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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료와 디테일] 잡초, 다르게 볼 줄 아는 자가 누리는 사치
    첫 번째 대화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임 소장(건축가)이 설계와 시공을 담당하게 된 성북동 현장을 방문했다. 성북동이라는 말에 한껏 들떴다. ‘우리도 이제 부자 동네에 한건 하는구나!’ 이렇게 혼자 헛물을 켜며 도착한 곳은 건물이 7평, 그 앞 장방형 마당 또한 무려 7평이나 되는 대저택(?)이었다. 너무 넓어서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건축주는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서 아파트를 처분하고 단독 주택을 짓게 되었다며 이 대저택의 출생을 설명한다. 그 분의 꿈을 이루어내야 하는 중 대한 사명을 띠게 된 것이다. 예산은 얼마냐고 물었다.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럼 어떻게’ 우린 고민하기 시작했다. 많은 아이디어가 오고가는 와중에 건축주가 한마디 거든다. “성북동 언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들풀을 써보면 어떨까요” 경비를 아끼자는 측면도 있지만 자신의 집에 들풀이 자라는 마당이 있으면좋겠다는 것이다. 처음엔 ‘과연 될까’하며 머뭇거렸지만, 현장을 나서면서 마주친 성북동의 오래된 담장 틈으로 자라고 있는 고들빼기와 민들레를 보는 순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두 번째 대화 조경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놀러 왔다. 파주 근처에 지어지는 건물 중정에 식재 공사를 하고 있다며 현장 사진을 보여 준다. 강원도에서 멋지게 자란 흉고직경 20cm의 낙엽교목을 이식하는 이미지였다. 부러웠다. ‘우리가 만들 정원의 총공사비로는 저런 나무 한 주 밖에 못 사겠네’라는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기에 에둘러 흠집을 잡기 시작했다. 물론 속으로만. ‘처음 태어난 땅에서 어렵사리 자리 잡고 살고 있던 나무였을 텐데…, 뿌리에 온통 칼질을 해대며 뽑아내 이 먼 거리를 싣고 와서 낯선 땅에 심는 게 마땅한 일인가…, 그것도콘크리트 바닥 위에다가….’ 그러다가 나 역시 인간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가만히 있는 식물에게 몹쓸 짓을 해오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공간 공감] 알토 사옥 옥상정원
    빛 공장 위에 떠있는 작은 천국 별천지라는 말이 여기만큼 딱 맞는 곳이 있을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경기도 외곽, 난개발로 이름난 용인시 한 구석에 툭툭 던져놓은 것처럼 무심히 박혀있는 공장들 틈에서 밤이 되면 그 존재감을 달리하는 한 건물이 있다. 빛을 연구하고 만드는 알토 사옥이다. ‘라이트 빌딩Light Building’이라는 정직한 이름을 가진 이 건물 옥상에 아주 특별한 정원이 있다. 2013년 경기정원문화대상 최우수상을 받은 알토 사옥 옥상정원(이하 알토 정원)은 직원과 방문객에게 휴식과 평화를, 그리고 문화 행사와 연회의 기쁨을 제공하는 열린 정원이다. 이곳은 정원의 사전적 의미를 충실히 구현한다. 정원garden의 어원이 ‘구획을 지어gar, gher, enclosure’ ‘이상향을 만드는 것eden’이라고 한다면, 알토 정원의 단아한 외관 뒤에 숨은 구획과 위요의 기법, 이상향을 만들기 위한 크고 작은 장치들은 치밀하게 작동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건물을 빠져나와 정원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누구나 ‘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미소를 머금게 된다. 그 감탄사는 건물로부터, 노동으로부터, 속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는 극적 반전에서 비롯된다. 알토 정원의 신비함에는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건축적·구조적 장치가 숨어 있다. 주변 건물의 보기 흉한 대형 광고판이나 골프연습장을 시각적으로 차단하기위해 옥상 파라페트와 가벽의 높이가 정확히 계산되어 설치되었다. 몇몇 나무들의 위치 역시 바깥으로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꼭 그 위치에 있어야 했다. 반면 정원은 주변의 산을 향해 무한대로 열려 있다. 적절한차단과 시각적 연계를 통해 만든 위요와 차경은, 대지 경계선 안쪽의 디자인 이전에 주변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정원의 성패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식물의 크기를 고려하여 화단의 높이가 달라지고 바닥의 수로를 설치하기 위해 목재와 화강석으로 마감한 바닥면은 슬래브에서 띄워져 있다.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비평] 세상에서 가장 긴 화분
