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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향의 전설2-초등학교의 기억
    The Legend of Chun Hyang(2) 사람들에게 정원이 있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없다고 이야기한다. 정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넓은 잔디마당과 고급스러운 나무들, 연못 등이 연상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린왕자의 정원은 장미 한 송이가 전부였다. 김 교수님의 정원은 어린왕자와 같은 장미 한 송이는 아니다. 가냘픈 시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가슴속으로는 자연을 품었다. 그의 정원에는 자유롭게 날아오는 새가 있고, 바람이 있고, 달과 별이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자연의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이 있다. 나는 그 정원을 시정(詩庭)이라 표현한다. 격식 없는 시골의 정원, 말끔하게 가꾼 텃밭에는 ‘그곳만의 영혼’이 있으며 자연의 언어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다. 그의 정원에 앉아 있으면, 자연의 색과 소리에 매료되며 그 순간 시인의 정원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시정을 거닐고 있으면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산책하는 커플과 공공 정원>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의 정원은 시인을 만드는 정원이며 예술적 영감을 주는 정원인 동시에 사랑을 꽃피우는 정원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수많은 정원을 경영해 왔다. 민가, 별서, 정자와 누 등 장소 특성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주위의 낮은 구릉지나 계류, 뒷산에 의해 자연스럽게 영역이 설정되고 정자와 연못, 샘과 경물이 적절히 배치되어 풍류공간을 조성했다. 자연이 만든 선형線形과 더불어 직선적인 요소를 가미해 화계와 방형의 연못을 만들었다. 조선시대의 정원을 경영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이상향과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자연의 순리를 근본으로 삼아 지세를 함부로 변형하지 않았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순리이기에 정원을 조성함에 있어서 물을 돌아 흐르게 하거나 폭포를 떨어지게 하거나 넘쳐나게 하였다. 조선시대 정원에는 계절의 변화가 민감하게 반영되었다. 봄이면 꽃과 신록이 움트는 것을 보며 생의 신비를 느낄 수 있고, 여름이면 시원한 녹음 밑에 한 낮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가을이면 단풍과 열매가 풍성한 결실의 시간을 만끽하며, 겨울이면 고독을 맛볼 수 있다. (중략) 달빛을 탐내다 _ 이규보 산에 사는 중이 달빛을 탐내더니물 긷는 병에 달까지 담았네절에 가면 금세 알게 될 거야물 쏟으면 달도 없어진다는 걸 우주의 세계가 펼쳐진 조선시대의 최고의 스토리텔링이다. 아마도 광한루에 담겨진 뜻이 있기에, 춘향과 몽룡의 사랑 이야기가 전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원의 묘미는 시인의 마음이 펼쳐질 때 그 의미가 풍부해진다. 비록 선현들의 호연지기와 호방함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광한루를 단순히 춘향으로만 도배하기에는 너무도 값진 문화유산이다. 용성관, 남원 구도심, 우주의 세계를 표현한 광한루, 삼신산과 오작교 등은 춘향과 추어탕에 눌려 그 본질이 사라지고 있다. 공간과 장소는 생성, 변화, 쇠퇴, 소멸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하지만 역사물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 태생적 의미와 정신세계에 대한 탐색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퇴색한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그 변화상과 본질을 찾는 여정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 둥구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여름,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신작로를 걸어온 할머니는 마을 어귀 서낭당이 보이자 비로소 허리를 폈다. 숲 기스락을 개개면서 휘돌아나가는 개울에는 난간 없는 콘크리트다리가 있었으며 그 다리를 건너기 전 숲 기스락 한편에는 당산나무가 시원하게 그늘을 펼치고 있었다. 지난 정월 초이틀 동제를 지내고 나무 밑동에 둘러놓은 하얀 한지는 한여름 뙤약볕에도 눈부셨다. 넉넉히 두 아름은 넘을 듯한 당산나무는 고묵은 소나무였다. 소나무 보굿은 지난 세월만큼 깊게 패이고 또 그만큼 켜켜이 도드라졌다. 할머니는 자잘한 돌멩이들로 울멍줄멍 탑을 쌓아놓은 당산나무 앞에 서자 가만히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친 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숙하게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하얀 코고무신에는 흙먼지가 뽀얗게 앉았다. 