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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의도시 베네치아
    이탈리아의 진주’ 또는 ‘아드리아(Adria)해의 여왕’으로 불리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 영어로는 베니스(Venice). 한번 방문한 사람은 몇 번이라도 다시 가보고 싶은 곳. 아직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은 일생에 한번은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 베네치아. 우리에게 흉노족(匈奴族)으로 알려진 훈(Hun)족의 침공을 피해 이탈리아반도의 주민들이 아드리아해의 개펄로 이루어진 섬으로 이주해 온 425년이 베네치아 탄생의 기원이다. ‘세계에서 자동차가 한 대도 없는 유일한 도시’인 베네치아에서는 다리품을 팔거나 배를 탈 수 밖에 없는데, 이곳에서는 간선도로나 국지도로의 분류와 같은 도로의 위계보다는 수로 의 위계에 따라야 한다. 큰 운하로는 ‘바포레토(Vaporetto)’라 불리는 수상버스나 ‘모토스카피(Motoscafi)’라 불리는 수상택시가 주로 운항하고, 작은 수로로는 베네치아의 상징인 ‘곤돌라(Gondola)’가 다니고 있다. 무더웠던 여름의 끝을 마무리 짓는 것은 매년 9월의 첫째 일요일에 벌어지는 배의축제인 ‘레가타’ 이다. 대운하에서 펼쳐지는 이 화려하고 웅장한 야외축제에서, 그 옛날 찬란했던 베네치아의 영광과 물의 도시만이 갖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다. 화려하게 치장된 수많은 배들의 물결을 이룬 운하 주변은 상기된 얼굴의 활기찬 사람들로 넘치고 거리에는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진다. 갖가지 배들이 대규모로 퍼레이드를 펼친 후에 행해지는 곤돌라 경주가 레가타의 정점인데, 경주의 기원은 “옛날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슬라브(Slav)족에게 빼앗긴 젊은이들이 신부를 다시 빼앗아 곤돌라에 태워 데리고 왔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배가 주요 생활수단인 베네치아에서 배가 축제로 승화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3백50여 개에 이르는 다리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는 대운하의 중간 지점에 있는 ‘리알토(Rialto)’다리인데, 원래는 목조였으나 1592년 석조로 개축된 아치형의 아름다운 다리이다. 영화 스크린에도 자주 등장하는 리알토다리에서 물안개 피어오르는 정취를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방문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감어린 흥취를 영원히 향유할 수는 없다. 지반이 약해 도시 전체가 계속 가라앉고 있어, 언젠가는 물속에 잠겨 우리 눈에서 사라질 슬픈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 키워드 : 베네치아, 물의도시 베네치아, 베니스 ※ 페이지 : p138~p143
  • 흔들리는 공주의 역사경관
    우리나라 고도(古都)의 옛 성이나 왕릉주변에는 지형적 문화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단지 즉흥적 편의주의에 따라 생겨난 국적 없는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이러한 반문화적·반역사적 상황은 백제웅진시기(475~538)의 도성이었던 공산성 주변에서도 예외 없이 펼쳐지고 있다. 공산성은 비록 64년이라는 짧은 기간의 도성이었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개로왕이 전사한 후 남쪽으로 천도하여 비로소 안정을 되찾고 사비시기를 열기 위해 백제 왕실이 힘을 키웠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산성의 역사성이 무질서한 주변 환경 때문에 크게 훼손되고 있다. 현재 성의 북문지를 복원해 놓았으나, 선진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 성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산성에 인접해 있는 무질서한 상점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쾌감마저 들게 한다. 외지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런 거리 풍경에 누구나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즈막한 야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공주만의 포근한 주변 환경과 오래된 고도로서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걸맞지 않는 거대한 석조물도 최근 축조되고 있다. 