    1. 작년 가을, 박원순 서울시장은 뉴욕의 하이라인에 올라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시작을 선포했다. “서울역 고가는 도시 인프라 이상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갖는 산업화 시대의 유산”이므로 “원형을 보전하면서…하이라인 파크를 뛰어넘는 녹색 공간으로 재생시켜 시민에게 돌려드리겠다.…서울역 고가가 관광 명소가 되면 침체에 빠진 남대문시장을 비롯해 지역 경제도 활성화될 것”이다. 산업 유산이므로 남겨서 하이라인처럼 명소로 만든다는 낭만적 논리는 국제 설계공모의 기본 정신으로 이어졌다. 논란과 우려 속에서 강행된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초청사에서 박 시장은 이렇게 말한다. “1970년에 준공된 서울역 고가는 근대 서울의 얼굴을 담고 있는 역사 유산이자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서울…의 성장과 발전을 상징하는 추억의 공간입니다.…서울역 고가를 무조건 철거하기보다는 주변 지역과 연계하여 녹지, 문화, 소통의 공간으로 재생하고…사람 중심의 보행 거리로 탈바꿈시키고자 합니다.…서울의 새로운 명소로 조성해 도심의 문화 유산 가치를 높이는 것은 물론 주변 지역의 경제 활성화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설계 지침서에 활자화된 공모의 목적은 “보존을 통해 도시 기억과 시민 공간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서울역 고가는 한국의 근대사를 대표하는 산업 유산이므로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공공의 보행로로 재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쟁점은 결국 서울역 고가를 근대 산업 유산으로 볼 수 있는가로 수렴된다. 이번 공모전은 이 이슈에 대한 해석과 해법을 중심에 놓았어야 한다. 서울역 고가는 1960년대 후반의 폭발적인 인구 집중과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주도한 서울 입체 도시화 사업의 산물이다. 그 직전에 도쿄에서 진행된 파괴적 입체 개발의 모방이라는 평가도 있다. 서울역 고가를 비롯한 당시의 고가 도로들은 개발의 상징이자 근대화를 과시하는 경관적 표상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교통 정체를 유발하고 안전을 위협하며 시민의 보행권과 조망권에 장애가 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2003년 청계고가도로를 시작으로 서울에서만 16개의 고가가 철거되었다. 서울의 관문 경관을 가로막고 있는 서울역 고가는 철거해야 할 위험 시설로 이미 2007년에 진단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었다. 서울역 고가는 과연 보존할 가치가 있는 산업 유산인가1 옛 것이면 가치를 불문하고 다시 살려 써야 한다는, 강박증적 ‘재생’ 이데올로기는 아닌가? 재활용의 ‘착한’ 이미지에 편승한 포퓰리즘적 논리는 아닌가? 공모전에 초청된 일곱 명의 조경가와 건축가에게는 바로 이 핵심 쟁점을 탐구하는 작품을 요청했어야 한다. 만일 폭력적 도시 개발의 산물인 고가도로를 산업 유산의 하나로 재평가할 수 있다 하더라도, 또 우리가 과거를 지워버리지 않고 기억하며 다시 쓰고자 한다 하더라도, 그 디자인적 해법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철거하여 기형적 경관을 바로잡고 고가가 있던 자리에는 선을 그어 기록할 수도 있다. 구조체와 재료의 일부만을 살려 전망대로 쓰는 방법도 있다. 철로로 단절된 구역의 고가만 남겨 보행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강한’ 조건의 설계 지침은 설계의 창의적 스펙트럼을 좁힐 수밖에 없다. 강한 지침을 따르며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938m의 긴 고가를 본래의 선형대로 유지하면서 고가 주변의 도시 조직과 적절히 연계되는 보행 위주의 공원을 제안하는 일뿐이다. 서울역 고가―그것이 근대 산업 유산이든 아니든― 자체에 대한 해석을 봉쇄당한 디자이너, 그는 고가 상부의 미려한 포장, 시각적 부담이 없고 동시에 안전에도 문제가 없는 난간, 보행의 원활한 흐름과 다양한 행태를 수용하는 장치 정도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무난하면서도 세련된 화장술이 관건인 것이다. 결국 서울판 하이라인이 요구된 셈인데, 역설적이게도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하이라인을 재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건으로부터 탈출하기 쉽지 않은 설계 과제다. 다음에서 간략히 살펴보겠지만, 제출작들은 기초화장, 네일아트, 원더브라 정도의 제한적 선택지에서 답을 고르는 데 고심했다. 2. 제목을 달지 않은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Topotek 1)의 제출작은 ‘강한’ 설계 조건에 역으로 대응해 서울역 고가를 화려한 주연보다는 충실한 조연으로 규정한다. 가장 ‘약한’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설계적 개입을 전략적으로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비움과 개방을 통해 역동적인 유연성을 꾀한 이 작품에는 아무런 구조물이 없다. 고가 전체를 하얀 콘크리트로 포장하여 단순한 공간미를 주고 고가 가장자리에 선형의 벤치를 겸할 수 있는 목재 데크의 선큰 플랫폼을 놓는 게 전부다. 프로그램별로 공간을 구획하지도 않는다(그림1). 거의 전 구간이 동질적이고, 그 위에서 일상적 이용과 계절별 이벤트가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비평] 제대로 된 쇼를 하라 서울역 고가 공모, 진화인가 퇴보인가?
