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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경사에 발을 들여놓기 30년
    1950년대 후반부터 나는 전남대학교 임학과에서 삼림입지학과 양죽론 그리고 조경학 강좌를 담당하면서 대나무의 연구에 관여하고 있었다. 우리 대학이 있는 지방은 대나무의 고장이었기에 대나무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강좌에 ‘양죽론’이라는 강의를 새로이 설강할만큼 연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조경」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상륙, 1973년에는 서울대학교와 영남대학교에 조경학과가 새로이 설치되었고 조경학회도 창립되어 내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고심끝에 나도 우리 대학에 조경학과를 설치하고 학문의 방향도 조경쪽으로 돌려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사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대나무에 미쳐 일생동안 대나무와 함께 할 뜻을 굳히고 있었다. 대나무 연구에서 조경사 연구로 1962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 고온과 저온의 갑작스런 변화로 시작된 이상기후는 마침내 3·4월에 이르러 전국의 대나무숲(竹林)에 큰 피해를 주어 상당수의 대나무가 말라죽어 갔다. 나는 당시 현지 답사를 통해 같은 지역이라도 대나무가 얼어죽지 않은 곳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그 간접적인 피해 요인은 국소적인 지형조건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피해지역을 찾아 그 피해상태를 파악하는 한편 이에 대한증명을 위해 국소지형(局所地形)에 대한 최저기온을 측정하고, 내한성을 판단하기 위해 대나무의 환원당(還元糖)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최저온도계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 주문하여 많은 양을 주문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산지에 고도 5m마다 설치한 온도계와 광주 소방서의 화재 감시탑에 수직으로 2m 간격으로 설치해 놓은 온도계의 기온을 날마다 측정하였는데 그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 키워드 _ 정동오, 조경사 ※ 페이지 _ 34-37
  • 조경에 젊음을 바치고 ; 관악캠퍼스 마스터플랜의 수립
    1973년 3월초 청와대에서 관악산 조림계획을 수립하여 조속히 보고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그 당시 미립목지가 많았고 토사의 유실을 막기 위해 사방공사를 한 곳도 있었다. 관악산 시설지역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호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웅장한 관악산 자체가 시설지역에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박대통령이 판단하고 조림계획을 지시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관악산의 시각구조에 대하여 분석한 결과, 순환도로에서 중복부까지를 시설지역의 배경으로 보고 조림대상지역으로 하였다. 조림계획의 중대성과 시기상으로 조급함을 느끼게된 나는 서둘러 현황조사에 착수하였다. 지형도와 카메라, 야장을 준비하여 미립목지의 범위를 지형도에 표시하고 현황을 사진에 담고 야장에는 토질을 기재하면서 중복부까지 구릉과 계곡을 답사하였다. 현지답사를 마치고 기간이 임박하여 관리과 안봉준 계장과 여관에 투숙하면서 며칠 밤을 새웠다. 또한 정확성을 더하기 위하여 관악산 항공사진과 지형도를 대조하면서 도면에 임반을 구획하고 번호를 부여하면서 면적을 산출하였다. 장래의 경관미와 시각미를 우선하고 계곡, 사면 등의 특성에 따라 적지 적수로 수종을 선정하였다. 상록수는 리기다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낙엽수는 주로 단풍나무, 자귀나무, 낙엽송 등의 20여종이 선정되었다. 상록수와 낙엽수의 비율은 산림환경의 안정을 위하여 7:3으로 계획하였다. 면적당 식재주수를 산출하고 조림계획보고서를 작성하였으며 조림계획의 타당성과 보완을 위하여 수원농과대학 이창복 교수, 심종섭 교수, 임경빈 교수를 초빙, 김도연 관리국장, 안봉준 계장이 참석한 가운데 설명회를 가졌다. 이 보고서를 근거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임반별로 조감도를 그리도록 하였다. 조감도를 그리는 화가와 같이 임반별로 대표적인 지역의 현황사진을 골격으로 삼고 조림한 수목이 성목이 된 상태의 색조로 조감도를 완성시켰다. 각 수종에 고유번호를 부여, 표시하여 조감도에 부착하고 일목요연하게 이해가 되도록 작성한 조감도의 사진을 찍어서 앨범 좌측은 현황사진, 우측은 조림 후 장차 성림이 된 상태와 비교가 되도록 임반별로 스크랩하여 청와대에 보고하였다. ※ 키워드 _ 서울대캠퍼스, 강우창, 마스터플랜, 1970년대 조경 ※ 페이지 _ 134-137
  • 남한산성 마을경관의 원형과 복원
