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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지극히 서민적인 독일의 풍경
    #54 뮌헨의 영국정원 - 유럽 최초의 ‘민주적’ 정원 프랑스에서 풍경화식 정원은 마치 잠시 스치고 지나간 유행병과 같았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는 좀 달랐다. 프란츠 공의 작은 정원 나라를 선두로 하여 서서히 전역에 확산되어 19세기 중반에 그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으며 독일 조경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 시기에 영국과 마찬가지로 굵직한 풍경 전문가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한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스켈Friedrich Ludwig Sckell(1750~1823), 베를린·포츠담의 문화 경관을 만든 페터 요셉 르네Peter Joseph Lenné(1789~1866), 동쪽 폴란드와의 접경 지역에 있던 자신의 영토를 모두 풍경화로 바꾸어 놓은 퓌클러-무스카우Pückler-Muskau(1785~1871) 공 등이다. 풍경화식 정원이 독일에서 이렇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서로 맞물렸기 때문이다. 우선 느릿느릿한 독일인의 정서에 맞았을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잊고 있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자연 종교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1 그에 더해 18세기 말, 독일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낭만주의를 구현하기에 풍경화식정원만한 것이 없었다. 지난해 9월호 연재 ‘26.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히의 정원 풍경화’에서 미학자 히르시펠트를 잠깐 언급했다. 그가 드레스덴에 있는 어느 풍경화식 정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 미학자 요한 게오르크 줄처Johann Georg Sulzer(1720~1779)의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렇게 묘사했다. “외로운 산책을 즐기는 현자 중 발길이 숲 속에 이르러 문득 이 웅장한 기념비를 발견하고 전율을 느끼지 않는 이가 과연 있을까? 내가 흠모해 마지않던 인물이 여기 이렇게 높이 기려지고 있다니. 마침 보름달이 둥실 떠 이를 환히 밝히고 사위는 죽은 듯 고요하다. 떡갈나무 등걸에 몸을 기대니 깊은 한이 서려온다. 다시 눈을 들어 그 고귀한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바라보며 눈물짓는다.”2 조선의 방랑 시인 뺨치는 이런 시구들은 당시 독일 문학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다. ‘외로운 방랑자’, ‘죽음 같은 고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풍경화식 정원을 널리 퍼지게 한 1세대의 감성이었다면 그 다음 세대에서는 폴크스파크volkspark라는 건조한 개념이 등장하여 풍경화식 정원의 키워드가 되었다. 폴크스파크라는 단어를 풀이해 보면 ‘백성을 위한 커다란 정원’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공원이다. 이 역시 히르시펠트가 던진 개념이다. 이후 독일의 풍경화식정원은 곧 시민 공원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공원을 조성할 때 풍경공원Landschaftspark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1789년, 바이에른 공국의 군주 칼 테오도르는 뮌헨에 있는 자신의 넓은 수렵원을 개조하여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유럽에서 최초로 시민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한 공원이 뮌헨에 탄생했다. 공원의 면적은 총 375헥타르로 뵈를리츠 정원의 3배가 넘는다. 처음엔 왕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르 정원이라고 불렀다가 영국풍을 따랐다고 해서 ‘영국정원’으로 개명되었다. 물론 영국의 왕립 정원들도 이미 백성들에게 ‘개방’되긴 했지만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왕실에 있었다. 처음부터 시민들을 위해 만든 것은 뮌헨의 영국정원이 처음이라고 뮌헨 사람들은 자부하고 있다. 얼핏 듣기에 칼 테오도르가 무척 훌륭한 군주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파리에서 대혁명이 일어난 해의 일이었으니 그 저의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공원을 만들어주어 민심을 한 번 다독여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참모였던 미국인 벤자민 톰슨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뮌헨의 영국정원이 자리 잡은 곳은 오래전부터 군주들이 사슴 사냥을 하던 곳으로서 이자르 강을 따라 깊은 숲과 평야가 번갈아 펼쳐진 매력적인 곳이었다. 혁명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런 매력적인 땅을 백성에게 내준들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는 이곳에 군인들을 위해주말 정원을 지을 생각이었다. 좀 더 건전하고 생산적으로 여가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군 주말 정원 위원회를 결성하고 톰슨에게 럼포드 백작의 작위를 주어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공사가 막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고 럼포드 백작이 발 빠르게 대응하여 시민 공원을 짓는 것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럼포드 백작은 이제 공원 조성 위원장의 자격으로 루드비히 스켈을 불러 조언을 구했다. 스켈은 당시 바이에른 공국에서 가장 재능 있는 정원 예술가였다. 대대로 왕실 정원사를 지내던 집안에서 태어나 정원사 교육을 착실히 받았다. 일찍이 그 재주를 인정받아 ‘국비 유학생’으로 파리 식물원과 베르사유에서 수학했다. 풍경화식 정원이 유행하자 다시 5년 동안 영국에서 풍경화식 정원을 공부하고 돌아와 슈베칭엔의 바로크 정원 담당자로 부임했다. 기존의 바로크정원 주변에 풍경화식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당시는 왕실 소속 정원사들이 왕실 비용으로 외국에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다. 스켈에게는 그동안 영국에서 공부하고 슈베칭엔에서 일하는 동안 성숙해갔던 아이디어를 구현해 볼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캐퍼빌리티 브라운의 작품 세계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켈뿐만 아니라 독일의 조경가들은 하나같이 브라운의 커다란 ‘한 획’과 명상적인 정서에 이끌렸다. 스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공원과 도시와의 화합을 꾀한 것이다. 그는 공원이 도시 안에 섬처럼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멀리 보이는 성당의 첨탑과 웅장한 궁의 높고 낮은 실루엣이 공원의 녹색 실루엣과 서로 중첩되었다가 다시 풀어지는 관계에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지금도 뮌헨 영국정원 안에서 바라보면 도시 실루엣이 ‘가장 아름다운 녹색 의상’을 입고 있는 듯 보인다. 