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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헤일, 시저!
Cinema Scape: Hail, Caesar!
나는 비디오 가게에서 어떤 영화인지 모르고 첫 번째 칸부터 차례로 비디오를 빌려보던 시절부터 코엔 형제 감독의 팬이었다. 그들의 초기 영화인 ‘아리조나 유괴 사건’(1987)은 여러 번 봐도 재미있다. 코엔 형제 특유의 코미디 코드가 나와 맞았는지 사소한 장면에도 배를 잡고 웃었다. 최근 그들의 영화는 무거워졌고 잔혹해지기도 했지만 이번 ‘헤일, 시저!’(2016)는 코미디에 가깝다. 다시 그들의 초창기 영화에 반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해서 반갑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는 가볍지 않다. 할리우드 영화에 종사하는 이들의 민낯과 이들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대형 영화 제작사 매니저의 27시간을 통해 대중문화인 영화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대 배경은 할리우드 시스템이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에 접어드는 시점인 1950년대 초다. 한창 잘 나갈 때는 사람이든 사회든 사유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도 없지만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 되면 기존 노선에 반기를 드는 집단이 생기고, 새로운 비전을 가진 혁신이 밀려온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움을 받아들일 것인가. 고된 현재를 유지할 것인가.
세계 대중문화를 이끄는 대형 영화 제작사의 총괄 매니저가 하는 일은 허접하기 짝이 없다. 그의 일과는 새벽부터 멍청한 배우가 친 사고를 수습하는 일로 시작된다. 진행 중인 촬영과 편집을 점검하는 기본 업무 외에도 수중 발레극 주인공의 임신 문제 같은 배우의 사생활도 해결해야 한다. 뉴욕의 사장은 서부 영화 전문 배우를 드라마 주인공으로 낙점하는데 감독은 그의 ‘발 연기’에 결국 폭발하고 영화사 대표 에디 매닉스(조슈브롤린 분)에게 불평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대형 시대극 ‘헤일, 시저!’의 주인공이 가장 중요한 라스트신을 앞두고 납치당한다. 이런 문제들에 봉착한 그의 주변에는 쌍둥이 기자가 기삿거리를 캐내기 위해 번갈아가면서 나타나 그를 괴롭힌다.
코엔 형제다운 유머는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헤일, 시저!’의 종교적인 부분에 대한 사전 검토를 위해 자문 회의를 개최하지만 계파를 대표하는 종교인들은 엉뚱하게도 신의 본질에 대한 논쟁만 한다거나, 납치당한 주연 배우가 약 기운에서 깨어날 때 문 밖에 들리던 무시무시한 기계 소음이 알고 보니 청소기 소리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몸값인 10만 달러를 마련했지만 가방이 작아서 잘 잠기지 않아 애를 쓰는 모습도 웃음을 자아낸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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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중세, 정원의 암흑 시대였나?
History of Landscape Architecture with 100 Scenes: Was the Medieval Age the Dark Age of Gardens?
#84
중세와 이상도시 - 성 갈렌 수도원의 설계도
“너희 동양인들이 최고의 문명 수준을 누리고 있을 때 우리는 아직 원숭이처럼 나무에서 살고 있었어.” 독일 친구들로부터 여러 번 들었던 말이다. 물론 심하게 과장된 자기 폄하적 발언이지만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 등 현재 유럽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국가들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이슬람 문화는 유럽 대륙을 빙 둘러 감싸며 전개되었다. 주변에서 고대문명이 나타났다 스러지는 동안 유럽 대륙은 문화의 블랙홀이었다. 아시리아의 공중 정원, 페르시아의 파라다이스를 거쳐 주옥같은 이슬람 정원이 만들어지고 있을 때, 유럽 대륙의 정원은 아직 태동도 하지 않았다. 정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정원은 먹고살기 위한 필수 품목이었으므로 사방에 존재했다. 다만 현대인이 기대하는 정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정원, 즉 아름다운 휴식 공간, 도시 속의 자연, 혹은 장식 정원 등에 부합하는 개념이 없었을 뿐이다. 중세에는 정원이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쓰였고 때로는 몹시 모호했다. 현실적인 개념과 상징적인 개념이 나란히 공존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는 와일드한 자연을 일궈서 얻어낸 결과물을 모두 정원이라고 했다. 우리의 밭에 해당한다. 채소밭, 약초밭, 사과밭 등이 그들의 정원이었다. 중세는 기독교가 삶의 구석구석까지 지배했던 시대다. 죽은 뒤 돌아가게 될 천국의 정원과 이 세상의 정원을엄격히 구분했다. 이슬람 정원처럼 하늘나라의 것을 미리 앞당겨 이 세상에 재현해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중세 유럽인들에게는 성당이 바로 하늘을 대신하는 곳이었다. 성당에 들어서면 우선 전실을 통과해야 하는데 바로 이곳을 파라다이스라고 불렀다. 중세 기독교의 파라다이스는 의외로 정원이 아니었다.