    흔히 부정적으로 얘기할 때 쓰는 ‘쇼를 하고 있네’의 천박한 의미의 ‘쇼’가 아니다. 멋지고 유려하며 감동을 주는, 그래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브로드웨이의 공연과 같은 ‘쇼’. 뉴욕의 더 로케츠나 파리의 물랭루즈와 같은 볼거리가 화려한 ‘쇼’. 수를 부리고 허를 찌르는, 짜임새가 탄탄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정치적 ‘쇼’. 무엇이든 간에 ‘쇼’의 핵심은 흡입력, 구성, 그리고 명분이다. 이 세 가지가 잘 갖춰지면 관객은 몰두한다. 그러나 서울역 고가는 흡입력도 없었고 구성도 빈약했으며 명분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물론 멋진 쇼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서울역 고가는 장소적 특성으로 인해 그 이전의 마포석유비축기지, 그리고 그 이후의 세운상가 공모전보다 훨씬 더 주목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서울의 대표 프로젝트로 청계천과 한강 르네상스가 있었다면 이번 시장에게 서울역 고가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제대로 인정받는 쇼를 통해 명분도 얻고 무얼 하든 따라붙는 정치색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이라인으로 갔다. 여러 가지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먼저 하이라인은 서울역 고가처럼 철거 논의가 많았지만 결국 공공 공간으로 지켜낸 프로젝트다. 그리고 성공 사례다. 드러내 놓고 얘기할 순 없었겠지만, 서양의 것이라면 그저 좋다고 여기는 천박한 시민 의식도 살짝 건드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해도 될 것을 굳이 멀리 뉴욕까지 갔다. 파란하늘, 선명한 색감, 하이라인의 시크하면서도 야생적인 느낌, 고풍스러워 보이면서도 현대미가 물씬 풍기는, 우리가 동경해 마지않는 뉴욕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It’s show time! 여기까지만 보면 쇼의 시작은 성공적인 듯 보인다. 하지만 강력한 한 방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이라인이 발목을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라인의 빼어남이 서울역 고가의 잠재력을 잠식했다. 많은 논란 끝에 고가를 활용하기로 했다면 왜 그것이 하이라인과 같은 공간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만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장소를 표방할 순 없었을까? 하이라인이 생기기 전의 성공 사례로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가 있었다. 그러나 하이라인은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냈다. 정말 쇼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면 서울역 고가에 올라가서 해야 했다. 하이라인 위에 올라 서울역 고가를 얘기함으로써 이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본편이 아닌, 성공하기 힘들다는 속편으로 만들어버렸다. 쇼를 보는 관객은 혼란스럽다. 하이라인이 좋은 건 알겠는데 그래서 서울역 고가는 어떻게 된다는 건가? 좋게 말하면 ‘벤치마킹’이지만 실상은 정체성의 ‘카피’와 무엇이 다른가? 관객은 본 공연을 보기도 전에 김이 샌다. 크레디트 그래도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아직 공모전은 시작도 안 했다고. 재미있는 쇼는 이제부터 보여주겠지. 그런데 웬걸. 본격적인 쇼 타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또 한 번 실망한다. 주최 측은 능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심사숙고해 공정하게 뽑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디션이 없다. 오디션이 없었는데 어떻게 공정하게 뽑은 걸까?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디자이너들로 구성해 놓았으니 주최 측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야 할까? 그런데 선발의 기준이 보이지 않는다. 최혜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 AECOM(전 EDAW)을 거쳐 West 8 뉴욕 오피스에서 거버너스 아일랜드 프로젝트를 담당했다.2012년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에서 West 8 + 이로재 팀의 당선을 이끌면서 현재 서울과 로테르담을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 및 조성계획 수립 프로젝트 리더로 일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 친환경건축물 인증제 공인 전문가(LEED AP)이다.
  • [비평] 상상적 시민들의 공모전 설계 교육의 단면들
    어째서 모두는 이 프로젝트의 주인을 박원순 시장으로 전제하고 있는가? 공론화는 시민의 몫이 아닌 서울시의 책임인가? 과연 서울역 고가에서 지역 전문가와 시민들의 내부 성찰은 무엇인가? 그러한 것이 있기는 한가?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앞서 이 프로젝트에서 시민들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축제의 끝에서 남은 질문들 또 하나의 축제가 끝났다. 공모전 때문에 며칠째 집에 못 들어가는 누군가나 당선작의 선정 결과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누군가는 공모전이 축제라는 말에 공감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모전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진지한 고민을 할 기회는 없기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공모전은 우리 도시와 공간의 담론을 풍성하게 해주는 축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축제에 누가 참여했는지 주인공들이 무엇을 했는지가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지만, 정작 축제의 성공 여부는 어떻게 축제를 기획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공모전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 『환경과조경』은 서울역 고가 설계공모의 방식과 절차에 대해 공모전 기획을 지휘한 김영준 전문위원에게 몇 가지 비판적인 질문을 제기한 바가 있다. 우선 굳이 소수의 작가들만 참여할 수 있는 초청공모 방식을 택한 이유를 물었다. 