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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 공감] 커먼 그라운드
    시커먼 남자 세 명이 함께 가기에 어색한 공간들이 있다. 백화점, 파스타 전문점 그리고 벽화마을…. 여자와 동행한 남자들을 간혹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왠지 자발적으로 방문한 표정들은 아니다. 이 장소들이 모든 여성들의 로망은 아니지만 여성이 우점 성별임에는 틀림없다. 화창한 5월에 방문한 건대입구의 커먼그라운드는 컨테이너 적층 건축의 인지도를 급격히 상승시킨 히트작이다. 비슷한 스타일의 프로젝트 가운데 유독 큰 주목을 받은 커먼그라운드는 오프라인 상에서 건축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해시태그에 의한 공간감의 확대 재생산을 논할 수 있는 곳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쇼핑, 파스타, 벽화의 세 가지 요소를 고루 갖춘 커먼그라운드는 여성 취향을 저격하는 종합 세트장으로서, SNS 게시물에 최적화된 다양한 배경을 제공한다. 배경이 주 임무가 된 공간을 부정적으로 볼 생각은 없다. 자칫 피상적으로 흐를 수 있었던 공간감은 구조와 디테일의 세련됨으로 극복하고 있다. 새로운 핫스팟에게 상위 검색 자리를 물려준다 할지라도 공간의 기본기가 제법 탄탄한 커먼그라운드는 계속해서 즐겁게 활용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_ 정욱주 컨테이너는 물건을 운반하는 수송 수단이기도 하지만 대표적인 가설 건물이기도 하다. 커먼그라운드에는 일반 가설용 컨테이너가 아닌 좀 더 튼튼한 수송용 컨테이너가 쓰였다. 하지만 가볍고 쉽게 해체 가능하리란 이미지는 잃지 않았다. 어릴 적 최초의 가설 건물에 대한 기억은 원두막이다. 몇 개의 기둥과 짚더미를 대충엮어 만든 원두막에는 딴 세상이 있었다. 고작 2m 남짓한 높이였지만 그곳에 오르면 구름 위에 올라선 것 마냥 시원하고 아늑하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다른 시선이 있었다. 가볍고 삐꺽거리는 위태로움이 높이에 대한 감각을 증폭시킨 것 같기도 하다. 어려서 그랬는지 그 가벼움과 시원함이 좋았다. 견고한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것과는 분명 다른 감각이었다. 게다가 원두막에는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감성이 있다. 그곳에 달달한 수박과 참외가 있어서일지도 모르지만…. 컨테이너로 쌓아올린 이 가벼운 건축에서 원두막의 감성을 떠올리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이곳에 모인 젊은 친구들이 훗날 이곳을 내 어릴 적 원두막과 같은 공간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젊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탈일상의 공간이면서 잠깐의 추억이 돼줄 수 있는 공간이니까. _ 김용택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 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 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진행 중인 붕괴에 대한 접근 컬랩스, 6. 3 ~ 6. 25, 합정지구
    최근 세상은 더 흉흉한 분위기다. 시대의 불안은 동시대 여러 예술가들의 작업에서도 예민하게 감지된다. 필자가 얼마 전 기획한 전시 ‘컬랩스Collapse’는 ‘무방비적인 붕괴가 일상이 되어버린 현시대’에 대한 질문을 시각적 구조로 다뤄보고자 했다. 본고에서는 전시 소개와 더불어 참여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사회적 붕괴에 접근하는 동시대 예술 현상을 다루고자 한다. 붕괴를 공모하는 사회 구조 작년 영국 신문 「가디언guardian」에서는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건물을 50개 선정해, 50회에 걸쳐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시리아의 시타델 등 도시 역사에서 주요한 건물들이 등장한 가운데 한국의 한 건물도 선정되었다. 놀랍게도 최대의 붕괴 참사로 전 세계인을 경악시킨 삼풍백화점이다. “삼풍백화점 참사로부터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기사는 한국의 개발 중심 성장이 불러일으킨 연쇄적 붕괴를 언급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는 안전 불감증을 전 세계인에게 경고한다. 위기 속에서도 개개인이 견디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은 시스템의 오작동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붕괴의 이미지는 흔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전 세계에 충격을 준파리 총기 난사 사건, 우리 사회의 부패된 시스템을 보여준 세월호, 중국의 고도성장을 증명하는 도시 심천에서 쓰레기더미에 매몰되어 죽은 사람들, 그리고 증시 파동으로 인한 세계 경제 공황… 무너지고 전복되고 좌초되고 휘감기고 난장판으로 흩어지고 쓰나미처럼 몰아쳐 파괴되고 싱크홀처럼 순식간에 매몰되는 참혹한 사건, 사고, 재해는 각종 미디어를 장악하며 충격과 혼란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화려하게 시선을 장악하던 파국 이미지는 더 이상 스펙터클하지 않다. 순식간에 배가 침몰하고 건물이 무너지고 다리가 붕괴되고 도로가 함몰되고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급작스런 재난에 떠밀린 상황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보이지 않는 개개인의 자아 붕괴, 공황 상태는 극한의 살인이나 범죄로 이어진다. 최근 더 빈번해진 가족 간의 살인 사건, 더 잔혹하고 극악해진 범죄의 이미지. 일상 속에서 시체가 유기되는 비인류적 사건은 비단 한 개인의 인간성, 윤리적 붕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사회적 윤리, 도덕 안에서 개개인의 인간성은 그 충격을 더 병리적, 더 파괴적으로 감지한다. 컬랩스된 사회ㆍ정치적 구조, 전 지구적 재난 등 그 힘에 밀려 세상은 마치 끝을 향해가고 있는 듯하다. 개인을 무력화하는 이 급작스런 붕괴로부터, 그리고 붕괴의 충격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이번 전시는 무방비적으로 노출되어 온 붕괴 이미지가 일상이 되어버린 현시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사회적 붕괴를 시각적으로 다루고 있는 6명의 참여 작가는 오늘날 붕괴 현상과 그 배후의 구조에 대해 각각 신문 매체, 슬럼 이미지, 자연재해, 버섯구름, 가족 제도를 통해 접근한다.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건축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송원아트센터, 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송원아트센터, 2014), ‘Hidden Dimension’(갤러리 스케이프, 2013)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갤러리 스케이프 책임큐레이터, 갤러리킹 공동디렉터,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2015년 동북아시아 도시 리서치(예술경영지원센터 후원)를 진행했으며,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 [시네마 스케이프] 브루클린 공간은 어떻게 장소가 되는가
