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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숲을 디자인하다
내가 좋아하는 조경가 한 명은 이렇게 얘기했다. 숲에서 놀아보지 않은 자는 설계하지 말라고. 그만큼 숲은 자연을 다루는 우리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고, 사전 같은 참고 문헌이 되기도 하며,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식처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이 꿈꾸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숲에 대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느끼고 해석하는 근본적인 무기를 하나 더 구비한 셈인지도 모른다.
화담숲은 LG상록재단이 구본무 회장의 아호를 따 만든 비영리 수목원이다. 부담스러운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계절에 따라 바뀌는 숲의 또 다른 모습을 보기 위해 기꺼이 또 하루를 내어주고 싶은 매력이 있는 곳이다. 산자락의 남쪽 사면 760,330m2(약 23만 평)에 걸쳐 4,300여 종의 식물이 공존하는 화담숲은 여느 산림에 비해 종 다양성이 높다. 자연 상태로 두었다면 분명히 경쟁과 도태 때문에 유지하기 힘든 숫자일 테다. 그렇다면 이곳은 보전된 자연 산림이라기보다 정성스럽고 치밀하게 디자인되고 꾸준히 관리되는 정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정겹게 얘기하는 숲’이라는 의미의 화담숲. 그러나 화담숲에서는 ‘말하기’보다는 ‘걷기’에 몰입하게 된다. ‘걷다’라는 행위는 많은 철학자와 문학가가 찬양해왔듯, 생각과 감성을 단순하고 반복적인 신체 행위를 통해 깨워내고 세상과 나를 감각적으로 또 사유적으로 연결시키는 사람만의 고유한 특권이다. 두 발로 걷게 되면서 하늘을 보게 되고, 땅과 하늘을 잇는 존재로서의 독자성을 갖게 된 것은 인류사의 발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공원 설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픽처레스크 정원 양식을 떠올려본다.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하나의 이상적인 자연을 만들고자 했던 인류사적 욕구인 픽처레스크 정원은 ‘걷는다’는 행위를 통해서만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걷는다는 행위, 그로 인해 풍경 속의 내가 그림을 주체적으로 편집하여 연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비로소 화폭에 담긴 풍경화를 우리를 둘러싼 공간으로, 현실로, 일상으로, 문화 영역으로 바꿔주었다.
화담숲은 참으로 걷기 좋은 곳이다. 편안한 경사를 유지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계획된 일련의 산책로와 데크구조물은 움직임의 방향을 틀어 새로운 주제원으로 몰입시키거나, 근경과 원경을 교차로 바라보게 만들어 숲을 입체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릉이 많은 한국적 픽처레스크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와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많은 날에 가면 등 떠밀려 올라가야 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풍경 속으로 점멸하고 나타나는 사람들의 무희적인 움직임은 역설적으로 사람이 많을 때에만 나타나는 순례의 경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산 체험 방식인 등산은 일정한 경사를 앞으로, 직선적으로 걷는 것이다. 한편 화담숲에서 걷는 행위는 계속적인 시선의 굴절과 그에 따른 경관 체험의 반전을 동반한다. 숲을 디자인하는 것은 숲 자체의 디자인과 더불어 숲을 걷는 움직임을 디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 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 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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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꿈꾸는 자들을 위한 변명
이십대 학창 시절, 운동권 선배들의 주변부를 기웃거리며 도대체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꿈꾸고 싸우는가를 궁금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을 변혁하고자 했던 그들의 열정과 치열함을 존경했지만 나약한 나는 결국 그들의 무리에 끼지 못하고 패배자의 죄책감을 가지고 도망쳤다. 한참의 방황기를 끝내고 복학하면서, 그래, 조경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실제로 만드는 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 학문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비로소 조경이라는 본연의 공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삼십대에 나는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에서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 중에는 일종의 경고성 당부도 끼어 있었는데, 학생들의 눈높이가 너무 올라가지 않게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헛된 꿈이 커지면 겉멋이 들어 졸업 후 현실에 부딪치자마자 쉽게 포기하고 이직한다는 이유였다.
사십대인 나는 여전히 이십대와 삼십대의 에피소드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우리나라 조경의 최대 위기라는 지금, 이상향을 고민하며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을 망각한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발주처의 대책 없는 갑질, 터무니없는 설계비에 회사 운영을 위해서 짊어지는 박리다매형 운영 방식, 권위주의적 심의와 트집잡기 문화, 타 분야의 영역 침범, 사람을 뽑지 못해 안달하는 중소규모 회사들과 공무원 시험에 몰두하는 학생들,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징글징글한 조경의 현실은 매순간 모습을 바꿔가며 우리를 옥죈다. 교수라서 현실의 냉혹함을 모른 채 꿈 타령이나 하고 있다는 비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꿈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지옥 같은 현실을 그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조경의 본질이 새로운 세상, 변화된 세상을 꿈꾸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믿고 있다. 우리 일의 보람은 이러한 꿈과 이상을 현실로 바꾸는 힘과 과정에 있다. 이상향 혹은 유토피아. 이 가슴 설레는 단어를 조경의 본질과 연관 짓기에 부담을 느낀다면 조금 더 소박하게 표현해 보자. 좋은 공간,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상상은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조경 행위를 발생시키는 첫 단계다. 꿈은 비루한 현실을 변화시키는 첫 걸음이다.
