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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일상
    이천십육년 가을 어느 저녁답 저녁 여섯 시, 지구가 서서히 기울고 있고, 멀리서 나는 자판 두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새벽 세 시 반에 겨우 잠이 들었지만 악몽에 시달리다 몇 번씩 현실이 아님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잠이 들었던 밤이었다. 미몽에 책상이 뿌레카 소리를 내며 떨었다. 전화기에 뜬 하얀 글자 ‘김정은 팀장’이 눈에 들어왔지만 머릿속은 희뿌옇게 몽롱했다. 그녀의 약간 무거우면서 꽉 찬 허스키한 목소리가 몇 개의 단어 속에 다른 운율을 포개는 순간에야 그녀와 관련된 기억을 소환할 수 있었다. 그녀는 먼저 지난 토요일 환경조경대전 심사의 부재를 확인했다. 아팠다고 간단하게 말했다. 금요일 저녁 어릿광대의 노래에 맞춰 무대 위의 기울어진 식탁에 매달린 배우들의 곡예가 속을 뒤집은 것은 아니지만, 1막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고, 이후 위 아래로 몸속의 모든 내용물이 용암 흐르드키 쏟아져 나왔다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틀에 걸친 분출과 실신, 그 낡은 기계의 자각 증상 앞에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는 에두르지 않았다. 내년 일월에 실을 ‘그들이 설계하는 법’ 꼭지에 글을 부탁한다고. 얘기 중에 언젠가 전화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냐고, 의문 부호가 아니라 마침표가 찍힌 말을 했다.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답이 될 만한 문장까지 생각이 나아가지 못했다. 사실 이유는 있었는데 그게 거절할 수 있는 답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답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가진 까닭에 그는 ‘그들’이 바라보게 될 ‘그의 설계’에 대한 진술을 얼버무리듯 약속했다. 전화를 끊기 전 그녀는 십일월 초에 김모아 기자가 전화를 할 것이라고 뒤를 닫았다. 그리고 열아흐레 뒤에 김모아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소금 기둥이 되고 싶지 않으면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그것도 아직 몸 안에 소금기가 남아있을 때 얘기겠지만. 연료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커피를 올린다. 모카주전자의 물그릇 안전밸브 중간까지 물을 붓고, 깔대기처럼 생긴 커피바구니에 곱게 간 커피가루를 채운 뒤 주전자 윗부분인 커피그릇을 연결해 불 위에 올려놓는다. 물이 끓는 사이 넋을 놓고 간밤 꿈에 나왔던 까마귀를 따라 날갯짓 두어 번 하고 들어오면 불에 탄 까마귀 날개 빛의 커피가 올라왔던 관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물그릇의 높아진 압력이 뜨거운 물을 밀어 올리면 중간의 커피바구니에 담겨 있던 커피가루를 통과해 커피가 만들어진다. 커피가 올라오는 그 짧은 시간에 검은 빛은 짙은 갈색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옅은 갈색이 올라오면서 마지막 물을 뿜어내느라 소리가 요란해진다. 일순 조용해지면 불을 꺼야 한다. 가끔 물그릇의 압력이 높은 날에는 안전밸브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기도 하고, 불 끄는 것을 잊어버려 커피그릇의 커피가 끓어 넘치기도 한다. 두어 해 전에는 플라스틱 손잡이가 모두 녹아내렸다. 커피가 준비됐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호이고 어떤 면에서 일반화된 것이지만, 카페인은 니코틴을 부른다. 똑같이 몸 안으로 들어온 니코틴은 늘 카페인에 굶주려있다. 언제부터인가 이 둘이 기계화된 몸을 태우는 연료가 아닐까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기계 속에서 신경계와 소화계를 유린하는 동안 북한산 자락의 먼 능선이 다가왔다 물러나고, 한양도성 성곽 위의 나무들은 단풍을 거둬 잎을 떨구기 시작한다. 날이 맑은 날에는 잔별들이 남아서 설렁이는 바람을 뚫고 마지막 미약한 빛을 떨구고 나면 동녘에 붉은 기운이 서린다. 송진 가루를 슬쩍 묻힌 바람이 부는가 싶으면, 북태평양 미드웨이 섬에서 보낸 습기를 머금기도 하고, 고비 사막의 모래가 박혀 있는 대기로 주변이 아득해진다. 담배 한 개피가 타는 동안의 자연은 늘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그렇다, 설계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할 말을 굳이 찾자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있는 것도 아닌, 아홉 시 정각이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컨베이어 벨트의 베어링이 된 지 오래인데. ...(중략)... 도구 책상 위에는 초벌그림을 그리기 위한 몇 개의 도구가 있다. 1,800×900mm 크 기의 책 상 위에 달려 있는 길이 900mm짜리 아이자, 두 개의 플라스틱 판을 붙이고, 자의 양쪽 끝에 두 개씩 네 개의 바퀴에 꼰 철사줄을 8자로 걸어 책상에 고정시켜 놓도록 되어 있어 좌우가 놀지 않고 평행으로 움직인다. 밑판에는 여섯 개의 구슬이 달려 있어 위아래로 움직임을 돕고, 위판의 왼쪽에 아이자를 고정시킬 수 있는 돌림 단추가 있다. 아이자를 이용하면 곧은 직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설계를 하면서 쓰는 아이자는 단순히 직선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접점을 확인시켜주는 먼 지평선을 내포한 도구다. 계획지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은 긴 직선 하나, 중력의 무게를 드러낸 가로선은 하늘의 끝이거나 땅의 표면, 여기에 길을 내고, 나무를 심고, 데크를 깔고, 의자를 놓아 사람들을 부른다. 그도 아니면 지평선 속으로 뚜걱뚜걱 걸어 들어가 풍경이 되어버리거나. 이 수평선 위에 각도삼각자를 놓고 수직선을 세우면 중력을 거스른 인간의 의지가 곧추서게 된다. 사실 ‘곧추서다’는 조경의 어휘는 아닌 것 같다. 수직 길이 300mm에 45°각을 가진 자는 중심점에서 45°까지 눈금과 치수가 있고 다시 반대로 90°까지 치수가 매겨있다. 다 벌리면 ㅂ자 모양이 되고, 삼각자의 밑면을 어디로 잡는가에 따라 이 치수들이 유용해진다. 각도삼각자는 삼각자에 분도기의 기능을 합친 진화된 도구다. 어떠한 선을 긋든 선에는 시작점이 있고, 각을 내포한 방향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계속 달려가면 방향성이 생기고 자꾸 내달리려는 운동성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 운동은 광활한 대지를 달려가는, 무질서한 욕망을 다스리는 더 없는 고삐인 각도삼각자에 의해 규정되고, 도면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허면 도면은 그것들을 통제하는 억압 기제인가, 규범으로 세운 아름다운 정원인가 모형자(templates) 혹은 ‘빵빵이’라 부르는 도구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나무를 상징한다. ‘빵빵이를 돌리다’는 ‘나무를 심다, 식재 계획을 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거기에 무의식적인 자기 비하와 냉소의 뉘앙스를 내포한다 해도. 그런데 이 모형자는 도형의 형태에 따라 타원형, 삼각형, 사각형 그리고 각종 도면용 기호에서 새와 사람이 있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래도 역시 모형자의 꽃은 둥근 빵빵이다. 빵빵이로 그려진 원은 광장이 되고, 둥근 긴 의자가 되고, 못이 되고, 가로등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경에서 쓰는 그 수많은 나무를 품고 있다. 하나의 원을 그리고 거기에 ‘계수나무_R15, H7.0’ 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빛깔과 형태를 갖고 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이 나무들이 자라면서 시간성을 갖는다. 무아지경에서 빵빵이를 돌리다보면 어느새 거대한 숲을 마주하게 된다. 