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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백남준아트센터
대상지를 방문하기 전에 들었던 첫 번째 궁금증은 ‘왜 용인이었을까’하는 점이다. 백남준은 서울 태생이며 일본, 독일을 거쳐 미국에서 활동한 아티스트였기 때문이다. 백남준 미술관 설립은 일종의 유치전 성격을 띤 사업이었는데 경기도가 가장 발 빠르게 대처해 선점한 것으로 보인다. 백남준은 가장 먼저 적극성을 보인 경기도에 ‘전 세계 미술관 중에서 백남준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미술관’이라는 권리를 부여했다고 한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글로벌한 예술가가 고국으로 선물을 보내면서 특정 장소와의 결부는 고려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백남준아트센터의 본명은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었다.
백남준이 생전에 미술관 부지를 확정하고 직접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이 좀 길어서인지 혹은 외국인에게 기억되기 힘들어서인지 고인의 작명은 사라지고 백남준 미술관으로 한동안 불리다 지금은 백남준아트센터가 되었다. 평생을 파격으로 점철한 예술가의 기념 미술관인데 이름이 좀 파격적이어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초기의 아이디어 중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이름 뿐만은 아니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였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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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발굴과 지속
추억, 아름다운 것
추억은 아름다운 것, 놓쳐버린 것에 대한 갈망이나 마찬가지.
-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추억은 아름답다. 그 대상이 상실되어 더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녹슨 탱크를 보며 우리는 덧없이 스러져간 것들을 떠올린다. 따라서 마포석유비축기지는 우리가 지켜낸 기억이기보다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표상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본 설계경기는 동시대 한국의 건축이 ‘도시의 기억’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 갈망이 발현되는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가을장마가 한창이던 9월의 어느 날, 탱크는 비에 흠뻑 젖어있었다. 매봉산 산책로에서 내려다본 녹슨 탱크는 불시착한 UFO처럼 서서히 산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탱크의 상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비를 피해 들어간 탱크는 몹시 어둡고 깊었다. 탱크는 산비탈 구덩이에 묻혀있었고, 높이 15m에 달하는 탱크는 세찬 빗줄기에 퉁! 퉁!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비가 그친 뒤 탱크의 붉은색은 한층 도드라져 보였다.
실제로 목격한 탱크의 붉은 빛깔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것을 잠식하고 있는 산조차 자신의 배경으로 만들어 버린다. 도시 속 자연에 묻힌 산업 유산이라는 독특한 대상지의 조건은 그 자체가 이미 매력적인 공원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다. 그래서인지 본 공모전의 설계 가이드라인은 매우 간결하다. 다섯 탱크의 내·외부를 활용하여 상설·기획전시 공간, 공연 공간, 도서관 및 강의실로 구성된 정보 교류 공간을 마련할 것, 적어도 하나 이상의 탱크는 원형 그대로 보존할 것, 그리고 비축기지 전면의 임시 주차장 부지를 공원의 진입부로 계획할 것 정도가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다.
설계지침의 초점은 매우 명확하다. “옛 것은 무조건 철거하고 새 것을 지어온 과거의 관습적 태도에서 벗어나, 오래된 구조물의 기억과 역사를 소중하게 살리고… 서울의 건축이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본 공모전의 의의에서 방점은 ‘옛 것, 오래된 구조물’에 찍힌다. 지침은 “자연스러운 부식을 통해… 각 탱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각적, 공간적 오브제로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반복적으로 땅과 구조물을 분리해서 언급한다. 따라서 공원의 구성보다는 구조의 활용이, 현재의 쓰임보다는 과거의 감상이 설계의 핵심이 된다.
실제로 공원의 쓰임, 즉 공원의 운영 주체와 구체적 프로그램이 설정되기 전에 이미 공원화 계획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본 공모의 성격은 일반적인 공원의 설계보다는 산업 유산을 추억하는 메모리얼에 가까워진다. 결과적으로 마포석유비축기지 공원화 사업은 ‘기억’에 대한 건축적 실험의 장이 되었고, 이와 더불어 건축가에게만 그 설계가 허락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공원 설계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획득하게 되었다.
기억의 발굴
무엇이든 오래도록 바라보면 흥미로운 것이 된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
설계지침은 최초의 설계다. 지침은 설계에 대한 최초의 관점으로써 다가올 설계들의 진폭을 결정한다. 대다수의 작품이 다섯 개의 탱크를 활용하여 다양한 공간을 연출하고자 했으며, 일부 작품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구조체를 도입해서 옛 것과 새것의 충돌을 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작품은 서울시가 제공한 설계 예시도의 모습에서 크게 더 전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마도 사고의 진폭이 공간적으로는 탱크와 옹벽이라는 구조체를, 시간적으로는 30년간 부식된 표면 위를 맴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등작 ‘땅石으로부터 읽어낸 시간’은 지침과는 다른 공간적, 시간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어떻게 탱크를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어떻게 탱크를 바라볼 것인가’를 먼저 고민했다. “찾아냄이 시작이며, 나타나게 함이 종결이다”라는 설계설명서의 구절처럼, 그들은 찬찬히 대상지의 기억을 들추어보고 이를 드러내기 위해 고민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비축기지가 조성된 과정을 유추해본다. 북측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피하기 위해 탱크는 남쪽으로 열린 경사면에 배치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설물의 안전을 위해 부지 전체가 암반 지형이어야 한다. 탱크를 매설하기 위해 암반은 원형으로 절개되었고, 절개면을 따라 옹벽이 들어섰다. 옹벽 내부에 탱크를 매설한 다음 이를 보호·차폐하기 위해 절개면의 입구는 토사로 메워졌다.