유토피아는 땅 혹은 세계를 의미하는 ‘topos’에 ‘존재하지 않는’ 혹은 ‘좋은’ 이라는 이중적 의미의 접두사 ‘eu’를 붙인 합성어다. 16세기, 중세로부터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목격한 사회의 극단적인 탐욕과 부조리와 폭력성과 불평등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라는 대작을 탄생시켰다. 그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정의하고 세부적인 작동 방식을 제시해 왔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유토피아를 실제로 구현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루이스 멈퍼드는 유토피아를 도피적 유토피아와 재건적 유토피아로 분류했는데, 두 유토피아의 차이는 지옥 같은 현실 세계를 그대로 두는 것과 그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와 실행력의 차이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현실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그 방식이 달라질 뿐, 유토피아의 본질은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엄중한 성찰과 비판에 있다.
도시 공원의 양식적 진화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픽처레스크 정원은 ‘이상향으로서의 자연’을 실제로 구현한 것이다. 근대의 도시 공원은 아르카디아Arcadia라는 도피적인 유토피아를 실제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재건적 유토피아로 변형시켰다는 데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최초의 시민 공원인 영국의 버컨헤드 공원, 여기에서 큰 영감을 받아 만든 미국의 센트럴 파크는 모두 열악한 도시 상황과 피폐한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으로서의 자연을 건설하고자 한 집단적 욕망이 실제 공간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바꿔 말하면 근대 조경의 시작은 유토피아를 시민의 일상 영역에 만들어 그들에게 현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순기능의 도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공원의 질적 변화를 유도했던 라빌레트 공원, 다운스뷰 공원, 하이라인 공원 등 우리가 부지런히 ‘벤치마킹’해 왔던 공원들은 모두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 인식과 더불어 그 공간에 펼쳐질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된 사례들이다. 급하게 베껴 비슷한 모양새로 만들어 봐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원작 공원에 배어 있는 그들의 꿈과 비전까지는 벤치마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꿈과 비전을 실현하기까지의 구구절절한 과정을 벤치마킹하지 못한 탓이다. 우리가 그렇게 가벼이 여기는 꿈은 현실의 다른 모습이며 서로를 떼어놓을 수 없는 암수한몸이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나는 곧잘 학생들에게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이나 유토피아를 그려보라고 한다. 어떠한 형태를 갖추든, 그들의 유토피아에서 현실은 악으로, 문제로, 고난으로, 디스토피아로 규정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날카롭게 해석하듯이, 근대의 유토피아가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희망을 전제로 세계의 진보를 낙관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라면, 현대의 유토피아는 지금 세상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한다. 또한 현대의 유토피아적 상상은 집단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이고 건설적이라기보다는 도피적이다.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생존과 도태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성과 공포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대한 혐오,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도피처,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무기력함, 이 모두가 학생들이 그린 유토피아 하나하나에 슬픈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최근 헤더윅 스튜디오의 전시와 이번 호의 특집인 아장스 테르의 작업을 보면서 나는 현대 유토피아에 대한 또 다른 버전을 발견한다. 다양한 프로젝트의 멋진 화보 이미지를 관통하는 강렬한 에너지는 더 나은 세계, 더 좋은 삶에 대한 집단적 상상과 실천 의지다. 아장스 테르의 작업을 들여다보면서, 치열한 현장에 대한 탐구, 더 좋은 삶에 대한 꿈과 비전, 전문가의 역할에 대한 확신, 세 명의 소장과 직원들의 집단 창작 과정에 대한 믿음이 이러한 작품들을 가능하게 만든 근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꿈과 가치를 공유하는 집단적 창작 방식은 우리에게 과연 사치일까? 해외의 멋진 작품을 접할 때마다 그들의 선진적인 발주 시스템, 전문가를 우대하는 사회적 풍토, 현실적인 설계비, 고용 안정성등을 부러워하며 한숨짓는 무기력 대신, 오늘은 당당하게 우리의 꿈을 이야기하자. 꿈과 현실의 변증법, 그것이 조경의 본질이므로.
김아연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자 느슨한 설계 집단 스튜디오 테라의 대표로서, 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 사이를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과 커뮤니티의 변화가 가지는 시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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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이름 짓기
이번 11월호의 특집은 프랑스의 아장스 테르(Agence Ter)다. 매년 한두 호는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국내외 조경설계사무소의 근작만으로 지면을 구성한다는 편집 구상. 작년에는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가 이끄는 독일의 토포텍 1(TOPOTEK 1)을 실었고(2015년 2월호), 올해는 이 달에 아장스 테르를 다룬다.
온천수의 생태적 프로세스를 시각적으로 강하게 전달해 큰 화제를 모았던 ‘아크바 마기카’ 이후, 아장스 테르는 유럽을 넘어 남미와 중국에 이르는 여러 문화권에서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펼쳐 왔다.
특히 도시 스케일의 조경 계획과 물을 기반으로 한 대형 프로젝트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어 왔다. 만일 찰스 왈드하임의 신간 제목처럼 ‘어바니즘으로서의 조경(landscape as urbanism)’이 우리 시대 조경의 과제라면, 아장스 테르는 아마도 그것에 가장 근접한 실천을 전개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취재를 하며 모든 에디터들은 아장스 테르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 똑같은 짐작을 했다. 아장스는 영어 에이전시(agency)와 마찬가지이니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었고, 테르는 흙이나 땅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따왔을 것이라고 믿었다. 수년 전에 출판된 그들의 작품집 제목도 ‘Territories’이고 이 중에 앞의 Ter만 다른 색으로 인쇄한 걸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확신에 찬 진지한 목소리로 에디터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장스 테르나 김아연 교수의 스튜디오 테라(Terra)나 결국 같은 뜻이지.” 그런데 본지 파리 리포터 박연미 선생이 공들여 진행한 인터뷰 원고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첫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급하게 사무실 이름을 짓다가 대표가 세 명이라서 숫자 3에 해당하는 라틴어 ter를 썼다고 한다. 당황스러웠지만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름을 짓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우리는 깊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논문을 다 써놓고도 제목을 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다못해 이 에디토리얼처럼 짧은 글쓰기에서도 가장 어려운 게 제목 달기다. 회사 이름 짓기, 사정은 더 하다. 이름이란 자고로 크고 좋은 의미를 담아야 한다. 이름이 운명을 좌우한다는 설도 무시할 수 없다. 어감도 중요하다. 겉멋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망설이지만 그래도 ‘뭔가 있어 보이는’ 멋은 있어야 한다. 유행도 의식할 필요가 있다.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거나 금년 『환경과조경』 지면에 등장했던 조경설계사무소 몇 곳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나 사연이 있을까. 거칠게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물론 정확하게 조사를 하거나 직접 문의를 한 건 아니다. 대부분은 짐작이고 떠도는 말을 주워 담은 이야기다). 첫 번째 유형은 작심하고 작명을 한 것처럼 느껴지는 전통적인(?) 2음절의 한자어 이름이다. 가원, 서안, 서인, 신화, 유림, 한림처럼 설립된 지 비교적 오래된 한국 조경의 대표적인 사무실들에 이런 이름이 많다. 이런 유형의 이름에서는 의미가 중요하다. 계림원, 동심원, 이화원처럼 3음절인 경우도 있는데, 이때의 ‘원’은 아마 정원이라는 조경의 대상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다음의 두 번째 유형으로 볼 수도 있겠다.