조형물 자체의 예술성을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이 거대한 (물론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조형물은 도시 전체의 조화를 단번에 깨뜨린다. 갑자기 시야가 답답해 지고 가슴이 막혀온다. 공주의 역사와 자연 환경을 염두에 두고 제작이 이루어진 것인지 의심스럽다. 오늘날 지역개발사업체는 흔히‘문화재 보존’이나‘환경 보호’등을 일종의 장애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다. 문화재 보존이나 환경 보호는 사유재산권 행사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건축이나 지역 편의주의적인 개발과 서로 대립관계에 놓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기관 내의 건축부서와 문화재부서의 정책이 간혹 상충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경우 한결같이 자신들의 고유한 전통문화유산을 다양한 관광자원으로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의 예를 보면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할지 그 방향이 감지된다. 그들이 여러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해결책을 참고하는 것이 우리에겐 보다 지혜로운 선택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여러 전문가를 참여시켜 전통과 현대의 기능이 조화된 바람직한 도시설계와 정책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민간인들은 사유재산만 고집하기 보다는 무엇보다 도시 속에서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겸허함을 마음깊이 새겨야 한다. 사람들간의 조화 못지않게 건물간의 조화와 아름다움 역시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 할 소중한 재산이기 때문이다. ※ 키워드 : 공산성 북문지, 공주, 백제 ※ 페이지 : p132~p133
  • 18세기 실경화와 조경
    경희궁(慶熙宮)은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궁궐들이 소실되자 경운궁(慶雲宮), 즉 지금의 덕수궁과 더불어 새로이 창건한 궁궐이다. 1592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이 끝난 후 피난지에서 환도한 선조(宣祖)는 거처할 곳이 없어 궁터를 물색하다 월산대군저(月山大君邸)에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을 세우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경복궁은 불길한 궁이라 하여 중건하지 않았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건을 마치고도 창덕궁 역시 불길한 궁이라 하여 입어(入御)하지 않고 경운궁에 장기간 머물었다. 이때 광해군은 신궁조영(新宮造營)에 강한 의욕을갖고 있었고 때마침 지상가(地相家)인 괴승(怪僧) 성지(性智)와 풍수지리에 정통한 명나라 사람 시문용(施文用)이 인왕산하에 신궁을 조영할 것을 건의함으로써 광해군 9년 (1617) 1월 인왕산하 사직(社稷)의 동쪽 담을 골라 민가 수천 채를 철거, 팔도의 목재를 징벌하였으며 1천의 승군(僧軍)을 동원해서 자수(慈壽), 인경(仁慶) 양궁의 창건을 시작하였다. 동년 6월에는 왕기(王氣)가 새문동(塞門洞)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승려 성지(性智)의 말을 믿고 광해군의 아우인 정원대군(定遠大君)의 저택을 철거, 궁궐을 짓기 시작하니 이것이 바로 경덕궁(영조때 경희궁으로 개칭)의 창건이다. 광해군 9년 6월12일 궁궐명칭을 서별궁(西別宮)으로 칭했고 동왕 동년 7월 29일 서별궁의 궁호(宮號)를 정하여 경덕궁(慶德宮)이라 했는데 이후에 인경(仁慶), 자수(慈壽), 경덕(慶德)의 삼궁(三宮)을 기공하였다. 광해군 14년(1622) 6월에 주로 전문(殿門)은 낙성된 듯 하나 동왕15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 자신은 신궁에 입어(入御)해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16대 인조는 반정직후 광해군이 백성들의 원한을 사면서까지 건립한 인경궁(仁慶宮)과 자수궁(慈壽宮)은 폐궁하였으나 경덕궁은 그 자리가 인조의 사친(私親)인 정원대군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이궁(離宮)으로서 그대로 유지하였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을 당한 후 그해(1624) 2월 20일 피난지에서 돌아오면서 경덕궁에 들어오니 이것이 경덕궁이 왕궁으로서 국왕을 맞은 시초이다. 