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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만강변 7백리를 다녀와서 ; 강변사람들의 잊혀졌던 모습들
    9월 7일. 연길에 여장을 풀 겨를도 없이 다음날부터 답사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안내를 하겠다는 젊은이가 별난 친구였다. 북경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임산가공 분야에서 뚜렷한 직장도 갖고 있던 그는 연길에 도착하기전 북경 북쪽의 승덕시(承德市)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을 함께 여행하면서도 그의 고향집 마을안내만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연변 화룡시(和龍市) 두만강변 오지(奧地)로서의 옛 모습을 보여드렸으면 좋겠지만 억척스럽게 향학(向學)만을 강조하시던 부친에 대한 공포심이 남아 있어 이렇게 불쑥 찾아 뵈었다간 그 노여움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 키워드 : 해외, 중국, 여행 ※ 페이지 : 102 - 107
  • 실내조경에 적합한 수종
    이번호에서는 실내조경에 적합한 수종을 알아보고, 각 수종에 적당한 일조량이나 온도, 물주기 등 관리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사항을 살펴본다. ※ 키워드: 실내조경, 수종, 식물 ※ 페이지 : 68 - 69
  • 나의 시와 야생화 ; 잊지 못할 제주 여행
    시인 송수권의 제주 여행기. 아래는 글의 일부. 내가 들꽃을 찾아나선 지는 오래 되었다. 최근의 인상적인 경험은 제주 한라산 용눈이 오름을 찾았을 때였다. 김순이 시인이 토종꽃으로만 뒤덮인 ‘용눈이 오름’이란 곳이 있다하여 찾아 간 곳이다. 그곳은 한라산의 4백여 오름중 유일하게 야생화로만 뒤덮인 오름이었다. 11월인데도 아직 지지 않은 풀꽃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난만하게 피어 있었다. 융단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김순이 시인은 ‘제주바다는 소리쳐 울 때가 아름답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런 바다를 배경으로 피어있는 꽃들은 아름다웠다. 나의 가슴은 꽃들의 색깔만큼이나 진하게 물들고 있었다. 물봉선, 물매화, 체꽃, 오랑캐, 구름무늬, 하늘메꽃……. 꽃이름만 묻고 다니기에도 한나절이 걸렸다. 분화구를 끼고 능선을 넘으면 그때마다 쪽빛바다가 눈시울을 적시고, 그 눈시울에서 삼삼한 꽃들이 하마 제 이름 기억 못할까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 키워드: 여행, 제주, 야생화 ※ 페이지 : 96 - 97
  • 프랑스의 ‘경관법’을 통해 본 경관보호법규,제도
    프랑스에서 1993년 신설된 속‘경관법’의 내용과 신설에 대한 영향 및 영역에 관해 논하기에 앞서 필자는 우선 법에 관한 연구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법’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은 본 학문에서 논하는 것이 아니기에 피하고, 일단 이러한 법에 관한 연구가 무엇을 위해 도움이 되는지 먼저 밝히고자 한다. 프랑스에서 얼마전 신설된 법에 관한 필자의 연구는 일본의 몇몇 잡지가 우리에게 보여준 구미의 디자인 사례처럼 금방 인용 및 모방할 수 있는 자료들은 아니다. 이는 일단 법이 실현될 수 있는 행정적인 환경이 우리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고 또한 조경업계 및 국토계획 분야의 상황 역시 우리와는 현실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법이든 신설 혹은 개정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 시행착오들이다. 예를 들어 모세 이전에 살인이나 절도행위 등이 없었다면 십계명이 나왔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행착오들을 가늠하면서 법이 생기게 된 사회적 배경 역시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함무라비 법전을 보고 나서야 간신히 바빌론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법의 역사를 보면 그와 관련된 당시의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법개정 및 법제도의 변천을 보면 당시를 살아가는 상황의 변화, 나아가 길게는 패러다임의 변화까지 가늠할 수 있다. ※ 키워드: 경관법, 해외, 법, 제도 ※ 페이지 : 56 - 63
  • 일제잔재 청산과 문화재조경 바로세우기
    새끼시인에서 문화재관리국 직원으로 1950년대 후반 진주사범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필자는 문학을 지망하는 새끼 시인이었다. 재학시 때때로 교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고 역사의식에 대한 책들을 탐독하기도 했는데 당시 시인 설창수 선생이 주관하던 지방문예지인 에 필자의 시가 2회에 걸쳐 추천받기도 했다. 그러던 필자가 졸업후 문화재관리국에 발령을 받아 공무원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된 것이 1963년 1월 25일이다. 문화재관리국은 문교부의 외국으로 1961년 10월 2일 처음신설, 우리나라 민족문화유산을 전담 관리하 는 중앙 행정기관이었다. 당시 문화재관리국 청사는 경복궁의 건춘문 안에 있었는데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쓰였던 집이라 주위는 온통 왜식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 키워드: 조경가 ※ 페이지 : 36 - 39
  • 조경기술사 시험의 출제경향