이경근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조경비평 ‘봄’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봄, 조경 사회 디자인』, 『공원을 읽다』, 『PennDesignSubstance Journal』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용산공원 조성 기본계획, 순천만 국제습지센터 기본계획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설계공모, 상상어린이공원 조성 기본계획(안) 현상공모, ASLA Student Award, 환경조경대전 등 여러 설계공모전의 수상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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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석유비축기지 참가 자격 논란
공원화 사업임에도 참가 자격을 ‘건축사’로만 제한 ‘마포석유비축기지 재생 및 공원화 사업을 위한 국제설계경기’는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적 활동을 제공할 수 있는 ‘공원’ 조성을 목표로 했다. 대상지 전체를 하나의 ‘열린 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 핵심 목표였으며, 석유비축탱크를 품고 있는 대상지는 도시적·지형적으로 독특한 조건을 가진 땅이다. 때문에 이번 설계경기는 다양한 전문성을 갖춘 여러 전문가들의 참신한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접근 방식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이번 설계경기는 그 참가 자격을 ‘건축사’로 한정하여 조경가의 공식적인 참여를 배제했다. 이에 본지는 공모전을 주최한 서울시에 참가 자격을 제한한 배경과 이유를 질의했다. 다음은 그에 대한 서울시(도시계획국 공공건축팀)의 답변이다.
참가 자격 관련 질의에 대한 서울시의 회신
“운영위원회에서는 당초 ‘참가 자격’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는데, 그 까닭은 ‘오래된 것은 무조건 철거해왔던 종래의 관습적 태도가 아니라 잃어버린 도시의 기억과 역사를 살려 산업 유산을 재생하고 활용하기 위한 참신한 아이디어와 다양하고 창의적인 설계안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초 자격 요건: 참가자는 단독응모의 경우 한국건축사 혹은 외국건축사이어야 한다. 공동응모의 경우 한국 혹은 외국건축사 1인을 팀의 대표자로 지명하고 나머지 팀원은 4인 이하로 하여 전문분야에 제한 없이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 다만 주최자의 소속 직원,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이 소속된 조직의 구성원, 중복으로 응모한 자, 자격 정지 중인 건축사는 참가할 수 없다.’
그러나 ‘참가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을 경우 계약 관계법령에 맞지 않는다’는 기술용역 타당성 심사 결과에 따라 계약부서(재무과) 및 안전행정부 협의를 거치면서 부득이하게 현행법령 규정에 맞도록 공모지침상 참가자격을 변경하여 공고하였습니다. 또한 운영위원회는‘본 설계경기의 핵심은 기존 석유탱크의 재생 및 활용’이라고 판단하여 참가자의 대표는 국내외 건축사로 지난 5차 위원회에서 결정했었고, 변경된 참가 자격에서도 DDP와 같은 설계비 폭증 및 계약 관련 분쟁 등을 방지하기 위해 향후 ‘기본 및 실시설계’ 계약시 관련법령에 따라 건축사사무소를 등록한 자를 주계약자로 선정하도록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상지와 주변 여건상 공원이 많고 도시계획 변경, 토목 등 다양한 분야와의 연계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 시행령’ 규정에 따른 조경기술사 등 다른 전문가들의 참가를 적극 검토하였으나, 참가자의 대표가 국내 건축사사무소를 등록한 자로 한정되고 공동응모는 2개사를 초과할 수 없도록 제한하면서 참가 분야를 전부 명시하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계약 시 시비가 발생될 여지가 있고, 컨소시엄 구성에 따른 참여업체가 오히려 지나치게 적어질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참가 자격을 변경하는 실무 과정에서 다른 전문분야가 불가피하게 제한되었습니다. 우리 시는 ‘최근 국제설계경기의 흐름은 각기 다른 전문성을 가진 이들이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통해 새로운 해법을 도출해 내는 협력적 작업이 필요하다’는 대부분 전문가들의 견해에 동의하며 본 설계경기에도 적용하려 하였으나, 위와 같은 제도상 문제 등으로 인하여 다양한 분야에 참여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상기와 같은 문제들이 향후 시행될 설계경기에서는 발생되지 않도록 우리 시에서는 건축정책위원회를 통해 개선방안을 논의하고 있으며, 법령 개정 건의등 후속 조치를 마련할 예정입니다.”
협력적 작업을 중시하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
지난 6월 최종 우승팀을 발표한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 설계공모는 CNN이 선정한 2013년 최고의 아이디어에 이름을 올렸는데, 여러 단계에 걸친 공모 과정과 전문가 집단의 학제 간 협력이 돋보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도시설계, 건축, 조경, 원예, 해양학, 엔지니어링, 생태, 교육, 그래픽 디자인, 예술, 재정-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함으로써 복합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었다. 최근 국제설계경기의 흐름은, 각기 다른 전문성을 가진 이들이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통해 새로운 해법을 도출해내는 협력적 작업을 크게 장려하고 있다. 기본 개념을 도출하는 첫 단계에서부터 여러 전문 분야의 협업이 필요하다는 점에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계공모의 핵심은 ‘공개’ 경쟁
이번 설계경기에 참가한 조경가들은 한결같이, 오일탱크에 대한 건축적 설계 해법이 중요한 대상지였으므로 대표자를 건축사로 한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공원화 사업’이란 타이틀이 붙은 설계공모임에도 조경가가 공식적으로 공동 참여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참가 자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분야 이기주의나 영역 다툼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공개경쟁방식으로 진행되는 설계공모에 참가조차 할 수 없도록 자격을 제한한 지침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그 성격이 다르다. 가장 좋은 안을 뽑기 위해, 다양하고 폭넓은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 보다 많은 전문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확대하는 것은 주최 측의 당연한 의무다. 다양한 층위의 안을 폭넓게 받은 후에, 대상지에 가장 적합한 안을 뽑는 것은 심사위원의 몫이자 역량이다. 미리부터 참가를 제한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6.4 지방선거 당시 서울역 고가도로를 재활용하여 뉴욕의 하이라인과 같은 공원으로 조성하겠다는 공약을 밝힌 바 있다. 이에 서울시(주무부처 도로관리과)는 서울역 고가도로를 대상으로 국제지명초청공모를 진행하기 위해 설계지침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이 참가 자격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마감중인 9월 22일 현재, 공식적인 설계공모 요강이 발표되지 않았다). 한국조경사회는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경우, 건축, 조경, 토목구조 3개 분야가 컨소시엄으로 참여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을 서울시에 전달한 상태다. 또 조경 관련 6개 단체장(한국조경학회, 한국조경사회, 한국환경계획·조성협회, 대한건설협회 조경위원회, 대한전문건설협회 조경공사업협의회, 한국환경조경자재산업협회) 공동 명의로 서울시장 면담도 요청해놓았다. 이 자리에서 이번 설계경기의 참가 자격 제한에 대한 문제 제기를 비롯해서, 다양한 조경 관련 정책 제안, 제도 개선 요구 등이 전달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논란이 공정한 경쟁의 장이 마련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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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도시재생, 편의적이거나 인기영합적인 해석을 넘어
‘도시재생’이 공간 문제를 다루는 모든 학계와 업계의 시대적 화두가 되고 있다. 특히 2013년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전국 13개 도시에 도시재생 선도 지역이 선정되어 도시재생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그동안 부동산 경기 침체로 고생하던 학계와 업계도 도시재생으로 활로를 찾고 있다.
