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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프레임
지면이 모자랄 지경인 최근의 정치면 기사에 유행어처럼 자주 등장하는 단어, 프레임frame. 사전을 펼쳐 보면 참 많은 뜻이 있다. 자동차ㆍ자전거 따위의 뼈대, 사람ㆍ동물의 골격, 창문이나 액자의 틀, 안경테, 영화나 TV 방송의 장면 한 컷, 신문과 잡지의 박스 기사 테두리 등 그 쓰임새가 다양한데, 요즘은 ‘생각의 틀’ 정도의 뜻으로도 통용된다.
“정치에서 프레임은 곧 권력이다”, “언론이 프레임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그녀에 대한 허상을 키웠다”, “‘장미 대선’에서 프레임 전쟁은 최고조에 달할 것이다” 등 요즘 언론 매체가 흔히 쓰는 프레임의 용례를 이해하기 위해선 미디어 비평가 토드 기틀린의 정의가 유용하다. 프레임은 “현실에 대한 인식, 해석, 제시, 선택, 강조, 배제와 관련된 지속적인 패턴”(『무한 미디어』, 휴먼앤북스, 2006)이며, 프레임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는다.
언어학을 현실 정치에 적용한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라고 정의한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어떤 사람에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와이즈베리, 2015). 어떤 사고의 틀을 주면 사람들은 다른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이 벌어져도 주어진 틀에서만 인지하고 판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레이코프는 “상대방의 프레임을 부정할수록 오히려 그 프레임은 강화된다”고 프레임의 효과를 설명한다. 한번 자리 잡은 프레임, 웬만해서는 내쫓기 힘들다는 것이다.
프레임이 정치와 언론에만 관련된 딱딱한 개념인 것만은 아니다. 사회 심리학자 최인철의 스테디셀러 『프레임』(개정증보판, 21세기북스, 2016)이 웅변하듯,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다. 같은 풍경이더라도 둥근 창, 네모 창으로 볼 때 완전히 다른 경관이 되듯, 어떤 마음의 창으로 세계를 보는가에 따라 우리의 일상과 인생이 달라진다. 프레임은 애매함으로 가득 찬 세상에 질서를 부여해 준다. 그것은 “특정한 방향으로 세상을 보도록 이끄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보는 세상을 제한하는 검열관의 역할도 한다”. 그래서 중요하고, 어렵다. 프레임은 독하게 마음먹는다고, 굳게 결심한다고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최인철은 자신의 틀을 지혜롭게 깨는 것, 즉 프레임을 리프레이밍하는 과정의 끊임없는 반복을 강조한다.
조경계에도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프레임들이 있다. 조경 공부를 하거나 조경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연은 선이고 인공은 악이라는 ‘자연 프레임’에 익숙하다. 이 전형적 이원론의 우산 밑에 여러 갈래의 지류가 공존하는데, 그중 하나가 조경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구원자(이다 또는 이어야 한다)라는 식의 프레임이다. 조경과 건축을 대립항으로 놓(아야 한다)는 신념도 자연 프레임의 연장선상에 있다. 1970년대에 제도권 조경을 개척한 60대 조경가도, 구체제의 혁신을 갈망하는 30대 조경가도, 희망과 설렘을 가득 품은 대학 신입생도 대부분 이런 공허한 창을 통해 조경을 본다. 이 프레임의 물리적 산물은 곡선 신봉이나 녹색 맹신 정도로 귀결되곤 한다. 지극히 추상적인 데다 논리적이지도 않은 이런 고정 관념의 실익은 무엇일까.
물론 조경계를 지배하는 프레임이 늘 추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매우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프레임도 적지 않은데, 지난 수년간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단연 ‘위기 프레임’이다. ‘조경이 위기를 맞았다’로 간명하게 요약할 수 있는 이 프레임은 위기의 원인을 대개 두 가지로 본다. 짧게 줄여 말하자면, 첫 번째 원인은 경제 전반의 불황으로 건설 시장이 침체했고 그 결과 조경 일거리가 고갈되어 간다는 것.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너무나 당연해서 공허하다. 문제의 원인을 조경계 외부의 조건에서만 찾는 환경결정론은 조경 자체에 대한 성찰적 반성과 대안적 지향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두 번째 원인은 조경 고유의 업역을 건축이나 산림 등 사촌 분야가 빼앗고 있다는 것. 현실 상황을 이렇게 진단하며 조경계의 일부 리더나 언론은 잠식이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때로는 침탈이라는 무시무시한 말까지 동원한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공유하는 것은 좋지만, 분노와 적의를 동반한 이런 프레임은 냉철한 상황 인식과 진단에 토대를 둔 대안으로 연결되지 못할 때가 많다. 과거 회귀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도 간혹 다시 고개를 드는 1970년대식 국토 담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풍 단합 담론을 면밀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반복적으로 강화되는 위기 프레임은 이 프레임에 노출된 사람들로 하여금 조경의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찾게 하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회피하거나 조경을 포기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학생들에게 조경 뉴스를 가급적 읽지 말라고 권한다. 그러나 레이코프가 말하듯 “프레임을 부정할수록 오히려 그 프레임은 강화된다”.
