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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지구 도시건축통합 마스터플랜 설계공모] 어반 랜드스트라이프
2등작
한국에서 신도시가 조성되기 시작한 지 40~50년이 지났다. 토지를 수퍼 블록으로 나누고 하나의 주거 형식을 복제해 배치하는, 단지 계획이라는 효율적인 방법은 국토의 풍경을 획일적으로 바꾸어왔다. 이러한 단지화의 폐해는 도시와 건축의 분리, 엔지니어링 우선의 사고 등 고착화된 제도적 문제를 야기했다.3기 신도시는 지금까지의 도시계획과는 다른 대안을 요구한다. 수퍼 블록을 소블록으로 작게 나누고, 가로 공간을 활성화하면서 건축을 도시계획 초기 단계부터 함께 구상해야 한다.
현실적 여건을 수용하면서 기존의 반복적인 해법으로부터 탈피를 시도하는, 새로운 도시 모델을 제안한다. 주변 지형을 고려하고 건축과 오픈스페이스를 결합한 ‘필드블록field block’ 체계를 고안해 과천 신도시의 틀을 완성했다. ...(중략)
*환경과조경385호(2020년5월호)수록본 일부
- 디에이그룹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사무소 + 와이오투도시건축 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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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지구 도시건축통합 마스터플랜 설계공모] 워커블 시티, 링크드 블록
3등작
‘워커블 시티, 링크드 블록(Walkable City, Linked Block)’은 가로 공간이 중심이 되는 공유 도시를 주제로 한 도시계획이다. 보행 중심 도시를 목표로 도시를 설계했다.
보행 중심 도시: 워커블 시티
보행 도시는 걸어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공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각 단지에 시민들이 공유하는 다양한 부대 복리 시설을 배치해 보행의 목표점을 만들어준다. 또한 자전거 도로, 공원, 도서관 등의 생활SOC, 커뮤니티 시설과 편의 시설을 보행 친화적인 가로와 함께 긴밀히 배치한다. 가로와 밀접하게 연계된 예술 및 음악 공간, 카페와 레스토랑 등은 풍성한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보행이 편리한 도로 구조와 더불어 자전거 등 퍼스널 모빌리티의 사용을 활성화하는 교통 계획을 마련한다. 이는 차량 이용을 최소화한 도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편함을 상쇄한다. 주거 약자나 보행 약자를 위해 별도로 마련된 단지에서는 차량 이용을 허용하고 단지마다 비상 및 조업 차량을 위한 동선과 주정차 공간을 마련한다. 이로써 보행과 차량이 서로 보완되는 도시가 완성된다. ...(중략)
*환경과조경385호(2020년5월호)수록본 일부
- 에이텍종합건축사사무소 + 케이에스엠기술 + 데바제2씨2한국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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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 투영법과 초점 거리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
누구에게나 사랑한다고 손꼽아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이라도 있을 것이다.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에겐 환경 운동일 것이다. 그리고 J. D.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라면 사냥 모자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일관되게 세상의 위선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 왔는지 주장할 것이다. 전혜린이 세코날을 먹고 자살하지 않았다면, 글쎄 헤르만 헤세를 얘기했을까?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라면 싸구려 재규어 기타를 들어 보이며 물질에 초탈한 영웅의 초상화를 능숙하게 그려냈을 것이다. 나라면?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설계 드로잉들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슬픈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계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젊은 조경가들 사이에서는 요새 어느 회사가 더 잘나가는지 토론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게 유행이 됐다. 그리고 학생들은 주로 설계를 너무 잘하고 싶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이제는 설계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다.
아마 술자리에서 루미온과 브이레이 중 무엇이 더 훌륭한지에 대한 백 번째 논의를 하거나 최근 유튜브의 오유 그래픽스(OU Graphics)채널에 올라온 죽이는 엑소노메트릭 다이어그램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예전부터 모든 게 그래왔던 것 같기도 하다.
