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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목관아
Jeju Mokgwana
제주 목관아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에 위치하며, 면적 19,533㎡의 조선시대 지방 통치기관이다. 세종 16년(1434) 화재로 인해 건물이 불탄 것을, 안무사 최해산(1380~1443)에 의해 종루, 홍화각 등 건축군 조영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내내 신축·개보수하였다. 관아의 전체구성은 홍화각, 우련당, 귤림당, 관덕정 등을 주축으로 평평한 대지에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93년 3월 31일 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었다.
Jeju Mokgwana(Old Government Office of Jeju) which is located in 43-3, Samdo2-dong, Jeju-si, Jeju-do is 19,533㎡ area. It was burned in the King Sejong’ 16th period(1434) and then was reconstructed the buildings and the gardens by Choi, Hae San(1380~1443). The aesthetics of adaptation is connected spatially, topographically and functionally on the flat ground with Honghwagak, Uryeondang, Gyullimdang and Gwandeokjeong. It was appointed as Historical Site no.380 in 31st, March,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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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의 정원
Five Senses Garden
빗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비 소식을 들은 날이면 설렘으로 그녀를 기다린다. 한번에 달려오면 좋으려만 한밤중이 돼서야 찾아온다. 감나무 잎 새에 떨어지는 소리, 파초에 떨어지는 소리, 처마 위에서 마당으로 떨어지는 소리, 장독대에 떨어지는 소리,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소리, 자갈 위에 떨어지는 소리, 시멘트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바람에 날리는 소리 등. 오감만족 감성디자인의 소재로 비처럼 좋은 소재는 없다. 비가 지닌 자체의 속성도 있지만 세상의 재료와 만나 오케스트라를 연출한다.
지난 6월 성균관대 경관연구실과 하거원을 답사했다. 정기호 교수님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주제는 문헌 속에 나타난 정원유적의 추적이었다. 우리 문화는 아직 복원에 있어서는 매우 소홀한 것 같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확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추하고 또 그것을 너무 빨리 가시화해 버린다. 그 날 답사를 한 학생들은 어떤 것이 원형이었는지, 현재 상태가 어떤 층으로 나눠져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복원된 활수담도 예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였다. 답사 온 학생들은 문헌에서 나타난 하거원에서 동쪽 외원의 유구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앞에서 묘사된 활수담, 수미폭포는 선비들의 이상향인 선경의 세계다. 하지만 실제는 활수담은 약 1.5㎡ 정도의 규모, 수미폭포의 높이도 약 1.2m 정도이다. 삼근정사 동쪽에 흐르는 조그만 개울물을 막아 만든 것이다. 마치 창덕궁 소요암에 새겨진 어제시(飛流三百尺 遙落九天來 看是白虹起 飜成萬壑雷)처럼. 더욱 유구조차 발굴되지 않은 상태이니, 초보 답사객들은 동쪽 외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원림은 과장이 심했다. 담양 명옥헌 그 이름의 유래는 정자 곁을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옥과 같다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학원시절 그 실체를 찾으려 명옥헌에 자주 들르곤 했다. 정자 곁을 흐르는 계곡도 찾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느 날, 정자에 홀로 앉아 배롱나무를 보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상지(上池)와 하지(下池) 사이, 돌틈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가 불과 5~10cm정도의 단차로 떨어지고 있었고 돌 틈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맑았던 것이다. 선비들의 정원 경영은 과장이 심할 수 있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에서 느낄 수 없는 조그만 자연도 우주로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정원이 아니었을까. 한 눈에 매료시키는 외국의 정원은 많다. 그 웅장함에 놀라기도 한다. 조선조 선비들의 정원은 자연의 소소한 세계에서 ‘물고기의 움직임’, ‘구슬같은 거품’, ‘떨어지는 복숭아 꽃잎’과 같은 시어, 생명력 있는 의성어를 통한 청각적, 시각적 효과(획연, 영연, 형연), 고사를 통한 심리적 연상효과 등을 이용해 한 폭의 동양화와 같은 선경 세계의 표현한 문학정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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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장소는 어떻게 만나는가: 일, 거리(감), 사물
How the Time Meets with Place?: Work, Distance, Object
공간(space)과 달리 장소(place)는 인간의 개입이 표나게 드러난다. 공간은 기능적으로 특화된 곳이므로, 그 ‘전문성’을 위해 ‘인간성’을 배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서둘러 이 취지를 압축하면, 장소는 공간의 기능성이 영도(零度)에 이르도록 ‘닦는’ 어떤 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브레트(L. Brett)는 이 개입의 정서적 차원을 ‘애정’이라고 부른 바 있다. 애정을 쾌락의 대상으로 소비, 소모하는 경험에 익숙한 이들은, 공간에 대한 정서적 개입으로서의 장소화를 이해하기 어렵겠다. 자본제적 삶의 현실 속에서 잦보는 애정이란 기껏 소모(consumption)이거나 남용(overdose), 혹은 방치(dilapidation)로 빠지곤 하기 때문이다.