5세기 말엽, 게르만족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중부 유럽의 주도권을 차지했던 시점. 거기서부터 고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를 중세라 한다. 고대의 게르만족은 짐승 털과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농경 생활을 했으며 나무를 신으로 모셨고 많은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뛰어난 전사였다. 이 전사들이 로마를 멸망시킨 뒤 나라를 세우고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제 막 자리 잡아가는 국가적 체계를 지속가능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종교가 필요했다.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합당해 보였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로마 제국의 멸망, 유럽 패권의 북상, 그리고 전쟁. 이렇게 부산했던 중세 초기는 예쁜 정원을 만들기에 적합한 토양이 아니었다. 게르만족의 프랑크 왕국이 로마 문화를 계승했다고는 하나, 아직 문화 생활을 할 수준은 아니었다. 중세의 사회는 기사, 수도사, 농부의 세 계층으로 이루어졌다. 기사는 국가의 안보를 담당하는 전사들이었고 그들의 우두머리가 왕이었다. 농부는 양식을 생산하여 모든 사람을 먹여 살렸다. 수도사에게는 가장 복합적인 역할이 주어졌다. 이들의 본업은 영혼을 구제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지만, 그 외에 학문과 기술의 연구, 교육, 질병의 치료도 이들의 몫이었다. 왕과 기사들이 대개 문맹이었으므로 왕실에 출장을 나가 사무와 재무를 돌보는 것도 수도사들의 과제에 속했다. 그러므로 수도원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어마했다. “왕과 그의 무리는 수 세기 동안 전쟁에 길든 전사였다. 게다가 왕들은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이 역시 중세만의 특징이었는데 새로획득한 영토의 통치권을 확립하고 백성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으며 또한 변방이 늘 시끄러웠기 때문에 왕은 말과 수레에 부하와 식솔을 태우고 이 지방에서 저 도시로 떠도는 생활을 했다. 왕실만 떠돌았던 것이 아니다. 황제가 큰 원을 그리며 떠돌았다면 영주들은 각자 자기 영토에서 작은 원을 그리며 돌았다. 그리고 그 사이를 수많은 상인이 떠돌았고, 수도사들과 순례자들이 떠돌았으며, 기술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돌았고, 도적들이 떠돌았고 기사들이 전쟁과 모험을 찾아 떠돌았다. 심지어는 농부들도 떠돌았다. 바이킹에 쫓겨 남쪽으로 가고, 북에서 오는 낯선 사람들을 피해 서쪽으로 가고, 새로운 농지를 찾아 동쪽으로 갔다. 10세기까지 중세는 이렇게 번잡한 시대였다. 이렇게 부산하던 시대에 유일하게 부동의 정점을 이루었던 곳이 수도원이었다. 당연히 수도원에서 정원이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1
수도원에는 두 가지 유형의 정원이 있었다. 하나는 실용 정원으로 의약을 생산하는 약초원이 핵심을 이루었고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므로 방대한 농경지와 저수지 및 과수원을 소유했다. 이들은 속세에 속하는 곳이었다. 한편 수도원에는 세속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별개의 공간이 있었다. 대개 성당 동쪽에 수도사들의 거처가 붙어있었는데 그곳의 중정은 사제들만의 공간이고 신성한 곳이었다. 이를 ‘클로이스터cloister’라고 했다. 기독교의 성당과 수도원 건축은 새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 고대 다신교 시절의 신전 건축에서 출발했다. 본래 존재했던 비너스 신전이나 이시스 신전에서 주인을 몰아낸 뒤 그 안에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성당으로 썼던 것이다. 기독교가 동쪽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전파되었으니 전달 루트를 따라 소아시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신전들이 먼저 성당으로 탈바꿈했고 그 곳에 최초의 수도원들이 설립되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건축 양식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오리엔트와 지중해 지역의 특징적 건축, 즉 주랑으로 둘러싸인 ‘ㅁ’자 형태의 건축이 수도원 건축 양식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팔라이스트라2나 로마의 페리스틸리움3을 기억할 것이다. 원칙은 그와 같지만 용도가 달라지니 이름도 새로워져서 클로이스터라고 불렀다. 클로이스터는 본래 사제들의 통행 공간이었으므로 기능에 맞게 잔디를 깔거나 석재로 포장했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보나 정원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중앙에 분수나 우물을 두고 자연스럽게 사분 정원이 자리 잡아갔다. 지금은 클로이스터를 정원과 연결 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중세에는 아무도 이곳을 정원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만큼 중세의 정원 개념이 지금과 달랐다는 뜻이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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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질리언스 읽기] 21세기 패러다임의 변화, 지속가능성을 넘어 리질리언스로
Reading the Resilience: Beyond the Sustainability
지속가능성의 두 얼굴
1990년대 이후 국제 사회가 주장하고 있는 ‘지속가능한 성장’은 매우 모순적인 용어다. 지나친 경제 개발과 무분별한 환경 파괴로 촉발된 이 용어에는 사회·경제·환경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선량한 인간’과 자원을 착취하는 ‘교활한 인간’의 모습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특히 ‘교활한 인간’은 친환경 기술이라는 명목으로 고효율의 녹색 기술을 개발하여 자연 자원을 착취했으며, 착취한 자원의 이용을 통해 인간 사회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자원에 대한 비용을 자연에게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으며, 이는 자연 자원 고갈을 비롯한 기후 변화, 자연 재해 등을 초래했다. 즉, 우리 사회는 현재 닥친 위기의 핵심을 보지 않았고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여 안일하게 대처했다. 