그렇게 잠깐 멈춰 서서 땀을 들이고 숨을 고른 할머니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기다랗게 가로놓인 콘크리트다리를 건넜다. (중략) 마을이 평안하고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한해가 시작된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정갈한 마음으로 모여 평안과 안녕을 정성들여 빌며 제사지내던 마을 입새에 있던 서낭당 당산나무는 그러나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흔적조차 없었으며 당산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난간을 두른 거대한 콘크리트다리가 들어섰다. 또한 그 개울에는 콘크리트 옹벽 같은 보가 만들어져 물길을 가두면서 그예 늙은 소나무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누구도 마을이 생긴 어느 해부터 세세연년 자리를 지켜오던 서낭당이 그곳에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숲정이 깊은 어느 계류 기스락 말라죽은 소나무 앞에서 여전히 그 옛날처럼 정월 초이튿날이면 모여서 동제를 지냈지만, 어린 사람들은 마을제사를 지내는지조차 까맣게 몰랐다. 당산나무 한 그루가 사라지면서 정결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모였던 마을 사람들 자취뿐만 아니라 풍습이 없어지면서 언어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한 마을에 살면서 골목길에서건 마을 신작로 안길에서 먼발치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사람 사이에 흔한 예의였지만 지금은 자주 볼 수 없게 되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누가 누군지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마을 당산나무, 둥구나무가 있었던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몰풍스러운 풍경이었다. 어쩌면 당산나무 한 그루가 있어 마을 사람들은 그곳으로 모여들 수 있었고, 서로 얼굴 맞대고 장기도 두고, 장기 두는 곁에서 훈수도 두면서 또 한편으로는 끼리끼리 속살거리기도 하면서 서로들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을 것이었다. (중략) 외지고 구석진 우리 동네를 비롯한 시골 마을, 많아야 30~40가구이고, 대부분 운동할 기력조차 없는 나이든 어르신들이 살고 있음에도 언제부터인가 ‘지자체’에서는 운동기구를 갖춘 공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원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느티나무며 크게 자란 소나무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어느 공원에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하얀 꽃을 피우는 해당화를 심어놓기도 했다. 나무든 꽃이든 나라 밖에서 들어오기도 하고, 나라 밖으로 나가기도 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품종조차 굳이 외국에서 들여온 식물을 심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을 안팎에 공원을 만들 때에라도 그 지역에서 자생하는 품종을 선택하면 좋지 않을까. 어느 도시를 가든 똑같은 벚나무 가로수길, 똑같은 소나무 명품길로 통일하지 말고. 요즘은 또 이팝나무 가로수길이 유행이었다. 마을 사람들 안녕을 바라며 모자라고 빈 곳을 채우기 위해 흙을 돋워 숲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던 조상들이 있었다. 거창한 비보풍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콩 세알을 심었던 그 심정으로 인간과 자연이 서로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으면 그 아니 넉넉하고 좋지 않을까.
  • 밀양향교
    Miryang Hyanggyo 밀양향교1는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733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면적은 5,068㎡로, 고려 인종 연간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는 존현공간으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조선시대 선조 25년1602 부사 최기에 의해 .대성전이, 광해군 10년1618 명륜당이 중창되었다. 특히 대성전(大成殿)은 순조 21년1821 부사 이현시(李玄始)에 의해 이건·중수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 유적으로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Miryang Hyanggyo which is located in 733, Gyo-dong, Miryang-si, Gyeongsangnam-do is 5,068㎡ area. After transferred in the 25th year of King Seonjo’s reign(1602), it was used for a religious service to ancient sages as a emotional support of the Joseon dynasty. The aesthetics of adaption is connected with Daeseongjeon, Dongmu, Seomu, Myeongnyundang, Dongjae, and Seojae spatially, topographically and functionally. It was appointed as tangible cultural properties of Gyeongsangnam-do 214 in 6th of August, 1983.
