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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페르시아 정원과 이슬람 정원
    #81 파라다이스와 사분원의 원작자를 찾아서 ‘파사르가다에’에 가다 지금 이슬람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바로 그 지역에서 ‘파라다이스’라는 개념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동쪽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서쪽의 스페인 안달루시아까지 보석 같은 이슬람의 파라다이스 정원들이 수없이 흩뿌려져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다. 인간의 가슴 속에는 천국과 지옥이 늘 공존해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기후 조건이 가장 험난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한반도의 경우, 봄부터 가을까지 사실상 반도 전체가 낙원과 같았다. 뒷동산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면 낙원이 따로 없었다. 고대 그리스 등 지중해 유역은 물론이고 온화한 기후대의 숲 속에 자리 잡고 살았던 유럽인에게도 자연 환경이 그리 험난하지 않았다. 굳이 사방에 담을 두르고 지하수를 퍼 올려 연못에 물을 대고 큰 나무들을 심어 그늘을 만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살 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낮이면 지옥의 불구덩이로 변하는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정원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지옥 불과 낙원의 개념이 모두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불구덩이와 모래바람을 피해 사방에 담을 두르고 별개의 세계를 구축하려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왜 하필 그런 곳에서 살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시작은 까마득한 옛날,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정주하여 농사를 짓고 부족 국가를 형성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실제 남아 있는 흔적은 기원전 6세기경 고대 페르시아 제국 때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이 지금의 이란이다.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가 합세하여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켰음은 지난달에 이미 언급했다.1 그 후 융성했던 바빌로니아는 다시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했다. 페르시아는 메소포타 미아의 경계를 넘어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서쪽으로는 지금의 터키,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인더스 강까지 이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팽창했다. 이 제국을 건설한 왕이 키루스 2세(B.C. 590년경~530년)였다. 사람들은 그를 대왕이라고 불렀다.구약 성경은 유대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기도 하다. 당시 이웃 나라들의 소식은 물론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강대국의 왕들이 구약에 자주 언급된다. 공중 정원을 지었던 산헤립 왕이나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왕도 여러 번 악역으로 등장한다. 키루스 대제의 경우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의외로 선한 역을 맡았다. 구약에 언급되는 타국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묘사되었다. 바빌론을 정복하고 나서 마침 그곳에 끌려와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도록 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로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바빌론을 항복시켰다고 기록했다.2 이렇게 제국의 주인과 왕조가 바뀌는 사이, 에덴동산보다도 아름답다고 했던 아시리아의 정원이 바빌론을 거쳐 페르시아로 전승되었다. 도시 건설, 건축, 물 관리 기법 역시 물려받았다. 키루스 대제는 현재 이란 남서부 산악 지대의 파르스Fars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첫 수도를 건설했다. 당시에는 ‘파사르가다에Pasargadae’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시라즈에서 약 13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로써 세상의 중심이 동쪽의 이란 고지대로 이전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파사르가다에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유적지로 등재되어 있지만, 담장의 흔적과 궁터, 매머드 사이즈의 기둥, 키루스 대제의 무덤 외에는 남은 것이 많지 않다. 그런데도 조경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바로 이곳에서 이른바 ‘사분원four gardens’의 최초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분원이란, 단어 그대로 해석하자면 하나의 정원이 네개로 분열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으나 반대로 네 개의 정원이 하나로 모였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3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분원을 탄생시킨 페르시아가 동서남북의 땅을 통합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네 개의 강과 네 개의 하늘을 합쳐 웅대한 제국을 이루었노라’는 자랑과 이념이 배어 있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키루스 대왕은 처음부터 정원에 중점을 두고 설계했다. 건물에 정원이 딸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였다.4 가로240m, 세로 200m 규모의 터를 높은 담으로 둘러쌌으며 이 방대한 정원 공간을 여러 단위로 나누고 그 안에 궁궐의 전각을 드문드문 배치했다. 이런 배치법은 오히려 창덕궁 등 동양의 궁궐을 연상시킨다. 큰 전각은 사방을 주랑으로 둘렀으며 작은 건물에는 앞뒤로 거대한 문주를 만들어 붙여 정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했다. 큰 전각들은 왕의 처소 혹은 알현실로 쓰였을 것이고 작은 누각들은 연회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석조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며 전각과 누각을 서로 연결했다. 수로의 중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원형 혹은 사각형의 석조 연못들이 배치되었다. 전각들 사이의 정원은 이렇게 수로가 중심이 된 사분원으로 단정하게 장식했지만, 건물 뒤편의 넓은 땅에는 수렵원을 조성했다. 사자부터 노루, 사슴 등 온갖 사냥감이 득시글거렸다고 전해진다. 이 또한 아시리아로부터 넘겨받은 전통이었다. 키루스 대왕은 소년 시절 수렵원에서 사냥을 해야 한다는 규칙을 무시하고 친구들과 담장을 몰래 넘어가 산에서 사냥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키루스와 그 뒤를 이은 페르시아 왕들의 정원 집착증에 대해서는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가 증언한 바 있다. 