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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린다는 것, 만든다는 것 그 즐거움을 이야기하다
    대담 김용택·이홍선 소장 “조경설계사무소 소장 두 분을 한 자리에 모셨다”라고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 두 분 모두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과 관리까지, 마치 원스톱 서비스처럼 제공하고 있어서다. 게다가 별도의 시공팀도 꾸리고 있고, 한 분은 가식장까지 갖고 있다. 사무실 풍경은 다른 설계사무소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두 분의 동선은 사뭇다르다. 특히 현장이 한창 바쁘게 돌아가는 봄부터 가을까지의 동선은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보다 현장에 있을 때가 더 많고, 나무를 구하러, 새로운 소재를 찾으러 전국을 누빈다. 주말도 따로 없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아침 6시 30분부터 현장이 돌아간다. 그 여파로(?) 이번 대담을 위한 답사도 토요일 오전 7시부터 시작되었다(사실은 개인 정원이다 보니 집 주인의 일정에 맞춰 토요일에 방문했다). 게으른 에디터에겐 꼭두새벽에 가까운 아침 7시에 만난 까닭은 길에서 버리는 시간을 줄여보고자 한 것. 그렇게 분당에서 출발해 가평을 거쳐 판교로, 다시 분당으로 돌아와 대담이 마무리된 시간은 오후 3시. 정원 두 곳을 둘러보고 식사도 하고 대담도 2시간여 진행했지만,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 있었다. 김용택 소장은 다음날 여주 주택정원에 심어야 할 나무를 사러가야 한다며 대담이 끝나자마나 과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이른바 ‘디자인-빌드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는 설계사무소 소장의 일과를 엿볼 수 있는 하루였다. 이번 대담은 잡지에 연재되고 있는 ‘공간 공감’이 촉매가 되었다. ‘공간 공감’ 멤버(김아연, 김용택, 박승진, 이홍선, 정욱주)들의 답사를 몇 차례 따라간 적이 있는데, 두 분의 설계관이 비슷한 듯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미묘한 ‘차이와 다름’의 실체가 궁금해진 것이다. 회사 설립 이후, 설계한 곳을 직접 시공하는 원칙을 지켜나가는 공통점도 있어서 대담자로 적격이었다. 특히 김용택 소장은 정영선 대표의 조경설계 서안에서 10년을, 이홍선 소장은 이교원 대표의 이원조경에서 18년을 근무하고 독립한 점도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이원조경과조경설계 서안에서의 경험이 지금과 같은 시스템의 디자인 오피스를 만들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을 터. 더구나 이교원·정영선 대표는 인구에 회자되는 뚜렷한 작품을 남긴 조경가이니 만큼 그에 얽힌 이야기도 궁금했다.1 담백하다 vs 단단하다 남기준(이하 남): 김용택 소장님이 설계·시공한 가평주택정원(이하 가평)과 이홍선 소장님이 설계·시공한 운중동 주택정원(이하 운중동)을 둘러보았다. 먼저 가평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 그동안 ‘공간 공감’ 답사를 여러 차례 같이 다니셨지만, 서로의 작품을 보신 적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홍선(이하 이): 건축과 정원의 조화가 돋보였다. 세컨드하우스로서의 장소성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건축 설계도 주변과 잘 어울렸다. 정원을 소개해주시면서 김 소장님이 ‘설렁설렁 했다’고 하셨는데, 꽉 채우려하지 않고 절제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담백하고 공간감이 좋은 정원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과하게 채우려 했다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됐을 것이다. 여러 디테일에서 여백이 느껴지도록 한 점이 경관을 확장시킨 효과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은 식재 패턴이다. 컬러나 높이, 질감의 조화가 좋고, 무엇보다 심플한 점이 매력적이다. 남: 장점만 이야기하는 것은 반칙이다. (웃음)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 이: 주차장과 주택 사이에 꽤 단차가 있는데,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동선에서 (건축가의 의도도 있었겠지만) 자작나무가 심긴 화단 때문에 약간의 중압감이 느껴졌다. 그 부분을 좀 감추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리고, 아쉬운 점은 아니지만 나와 스타일이 좀 다르다고 느낀 곳은 건축 전면부다. 만약 내가 설계했다면, 건축 매스가 작은 편이 아니니까 건물 앞에 나무를 대서 좀 가렸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단풍나무나 산딸나무, 벚나무 등 의 교목이 적절히 자리 잡고 있지만, 좀 더 적극적인 제스처를 썼을 것 같다. 물론 건축가들은 굉장히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꼭 나무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이들 때면 설득을 한다. 김용택(이하 김): 건축가들과 작업 할 때, 미리 조심하는 부분도 있다. 건축가가 좋아할만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원칙은 전체 공간의 조화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작은 디테일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성향 탓이 더 클 것이다. 좀 더 돋보이고강하게 연출하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작업을 하다보면 늘 줄이게 된다. 이: 그래서인지, 건축과의 호흡이 좋아 보인다. 예를 들어, 노출 콘크리트 가벽이 정원에서 오브제 역할도 해주고 적절히 외부를 가려주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건축 설계가 정원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느낌도 든다. 건축가와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가 궁금하다. 김: 가평 정원을 함께 한 건축가 같은 경우, 첫 프로젝트는 꽤 힘들었다. 건축가는 별 말이 없었는데, 직원들이 미리 걱정을 해서 대안 요구를 상당히 많이 했다. 하지만 첫 번째 결과가 만족스럽게 나온 후로는 전적으로 내게 맡기고 있다. 지금은 건축주만 설득이 되면 내 의견이 거의 반영된다. 그리고 건축가라고 해서 모두가 건축물 앞에 나무 심는 걸 꺼려하는 것도 아니다. 단독 주택에 살고 있는 건축가들은 특히 그렇다. 설계자가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주택에 살아보면, 집 가까이 있는 나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일도 건축가의 집 바로 앞에 나무를 심으러 가야 한다. 이 소장님이 ‘적극적인 제스처’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렇게 프레임을 강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요즘은 많이 든다. 최근에 경기정원박람회나 세종시 푸르지오의 작가정원, 국립수목원 내의 정원 등 공공적인 성격의 정원을 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그에 대한 고민이 더 커졌다. 건축과 별개의 공간에 정원만 자리 잡는 경우인데, 임팩트 있는 디테일이나 프레임이 없으제스처를 썼을 것 같다. 물론 건축가들은 굉장히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꼭 나무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이들 때면 설득을 한다. 김용택(이하 김): 건축가들과 작업 할 때, 미리 조심하는 부분도 있다. 건축가가 좋아할만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원칙은 전체 공간의 조화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작은 디테일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성향 탓이 더 클 것이다. 좀 더 돋보이고강하게 연출하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작업을 하다보면 늘 줄이게 된다. 이: 그래서인지, 건축과의 호흡이 좋아 보인다. 예를 들어, 노출 콘크리트 가벽이 정원에서 오브제 역할도 해주고 적절히 외부를 가려주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건축 설계가 정원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느낌도 든다. 건축가와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가 궁금하다. 김: 가평 정원을 함께 한 건축가 같은 경우, 첫 프로젝트는 꽤 힘들었다. 건축가는 별 말이 없었는데, 직원들이 미리 걱정을 해서 대안 요구를 상당히 많이 했다. 하지만 첫 번째 결과가 만족스럽게 나온 후로는 전적으로 내게 맡기고 있다. 지금은 건축주만 설득이 되면 내 의견이 거의 반영된다. 그리고 건축가라고 해서 모두가 건축물 앞에 나무 심는 걸 꺼려하는 것도 아니다. 단독 주택에 살고 있는 건축가들은 특히 그렇다. 설계자가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주택에 살아보면, 집 가까이 있는 나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일도 건축가의 집 바로 앞에 나무를 심으러 가야 한다. 이 소장님이 ‘적극적인 제스처’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렇게 프레임을 강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요즘은 많이 든다. 최근에 경기정원박람회나 세종시 푸르지오의 작가정원, 국립수목원 내의 정원 등 공공적인 성격의 정원을 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그에 대한 고민이 더 커졌다. 건축과 별개의 공간에 정원만 자리 잡는 경우인데, 임팩트 있는 디테일이나 프레임이 없으면 영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 건축적인 요소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고 있다. 또 그동안 상당히 많은 정원을 디자인했는데, 대부분 비슷한 패턴으로 하다보니까 내 정원이 스스로 식상해지기도 했다. 이 소장님은 건축을 전공하셔서 그런지 나와는 스타일이 꽤 달라 보인다. 이: 반대로 내가 만드는 정원에는 잔잔한 터치가 부족한 점이 항상 아쉽다. 다양한 요소를 활용한 연출 방식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김 소장님과 작품을 함께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전반적으로 느슨하고 비어보이지만, 소재와 물성의 믹스가 자연스럽고 거기서 나오는 공간감이 좋다. 가평 정원을 보면서 부족한 점을 많이 배웠다.
