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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양기대 광명시장
광명동굴의 신화
2016년 연간 유료 관광객 142만 명, 시 수입 85억 원, 400여 개 일자리 창출, 개장 5년여 만에 한국 100대 관광지 선정, 43억 원에 매입한 부지 가치가 2,000억 원으로 상승, 올해 관광객 200만 명 목표. 화려한 성적의 프로젝트, 광명동굴이다. 그러나 수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상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의 ‘관급’ 도시재생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기특한 사례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수도권에 그만한 위력을 가진 관광지는 여럿 있다. 캐리비안 베이와 용인 한국민속촌이 그렇다.
그럼에도 광명동굴에 ‘기적’이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다면, 프로나 대기업이 아니고 서울시나 광역시도 아닌 작은 베드타운 위성 도시 광명의 공무원과 지자체가 벌인 일이기 때문이다. 각종 지원금을 뺀 현재까지의 총 투자액 570억 원, 광명동굴은 이미 손익 분기점을 넘겼다. 입장료 등으로 벌어들인 세수는 올해 초 광명시가 채무 제로를 선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지방 자치는 양날의 칼이다. 포퓰리즘과 재선을 위한 혈세 낭비의 축제, 허황되고 수준 낮은 사업, 단기적 사고의 부양책, 뿌리 깊은 부정부패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지방 자치에 근본적 회의감이 들게 한다. 잘하고 있는 곳도 있지만, 실제로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단체장의 역량과 청렴도라 할 수 있다. 소문으로만 듣던 광명동굴에 가 보았다. 외부 공간에서부터 내부 콘텐츠, 시공의 디테일, 운영 상태까지 하나하나 뜯어 살펴보았는데, 웬걸, 상당한 수준이었다. 대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안 하니 못한 지자체 사업이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아니 어쩌면 세계적으로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장소, 이런 희귀한 공적 공간을 만든 브레인이 누구일지 궁금했다. 뜻밖에 그 주인공은 괴짜 예술가나 특이한 사회 사업가가 아니라 광명의 단체장 양기대 시장이었다. ...(중략)...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2호(2017년 8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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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정원 생활] 다산 정약용, 정원에서 길러 낸 맑고 고상한 삶
다산,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조선 역사상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과학, 의학, 공학에서부터 철학, 경제, 사회, 문학, 그리고 시와 그림까지 넘나들며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다산이 ‘조선사 최고의 학자이자 개혁적 경세가’가 된 배경에는 걸출한 인물 두 사람과의 인연과 만남이 있다. 다름 아닌 성호 이익과 정조대왕이다. 성호가 다산에게 경세치용과 사회 개혁의 꿈을 꾸게 한 이라면, 정조는 그것을 실현할 수 있게 해 준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16세부터 성호의 책을 읽은 다산은 그를 평생 마음의 선생으로 삼고 공부하며 실학 사상을 계승하려 애썼다. 20대의 젊은 다산이 지닌 재능을 간파한 정조는 규장각으로 불러 여러 학자와 교유하며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초계문신抄啓文臣’, 일종의 ‘정조 스쿨’에 선발되어 여러 차례 정조와 대면하며 학문을 논한 것은 다산의 성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다산은 실학을 바탕으로 한 경세치용의 정책 제시와 함께 거중기와 한강 배다리 등의 실용 기술로 정조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결과적으로 다산의 일생은 정조의 통치 시기 전후로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다산의 대표 정원들