이렇게 도시와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속에서 계층 간의 구분 없는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스켈이 추구했던 풍경화식 정원의 이상이었다.3 이 점은 지금도 뮌헨 영국정원의 커다란 특징으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페터 요셉 르네를 포함한 후배 조경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도시와 녹지가 하나로 얽혀 시민의 집과 정원이 된다는 생각은 이후 독일 도시 설계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어째서 독일에서는 고층 건물을 거의 짓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건물 몸체의 높이가 30m를 넘어가면 녹색 의상을 제대로 갖춰 입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어떤 동기로 시작되었든 간에 영국정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테오도르 공의 정치적 이념 역시 변화를 겪었다. 그때까지 주종 관계로만 이해했던 ‘군주와 백성’의 관계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가관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 대륙 최초의 이 ‘민주적인 그린’은 독일 조경사와 도시설계사뿐만 아니라 사회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런 중요한 정원이 1960년대 외곽 순환 도로가 건설되면서 남북으로 단절되었다. 지난 2010년부터 ‘영국정원 통일’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뮌헨 영국정원 운영 재단에서 발의하고 알리안츠 환경 재단에서 후원하는 프로젝트로 도로를 지하로 집어넣고 그 위에 남북으로 갈라졌던 정원을 다시 만나게 한다는 계획이다. 여론도 긍정적이므로 영국정원은 조만간 스켈의 원안대로 복구될 가능성이 크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다양성의 도시, 단조로움의 도시
    도시 다양성이란 무엇인가 눈을 감고 한 번 떠올려보자. 지난 몇 년간 경험한 도시 중 ‘다양성의 감각’을 가장 풍부하게 담고 있는 가로 환경은 어디인가? 다양성의 대상은 눈에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물리적 대상일 때도 있고 사람이나 커뮤니티, 혹은 문화 환경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뉴욕을 다녀온 독자라면 태피스트리tapestry처럼 촘촘하게 짜인 맨해튼 도시 블록의 한 가로를 떠올릴 수도 있고, 어떤 독자는 업종 분화가 활발하게 진행 중인 신사동 가로수길과 세 로수길의 교차점에서 만난 십인십색의 사람들을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 어느 곳을 떠올렸든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해당 가로에서 경험한 ‘무엇’이 그토록 다양하다고 느꼈는가? 나아가 이러한 다양성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다양성인가, 아니면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특성인가 도시 공간에서 다양성이란 한 지역 내에 서로 다른 성격의 건축물과 가로, 용도와 사람, 서비스나 지역 문화가 그 고유성을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한 채 섞여 있는 특질이다. 여기에는 다양성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에 대해 접근하고 누릴 수 있는 ‘물리적 경험’의 차원과 함께 차이에 대한 관용이나 상호 존중 같은 ‘비물리적 인식’까지 포함된다(그림1, 2). 나아가 한 장소에서 누릴 수 있는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이나 이국적인 행태가 오랜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전통적 환경과 대비를 이룰 때도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차이와 다름의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은 이해하기 쉬운 개념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나 상호 존중이 다양성을 위한 전제 조건이긴 하지만, 때로는 한 커뮤니티가 외부로부터의 영향에 대해 상당 기간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즉 수용하기 어려운 차이를 문화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에—고유한 문화가 한 장소에 온전하게 정착하고 결국 지역 다양성의 한 요소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커뮤니티 일부가 문화적 동질성을 갖는 모집단으로부터 분리·독립함으로써 다양성이 시간에 따라 분화되고 공간적으로 확산되는 경우도 있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실제 도시 공간에서 다양성의 감각을 일으키는 요소가 무엇인지 좀 더 따져보자. 다양성의 세 가지 요소: 물리적 환경, 사회적 특성, 재화·서비스의 종류 많은 도시 이론가는 도시의 물리적 환경, 사회적 특성, 그리고 제공되는 서비스나 재화의 종류가 다양성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라고 본다.1 첫째, 물리적 환경의 관점에서 작게는 가로의 표면을 덮고 있는 간판이나 건축물 크기, 건축 유형과 용도, 지어진 시기나 스타일, 외장재의 특성을 비롯해, 크게는 가로의 물리적 폭과 연속성, 필지 크기의 균질성과 도시 블록의 크기 등이 다양성과 단조로움의 차이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를테면 용도와 건축 유형 측면에서 보았을 때, 홍익대학교 입구 주변은 1957년 토지구획정리사업 대상지로 지정된 후 1960~1970년대에 걸쳐 비교적 균질한 저층 주거지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를 전후로 상업·문화·소비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면서 최근 다양한 비주거 용도와 형형색색의 건축 스타일을 접할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그림3). 그렇지만 상업화가 진행된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언제나 더 높은 수준의 다양성을 보인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같은 홍대 입구 지역이지만 도시 블록 전체가 상업화된 서교동에 비해 기존의 모습이 유지된 단독 주택 단지 환경에 게스트하우스, 공방, 제과점, 이자까야가 골목 구석구석 흩뿌려지고 있는 연남동에서 더 풍부한 다양성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2. 둘째, 다양성의 또 다른 요소인 사회적 특성은 도시 공간의 소비자이자 문화의 생산자인 사람들이 나타내는 문화적·사회적·경제적 차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거주자의 소득 수준, 직업군, 연령대, 인종과 국적, 언어와 취향이 다채로운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그림4). 반면 도시 변화에 따라 이러한 사회적 특성의 차이가 점차 옅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국내에서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1~2인 가구를 대상으로 민간 주도의 소형 주택 공급을 확대하려는 ‘도시형 생활 주택’ 정책이 2009년 도입되었다. 그런데 하나의 주택 유형이 일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지어지면서 짧은 시간에 해당 지역의 사회 구성원이 교체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강서구 화곡동에는 2014년 인허가 건수 기준으로 서울시에 지어진 전체 도시형 생활 주택 중무려 9.1%에 해당하는 1,718세대가 들어서게 되었다.3 이로 인해 화곡동의 20~30세대 1~2인 가구, 특히 젊은 직장인 부부, 전문직종 1인 가구, 취업 준비생의 비율이 갑작스럽게 늘어났으며 이는 해당 지역 거주자의 연령대나 직업군이 오히려 유사해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심각하게 놀기