    • 남기준
  • [칼럼] 남귤북지, 서울역 고가
    2014년 10월 12일. 서울역 고가는 무척 부산했습니다. 1970년 준공 이후 무려 44년 만에 처음으로 보행자에게 고가 도로를 개방했기 때문이었지요. 저도 이런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사진기 가방을 메고 서울역 고가로 향했습니다. 자동차가 주인이던 도로를 걷고 있자니 왠지 모를 ‘통쾌함’ 같은 것도 느껴졌습니다. 걷다보니 자동차 안에서 스쳐보기만 했던 주변의 건물들이 하나하나 자세히 눈에 들어오더군요. 역시 도시는 걸으면서 느껴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더 걸어 나가니 예전 서울역사건물이 시원스럽게 ‘내려다’ 보였습니다. 이런 건물을 내려볼 수 있는 기회라니! 옆으로는 길게 뻗은 한강대로의 모습도 보이고. 고개를 조금 더 옆으로 돌리니 세종대로 옆 고층 건물들 사이로 남대문도 볼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에게 내준 17m 높이의 고가 도로에는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아주 멋진 경관이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서울을, 그것도 서울의 가장 중심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좋은 전망 장소로 충분한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달 다시 고가 개방 행사를 진행할 때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프로젝트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가장 크게 반대하는 분들은 주변의 상인들입니다. 특히 남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중림동과 회현동 일대의 상인들은 고가 도로를 공원화할 경우 차량 유입이 중단되면서 상권이 위축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고가 도로 인근의 12,000여 개의 상가에서 일하고 있는 약 4만여 명의 생계가 이 프로젝트와 직결되어 있는 만큼 당장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올해 1월에 개최하려고 했던 고가 도로 활용에 관한 전문가 토론회는 주변상인들이 대체 도로 우선 논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여러 이해당사자가 관여된 프로젝트에서는 항상의견 조율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프로젝트의 진행을 통해 이익이 생기는 그룹과 손해를 보는 그룹간의 갈등은 매우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러한 갈등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충분한 논의 과정이라고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환경과조경』 2014년 11월호를 참조). 그리고 논의 과정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프로젝트의 방향을 잡는 초기 과정에서 주변 상인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이 반대 의견을 낳은 큰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당사자를 제외시켰다는 것에 대한 허탈감 같은 것이 반대 의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보다 ‘어떻게’가 이런 프로젝트에서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좀 더 여러사람의 의견을 충분히 담아야 합니다. ‘서울의 하이라인’ 혹은 ‘한국판 하이라인’은 서울역 고가 공원화 프로젝트를 소개할 때 흔히 붙이는 제목입니다. 도심의 고가 도로(하이라인의 경우 고가 철도 였지만)를 공원처럼 만들겠다는 공통점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비유인 셈이지요. 게다가 서울시가 당당히 하이라인을 ‘벤치마킹’했음을 내세우고 있고 박원순 시장이 미국 방문 때 이르면 2016년까지 뉴욕 하이라인과 같은 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히면서 두 프로젝트의 연관성은 더 확고해졌습니다. 그러나 정말 서울역 고가 도로가 서울의 하이라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 되어야 할까요? 우선 하이라인과 서울역 고가 도로는 상당히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뉴욕 하이라인의 경우는 고가 철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주변 공업용 건물의 구조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서 현재의 하이라인도 주변 건축물들과 물리적으로 잘 엮일 수 있는 구조입니다. 태생적으로 하이라인 철도는 주변 건물과 일체화하기 유리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역 고가 도로의 경우는 차량 통행을 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주변 건축물들과 분리해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변 건물과의 관계를 새로 맺는다는 게 현재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상태입니다. 이런 차이로 인해 뉴욕의 하이라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시민의 일상적인 이용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서울역 고가도로 위를 많은 사람이 걷기를 희망한다면 하이라인과는 전혀 다른 이유를 만들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조건에 맞는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과거 ‘서울숲’을 조성할 때에도 ‘서울의 센트럴 파크’를 지향했던 적이 있었지요. ‘서울숲’ 이전의 많은 신도시에도 ‘중앙공원’이 양산됐습니다. 브랜드를 빌려오면서 얻게 되는 이득이 분명히 있습니다. 일반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는 데에는 이만한 방법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브랜드를 수입해야 할까요? 이제 우리도 우리 브랜드를 자신있게 내 놓을 수 있어야 하지않을까요? 지난 5월 13일 서울시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당선작으로 MVRDV의 비니마스Winy Maas의 제안을 선정했습니다. ‘서울수목원The Seoul Arboretum’. 서울역 고가도로 전체를 나무에 비유하여 인근 지역으로 뻗어가는 유기적인 디자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고가 위에는 국내의 다양한 나무를 가나다순으로 심어 수목원을 만들고, 사업에 반대하고 있는 지역 상권과 연계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네요. 우선은서울의 하이라인을 꿈꾸고 있지 않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남귤북지南橘北枳’는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고사성어입니다. 강남에 심었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서로 다른 기후와 풍토 때문에 탱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즉, 주위 환경에 따라서 같은 인재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아무리 하이라인이라고 한들 태평양을 건너왔는 데 뉴욕의 하이라인이 서울에서도 같을 수는 없지않을까요? ‘프롬나드 플랑테’가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하이라인’으로 성공한 것처럼, 태평양 건너 새로운 ‘서울역 고가’로 거듭나길 기대해 봅니다.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업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Ohio State University)에서 방문교수로 지냈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에디토리얼] 열린 디자인
    당위성, 목적, 효과 모든 면에서 논란을 가득 안은 채 강행된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13일 서울시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 결과를 발표했다. 4월 29일의 심사 다음 날 당선작을 공개한다고 예고한 일정과 달리 선정 결과 발표에 2주의 긴 시간이 흘러서 『환경과조경』 편집부에는 때 아닌 비상이 걸렸다. 이미 세 달 전에 서울역 고가를 이번 호 특집으로 정하고 60쪽에 가까운 지면을 할애해 놓았으니월간지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비공식 채널로 제출작들의 패널과 설계 설명서를 구해 발표 전에 미리 편집을 해놓는 무리수를 두느냐, 발표 때까지 인내한 후 사나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느냐로 고심을 거듭하다 대책 회의 장소를 근처의 치킨집으로 옮겼다. 공모전 출품작을 지면에 담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공이 들어간다. 우선 에디터가 작품을 충분히 해석한 후 잡지에 실을 다이어그램, 도면, 이미지, 텍스트를 선별한다. 동시에 내부에서 직접 번역을 하거나 외주를 맡긴다. 이런 1차 작업이 끝난 원고가 디자이너에게 넘어가 편집 디자인된 초고가 나오고, 수정과 교정 작업이 세 차례 정도 이어진다. 그래서 공모전을 잡지에 싣는 달이면 (출품자들의 수고에야 못 미치겠지만) 편집부 모두 의욕 과잉과 심신 탈진을 동시에 경험하곤 한다. 특히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세 편의 비평을 붙이기로 했던 편집 계획이 문제였다. 오래 전에 섭외한 비평자들이 단 사흘안에 작품을 읽고 평문을 쓰기란 사실 불가능했다. 대책 회의의 소품이었던 맥주잔이 점차 쌓여가자 마침내 단순 명쾌한 해법이 나왔다. 