 말입니다. (하하) 박: 힘든 프로젝트를 마치고, 그것의 과정과 결과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격려해 주었고, 이분야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생기는 순간이었습니다. 김: 또한 어너레리움honorarium(상금)도 그 당시 우리 사무실 수익보다 좋았지요? 박: 그렇습니다. 다음해인 2012년에는 호주 멜버른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전시와 특강, 워크숍을 진행했죠. 우리가 싱가포르에서 윌리엄 림William Lim과 출판한 『강남 대체 자연Gangnam Alternative Nature』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서울의 정체성을 한옥이나 과거의 패브릭이 남아있는 강북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 일반적인 연구 동향이었던 반면, 우리는 그것을 강남에서 찾은 것이죠.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2012~2013년에 유행했으니까, 그 전에 강남을 세계에 알린 셈이네요. 물론, 아주 다른 방식으로 말이죠. 사실 저와 김대표 모두 어린 시절을 강남에서 보냈으니,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멜버른대학교로부터 가족 동반 비즈니스석 티켓, 최고의 숙소와 시급 그리고 귀빈 만찬까지, 싸이 급에는 못 미쳤겠지만, 디자이너로서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김: 멜버른 대학교의 젊은 교수들이 학장의 요구에 따라 전도유망한 아키텍트를 찾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포착되었다고 했지요? 일면식도 없던 초청 담당 교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왕슈王澍(당시에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중국의 건축가)도 몇 년 전에 같은 프로그램으로 초청했다며, “너희들도 프리츠커상을 받을 것”이라고 격려를 해주었지요. 박: 그리고 당시 강연도 매우 성공적이었죠? 청중은 400명 이상 왔었고, 청중과의 호흡도 매우 좋았습니다. 호주의 한 설계사무소 대표가 “우리 사무실은 규모가 작아 양화한강공원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설계사무소는 우리의 3배 규모였습니다. 무척 놀라더군요. (하하) 그리고 당시강연에서 만났던 건축과의 한국 학생들도 우리를 매우 자랑스러워했어요. 김; 네. 바쁜 일정으로 인해 밥 한 끼 사주지도 못했네요. 아무튼, 이 시점에 우리가 수행했던 프로젝트가 상암동에 위치한 SBS 프리즘 타워입니다. 미디어를 다루는 방송국의 속성상 브랜드와 아이덴티티가 중요하게 부각되었습니다. 클라이언트는 미디어 아트와 인테리어 그리고 외부 공간을 다루는 협업 팀 세 곳을 초청하여 지명설계공모를 진행했고, 결국 우리가 당선되었지요. 수퍼 클라이언트 박: 클라이언트의 의도가 흥미로웠어요. 상암동 미디어시티에 위치한 주변 다른 방송국 건물과 비교해 볼 때 건물의 형태, 기능 그리고 외장 등은 최대한 단순하게 설계하되, 외부 공간과 인테리어를 통해 방송국의 아이덴티티를 찾고자 했으니까요. 조경 면적이 200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정말 작은 공간이기 때문에 보통 관행적으로 하자면 설비나 토목에 끼워 넣어서 그저 나무 몇 그루 심고 마무리했을 만한 땅이잖아요. 우리에겐 이런 작은 공간을 기회의 땅으로 만들어 보고자 생각했던 클라이언트―수퍼 클라이언트(Super Client)―를 만난것 자체가 좋은 시작이었습니다. 김: 특히, 우리의 아이디어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박:설계공모 때 우리가 만들었던 초기 아이디어는 무엇이었죠? 김: 우리는 디자인 초기에 먼저 SBS의 목동 본사 건물과 그 주변을 리서치했어요. 민간 기업의 소유이지만 공공재라 할 수 있는 방송을 만들어내는 건물의 랜드스케이프는 방문자에게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목동 본사는 방송국의 로고만 있었을 뿐 공간적으로는 SBS만의 아이덴티티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프레젠테이션 제목도 ‘조경을 통한 SBS이미지 메이킹’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방송국을 어떻게 하면 공간을 통해 기억하도록 할 수 있을까에 중점을 두어 콘셉트를 잡았습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인 로비 바깥쪽 3m 폭의 길쭉한 땅을 ‘포디엄podium’이라 이름 붙이고 인접한 1층 로비와 연결되어 읽히도록 했죠. 그리고 정문과 후문부에 각각 특징적인 수경과 수직적 조경을 제안하여 미디어 아트와 반응하도록했고요. 박윤진은 하버드 GSD를 졸업하고 Sasaki Associates, West 8 등에서 실무를 쌓고 치치 지진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 당선을 계기로 김정윤과 함께 오피스박김을 설립하였다(2004). 미국 보스턴 건축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타이완 쉬이첸대학교(2007), 미국 하버드대학교(2008,2010), 오하이오주립대학교(2011), 호주 멜버른대학교(2012) 등에서교육, 전시, 강연을 위해 초청되었다. 김정윤은 서울대와 하버드 GSD졸업 후 네덜란드 West 8 등지에서 실무를 쌓았다. 네덜란드 조경건축사이며 바허닝엔대학교에 출강하였다. 차세대디자인리더(산업자원부2007), 광교공원 디자인커미셔너(2008), 서울형공공건축가(2011)로 선정되었고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놀튼건축대학원이 선도적 조경가에게수여해 온 글림처 특훈 교수(2011)로 임명되어 강의하였다.