프로젝트 특성과 작품의 질을 고려할 때, 응모작 수는 많지만 정작 좋은 안들은 소수에 그치는 공개공모보다는 초청공모 방식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확실히 지명초청 방식이 저명한 작가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는 유리하다. 물론 저명한 작가의 안이 반드시 좋은 안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공개공모의 방식일 경우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작가들이 참여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지며, 국내의 저명한 작가들의 참여마저도 이끌어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서울역 고가 공모전이 서울시가 추진하는 유일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큰 구상의 일부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미 ‘서소문밖 역사유적지’와 ‘마포석유비축기지’가 공개공모 방식으로 치러졌다. 서울역 고가에 이은 ‘세운상가 활성화’와 ‘잠실종합운동장 일대 도시재생 구상’ 역시 공개공모로 진행된다. 따라서 이 많은 공모전 중에 하나쯤은 확실히 흥행을 보장할 주연 배우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시기적으로나 화제성에 있어서나 서울역 고가를 초청공모로 진행한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음은 폐쇄적으로 진행된 지명 과정의 적절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일단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번에 초청된 작가들의 구성은 꽤 흥미롭다.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든 작가들이 명단에 없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장들이 국내 무대에서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를 보았을 때 차라리 국내의 여건을 충분히 존중해줄 만한 작가들을 선정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번 공모전에 참여한 국내외의 작가들이 지명도가 낮다는 말은 아니다. 선정 과정이 투명하지 못했다는 문제 제기는 할 수 있어도 초청받은 작가들이 자격 미달이거나 특정한 분야나 국가에 편중되었다고 비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또한 지난 공모전의 참여 자격에 대한 논란을 의식한 듯 처음부터 공모전의 조건으로 건축, 조경, 구조의 협업을 전제했고, 그 때문인지 염려되었던 특정 분야의 독단과 독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적극적인 소통의 과정이 간과된 성급한 진행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장황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게 해결되었다고 느껴지지 않는 이질문은 여전히 진행 중인 논란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비판적 견해를 반영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정작 설계공모의 기획책임자가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는 공모전의 방식과 절차 이전에 이 프로젝트의 당위성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울역 고가의 주인 2014년 9월 미국을 순방 중이던 박원순 시장은 뉴욕의 하이라인을 시찰한 뒤기자간담회를 열어 서울역 고가를 재생하는 공모전을 개최하겠다고 발표한다. 발표 직후 호평보다는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 일간지에는 전문가들의 비판적인 의견이 담긴 칼럼들이 실리기 시작했으며,2 남대문시장 상인들과 인근 주민들은 공원화 계획에 거세게 반발했다. 서울시 의회에서도 시장이 절차를 무시했다며 일부 의원들이 제동을 걸었다. 공모전이 끝나고 당선안이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역 고가 공원화는 모두의 동의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서울역 고가는 이제 더 이상 가치중립적인 도시의 공간으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이명박 전 시장에게 청계천과 서울숲이 그러했고 오세훈 전 시장에게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한강 르네상스가 그러했듯이, 서울역 고가는 박원순 시장의 미학적인 정치 도구라는 사실이 이미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서울역 고가에 대한 모든 평가는 아무리 신중하게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을 하더라도 어떤 지점에서 반드시 본의 아니게 정치적인 함의 속으로 미끄러지게 된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은 결국 서울시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고, 상찬 역시 박원순 시장의 정책에 대한 지지와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되는 묘한 동조 현상이 나타났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했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 [칼럼] 담장에 갇힌 늙은 거인
    불안감에 쌓기 시작한 담장에 스스로 갇혀 버린 사람의 얘기는 더 이상 우화가 아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 거주자가 도시의 절반이 넘고 그나마 남은 골목은 주차장이 되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은 지 오래다. 행여나 뭐라도 훔쳐 갈까 집집마다 보안 시설을 설치하고 도로 곳곳에 CCTV를 단다. 서울의 아이들이 바깥공기를 맡는 시간이 하루 평균 7분이라는 통계는 담 정도에 갇힌 게 아니라 벙커에 사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게할 정도다. 담은 궁극적으로 단절을 말하는 것인데, 도시민들이 스스로 쌓은 담은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불안감에서 기인하지만 도시의 단절은 자본의 욕망에 기인한다. ‘더 많이’ 벌고 싶은 욕구는 ‘더 빨리’를 요구했고 결과적으로 더 넓은 도로와 더 많은 철도가 만들어진 셈이다. 서울의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려고 할때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단연 자동차다. 필자는 건강과 다이어트를 이유로 걷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있지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여전히 걷기 힘든 도시다. 그래서 결국 다시 자동차 열쇠를 찾는다. 