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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ive
밀라노의 꿀벌과 생태적 상상력
지난 5월 1일부터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지구 식량 공급, 생명의 에너지Feeding the Planet, Energy for Life’라는 주제로 ‘2015 밀라노 엑스포Milano Expo 2015’가 열리고 있다. 140여 개국이 참여한 이번 박람회는 건강한 삶을 보장하고, 안전한 음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제공하며, 그와 동시에 보다 회복탄력적인 지구 환경을 만들 수 있는 방식을 찾고자 기획되었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으고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전 세계적 공통 담론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박람회장 한 편에 이러한 주제와는 맞지 않아 보이는 공간이 하나 있다. 이 공간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내부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와 예고 없이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하는 불빛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이례적 공간은 지속가능성, 구체적으로는 식량과 자원을 주제로 한 이번 박람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벌통, 그 이상
이번 박람회에 참여한 국가 중 상당수가 기술적·공학적 연구 결과를 통해 지속가능한 식량 및 자원 공급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에 반해, 영국 팀은 노팅험Nottingham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볼프강 버트리스Wolfgang Buttress의 주도하에 ‘하이브The Hive’라 불리는 거대한 ‘벌통beehive’을 선보였다. 우리가 먹는 곡물과 과일의 3분의 1은 꿀벌의 수분에 의존한다.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100대 농작물만 보더라도 무려 71%가 꿀벌의 수분에 의존하고 있다. 그 중 사과, 딸기, 양파, 호박, 당근은 90%를 꿀벌의 수분에 의존하며, 아몬드의 꿀벌 수분률은 무려 100%에 달한다. 그린피스Greenpeace는 전 세계 꿀벌의 노동 가치를 373조 원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국내의 경우 꿀벌이 수분 작용에 기여하는 경제적 가치가 6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즉, 꿀벌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우리 먹거리의 상당수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이 하이브의 모티브가 되었다. 생산자(식물)의 생산자(꿀벌)를 살려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계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박람회장에서 이와 같은 수치적 내용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버트리스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꿀벌의 수에 대한 위기의식이 대두된 지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경험이 생태계의 상호 관계성과 꿀벌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며 디자인 의도를 설명했다. 하이브에는 숫자와 관련된 내용은 전혀 없다. 단지 사람들이 꿀벌의 하루를 체험하도록 할 뿐이다.
꿀벌의 일상을 경험하다
벌통으로의 여행은 과수원에서 시작된다. 과일향이 가득한 과수원을 지나고 나면, 야생화로 가득한 초지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눈높이만큼 높게 자란 야생화가 가득한 길을 따라 걸으면, 마치 꽃 속에서 꿀을 채취하는 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직선 구역을 지나면 ‘벌들의 춤’ 구역이 나온다. 사람들은 직선으로 날지 않는 벌꿀처럼 잠시나마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지그재그로 이동하며 벌통(하이브)에 도달하게 된다. 32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이브에는 총 169,300개의 부품이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부품이 철골 구조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철골 구조의 거대함에 이끌려 내부로 들어온다. 그러나 버트리스는 이런 물리적 요소보다 내부에서 들을 수 있는 청각 신호와 볼 수 있는 시각적 신호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밝혔다. 내부를 향해 소리와 진동을 전달하는 다수의 스피커는 노팅험의 한 벌통에 설치된 센서와 연결되어 있다. 실제 꿀벌들의 신호 체계에 대한 분석과 진동 정보가 혼합된 정보가 밀라노의 하이브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변환되어 전달된다. 내부는 물론 외부를 밝히는 수천 개의 LED 전구 또한 노팅험의 벌통에서 꿀벌들이 만들어 내는 작은 진동에 반응한다. 전구 하나하나가 꿀벌 수백 마리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전달하여 발광하는 것이다. 사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에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정말 꿀벌과 대화하는 것이냐”며 신기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귀가 간지럽다며 서둘러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다. 자꾸 깜빡거리는 전등을 보고 “고장난 것 아니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많다. 버트리스는 “이렇게 생물의 생명력을 과학과 예술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하려는 시도가 잘 전달되지 않을 수도, 무의미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지금 저 멀리 수천 마일 떨어진 노팅험의 벌꿀이 모두 멸종된다면, 이곳 밀라노(의 하이브)에도 아무런 생명의 흔적이 없을 것”이라며 하이브가 꿀벌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지길 바랐다.
아인슈타인은 “지구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인류도 멸종하게 될 것이다”라며 꿀벌이 전 지구적 환경과 인류를 존속시키기 위해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꿀벌의 수가 20~40% 감소하고 등 세계 도처에서 벌꿀의 밀도가 갑자기 감소하는 현상이 보고되고 있다. 관련분야의 과학자들은 해결책을 품종 개발 등의 기술 개발에서 찾고 있지만, 여러 환경 단체는 기후 변화, 농약 중독, 밀집 사육 등 꿀벌의 생장 및 활력에 영향을 주는 원인을 먼저 해결하지 않는 이상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도 하다.
분명 원인은 복잡하고 해결책은 불분명하다. 영국 팀은 하이브를 통해 공기알만한 크기에 불과한 꿀벌이 전 지구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6개월이 지난 시점에 하이브를 경험한 수많은 ‘인간 꿀벌’들의 크고 작은 생태적 상상력이 전 지구적인 변화로 이어지길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 이번 박람회는 10월 31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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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조경비평상 심사평
총 네 편 출품, 조경비평 봄 심사
‘2015 조경비평상’에는 총 네 편의 작품이 출품되었습니다. 심사는 ‘조경비평 봄’ 회원들이 맡았습니다. 심사자마다약간의 견해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인 심사 기준은 문제의식의 독창성과 주장의 타당성, 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완성도, 비평가로서의 태도와 문장력이었습니다.
이번 응모작들은 비평의 소재가 다양화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의 작가나 작품 위주의 비평을 넘어 일상의 경관(응모작1, 2, 3)과 조경가 혹은 조경계의 문제(응모작4)로까지 비평의 대상이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객관적 서술을 지향하는 글쓰기 못지않게 주관적인 서술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도 절반을 차지했습니다(응모작2, 4). 작가가 있는 작품에 대한 비평에 비해 일상을 소재로 한 비평이 불리한 것은 아닙니다. 주관적인 서술 스타일의 글이 비평으로서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소재와 스타일에서 참신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비평’의수준과 완성도가 문제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번 응모작들은 다소 미흡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네 편의 글에서 장점 또한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서 그 장점에 대해 주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응모작1. ‘일상의 풍경을 새롭게 보기 - 가로수’는 지적 의욕이 넘치는 글입니다.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자료 조사와 준비를 충실히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데이터와 정보를 근거로 한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저자가 그 근거를 바탕으로 무엇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호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구조도 부실했다는 것이 공통된 심사 의견이었습니다. ‘가로수’와 ‘가로’에 대한 문제의식의 혼란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응모작2. ‘위로의 산책’은 문장 자체가 편안하게 읽힙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주관적인 시점으로 서술하는 형식에 대해서는 심사위원의 평가가 엇갈렸습니다. 이런 서술 방식은 비평문으로서 부적합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참신한 전략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사적인 것을 넘어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글 자체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글은 그 문턱을 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공간에 대한 저자의 기억, 감정, 생각 등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을 글로 풀어 쓴 부분과 공간에 대한 주관적인 분석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응모작3. ‘무제’는 삼청동을 ‘권력의 공간’으로 읽으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이 글은 권력의 의미를 정치권력 외에 자본권력으로 확장하여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권력을 이렇게 정의했기 때문에 삼청동이라는 장소 선택은 퍽 흥미로워집니다. 삼청동이 청와대로 대표되는 정치 권력과 최근의 상업 및 자본 권력이 함께 나타나는 권력 중심지가 되었다는 관점입니다. 이렇게 저자는 삼청동의 장소 특성을 논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잘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에서 삼청동만을 대상으로 한 고유한 논의가 이루지지 못했고,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한 기존 논의의 반복에 머문 점이 아쉬웠습니다.