일생을 통해 다산이 만들고 즐긴 정원은 여럿이다. 어릴 적부터 고향 능내 인근의 한강변과 수종사 등의 명소를 찾아 자유롭게 노닐며 감수성을 키웠던 다산은 장성하기 전까지 부친을 따라 다니며 전국 각지의 이름난 경승을 즐겼다. 17세에는 아버지가 화순현감으로 근무하던 관아 주변의 정자 차군정此君亭에서 지역 선비들과 함께 섬돌과 잔디로 정돈된 단 위의 노송과 대숲의 바람 소리를 즐기기도 했다. 부친이 임지를 예천으로 옮긴 19세에는 지역의 누각과 정자를 조사하고는 관아 동측에 폐허로 남아있던 정자 반학정伴鶴亭을 발견하여 수리한 후 수목과 초화 가득한 그곳을 자신의 공부방으로 삼았다. 22세에는 남산 회현동 재산루로 이사했는데, 당시 그곳은 남산 북사면의 승지로서 경치가 아름다웠던 곳이었다. ...(중략)...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이래 줄곧 조경가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은 대학에서 조경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선유도공원 계획 및 설계, 용산공원 기본구상,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설계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풍토 속 장소와 풍경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으로서 조경 공간이 지닌 가능성과 효용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환경과조경352호(2017년 8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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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토니 에드만
무한 경쟁 시대를 사는 딸에게
놀랍고 신선한 이 영화는 무한 경쟁 시대를 사는 딸에게 아버지가 보내는 위로를 농담의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었다. “자기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애틋하니 좋아할 거야”라는 동네 친구의 추천에 내심 기대했다. 바쁜 딸을 졸졸 따라 다니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일삼는 아버지의 행동,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세 시간 가까운 상영 시간도 참을성의 한계를 느끼게 했다.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난 후에야 영화 속 상황들이 떠올랐다.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며 옷매무새를 고칠 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갈 때, 만약 아버지가 내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하실까. 우리 딸 잘 살고 있구나, 그러실까?
‘토니 에드만Toni Erdmann’은 독일 영화지만 주요 배경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Bucharest다. 루마니아라면 코마네치라는 전설의 체조 선수밖에 모르는 터라 영화를 두 번째 볼 때는 생소한 거리나 공원 풍경에 시선이 꽂혔다. 영화 속 대화나 상황은 서유럽이 시장 경제에 뒤쳐진 동유럽 국가들을 어떻게 보는지도 짐작하게 한다. 루마니아는 공산 정권 붕괴와 혁명 이후 2000년대 들어서야 EU에 가입했으며 자금 지원과 외자 유입에 따른 투자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다.
주인공 이네스는 석유 관련 회사의 컨설팅 일로 부카레스트에 와 있다. 개발 도상국의 기업 개혁을 추진하는 선진국에서 온 외부자인 셈이다. 올림머리에 타이트한 검은색 정장과 하이힐을 갖추고 운전기사와 비서의 수행을 받는 모습, 언뜻 보면 성공한 직업인이다. 실상은 고객의 눈치를 보며 기분을 맞춰야 하고 상사에게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불편한 업무도 해내야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고단한 현대인의 모습이다. 자신의 욕망보다는 사회적 책무를, 자신의 윤리적 판단보다는 경제적 이익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헛기침으로 진심을 감춰보지만 스트레스로 자주 미간을 찡그린다. 늘 잠이 부족해 차만 타면 졸기 일쑤다. 이네스는 그런 생활에 대체로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기 전까지는. ...(중략)...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보고 나서 기억되는 영화, 볼 때마다 다른 것이 보이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겉으로 드러난 서사보다 그 사이에 숨겨진 맥락에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영화를 보는 독자가 있다면, 마치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보는 기분이 들면 좋겠다. 디테일과 스포일러일지 모르는 클라이맥스 부분을 묘사한 이유다.