그 결과, 오늘날 인간 사회는 오히려 ‘지속불가능한 성장’에 갇혀 경제 침체, 생태계 붕괴 등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현대 과학 패러다임으로의 혁명을 일으켰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기존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그는 ‘빛=파동’이라는 물리학계의 정설을 뒤엎고 ‘빛=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안했으며,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때까지 풀리지 않았던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 인류에게 닥친 새로운 위기도 ‘지속가능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현재 직면한 위기의 핵심은 ‘지속가능성’ 그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보다 복잡해진 사회 시스템이 ‘최적화’, ‘효율성’과 같은 일부 가치에 치중되면서 예측하지 못한 변화와 교란들이 인류를 위협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진정한 ‘지속가능성’을 달성하기 원한다면, ‘효율적인 최적화된 시스템’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교란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동시에 구축해야 한다. 무대 뒤에 있는 ‘선량한 인간’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무대 위로 올리기 위해서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기발하고 새로운 사고’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지속가능성을 넘어 리질리언스로 기존 ‘지속가능성’의 핵심은 지구 환경을 하나의 평형 상태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평형 상태란 물질 혹은 에너지의 유입과 유출의 양이 같아서 마치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안정된 상태를 말한다. ‘지속가능성’ 패러다임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지구의 ‘안정된 상태에 최적화된 시스템’1을 구축했다. 그러나 지구 환경은 무섭게 변하고 있다. 간단한 예로 여름철 강우 패턴을 살펴보자.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1시간 동안 50mm 이상 폭우는 5.1회에 그쳤으나 2000년대 들어서서 12.3회로 급증했다. 급증한 국지적 폭우는 수질 오염, 토양 침식, 도심 홍수 등의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이러한 위협은 근래에 발생한 우면산 산사태나 강남역 침수 등으로 가시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최근 2015년에는 극심한 가뭄도 찾아왔다. 중부 지역의 누적 강수량이 평년 대비57%에 그쳤고, 바닥을 드러낸 소양강댐은 방류량을 80% 이상 줄여 생활용수 제한 급수를 단행하게 되는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다. 과거의 강우 패턴에 최적화된 우리나라의 수자원 확보는 예상치 못한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큰 사회적·경제적 손실을 안겨주고 있다. 겨울철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 겨울 제주도에서의 예상치 못한 이틀간의 폭설은 9만 명의 여행객의 발을 묶었고, 59억 원의 피해와 86억 원의 복구 비용이라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유발했다. 변화하고 있는 환경에 인간이 만든 시스템은 점차 마비되고 붕괴되고 있다.
연재 순서
1. 21세기 패러다임의 변화,지속가능성을 넘어 리질리언스로
2. 리질리언스 개념의 등장과 확장
3. 새로운 사고의 틀, 리질리언스 사고
4. 리질리언스 향상을 위한 전략, 적응과 전환
5.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도전1: 도시 리질리언스
6.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도전2: 해안 리질리언스
전진형은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 환경생태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습지생태계 조성과 생태환경회복기술 개발, 시스템 다이내믹스를 활용한 도시 내 저탄소 경관 디자인 요소 개발 및 야생생물 군집 변화 모델링 등 생태계 복원 및 설계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생태학적 이론과 과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한 다양한 디자인 시뮬레이션을통해 설계 단계부터 시공 후까지 생태계 변화를 예측하여 대상지가 지속가능할 수 있는 생태적 조경 설계와 유지관리 방안을 연구하고 교육하고 있다. 최근에는 생태환경의 보존과 인간의 이용 및 개발의 조화라는 패러독스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을 통한 생태회복성(eco-resilience)에 관심을 갖고 이를 조경 분야에서 적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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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의 경제학] 공원의 적정량을 비용편익분석으로 도출할 수 있을까
Economics of Landscape Architecture: Can We Estimate the Proper Amount of Parks by Cost-Benefit Analysis?
비용편익분석, 벗어나기 힘든 굴레
비용편익분석cost benefit analysis은 실용적인 수단이다. 이름 그대로 해석하자면 어떤 사업 또는 투자에 소요되는 비용과 기대되는 편익을 비교하는 (그래서 진행 여부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타당성 검토feasibility study는 정부의 공공사업이나 민간의 수익사업뿐만 아니라 개인이 대학에 진학할지를 결정하는 데에도 활용될 수 있다. 하지만 경제학에서는 비용편익분석이라는 단어를 주로 정부가 공공재를 공급하는 경우에 한정하여 사용한다. 정부가 공원의 조성여부를 비용과 편익을 비교하여 결정하는 것은 비용편익분석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호에서 설명했듯이 공원과 같은 공공재의 가장 큰 특징은 (시장기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적정량이 얼마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용편익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정부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편익이 비용을 초과하는 공원만 빠짐없이 조성하면 사회적으로 적정한 공급량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비용과 편익이 제대로 추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공원뿐만 아니라 어떤 공공재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용과 편익을 정확하게 계산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 철도, 발전소 등 공공사업에 비용편익분석은 널리 활용되고 있다. 때로는 고속도로가 산을 뚫고 교각을 놓아가며 울창한 수림을 관통해야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고압의 송전탑이 신성한 능선들을 밟고 지나가야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면서 말이다. 비용과 편익을 추정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비용편익분석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이를 대신할 합리적인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할 능력은 없지만 대체할 수단 또한 없는 것. 이것이 비용편익분석에 대해 우리가 가진 딜레마다.