한 달 연기! 역시 계획은 유연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환경과조경』은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당선작을 비롯한 모든 출품작을 7월호에서 보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룰 것을 약속드린다. 다음 달에 실릴 출품작과 비평을 안주 삼아 많은 토론 생산하시길. 당선작으로 발표된 비니 마스Winy Maas(MVRDV)의 ‘서울수목원The Seoul Arboretum’을 두고 페이스북을 비롯한 여러 SNS 매체에서는 이미 다양한 견해가 쏟아지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처음 구상된 작년 후반기와 다를 바 없이, 사업 자체의 당위성에 대한 의구심, 정치적 목적에 대한 의혹, 주변 상인들의 반대와 서울시의 소통 부족, 설계공모의 과정과지명 초청 방식 등에 대한 의견과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당선작 발표 후에는 비니 마스의 안에 대한 촌평도 꼬리를 물고 계속되고 있다. 대부분은 적절한 논증이 없는 단순한 취향 고백이거나 인상 비평이지만 몇 가지 흥미로운 관점도 눈에 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불투명한 설계 환경에 대처한 전략적 작품, 일견 유치한 키치kitsch로 보이지만 서울의 도시 환경을 단도직입적으로 비판한 작업, 콘크리트 환경에 가장 쉽게 대응할 수 있는 기술적 제안이라는 반응도 있고, 여러 각도의 혹평도넘쳐난다. 한 지인은 청계천 복원 프로젝트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큰 어항”이라고 비판했던 어느 외국 전문가의 말을 패러디해서 이번 당선작을 “세상에서 가장 긴 화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 조경가는 여러 일간지에 실린 분홍빛 식물로 가득한 당선작의 이미지 컷을 두고 “어느 기독교 이단 종파의 선교 책자 표지 같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다음 달 『환경과조경』에서는 당선작과 여러 출품작은 물론 공모 지침과 과정을 아우르는 보다 심층적인 분석을 만나실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자체의 비전과 실천성에 대한 평가는 다음 달로 미루지만, 이 지면에서 간단하게나마 먼저 짚어 보고자 하는 쟁점은 앞으로의 ‘과정’이다. 당선작 ‘서울수목원’은 공중 보행로를 수목원으로 조성한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서울역 고가를 하나의 큰 나무로 설정한 후 퇴계로에서 중림동까지의 고가 구간에 ‘가나다’ 순으로 국내 수목을 심는다는 구상이다. 심사위원회는 ‘서울수목원’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유를 “서울역 일대를 녹색 공간화하는 확장 가능성을 제시한 점”과 “다양한 시민 및 주체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프로세스를 중시한 점”이라고 밝혔다. ‘녹색’과 ‘확장’은 다른 제출작에서도 거의 공통적이므로 결국 당선작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시민 및 주체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프로세스”인 셈이다. 그런데 과연 그 프로세스라는 건 무엇인가? 다음의 세 가지 단서를 통해 애써 짐작해 볼 수 있다. 비니 마스는 공식 인터뷰에서 “여러 시민이 참여하는 연합 프로젝트로 진행할 것”이며 “서울에서 자생하는 식물을 선택하고 관리하는 과정에 시민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심사위원을 겸했던 승효상 서울시 총괄건축가는 “이번 당선작이 지니는 가치와 장점을 구현하기 위해선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거버넌스가 운영되어야 하며, 특히 당선작이 지향하는 ‘열린 디자인’의 정신이 프로젝트 전개 과정에서 잘 구현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서울시의 보도 자료를 보면 “이번 당선작은 확정된 설계안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 주민설명회, 분야별 전문가 소통을 통해 설계를 구체화할 것”이라고 한다. 함께 만드는 프로세스, 열린 디자인, 참여, 거버넌스 등은 명확한 의미로 쓰였다기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일종의 다짐으로 읽힌다. 그러나 서울시가 이번 프로젝트를 과정 중심적으로 끌어갈 것이라고 신뢰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번 설계공모 과정이 열린 과정보다는 닫힌 결과를 위한 하나의 절차였기 때문이다. 전문가 그룹조차도 침묵하고 지나갔지만, 이번 지명 공모전은 통상적인 지명 방식인 RFQRequest for Qualification(자격 심사)나 RFPRequest for Proposal(제안서 심사)도 생략한 채 기형적으로 진행되었다. 마치 재벌오너가 사옥을 지을 때 자신의 목적과 취향에 맞는 건축가들을 초청해 경쟁시키는 방식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경우, 과정은 빠른 결정과 진행의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다. 만일 비니 마스의 당선작이 과정 중심적인 ‘열린 디자인’을 지향하고 있고 서울시가 열린 디자인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과정을 다시 디자인해야 한다. 몇 차례 주민 설명회와 전문가 자문 회의를 거친다고 해서, 홍보 이벤트를 몇 번 더 연다고 해서 참여와 소통과 과정을 존중하는 열린 디자인이 완성될 리 없다. 공모전 당선작 발표를 일주일 앞두고 주변 상인들의 반대에 대한 대응책으로 대체 고가도로 건설 계획을 내놓은 게 지금 서울시가 생각하는 ‘과정’의 단면이다.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에 열린openended디자인이 필요하다면, 서울시의 계획과 일정 자체가 열려 있어야 한다. 토건시대를 연상시키는 속도전을 통해 박원순 시장의 임기 내에 완공하는 게 목표라면 열린 디자인은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에디터의 설계공모 도전기
    미리 양해를 구한다. 인용이 제법 길다. 하지만 그만큼 흥미진진하다. “월요일 아침마다 하는 오피스 전체 미팅이 끝나고 회의실을 나가려는 사장님을 불러 세운다. MAC 공모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지 않느냐고. MAC? 표정을 보아하니 맥도날드 빅맥을 생각하는 눈치다. 이메일로 온 공모전 초청에 대해서 설명하니 그제야 알아듣는다. … 전화할 곳이 있어 일어나야겠다는 사장님에게 회사 차원에서 공모전을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면 개인적으로라도 참가하겠다고 말한다. 업무 외 시간과 주말을 이용하여 작업을 할 테니 회사 일에는 지장을 주지않겠다. 그러니 양해해 달라. 바빠서 일어나야 한다는 사장님이 가만히 있는다. 이 자식, 따로 공모전을 한다면 회사 일에는 소홀해질 게 뻔한데, 그렇다고 개인 시간에 한다는 공모전을 못하게 할 명분도 없고. 말투를 들어보니 목숨 걸고 할 기세인데, 혹시라도 좋은 결과가 있으면 공식적으로는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이니, 결과가 좋으면 나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한데…. 표정을 보고 짧은 순간에 대강 이런 생각이 스쳐갔으리라고 짐작해 본다. 매우 심사숙고를 한 듯한 표정으로 사장님이 입을 연다. 너의 열정을 알겠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의미도 잘 알겠다. 그렇다면 SWA의 이름을 걸고 한번 나가보자. 대신 알다시피 다른 회사 프로젝트들도 바쁘고 큰 공모전을 치른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지원은 거의 못해준다. 너를 믿을 테니 이 공모전을 함께 치뤄보자. 아 참, 그리고 참가 등록할 때 내 이름으로 등록해야 하는 거 알지? … 말은 그럴싸하지만 너 혼자 잘해보라는 의미다. 물론업무 외 시간을 주로 이용해서. 시작은 미약하지만, 일단 회사 이름을 걸고 참가한다는 것은 큰 성과다.” 『조·경·관』(임승빈 외 17인 공저, 나무도시, 2013)이란 책에 실린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조경학과)의 ‘조경 경연 이야기 - 행정중심복합도시 국제 설계공모 참가하기’의 한 대목이다. 이렇게 시작된 설계공모 참가기는 팀 구성, 작품 제출, 결과 발표(낙선), 그 이후의 에피소드까지 공모전의 전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해 놓았다. 교정을 보면서 몇몇 대목에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이다. “문제는 팀원이다. 그래픽 작업은 물론이고 디자인 개념을 만드는 단계에서도 한명 보다는 두 명이 낫다. 저녁 때 오피스 전체에 이메일을 보내본다. 디자이너로서의 역량과 아이디어를 시험해 볼 도전적인 공모전이 떴다. 한국에 센트럴 파크를 능가하는 규모의, 어쩌면 조경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도 있는 공원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우리 함께 하얗게 밤을 불살라보자꾸나. 다음날, 답 메일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일단은 나 혼자 해야겠다.” 그러다가 가끔은 이런 식으로 잡지에 공모전 이야기를 풀어내면 어떨까 하는 궁리를, 아주 잠깐 해보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맹랑한 상상을 발칙한 공상으로 발전시키게 된 건 카톡방이 발단이 되었다. ‘잠실종합운동장 일대 도시재생 구상 국제공모’가 막 발표된 때 였다. 9월 4일에 당선작이 발표되니 10월호에 지면을 잡아 놓아야겠다는 둥, 이런 공모는 제대로 된 그림보다 강력한 아이디어 한 방이 필요하다는 둥의 뻔한 이야기부터, 서울시에서 공모가 쏟아지는 배경에 대한 정치적 분석까지 흘러갔다가, 코엑스와 한전 부지를 중심으로 한 잠실 일대의 잠재력에 대한 난상토론을 거쳐, ‘설마 잠실야구장에서 프로야구를 못 보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건 아니겠지’ 같은 난데없는 취미 생활에 대한 걱정까지, 그야말로 두서없는 대화가 오고갔다. 