렐프(E. Relph)가 정의한 이른바 ‘무장소성(placelessness)’도 ‘평균적이며 공통적인 성격’이 도드라지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間)이 개입한 시간(間)이 공간(間)에 남긴 무늬와 같은 것을 아직은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간이 기능에 준한다면, 장소는 사람의 일에 따르는데, 물론 이 기준과 구분은 완벽하게 명확하지 않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자판기’라는 식의 ‘어둡고 비스듬히 어긋난’ 이치가 생길 수도 있듯이, 말이다(실제로, 나는 전주에 살면서 천변의 어떤 ‘곳’에 있는 커피 자판기를 자못 ‘사랑’하였다!).
우선 시간과 장소는 ‘인간의 일’에서 겹친다. 토착성(Bodenständigkeit)과 고향상실(Heimatlosigkeit)을 날카롭게 대조하는 하이데거는, ‘창조적 풍광; 우리는 왜 시골에 사는가?’라는 짧은 글에서, 슈바르츠발트(Schwartzwald)와 그곳의 주민들의 경우 각자의 고유한 ‘일’이 친밀하게 귀속해 있다는 점에서 그 토착성의 유래를 추적한다. 대지가 토지로 바뀌는 과정에서처럼, 토착성은 단지 시간만의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노동을 통해 인간이 개입한 역사의 암우(暗祐)가 필요한 것이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면서 가다』의 저자인 리 호이나키의 논점이 바로 이것이다. “장소에 친밀하게 거주하려면 필수적인 일의 반복적 수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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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규당고택
Gyudanggotaek
영동 규당고택은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 417번지에 위치하며, 면적은 2,458㎡의 민가주택으로 조선 고종 13년1885 송복헌1857~1948에 의해 건축 및 정원조영이 이루어졌다. 가옥의 전체구성은 안채·별채·광채를 주축으로 하며, 평탄한 대지에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The Gyudanggotaek is the Korean traditional upper classes house in 417, Gyesan-ri, Yeongdong-eup, Yeongdong-gun, Chungcheongbuk-do. It had been built in Kojong’s period(1885) in Joseon dynasty. It is in important position to analogize technique of the arrangement of the house and rational arrangement of the house reflected factors of the Pungsu(divination by configuration of the ground). The area of the house is 2,458㎡ and it is basically made up of Gwangchae(storage), Byeolchae(the men’s part of a house), Anchae(the main building of a house). It is connecting with condition of the selecting of the building area by environment and aesthe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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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산
Mountain of legend
(중략)…한 사람을 만나니 산관야복山冠野服으로 길이 읍하며 나한테 이르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이외다.”하므로 나는 박팽년과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니, 산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냇길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한다. 그 골짜기를 돌아가니 마을이 넓고 틔어서 2, 3리쯤 될 듯하여, 사방의 벽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도화 숲이 어리비치어 붉은 놀이 떠오르고,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흙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중략)
백굽이로 흐르는 시냇길을 따라 들어가는 마을입구, 마을 앞에 넓고 트인 논과 밭, 그리고 앞 시냇물, 그리고 마을 뒤에 멀고 가까운 도화 숲은 안평대군의 발문에서 표현된 도원의 모습이다. 에덴에서 표현된 이상향이 과수로 이루어진 숲과 물 그리고 근심 없는 삶이라면 무릉도원은 도화 숲과 시냇물 그리고 신선의 마을로서 표현된다. 도원에 들어가는 방법은 백굽이로 휘어져 흐르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물이 굽이굽이 흐른다는 것은 좌우의 산이 서로 교차되고 있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이러한 형국을 장풍국 명당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을 뒤에 있는 도화 숲은 주산(主山), 마을 앞에 넓게 트인 곳은 명당(明堂), 앞 시내는 명당수(明堂水)라고 풍수지리에서는 말한다. 장풍국의 명당이란 주변 산세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외부로부터 보호된다. 이러한 지형은 외부에서 쉽게 접근할 수 없기에 전쟁을 피해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된다. 흔히 말하는 십승지가 바로 이와 같은 터이다.