    소설가 김연수는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다리를 불태우다”라는 말로 비유한다. 지나온 다리를 불태우면 다시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대부분의 인생에서는 그게 다리였는지 모르고 지나가고, 그러고 나서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뒤늦게 그게 다리였음을, 그것도 자기 인생의 이야기에서 너무나 중요한 갈림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통적인 이야기 작법에서 플롯은 3막으로 구성되는데 1막의 끝에 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있다고 한다. 내 인생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은 건넜을 다리, 그때가 언제였을까. 그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면 지금과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브루클린’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 주인공 에일리스(시얼샤 로넌 분)가 고향 아일랜드를 떠나 미지의 땅 브루클린에 적응하는 이야기다. 에일리스가 브루클린으로 가는 배 위에서 멀어지는 엄마와 언니를 보며 손을 흔들 때, 관객은 그녀가 다시는 이전의 그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란 걸 안다. 낯선 브루클린에 도착한 후 한동안 지독한 향수병을 앓는다. 하숙집의 딱딱한 저녁 식사 자리도, 고향과는 다른 번잡한 출근길도, 화려한 백화점의 점원 생활도 모든 것이 낯설다. 잔뜩 주눅이 들어 누가 건드리면 금세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이다. 그러던 그녀가 먼 훗날 그녀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이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로 변한다. “힘들지만 향수병으로 죽지는 않아요. 곧 지나가죠.” 영화는 두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변화와 만나는 사람들과의 화학 작용을 통해 그녀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매우 디테일한 시선으로 묘사한다. 영화에서 짧은 슬로우 모션이 두 번 등장하는데, 한 번은 그녀가 입국 심사장을 통과한 후 파란색 문을 열고 환한 밖으로 나가는 장면이고, 또 한 번은 타국에서 보내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날 밤에 눈이 오는 장면이다. 아일랜드인을 위한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앞 장면이 물리적으로 다른 공간에 첫발을 내딛는 날이라면, 두 번째는 어떤 인식의 전환점이 되는 날이다.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구슬픈 고향의 노래를 부르고 함께 모여 술에 취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하며 하루를 보내고 비로소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같은 공간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 지점이다. 신부님의 도움으로 야간 대학에 다니면서 회계 자격증을 취득하고,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까다롭기만 하던 하숙집 주인과 백화점 상관에게 인정받기 시작한다. 배관 일을 하는 다정한 남자친구도 생긴다. 어리숙하던 그녀의 표정은 모두 놀랄 정도로 당당해지고 활기에 넘친다. 코니아일랜드에 놀러 가기 위해 최신 유행의 수영복과 선글라스를 준비하고, 이탈리아 이민자인 남자친구네 집에 초대받고는 하숙집 친구들에게 스파게티 먹는 방법도 배운다. 엉엉 소리 내어 울며 고향에서 온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던 그녀가 이제 브루클린이 마치 집같이 느껴진다고 답장을 쓴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녀를 인정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고,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렇게 낯선 공간에 자신만의 경험과 기억이 쌓여 새로운 정서와 의미가 생기면서 공간은 장소가 된다. 브루클린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로운 세계관을 바탕으로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편집자의 서재] 색맹의 섬 Editor’s Library: The Island of the Colorblind
    포스터의 “절대 현혹되지 마라”는 경고를 일종의 선전포고로 읽었어야 했다. 영화 ‘곡성’은 상징과 메타포, 블랙유머로 뭉친 ‘떡밥’을 관객들 앞에 던진다. 이미 영화를 보고 온 사람들의 증언에도 코웃음 치며 나는 절대 감독의 의도에 홀리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의를 하고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았다. 그렇지만 선로를 이탈한 기차처럼 폭주하는 이 영화를 어떻게 당해내랴. 영화 초반부, 주인공 종구(곽도원 분)가 밥 먹고 나가라는 장모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아침밥을 배불리 먹고 사건 현장에 지각할 때, 이 영화는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는 데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다. 종구의 직업은 경찰이지만 그가 사건의 원인을 파헤치고 해결하는 방식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수사와는 거리가 멀다. 종구는 허술하고 친근한, 우리 주변에 한 명쯤은 있을 법한 평범한 인물이다. 관객들은 그의 시선을 따라 정신없이 끌려다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관객들의 예상과 기대를 비껴가며 ‘들었다, 놨다’하는 영화의 장치는 대부분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시각적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피해자들의 집마다 걸려 있는 해골을 닮은 금어초, 속을 알 수 없는 무당 일광(황정민 분)이 미끄러지듯 차를 몰며 등장할 때 배경으로 보이는 구렁이 같은 능선과 도로, 일본에서는 길조로 보지만 한국에서는 흉조를 뜻하는 까마귀 등의 상징적 이미지가 반복해서 등장하면서 관객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주입시킨다. 주인공 종구 또한 ‘보는 것’에 집착한다. 일본인을 조심하라고 충고하는 무명에게 “직접 봤냐”고 추궁하다가 급기야는 “내 눈깔로 직접 봐야 쓰겄다”며 나선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어떤가. 종구와 관객이 ‘본 것’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고 사건의 전말은 여전히 알 수 없다. 만약 우리의 시각적 정보가 제한적이라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최근에 읽은 올리버 색스의 『색맹의 섬』은 태평양 한가운데 미크로네시아 제도의 조그만 섬핀지랩에 살고 있는 색맹 원주민의 삶, 풍습, 역사, 섬의 생태 등을 관찰한 여행기다. “완전한 색맹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보는 세계는 어떨까? 