그러나 도시재생은 여전히 생경한 개념이다. ‘재생’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의 법제에서 그대로 따온 것으로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재활성화’가 더 이해하기 쉬운 용어다. 그 뜻을 새겨보면 예전에는 번성했던 곳을 ‘다시’ 활성화시킨다는 의미로, 그 전제 조건은 도시 쇠퇴다. 이러한 점에서 엄밀히 말해 한때 활력이 있었던 곳이 쇠퇴decline한 경우와 한 번도 발전한 적이 없었던 낙후backwardness의 경우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그러므로 도시재생을 ‘낙후 지역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 수단’쯤으로 여기는 지자체들의 태도는 매우 안이하다. 번영했던 도시가 쇠퇴하면 공장과 상가가 문을 닫고 빈 집이 생기고 도로가 한산해지면서 그동안 도시 개발을 위해 투자되었던 각종 시설이 100% 활용되지 못하고 방치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재활성화’에는 이렇게 미이용unused되거나 저이용under-used되고 있는 기존의 도시 시설을 다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재활용’의 의미가 그 기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영국에서 탈산업사회의 도래로 인해 가동이 중단된 수변 공간의 제조업 공장, 창고, 도크dock 등의 산업 유산을 문화 자산으로 재활용하거나, 일본에서 ‘읽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도심에 방치되었던 대단위 토지를 재활용하여 도시재생을 꾀하려고 했던 시도와 맥락을 같이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도시재생을 ‘부수지 않고 다시 이용한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정 부분 유효하다. 실상 많은 사람들에게 도시재생은 단적으로 재개발redevelopment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철거 재개발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철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용한다는 개념은 일찍이 수복 재개발, 보전 재개발 등의 개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곧 도시재생은 수복 재개발, 보존 재개발을 의미하는 것일까?
유의할 점은 ‘부수냐 마느냐’는 방법 또는 수단일뿐, 도시재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정 지역의 ‘재활성화’에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존의 것을 없애버리는 것보다 다시 활용하는 것이 지역의 재활성화에 보다 효과적이라면 보존하여 이용하고, 반대의 경우라면 철거해도 된다는 것이다. 재활용하기에는 너무 노후화되고 불량화되어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거나 재활용할 만큼 희소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 것까지 모두 무조건 재활용하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재활용’은 건축물·시설물 등의 재활용뿐만 아니라 기성 시가지내에 이미 개발이 되었던 토지의 재활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폭넓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건축물·시설물을 재활용하는 것이 지역의 재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예전의 것이 지니는 희소성의 가치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예전에 수많은 달동네들이 도시 곳곳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신작로와 아파트는 매우 신기하고 희소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동안 거의 모든 달동네가 철거 재개발을 통해 아파트 숲으로 변모하게 됨에 따라 오히려 이제는 그나마 남아 있는 달동네와 골목길이 신기한 희소한 자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겨우 남겨진 철로, 공장, 창고, 점포, 한옥, 골목길, 계단길 등이 그 지역 고유의 유일하고unique 진정성 있는authentic 장소성을 나타내며 도시재생의 귀중한 자산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도시재생은 종종 ‘마을만들기’와 혼용되기도 하면서 하향식top-down 방식에 대비되는 주민참여형의 상향식bottom-up 도시 정비·개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시 주민참여는 방법 또는 수단에 관한 사항이다. 도시재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역의 ‘재활성화’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 계획 이론에 의하면 주민참여에 기초한 협력적 계획collaborative planning은 그 대상이 도시재생이든 새로운 지역의 개발이든 또는 비물리적 프로그램이든 절차적 합리성과 정당성이 재활성화와 같은 계획의 성공적 산출을 위해 매우 중요함을 보편적으로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실로 도시재생의 가장 큰 특성은 그 목적인 도시재활성화가 물리적 측면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측면을 통합적이고 균형 있게 고려한 개념이라는 데 있다. 즉, 종전의 재개발이 물리적 측면에서 도시 및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춘 데 비해, 도시재생은 물리적 환경이 개선되더라도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경제적·사회적 여건이 개선되지 않으면 쇠퇴 도시의 재활성화는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도시재생의 원조격인 영국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카리브 해와 서남아시아의 이민자들이 공간적으로 집중됨으로써 나타난 빈곤, 치안, 인종적 갈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 제조업 쇠퇴에 따른 실업 등 경제적 문제를 도시 및 주거 환경 악화와 같은 물리적 문제와 함께 통합적으로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일본의 경우도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고 도쿄 등 대도시 지역의 국제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경제적 요인이 도시재생을 외치게 된 주요 배경이었다.