*환경과조경352호(2017년 8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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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도시와 관계하는 열한 가지 방식] 경험의 다성학
2016년 학술정보 통합서비스 디비피아DBpia의 사회·과학 분야 최다 검색 키워드로 ‘여성혐오misogyny’가 선정되었다. ‘혐오’라는 번역이 적합한가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례에 여성혐오라는 틀을 씌우는 일에 동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우선 차치한다 하더라도, 이는 지난 한 해 우리 사회에서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이 얼마나 뜨거운 이슈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성혐오’는 ‘혐오’ 또는 ‘반감’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miso-’와 여성을 뜻하는 ‘-gyny’가 합쳐진 말이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말 ‘혐오’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그런 의미뿐 아니라, 여성의 성적 대상화, 여성에 대한 부정과 비하, 폭력, 차별, 남성우월주의 등 매우 다양한 양태의 여성에 대한 편견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고대 신화나 설화 등이 여성혐오적 시각을 종종 담는다는 것, 그리고 수많은 탈식민주의 학자, 페미니스트 학자가 기존 서양 철학과 사상, 역사가 주로 서양-백인-남성의 시각에서 기술·구성되었음을 지적한 것은 누차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생산 관계가 문화, 예술, 종교 등의 상부 구조를 결정한다 말하며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외친 마르크스조차 그의 저작에서 젠더적 권력 구조에 무감각한 시각을 드러낸다는 비판을 받는데, ‘보편’, ‘이성’, ‘객관’을 표방하는 학문이 얼마나 많은 차이와 권력 구조를 간과하는지에 대해 무시할 수 있을 것인가. 여성주의에서 입장론Standpoint theory은 이러한 남성 중심의 기존 사회와 학문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주변화된 계층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세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여성 학생이나 학자 자체가 흔하지 않던 시절 사회학자 도로시 스미스Dorothy E. Smith는 남성 위주의 아카데미아에서 혼란을 겪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사회학에 입장론을 제기하며, 이를 인식론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동물학, 철학, 영문학,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두루 섭렵해 1980년대에 ‘사이보그 선언문’을 쓰기도 한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는 영장류학, 생물학 등 자연 과학, 즉 하드 사이언스hard science 역시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왔음을 밝힌 바 있다. ...(중략)...
진나래는 미술과 사회학의 겉을 핥으며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게으르게 활동하고 있다. 진실과 허구, 기억과 상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흐리고 편집과 쓰기를 통해 실재와 허상 사이 ‘이야기-네트워크-존재’를 형성하는 일을 하고자 하며, 사회와 예술, 도시와 판타지 등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기술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지점에 매료되어 엿보기를 하고 있다. 2012년 ‘일시 합의 기업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해 활동했으며, 2015년 ‘잠복자들’로 인천 동구의 공폐가 밀집 지역을 조사한 바 있다.
www.jinnarae.com
*환경과조경352호(2017년 8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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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서울역 고가, 다시 토론할 때다
빛의 속도로 완공된 ‘서울로 7017’, 서울시 보도 자료에 따르면 개장 한 달 만에 203만 명이 방문했고 연말까지 1,000만 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박원순 시장이 뉴욕의 하이라인에 올라 서울역 고가를 서울판 하이라인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2014년 9월 이후, 『환경과조경』은 여러 호에 걸쳐 이 사업의 중간 지점을 포착해 왔다. 특히 2015년 7월호에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 당선작은 물론 출품작 전체에 대한 리뷰와 비평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토론의 장을 열기도 했다. 이번 호에서는 당선작 선정 2년 만에 개장한 ‘서울로 7017’을 다시 특집으로 올린다. 지난 겨울부터 기획을 시작한 편집부는 서울시 담당자, 설계사의 핵심 관계자, 시민 단체 리더, 자문위원, 관련 전문가들을 여러 차례 취재했지만, 아직 물음표를 거두기 쉽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다. 특집에 담은 MVRDV의 글과 인터뷰, 이경훈 교수와 서예례 교수의 비평, 김정은 편집팀장의 취재기와 인터뷰는 어딘가 서로 어긋나 있다. 당위성, 지향점, 과정, 효과 등 여러 지점에서 갈팡질팡해 온 이 프로젝트의 민낯일 수도 있겠다.
편집부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서울역 고가가 그야말로 ‘열린 결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서울역 고가의 미래를 긴 호흡으로 토론할 필요가 있다. 몇 달간 편집부에서 오고간 많은 대화 뭉치 중 한 토막을 옮긴다.