페르시아 왕은 가는 곳마다 우선 정원부터 만들고 보았는데 그 정원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과 식물이 가득차 있었다고 했다.5 물론 소크라테스가 직접 글을 써서 남긴 것은 아니고 그의 제자였던 크세노폰(B.C. 430년경~354년경)이 기록으로 옮긴 것이다. 이때 ‘페르시아 왕들의 담 높은 정원’이라는 개념을 그리스어로 옮겨야 했다. 그런데 왕도 없고 담 높은 정원도 없던 그리스에 같은 뜻을 가진 단어가 있을 리 만무했다. 구 페르시아어로는 ‘pairi-daeza’라고 했다.6 크세노폰으로서는 발음을 비슷하게 하여 그리스어로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파라디소스’였다. 우리 조상들이 처음으로 영어를 번역할 때와 흡사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크림’을 ‘구리무’라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후, 약 백 년쯤 지나서 유대인들의 경전 『토라』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때는 아직 기독교가 시작되기 전이었으므로 교회와는 무관하게 순수한 학문적 관점에서 타문화의 ‘고전’을 번역한 것이다. 당시 창세기를 번역하는 데 “하나님이 에덴이라는 곳에 정원을 조성했다”는 대목이 나왔다. 히브리어로는 ‘간 에덴Gan Eden’ 정도로 발음하는 데 이에 또 갖다 붙일 그리스어가 부족했다. 번역해 본 사람은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어려움이다. 문득 예전에 크세노폰이 창조했던 파라디소스라는 단어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이를 가져다 썼다. 그래서 페르시아 왕들의 담 높은 정원이 창졸간에 에덴 정원으로 둔갑하여 구약 성서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조경의 경제학] 공원, 누가 공급할 것인가
    ‘시장’이 공원을 공급할 수 있는가 정부는 공원을 ‘적정하게’ 공급할 수 있는가 우리 정부는 공원의 공급자 역할을 잘 하고 있는가 ‘시장’이 공원을 공급할 수 있는가 어릴 때는 공원이 좋은지 몰랐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1970년대에는 집 근처에 공원이 흔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공원에 관심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나니 어느새 공원이 삶 속에 들어와 있었다. 내 아이가 유모차를 타고 처음 산책을 한 곳은 분당중앙공원이었고, 보조 바퀴를 떼고 처음으로 두발자전거를 탄 곳은 한강공원이었다. 이제 산책을 즐기는 나이가 되고나니 집 뒤에 나지막한 근린공원이 있는 것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공원은 사람들이 집을 고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무심한 사이, 누군가는 꾸준히 공원을 만들어온 것같다. ‘이렇게 좋은 일을 한 그(녀)는 누구일까?’ 공원은 다양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도시인의 여가를 위해 조성되기도 하고, 자연을 보전하기 위해 지정되기도 한다. 근대적 의미의 공원은 권력을 잃은 왕과 귀족으로부터 빼앗은 사냥터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열악한 도시 환경에서 노동자의 생산성을 최소한이나마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가 고안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어두운 기원이 사실일지라도, 지금의 공원은 노동과 자본이 집적된 도시에서 녹색의 허파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조경가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공원의 편익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 좋은 공원을 공급하는 그(녀)는 누구일까?’ 이 글에서 공원public park은 ‘사적으로 소유되지 않고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를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자연공원보다는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조성해야만 공급되는 도시공원에 관심을 둔다. 지난 4회의 연재를 통해 우리는 ‘정원의 경제학’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정원private garden은 ‘사적으로 소유되고 소유자 임의로 사용, 수익, 처분되는 장소’다. 따라서 정원과 공원은 비록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경제학적 특성은 전혀 다르다. 정원은 이윤을 추구하는 누군가에 의해 공급될 수 있지만, 공원에 대해서는 그러한 누군가가 시장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적재화private goods인 정원과 달리 공원은 공공재public goods이기 때문이다. 매우 자주, 때로는 의도적으로 오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공공재다. 부동산 가격이 치솟을 때마다 심심치 않게 들리는 ‘토지와 주택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가격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 사례다. 토지와 주택이 다른 재화에 비해 공공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틀린 말이다. 경제학에 기원을 둔 공공재라는 개념은 상당히 엄격한 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공공재라는 단어의 오용이 심각한 문제인 것은 개념적 혼란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공재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가 사적재화와 다르기 때문이다. 사적재화는 시장기구에 의해 적절히 공급될 수 있지만, 공공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경제학자의 시각이다. 따라서 토지와 주택이 공공재로 취급되는 순간 부동산 시장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따라서 공공재라는 단어는 주의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공공재란 무엇일까? 경제학자는 경합성rivalry과 배제성excludability이라는 두 기준으로 우리 주변의 재화나 서비스를 분류하기 좋아한다. 여기서 경합성이란 어떤 사람이 한 재화나 서비스를 사용하면 다른 사람이 그 재화나 서비스를 사용할 수 없는 성질을 말한다. 내가 풀빵을 먹어버리면 당신은 그것을 먹을 수 없다. 이것을 경제학자는 ‘풀빵에 경합성이 있다’고 표현한다. 배제성이란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특정한 사람들만 사용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막을수 있는 성질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정한 사람들’이란 사용의 대가를 지불한 사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풀빵 장수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풀빵을 먹을 수 없다. 이것을 경제학자는 ‘풀빵에 배제성이 있다’고 표현한다. 다음 표는 경합성과 배제성을 기준으로 분류된 네 가지 재화나 서비스를 보여준다. 민성훈은 1994년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2년간 일했다. 그 후 경영학(석사)과 부동산학(박사)을 공부하고 개발, 금융, 투자 등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2012년 수원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가장 오래 가졌던 직업은 부동산 펀드매니저다.