이렇듯 도시재생이 물리적 측면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측면의 도시 재활성화를 통합적이고균형 있게 고려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기존의 낡은 건축물·시설물의 철거를 통해 물리적 환경만을 개선하려는 재개발의 개념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또한 사회적·경제적 여건 개선의 핵심은 사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민참여가 재활성화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시재생이 갖는 시대적 화두의 의미는 통합적 또는 융·복합적 접근 방식에 있다. 이에 따라 국토교통부뿐만 아니라 여러 부처에서 벌이고 있는 도시, 주택, 교통, 환경, 경제·산업, 교육, 의료, 사회복지 관련 사업들이 지역 활성화라는 하나의 최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통합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연계 사업’이야말로 도시재생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최막중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로서 원장에 재임 중이다.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도시계획학 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회장을 맡고있으며, 대통령 직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 국무총리 소속 국토정책위원회 위원, 국토해양부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 등으로활동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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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도그마
용도 폐기되어 방치된 지 16년 만에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을 꿈꾸며 진행된 ‘마포석유비축기지의 재생 및 공원화 사업을 위한 국제설계경기’가 막을 내렸다. 그 진행 과정과 수상작들을 보면서 일종의 도그마dogma라고도 할 수 있을 두 가지 쟁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참가 자격 문제가 그 하나다. 경쟁 끝에 선정된 당선작과 여러 수상작의 설계 개념과 해법보다 오히려 작품 외적인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 ‘환경’과 ‘재생’을 주제로 한 이 공모전은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적 활동을 제공할 수 있는 공원 조성을 목표”로 삼았음에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인 참가 자격 조건을 내걸었다. 대표자를 “건축사 면허를 소지하고 … 건축사사무소의 등록을 필한 자”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 응모 시 응모자 모두 상기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제한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제한은 “푸른 도시, 건강한 도시, 매력적인 도시”를 지향하고 있는 서울시의 정책 방향에 역행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다양한 전문분야의 협력과 융합이라는 시대정신에도 어긋난다. 이러한 극단적 폐쇄성의 원인이 서울시를 대리하여 공모를 전담 운영한 기관의 건축 교조주의dogmatism나 근본주의fundamentalism에 있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진행 과정상의 단순한 실수이거나 서울시의 행정적 무관심에서 비롯된 일이기를 바랄 뿐이다. 결과적으로 조경가는 설계 크레디트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환경과조경』은 그들의 역할을 기록하기 위해 수상작에 참여한 조경가의 이름을 본문에 포함시켰다(지면 관계상 수록하지 못한 가작 수상작에도 유승종, 정욱주, 최혜영 등의 조경가가 참여했음을, 이곳에서나마 밝혀둔다). 마포석유비축기지 공모전을 두고 함께 생각해 볼 또 다른 도그마는 산업 유산을 재활용하는 최근의 설계에서 드러나는 단선적 경향에 관한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기능을 다한 공장, 항만, 창고, 철로 등의 산업시설을 재활용하여 공원, 미술관, 복합문화시설로 전환하는 프로젝트가 20세기 후반 이후 줄을 이었고, 이러한 재활용이 주변 지역과 도시를 재생시키는 촉매가 된 성공 사례도 속속 탄생했다. 뒤스부르크-노르트 공원을 벤치마킹한 선유도공원이 국내 포스트-인더스트리얼 공원의 서막을 열었고, 콘크리트와 녹슨 철과 새로운 식물이 동거하는 선유도공원의 생경하면서도 숭고한 sublime 미감이 서울숲공원의 정수장 구역과 서서울호수공원 등 여러 공간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이제 공장이나 산업시설에 문화나 유산이라는 말을 대입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공업시설의 구조물, 흔적과 잔해, 재료와 물성을 그대로 남기고 적극적으로 재활용하는 것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일종의 설계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한 규범이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도그마로 치닫거나, 아니면 단순히 표피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면서 하나의 유행으로 복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마포석유비축기지는 1970년대의 두 차례에 걸친오일 쇼크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한 석유 비축사업의 결과물이다. 매봉산 자락에 콘크리트와 철제 구조물로 만든 5층 건물 높이의 탱크 다섯 개가 매설되었고 여기에 20여 년간 130만 배럴의 석유가 저장되었던, 한국 현대사의 독특한 산물이다. 새로운 변신을 기획하고 있는 이 땅의 설계에서 ‘재생’과 ‘남기기’가 중심 주제로 검토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방식은 보다 자유롭고 창조적일 필요도 있다. 석유를 저장했던 탱크는 형태와 물성만으로도 강렬한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계의 다양한 해법을 제한하는 조건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당선작 ‘땅으로부터 읽어낸 시간’은 탱크가 건설되던 당시의 작업 역순으로 그 과정의 기억을 복원하고자 한다. 암반을 뚫고 석유 탱크를 만들던 작업로를 다시 재현하고자 한다. 이 작품에 대해 심사위원회는 “공간의 기억에 주목해 ‘건축의 고고학’을 전개한 작품”이라고 정의하고, “과도한 설계를 자제하면서 이 땅이 지닌 지형의 고유한 잠재력을 최대로 이끌어냄으로써 탱크와 풍경이 하나가 되게 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심사평처럼 이 작품은 건설 당시의 상황과 조건에 주목하여 설계를 전개했으며 새로운 물리적 개입을 최소화하는 지혜를 발휘한 수작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법이 과연 이 땅과 주변 지역에 어떠한 재생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지 상상하기란 쉽지않다. 당선작뿐만 아니라 다른 수상작들도 과연 무엇을 재생하고자 한 것인지 의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탱크를 최대한 원래의 형태대로 남겨서 다시 쓰는 것과 이미지의 소비나 유행 사이의 경계는 아슬아슬하다.