    • 박윤진·김정윤 / 오피스박김 대표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파올로 뷔르기
    이탈리아와 맞닿은 스위스 남단의 작은 도시 카모리노Camorino에는 커다란 유리 온실 식물원을 방불케 하는 뷔르기 스튜디오가 있다. 넓은 잎을 드리운 열대 식물 사이로 띄엄띄엄 놓인 큰 테이블, 햇빛이 살랑거리는 나무 그늘 아래 회의를 여는 모습이 이채롭다. 부인이 운영하는 시공 회사도 함께 입주했다. 디자인-빌드형태로 작업해 온 탓인지, 파올로 뷔르기 프로젝트의 눈에 띄는 특징은 우선 단단한 완성도다. 간략하게 정제된 형태에도 불구하고 심심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풍부한 미니멀리즘’으로 요약될 수 있는 모더니즘적 장인정신 덕분일 것이다. 나아가 파올로 뷔르기의 작업이 평범한 미니멀리즘에 비해 탁월한 이유는 각각의 프로젝트에서 강한 지역성 또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과 지역성이 이처럼 드라마틱하게 만나는 사례는 흔치 않다. ‘억지스럽지 않은 무위無爲의 디자인’, ‘대상지의 핵심적 가치에 집중한 깊이’, ‘스스로를 드러내려 애쓰기보다는 그 너머의 무엇을 상상하게 하는 미스터리한 공간’. 그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체험할 수 있는 짧은 감상평이다. 험준하고 압도적인 스위스의 경관 덕분일까? 주위 환경에 딱 들어맞게 설계한 그의 프로젝트에서 느껴지는 대상지에 대한 깊은 존중은 종교적인 수준이라 할 만하다. 그가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án이 색채를 통해 빛을 매만졌다면, 뷔르기는 소재의 물성을 통해 빛을 조율하고 주변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카르다다Cardada 산 정상의 전망대에서 석양을 반사하는 티타늄 난간과 한 스위스 디자이너의 개인 정원에 놓인 잎갈나무 목재 벤치의 간소함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경솔함이나 과도함의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깨어있는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뷔르기는 “처음 스케치를 시작할 때 프로젝트의 방향이나 클라이언트의 요구, 형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대상지가 내 소유의 땅인 것처럼 여긴다”고 말한다. 또한 시간을 두고 드로잉을 묵혀가며 몇 번이고 돌아보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나간다고 밝히고 있다.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그의 공간에서 각각의 요소는 하나같이 묵직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마치 자연의 그것처럼, 뷔르기의 대지는 극도로 경제적이며 불필요한 것이 없다. 그는 ‘지평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결국 동양 조경의 ‘차경借景’을 말한다. 독립된 각각의 장소보다 그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평범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중성적인 경관을 해석하는 틀로서의 ‘조경’과 무언의 경관을 대화하는 공간으로 전이하는 ‘과정’이 바로 뷔르기 디자인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해석의 요체는 경관의 변화, 즉 흐름을 느끼게 하는 데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다. 투시도라는 수단에 익숙해진 우리는 기본적으로 ‘픽처레스크picturesque’한 정적인 사고에 머물기 쉽다. 뷔르기가 강조하는 ‘움직임movement’의 디자인은 그러한 매몰된 시각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결과다. 그의 공간에는 항상 시퀀스가 있다. 연결과 단절, 그리고 통과되는 공간. 벽, 혹은 이어짐. 짧은 멈춤과 이동. 그는 이러한 내러티브를 통해서 디자인을 이야기하고 공간을 재발견한다. 한편, 외부에 노출된 조경 공간이 건축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시간의 변화에 민감하다는 점일 것이다. 