공원에 드는 비용
비용을 추정하는 것이 어려운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비용편익분석에 필요한 것은 회계적 비용accounting cost이 아닌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다. 경제학에서는 어떤 자원을 사용하는 데 드는 기회비용을 ‘그 자원을 다른 용도로 사용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 중 가장 큰 값’이라고 정의한다. 예를 들어 공원에 심는 나무의 기회비용은 그것을 얼마에 샀는가(회계적 비용)가 아니라, 그것으로 집을 짓든 젓가락을 만들든 공원에 심기 위해 포기한 다른 모든 용도의 가치 중 가장 큰 값이다. 그런데 이 값을 어떻게 일일이 계산하여 비교한단 말인가? 다행히 경제학자는 시장이 완전하다면 시장가격market value에 이 값이 잘 반영된다는 논리로 수고를 피해간다. 공원에 드는 비용은 공원에 투입되는 자원들의 시장가격을 합하여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장가격은 내가 시장에서 나무를 사는데 지불한 액수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나는 상황에 따라 나무를 싸게 살 수도 있고, 비싸게 살 수도 있다. 때로는 원래 가진 나무가 있어서 추가적인 현금 지출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내가 나무를 공원에 심는다면 나는 합리적인 당사자들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주고받았을 시장가격을 지불한 것이다. 바로 이 값들을 합해야 공원에 드는 비용이 계산된다.
한편 공원에 드는 비용이 오늘 전부 지출되지 않고 미래에 조금씩 지출되는 것도 비용의 추정을 어렵게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슈가 숨어 있다. 첫째, 비용이 미래에 지출되면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예측’해야 한다. 경제학자가 아닌 점쟁이에게도 미래의 예측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비용의 추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반드시 틀린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둘째, 총지출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점의 미래 지출을 오늘의 값으로 환산해야 한다. 오늘의 백만 원과 10년 뒤의 백만 원은 그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환산의 비율이다. 이 비율을 정하는 과정에는 분석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결국 누가 추정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값을 놓고 우리는 공원의 조성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셈이다.
민성훈은 1994년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 2년간 일했다. 그 후 경영학(석사)과 부동산학(박사)을 공부하고 개발, 금융, 투자 등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2012년 수원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가장 오래 가졌던 직업은 부동산 펀드매니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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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와 디테일] 톤
다르게 할 것을 요구 받는다. 아주 노골적으로. 새롭지 않으면 늘 뒤쳐진 낡은 것을 하고 있다는 오해를 한다. 심지어 능력 부족이라는 오명과 함께 지켜온 자리마저 위협받는다. 경쟁 시대의 현실이다. 종교는 없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경의 한 구절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다. 이런 내게 혹은 나와 닮은 이들에게 새로움을 강요하는 현재의 분위기는참 견디기 힘들다. 조경은 살아있어 항상 변하는 재료를 사용하는 아주 독특한 분야다. 입이 아프게 말하고 귀가 따갑게 듣던 이야기다. 이렇게 늘 새롭게 변화하는 재료를 사용해 계획하고 만드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새로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혹시 말(보고서)로는 시간이 지나며 더 아름답게 변하는 경관 중심의 공간을 계획했다고 하지만, 변화는커녕 낡아빠진 형형색색의 시설물로 가득한 공간을 보여주었기에 사람들이 우리의 거짓말을 알아채 버린 것일까.
이 연재를 하며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있다. 과연 소재를 많이 아는 것과 그 구법에 능통한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게 굳이 필요한 것인가? 뻔하지만 답도 없는 생각으로 머리만 바쁘다.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좋은 공간적 ‘톤tone’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사전에서 찾아보면, 톤은 본래 음악 용어로 일정한 결합 관계를 가진 몇 개의 음이 융합되어 만드는 음조를 말한다. 회화에서는 개개의 색채가 명암, 농담의 차이에 따라 형성되는 조화를 말한다. 색의 명암, 강약, 농담 등이 나타내는 미묘한 차이와 그 혼합으로만들어내는 조화로운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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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커먼 그라운드
시커먼 남자 세 명이 함께 가기에 어색한 공간들이 있다. 백화점, 파스타 전문점 그리고 벽화마을…. 여자와 동행한 남자들을 간혹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왠지 자발적으로 방문한 표정들은 아니다. 이 장소들이 모든 여성들의 로망은 아니지만 여성이 우점 성별임에는 틀림없다. 화창한 5월에 방문한 건대입구의 커먼그라운드는 컨테이너 적층 건축의 인지도를 급격히 상승시킨 히트작이다. 비슷한 스타일의 프로젝트 가운데 유독 큰 주목을 받은 커먼그라운드는 오프라인 상에서 건축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해시태그에 의한 공간감의 확대 재생산을 논할 수 있는 곳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쇼핑, 파스타, 벽화의 세 가지 요소를 고루 갖춘 커먼그라운드는 여성 취향을 저격하는 종합 세트장으로서, SNS 게시물에 최적화된 다양한 배경을 제공한다. 배경이 주 임무가 된 공간을 부정적으로 볼 생각은 없다. 자칫 피상적으로 흐를 수 있었던 공간감은 구조와 디테일의 세련됨으로 극복하고 있다. 새로운 핫스팟에게 상위 검색 자리를 물려준다 할지라도 공간의 기본기가 제법 탄탄한 커먼그라운드는 계속해서 즐겁게 활용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_ 정욱주
컨테이너는 물건을 운반하는 수송 수단이기도 하지만 대표적인 가설 건물이기도 하다. 커먼그라운드에는 일반 가설용 컨테이너가 아닌 좀 더 튼튼한 수송용 컨테이너가 쓰였다. 하지만 가볍고 쉽게 해체 가능하리란 이미지는 잃지 않았다. 어릴 적 최초의 가설 건물에 대한 기억은 원두막이다. 몇 개의 기둥과 짚더미를 대충엮어 만든 원두막에는 딴 세상이 있었다. 고작 2m 남짓한 높이였지만 그곳에 오르면 구름 위에 올라선 것 마냥 시원하고 아늑하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다른 시선이 있었다. 가볍고 삐꺽거리는 위태로움이 높이에 대한 감각을 증폭시킨 것 같기도 하다. 어려서 그랬는지 그 가벼움과 시원함이 좋았다. 견고한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것과는 분명 다른 감각이었다. 게다가 원두막에는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감성이 있다. 그곳에 달달한 수박과 참외가 있어서일지도 모르지만….