그러다 누군가 ‘의외로 제출도서가 많지 않다’는 점에 집중했다. 그러자 ‘공개 국제 아이디어 공모’란 공모 방식에서 ‘공개’와 ‘아이디어’란 두 단어가 유독 눈에 도드라졌다. 지나가는 농담으로 흘러가버릴 수 있었던 ‘한 번 해볼까’란 멘트가 본격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건, 앞서 인용한 김영민 교수의 글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에디터의 자전거 출근기’의 뒤를 잇는 후속 기획으로 ‘에디터의 설계공모 도전기’를 한 번 해봐? 그래도 기본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경을 전공하고 지금은 부동산학과 교수가 된 A와 다수의 공모전에서 수상 경력이 있는 이른바 ‘공모의 여왕’ B를 섭외하는 것으로 팀 구성을 완료했다. 일단 김영민 교수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 세팅된 것 이다. 물론 그 전에 단체 카톡방부터 만들었다. 카톡방 이름은 ‘Project C’로 정했다. 컴피티션Competition의 약자이기도 하지만, 챌린지Challenge의 의미도 담았다. 킥오프 미팅 날짜도 정하고, 각자의 미션도 느슨하게 나누기로 했다. 내가 맡은 건, 공모와는 하등 상관없는 잡지에서 어떤 점을 부각시킬 것인가였다. 그래서 우선 계약서를 먼저 작성하자고 했다. 파주출판도시의 건축주와 건축가들이 맺었던 ‘위대한 계약서’를 카피하여 ‘상징적인 계약서’라는 타이틀부터 뽑았다. 설계공모에서 컨소시엄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지만, 막상 제대로 계약을 맺고 작업을 하는 사례가 거의 없는 상황이어서, 이에 대한 문제점을 에둘러 짚어보고자 한 것이다. 계약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1/n’을 바탕으로 하되, 합리적으로 기여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삼았다. 비용 역시 ‘1/n’의 원칙에 따라 부담하기로 했다. 만약 실제로 참가 등록을 하고 아이디어 공모안을 준비했다면, 이 글은 10월호에 수록되었을 것이다. 결과는? 과연 참가에 의의를 두는 수준을 벗어났을까? 지금도 가장 궁금한 대목이다. 결국 참가 등록 마지막 날까지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우리는 ‘Project C’를 없던 일로 되돌렸다. 만약 진행했다면, 에디터들에게 적지 않은 공부가 되었을 것이고, 설계공모의 프로세스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한두 가지 유의미한 이슈를 도출해내지 않았을까 싶지만, 설계공모 도전은 자전거 출근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 만큼 보다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10월호에 한 꼭지가 펑크 났으니, 이제 정신 차리고 그걸 때울 생각이나 해야겠다. 상금을 받아서 북유럽으로 다 같이 답사를 가자던 어느 기자의 마음도 달래주고.
  • [편집자의 서재] 메이즈 러너
    미로에 얽힌 설화는 그리스 신화가 유명하다. 크레타의 미노스 왕은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가두기 위해 미궁을 만들었다. 매년 7인의 소년 소녀가 제물로 바쳐졌는데,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길을 헤매다 괴물에게 먹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이 미궁에 들어가 괴물을 처치하고 아리아드네의 실에 의지해 빠져나온다. 미로의 폐쇄적인 물리 구조는 공간 선택의 자유를 제한한다. 지각 능력을 차단함으로써 공포감을 일으키는 데, 이러한 미로의 속성을 바탕으로 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위의 미궁 이야기다. 하지만 이와 같은 특성은 때로는 기대감을 안겨주고 다양한 공간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귀족들은 정원에 미로를 설치하고 밀회를 즐기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여가를 위한 공간으로 미로가 조성된다. 소설은 현실의 축소판이다. 더욱 극적인 표현을 위해 비현실의 세계를 끌어온다. 현실 세계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이 은유적으로 표현되는데, 독자들은 이를 통해 스토리에 공감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몰입한다. 우연한 탐방의 여정을 미로의 개념으로 차용하거나, 탐사와 미로의 경계에 있는 상황, 미궁을 상징하는 미로의 형식이 두루 활용된다. 『메이즈 러너』는 기억이 삭제된 채 거대한 미로에 둘러싸인 낯선 공간에서 펼쳐지는 소년들의 생존기를 그린 소설이다. 지난해 개봉한 동명 영화의 원작이다. 누군가에 의해 매달 한 명의 소년이 ‘박스’를 통해 미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단순한 탈출기가 아니다. 이 작품 속 미로에는 자연이 형성되어 있다. 기존의 미로 이야기와 다른 구조로 전개될 수 있는 단서가 ‘숲’에 있다. 미로 속이 순환하는 구조가 아니었다면 신체에 대한 구속력과 심리적 압박감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메이즈 러너』에서는 숲을 두어 그 감정을 완화하도록 했다. 생존의 여지를 둔 것이다.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는 숲이 있고 물과 나무, 열매가 식욕과 잠, 안전의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준다. 이는 작품 말미에 드러나는 인류의 질병 치료를 위한 실험이라는 설정에서 비롯된다. 단순한 감금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 변화하는 정신상태를 분석해 인류의 생존 열쇠를 찾는 것이 작품 속 미로의 목적이다. 숲이 없었다면 이 작품은 ‘큐브’ 혹은 ‘빠삐용’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사람이 스스로를 중심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삶과 죽음,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등의 양극으로 정리하는 경향을 찾아냈다. 생존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는 타자에게 기대기도 한다. 『메이즈 러너』의 핵심 배경은 미로와 숲이라는 두 개의 대립 공간이다. 숲은 삶과 빛에 해당하고 미로는 죽음과 어둠이다.이 양극화된 공간에서 두려움에 맞서 소년들은 숲에 속하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 미로에 가장 먼저 들어온 알비는 무리를 이끌기 위해 세 가지 규칙을 정했다. 토머스가 등장했을 때 규칙을 알려주는데, 미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가장 강하다. “룰이 세 개 있어. 첫째, 맡은 임무를 다할 것… 둘째, 다른 친구들을 해치지 말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절대 저 벽을 넘어가지 마!” 푸코의 눈으로 본다면 규율은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미로는 감시와 통제의 장치다. 그 안에서 또 다시 규율을 만듦으로써 이중의 감금 장치가 채워지며 공간의 지배력은 더욱 강해진다. 자연은 사람이 쉽게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이러한 환경을 외경의 마음으로 대하게 되는데, 자신의 인지 능력이나 지식의 범위 밖에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소년들은 그들을 둘러싼 숲과 미로를 상반되게 인식한다. 숲은 통제되는 즐거운 공간이지만 미로는 파악할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소년들이 미로를 대하는 태도는 인간사 초기에 산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과거 사람들은 산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라고 생각하고, 숭앙의 대상이자 위험한 미지의 장소로 바라보았다. 소년들은 벗어나려고 갖은 시도를 했지만 벽에 부딪쳤고, 미로를 파헤치려 하면 괴물들이 징벌을 가한다. 이겨낼 수 없는 미로에 굴복하고 결국 숲에 적응하는 방법을 택했다. 미로는 올림포스와 같은 영산靈山이 되고 숲은 세속이 되는격이다. 환경에 대한 태도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외경의 대상이었던 자연의 원리를 알게 되자 위험 대처법도 찾아내었고, 자연스레 산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메이즈 러너』에서는 토머스가 그 실마리를 던져준다. 처음부터 남다르게 미로에 관심을 가진 그는 부상당한 러너를 구하기 위해 미로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면서 활로를 찾았다. 토머스는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실재의 세계로 소년들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미로의 전모를 알게 되었을 때, 치열했던 사투의 공간은 의외로 초라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공간이, 규율이 행동을 지배할 수 있다. 『메이즈 러너』는 미로라는 장치를 이용해 이를 잘 보여준다. 갇힌 소년들은 벽을 경계로 안에서는 자유롭다. 미로에 저항하지 않고 숲을 즐기면 안전이 보장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도 없다. 미로는 현대 사회의 과잉 노동의 현장으로 볼 수도 있는데, 저자는 생산과 소비의 굴레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을 은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로는 피로사회로 불리는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모습일 수 있고, 숲 또한 자본이 던져주는 ‘힐링’이라는 이름의 마취제일 수 있다. 『메이즈 러너』는 미로 속의 자유를 안주하는 현대 사회의 인간 군상으로 비유된다.