  • [재료와 디테일] 디딤돌, 장식재인가 바닥재인가
    외부 공간, 특히 조경 공간을 설계할 때 중요한 사항 중 하나는 사람의 이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그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이 사람들이 공간을 어떻게 이용하고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예측하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절대 설계가가 의도한 패턴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또 다른 어려움 중 하나는 방향, 길의 흐름을 잡는 일이다. 사람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으며 필요한 길의 폭을 예측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기본이 되는 기능적인 큰 흐름을 먼저 만들고 작은 흐름을덧붙여 공간과 공간의 연결을 도모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공간을 만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핏줄에 비유하면, 큰 동맥(큰 선)에서 뻗어나간 수만 갈래의 작은 실핏줄이 신체 기관(공간)을 연결하고 분리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본디 길이란 연결하기 위한 것이지분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길이 전체 공간에서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 공간 활용에 부담을 주는 부정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아야 하기에 길 만드는 일은 몹시 예민한 작업이다 공간을 계획하는 디자이너라면 늘 전체 공간을 적절하게 배분해 쓰임이 좋은 공간으로 만드는 데 온 신경을 곧추 세울 것이다.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기 위해 길의 부피를 줄여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간 활용이 쉬우려면 길은 단순히 연결 기능만 수행해야 한다. 디딤돌로 길을 만든다. 이 길은 많은 부피를 차지하지 않으면서 연결 기능을 충분히 수행한다. 길이 부피를 적게 차지하기 위해서는 면이 아닌 점의 개념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에 듬성듬성 놓아 부피를 줄일 수 있는 동시에 연결의 기능을 수행하는 디딤돌은 최고의 효과를 가진 재료다. 견고하며 필요에 따라 쉽게 제거하고 변경할 수 있어 가변적인 재료이기도 하다. 재료의 선정에 따라 다양한 공간 연출도 할 수 있다. 재료 선택의 폭이 이처럼 넓은 설계 언어가 또 있을까.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공간 공감] 국회의사당 사랑재
    20대 총선 직전의 긴장감과 벚꽃의 화사함이 교차하는 시기에 국회의사당을 찾았다. 국회라는 다소 중압적인장소가 상춘객으로 북적거리는 장면도 의외였지만, 더욱이 의원동산 자락 화합의 꽃밭에서 깽깽이풀의 꽃을 무더기로 본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팔도에서 모인 다양한 꽃들의 환대를 받으며 오른 의원동산의 상부에는 너른 평지가 펼쳐졌고 사랑재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재까지 이르는 시퀀스는 ‘화합의 꽃밭 → 의원동산의 경사지 계단 → 너른 마당과 사랑재’의 3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의원동산은 그 높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한강을 볼 수 있는 전망대로서의 기능을 부여받았고, 사랑재 역시 전망의 잠재력이 다분하다. 사랑재 일대를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방식이야 다양하겠지만 우선 떠오른 것은 ‘돌아들어가는 맛’을 부가 하는 것이다. 화합의 꽃밭에서 의원동산으로 곧바로 오르는 동선 대신 경사를 완만하게 즐기면서 사랑재에서 먼 쪽으로 돌아 오르게 하는 방식이다. 낮은 담이나 지형, 식재로 공간을 구분지어 두세 공간으로 나눈 후 사랑재에 다다르게 하면 어떨까? 마지막에 당도한 사랑재에서는 깔끔한 마당과 한강으로의 막힘없는 뷰를 맛볼 수 있게 하고…. 한눈에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화끈함보다는 발품을 팔면서 점진적으로 새로운 장면이 전개되는 방식은 우리의 오래된 공간에서 애용되던 기법임을 상기해본다. _ 정욱주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 [디자인 노트] 갯골에서 찾은 경관 김기천 A Landscape Discovered from Tidal Channel
    시흥시는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프로젝트 경험이 많은 도시다. 얼마 전 공원의 일부를 준공한 배곧신도시의 중앙 및 수변 공원을 비롯해 LH에서 시행한 시흥 은계지구, 그리고 이번 장현지구 조경 설계공모 등에 참여했다. 덕분에 잊을 만하면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변해가는 도시의 모습을 꾸준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시흥에 방문할 때마다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만큼 최근 몇 년 사이에 도시경관적 차원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시흥시는 전략적으로 지역성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이 상당해 도시의 특성이 분명하다. 때문에 대상지의 디자인 방향을 끌어내는 과정이 비교적 빨리 진행됐다. 갯벌 담은 공원 시청과 서해 바다의 초입을 연결하는 갯골길(늠내길 2코스), 긴 언덕인 장현長縣, 새재마을 등의 지명은 갯골, 갯등, 언덕 등 고유의 자연 환경에서 비롯됐다. 이 자연 요소를 디자인 언어로 삼아 설계를 진행했다. 과거의 지명인 ‘잉벌노仍伐奴’는 뻗어나가는 장소라는 뜻이며 ‘늠내’는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다. 드넓은 경작지를 통해 물과 뭍으로 열려 있는 풍경은 시흥시의 경관적 특징과 스케일을 보여 준다. 현장 답사 때 둘러본 대상지는 좁은 폭 때문에 실제보다 협소해 보였다. 폭은 좁고 길이는 긴 개별 공원 부지에 기능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안 그래도 좁아 보이는 공원이 더욱 작게 느껴지리라 생각됐다. 