    조경기술사 시험은 지난 1월호에 소개된 바와 같이 필기시험(논술시험), 자격심사, 면접시험의 단계로 진행된다. 이중 올해의 필기시험은 60회(3월 5일), 61회(5월 28일), 62회(9월 17일) 3회에 걸쳐 시행될 예정이다. 기술인에게 최고의 영예인 기술사 특히, 조경기술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요건, 필기시험, 면접시험 등 그야말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러나 응시자들은 이미 시험자격요건을 확인하고 시험에 응시하기 때문에 자격연한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또한 면접시험도 필기시험에 합격하면 2년간 자격이 유효하고, 지금까지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2년 안에 면접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 없다는 측면을 생각하면 어려운 관문은 아니다. 결국, 1차 필기시험이야말로 기술사가 되기 위해 통과해야할 가장 힘들고 험난한 관문이 된다. 필기시험은 매교시 100분씩 4교시 400분에 걸쳐 치루어지는 시험시간만으로도 만만치않은 논술형 시험이다. 일반적으로 1교시는 용어정의나 단답형 방식으로, 2, 3, 4교시는 필수와 선택문제가 혼합된 논술형 문제 위주로 출제된다. 합격기준은 평균 60점이 기준이나 지난 1월호에 소개된 바와 같이 절대평가 기준으로서의 60점은 무의미하다. 즉, 회차별로 필기시험의 합격자가 2~10명 정도이고, 한 회의 응시자가 60~120명선임을 감안한다면 시험본 회차의 응시자중 적어도 5~10% 안에는 들어야 합격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 키워드 _ 조경기술사, 시험경향, 출제경향, 조경기사 ※ 페이지 _ 144-145
  • 조경사에 발을 들여놓기 30년
    1950년대 후반부터 나는 전남대학교 임학과에서 삼림입지학과 양죽론 그리고 조경학 강좌를 담당하면서 대나무의 연구에 관여하고 있었다. 우리 대학이 있는 지방은 대나무의 고장이었기에 대나무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강좌에 ‘양죽론’이라는 강의를 새로이 설강할만큼 연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조경」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상륙, 1973년에는 서울대학교와 영남대학교에 조경학과가 새로이 설치되었고 조경학회도 창립되어 내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고심끝에 나도 우리 대학에 조경학과를 설치하고 학문의 방향도 조경쪽으로 돌려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사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대나무에 미쳐 일생동안 대나무와 함께 할 뜻을 굳히고 있었다. 대나무 연구에서 조경사 연구로 1962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 고온과 저온의 갑작스런 변화로 시작된 이상기후는 마침내 3·4월에 이르러 전국의 대나무숲(竹林)에 큰 피해를 주어 상당수의 대나무가 말라죽어 갔다. 나는 당시 현지 답사를 통해 같은 지역이라도 대나무가 얼어죽지 않은 곳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그 간접적인 피해 요인은 국소적인 지형조건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피해지역을 찾아 그 피해상태를 파악하는 한편 이에 대한증명을 위해 국소지형(局所地形)에 대한 최저기온을 측정하고, 내한성을 판단하기 위해 대나무의 환원당(還元糖)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최저온도계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 주문하여 많은 양을 주문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산지에 고도 5m마다 설치한 온도계와 광주 소방서의 화재 감시탑에 수직으로 2m 간격으로 설치해 놓은 온도계의 기온을 날마다 측정하였는데 그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 키워드 _ 정동오, 조경사 ※ 페이지 _ 34-37
  • 조경에 젊음을 바치고 ; 관악캠퍼스 마스터플랜의 수립
    1973년 3월초 청와대에서 관악산 조림계획을 수립하여 조속히 보고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그 당시 미립목지가 많았고 토사의 유실을 막기 위해 사방공사를 한 곳도 있었다. 관악산 시설지역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호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웅장한 관악산 자체가 시설지역에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박대통령이 판단하고 조림계획을 지시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관악산의 시각구조에 대하여 분석한 결과, 순환도로에서 중복부까지를 시설지역의 배경으로 보고 조림대상지역으로 하였다. 조림계획의 중대성과 시기상으로 조급함을 느끼게된 나는 서둘러 현황조사에 착수하였다. 지형도와 카메라, 야장을 준비하여 미립목지의 범위를 지형도에 표시하고 현황을 사진에 담고 야장에는 토질을 기재하면서 중복부까지 구릉과 계곡을 답사하였다. 현지답사를 마치고 기간이 임박하여 관리과 안봉준 계장과 여관에 투숙하면서 며칠 밤을 새웠다. 또한 정확성을 더하기 위하여 관악산 항공사진과 지형도를 대조하면서 도면에 임반을 구획하고 번호를 부여하면서 면적을 산출하였다. 장래의 경관미와 시각미를 우선하고 계곡, 사면 등의 특성에 따라 적지 적수로 수종을 선정하였다. 상록수는 리기다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낙엽수는 주로 단풍나무, 자귀나무, 낙엽송 등의 20여종이 선정되었다. 상록수와 낙엽수의 비율은 산림환경의 안정을 위하여 7:3으로 계획하였다. 면적당 식재주수를 산출하고 조림계획보고서를 작성하였으며 조림계획의 타당성과 보완을 위하여 수원농과대학 이창복 교수, 심종섭 교수, 임경빈 교수를 초빙, 김도연 관리국장, 안봉준 계장이 참석한 가운데 설명회를 가졌다. 이 보고서를 근거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임반별로 조감도를 그리도록 하였다. 조감도를 그리는 화가와 같이 임반별로 대표적인 지역의 현황사진을 골격으로 삼고 조림한 수목이 성목이 된 상태의 색조로 조감도를 완성시켰다. 각 수종에 고유번호를 부여, 표시하여 조감도에 부착하고 일목요연하게 이해가 되도록 작성한 조감도의 사진을 찍어서 앨범 좌측은 현황사진, 우측은 조림 후 장차 성림이 된 상태와 비교가 되도록 임반별로 스크랩하여 청와대에 보고하였다. ※ 키워드 _ 서울대캠퍼스, 강우창, 마스터플랜, 1970년대 조경 ※ 페이지 _ 134-137