    두 번째 글이다. 첫 번째 글에서는 나의 네 가지 설계태도―물어보기, 다시 그리기, 노동하기, 설계 안하기―와 설계 시작점에 관해 짧게 써보았다. 이번에는 2년 전 미국 뉴욕 MoMA PS1Museum of Modern Art PS1에서 주최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Young Architect’s Program(YAP)의 파이널리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던 작품을 바탕으로 좀 더 구체적인 설계 과정에 대해 써보려 한다. YAP은 디자인 분야 인재 육성을 목적으로 매년 다섯 팀을 선정해 미술관 방문객을 위한 야외 휴양 공간 아이디어를 공모한다. 그리고 그 중 당선작은 MoMA PS1의 여름 웜-업Warm-Up 행사 때 사용될 임시 설치물temporary installation로 구현된다. 동료 회사와 뭉쳐 템프에이전시TempAgency라는 팀을 구성했고 다섯 파이널리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비록 우리 팀의 디자인이 최종적으로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약 한 달간 혹독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설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그만큼 나누고 싶은 점이 많은 프로젝트다. 우리의 YAP 설계 과정은 놀이터 같았다. 아니, 그렇게만들려 노력했다―어떻게 보면 이것이 나의 다섯 번째 설계 태도다. My Hair is at MoMA PS1 프로젝트 이름 그대로 우리가 내놓은 설계안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으로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다. 미쳤다고, 이상하다고, 장난 아니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신기하고 색다르고 만들어지면 가보고 싶다는 사람도 많았던, 아무튼 설계안에 대한 주변 반응이 너무나 대조적이면서도 다양했던 프로젝트임에는 틀림없다. 어떻게 보면 거의 도박 수준인 아이디어였지만 우리는 정말 진지했다. 이제껏 시도해보지 않은 도전적인 설계, 한 번 해보자고 했다. 아니, 그보다는 “떨어지더라도 밋밋하지 않게 떨어지자”고 했다. 많은 공모전에 참가해 보았지만 처음부터 작정하고 놀면서 설계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노력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클라이언트가 예술을 항상 접하는 큐레이터였기에 좀 더 과감해도 되지 않겠냐는 상상 혹은 편견을 가졌던 것 같다. 여기서 잠시 템프에이전시 팀 구성을 설명해야겠다. 쿠토노톡KUTONOTUK의 나와 공동 대표 매튜 줄Matthew Jull, 그리고 맥도웰스피노자mcdowellespinosa의 두 공동 대표까지, 총 네 명이 팀의 중심이었고, 버지니아대학교 건축학과와 조경학과 학생 여섯 명―풀타임 네 명,파트타임 두 명―이 어시스트를 해주었다. 본격적인 작업은 12월 초 가을 학기가 끝나자마자 시작되었고, 겨울방학 한 달 동안 학생들과 같이 일할 작업장은 학교 건물 안의 교실 한 곳에 마련했다. 거의 눌러 앉은 셈이다.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1일, 새해를 맞았을 때도 그나마 구색을 맞춘다고 어디선가 구해 놓은 샴페인 두병을 터뜨리며 컴퓨터와 드로잉 사이에서 우리끼리 자축했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학생들과 같이 우선 아이디어부터 짜기 시작했다. 설계안 제출까지 시간이 촉박해서 아이디어를 짜내면서 리서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역시 처음엔 별의별 토픽이 다 나온다. 마네킹, 잠수 어항, 나무 쓰레기, 거인 얼음, 정글, 돌 밭, 임대 노동 등등. 한 명당 20~30개 정도의 아이디어를 내고 이미지, 논리, 내러티브 등 각 아이디어에 대한 큰 윤곽을 정리하여 3~4시간에 한 번씩 팀 멤버들과 교류하며 발전시켜 나갔다. 조리나는 1982년 생으로, 미국 웰슬리 칼리지(Wellesley College)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트(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맥스완 아키텍트 + 어바니스트(Maxwan Architects + Urbanists)에서 다양한 도시 디자인과 조경 및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조경학과 대학원 강사로 있으며 하버드 GSD에서 초청 강사로 가르친 바 있다. 건축가 매튜 줄(MatthewJull)과 쿠토노톡(KUTONOTUK)의 공동 대표로서 구겐하임 헬싱키(Guggenheim Helsinki)와 헬싱키 공공 도서관(Helsinki Public Library), MoMA PS1 젊은 건축가(Young Architects Program), 유로판 등에서 주관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아크틱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의 대표로서 미국 워싱턴D.C.의 정책 연구 기관과의 협력 아래 북극 도시와 극한 랜드스케이프(extreme landscapes)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www.kutonotuk .com | www.arcticdesigngroup.org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로버트 험버 므핀다 칼룬가 커뮤니티 가든 수석 정원사
    “내가 원하는 정원은 가난하든 부자든, 덩치가 크든 작든, 노숙자이든 장님이든, 혹은 목발을 짚은 사람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뉴욕의 대표적 지역 공동체 정원, 므핀다 칼룬가 가든을 설립하고 30년 넘게 운영해 온 로버트 험버가 내비친 소망이다.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졌던 1980년대 초반의 맨해튼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그는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긋나가던 10대 청소년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면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수단으로 정원을 선택했다. “저는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도와줄 수 있냐고. 그들에겐 그러한 질문 자체가 큰 의미를 지니니까요.” 그리고 그의 생각은 어린이와 노인을 비롯한 지역 주민 전체로 퍼져 나갔다. “10대들은 농구에 관심이 있지만 모든 사람을 위해서는 식물을 함께 키우는 것이 최고죠.” 그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공원의 한 귀퉁이를 시로부터 위임받았다. 한 번도 정원 일을 해 본적 없었지만, 동네 주민, 노숙자, 부랑자, 거리의 매춘부 등에게 도움을 청해 므핀다 칼룬가 가든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원의 이름은 오래 전 이 부근에 있었던 흑인 매장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의미에서 스와힐리어로 지었다. “이전에 이 공원은 그저 빨리 걸어서 통과해야 하는 곳일 뿐이었죠.” 