지난 9월 초, 서울시는 철거가 예정되었던 서울역 고가도로를 “뉴욕의 하이라인처럼 공중 공원으로 바꿔 서울의 명물로 키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산업시대의 대표적 산물인 이 고가도로를 “관광 명소로 만들기 위해 원형 구조물을 최대한 보존하여 휴식 공간으로 재생할 계획”이며, “도로 상하부에 ‘환경과 재생’을 주제로 다양한 콘텐츠와 프로그램을 도입”한다고 한다. 10월에 국제설계공모를 통해 연말까지 계획안을 선정하고 내년에는 구체적인 설계안을 발전시켜 2016년 완공을 목표로 한다는 ‘토건시대적’ 스피드의 일정도 내걸었다. 이 프로젝트는 기억과 역사에서 지워질 예정이었던 1970년대의 구조물을 재활용해 서울에 새로운 명소를 만들어낸다는 의의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 모든 것을 순식간에 지우고 버린 후 다시 빠른 속도로 그리고 만들기를 반복해 왔던 우리 현대사에 대한 반성과 극복이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서울의 도시 구조와 형태에, 또 주변 지역의 재생과 재활성화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가져 올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선행되어야할 것이다. 서울시가 발표한 급박한 일정대로 진행된다면, 연장 1km에 가까운 고가도로를 그대로 ‘남겨’ 다시 사용하는 것에만 초점을 둔다면, 이 프로젝트 역시 이미지의 소비이거나 도그마의 추종에 불과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번 호의 도시재생 특집에서 여러 필자들이 강조하고 있듯, 과거의 것을 남긴다고 해서 재생과 재활성화의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뉴욕의 하이라인을 모델로 삼았다는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가 여느 시장들의 전시적 대형 사업과 다름없는 정치적 프로젝트가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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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권리와 의무
‘이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보통 이런 표현은 외부 필진의 원고에만 달리기 마련이다. 생뚱맞게 이런 대목으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견해를 담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교과서적이고 원론적인 (한 마디로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너그럽게 보아달라는 엄살이기도 하다(이럴 땐 잡지지면에 이모티콘을 사용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이런 대목에서는 어울리는 이모티콘 하나쯤 달아주어야 하는데)
처음 한국조경사회 밴드에서 건설기술진흥법(이하 건진법) 문제를 접했을 때는, 지자체에서 발주하는 공공부문 조경설계 용역은 기존처럼 엔지니어링활동주체와 기술사사무소도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기존의 입찰 참가 자격에 건설기술용역업이 하나 추가되는 것 정도로 인식한 것이다. 지금까지 멀쩡하게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이하 엔지니어링법)과 기술사법에 의해 조경 설계를 수행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제도가 확 바뀔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막연한 추측도 했다. 20년이 넘도록 큰 변화가 없던 시스템이어서 더욱 그랬다. 과거에는 ‘기술용역육성법’에 따라 건설용역업의 일환으로 조경설계를 수행했는데, 1992년 11월 25일 이후에는 기술용역육성법이 엔지니어링법과 기술사법으로 분리 제정됨에 따라 조경설계 용역 업체가 엔지니어링활동주체와 기술사사무로 이원화되었다(『한국조경의 도입과 발전 그리고 비전 - 한국조경백서1972~2008』 참고). 그리고 그 시스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달라질 기미도 크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안일한 생각 때문에, 시행령 별표1과 별표5는 물론이고 건진법 조항을 들여다보았지만, 의아함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몇 군데 전화를 돌리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건진법이 건설기술용역업의 통합을 꾀하려는 취지가 있다고 해서, 엔지니어링법과 기술사법이 당장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일원화될 수 있는 것인가 싶었다. 또 그보다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은, 토목·건축 또는 기계분야 특급기술자가 조경설계를 비롯해서 다양한 건설 분야의 설계, 감리 등의 기술 용역을 모두 수행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각 분야만의 고유한 전문성이 있고, 또 그 때문에 지금까지 세분화된 전문 분야별로 수많은 기술자를 양성해왔는데, 그 전문성을 지금에 와서 단번에 무시할 수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건진법 시행령 제4조 별표1에서 규정하고 있는 “건설기술자의 범위”를 보면 조경을 비롯해서 10가지의 세부 직무 분야를 두고 있다. 건축, 토목, 기계도 있지만, 도시·교통, 환경, 광업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시행령 별표5에서는 건설기술용역업 중 ‘설계 등 용역’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토목·건축 또는 기계 분야 특급기술자 1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명시해 놓았다. 혼란스러웠다. 법을 조금 더 살펴보았다. 그런데 꼼꼼히 찬찬히 들여다볼수록 걱정이 커지기 시작했다. 기존 법과의 관계도 찾아보았다.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 제4조는 ‘다른 법률과의 관계’에 대해 규정해 놓았는데,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에 따른다”고 명시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으면, 그 법률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기술사법 역시 제3조 기술사의 직무 항목에서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에 따른다”고 명기해 놓았다. 이후 이어진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 담당자, 한국조경사회에서 법제를 담당하고 있는 진승범 부회장(이우환경디자인 대표), 처음으로 이 문제를 조경계에 알린 차욱진 대표(두인디앤씨)와의 전화 통화를 통해 그 여파가 실감되기 시작했다. 사실 문제의 심각성은 그보다 먼저 깨닫게 되었는데, 전국 여러 대학교의 조경학과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학생통신원들의 전화가 한 통 두 통 걸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조경설계사무소 대표, 조경학과 교수들과의 통화도 늘어났다. 최종적으로 정리된 내용은 이번 호에 실린 “건설기술진흥법, 조경설계업에 미칠 여파는”이란 기사(148쪽) 내용과 같으니, 더 이상의 중복은 피한다.
관련 내용을 파악하면서 몇 가지 느낀 점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 중의 하나만 이야기해볼까 한다. 건진법 문제와 관련하여, 조경 단체의 관련 법 모니터링 시스템의 허점에 대한 지적이 꽤 나오고 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경우도 있지만, 질책성 반응도 많다. 예를 들어 엔지니어링협회에서는 이미 시행령에 대한 공람이 진행되었을 때, 관련 문제점에 대한 의견을 국토부에 전달했는데, 조경 단체는 시행령이 개정된 지 5개월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관련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조경기본법, 조경산업진흥법, 수목원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수목원 및 정원 법으로 개정 시도) 등 최근 들어 관련 법에 대한 첨예한 논의(제정을 위한 노력도 있었고, 개정 반대를 위한 논의도 많았다)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는데도, 정작 조경설계업에 지대한 여파가 미치는 법 개정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따끔한 지적이다.
