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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주 ; 서호로 유명한 중국의 호반도시
    “상유천당 하유소항 (上有天堂 下有蘇杭)”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는데, 소주와 항주는 천당의 극락세계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라는 뜻이다. 정원도시 소주와 더불어 예부터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항주는 ‘동방견문록’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마르코폴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 극찬을 아끼지 않은 곳이다. 항저우로 발음되는 항주는 행정적으로 화중지방 절강성에 속하는데, 절강성이라는 이름은 “항주의 남쪽을 가르며 유유히 흐르는 전당강이 갈지자의 형상으로 구부러지게 흐르고 있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절강성은 동으로는 황해, 서로는 안휘성과 강서성, 남으로는 복건성, 북으로는 강소성과 맞닿아 있는데, 예부터 기후가 온화하고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지속적으로 농경생활의 근거지가 되어 왔던 절강서의 성도가 바로 항주이다. ※ 키워드 : 항주, 중국의 호반도시, 서호, 항저우 ※ 키워드 : p62~p97
  • 18세기 실경화와 조경
    돈화문은 경복궁의 궁성 정문인 광화문이 정전인 근정전과 그 중심축을 같이 하는 것과는 다르게 창덕궁 궁성의 가장자리 모퉁이인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창덕궁 전체가 자연의 자세에 조화되는 배치수법을 이루기 때문이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어도가 곧바로 북쪽으로 뻗어 올라가다가 동쪽으로 90도 꺾여 돌다리 금천교에 이르게 된다. 또 서쪽으로 기다란 행각이 있는데 이곳도 수문장청이 있고 또 금호문이 있다. 돈화문을 통하여 들어선 이 첫 번째 마당은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으로 가기 위한 첫 도입공간이다. 이 마당에는 어도는 물론이고 궁궐의 정전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 금천교가 있다. 각 궁궐에 따라 정전에 들어가기 위한 각기 다른 다리가 놓여있는데 창덕궁의 금천교, 경복궁의 영제교, 창경궁의 옥천교 등이 이에 해당한다. 금천은 창덕궁 후원 골짜기의 시냇물이 모여 이곳에 흘러와 돈화문 동쪽 행각 밑을 통해 궁성 밖으로 흘러 보내지고 있다. 개천가에는 수양버들과 꽃나무, 그리고 큰 나무들을 심어서 아름다운 하천경관을 이루었다. ※ 키워드 : 18세기 실경화, 18세기 조경, 실경화와 조경 ※ 키워드 : p98~p99
  • 자연형 연못설계의 기본원칙
    기본원칙 (Grandt, 1989 ; Peters, 1992 ; Rothstein,1995) ·연못의 위치는 가능한 한 햇볕이 잘 드는 곳이 적당하다. ·연못의 형태는 주변환경, 특히 등고선의 방향에 역행하지 않도록 결정한다. ·연못하안의 남측 일부구간은 완만한 경사 및 적절한 폭이 이루어지게 조성되어야 한다. ·연못 일부분의 수심은 1.5~2.0m가 되는 것이 생태적으로 유리하다. ·하안의 경사는 적어도 1:3 이상으로 완만하여야 하고 수심이 일정하지 않도록 조성한다. ·골프경기상의 목적으로 식재를 할 수 없는 하안의 경우, 부분적으로 자갈 및 모래로 하안을 구성한다. ·하상바닥의 재료는 입자가 가는 것부터 굵은 것까지 다양하게 선택하되 유기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연못의 경계부에는 습한 구역과 건조한 구역의 완충구역을 조성하여 지표면에서 흘러드는 유해물질, 특히 비료 및 농약을걸러낼 수 있게 한다. 방수 자연적인 못이나 개천이 없을 경우, 즉 수원이 없는 지역인 경우 연못은 인공적으로 방수를 하여야만 한다. 연못의 크기, 지층의 구조 또는 재료구입 형편에 따라 방수방법은 크게 자연재료에 의한 공법 또는 인공재료에 의한 공법을 선택할 수 있다. ※ 키워드: 자연, 연못설계, 골프장, ※ 페이지 70 ~ 74
  • 내고향 인천 짠물