E. 중간에 자문회의에 참여했던 사람들 만나보면 MVRDV가 지나치게 고집을 피웠다, 불합리한 부분까지 너무 지켰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H. 주로 당선작의 가나다 식재와 콘크리트 화분 길이 실제로 구현됐다는 점에 대한 비판인거죠? 그런데 ‘고집을 피웠다’고 보는 시각은 적절하지 않아요. 설계대로 시공하는 건 원칙 중의 원칙입니다. 자문이 그 역할을 넘어서 설계안을 좌지우지하는 건 오히려 고쳐야 할 고질병 중 하나죠. 이번 프로젝트에서 유일하게 돋보이는 건 공모 당선작이 거의 원래대로 실현됐다는 점이에요.
E. 문제는 ‘설계대로’에서 그 ‘설계’가 과연 무엇인가에요. 설계공모 당선작이 바로 그 ‘설계’로 확정돼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H. 맞아요. 설계공모란 건 적합한 설계자와 설계안의 밑그림을 공정하게 선정하는 절차죠. 따라서 당선작을 그 ‘설계’로 발전시키고 토론하고 합의하는 합리적 과정이 뒤따라야 해요.
E. 하지만 서울역 고가는 누구나 알듯이 대선용 프로젝트였어요. 과 정에 충실할 시간? 꿈같은 얘기죠.
H. 소통과 과정과 참여의 대명사인 박원순 시장답지 않은, 전형적인 ‘시장표’ 전시 사업이죠. 초기 구상 때부터 이미 불변의 목표 완공 시점이 정해져 있으니 무리한 속도전을 벌일 수밖에 없고 당선작을 그 ‘설계’로 확정하는 과정이 실종되거나 소홀할 수밖에 없었어요.
E. 서울로 7017 덕분에 모처럼 일간지와 방송에서도 조경·도시설계 프로젝트를 다루는 기사와 칼럼이 넘쳐나고 있어요. 내로라하는 논객과 SNS 스타들도 한마디씩은 거들고 있고요.
H. 공론의 장에서 조경과 도시설계가 이렇게 토론된다는 것, 당연히 환영이죠. 그런데 메뉴로 올라오는 걸 보면 못생긴 콘크리트 화분 길, 난데없는 가나다 식재, 삭막한 콘크리트 포장, 옹색한 육교, 그늘이 없다, 걷기에 좁고 복잡하다 등 디자인에 관한 것들인데, 이제야 디자인으로 토론한다는 게 참 아쉬워요. 2년 전 당선작이 발표됐을 때 더 활발하게 갑론을박했어야 할 주제.
E. 2년 전에 충분히 공론화됐어야 할 문제가 뒤늦게 다뤄지고 있다는 말인 거죠?
H. 사실 그때도 조경, 건축, 도시설계 전문가 사회에서는 핫 이슈였죠. 우리 잡지도 기여를 했고. 그러나 시민들은 몰랐던 겁니다. 당선작의 조감도와 이미지 컷들을 아무리 지하철역마다 걸어놓았어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한 거예요. 그때 그림 그대로인데도 막상 완공된 공간이 생경한 거죠. 공공 프로젝트는 내 집 앞마당을 내 맘대로 꾸미는 거랑 전혀 달라요. 시민 모두가 클라이언트인 셈이죠. 시민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다수의 시민이 MVRDV의 당선작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심만큼은 가지고 대화의 소재가 될 수 있어야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인 거죠. ‘세상에서 가장 긴 화분’이 우리 앞에 등장한다는 걸 시민의 다수가 알고 관심을 가지고 상의하는 과정이 있었어야 해요. 몰랐고 또 기회가 없었으니 시민들은 이제야 뒷북을 두드릴 수밖에.
E. 클라이언트이자 사용자인 시민에게도 설계안에 대한 의견을 낼 권리가 있죠. 마음에 드는지 들지 않는지 보고 알고 이야기할 과정이 있어야 했다, 동감입니다.
H. 개장 후 한 달간 가장 놀라웠던 건 한 일간지에 실린, 전 서울시 총괄건축가의 칼럼이었어요. 런던의 “‘가든 브리지’가 수년 동안 논란만 무성한 채 착공조차 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며 불과 2년 만에 완성한 서울의 실천을 부러워하며 조명한다”고 영국 「가디언」의 보도를 인용한 부분 있잖아요. 사회적 합의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가든 브리지’가 정상 아닐까요? 토건 시대도 아니고, 속전속결이 자랑거리는 아니죠.