아니 숲을 꿈꾸게 한다. 비록 우리가 그린 원이 우주의 섭리와 형태적 완결성에 다다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모형자의 원을 따라 한 바퀴 원을 그리고 나면 거기서 한 세상은 조용히 문을 닫고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컴퍼스는 우리말로는 걸음쇠, 양각규(兩脚規) 또는 양각기(兩脚器)라 불리는데, 두 개의 다리가 톱니로 맞물려 있거나, 철판의 탄성을 이용해 두 개의 다리에 축쇠를 연결해서 돌림쇠를 걸어 놓은 것이 있고, 간단하게 나사로 조인 세 종류가 있다. 멀리 고구려 환문총 벽화나 파르테논 신전에서도 쓰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오래된 도구로, 기하학과 건축, 미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지적 여정과 함께 해 왔다. 너무 거창하게 얘기했지만 컴퍼스는 도면이 갖고 있는 축척의 의미를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도구다. 하나의 중심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중심은 사라지고 거대한 원의 일부인 호만을 우리는 식별하거나 빌려 쓴다. 그러니까 도면이라는 한정된 영역 안에서 늘 그 존재의 일부만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하고 있는 작업의 제한된 범위를 인지시키면서 동시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온전한 모습에 대한 상상 속에 우리를 놓아둔다. 또한 치수 없는 순수한 작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황금비나 루트 비례는 컴퍼스가 만든 궤적을 따라가야만 그 전모를 알 수 있다.그래서 컴퍼스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과 두 다리가 걸어갔던 궤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비례척(比例尺) 또는 비례자, 영어로 스케일(scale)은 미터법에 따른 거리를 일정한 비율로 줄여서 눈금 매겨 놓은 자다. 설계에서 주로 쓰는 삼각비례자, 일반적으로 삼각스케일이라 부르는데, 세 개의 면에 모두 여섯 개의 서로 다른 축척이 표시되어 있다. 이 여섯 조합은 1/25, 1/50, 1/75, 1/100, 1/125, 1/150, 1/200, 1/250, 1/300, 1/400, 1/500, 1/600 중에서 만든 회사와 나라 또는 전문 분야에 맞게 선별 조합된다. 삼각비례자가 보여주는 축척은 실제 거리와 도상의 거리 간 비율을 나타낸 것으로, 1인용 의자에서 10헥타르가 넘는 공원까지 A1 도면에 구겨 넣을 수 있는 노동력이 집약된 마술을 펼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땅에 대한 공감각적 인식을 도상에서 직조하고 도상에서 했던 구축적 사고를 땅에서 풀어내는데, 이 눈금과 눈금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이 있다. 만약 그녀 또는 그가 운이 좋아 이 신비한 축척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이이명의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1가 만들어낸 광대한 공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트레이싱지가 잉크를 먹어 우굴해지는 선을 따라 주변으로 낙서를 하는 것은 마치 길을 걸으면서 주변의 간판을 쳐다보고 가게를 기웃거리는 것과 같다. 비 온 뒤 웅덩이에 물이 고이듯 생각이 고여 만년필의 촉이 한 곳에 오래 머물거나 자주 지나가면 구멍이 난다. 촉 굵기 1.1의 만년필은 굵은 각인을 남긴다. 뭉둥그려지고 모호한 생각들이 지나간 흔적 그대로다.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이 정제되면 그 반 굵기의 족적을 남기는 만년필이 따라간다. 만년필은 자(尺)하고 상극이다. 만년필은 오구(烏口)가 아니다. 로트링펜은 더더욱 아니다. 볼펜은 빠른 생각에 반응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을 무화시키고 저 혼자 형태를 잡아 길을 간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차바퀴 구르는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엔진 소리 이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풍경도 보이지 않는다. 볼펜에는 구슬이 달려 있다. 껄끄러운 트레이싱지 위를 빠르게 질주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유화의 미티에르(la matière) 기법과 같은 양감을 가지면서 잉크가 덧칠된 곳이 반들반들하게 빛이 난다. 이때 조심해야 한다. 볼펜의 잉크가 마르는 데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데, 잘못하면 손도장을 찍어 놓은 것처럼 온 계획지에 발자국이 남는다. 홀더(leadholder)는 심(心)을 갈아 끼워서 사용할 수 있는 기계식(器械式) 필기도구(mechanical pencil)의 하나다. 우리말로 하면 심잡이연필 쯤 되려나. 유럽에서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6세기 중반에 홀더의 원형이 되는 기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홀더는 샤프와 달리 아주 간단하고 원초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몸체가 있고 그 안에 심을 넣는 대롱과 대롱에 감싸인 스프링, 그 끝에 심을 잡아주는 심잡이(clutch), 선단(tip) 그리고 반대쪽 끝에 누름단추(knob)로 구성되어 있다. 상세도를 그릴 때 굳기 에이치H의 심을 심갈이로 끝이 뾰족하게 갈아서 쓰면 볼펜으로 그릴 때와 다른 세밀한 부분까지 다가갈 수 있다. 설계충設計蟲2 책상을 깨끗이 비운 뒤, 플로터로 출력한 밑도면을 깔고 종이테이프로 고정한다. 그 위에 계획지를 얹어 똑같이 위아래의 가운데에 종이테이프를 붙인다. 계획지 위로 밑도면의 검은 선이 스며 나오면서 노오란 반투명의 계획지에 벌써 누군가 휘갈겨 놓고 간 느낌을 받는다. 자세히 보고 있으면 선과 선 사이에 공극이 커지면서 어떤 물컹거리는 유체(流體)를 대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보이지 않는 유체는 머릿속이 만들어낸 환영일지 모른다. 멀리 환영의 뒤로 지난 주에 보고 온 대상지의 모습이 보인다. 길, 만들어지지 않은 길, 나무, 칡넝쿨이 타고 올라간 참나무숲, 흙더미, 철근이 삐져나와 있는 옹벽, 쌓다 멈춘 석축, 햇빛, 무차별로 쏟아지는 햇살. 말 소리도 들린다. 대상지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도 보인다. 첫 문장을 쓰기 위해 휘적휘적 낙서 하드키 생각의 실타래를 찾기 위해 한참을 더 공극을 들여다 본다. 소리 없이 오전이 간다. 점심은 면을 먹기로 한다. 우선 중국집인지 국수집인지 정해야 한다. 국수라고 정했다면 칼국수인지, 잔치국수인지, 제주국수인지 묻는다. 칼국수는 사골의 농도에 따라 정해야 하고, 잔치국수는 멸치국물 맛에 따라 다르고, 제주국수는 돼지고기 육수에 편육이 올라온다. 잔치국수는 부산 구포에서 만든 소면, 제주국수는 중면을 쓴다. 수제비집에도 국수가 있다. 이 겨울에 막국수는 이인분을 주문해야 한다. 혜화칼국수, 국시집, 우리밀국시, 엄마손국수, 구포국수, 올레국수, 소문난국수집, 성북동수제비집, 명문막국수, 설계는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고, 선택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늘 다르다. Bon Appétit. 둘러앉아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듣는다. 대상지와 주변의 관계, 지층의 역사, 지침 사항 혹은 의뢰인 주문 사항, 물리적 상황, 거기다 인상 비평까지. 자리를 빠져나와 다시 공극을 마주하고 앉는다. 몇 개의 선과 낙서, 이미지, 낱말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쌓이기를 반복하고, 생각이 대지 경계 안에서 둥실 떠다니며 부유한다. 이 모호한 유체 속을 얼마나 떠다녀야 할지 정해진 것은 없지만 늘 시간의 압박을 받는다. 그러다 낱말이 이미지를 만나거나 이미지가 물리적 형태를 붙잡으면서 자그마한 개념 평면이 하나 그려진다. 이 개념이 계획안으로 발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다시 생각의 수레바퀴를 굴려야 한다. 