응모작4. ‘건축가 아닌 승효상 탐구 - 어느 30대 조경가의 길 찾기’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몰입도가 강한 글입니다. 문제의식과 주장이 선명하고 문장 자체가 잘 읽힙니다. 개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글은 우선 진실하고, 성공할 경우 우리 모두의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조경가로서 자신의 진로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경계의 문제 해법을 건축가 승효상과 건축계의 성공 전략에서 찾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자칫 무비판적이고 순진하게 비춰질 위험이 있습니다. 세련미와 참신한 대안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네 작품 모두는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의 목표 지점까지 완주하는 지구력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각자의 장점을 더욱 살리고 짜임새 있게, 끝까지 힘 있게 글을 쓴다면 좋은 비평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사를 하면서 입상작을 내지 못한 결론이 심사자들에게 부담스러웠습니다. 이런 결과가 조경비평의 앞날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매 회마다 반드시 수상작을 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가능성의 문은 늘 열어두되 그
결과에 조급해 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당선작이 없어도, 가작 한 편 없어도 매년 신진 조경비평가의 등용문을 마련하는 주최측의 ‘은근과 끈기’를 응원합니다. 내년에는 조경비평상에 부합하는 글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심사평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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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IFLA 세계대회
아직 오지 않은 조경의 역사를 논하다
지난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제52회 세계조경가협회 세계대회World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IFLA)’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됐다. 최근 러시아는 매년 새로운 조경 디자인, 논문, 전문 서적이 쏟아져 나오는 등 ‘조경의 호황기’를 맞고 있다. 조경에 대한 시민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고, 국가적으로도 조경의 잠재력을 인지하고 경제적·정책적 뒷받침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번 IFLA 세계대회는 러시아에서는 처음 개최된 것으로 총 35개국에서 304명의 관련 전문가가 참여했다.
‘미래의 역사History of the Future’를 중심 의제로 제시한 이번 행사에서는 잃어버린 경관의 재건과 재생의 사례를 바탕으로 조경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도전과 기회에 대해 폭 넓은 논의가 전개됐다. ‘미래의 역사’를 위한 사흘간의 토론 이번 세계대회는 세 개의 세션으로 구성되었고, 총 95개의 세부 사례와 연구 발표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첫 번째 세션, ‘동에서 서로: 현대 조경의 통합과 혁신’에서는 현대 조경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어떠한 연구방법론이 필요한가에 대한 발표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 아시아와 유럽 모두에 속한 러시아에서 어떤 조경이 펼쳐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토픽이 주목을 받기도했다. 두 번째 세션, ‘21세기의 역사와 자연 경관: 보전, 재건, 복원을 중심으로’에서는 문화 유산의 보전과 역사적 장소에 대한 생태적이고 지속가능한 복원 및 재생에 대해 미국, 러시아, 터키, 중국, 스웨덴 등 각 국가의 사례 연구가 발표됐다. 지형학적, 생태적,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른 각기 다른 해법을 공유했다. 세 번째 세션은 ‘그린-블루 인프라스트럭처와 지속가능한 도시 개발’을 주제로 미래 도시의 오픈스페이스 활용과 미래지향적 도시 시스템 등이 논의됐다. 워터프런트 리노베이션 프로젝트, 워터프런트 시티, 에코시티,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문제, 미생물 연구를 통한 조경 분석, 돌로 만들어진 식재 기반 연구등 미래 도시의 오픈스페이스와 시스템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주를 이루었다.
2015 IFLA 세계대회의 주요 주제 발표
사흘 동안의 본 회의에 앞서 매일 두 개의 기조 발표keynote presentation가 진행됐다. 러시아에서 개최된 만큼, 러시아 주요 도시의 도시 경관 개선 프로젝트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1일차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총괄 조경가인 라리사 카누니코바Larisa Kanunnikova가 ‘경관 시나리오’를 주제로 향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행될 경관 개선 사업을 개괄했다.‘생명을 위한 장소들 Places for Life’을 키워드로 도시 속에 녹색 인프라스트럭처를 구성할 것이라 밝혔다.
2일차 회의에 앞서 세르게이 쿠슈네트소프Sergey Kusnetsov 모스크바 총괄 건축가는 ‘2035 모스크바 강변 개발 사업’을 주제로 모스크바 강 주변 10,400헥타르 면적에 펼쳐질 대규모 경관 개선 및 도시 인프라 구축 사업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사업은 2014년 모스크바 시정에서 주최한 공모전의 당선작인 ‘메가놈 프로젝트Meganom Project’(설계: SUE Research and the Project Institute)를 기반으로 진행된다. 같은 날, 중국 투렌스케이프Turenscape의 조경가 콩지안 유Kongjian Yu는 ‘도시의 자연 속에 딥폼Deep Forms 만들기’라는 제목의 기조 발표를 하기도 했다. 딥폼은 다랭이 논과 같이 인간이 오랫동안 자연과 함께 지내면서 만들어낸 형태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딥폼 방식의 예로 자르고 채우기, 틀 세우기, 관개와 토지 개량, 수확을 제시하며, 이를 도시 속에 자연 환경을 재건할 때 적용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홍수, 가뭄, 황사, 기근 등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에 대한 조경적 해결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스웨덴 농업과학대학교Sweish University of Argriculture Sciences의 마리아 이그나티에바Maria Ignatieva 교수가 ‘러시아의 조경: 동서양의 상호작용’을 주제로 1900년대 초부터 1990년대까지 러시아의 사회문화적 변화 흐름 속에서 조경이 어떤 역할을 해왔고 어떤 영향을 받아왔는지 해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유라시아 지정학적 영향권에서 큰 다양성을 갖게 된 러시아의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세계화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오픈스페이스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에 많은 청중이 주목했다. 한편 같은 날, 올가 밀리샤Olga Militsa 러시아 국가문화유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러시아의 역사적 정원과 공원에 대한 주state 단위 관리 시스템’이란 기조 발표에서 러시아 오픈스페이스의 변화 양상과 현재를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사례로 제시하며 설명하기도 했다.
한국인 발표
이번 세계대회가 끝나고 게재된 리뷰 글에서도 여러번 언급될 만큼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의 주제 발표가 큰 관심을 끌었다. 한국에서는 김준현(서울대학교), 윈쟈엔(서울대학교), 황주영(서강대학교) 등이 세션 발표자로 나섰다. 김준현은 ‘공원 설계와 정치의 경계에서’를 통해 정책 결정권자가 공원 설계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정치 이데올로기가 공원 설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는 어디인가, 정치 영합적으로 조성된 공원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 윈자엔은 ‘상하이 스쿠먼Shikumen 경관: 과거, 현재, 미래를 엮어내다’를 발표했는데, 스쿠먼의 ‘신천지Xintiandi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 1990년대 이후 중국과 서양의 건축 문화 양식이 융합되는 과정을 해석했다. 황주영은 ‘예수회Jesuits로부터 유입된 시느와즈리Chinoiserie 취미에 대하여’에서 조경의 유입 경로에 새로운 의견을 개진했다. 흔히 조경은 서구에서 동아시아로 유입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17~18세기에 유럽의 정원 문화는 중국의 시느와즈리(중국 예술풍의 일종)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밖에 심지수(서울대학교), 유수진(고려대학교), 이명준(서울대학교) 등이 포스터 발표자로 참가했다.
2016년은 이탈리아 튜린에서
제53회 세계조경가협회 세계대회는 이탈리아의 튜린Tulin에서 2016년 4월 20일부터 22일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내년의 의제는 ‘테이스팅 더 랜드스케이프Tasting the Landscape’로, 환경, 경제, 사회적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문성으로 경관을 다루는 다양한 접근과 경험이 발표, 토론될 것이다. 참가를 원하는 조경가와 학생은 오는 8월 10일까지 영문 초록과 관련 서류를 공식홈페이지(http://www.ifla2016.com/)에 제출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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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향한 건축가들의 여정
‘아키토피아의 실험’, 2015.6.30~9.27
건축가들은 때로는 파격적이었고, 낭만적이기도 했으며, 내밀하게 욕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키토피아의 실험’ 전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건축가들의 여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펼쳐졌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키토피아의 실험’은 건축architecture이 꿈꾸는 유토피아utopia, ‘아키토피아architopia’를 쌓아올린 건축가들의 사회적 실험을 영상, 그래프, 텍스트, 사진 등 다양한 매체로 소개한다.
건축가, 사진가, 비평가, 미디어 아티스트, 만화가, 그래픽 디자이너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 22명이 참여해 전시를 구성했다.