  • [시네마 스케이프] 말하는 건축 시티:홀 말하지 않는 경관
    9회 말 동점, 2루에 주자가 나가 있는 상황에서 안타 하나로 경기가 끝나면 누가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할까? 끝내기 안타를 친 선수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지만 마무리 투수는 패배의 원흉으로 비난을 받는다. 사실은 3시간이 넘는 경기의 고비 고비에 수많은 요인이 차곡차곡 쌓여 승부가 결정된 것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한 경기의 승패에는 선수의 컨디션, 수많은 작전, 순간적인 판단, 크고 작은 실수가 숨어 있다. 준공된 지 2년이 넘은 서울시청사는 건립 과정부터 완공된 이후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우호적인 시선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 눈이 간사해서 이쯤 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측면의 사선 디자인은 여전히 거칠게 느껴지고 정면의 유리 곡면은 낯설기만 하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비슷한 프로젝트가 다시 추진된다면, 시간을 뒤로 돌릴 수 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까? 최근 서울시는 굵직한 사업들을 연이어 계획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과거에 벌어진 일을 되짚어보면 무언가 얻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서울시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서울시청사는 이명박 시장에 의해 현재의 부지에 건립이 결정되었고, 3천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2012년 10월에 준공되었다. ‘말하는 건축 시티:홀’은 시청사 준공을 1년 앞둔 시점부터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당시 시공 현장에서 벌어진 리얼한 상황과 지난 7년간 서울시청사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복잡다기한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다. 정재은 감독은 ‘고양이를 부탁해’(2001)에서 서울의 주변부이면서도 어디로든 출발할 수 있는 인천이라는 도시의 특성을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에 탁월하게 투영한 바 있다. 영화 개봉 이후 도시와 건축에 관심 있는 이들은 영화 속 주요 공간인 월미도, 차이나타운, 여객터미널, 폐철도 등을 답사하고 연구하기도 했다. 서울시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이전 작으로는 건축가 정기용의 삶의 마지막 1년을 담은 ‘말하는 건축가’(2011)도 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 개정을 위한 공청회 저조한 합격률의 조경기사 자격시험, 해법을 모색하다
    지난해,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의 필기 합격률이 역대 최저 기록인 6.1%로 집계돼 조경계에서 조경기사자격제도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켰다. 조경기사 시험의 저조한 합격률에 대한 우려와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지난 6월 18일 한국조경사회(회장 황용득)는 코엑스에서 열린 ‘2015 대한민국 조경박람회’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 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공청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시험의 난이도뿐만 아니라 자격증의 실효성, 교육과 시험 문제 간의 괴리, 자격 인증 방식 등 자격시험과 관련해 산업과 교육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제기하며 열띤 토론을 펼쳤다. 이날 개진된 내용은 한국조경사회에서 취합·정리해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을 운영하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 제출할 예정이다. 본지는 문제의식을 폭넓게 공유하기 위해 이번 공청회에서 다뤄진 내용을 지면에 옮긴다. 기사 제도의 현황과 문제점 발제 김태경 강릉원주대학교 환경조경학과 교수, 한국조경사회 부회장 자격증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자격을 인정하여 주는 증서’다. 현재 조경기사 국가자격시험 제도는 맨 밑에 기능사, 그 위에 (산업)기사, 기술사 순으로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세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이 직능을 상호 보완하는 구조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기능사와 기술사 중간에 위치하는 조경기사의 자격시험 접수 및 응시자 현황을 살펴보면, 응시자 수가 2010년을 정점으로 해서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으며 2014년의 응시자 수는 2008년도의 수준이다. 지금 추세로 보면 앞으로 조경기사 자격시험의 응시자 수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조경기사 자격시험 합격률도 마찬가지로 떨어지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된 작년도 필기 합격률 6.1%에 실기합격률(최대 40%)을 적용하면, 2014년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 응시자의 약 2.44%만 최종적으로 조경기사 자격을 취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107개의 국가기술자격시험 평균 필기 합격률이 36.4%인 것과 비교하면 조경기사 자격시험의 필기 합격률은 현저하게 낮다. 게다가 2014년도 조경기사 응시자의 최종 합격률은 사법고시 합격률(2.74%, 총 7,428명 지원, 205명 합격, 출처: 법무부), 외교관후보자 합격률(5.90%, 총 559명 지원, 33명 임용, 출처: 정책브리핑), 행정고시 합격률(3.13%, 총 13,700명 지원, 430명 합격, 출처: 안전행정부)과 비교해도 가장 저조하다. 이 현상을 종합해서 보면, 응시자가 자격증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다보니 합격률이 낮아지고, 이로인해 또 다시 조경기사 자격시험에 대한 관심이 저조해지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타 분야의 국가기술자격시험에 비해 유독 조경기사 자격시험의 합격률이 낮은 이유에 대해 크게 시험의 난이도와 시험의 출제범위 두 가지를 검토해 볼 수 있다. 자격시험의 난이도는 조경 내부의 문제이므로 다른 분야와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반면 시험 출제 범위는 인접 분야와 비교해 형평성을 가려볼 수 있다. 자연생태복원기사, 산림기사 등을 포함해 조경과 인접한 38개 분야는 필기시험으로 대부분 5개 과목을 보고 있다. 조경처럼 필기시험에 6과목을 치르고 있는 분야는 전체 107개의 국가기술자격 중 6개 밖에 없는데다가 조경기사의 필기 합격률 또한 평균(36.4%)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국조경사회는 학생, 실무 종사자, 교수 등 총 403명을 대상으로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조경기사 시험에 대한 설문을 진행했다. 필기과목 조정 필요성, 적정 필기과목수, 필기과목의 실무적합도 등을 질문한 결과, 대부분의 응답자가 필기과목수를 줄여야 한다는데 동의했고, 조경 계획, 조경 설계, 조경 식재 등의 과목이 실무와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조경사, 조경 관리 등의 과목이 실무와 관련이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기타 의견으로는 ‘필기시험의 난이도를 낮출 필요가 있다’, ‘실무와 관련성이 높은 과목 위주로 필기과목을 선정해야 한다’, ‘유사 과목과 통합할 필요가 있다’, ‘시험 출제 범위가 넓은 것에 비해 너무 세분화된 문제가 나오고 있다’ 등의 의견이 있었다. 국가기술자격에 대한 이해와 발전 방안 발표 김규섭 한국산업인력공단 선임연구원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실무에서 요구하는 업무 능력은 차이가 많다. 국가기술자격 시험은 교육과 현장, 양쪽의 요구를 모두 반영할 수밖에 없는데 교육과 현장의 극심한 괴리 때문에 국가기술자격의 의미와 필요성이 퇴색하고 있다. 최근 조경기사 시험에 응시하는 학생들에게 기사 자격을 취득하려는 이유를 물어보면, 80% 이상의 학생들이 공무원 시험에서 가산점을 받기위해서라고 응답했다. 자격제도의 취지와 실제 활용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만약 국가기술자격시험이 출제자가 한자리에 모여서 다함께 출제하는 방식으로 치뤄진다면 출제자들이 실무와 관련성이 적거나 지엽적이라고 공감하는 문제는 필기시험에서 제외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자격시험은 문제 은행 방식이기 때문에 문제가 임의로 추출되어 출제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필기 문제의 난이도나 출제 경향을 제어하기 어려운 구조다. 이처럼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인증하고 있는 국가자격 제도는 기본적으로 공급자(수험자) 위주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국가직무능력표준National Competency Standards, 이하 NCS(산업현장에서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 기술, 소양 등의 내용을 국가가 산업부문별·수준별로 체계화·표준화한 것)1과 신자격 제도(과정평과형 자격제도2, 일학습병행제도3)가 도입되면서 국가기술자격은 최근 4~5년 전부터 수요자(현장 활용자)의 요구 사항에 맞추어 현장성 및 통용성을 갖춘 인력을 선별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기존의 검정형 자격은 실무 능력을 실제로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외국처럼 산업 현장에서 개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려는 것이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검정형 시험을 전면 폐지하고 NCS에 따른신자격 제도를 바로 적용할 수는 없고, 유예 기간을 두고 공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실무 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에 따라 앞으로 5년 안에 실무 능력과 관련성이 부족한 검정형 시험 문제는 점점 퇴출되고 모든 실무 현장에서 표준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문제로 구성될 것이다.