먼저 아주 간단한 사실 관계 하나만 살펴보면, 조경 분야에는 법인 단체는 있어도 법정 단체는 없다. 한국조경학회, 한국조경사회, 한국환경계획·조성협회 등은 모두 국토부와 환경부 등에 사단법인 등록이 되어 있지만, 엔지니어링협회와 같은 법정 단체가 아니다. 엔지니어링협회는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 제5장 협회 및 공제조합’ 법령에 근거하여 설립되었다. 기술사회 역시 ‘기술사법 제14조 기술사회의 설립’ 조항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체다. 건축사협회 역시 ‘건축사법 제6장’에 근거하고 있고,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은 건축진흥원의 설립을 제5장에서 다루고 있다. 1980년 설립된 조경사회는 2000년에야 국토부(당시 건설교통부)에 사단법인 등록을 할 수 있었고(환경계획·조성협회는 1999년도에 환경부에 사단법인 등록), 2008년 11월 10일에야 독립된 사무국을 개소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 회장직을 맡은 대표의 사무실에서 조경사회업무를 함께 보았고, 사무국장 역시 조경사회 임원 중 한 명이 겸직했었다. 법정 단체가 아니다보니, 회원들의 회비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사무국을 꾸려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재정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뜻있는 몇몇 회원들의 후원으로 지금처럼 별도의 사무국을 꾸려가는 시스템이 마련될 수 있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지나간 이야기를 다시 꺼낸 이유까지, 구구절절 이곳에 쓸 필요는 없어 보인다. 교과서적인 결론도 사실 썩 내키지 않는다. 조경 단체의 상황이 이러하니, 관련 법 모니터링을 제대로 하지 못했더라도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는 더더군다나 아니다. 조경사회의 정관 제4조에 명시되어 있는 조경사회의 주요 사업을 보면 “조경 및 관련 분야에 관한 자문 및 대정부 건의 / 조경 관련 정책, 법령 연구 및 제도개선 / 회원의 권익 및 복지 증진을 위해 필요한 사업” 등이 소개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업을 위해 설립된 조경 단체에게 관련 법제도를 살피고 개선을 위해 노력해달라는 요구를 하지 못한다면, 어디에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정관 제7조에 명시된 ‘회원의 권리’ 못지않게, 제8조에 나와 있는 ‘회원의 의무’도 한번쯤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례 없이 조경을 둘러싼 법제도와 사회·경제적 상황이 급변하고 있는 시기에,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살펴보아야겠다. 그나저나 한창 조경가를 꿈꾸고 있는 후배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려운 숙제가 머릿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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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원스
진짜의 힘
노래 잘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넘쳐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더 이상의 실력자는 없겠구나 싶었는데 어디서 그렇게 또 나타나곤 하는지. 열풍이 불던 초반에 비해 일일이 챙겨보지는 못하지만, 화제가 되는 동영상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이 전해진다. 단 몇 분 만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까지 흘리게 만드는 힘은 대체 무엇일까.
최근 개봉해 가을에 어울리는 감성을 전하고 있는 ‘비긴 어게인Begin Again’에서 주인공은 음악을 통해 ‘진정성’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진정眞情’의 사전적 의미는 ‘거짓 없이 참’이며, 유네스코에서 정의하는 ‘진정성Authenticity’은 ‘본질 및 기원을 증명할 수 있는 정품, 또는 본래 가진 원형’이다. ‘Authenticity’는 옥스퍼드영어사전에서 ‘진짜임’이라고 설명된다. ‘비긴 어게인’을 보고 나니 감독의 전작인 ‘원스Once’가 떠올랐다.
‘원스’의 두 주인공(글렌 핸사드, 마케타 잉글로바)은 ‘비긴 어게인’의 주인공(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처럼 유명 배우도 아니며, 배경 역시 근사한 뉴욕이 아닌 아일랜드의 더블린이다.영화는 쇼핑몰로 보이는 거리에서 남자가 기타 케이스를 앞에 두고 노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무심하게 그의 옆을 지나고, 마약에 취한 부랑아가 근처를 서성이다 동전 몇 푼이 전부인 기타 가방을 들고 도망친다. 노래 부르던 그는 필사적으로 부랑아를 쫓아가 근처 공원에서 기어이 붙잡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남자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절규하듯 노래를 부른다. 일정 거리를 두고 손에 든 카메라로 촬영한 듯 조금씩 흔들리는 이 장면은 마치 관객이 남자 앞에 서서 실제로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다. 그의 노래가 끝나자 한 여자가 박수와 함께 10센트를 기타 케이스에 넣는다. 시큰둥해 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음악에 관해 묻는다.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처음 만난다. ‘가짜’ 이야기지만 ‘진짜’로 느껴지는 인상적인 첫 시퀀스다.
피아노를 살 형편이 되지 않는 여자가 피아노를 연습하는 악기점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함께 노래를 부른다. 여전히 카메라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으로 흔들리고, 그들의 옆에는 여자가 수리해달라고 끌고 온 진공청소기가 놓여있다. 악기점 주인은 신문을 읽다 옅은 미소를 지을 뿐 과장된 호들갑 따윈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여자가 밤에 건전지를 사러다녀오는 장면이다. 남자가 빌려준 시디플레이어로 곡을 들으며 노랫말을 만들던 여자는 어린 딸의 저금통에 들어있던 동전을 챙겨 들고,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채 가게로 향한다. 건전지를 끼워 넣고 노랫말을 붙이며 걸어오는 길을 카메라가 따라 걷는다. 인위적인 조명 없이 촬영한 듯 가게 불빛이나 가로등에 의지한 여자의 모습은 컴컴한 곳을 지날 때는 아예 보이지 않기도 한다. 몇 블록의 코너를 돌며 여자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서야 비로소 관객은 여자의 속마음을 알게 된다. 더블린의 어느 허름한 주택가를 함께 걸으며 ‘거짓이 아닌 참’ 사연을 듣게 되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한겨레 영화평론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전공으로 삼아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극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그것이 주는 감동과 함께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텍스트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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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저항하기
주민참여
주민참여? 물론 중요하지. 디자이너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항을 반영할 수 있고, 이용자들의 만족도도 높일 수 있고, 더욱 민주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점, 모두 동의해. 그런데 주민참여가 설계와 큰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어.