    고향하면 남들은 흔히 아름다운 산천에 실개천이 휘돌아가는 시적(詩的) 풍경을 들먹이지만 나는 갯벌의 비린내나는 선창가에 해풍(海風)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풍각(風角)과 궁(宮), 상(商), 각(角), 치(緻), 우(羽)의 오음(五音)으로 감별해도 변함없는 사방 네 모퉁이 바람이 촉감으로 나를 반겨주는 곳, 인천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잊고싶지 않은 고향속의 추억은 바로 초등학교 시절이다. 무더운 여름철이면 런닝셔츠바람에 화수동(花水洞) 선창가 언덕배기 위에 옷을 벗어 던진후 밀물이 밀려오는 짠물속에 머리와 배를갯벌속에 깔고 미끄러져가는 스릴을 만끽하며 한여름을 시원하게 보냈던 기억이 새롭다 인천 시가지내엔 한미수교 1백주년 기념탑이 서있는데 이는 응봉산 전체를 공원화하여 조성한 만국공원의 맨꼭대기에 독일인 존스턴이 별장으로 조성한‘인천각’이라는 명물이 있었던 곳으로 나중에 호텔로 사용되다 6.25때 폭격을 맞아 사라진 곳이다. 이곳은 봄이오 면 온 산이 벚꽃으로 뒤덮이는데 꽃이 떨어진 지 20여일이 되면 버찌가 무르익는다. 인천공립상업중학교에 다니던 나는 하교후면 벚나무에 올라가 버찌를 따먹곤 했는데 운이 없으면 공원관리자에게 그 자리에서 붙들려 벌을 서거나 실컷 따먹고 입술이 시퍼렇게 물든 채 공원길을 지나가다 붙잡혀 5~6시간씩 청소와 쓰레기 태우는 벌을 서기도 했다. 지금은 이곳에 인천항을 굽어보는 맥아더 원수의 동상을 건립하면서 자유공원으로 개칭,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공을 기리는 관광지는 물론 인천의 명소로도 유명해지게 되었다 인천’하면 빠질 수 없는 곳이 바로 월미도인데 내가 어릴때는 월미도 입구에서 좌측으로 10분쯤 걸어 들어가면 바닷물을 가둔 해수욕장과 조탕이 함께 있었다. 이곳은 1년내내 실내에서 바닷물로 수영하고 바닷물을 뜨겁게 하여 만든 조탕에서 목욕할 수 있어 사람 들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한 월미도의 산중턱에는 필자가 가장좋아하는 꽃사슴 5~7마리가 꽃사슴칸에 모여 있었고 이들과 조금떨어진 곳에는 먹을 것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일본원숭이들도 있었다. 그 애교스런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월미도의 좁은 석축길을 따라 약1시간 가량 걸어 들어가면 월미도의 1/1000 정도 되는 섬이 나타나고 그 위에 하얀 등대가 보인다. 우리는 이 작은 섬이 보이는 곳에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하루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했다. 이 때의 우리들의 소풍은 하루종일 걸어다니는 것만도 마냥 즐거웠기에 월미도와 소월미도의 아련한 추억만으로도 생생한 지도를 그릴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 월미도와 소월미도의 원형은 오간데 없고 월미도 산등성이만 미군기지로 남 아있으며 시장터나 부두가는 횟집과 놀이동산이 판치고 있는 모습으로 변질돼 버렸다. 바 다 이외엔 고향의 향기를 느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인천항의 명물인 갑문식 도크는 내가 중학교때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견학했던 곳으로 고향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인천항은 조석간만의 차가 극심한 관계로 전천후 하역작업이 어려워1911년 10월부터 10년 계획사업으로 제1 선거(船渠)가 시작되었 는데 이것이 인천항의 그 유명한 갑문식(閘門式) 도크로 지금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 키워드: 인천, 화평동, 인천시 화평동 ※ 페이지 92 ~ 93
  • 영원한 미완성 천리포 수목원
    천리포와의 운명적 만남 한국은행에서 일하던 ’50년대 중반 나는 서해안 만리포로 자주 수영하러 다녔다. 당시 한국은행 이사였으며 나중에 재무부장관까지도 역임했던 송인상씨의 별장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해수욕장으로 개방되어 상업시설들이 빽빽히 들어섰지만 당시는 인적이 드문 아름다운 해변이었기에 여름이면 친구들과 함께 수영하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미국에 서 가족, 친지나 친구들이 오면 어김없이 이곳 만리포로 데리고와서 그 아름다운 비경을 보여주며 즐거움을 함께 했다. 그러기를 몇년째, 어느날 동네 노인이 다가와 만리포 바로 옆에 있는 천리포 부근에 땅을 좀 사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해왔 다. 당장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내 평생 처음으로 땅을 사본 것이 바로 그 때로 나는 천리포에 3천여평의 땅을 구입했다. 