이리하여 경덕궁은 인조 2년 이래로 역대의 왕궁이 되었으며 영조 36년 경희궁으로 개칭되었고 1910년 일본인의 손에 의해 완전 해체될 때까지 파란곡절의 역사를 보냈던 것이다. 경희궁은 순조 29년 회상전(會祥殿)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융복전(隆福殿), 흥정당(興政堂), 정시각(政始閣), 집경당(集慶堂), 사현각(思賢閣)까지 태우고 궁궐의 태반이 훼손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이에 순조는 곧 중수에 착수, 31년 그 완성을 보았지만 고종 26년에 숭정문(崇政門)에서 또 발화하여 행각사십간(行閣四十間)이 타버려 황폐화되고 말았다. 이후 일제는 조선의 여러 궁궐중에 유독 경희궁만 완전히 해체시키고 사료를 모두 없애버렸다. 그후 1910년 11월 1일 경희궁 자리에 경성중학교가 조선총독부중학교로 개칭되어 교사를 옮겼고 1978년 5월 서울 중·고등학교가 이전하면서 현대에서 매입, 1980년 9월 국가지정 사 적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경희궁의 지금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은 일제시대 장충동 이등박문의 사당 정문으로 사용되었다가 해방 후‘영빈관’이라 하여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던 것을 뜯어 이전 복원한 것이다. 또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正殿)으로 원래의 건물은 동국대학교에서 법당으로 사용하는 정각원이며 이것을 실측 복원한 것이다. 그림「서궐도안 모사도」는「서궐도안」을본으로 삼아 이강근, 정병화, 김일훈, 홍성천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 키워드 : 18세기 실경화, 18세기의 조경, 경희궁 ※ 페이지 : p144~p145
  • 생태 또는 애니메이션
    나는‘생태’라는 말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을 전부터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은 한참 지나면 그 뜻이 복잡해지거나 헝클어지지만, 생겨난 초기 단계에는바탕이 되고 뿌리가 되는 뜻을 간명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 정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중국그림 이론서를 보다가 이 말을 찾아내고, 그 뜻을 새겨 보면서 어원은 아닐지 몰라도 무척 그럴 듯한 생각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고 중국 청나라 시절의 유명한 화가인 석도(石濤)가 쓴 다음 글에 나오는 말이다. 如空山杳冥無物生態借此疎柳嫩竹 橋梁草閣此借景也 지금과 같은 초겨울, 또는 이른 봄, 온 천지만물이 다 자는 것 같고 다 죽은 것 같은 경관이 어디를 가나 펼쳐져 있는데, 살아있는 꼴, 생태를 알려 주는 어떤 작은 사물이 있다면 그 경관이 살아 있음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석도는 바로 이런 점에 착안하여 버드나무나 어린 대나무 등이나, 사람이 있음을 암시하는 다리나 초가집 등을 그려 넣음으로써, 즉 어둡고 막막한 가운데 어떤 생태가 있음을 표현함으로써 그림 전체를 살아 있게 하는 기법을‘借景’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것은 주마등이나 만화영화보다 훨씬 더 높고 깊은 차원의 애니메이션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것은 생태학의 무정한생태보다 훨씬 더 생태의 진수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조경을 함에 있어 생태를 ‘살아 있는 꼴’로, 그리고 그 생태를 만드는 일을‘애니메이션’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사실 이 생각의 단초는 꽤 오래 전에 생겼는데, 아마도 나 스스로 자각한 것은 1983년 문화재관리국의 정재훈 선생이 의뢰하여 작업했던『소쇄원 복원 및 정비 기본설계』에 참여할 때인 것으로 생각된다. 