솔직히 말해서 주민참여 설계의 사례들, 좀 촌스럽지 않아? 타일 만들기, 벽화 그리기, 텃밭 가꾸기. 항상 식상한 아이템의 반복이잖아. 만약 주민들의 불만이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 주민참여라면 내가 어제 인터넷 쇼핑몰에 불만섞인 글을 써놓고 환불 요구한 것도 주민참여겠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안을 관철시켜서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는 경우는 들어봤어도, 주민참여를 통해서 걸작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어. 그리고 그토록 신선했던 설계안들이 주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그저 그런 작품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수두룩하다고. 그래서 말인데 친구야. 네가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꿈꾼다면 주민참여에는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저항 1 –하이라인
최근 디자인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공원을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하이라인High Line을 선택할 것이다. 설계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공원의 디자이너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조경가 제임스 코너James Corner라는 사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이 공원을 기획하고 만든 당사자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그림1).
맨해튼 웨스트 첼시 지구를 관통하고 있는 고가 철도 하이라인은 1980년을 끝으로 운영되지 않고 방치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뉴욕 시는 이 버려진 고가 철도를 철거할 계획을 발표한다. 어릴 적부터 이 동네에서 자란 청년 로버트Robert Hammond는 우연히 신문에서 철거 계획을 보고 의문을 품는다. ‘이 멋진 구조물을 꼭 철거해야만 할까’ 여러 건축 및 문화재 보호 단체, 그리고 시당국에 문의를 해본 결과 아무도 이 구조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이라인 철거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소식을 듣고 로버트는 난생 처음으로 주민 공청회에 참석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이라인의 철거에 의구심을 품은 또 다른 청년 조슈아Joshua David를 만나게 된다. 로버트는 조슈아에게 말을 건다. “저기요, 우리 무언가를 함께 시작하지 않을래요” 하이라인 친구들Friends of the Highline은 이렇게 두 명으로 시작되었다(그림2).1
두 청년은 하이라인을 철거하려는 시당국의 계획에 맞서 여러 가지 활동을 시작한다.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고, 대상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디자인 대안도 제시하고, 법적 대응 절차도 강구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로버트와 조슈아는 사진가 스턴필드Joel Sternfeld와 연락해 대상지의 현황 사진을 찍기 위해 하이라인 구조물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맨해튼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야생의 정원을 목격한다. 그때 그들은 하이라인이 모두를 위한 공원으로 다시 탄생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그림3).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하이라인의 모습을 공개한 사진 전시회는 엄청난 대중들의 호응을 얻고 하이라인은 지역 사회의 가장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다. 5년 뒤 하이라인 친구들은 지역 주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한다. 마침내 2004년 새로운 뉴욕 시장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와 시당국은 하이라인을 공원으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2009년 하이라인의 첫 구간이 개장한다. 로버트와 조슈아가 하이라인 친구들을 만든 지 정확히 10년만의 일이다. 현재 하이라인 친구들은 뉴욕 공원국과 함께 공원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고 향후의 공원 이용 계획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하이라인을 제임스 코너의 작품으로 알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코너는 철거될 구조물을 보존하자고 주장한 적도 없고, 이를 공원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하지도 않았다. 주민들을 설득하고 시당국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하이라인을 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모든 기획과 실천은 로버트와 조슈아가 생각하고 발로 뛰어가며 이루어낸 성과다. 그렇다면 하이라인은 누가 만든 것인가? 제임스 코너라는 세계적 디자이너인가, 아니면 두 명의 동네 청년인가? 우리는 좁은 의미에서 코너가 제안한 공간적 구상과 도면들을 설계라고 부른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이라인의 설계는 로버트가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구조물의 철거 계획에 저항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코너는 하이라인을 공원으로 만들기까지의 많은 과정 중 일부분만을 담당한 협력자일 뿐이다.
로버트와 조슈아는 하이라인의 가장 중요한 의의를 물어보았을 때, 철거될 위기의 근대 유산을 보존했다거나, 지역에 뉴욕을 대표하는 새로운 명소를 만들었다거나, 현대 건축과 조경에 중요한 이정표를 마련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두 청년은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었던 그들이 이러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킴으로써 누군가 또 다른 하이라인을 자신의 지역에 만들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점이 하이라인의 가장 큰 의의라고 말한다.