  • 춘향의 전설1-초등학교의 기억
    The Legend of Chun Hyang(1) 책을 읽는 즐거움은 나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동지가 있기에 글 쓰는 작업도 외롭지 않다. 글을 쓰면 책을 더 많이 읽게 된다. 나와 동질의 시각으로 출판된 책을 보면 내 이야기는 없어지고 그의 글을 인용하기 시작한다. 활자화된 글을 보면 왠지 세련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을 느낄 때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지면의 낭비요, 넘치는 정보의 시대에 내 글이 쓰레기가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환경과조경>에 연재하기 시작할 무렵, 신상섭 교수님(우석대학교)께서 한 권의 책을 선물해 주셨다. 지금은 선물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고 앞 페이지에 몇 자 적어 우정의 증표로 삼았던 기억이 났다. 학창시절, 서점은 약속장소였지만 대형서점으로 인해 조그만 서점들은 문을 닫기 시작했고, 급기야 대형서점도 인터넷 서점에 밀려 문을 닫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간혹 답사를 다니다 작은 서점이라도 발견하면 흐뭇한 미소를 자아내는 것, 그것은 아마도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중략) 요즘 뜬금없이 본방을 사수하는 TV프로그램이 생겼다. 일일시트콤 ‘패밀리’이다. 유전자적으로 우성인 가정과 열성인 가정이 모여 새로운 가족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내용이다. 처음에는 가족들이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 채널을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에 점차 하나의 가족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훈훈한 저녁 볼거리가 되었다. 여배우 황신혜의 변화모습이 남다르다. ‘미모의 능력 있는 이혼녀’에서 ‘가족을 배려하는 따뜻한 엄마’로 변화해 간다. 나는 이것을 장소의 원칙이라 말한다. 장소는 3인칭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1인칭 관점, 즉 실존적 장소가 되어야 맛이 난다. 전설적인 장소는 타인의 일상적 기억들을 함께 소통하고 배려할 때, 집단적 기억으로 승화되고 비로소 신화를 창출하게 된다. 우리집 동네에 신평상회가 있다. 동네의 유일한 생활필수품 창고이다. 달달한 것이 먹고 싶으면 사탕을 사러 가게에 들르곤 했다. 어느 날 나의 눈에 띄는 것은 뉴슈가와 소다였다. 달고나 혹은 띠기라고 불리는 간식의 주재료이다. 추억의 재생산이다. 그것은 초등학교 때 최고의 간식이었고, ‘사탕물고기’를 타기 위해 용돈을 투자했던 주범이었다. (중략) 흔히 역사도시, 역사경관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북촌, 전주, 안동 등의 한옥마을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 중 전주한옥마을은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전통과 상업개발주의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괴물이다. 반면 남원 구도심은 전통, 근대, 그리고 현대가 녹아든 거리 박물관이다. 일식건물의 병원, 1960~1970년대 익숙한 간판 등은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근대경관이다. 역사적 사건이 아닌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묻어져 있는 근대경관은 박물관 유리관에 전시된 문화가 아니라 시대의 정신과 한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래서 정겹다.
  • 나의 미술관은 어디에?
    Where is My Art Museum? 미술관은 멀리 떨어져 있다. 내가 사는 서교동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을 가려면 강을 건너고 고개를 넘어야 한다. 동물원 옆 구불구불한 길을 돌고 돌아서야 미술관에 도착한다. 그곳에 도착해서도 계단을 오르고 입장료를 지불한 후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걸은 후에야 조명 속에서 드러나는 빛나는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작품들은 하얀 큐브 속에서 보물들처럼 반짝이고 있다. 나는 그 보물들을 보기 위해 신전을 찾아왔는지 모른다. 미술관은 멀고 드물다. 그런 만큼 작품은 고귀하다. 그래서인지 작품들에 붙어 있는 수천만 원대의 저 고귀한 가격표들은 미술관의 거리만큼이나 나의 실감 저 너머에 있다. 이렇게 제도화된 미술관은 신전을 짓고 신화를 만들어내면서 작품들을 우리 일상과는 거리가 먼 보물로, 값비싼 상품으로 재생산한다. (중략) 삶으로부터 동떨어짐으로써 그 존재이유를 찾는 작품들은 그것이 큰 시장적 영향력을 가질 때조차도 어딘가 삶의 에너지가 박제된 것처럼 느껴진다. 왕궁이나 신전이 시정에서 멀어짐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을 다한 것과 비슷하게, 예술가들의 집단주거나 작업실도 생활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곤 한다. (중략) 여러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미술관들은 고정된 장소에 놓여 있다. 작품의 전시나 상영 혹은 공연은 그 장소에 가 야 만 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작년 7월 15일부터 30일까지 부평 콜트콜텍 공장에서는 ‘인천시 부평구 갈산동 421-1 콜트콜텍전시회’가 열렸다. 폐쇄된 공장이 미술관으로 바뀐 것이다. 그곳은 기타를 만드는 공장이었지만, 회사가 2007년 경영악화를 이유로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고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해외공장을 만든 후 폐쇄된 상태였다. 노동자들은 해고무효투쟁을 벌였고 2,000일을 맞은 때에 노동자들을 예술적으로 돕기 위한 방법으로 19명의 개인작가와 두 개의 작업그룹이 공장에서 이 전시회를 연 것이다. 미술관은 건물관리인들의 방해와 협박에 대항하면서 형성되는 저항력만큼의 크기로, 그 현장의 기억들을 되살리고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불러내는 상상력만큼의 강도로 만들어졌다. 그 미술관은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일종의 ‘일시적 자율공간(TAZ: Temporary Autonomous Zone)’이었다.