조경가에게 미디어
그래서 친구가 없다거나 많다거나 뭐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억울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이제야 생각해보면 사실 ‘조경’이라는 분야가 산업 디자인 중 유독 미디어에 소홀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폴리곤(polygon)과 넙스(nurbs)의 차이점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거나 픽사(Pixar)가 ‘제리의 게임’에서 서브디비전 모델링을 최초로 사용해 시그라프(SIGGRAPH)기술상을 탔다는 얘기 같은 걸 지금까지 누구와도 나눠본 경험이 없다.
이건 정말 슬픈 일이다. 예를 들면 나는 절제된 볼록한 형태의 구조를 만들 때는 케이트너리 커브(catenary curve)를 쓰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에 대해 열 번 말할 때, 한 번쯤은 커브의 차수(degree)간의 차이에 대해 말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는 업무 시간에 라이노와 스케치업을 주로 쓰면서 회의만 시작했다 하면 지난주에 했던 콘셉트 얘기를 다섯 번째 반복하는 게 슬프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사랑하는 루미온의 그래픽이 모든 설계 드로잉들을 먹어 치우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공모전에서는 대놓고 스케치업과 루미온을 쓰라며 설계에 있어 미디어의 다양성과 개성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강요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배가본드’의 무사시는 오직 검술에만 몰두해 인생의 허무를 깨달았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건 ‘문체’라며 미디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우리는 종일 컴퓨터로 설계하면서도 정작 디지털 미디어를 부차적인 표현 수단 정도로만 생각한다. 원근법 이미지와 정투영법 도면의 역할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논의하지 않으면서, 루미온으로 비슷한 이미지들을 10분 만에 20장 렌더링해서 패널의 2/3를 채우는 것은 너무도 대량 생산적이다(디자이너가 대량 생산을 하다니). 만약 100명의 사람이 앞으로도 루미온을 쓸 생각이라면 나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거다. 언젠가 아무도 루미온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 그때 루미온을 쓸 거다. ...(중략)
*환경과조경385호(2020년5월호)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 한국의 디자인 엘, 뉴욕의 발모리 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고, West 8의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를 수행했다. 한국, 미국, 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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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잇기] 학생들과 함께 읽은 동네 이야기
아저씨, 사진 찾으러 왔어요
세 평 남짓한 작은 한옥 사진관에 여고생들의 왁자한 목소리가 가득하다. “경자야 너는 잘 나왔는데 나는 못나게 나온 것 같아.” “영애야 무슨 소리니. 네가 훨씬 예쁘게 나왔는 걸. 아저씨가 너만 잘 찍어 주셨나 보다.” “얘는 참. 우리 이 옆에 떡볶이 먹으러 갈까? 숙희랑 명진이도 그리로 온다고 했어.” 사진관 주인이었던 주희돈 할아버지 귓가에는 학생들이 사진을 찾아가며 까르르 웃던 소리가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맴도는 듯하다.
196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종로구 재동에 있던 ‘명광사’는 창덕여자고등학교 맞은편에 자리한 사진관이었다. 입학식, 졸업식, 체육 대회 등 굵직한 행사 사진뿐 아니라 각종 증명사진과 추억이 담긴 사진의 인화를 도맡았다. 안국역 사거리에서 가회동으로 올라가는 방향에 있던 창덕여고 자리에는 현재 헌법재판소가 있다. 함경북도 길주가 고향인 주희돈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서울로 혈혈단신 피난온 뒤 계동에 60여 년간 살고 있다. 고향을 떠나 고단했던 젊은 시절, 사진 기술을 가진 인생의 단짝 정옥선 할머니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재동에 명광사를 차려 동네 사람들과 서로 의지하며 정겹게 한 세월을 살았다.