역시 자동차가 답이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교통이 좋아야 장사도 잘 됐고 집값도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월세를 사는 한이 있어도 차는 꼭 샀다. 시작은 달콤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교통사고는 늘고 공기의 질은 지속적으로 나빠진 데다 아스팔트의 열기는 숨이 턱턱 막히게 했다. ‘더 빨리’가 무색하게 길에서 낭비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천정부지로 치솟은 기름값은 지갑을 얇게 만들었다. 그뿐인가 개인이 쌓은 담과 도시가 쌓은 수많은 담들에 갇힌 시민들은 급속도로 개인화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한국 사회를 휩쓸고 간 키워드는 ‘불不’이었다. 불통, 불신, 불안, 불확실 등의 단어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수준으로 다가왔고, 결국 우려했던 단계로 접어들었는데 그것은 ‘무無’다.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로 지금의 메르스까지 우리는 무책임, 무능력, 무관심으로 인한 무기력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개인화가 낳은 소외와 단절이 가져온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린 서울은 세계의 대도시가 다들 그랬듯이 육교와 고가를 허물고 보도를 넓히고 더 나아가 차량이 다니지 못하는 보행 전용 도로나 대중교통 전용 도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담을 허무는 서울의 도전이 시작된 셈이다. 그 한복판에 서울역 고가가 놓여 있다. 남대문시장의 상인들은 시장이 망할 것이라고 하고, 고가 주변 주민들은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고 걱정이 태산이다. 과거의 경험이 주는 믿음은 견고했고 갈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것에 있음에도 여전히 화살의 방향은 교통을 향한다. 꽉 막힌 도시에서 자본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길을 뚫어 소비의 물꼬를 돌렸고 더 이상 좋은 땅을 찾지 못한 현대판 지관들인 투기꾼들은 수도권 곳곳에 욕망의 신기루를 만들어 배를 불렸다. 그러는 동안, 정부와 서울시의 무책임, 시민들의 무관심, 소위 전문가 집단의 무능력은 상인들을 무기력 상태에 빠뜨렸고 분노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서울역 고가로 향했다. 서울역 뒤편의 상황은 더 처참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시의 중앙 역사의 뒤편은 허름했다. 서울역도 예외가 아니었고 한 발 더 나아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병폐인 부동산 투기와 만나 상황은 더욱 처참해졌다. 지난 30년 동안의 선거에서 모든 후보들은 개발을 약속하고 파기하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요동을 친 땅값은 2008년 북부역세권 개발 계획 발표 시 평당 6천만 원이라는 정점을 찍었다. 800여 명이었던 소유주는 그새 2,200여 명으로 늘었는데, 소위 딱지 거래가 성행한 결과 한 집에 소유자가 무려 20명에 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이제 주민들은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 말기 암환자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대체 의학을 찾듯 “그나마 박원순이니까…”하는 마음으로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중이다. 늙은 도시, 600살을 넘긴 무기력한 거인의 현재 모습이다. 그렇다면 진정 답은 없는 것인가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에 답이 있을 것 같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어미닭이 쪼아주듯이 주민과 시민들이 스스로 깨려고 할 때 행정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 서울의 활력은 애초부터 사람에 있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서울은 언제나 도전하는 사람들의 활력으로 발전해 온 도시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역량이 지속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 정책의 결정 과정에 참여시켜야 근육이 생기고 힘이 붙어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법이다. 네덜란드의 세계적 건축가인 비니 마스가 서울역에 말을 걸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시민이 할 것인가, 서울시가 할 것인가. 앞으로 남은 설계 과정에 얼마나 많은 시민이 참여할 것인가가 이 사업의 관건이다. 앞으로 3개월 여, 고가산책단은 이 과정의 퍼실리테이터facilitater가 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서울역 고가의 당선 작가인 비니 마스의 인터뷰는 눈여겨볼 만하다. “도시재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산물입니다.” 이제 선택은 서울 시민들에게 달렸다. 담장을 허물어주길 기다릴 것인가, 스스로 깨고 나올 것인가. 조경민이라는 이름보다는 조반장이라는 별명이 더 익숙해졌다. 지금은 사단법인 서울산책의 대표이자 고가산책단의 일원이지만 이전까지는 각종 문제 연구소장으로 불릴 정도로 얇고 넓게 그리고 복잡하게 살아왔다. 건축을 전공했으나 아직 자기 집이 없고 남자 평균수명의 절반을 넘었으나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많으며 현재 가장 큰 고민의 주제는 ‘서울’과 ‘길’이다. 고가산책단은 서울역 고가에 대한 걱정이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모임이다. 지금은 고가에 대한 시민들의 마음을 듣고 모으고 전하는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설계공모의 이면