그 사람들은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 자체를 느끼지 못할까? 그들도 우리가 보는 세계 못지않게 강렬하고 활기 넘치는 세계를 갖고 있을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비롯해 『뮤지코필리아』,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등 뇌와 정신 활동에 관한 서적을 10여 권 저술한 저명한 신경과 전문의인 작가는 단순한 의학적 호기심을 넘어 색맹의 ‘삶’에 관심을 갖고 색맹의 섬을 찾아 떠난다. 그가 도착한 핀지랩에서는 색맹을 ‘마스쿤’(‘안보인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 섬 인구의3분의 1이 마스쿤 유전자 보유자이며, 전체 인구 약 700명 가운데 57명이 색을 완전히 구별할 수 없는 전색맹이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 색맹의 발생률은 30,000분의 1 미만이지만, 핀지랩에서는 12분의 1에 달한다. 이 섬에서 색맹은 불쌍한 장애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불편할 뿐인 흔한 질병이다. 올리버 색스는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뭔가를 검사할 때, 대개 상당히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핀지랩의 색맹 검사는 “마을 축제라도 벌어진 것처럼 즐겁고 경쾌한 분위기”였다고 묘사한다.1 올리버 색스의 가장 큰 미덕은 환자를 ‘치료 대상자’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병의 원인을 탐구하고 치료방법을 연구하지만, 환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편견 없이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책에는 따뜻한 인간미와 유머가 넘친다. 그는 색맹 원주민이 어떤 면에 있어서는 일반인보다 뛰어난 감각을 지녔다고 기술한다. 색맹원주민은 밝기만으로 색을 구분하기 때문에 색채의 대비가 뚜렷하지 않은 색깔들을 쉽게 구분해 아름다운 무늬의 깔개를 만들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도 명암을 잘 구분할 수 있어서 밤낚시를 할 때 발군의 기량을 발휘하기도 한다. 한번은 올리버 색스의 일행 중 한 명이 노란색과 녹색을 구분할 수 없는 색맹 원주민에게 바나나가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묻는다. 원주민은 대답 대신 연두색 바나나를 내민다. 아직 푸른 기가 돌지만 껍질을 벗겨보니 속은 완전히 익은 바나나다. 놀라워하는 색스의 일행에게 원주민은 말한다. “색깔만 보는 건 아니에요. 우린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냄새 맡고, 또 알아요. 여러분들은 그냥 색깔만 보겠지만 우린 모든 걸 따지는 거지요!”2 지난 5월, 문경원 작가의 프라미스 파크 워크숍, ‘미래 공원의 제안’이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려 취재를 다녀왔다. ‘향’으로 공원을 탐구한다는 기획을 처음 들었을 땐 막연하고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양한 감각을 이용해 구체적인 개념을 만들어가는 시도와 과정 자체가 하나의 플랫폼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문경원 작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시각이 지배하는 현대인의 얕은 사유 방식에 경종을 울리는 새로운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기대했던 결과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와 연구 방식은 ‘공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예술의 언어로 표현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 [CODA] 살아남지 못한 구절
    가다듬고 지우고 살리고 없애고 되살리고 줄인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 좌담회 녹취록 정리 이야기다. 대부분의 좌담회는 2시간 남짓 진행된다. 예정된 주제들을 하나씩 소화하며 순조롭게 이야기가 풀리기도 하지만, 곁가지로 새는 일도 다반사다. 어떤 경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펼쳐져 원래의 주제로 되돌아오기까지 한참이 걸리기도 한다. 그럴 때 녹음기를 바라보는 에디터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예상했던 분량이 안 나올까봐 걱정이 되어서다. 한 가지 주제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논의가 빙빙 맴돌 때도 마찬가지다. 마치 도돌이표가 표시된 것 마냥 중언부언된 부분을 쳐내고 나면 지면에 옮길 텍스트가 몇 단락 안 될 때도 있다. 30분 넘게 이야기가 오고갔는데도 말이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패널들이 이야기에 심취해 예정했던 2시간을 훌쩍 넘기는 경우다. 게다가 주제에 대한 집중도까지 좋은 경우는 요즘 말로 웃픈 상황이다. 내색 할 순 없지만, 없던 다크서클이 절로 생기기도 한다.녹취 분량도 어마어마해지고 다른 지면을 줄여서 새로 지면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표정은 웃고 있어도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떨 땐 애꿎은 녹음기의 정지 버튼만 노려보다가 녹취를 풀기도 전에 그림 먼저 그리기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통째로 들어내야지. 안 그랬다간 A4 30매도 넘기겠어.’ 물론 내용이 알차다면 지면을 더 할애하는 것이 순리이겠지만, 그게 꼭 득인 것만은 아니다. 지면을 빽빽하게 채운 활자 더미에 독자들은 시선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내용의 질과는 무관하게…. 지난 호 특집에 실린 좌담회 ‘설계비, 무엇이 문제인가’는 좀 독특했다. 평균 좌담회소요 시간인 딱 2시간 동안만 진행되었음에도 초벌 녹취 분량이 A4 26매에 달했다. 초벌 녹취 단계에서는 불필요한 부분을 미리 배제하고 정리하기 때문에 보통 20매 이내에서 정리되는데, 이번 좌담회는 달랐다. 그만큼 곁가지도 잔뿌리도 없이, 굵직굵직한 메인 줄기를 따라 2시간 내내 주제에 부합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패널들이 준비해 온 자료도 순도가 높았다. 그럼에도 “텍스트가 너무 많아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반응도 있었고, “설계 환경의 가장 큰 이슈를 결국 ‘기-승-전-설계비’로 맺은 점 또한 아쉽다”(이번호 칼럼)는 지적도 있었지만, ‘기-승-전-설계비’에 대한 아쉬움은 특집의 전체적인 ‘기획’에 대한 것이고 텍스트의 양을 더 간결하게 구성하지 못한 것은 편집부 탓일 뿐, 좌담회 자체는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살아남지 못한 구절을 굳이 여기서 되살리려는 까닭이다(공식적인 좌담회의 기록은 아니기 때문에 이니셜로 표기한다). A: 조경 업계를 거칠게 구분하자면 설계, 시공, 시설물로 나눌 수 있는데, 조경설계사무소의 대표는 대부분 조경학과 출신이다. 