    • 조한결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세 도시 이야기
    #51 독인가 약인가 - 이상 도시 쇼Chaux 원로 건축가가 하루아침에 감옥에 던져진 신세가 되었다면, 그리고 감옥에서 종이와 펜을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면,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살아나갈 궁리를 할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머릿속에서 세상을 다시 설계할 것이다. 프랑스의 건축가 클로드 니콜라 르두Claude-Nicolas Ledoux(1736~1806)의 이야기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그는 왕실 전속 건축가였다. 루이 15세와 16세의 신임을 얻어 중요한 프로젝트를 여러 건 의뢰받았다. 다만, 당시 프랑스 왕실의 재정이 파산 상태였기 때문에 으리으리한 궁전 등을 지을 형편은 못 되었고 중요한 국가시설들이 그에게 맡겨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파리의 새로운 성벽, 세관 건물, 왕립 제염소다. 여기서 파리의 성벽이란 중세에 축조된 방어용 성벽이 아니라 1785년에서 1788년 사이, 즉 혁명 전야에 세워진 새로운 성벽을 말한다. 표면상으로는 밀수품을 통제하기 위해서 새로 축조했다고 하지만 실은 파리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통관세를 걷기위 해서였다. 새 성벽은 총 연장 24km에 총 60개의 관문을 세워 물샐 틈이 없었다. 그 60개의 관문 중 42개를 르두가 설계했다. 르두의 주요 프로젝트인 세관 건물과 제염소는 서로 판이한 운명을 맞게 된다. 세관 건물은 혁명의 날분노한 파리 시민들에게 파괴당했다. 그 반면 제염소는 파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덕에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뿐만 아니라 1920년 프랑스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을 얻었다. 18세기, 소금은 왕실 전매품으로서 왕가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프랑스의 아르케스낭Arc-et-Senans이라는 곳에 중요한 제염소가 하나 있었는데 시설이 몹시 낙후되어 다시 지을 필요가 있었다. 이 지역은 지하수에 염분이 섞여 있어 고대 로마 시대부터 내륙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다. 소금이 엄청 비쌌던 시절이었으므로 소금 도둑이 많아 철통같은담장을 둘러 지켰는데,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점점 비좁아지니 위생 문제와 더불어 화재의 위험도 커졌다.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주변의 숲을 모조리 벌목하여 불을 땠으므로, 땔감 수급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르두는 구 제염소를 개조하는 것보다는 숲이 있는 곳으로 이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경우 제염소 전체를 새로 설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는 새 제염소의 기본 틀을 반원형으로 잡고 건물과 동선을 방사형으로 배치하여 향후 사업이 확장되더라도 외곽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르두가 설계한 아르케스낭의 소금 마을 배치도 참조). 이 반원형의 구조를 좀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가장 외곽에는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정원과 건물이 번갈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가장 남쪽에 반원형을 그리며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는 건물군은 기숙사다. 정중앙의 캐노피가 입구 겸 경비실이며 양쪽으로 각각 재판소와 유치장이 배치되어 있다. 북쪽의 일직선을 보면 중앙에 소장의 관사가 우뚝 서 있다. 여기가 바로 컨트롤 타워이며 힘이 집중되는 구심점이다. 이곳에는 예배당도 마련되어 소장의 감시 하에 모두 함께 미사를 드렸다. 소장의 관사를 양 옆에서 호위하고 있는 건물들이 바로 생산 공장이다. 이 제염 마을의 배치도에는 르두의 세계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계몽 왕조였다. 즉, 왕정과 신분 사회를 유지하여 계급 사이에 선을 분명히 긋되, 계몽 정신에 의거하여 각 신분의 존엄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몽 정신보다 더 우위에 둔 것은 건축이었다. 이 사실은 그의 건물 설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건물의 창을 아주 작게 만들었고, 공장의 굴뚝도 생략했다. 자신의 건축 미학을 훼손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공장 내부는 통풍이 잘 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만성 호흡기 질환에 시달렸고 일찍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느 모로 보나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바스티유 감옥에서 13개월을 보내는 동안 르두는 소금 마을을 이상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종이와 연필이 없으니 일단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가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종이에 옮겼다. 우선 그는 반원을 확장시켜 완전한 원으로 만들고 개별 건물을 디자인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숲의 이름을 따서 이상 도시쇼1라고 이름 붙였다(118쪽 아래 그림 참조). 이상 도시 쇼의 설계도는 마치 백설 공주의 계모가 내민 사과와 같다. 반쪽에는 독이 들어있고 나머지 반쪽에는 독이 없는 사과처럼 쇼 마을의 반은 참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북쪽의 새로운 반원 마을이 이상 도시에 해당된다. 이곳은 ‘도덕적인 이상에 따라 사는 곳’2이었다. 18세기 계몽 시대에 정원이나 건물을 지을 때 항상 ‘도덕성’을 내세우는 이유는 그동안 신의 계율에 따라 살았으나 이제는 인간 중심의 세상을 만들어스스로를 지켜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신의 계율이 아닌 인간의 도덕성이 관건이 되었다. 루소나 조지프 에디슨 등이 정원에서 도덕성을 찾았다면 르두는 공동 생활체 개념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숲 속에 세노비Cénobie라는 공동 주택을 설계했다. 총 16가구가 모여 사는 주택이다. 르두에 따르면 사람은 다른 이와 교류를 통해 좋은 사람으로 다듬어지기도 하고 방종하게도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즐거운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만 행복해진다. 고요한 숲 속에 지어진 세노비에서 현인들의 지도 아래 단순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활하면서 전설 속의 황금기를 구현하고자 한 곳이 바로 이상 도시 쇼다. 혁명 이후, 아무도 전 왕실 건축가에게 일을 주려 하지 않았으므로 르두는 나머지 생을 건축 이론을 완성하는 데 바친다. 그 결과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책3을 집필했고 총 364장의 도판을 삽입했다. 이상 도시 쇼는 1권에서 설명하고 있다. 책의 제목 『예술과 관습과 법의 맥락에서 고찰한 건축』에서 나타나듯, 그는 세상의 모든 이치에 답을 주는 것이 건축이라고 주장했다. 건축가는 공간만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해법을 제시한다며 혁명 와중에 공석이 되어 버린 종교와 왕의 자리에 건축을 슬며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건축가는 신과 경쟁하는 자다. 모든 것이 그의 영향권 안에 있다”라고 비약하기에 이른다. 르두의 이상 도시는 그의 사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20세기 초, 경제 대공황을 겪으며 다시금 격변의 시대가 왔을 때, 일거리가 별로 없는 건축가들이 이상 도시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르두의 작품들이 재조명되었다. 르 코르뷔지에4가 르두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독일에서도 한 젊은 건축가가 르두의 작품에 깊이 심취하게 된다. 히틀러의 전속 건축가가 되는 알베르트 슈페어였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정의로운 도시, 차별의 도시
    삼(오)포세대 도시론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일컫는 삼포세대에 대한 사회적 우려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우려를 기성세대가 자신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사람에게 갖는 정체 모를 불편함이라고 생각했다. 남녀가 건강하다면 만혼이면 어떻고 아이를 갖는 대신 부부만의 오롯한 삶을 꿈꾸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이후 나는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앞의 세 가지에서 더 나아가 ‘인간 관계’와 ‘내 집 장만’마저 포기한 오포세대를 접하게 된 것이다. 도시에서 사회적 관계와 주거 공간이 갖는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나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기쁨과 슬픔, 보살핌과 따스함, 붐빔과 다양성의 감각을 만끽 할 기회를 넓혀가는 것, 나아가 적정 비용의 지불을 통해 소박하지만 깨끗한 집에서 거주하며 가족이나 이웃과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도시설계가 추구해야 할 핵심 덕목이 아니었던가? 이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세대에게 좋은 도시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종용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시에서의 삶, 특히 젊은 세대의 일상이 각박해지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수록 이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더욱 첨예하게 대립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사회·경제적 어려움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만 특정한 사람들의 삶을 특히 더 힘들고 비참하게 만든다는 관점이다. 출발 자체가 남들과 다른 이들은 자유 시장 경제 안에서 빈곤의 대물림, 교육 기회 박탈, 체력 저하나 건강 문제로 인한 사회적 격차를 극복하기 어렵다. 