컨테이너로 쌓아올린 이 가벼운 건축에서 원두막의 감성을 떠올리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이곳에 모인 젊은 친구들이 훗날 이곳을 내 어릴 적 원두막과 같은 공간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젊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탈일상의 공간이면서 잠깐의 추억이 돼줄 수 있는 공간이니까. _ 김용택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 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 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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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진행 중인 붕괴에 대한 접근
컬랩스, 6. 3 ~ 6. 25, 합정지구
최근 세상은 더 흉흉한 분위기다. 시대의 불안은 동시대 여러 예술가들의 작업에서도 예민하게 감지된다. 필자가 얼마 전 기획한 전시 ‘컬랩스Collapse’는 ‘무방비적인 붕괴가 일상이 되어버린 현시대’에 대한 질문을 시각적 구조로 다뤄보고자 했다. 본고에서는 전시 소개와 더불어 참여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사회적 붕괴에 접근하는 동시대 예술 현상을 다루고자 한다.
붕괴를 공모하는 사회 구조
작년 영국 신문 「가디언guardian」에서는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건물을 50개 선정해, 50회에 걸쳐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시리아의 시타델 등 도시 역사에서 주요한 건물들이 등장한 가운데 한국의 한 건물도 선정되었다. 놀랍게도 최대의 붕괴 참사로 전 세계인을 경악시킨 삼풍백화점이다. “삼풍백화점 참사로부터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기사는 한국의 개발 중심 성장이 불러일으킨 연쇄적 붕괴를 언급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는 안전 불감증을 전 세계인에게 경고한다. 위기 속에서도 개개인이 견디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은 시스템의 오작동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붕괴의 이미지는 흔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전 세계에 충격을 준파리 총기 난사 사건, 우리 사회의 부패된 시스템을 보여준 세월호, 중국의 고도성장을 증명하는 도시 심천에서 쓰레기더미에 매몰되어 죽은 사람들, 그리고 증시 파동으로 인한 세계 경제 공황… 무너지고 전복되고 좌초되고 휘감기고 난장판으로 흩어지고 쓰나미처럼 몰아쳐 파괴되고 싱크홀처럼 순식간에 매몰되는 참혹한 사건, 사고, 재해는 각종 미디어를 장악하며 충격과 혼란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화려하게 시선을 장악하던 파국 이미지는 더 이상 스펙터클하지 않다. 순식간에 배가 침몰하고 건물이 무너지고 다리가 붕괴되고 도로가 함몰되고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급작스런 재난에 떠밀린 상황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보이지 않는 개개인의 자아 붕괴, 공황 상태는 극한의 살인이나 범죄로 이어진다. 최근 더 빈번해진 가족 간의 살인 사건, 더 잔혹하고 극악해진 범죄의 이미지. 일상 속에서 시체가 유기되는 비인류적 사건은 비단 한 개인의 인간성, 윤리적 붕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사회적 윤리, 도덕 안에서 개개인의 인간성은 그 충격을 더 병리적, 더 파괴적으로 감지한다. 컬랩스된 사회ㆍ정치적 구조, 전 지구적 재난 등 그 힘에 밀려 세상은 마치 끝을 향해가고 있는 듯하다. 개인을 무력화하는 이 급작스런 붕괴로부터, 그리고 붕괴의 충격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이번 전시는 무방비적으로 노출되어 온 붕괴 이미지가 일상이 되어버린 현시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사회적 붕괴를 시각적으로 다루고 있는 6명의 참여 작가는 오늘날 붕괴 현상과 그 배후의 구조에 대해 각각 신문 매체, 슬럼 이미지, 자연재해, 버섯구름, 가족 제도를 통해 접근한다.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건축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송원아트센터, 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송원아트센터, 2014), ‘Hidden Dimension’(갤러리 스케이프, 2013)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갤러리 스케이프 책임큐레이터, 갤러리킹 공동디렉터,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2015년 동북아시아 도시 리서치(예술경영지원센터 후원)를 진행했으며,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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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브루클린
공간은 어떻게 장소가 되는가