  • 남한산성 마을경관의 원형과 복원
    최근 남한산성이 수도권 제일의 역사문화 관광지로 부각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의 수가 늘고 있으며 학술적 관심과 연구 또한 확대되고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백제 초기 도읍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대 규모 취락이 형성된 것은 조선조 인조 5년에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안으로 옮기고 산성거민을 확보할 목적으로 광주 관내의 백성은 물론 타 읍의 거주민도 모민입거(募民入居)한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마을의 규모면에 있어서는 이읍(移邑) 초기에는 대략 300여호 정도였으나 점차 그 수가 늘어나『광주부읍지』(1842~43)에 나타난 산성마을의 호구수를 보면 1,088호에 인구는 4,047명(남:2,100명 여:1,947명)을 보이고 있다. 이는 당시의 우리나라 생활양식을 고려해 볼 때 남한산성이 상당한 도시적 면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마을의 구조나 모습은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유리원판사진이나 일정초기에 제작된 지형도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성세가 20세기초 까지만해도 그대로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한산성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은 산성이 갖는 고즈넉한 옛 멋과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남한산성, 그리고 전통적 산성마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대형화되고 변형된 건축물에 먹거리 집들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역사 유적들과 조화되지 않은 현재의 마을 모습에서 실망을 감추지 못하곤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산성마을을 복원하기 위한 몇가지 논의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 키워드 _ 남한산성, 경관, 공원, 역사문화 ※ 페이지 _ 122-123
  • 우리시대의 설계언어 ; 프랑스 : 경관과 예술
    알랭 로제는 원래 소설가였으나 파리 라빌레트 건축학교의 조경학 박사과정 교수로 채용됨으로써 프랑스 조경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몸과 경관의 관계에 관한 이론, 경관론에서 사용되는 어휘들의 계보에 관한 연구, 경관에서의 예술의 기능에 대한 연구 등이 그의 주된 학문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경관과 환경을 엄격히 구분하여 예술에서 시작된 경관을 주로 깊이 탐구했으므로 조경에 대한 과학적 태도, 즉 통계 수치나 그래프를 통해 환경 과학의 방식으로 이뤄지는 조경학에 매우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소설가가 조경학 박사과정을 지도할 수 있고, 조경을 이야기하며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을 비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그의 이력과 입장은 매우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조경계에서 그의 입지는 확고하며 그의 입장은 광범위하게 호응을 얻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편으로 이런 현상이 어쩌면 조경이 잃어버린, 조경의 본래 모습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의 지적대로 환경 과학으로서만 조경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경관은 파괴되고 조경은 사라진다는 것은 점점 입증되고 있다. 조경은 분명히 현장의 일만은 아니다. 또한 조경은 과학에서 시작해서 과학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조경은 또한 철저하게 학문이기도하며 미학과 깊이 연관된 매우 흥미있는 분야이다. 학문으로 조경을 논하기 위해서는 조경과 관계된 미학적 논점들을 반드시 알 필요가 있다. 단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든지 관념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덮어버린다면 조경계는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할 궁극적 방법을 결코 찾아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점에 대해 알랭 로제가 인용한 칸트의 아폴로지는 새겨들을 만 하다. 매일 빙벽을 바라보고 살면서 빙벽이 왜 아름다운지 모르는 알프스 산골의 시골뜨기 대접을 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빙벽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왜 빙벽을 오르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 정리해볼필요가 있다. 또한 소설가가 조경학 박사과정을 지도하고, 도로 장비청의 전문위원회장을 수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키워드: 경관, 예술, 설계언어, 프랑스, 디자인철학, 미학 ※ 페이지: 5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