도시의 괴물, 세운상가의 꿈
이번 전시는 건축의 꿈과 욕망이 투영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키토피아로 세운상가, 파주출판도시, 헤이리 아트밸리, 판교 신도시를 꼽으며 이들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본다. 전시의 첫 장 ‘유토피아의 꿈’을 여는 세운상가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괴물 빌딩’1으로 불리는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가이지만 그 시작은 화려했다.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라는 뜻의 ‘세운世運’ 상가는 김현옥 전 서울 시장의 진두지휘 아래 1968년, 국내 최초의 주상 복합 건물로 완공되었다. 당시 세운상가의 설계를 맡았던 젊은 건축가 김수근은 쪽방과 판자촌이 즐비하던 소개 공지에 옥상 정원, 건물과 건물을 잇는 공중 보행로, 건물을 유리로 덮는 아트리움 등 도시의 구조를 건축물에 압축한 파격적인 설계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시공사가 8개 회사로 조각나면서 당초 설계대로 진행되지 못한 채 완공되었고 반짝 인기를 끌었다가 19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건축가 김수근의 세운상가 기본 설계 도면을 5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한다. 또한 당시의 신문 기사, 홍보 전단지, 관련 문서 등을 통해 세운상가의 번영과 쇠락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이곳에 움트고 있는 새로운 미래에 주목한다. 전시를 기획한 정다영 학예사는 세운상가에 대해 “기본 설계 도면을 보면 원래 아주 미려한 건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메타볼리즘을 보여주는 진보적인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당시 실현되지 못한 건축가의 꿈이 미래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건축가의 작업실을 옮겨온 듯한 전시의 배치는 관객을 세운상가와 그 일대의 청사진을 그리는 건축가의 치열한 고민의 현장으로 데려간다.
유토피아의 낭만과 현실
파주출판도시의 퇴근 시간, 사람들은 거리가 스산해지기 전에 서둘러 셔틀버스에 올랐다. 파주와 서울을 오가는 출퇴근 셔틀버스는 언제나 만석이었다. ‘출판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꿈의 도시’를 꿈꾸며 야심차게 출범한 출판도시의 밤거리와 주말 카페 테라스엔 도시로서의 생명력이 부족하다. 파주에 근무하는 직장인 500명을 설문 조사해 출퇴근 시간과 거리를 인포그래픽으로 나타낸 옵티컬레이스의 작품 ‘출판단지 가는 길’(2015)은 출판도시의 스산한 밤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파주출판도시와 헤이리 아트밸리는 기존의 마스터플랜 식의 도시 개발의 대안으로 건축 코디네이터 개념을 도입해 출발한 도시다. 1부에서 소개한 세운상가가 1960년대 후반 기존 도심지에 정부 주도로 세운 아키토피아라면 2부 ‘건축도시로의 여정’에서 소개하는 파주의 사례는 1990~2000년대 도시 외곽에 민간이 주도해 이룩한 아키토피아다. 2부는 생태 도시, 민주적 도시, 문화·예술의 도시의 낭만적인 기치 아래 이룩된 아키토피아가 도시로서의 기능을 자족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상업주의와 절충하는 모습을 비춘다. 배형민, 정다운의 공동 영상 작업 ‘목소리의 방’(2008)을 통해 파주출판단지를 둘러싼 건축가, 건축주, 주민 등의 다양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의 이율배반
3부 ‘욕망의 주거 풍경’은 2000년대 이후 젊은 건축가들의 데뷔 무대가 되고 있는 판교 단독주택 단지를 조명한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로 서울로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형성된 판교 단독주택 단지는 건축가와 건축주의 욕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저밀도 신도시다. 도시근교에서 여유와 멋이 있는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는 건축주의 요구와 자신의 철학과 개성이 담긴 작품을 짓고 싶어 하는 건축가의 이상이 맞물려 탄생했다. 판교 단독주택 단지는 도시와 동떨어진 반쪽 도시가 아니라 주민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삶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파주의 사례와 다른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판교의 ‘저녁이 있는 삶’은 이율배반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건물 크기에 비해 좁고 작은 창문을 가진일련의 단독 주택을 촬영한 이영준의 사진 작품 ‘왜 판교는 창문을 싫어할까’(2015)는 이웃과 함께 하는 ‘저녁’이 과연 판교에서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게 한다. 이웃과 소통하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의미에서 담장을 만들지 못하게 한 규정은 오히려 단지 곳곳에 무인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고 주택의 창문을 극도로 작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최호철의 일러스트 작품 ‘판교택지개발지구-돈이 자라는 땅’(2005)은 평범한농촌 마을이 신도시 개발 붐으로 인한 부동산 투기로 어수선해진 모습을 묘사했다.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욕망이 누군가의 소박한 저녁을 망가뜨리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 직후, 백지와 같던 도시의 밑그림은 어느새 빽빽한 획으로 들어찼다. 저성장 시대, 앞으로 건축가들은 아키토피아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실험을 펼칠까. 이번 전시는 건축가들이 지금까지 펼쳐온 실험의 부산물과 열매를 소개하며 미래의 아키토피아에 대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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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만지고 즐기는 ‘지붕감각’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2015
지난해 구름 풍선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신선놀음’에 이어 올해는 파동 형태의 거대한 지붕이 미술관 마당을 뒤덮었다. 갈대를 엮은 발로 만든 지붕이 바람에 너울거리듯 커다란 파동을 이루며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뉴욕현대미술관(MoMa-PS1), 현대카드와 함께 여는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8_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2015’는 올해의 최종 건축가로 SoA(이치훈, 강예린)를 선정하고, 작품 ‘지붕감각’을 지난 7월 1일 선보였다.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Young Architects Program(YAP)은 뉴욕현대미술관이 신진 건축가를 발굴하고, 이들에게 프로젝트 기회를 주기 위해 1998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공모 프로그램이다. 칠레(CONSTRUCTO), 이탈리아(MAXXI), 터키(Istanbul Modern)의 유명 미술관과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각국의 젊은 건축가를 발굴하고 있으며, 지난해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 도입되었다. ‘지붕감각’은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9월 30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극대화된 지붕의 감각
최종 건축가로 선정된 SoA는 미술관 주변의 북촌 한옥마을과 경복궁의 지붕에서 영감을 받아 이번 작업을 진행했다. 오늘날 점점 사라져가는 지붕의 느낌을 되살려보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지붕의 형태를 수직적으로 왜곡하고 과장시켜 시각적 경험을 극대화시켰다. 또한 커다란 갈대발을 재료로 이용해 비와 바람에 스치는 갈대발의 소리와 움직임, 발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발이 만들어내는 그늘의 시원함을 동시에 체험하게 한다.
지붕은 폭 1.5m, 길이 2.5km의 갈대발을 엮어서 만들었다. 강예린 SoA 소장은 “근 두 달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애타게 돌아다니며 ‘갈대발’을 생산하는 곳을 찾아보았지만, 한국에서는 더 이상 ‘갈대발’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작업 과정 중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했다. 결국 SoA 팀은 중국 산둥 지방의 가장 큰 늪지대에서 갈대발을 생산하고 있는 마을을 찾아 3대째 갈대발을 만들고 있는 장인을 섭외해 갈대발 지붕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고정관념을 부수는 대안 건축
‘지붕감각’은 2차원적인 형태의 갈대발을 철골 지지물에 ‘걸어’ 3차원의 공간으로 구현했다. 따라서 지붕감각은 갈대발을 말아 올리거나 걷어서 상황에 따라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갈대발은 소재의 특성상 덥고 습한데다 때로는 태풍까지 몰아치는 한국 여름 기후에 풍화되거나 마모되기 쉽다. 기후 상황에 따라 갈대발을 걷어 보관하고 마모된 부분은 여분으로 만들어 둔갈대발을 이용해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지붕감각’의 이러한 특징은 ‘건축은 한번 지어지면 변형할 수 없는 고정적인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부수고 대안 건축의길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안과 밖, 반전의 묘미
‘지붕감각’의 가장 큰 묘미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느슨하면서도 안과 밖에서의 체험이 극명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작품 밖에서는 지붕감각의 거대한 크기와 과장된 형태가 시선을 사로잡지만, 내부로 들어오면 소리, 향, 촉감 등 미시적 요소의 경험이 두드러진다.