  • 청평사
    Chung Pyeong Sa 청평사는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674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면적 43,098㎡의 고려시대 사찰로 고려 광종 24년(973) 영현선사에 의해 백암선원으로 창건된 이후 보현원, 문수원으로 불려오다 조선 명종 때 보우선사에 의해 중건 및 정원조영이 이루어졌다. 사찰 일원은 아늑한 분지형을 이룬 입지환경 속에 계곡, 영지(影池), 소(沼), 반석(너럭바위), 기암괴석, 폭포 등이 어우러진 천혜의 산수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명승지로, 경내에는 회전문, 경운루, 대웅전, 극락전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84년 12월 28일 강원도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 The Chung Pyeong Sa is the Korean traditional Temple in Cheongpyeong-ri, Buksan-myeon, Chuncheon-si, Gangwon-do and it had been built in Gwang-Jong's period(973) in Korea dynasty. The location of the temple has aesthetics of the adaptation as the symmetry of Buddhism, and the harmony of the nature and Human work. The area of the temple is 43,098㎡ and it is basically made up of Hoejeonmun, Gyeongullu, Daeungjeon, Geungnakjeon. It is connecting with condition of the selecting of the building area by environment and aesthetic. It appointed as the Gangwon-do monument 55 at 1984.
  • 학림다방
    Hakrim Teahouse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추억의 장소에 간다. 반면 뜻하지 않는 곳에서 그리운 장소를 만날 수도 있다. 학림다방, 대학로에 있는 그곳이다. 꼬불꼬불한 계단을 아스라이 넘어가면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도심 속의 멈춤이라 할까. 창덕궁 답사를 마치고 홀로 이곳저곳 발길이 이끄는 곳으로 갈 찰나, 윤보람 학생성균관대학교이 시골 촌놈에게 학림다방을 소개해 주었다. 1956년 문을 연 학림다방은 그 유래가 남다르다. 서울 문리대의 옛 축제명 ‘학림제’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학림다방은 철학, 문학, 예술을 논하던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이 되어 문리대의 제25 강의실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황동일’의 문구가 쓰여 있다. “…학림은 현재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현대의 시간 위에 과거를 끊임없이 되살려 붙잡아 매두려는 위태로운 게임을 하고 있다. 이 게임은 아주 집요하고 완강해서 학림 안쪽의 공간을 대학로라는 첨단 소비문화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고립된 섬처럼 느끼게 할 정도이다.…”마치 선언문과 같은 그의 문구를 읽고 삐꺽거리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학림다방의 돛대에 몸을 맡겼다. 가장 나의 시선을 잡은 것은 2층으로 된 구조이다. 천장이 낮은 2층에 올라가면 사랑을 속삭이거나 조용히 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갈색 기둥과 난간 그리고 벽면에는 베토벤 석고 두상과 유명 지휘자들의 사진, 클래식 LP판들이 걸려있고, 관록이 붙은 테이블과 빛바랜 의자는 오래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막상 다방에 올라가보니 낯설지 않은 기억들이 중첩되었다. 생각해 보니 1990년 서울대 의대를 다니고 있던 친구를 기다리기 위해 들렀던 다방이었다. ‘학림’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는 테이블은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의 지훈최다니엘 분과 세경신세경 분의 추억의 장소로 촬영되었던 곳이었다. ‘지훈이 다녀가다’라는 낙서 밑에 ‘세경이도 다녀가요’라는 낙서 장면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장면이다. 처음에는 ‘다방’이라는 단어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 곳에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2030세대에서 노신사들까지 함께 공간을 향유하고 있었다. 나중에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강의가 없을 때면 혼자서 자주 들렀던 곳이라고 했다. 혼자 있기에도 어색하지 않은 무언가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라 덧붙였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나이가 지긋하신 노신사들. 문득 그분들이 당시 서울 문리대를 다녔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그 분들과 인터뷰를 시도했다. 한 분은 파리에서 몇 일전에 도착했고, 옛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들렀다고 했다. 그분은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아래에 센강이 흘렀지. 그 센강 위에는 조그마한 다리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 다리를 ‘미라보센강 위의 다리’라 불렀어.” 정도상의 소설 ‘누망’에도 당시 대학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신사들의 기억에는 낭만적인 파리의 센강과 미라보 다리로 기억되었다. 그렇다면 1960년대 이곳에서 젊음을 보낸 이들은 왜 파리로 기억하고 있을까. 시대적으로 암울했던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젊음의 꿈과 희망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 천변산책