소설가 김연수는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다리를 불태우다”라는 말로 비유한다. 지나온 다리를 불태우면 다시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대부분의 인생에서는 그게 다리였는지 모르고 지나가고, 그러고 나서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뒤늦게 그게 다리였음을, 그것도 자기 인생의 이야기에서 너무나 중요한 갈림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통적인 이야기 작법에서 플롯은 3막으로 구성되는데 1막의 끝에 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있다고 한다. 내 인생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은 건넜을 다리, 그때가 언제였을까. 그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면 지금과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브루클린’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 주인공 에일리스(시얼샤 로넌 분)가 고향 아일랜드를 떠나 미지의 땅 브루클린에 적응하는 이야기다. 에일리스가 브루클린으로 가는 배 위에서 멀어지는 엄마와 언니를 보며 손을 흔들 때, 관객은 그녀가 다시는 이전의 그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란 걸 안다. 낯선 브루클린에 도착한 후 한동안 지독한 향수병을 앓는다. 하숙집의 딱딱한 저녁 식사 자리도, 고향과는 다른 번잡한 출근길도, 화려한 백화점의 점원 생활도 모든 것이 낯설다. 잔뜩 주눅이 들어 누가 건드리면 금세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이다. 그러던 그녀가 먼 훗날 그녀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이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로 변한다. “힘들지만 향수병으로 죽지는 않아요. 곧 지나가죠.” 영화는 두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변화와 만나는 사람들과의 화학 작용을 통해 그녀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매우 디테일한 시선으로 묘사한다.
영화에서 짧은 슬로우 모션이 두 번 등장하는데, 한 번은 그녀가 입국 심사장을 통과한 후 파란색 문을 열고 환한 밖으로 나가는 장면이고, 또 한 번은 타국에서 보내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날 밤에 눈이 오는 장면이다. 아일랜드인을 위한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앞 장면이 물리적으로 다른 공간에 첫발을 내딛는 날이라면, 두 번째는 어떤 인식의 전환점이 되는 날이다.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구슬픈 고향의 노래를 부르고 함께 모여 술에 취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하며 하루를 보내고 비로소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같은 공간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 지점이다.
신부님의 도움으로 야간 대학에 다니면서 회계 자격증을 취득하고,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까다롭기만 하던 하숙집 주인과 백화점 상관에게 인정받기 시작한다. 배관 일을 하는 다정한 남자친구도 생긴다. 어리숙하던 그녀의 표정은 모두 놀랄 정도로 당당해지고 활기에 넘친다. 코니아일랜드에 놀러 가기 위해 최신 유행의 수영복과 선글라스를 준비하고, 이탈리아 이민자인 남자친구네 집에 초대받고는 하숙집 친구들에게 스파게티 먹는 방법도 배운다. 엉엉 소리 내어 울며 고향에서 온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던 그녀가 이제 브루클린이 마치 집같이 느껴진다고 답장을 쓴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녀를 인정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고,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렇게 낯선 공간에 자신만의 경험과 기억이 쌓여 새로운 정서와 의미가 생기면서 공간은 장소가 된다. 브루클린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로운 세계관을 바탕으로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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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색맹의 섬
Editor’s Library: The Island of the Colorblind
포스터의 “절대 현혹되지 마라”는 경고를 일종의 선전포고로 읽었어야 했다. 영화 ‘곡성’은 상징과 메타포, 블랙유머로 뭉친 ‘떡밥’을 관객들 앞에 던진다. 이미 영화를 보고 온 사람들의 증언에도 코웃음 치며 나는 절대 감독의 의도에 홀리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의를 하고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았다. 그렇지만 선로를 이탈한 기차처럼 폭주하는 이 영화를 어떻게 당해내랴. 영화 초반부, 주인공 종구(곽도원 분)가 밥 먹고 나가라는 장모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아침밥을 배불리 먹고 사건 현장에 지각할 때, 이 영화는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는 데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다. 종구의 직업은 경찰이지만 그가 사건의 원인을 파헤치고 해결하는 방식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수사와는 거리가 멀다. 종구는 허술하고 친근한, 우리 주변에 한 명쯤은 있을 법한 평범한 인물이다. 관객들은 그의 시선을 따라 정신없이 끌려다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관객들의 예상과 기대를 비껴가며 ‘들었다, 놨다’하는 영화의 장치는 대부분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시각적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피해자들의 집마다 걸려 있는 해골을 닮은 금어초, 속을 알 수 없는 무당 일광(황정민 분)이 미끄러지듯 차를 몰며 등장할 때 배경으로 보이는 구렁이 같은 능선과 도로, 일본에서는 길조로 보지만 한국에서는 흉조를 뜻하는 까마귀 등의 상징적 이미지가 반복해서 등장하면서 관객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주입시킨다. 주인공 종구 또한 ‘보는 것’에 집착한다. 일본인을 조심하라고 충고하는 무명에게 “직접 봤냐”고 추궁하다가 급기야는 “내 눈깔로 직접 봐야 쓰겄다”며 나선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어떤가. 종구와 관객이 ‘본 것’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고 사건의 전말은 여전히 알 수 없다.