여러 심리학과 미디어 이론이 말하듯, 어떤 프레임으로 보는가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 어떤 프레임으로 조경과 그 주위의 조건을 읽는가에 따라 조경의 목적, 대상, 교육, 문화적 가치, 사회적 역할이 적지 않게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만들고 의존해 온 기성의 프레임을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일한 단수의 프레임을 의심하고 다양한 복수의 프레임을 열어 놓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기성 프레임의 해체를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작지만 참신한 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과조경』에 던져진 숙제 중 하나다.
이수학 소장(아뜰리에나무)에 이어 앞으로 세 달간 ‘그들이 설계하는 법’을 맡아줄 백종현 대표(세계수프로젝트)에게 감사드린다. 이번 4월호 지면에는 특집 기획물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달에 실은 여러 프로젝트와 공모전의 공통분모가 주거 단지라는 점을 쉽게 알아차리셨을 것이다. 미국, 싱가포르, 한국의 최근 사례를 통해 ‘아파트 조경’ 설계의 현재를 점검해 볼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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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파트 키드에게 재건축이란?
여기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아파트가 고향인 청년들, 재건축된다는 소식에 마음 아파하는 청년들이다. 고향이라는 ‘애틋한’ 말이 아파트라는 ‘딱딱한’ 단어와 연결된다니, 많은 사람들이 낯설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아파트의 모습을 기록하고 사람들의 사연을 수집해 책을 낼 정도로 고향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과천주공아파트 101동 102호』, 『고덕주공, 마지막 시간들』이란 책을 낸 아파트 키드들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단지의 재건축 움직임이 일어나던 2013년, 이인규 씨는 ‘고향이 사라지게 생겼다’는 위기감에 둔촌주공단지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사진과 사연을 수집해 잡지 형태로 발간하는 독립 출판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발행했고, 2014년 서울역사박물관 ‘아파트 인생’ 전의 한 코너에서 전시도 하게 되었다. 단지 상가에 ‘마을에 숨어’라는 문화 공간을 열었고, 최근 발행된 4호는 둔촌에 거주하고 있는 열두 가구를 방문해 촬영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담아 냈다.
이 작업은 둔촌의 재건축을 앞두고 ‘추억이 담긴 고향이 사라지면 다시 돌아올 수 없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작업을 하다 보니 둔촌은 물론 잠실, 개포, 반포, 고덕, 과천 등지에서 자라온 ‘아파트 키드’들에게서 공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둔촌 작업 덕분에 잠실에는 ‘안녕, 잠실주공5단지’ 페이스북 페이지가 개설되었고, 고덕에는 책 『고덕주공, 마지막 시간들』, 과천에서도 책 『과천주공아파트 101동 102호』가 발간되었다.
그는 “고향을 구성하는 것은 공간 그 자체라기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관계인 것 같다”고 말한다. 과천에서도 ‘동네’와 ‘고향’이라는 말이 단순히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에는 사람 사이의 관계망과 그들이 공유하는 상징이 내포되어 있다. 공동체는 상징적 구성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공동체는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들만의 영역을 형성하는데, 그 과정에서 상징이 두드러지고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로 작동한다. 곳곳의 아파트 키드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 각 관계망을 묶을 수 있는 하나의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과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징은 과천에서 자란 청년들에게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과천에서 가장 좋았던 점으로 청년들은 도시의 자연 환경을 꼽는다. 대공원 산책, 큰 가로수, 관악산이나 청계산에 대한 경험 때문에 “아 풀 냄새, 이게 과천이지”라고 하거나, “서울에서 남태령을 넘어올 때 창문을 열고 과천 공기를 맡는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할 정도다.