E. 며칠 전 시의회에서 시장은 다른 나라에서 10년이 걸린다고 우리도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비록 2년이지만 강력한 추진력으로 런던이 해내지 못한 걸 이뤘고 충분한 소통의 과정을 거쳤다고 자평하던데, 솔직히 ‘내로남불’처럼 들렸어요.
H. 서울역 고가에 대한 비평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어요. 사업의 구상과 목표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에 정치적 콘텍스트를 괄호 안에 묶어둔 채 순수하게 디자인 자체만을 비평하는 건 핵심을 벗어나거나 의미 없는 푸념에 그칠 가능성이 커요. 무슨 공원 바닥이 콘크리트냐, 화분 속 식물이 불쌍하다, 가나다가 웬 말이냐 같은 이슈는 다른 공원이나 가로에서는 중요하겠지만 서울역 고가의 핵심은 아니죠.
E. 결국 다수의 공간이므로 어떤 설계안이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충분히 토론하면서 다수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중요한 거죠.
H. 실은 초기의 공론화 과정이 더 중요하죠. 왜 하는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공론화, 지금 다시 그 이야기를 들춰서 특집에 담는 건 정말 뒷북이겠죠?
E. 이번 기획에선 다루지 않더라도 여전히 생명력 있는 쟁점인 건 분명해요. 광화문광장 개선과 같은 또 다른 도시 정치 프로젝트가 대기 중이니까요. 무엇을 만드느냐 못지않게 중요한 게 어떻게 만드는가라는 점, 서울역 고가의 교훈. 오늘은 이 정도로 맺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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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낡은 다리 위에서, 전복의 풍경
‘파레르곤parergon’은 작품, 주제, 기능, 일, 행위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르곤ergon’에 주변, 보조, 부차적이라는 의미의 접두사 ‘파라para’를 붙여서 만든 단어다. 아들을 위한 품행 지침서 제목으로 처음 사용한 18세기 초에는 텍스트에 덧붙인 보조적, 교육적 문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칸트, 쇼펜하우어, 자크 데리다 등 여러 철학자를 거치면서 복잡 미묘한 의미를 갖추게 되었다. 좁게 보면 주 텍스트에 달아놓은 주석으로 볼 수도 있고, 넓게 보면 작가의 전체 저서 중 중요치 않은 저작이나 작가의 주요 저서를 만들기 전에 제작한 소품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함부로 분리할 수 없는 주석으로서 파레르곤이 주 텍스트를 보충해서 설명을 하면 할수록 다른 한편으로 텍스트가 지닌 근원적 복잡성이 드러난다. 역설적이게도 주요한 내러티브를 다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논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텍스트의 역사에서 고정 불변성이 사라진다.
공사 당시 상황판 사진의 문구처럼 “서울역전의 평면교차로 인한 교통 혼잡”을 “완전 해결”하고자 근대적 교통 체계에 입체로 덧붙인 이전의 ‘서울역 고가도로’ 또는 오늘날의 ‘서울로 7017’은 태생적으로 파레르곤이다. 차량이 우선이었던 속도의 시대에 도도한 차량 흐름을 끊는 보행 동선과의 교차점을 없애거나 줄이는 방식의 보완 역할로 교통 체계의 효율을 높였으며(실상은 효율적이라고 믿었을 뿐이지만), 때로는 거대 도시 서울의 중심에서 1970년대 조국의 근대화를 웅변하는 상징물 노릇도 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고가도로들은 이미 1980년대에 정체를 해소하기보다 오히려 교통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1990년대에는 흉물이자 골칫거리가 되었다. 건설 의도와는 정반대로 고가도로라는 파레르곤이 일견 완벽해 보였던 근대 교통 체계의 계산법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게다가 2017년 이 고가도로를 녹지가 있는 선형의 보행로로 재조성하면서, 급기야 우리는 오래된 콘크리트 덩어리의 ‘파레르곤’이 주변 도심 공간을 엮는 중심이자 주제인 ‘에르곤’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목도한다. 눈여겨 볼 것은 다중적 해석 속에서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자리가 뒤바뀌는 ‘파레르곤’과 ‘에르곤’의 전복적 양상이다.