    예고한 대로 이달에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당선작과 출품작들을 세 편의 비평과 함께 엮은 특집을 싣는다. 너무 당연한 말이 겠지만 설계공모의 목적은 좋은 설계안을 뽑는 데 있다. ‘좋은’의 자리에는 실험성이나 독창성처럼 가슴 뛰는 단어가 들어갈 수 있다. 경제성이나 공공성 같은 가치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어느 경우든 설계공모의 주인은 당선작에 따라 구현될 현실 공간의 사용자들이어야 하지만, 그들이 공모전의 실제 과정에 개입할 기회는 거의 없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는 주최자(또는 전문위원), 출품자, 심사위원 정도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 세역할을 모두 경험하며 설계공모의 이면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모든 게임의 주인공은 직접 뛰는 선수다. 스스로를 조경가가 아니라 이론가나 비평가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공모전에는 출품한 적이 몇 번 있다. 연합팀의 일원으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거나 전반적인 디자인 개념이나 전략을 잡는 일을 했다. 설계공모에 도전한다는 건 경쟁의 장에 뛰어드는 일이다. 시간과 노동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안감이나 피곤함보다는 흥분감과 초조함이 절묘한 비율로 혼합된, 매우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공모전을 한번이라도 해보면 바로 그 “기쁨을 아는 몸”이 된다. 자신의 디자인 아이디어와 해법을 실험하고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거나 적어도 공론화될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부르디외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루지오illusio”(장場의 환상)에 빠져 “인정 투쟁”을 하는 셈이다. 당선작을 내는 기쁨을 맛본 적은 없다. 매번 아쉬울 수밖에 없었는데, 경쟁에서 이기지 못해 억울한 건 아니었다. 패인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패인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주최자나 심사위원회가 제출작이나 최종 경쟁작에 대해 상세한 리뷰를 제공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A4 한쪽 미만의 형식적인 심사평이라도 발표되면 다행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패자는 작품 외적인 모종의 어떤 상황이나 관계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당선되지 못했다고 굳게 믿으며 분루를 삼킨다.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 냉소를 짓지만 이미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기에 멈출 수 없다. PAProfessional Advisor라는 조금은 생소한 약자로도 불리는 전문위원은 설계공모 주최자의 대리인이다.설계공모의 풍년이던 2000년대 중반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제도다. 같은 학과 원로 교수를 도와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광교신도시 호수공원, 동탄신도시 워터프런트공원, 용산공원 등 대형국제 설계공모의 전문위원 역할을 하게 됐는데, 복잡하지만 도전적인 일이었다. 설계공모 전반을 기획하고 설계 지침을 쓰고 제공 자료를 만들고 심사위원을 섭외하고 심사를 진행한다. 초청 공모인 경우에는 지명 초청자를 선정하는 일도 해야 한다.홍보, 의전, 전시 기획, 출판까지 관장해야 한다. 교수 몇 사람이 하기에는 벅찬 일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 인력 풀이 필요함을 깨닫곤 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주최자가 설계공모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였다. 설계 대상지를 무엇으로 어떻게 쓰겠다는 명확한 목적 없이, 원하는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바람도 없이 행정 절차의 하나로 진행되는 공모전. 설사 좋은 작품을 뽑는다하더라도 현실로 구현되기 어렵다. 주최자를 대리하는 입장에서 공들여 설계 지침을 작성해도 머릿속에 그렸던 작품이 제출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전문위원이 설계 지침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사를 진행하는 과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심사위원회에 모신 내로라하는 세계적 전문가들이 합리적인 토론보다는 난데없는 국가대항전이나 감정적인 민족주의의 대리전을 펼친다. 작품 자체보다는 태도나 스타일이 심사의 초점이 되기도 한다. 심사위원은 다시 하라면 가장 하기 싫은 역할이다. 다른 분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나에겐 몇 달씩 뜬눈으로 밤을 새워 제출한 노력과 성과를 단 몇 시간 안에 감식할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첨예한이권이 걸린 설계공모에서는 심사위원간의 토론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미명 하에 심사장의 상황이 옆방에 앉은 제출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심사위원은 마네킹처럼 다소곳이 앉아 자신의 채점표에 점수만 매기는 진풍경도 펼쳐진다. 토론을 하더라도 “이 작품은 직선이 많아 생태적이지 않다”, “저 작품은 정자가 있으므로 전통적이고 한국적이다”는 수준의 주장이 난무한다. 심사위원 노릇이 난감하고 피곤한 더 큰 이유는 인간관계 때문이다. 심사위원으로 예상되거나 발표되면 선후배,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 생전 본 적 없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친다. 찾아오지 마시라고 간청을 해도 소용없다. 연구실 문을 잠그고 없는 척해야 한다. 작품 제목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는 사람도 있고, 패널 이미지 파일이 카톡으로 날아오기도 한다. 2015년의 서울은 때 아닌 공모전의 르네상스다. 지난 한달 동안만 하더라도 설계공모 뉴스가 줄을 이었다. ‘잠실운동장 도시재생 구상 국제공모’의 참가 등록이 끝났고, ‘노들꿈섬 운영구상(1차) 공모’의 설계 지침이 발표됐으며,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국제공모’의 수상작들이 공개됐다. 세종대로의 국세청 별관을 허물고 역사문화 광장을 조성하는 설계공모도 곧 시작될 예정이다. 공공의 도시 공간을 재발견해 지혜롭게 고쳐 쓰는 일이야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 프로젝트들의 목표 시점이 정치적 일정과 무관하지 않으며, 일련의 설계공모가 ‘공간 정치’의 전시적 이벤트로 동원되고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공모전이 많아질수록 조경, 건축, 도시 전문가의 일거리가 풍족해진다고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설계공모는 생각처럼 낭만적인 제도가 아니다. 잡지 첫 쪽에 부끄러운 개인적 경험담을 늘어놓은 건 설계공모의 관행적인 형식과 내용을 다시 돌아보자는 뜻에서였다. 설계공모의 과정 자체를 다시 디자인하고 그 과정에 사용자(시민)가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시점이다.