이쯤 되면 도면 작업할 축척에 맞는 평면을 한 번 더 출력하고 그 위에 계획지를 덮는다. 이번에는 가야 할 길이 어렴풋하지만 정해져 있으니까 망설임은 덜하다. 그래도 ‘어렴풋’이 계속 발목을 잡아 손놀림이 둔하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때는 만년필이 제격이다. 정확히 말하면 잉크가 만들어내는 뭉개지는 듯한 선이 생각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전체로 보면 여러 과정의 하나이겠지만, 한 번 계획지를 펼쳐 그리면 그것은 그것 자체로 완결되어야 한다. 자 없이 그린 초벌이 한판 완성되면 첫 번째 계획지 위에 다시 계획지를 얹고 그린다. 첫 번째 계획지를 빼내고 두 번째 계획지 위에 새 계획지를 얹어 필기도구를 바꾸어서 개략적인 치수를 따져가며 그린다. 볼펜은 의외로 까다로운 필기구다. 힘 조절을 잘 해야 원하는 선을 그릴 수 있다. 이 개략적인 치수 속에서 조금씩 형태의 미묘한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모호한 평면 속에 머물 때는 방법이 없다. 더 묻고 더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더 그려야 한다.두 번째 계획지를빼내고 새 계획지를 얹어 그린다. 세 번째 계획지를 빼 내고 다시 계획지를 얹어 그린 뒤 보라색 색연필로 녹지를 칠한다. 네 번째 계획지를 빼내고 새 계획지를 얹어 나무를 심는다. 이 나무는 그냥 덩어리로서 나무다. 한 판의 초벌그림이 완성되면, 스캔을 받고, 캐드 프로그램에서 불러들여 캐드로 그리는 도면 작업이 진행된다. 이렇게 나온 기본 평면을 가지고 부분별 계획에 들어간다. 혹 소장이 의기 충만해지면 모형을 만들어 보자는 얼척 없는 주문이 들어오고, 한켠에서는 우드락을 사온다, 칼질을 한다, 칙칙이풀을 뿌린다 요란해지면서 사무실은 도떼기시장으로 바뀐다. 그 사이 기본 평면 위에 덩어리로만 잡아 두었던 나무가 이름과 형상을 갖게 된다. 바닥의 마감 재료가 정해지고, 돌이라면 문양과 크기를 디자인한다. 시설물은 부분 부분 더 확대된 평면을 바탕으로 하나씩 디자인 해나간다. 점점 확대된 축척의 그림들이 그려지고, 한 쪽에서 나무와 여러해살이풀에 대한 상세 설계가 진행된다. 시설물 상세 계획과 디자인까지 나오면 모두들 바빠진다. 긴 캐드 작업 속에 한 벌의 도면이 꾸려지면 검토하고 수정하고 다시 검토하는 사이에 내역 작업으로 넘어가고, 소장은 다시 수정하려 들고, 실장은 수정은 없다고 못을 박는다. 납품 날짜가 임박한 것이다. 검토본을 보내고서 확인을 받으면, 최종본 제본을 한다. 그러나 이건 아주 행복한 일정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일 때 그러하고, 대개는 이런저런 이유로 연장되고 검토와 수정이 반복되면서 기약 없이 납품을 한다. 설계 기계 도면은 환하게 빛나지만 선은 보이지 않는, 도구를 내려놓은 채 비로소 먼 산을 보며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는, 산 그림자가 마을에 길게 드리우고 파란 빛깔의 하늘과 선명한 경계를 이루는 시간을 그림책 작가 안 에르보(Anne Herbauts)는 ‘파란 시간’3이라 이름했다. 지금은 파란 시간이다. 가끔, 사실은 자주 설계가 힘들다는 말을 내뱉지만 엄밀히 말하면 설계 자체가 힘든 것인지, 설계를 하고 있는 이 상황이 힘든 것인지 모호해질 때가 많다. 이 모호함은 규명되지 않은 채 삶이 ‘원래 힘든 걸로’ 귀결되기 일쑤여서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게 되곤 하지만 그래도 파란 시간인 까닭에 무언가 생각이라는 것을 아니면 꿈이라도 꾸어야 하지 않나 싶어진다. “사람이 진정 사랑하면서 섹스를 할 때에는 언제나 자기 혼자서, 그리고 한 명의 타인 또는 타인들과 함께 기관 없는 몸체를 이루게 된다. 기관 없는 몸체는 기관들이 제거된 텅 빈 몸체가 아니다. … 따라서 기관 없는 몸체는 기관들에 대립한다기보다는 유기체를 이루는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한다. 기관 없는 몸체는 죽은 몸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체이며, 유기체와 조직화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더욱더 생동하고 북적댄다.”4 중간중간 건너뛰면서 읽다가 말기를 십여 년 째 하는 책, 그 책의 중간에 가면 ‘유목론 또는 전쟁 기계’라는 항목이 나온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각을 쫓아 설계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 가능할까. 못 할 것도 없겠다. 날 어두워 이미 도구는 내려놓았고, 밤은 길고, 술은 넉넉하니 말이다. ‘한 명의 타인 또는 타인들과 함께 기관 없는 몸체’를 이룬 설계 기계. 사무소라는 장소를 바탕으로 한 것도, 회사라는 경제 활동 조직의 단위도 아닌, 설계라는 행위만을 중심으로 규정할 수 있는 움직이는 몸체.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으면서, 그 모든 것에 속한 채 설계라는 행위 속에서만 존재하는 불운의 현재성과 찰나(刹那)의 현존성을 가진 유체(流體). 비록 그들이 엔지니어링사업자 또는 기술사사무소, 법인 또는 개인사업자라는 국가 체제體制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유일하고 완전한 현존은 계약 속에서만 가능하고 유지되는 객체. 그러나 이 계약이 설계 기계를 작동시키는 동력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로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설계 기계의 처음 작동과 멈춤이 계약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설계 기계를 지속적으로 작동시키는 동력은 설계라는 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속성에 기인한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얘기한 ‘창조적 도주선’이란 속성은 기계 스스로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을 동력 삼아 움직인다. 그래서 계약은 설계 기계와 체제가 맺고 있는 최소한의 관계이지 절대적인 관계일 수는 없다. 이것은 설계 기계의 현존성에 배치되는데, 설계 기계가 체제와 관계 속에 모습을 가질 때 그러한 이름으로 불릴 따름이다. 이것이 체제를 벗어나 그 고유한 속성을 유지한 채 나아간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명명해야 할지 모른다. 언젠가 설계 기계는 국가/체제와 계약에 의하지 않고도 스스로의 동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불가능을 욕망한다. ‘창조적 도주선’은 체제가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해법/계획안을 뜻한다. 그렇게 읽는다. 그래서 창조적 계획안은 낯설고 전복적이다. 설계 기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이 창조적 계획안은 설계 기계가 체제 안에서 그 작업을 수행함에도 그 체제의 바깥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르게 말하면 설계 기계는 체제에 편입되는 대신에 체제를 가로질러 간다. 설계 기계는 조직을 수직으로 관통하며 의견을 내고, 대안을 제시하며, 새로운 해결책을 통해 조직의 기반을 흔든다. 그러나 설계 기계의 목적은 체제의 해체나 전복이 아니다. 그 많은 창조적 계획안을 체제가 선별적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하나다. 체제를 존속하기 위한, 체제 속으로 편입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체제의 입장에서 늘 예외적이고 설계 기계는 예외를 일반화하려 하지만 체제는 단지 예외적으로만 창조적 계획안을 받아들인다. 설계 기계가 수행한 작업은 그 체제를 더욱 굳건히 만드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고, 체제에 수렴된 일부 설계 기계는 익숙하고 동일한 설계안을 만들어 낸다. 설계를 할 때, 조경은 늘 이중의 탈주를 시도한다. 하나는 평면으로 치환된 대지에 대해 또 하나는 시간에 대해. 동구 밖에서시작된 길은 대문을 지나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을 거쳐 뒷뜰을 지나 뒷산까지 올라가고, 마당의 감나무는 옆집의 배나무와 어깨동무를 하고, 뒷산의 참나무숲과 어우러져 앞 강까지 내닫는다. 모든 작업은 대지 경계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의식의 지평은 대지 밖으로 뻗어나가고 지평선은 대지 안으로 들어온다. 