설계의 대상 자체를 이름의 중심에 놓는 경우가 두 번째 유형이다. 아장스 테르의 테르가 3이 아니라 땅이었다면 바로 이 경우다. 테라, 로사이(loci), 사이트, 플레이스랩 등이 여기에 속한다. 신생 사무실인 경우가 많다. 이 유형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엘’이 아닐까. 스튜디오 엘도 있고 디자인 엘도 있다. 참, 팩토리 엘도 있다. 소장의 성인 이(Lee)에서 따온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L은 동시에 랜드스케이프의 L이다. 땅이든 장소든 경관이든, 영어—심지어 라틴어— 표현이나 그 약자를 쓰는 게 대세다.
세 번째 그룹은 대표 조경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다. 전통적으로 변호사, 의사, 건축가와 같은 전문가들은 사무실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거는 경우가 많았다. 해외의 여러 조경설계사무소 역시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사례를 많이 볼 수 없었다. 오래 전의 『환경과조경』 광고란에서 매달 볼 수 있었던 ‘김종해조경설계사무소’가 내 기억으로는 이 유형의 대표 사례다. 이원은 이교원에서 교를 뺀 이름 아닐까. 흥미롭게도 지난 십여 년간 새로 문을 연 사무실인 경우, 린, 오피스박김, D스퀘어, JWL, KnL처럼 소장(들)의 이름을 쓰거나 조합하거나 응용하는 추세가 급증하고 있다. 로직은 논리가 아니라 초기 창립자들의 영문 성 첫 글자의 조합인 LOSYK이다. HLD의 뜻이 무엇일지 무척 궁금해 문의했더니 ‘호영리디자인’이라는 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물론 신생 사무실만의 경향은 아니다. CA도 ‘진’과 어소시에이츠이니 이 유형에 속할 테고, C’Topos는 ‘최’의 땅이니 이름과 대상이 결합된 예다.
네 번째 그룹은 사무실 이름에 설계의 지향점이나 설계 태도를 담는 경우다. 마당, 라이브스케이프, 비욘드, 빅바이스몰, 사이, 어리연, 우리엔, 채움, D+H(디자인 플러스 호프(Hope)), salmworkshop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다섯 번째 유형에는 기타 또는 우연 정도의 카테고리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연이 많다. 이작은 ‘이번 작품’의 줄임말이라는데, 확인한 팩트는 아니다. 스튜디오 101은 수년 전의 『환경과조경』 연재물 제목을 그대로 썼다고 한다. 이수는 소장의 딸 이름 ‘이수◯’에서 앞의 두 글자를 가져온 경우. 많은 사람들은 사무실이 이수역 근처에 있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룹한의 작명 사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조경에 ‘한’ 맺힌 사람들이 모여 한을 풀어보자는 뜻이라는 설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무실로 성장한 걸 보면 크다(大)라는 뜻의 우리말 ‘한’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더 유력한 것 같다.
아장스 테르 특집 덕분에 우리나라 조경설계사무소들의 이름과 그 사연을 새삼 즐겁게 생각해 보았다.
전진형 교수의 리질리언스 연재가 이번 호로 막을 내린다. 6개월간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올해를 마감하는 다음 호에는 여러 연재물의 마지막 원고가 실릴 예정이다. 편집실의 가을 풍경은 또 다른 시작을 새롭게 준비하느라 몹시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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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전선'에서 건축이 나아갈 길
2016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본 전시 리뷰
제15회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의 주제는 ‘전선에서 알리다(Reporting from the Front)’로, 여느 비엔날레보다도 사회적 분쟁 속에서 건축의 역할에 주목한다. 지난 호에서는 65개 국가관에서 다루는 이슈를 통해 각국의 현실과 동시대 건축의 사회적 제안 방식들을 살펴보았다. 사회적 위기에 맞선 건축의 메시지는 총감독의 지휘 하에 기획된 본 전시에서 88팀의 건축 프로젝트로 제안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본 전시를 통해 동시대 위기의 실체와 건축이 이로부터 모색하는 사회적 대응 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건축이 ‘전선’에 나섰다. 이 선전 포고는 올해의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총감독인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가 내건 것이다. 아라베나의 접근은 2012년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 2014년 렘 콜하스(Rem Koolhaas)보다도 더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건축의 사회 참여를 강조한다. 이러한 아라베나의 견해는 작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감독인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의 관점과도 연결된다. 작년의 비엔날레는 ‘모든 세계의 미래(All the World’s Futures)’라는 주제로 동시대적 분쟁과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예술의 사회적 발언을 불러 모았다. 작년과 올해 근 2년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비엔날레가 사회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베니스 비엔날레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의 예술 행사와 전시들에서 분쟁, 경제난, 재난, 테러 등의 위기로부터 예술의 현주소를 모색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오늘날 세계는 미학적 질서가 지배적이었던 주류 건축계마저도 사회적 역할을 내세울 정도로 각종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다. 이번 비엔날레가 모색하는 건축의 역할은 도시와 주거, 건축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아라베나가 글에서 언급하듯, ‘불평등, 지속가능성, 불안, 분리, 교통, 환경 오염, 폐기물, 이주, 자연재해, 비정형, 주변부, 주거난’ 등 인간의 기본적 요구와 인권이 걸려 있는 문제다.