도시의 변방, 어둡고 위험했던 장소는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역 사회도 정원을 중심으로 마약상을 몰아내고 이미지를 바꾸었다. 노인 센터의 앞마당으로도 쓰이며 그들이 마음 편히 안전하게 채소를 가꾸고 소일할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했다. 밥 험버의 헌신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은 점차 알려졌고 커뮤니티 가든의 모범 사례로 통하게 되었다. 관광객과 미디어의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지역 주민에겐 보석과 같은 공간. 므핀다 칼룬가 가든은 오늘도 조용히 맨해튼의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밥 험버는 오늘도 여전히 그 곳을 지키고 있다. Q. 이 정원이 문을 연 첫 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A. 아, 무척 오래된 이야기다. 어느덧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원래 근처에 있는 어린이돕기협회the Children’s Aid Society에서 일했고, 주로 남자 아이들 그룹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자연스럽게 공원에서 소년들과 모임을 갖는 일이 잦았는데, 뭔가 변화가 필요함을 느낀 것도 그 즈음이었다. 협회에서 퇴직하고 난 후, 나는 여기에 좀 더 머물면서 공원 자체를 바꾸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 첫 번째 과제는 공원에서 빈번히 볼 수 있던 마약 거래상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 후 정원을 가꾸는 기술을 점차 배우면서 동네 아이들에게도 뭔가를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렇게 이 정원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Q. 어린이돕기협회의 일과 정원 일을 시작한 계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어린이협회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단체인가? A. 지역의 불우한 어린이와 청소년을 돕는 단체다. 주로 집에 아버지가 없는 소년들인데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고 운영하는 일을 했다. 우리는 뉴욕 시 전체를 교실로 이용했다.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연극이나 야구 경기도 보러갔으며 모여서 방과 후 숙제를 함께 하기도 했다. 뭐, 말하자면 그런 종류의 일들이다. Q. 이곳에 정착하게 된 개인적인 배경과 가족에 대해서 궁금하다. A. 우리 가족은 중남미 파나마 출신으로, 조지아 주로 이주했다. 나는 조지아에서 태어났고 취학 연령이 되었을 즈음 뉴욕으로 이사해 여기 맨해튼에서 평생을 살았다. 나는 스페인어를 못하지만, 내 친척 중에는 유창한 사람이 많다. 지금은 대부분 뉴저지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이번 독립기념일에도 가족들을 방문해서 휴일을 보낼 계획이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몇 있다. 자기들의 생부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심지어 아버지가 있어도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다니기도 한다.이 공원은 수십 년간 나에게 더할 수 없이 귀한 우정을 선물해 줬다. Q. 므핀다 칼룬가 가든의 초기 시절을 묘사한다면? A. 1980년대였고, 무척이나 거친 시절이었다. 공원에는 온갖 종류의 마약이 횡행했고 위험했으며 심하게 지저분하고 불결했다. 칼에 찔릴 뻔하거나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바닥에 총알이 널려있기도 했다. 한마디로, 전혀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특히 어린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게 위협적인 곳이었다.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소년들을 데리고 온 시내를 돌아다녔다. 주중에는 함께 모여서 농구를 하거나, 시시콜콜한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남자아이였는데, 지역 주민이었던 델마 프리차드Thelma Pritchard 여사가 여학생 모임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내가 공원에서 처음 그 분을 만났을 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 아이가 지금 스물서넛 정도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프리차드 여사 또한 아직도 이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돌봤던 아이들이 어느덧 커서 그들의 자녀를 데리고 오면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다. 이것이 내 인생이고 나는 그것을 즐긴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재료와 디테일] 콘크리트 벽돌, 그 변신은 무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늘 경계에 눈이 간다. 긴 담장이 공간을 구획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사용된 소재의 대부분이 벽돌이다. 붉은색 벽돌도 있고 회색 콘크리트 블록도 많이 보인다. 쉽게 쌓을 수 있고, 땅의 압력(사면 압력)을 크게 받지 않는 곳이라면옹벽을 치지 않고도 좋은 입면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널리 활용되었을 것이다. 몇 장씩 내어 쌓기도 하고 구멍을 만들어 내는 등, 벽돌만이 만들 수 있는 특유의 패턴으로 거리에 활력을 불어 넣기도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재료비를 많이 쓸 수 없는 외곽이나 사람의 시선이 덜 가는 외진 곳에 쓰이는 경우가 많다. 요지에 쉽게 쓰지 못하는 이유를 소재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서 찾기도 한다. 벽돌이란 소재의 가치를 아는 일반인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벽돌을 활용해 건축물 내부를 구획한 공간을 우연히 본 적 있는데, 소재의 원초적 질감에 생경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런 소재가 외부에만 나오면 이상하게 저급한 재료로 치부되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 주위에 있는 군부대 담장이나 예비군 훈련장의 시가 전투장, 혹은 저렴하게 지은 경비실 등에서 돈들이지 않고 손쉽게 지어진 공간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재료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새롭게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된다. 몇 해 전 지방의 한 정원박람회장에 작은 공간을 만들 기회가 있었다. 실제보다는 관념적인 공간을 만들어 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작업에 임했으나 결과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공간 공감] 창덕궁 후원