이것이 첫 번째 질주다. 두 번째 질주는, 하나의 계획안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 계획안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계획안이라고 불리는 평면은 어느 시간의 한 순간일 뿐이다. 잎이나고, 나무가 자라고, 어디선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운다. 오늘의 바람은 어제의 바람과 달라 어제 흔들리던 잎이 오늘은 꽃잎 뒤로 숨고, 개미들은 저만치 흙더미를 쌓아 놓는다. 장식담은 담쟁이가 타고 오르고, 경계면은 흐트러진다. 내일 떨어지는 햇볕의 모습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과거의 평면을 그리는 현재의 조경가는 현재에 미래를 가져다 놓기 위해 시간 속으로 광란의 질주를 한다. 그래서 설계 기계의 작업은 도면 안에 머물지만 시선은 늘 도면 밖, 경계선 밖, 시간의 너머를 주시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지 안의 정원은 만들어지면서 동시에 사라진다. 이것은 구축하면서 동시에 허무는 작업이다. 늘 주변의 경관과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원하지 않을 때조차 그것은 하나의 관계 방식의 차이일 뿐이고, 차이 자체가 전체 경관의 맥락 속에서 그 존재성을 인정받을 뿐이다. 이러한 조경의 이중 탈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조경은 보이는 시선 너머로 질주한다. 정원은 상상의 공간이 되고, 공원은 고원이나 사막을 꿈꾸고, 광장은 큰개자리은하를 품는다. 조경이 언제고 ‘여기’, ‘지금’을 꿈꾼 적은 없다. 조경은 언제나 ‘저기’, ‘어느 날’을 응시한다. 그래서 이 조경 작업을 수행하는 기계는 결국 유기체를 이룬 기관들, 체제, 국가와 대립한다. “전쟁 기계가 국가에게 정복당해 이미 실존하지 않는 바로 그 순간에 국가로 환원되지 않는 이 기계가 최고도의 환원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승승장구하는 국가에 도전할 수 있는 활력 또는 혁명력을 갖춘 사유 기계, 사랑 기계, 죽음 기계, 창조 기계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는 것이 과연가능할까?” * 각주 1. “1706년 이이명이 제작한 10폭의 병풍에 실린 지도, 북경 서쪽의 구릉 지역부터 동해까지중국과 만주의 국경 지역을 한 폭의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개리 레드야드(Gari Keith Ledyard), 『한국의 고지도의 역사』,소나무, 2011, pp.332~333. 2. 그려벌레. 권윤덕이 쓰고 그린 다음 책들에서 따온 말이다. 『씹지 않고 꿀꺽벌레는 정말 안 씹어』, 2000,『생각만 해도 깜짝벌레는 정말 잘 놀라』, 2001, 『혼자서도 신나벌레는 정말 신났어』, 2002(모두 ‘재미마주’에서 출간). 3. 안 에르보(Anne Herbauts) 글·그림, 이경혜 옮김,『파란 시간을 아세요?』, 베틀·북, 2003. 4.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팰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김재인 옮김,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p.67.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했고, 현재 아뜰리에나무를꾸리고 있다.
  •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인조 잔디 vs. 천연 잔디
    들어가며 조경에 몸 담고 계신 분들 혹은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이라면, 모처럼 좋은 장소에 갔는데 정작 그 장소와 공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처음에는 여행, 데이트, 여가를 즐기러 나왔는데 어느 순간 두 다리를 혹사하며 답사에 여념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으리라. 왜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 포장 패턴이나 재료 따위에 신경을 쓰며 땅바닥 사진만 잔뜩 찍고 돌아왔는지 자책한 적이 있는가.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불편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벤치나 좁은 벽 틈 사이를 애써 관찰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직업병’이라 웃어넘기고 스스로를 위안해 보지만, 참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는 강박이자 집착이 아닐 수 없다. 굳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까지 불러오지 않더라도, 오늘날 조경 실천(practice)에서 ‘넓은 시각’이 중요함을 듣고, 보고, 체험하고 있다. 도시설계 규모의 대단위 프로젝트는 말할 것도 없고, 작은 공원이나 광장 또는 좁은 골목길을 계획하고 설계할 때도 주변 지역의 공간적ㆍ사회적ㆍ문화적 맥락을 연구하고 반영하는 설계의 과정이 오늘날 조경 실천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장소가 지닌 역사가 어떠했는지, 주변 지역은 어떠한 정치적ㆍ경제적인 배경으로 변화해 왔는지, 주변 지역의 지형과 수리는 어떠한지, 광역 교통 시스템에서 그 공간이 차지하는 분량과 역할이 무엇인지, 이용자의 행태는 어떠한 패턴을 가지고 있는지, 사회적인 요구는 무엇인지, 지반의 구조와 미기후는 어떠한지 등 단순히 공간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 생태 등의 요인을 통괄할 수 있는 넓은 시각이 요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건축, 토목, 엔지니어링, 시공에서부터 조명, 전기, (공공)미술, 정책에 이르기까지 가깝고 먼 관련 분야와 협업을 하면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시각 또한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하지만 ‘넓은 시각’만이 현대 조경에 필요한 만능의 도구일까? 앞서 언급한 편집증적 강박은 소인배들의 무의미한 집착일 뿐일까? 실제 디자인을 시공하고 실현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아무리 좋은 의도, 아이디어, 설계라고 할지라도, 실제 공간을 완성하는 것과 이용자가 직접 만지고 체험하게 되는 것은 결국 물질이고 재료다. 화려하게 멋을 낸 디자인이라도 질 나쁜 재료나 섬세하지 못한 디테일로 말미암아 그 빛이 바래는 경우가 있는 한편, 언뜻 보기엔 평범하고 수더분한 공간에서 재료 자체의 힘과 솜씨 좋은 마감을 통해 깊이 있는 내공을 느끼게 되는 사례도 있다. 작은 부분의 완성도가 모여 양질의 전체 공간을 구성하는가 하면, 아주 디테일한 일부만 보고도 미루어 전체 공간의 질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직업병자들이여, 너무 걱정하지 말자. 디테일을 바라보는 ‘좁은 시각’은 분명히 필요하고 중요하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는 당당하게 좁은 시각으로 공간을 ‘가까이’ 보고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정교하게 자리 잡은 나사 하나, 돌 조각 일부가 주는 감동, 좋은 재료 자체가 시사하는 바, 재료의 물질적인 측면 이면의 배경을 드러내는 등 디테일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이러한 부분들이 어떻게 전체를 구성해 나가는지 살펴볼 구상이다. 모쪼록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부분이 시사하는 전체’에서 즐거움을 발견하시기를 바란다. 각 에피소드의 구성은 장소의 이름과 설명 없이 디테일의 묘사에서부터 시작해, 글의 말미에서 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들께 상상과 추리의 즐거움을 드릴 수 있기를. 첫 번째 이야기, 인조 잔디 vs. 천연 잔디 연재의 첫 번째 꼭지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고민하던 차에 꽤나 재미있는 디테일을 가진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진의 잔디 포장을 보자. 