조경학과 학부 때부터 디자인의 매력에 끌려서 설계를 자신의 천직으로 여겨 이 일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조경 시공이나 조경 시설물 회사의 대표는 조경학과 출신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런데 회사 경영은 이들이 더 잘한다. / B: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C: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설계대학원에서도 경영을 가르친다. 회사의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해야 원하는 설계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A: 적정 설계비를 받지 못하면서 생기는 문제 중의 하나는 조경학과 학생들이 설계 분야로의 진출을 꺼리는 점이다. 업무양도 많고 초봉도 낮다보니 설계를 기피한다. 예전에는 조경학과의 상위 그룹이 설계를 했지만, 지금은 그 반대다. / B: 조경설계사무소의 급여가 가장 낮다는 이야기인가? / A: 가장 적다. 대기업 연봉은 세배 이상인 경우까지 있다. / A: 조경 분야 내에서도 설계 분야가 가장 연봉이 적은 가? / C: 내가 알기로는 2000년대 중반에는 조경 분야 내에서 설계사무소의 연봉이 가장 높았다. 시공 회사 대표가 설계사무소에서 신입 직원에게 월급을 너무 많이 줘서 시공 회사로 취직하려는 졸업생이 없다고 항의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서 설계사무소가 제일 적고 자재 회사가 제일 많이 준다. / D: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프를 좀 다르게 봐야 한다. 출발선상에서 보면 대기업과 설계사무소의 연봉에 많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대기업의 초봉이 4천만 원 혹은 5천만 원에서 시작되더라도 1억 원까지 빨리 가는 게 아니다. 대기업은 그래프가 완만하다. 게다가 몇 퍼센트만 살아남는 구조다. 반면 설계사무소는 개인의 역량에 따라 그래프의 곡선이 얼마든지 가파르게 상승할 수 있다. 조경 분야끼리만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시공 회사가 설계사무소보다 그래프가 완만하다. 설계 분야의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이야기다. / A: 그런데 그렇게 버틸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시공이나 시설물 분야는 10년 이상 계속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설계는 적은 연봉으로 10년 이상 버티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요새는 10년차 경력자는 웃돈을 주고 스카우트해야 한다. / C: 상승 곡선을 가파르게 탈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설계 쪽이 많은데, 현재 취업을 목전에 둔 젊은 친구들은 초봉 비교를 조경업종 내에서 하지 않고 일반 대기업과 한다. 기회가 될 때마다 학생들에게 대기업이 초봉은 많아도 10년 후를 생각하면 설계 분야가 더 비전이 있다고 설명을 하지만, 당장의 초봉에 연연해하는 경우가 많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말이다. / B: 요새는 설계사무소가 어렵다는 말들이 많아서 교수들도 설계사무소 취업을 권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히 비전이 있다. 설계자의 희소가치도 점점 높아질 것이다. 양질의 설계를 할 수 있는 전문가에 대한 수요는 커질 수밖에 없고, 단가도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다. 성공 확률은 확실히 과거보다 지금이 더 크다. / A: 설계사무소는 여성에게 유리한 측면도 많다. 경력 단절 이후에 재취업할 수 있는 확률이 다른 분야보다 월등히 높다. 초벌 녹취 원고 A4 26매 중에서 지면에 담긴 분량은 A4 14매다. 절반 가까이가 살아남지 못했다. 그 중에서 아주 일부를 옮겨 보았다. 설계비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옅어서 딜리트 키를 피해가지 못했던 대목이다. 왜 옮기는지에 대한 부연은 생략한다.
  • [칼럼] 설계를 찾아서 Column: Quest for Design
    5월호 특집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을 읽고 몇 마디 거들고자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내용이었으면 좋겠다는 원고 청탁을 받았다. 편집주간의 글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젊은 그들의 참신한 태도와 작업 방식에 나 또한 박수를 보내며 내가 설계사무소를 열고 지금까지 운영해 오면서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몇 가지 이야기를 꺼낼까 한다. 학부 졸업 후 나 또한 풍운의 꿈을 안고 설계사무소에 입사했다. 첫 출근 날 강남역에 내려 사무실로 걸어가는데 지하 역사 안의 레코드 가게에서 아침부터 음악이 울려 퍼졌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환희의 송가가 등 뒤로 웅장하게 흘렀다. 마치 내 첫 출근의 위대한 첫 걸음을 환희로 채워주는 듯했다. 전율을 느꼈다. 영광스러운(?) 나의 조경 설계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7년이 흐른 후 내 사무실을 열었다. 마흔둘의 나이에 한 창업이라 주변에서는 좀 늦은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동업으로 시작했기에 마음의 부담을 나눌 수 있었다. 건설 경기가 계속 악화되어 매출 대비 고정 지출의 규모가 너무 커 경영난을 겪게 되었고,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서로 독립해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되었지만, 처음의 선택은 옳았다. 지난 호에 실린 소장들의 창업 이야기를 읽으며 참신한 작업 방식과 환경은 물론 남부럽지 않은 스펙을 가진 젊은 그들의 역동성을 느꼈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를 이겨나갈 능력을 지닌 그들에게 안도감을 느꼈다. 부러움이 앞선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상상력 충만한 분위기에서 좋은 설계안이 나온다고 믿고 직원들과 허물없이 호형호제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설계사무소라 하더라도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아무리 참신하고 의욕 충만한 새로운 설계사무소여도 대표자에게는 결코 뒤로 할 수 없는 책임이 따른다. 설계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나 오류는 일 잘하는 임원이 해결할 수 있다. 세금이나 회계 문제는 전문 세무사에게 맡기면 된다. 하지만 대표 소장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 첫 번째는 직원과의 약속이다. 최근 몇 년간 경기가 계속 나빠지고 회사의 수주가 바닥을 찍는 악순환이 연속되면서 사무실의 대표는 나름 최선을 다해뛰고 또 뛴다고 생각하는데 직원들이 그 노력을 반도 몰라주는 것 같다. 또 직원들은 열심히 하는데 대표가 보기에는 무언가 모자라고 성이 차지 않는 다. 대표의 눈에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불만이 생기고 다그치기 시작한다. 경영자와 직원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서로가 이해해 주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거리라고 인정해 버린다. 