    최근 남한산성이 수도권 제일의 역사문화 관광지로 부각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의 수가 늘고 있으며 학술적 관심과 연구 또한 확대되고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백제 초기 도읍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대 규모 취락이 형성된 것은 조선조 인조 5년에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안으로 옮기고 산성거민을 확보할 목적으로 광주 관내의 백성은 물론 타 읍의 거주민도 모민입거(募民入居)한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마을의 규모면에 있어서는 이읍(移邑) 초기에는 대략 300여호 정도였으나 점차 그 수가 늘어나『광주부읍지』(1842~43)에 나타난 산성마을의 호구수를 보면 1,088호에 인구는 4,047명(남:2,100명 여:1,947명)을 보이고 있다. 이는 당시의 우리나라 생활양식을 고려해 볼 때 남한산성이 상당한 도시적 면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마을의 구조나 모습은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유리원판사진이나 일정초기에 제작된 지형도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성세가 20세기초 까지만해도 그대로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한산성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은 산성이 갖는 고즈넉한 옛 멋과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남한산성, 그리고 전통적 산성마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대형화되고 변형된 건축물에 먹거리 집들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역사 유적들과 조화되지 않은 현재의 마을 모습에서 실망을 감추지 못하곤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산성마을을 복원하기 위한 몇가지 논의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 키워드 _ 남한산성, 경관, 공원, 역사문화 ※ 페이지 _ 122-123
  • 우리시대의 설계언어 ; 프랑스 : 경관과 예술
    알랭 로제는 원래 소설가였으나 파리 라빌레트 건축학교의 조경학 박사과정 교수로 채용됨으로써 프랑스 조경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몸과 경관의 관계에 관한 이론, 경관론에서 사용되는 어휘들의 계보에 관한 연구, 경관에서의 예술의 기능에 대한 연구 등이 그의 주된 학문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경관과 환경을 엄격히 구분하여 예술에서 시작된 경관을 주로 깊이 탐구했으므로 조경에 대한 과학적 태도, 즉 통계 수치나 그래프를 통해 환경 과학의 방식으로 이뤄지는 조경학에 매우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다. 소설가가 조경학 박사과정을 지도할 수 있고, 조경을 이야기하며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을 비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그의 이력과 입장은 매우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조경계에서 그의 입지는 확고하며 그의 입장은 광범위하게 호응을 얻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편으로 이런 현상이 어쩌면 조경이 잃어버린, 조경의 본래 모습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의 지적대로 환경 과학으로서만 조경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경관은 파괴되고 조경은 사라진다는 것은 점점 입증되고 있다. 조경은 분명히 현장의 일만은 아니다. 또한 조경은 과학에서 시작해서 과학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조경은 또한 철저하게 학문이기도하며 미학과 깊이 연관된 매우 흥미있는 분야이다. 학문으로 조경을 논하기 위해서는 조경과 관계된 미학적 논점들을 반드시 알 필요가 있다. 단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든지 관념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덮어버린다면 조경계는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할 궁극적 방법을 결코 찾아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점에 대해 알랭 로제가 인용한 칸트의 아폴로지는 새겨들을 만 하다. 매일 빙벽을 바라보고 살면서 빙벽이 왜 아름다운지 모르는 알프스 산골의 시골뜨기 대접을 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빙벽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왜 빙벽을 오르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 정리해볼필요가 있다. 또한 소설가가 조경학 박사과정을 지도하고, 도로 장비청의 전문위원회장을 수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키워드: 경관, 예술, 설계언어, 프랑스, 디자인철학, 미학 ※ 페이지: 50-55
  • 조경학회장 선거과열 이대로 좋은가?