건축의 경각심: 폐자재로부터 건축으로
아르세날레(Arsnale) 본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공간 설치 작업은 비엔날레 주제를 첫 진입부터 강렬하게 전달한다. 전시의 인트로에 해당하는 이 공간은 큐레이터 팀이 구성한 것으로, 작년 비엔날레의 공간 구조물이었던 폐자재 100톤을 재활용한다. 전시장을 둘러싼 1만m2의 석고 보드는 그 양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수평적인 층으로 벽에 빼곡히 쌓인다. 천장에 가득히 매달린, 모두 합쳐 14km에 달하는 철골은 전선의 위기감을 철재의 거친 물성과 수직적 형태로 구현해 보인다. 건축의 엄청난 폐자재는 사회, 경제, 환경적 문제에 일조하는 큰 골칫거리다. 지난 비엔날레의 폐자재를 활용하는 설치물은, 오늘날 건축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인간은 건축으로 인해 발생하는 산업 폐기물을 계속 생산할 것인가? 최초의 생산자인 건축이 이를 다시 재활용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은 없는가? 아라베나는 이 공간에 전시 준비 과정을 담은 영상을 설치하고, 88명의 본 전시 참여 건축가들과 논의한 서신 자료들을 공개한다. 감독과 건축가들이 주고받은 이메일 서신에는 전시를 준비하며 대화한 질문과 답신, 논의의 과정이 담긴다. 인트로 공간에서는 폐자재가 내뿜는 강렬한 메시지와 더불어 관객과의 섬세한 교류가 시작된다. ...(중략)...
*환경과조경342호(2016년10월호)수록본 일부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도시 관련 비평을 쓰고 있다.‘신지도제작자’(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2014) 등 현대 미술과 도시 연구를 매개한전시 기획을 해왔으며, 도시 개입 프로젝트 ‘마이크로시티랩’(2016)을 선보일 예정이다.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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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플라워 쇼
첼시에서 만나는 정원 문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자연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체험할 수 있는 정원 문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한 편의 영화가 곧 개봉한다. 원생의 자연을 정원 예술로 승화시킨 메리 레이놀즈(Mary Reynolds)의 실화를 그린 영화 ‘플라워 쇼’는 자연의 위대함을 예찬하며 시작한다. 메리는 정원 ‘켈트족의 성소’로 2002년 첼시 플라워 쇼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그녀의 나이 28세 때다. 영화를 계기로 들여다 본 첼시 플라워 쇼는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제시한다. 스타 가든 디자이너, 오랜 준비와 기획, 막대한 예산과 스폰서, 정원 문화에 대한 관심과 파급 효과 등이 그것이다.
메리는 오래된 산사나무와 야생화, 켈트족의 흔적으로 둘러싸인 아일랜드 초원에서 뛰어놀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자연을 벗 삼아 자란 사람에게는 꽃과 나무를 책으로 배운 사람과는 다른 어떤 정서가 있다. 배꽃 향기가 하루 중 어느 때 제일 진한지, 산길 모퉁이 빨간 열매는 얼마나 시큼한지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요정의 들판이니 땅의 정령이니 하는 것을 상상하며 자란 메리가 야생화를 기반으로 지역 정체성을 반영한 정원을 디자인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도시 변두리 골목에서 동네 아이들과 술래잡기와 땅 따먹기를 하면서 자란 조경하는 어떤 여자는 아직도 벌레 한 마리 등장에 기겁을 한다나.
감독은 자신의 집 정원 디자인을 메리에게 의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자서전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정원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던 메리는 부푼 꿈을 안고 더블린에 가서 취업했다가 좌절을 겪고 난 후 첼시 플라워 쇼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첼시 플라워 쇼는 1827년에 치스윅 가든에서 처음 열린 치스윅 페트(Chiswick Fete)로 시작한 행사로 그 역사가 깊다. 영국에서는 크고 작은 꽃, 정원 관련 전시회가 연중 1천 회 이상 개최된다. 영국 왕립원예협회(RHS)는 네 개의 정원(Wisely, Rosemoor, Hyde Hall, Harlow Carr)을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이 정원들을 통해 교육과 연구를 지속하고 가드너를 배출한다. 협회가 개최하는 첼시 플라워 쇼는 메리와 같은 열정을 가진 디자이너라면 꿈꿀 만한 영국의 대표적인 플라워 쇼다. ...(중략)...
*환경과조경342호(2016년10월호)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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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질리언스 읽기]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도전, 도시 리질리언스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은 도시
사나울 폭(暴), 불꽃 염(炎), 날이 몹시 더운 상태를 의미하는 폭염이 올해 여름 한 달 이상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소방방재청은 최근 기상 재해 중 폭염을 가장 큰 재해로 선정했는데,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추세에 비해 국민들은 물론 정부조차 폭염에 대한 위기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많은 도시에서 에어컨이나 선풍기 등의 냉방 시설 없이 천막만 설치해 놓은 무더위 쉼터를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허술한 방역 시스템으로 콜레라나 식중독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심각한 가뭄과 농업용수 고갈로 인한 농업 시스템 마비, 농수산물 가격 상승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 증가, 예측 불가능한 기후 예보 시스템 및 근시안적인 재해 대책 등이 줄지어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다.