어쩌면 ‘회사’라는 통념과 선입견 속에서 비롯된 사용자와 피사용자 간의 거리감은 아닐까? 이 어쩔 수 없는 입장 차이를 조금이라도 개선할 방법은 없을까? 하나 있는 듯하다. 내가 직원이었을 때를 기억해 내는 것. 나는 그 당시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무엇이 불만이었고 무엇에 만족했는지 다시 떠올리는 것. ‘나는 설계사무소를 이렇게 이끌어갈 것이다’라는, 처음 지녔던 자신만의 신념을 부적처럼 지니고 살아야 한다. 무언의 다짐도 약속이다. 대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해야 한다. 그리고 직원으로 채용한 사람을 믿어야 한다. 이런 약속이 직원들과 새끼손가락을 건다고, 계약서를 쓴다고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첫 생각을 잊기 마련이다. 이 정도면 됐다하고 마음을 놓는 순간 사무실 가족들과 함께 쌓아온 탑이 기초부터 흔들린다. 창업하면서 큰 꿈을 꾼 바로 그때 가슴 깊숙한 곳에 스스로 묻어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내 곁에 있는 ‘스마트 피플’들이 없었다면 나의 오늘도 없었다”는 빌 게이츠의 회고를 잊지 말자. 두 번째는 설계사무소의 생명력 문제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불을 찾아서Quest for Fire’(1981)라는 영화가 있다. 약 8만 년 전, 동굴에서 사는 울람 족은 자연에서 생겨난 불을 이용해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부족의 습격과 야생 동물의 공격으로 불을 꺼뜨리고 만다. 추위에 떨게 되고 불의 필요성을 새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울람 족은 불을자연에서만 얻어왔던 터라 다시 불을 구하기 위해 부족 중에 선발된 세 명이 멀고 긴 여정에 나선다. 목숨 걸고 불을 찾아 떠난 여정 속에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불을 가지고 돌아오지만 물속에 빠뜨려 천신만고 끝에 얻은 불을 잃는다. 결국 여행 중 구해낸 여성의 부족에게서 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어 다시 불을 얻게 된다. 영화에서 불의 의미는 생명이며 힘이다. 불을 중심으로 가족이 모일 수 있었고 불이 있어 맹수들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지킬 수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불을 지키려 애썼다. 불을 잃게 되자 모든 것을 걸고 불을 찾아 나섰다. 불은 반드시 구해야 할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불이 있는 종족이 곧 힘 있는 종족이었다. 설계사무소에서 불과 같은 존재는 누가 뭐래도 설계다. 설계는 우리가 지켜야 할 힘이며 생명이다. 설계사무소가 갖추어야 할 최종병기다. 가슴 벅찬 기대를 안고 새롭게 시작하는 그들, 꿈틀대는 생명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갖춘 그들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설계를 찾아서. 이재연은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을 거쳐 2006년조경디자인 린을 설립했다. 2013년 조경박람회 초대 작가로, 2014년에는 정원문화 심포지엄 초대 작가로 선정되었다.
  • [에디토리얼] 조경이라는 이름 Editorial: Questions on Nomenclature of Landscape Architecture
    어느 제자와의 대화를 소개하며 ‘조경’의 개명 문제를 넌지시 제기했던 지난 4월호 에디토리얼에 많은 독자들이 피드백을 주셔서 내심 놀랐다. 1970년대에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선택된 조경造景. 이 단어의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가 어긋나는 현상이 한국 조경의 40년 역사를 뒤엉키게 한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주장에 다양한 반응이 이어졌다. 나무나 꽃 심고 돌 놓는 것을 연상시키는 일상 용어 조경이 전문 직능이자 학제인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와 등가를 이루지 못한다는 점에 동감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이제 와서 40년 넘게 지켜온 이름을 버릴 수는 없으며 오히려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조경의 사회적·문화적 역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가야 한다는 반론도 있었다. 공감은 하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다시 번역한다면 결국 대만처럼 경관건축景觀建築인가. 중국처럼 원림園林건축으로 옮길 이유는 없다. 일본의 조원造園은 조경보다 더 좁은 느낌이다. 일부 건축가나 유학파 조경가들처럼 조경건축이라 쓰는 대안도 있겠지만 아마 제도권 조경인들은 경관‘건축’이나 조경‘건축’에 결사반대할 게 분명하다. 이미 몇몇 대학의 학과명에서 볼 수 있듯이 조경 앞에 환경이나 생태나 도시를 덧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옹색한 감을 감출 수없다. 이미 익숙해서 둔감해졌지만, 여러 지자체의 조경관련 부서명들은 조경이라는 이름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서울시의 조경 정책과 사업을 총괄하는 조직은 푸른도시국이다. 이 근사한 이름을 단 부서 밑에 공원조성과, 공원녹지정책과, 자연생태과, 산지방재과, 그리고 ‘조경과’가 있다. 조경과의 담당 업무를 찾아보면 수목 식재 사후 관리, 시설물 관리, 가로수와 녹지대, 가로변 꽃 가꾸기정도다. ‘한국조경헌장’이 정의하듯, 조경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건강한 환경을 형성하기 위해 인문적·과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토지와 경관을 계획·설계·조성·관리하는 문화적 행위”라면, 푸른도시국은 ‘조경국’이어야 정상적인 이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조경계에서만 소통될 수 있을 뿐이다. 몇 년 전,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광교호수공원, 용산공원 등 대규모 국제 설계공모의 운영과 진행에 참여하며 공모전 결과와 당선작에 대한 보도 자료를 작성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은 보도 자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기사를 내보내면서 유독 조경이나 조경가는 다른 용어로 고쳐 표기하곤 했다. 이를테면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조경가 아드리안 구즈의 작품이 용산공원의 미래를 그릴 설계안으로 당선되었다’는 문장에서 ‘조경가’는 예외 없이 다른 단어로 수정되었다. 조경전문가, 조경디자이너, 조경건축가는 그나마 조경을 남겨준 경우다. 적지 않은 언론은 구즈의 직업명을 공원전문가, 공원설계가, 공원디자이너, 도시공원계획가 등으로 바꿔 적었다. 기자와 편집자들이 조경에 무지한 탓이라고 분노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조경(가)으로는 의미 전달이 안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번 호 특집 ‘설계 환경을 진단하다’는 이 애증의 이름 조경을 달고 고군분투하는 현장의 난맥 중 계약, 공모, 자격, 설계비의 문제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박승진 소장은 계약의 중요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제시하고, 최정민 교수는 설계공모의 문제점과 방향을 깊이 있게 다룬다. 