특별한 생각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당장 돈이 필요한 그들을 돕는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1962년의 일이다. 이후 천리포의 한 노인이 미국인에게 땅을 팔았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그곳의 많은 주민들이 자기네 땅을 사달라는 요청들이 쇄도했다. 처음엔 곤란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땅을 사놓으면 미래 언젠가 뭔가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그저 특별한 생각없이 조금씩 그들의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결국 3천평에서부터 시작된 땅 매입은 ’75년까지 15만평으로 불어났고 대책없이 모아놓은 이 땅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나의 커다란 고민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애꿎은 땅이 되어버린 그때 내 인생을 바꾸어버린 결정적 계기는 바로 한 친구의 전화와 그가 보낸 트럭 한대에 담겨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지금의 내모습과 천리포수목원을 탄생시킨 모태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 키워드: 천리포, 천리포수목원, 수목원 ※ 페이지 30 ~ 33
  • 자연체험의 장 - 태양열 이용생활센터 -
    태양열이용 생활센터 생태적인 설계는 물과 에너지, 농업과 생산에 대한 우리의 체계를 건강하게 하는 시각생태학과 연계된다. 일종의 시각생태학은 생태적인 설계방법중의 하나인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호플랜드에 있는 The Real Goods회사의 태양열 이용센터는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 태양열 이용 생활센터의 부지는 12에이커의 농업홍수범람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사람들에게 회사의 기술공학적 자연재생 생산물들과 생태적 시각 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공유하기 위해 생태적인 기법과 그기반이 되는 설비들 그리고 전시경관과 정원 등을 포함하고 있다. 부지와 프로그램들은 사람들이 자연과정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부지의 한쪽에 있던 훼손된 하천은 원래의 강기슭의 특성들 을 반영하여 복구했으며 홍수범람지역에는 인공습지, 연못 그리고 정원들을 배치하였다. 또한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원래의 다양한 식물군집사회를 모방하여 경관설계를 하였으며, 공간적으로 계절과 관계되는 식재계획은 계절마다의 태양의 통로를 고려하여 계획되었다. 부지내 대수층으로 부터 재순환되는 풍부한 물은 설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외부공간을 위한 여름냉방, 후방소음을 경감시키고, 방문객을 따라서 흐르며 활력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부지계획은 식물이나 동물은 물론 인간에게도 상당히 좋은 서식처가 될 수 있는 추이대들의 복잡한 상호엮음을 보여준다. ※ 키워드: 태양열, 자연체험, 생활센터 ※ 페이지 54 ~ 59
  • 베르시공원 - 장소의 기억 -
    공원계획에 있어 장소성을 살리면서 보존과 개발이라는 양면성을 합리적으로 해결한 한 예로 프랑스의 베르시(Bercy)공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공원은 무엇이든 일단 깨끗이 밀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쉽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끔 한다. - 위치 : France, Paris, 12구, 13.5 ha Palais Omni-sports 와 Pont National 사이에 위치하고 12구의 세느강변에 걸쳐져 있음 당선작 당선작은 기억의 정원(Le Jardin de la Memoire)이라는 제목으로 출품된 작품이었다. 