숱하게 부수고 새로 지어서 한눈팔다 돌아보면 으레 강산이 바뀌어 있는 토건 국가에서 살아왔으니 구조물의 변신 자체는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다. 강을 건너는 노후한 다리를 폐쇄한 후 보행교로 용도를 바꾸거나 고가의 육교를 철거하는 작업은 이미 흔하게 봤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재미가 없다. 세상이 반드시 흥미로워야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사는 도시의 경관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대중에게 정보를 열어놓고 치열하게 논란을 거치면서 다시 구축했다는 점에서 ‘서울로 7017’은 분명히 진일보했다. 전복적 사고는 전면적 파괴나 철거나 멸실이 아니라 계보학적 접근을 통한 해체와 재구축 작업을 통해서 제대로 실현된다.
뉴욕의 하이라인을 거울삼았지만 애초에 한계는 명확했다. 다리 높이가 17m로 지상과는 너무 동떨어졌다는 점, 그에 비해 10m 폭은 비교적 좁다는 점, 주변 건축물 입면과 자연스레 접하는 지점이 거의 없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다리 전체가 분주한 대로와 철로 위에 올라앉은 긴 섬이라는 형국. 이런 상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면서도 가장 압도적인 것은 다양한 크기와 높이로 만든 원형의 콘크리트 화분들이다. 하늘 위를 걷는 사람들이 냇물에 잠긴 작은 바위와 돌을 스쳐가는 물고기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대개는 가운데를 통해서 가지만, 화분과 유리 난간 사이로 난 좁다란 골목도 택한다. 화분이 원형이라서 이 독특한 골목은 구불구불한 형상으로 주변 경관을 부감하면서 아주 길게 이어진다. 흔치 않아서 재미있다.
다만 해체해서 재구축한 다리 위에 놓인 식물도감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건물 파사드와 연결하기 힘드니 행태 유발의 임무를 이름순으로 나열한 나무들에게 떠맡긴 것일까. 그러나 기표와 기의를 일치시키고 호명하는 근대를 탈근대 위에 올려놓은 이 질감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다. 설계공모에서도 제시한 수목원식 나무 배열은 그 목적이 관람이건 학습이건 누구나 익숙해서 무난할 테지만 그저 그뿐이다. 게다가 230여 종에 달하는 다종다양한 나무 모두에게 콘크리트 다리 위는 과연 살만한 환경인가. 식재의 내용보다는 고가도로라는 형식, 나무보다는 화분이라는 틀에 집중하면, 지상과 분리된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명력을 생생하게 드러냈을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늦지 않았다. 탈근대적 작품의 끝은 열려 있고 누구나 의견 개진이 가능하니 앞으로의 모습 또한 끊임없이 변모해갈 것이다.