콘크리트 경계를 기준으로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질감이 다르다. 눈썰미 좋은 분이라면 ‘천연 잔디’와 ‘인조 잔디’의 차이라는 것을 눈치챘으리라. 멀리서 보기에는 단순히 질감의 차이로만 느껴질 정도로 근사하게 색과 외관을 맞추어 놓았다. 재료의 다름은 자연스럽게 이용의 분화로 이어진다. 매끈한 인조 잔디에서는 시민들이 활동적인 운동과 놀이를 즐기는 한편, 푹신한 천연 잔디에는 앉아서 운동하는 아이들을 지켜보거나 주변 경치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왜 조경가는 이렇게 같지만 서로 다른 재료를 제안했던 것일까? 그 배경부터 설명하자면, 설계 과정 중 지역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단계에서 공원 주변의 커뮤니티 학교가 필요로 하는 운동 시설―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인조 잔디 오픈스페이스―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조경가는 천연 잔디의 장점과 편의성 또한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 결과 주변 지형의 높낮이 차이를 이용하여 영민하게 공간과 재료를 분할했다. ...(중략)... *환경과조경345호(2017년1월호)수록본 일부 안동혁은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활동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현재 회사에 8년째 근무하면서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한태곤 선포탈 대표 자연광이 재조명한 지하의 의미
    이제 지방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대한민국에서 조경의 블루오션은 무엇일까?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첫해, 이 화두를 붙잡고 전국 각지를 꽤나 돌아다닌 것 같다. 그 결과 새로운 공간에 대한 관찰은 사뭇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곳곳에서 스스로 성장해 온 여러 선구자들에게서 해답의 실마리를 얻었다. 대담함을 요구하는 시대다. 공간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새롭고 과감한 실천을 벌여 온 개척자들을 통해 새로운 조경 여정의 힌트를 얻었다. 조경의 본질은 결국 새로운 공간 창조이기 때문이다. 라이프스타일은 산업 구조에 따라 변화한다. 기존의 조경 업역이 신도시 개발과 대규모 단지 조성, 신규 건축과 인프라 구축이라는 성장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에 동반해 성장해 왔다면, 이제 성숙과 축소의 사회에서 그 설 자리를 잃고 있음은 대개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지금의 화두는 재생과 재발견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해야 하며, 그동안 이루어 온 도시적 인프라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 곧이어 닥쳐올 시대에는 더 이상 완전히 뜯어고칠 돈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여유도 없어질 것이다.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개선하는 수밖에 없다. 기존을 인정하고 다만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바꾸는 과정의 새로움은 결국 긍정에서 나온다. 조경 설계가 단지 디자인 언어의 변용이나 시류에 편승한 스타일의 수정에 머무른다면 판의 확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판을 짜야 하고, 그 확장은 어느 한 분야의 성장이 아니라 전체 조경 산업 생태계를 두고 고민했을 때 가능하다. 이제 계획과 설계는 시공과 관리와 제품에서 거꾸로 영감을 얻어야 한다. 경관과 휴식이라는 용도의 하향식 분배에서 벗어나고 우리 분야가 품지 못했던 영역을 흡수해 조경 스스로가 보편적 의제를 선도하고 새롭게 정의해 나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비단 나만의 위기감일까. 생명공학과 유기농, 디스플레이와 영상 산업, 3D 프린팅과 업사이클링, 탄소 저감과 지구 온난화, 도시재생과 사회 복지, 빗물 관리와 대안 에너지, 도시농업과 첨단 작물, 문화재와 예술 등 기존 조경에서 양념에 그쳤거나 간접적 부산물에 불과했던 주제들을 이제 중심으로 초대할 필요가 있다. 이노베이션의 결합이 아닌 이노베이션 자체가 디자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시기다. 미래지향적 주제를 새로운 국토적 스케일로 조명해야 희망이 있다면, 서울 공화국이라는 좁아터진 부지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타성에 젖은 대상지와 방법론의 반복에서 벗어나려면 대한민국 조경은 수도권의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스타일이 아닌 디자인이 시도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간의 이용에 대한 시각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조경의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공간을 탐사하기로 한다. 따라서 이 인터뷰 연재물은 정형화된 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자본이나 정책의 흐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정답을 정해놓고 누가 더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영감을 줄 수 없다. 새로운 공간을 향한 인물 개인의 의지, 그것이 산업 구조를 혁신하는 핵심적 에너지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이미 그런 새로운 융합이 일어나고 있다. 이론이 채 따라가기도 전에 그러한 실험이 이미 행동주의자들에 의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거창한 예상과 추측에 비하면 그 성과가 대단치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 시리즈의 주제다. 잘 알려지지 않은 텍사스의 중소 도시 포트워스(Fort Worth)에는 무척이나 아름다운미술관이 있다. 루이스 칸(Louis Kahn)이 설계한 킴벨 미술관(Kimbell Art Museum). 초대 관장 리차드 브라운(Richard Fargo Brown)은 미술관을 설계할 때 흥미로운 몇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했는데, 가장 핵심적이고 눈에 띄는 조건은 자연광의 사용이었다(“Natural light should play a vital part”). 16개의 볼트 구조로 이루어진 폭과 높이 각각 6m의 아늑하고 편안한 인체 스케일의 관람 공간이 상층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전시실을 따스한 은빛 태양광으로 채운다. 렘브란트나 터너 같은 작품들이 곡선형 천장으로부터 쏟아지는 섬세한 산란광 아래에서 더욱 신비한 빛을 뿜어낸다. 킴벨은 미술 작품의 관람에 있어 자연광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태양광이 표현해낼 수 있는 색의 섬세함과 자연스러움은 3파장, 5파장 인공조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소중한 빛을 어두운 지하나 실내 깊숙한 공간으로 끌어온 이가 부산 기업 ‘선포탈’의 한태곤 대표다. 부산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건축시공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영국 레딩 대학교(University of Reading)에서 건설관리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영국 유학 시절 경험했던 자연광 도입 기법에 자극을 받아 독자적 기술 개발에 매진해 왔다. 선포탈의 기술이 킴벨과 같은 기존의 패시브 방식과 다른 점은 태양광을 모아 응축한 다음 100m 이상 전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선포탈은 특히 그 과정에서 자외선, 적외선, 가시광선 등으로 이루어진 풀 스펙트럼을 유지하는데 탁월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자연광을 통해 지금까지 방치되던 열악하고 어두침침한 도시의 구석들을 고품질의 공간으로 환하게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연 것이다. 