소쇄원 원주인 양씨 댁에 전해오는 문집을 읽어 가며 소쇄원의 원래 상황을 재현하느라고 한 겨울 시름하는 중에 애니메이션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양산보 선생이 어릴 적 계곡에서 놀았던 정경, 낙향하여 조원을 하는 정경, 광풍각 아래 너럭바위에서 시를 읊고 차를 드는 정경 등을 상상해 보면서 소쇄원을 살펴보니, 훨씬 더 실감날 뿐 아니라 정감나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후 대우재단의 연구비를 받아『조선조정원의 원형 연구』를 하면서 전국의 여러 이름난 정원을 찾아가서 비슷한 체험을 하고, 그 연구 성과를 가상현실 속의 정원인 ‘離世園’으로 표현해 보면서 좀 더 구체적인 체험을 나타내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작업은 과거에 사람이 살아가던 집과 정원, 그래서 그때는 살아 있던 집이나 정원이었지만, 지금은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고 삶의 흔적만 어슴푸레 남아 있는 집과 정원, 알맹이가 없이 껍질만 남아 있는 집이나 정원, 그래서 속절없이 퇴락하면서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집과 정원에 숨을 불어넣어 되살려 보는 작업이었다. 그 후 학생들과 함께 수원성, 양동 마을 등을 소재로 하여 일종의 픽션을 만들어 보는 작업을 해보면서 그 가능성을 점점 더 확인할 수 있었다.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묵은 집과 정원을 되살리는 작업뿐아니라, 새로 집과 정원을 만드는 작업에서도 이러한 작업이 가능함 을 실험해 보기로 하였고, 그래서 나온 성과가 바로『원주 토지문학공원』이다. ※ 키워드 : 황기원, 생태, 애니메이션, 토지문학공원 ※ 페이지 : p30~p37
  • 세계의 공원순례 ; 우에노공원
    우에노지역은 1868년 명치유신시절에 대부분 불에 타서 시가지를 재정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우에노 공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우선 1872년에 개관한 동경국립박물관(소장품만 9만여점)이 우에노공원 전체의 중심적인 축의 최상부에 설치되었고, 그 아래 동경 최초의 공공공원으로 우에노공원이 1873년에 오픈되었다. 또한 우에노 동물원은 1882년에 개장하였으며 총 141,500㎡의 부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 본격적인 문화예술활동의 기반이 되는 우에노미술관이 1887년에 발족, 상설조각전시실을 비롯해 시민을 위한 눈높이를 유지하며 활발한 전시행사를 지금까지 벌이고 있다. 우에노공원이 체계를 갖추게 된 계기는 간에이지라는 사찰이 명치유신 이후 방치되었다가 1924년에 우에노온시공원으로 바뀌면서 부터이며 총면적은 531,855㎡의 대공원으로 연못을 포함하고 있다. 동경의 예술 활동의 중심이 되는 동경도립미술관이 1926년에 건립됨으로써 우에노공원은 명실상부한 동경의 문화공원으로서의 권위와 함께 시민에게 개방된 공간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다지게 되었으며 1975년에 새로이 시설을 보강하여 현대적인 예술의 경향을 수용하였다. 문화예술의 한 축의 건너편에는 1931년에 개관한 국립과학박물관이 있어 과학기술의 입국에 대한 균형감각을 공원에 부여하고 있다. 또한 그로부터 28년 뒤인 1959년에는 국립서양미술관이 르 코르 뷔지에의 설계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그곳에는 전쟁 후 세계 문화예술계에 일본의 변화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로댕의 조각을 구입하여 전시하고 있다. 우에노공원은 인공과 자연, 문화와 과학, 살아있는 현재의 미술을 전시하는 미술관과 과거를 보듬어 안은 박물관, 그리고 체육시설을 통한 시민의 건강과 동물원, 거대한 호수, 접근성을 최대화한 전철역 등 복합적인 문화공원으로 손색이 없다. 시민에게 완전히 개방된 공원이 문화공간을 비롯한 각종 시설과 연계되어 자연의 숲으로 이루어지고, 시민을 위한 위락공원으로서의 역할과 체육시설의 역할을 복합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예를 찾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일반시민들이 자유롭게 누구나 들어와서 다양한 장르의 문화와 과학과 예술과 위락과 건강과 휴식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도시공원이 앞으로 많이 조성되길 기대해 본다. ※ 키워드 : 우에노공원, 우에노 ※ 페이지 : p134~p137
  • 우리시대의 설계언어 : 프랑스
    베르나르 라쉬는 파리 국립고등예술 학교인 보자르를 졸업하고 프랑스 입체파의 대가인 페르낭 레제의 작업실에서 수업을 받았던 화가출신의 경관 설계가이다. 