    Walk the Riverside 천변(川邊)을 걷습니다. 폭 2미터가 채 안 되는 시멘트 길입니다. 천川의 양쪽 둑길에도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긴 합니다. 그러나 나는 둑길에서 내려와 물가로 낸 시멘트 포장길을 매번 걷습니다. 이 길을 더 선호합니다. 물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입김을 내뿜으며 걷습니다. 녹지 않은 눈이 사람들의 발길로 단단하게 다져져서 길은 미끄럽습니다. 이 길은 집 가까이에서 찻소리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람들이 많은 시간대를 피하면 혼자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겨울이고 밤입니다. 가로등 불빛 때문에 어둡지는 않습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두운 밤길을 달빛과 별빛을 의지해서 걸었던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합니다. 천변(川邊)을 걷습니다. 물론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뜨문뜨문 하나둘씩 이어지면서 만들어낸 천변 산책길이 아닙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만들어지는 길 말입니다. 이 길은 조경(造景)된 길입니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원래 있던 자연하천과 그 주변이 단지 내 공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파트 단지가 끝나는 곳에서 천변 산책길도 끝이 납니다. 여기에서부터 하천은 원래의 모습이라 짐작되는 상태입니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하천에는 마른 물풀들이 눈에 덮인 채 가득합니다. 마른풀과 쌓인 눈 때문에 물길도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천 양쪽 가장자리로 풀이 무성한 곳에 내가 걷고 있는 산책길이 조성된 것입니다.
  • 하회마을 양진당
    Hahoemaeul Yangjindang 하회마을 양진당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동 729-4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조선 선조(宣祖) 때 대유학자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이 거주했던 반가주택으로, 가옥의 전체 구성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행랑채, 사당 등이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06호 지정되었다. The Yangjindang is the Korean traditional upper classes house in Hahoemaeul, Pungcheon-myeon, Andong-si, Gyeongsangbuk-do. It had been built in Sunjo’s period in Joseon dynasty. It is in important position to analogize technique of the arrangement of the house reflected factors of the Pung-su(divination by configuration of the ground). The factors are name of the town, topography and arrangement of the Sarangchae(the men’s part of a house) and Anchae(the main building of a house). The area of the house is basically made of Hangrangchae(servants’ quarters), Sarangchae(the men’s part of a house), Anchae(the main building of a house). It is connecting with condition of the selecting of the building area by environment and aesthetic.
  • 핍스 식물원
    Phipps Conservatory and Botanical Gardens 지속가능한 조경과 친환경 디자인의 선두자 고풍이 넘치는 건물들이 즐비한 피츠버그 대학교 중심가를 지나 도착한 곳은 빅토리아 양식의 돔 모양으로 웅장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핍스 식물원’이다. 멀리서부터 방문객을 양팔 벌려 환영하듯 온실의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있는 웰컴센터(Welcome Center)에는 높게 솟아 있는 유리 온실의 투명창 아래로 환하게 쏟아지는 햇빛으로 따뜻함이 가득했다. 이 온실에서 2009년 기후변화에 대한 해법을 주요 의제로 다루었던 제3차 G20 정상회담의 업무 만찬이 열렸다고 하니 왠지 더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세상엔 정말 내로라하는 식물원들이 참 많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핍스의 역사핍스 식물원은 1893년 헨리 핍스(Henry Phipps, Jr.)가 피츠버그 시에 안겨준 선물이었다. 세계적인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의 절친한 친구였던 헨리 핍스는 카네기철강회사의 경영 파트너이자 성공적인 부동산 투자자였다.그는 또한 박애주의자로서 상당한 시간과 돈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는데, 피츠버그 시에 교육의 원천이자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의 뜻은 당시 부흥했던 도시미화운동(City Beautiful Movement)과 시기적으로 잘 맞아 떨어졌고, 산업적으로 가장 전성기를 구가했던 피츠버그 시에 원예의 최상을 보여주는 온실의 건립으로 이어졌다.이는 20세기로의 전환 시기에 도시와 공원 개발에 있어 피츠버그를 미국과 유럽의 주요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핍스 온실은 뉴욕의 로드 앤 번햄(Lord & Burnham) 사에 의해 설계되었고 강철과 유리를 이용한 빅토리아 양식으로 약 10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그리고 온실의 정원 조성에는, 같은 해인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컬럼비아박람회(World’ Columbian Exposition)에 사용되었던 식물들이, 전시가 막을 내린 후 핍스 온실로 대거 도입되어 식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