선포탈의 기술력은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아 세계 최초의 본격적 지하 공원인 뉴욕 로우라인(Lowline) 프로젝트에 공식 협력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맨해튼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방치된 전차 터미널을 자연광 기술을 이용해 녹색이 넘쳐나는 휴식처로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에서 선포탈이 중심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70여 년간 닫혀있던 지하 공간이 햇빛을 받아 살아나게 되며, 과거의 갖가지 건축적 디테일이나 구조, 장식물도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중략)... *환경과조경345호(2017년1월호)수록본 일부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정원 탐독] 다른 세상이 다른 정원을 만든다
    자연스럽다 vs. 인위적이다 자로 잰 듯 어김없는 직선과 방사선의 길, 패턴 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정교하고 화려한 문양, 한 치의 뻗침도 용서할 수 없는 단정한 나무들의 칼 정렬, 더 이상의 틈도 없이 완벽한 섬세함을 보여주는 조각, 하늘을 뚫고 치솟는 엄청난 물줄기의 분수!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를 아우르는 유럽 정원의 아름다움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인위성’이 아닐까. 잠깐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에 하나가 바로 ‘자연스럽게’라는 표현이다. 이 자연스럽게의 반대말로 우리는 ‘인위적으로’라는 말을 쓰고, 이 말 속에는 ‘억지로’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숨어 있기도 하다. 결국 ‘자연스럽게’에는 ‘좋다’의 착한 이미지가 투영돼 있고 인위적이라는 말 속에는 나쁘다까지는 아니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의 생각도 우리와 같을까? 영어로 인위적임을 뜻하는 ‘artificial’ 안에는 ‘예술(art)’이 숨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예술품과 행위 그리고 과학 기술이 포함된다. 그들에게는 ‘natural’이 긍정적이고 ‘artificial’이 부정적이라는 잣대가 없다. 여기서 한발짝만 더 나아가면 오히려 인위성이 바로 예술의 기초가 된다. 그것은 기술과 과학의 시작이다. 다시 유럽의 정원으로 돌아가 보자. 그 철저한 인위적 정원을 거닐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감동을 할까? 유럽의 많은 정원을 지인들과 둘러보았을 때 그들의 입에서 “정말 아름답다!”라는 감탄사가 나오는 걸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최고의 극찬이라면 그 정성에 대한 답례 정도인 “대단하다!” 정도. 그런데 유럽에도 뭔가 다른 정원이 있다. 영국의 시싱허스트 캐슬 가든(Sissinghurst Castle Garden)은 중세 때 지어진 성을 시인 비타 섹빌-웨스트(Vita Sackville-West)가 1930년대에 사들여 만든 정원이다. 거트루드 지킬(Gertrude Jekyll)과 히드코트 매너(Hidcote Manor)의 로렌스 존스턴(Lawrence Johnston)의 식재 디자인 노하우가 실현된 이 정원에 들어서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너무 예쁘다’를 연발한다. 넘치도록 풍성하게 심어진 각양각색의 식물이 정리되지 않은 듯 마구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이 정원에서야 드디어 ‘너무 자연스러워서 좋다’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물론 ‘아트 앤드 크래프트(art and craft) 정원’이라고 명명되는 이 정원이 우리가 생각하듯 식물을 손도 대지 않고 제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둔 정원이 아니라는 진실이 후에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라도 말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45호(2017년1월호)수록본 일부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The University of Essex) 리틀 칼리지(Writtle College)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시골의 발견』,『가든 디자인의 발견』,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외다수의 저서가 있고, 현재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
  • [시네마 스케이프] 로스트 인 더스트 쇠락한 도시, 그 풍경의 서사
    첫 시퀀스부터 예사 영화가 아님을 감지할 수 있다. 에드워드 호퍼 그림처럼 환한 빛이 내리쪼이는 텅 빈 거리, 따뜻한 색감의 벽면, 펄럭이는 작은 깃발, 화면 안으로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기다렸다는 듯 멀리서 파란색 차 한 대가 다른 길로 돌아서 천천히 다가온다. 파란색 차가 건물 뒤로 사라지는 동안 담배를 물고 차에서 내린 여자는 벽에 잠시 서서 담뱃불을 끄고 건물 입구로 향한다. 문 앞에서 열쇠를 꺼내는 순간 복면을 한 두 남자가 나타나 그녀 머리에 총을 겨눈다. 롱테이크로 느릿하게 움직이던 화면 안으로 두 명의 복면강도가 훅 하고 들어오는 순간, 이거 뭐지? 범죄 영화인가? 요약하자면 형제가 은행을 터는 범죄 영화이자 텍사스를 배경으로 하는 현대 서부 영화다. 왜 그들은 강도가 되었을까. 둘 중 키가 큰 동생은 복면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선하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졌다(얼굴도 보기 전에 반하다니, 드문 일이다). 거침없는 형 태너(밴 포스터 분)와 달리 겁에 질린 듯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는 동생 터비(크리스 파인 분)는 이 강도 행각 전체를 설계한 자다. 태너는 아버지를 싸움 끝에 총으로 쏘아 죽인 죄로 10년 동안 복역한 후 출소했다. 그 사이 어머니는 병들어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재산인 농장을 동생인 터비에게 물려주었지만 저당 잡힌 은행으로 바로 며칠 후 소유권이 넘어간다. 이 와중에 농장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다. 막노동으로 살아가는 터비는 이혼한 후 양육비를 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두 아들을 만난 지 1년이 넘었다. 어떻게든 만기일 전에 은행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 영화의 원제는 ‘Hell or High Water’다. 무슨 일이 닥치든 해낸다는 의미다. 터비가 며칠 안에 합법적으로 돈을 마련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나의 부모님, 조부모님 모두 가난했다. 가난은 전염병과 같아서 주변 사람 모두에게 옮아간다. 내 자식에게만은 절대 물려주지 않겠다.” 터비의 고백은 차라리 처연하다(무얼 해도 잘생긴 등장인물에게 한결같이 마음을 뺏기다니, 흔한 일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45호(2017년1월호)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홍상수의 신작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보면서 등장인물보다 연남동과 경의선숲길에 더 눈길이 갔다. 오래된 골목과 새로운 공원,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사람들의이야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가.