또 과천의 청년들은 “내가 놀던 아파트 단지가 그대로” 남아있거나, “내 나와바리이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대로 있어서”라고 말할 정도로 도시의 지속성을 장점으로 꼽는다. 과천의 주공단지 두 곳이 초고층 아파트로 재건축되었을 때, 청년들은 과천 같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잘 짜인 도시계획으로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에 펼쳐진 나지막한 경관이 변하는 것을 낯설어 했다. 현재는 단지 다섯 곳이 동시에 재건축을 진행하고 있어서 5천 가구가 한꺼번에 이주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역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정주성이라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수도권에서는 임대료나 직장, 교육 때문에 지역을 자주 옮기는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지역 정체성을 갖기 어려워지며 심리적 부유 상태의 누적이 안정감에 악영향을 끼친다. 재건축은 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관계를 파열시킨다.
수도권에서 한자리에 오래 산다는 건 자기 집이 있거나 돈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하지만 과천에 강한 지역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은 비싼 전월세를 부담하거나 집을 줄여서라도 과천에 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적 여건만이 아니라 지역 정체성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볼수밖에 없다.
아파트 단지는 만들어진 환경built environment이지만, 이 아파트 키드들은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 왔고 그곳에 의미를 담아 왔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아파트가 고향이다. 또 이들은 장소의 고유한 경관이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맺어 온 관계를 지키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재건축을 위해 이주한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다. 함께 공유하던 지역 정체성이 갑자기 흩어져 버린다면 쓸쓸하고 허무할 수밖에 없다.
사실 재건축은 부모 세대에게는 시세 차익으로 새집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과천의 한 청년이 “여기에 계속 살고 싶은데, 왜 재건축, 재건축하시는 거예요?”라고 묻자,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얘, 너 신혼집 마련해 주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재건축을 둘러싼 이 딜레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집값이라는 고리가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다. 다음 세대의 신혼집을 마련해 주려면 집값이 더 올라야 하는 건가? 모두가 망하는 결과로 치달을 이 고리를 끊는 일이 절실하다. 이 모순된 사회 구조는 도시를 소유하는 공간으로 보고 그 공간을 자본 증식의 수단으로 여기는 관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숫자로 삶의 의미를 지워버린다. “사회의 뿌리가 사람이고, 사람의 뿌리가 청년 시절에 자라나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회의 비극”이라는 쇠귀 신영복 선생의 말씀, 재건축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송준규는 도시 공동체를 연구하는 인류학도이자 과천에서 활동하는 청년 활동가다. 논문 “부모됨·이웃됨·시민됨: 과천시 풀뿌리 시민운동의 형성과 도전”으로 인류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형성하는 문화적·사회적·경제적 관계망이 국가와 부딪치는 지점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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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스케이프] 세 개의 태양
2015년 말, 한남동에 새로운 명소가 또 하나 만들어졌습니다. 단국대학교 캠퍼스가 이전한 자리에 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싸다는 바로 그 아파트 단지. 아, 그런데 말씀드리려는 곳은 그 아파트가 아니고, 단지 바로 옆에 있는 미술관, 디뮤지엄D Museum입니다.