무더위로 말라비틀어진 도시들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상 최대의 지진을 경험했다. 지난 9월 12일 규모 5.8과 5.1의 강력한 지진과 200회가 넘는 여진이 발생하여, 경북 경주시를 비롯한 주변 지역의 도시민들이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도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급작스러운 재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으며, 곳곳에서 피해가 급증했다. 원활하지 않은 통신 시스템으로 인한 사회적 네트워크(연결성, connectivity) 마비는 재해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감을 증대시켰다. 또한 재해 시 대피 장소로 활용이 가능한 방재 공원과 같은 다기능성을 지닌 장소(중복성, redundancy)가 부족했으며, 지진이라는 재해를 예측하고 적응할 수 있는 계획이나 설계 방안(적응적 계획, adaptive planning)이 미흡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진 발생 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학습과 매뉴얼(다양성, diversity) 등 충분한 사전 조치가 없었다.
위 사례와 같이 오늘날 도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도시 시스템은 예측 불가능하고 강력한 재해에 의해 언제 붕괴될 지 모르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해 있으며, 도시의 사회적·경제적·생태적·공간적 요소인 연결성, 중복성, 적응적 계획, 다양성 등의 부족은 재해에 취약한 도시를 만들었다. 이에 많은 계획가와 설계가가 기존의 도시설계와 계획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시설계 및 계획의 패러다임인 도시 리질리언스를 위한 도전을 시작했으며, 아무리 큰 재해가 오더라도 도시의 기능과 구조가 유지될 수 있는 회복력 있는 도시로의 첫걸음을 뗐다.
도시 리질리언스
리질리언스는 생태학에서 태동하여 사회학 및 경제학 분야로 확장했으며, 최근에는 다양한 분야가 융합되어 사회생태적 리질리언스 개념으로 발전됐다. 이는 인간 사회가 자연환경에 속해 있다는 ‘자연 속 인간 모델(Human-in-Nature model)’과 인간 사회의 구조와 기능은 주변 자연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환경 결정론’ 등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사회생태적 리질리언스 개념이 도시계획 및 설계 분야로 확장되었으며, 도시 리질리언스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도시 구조의 파괴와 무분별한 도시 확장으로 많은 조경가는 ‘지속가능한 도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그들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과 ‘도시생태학’에 집중했다. 조경과 건축 분야에서 발전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은 도시설계에서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됐던 경관을 중심 요소로 격상시켰다. 또한 ‘경관생태학’을 기반으로 발전된 ‘도시생태학’은 경관을 도시 생태계의 구조적·기능적 단위로 바라보았고, 도시의 생태학적 패턴 및 프로세스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토지이용의 변화를 이용했다. 신선하고 창의적인 두 이론은 그린인프라스트럭처 등을 통해 도시 내 조경 공간으로 구현됐으며, 지속가능한 도시를 설계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최근 도시들은 기후 변화로 급증한 수많은 재해에 의해 무너질 수 있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도시’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대기 및 수질 오염, 생태계 파편화, 열섬 현상 등과 같은 문제를 동반했고 지진, 태풍, 홍수, 가뭄 등에 의한 피해를 심화시켰다. 많은 학자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전략이 부족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과 주로 토지이용만을 다루는 ‘도시생태학’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를 융합한 ‘생태적 어바니즘’을 새로운 대안으로 내세우며 연구를 진행했다. 또한 예측 불가능한 교란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인 도시 리질리언스을 갖춘 회복력 있는 도시를 구현하고자 했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의 조경학 교수인 앤 스펀(Anne Spirn)은 생태적 어바니즘은 회복력 있는 도시를 설계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로, 이를 바탕으로 도시 환경을 설계하는 조경가는 도시 리질리언스를 증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회복력 있는 도시를 조성하고자 하는 조경가는 생태적 어바니즘을 기반으로 도시 시스템을 다섯 가지 렌즈를 통해 바라볼 수 있다. 첫째, 도시를 자연환경의 일부로 바라볼 수 있다. 둘째, 도시를 생태계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도시란 동태적이고 상호 연계된 복잡계다. 넷째, 그 도시만이 가진 고유한 역사와 맥락이 있다. 마지막으로 도시설계는 미래의 변화에 대한 적응을 위한 강력한 도구라는 점이다. 즉 생태적 어바니즘은 도시를 하나의 역동적인 생태계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러한 관점은 도시가 예측 불가능한 재해에 적응할 수 있는 회복력 있는 도시를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 회복력 있는 도시를 구축하기 위해 록펠러 재단은 2014년부터 ‘100 리질리언트 시티(100 Resilient City)’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서울을 포함한 전 세계 100개 도시를 선정하여 도시마다 취약한 재해 혹은 교란의 종류를 분석하고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전략과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환경과조경342호(2016년10월호)수록본 일부
전진형은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 환경생태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습지생태계 조성과 생태환경회복기술 개발, 시스템 다이내믹스를 활용한 도시 내 저탄소 경관 디자인 요소 개발 및 야생생물 군집 변화 모델링등 생태계 복원 및 설계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생태학적 이론과 과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한 다양한 디자인 시뮬레이션을통해 설계 단계부터 시공 후까지 생태계 변화를 예측하여 대상지가 지속가능할 수 있는 생태적 조경 설계와 유지관리 방안을 연구하고 교육하고있다. 최근에는 생태환경의 보존과 인간의 이용 및 개발의 조화라는 패러독스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을 통한 생태회복성(eco-resilience)에관심을 갖고 이를 조경 분야에서 적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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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의 경제학] 경관의 공급, 미적인 경관은 왜 부족한가?