따라서 정책적 배려와 함께 지금보다 더욱 정의로운 도시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저소득층 주거권 보장’, ‘다민족·다인종 사회 만들기’, ‘청년 창업 지원 센터’, ‘공동 육아방’이나 ‘폭염 쉼터’ 운영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 중요한 만큼 지금의 도시를 더 혁신적이고 경쟁력 있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도시 경쟁력 강화’, ‘혁신 도시 건설’, ‘(전략적) 불균형 성장’을 이루어 전체 파이를 키운 후, 이를 적절히 나눠 가지면 궁극적으로 모두가 잘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배-성장, 정의-효율성 관점의 대립은 시설 투자에 대한 정부 예산 분배부터 도시 공간의 이용과 규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준다. 파인스타인 교수의 ‘정의로운 도시론’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과연 도시 공간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방식을 통해 효율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정의로운 도시just city를 구현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정의로운 도시를 만드는 일이 과연 얼마나‘공간’과 관련되어 있을까? 조경·도시설계의 결과는 결국 크고 작은 도시 개발(혹은 재개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토지 매입, 보상, 착공 및 준공, 분양을 포함한 도시 개발 과정은 매 순간 돈의 흐름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정의나 분배와 관련된 이슈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쉽지 않다. 나아가 개발 사업의 타당성 여부도 궁극적으로 지역 경제 성장이나 일자리 창출, 도시 경쟁력 강화나 기업 브랜딩 효과 같은 효율성의 지표에 따라 판단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도시 개발로 인해 토지의 잠재된 가치가 발현됨으로써 공간을 직간접적으로 소비하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혜택을 볼 수 있지만, 결국 직접적인 개발 이익의 대부분은 투자의 불확실성을 감수한 개인이나 집단이 누리게 된다. 더욱이 이들의 이익 추구 행위를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규제하기도 쉽지 않다. 개발 사업에서 정당한 이익 추구와 지나친 탐욕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버드 대학교의 수잔 파인스타인Susan Fainstein 교수는 정의를 도시 공간과 이를 생산하는 과정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목표로 본다(그림1). 그는 정의로운 도시란 “공공 투자와 정책이 이미 부유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공정하게 혜택을 주는 도시”라고 정의한다.1 여기서 공정한 혜택이란 개발로 인해 도시민 전체가 골고루 부유해진다는 결과론적 해석이 아니다. 도시 개발 과정의 매 단계에서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 부와 효율성을 추구하는가를 묻고, 나아가 최소한의 ‘민주적 참여,’ 사회·경제적 ‘다양성 추구,’ 개발 혜택에 대한 ‘공정한 분배’ 원칙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을 고려한 도시 개발의 결과가 전혀 고려 없이 진행된 결과보다 훨씬 더 공정한 도시 공간에 가깝다. 파인스타인 교수는 뉴욕 브롱크스Bronx 지역에 2009년 완공된 양키스 구단 야구장Yankee Stadium을 정의롭지 못한 개발 사례로 손꼽는다(그림3). 비교적 낙후되었을 뿐 아니라 총격 사건과 방화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지역에 다수의 관중이 이용하는 스포츠 경기장을 개발함으로써 지역 이미지 개선을 기대하는 정책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뉴욕 양키스라는 명망 있는 구단을 유치함으로써 지역 불균형 해소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파인스타인 교수는 과연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고 있는 선수들과 부유한 구단주를 위해 뉴욕 시가 나서서 경기장 건립과 주차장 및 어메니티 시설 확보를 위한 대규모 공공 자금을 투자해야만 했는가, 그리고 야구장 부지 확보라는 명목으로 브롱크스 커뮤니티가 오랫동안 이용해 온 오픈스페이스를 잃게 되는 기회 비용이 과연 정당한 비용인가에 대해 묻는다. 나아가 다수의 야구 경기 관람객, 특히 값비싼 VIP 관람석 비용을 지출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과연 브롱크스라는 낙후된 지역 사회의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얼마나 줄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2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양키스 야구장 개발 과정을 보다 정의롭게 하기 위해 민주성, 다양성, 공정성이라는 원칙이 중요하지만, 이 중 하나에 지나치게 집착할 경우 오히려 총체적인 의미의 정의가 구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그들이 설계하는 법] Do you like it?
    열세 살 때 집을 떠났고 미국 동부에서 오랜 시간 동안홀로 유학 생활을 했다. 유학 초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문화적·언어적·지리적 혼돈 속에 사춘기를 보냈고, 낯선 것들 사이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강원도 속초.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의 어느 작은 시골에 부모님의 집이 있었다. 지붕 넘어로 설악산 미시령과 울산바위가 보이는 작은 마을인데, 학창 시절 단기간 살았던 서울과는 또 너무나도 다른 육지 위의 섬 같은 이곳을 나는 ‘내 집’이라부르며 자랐다. 막상 익숙해지려 하면 떠나게 되었고, 다시 돌아와 보면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이처럼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간에 빨리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그 세월 속의 변화가 느껴지는 공간이라면 ‘장소’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이십 여 년 동안 항상 스쳐가는 방문객처럼 살다보니(뭐, 원래 다 그런 것이겠지만), 장소란 한 곳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어디든지 동행할 수 있는, 정신적이고 무형적인 요소로 이루어졌을 거라 믿게 되었나보다. 그래서인지 공간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하나의 의도나 요지, 혹은 게임의 룰로서. 익숙한 것보다 생소한 것이 더 좋다. 아니, 좋다기보다는 생소해서 편하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물질적인 창조와 공간의 생산을 목표로 하는 조경 디자인의 일반적인 접근법에 비교하면 조금 벗어난 방식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추상성은 오히려 공간을 좀 더 자유롭게 해석하고 또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고방식이지 않을까.어쨌든 조경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의 눈으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네 가지 설계 방식을 적어본다. 01 물어보기: Do I like it? 다루는 대상이 뭐든지 간에 조금이라도 다른 시각에서 보고 또 그러한 시각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갈망과 의지가 설계하는 방법을 주도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그 방법은 항상 바뀌는 것 같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변하기 때문일까. 매번 똑같지 않다. 사소한 설계 디테일이 바뀐다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보는 시각과 디자인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하고자연스럽게 내가 설계하고 싶은 ‘이상’도 변화한다. 당연하겠지만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시도하는 설계 방법도 같이 변하게 될 것이다. 큰 그림, 즉 추구하는 바가 같더라도 객관적인 디자인이란 있을 수 없다. 디자인은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라는 것. 아무리 과학적인 접근을 취하더라도―하는 척만 해도!― 결국엔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 결과가 생산된다. 같은 맥락에서 사이트의 모든 챌린지를 단번에 풀어주는 디자인 전략이 있다고 해도, 내가 신나지 않으면, 즉 자신의 설계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결국엔 망한 전략이다. 설계 대상의 수많은 디테일과 여러 가지 상황 안에 나를 집어넣고 그때마다 받는 느낌이 어떤지, 내가 그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해가며 설계한다. 디자인 안에 들어가서 디자인하기다. 따라서 설계 중 항상 점검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취향과 시각이다. 그것이 디자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도구이자 매체라고 생각한다. 사이트를 읽든 소재를 고르든 설계의 대부분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내가 정보를 선택하고 걸러내며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구―취향과 시각―가 빛바랬거나 너무 익숙하다거나 또는 저만의 특별함이 사라졌다면, 설계가 잘 된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결국, 취향과 시각에는 좋고 싫음의 잣대가 적용되어 있다. 그런 익숙함에서 벗어나 정말 많은 것을 봐야 하고 접하고 또 물어봐야 한다. 또한 피하고 싶은 디자인 종류―나는 녹색만 입혀 놓았거나, 비전이 약하거나, 오버 엔지니어링된 건축이나 조경 사례를 좋아하지 않는다―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설계 스튜디오 때 학생들의 설계 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면 빼놓지 않고 그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So, do YOU like it?” 다시 말하지만, 방금 설명 받은 그 학생의 설계 안을 놓고 묻는 말이다. 설계안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던 학생들도 의외로 많이 머뭇거린다. 간단한 “Yes!”나 “No!”가 아니라, 대부분 한숨 섞인 미소로 답을 대신한다. 디자인하는 데 바빠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눈치다. 어떤 계기로 이 질문을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처음으로 던지기 시작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대학원생 시절의 나에게 한번만이라도 물어봐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랬다면 좀 더 일찍 남의 눈에 들지는 못하더라도 나만의 것을 찾으려 의식하고 대화했을 것이다. 