2015년 12월부터 2016년 5월까지 ‘라이트 아트Light Art ’를 선보이는 개관 기념 특별전 ‘Spatial Illumination-9 Lights in 9 Rooms’가 디뮤지엄에서 개최됐습니다. 빛을 매개로 하는 설치, 조각, 영상, 사운드,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을 전시 제목처럼 아홉 개의 방에 설치한 신선한 구성. 모두 빛을 주제로 하지만 각양각색의 형태와 표현 방식을 담은 아홉 점의 작품들. ‘빛’을 색, 소리, 움직임과 같은 다양한 감각과 결합해 전달하는 경험,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새로운 경험에 민감한 젊은 세대를 겨냥한 마케팅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전시장 내에서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셀카와 SNS에 익숙한 세대에게 아주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해시태그를 타고 꼬리를 물고 확산된 이미지가 저절로 전시를 홍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SNS 사진을 통해 관심이 생겨 찾아온 미술관에서 사진을 찍고 다시 공유하고. 이런 반복이 해시태그 10만 건 이상이라는 큰 성과를 만든 원동력이라는 평가가 많더군요. 누적 관객 수도 26만 명을 훌쩍 넘겼다고 하니 미술 전시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난 셈입니다. 관람객의 68%가 20대라는 자료도 이런 마케팅의 지향점을 알려줍니다. 바야흐로 미술관도 이제 마케팅 시대입니다. ...(중략)...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실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 환경과조경 348호(2017년 4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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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자연과 도시 라이프스타일의 새로운 균형
이 꼭지의 이름 ‘그들이 설계하는 법’, 참 흥미롭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라. 『환경과조경』의 원고 의뢰서에는 이 꼭지를 “조경가 개인의 설계 철학, 설계 방법론, 설계 과정의 에피소드 등을 설계에 관심 있는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마련”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조경가가 아니며 설계를 하고 있지도 않다. 내가 일하는 회사의 사업자등록증에서 조경이나 설계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일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소장’보다는 ‘대표’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때 나는 설계 행위를 하고 있는 조경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환경과조경』은 왜 나에게 연락해 ‘그들이 설계하는 법’의 연재를 요청했을까. 그리고 나는 왜 흔쾌히 연재를 하겠다고 답했을까. 물론 서로 시작은 ‘왠지 모르겠지만 재미있겠다!’라는 ‘느낌적 느낌’이었을 것이다. 분명 그런 직감이 작용했다. 하지만 세상과 사회는 그 직감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설명하자면, 연재를 하겠다고 답한 이유는 첫째로 내가 하는 일이 분명 내가 배우고 경험한 ‘설계’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것이 ‘조경가’가 하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런 나의 생각과 생각의 과정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는 것에 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나와 독자 여러분이 만나는 ‘그들이 설계하는 법’에서 조경가이자 조경가가 아닌 내가 생각하는 ‘조경가’와 ‘설계’, 그리고 ‘설계하는 법’에 대해 이
야기할까 한다. ‘재미있겠다!’라는 처음 느낌처럼 글을 읽고 난 후 ‘재미있다!’라고 느끼는 분이 있으면 좋겠다. 나아가 ‘조경’과 ‘설계’라는 키워드를 매개로 서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중략)...
백종현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 미국 하버드 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에서 조경 설계와 도시설계를 공부했다. 다목적 조경 모듈 셀라(CELLA)를 개발하여 2014년 레드닷 디자인에 선정됐고, 한국인 최초로 캐나다 국제정원박람회(The International Garden Festival, 2013)에 초청됐다. 2016년 조경 스타트업 세계수프로젝트를 창업하여 자연과 도시 라이프스타일의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48호(2017년 4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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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고집스러운 디테일과 사람들
공원이나 정원 또는 건축 설계에서 조망이나 주변 경관을 마치 액자처럼 프레임frame하는 기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이다. 사진의 장소에서도 계단식 벤치의 양 옆에 세워진 벽이 인접한 강과 그 너머의 스카이라인을 액자처럼 틀 지은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벽과, 널찍한 벤치, 강가로 이어진 계단 그리고 바닥재까지 모두 단일한 화강석을 사용해 매끈하게 마감했다. 지나치게 깔끔한 마감과 디테일은 재료의 통일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다. 석재의 이음매를 배열한 방식에 주목해 보자. 조망 축 양 옆에 위치한 벽면은 각각의 폭이 60cm 남짓으로, 약 25mm의 틈을 두고 배치됐다. 이 틈 사이로 강 너머의 풍경이 언뜻언뜻 보인다. 바닥면과 벤치는 인접한 돌 재료끼리 딱 붙여 길이쌓기running bond 패턴으로 이음매를 배열했다. 길이쌓기 패턴을 제외하고 모든 이음매가 정확하게 정렬되어 있다. 각기 다른 너비의 벽 틈과, 바닥면에서 벤치로 이어지는 이음매가 중심을 기준으로 완벽하게 줄을 맞추어 있다. 마치 전체 매스mass를 미리 조형해 놓은 후,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반듯하게 재단한 듯한 디테일이다.