(ⓒT.Dallas / shutterstock.com)
경관 공급의 모습
경제학 교과서를 보면 공급은 곧 생산을 의미한다. 경제학 이론들이 대량 생산의 제조업을 염두에 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생산자는 소비자에게 공급할 목적으로 토지와 노동과 자본을 투입한다. 공급량은 소비자의 수요량과 균형을 이루는 수준에서 결정된다. 주류 경제학자에 의하면 이 균형점(균형가격과 균형수량)에서 자원 배분의 효율성과 경제적 후생의 극대화가 달성된다. 그렇다면 경관에 있어서도 공급은 이러한 모습일까?
지난 호에서 경관은 스스로 존재하는 조망 대상, 그것에 의존하는 조망점, 그곳에서 함께 제공되는 유무형의 조망 조건 등의 세 요소로 공급되고 사람들이 대가를 지급하고 이를 체험함으로써 소비된다고 했다. 여기서 조망 조건은 조망 대상을 향한 시야와 함께 조망점을 구성하므로, 크게 보자면 경관은 조망 대상과 조망점 두 요소로 공급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은 경관의 공급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면 경관 체험이 불가능해진다.
문제는 조망 대상과 조망점의 공급자나 생산 목적이 전혀 다르다는 데 있다. 조망점의 경우 특정한 공급자가 소비자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생산한다. 반면 조망 대상의 경우 불특정 다수의 공급자가 누구에게 판매할 의도 없이 생산한다. 어쩌면 그것을 생산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부적합할 수도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망 대상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형성되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연재를 꼼꼼히 읽어 온 독자라면 이것이 왜 문제인지 알 것이다. 경관 체험을 위해서는 조망 대상과 조망점이 모두 필요한데, 이 두 요소가 각기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 공급된다면 경관 시장의 균형이라는 것이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원 배분의 효율성과 경제적 후생의 극대화라는 이상도 꿈같은 이야기가 되고 만다. 주류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경관의 공급에 대해 조망점과 조망 대상을 나누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조망점의 공급과 시장실패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재화나 서비스의 적정 가격과 수량(생산량 및 소비량)이 결정되고, 이 균형점에서 자원 배분의 효율성과 경제적 후생의 극대화가 달성된다는 주류 경제학자의 생각이 항상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시장기구의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류 경제학자도 인정하는 시장실패의 대표적인 원인에는 외부효과, 공공재, 독점 등이 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면 시장은 스스로 바람직한 균형점을 찾아가지 못한다. 외부효과에 대해서는 정원의 경제학에서, 공공재에 대해서는 공원의 경제학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조망점에 있어서는 마지막으로 남은 독점이 문제가 된다.
어느 한 주체가 재화나 서비스의 공급을 독점하면 그(녀)에게 가격을 결정할 힘이 생긴다. 그런데 독점적 공급자가 임의로 결정한 가격이 바람직한 가격, 즉 다수의 수요자와 공급자 간 경쟁 때문에 달성되는 균형가격과 일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실제로 독점적 공급자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격을 고집하게 되는데, 이는 균형가격보다 높기 마련이다. 수요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이 가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수요자가 할 수 있는 결정은 ‘그래도 살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가 전부다. 결과적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나 서비스의 수량(수요량과 공급량)이 바람직한 수량에 비해 적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어떤 재화나 서비스가 ‘균형가격보다 비싸게, 균형수량보다 적게’ 거래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람직한 상태에 비해 더 적은 사람이 더 큰 부담을 지고 재화나 서비스의 효용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원 배분의 효율성과 경제적 후생의 극대화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점은 시장실패를 초래하고, 세계 각국은 독점 금지에 관한 법을 시행하고 있다. 조망점의 공급은 ‘사용’의 제공과 ‘소유’의 제공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진다. 사용의 제공이란 조망점의 소유자가 타인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일정 시간 조망점에서 경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경관 소비는 입장료를 내고 전망대를 즐기거나 전망 좋은 카페의 창가에서 차를 마시는 것 등의 모습일 것이다. 소유의 제공이란 조망점의 소유자가 타인에게 조망점에 해당하는 부동산을 매도하는 것을 말한다. 매수자가 그 조망점을 혼자 즐기던 다시 타인에게 사용을 제공하여 돈을 벌든 상관이 없다. 여기서 부동산의 가치 중 경관이 차지하는 가치, 즉 조망점소유의 가치는 조망점 사용의 가치에 근거한다.
*환경과조경342호(2016년10월호)수록본 일부
민성훈은 1994년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2년간 일했다. 그 후 경영학(석사)과 부동산학(박사)을 공부하고 개발, 금융, 투자 등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2012년 수원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가장 오래 가졌던 직업은 부동산 펀드매니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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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우리에겐 정원이란 없어
창밖에 비가 내린다. 오랜만에, 그 지긋지긋한 여름의 뜨거운 햇볕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이 비 끝엔 서늘한 가을이 다가올까? 아직 가시지 않은 더운 열기를 20년 된 선풍기 바람이 밀어내고 있다.