    시민총선연대의 낙천 낙선운동이 세간의 뜨거운 화제로 떠오르며 정치권의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그 어느때 보다도 드높은 올해, 총선의 향방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무능한 후보는 아예 출마하지도, 선출되지도 못하게 하겠다는 국민적인 공감대가 이처럼 뜨거운 열망으로 분출되었던 것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공교롭게도 같은 4월에 이틀을 사이에 두고 개최되는 한국조경학회장 선거 또한 새천년 한국 조경계의 뜨거운 화두로 꼽힌다. 한국 조경계의 구심축을 형성하는 조경학회의 새로운 차기 임원진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조경계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반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학교별·지역별 분파가 형성되어 후배, 제자들을 끌어모으고 선거 전날이면 여관, 호텔을 잡아 술대접까지 하며 지지를 부탁하던 과거의 선거풍토가 과연 올해에도 재현될 것인지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있다. 언제부터 우리 조경계가 이런 선거과열 풍토로 몸살을 앓게 되었는지. 학자들다운 청렴한 방식과 절차로 타 관련단체의 모범이 되어야 할 조경학회가 또다시 진부한 분파 싸움과 감정대립으로 일관한다면 이미 그 신용을 잃어버린 ‘못믿을’ 우리의 정치판과 조금도 다를게 없을 것이다. 누구누구가 출마할 것이라는 공공연한 이야기가 나돌고 있는 가운데 일부 후보는 본격적인 선거활동에 들어갔다는 소리도 들리고 있다. 선거후보 등록절차나 선거방식 등 어떠한 규정도 만들어지지 못한채 선거당일 이사회에서 즉각적인 입후보 및 선거로 결정되는 현행 선거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사실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본지는 오는 4월 중순 새천년의 미래를 열어갈 차기 회장선거에 앞서 예년과 같은 입후보자들의 과열경쟁을 우려하는 조경계 중진교수 두분의 목소리를 담아보았다. 이번 토론을 계기로 입후보자들은 물론 현 회장단과 유권자들이 학회 본연의 의미와 역할을 되새기며 개선대책을 마련하고 동시에 그간에 우려되었던 과열풍조를 뿌리뽑아 ‘학회장 선거’가 조경학회인들은 물론 전 조경인들의 한마당 축제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키워드 _ 조경학회장 선거, 선거과열 ※ 페이지 _ 132-133
  • 두만강변 7백리길을 다녀와서 ; 조선족 이주정착의 배경
    지난 1999년 9월 1일부터 1년간 해외 파견교수로 임명을 받은 나는 13회에 걸쳐 답사해 보았던 중국 일대를 다시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동안 주마간산격으로 변방문화권의 이구석과 저구석을 헤집기만 한 것을 정리도 할겸, 마음속에 접어두었던 두만강 7백리 길에서 우리 피붙이들과 못다한 이야기들도 이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우선 몽골의 드넓은 초원에서 고대사(古代史)의 우리 뿌리를 확인하는 즐거움도 맛보았고, 수천년이 지난 오늘 이라고 반겼을 때에도 그리 거북하지 않았었다. 중국의 서남쪽 운남성에서는 소수민족들의 풍물과 석림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만끽하기도 하였고 요녕성 요동반도 끝자락의 대련과 여순시에서는 중국의 근대사와 현대 도시로의 발돋움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어서 찾은 중원의 고도 하남성 개봉과 소림사에서는 황하만큼이나 길고 깊은 한족들의 근원과 역사의 자존심을 읽어보기도 하였다. 이렇게 겹겹이 쌓여진 그들의 창고 속을 들여다보면서 그동안 확인되었던 알갱이들이 이어지며 어렴풋이나마 인접국과 여러 민족들의 문화흐름을 구분하게 되었고, 비록 곳간 입구에서 출납장부속의 을 추스려보려던 10여년의 우둔함 때문에 심신은 많이 피로해졌지만 앞으로 과 비교하기 위한 시간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로 미련을 접어두기로 하였다. 그래서 이제부터 터득할 수 있는 것을 깨우치는 이 어떠한 접촉과정을 통해 중국에 영향을 미쳤고 동화, 변질되어 가는가를 더듬어 보기로 하였다. ※ 키워드: 두만강, 조선족, 중국여행, 기행, 해외여행 ※ 페이지: 116-121