우리민족에게 있어 산은 신앙의 대상이자 삶의 터전이다. 마을을 지켜주는 어머니와 같은 보호막이며, 우리와 같이 호흡하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산은 우리 마을의 이름 없는 뒷동산에 이르러 삶의 쉼터를 형성한다. 여기에는 전설이 있고 민중들의 희노애락이 묻어 있다. 꿈틀거리는 산은 마을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민중의 삶에 믿음과 희망을 준다. 어머니 山! 호랑이 山! 연꽃과 같은 山! 부자를 만들어 주는 山! 재상을 만들어 주는 山! 바로 우리의 산은 민중들의 염원이며 삶의 터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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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를 추억하다
Reminisce about Pine Tree
(상략)솔수펑이에 소나무들이 팔려가면서 놀란흙이 드러난 솔숲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경우가 숱했으므로 멀리서도 소나무가 없는 휑한 자리는 한눈에 들어왔다. 소나무들로 숲을 이루던 때를 떠올리는 일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 테지만, 저녁 빛이 비껴들 때 솔숲은 가던 길을 멈추게 했다. 붉고 늙은 소나무 보굿에 맑고 밝은 볕뉘가 스며들면 마치 관능적인 관음보살상을 보듯, 어디에서도 다시 볼 수 없는 구경거리였지만, 소나무들이 매우 흔했으므로 때때로 무관심했다. 우리 마을 숲정이를 돌이켜보면 소나무들로 빽빽했던 시절도 한때였다. 지금은 참나무류가 소나무들 보다 더 너른 영역을 차지했다. 넓은잎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는 겨울이면 왜소해진 솔숲은 한결 더 도드라져보였다.
(중략)어느 집 마당에 숲에서 잘라낸 소나무들이 발구에 실려와 쌓이기 시작하면 굳이 ‘성주풀이’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그 집에서 집칸을 늘리거나 아니면 헛간이라도 짓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붕에 볏짚이엉을 올리든 기와를 올리든 집에 뼈대가 되는 것은 틀림없는 소나무들이었다. 대들보는 물론이거니와 하다못해 작은 서까래까지 모든 소나무들은 숲에서 베어다 썼다. 왕실은 물론 서민들이 짓는 집까지 소나무로 지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나무가 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먹을거리를 제사상에 올리는 까닭에 지역마다, 집집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략)마찬가지로 삼국시대부터 고분이든, 선비들 그림이든, 심지어 자주 쓰던 그릇에 등장했던 소나무도 많았던 만큼 어쩌면 제값을 받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명품’이란 이름으로 값비싸게 거래되고 있었다. 솔숲에 소나무들을 그저 바라만 보는 일이 잘하는 일은 아닐 것이지만, 어느 한쪽을 거덜 내는 짓 또한 잘하는 짓은 아닐 것이다. 깊은 산골 소나무는 방구들을 덥히는 땔감으로도 쓰여야 하고, 또 누군가의 집을 짓는 부재로도, 가구를 제작하는 데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문제는 소나무를 파낸 다음 뒤처리 문제였다. 도심의 공원이나 도시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저택으로 팔려갈 때, 소나무를 파낸 자리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일이 잦았다. 하다못해 꼴풀이라도 길러야 했지만, 도무지 산주인들은 무관심했다.
한겨울 마루에 놓인 무쇠난로에 소나무를 땔감으로 넣을 때면 사람보다 오래 사는 나무들이 내뿜는 어떤 향기는 온전히 나무 냄새만은 아니었다. 인간은 그 비밀을 영영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당장은 나무 타는 냄새만으로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 넉넉하게 기뻤다. 숲에서 사라지는 것이 어디 소나무뿐이겠는가 마는 조금 더 오랜 세월 청정한 소나무들과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을 끝내 놓지 못했다. 솔숲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어떤 묵시록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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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영정
Sigyongjeong
식영정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1 일원면적 28,039㎡에 위치하며, 조선 명종 때의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조영한 정자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주변에 자리한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산실인 환벽당, 취가정, 소쇄원 등과 함께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79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이후 2009년 9월 18일 명승 5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Sigyeongjeong which is located in San 75-1, Jigok-ri, Nam-myeon, Damyang-gun, Jeollanam-do was constructed by a great scholar Kim, Sung Won and his father-in-law Im, Eok Ryeong in the King MyeongJong’s reign of Joseon dynasty. It is 2gan(front) by 2gan(side) size on the center of the turtle-shaped rock. The aesthetic of adaption is connected spatially, topographically, and functionally with Sigyeongjeong, the valley and the lake. It was appointed as Scenic Spots and Places of Historic Interest no.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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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되어 가는 여행
Travellers going to be legendary
몇 달 전 나에게 이상한 프로젝트가 하나 생겼다. 폐교의 조경설계이다. 언제부터인가 폐교는 미술관, 동호회장 등으로 다양하게 변모되어 갔다. 대개 폐교를 인수한 사람들은 공공의 건물을 인수해 자신들의 취미 또는 개인적 공간으로 바꾸기를 원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주인장과의 첫 번째 회의 주제는 ‘나무의 이용가치’였다.