당초 ‘지붕감각’의 내부 조경은 단순히 지형을 구축하고 잔디를 입히는 설정이었지만 롤 잔디의 비용과 관리 문제, 급박한 시공 일정 등으로 인해 불가능하게 되었다. 안기수 부장(울림조경), 김지환 과장(Studio L)과 함께 팀 동산바치를 결성해 ‘지붕감각’ 조경 부분의 설계와 시공을 진행한 최영준 소장(Laboratory D+H)은 “현장에서 테스트를 거쳐서 바닥 재료로 최종 확정된 바크는 우려와는 달리 철골 구조물을 안정적으로 받치고 소나무 수피 고유의 향을 공간 내부에 가득 채워 ‘지붕감각’의 감각을 진하게 더해주었다”고 전했다. 갈대발이 드리우는 그늘과 부드럽게 밟히는 소나무 바크, 수크렁과 관중 등의 식물이 어우러진 갈대발 내부로 들어오면 마치 숲 속을 걷는 기분이 든다. 갈대발을 지지하는 철골 지지대가 내부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서 철재의 차가운 재질감을 완화시키고 기둥의 위압감을 줄이기 위해 둥근 마운드를 조성하고, 그곳에 여러 종류의 식물을 식재했다. 그중 가장 높게 쌓은 둔덕 위로 매트를 깔아 동선을 만들고 갈대발에는 구멍을 뚫어 안과 밖을 넘나드는 이질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최영준 소장은 “우리 팀이 가장 특별히 생각하는 둔덕이었는데, 미술관 측에서 이 마운드에 대해 ‘무덤 같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작가의 의도를 앞세우기 전에 공간에 대한 공공의 보편적인 인식도 존중해야 된다는 점에 수긍하고, 약간의 추가식재를 통해 논란을 잠재웠다”고 둔덕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미술관 제 8전시실에는 최종 우승팀과 최종 후보군의 설계안과 뉴욕, 칠레, 이탈리아, 터키에서 진행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우승팀의 작품이 전시된다. 한여름, 도심 속 피서지를 선물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뜨거운 계절을 지나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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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기지의 공원화와 세계유산 등재
용산공원 세계문화유산적 가치 규명 학술대회
지난 7월 24일 서울시립미술관 세마홀에서 ‘용산공원의 세계유산적 가치 규명 학술대회’가 열렸다. 용산기지는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을 계기로 지난 100여 년 간 일본군 병영(1904년~1945년)과 용산미군기지(1945년~현재)로 사용되어 온 곳이다. 서울시는 2014년 3월‘역사도심 관리 기본계획’에 따라 근대 건축 분야 전문가 자문을 통해 용산공원이 세계문화유산 등재 조건을 충분히 갖췄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으며, 2014년 11월 ‘용산공원’은 ‘한성백제유적’, ‘성균관과 문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 등재 추진 대상의 하나로 최종 선정되었다. 이번 학술대회는 용산공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치를 규명하고 그 타당성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로 마련되었다.
조광 위원장(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명예 교수)은 기조 강연 ‘용산공원의 문화유산적 가치와 보존’에서 “세계적인 도시 경쟁력 평가 항목에 문화 관광 분야가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중 세계문화유산의 개수를 주요 평가 지표의 하나로 강조하고 있다”며, 서울시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추진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조 위원장은 이를 위해 사료의 수집과 검증을 통해 명분을 수립할 것을 강조했다.
신주백 교수(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는 주제 발표 ‘동북아의 역사적 전개와 용산기지’에서 군사적 시설로 사용되어 온 용산기지를 동아시아 역사 흐름과 연계해 설명했다. 특히 일본군의 관점에서 용산기지가 중일전쟁의 후방기지 중 최전선 역할을 하게 되면서 100만 이상(2개 사단)의 군이 상주하기 시작한 시기(1916~1919년)와 제17방면군 사령부가 들어서게 된 이후 대미 작전의 최전방 사령부로 활용되는 시기(1945~1948년), 그리고 미군의 관점에서 한국전쟁 발발 이후의 시점에 집중하여 용산기지가 세계사적 측면에서 갖는 군사 역학적 중요성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신 교수는 이를 통해 “용산기지를 한국 근현대사를 넘어 동아시아사와 세계사가 중첩된 공간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용산기지를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식민의 역사와 냉전(분단)의 역사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반도의 역사를 ‘식민’으로 한정하는 실수를 범해 일본의 하시마섬 등 23개 일본 산업 시설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의 기준에 반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이어진 두 번째 주제 발표 ‘용산기지의 변화 과정을 통해 본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용산기지가 현재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김종헌 교수(배재대학교 건축학부, 배재학당역사박물관장)는 경성시가전도(1927)와 같은 지도나 다수의 배치도와 건축물 평면도 등의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1920년대 말 용산기지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서울의 중심에 “용산기지만큼 잘 보존된 근대 문화유산은 찾을 수 없다”며 용산기지를 ‘20세기’의 세계 유산으로 다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현재 제시된 용산공원 마스터플랜과 관련 계획은 이러한 역사적 유산의 현황을 잘 반영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며 보존해야할 유산과 보존 방식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촉구했다.
김 교수는 현재 용산기지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준Ⅱ, Ⅳ, Ⅵ1에 적합하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마지막 주제 발표로 진행된 ‘도시공백都市空白 용산공원의 의미와 가치’의 발표자로 나선 김인수 대표(환경조형연구소 그륀바우)는 더 나은 용산기지 공원화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했다. 그는 “용산공원은 이미 공원의 모습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며 공원을 만든다는 명목 하에 불필요한 토목 공사나 철거 행위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는 공원화 과정에서 ‘서울공원박람회’와 ‘중간 이용Zwischennutzung’과 같은 이벤트를개최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서울공원박람회는 엠셔파크Emscher Park나 모리스 로사 에어필드 공원Maurice Rosa Airfield Park처럼 독일에서 산업 문화 유산의 활용방안을 고민할 때 도입했던 정원박람회의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공원 조성과 같은 장기 프로젝트를 공공 이벤트화하자는 것이다. 실제 엠셔 파크는 버려진 제철소의 흔적을 공원과 문화 시설로 잘 활용한 사례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점에서 청중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중간 이용’은 본격적인 재생 이전에 시설의 활용 가능을 확인하고 그 이용 방식을 찾아내기 위해 제한된 시간 동안 일반 시민의 이용을 허용하는 실험적인 방법이다. 김 대표는 “100년이라는 장소·시간·기능의 공백을 채우기에 앞서 치밀한 기획이 필요하며 용산기지의 중요성과 그 상징성에 상응하는 다양한 실험이 필요하다”고 밝히며, 이벤트를 통한 시민의 의견 청취와 이용 행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토론은 조명래 교수(단국대학교 도시지역계획학과)가 좌장을 맡아 진행하였으며 최성자 위원(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송인호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소장), 한동수 교수(한양대학교 건축학부), 조건 연구원(동국대학교)이 참여했다. 토론자들은 대체로 용산기지(공원)의 세계문화유산적 가치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하지만 최성자 의원이 “공원화와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주제가 동시에 논의된다는 점은 의아하게 느껴졌다”고 밝힌 것처럼 세계유산 등재 추진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한동수 교수는 서울시가 제시한 ‘도시 경쟁력을 상승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명분에 문제를 제기하며 “세계 속의 용산공원을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 도시, 서울 시민의 삶 속에서 용산공원의 의미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정치·외교적 목적에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경향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 자격으로 의견을 개진한 강철기 교수(경상대학교 산림환경자원학과)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용산기지의 공원화 과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좋은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우리 스스로 없애버리는 건 아닌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김종현 교수는 군시설이라는 점의 민감성은 인정하면서도 “용산기지의 공원화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논하고 있지만 여전히 공개하지 못해 아쉬운 관련 정보가 너무 많다”며 더 나은 논의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보를 공개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보다 천천히 다루어야 하는 문제임에 분명”하다는 조명래 교수의 말처럼 100년의 공백 속 미지의 땅인 용산기지를 알아가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은 분명해 보인다. 관련 전문가들은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지난 100년의 용산기지의 가치에 대한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향후 100년을 바라봐야 하는 용산기지가 ‘공원화’와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두 가지 조금은 다른 길에 서있는 듯한 목표를 좇다 모두 놓쳐버리는 것은 아닌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서울시는 용산기지를 2023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용산공원은 용산미군기지 이전이 완료(2016년 말까지 평택으로 이전 예정)되는 시점인 2017년부터 2027년까지 1,156만m2 규모로 장기적이고 단계적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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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조경디자인캠프, ‘용산공원, 경계를 넘어’ 주제로
조경학도들이 뜨거운 여름을 보내는 법
유례없는 대형 오픈스페이스이자 한국 현대 도시사의 굴곡과 복잡한 도시 형태가 뒤엉켜 있는 용산공원과 그 일대는 지난 몇 년간 많은 조경가, 도시설계가, 건축가에게 섣불리 손대기 어려운 난제로 꼽혀왔다. 미래 조경가들은 용산공원의 경계부에 ‘도시 재생’의 해법을 어떻게 제시할까? 44명의 미래 조경가들이 초대형 공원인 용산공원과 다양한 주변 도시 조직의 경계에 적용할 수 있는 도시 재생의 실천적 해법을 탐색했다.