  • 벌개미취
    학 명 : Aster koraiensis Nakai 과 명 : 국화과 국화과 식물 중에서 토양 적응력이 매우 뛰어난 식물로 건조지, 습지 등 열악한 조건에도 잘 적응하며 잡초와의 경쟁에서도 우성을 보여 번식력 또한 강하다. 한국 특산식물로서 여러 종류의 야생화 중에서도 비교적 많이 보급되어 있는 실정이며 넓은 고수부지, 나대지, 도로변의 가로화단 등 여러 지역에 식재가 가능하다. 번식방법은 실생, 분주, 근삽 등 여러 방법으로 가능하나, 특히 근삽(root cutting)이 대량 생산에 많이 이용된다. 3월중·하순경 굴취하여 뿌리 마디사이의 부정아(adventitious bud)를 2개 정도 잘라서 잘 정지된 토양에 20㎝간격으로 배열하여 얇게 복토하고 충분히 관수하면 짧은 기간에 대량육묘가 가능하다. 벌개미취는 식용으로도 가능한 식물로서 비닐하우스 재배시 연 3회 정도 잎을 수확하여 나물로 이용하면 높은 농가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유망한 자원식물이다. ※ 키워드 _ 벌개미취, 지피식물 ※ 페이지 _ 128
  • 갠지즈강에서 쓴 편지
    갠지스강은 히말라야산맥 시바산에서 발원하여 흘러오다가 신기하게도 이곳 바라나시에서 역류하여 다시 시바산을 향해 흐르고 남쪽으로 이어져 인도양으로 흐른다고 합니다. 바라나시(Varanasi)는 이런 갠지스강의 영험함 때문에 힌두교도의 최대 성지로 알려져 있습니다.바라나시는 Varuna강과 Assi강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도시명이 되었고 “영적인 빛으로 넘친 도시”란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바라나시는 갠지스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입니다. 갠지스(Ganges)는 원래 영어식 이름이고 현지에서는 강가(Ganga)강이라고 불리우며, 불교경전에 항하(恒河)라고 나오는 것도 이 강가(Ganga)의 음에서 온 것입니다. 히말라야에서 흘러내린 물이 인도평원을 거쳐, 우주의 창조와 파괴라는 두 개의 모습을 지닌 시바산의 얼굴에 해당되는 초생달 모양으로 굴곡진 곳에 바라나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1천5백개가 넘는 힌두사원이 있는 이 성지는 영국의 식민통치 아래에서도 별다른 변화없이 인도의 민족정신을 길러왔으며 현재 인구는 1백만 정도라고 합니다. 이른 새벽 죄의 사함을 얻기 위해 목욕을 하는 신도들을 보았고 시체를 태우는 화장터, 합장을 하고 기도를 올리는 성자들을 봅니다. “신과 함께 사는 사람들”, “종교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곳 인도사람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얼른 보기에 깨끗해 보이지 않는 그 물에서 빨래도 하고 대소변을 보며, 목욕도 하고 그 물을 떠다 식수로 쓰기도 합니다. ※ 키워드: 기행, 인도문화, 해외여행, 해외여행기 ※ 페이지: 110-115
  • 연못의 수질오염과 자정
    연못과 호수는 물의 이동이 많지 않은 곳이다. 즉 주변환경이 완전히 폐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요인중 중요한 것으로는 바람과 햇빛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계절적으로 변화무쌍하며 또한 지리적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수중의 미생물들과 조류의 광합성은 환경에 따라 그 번식을 크게 달리한다. 미생물들과 조류의 번식에 좋은 환경은 주로 수면이고 이러한 수면은 비가 오면 빗물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곳이다. 따라서 연못이나 호수 유입구의 구조와 위치 또는 수심에 따라 물의 양과 유속이 변화하고 이로인한 유기물들의 퇴적이나 종류도 다르게 된다. 