부지의 전체적인 공간 구성이 레이스 스트리트 부두Race Street Pier 공원(환경과조경 2017년 3월호 “까다로운 부지와 조금 ‘다른’ 재료” 참고)을 상기시킨다. 너른 잔디밭 양쪽에 정형화된 수목을 열식하고 그 끝에 수변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을 배치했는데, 레이스 스트리트 부두와 같이 활짝 열린 조망에 이르기까지 점차 공간의 폭이 좁아져 진행 방향으로의 원근감을 극대화했다. 재미있는 비교 포인트는 공간을 체험하는 높낮이를 각각 반대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레이스 스트리트 부두 공원의 경우 완만한 경사를 올라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해서 열린 조망을 감상했다면, 이 장소는 돌계단을 올라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한 후 완만한 내리막을 따라 좁아지는 통로를 통과해 다시 낮아진 지점에서 경관을 조망하는 공간 구성을 보여준다. ...(중략)...
안동혁은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활동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현재 회사에 8년째 근무하면서 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 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 환경과조경 348호(2017년 4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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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윤만걸 창조사 대표
신들의 정원, 경주 남산
‘그만 좀 부숴라, 제발….’ 우리 도시를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신음이다. 낡은 것을 고쳐 쓰기보다는 ‘깔끔하게, 화사하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지배적 미감인 듯하다. 다행히 미술적 감성이 살아있는 극소수의 미술관과 상당수의 카페가 오히려 그것을 거스르는 낡은 미감을 보여주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저 수많은 관청과 ××센터와 전국에 깔린 혁신도시를 보라. 우리가 코딱지만 한 땅뙈기를 생태◯◯으로 만들었다고 자축하는 사이, 광대한 산야와 들판과 숲과 투수층이 사라졌다. 심지어 ‘재생’을 표방하는 사업들 또한 실제 들여다보면 과거를 뭉개버리고 새로운 시멘트와 유리 덩어리 올리는 것을 성과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건축가의 화려한 포트폴리오에도, 도시설계가의 찬란한 비전에도 때가 묻은 흔적은 없다. 조경도 마찬가지다. 역사라는 명분은 세워줘야겠기에 손톱만 한 표시는 화석처럼 남기는데,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구석에서 먼지나 먹고 있을 운명이 뻔히 보인다.
과거의 온전한 복원이야말로 가장 새로운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어렵고 골치 아프다. 비까번쩍하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는다. 노력과 수고와 과정에 비해 그 결과물은 너무도 당연하다. 시간이 만든 아름다움은 인간의 손으로 흉내 내기엔 벅차다. 그러나 우리가 눈길을 주지 않고 있던 사이, 경주의 숲에서 이 무리하지만 찬란한 망치질을 묵묵히 해온 한 석공이 있다. 천 년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 어렵고도 불가능한 일을 자처한 곰 같은 사내다. 그가 만지는 재료들은 기본이 천 년이다. 대를 이어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남산, 신들의 정원을 복원하고 있는 윤만걸 명장과 그의 후계자 윤동천, 윤동훈. 이제까지 슬프고 어그러진 파편 덩이만을 과거라고, 문화재라고 알던 우리에게 그가 보여주는 남산의 감동은 먹먹하다. ...(중략)...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48호(2017년 4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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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의 정원 생활] 고산 윤선도, 늙은 어부 혹은 신선으로 살기
한국 최고의 정원가
고산 윤선도는 역사상 최고의 시조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최고의 정원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의외로 많지 않다. 그를 한국 최고의 정원가라고 할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역사상 그만큼 많은 정원을 만든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전 생애에 걸쳐 머무는 곳마다 정원을 짓고 즐겼다. 현재 흔적이 남아 있는 곳만도 해남 삼승三勝이라 불리는 수정동ㆍ문소동ㆍ금쇄동, 해남 윤씨 종가 녹우당과 백련지, 보길도 부용동, 강진 덕정동의 추원당, 남양주 수석동의 해민료와 명월정 등 여러 곳이 있다. 유배지였던 함경도 경원과 삼수, 경북 기장과 영덕 등에도 그가 즐긴 정원 관련 지명이 있다. 둘째, 그가 만든 정원들은 한결같이 한국의 대표 정원으로 내세울 만한 걸작이다. 그의 정원은 대체로 바위와 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자연 경승지에 있다. 고산은 자연 요소와 경치를 탁월한 안목으로 읽어내 과학적ㆍ생태적 지식과 기술은 물론 예술적 감각이 충만한 정원으로 만들었다. 셋째, 그는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원을 이용하고 즐기는 데에도 탁월한 감각과 수준을 과시했다. 아름다운 산수간에 만든 정원에서 그는 시, 음악, 무용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즐김으로써 정원이 단순히 휴식이나 완상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문화 예술을 생산하고 체험하는 장임을 실제로 보여준 셈이다.