지난 7월 20일부터 31일까지 한국조경학회(회장 김성균)가 주최한 제22회 조경디자인캠프가 서울대학교에서 진행되었다. 배정한 교수(서울대학교)가 교장을, 윤희연교수(서울대학교)가 교감을 맡았다. 주제는 ‘용산공원, 경계를 넘어’. 이 까다로운 대상지에 장소 고유의 가치를포용하면서 새로운 방식을 덧대어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과제가 학생들에게 주어졌다.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가 ‘도시 공원의 사회적 가치와 거버넌스’를 주제로, 송도영 교수(한양대학교)가 이태원의 계층성과 인종성에 대해, 안창모 교수(경기대학교)가 용산의 100년간 이야기와 그 역사성에 대해, 김연금 소장(조경작업소 울)이 경리단길이 던지는 도시 재생에 대한 질문을 주제로 4일간 특강을 진행해 대상지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학생들은 사례지 답사를 통해 설계를 진행하는 대상지를 직접 걷고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을 스스로 파악해나갔다.
학생들이 그리는 용산공원 일대의 미래
조경디자인캠프는 최혜영(West 8), 강중구(AECOM Hong Kong) 튜터의 스튜디오 A, 김세훈(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김영민(서울시립대학교) 튜터의 스튜디오 B, 다니엘 오(고려대학교), 나성진(전 JCFO) 튜터의 스튜디오 C로 나눠 공원과 도시 조직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경계부―이태원길·서빙고, 남영동, 경리단길 일대―를 각 스튜디오의 대상지로 다뤘다.
스튜디오 A는 이태원길에서부터 서빙고로 이어지는 용산공원의 동측 경계 부분을 대상지로 다루며 도시속의 경계에 대해 고민했다. 대상지의 물리적·비물리적 특성을 이해하고 훗날 용산공원이 그 경계들과 어떻게 작동할지 상상함으로써 용산공원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해보고자 했다. 스튜디오 B는 남영동을 대상지로 삼아 공원과 도시의 매개를 탐구했다. 서울역을 관통하는 철도와 한강대교부터 시청까지 뻗어 있는 한강대로 사이에 위치한 남영동은 공원과 도시를 매개하는 연결 고리로서의 잠재력이 크지만 지금까지 도시의 낙후된 후면부로 남아있는 곳이다.스튜디오 C는 남산식물원과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시작해 용산공원으로 이어지는 경리단길을 대상지로 다루며 경계공간의 오픈스페이스를 어떤 방식으로 설계해야 할지 고민했다. 남산, 용산공원, 한강을 잇는 경계 공간이자 서울의 ‘길’ 문화와 ‘경사지’ 지형을 대표하는 경리단길의 오픈스페이스 디자인에 대한 실험을 통해 서울의 도시 공원들이 어떻게 서울의 변화에 긴밀히 대응하며 도시 재생의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탐구했다.
캠프의 마지막 날, 용산공원 경계부를 대상지로 한 총 15개의 작품이 제출되었고 학생들의 열띤 발표가 이어졌다. 서영애 소장(기술사사무소 이수),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 서예례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조용현 교수(공주대학교)가 리뷰를 맡았다. 대상은 공원과 도시 사이에서 중간적 성격을 띠는 남영동 일대의 오픈 스페이스의 면적, 도시 건축물의 용적률, 식재의 밀도 등에 변화를 주어 프로그램, 동선, 경험 및 활동의 볼륨을 증가시키는 안을 제안한 스튜디오 B의 ‘볼륨을 키워요’(한국전통문화대학교 김명조, 서울대학교 유지민, 청주대학교 윤병두)가 차지했다. 대상에게는 한국조경학회장상이 수여됐다. 최우수상에는 ‘Weave it’(부산대학교 김종명, 서울시립대학교 김병호, 서울대학교 신채영), ‘Operation of fabric: flexible entrance’(부산대학교 엄성현, 서울대학교 송기현)가선정됐으며 한국조경사회장상이 수여됐다. 우수상은 ‘녹사평, 초록으로 물들다’(경희대학교 백규리, 서울여자대학교 박지연, 계명대학교 손원석), ‘전망, 전망’(청주대학교 김용환, 서울여자대학교 구수진, 서울대학교 이호상), ‘Project CC’(서울시립대학교 이진선, 강원대학교 김서현, 럿거스대학교(Rutgers University) 최우석)가 차지했다. 또한 올 해부터 학생들의 투표를 통해 각 스튜디오별로 한 명씩 인기상을 시상했다. 김예지(동아대학교), 안로사(부산대학교), 이호상(서울대학교) 학생이 인기상의 영예를 안았다.
대상을 수상한 김명조 학생은 “밤을 정말 많이 샜다. 하기 싫은 건 쉬운 일이라도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데 이번에는 몸은 힘들었어도 정신적으로 너무 즐거웠다”고 캠프를 수료한 소감을 말했다. 같은 팀의 유지민 학생은 “학기 중에는 과목을 여러 개 병행하니까 설계에집중하기 힘든데 캠프에서는 설계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며 조경디자인캠프가 유익한 경험이었다고 전했다. 윤병두 학생은 “다른 학교의 학생들과 설계를 함께 하면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싶었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며 서로 다른 학교에서 모인 학생들과 교류를 나누는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길고도 짧았던 2주
“학생들에게는 계속 미안한 점이 있었습니다. 캠프 진행한 200동 9층이 너무 더웠죠? 아마 한국에서 제일더웠을 겁니다. 지금 가장 더운 철이고 다른 건물들과 달리 중앙 냉방 시스템이라 6시만 되면 에어컨이 꺼져서 정말 물속에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조경디자인캠프의 수료식에서 교장을 맡은 배정한 교수는 더운 작업실에서 늦게까지 남아 작품을 만들었던 학생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말 그대로 이열치열. 44명의 조경학도들은 뜨거운 여름을 열정으로 맞섰다. 무더울수록 맵게 익어가는 빨간 고추처럼 학생들의 눈빛이 2주 전보다 자신감으로 맵게 빛났다.
“처음에는 ‘방학인데 이걸 왜 했지’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캠프가 끝나갈수록 ‘일주일만 더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조원들과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2주 간의 캠프 기간이 금방 지나갔고 아쉬워서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습니다.”
조경디자인캠프를 마치며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 백규리 학생(경희대학교 환경조경디자인학과)을 비롯해 소감을 발표한 많은 학생들이 2주 간의 프로그램이 금방 지나가 버렸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에어컨을 틀지 못해 더운 작업실에서 작품을 마무리했다는 학생들에게는 ‘뜨거운 계절’을 보내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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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광복, ‘북한’을 바라보는 예술적 시선
‘북한프로젝트’, 2015.7.21~9.29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시립미술관SeMA은 독립, 분단, 그리고 통일에 대한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과제를 통찰하는 전시 ‘북한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북한을 어떻게 제시하고 상상하며 재연결할 것인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기획된 이 전시는 정치적 상황이나 교류 사업과 같은 기존의 남북한 관련 주제에서 벗어나 북한을 예술의 주체로서 바라보는 한편, 우리가 북한을 예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다.