이민우 교수는 기존의 조경기술사 자격과 구별되는 조경설계 전문가 자격의 필요성을 제안한다. 특히 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조설협)와 공동으로 기획한 좌담에서는 설계비를 둘러싼생생한 현장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조설협의 전·현직 회장인 안세헌 소장과 안계동 소장, 한국조경사회 수석부회장인 진승범 소장은 설계비의 실태와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진단한다. 특히 스타트업 조경가를 대변하며 참여한 이호영 소장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조경계 내부의 관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저가 수주가 만연한 현재의 상황을 문제라고 지적만 할 것이 아니라 원인 파악이 우선이라는 그의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호영 소장이 예로 든, 소수 민족이나 스타트업과의 협업을 의무화한 미국의 사례는 기성과 신생설계사무소가 동반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한국조경헌장에 명시된 ‘조경의 영역’ 중 설계는 “계획안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창작 행위이며, 계획설계, 실시설계, 감리의 과정으로 나뉠 수 있다. 조경가는 설계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복합적인 요구와 문제를 합리적이고 창의적으로 해결한다.” 사회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명칭인 조경과 조경가가 조경설계의 정의와 범위까지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조경가는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하며 ‘복합적인 요구와 문제를 합리적이고 창의적으로 해결’하고 있지만, 정작 되돌아오는 사회적 인식과 경제적 대가는 ‘나무나 꽃 심고 돌 놓는 조경’이다. 현실의 설계 환경을 둘러싼 여러 문제는 이 간극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 특집은 문제의 원인을 외부적 요인 탓으로만 돌리기보다는 조경계 내부를 진단하고 성찰해 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번 기획이 설계 환경의 실제, 더 나아가 조경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부족한 지면에 일회성 기획으로 담을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환경과조경』은 독자 여러분의 보다 다각적인 의견과 아이디어를 모아 설계 환경과 조건의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후속 기획을 마련하고자 한다. 애증(?)의 이름표 조경을 목에 걸고 오늘도 설계실의 밤을 밝히고 있는 조경가들에게 존경과 애정의 박수를 보낸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누가 중세를 두려워하는가? History of Landscape Architecture with 100 Scenes: Who is Afraid of the Middle Ages?
    #87 빛을 담는 방법 - 중세의 고딕 성당 이런 이야기가 있다. 중세 유럽 한복판에 쉴다라는 도시가 있었다. 이 도시의 시민들은 본래 너무 똑똑했다. 그러나 똑똑해봤자 사는 것만 복잡하지 아무 이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모두 바보가 되어 살기로 했다. 이제 바보가 된 똑똑한 쉴다 시민들은 그 기념으로 시청사를 짓기로 결의했다. 곧 작업에 착수, 모두 힘을 합쳐 도운 끝에 건물이 완성되어 성대한 준공식을 열었다. 그런데 바보들답게 창문 내는 것을 잊은 까닭에 청사 안이 깜깜절벽이라 업무를 볼 수가 없었다. 다시 호프집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홧김에 맥주잔을 거푸 기울이던 어느 시민이 갑자기 무릎을 치며 외쳤다. “그렇지! 이거야. 맥주를 이렇게 잔에 담는 것처럼 햇빛을 양동이에 담아서 나르면 되지 않을까” 모두 갈채를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시민들은 양동이며 부대자루 등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열심히 빛을 담아종일 청사 안으로 날랐다. 참으로 부지런히 나른 끝에 해 질 무렵 모두 녹초가 되었다. 마침내 어둠이 내리고 쉴다 시민들은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시청으로 향했다. 그 결과가 어땠을지는 보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지붕을 들어냈다. 눈비가 내리면 지붕을 다시 덮고. 그러다가 우연히 벽의 갈라진 틈으로 빛이 새어들어 오는 것을 발견하고 창문을 냈다고 한다. 교회 혹은 성당을 ‘빛의 집’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신은 곧 빛이므로 교회에 빛이 가득하면 이는 곧 신이 거하시는 것이라 믿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를 지을 때 되도록 많은 빛이 들어오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 대답이 창문에 있다는 사실은 쉴다 시의 현명한 바보들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들처럼 지붕을 걷어낼 수는 없으므로 천장을 매우 높게 지어서 지붕이 거의 하늘에 닿게 해야 더 많은 빛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창문도 매우 커야 한다. 문제는 ‘기술적으로 이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였다. 창문을 많이 내면 벽의 지탱하는 힘이 약해져서 거대한 지붕의 무게를 받아내지 못한다. 12세기 중반, 프랑스 중세 건축가들이 이에 대한 해법을 찾아내어 결국 빛이 가득한 성당을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된다. 벽이 해체된 순간이라고도 말한다. 기존의 두꺼운 벽 대신에 창문과 기둥을 연속시켜 성당의 외관을 완성했다. 이런 구조로 인해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짓는 것도 가능해졌다. 성당 건축은 대개 선박처럼 긴 홀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성당 내부 공간을 선체라고도 부른다. 이 홀은 다시 길이에 따라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그중 중앙의 홀을 신랑身廊이라고 하며 이를 좌우에서 좁은 복도와 같은 측랑이 보좌한다. 신랑과 측랑은 벽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열주에 의해 분리되며 열주의 기둥과 기둥 사이는 대부분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구조를 ‘바실리카’라고 한다. 바실리카는 본래 고대의 공공건물이나 신전을 짓던 방식을 뜻했는데 기독교가 도입되면서 서서히 교회 건축을 일컫는 용어로 굳어졌다. 흔히 말하는 중세의 고딕 양식이란 바실리카의 기본 형태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성당은 대개 동서 방향으로 길게 짓는다. 