대표 정원들
고산은 51세 때 보길도에서 처음으로 정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출발이 순전히 자기 뜻만은 아니었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청나라에 굴욕적으로 항복하게 되자 부끄러워 하늘을 볼 수 없어 탐라에라도 가 은거하겠다고 결심한 고산이 도중에 잠시 들렀다가 아예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곳이 보길도였다. 이후 그가 죽기 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해 나간 보길도 부용동芙蓉洞 정원의 면모는 후손 윤위가 쓴 『보길도지』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탁월한 풍수 안목으로 섬 중앙 계곡부를 중심으로 혈처(낙서재), 안산(동천석실), 외수구(세연정) 등의 요지에 각기 다른 성격의 정원을 조성하고는 그곳들을 오가며 즐겼다. 요처에 최소한의 인위로 정원을 만들고 섬 전체를 자신의 왕국인양 즐긴 호방한 공간 사용 전략을 잘 구사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안 되어 2차 유배를 당하면서 보길도의 첫 정원 생활은 낙서재 등 극히 일부만 완성한 상태에서 중단되고 만다. ...(중략)...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이래 줄곧 조경가의 길을 걷고있다. 연구소와 설계사무소에서 기획부터 설계, 감리에 이르는 실무를두루 익힌 후 지금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93 대전세계엑스포 조경계획 및 설계, 인사동길 재설계, 용산국립중앙박물관 조경설계, 신라호텔 전정 설계 및 감리, 선유도공원 계획및 설계, 용산공원 기본구상,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설계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풍토 속 장소와 풍경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조건으로서 조경 공간이 지닌 가능성과 효용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환경과조경348호(2017년 4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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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봄의 흙은 헐거워지고, 헐거워진 흙은 부풀어 오른다
봄이다. 형형색색 꽃이 만개하는 계절. 『자전거여행』(문학동네, 2014)에서 김훈은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 산수유는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 목련 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보고 나면 가슴 한편이 아린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는 스쳐 지나가듯, 창문을 통해 마른 나뭇가지에 달린 꽃봉우리 비슷한 것이 보인다. 내내 차가운 바람과 눈발 날리는 바다 풍경만 보다가 그 단 한 장면에 이르면, ‘아!’ 하는 탄식이 나온다.
여기 보스턴에 사는 한 남자가 있다. 아파트 관리인으로 일하는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 분)는 무표정하고 불친절한 태도로 매일 쓰레기를 정리하고 막힌 하수도를 뚫는다. 무기력해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 화를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치우던 어느 날,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맨체스터 바이 더 씨’(놀랍게도 도시 이름이다)로 향한다. 형이 죽고 남겨진 조카의 후견인이 되어야 하는 상황, 그는 당황한다. 아직 고등학생인 조카,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야 한다. “그 유명한 리 챈들러야?” 고향 사람들은 그를 보고 수군거린다. 불쑥 기억을 통해 그가 아내와 함께 세 아이를 키우던 행복한 순간들이 소환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관객은 영화 중반까지 알 수 없다. 그저 그 남자의 공허한 눈빛과 처진 어깨를 바라볼 수밖에. ...(중략)...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상처가 그리 호락호락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한편의 영화, ‘문라이트’. 어떤 선택지도 없는 벼랑에 선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희곡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가 원작이다. 영화 초반부에 잠시 등장하지만 소년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후안이라는 조연이 인상적이다. 영화의 주제이기도 한 그의 대사다. “네 삶을 다른 사람이 정하도록 두지 마라.”