조경가가 다루는 대상이란 대개 세월에 의해 빠르게 침식되고 어느샌가 그것을 담고 있는 거대한 경관에 흡수되어 버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조경가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낡음’과 ‘쇠락’에 대해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조경에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제대로 나이 들어갈 수 있느냐,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달려있을 것이다. 억지로 현재를 유지하려는 몸부림이야말로 가짜의 선명한 표상이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바래버릴 반짝이는 것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는 어렵다. 시간의 흐름에 순응해야 진짜가 될 수 있다. 뷔르기의 작품들은 ‘인간은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체험해야만 살아 움직이는 현재를 느낄 수 있다’는 교훈을 웅변하고 있다. 뷔르기는 스스로 움직이는 시간과 쇠락하는 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디자인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놓은 하나의 돌이 원하는 모양이 되는 데 오십 년 정도는 걸리기 때문입니다.” Q. 루이스 바라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A. 멕시코의 건축가 바라간은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소수의 작품이 역설하는 바가 무척 깊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극도로 압축된 언어로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시적이고 강하다. 나는 수십 년 전, 멕시코시티에서 그와 조우할 기회가 있었다. Q. 그의 작품 중 당신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품은? A. 멕시코시티의 개인 주택이자, 목장인 쿠아드라 산 크리스토발Cuadra San Cristóbal과 엘 페드레갈El Pedregal Gardens을 들 수 있겠다. 그 곳은 이제 사라져 버려 불과 몇 장의 흑백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정원은 사라지고 건물이 들어선 곳이다. 당시 그곳을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요즘에는 어느 곳을 막론하고 개인 정원에 들어가는 것이 무척 힘들다. 그의 집과 사무실, 작업실 등에서 받은 감동이 내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하다. 루이스 바라간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인 길라르디 하우스Gilardi House 또한 인상 깊게 남아 있다. Q. 나는 당신 작품의 특징을 ‘간소한 풍부함richness in simplicity’으로 요약했다. 바라간과도 닿아 있지만, 스위스의 자연 환경 때문인지 왠지 도가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A. 도가적이라 함은 어떤 것인가? Q. 『장자』에서는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신발을 느낄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신의 작품은 그야말로 미니멀하지만, 동시에 풍부한 감정과 짙은 감수성이 느껴진다. 다시 말해, 작품에서 많은 것이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많은 요소가 설계되지는 않았다. 최소한의 수단으로 상당히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대상지에 꼭 맞는 듯한 당신의 작업에서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 A. 사실 당신이 파악한 것이 나의 철학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건 다양한 분야에 대한 나의 호기심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몬드리안 등의 예술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예술가는 대개 처음엔 대상에 대해 낭만주의적이지만, 점차 그것들을 압축해간다.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람의 머리를 주제로 한 연작을 20년 넘게 꾸준히 발표했다. 극도로 정제되고 간략화된 아티스트로서의 태도가 내가 조경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작은 정원이든, 큰 프로젝트이든 나는 항상 그러한 경계를 탐색하고 그 경계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찾아 헤맨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