그는 예술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깊은 사고를 전개시켜 왔고, 경관과 환경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론화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조경의 이론적 바탕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예술가답게 매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조경 분야에서 사물을 어떤 식으로 접근해 들어가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이런 접근 방식은 화가가 사물을 분석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곧 조경을 예술화시키는 방법을 나름대로 개척해 나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각적 대상을 새롭게 분절하고, 조각들의 단편으로 대상을 재구성하는 것은 입체파의 기초적인 화법인데 라쉬는 이런 입체파 이론을 “연속적 분위기”나 “창의적 분석”이라는 용어로 응용하며 조경의 예술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에 의해 창안된 조경의 신개념들은 특히 역사적 장소들의 조경에 적용 되었다. 그의 이론은 그의 작품들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입증되었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조경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이론은 매우 진지하며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행동들의 분석에서부터 시작한다. 그의 독창적인 이론인“창의적인 분석”을 배경이론과 용어에서부터 살펴보고, 그의 설계 노트들을 함께 인용하며 체계적으로 그의 이론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경관의 범주에 대한 분석과 경관의 실체, 자연과 인공적인 것의 구분, 최소한의 개입과 해석의 엄밀성, 창의적 분석과 변화 과정의 통제 등이 그의 이론의 배경을 구성하는 논리들이다. ※ 키워드 : 프랑스, 베르나르 라쉬 ※ 페이지 : p68~p75
  • 여수앞바다 장군도의 풍경이 아련한 곳 ; 전남 여수시 중앙동
    지는 그나마 개발의 여파가 덜 미쳐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동안 지자체의 근시안적 개발정책으로 일부는 상당부분 그 자연성을잃어가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오동도가 그 대표적인 예로 보인다. 지난 1968년 한려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오동도는 7백미터가 넘는 긴 방파제가 육지로 연결된 아름다운 섬이었지만 지금은 횟집을 비롯한 각종 상업시설과 유희시설 등 섬전체가 돈벌이를 위한 공간으로 전락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해상공원으로 만든답시고 바닥은 온통 시멘트에다 장삿집만 늘어나고 있으니 오동도 고유의 아름다운 자태가 유지되기는 만무한 것이다. ‘친환경적인 개발’이라는 말이 이젠 보편화되고 있는 요즘, 오동도 역시 그 고유의 자연성을 최대한 살려나가면서 그에 맞는 적절한 시설과 엄격한 보존관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얼마전 여수에 내려가 내가 살던 고향집 주변을 둘러본 적이 있다. 아버님마저 떠나오신지 꽤 오래된 우리집은 마당도 건물도 모두 달라져 있었고 주변으로는 덩치큰 아파트들이 키낮은 주변 건물들을 위압하듯 버티고 있어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예전의 모습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것이야 인간사 어딜가나 마찬가지겠지만 늘 그 곳에 그러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길 바라는 것은 나만의 향수어린 이기심일까? 그래도 아직 몇몇 고향 친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바쁜 방송생활속에서도 불쑥 찾아가 싱싱한 회 한접시에 소주한잔 나누는 정겨움을 맛볼 수 있다는 것도 어쩌면 내겐 큰 행운이리라. 이번 주말에는 여수에나 한번 내려갔다 와야겠다. 가을에 보는 장군도가 아름다울 것이다. ※ 키워드: 여수, 전남, 중앙동, 장군도, 풍경 ※ 페이지 136 ~ 137
  • ASLA,‘ 왕후의 밥 걸인의 찬’ ; ASLA 100주년 기념 세미나
    Urbanism: Visions for the next 100 Years 다음에 올 새로운 세기의 비전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Sustainability와 New Urbanism이 그것이다. ·Sustainability : 지속가능한 개발 혹은 발전이라는 개념으로 이미 금세기 후반부에 등장한 이것은 인류문명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단순히 보수 혹은 개조 정도의 컨셉에서 발상을 전환하여 공간을 다루는 모든 부문에서 적용되어야 할 과제다. John Lyle의 말을 빌면, “우 리의 행동과 환경의 패턴을 바꾸어야 함은 물론, 디자인의 컨셉설정이 새로워져야 하고, 복합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New Urbanism : Neo-traditional Design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개념은 지금까지의 디자인 방향을 전환하여 일종의 전통 회귀적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기존의 도시화가 가져왔던 사회적 문제와 병폐를 치유한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적정규모의 공동체 단위를 찾고 이 단위들이 서로서로 전이 공간을 통해 지역적 통합을 이룩하는 방식이다. 