그런 것 같다. 숨을 멎게 하는 더위, 곰팡이가 필 것 같은 습기, 손끝을 오그라들게 하는 추위. 이런 것들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갈라지는 갈증을 가라앉히는 비, 눅눅한 습기를 날려버리는 햇볕, 뜨거운 더위를 밀어내는 바람, 그리고 살 에이는 추위를 달래는 온기는 다시 우리를 살게 만든다. 살리던 것들이 숨통을 죄고, 그 옆에 것이 다시 밀려와 살려내고. 그리고 그것들을 우린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기어이 어떻게든 통제하려 한 것이 인간의 역사 아니었나. 집을 짓고 도시를 만들고 서로의 영토를 넓히고 다투고 방어한 인간의 역사가 대략 1만 년이다. 무수히 많은 욕망이 서로 부딪혔지만 그 근저에 깔린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살자’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 욕망은 끊임없이 숲을 파괴하고 대지를 긁어내고 물길 돌려가기를 그치지 않았고, 그 행동에 자연은 더 혹독한 대가를 요구했다. 처절하게 서로 반목하며 밀어내고 밀려다니던 싸움에서 평화를 외친 자가 나타났다. 바로 조경가다(이런 관점에서 조경가라는 명칭은 정말 잘 어울리지 않는군).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조경 설계 일을 해 왔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설계를 어떻게 했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설계 방법론을 다룬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그간 나의 설계가로서의 여정을 돌아보니 의아함이, 풀리지 않는 숙제가, 그리고 마음 한가득 궁금함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왜 좋아하는 일이 이렇게까지 힘들고 외면받고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가. 그럼 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 일을 멈추지 못하는가.
앞으로 3회에 걸쳐서 조경 설계에 대한 나의 생각을, 그리고 우리가 한 설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해 나가려는 이유를 중심으로. 나는 어떤 ‘방법’을 연구하고 실험하고 창안해내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원칙과 태도를 가지고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라 ‘당신은 어떻게 설계하세요?’라고 묻는 말에 해 줄 말이 없다. ‘그냥 하는데요?’라고 할 밖에. 하지만 만일 내게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설계를 합니까?’ 또는 ‘당신이 생각하는 조경 설계, 혹은 설계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할 이야기는 있다. 어쩌면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설계하는 방법이라는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원칙이나 태도 같은 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조경은 필요 없어
설계를 하면서 만난 많은 클라이언트가 한 이야기 중 잘 이해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들으면 왠지 기운이 빠지고 뭔가 내가 큰 잘못을 지은 것처럼 느껴지는 말이 있었다. ‘눈앞에 숲이 있고 산이 있는데 왜 여기다 비싼 돈을 들여 쓸데없이 나무를 심고 치장을 해야 하나?’ 법이 정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한다거나 건물을 지었으니 뭐라도 꾸며야 할 것 같다는 정도의 말이 그 뒤에 오갔던 거 같다. 물론 내게 상처를 주기 위해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조경이라는 분야가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그리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고 전 세계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왔는지 모르는 것이라고,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은 내가 몰랐던 거다.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왜 이 짓이 쓸모없는 행위로 인식되고 있는지 내가 잘 몰랐던 거다. 그냥 대학에 들어오면서 뭔가 이 일이 사람들에게 좋을 일이라는 생각과 외국의 스타 조경가들이 만들어 내놓은 화려한 사진들에 마음이 움직였던 거였다. 이 일을 하면서 아파트 조경의 공원 같은 녹지와 화려한 포장 패턴을 보며 저건 아닌데 하면서도 뭐가 아닌지는 몰랐다. 건축가들이 그려놓은 배치도에 그들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이건 아닌데 싶었지만 뭐가 아닌지는 잘 몰랐다. 한국의 특수한 설계 환경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외국의 설계가들처럼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잠시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다. 뭐가 다른 건지에 대한 나의 생각 말이다....(중략)...
*환경과조경342호(2016년10월호)수록본 일부
박준서는 ‘Link Landscape with Life’라는 모토로 디자인엘을 설립해운영하고 있는 조경 설계가다. 조경이란 근원적 삶의 터전으로서의 자연을 문화적으로 해석해 일상에 녹여 내는 행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 조경 설계의 사회적 역할을 바로 세우기를 바라고, 지어지는 설계를 실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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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연남동 골목길
연남동과 인연을 맺은 건, 5년 전 사무실을 연남동으로 이전하며 살던 집도 함께 옮기면서부터다. 평소 좁은 골목길을 다니며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연남동은 너무 좋은 ‘나만의 놀이터’ 같은 곳이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골목을 누비고 숨어 놀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른 동네의 아이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연탄재 싸움을 하던 장면도 생각난다. 나뿐만 아니라 골목길은 많은 사람에게 추억거리일 것이다. 골목길은 예측하기 어려운 돌발성과 다변성을 지니고 있고, 이는 궁금증을 유발해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실제로 골목길은 공간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기도 한다.
연희동에서 분리된 연남동(延南洞)은 1970년대에 연희동의 남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시 정비 계획이 잘 이루어져 주택과 주택 사이에 그리 좁지 않은 골목길들이 있다. 연남동 골목길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계기는 ‘경의선숲길’ 조성이었다. 이전엔 경의선 철길로 인해 동네가 단절됐을 뿐만 아니라 소음과 공해도 발생해 좋지 않은 요소로 여겨졌다. 하지만 경의선숲길이 조성된 후 동네는 서로 연결되어 사람들을 소통하게 만들었고, 소음과 공해 대신 좋은 공기를 마시며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게 됐다. 연남동에 오아시스가 생긴 것이다(이곳은 현재 연트럴파크라 불리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주변 주택가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기존 주택을 리모델링하거나 건물을 새로 짓고자 하는 투자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압구정 가로수길, 혜화동 거리, 성수동, 이태원 경리단길처럼 연남동에도 예쁜 카페와 외국의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다양한 음식점이 들어섰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책방과 꽃집이 자리 잡았다. 친구나 가족 혹은 연인이 함께 즐기고 싶은 오감이 즐거운 거리는 금세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특히 지하철 홍대입구역 3번 출구 부근은 공항철도와도 연결되어 있어 외국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3번 출구에서 이어지는 연남동 골목길 주변의 주택가에는 게스트하우스가 많아 외국에 온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2호(2016년 10월호) 수록본 일부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 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 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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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광교신도시와 주민의 열망
한국의 신도시 주택은 대부분 아파트다. 순차적인 분양과 공사 기간을 거쳐 입주 때가 되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신도시로 들어오게 된다. 개인에게 아파트 구입은 평생의 큰 거래다. 당연히 그들에게 신도시 계획과 공사 과정은 크나큰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입주자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관심으로만 끝나지 않고 직접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도 많다.