* 환경과조경 348호(2017년 4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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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도시와 관계하는 열한 가지 방식]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제주에서 일이 끝나고 하루 이틀간의 여행을 계획할 때, 한 지인은 내게 공동묘지를 산책해 보라고 권했다. 이에 옆에 있던 또 다른 지인은 몸서리를 치며 시체들이 있는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산책을 하느냐 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해보면 내가 일상에서 디디는 모든 곳이 몇 십만 년에 걸쳐 그런 시체들을 켜켜이 품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같이 지르밟고 거니는 이 땅에는 온갖 이야기와 살들이 부산스러운 우리 발에 잘 다져진 채로 묻혀 있다. 이 퇴적층은 일상을 사는 우리 눈에는 비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때때로 스며 올라와 낯선 내음을 풍기거나 삽 아래 적나라하게 파헤쳐진 채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지금도 건물을 짓기 위해 토목 공사를 하다보면 새로운 유적이 발견되는데, 이렇게 발견되는 것들 외에도 유형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렇다고 기록에 남지도 않은 채 묻힌 사람들의 이야기와 문화의 층위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것이다. 좋든 싫든 이 땅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과거의 유물과 이야기들은 미래를 향하는 우리의 시선과 어떤 관계를 가질까? 그것은 새로운 것을 그리기에 이미 너무 더럽혀진 종잇장, 또는 상상조차 불허하는 숨 막히는 박제에 불과한 것일까? 실용적 관점에 입각한 것이든 미적 관심 또는 이념적 관점에 입각한 것이든,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계획의 목표이거나 또는 부수적인 작용인 바. 퇴적층을 깨끗하게 쓸어내고 새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면 우리의 상상력을 장애물없이 펼칠 수 있을까? 그런데 도시에서, 특히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축적됐고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런 곳에서, 시공간적, 사회경제적 맥락으로부터의 무중력 상태가 과연 가능하긴 한 것일까? ...(중략)...
진나래는 미술과 사회학의 겉을 핥으며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게으르게 활동하고 있다. 진실과 허구, 기억과 상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흐리고 편집과 쓰기를 통해 실재와 허상 사이 ‘이야기-네트워크-존재’를 형성하는 일을 하고자 하며, 사회와 예술, 도시와 판타지 등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기술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지점에 매료되어 엿보기를 하고 있다. 2012년 ‘일시 합의 기업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해 활동했으며, 2015년 ‘잠복자들’로 인천 동구의 공폐가 밀집 지역을 조사한 바 있다.
www.jinnarae.com
* 환경과조경 348호(2017년 4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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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광장의 계절을 보내며
광장의 계절이다. 지난 가을과 겨울 광화문광장을 촛불로 타오르게 한 집회 참가자 연인원이 3월 초면 1,500만 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이 차디찬 계절의 뜨거운 광장을 한 외신은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민주주의라 평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도시 문화에서는 낯선 공간이었던 광장에 그 어느 때보다 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 호 특집 ‘광장의 재발견’의 배경에는 최근의 국정 농단과 ‘광화문광장 현상’이 광장이라는 공간과 문화에 대한 다각도의 해석을 요청하고 있다는 진단이 자리한다. 그러나 도시의 그 어느 곳보다도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와 활동이 교차하는 공간인 광장을 어떻게 설계하고 경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이번 특집을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이번 광장 기획은 또한 월간 『환경과조경』이 공동 주최하는 제1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과 켤레를 이룬다. 공모전 취지문을 아래에 옮긴다.
“광장보다 골목과 길이 더 친숙했다. 꽤 오랫동안 광장은 우리의 것이 아닌 서구의 것이었다. 광장과 같은 빈 땅을 필요로 하는 집단적 종교 활동도 없었고, 군중의 집합이 동반되는 시민 사회의 성숙 역시 뒤늦게 발현되었다. 사람들은 가로의 일종인 선형의 시장에서 만났고, 아이들은 골목에서 뛰어 놀았다. 개인이나 마을 단위의 대소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마당이면 족했다. 그도 아니면 사람들은 당산나무 그늘을 찾았다. 우리네 광장의 역사가 짧은 까닭이다.
한강 백사장과 여의도광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관제 집회와 종교 집회의 시기를 거쳐, 본격적으로 광장이 주목받게 된 계기로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꼽지 않을 수 없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대규모 거리 응원도 광장의 흥분을 온 국민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세기가 바뀌기 시작할 무렵부터 전 세계적으로 광장은 공원과 유사한 하나의 오픈스페이스로 변신하며, 그 고유한 특질을 잃어갔다. 공원 같은, 광장 아닌 광장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의도광장은 여의도공원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서울광장엔 잔디가 깔렸다. 청계광장 역시 일상적 이용에 초점이 맞춰졌다. 정부도, 시민도 비일상적인 대규모 집회용 광장보다는 녹색 옷을 입은 일상적인 오픈스페이스를 선호한 탓이다. 광활한 비움보다는 불확정적이며 유연한 설계가 더 각광받았다. 그 사이 오프라인에서의 직접적 만남은 온라인상에서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 이른바 SNS로 대체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난 것에 비례해서 광장에는 녹음을 드리우는 녹색의 면적이 커져갔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광장의 의미와 쓰임은 무엇일까? 혹은 무엇이어야 할까? 광장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신선한 모색을 초대한다. 작아져만 가던 광장을 다시 호출한, 슬프고도 우울한 시국은 ‘광장의 재발견’에서 절대적인 단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 엄중한 시기를 지나 다시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야 하니까.”