만약 우리의 시각적 정보가 제한적이라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최근에 읽은 올리버 색스의 『색맹의 섬』은 태평양 한가운데 미크로네시아 제도의 조그만 섬핀지랩에 살고 있는 색맹 원주민의 삶, 풍습, 역사, 섬의 생태 등을 관찰한 여행기다. “완전한 색맹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보는 세계는 어떨까? 그 사람들은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 자체를 느끼지 못할까? 그들도 우리가 보는 세계 못지않게 강렬하고 활기 넘치는 세계를 갖고 있을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비롯해 『뮤지코필리아』,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 등 뇌와 정신 활동에 관한 서적을 10여 권 저술한 저명한 신경과 전문의인 작가는 단순한 의학적 호기심을 넘어 색맹의 ‘삶’에 관심을 갖고 색맹의 섬을 찾아 떠난다.
그가 도착한 핀지랩에서는 색맹을 ‘마스쿤’(‘안보인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 섬 인구의3분의 1이 마스쿤 유전자 보유자이며, 전체 인구 약 700명 가운데 57명이 색을 완전히 구별할 수 없는 전색맹이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 색맹의 발생률은 30,000분의 1 미만이지만, 핀지랩에서는 12분의 1에 달한다. 이 섬에서 색맹은 불쌍한 장애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불편할 뿐인 흔한 질병이다. 올리버 색스는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뭔가를 검사할 때, 대개 상당히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핀지랩의 색맹 검사는 “마을 축제라도 벌어진 것처럼 즐겁고 경쾌한 분위기”였다고 묘사한다.1
올리버 색스의 가장 큰 미덕은 환자를 ‘치료 대상자’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병의 원인을 탐구하고 치료방법을 연구하지만, 환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편견 없이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책에는 따뜻한 인간미와 유머가 넘친다. 그는 색맹 원주민이 어떤 면에 있어서는 일반인보다 뛰어난 감각을 지녔다고 기술한다. 색맹원주민은 밝기만으로 색을 구분하기 때문에 색채의 대비가 뚜렷하지 않은 색깔들을 쉽게 구분해 아름다운 무늬의 깔개를 만들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도 명암을 잘 구분할 수 있어서 밤낚시를 할 때 발군의 기량을 발휘하기도 한다. 한번은 올리버 색스의 일행 중 한 명이 노란색과 녹색을 구분할 수 없는 색맹 원주민에게 바나나가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묻는다. 원주민은 대답 대신 연두색 바나나를 내민다. 아직 푸른 기가 돌지만 껍질을 벗겨보니 속은 완전히 익은 바나나다. 놀라워하는 색스의 일행에게 원주민은 말한다. “색깔만 보는 건 아니에요. 우린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냄새 맡고, 또 알아요. 여러분들은 그냥 색깔만 보겠지만 우린 모든 걸 따지는 거지요!”2
지난 5월, 문경원 작가의 프라미스 파크 워크숍, ‘미래 공원의 제안’이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려 취재를 다녀왔다. ‘향’으로 공원을 탐구한다는 기획을 처음 들었을 땐 막연하고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양한 감각을 이용해 구체적인 개념을 만들어가는 시도와 과정 자체가 하나의 플랫폼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문경원 작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시각이 지배하는 현대인의 얕은 사유 방식에 경종을 울리는 새로운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기대했던 결과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와 연구 방식은 ‘공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예술의 언어로 표현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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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살아남지 못한 구절
가다듬고 지우고 살리고 없애고 되살리고 줄인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 좌담회 녹취록 정리 이야기다.
대부분의 좌담회는 2시간 남짓 진행된다. 예정된 주제들을 하나씩 소화하며 순조롭게 이야기가 풀리기도 하지만, 곁가지로 새는 일도 다반사다. 어떤 경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펼쳐져 원래의 주제로 되돌아오기까지 한참이 걸리기도 한다. 그럴 때 녹음기를 바라보는 에디터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예상했던 분량이 안 나올까봐 걱정이 되어서다. 한 가지 주제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논의가 빙빙 맴돌 때도 마찬가지다. 마치 도돌이표가 표시된 것 마냥 중언부언된 부분을 쳐내고 나면 지면에 옮길 텍스트가 몇 단락 안 될 때도 있다. 30분 넘게 이야기가 오고갔는데도 말이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패널들이 이야기에 심취해 예정했던 2시간을 훌쩍 넘기는 경우다. 게다가 주제에 대한 집중도까지 좋은 경우는 요즘 말로 웃픈 상황이다. 내색 할 순 없지만, 없던 다크서클이 절로 생기기도 한다.녹취 분량도 어마어마해지고 다른 지면을 줄여서 새로 지면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표정은 웃고 있어도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떨 땐 애꿎은 녹음기의 정지 버튼만 노려보다가 녹취를 풀기도 전에 그림 먼저 그리기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통째로 들어내야지. 안 그랬다간 A4 30매도 넘기겠어.’ 물론 내용이 알차다면 지면을 더 할애하는 것이 순리이겠지만, 그게 꼭 득인 것만은 아니다. 지면을 빽빽하게 채운 활자 더미에 독자들은 시선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내용의 질과는 무관하게….