결국, 두가지 개념 모두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복합화 이론Complexity Theory에 주목해야 한다. Professionalism in the 21st Century 앞으로의 시대는 전문가의 시대라는 보편적 예측에도 불구하고 현재 다음과 같은 4가지 모델이 제시되고 있다. ·세계 공동체가 본격화되고 조직 관리의 전문화가 진전됨에 따라 전문 분야의 일상화가 진행될 것이다. ·지식사회의 발전이 가속화됨에 따라 전문가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인간의 욕구가 다양해지고 틈새시장이 발달함으로써 전문 분야의 다기화가 증대된다. ·후기 현대사회가 극단적으로 다양화의 길을 걸으면서 전문가들은 감성적 접근과 해결책 모색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 하에 조경의 21세기는 다음과 같이 예측할 수 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조경은 법률분야와 같이 사회의 지도적 엘리트 계층에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표준화가 계속 진행됨에 따라 부문이 위축되는 지표는 아직없다. 조경은 여전히 손과 머리가 작업을 주도하는 부문이기 때문이다. ·조경 부문의 수직 체계화 및 다변화는 지속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현상의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자격증을 디자인, 프로젝트 관리, 학문 분야로 세분화하고 있고, 뉴질랜드에서는 조경학 석사 학위 소지자가 부문의 Underclass로 자 발적으로 편입하는 경향도 일어나고 있다. ※ 키워드: ASLA, ASLA100주년, 세미나 ※ 페이지 144 ~ 147
  • 18세기 실경화와 조경
    경복궁 향원지 「北闕圖形」(북궐도형)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정신문화원 장서각, 고려대학교 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북궐은 경복궁의 별칭으로 조선시대에는 삼대 궁궐이있었는데 북쪽의 경복궁을 북궐(北闕), 동쪽의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東闕), 서쪽의 경희궁을 서궐(西闕)이라 불렀다. 「北闕圖形」지도는 고종 대에 중건된 경복궁의 건물 및 문루 등의 배치를 그린 평면도 중 향원지(香遠亭) 부근에서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에 이르는 지역이 표현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가로 세로 각 1.14㎝의 적색 방안(方眼) 위에 각 건물의 구조 및 크기가 나타나 있는데 칸과 칸을 검 은 먹선으로 구분, 각 칸에는 방(房), 청(廳), 주(廚), 문(門) 등의 건물 쓰임새를 기록하였다. 또한 주요 건물에는 건물 이름, 공포형식, 칸수, 기둥의 높이와 간격등을 기입해 놓았다. 「景福宮配置圖」는「北闕圖形」과 거의 유사한 배치도이나, 이 지도가 좀 더 이전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 지도의 크기는 세로 265㎝ 가로 407㎝에 달한다. 전체적으로 이 지도가 이전 지도보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건물의 명칭, 기능 등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후원(後苑) 에 속하는 향원지는「北闕圖形」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향원지는 1456년(세조 2)에 조성되어 취로정(翠露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고 한다. 연지(蓮池)의 북쪽에는 1873년(고종 10년)에 건청궁(乾淸宮)을 지으면서 연지를 개축, 섬에다 2 층의 육모정인 향원정을 지었다. 또한 북쪽 건청궁에서 향원정에 들어가는 나무다리를 설치하고 이를 취향교(醉香橋)라 하였다. 최근 향원지의 실측도와「北闕圖形」과「景福宮配置圖」에서의 향원지의 형태는 조금 다른 모습이지만 옛 지도에서는 연못 내의섬 안의 육모정이나 북쪽에 설치된 다리 등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향원지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 키워드: 18세기, 실경화, 조경, 실경화와조경 ※ 페이지 156 ~ 157