이렇게 ‘Do I like it?’이라는 질문을 수시로 던지며 설계하다 보면 데드라인에 쫓겨 허겁지겁 마무리하는 식의 설계안이나, 잘 마무리된 것 같으나 어딘지 특별함이 없는 설계안을 내놓는 일이 줄어든다. 보통, 내가 진행한 프로젝트는 대략 네 가지 레벨로 나뉜다. 1) 숨기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거나 “I didn’t do it”, 2) 다들 좋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부족하거나 “I don’t believe in this”, 3) 모두 별로라고 하지만 나에겐 좋아 보이거나 “I believe in it”, 4) 전체적으로 부족해도 어느 한 구석 잠재력이 보이는 “There’s something in there” 프로젝트로,언젠가 다시 제대로 써봐야 할 밑거름 같은 설계안들이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설계와 감정이 많이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스스로 열심히 대화하며 설계하는 것, 나의 직감과 능력의 바로미터를 꾸준히 셀프 검진하는 것이 나의 설계 과정에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방법이다. 사이트나 소재를 해석하는 것. 상당한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대상지 분석(site analysis)은 설계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인데, 지난 몇 년간 내가 지도하는 학생들에게서 대부분의 대상지 분석이 해석(interpretation)이 아닌 말 그대로 분석에서 끝난다는 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분석은 서술(description)이고 해석은 프로포지션(proposition), 즉 논의가 있는 개인적 편향이라는 점이다. 물론 분석하는 과정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맞춰보고 들어보면 어떤 개인의 견해가 생기겠지만, 설계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이 분석에서 끝나면 자기 자신만의 유일한 디자인은 나오기 쉽지 않다. 해석은 분석된 내용이 디자이너를 통해 한 번 더 걸러진 정보다. 디자이너만의 시각으로 사이트나 소재를 소화하는 과정이다. 어떻게 보면 두 결과물이 비슷할 수 있으나, 창의적인 해석을 의도적으로 진행하면 설계 과정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변화는 우선 드로잉에 나타난다. 가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조경을 하는 사람으로 나무의 생물학적 특징과 습관을 더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나무를 평-단면 형태의 아웃라인으로 동그랗게만 그릴까. 물도 마찬가지다. 특유의 역동적인 성질이 모두 제외된 볼륨이나 덩어리, 물을 담고 있는 컨테이너로 대신 그린다. 조경에 가장 많이 쓰이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습관적 묘사 기법(representational habit)때문에 보다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해석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드로잉에 드러난 것처럼 조경다운 시각이 결여된, 어찌보면 너무나도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태도로 설계하고 있는 것 같다. 2년 전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진행한 디자인 스튜디오는 이런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막대 사탕 모양의 나무는 No’. 아이콘이 아닌, 나무의 아키텍처(architecture)를 구축하는 문화적·생물학적 과정을 이해하고 그리기, 즉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소재의 재해석을 바탕으로 설계할 것을 과제로 제시했다. ‘가지치기’ 같은 도시 행정 속의 문화적 의도가 살아있는 소재(living material)의 형태를 어떻게 구체화시키는지, 즉 어떤 방식으로 도시 수목의 관리 과정이 이루어져야 하는지가 스튜디오의 쟁점 중 하나였다. 나무의 캐노피를 생태적 산물이 아닌 변형 가능한 건축 구조물로 본 셈이다. 설계는 게임이나 놀이처럼 진행됐다. 우선 학생들은 자기만의 규칙으로 나무를 관찰하고 그려나가는 것 자체를 아주 재미있어 했고, 그래서인지 그 과정에서 생산된 그림들 역시 매우 신선했다. 물론 오차도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학생 14명의 14가지 규칙을 모두 기억해야 했던 부담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개개인의 규칙을 바탕으로 ‘나무를 얼마만큼 언제 어디에 심으며 어느 부분을 관리해 주어야 원하는 형태의 도시 숲이 생성될 수 있을까’라는 렌즈를 통해, 익숙하다고 여겨왔지만 여전히 생소한 소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03 노동하기 도면 없는 설계, 즉 노동도 설계 방법의 하나다. 물론 일시적인 설치 작품(temporary installation)이나 골목, 정원 등 작은 사이즈의 프로젝트에 해당되는 말이다. 대학원에서 건축 디자인을 가르치는 남편도 강의식 수업이 많다 보니 가끔 무작정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고 한다. 우선 시작하고 본다. 가벼운 스케치 몇 장과 250달러를 들고 바로 재료를 사러 나간다. 5일 만에 끝내겠다는 플랜도 짠다. 아침과 오후엔 수업과 미팅이 있어 밤 8시가 되어서야 이 게릴라 설계 노동이 시작되었다. 새벽 두세 시에 건축학교 빌딩 앞마당에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당시엔 아직 아이가 없을 때라 이런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었다) 남편과 나를 발견한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뭐하냐고 물 어본다. “We are just making! 그냥 만드는 중이야!” “Making what?! 뭘 만드는 데요?!” “We don’t know yet! I’m sorry! 우리도 아직 몰라! 미안해!” 그리고 5일 후, 안에선 사람들 머리만 보이고 밖에선 몸만 보이는 헤드 박스가 완성되었다. 이 해 10월, 할로윈 파티에 앞서 비가 너무 많이 온 것이 설계에 영향을 미쳤던 걸까. 박스 내부엔 마일라(Mylar)와 조명을 사용해 다들 물속에서 나오고 있는 듯한 (혹은 가라앉고 있는 듯한) ‘가짜 공간’을, 외부엔 본격적인 파티에 앞서 몸을 풀 수 있는 작은 에피타이저 같은 장소가 만들어졌다. 설계 과정에서 모델(physical model)을 활용해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는 것처럼, 헤드 박스를 만드는 ‘노동’은 실시간 설계다. 비용과 시간에 제한을 두고 직접 지으면서 설계 결정을 해 나간다는 것은 그리면서 하는 설계와는 다른 종류의 설계법과 디테일을 배우게 한다. 심플한 구조에도 무게가 꽤 나갔던 박스의 나무 프레임이 1인치도 안 되는 가는 막대기 네 개에 의해 지탱될 수 있을지 처음엔 몰랐던 것처럼. 설계란 꾸준히 다양한 방법을 필요로 한다. 한 가지에 익숙해질 때 쯤 또 다른 설계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도면 없는 설계를 한다. 헤드 박스는 한 예에 불과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이유를 찾는다면 도면 베이스의 설계 시 필요한 현실적 감각을 기르기 위함이라 할 수 있겠다. 04 설계 안하기 마지막으로 설계를 하지 않아도 좋다고 결정하는 자세도 중요한 설계 방법 중 하나다. 즉, ‘없음’이 도구다. 우리가 사이트나 소재를 알아야 하는 이유도, 클라이언트와 꾸준한 대화를 하는 이유도 모두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설계안을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새로 짓거나 개조한다고 해서 어떤 공간이 반드시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보스턴 시청 건물과 광장에 관한 공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공모 대상은 거대한 콘크리트 외부를 자랑하는 브루탈리즘(brutalism0 건축으로,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못 생긴 빌딩 중 하나로 뽑혔던 나름 역사적인 건물이다. 그만큼 이 건물을 재해석해보려는 시도가 많았다. 아직도 수많은 설계 회사와 건축 대학원에서 스튜디오 소재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설계안이 나왔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니. 우린 또 다른 설계안을 제안하기보다 과대 선전을 통한 이미지 개선 캠페인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 시청 빌딩이 건축적으로 혹은 도시학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빌딩을 또 다른 문화를 생산하는 촉매제로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사실 이 건물을 좋아해 애초부터 별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했다). 행정 건물과 대중문화가 서로 어우러진 시청의 미래는 연상(association), 모사(replication), 아이콘화(iconization), 그리고 전파(dissemination)라는 전략을 통한 물질적 개조가 아닌 대중 인식의 개조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설계를 하지 않았다기보다 설계의 정의를 넓힌 것이다. 이러한 예가 아니더라도 설계 도중 스스로 편집할 수 있는 능력, 상황에 따라 잠시 생략하고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프로젝트가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공간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아이디어가 곧 ‘설계’고 ‘방법’일 것이다. 조리나는 1982년 생으로, 미국 웰슬리 칼리지(Wellesley College)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트(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맥스완 아키텍트 + 어바니스트(Maxwan Architects + Urbanists)에서 다양한 도시 디자인과 조경 및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조경학과 대학원 강사로 있으며 하버드 GSD에서 초청 강사로 가르친 바 있다. 건축가 매튜 줄(MatthewJull)과 쿠토노톡(KUTONOTUK)의 공동 대표로서 구겐하임 헬싱키(Guggenheim Helsinki)와 헬싱키 공공 도서관(Helsinki Public Library), MoMA PS1 젊은 건축가(Young Architects Program), 유로판 등에서 주관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아크틱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의 대표로서 미국 워싱턴D.C.의 정책 연구 기관과의 협력 아래 북극 도시와 극한 랜드스케이프(extreme landscapes)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www.kutonotuk .com | www.arcticdesigngroup.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