통일된 디자인 언어를 바탕으로 대상지가 하나로 읽혀야 장현천을 중심으로 한번에 읽히던 개발 전 경관의 스케일이 유지될 수 있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공원의 상징성과 존재감을 위해서도 일체화된 디자인 언어는 필수적이었다. 김기천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룹한에 입사하여 현재 전략디자인본부를 맡아 이끌고 있다. 2007년 행정중심복합도시 국제 공모전 이후 현재까지 국내외 다양한 형태의 도시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작업으로는 서울대공원 재조성, 시흥 군자 배곧신도시 수변 공원, 브루나이 워터프런트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공공 오픈스페이스를 통한 도시 환경의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 [칼럼] 뻘 비치를 사뿐하게 누볐다 Column: Running a Practice Is Just Like Walking on the Mud Beach
    시대가 변했고 가치도 변했다 내가 조경학과에 다니던 시절은 피터 워커와 그의 후학 조지 하그리브스로 대표되는 ‘개인’의 선구적 프랙티스에 매료되었던 시절이다. 그리고 소위 ‘조금 한다’는 학부생들은 설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내 사무실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부터 이렇게 자라고 있었다. 설계사무소를 연다는 것을 ‘창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색한 이유는, 이 일을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며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워커나 하그리브스가 비즈니스 면에서도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그 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한국에서 적용하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많지 않았다. 시장의 크기, 수주 구조, 계약과 지불 등 모든 면에서 한국과 미국은 달랐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취직할 곳이 없어 경계 없는 국경을 넘어 쏟아져 들어오는 인턴들로 넘쳐나는 네덜란드도 아니었다. 2006년에 서울에서 사무실을 열기는 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일을 수주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고, 사실 지금도 잘 모른다. 우연한 계기로 일이 생겼고,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클라이언트를 소개 받았다. 이런 불확실성을 관통하여 지금까지 10년을 버티어 냈으니, 한편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하다. 오피스박김의 지난 10년을 뒤돌아보면, 당시에는 힘겨운 시도 혹은 실패로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적 역량이 축적되었고 우리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안내하였다. 그간 남겨 놓은 텍스트를 묶어 단행본으로 출판하자는 의견에 공감하게 되어 올 가을에 그 축적물이 책으로 나올 예정이고, 오피스박김 후학들을 중심으로 랜드스케이프의 미래Landscape for Tomorrow를 조망할 작은 컨퍼런스를 준비 중이다. 앞으로 10년의 미래 역시 불분명하겠지만, 계속 도전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있는데, 나부터가 일을 제대로 해서 제대로 지어야 우리의 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고, 이러한 것들이 쌓이다 보면 우리의 후학들이 지금의 오피스박김 보다 조금이라도 더 수월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다. ‘돈 주고 조경 설계 처음 맡겨 본다’는 분들이 여전히 있고, 이런 클라이언트의 ‘계몽’ 역시 우리의 일이다. 사실 사명감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생존을 위한 반사 작용이기도 하다. 스스로 우리의 것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과연 누가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인가? 어느 주말, 우리 집 강아지 마리와 함께 양화한강공원에서 왕복 4km를 뛰었다. 뛰면서 돌아본 주변에는, 나만큼이나 고된 한 주를 보냈을 것으로 짐작되는 어느 가장이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잔디 사면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고, 휠체어를 탄 어느 중년은 한강물이 찰랑대는 강가까지 내려가 하염없이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다리는 당시 공원 설계와 시공을 회상하며, 갈대지형과 사석호안그리고 뻘 비치를 사뿐하게 누볐다. ‘세상에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하는 생각은 또 그 후 한동안 진격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아직 일천하여 의견 개진이 매우 조심스러우나, ‘창업’에 관한 기획 의도를 존중하며 소견을 밝히자면, 한국에서 설계사무소를 여는 것을 굳이 장려하고 싶지도, 그렇다고 말리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들은 있다. 먼저, 너무 빨리 열려고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설계를 하다가 자기 사무실을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그때 열면 된다. 르네상스 이후 별로 변한 것이 없는 설계라는 직능은 가장 고전적인 업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개업 초기의 열정도 좋지만 대형 회사에 소모되지 않고 직원들 월급 안 밀리려면 현실을 이겨 낼 수 있는 명확한 대차 대조표가 있어야 한다. 원한다면 때는 언젠가 올 수 있다. 그러나 오지 않더라도, 사무소에서 일하되 소장처럼 일하면 된다. 