  • 위대한 조경가 옴스테드의 역정
    호사다마의 역정 동생 존이 사망한 뒤 부인 메리는 세명의자녀를 하트포드에서 혼자 키우다가 옴스테드 사무실 가까운 맨하탄으로 옮겨오게 된다. 옴스테드는 자기와 가장 절친했던 동생의 부인이 혼자 조카들과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와 자주 들러 위로하고 조카들과 놀아주는 동안 메리와 정이 들어 1859년 6월 13일 옴스테드 37세, 메리 29세에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낳았다. 신혼여행을 갈겨를도 없이 옴스테드는 공원공사 감독에 바빴는데 1858년 겨울에 이용할 수 있도록 6개월만에 스케이트장 겸 연못을 완성했고, 산책길 조성은 다음 여름까지 마쳤다. 그리고 국내 처음으로 잘 훈련되고 유니폼을 입 힌 24명의 경비원이 배치되어 질서를 유지시키고, 드라이브길에 상업용 차량은 금지시켰으며, 속도를 완속시키고, 동물을 풀밭에 방목하지 못하도록 했다. 도박이나 매춘도 철저히 막고 밤에는 공원의 문을 닫았다. 그러나 너무 과로한 나머지 건강이 악화되어 1959년 9월 28일에 위원회로부터 5백 달러와 6주의 휴가를 얻어 결혼한지 3개월만에 부인과 애들을 동반하지 않고 혼자서유럽 공원여행을 떠났다. 옴스테드는 시간을 헛보내지 않고 리버풀에 도착하자 바로버큰헤드공원에 다시 찾아 시공·관리·운영에 관한 자료를 입수했고, 이틀후에는 버밍험에 들려 하수처리공장을 견학했으며, 시장을 만나 새로 개장한 아스톤공원에 관하여 인터뷰를 가졌다. 팍스톤을 만나기 위하여 챠트워즈에도 들렀으나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또 스코틀랜드 원예가 로돈(JohnCaludius Loudon)이 설계한 더비식물원도 찾았을 뿐만 아니라 농촌지역과 런던 대공원들을 답사했고, 파리로 건너가 대공원들과 교외 공원들도 둘러 보고, 브루쉘의 공원들도 찾아갔다. 이런 답사외에도 책과 계획 도면, 기술정보를 입수하고 사진사를 고용하여 기록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수목을 구입하여 뉴욕으로 실어보내기도 했다. 옴스테드는 이번 여행을 통해 그의 시야를 넓힐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브라운의 작품이나 베르사이유의 기하학적인 궁원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고, 6주간이 3개월로 연장되었는데 돌아오자 많은 업무가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공원 설계작품이 영국과 유럽 조경가들 에게 널리 알려져복스와 응모 당시는 초보자였으나 이제는 유능한 베테랑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첫해 겨울 연못이 얼자 스케이트광들이 몰려들고 마차길은 마차행렬이 줄을 이었으며, 산책하러 온 사람, 백조에 먹이 주러 온 사람, 호수에서 보트타러온 사람 등 큰 호응을 얻게 되었고, 1859년 7월부터는 위원회에서 토요일 오후 무료 음악연주회도 개최하여 많은 시민들을 끌어 들였다. 이 중앙공원은 아주 마술적인 장소가 되었고, 기분좋은 레크레이션 장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맛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공사비가 증액되어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당초 공사비는 1백50만달러로 책정됐는데, 1년후 설계변경으로 2백만달러로, 1860년 1월에는 2백50만달러로 증액되어야 했으며, 공사를 완공하는데는 1천3백만달러 이상이 소요된 것으로 추정한다. 옴스테드가 유럽여행중 위원회에서는 1859년 10월 5일 회계검사관으로 그 린(Andrew Haswell Green)을 임명했는데 그는 매우 꼼꼼한 경리인이었다. 옴스테드보다 2살 많지만 서로 자라온 과정에 공통점도 많아 친구로서 잘 지낼 수 있었고 옴스테드가 감독으로 임명받고 일등으로 당선되는 데도 큰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옴스테드가결혼한 뒤에 독신이었던 그린은 자주 옴스테드 집에 들러 식사도 하고, 특히 유럽여행중 혼자있는 메리를 자주 찾아 다니며 사이가 가까워진데다가 그린이 회계검사관으로 임명되어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바람에 그린과의 사이가 악화되어 공사진행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1861년 1월 22일 정식사표를 제출했으며, 그후 중앙공원 공사에 옴스테드는 미지근히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마차사고로 영구적인 절름 발이 신세가 되는 등 설상가상으로 불행이겹치기도 했다 ※ 키워드: 조경가, 옴스테드, ※ 페이지 148 ~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