조경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조경에 대한 관심과 관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수목, 시설물, 포장, 생태 하천, 산책로 등 대부분의 조경 공종을 대상으로 다양한 문제가 제기된다.
대개는 개인 단위이지만 정보화 기기의 발달에 힘입어 집단적 관여가 점점 늘고 있다. 입주자가 워낙 많다 보니 그 영향력도 갈수록 커져만 간다. 때때로 항의 방문이나 시위도 하지만 이들의 주된 소통 경로는 인터넷 ‘입주(예정)자 카페’이며 행동 경로는 인터넷 ‘민원 창구’다. 입주자 카페는 인터넷 환경이 대중화된 2000년대 초반부터 활성화되어 근래의 판교, 파주 운정, 청라, 김포 한강, 광교, 제2동탄 등대부분의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활발히 작동했다. 카페 게시판을 통해 서로 정보와 의견을 나누다가 생각이 일치되면 곧바로 집단 행동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관련 자료를 보면 광교신도시 입주자 카페 게시글의 상당수가 조경과 관련된다. 그중 57%는 호수공원과 생태 하천을 대상으로 쓴 글로, 광교신도시의 랜드마크인 호수공원에 대한 높은 비중과 기대감을 잘 보여준다. 게시글의 42%는 정보 교류 목적이었고, 38%는 공사 과정에 대한 비평이나 평가였으며, 20%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었다. 문제 제기 글에 대한 댓글수가 다른 글보다 1.6배 정도 더 많아 이에 대해 관심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입주자 카페를 통해 확인되고 뭉쳐진 의견은 대개 사업 시행자나 지자체에 민원으로 접수된다.
광교신도시의 조경 민원은 입주 전후로 본격화되었다. 조경 공사를 시작한 뒤 준공하여 공원·녹지를 지자체에 인계할 때까지 약 4년간 조경 관련 민원은 1,000여 건에 달했다. 이 중에는 같은 사안에 대한 수십 명의 집단 민원도 있었고, 한두 명이 비슷한 내용을 하루에 몇 번씩 접수하거나 길게는 몇 달 동안 반복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 모두가 조경에 대한 높은 관심의 증거다. 그렇지만 일부 공원 시설에 대한 혐오와 기피는 조경 시설도 님비 현상의 대상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화장실과 빗물 저류조가 대표적이다. 화장실은 디자인에 신경 썼음에도 혐오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빗물 저류조는 위생성에 대한 걱정과 함께 지상에 돌출된 환기구가 공원 이용에 불편하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판교신도시에서도 같은 문제로 결국 화장실을 최소화했다고 하니 이는 신도시의 공통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혁신적인 디자인 개발과 기술 개발로 풀어야 할, 신도시 조경의 과제다.
물론 입주자의 조경 민원은 원칙적으로 타당한 것이 많았다. 그렇더라도 예산과 공사 기간, 관련 법규 등의 현실적 문제와 설계 개념 및 기능과 맞지 않을 때는 수용하기 힘들다. 상당히 공을 들인 생태 하천이었건만 친수 및 경관에 치중한 나머지 생물 서식처 기능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꽤 가슴을 아프게 했다. 최신의 포장재에 대한 신통찮은 반응을 보니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적정한 공간에 적절하게 표현되지 못하면 ‘듣보잡’ 포장으로 전락하는구나 싶었다. 그 외에도 수질 문제와 기능성에 치우쳐 경관적고려가 부족한 토목 공사 구역의 옹벽에 대한 지적도 꽤 있었다.
입주자 카페에서 많이 얘기되었다 해서 모두 민원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민원은 엄연히 공적 영역이기에 은연 중 자기주장의 공공성을 재고해 보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를테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조경수의 경우 입주자 카페에서는 수종에 대한 주관적 평가와 함께 ‘가격’도 꽤 따지지만 이러한 요구가 그대로 민원이 된 경우는 별로 없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생각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입주자 의견의 공론화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지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광교 이후에 ‘주민 참여형 조경’을 적극 고려하게 되었다. 행정적인 처리나 전문가주의를 탈피하고 주민의 역할과 참여 폭을 선제적으로 더 넓힌다는 데 목적이 있다. 물론 그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더 들거나 효율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신도시를 개인들만의 ‘개미굴’이 아닌 ‘공동체’로 만들려면 결국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그 방법의 하나로 경기도시공사는 ‘조경가든대학’을 2015년부터 개설하여 현재 다산신도시 조성에 2년째 적용하고 있다. 입주자와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14주 교육 프로그램으로, 공원ㆍ녹지의 공익적 가치와 함께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원 만들기와 그 관리법을 알려준다. 신도시 조경 공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궁극적으로는 주민들의 자율적인 공원ㆍ녹지 관리 역량을 길러주기위함이다.
저출산ㆍ저성장 시대를 맞아 이제 신도시는 과거처럼 양산되기 힘들다. 지금까지 주택이라는 주거 시설 공급에 급급했다면 앞으로는 주거 공동체와 신도시 문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졌다. 특히 신도시의 공원ㆍ녹지는 주민들의 일상적 공간이자 문화의장소다. 이 공간들이 주민들의 소통과 공유 경제에 일조하기 위해서 공청보다 공론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