2차 회의 결과, 장소성을 유지하되, 나무를 살리기 위해 위치변동을 하기로 했다. 나무의 뿌리를 걷어 보니, 서로가 살기 위해 뿌리가 한 쪽으로만 뻗고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치 서로가 부부인 것 같았다. 순간 나는 “할배나무, 할매나무야” 라고 외쳤다. 조경팀이 뿌리돌림 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마지막 날 위치이동을 위해 25톤 크레인을 섭외했다. 느티나무를 드는 순간, 동네사람들이 몰려 왔다. 나무를 옮기지 말라고 항의를 했다. 자신들의 소유라고. 사실 동네의 소유는 아니다. “나무가 아파서, 잘 살리려고 잠깐 앞으로 위치 변동하는 거예요. 어르신.” “하지마. 죽든지 살든지. 그 자리에 놓아.” 어르신의 답이었다. 순간 인간의 욕심이 야속해지는 순간이었다. 알고 보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속셈이었다. 주인장은 나무를 생명으로 살리려고 하고, 어떤 이들은 단지 소유물로 보려하고, 인간들의 관점에 따라 말없는 자연생명이 어떻게 생존되는지를 아는 순간이었다. 할 수 없이 느티나무를 그 자리에 다시 묻었다. 다행히 약간 서로의 간격을 떨어뜨렸다.
세 번째 회의주제는 학교본관 앞에 있는 향나무였다. 등나무로 인해 그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었다. 처음은 살리기보다는 없애는 것이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장님의 생각은 역시 달랐다. “작업비 생각하지 말고 생명이 있는 것이니, 어떻게든 한번 살려봐” 어떻게 보면 나도 느티나무를 소유로 바라보았던 동네 어르신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 졌다. 향나무를 살리는 작업은 은단풍과 느티나무 보다 힘들었다. 등나무를 걷어내고 하루가 지나서 서서히 그 자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가려서 보이지 않는 나무들이 용처럼 보였다. 특별한 안목의 건축가가 나무들의 생명을 살렸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향나무, 호랑가시, 석류, 산수유, 동백, 목련, 소나무 등을 살려 학교 운동장에 이식하니 하나의 정원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토목이다. 학교본관과 운동장과는 약 5m 정도의 단차가 발생되었다. 내 생각은 그 단차를 완만히 하려 했다. 토목장비에게 단차를 무너뜨리라고 지시하고, 나는 식재에 집중했다. 그런데 토목장비는 단차를 무너뜨리지 않고 마치 논두렁 조성하듯 스탠드 단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공사 중지를 시켰고, 그 다음날 단차를 무너뜨렸다. 하나의 장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심한 신경이 쓰인다. 잠시라도 한 눈을 팔게 되면 의도하지 않는 일들이 발생된다. 순간의 판단력도 중요하다. 그래서 조경가는 경관위에 글을 쓰는 시인이다. 어느 정도 공사가 마무리 될 무렵, 성균관대 정기호 교수과 이 소장님이 방문하셨다. “그래. 이 소장 여기다 뭘 짓을 건데?.” “허참. 안 짓는 다니까” 이 소장님의 답이었다. 공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동네사람들도 말이 많았다. 요양원이 들어선다, 별장이 들어선다… 별 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이 소장님과 나 그리고 주인장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단지 건물 철거와 나무를 살리자는 것이었다. “그래. 정말 아무것도 안 해?” 정교수는 다시 친구에게 물었다. “그래 그대로 둘 거야. 그냥 정원부터 조성할거야. 주민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게. 앞으로 김 박사가 다 알아서 해야지.”새로운 조경시대의 서막이었다. 건축을 하고 조경이 마무리 하는 것이 보통은 관례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무엇인가 독특하다. 마을주민을 생각하는 주인장과 건축소장의 마음이 아름답다. 나무 하나도 생명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아름답다. 이번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전설이 되어가는 실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앞으로 그 땅이 어떻게 변해갈지 아직 모르겠다. 단지 나도 시나브로 생각할 것이다. 사계절, 아침과 밤, 그리고 별과 달과 바람. 이 모든 것을 느낀 후에 계획할 것이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최대한 비워둘 것이다. 진정한 대지예술은 자연이 지니고 있는 본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지금 그 곳에 가면 산수유와 목련이 봄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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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에 대한 불만
Complaint about Bench
(중략) 공원을 만났습니다. 아이들 놀이터가 있고 화장실과 벤치 몇 개가 놓여 있을 뿐인 공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반가웠습니다. 화장실이나 놀이기구나 벤치 등이 모두 새것이었습니다. 그곳이 공원으로 조성된 지 얼마 안 되어 보였습니다. 공원 둘레에 서 있는 나무들은 빈약해 보였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팍팍한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된 공원은 반갑기 그지없었습니다. 한숨을 내쉬면서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화장실에도 다녀왔습니다. 다리쉼을 하기 위해 빈 벤치에 걸터앉았습니다. 벤치는 등받이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한 사람씩 따로따로 떨어져 앉으라는 듯 세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쇠로 만든 낮은 팔걸이로 칸을 나눴습니다. 등을 편하게 기대고 앉아 어깨의 긴장을 풀고 싶은 사람은 앉을 수 없는 벤치였습니다.