북한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전시 제목에 쓰인 ‘프로젝트project’라는 용어는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장기적인 전략을 의미한다. 북한에 대한 장기적인 시선을 포함하는 ‘북한프로젝트’는 ‘앞으로 나아가pro 만들어가는 것ject’에 초점을 맞추어 북한을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행동하고 있는 지금의 실행 자체를 강조한다. 북한을 프로젝트함으로써 규정짓기 어려운 북한이라는 존재가 끊임없는 의미작용을 거쳐 하나의 규정된 정의의 작품object이 되려고 하는 과정, 그러나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의미가 확장되는 과정이 이 프로젝트의 의의다.
‘북한프로젝트’는 세 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북한의 시각예술 분야(유화, 포스터, 우표)를 조명하는 국내외컬렉션이 첫 번째, 최근 북한의 풍경과 주민의 일상을 촬영한 외국 작가들의 사진이 두 번째, 마지막은 북한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는 한국 작가들의 영상 설치 작업이다.
북한 유화는 북한 화가들이 작업한 작품이며 네덜란드 로날드 드 그로엔 컬렉션Ronald de Groen Collection, 포스터는 네덜란드 빔 반 데어 비즐 컬렉션Win van der Bijl Collection, 우표는 한국 신동현 컬렉션Shin Donghyun Collection으로 구성되어 한국 최초로 공개되었다. 북한 유화는 ‘조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유화’의 함축적 표현이다. 1950년대 소련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 유화의 발전을 이루었으나 점차 민족적 감성에 맞는 미술의 발전이 요구됨에 따라 미술가들은 ‘북한식 유화’를 만들어 이에 부응했다. 조선화를 바탕으로 한 유화는 마치 한국화처럼 바탕에 양감의 표현을 최소화한 표면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 이번 로날드드 그로엔 컬렉션은 혁명적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작품들보다는 생활에 가까운 작품 위주로 구성되었다. 내용면에서 국가 체제의 이념 구현을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노력하는 북한 주민과 북한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을 주로 볼 수 있다.
북한 포스터는 선전화라고 불리기도 하는 만큼 선전을 위한 표제어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한 주민들의 계도를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북한 포스터 컬렉션인 빔 반 데어 비즐 컬렉션은 포스터가 북한 사회에서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제작되며 대중 선전 도구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섹션이다.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별로 나뉘어 전시된 포스터는 각 시기에 국가가 당면한 과제를 북한 주민에게 구호를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적인 우표 생산국 중 하나인 북한은 그 규모만큼이나 다양한 소재와 방식을 자랑한다. 신동현 컬렉션은 북한의 우표들이 해외 컬렉터에 의해 평가되고 결정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손으로 우표를 정리하고자 만들어졌다. 이 컬렉션은 북한의 『조선우표목록』에 수록된 공식 발행 우표의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어 우표에 반영된 북한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엿볼 수 있다.
영국의 닉 댄지거Nick Danziger, 네덜란드의 에도 하트먼Eddo Hartmann, 중국의 왕 궈펑Wang Guofeng이 담은 북한의 도시 건축, 풍경, 인물 사진을 통해 최근 북한의 모습을 만나보는 섹션 또한 마련되었다. 뉴스가 다루지 않는 북한 일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도주의적 시각보다 북한 건축 공간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공산 국가 건축에 대한 꾸준한 작업으로 시작된 그들의 사진은 북한 주민의 일상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또 한편으로는 작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시각을 삶의 풍경, 도시 공간의 공허함, 사회주의 국가의 구성원과 건축물이 보여주는 스펙터클로 표현하고자 했다.
한국 작가의 작품으로는 분단 현실을 다뤄온 강익중의 ‘금수강산’, 냉전기 소련과 미국의 우주 개발 경쟁과 북한 땅굴 사건을 병치해 리서치 자료와 함께 보여주는 박찬경의 ‘파워통로’, 그리고 사진과 글쓰기로 현장에 대한 기록과 문제제기를 제시하는 노순택의 ‘붉은 틀 #I-01’,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일상을 이야기하는 이용백의 ‘우리에게 희망은 언제나 넘쳐나’가 전시되었다. 또한 남북 구분이 없는 하나의 세상을 작품을 통해 염원하는 탈북 작가 선무, 3D 가상현실 기법을 이용해 관람객에게 DMZ에 들어가 보는 경험을 선사하는 권하윤, 남북한 피아니스트의 음악적 대화를 통해 대립의 극복을 시험한 전소정의 작품이 초대되었다.
북한 예술가를 비롯한 국내외 여러 시각을 포함하는 이번 전시는 서로간의 대화를 위한 세 가지 다른 시야의 맵핑을 시도한다. 이를 통해 작가와 관람객 모두 북한에 대한 시각을 교환하며 담론과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북한을 바라보는 것을 다시 본다
7월 28일 서울시립미술관은 북한대학원과 공동으로 ‘북한프로젝트’전과 연계한 학술 심포지엄인 ‘북한을 바라보는 것을 다시 본다’를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정치와 경제적 틀에 국한되어 논의되던 북한에 대한 관심을 문화적 차원으로 확장하고자 기획되었으며, ‘북한의 Visual Art’, ‘북한의 문화, 문화로의 북한’, ‘라운드테이블-북한(이) 바라보기’, 이렇게 세 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각 섹션은 북한 노동신문에 나타난 최고 정치 지도자의 사진과 북한의 기록 영화, 그리고 북한의 미술과 북한을 그린 우리나라 영화와 같이 각기 다른 매체를 대상으로 북한이 제공하는 시각과 우리가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 사이의 온도차를 조망했다. 북한의 시각예술을 주제로 한 첫 번째 섹션에서 변영욱 기자(동아일보)는 북한 노동신문에 실린 역대 지도자들의 모습은 권력의 정당화와 체제 유지를 위해 정밀하게 만들어진 하나의 방편이라고 해석했다. 김승 교수(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는 북한 기록 영화에 담긴 표상 분석과 그 내러티브에 담긴 의미 체계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북한의 문화에 대한 두 번째 섹션에서 발표한군 드 궤스데르Koen de Ceuster(Leiden University)의 사상예술성 탐구와 북한 예술에 대한 예술성 판단의 유무에 대한 논의는 북한 미술의 미적 특질, 향후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많은 호응을 받았다. 전영선(건국대학교)은 북한을 소재로 한 우리 영화를 통해 북한을 그리는 시각의 시대적 변화 양상을 소개했다.
북한을 다룬 영화는 시대나 유행에 따라 초점이 되는 구체적 대상과 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엔 한정된 스펙트럼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논의는 북한에 대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함을 떠올리게 했다.
북한과 관련한 여러 가지 매체들을 대상으로 하되 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고찰이 전제되었다는 점이 바로 이번 심포지엄과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다.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주최 측의 말대로 우리의 시선과 시각은 결코 중립적일 수도 순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북한을 ‘바라보는 것’의 의미를 문제시한다는 것은 전시 이후에도 북한에 대한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한편,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의 접근 방식을 성찰하는 기회가 된다. 접근을 통한 변화가 아니라 변화를 통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임을 북한 관련 예술을 통해 고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번 프로젝트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안진희 /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조경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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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이면을 항해하다
‘신지도제작자’, 2015.8.5~26
오지 여행가이자 국제 구호 활동가로 잘 알려진 한비야의 책 제목인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지도가 가진 사회문화적인 메타포를 잘 보여준다. ‘지도’란 우리가 잘 아는 세상을 의미하고 ‘지도 밖’이란 미지의 세계 혹은 소외된 공간이나 사람들의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의식중에 우리는 지도를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로 받아들이곤 하지만 사실 지도는 만드는 사람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그 안에 담기는 정보가 선택되고 가공된다. 즉 지도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관계망을 드러내고 시대의 관습을 투영하는 매체인 셈이다. 그래서 지역적 맥락을 중시하는 도시, 조경, 건축분야에서는 맵핑mapping을 분석 도구로 활용하고 더 나아가 디자인의 생성 도구로 확장하기도 한다. 맵핑이 디자이너에게 창조적 과정이 되고, 더 나아가 예술가들의 표현 방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공간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면서 발생하는 실제와 재현된 지도의 간극에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충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8월 5일부터 26일까지 송원아트센터에서는 통상적인 지도의 형식과 개념을 넘나들며 맵핑의 범주를 확장하는 전시 ‘신지도제작자’가 열렸다. 한국, 프랑스,독일 등 14명의 작가와 디자이너, 건축사가가 참여해 드로잉, 설치, 회화, 미디어아트, 디자인 등 다양한 형식으로 세상을 지도화했다.