    창덕궁 후원. ‘공간 공감’ 코너에서 두 페이지로 다루기에는 그 무게감을 이기기 힘든 장소다. 국가대표 정원을 대상으로 허투루 설계 담론을 펼치다가는 뭇매를 맞을 것이 뻔하다. 게다가 한 차례, 그것도 제한된 시간의 가이드 투어를 통해 담론의 깊이를 추구한다는 것 역시 무리수다. 하지만 공간 자체가 위압적이거나 엄숙함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차분하고 정갈하다. 불과 몇 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복닥거리는 현대의 삶과 대비되는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진다. 처음이 정원을 만들고 가꿔 온 다양한 스토리를 상상하면서 다른 각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할 참이다. 메르스 여파로 비교적 한산한 토요일 아침, 해설사가 인솔하는 무리에서 가장 뒤쳐져 걸으며 ‘후원 달리 읽기’궁리를 시작했다. 후원은 왕의 정원이었다. 정원의 첫 시작은 지금부터 약 610년 전인 태종 때였다. 여러 왕을 거치면서 확장과 수정이 행해졌으며, 230여년이 지난 인조 때 옥류천 일대까지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다시 140년의 세월이 흘러 영·정조 때 부용정 일대를 조성했고, 순조 때 연경당을 지으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후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무려 420년이 넘는 시간동안 가꿔 온 장소다. 당시 왕이 거닐던 후원의 모습은 또 다시 180여년이 지난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비평: 늙은 근대성과 도시 공공성의 스펙터클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해 공공 공간을 다루는 전략적 태도는 무엇인가? 서울시는 지난 6월 16일 제출된 82개 작품 중에서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 당선작으로 이_스케이프(대표 김택빈)와 장용순(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이상구(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팀이 공동으로 제안한 ‘현대적 토속Modern Vernacular’을 최종 선정했다. 이번 공모전에서 요구한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 공간 설계는 세운상가의 민간 소유 영역을 제외하고 서울시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공중 보행 가로인 데크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선 당선작을 중심으로 설계안을 들여다보자. 당선작, 2등작, 그리고 3등작은 일견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한 인식의 차이를 갖고 있다. 애매모호한 가치를 설정하거나 경직된 건축화의 태도로 일관한 안들과 달리 당선작은, 세운상가를 둘러싼 공간 담론, 세운상가에 대한 공적 개입의 타당성, 세운상가 내부목소리에 대한 이해, 그리고 도시와 삶의 흔적에 대한 존중이란 네 가지 측면에서 볼 때 확실한 비교우위를 갖는다. ‘Modern Vernacular’ 즉 ‘현대적 토속’이란 제명이 대변하듯이 당선작은 공공공간에 개입함으로써 세운상가를 넘어서서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좀 더 큰 틀에서의 도시 역사, 공간 구조와 장소성을 보완하거나 복원하는 데 가치를 부여했다. 당선작의 보행 데크 활성화는 크게 보면 남북축의 기능에 의존한다. 세운상가의 동서축 연결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느슨하다. 개발 시대 세운상가라는 거대한 구조물로 인해 단절되었던 동서 양축과 기존 도시 조직의 연결에 대해 여백과 흐름의 가능성을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적극적인 해결이 될 수 있다고 본 점은 인위적 개입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있어서 좋다. 남북을 잇는 보행 데크를 복원하여 구체적인 프로그램 공간을 삽입하고 세운초록띠공원 자리는 종묘와 연결되는 경사진 광장으로 전환하는 제안이 남북축 보행 데크 활성화의 주된 내용이다. 이렇듯 남북과 동서축에 대해 서로 다른 언어로 접근한 것 역시 도시 구조의 역사와 장소성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듯하다. 당선작의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세운상가의 공공 공간에 대한 개입은 여전히 개념과 해석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거기엔 세운상가 내부의 치열한 목소리가 들리기 않기 때문이다. 세운상가를 소유에 따라 서로 다른 두 개의 주체로 분리해서 접근하다 보니 복잡하게 얽힌 내부의 목소리를 공공이 소유한 공공 공간으로 이끌어낼 수 없었다. 이는 결국 세운상가 활성화를 ‘밖에서부터 안으로’, 즉 추진하기 쉬운 곳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서울시의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해 서울시가 공공 공을 다루는 전략적 태도다. 본질이 문제의 핵심을 우회하고 있는데, 세운상가는 과연 활성화 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든다. 빅 플랜을 넘어서기 위한 공공 공간 개입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확보될 수 있을까? 세운상가를 개발 시대의 빅 플랜Big Plan의 상징이라고 보자. 시대가 바뀌고 도시적 상황이 변화했다. 가장 크게는 세운상가를 지탱해 온 도시 산업 생태계의 몰락을 들 수 있다. 이제 다른 가치로 세운상가의 시대성을 읽어 내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야 한다면, 가장 우선해야 할 태도와 접근이 과연 공공 공간인 데크의 활성화이어야만 했을까?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울시가 내세운 세운상가 보행 데크 복원이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봐야만 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 거대 스케일의 보행 데크가 완성되면 종묘에서 남산까지 이어지는 보행 녹지축이 형성된다고 한다. 서울 시민들이 도심에서 남북으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고도 한다. 더 큰 틀에서 보면 보행 데크를 통해 연결된 남산은 향후 용산과 한강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곧 종묘, 북악산, 삼각산을 통해 백두대간이 한강까지 이어지는 생태계의 중요한 연결 통로의 회복을 상징하는 역할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환상은 우리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들리는가? 이영범은 1986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영국 AA 스쿨 대학원에서 도시 공간 이론으로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에는 시민단체인 도시연대에서 커뮤니티디자인센터를 설립해 주민참여 디자인을 통한 마을만들기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경기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요 저서로는 『도시의 죽음을 기억하라』, 『뉴욕 런던 서울의 도시재생 이야기』(공저),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다』(공저),『건축과 도시, 공공성으로 읽다』(공저), 『사회적 기업을 이용한 주거지 재생』(공저), 『새로운 도시재생의 구상』(공저), 『우리, 마을만들기』(공저), 『도시 마을만들기의 쟁점과 과제』(공저) 등이 있다.