모든 경관은 이미 정치적이다. 경관이 가치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어쩐지 의도가 불순하다. 다수를 차지하는 유권자 층이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만 언제 어디서고 경관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실상은 가장 정치적이다. 그렇다면 예술을 통해서 전망을 제시하는 진보적, 도전적인 작품들이 놓일 자리는 어디인가. 불행하게도 서둘러 정리되는 결말을 맞이했지만, ‘슈즈 트리’처럼 때로는 논란만으로도 충분하다. 논란거리를 아예 없애겠다는 태도가 오히려 심각한 문제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주석이 달리고 전복적인 논의가 따라 붙는 풍경이 필요하다. 낡았지만 새로 태어난 다리, ‘서울로 7017’이 그 시작이 되었으면 한다.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1999년부터 19년째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조경설계 힘(studio HYMH)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이 즐거워야 그곳에 머무는 사람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경관에 대한 해석과 발언이 자유롭고 ‘시급 1만 원 시대’에 경제적으로 튼튼한 설계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인내심 많은 친구들인 안형주, 박준영과 함께 열심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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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스케이프] 불완전이 만든 완성품
지난 5월, 드디어 서울로가 열렸습니다. 개장 2주 만에 방문객이 100만 명을 넘어섰다는 소식도 들리고,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아쉬움을 지적하는 기사들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슈즈 트리’ 논란까지 가세하면서 조경 프로젝트(‘건축’이라고 규정하는 분들도 있긴 합니다만)로는 이례적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 프로젝트에 대한 아쉬움이 있지만, 조금 더 사람들이 이용한 후로 판단을 미룹니다. 공간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익어가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오늘 사진의 주인공은 서울로 7017의 한쪽 끝에 위치한 ‘윤슬’이라는 공공 미술 작품입니다.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이라는 부제도 달려 있네요.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는 반짝이는 잔물결을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라고 합니다. 어감도, 뜻도 참 예쁜 말입니다.
‘윤슬’은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서울은 미술관’의 일환으로 진행된 공공 미술 프로젝트입니다. 건축사사무소 SoA(강예린, 이재원, 이치훈)의 작품인데, 이들은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지붕감각’을 설치하는 등 공공 공간에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최근 한강예술공원 프로젝트에 몇몇 조경가가 참여해 멋진 결과를 보여 주었습니다. 더 많은 조경가가 공공 미술에도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략)...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실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1호(2017년 7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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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이중성
나는 아직 남들과 공유할 수 있을 만큼의 원숙한 설계 노하우를 체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설계하는 법은 꽤 오랜 기간 몸담았던 순수 예술이라는 영역, 함께 일하는 다양한 분야의 동료들, 스튜디오 MRDOStudio MRDO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의 확연한 작업 방식 차이 등에서 비롯한 다중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이번 호에서는 그동안의 작업에서 예술과 설계라는 다른 두 분야가 서로 간섭했던 흔적들을 소개하고, 두 영역의 교집합과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조소과 재학 시절 인접 분야의 수업을 두루 들어보던 중 조경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나에게 조경은 핸드 드로잉보다 훨씬 세련된 컴퓨터 드로잉으로, 외국에서 실무를 마치고 귀국해 설계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의 화려함으로 인식되었다. 조경의 일부만을 피상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자연과 시스템 그리고 예술의 조합이라던 이 분야는 쿨한 창작을 하면서 동시에 규칙적인 보수도 기대할 수 있는 영역이자, 순수 예술이나 건축과 비교할 수 없는 블루오션으로 비춰졌다. 막연한 예상과 현실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물론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0년간 조경, 특히 조경 설계를 알아가면서 노력만큼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고 느낀 적은 있었을지언정 그때의 착각이 큰 실수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만일 내가 미술에 조경을 더함으로써 하나 이상의 프레임으로 디자인적 사고를 하는 디자이너라면, 미술만 할 때보다 창작에 있어서 더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때의 성급했던 결정은 역설적이게도 보다 넓은 풀pool을 만나게 해 준 고마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중략)...
전진현은 스튜디오 MRDO(Studio MRDO)를 공동 설립해 조경뿐 아니라 더욱 확장된 영역에서 디자인을 실험·연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과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GSD 입학 전 신화컨설팅에서 근무했고, 현재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조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보더스: DMZ 지하 대중목욕탕(Borders; Korean DMZ Underground bath house Competition), 세종대로 역사문화공간 설계 공모, 서울 도시 디자인 공모전 등 다수의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www.studiomrdo.com
* 환경과조경 351호(2017년 7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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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순수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위하여
수목이 계단식 앉음벽의 층계를 뚫고 나온 듯한 모습이다. 계단식 앉음벽의 형태를 최대한 연속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수목 보호대를 계단의 형태 그대로 만들어 덮었다. 즉, 계단식 앉음면의 세 면을 파내고 그 공간에 수목을 식재한 후, 계단 모양의 뚜껑을 덮은 디테일이다. 일반적인 경우, 나무가 식재된 주변의 단을 들어올려 플랜터 벽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진의 장소에서는 계단의 조형적 형태를 부각하기 위해 독특한 플랜터 디테일을 만들었다. 계단과 같은 재질의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수목 보호대에는 통기구들이 가늘게 뚫려 있고, 업라이트 효과를 위한 조명 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계단의 형태 변형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목이 위치한 구멍을 작게 만들었지만, 그 구멍의 중심은 계단 디딤면이 아닌 수직면에 정렬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수직면과 이에 인접한 위아래 디딤면을 관통한 듯한 형태가 되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재미있는 제안이지만, 한편으로는 계단 수직면의 구멍으로 전기 배선이나 콘센트 등 숨겨 놓은 설비와 구조 내부의 모습이 눈높이에서 보여 깔끔하지 못한 마무리로 보이기도 한다.