건축가 Maril ne Ferrand와 Jean Pierre Fegus, 도시계획가 Bernard Huet 와 Bernard Leroy, 조경가 Lan Le Casine와 Philippe Raguin으로 구성되어진 팀이었으며 그들은 가장 명쾌하게 장소의 역사적이고 형태적인 특성을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모든 참가작품은 1백50여 팀에 이르고 여기에서 1개의 당선작과 9개의 부 당선작을 선정하였다 기본개념 베르시공원에 제안된 디자인의 기본개념은 일종의 Palimpseste(빨렝쁘세스트) - 쓰여 있던 글자를 지우고 다시 글자를 써넣은 양피지(羊皮紙) - 라 할 수 있다. 양피지가 무수한 기록의 흔적을 가지고 있을 때 각각의 기록은 한 시대의 존재를 불러일으키고 읽는 사람은 더 오래된 기록들임에도 불구하고 상상을 통하여 더 깊이 빠져들게 되는 것처럼 베르시공원은 과거의 기억이 읽혀질 수 있도록 만든다. 이는 앞서의 두 공원과는 확연 하게 구분되어지며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역사의 아름다운 두께를 간직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설계전략 첫번째로 부지안에 남아 있는 두가지 흔적들의 중첩을 기본틀로 삼고 있다. 즉 과거의 포도주창고 외곽선의 연장과 내부흔적들의 보존을 말한다. 두번째로는 규칙적인 그물망을 창조하여 부지의 고고학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첫번째의 그물망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창고로부터 강둑까지 포도주 통을 나르기 위해 형성된 화강석으로 포장된 도로 - 세느강과는 수직을 이루는 - 이며 두번째 그물망은 세느강과는 평행을 이루는 새로운 알레(Allee)로서 이 두 개의 그물망이 결합을 이루어 전체부지에 바둑판 모양의 줄치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규칙적인 그물망으로 인해 부지안의 가장 강한 요소 들인 도로와 나무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가치있는 몇몇 건물들의 보존을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Bernard Le Roy는 이러한 그물망은 여러 서로 다른 지층을 보여주는 작도가 되며 이 복잡한 도형들의 결과는 오히려 눈에 띄는 단순한 이미지라고 언급했다. ※ 키워드: 베르시공원, 공원, 장소 ※ 페이지 46 ~ 53
  • 첫 금강산 관광의 교훈
    지금까지 알려진 금강산 생태계에 관한국내외 자료에 따르면, 현재 금강산에는 조류 2백여종, 포유류 68종, 파충류 9종, 양서류 10종, 어류 36종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이중에는 금강산에만 유일하게 서식하는‘금강인가목’,‘ 반달가슴곰’등 희귀 동식물도 포함되어 있다. 즉, 백두대간의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금강산은 비무장지대 와 더불어 한반도 최고의 생태보존구역이라 할 수 있다. 어느 특정인의 교시에 의해서건 아니면다른 어떤 이유에서건 금강산을 지금의 상태로 훌륭하게 보존한 것은 분명 다행스러우며, 한편 우리의 국립공원을 떠올릴 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금강산 관광의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자연생태계의 완벽한 보전이 얼마나 값진 일이며, 또한 그렇게 조성된 생태계를 둘러보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몸소 깨달은 점이라 할수 있다. 이제‘왜 우리에겐 금강산 같은 국립공원 하나가 없단 말인가?’하는 자조섞인 한탄은 필요치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금강산의 하루 관람객 수를 일정 수준으로 제한하고, 주기적으로 생태계의 변화양상을 면밀히 점검하고, 탐방객 모두가 세계수준의 성숙한 관광태도를 견지하는 자세이다. 금강산이 산 중의 금강(金剛)인 것은 수려하고 빼어난 자연문화유산 때문이지, 결코 먹고, 마시고, 쉬는 인공적으로 건립된 위락단지 때문이 아님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하겠다. 일례로 만폭동계곡에 위치해 있는 보덕암 역시, 그 인공물이 주변의 자연경관과 너무나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만폭동의 절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것이지, 보덕암 제 스스로 산을 위압하거나 혼자만의 위용을 뽐내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우리 모두 금강산 관광을 계기로‘자연은 아끼는 이에게만 그 빼어난 경관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하겠다 ※ 키워드: 금강산 ※ 페이지 82 ~ 85