지도와 예술의 만남,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대화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작품에 대한 접근 방식이 워낙 다르고 작업에 담아내는 내용의 간극도 상당히 크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양면을 모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작품의 배치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듯이 상대적인 방식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병치했지요.” 전시의 기획자인 독립 큐레이터 심소미의 말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활동하던 참여 작가들이 어떻게 맵핑을 해석하고 표현하는지 그 다양함에 주목하는 것은 ‘신지도제작자’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전시장 초입에 전시된 카롤린 코바쏜Caroline Cobasson의 ‘블랙아웃 맵Blackout Map’(2013)은 지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블랙아웃 시리즈는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접이식 지도에 검은 스프레이를 뿌려 시각적 정보를 모두 지워버렸다. 마치 밤하늘을 보고 있는 듯한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어둠과 적막이지나간 자리에 언뜻언뜻 남아있는 지도의 흔적이 마치 은하수처럼 떠오른다. 코바쏜의 작업이 직관적이고 정서적으로 자연의 광대함과 무한한 신비의 세계를 열어준다면, 부로 데튜드Bureau d’tudes의 ‘세계 정부World Government’(2013)는 현실 세계의 구조적인 관계망을 논리적으로 보여준다. 동시대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영역을 맵핑하는 카토그래피cartography 작업을 해왔던 작가는 자본주의 발전과 유형에 대한 관계망을 구체화한 ‘권력 지도’를 선보였다. 이 엄청난 양의 정보 앞에서 관객은, 작가가 구축한 세계를 해석하느라 머리가 바빠진다. 그러나 동시에 화면을 가득 채운 픽토그래픽pictographic과 컬러풀한 버블은 그 자체로 지도의 배후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의 아우라aura를 뿜어낸다.
반면 유창창의 ‘COME’ 시리즈는 불안과 공포를 신경질적으로 드러낸다. 작가의 메시지를 이해해보기 위해 지도 앞으로 한 발 다가서 보면 지도 안의 정보는 꼼꼼하게 지워져 있다. 유창창의 지도 작업은 2010년경 한참 사회가 각종 참사와 분쟁들로 소란스러울 때 등장산되고 흘러내리면서―실제 작품에 뿌려진 것은 작가의 정액이다―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전시장 한편에는 1966년판 유라시아 지질구조지도가 전시되어 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이 ‘순수한’ 지도는 과학적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에 충실하지만 그 자체로 훌륭한 디자인과 아름다운 색감을 보여주기도 해서 의외로 이 전시에 잘 녹아든다. 그 바로 옆에는 임선이의‘붉은 눈으로 본 산수’(2008)가 전시되어 있다. 지도의 등고선을 칼로 오려내 켜켜이 쌓아 올린 작업이다. 흔히 조경가나 건축가들은 대상지의 지형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용으로 ‘콘타를 뜬다’. 그런데 임선이 작가는 무한한 수공의 노력을 통해 이러한 등고선 지도contourmap를 조각으로 만들어 새로운 풍경을 맵핑한다.
보이지 않는 장소, 보이지 않는 삶의 이야기
과거의 지도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의 역사와 현재 진행 중인 분쟁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하는 맵핑도 있다. 줄리앙 코와네Julien Coignet의 ‘군도Archipel’는 고지도에서부터 현재의 지도까지 시간을 달리하는 지도를 중첩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준다. 작가는 구글 검색을 통해 한반도 주변 섬들의 과거와 현재 지도들을 한자리에 불러들여 가상의 풍경을 만들었다. 남한, 북한, 일본 등 세 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현재는 분쟁 중인 곳도 있고 과거에는 다른 나라 영토였던 섬도 있다. 이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통해 마치 고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영토나 국경의 개념이 얼마나 한시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드러낸다.
지도에 얽혀있는, 혹은 지도가 드러내지 않는 삶을 드러내는 작가들도 있다. 이들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주관적 시선과 세계와의 관계를 표현한다. 린다 하벤슈타인Linda Havenstein의 ‘구룡 워크The Guryong Walks’(2015)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장소 아닌 장소no place’ 구룡마을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시에서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들을 들춰내는 작업은 은폐된 것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임무라는 점을 다시금 환기한다.
김태헌은 너무 좁아서 지도에 잘 드러나지 않는 성남의 오래된 골목길을 걸으며 도시의 빛바랜 색들을 채집해 재현한 작업을 선보였다. 심소미 큐레이터는 “이 작가는 1990년대 말쯤 성남 개발에 대한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작업과 리서치를 많이 했습니다. 소위 요즘 유행하는 작업들을 일찍 시작한 셈입니다. 최근에는 작은 회화 작업을 주로 하셨구요. 선생님의 초창기작업을 연상하고 전시를 부탁드렸는데, 자연스럽게 그 두 가지 작가적 태도가 연계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라며 작품의 배경을 설명했다. 김태헌 작가가 색을 채집하는 방법은 의외로 원시적이고 노동집약적이다. 일례로 오래된 문을 발견하면 그 표면에 접착용 셀로판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어낸다. 그리고 작업실로 돌아가 그 색을 똑같이 재현하는 방식이다. “수십 년의 때가 묻은 색을 페인트를 섞어서 똑같이 만들어 내는 작업이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마치 추상화처럼 전시되어 있는 ‘성남 구시가지의 색’(2015)은 이렇듯 작가가 직접 땀 흘려 채집한 45가지 골목길의 색들이다.
실제 작가들이 몸으로 체험하며 만들어내는 작업은 애초의 계획과는 다른 의외의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한국의 이주 노동자들의 삶에 관한 작업을 주로 해온 미디어아티스트 자우녕의 작업이 그렇다. 나룻배를 가지고 계셨던 아버님과 함께 광나루에 살았던 작가는 어린 시절 한강의 모래사장에서 뛰어 놀았다고 한다. 그기억 때문에 한강에 남아있는 모래를 찾아 전시하려던 것이 본래의 계획이었는데, 서울에서 남양주, 팔당댐까지 모두 걸으며 모래를 찾았지만 남아있는 모래사장은 없었다. 대신 사람들의 유품처럼 강물에 떠내려온 물건들을 발견했고 그 죽음의 잔재와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시장에서 복원했다. “처음에 이 오브제들을 보았을 때 기획자의 입장에서 너무 당황했죠. 그때 저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 다른 전시물들에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는 게 보였어요.” 그렇게 자우녕의 작품은 전시장의 한 구석에서 사람들의 삶을 애도하고 기억하면서 맵핑의 범주를 고민하게 한다.