이러한 환경적 차이는 주변 토양과 수목의 종류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며 수중식물들이나 미생물들의 분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유입구 주변에는 비교적 입자가 큰 모래나 자갈이 쌓이고 작은 입자들은 물의 흐름을 따라 멀리까지 이동하게 된다. 따라서 먼 곳에서는 가벼운 입자들의 퇴적이 발생하게 되며 이것은 진흙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러한 진흙은 주변 기슭에 수생식물들의 보금자리를 제공하게 되고 수생식물들 사이에는 물고기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지게 되나 물고기들은 좀 더 상위의 먹이사슬을 이루어 수질오염을 제거하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대기오염 및 오폐수에 의한 오염이 심각한 상황에서 고인물은 가능한 수면으로 이동시켜 산소를 많이 공급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여야 하며 또한 수면에 많은 산소가 공급될 수 있도록 식물성 조류의 번식환경을 잘 조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작은 연못에 수생식물을 심으면 연못이 아주 작게 보이며 이들의 성장과 쇠퇴주기에 적절히 대처해야만 한다. ※ 키워드 _ 수질정화, 자정작용 ※ 페이지 _ 138-141
  • 베를린의 자연공원 쥐트겔랜데
    베를린 중앙의 한 지역인 과거의 열차 편성정거장 템펠호프(Tempelhof)에는 도시 속의 자연이 자라고 있다. 이곳은 자연오아시스로서 동시에 철도시대의 독특한 흔적을 간직한 전설적인 곳이며, 베를린 시민들, 자연보호주의자들, 경관생태계획가들, 학자들이 10년 이상 이러한 생태적인 보물의 지속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연공원의 목표는 베를린의 경관생태프로그램과 관할구인 쇠네베르그(Schoeneberg)의 계획에서 출발한다. 이 지역은 이 공간의 이용이 중단된이래로 거의 50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속되어온 도시유휴지 비오톱으로서, 현재 베를린에서 나타나고 있는 57개 비오톱유형의 하나이며 상당부분이 특별히 보호가치가 있는 비오톱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5년 이 자연공원은 통일된 베를린의 도시계획 및 개발과정에서 이 공간에 대한 독일철도회사의 수요에도 불구하고 자연공원으로서 오랫동안 보호된 아름다운 꿈을 실현시켰다. 이를 위한 관련행정기관, 시민, 학자의 노력, 알리앙스 재단의 투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일철도회사가 쇠네베르거 쥐트겔랜데 자연공원을 위하여 베를린 지역에 대하여 계획을 변경한 것은 과거의 철로지역 18ha를 도시의자연으로 돌려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자연 공원 쇠네베르거 쥐트겔랜데에 대한 계획과 이의 공개 및 신중한 개발은 자연오아시스의고유한 특성을 유지하고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지속적인 개발의 위협속에 있는 도심의 공간(특히 도시유휴지)이 그 자체의 생태적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호되고 관리된다는것은 오늘날의 도시개발 및 관리의 상황에서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1997년 초여름 통 제되어있던 이곳을 안내자를 따라 처음 방문했을 때 다른 일행들은 하나 뿐인 외국인인 검은머리 이방인이 이곳을 취재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는지 눈이 마주치면 기자냐고 물었다. 그만큼 이 공간은 그들에게도 일반화되지 않은 그들 스스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 키워드: 베를린. 자연공원, 공원, 쥐트켈랜데 ※ 페이지 126 ~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