  •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광장의 함성으로부터, 예술과 시대상 ‘클럽 몬스터’(국립아시아문화전당), ‘동백꽃 밀푀유’(아르코미술관)
    신년이지만 차분히 모임조차 하기 쉽지 않다. 혼란스런 시국 속에서 예술 작품에 몰입하기는 더욱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술은 검열과 금지, 각종 규율 속에서도 억압에 맞서며 사회적 부조리와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호소해 왔다. 이와 관련해 오늘날의 시대상에 담긴 정서와 사회적 구조, 소외된 삶을 다루는 두 전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클럽 몬스터’와 서울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동백꽃 밀푀유’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매주 광장에서 울려 퍼진 노래의 가사다. 세월호 추모곡으로 등장한 민중가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에는 시대적 참사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사회·정치적 진실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깃든다. 2016년 10월 말부터 매주 토요일이면 광장에서 시민들의 함성이 끊이지 않는다. 광장에서는 민중가요, 저항 가요, 인디 뮤직 외에도 현실을 풍자한 여러 패러디곡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익숙한 모양새로 입을 모아 합창한다. 정치 검열로 인해 꽤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광주로부터 여러 도시의 광장으로 소환되어 역사를 마주한다. 현 정권 퇴진을 외친 ‘하야가’, ‘헌법 제1조’ 등 오늘의 시국을 반영한 새로운 곡들도 등장했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며 정부를 향해 분노의 함성과 구호를 외치는 일이 주말마다 일어나듯이 변화를 향한 사람들의 갈망은 식지 않는다. 축제처럼 평화롭게 모여 있지만 분노로 인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은 뜨겁다. 집회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민중가요는 사회·정치적 상황으로부터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해 왔다. 뿐만 아니라 대중가요는 오랫동안 시대적 정황과 사회적 아픔, 애환을 표현하며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이러한 시국에 예술과 음악의 관계를 의미심장하게 다루고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어 소개한다. 대중음악과 예술의 저항 정신, ‘클럽 몬스터’ 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2017년 2월 26일까지 열리는 ‘클럽 몬스터(Club Monster)’는 대중가요로부터 영감을 얻은 현대 미술을 선보인다. 제목만 들어서는 어떤 전시인지 유추가 쉽지 않은데, 사실 여기서 몬스터는 헤비메탈 그룹 메탈리카(Metallica)의 한 노래 제목에서 유래한다. 전시는 음악 전문가들로부터 추천을 받은 세계인의 애창곡 108곡을 예술가와 공유하여 이로부터 영감을 받은 현대 미술 작업을 전시한다. 전시 제목에서 지칭하고 있는 ‘몬스터’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함축하는 의미는 크다. “사회의 기득권을 가지지 않은 자, 사회 소수자들, 약자들, 빈곤층뿐만 아니라 각종 트라우마에 노출되어 고통 받고 있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전시 기획자가 기획 노트에서 밝히고 있는 ‘몬스터’다.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억눌린 사람들, 바로 우리를 의미한다. 사람들의 정서를 어루만지는 음악은 흥을 북돋우기도 하고 감성을 어루만지기도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음악이 인간에게 일으키는 힘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적 소통일 것이다.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종종 내면에 가려진 목소리를 거센 음성으로 마주하기도 한다. 참여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뮤지션으로는 밥 딜런, 존 레논, 레오나드 코헨, 핑크 플로이드, U2, 한대수, 신중현, 노래를 찾는 사람들 등이 언급되며, 다수의 음악은 시대,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과 교감해온 노래는 시대를 불문하고 이렇게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현재의 삶과 새로운 공명을 일으킨다. 이 음악들은 개별 작가들의 작업에서 공명하는 현시대적 배경과 공명을 일으킨다. ...(중략)... *환경과조경345호(2017년1월호)수록본 일부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도시 관련 비평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2014)등 현대 미술과 도시 연구를 매개한 전시 기획을 해왔으며,도시 개입 프로젝트‘마이크로시티랩’(2016)을 선보였다.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 [시네마 스케이프] 다가오는 것들 사라지는 것에 대처하는 어떤 태도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보고 난 후 한동안 ‘사라지는 것들’로 제목을 기억했다. 사라지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극장 옆 서점에 들러 제목이 가장 그럴 듯해 보이는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채정호, 생각속의집, 2014)라는 책까지 샀다. 우리는 시련에 대처하는 여자 주인공의 패턴에 익숙하다.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거나, 더 깊은 우울의 늪에 빠지기도 한다. 한국 드라마가 가장 사랑하는 공식은 젊고 능력 있고 게다가 잘생긴 실땅님(발음에 주의)을 만나 성공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아름다운 포스터만 본다면 아침 드라마의 익숙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기차역 플랫폼에서 중년 여자가 여행 가방을 든 채 잘생긴 남자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기차란 일상에서 떠남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기표가 아닌가. 아! 젊은 남자와 새 출발하는 이야기구나. 그러나 영화의 해법은 예상을 벗어난다. 영화는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분)의 삶에서 중요한 존재나 의미들이 사라져 가는 상황을 그린다. 어머니는 죽고 남편은 떠나며 명예와 열정은 옅어진다. 종종걸음으로 바삐 걸어 다니는 그녀를 따라다니다 보면 사라져가는 것들만 보인다. 영화의 반어적 제목은 결국 무엇이 다가오는지를 관객 스스로 생각해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나탈리는 어딘가 떠나긴 하지만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며, 옛 제자 파비앵(로만 코린카 분)을 만나긴 하지만 관객이 상상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다. 나탈리는 파리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사다. 같은 직업을 가진 남편과 두 자녀를 두었다. 우울증을 앓는 그녀의 어머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수없이 전화한다. 수업하던 중에도 자살 소동을 벌이고 있는 어머니에게 뛰어가야 한다. 남편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고백한 후 그녀를 떠난다. 출판사로부터는 오랫동안 참여해 온 철학 교과서 공동 필자에서 배제된다는 통보를 받는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처하는 그녀의 방식은 책임감과 솔직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어머니를 돌보며, 남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 정리한다. 출판사의 통보를 듣고도 제자의 책이 누락되었는지부터 챙긴다. 해마다 휴가를 보낸 남편의 여름 별장 정원을 손질하다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요양원으로 허겁지겁 달려간다. 그 와중에도 꽃 몇 송이를 챙기며 추억이 쌓인 바다 풍경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눈물짓는다. 인간이 힘든 상황에서도 얼마나 존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우아한 장면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44호(2016년12월호)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홍상수의 신작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보면서 등장인물보다 연남동과 경의선숲길에 더 눈길이 갔다. 오래된 골목과 새로운 공원,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사람들의이야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가.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멀티 코딩