저항 2 - 포르타 볼타와 파킹데이
로버트와 조슈아는 하이라인을 통해서 저항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다면 저항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의 잘못된 결정이 아무런 근거가 없을 수도 있고, 나의 이웃이 그 잘못된 결정을 그대로 따르는 이유는 무관심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저항이 하이라인처럼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프로젝트로 발전되는 경우는 매우 예외적이다. 대부분의 경우 저항의 목소리는 대립되는 논리나 무관심 속에 묻혀버린다. 그럴 경우 실천이 중요하다. 설계는 실천적 저항의 가장 중요한 도구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포르타 볼타Porta Volta라는 동네에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공지가 있었다. 어느 날 서커스 단원들이 이곳에서 서커스 연습을 시작했고 동네 아이들에게 공짜 서커스는 인기 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 공지는 주민들이 모이는 동네의 명소가 되었다. 얼마 뒤 공지는 한 재단에 팔려 주차장으로 개발되기로 결정된다. 주민들은 그 계획안에 맞서 이 부지를 작은 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시에 제출한다.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시는 개발이 착수되기 전까지 남은 한 달 동안 주민들이 자유롭게 부지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어준다. 작은 지역 설계 회사와 함께 주민들은 쉼터, 아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 텃밭, 정원으로 이루어진 공원을 만들어 나간다. 이 빈터는 화려하진 않지만 주민들이 늘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가꾸어나가는 공공 장소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약속대로 한 달 뒤에 이 공원은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철거된다(그림4, 5).2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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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서재] 책과 헤어지지 않기2
책과 설계와 나
‘올곧은 삶’이라는 손 글씨
벌써 가물가물한 일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 너머옆집에서 자취를 하시던 담임선생님이 실로 오랜만에 내 고향 집을 찾으신 적이 있었지요. 대학 합격을 축하한다면서 불쑥 내민 문고판 크기로 출판된 토마스 불핀치Thomas Bulfinch의 『그리스 로마 신화』 표지 안에는 ‘올곧은 삶’이라는 손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당시 담임선생님의 연배가 아마도 지금 내 나이쯤이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굳이 산골 분교만 골라서 다니시던 아동문학가였습니다. 소박한 동화를 쓰겠다는 목표를 초임부터 묵묵히 실천하시던 선생님도 때로는 삶의 궤적이비틀거린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부끄럼 탓인지 짧은 글귀의 뜻을 여쭙지 못했지요.
벌써 마흔을 넘어 수년이 부질없이 더 흘러갔습니다. 시인 허연은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2 그렇군요. 부인할 수 없어요. 적잖이 비열하고 야비해도 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회의하고 탈선하고 타락하려는 삶을 ‘올곧게’ 잡아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이라는 날을 다시 살면서 결코 너의 정신을 그 위엄 있는 말이 흐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그런 걸 해서 뭐가 되겠는가, 라는 예의 그 말이.”3라는 시인 겸 비평가 폴발레리Paul Valéry의 결연한 다짐처럼.
문사철시서화는 오늘날 설계가의 소양이지만 신영복 선생이 이르기를, 군자는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중략)… 문사철시서화文史哲詩書畵를 두루 익혀야”4했다고 하지요. 무릎을 쳤습니다. 그 대목을 읽고 바로 이 여섯 자가 다름 아닌 우리 설계자들이 평생 익힐 소양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데 퍼뜩 드는 생각을 조금 다듬어보면, 책을 읽고 쓴다는 것과 설계를 한다는 것은 실은 꽤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적어도 나에겐 아주 멀지요. 문학과 설계가 비슷한 시간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비슷한 결과 물을 내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쉽사리 금방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자신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읽을 수가 없는 것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풀이 해서 읽는 것이고, 이를 통해 마침내 남의 꿈을 그대로보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접속하게 되면 정면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지요. 결국 책을 읽는 것은 광기의 도박입니다. ‘읽어버리면’ 써야 하고, 고쳐 쓰면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죽음까지 불사합니다. 성서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또 고쳐 쓴 문학가이자 혁명가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5 두렵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방어적 태도를 취하며 책을 그저 ‘정보’의 수준까지만 받아들이고 만다는 겁니다. 문학을 통한 혁명을 외면하지요. 그렇다면 설계는 어떨까요?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받았다. 졸업 후 1999년부터 16년째 조경설계사무소를 다니고 있다. 4년 전부터는 개인 주택 정원, 어린이집과 학교의 외부 공간, 농장 조경계획, 공장 외부환경 개선사업, 아파트 조경 가이드라인 등 하나하나 성격이 다른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중에 그 공간에서 머무는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일하는 조경설계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현재 스튜디오테라(STUDIOS terra)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공저로 『철새협동鳥합』이 있고, 제프 마노가 쓴 『빌딩 블로그』를 번역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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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방법론에 대하여: 설계에 대한 탐구적 접근
첫 번째 글에서는 비정통성, 기회주의, 그리고 책임감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통해 나의 설계 방법론이 구체화되기까지의 배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 호에서는 실제 설계를 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느 조경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설계를 할 때 연구, 분석, 개념, 프로그램 설정, 공간의 구상과 같은 과정을 거치며 다이어그램을 그리고 투시도를 만든다. 특별히 남과 다른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하는 것은 아마 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남과 다른것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완전히 희한한 새로운 것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것을 하더라도 남들과는 다른 방법을 찾아서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연구 방법론은 가설을 설정하고 연구를 통해 이를 검증한다. 전통적인 설계 과정도 이와 비슷해서 합리적 분석을 통해 초기에 설계의 전제와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이용해 최종적으로 도출되는 논리와 결과를 정당화시킨다. 이와 상반되는 방법이 탐구적인 연구exploratory research다. 어떠한 가설이나 전제를 갖고 특정한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다양한 방향을 연구한 후 여기에서 나타나는 증거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구의 궁극적인 방향이 발견되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탐구적 연구를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1996년 하버드 GSD에서 렘 콜하스Rem Koolhaas와 함께 하버드 도시 연구 프로젝트Harvard Project on the City를 수행할때였다. 연구 첫 시간에 모든 연구원이 각자의 연구 주제와 이를 위한 가설thesis을 만들어 왔는데 연구를 총괄한 콜하스가 엉뚱한 주문을 했다. 모든 가설을 버리고 백지에서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가설을 원하지 않는다.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는 연구는 이미 답을 알고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장 잘 되어도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설과 입증의 전통적인 연구 방식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이와 같은 탐구적인 방법론은 획기적인 것이었는 데,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열린 결과를 추구하는 연구방식이 지금까지 나의 설계 방법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탐구적 접근은 당연히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기대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해준다. 탐구적 방법론에서 연구와 분석은 결과를 정당화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차태욱은 미국 뉴욕에 위치한 수퍼매스 스튜디오(Supermass Studio)의 대표로 미국을 근거로 한 17년간의 국제적 설계 경력을 통해 설계및 프로젝트 운영, 시공에 이르는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하버드 GSD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뉴욕, 매사추세츠, 네바다, 노스캐롤라이나에 공식 등록된 미국 공인 조경가로서 친환경전문자격증(LEED)을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