  • [CODA] 여행의 기술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때는 어딘가로 떠나기를 결정하고 출발을 기다리며 기대를 부풀리는 시간일 것이다. 무려 6개월 전부터 비행기 티켓을 끊어두고 동행과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만날 때마다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볼지, 어떤 맛있는 음식(술)을 먹을지 등을 이야기했다. 바르셀로나나 파리, 런던 등 대도시와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프로방스나 지중해의 도시를 따라가는 여행. 가보고 싶은 장소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들뜨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통장에서 따박따박 빠져나가고 있는 여행 경비 따위는 외면하고 말이다. 이런 흥분 상태는 먹고사는 일을 잠시 제쳐 두고 익숙한 공간을 떠나 벌어질 미지의 일들에 대한 기대와 상상 때문에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우리에게 이번 여행은 현실 탈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여행을 떠날 때가 되자 (“꿈이 현실로 바뀔 시간”이 다가오자) 그전에 마쳐두어야 할 일들에 대한 부담과 준비 부족으로 인한 걱정이 여행에 대한 기대를 슬그머니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상향이 부담스러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출발 전부터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 생각났다. “늘 제기되는 한 가지 문제는 여행에 대한 기대와 그 현실 사이의 관계이다.”1 여행 전에 가졌던 기대와 달리 새로운 곳에서 느끼는 환희의 시간은 매우 짧다는 그의 예민한 관찰에 열렬히 동의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감동적인 풍경의 사이사이는 낯선 환경의 고달픈 현실이 채운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예상치 못한 현실이란, 답사를 위해 준비한 새 신발은 길이 들지 않아 걸을수록 상처만 내고, 기상이변으로 기온은 40도까지 치솟는데 한국에서는 흔하게 팔고 있는 아이스 커피가 없는 식이다(카페에서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면 점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뜨거운 커피가 담긴 잔과 딸랑 얼음 두 조각이 담긴 유리잔을 함께 내밀곤 했다. 얼음이 든 음료를 잘 마시지 않는 유럽 문화의 체험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더위를 견디기 힘들었던 우리는 사방에 널려 있는 매력적인 노천 카페를 두고 결국 익숙한 스타벅스에 찾아들곤 했다. 예전에는 전 세계의 맥도날드화를 우려했다면 지금은 스타벅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같다. 여하튼 우리에게 스타벅스 커피는 고향의 맛이었다. 낯선 것을 열망해 떠난 여행에서 다시 익숙한 것을 소망하는 아이러니라니!). 신체적 욕구의 충족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부분도 여행의 질에 영향을 미쳤다. “아름다운 대상이나 물질적 효용으로부터 행복을 끌어내려면, 그 전에 우선 좀더 중요한 감정적 또는 심리적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 따라서 중요한 인간관계 속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몰이해와 원한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은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목조 오두막을 즐기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즐길 수가 없다.” 긴 여정에 몸이 피곤해지니 사소한 의견 차에도 감정이 예민해졌다. 관심사와 스타일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함께 여행을 다니다 보니 보고 싶은 것도 제각각이어서 아무리 팀을 나누어도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돌발 상황도 속출했다. 어느 순간 우리는 희망한 그 모든 곳에 갈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답사 리스트에 올려 두는 것과 치밀하게 동선을 짜는 것은 다른 일이다. 꼼꼼한 답사 계획을 짜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을 접어두고) 여건이 되는대로 또는 그날의 리더가 이끄는 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여러 지역을 단체로 움직였던 이번 여행에서 습득한 ‘여행의 기술’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하나의 도시를 차근차근 둘러보거나 한 공간을 음미하며 답사하기보다는 빠르게 둘러보고 파악하기, 그리고 대책 없이 나열해 놓은 답사지 리스트를 다음 방문을 기약하며 포기하기가 주요 포인트였다. 그런데 여행의 빛나는 순간은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순간에 찾아오곤 했다. 이를테면 주요 스팟을 징검다리 건너듯 답사하다가 누군가의 의견에 따라 큰 기대 없이 돌아선 길에서 마주친 길거리 풍경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식이다. 그리고 보면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거리나 광장 혹은 공원의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좋은 계절 탓인지 공원이나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극성수기 해변 모래사장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파라솔들처럼 낯선 사람들과 큰 거리를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딱히 특별한 일을 하는것도 아니다. 그저 대화를 나누거나 누워서 햇볕을 즐기거나 홀로 앉아 있다. 서양인들은 햇볕을 종교처럼 여긴다는 상식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잘 꾸며진 공원뿐만 아니라 어디든 자리만 있으면 그렇게들 앉아 있다. 하다못해 파리 센 강의 더러운 지천 양편에도 맥주 한두 병을 든 젊은이들이 마치 술집의 바인 양 줄지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치 많은 실내 공간을 오픈스페이스가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달 전 편집부 카톡방에서 나눈 이야기가 떠오른다. 가을이 되면 소풍을 겸해 ‘공원’ 특집을 기획하자는 내용이었다. 실제 공원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미세하게 들여다보자고 했다. 공원의 원조인 서구의 공원과 우리의 공원 문화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공원이나 거리가 어떻게 받아주어야 할지도 고민해보자고 했다. 아마 올 가을에는 ‘즐거웠던’ 이번 여행을 추억하며 한국의 공원과 거리를 쏘다닐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그때쯤이면 고달팠던 현실은 생략된 채 감동적인 장면을 이어 붙여 편집한 여행이 남아 있을 것이다.