신도들은 서쪽으로 입장하여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게 된다. 이것이 정석이다. 동쪽의 좁은 벽을 반원형으로 만들고 벽 전체를 창문으로 대체하면 해가 떠오르면서 빛이 곧 가득 차게 된다. 빛의 집을 짓는 첫 번째 원리다. 바실리카는 신랑의 천장이 측랑의 천장보다 훨씬 높은 것이 특징이다. 측랑은 중앙의 신랑을 되도록 높게 지을 수 있도록 좌우에서 받쳐 주는 역할을 한다. 홀을 크게 지었으므로 지붕 역시 매우 커서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이 지붕의 무게를 벽체로 받치는 것이 아니라여러 개의 기둥에 분산시키는 것이 구조적 해법이었다. 그래야만 두껍고 투박한 벽체를 최소화할 수 있게 된다. 무게를 사방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궁륭형의 독특한 천장 구조가 고안되었다. 돌로 만들었을 뿐 그 원리는 텐트와 같았다. 평평한 것도 아니고 완벽한 구형도 아닌 텐트 구조의 궁륭을 여러 개 연결해 천장을 완성했다. 대개 네 개의 기둥이 궁륭 하나를 받친다. 그러므로 연결된 궁륭의 숫자에 따라 기둥의 수도 결정되며 당연히 성당 홀의 길이도 결정된다. 그다음으로 기둥 사이의 아치를 뾰족하게 변형시켰다. 기둥 사이의 간격이 같더라도 아치가 높아짐으로써 천장도 같이 들어 올려졌다. 창문의 형태를 아치의 형태에 맞추었으므로 좁고 길며 끝이 뾰족한 고딕 특유의 창문이 탄생했다. 외벽 바깥쪽에는 추가로 ‘ㄱ’자의 구조물(버트레스라고도 함)을 대어 측면으로 가해지는 압력을 지탱했다. 물론 아무리 날렵하게 지었다고 하더라도 돌의 총 무게가 만만치 않았으므로 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기초를 튼튼하게 닦아야 했다. 지하에 묻힌 돌의 무게와 지상에 쌓은 돌의 무게가 거의 같았다고 한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리질리언스 읽기] 리질리언스 개념의 등장과 확장 Reading the Resilience: Emergence and Expansion of Resilience
    제방이 무너져 내렸을 때 ‘제방이 무너져 내렸을 때When the Levees Broke’는 2005년 8월 미국 남동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뉴올리언스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가족을 잃은 주민들의 인터뷰로 시작된다. 그들은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에 접근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해안 제방이 이를 충분히 막아낼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재앙은 카트리나 상륙 사흘 후 새벽에 일어났다. 뉴올리언스를 보호하고 있던 폰차트레인Pontchartrain 호의 제방이 붕괴되어 멕시코 만의 검은 바닷물이 순식간에 뉴올리언스를 덮쳤다. 해수면보다 지대가 낮은 뉴올리언스 지역의 80% 이상이 물에 잠겼다. 2만 명 이상이 실종 혹은 사망했고 8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로써 화려했던 재즈의 도시가 종말을 알리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에서 경제적·사회적·환경적으로 가장 취약한 지역이었던 뉴올리언스는 거대한 재난 이후의 상황을 감당하지 못했다. 치한을 위해 ‘사살권’을 발효하는 등 무정부 상태를 방불케 했다. 약탈과 방화, 주민 간의 총격전, 성폭행, 구조대와 이재민의 마찰, 시체썩은 물과 토양 속의 오염 물질이 뒤섞인 식수…. 강력한 인공 구조물로 폭풍을 막으려고만 했지, 폭풍이 도시를 붕괴시킨 이후 사회와 환경을 재건하는 방법과 이전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계획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카트리나는 완벽한 재난 대응법은 없다는 것을 일깨웠다. 오히려 재난을 받아들임으로써 피해를 줄이고 피해를 입은 지역을 회복시킬 수 있는 대응법이 더욱 중요했다. 이에 미국 사회는 회복력, 즉 리질리언스resilience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세계 최대 규모의 자선 단체인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과 손을 잡고 1조 원 규모의 ‘국가 재해 리질리언스 대회National Disaster Resilience Competition’를 개최했다. 이는 리질리언스 개념을 도입하여 대형 재난 대응 계획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뉴욕, 뉴저지, 뉴멕시코, 시카고 등 많은 해안 도시가 이에 동참했다. 프로젝트는 조경계획과 도시계획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미국조경가협회ASLA(American Society of Landscape Architects)는 2014년 학술 대회 주요 테마로 ‘리질리언스’를 선정해 계획과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과 관리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 적용시킬 방안을 논의했다. 리질리언스라는 실천적 개념을 미국 조경계에 환기시키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리질리언스 향상을 위한 조경 정책에 재정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도시 조경에 집중되어 있던 미국 조경계가 방재, 해안 복원, 기후 변화, 사회 생태 시스템 등 거시적이고 복잡한 시스템에도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다. 리질리언스 개념은 지속가능한 사회 구현의 전략적 수단이자 예측 불가능한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핵심 어젠다로 급성장했다. 전진형은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 환경생태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습지생태계 조성과 생태환경회복기술 개발, 시스템 다이내믹스를 활용한 도시 내 저탄소 경관 디자인 요소 개발 및 야생생물 군집 변화 모델링 등 생태계 복원 및 설계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생태학적 이론과 과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한 다양한 디자인 시뮬레이션을통해 설계 단계부터 시공 후까지 생태계 변화를 예측하여 대상지가 지속가능할 수 있는 생태적 조경 설계와 유지관리 방안을 연구하고 교육하고 있다. 최근에는 생태환경의 보존과 인간의 이용 및 개발의 조화라는 패러독스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을 통한 생태회복성(eco-resilience)에 관심을 갖고 이를 조경 분야에서 적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연재 순서 1. 21세기 패러다임의 변화,지속가능성을 넘어 리질리언스로 2. 리질리언스 개념의 등장과 확장 3. 새로운 사고의 틀, 리질리언스 사고 4. 리질리언스 향상을 위한 전략, 적응과 전환 5.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도전1: 도시 리질리언스 6.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도전2: 해안 리질리언스
  • [조경의 경제학] 공원의 적정량을 사회적 합의로 도출할 수 있을까? Economics of Landscape Architecture: Can We Estimate the Proper Amount of Parks by Public Consensus?