그렇게 주인처럼 설계하다 보면 자연히 어떤 위치에 있던 소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훈수에도 심장박동이 느려지지 않는다면, ‘주변부’를 주목하기 바란다. 설계라는 중심 영역 대신 이와 관련된 새로운 외연을 탐험하는 것도 개척자의 특권이다. 우리가 여전히 조경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도입 4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 개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공자 역시 “부귀가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을 잡고 말을 모는 사람 노릇이라도 하겠지만 만약 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겠다”라고 하니, 나의 발걸음이 양화의 뻘 비치를 사뿐하게 누빌 수 있나 보다. 김정윤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 GSD 졸 업 후 네덜란드 West 8 등에서 실무를 쌓았다. 치치 지진 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당선을 계기로 박윤진과 함께 오피스박김을 설립했다(2004). 네덜란드 조경건축사이며 바허닝엔 대학교에 출강했다. 차세대디자인리더(산업자원부 2007), 광교공원 디자인커미셔너(2008), 서울형공공건축가(2011)로 선정되었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놀튼 건축대학원이 선도적 조경가에게 수여해온 글림처특훈교수(2011)로 임명되어 강의했다. ‘양화한강공원’, ‘광교신도시 공원시스템’, ‘SBS 프리즘 타워’, ‘현대캐피탈 배구단 캠프’, ‘CJ 광교통합연구소’ 등 공공과 민간 영역을 넘나드는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 [에디토리얼] 그들의 참신함을 응원한다 Editorial: For Their New Start
    강의실이나 작업실이 아닌 내 연구실에서 학생 설계안 크리틱하는 일, 대학원생 논문 지도하는 일, 가끔 찾아오는 졸업한 제자와 대화하는 일을 나는 ‘외래 본다’라고 총칭한다. 물론 그들을 환자 취급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유 있게 호흡하며 이야기 나누지 못하고 종합병원 의사처럼 분초를 다투며 대하는 나 자신을 반성하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모든게 새로 시작되는 계절인 탓일까. 이번 봄에는 정말 많은 외래를 봤다. 학업 상담, 진로 상담, 인생 상담이 줄을 이었다. 그중 몇 가지 이야기를 간추려 옮긴다. #1. 고3 티가 여전한 한 신입생. 놀랍게도 중학생 때부터 조경가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한다. 어느 ‘미드’의 배경으로 나온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매료됐고, 몇 번의 클릭으로 그곳의 설계자가 캐서린 구스타프슨임을 알아냈다고 한다. 마사 슈왈츠에게도 강한 팬심을 느끼고 있다 한다. 놀란 내 표정에 고무되어 어떻게 하면 그들 같은 스타 조경가가 될 수 있는지 돌직구 질문을 날린다. 말문이 막힌다. 글쎄, 많이 보고 읽고 그리며 안목을 기르라는, 하나마나한 답을 우물거린다. #2. 3학년 미학 시간에 눈에 띈 한 낯선 남학생. 언제 제대했는지 묻자 이번에 복학한 건 맞는데 군대를 다녀온 게 아니라 2년간 휴학하며 창업 동아리활동에 전력을 쏟아 부었다 답한다. 내성적인 인상이지만 말문이 트이자 미래의 사업 계획이 줄줄 쏟아진다. ‘생태적 디자인으로 지구와 인류를 구하는’ 기업을 고등학교 때부터 구상해 왔다고 한다. 포어스ForEarth.ForUs라는 사명도 미리 지어놓았다고. 뭐라 내가 말을 보탤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관심과 응원의 미소면 충분. 생태학과 상상력을 함께 다룬 책 몇 권을 소개. #3. 수시 입시 면접 때부터 대학원생급 전공 지식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한 4학년 여학생. 학년이 올라가며 설계 스튜디오는 물론 이론 과목에서도 빼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고 공모전 수상도 다수. 졸업 후의 계획을 묻자 명문 디자인 스쿨로 유학 가서 도시설계를 전공해 사회적 기여를 하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엉성하고 허약한 조경판이 못마땅하거나 불안한가 보다. 상담의 제1원칙은 잘 들어주는 것임을 알지만, 아까운 인재 하나 놓칠 판이니 적당히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다 안하려고 할 때 하면 100미터 달리기 혼자 하는 것처럼 쉽지 않을까. 늘 고상한 척 하는 교수가 평소와 달리 현실적으로 접근하자 다시 생각해 보겠다 한다. 갑자기 책임감 비슷한 게 생긴다. #4. 비교적 늦은 나이에 유학해 조경학 석사를 마치고 유명 설계사무소에서 2년여 일하다 돌아온 삼십대 중반의 제자. CG 숙련공 역할만 반복하다 보니 세계 최고의 오피스라는 간판에서도, 뉴요커 생활의 그럴싸한 허세에서도 만족감을 얻지 못했다한다. 비슷한 처지로 십 년씩 버텨온 선배들 그림자를 밟느니 열악하더라도 한국 조경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게 낫겠다 싶어 미련 없이 짐을 쌌다고 한다. 돌아오니 광야에 던져진 것처럼 막막하다는 그에게는 오백 몇 잔이 답이다. 책임질 수 없어 주저했지만 취기를 빌어 독립을 권했다. 자, 건배사, 내가 ‘독’하면 넌 ‘립’하는 거다. #5. 대학원 졸업 후 신생 설계사무소에 들어가 근십 년을 묵묵히 버텨 온 제자. 세상 잘 읽는 영민한 친구들이 줄줄이 설계 일을 접는 중에도 말없이 설계실을 지키며 집중해 온 그, 제자지만 존경한다. 그런 그가 요즘 조금 흔들리나 보다. 보수나 근무환경 탓이 아니라 한다. 십 년 하면 뭔가 통찰력 있는 디자인 감각이 생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란다. 앞으로 십 년 더 한다고, 그러다 오십대가 된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음을 절감한다고 고백한다. 언젠가 자신의 사무실을 열어 따뜻한 공간, 좋은 환경설계하는 걸 꿈꾸지만 그럴 수 있을지 의심된다며의기소침. 괜찮아, 조금 더 가면 길이 나올 거야. 내말이 형식적으로 들렸을 테지만, 분명히 진심이다. 테이블에 빈 맥주잔이 가득 찬다. 얼핏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키워드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하는 일’과 소통하고 또 ‘잘 하는 일’과의 교점을 찾는다면 그들은 앞에 마주친 두꺼운 벽을 유연하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생각이 선생들처럼, 선배들처럼 진부하지 않고, 참신하기 때문이다. 