  • [편집자의 서재]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조경학과 학생들이 대상지를 이해하기 위해 답사를 다녀오는 것처럼 국문학과 학생들도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혹은 밤샘 술자리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를 대기 위해) 문학의 고향을 찾는다. 하지만 의도한 것과 반대의 경험을 하기도 한다. 지난해 나는 우연히 청양에 들렀다가 내가 사랑하는 시의 고향을 영영 잃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얼어붙은 호수에 헛되이 돌멩이를 던지며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나희덕의 시 ‘천장호에서’를 읽으며 과거에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천장호에는 적막 대신 거대하고 시뻘건 청양고추·구기자 조형물과 뜬금없이 하늘로 승천하고 있는 용 한 마리가 세워져 있다. 이 끔찍한 기억 덕분에 나는 이번 달에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국제공모를 다루면서 늦기 전에 세운상가를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줄곧 시골에서 살았던 터라 아쉽게도 세운상가에 대한 추억도, 찾아가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골뜨기에게 유하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의 시집이었다. 지금은 시인보다는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그는 자신의 시와 영화에서 줄곧 과거의 서울에 대한 향수를 노래해왔다. 최근작 ‘강남 1970’에서는 1970년대 초 강남의 재개발을,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1970년대 말죽거리(양재동) 일대의 풍경을,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에서는 1990년대의 압구정동을 스케치했다. 하지만 그가 묘사하는 도시의 풍경은 사실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욕망의 통조림 공장’1이나 ‘쩝쩝대는 파리크라상, 흥청대는 현대백화점, 느끼한 면발 만다린, 영계들의 애마 스쿠프, 꼬망딸레부 앙드레 곤드레 만드레 부띠끄, 무지개표 콘돔 평화이발소, 이럇샤이마세 구정 가라, 오케’2 등으로 표현되는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욕망으로 넘쳐나는 공간이다. 그가 영화에서 묘사하는 공간에도 언제나 폭력과 부패가 넘친다. 그런데도 그의 시를 읽다보면 혐오의 감정 속에 왠지 모를 그리운 마음이 뒤섞인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운상가에 대해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3, ‘고담시市에 뒹구는 쓰레기들의 환희, 유혹’4이라고 표현하면서도 ‘난 모든 종류의 위반을 사랑했고 버려진 욕설과 은어만을 사랑했다’5고 고백한다. 이 모순된 감정은 특히 시집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시 ‘모텔, 카사블랑카’에서 ‘세월의 불안, 경멸과 모독, 기다림 따위들을 견디며 난 길 위의 먼지 묻은 사과를,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산다’는 구절로 압축된다. 시금털털할 것이 분명한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사는 시인의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공존할 수 없는 양가감정 사이에서 헤매다가도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6라는 아름다운 시구에서는 알듯 말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지난 주말 세운상가를 답사하면서 시인이 표현한 감정을 어렴풋이 느꼈다. 페인트칠이 누더기처럼 지저분하게 벗겨진 건물 외벽, 많이 훼손되어 바스라질 것 같은 시멘트 계단, 비아그라, 흥분제, 도청장치, DVD, CCTV를 모두 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으슥한 상점,건물 주변으로 다닥다닥 붙은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길게 누워있는 세운상가는 과거라는 행성에 불시착한 은하철도999를 현실 세계에 옮겨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처음 세운상가 입구에 들어설 때는 ‘여기서 걷다가 어디 이상한 골목에 끌려가 장기를 떼이고 버려지는 게 아닐까’하는 무서운 상상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안쪽으로 진입하니 좁은 골목 사이로 오토바이와 트럭이 끊임없이 들락날락 거리며 무언가를 날랐다. 칼빵(?)이 한두 개쯤 있는 무서운 얼굴일 것이라 생각했던 정체불명의(?) 상점 상인들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세운상가 건물 중 가장 낡고 허름한 진양상가에서는 그 어둡고 쇠락한 건물 속에서 꽃을 팔고 있었다(세운상가 일대에서 본 가장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한동안 세운상가는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인 성급한 행정과 건축가의 의도가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실패한 건축으로 인식되었다. 지역 슬럼화의 원인으로 지적되며 철거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일정 부분 맞는 평가다. 하지만 그 B급의 정서가 없었다면 세운상가가 지금처럼 영세한 부품 가게, 특수 용품점, 소규모 작업공장 등을 하나로 품는 독특한 장소성을 가진 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오피스텔 단지와 공원으로 바뀐 세운상가를 상상하는 것은 천장호에 세워진 고추와 용 조형물을 보는 것만큼이나 어색하다. 더디고 완벽하진 않겠지만 철거 대신 활성화를 택한 세운상가의 미래를 응원한다. 그리고 활성화 과정에서 특유의 B급 정서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세운상가엔 ‘시금털털한 푸른 사과만큼의 희망이 있’7으므로.
  • [시네마 스케이프]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소 매력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나라국제영화제의 지원을 받은 한일 공동 제작 영화다. 영화제측은 나라 현 고조五條 시에서 촬영할 것, 일본인 스태프와 배우를 기용할 것, 고조의 지역 축제인 불꽃놀이를 포함시킬 것을 조건으로 제작비를 지원했다. 조건은 창작자에게 제약이 될 수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내가 감독이라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도시에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주변에 고조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고, 검색을 해봐도 무엇 하나 특별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 난감하다. 무엇을 제일 먼저 해야 할까. 우선 답사를 가야지.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시청 직원이 제일 좋겠다. 시에 대한 기본 정보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흔히 하는 인문·사회 분석을 하는 거지. 만약 시청직원이 타지 사람이라면 그 동네 사람을 소개받아서 그곳 사람들만 아는 오래된 이야기부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듣는 거야. 이런 자료들이 모아져서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 장건재 감독은 영화를 두 개의 챕터로 나누었다. 흑백 영화인 첫 번째 챕터에서는 감독이 겪었던 낯선 도시에서의 사전 답사 내용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다. 영화감독 태훈이 통역과 함께 고조에 답사 가서 시청 직원을 만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고조는 나라 현 남서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400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소박한 고조 역 앞, 오래된 가옥, 좁은 골목, 여관, 동네 카페 등의 장소는 예전의 정취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