“대박이다. 헌법재판소가 창덕여고였다구요?” “할아버지 그럼 명광사 한옥 건물은 지금 어디 있어요?” 계동 중앙고등학교 1학년 선재와 혜조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운 듯 큰 소리로 질문한다. “있긴 어디 있어. 지금은 다 없어지고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 아이들은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준비해온 질문과 동네 지도를 바탕으로 할아버지가 겪었던 동네 이야기를 하나씩 수집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동네 어귀의 우물터
“우리 동네 어귀의 오랜 우물터에 얽힌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조사해 오세요.” 20여 년 전 한국에서 획일화된 교육을 받다 중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가서 받은 첫 역사 수업의 과제였다. 유명한 문화유산도, 미국의 눈부신 개발상을 담은 멋진 건물도 아닌, 그저 동네 어귀에 오랫동안 자리해온 우물터였다. 비석도 없고 관리도 잘 되어 있지 않았으며, 물을 깃는 원형의 넓은 구멍은 널빤지로 단단히 못질 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사용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된 우물임을 알 수 있는, 볼품없고 허름한 곳이었다. 역사 공부는 당연히 암기식으로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것이라고 배웠던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서 과제를 제대로 이해 못 한 건 아닌지 의심하며 과제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하던 기억이 또렷하다. 한 주 뒤, 같은 반 열두 명의 친구들의 과제 발표는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떠오를 만큼 신선한 충격이었다. ...(중략)
*환경과조경385호(2020년5월호)수록본 일부
서준원은 열다섯 살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뉴욕에서 약 10년간 생활했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 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 다양한 생활 공간에 대해 공부했고, 한국인의 주거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SOM 뉴욕 지사, HLW 한국 지사, GS건설, 한옥문화원,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등에서 약 16년간 실내외 공간을 아우르는 디자이너이자 공간 연구자로 활동했다. 한국인의 참다운 주거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공간 연구를 위해 곳곳을 누비며 ‘공간 속 시간의 켜’를 발굴하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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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스케이프] 반지의 제왕 속 나무수염이 전하는 이야기 1
“이는 이미 대규모 살생을 초래했고 수백만 명 이상을 조기 사망케 하겠다고 위협하는 비상 사태다. 그 영향은 점차 확산되어 경제 전체를 불안정하게 하고 자원과 인프라가 부족한 빈곤 국가를 압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기후 위기다.”1 팬데믹(pandemic)의 주요 원인으로 기후 변화가 언급되고 이기후 변화 너머에는 인류세(Anthropocene)가 있다. 인간이 지구에 가하는 압박이 너무나 극심해져 지구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의 복수라고 하는 오래된 레토릭(rhetoric)이 다시 등장하지만,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톨킨(J. R. R. Tolkien)의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에 숨어 있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동명의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터라 절대적인 힘을 지닌 반지를 둘러싼 사건들이 잘 알려져 있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볼 수 있다.2 우선은 정원사 샘와이즈 갬지가 있다. 순박하고 정직한 그는 이야기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절대반지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충실하게 프로도를 끝까지 수행한다. 심지어는 반지의 유혹을 받았을 때에도 정복한 곳에 꽃과 수목의 동산을 만드는 환상을 볼 정도로 뼛속까지 정원사인 인물이다.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고향을 복구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으니, ‘돌보는 이’라는 정원사의 덕목을 그대로 체화한 인물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85호(2020년5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Owen Jones, “Why don’t we treat the climate crisis with the same urgency as
coronavirus?”, The Guardian 2020년 3월 5일.
2. 『반지의 제왕』은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었다. 먼저 김번·김보원·이미애의 공역본인 『반지전쟁』(예문, 1991년과 1998년)이 출판되었고, 이후 톨킨의 번역 원칙에 따라 제목을 수정한 『반지의 제왕』(씨앗을뿌리는사람, 2002년)이 출판되었다. 이 연재에서는 2002년 출판본을 참고한다. 이외에 한기찬이 번역한 『반지의 제왕』(황금가지, 2001년), 일본어 중역본인 강영운
번역의 『완역 반지제왕』(동서문화사, 2002년)이 있다. 모두 절판 되었으나 중고 서점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황주영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 같은 대학 미술사학과에서 풍경화와 정원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생계를 위한 독서를 하기 전에는 다양한 판타지 소설을 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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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바꾸는 세상
‘새일꾼 1948-2020’ 전, 일민미술관, 6월 21일까지
선거는 작기만 한 내가 커다란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종이 한 장에 세상을 바꾸는 힘이 깃들어 있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와 맞물려 선거의 의미를 되짚는 전시가 마련됐다. 3월 24일부터 6월 21일까지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새일꾼 1948-2020: 여러분의 대표를 뽑아 국회로 보내시오’는 아카이브와 사회극의 결합을 시도한 전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기록보존소의 400여 점의 선거 사료, 신문 기사 등 다양한 기록물을 전시해 73년간의 선거 역사를 살필 수 있게 했다. 예술가 21팀은 선거라는 주제를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해 설치, 퍼포먼스, 문학, 드라마, 게임, 음악 등 다채로운 형태로 선보였다. “선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선출하는 과정으로, 경합과 갈등의 장이며, 사건들의 드라마틱한 흐름을 이끄는 모멘텀(momentum)이자 참여라는 행위인 점에서 사회극이 펼쳐지는 무대이기도 하다”는 점에 착안한 기획이다.