막 자신의 작업 공간을 꾸려 독립한 삼십대 조경가 아홉 명의 이야기를 다룬 이번 달 특집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을 기획하며 여러 젊은 조경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맥주 살이 더 늘었음은 물론이다. 경험해 보지 못해서인지 나는 ‘창업’이라는 두 글자에 심한 중압감을 느낀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았다. 설계 배우고 설계해오면서 늘 가졌던 꿈이 이제 현실로 다가왔을 뿐이라고 한다. 누구는 우연한 기회에 갑자기, 누군가는 몇 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시작한 차이가 있을 뿐. 그들에게서 발견한 또 하나의 공통점은 태도와 작업 방식의 참신함이다. 그 참신의 바탕에는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잘 하는 일의 행복한 동거가 있었다. 그들과 만나고 돌아와 참신斬新의 뜻을 사전에서 확인해 봤다. 새롭고 산뜻하다. 그런데 ‘참斬’자의 유래가 예사롭지 않다. 고대 중국에서 죄인을 죽이던 극형 틀인 수레와 도끼로 이루어진 글자다. 참신이란 과거를 도끼로 치는, 완벽한 단절을 뜻하는 말이다. 참신함을 유지하는 일은 더 어렵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참신은 진부가 된다. 진부陳腐. 사상, 표현, 행동 따위가 낡아서 새롭지 못함. 썩은 고기腐를 남들 보라고 전시陳한다는 뜻이다. 어렵게 구한 고기를 자랑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꺼내 보여주다 보면 고기는 썩고 악취가 난다. 고기주인은 썩은 고기에 익숙해져 고약한 냄새가 나는지도 모른다. 교훈과 계몽으로 흘러버린 글, 한 번 더 막 나가며 맺는다. 한국 조경 40년, 그러나 아직 걸음마 단계다. 미숙하다. 새로운 시작, 당신들의 영토가 무한히 펼쳐져 있다. 진부함을 경계하고 참신함을 이어가길 당부한다.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누구에게나 시작은 있다
    한참을 망설였다. 분홍빛이 살짝 도는 여린 꽃잎이 마치 겹겹이 두른 여인의 농염한 치맛자락처럼 화려한 작약과, 한 달쯤 물을 안 주어도 끄떡없이 늘 푸르름을 선사할 스투키 사이에서 한동안 움직이기 힘들었다. 결국 스투키 화분을 옆구리에 끼고서 아쉬운 발걸음을 L의 사무실로 향했다. 실용주의자인 L은 “꽃은 금방 시들 잖아”하며 스투키를 반겨주었다. L은 공동으로 쓰던 사무실이 문을 닫게 되면서 의도치 않게 개인 사무실을 열게 되었다. 한동안 집 서재를 사무실로 꾸밀 것인지 고민하다가 얼마 전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 계획된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닥치니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며 고객 유치를 위한 궁리로 부산한 눈치였다. 특히 새로 마련한 공간이 비좁다며 엄살을 떨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가구 배치계획을 들려주곤 했다. 작은 공간이지만 자기 자리를 찾아간 화분을 보니 지난달 창업 특집(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을 위해 찾았던 강연주 소장과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사실 번듯한 사무실 공간을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직원을 뽑은 것은 회사를 만들고 1년쯤 지났을 때다. 당시 자리를 빌려 쓰던 사무실에서 나오게 되면서 신혼집 거실에 책상을 놓고 직원들 한두 명을 불렀다.” 강 소장의 마지막 말은 나를 순식간에 30년 전으로 데려갔다. 지금은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이사 후 갓 생긴 내 방이 다시 없어지고 동생과 한 방을 쓰게 된 것이 불만스러웠던 것 같다.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어느 날 얼굴이 하얀 아저씨가 “오늘부터 매일 올 거야”라고 말하던 장면이다. 그리고 집에서 넘쳐나는 청사진 뒷면에 그림을 그리던 기억, 버스 타는 법을 교육시킨다며 청사진 굽는 가게에 혼자 보냈던 아버지의 심부름을 완수하지 못해 울면서 돌아왔던 장면들이 끊어진 필름을 이어붙인 듯 재생되었다. 아버지가 창업했을 때가 당신 나이 40일 때였다. 당시 어렸던 나는 집에서 설계사무소를 시작했던 아버지가 이상하게 느껴졌고 그런 인상은 그대로 내 안에 봉인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번듯한 사무실을 열었고 그 후로 오랫동안 크고 작은 부침을 겪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러한 부침 가운데서도 ‘설계’를 고집하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그것을 대물림하려는 바람은 끝까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사업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차분한 목소리로 창업 당시를 설명하는 강 소장을 바라보며 기억의 빗장이 풀리고 지금 내 나이가 30년 전의 아버지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업 전선에 뛰어든 이래로 나에게 창업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제 주변의 가까운 선후배들이 사무실을 열거나 창업 계획을 세우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소심한 월급쟁이인 나는 지인들이 새로 오픈하는 사무실을 보면, ‘저 임대료를 감당하려면 일을 얼마나 해야 할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혹은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 당당하게 뛰어드는 (혹은 떠밀려가든) 그들의 용기가 부럽기도 하다. 심리 상담을 업으로 하는 L은 이런 나의 넋두리를 듣더니 엷은 미소를 지었다. “용기의 임계점은 변화의 시작이야. 용기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변하기 싫다는 거고. 