  • [칼럼] 조경의 페다고지를 논할 때다 Column: Pedagogy of Landscape Architecture
    대학 신입생 시절, 영어 토론 서클의 첫 텍스트가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였다. 원서를 읽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내용에는 쉽게 공감이 갔다. 진정한 교육은 선생이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주체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라는 게 책의 메시지였다. 시간이 한참 흐른 요즘 나는 교수법이나 교육론으로 번역되는 페다고지에 다시 관심을 두고 있다. 올해로 조경학과에서 교수로 생활한 지 20년이 되는 나는 오는 가을 학기부터 1년간 연구년을 가질 참이다. 과연 내가 학생들과 함께 진행하는 수업방식이 최선인가? 매너리즘에 빠져 유사한 수업내용과 과제를 반복하지는 않았는가? 내 수업이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식 체계를 완성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교육 현장의 실존적 고민을 연구년 동안 풀어야 할 숙제로 삼았다. 최근에는 우리 학과 교수들과 학생 교육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교과 과정의 개편과 신규과목 개설에 관한 논의는 늘 있어 왔지만, 이번 논의는 보다 절박한 상황이 계기가 되었다.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시점에서 여러 교수가 지닌 역량을 어떻게 수렴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점점 감소하는 대학원 입시 지원율에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 등이 핵심 주제다. 교과 과정의 구성과 수업 간의 교육 내용 조정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있지만, 교수 방법에 대한 문제까지도 함께 토론할 계획이다. 페다고지에 관한 논의는 교육 과정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나는 두 학교에서 학과장을 맡아 교육 과정을 계획하는 일을 경험했다. 조경학과의 교육 과정이 이론theory, 테크닉technique, 실기praxis의 세가지 틀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론은 역사와 비평, 인접 분야에 대한 지식을 다룬다. 테크닉은 생태나 공학적 지식과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활용하는 능력을 기른다. 실기는 주로 스튜디오 과목으로 현장 중심의 프로젝트 수행 역량을 다룬다.학교마다 어떠한 인재를 길러낼 것인가라는 교육의 비전이 다르기 때문에 상이한 교육 과정을 구성하게 된다. 내가 조경 교육 과정을 다룰 때 고민했던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론, 테크닉, 실기 영역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교수를 처음 시작하던 무렵 한 선배 교수가 던진 질문은 늘 나를 고민하게 해왔다. 조경의 현실 상황이 열악한데 지나치게 추상적인 담론에 몰두하는 것이 타당한가? 너무 많은 이론적 지식만을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준비시키는 데 소홀하지 않는가를 늘 염두에 두곤 했다. 둘째는 조경 교육의 핵심 영역과 주변 영역을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다. 전통적으로 조경가에게 요구되어 온 지식이나 기술과,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새롭게 요청되고 있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전자는 생태적 지식과 땅을 다루는 기술이고, 후자는 지역 커뮤니티와 협력하고 소통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한정된 시간의 교육 과정에서 역량을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는 늘 선택의 문제로 남는다. 셋째는 한국적 상황에 적합한 교육 과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의 조경 교육은 해외 대학의 교육과정을 도입해 변용해 왔다. 그러나 사회적 배경이 다르고 졸업생이 취업하는 시장이 상이한 상황에서 유사한 교육 과정을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에게 적합한 조경 교육의 내용과 형식을 찾아내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쉽게 찾기는 어렵다. 공론의 장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내용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테크닉이나 실기보다 이론이 과잉인 상황이다. 현장에서 요구되는 조경 고유의 지식 체계와 기술력이 빈곤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없다. 최근 조경계 전반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건설 경기의 위축 등 외부적 상황 때문이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기대에 질 높은 서비스로 대응하지 못한 내부적 상황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빈곤한 실무분야의 근원을 따지다 보면 조경 교육의 부실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교육 현장의 교수들은 교육에 관해 얼마나 치열한 고민을 했는가?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 학계는 조경 교육에 관한 논의에 인색한 편이다. CELACouncil of Educators in Landscape Architecture를 비롯한 여러 외국 학회에서는 조경교육에 관한 다양한 발표와 토론이 전개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히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조경 교육 과정과 교육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한국조경학회지』(2015년 2월)에 실린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의 ‘조경 교육에 있어 학습자 중심 스튜디오 수업의 쟁점’이라는 깊이 있는 연구를 발견할 수 있어 반가웠다. 미래를 변화시키려면 교육에 주목해야 한다. 후속세대에게 좋은 조경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일이다. 이제 조경 교육에 관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자. 작은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서로 교육 현장의 고민을 나누자. 그리고 교육의 내용과 결과물을 공유하자. 좋은 시도와 성과는 많은데 서로 공유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조경 교육, 서서히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대학정원이 축소되고 취업난이 가중되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조경을 공부하는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조경진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서울시 공원녹지 총감독, 서울그린트러스트 상임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 마곡지구에 본격적인 식물원을 도입하면서공원과 결합하는 작업의 코디네이터인 마곡중앙공원 총괄계획가를맡고 있다.