전시는 일민미술관 앞에 위치한 광화문광장을 활용해 그 의미를 더욱 확장한다. 천경우 작가의 ‘리스너스 체어(Listener’s Chair)’는 광화문광장과 전시실 내부를 간접적으로 연결해 오늘날 민주주의적 소통 방식을 사유하게 한다. 정치적 입장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수많은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광장에 스피치룸(speech room)을 설치하고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스피치룸에서 수집된 목소리는 음성 변조를 거쳐 미술관 1층 전시장에 설치된 헤드폰으로 전달된다. 어둑한 공간에 원형으로 배치된 익명의 시민들이 사용했던 의자, 이야기의 주인을 알 수 없게 변조된 목소리는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의사소통의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아카이브는 단순히 기록물을 나열하는 소극적 방식을 탈피해 동시대의 예술 작품과 적극적인 상호 작용을 시도한다. 안규철의 ‘69개의 약속’은 역대 대통령 선거 벽보에 사용된 슬로건과 구호가 얼마나 모호하고 추상적 언어인지를 드러낸다. ...(중략)
*환경과조경385호(2020년5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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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에 맞물린 환상과 일상
‘화이트 랩소디’ 전, 우란문화재단, 5월 27일까지
분필을 잡은 손이 초벌된 항아리에 선을 긋기 시작한다. 흰 선이 한 줄 한 줄 채워지며 검은 항아리는 백자가 되어간다. 도예가 주세균은 분필이라는 일상적 소재로 한국적 아름다움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달항아리를 모방한다. 유약 대신 분필 가루가 덮인 도자, 낙서처럼 구불구불한 선이 그려진 도자는 낯선 모습으로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지난 4월 1일, 우란문화재단은 백색에 투영된 다양한 이념과 심상을 공유하는 ‘화이트 랩소디(White Rhapsody)’전을 열었다. 백색은 한국의 전통성과 민족성을 대변하는 색채지만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며 그 함의와 소비되는 방식이 다양하게 변해 왔다. 전시는 백색을 통해 드러나는 전통의 시각성과 해석의 전형성을 현대적 시점에서 비평적으로 고찰한다.
백색에 관한 낯익은, 낯익지 않은 시선
전시장 입구에는 사전 리서치 자료와 직물, 비누, 설탕, 밀가루 등 백색 사물을 전시한 아카이브가 마련됐다. 사전 리서치는 산업, 문학, 건축 다양한 분야에서 쓰인 백색을 두루 살폈다. 이정은의 ‘화이트 인사이드(White Inside)’는 하얀 피부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최호랑의 ‘올림픽 시공간의 백색’은 88올림픽 개최 시점에 나타난 백색의 상징성을 탐구했다. 이야호는 리서치 픽션 ‘모두의 일’을 통해 흰색이 증발해버린 세상을 그렸다. 이 같은 작업은 역사와 인식 속 백색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며 이와는 또 다른 해석이 펼쳐질 것을 암시한다.