대신 남이 변하길 바라지.” “망설인다는 것은 회피인 거로군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또 피하다보면 고여서 썩게 마련이지.” “흔히 ‘창업한다’를 ‘독립한다’고 표현하잖아요.” “그래, 독립은 새로운 시작이지.” “지난 달 칼럼에서 김정윤 소장이 ‘사무소에서 일하되 소장처럼 일하면 된다. 그렇게 주인처럼 설계하다 보면 자연히 어떤 위치에 있던 소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도 창업만큼 주도적인 삶을 말하는 듯해서 인상적이었어요.” “그 집단에서 자아가 독립했다는 의미지.” “이제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요(웃음)” “음. 용기를 낼 때 말이야. 접어야 할 것과 접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아는 게 아닐까?” “어렵네. 그런데 용기인줄 알았는데 객기일 수도 있잖아요.” “용기는 미래를 예측하는 거고, 객기는 예측을 하지 않는 거지. 용기가 낙천이라면 객기는 낙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전체로 볼 때와 하나의 점으로 볼 때의 차이가 있어. 전체로 받아들이면 용기가 없어지지만 멀리서 점으로 보면 용기가 생겨. 지금의 실수도 멀리 보면 과정이거든. 점들이 모여 삶이 되는 거니까, 멀리서 보면 용기를 못 낼 이유가 없어. 근데 말이야, 저 화분은 창가에 놓는 게 더 어울리지 않아” 그날 우리는 옥상 달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 수다를 떨었다. L은 주변 아파트 단지의 불빛을 가리키며, 주민들을 모두 고객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들려주었다. 30년 전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래를 낙관했을까, 혹은 변화가 두렵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두렵지만 용기를 냈던 걸까? 이번 달 칼럼이나 오피니언 란에 도착한 독자편지를 보면 지난 창업 특집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창업을 앞둔 이들 뿐만 아니라 학생과 직장인들, 그리고 오래 전 창업했던 선배들까지.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변화를 도모해야 할 순간이 언제인지 고민하고 시작을 망설인다.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나를 포함해 용기 있는 독립을 꿈꾸는 많은 이들을 응원한다.
  • [편집자의 서재]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Editor’s Library: Hallo?-er det noen her?
    때 이른 더위가 서울을 덮쳤다. 지난주에는 32도를 웃도는 날씨에 올해 첫 폭염 주의보가 발령되기도 했다. 굳이 최고 기온을 확인하지 않아도, 출퇴근길에 만나는 사람들의 가벼워진 옷차림과 태양의 열기에 익어 말랑말랑해진 아스팔트 도로가 여름이 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낮도 길어졌다. 퇴근 후, 집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해 역사를 빠져나갈 때면 어두웠던 하늘이 전보다 밝아졌다.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오기 전의 초여름 밤은 가을 날씨와 비슷하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점점 마음이 급해진다. 낮이 길어져 밤이 짧아진 데다가 열대야가 찾아오면 사라져 버릴 이맘때의 여름밤이 문득 아까워지는 것이다. 요즘엔 땀이 나도 집으로향하는 계단을 뛰어서 오를 때가 많다. 서양에서는 예로부터 한여름 밤—일 년 중 가장 낮이 긴 하지의 전날밤—에 신비로운 일이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고 셰익스피어는 이에 착안해 『한여름 밤의 꿈』1을 썼다. “깊은 밤 아름다운 그 시간은 이렇게 찾아와 마음을 물들이고 영원한 여름밤의 꿈을 기억하고 있어요. 다시 아침이 와도 잊히지 않도록”2이라고 여름밤을 몽환적으로 묘사한 김현식의 노래가 수차례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름밤에 진행되는 각종 행사의 홍보 문구에 ‘환상’이라는 단어가 곧 잘 쓰이는 걸 보면, 꽤 많은 사람이 여름밤에 신비로움을 느끼는 모양이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의 주인공인 요아킴도 여름밤의 기이함에 대해 알고 있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요아킴의 동생을 임신한 어머니가 출산이 임박해 아버지와 함께 집을 비운 사이 믿을 수 없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곧 태어날 동생에 대해 생각하며 밤하늘을 바라보던 요아킴은 어둠을 쏜살같이 가로지르는 별똥별하나를 발견한다. 뒤이어 정원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정원의 사과나무를 살펴보니, 놀랍게도 외계인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삽화에 표현된 외계인 ‘미카’의 외양은 영화 ‘이티E.T.’의 외계인과는 조금 다르다. 머리카락이 없고 머리가 몸보다 상대적으로 크지만, 팔다리의 길이나 눈, 코, 입의 형태와 위치 등이 사람과 상당히 비슷하다. 무엇보다 미카에게는 손가락 끝을 통해 상대의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이 없다. 대신 미카는 유창하게 지구의 말(정확히는 노르웨이어)을 구사할 줄 안다. 미카는 자신을 보고 혼란에 빠진 요아킴에게 태연하게 묻는다. “너는 누구니?”3 책의 저자인 요슈타인 가아더Jostein Gaarder는 철학 입문 소설로 불리는 『소피의 세계』의 작가다. 『소피의 세계』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무거운 주제를 쉽게 풀어냈던 그의 능력은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그는 주인공 요아킴과 외계인 미카의 대화를 통해 우주의 탄생과 인간의 역사, 삶의 가치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심오한 물음의 답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 초반의 미카와 요아킴의 대화는 독자에게 열린 마음으로 책을 읽어줄 것을 은근히 요구한다.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미카는 요아킴에게 왜 물구나무를 서있냐고 묻는다. 