  • [에디토리얼] 하지운이다 Editorial: Her Name Is Ha Ji Un
    12년 전의 봄, 한두 주짜리 단기 프로젝트를 열 개정도 진행하는 기초 디자인 스튜디오 첫 시간, 떨리는 마음으로 출석부의 이름을 정성껏 부르다 마지막 줄에서 눈이 멈췄다. 한 여학생 이름 옆 칸의 소속이 경제학과로 적혀 있었다. 네, 하고 대답하는 쪽을 보니 얌전한 인상의 여학생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손을 들고 있었다. 기본적인 드로잉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을 테고 또 과제물이 적어도 매주 이틀은 밤을 새워야 할 분량인데 괜찮겠냐고 물었다.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고 지치면 알아서 관두겠지, 흘려 생각하며 수강을 허락했다. 다음 주, 그는 출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석이 아니라 외모가 몰라보게 달라진 것임을 곧 깨달았다. 조용하고 수줍은 여학생이 한 주 만에 레게 머리의 힙합 걸이 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넘어갔다. 세 번째 주는 복고풍 세라복에 단발이었다. 한 주가 또 흐르자 노란색 긴 머리와 빨간 원피스의 조합이었고, 그 다음 주엔 검은 커트 머리에 타이트한 스커트의 오피스 걸 룩. 매주 화장 색조와 톤이 급변했고, 목과 귀와 팔과 발의장신구가 달랐음은 물론이다. 이 다채로운 변신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의 설계 작업에 주목하지 못했다. 학기가 삼분의 일이나 흐른 뒤에야 겨우 알아차렸다. 그의 머리, 의상, 화장, 장신구가 모두 주별 디자인 프로젝트의 일부라는 것을. 디자인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매체로, 또 때로는 설득하는 도구로 자신의 신체까지 사용한 셈이다. 설계 성과물의 일부인 그의 외양은 학기말까지 매주 달라졌다. 순전히 설계안의 개념 때문이었다. 인형을 동반하기도 했고, 장난감 권총 같은 소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최종 발표 때는 급기야 뽀글뽀글한 ‘아줌마 파마’를 하기에 이르렀다. 가을 학기에도 그 여학생이 조경학과에 나타났다. 조경을 복수 전공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연구실로 불러 물었다, 조경이 좋니? 네. 조경이 뭔 거 같아? 잘 모르겠어요. 의외로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그럼, 왜 조경이 좋은데? 그러자 매우 논쟁적이지만 아주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일상적인 공간에, 장소에, ‘나를 표현’할 수 있어서요.” 그 학기에도, 학회가 주최하는 여름 디자인 캠프에서도, 또 졸업 작품 때도 평범한 선생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작품’을 들고 왔다. ‘설계 잘 하는 학생’이라는 어떤 관례적 기준으로 보자면 그의 결과물은 모범답안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표준화된 스튜디오 시스템과 관성에 젖은 설계 교육에서는 생산되기 힘든 독특한 생각, 그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설득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지운이다. 조경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학생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어 나는 “조경하기 참 아깝다”는 생각을 여러 번 속에 묻었다. 졸업 작품 리뷰에 초청한 한 조경가도 똑같은 말을 내 귀에 속삭였다. “쟤는 조경시키기 아까운 애다.” 물론 이 말은 우리 조경 현실이 그런 독창성과 상상력을 포용하고 배가시켜 줄 수 있을 만큼 풍요롭지 못하다는 아쉬움과, 꼭 탄탄한 실력을 갖춘 조경가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동시에 담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졸업 무렵 지운이는 광주아시아문화전당 프로젝트에서 인턴을 잠시 하게 되었다고 알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어느 조경설계사무소에 취직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사오 년이 흘렀을까, 한 심포지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예전의 그 하지운이 아니었다. 악수 외 몇 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지만, 조경에 찌들고 지친 지극히 평범한 조경설계사무소 대리급 직원으로 변한 그가 한눈에 보였다.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운이다! 얼마 전 한 페이스북 친구가 링크한 기사를 읽고 평소에는 거의 안 해본 ‘공유’라는 걸했다. 그리고 아쉬움과 반가움과 기쁨이 뒤섞인 마음으로 바로 이렇게 적었다. 하지운이다! 베를린의 샤우뷔네Schaubühne라는 극단이 공연하고 있는―240시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진행하여 화제를 모으고 있다는―드라마 ‘미트Meat’를 다루며 출연 배우를 인터뷰한 기사다. 드라마의 내용과 진행에 대한 긴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 한국에서 배우 지망생이었나요? 여배우 하지운의 답이 이어진다. “원래는 조경가였어요. 5년간 회사에 다니기도 했고요. 연기자는 어릴 때부터 꿈이었어요. 다만 집안이 보수적이었기에 이를 말하기가 쉽지는 않았었죠. … 베를린에서는 독립영화를 찍기도 했고, 본디지 페이리즈Bondage Fairies의 ‘헤드 온Head On’이라는 뮤직비디오 촬영에도 참여했지요.” 하지운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 다른 형식의 조경 설계를 실천하고 있다. 이번 호 ‘설계 교육’ 특집을 의식해서 쓴 에디토리얼의 초벌 메모 파일을 지웠다. 표준화된 설계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다, 설계 교육은 조경가로서의 기본기를 연습시키는 전문 교육일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안목과 자기 주도적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는 교양 교육이기도 하다, 조경 교육 인증 제도가 필요하다는 류의 이야기를 적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지운을 다시 만나니 하지운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설계 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아직 불안정한 게 한국 조경학의 현실이니 보편적인 틀을 고민하는 게 먼저겠지만, 평균의 그물을빠져나가는 잠재력과 가능성에도 시선을 줄 필요가 있다. 하지운을 다시 생각하니 이번 호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 자꾸 겹쳐서 떠오른다. 머리카락만으로 공간 만들 생각을 한 조리나 소장 같은 조경가로 하지운을 자라게 할 방법은 없었을까.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나의 공원