  • 18세기 실경화와 조경
    조선왕조의 르네상스를 이룩한 정조의 화성(華城) 건설은 왜 이루어졌는가. 이 대답을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華城’이라는이름 그 자체이다. 이 이름은 원래『莊子』「天地編」에 나오는‘화인축성’(華人祝聖)이라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華’라는 지방에 봉해진 어떤 사람이 요(堯) 임금에게 수(壽)와 부(富), 그리고 다남(多男)을 기원하자“壽는 욕됨이 많고, 富는 일이 많으며, 多男은 걱정이 많아서 싫다. 이 세 가지는 덕(德)을 기르는 까닭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화성’이라는 이름에서 정조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왕실의 장수와 부귀와 번창을 기원하는 도시요, 왕의 입장에서는 요임금처럼 덕을 펴는 도시라는 두 가지의 함축된 의미이다. 그러니까 왕은 자신이 요임금 못지 않은 성인(聖人)이라는 것을 신민(臣民)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화성을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 키워드:18세기, 실경화, 조경 ※ 페이지 90 ~ 91
  • 다시 깨어나는 항구도시 목포, 두 번째의 강남 순천
    예술이 있고 멋이 있어 좋은 도시, 우리나라 최서남단의 항구도시, 점점이 그림같은 다도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고장, 그래도 그중에서 목포의 유달산(儒達山,해발 228m)은 노령산맥의 마지막묏부리로서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명산이다. 어느도시이건 크고 작은 뒷산을 의지하고 있지만 유달산만큼 빼어난 절경의 산을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자체가 기암괴석으로 어우러져 각기 다른 봉우리와 정상에서 시가지와 바다를 조망할 수 있고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어 시민들의 일상적 애환이 담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민들의 타고난 끼를 담아 우리나라 도시공원사중 제일 먼저(1982년 11월) 야외조각장을 마련하였고, 시민들의 흐르는 눈물을 적어 노래비(碑)를 세웠으니 그 누가 목포를 서러움의 응어리를 속으로 삭히며 오기스럽게 버텨온 도시라 했던가?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고/ 삼학도(三鶴島)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1930년대 가수 이난영씨가 불러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노래‘목포의 눈물’이다. 또 유달산 입구에 위치한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의 공을 기리고 있고, 대반동(大盤洞)에서의 다도해 석양(夕陽)은 동해안의 일출(日出)과 더불어 신이 빚어낸 또 하나의 비경이라 한다. 비록 황금빛 노을로 물든 항구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으나 순환도로로 이어진주변의 자연경관만 보고서도 이곳이 멋과 낭만이 넘치는 예향이고꿈이 있는 도시임을 직감하게 된다. 이러한 자연경관의 영향이었던지 단일 도시로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가장 많이 배출하였고(4명), 지금도 고향을 지키며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예술인들이 많다고 한다.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분으로도 서양화가 수화 김환기, 한국화가 남농 허건(南農許健), 여류소설가 소영 박화성, 극작가 차범석 선생 등이 이곳 출신들로서 우리나라 문화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분들이다. 이러한 예술적 지역 정서 때문인지 목포의 집집마다에는 그림 하나쯤은 걸려 있고 각종 전시, 공연이 그칠 날이 없으며 판소리 경연대회(10월), 난영 가요제(6월), 목포 가요제(10월) 등 전국 규모의 문화예술 이벤트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고 한다. ※ 키워드: 목포, 순천, 항구도시 ※ 페이지 86 ~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