지난 호 특집에 실린 좌담회 ‘설계비, 무엇이 문제인가’는 좀 독특했다. 평균 좌담회소요 시간인 딱 2시간 동안만 진행되었음에도 초벌 녹취 분량이 A4 26매에 달했다. 초벌 녹취 단계에서는 불필요한 부분을 미리 배제하고 정리하기 때문에 보통 20매 이내에서 정리되는데, 이번 좌담회는 달랐다. 그만큼 곁가지도 잔뿌리도 없이, 굵직굵직한 메인 줄기를 따라 2시간 내내 주제에 부합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패널들이 준비해 온 자료도 순도가 높았다. 그럼에도 “텍스트가 너무 많아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반응도 있었고, “설계 환경의 가장 큰 이슈를 결국 ‘기-승-전-설계비’로 맺은 점 또한 아쉽다”(이번호 칼럼)는 지적도 있었지만, ‘기-승-전-설계비’에 대한 아쉬움은 특집의 전체적인 ‘기획’에 대한 것이고 텍스트의 양을 더 간결하게 구성하지 못한 것은 편집부 탓일 뿐, 좌담회 자체는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살아남지 못한 구절을 굳이 여기서 되살리려는 까닭이다(공식적인 좌담회의 기록은 아니기 때문에 이니셜로 표기한다).
A: 조경 업계를 거칠게 구분하자면 설계, 시공, 시설물로 나눌 수 있는데, 조경설계사무소의 대표는 대부분 조경학과 출신이다. 조경학과 학부 때부터 디자인의 매력에 끌려서 설계를 자신의 천직으로 여겨 이 일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조경 시공이나 조경 시설물 회사의 대표는 조경학과 출신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런데 회사 경영은 이들이 더 잘한다. / B: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C: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설계대학원에서도 경영을 가르친다. 회사의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해야 원하는 설계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A: 적정 설계비를 받지 못하면서 생기는 문제 중의 하나는 조경학과 학생들이 설계 분야로의 진출을 꺼리는 점이다. 업무양도 많고 초봉도 낮다보니 설계를 기피한다. 예전에는 조경학과의 상위 그룹이 설계를 했지만, 지금은 그 반대다. / B: 조경설계사무소의 급여가 가장 낮다는 이야기인가? / A: 가장 적다. 대기업 연봉은 세배 이상인 경우까지 있다. / A: 조경 분야 내에서도 설계 분야가 가장 연봉이 적은 가? / C: 내가 알기로는 2000년대 중반에는 조경 분야 내에서 설계사무소의 연봉이 가장 높았다. 시공 회사 대표가 설계사무소에서 신입 직원에게 월급을 너무 많이 줘서 시공 회사로 취직하려는 졸업생이 없다고 항의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서 설계사무소가 제일 적고 자재 회사가 제일 많이 준다. / D: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프를 좀 다르게 봐야 한다. 출발선상에서 보면 대기업과 설계사무소의 연봉에 많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대기업의 초봉이 4천만 원 혹은 5천만 원에서 시작되더라도 1억 원까지 빨리 가는 게 아니다. 대기업은 그래프가 완만하다. 게다가 몇 퍼센트만 살아남는 구조다. 반면 설계사무소는 개인의 역량에 따라 그래프의 곡선이 얼마든지 가파르게 상승할 수 있다. 조경 분야끼리만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시공 회사가 설계사무소보다 그래프가 완만하다. 설계 분야의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이야기다. / A: 그런데 그렇게 버틸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시공이나 시설물 분야는 10년 이상 계속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설계는 적은 연봉으로 10년 이상 버티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요새는 10년차 경력자는 웃돈을 주고 스카우트해야 한다. / C: 상승 곡선을 가파르게 탈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설계 쪽이 많은데, 현재 취업을 목전에 둔 젊은 친구들은 초봉 비교를 조경업종 내에서 하지 않고 일반 대기업과 한다. 기회가 될 때마다 학생들에게 대기업이 초봉은 많아도 10년 후를 생각하면 설계 분야가 더 비전이 있다고 설명을 하지만, 당장의 초봉에 연연해하는 경우가 많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말이다. / B: 요새는 설계사무소가 어렵다는 말들이 많아서 교수들도 설계사무소 취업을 권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히 비전이 있다. 설계자의 희소가치도 점점 높아질 것이다. 양질의 설계를 할 수 있는 전문가에 대한 수요는 커질 수밖에 없고, 단가도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다. 성공 확률은 확실히 과거보다 지금이 더 크다. / A: 설계사무소는 여성에게 유리한 측면도 많다. 경력 단절 이후에 재취업할 수 있는 확률이 다른 분야보다 월등히 높다.
초벌 녹취 원고 A4 26매 중에서 지면에 담긴 분량은 A4 14매다. 절반 가까이가 살아남지 못했다. 그 중에서 아주 일부를 옮겨 보았다. 설계비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옅어서 딜리트 키를 피해가지 못했던 대목이다. 왜 옮기는지에 대한 부연은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