    다수결은 합리적인가? 대표자와 관료는 우리를 위해 일하는가? 거버넌스는 정부의 대안인가? 다수결은 합리적인가 땅이 있을 때 그곳에 공원의 조성 여부를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을까? 예산이 있을 때 그 돈으로 어디에 공원을 조성할지를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을까? ‘좋다’는 말은 가치 지향적이다. 게다가 ‘좋음the good’이 ‘옳음the right’과 항상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위 질문은 대답하기가 아주 어렵다. 이 글에서는 ‘좋다’는 말의 의미를 사람들의 불만이 가장 적은, 그래서 만족이 가장 큰 상태라고 정의한다. 이 연재를 처음부터 읽어온 독자라면 그 상태에서 공원에 투입되는 자원의 배분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면 위 질문에는 이제 가치가 아닌 수단의 문제만 남는다. 지난 호에서 우리는 사회적 의사결정의 수단으로서 비용편익분석을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는 또 다른 수단인 사회적 합의를 살펴본다. 비용편익분석이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것과 달리 사회적 합의는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다. 공원의 조성을 사회적 합의로 결정하는 방법은 주민들이 모여 투표하는 것일 수도 있고, 주민이 선출한 대표자와 정부에게 일을 맡기는 것일 수도있고, 그 외의 또 다른 정치적 대안일 수도 있다. 어떤 방법을 활용하든 사회적 합의를 잘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공원의 적정량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투표라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투표는 여러 사람의 선택을 모으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는 만장일치인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만약 사람들이 공원을 추가로 조성하는 대가로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는 금액, 즉 한계지불의사를 정확히 표현한다면, 정부는 공원의 적정량에 대해 만장일치에 버금가는 수준의 결정을 할 수 있다. 바로 모든 개인이 표현한 한계지불의사의 합과 공원 조성의 한계비용이 같아지는 점을 찾는 것이다.1 물론 세금은 각 개인이 표현한 한계지불의사만큼 걷어야 한다. 린달Erik Lindahl이 제시한 이 상태를 경제학에서는 린달균형Lindahl Equilibrium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론서에 나오는 이 상태는 현실에 없는 이상에 불과하다.2 실제로는 ‘오늘 점심에 뭐 먹지’라는 문제조차 만장일치로 결정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다수결을 주로 활용한다. 다수결은 사회 전체의 만족이 가장 큰 결과를 찾는 방법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비록 ‘다수의 선택을 따르는 것이 항상 정의로운가’와 같은 철학적 이슈는 있을지언정 다수결에 방법적인 문제는 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과연 그럴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다수결의 문제는 표를 세는 과정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용산의 미군이 이전했다고 가정하자. 오래전부터 이 땅은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군이 이전을 하고나니 다른 주장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중에 시민의 공감을 크게 얻고 있는 대안은 대학을 건립하자는 주장과 병원을 건립하자는 주장이다. 정부는 결국 세 가지 대안을 놓고 투표를 진행하기로 한다. 상황을 단순화해서투표자가 청소년, 학부모, 고령자 세 집단으로 구성되었다고 가정하자. 세 집단의 구성원 수는 동일하다. 청소년의 선호는 공원>대학>병원 순이다. 하지만 자녀를 대학에 보내야 하는 학부모의 선호는 대학>공원>병원 순이다. 자식을 다 키운 고령자의 선호는 병원>공원>대학 순이다. 이를 정리하면 <표1>과 같다. 이들을 대상으로 정부는 두 가지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투표를 여러 차례 진행하고자 한다. 먼저 공원과 대학으로 투표를 하면 공원이 선택될 것이다. 청소년과 고령자 두 집단이 대학보다 공원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대학과 병원으로 투표를 하면 대학이 선택되고, 병원과 공원으로 투표를 하면 공원이 선택될 것이다. 결국 세 대안의 순위는 공원>대학>병원이 된다. 사실 세 번째 투표는 할 필요도 없었다. 앞선 두 번의 투표를 통해 순위가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제 정부는 확신을 가지고 미군이 이전한 용산에 공원을 조성할 수 있다. 민성훈은 1994년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 2년간 일했다. 그 후 경영학(석사)과 부동산학(박사)을 공부하고 개발, 금융, 투자 등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2012년 수원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가장 오래 가졌던 직업은 부동산 펀드매니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