요아킴은 황당해하며 미카를 땅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미카는 자신이 거꾸로 요아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어 미카는 달에 갈 때 위쪽으로 여행하는지, 아래쪽으로 여행하는지 묻고 요아킴은 자신 있게 위쪽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넌 달에 내릴때 달 표면으로 날아와 앉잖아”, “그리고 네가 그 곳에 가 있을 때는 이 지구를 올려다보잖니”, “그럼 이 별과 달의 중간 어딘가에는 아래가 위가 되고 위가 아래가 되는 데가 있겠네”4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미카의 질문에 요아킴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게 맞다고 답한다. 단순히 보자면 ‘중력’이라는 과학적 개념을 깨닫게 하는 대화지만, 이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방법과 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사실도 함께 다루고 있다. 이 둘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져 ‘진화론’에 다다른다. “그렇지만 우린 다른 별에서 왔는데 이처럼 닮았다는 게 이상하지 않니”5라는 대목에서 미카의 생김새가 사람과 비슷하게 설정된 이유를 깨닫게 된다. 둘은 눈과 코, 입, 귀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더 나아가 온 우주의 생명체는 하나의 지점을 향해 진화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비록 산 꼭대기로 오르는 길은 많을지 모르지만 산은 하나야. 우리가 많이 닮은 이유는 우리 각자가 산을 오르는 사람이기 때문일 거야. 우린 그 곳에서, 그 산 꼭대기에서 함께 커다란 기념비를 세울지도 몰라”6 요아킴의 부모님이 요아킴의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미카는 한여름 밤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다.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은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자는 동안에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단다”7는 요아킴의 말처럼 그날 밤의 일이 꿈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책을 통해 요아킴과 미카를 만났고 그들의 대화를 통해 생명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벌써 6월이다. 1년의 반이 흘렀고 자연스레 지난 반년을 뒤돌아보게 된다. 알찬 시간을 보낸 이에게는 즐거운 일일지 모르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삶을 평범하다고 느끼며 자신이 아무 쓸모 없는 존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에게 힘이 될 만한 미카의 말을 전한다. “그냥 돌멩이라고? 이 세상에 있는 건 아무것도 평범하지 않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모두 그 커다란 수수께끼의 일부분이니까. 너와 나도 마찬가지야. 우린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수수께끼야.
  •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시대에 반응하는 몸 Wandering Eyes, Curator's View: Bodily Reactions to an Era
    붕괴로부터 저항의 몸으로 몸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세기말적 불안과전환 속에서 몸은 여러 화두로 전개되었다. 당시 미술계에서는 몸과 욕망, 몸의 풍경,몸의 정치학, 몸의 변형과 확장 등을 소재로 한 전시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2010년이 넘어가며 몸은 예술의 주된 화두에서 사라져 가는 듯 했다. 사회적 침체,경제난, 재난, 파국 등 연일 반복되는 충격의 상황에서 몸이 더 이상 도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반응하는 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존재해 왔다. 최근 몸의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몸짓은 미미하나 거센 진동으로 감지된다. 수동적 몸의 저항: 히지카타 다쓰미-방언 얼마 전 광주에 다녀왔다.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예술극장에서 ‘히지카타 다쓰미-방언’(5월 6일~8일) 프로그램을 보았다. ‘히지카타 다쓰미-방언’은 1960년대 일본의 전후 사회적 암흑기에 탄생한 ‘부토舞踏’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조명한다. 당시 일본의 암울한 정치ㆍ사회적 상황에 가역적으로 반응한 히지카타 다쓰미HijikataTatsumi(1928~1986)는 쇠약한 모습으로 무대 위에 쓰러져 다시 서지 못하는 수동적인 몸을 격하게 보여주었다. 마치 나병 환자와 같이 허물어지는 그의 몸은 주저앉은 채로그 움직임을 이어나간다.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지고 있는 인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고 있는 인간,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지고 있는 인간… 이런 완전한 수동성에는, 그럼에도불구하고, 인간적 자연의 바이탈리티가 역설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분명하다.” _ 히지카타 다쓰미, 형무소로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건축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송원아트센터, 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송원아트센터, 2014), ‘Hidden Dimension’(갤러리 스케이프, 2013)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갤러리 스케이프 책임큐레이터, 갤러리킹 공동디렉터,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2015년 동북아시아 도시 리서치(예술경영지원센터 후원)를 진행했으며,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