    #99 라 빌레트 설계공모 2015년 1월 14일 파리의 필하모니가 화려하게 오픈했다. 스타 건축가 장 누벨이 디자인한 것으로 마치 은빛 비늘의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환상적인 건물이다. 그런데 필하모니답게 샹젤리제 거리에 근사하게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도시 북서쪽 외곽의 라 빌레트 공원 가장자리에 건설되었다. 공원 남동쪽에는 ‘음악 도시Cité de la musique’가 한 구간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1995년에 콘서트홀, 야외 음악당, 악기 박물관, 전시관, 아틀리에, 문서 보관소 등이 포함된 복합 건축을 세운 후 그 옆에 필하모니를 덧붙임으로써 음악 도시가 완성되었고 이와 더불어 라 빌레트 공원도 완성을 보았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30년이 넘어 일단락 지어진 것이다. 무슨 뜻일까. 어째서 음악 도시의 완성이 공원의 완성일까. 그건 라 빌레트 공원이 처음부터 ‘공원 도시urban park’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urban park’를 ‘도시 공원’이 아니라 ‘공원 도시’라 말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도시 공원이라고 하면 도시 속에 조성된 시민 공원 등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21세기를 위한 도시 공원’임을 표방하는 라 빌레트의 콘셉트와 그간의 발전 양상을 찬찬히 살펴보면 기존의 도시 공원이라는 개념을 라 빌레트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보다는 공원 도시가 어울린다. 공원이자 동시에 도시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공원인지 도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라 빌레트 공원이 들어선 부지는 19세기 말부터 오랫동안 도축 산업지로 사용했던 곳이었다. 1974년 폐쇄된 뒤 파리 시는 50헥타르가 넘는 넓은 땅에 대형 가축 경매장, 도축 시설, 가축병원, 관리 건물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 부지를 공원으로 전환시킬 것을 결정했다. 녹색으로만 이루어진 공원이 아니라 기존의 건축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여러 문화 시설을 공존하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1982년 5월 국제 설계공모가 시작되어 1983년 3월 스위스 출신의 뉴욕 건축가 베르나르 추미Bernard Tschumi의 출품작이 최종 선발되었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당선작이 발표되자 조경계가 공황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40여 개국에서 800여 점의 작품이 제출되었으며 그중에는 내로라하는 조경가들도 대거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건축가의 작품이 선발되었다는 사실에 조경가들이 받은 충격이 작지 않았다. 물론 이 충격이 약이 되기는 했다. 그동안 잔디밭 양지쪽에 앉아서 끄덕끄덕 졸고 있던 조경계가 화들짝 깨어난 것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44호(2016년12월호)수록본 일부 고정희는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식물,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조경의 경제학] 경관 시장의 오픈을 위한 조건
    우리에게 경관을 향유할 권리가 있는가? 경관을 향유하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기차를 타고 가다 창밖을 내다보거나 등산을 하다 산 아래를 굽어보는 것과 같은 일회적인 향유다. 둘째는 주택의 거실이나 카페의 창가 자리에서 경치를 즐기는 것과 같은 지속적인 향유다. 전자의 경우 사실상 향유 행위를 방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굳이 권리를 따질 실익이 크지 않다. 그에 비해 후자의 경우는 우리가 소유하거나 점유한 조망점과 관계되고, 타인에 의해 방해받기 쉽고, 그 대부분이 비가역적이라는 점에서 권리의 문제가 첨예하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보자. 자신이 소유하거나 점유한 조망점에서 경관을 지속적으로 향유하는 것은 법적 권리로서 보호받고 있는가? 멀리 아름다운 산이 내다보이는 당신의 집 앞에 고층 아파트가 건설 중이라고 상상해 보자. 이 집은 당신의 직장에서 가깝지도 않고, 주변에 극장이나 할인점도 없고, 걸어서 갈 수 있는 전철역도 없다. 당신은 그 모든 불편을 산이라는 경관으로 보상받으며 행복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그 행복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당신은 행복을 지킬 수 있을까? 당신의 ‘내다봄’은 ‘권리’로서 보호받을 수 있을까? 개발 밀도가 높은 도시의 경우, 새 건물이 옛 건물을 가려서 발생하는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중 일부는 새 건물의 권리가 인정되는 방향으로, 또 일부는 옛 건물의 권리가 인정되는 방향으로 결말이 나고 있다. 새 건물의 건축주가 갖는 권리는 개발권이다. 도시계획으로 정해진 범위 내에서 자신의 땅을 원하는 대로 개발할 수 있는 권리는 법에 의해 보호받는다. 반면 옛 건물의 소유자가 갖는 권리는 다소 애매하다. 무엇이 보호되는지 명확하지 않고, 그것을 다루는 법이 무엇인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건물의 건축주가 원하는 높이만큼 건축하지 못하게 하거나 옛 건물의 소유자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하게 하는 판결이 간혹 내려지는 것을 보면, ‘내다봄’에 대해서도 권리가 인정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법원의 판례를 보면 ‘조망권’이라는 말이 분명히 등장한다. ‘조망’이라는 행위 또는 상태 뒤에 ‘권權’이라는 글자가 붙은 이 단어는 마치 우리에게 ‘원하는 경관을 내다볼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조망권이 인정되어 옛 건물의 소유자가 조망을 지키거나 그것을 잃는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한 판결의 대부분은 조망권이 아닌 ‘일조권’을 인정한 결과다. 조망권과 일조권은 모두 헌법에서 보장한 ‘환경권’에 근거한 권리다. 조망권은 안에서 밖으로 내다보는 권리고, 일조권은 (태양 광선을) 밖에서 안으로 받아들이는 권리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나라의 경우 일조권은 인정하는 반면 조망권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하다. 아마도 일조권이 침해당했는지 여부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반면, 조망권의 침해 여부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조망권은 아직 법학자들 사이에서 이야기되는 개념적인 단어에 가깝다. ...(중략)... *환경과조경344호(2016년12월호)수록본 일부 민성훈은1994년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2년간 일했다.그 후 경영학(석사)과 부동산학(박사)을 공부하고 개발,금융,투자 등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2012년 수원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가장 오래 가졌던 직업은 부동산 펀드매니저다.
  • [그들이 설계하는 법] 행복한 설계가
    첫 회의 글을 쓰기 시작할 땐 뜨거운 한여름의 끄트머리를 지나고 있었는데 어느새 겨울의 문턱에 접어들었다. 집 앞의 숲도 이미 잎을 다 떨어뜨리고 마당엔 낙엽이 쌓여 간다. 해 뜰 무렵 창밖에 드리운 옅은 붉은 빛으로 변한 나뭇잎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계속 반복되는 풍경, 당연한 듯 스치는 풍경들이 너무나 소중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작은 마당은 이전에 살던 아파트에서는 겪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한다. 꽃이 피고 낙엽이 지는 풍경을 온몸으로 감각하게 하고 이는 내가 살아있음을, 살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것도 아주 행복하게. 첫 번째 글을 쓸 때 골랐던 풍경화가 생각난다. 풍경에 감탄하며 그 모습을 스케치북에 옮기던 때에는 그 풍경이 왜 나를 끌어당겼는지 잘 몰랐다. 그저 너무나 인상적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 결국 그런 풍경이 우리가 늘 가까이하고 싶고 더불어 살고 싶어 하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내가 하는 일이 이해됐다. 이어진 두 번째 글에서는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조금씩 설계가로서 성장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저 멋진 공간을 만들기 바라는 설계가에서 조금씩 공간에 투영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줄 아는, 아직은 설익은 애송이 조경가로 성장한 나의 모습.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설계 작업의 일차적 환경인 디자인엘과 나와 함께 작업하는 설계가들에 대한 이야기다. 공감, 색깔 찾기 작년 새해에 2015년이 사무소를 시작한 지 십 년째 되는 해임을 깨닫고 무척 놀랐다. 벌써 십 년이라니. 급히 뭔가 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사무소의 설계가들과 함께 무엇을 할지를 의논해봤다. 다양하지는 않지만 연말에 십 주년 기념행사를 하자, 해외 답사를 하자, 책을 하나 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책은 다음 기회로 미뤘고, 조촐하게 직원들과 지난 십 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희망에 따라 두 팀으로 나눠 싱가포르와 뉴욕을 답사했다. 연말에 워크숍을 하며 나눈 마지막 다짐은 우리의 색깔을 찾자는 것이었다. 누구나 말하는 자기만의 색깔 찾기. 어쩌면 지금까지는 우리의 색깔을 드러내는 시간이라기보다 제자리를 찾고 사무소의 틀을 세우는 기간이 아니었을까. 이 생각 안에는 우리의 색깔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무언가를 해내지 못했다는 반성 또한 숨어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십 년은 우리의 색깔을 찾고 드러내는 시간으로 삼자는 이야기를 했다. 그 색깔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십 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설계에 임했다면 우리 나름의 색깔이 옅게라도 있었을 텐데, 왜 없다고 생각했을까. 혹 다른 것을 찾고 있지 않았을까? 설계가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독특하지 않다고 인식한다는 것은 설계가가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중략)... 박준서는 ‘Link Landscape with Life’라는 모토로 디자인엘을 설립해운영하고 있는 조경 설계가다. 조경이란 근원적 삶의 터전으로서의 자연을 문화적으로 해석해 일상에 녹여 내는 행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 조경 설계의 사회적 역할을 바로 세우기를 바라고, 지어지는 설계를 실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