특집의 첫 번째 글 ‘아고라포비아’에서 박승진 소장은 설계자들이 갖는 광장공포증을 다루지만, 광장 설계를 둘러싼 거의 모든 핵심 쟁점들도 샅샅이 조회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광장은 대중 민주주의의 상징이면서 전체주의의 통치 도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광장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사용된다.” 그는 광장공포증을 극복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며 글을 맺는다. “좋은 광장을 만드는 데 있어서 위대한 설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열정적인 협력 그룹, 뛰어난 집단지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편집자로서 가장 굵은 형광펜을 그은 문장은 “광장은 다수의 군중을 위해 존재하지만, 외로운 도시 산책자를 외면하지 않는다. 어쩌면 도시에 더 많은 광장이 필요한 이유다”였다.
전상인 교수는 ‘광화문광장인가, 광화문극장인가?’에서 도시의 계획·설계와 문화라는 관점으로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의 몇 가지 쟁점을 검토한다. 이 글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광화문광장은 광장이 아니라 극장”이라는 주장이다. 광화문광장은 “그 자체의 전통으로 빛나는 시민의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연출과 기획을 기다리는 미장센”이며, 그것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론의 장이 될지, 푸코가 말하는 권력의 장이 될지 선택은 우리의 몫”이라는 해석은 토론을 초대한다. 반면, ‘광장, 군중, 이벤트’에서 김세훈 교수는 최근의 평화 집회가 광장이라는 도시 공간을 재발견할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고 진단하고, “다양한 집단의 사회적 활동을 풍부하게 담을 수 있으면서 동시에 즐겁고 쾌적한 광장, 그리고 이벤트에 몰입하는 경험과 함께 자유로운 참여 선택의 여지를 주는 광장”을 위한 과제를 탐색한다. 특히 ‘군중관리학’에 토대를 둔 정교한 광장 설계와 이벤트 계획의 가능성을 짚는다.
광장을 광장답게 쓰는 방식이 정해져 있다, 정해져 있지 않다는 지점에서 두 필자의 견해가 엇갈린다.
특집에는 남기준 편집장의 ‘‘광장의 재발견’에 단 편집자 주’와 편집부의 조사와 토론을 바탕으로 김정은 편집팀장이 갈무리한 ‘편집부가 추천하는 광장 10선’을 함께 싣는다. ‘광장 10선’은 지난 10년간 『환경과조경』에 실린 광장 프로젝트 전수를 놓고 에디터들이 열띤 토론과 투표를 통해 선정했다. 환경조경대전 출품을 준비하는 독자들에게 광장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실험을 접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이번 특집 ‘광장의 재발견’은 완성본이 아니다. 지금, 여기, 한국 사회와 조경계의 교집합이 있다면 그 중심에 광장이 놓이기에, ‘광장의 재발견’은 현재진행형 프로젝트다. 광장을 다시 생각하며 도시사, 건축사, 조경사의 내로라할 고전들을 계속 뒤적거리지만, 그래도 자꾸 손이 가는 책은 최인훈의 『광장廣場』이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 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누구나 밑줄 그어놓았을 1961년 판본의 서문 한 대목이다.
희망의 새봄을 맞는 『환경과조경』에 몇 가지 뉴스가 있다. 김정은 편집팀장이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먼저 전한다. 논문 주제는 한국 근대 유원지의 공간문화사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정확하게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국내 조경과 건축 전문지 역사상 최초의 박사 기자가 탄생한 셈이다. 하지만 2014년 6월호부터 합류해 서른 세 권의 잡지를 만든 조한결 기자가 대학원 진학을 위해 퇴사한다는 아쉽고 섭섭한 소식도 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조 기자는 『환경과조경』의 지면 혁신을 실천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잡지 곳곳을 업그레이드시킨 유능한 편집자였다. 미술사를 전공할 그의 새로운 항해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편집자가 아닌 필자로 『환경과조경』 지면에 곧 등장하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