(중략)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습니다. 등받이가 없어서 어깨를 옹송그린 채 잠시 걸터앉는 것만이 허용된 벤치였습니다. 공원의 벤치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화단 턱에 걸터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노인들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나 연인들 심지어 그 동네 주민들의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벤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드러눕는 것은 안 됩니다. 입을 맞추거나 끌어안고 있는 것도 안 됩니다. 옆 사람과는 적당히 떨어져 앉아 있어야만 합니다. 오래 앉아 있어도 안 됩니다. 잠시 걸터앉아 있는 것만허용됩니다.”
(중략)
늦도록 노닥거릴 수 있는 여름밤 공원을 상상해 봅니다. 도시 공원에서 잠든 아이를 안은 채 말놀음을 놀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부질없는 상상인 줄은 압니다. 그래서인지 느리게 노닥거릴 수 있는 여름날밤 공원에 대한 상상은 가닿을 수 없는 낙원의 꿈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공원을 나서기 전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벤치들은 여전히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벤치의 말이 아니라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말이 들리는 공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저귀를 찬 갓난아기와 그를 돌보는 엄마가 돋보이고 그들의 말이 들리는 환경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노인들처럼, 느리게 걷는 것이 가능한 구역이 어딘가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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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하는 정원. 파도바 대학 식물원
L’Orto Botanico dell’Università 야 Padova
파도바 대학 식물원이탈리아 북부 Veneto(베네토)주에 위치한 Padova는 Sant’Antonio산 안토니오로 인해 전 세계에서 몰려 온 독실한 기독교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지이다. 1222년에 설립된 파도바대학6은 Bologna볼로냐대학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들 중에 하나이기에 배움에 목마른 젊은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온 도시를 누비는 활기찬 도시이기도 하다.
Padova는 Breda(브레다)강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고 Venezia와 겨우 30㎞의 거리에 있어 베네치아의 영화(榮華)를 함께 누리게 된다.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베네치아의 항구를 통해 들어온 신기한 물품들 중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도 끼어 있었다. 필자가 처음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도 우리나라에서는 보지 못했던 식물들에 매료되어 종종 편지에 말린 잎을 동봉해서 보냈던 기억이 있다. 씨앗들을 가져다가 키워보려고 애쓰기도 했는데 기후의 차이와 미숙함으로 인해 성과는 낮았고, 겨우 수확한 것조차도 미니어처 수준이었다.
1997년 UNESCO에 의해 “파도바 식물원은 전 세계 식물원의 원형이고 과학의 요람이며, 과학 교류와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현대 과학, 특히 식물학, 의학, 화학, 생태학과 약학 등 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는 평가를 받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또 하나 이탈리아9에게 안겨준 이 식물원은 1545년 베네치아 공화국 상원의 결정으로 조성되었는데, 식물 연구의 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건축적 가치 또한 높다.
그 당시 식물연구에 관해 파도바 대학은 이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Theophrastos(테오프라스토스)와 같은 그리스 학자들의 식물학에 관한 작품들이 읽혀지고 토론되었다. 독일의 Albertus Magnus(알베르투스 마그누스, 1193~1280)와 고대 의학을 집대성한 Claudius Galenus(클라디오스 갈레노스)의 의학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한 Pietro D’Abano(피에트로 다바노, 1253~1316) 등 많은 학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당시는 무지無知에 의한 약물 오용이 난무했던 시대였는데 이를 바로 잡기 위해 Francesco Bonafede(프란체스코 보나페데)는 학생들에게 약용식물을 식별하는 방법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