장소를 조금 이동하자 약간 다른 모습의 계단식 수목 보호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본적인 원리는 동일하지만 수목 보호대가 놓인 위치가 계단식 앉음벽이 아닌 일반 계단이기 때문에 보호대의 형태도 이에 동화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디딤면과 수직면의 크기가 앞의 사례보다 절반으로 줄었기 때문에 계단 수직면에 위치한 구멍 또한 작아져, 계단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본래의 디자인 의도를 보다 잘 전달하고 있다.
안동혁은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활동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현재 회사에 8년째 근무하면서 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 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1호(2017년 7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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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김종석 쿠움파트너스 대표
공유 공간의 마법
최근 가장 ‘핫’하다는 연희동과 연남동. 그 변화를 주도한 것은 그다지 잘 알려지
지 않은 한 사람이다. 이 일대에서 50여 채에 이르는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면서 불과 5~6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창조한 중심에는 수십, 수백억 원의 공적 자금이 아니라 지역에서 건축업을 하는 김종석 대표가 있다. 그렇다, 그는 소위 말하는 ‘업자’다. 학자도 아니고, 건축가도 아니고, 흔히 듣는 ‘공공◯◯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대화에 사용하는 언어는 어바니즘의 고전에 등장하는 설계 기법들이다. 노출 계단, 오픈스페이스, 선큰sunken, 발코니, 시선의 높낮이, 빛과 밝기, 공간 심리학 등. 어쭙잖은 건축가가 종종 내뱉는 말뿐인 소통이 아니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소통, 대화, 연계와 맥락의 디자인’을 그의 건축을 통해 너무도 쉽고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거리와 건물의 소통, 사유 재산과 도시의 대화, 손님과 주민, 건물주와 세입자 간의 상호작용을 볼 수 있는 현실의 교과서다.
그는 언제나 현장을 두고 말한다. 그가 쌓아온 방식이다. 경남 함양 출신으로 스무 살에 상경해 연희동의 전파상인 정음전자에서 일하다 제대 후에 사장님이 돌아가신 가게를 인수했다. 그 후 연희동에서 30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사람들의 온갖 인생 스토리가 녹아 있다. 책상머리에서 구상한 거창한 마스터플랜 없이, 정부도 손 놓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을 혼자서 해결하고 있는 이 독특한 남자의 경험 보따리는 도시재생이 가야 할 방향을 일러준다. 그의 도시재생은 어찌 보면 자본주의 사회 체제에 가장 부합하는 도시재생이다. 공중에서 투하되는 지원 자금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욕망, 서로의 행복에 충실한 도시재생이기에 현실적이다. 우리 도시재생에 필요한 것은 눈먼 자금이 아니라 불합리한 절차와 제도의 개선을 통해 창의적인 개인이 뜻을 펴고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일 것이다. 사업 성과를 위한 재생, 도시재생의 이름을 빌린 지자체의 치적 쌓기가 아니라, 삶을 위한 재생, 강소 경제 서민 상권을 부활시키기 위해 철저히 시장성을 바탕으로 한 살아남을 수 있는 재생이다. ...(중략)...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1호(2017년 7월호) 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