전시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중반에 태어난 다섯 명의 작가를 초대했다. 사진, 조각, 도자, 설치, 향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은 백색에 대한 작가들의 개별적 해석의 결과물로,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관념으로부터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 전시의 협력 기획자인 조주리 큐레이터는 백색에 관해 “새로운 발언을 할 수 있는 세대의 작가들을 초청했다”고 설명했다. ...(중략)
*환경과조경385호(2020년5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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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층 도시
장지, 서울 컴팩트시티 국제설계공모 당선작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대규모 택지 개발을 통해 공공 주택을 공급해왔다. 거듭된 개발은 서울을 물리적 한계에 다다르게 했고, 이제 개발 가능한 토지 자원을 찾기 힘든 상태에 이르렀다. 대안으로 도시 외곽에 주거 단지를 짓기 시작했지만, 이는 시간적·경제적 비효율성, 그린벨트를 비롯한 녹지 잠식 등의 문제를 낳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SH는 저밀도로 이용되는 공공시설 부지의 입체적 활용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 1월 17일 SH는 ‘장지, 서울 컴팩트시티(Compact City)국제설계공모’를 개최했다. 대상지는 송파구 장지동의 장지공영차고지다. 1990년대에 매연, 소음, 안전사고 문제에 대비해 시 외곽 그린벨트 지역에 지어졌지만 수도권 확장으로 주택 단지에 둘러싸이게 된 곳이다. 공모는 활용도 낮은 차고지 부지를 대규모 도시숲, 행복주택, 생활(SOC)가 층층이 어우러진 입체 도시로 재탄생시킬 것을 요구했다. 양적 공급에 치중했던 공공 주택 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는 시도다. 과제는 세 가지였다. 첫째, 공영차고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한다. 둘째, 다양한 도시 활동을 수용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다. 셋째, TOD(Transit Oriented Development)(대중교통지향형개발)가 녹아든 공간 구조를 통해 삶터와 일터가 어우러진 미래 도시를 계획한다.
심사위원 이상윤(연세대학교 교수), 이신해(서울연구원 선임연구원), 전숙희(와이즈건축사사무소 대표), 임영환(홍익대학교 교수), 한광야(동국대학교 교수), 헤르베르트 드라이자이틀Herbert Dreiseitl(램볼 스튜디오 드라이자이틀 대표), 피터 페레토Peter Ferretto(홍콩 중문대학교 교수)는 혁신적인 공간 계획, 창의적인 건축 설계, 쾌적하고 친환경적인 오픈스페이스 계획에 주안점을 두고 심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건축사사무소아크바디+범도시건축+동일기술공사+CA조경 컨소시엄의 ‘적층 도시Multi-Layer City’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중략)
* 환경과조경 385호(2020년 5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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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목소리를 드릴게요
길이 200m, 직경 20m에 육박하는 대형 지렁이가 나타났다. 땅 속에 살다 비 오는 날이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붉은 색의 미끌미끌한 생명체. 흙과 함께 낙엽과 분변을 먹고 건강한 토양을 생산하는 생물. 다만 거대 지렁이는 땅 속 대신 지상을 다니며 휘발성 유기화합물을 먹는다. 석유를 이용해 만든 모든 것을 집어 삼키며 도시를 이루는 대부분의 구성물을 분변토로 만든다. 숲과 동물에는 무관심하다. 인류는 지렁이들을 피해 땅 속으로 들어간다. 우주에서 누군가 보낸 거대 지렁이 덕분에 지구는 리셋(reset)된다. 지상에 남은 인간의 흔적은 작물을 재배하는 농장뿐, 숲과 건강한 토양이 회복된 지구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이 자유롭게 사는 곳이 된다. 정세랑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두 번째 단편 ‘리셋’의 세계관이다.
많은 장르 소설이 그렇듯『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그리는 미래는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린 상황이다. ‘리셋’에서 인류는 계속된 자원 고갈과 멸종을 일으키다 거대 지렁이의 심판을 받게 됐고, ‘모조 지구 혁명기’의 미래 지구는 각종 혐오와 폭력, 재난이 범벅된 여행 기피 행성이 됐다. ‘7교시’의 배경은 여섯 번째 대멸종 이후의 지구다. 체제를 바꿔 겨우 살아남은 미래 인류는 현대사 수업을 들으며 생명 존중에 대한 감각이 전무했던 과거 인류를 부끄러워한다. 실제로 정세랑은 “지금의 우리가 19세기와 20세기의 폭력을 역겨워하듯”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 할까봐 두렵다”고 고백했는데, 그래서인지 소설은 망한 지구와 인류라는 인과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기발한 상상력과 재기발랄한 인물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어떤 대사 앞에서는 뒤통수가 따끔해진다. “너 그러다 망한다? 그렇게 원칙도 윤리도 없이 막살다가 망한 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지구가 끝난 거다?”