그밖에도 전시장에는 시각을 청각으로 전환한 백정기의 ‘맑은 밤 혼자 걷는다’(2011)나 일상 속 장소에 깃든 개인적인 기억과 몸의 움직임, 주관적인 감성의 흔적등을 자신만의 지도화한 김정은의 ‘부유하는 장소 맵핑Floating Place mapping’(2015) 혹은 통계를 활용한 다이어그램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한 맵핑 작업들이 전시되어 있다. 경험이나 기억, 지각, 이데올로기, 사회 문제 등 지도에 담긴 주제의 폭넓은 스펙트럼은 ‘지도’의 복합적 성격과 가능성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이번 전시의 상당수 작업들이 온전히 작업실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몸으로 겪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은 예술 작품과 공간을 다루는 디자이너의 작업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또한 전적으로 예술적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 같지만 끝없이 반복된 노동 이후에 찾아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공통된 숙명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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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가스카노의 서펜타인 파빌리온 2015
런던 하이드파크, 2015.6.25~10.18
‘런던에 상륙한 사이키델릭 번데기’, ‘무지갯빛 애벌레’등은 올해 서펜타인 파빌리온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런던 하이드파크 내 위치한 현대미술관인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매년 여름 세계적인 건축가를 초청해 선보이는 한시적인 건축 프로젝트다. 요약하자면 낮에는 카페로 쓰이고 밤에는 포럼이나 오락을 위해 활용되는 300m2 면적의 파빌리온을 세워 약 4개월가량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서펜타인 갤러리 측은 올해의 파빌리온을 지을 초청 건축가로 스페인의 건축 스튜디오 셀가스카노selgascano를 선정했다. 재미있는 디자인playful design과 대담한 색채 사용이 특징인 이들 신예 건축가가 완성한 파빌리온은 건축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한없이 가벼운 디자인
이번 파빌리온은 마치 두 마리 애벌레를 X자 형태로 겹쳐 놓은 듯한 모습인데, 스틸 프레임을 사탕 포장지같은 얇은 막과 리본이 이중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 다채로운 색깔의 이중 외피는 반투명한 플라스틱인 불소수지필름(ETFE: 콘월에 있는 온실인 에덴 프로젝트를 덮고 있는 재료)으로 만들어졌다. 방문객들은 파빌리온의 여러 구멍을 통해 자유롭게 들어가고 나갈 수 있으며, 구조물의 외부와 내부 레이어 사이의 ‘비밀 통로secret corridor’를 통과할 수도 있다. 건축가는 대상지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런던에서 이동하는 방식에서 이 작업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레이어가 많아서 혼돈스럽지만 구조화된 흐름을 보여주는 런던의 지하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영국의 왕립 공원에 번데기 모양의 파빌리온을 만든 셀가스카노는 부부 건축가인 호세 가스José Selgas와 루시아 카노Lucía Cano가 1998년 마드리드에서 설립한 건축설계사무소다. 셀가스카노의 작업은 건축에서 드물게 쓰이는 합성 재료synthetic materials나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이들은 독특한 색채와 자연을 참조하는 디자인을 추구했던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an이나 리차드 로저스Richard Rogers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를 설명한다. 셀가스카노는 대중이 “구조, 빛, 투명성, 그림자, 가벼움, 형태, 예민함, 변화, 놀람, 색채 그리고 재료와 같은 단순한 요소를 통해 건축을 경험”하길 바랐다. 그 결과 탄생한 파빌리온의 “각 출입구는 색채와 빛 그리고 놀라운 형태의 공간을 통해 특별한 여행을 허락한다.”
서펜타인 갤러리의 디렉터인 줄리아 페이튼-존스Julia Peyton-Jones는 한 인터뷰에서 이번 파빌리온이 “여름내내 사람들이 만나고 커피를 마시고 생생한 이벤트가 펼쳐지는 장소”라며, 올해의 프로젝트가 ‘파티 파빌리온’이 되기를 희망했다고 했다. 서펜타인 갤러리는 매년 여름 금요일을 택해 서펜타인 파빌리온에서 열리는 이벤트 무대인 ‘공원의 밤Park Nights’을 기획해왔다. 올해 프로그램으로는 음악, 공연, 토크, 영화상영 등이 있다. 이러한 시즌은 서펜타인 갤러리의 공동 디렉터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가 매년 10월진행하는 마라톤 행사와 함께 절정을 이룬다. 실제 올해 파빌리온의 심장부는 카페와 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오픈스페이스다. 영국의 홍차 전문 브랜드인 포트넘앤 매이슨Fortum & Mason은 파빌리온 내에 베이스를 차리고 아이스크림 카트를 운영하고 있다. 방문객들은 파빌리온에서 아이스크림뿐만 아니라 이 브랜드를 유명하게 만든 애프터눈티 세트인 햄퍼링Hamperling도 즐길 수 있다.
이들의 디자인 의도는 매혹적으로 작동한다. 화창한 날이면 파빌리온의 벽과 바닥은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에 의해 몽롱한 색깔이 어른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밤이 되면 파빌리온 내부의 조명에 무지개처럼 (혹은 신호등처럼) 빛나는 ‘번데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미 이곳은 “인스타그래머들의 파라다이스”가 되었다. 사진 공유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인 인스타그램instagram에서는 이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는 동굴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다양한 포즈를 취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셀가스 역시 사진 재생이 파빌리온의 핵심 부분임을 인정했다.1
재미와 기능 사이
셀가스카노의 파빌리온은 투명성과 가벼움은 확보했으나 디테일과 안전 문제에 대한 지적은 면하지 못했다. 사실 리본 테이프가 스틸 프레임에 아슬아슬하게 엮여 있는 모습은 미덥지 않다.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불면 이 장난기 넘치지만 연약한 구조물이 자신의 모습을 지킬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2 그래서 건축의 기본적인 기능을 충족시키기 못하는 이 파빌리온은 ‘건축architecture’이 아니라 ‘사물thing’이라는 비판을 불러 오기도 한다. 한 건축 비평가는 “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는 미스 반 데어 로에 Mies van der Rohe의 경구를 떠올리며, “이 파빌리온은 6개월 동안 디자인되고 완성되는, 툭 등장했다 사라지는 재미있는 궁전이며 건축적 미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3 반면 셀가스와 카노는 이 파빌리온이 완성된 건물이 아니라 진행 중인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파빌리온 프로젝트가 “완벽하고 세련된 보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료의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여 실험하는 기회”라는 생각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번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디자인에 대한 일각의 비판(즉 디테일이 결여되었다거나 조잡하다는 평가)은 일부 짧은 조성 기간이나 제한된 예산 등의 기본 조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 셀가스는 한 인터뷰에서 제작비와 시간 부족으로 한 가지 재료만을 사용하려던 원래 계획을 변경했다고 밝히기도 했다.4
서펜타인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건축가 초청부터 완성까지 최대 6개월을 넘지 않는다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위한 예산은 없다. 파빌리온의 조성 비용은 후원―올해의 주요 후원은 국제적 금융기업인 골드만 삭스(Goldman Sachs)가 했다―이나 현물지원, 그리고 완성된 구조물의 판매를 통해 충당된다. 그러나 이 판매 금액은 전체 비용의 40%를 넘지 않아야 한다. 이미 스밀랸 라디치Smiljan Radi 의 2014년 파빌리온은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Hauser & Wirth art gallery로 옮겨졌다. 올해의 파빌리온도 세컨드 홈Second Home에 팔려 LA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할 예정이다. 경비는 많이 들지만 수명은 짧은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상당한 모금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이 좀더 스펙터클하고 오락적 성격을 강화한 구조물을 만들도록 압력을 가한다는 주장5도 설득력을 가진다.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실제 프로젝트에 비해 훨씬 더 실험적인 기회를 제공한다는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제작비 조달의 한계 앞에서 스폰서를 위한 기능 위주의, 수집 가능한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실험적인 공공 프로젝트의 가치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지난 2000년 서펜타인 갤러리의 후원금 모금 파티를 위해 자하 하디드Zaha Hadid에게 설계를 의뢰한 임시 야외 천막이 예상 외로 인기를 얻으면서 연례행사로 발전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런 일시적인 프로젝트는 드문 일이었고, 서펜타인 갤러리는 파빌리온 시리즈를 통해 영국 안팎에서 현대미술을 선도하는 공공 갤러리로 거듭날 수 있었다.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혁신성은 지속적으로 건축 실무의 영토를 넓혀 왔지만 영국에서는 작업하지 않았던 신진 건축가를 초청하는 작가 선정 기준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그간 렘 쿨하스Rem Koolhaas, 프랭크 게리Frank Gehry,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 등 스타 건축가들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2013년의 소우 후지모토Sou Fujimoto, 2014년의 스밀랸 라디치 그리고 올해 셀가스카노 등은 고국 밖에서의 작업이 드문,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건축가들이다. 이들은 연간 30만 명이 방문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활동의 범위를 국제적으로 확장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 파빌리온이 예술과 사회·문화적인 행사들과 결합되며 대중과의 신선한 만남을 주선한다는 점도 성공의 요인이다. 그러나 어느덧 15주년을 맞이하는 서펜타인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문제점 역시 지적되는 최근, 혹자는 서펜타인 파빌리온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제 갤러리의 앞마당을 넘어, 좀더 다양한 경계에 있는 디자인을 지원해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번 파빌리온이 재료의 새로운 지평을 탐색하는 혁신적이고 매혹적인 건축인지 혹은 한시적이고 불완전한 그 무엇에 불과한지는 논쟁거리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건축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고, 보다많은 사람들에게 건축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후원을 받기 위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건축의 본질을 탐구하는 서펜타인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공공적 가치는 아직 유효한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