    대단한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이번호 코다에는 스포일러가 있다. 한창 개봉 중인 영화 이야기는 아니니 괜한 걱정은 붙들어 매두시길. 1. 공원을 보다.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란 물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네 컷의 사진이다. 잡지에 사용한 적도 있고, 단행본에 참고 이미지로 쓰기도 했다. 사진의 주인공은 공원이다. 뭐 대단히 유명한 곳은 아니다. 분당 까치마을에 있는 ‘벌말공원’이란 자그마하고 평범한 공원이다. 실제로 공원으로 이용(?)해 본 기억도 거의 없다. 그저 무심히, 묵묵히 지나쳐 갔을 뿐이다. 거의 매일. 집에서 사무실로 출근하려면 그곳을 거쳐 가야 했으니까. 그런 곳을 카메라에 담은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집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유일한 녹색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 꾸준히 한 공간의 사계절을 기록해보리라 마음먹고 나서 떠오른 첫 번째 공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열두 달짜리 나만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아침, 점심, 저녁, 한밤중 시간대를 달리해 가며, 5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특히 빗발이 흩날리거나 소복이 눈이 쌓인 날이면 어김없이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당시는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지 않은 때여서, 슬라이드 필름 값을 아끼겠다고 한 번에 열 컷 이상은 찍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같은 앵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맨 처음에 촬영한 사진을 인화한 후 드럼 스캔을 받고 그걸 출력해서 카메라 가방에 넣어 놓고는 매번 들여다보며 셔터를 눌렀다. 바닥에 나만 아는 촬영 포인트도 표시해놓고, 줌렌즈의 줌 기능도 고정시켰다. 그렇게 해서 건진 ‘벌말공원의 사계’를 담은 네 컷의 사진을 재탕, 삼탕 우려먹었다. ‘이용’하지 않고 바라보거나 지나간 공원이지만, 여러 갈래의 출근길 동선 중에서 벌말공원을 경유하는 코스를 잡은 건 최단 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공원이 있어서였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아주 가까이에 있는…. 2. 공원을 읽다. 네 컷의 사진에 이어 떠오른 건 두 권의 책이다. 조경비평 봄 멤버들과 함께 쓴 『공원을 읽다』(나무도시, 2010)와 환경과조경 편집부가 엮은 『한국의 공원 - PARK_SCAPE』(도서출판 조경, 2006). 『한국의 공원』에는 선유도공원부터 포항환호해맞이공원까지 총 서른 곳의 국내 공원을 수록했다. 특히 절반 이상의 공원은 사진을 새로 촬영했다. 그 덕에 집에서 가깝지도 않은 선유도공원, 올림픽공원, 하늘공원, 평화의공원을 그 해에만 서너 번 방문했고, 일산호수공원, 길동자연생태공원, 여의도공원, 파리공원, 서울숲,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분당중앙공원, 서대문독립공원, 용산가족공원, 울산대공원도 한 번 이상 찾았다. 순전히 촬영을 목적으로…. 그렇게 많은 공원을 자주 방문한 경우는 그 해가 유일했다. 당시 잡지원고에 종종 등장하던 파리공원도 솔직히 그 때 처음 가보았다. 다음 해에 국내조경 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쓸 일이 생겼는데, 이때의 답사가 무척 유용했다. 공원 중에서는 선유도공원, 하늘공원, 올림픽공원, 일산호수공원, 평화의공원을 그 글에 소개했다. 특히 선유도공원, 하늘공원, 올림픽공원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서울숲은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서서울호수공원과 북서울꿈의숲은 완공전이었다. 개인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는 공원 리스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의 공원』이 답사의 추억으로 남은 책이라면, 『공원을 읽다』는 그야말로 독서의 즐거움으로 기억되는 책이다. ‘근대, 극장, 정치, 정원, 놀이공원, 산, 물, 네트워크, 노인, 밤문화, 안전, 도시’ 등 12가지 키워드로 공원을 들여다 본 기획이었는 데, ‘노인, 밤문화, 안전’처럼 의외의(?) 키워드가 등장해 교정 보는 내내 흥미진진 했다. 특히 이경근의 ‘도시의 산, 한국의 공원’은 자신 있게 주변에 일독을 권했다. 『한국의 공원』이 주요 공원의 현장 답사를 이끌었다면, 『공원을 읽다』는 공원에 대한 다양한 담론 탐색을 이끈 셈이다. 3. 공원에 가다. 출근길에 지나쳐 간 공원을 빼고, 가장 많이 찾은 공원은 일산호수공원이다. 아마 방문 기록 2위는 마로니에공원이나 분당중앙공원이 아닐까 싶다. 마로니에공원은 목적지는 아니었다. 대학로 주변에서 데이트를 꽤 많이 한 덕분에 그 공원을 종으로 횡으로 참 많이도 지나다녔고, 그늘이 좋아 쉬어 간 적도 많다. 순전히 공원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선 빈도로만 따지면 일산호수공원, 분당중앙공원 순이다. 일산과 분당에서 몇 년씩 살았으니까. 근데 신도시 두 곳에서 산기간은 비슷한데, 공원을 방문한 횟수는 제법 차이가 난다. 여가 시간을 보내는 패턴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특히 아이한테 미안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주말 방콕을 즐기는 건 똑같다. 다만 분당에 살 때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거나 아주 어렸고, 공원도 차를 타고 15분 이상 이동해야 했다. 일산으로 이사한 후 아이는 신나게 뛰어 놀 나이가 되었고, 현관문을 열고 단지를 빠져 나와 6차선 도로만 건너면 바로 공원이었다. 일산을 떠나 파주로 이사한 후에도 파주에 있는 공원이 아니라, 일산호수공원을 찾았다. 아이가 혼자 힘으로 자전거를 타게 된 이후에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놀았고, 공원에서 진행되는 행사도 몇 차례 구경했다. 요즘처럼 무더운 한여름에는 해질 무렵 노래하는 분수대 주변에서 치맥을 즐기기도 했다. 일상과 공원이 가장 밀접했던 한 때였다. 스포일러라고 하기도 뭣하지만, 10월호 특집으로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를 준비하고 있다. 그냥 이 질문 하나만 던지고, 7명의 에디터가 각자 떠오른 생각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써보기로 했다. 누구는 직관적으로 떠오른 공원을 소개하겠지만, 누군가는 이 질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나의 공원은 어디에도 없다’며 왜 그러한지를 따질 것이다. 공원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나 장면을 소환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느슨하게 공원의 일상과 쓰임과 필요와 의미를 엉기성기 재구성해 볼까 한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이번 달 코다에 ‘나의 공원’ 이야기를 다해버렸으니, 다음 달 특집에는 뭘 써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