삶이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면 지금의 지구는 비극이다 못해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은 존재들이 놓인 상황이 그렇다. 2010년대에만 열대 우림 등의 서식지 감소, 사냥 및 밀렵, 기후 변화, 공해, 외래종 침입 등으로 467종의 생물이 멸종됐다.2아프리카 북부흰코뿔소는 암컷 두 마리만 남았다. 마지막 수컷이 죽기 전 채취해 둔 정자로 종을 복원한들 무슨 소용일까. 뿔과 상아 때문에 산 채로 얼굴 앞부분이 잘려 버려진 코뿔소와 코끼리 사체가 아프리카 초원에 널려 있고, 값싼 라면과 과자를 만드는 데 쓰이는 팜유 때문에 매년 수천 마리의 오랑우탄이 죽는다. 부리에 플라스틱 고리가 끼어 굶어 죽는 새들도 허다하다. 감금, 학대, 도살, 살처분이 횡행한 공장식 축산업은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많지만 교통 및 운송 부문보다 14.5%나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함에도 그 궤도가 수정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일상의 풍요와 분주함은 이 같은 폭력에 노출된 얼굴들을 가리고, 사진과 동영상으로 소비하는 귀여운 동물은 일종의 환각제로 역할할 뿐이다.
그런데도 정세랑은 어차피 망한 거 그냥 이대로 살기보다는 “어려운 희망에 대해 끝까지 쓰고 싶”다고 말한다.3여섯 번째 단편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의도치 않게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초능력을 갖고 태어난 인물들의 이야기다. 사람들에게 살의를 느끼게 하는 목소리를 가진 승균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성대를 제거하기로 한다. 후기에서 작가는 “스스로의 유해함을 신중하게, 더불어 기꺼이 제거하기로 마음먹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받아 적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거대 지렁이가 온 건 아니지만 팬데믹으로 전 세계 산업 경제가 마비되면서 지구의 숨통이 잠시나마 트이고 있다. 베네치아 운하에는 백조와 돌고래 심지어 해파리까지 나타났고, 인도 루시쿨야 해변에는 관광객 출입이 금지되자 올리브 바다거북 80만 마리가 산란을 위해 돌아왔다. 이동 제한으로 교통량이 감소하고 공장 가동이 중지되어 탄소 배출량과 미세 먼지 농도도 크게 줄었다. 고작 몇 달 만의 일이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의 원인도 결국 야생 동물의 서식지 파괴와 관련 있다는 점은 백신 개발보다 더 근본적인 예방책을 떠오르게 한다. 책을 덮고 나와 닮지 않은 존재를 위협하는 내 유해함에 대해 생각했다. 쓰지 않아도 될 플라스틱과 비닐, 먹지 않아도 될 음식, 그러니까 정말로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작가의 말처럼 너무 늦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각주 정리
1.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
2. 이성규, “지난 10년간 멸종된 동물은?”, 사이언스타임즈 2020년 1월 10일.
3. blog.naver.com/bandinbook/221833248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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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가장 현실적 디스토피아
멍하니 달고나 커피에 올릴 크림을 휘젓고 있을 때만 해도 몰랐다. 집에 갇혀 지내는 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넉 달 가까이 자(타)발적으로 사회와 거리를 두다 보니 뜬금없이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집순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놈의 집구석이 지긋지긋하다. 하필이면 또 꽃놀이 가기 딱 좋은 날씨다. 내 아까운 봄! 이쯤 되니 정말 2020년을 무효로 하면 좋겠다는 허튼 생각도 든다. 나이도 한 살 깎아주면 더 좋고.
갑갑함을 참고 꾸역꾸역 칩거 생활을 이어나간 건, 일상의 흐름이 더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점점 줄어드는 신규 감염자 수를 볼 때면 한 것도 없이 괜히 뿌듯해졌다. 그러던 중 인터넷 기사에서 마주친 문장이 준 충격이 여태 생생하다. “이제 코로나 발생 전의 세상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겁주려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착잡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정말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만났던 디스토피아의 모습이 나와 먼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서.
그 때문인지 예전보다는 자주, 좀비 떼가 달려드는 이야기보다 끔찍한 미래에 대한 예언을 더 무섭게 느낀다. 특히 그 시기가 지금과 가까울수록 더. 딱 적당한 예시가 떠올랐다. 러셀 T. 데이비스(Russell T. Davies)의 ‘이어즈 앤드 이어즈(Years & Years)’. ‘퀴어 애즈 포크(Queer as Folk)’와 ‘닥터 후(Doctor Who)’로 이름을 알린 러셀은 인류를 향한 애정을 담은 작품을 선보여 왔다. 이어즈 앤드 이어즈는 브렉시트 후 영국의 15년을 그린 블랙 코미디 드라마로, 인간의 어리석음과 비정함, 그로 말미암은 비극을 거침없이 그린다. 극 속 지구의 북극에는 빙하가 없다. 나비는 멸종됐고, 조금씩 상승하는 해수면은 육지와 삶터를 삼키고, 극심한 기후 변화는 90일에 달하는 장마를 일상으로 만들었다. “세상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빨라지며 미쳐 가는데 우린 멈추지도 생각하지도 배우지도 않고 다가올 재앙으로 질주하기만 해요. 이다음은 뭘까요?” 정치활동가가 아무리 외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슬프게도 질문에 귀 기울이는 사람 자체가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점점 망해가는 지구에서 각양각색의 끔찍한 모습을 자랑하며 삶을 잇는다. 심지어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가 중국의 인공 섬에 핵폭탄을 날려도 일상이 계속된다. 단 몇 년 만에 수만 명의 사상자도, 방사능 피폭도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해프닝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관심사는 여전하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보다는 당장 우리 집 앞에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 걷는 걸 불편하게 만드는 인도 위의 차를 사라지게 할 방법에 더 마음을 쏟는다. AI와 기계의 발달은 아주 손쉽게 사람들을 일자리 밖으로 몰아내고 난민, 성 소수자, 장애인, 싱글맘, 유색 인종을 향한 차별은 점차 심화된다. 이럴 바에야 대형 지렁이가 나타나 지구를 ‘리셋’(이웃 지면 “목소리를 드릴게요” 참조)해 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러셀은 다시 한 번 인류를 향한 낙관을 던진다.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앉아서 남 탓을 해. 경제 탓을 하고 유럽 탓을 하고 야당 탓을 하고 날씨 탓을 하며 광대한 역사의 흐름을 탓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핑계를 대지. 우린 너무 무기력하고 작고 보잘 것 없다고 말이야. 그래도 우리 잘못이지. 왜 그런 줄 아니? … 거리 시위는 했니? 항의서는 썼어? … 안 했지. 씨근덕대기만 하고 참고 살았어. … 그러니까 우리 탓이 맞아. 우리가 만든 세상이야.” 항상 비극 속에서 해답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온 러셀이 하려던 말은 아마 이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다른 세상을 만 들 수도 있다고.
코로나로 세계 곳곳이 혼돈에 휩싸였는데 생태계는 도리어 평화를 되찾은 듯 보인다. 퓨마와 여우, 곰 등 야생 동물들이 텅 빈 도심을 유유자적 거닐고, 관광객이 사라진 해변에 다시 찾아온 플랑크톤은 바다를 형광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게다가 당장 마스크 너머로 느껴지는 공기가 너무 신선하다. 폐쇄된 아쿠아리움 내부를 구경하며 자유 시간을 즐기는 펭귄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알면서도 모른척 해온 것들이 너무 많다. 특집 지면을 매만지며 “조경의 기술과 지력으로 기후 변화 등 인류가 당면한 여러 위기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받는 타격의 정도는 줄일 수 있을 것”(이번 호 14쪽)을 믿는다는 김정윤 소장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은 이유다. 더 이상 자연환경이라는 단어는 조경을 꾸며주는 낭만적 수식어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