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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감염 도시의 공원 풍경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 중인 조경가 최지수(SOM)가 최근 포스팅한 글은 그 어떤 기사보다도 생생하게 코로나 시대의 비일상적인 일상을 담고 있다(brunch.co.kr/@playwithaina/12). 초현실적인 시절을 현실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역설을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힘을 냈다가 지쳤다가 막막했다가 끝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가 매일 같은 장소, 집에서 일하고 자고 먹고 살아가는 하루가 느린 듯 바쁜 듯 흘러간다. … 그렇게 셋이 복닥거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나의 주말은 전보다 더 특별해졌다. 반강제로 집에 갇혀 ○○를 돌보며 정신없이 일하다가 삼시세끼 해 먹고 지쳐갈 때 즈음 맞이하는 주말이 요즘은 더더욱 반갑기만 하다. 닫아버린 공원이나 산책로, 해변을 제하고 … 한정적인 선택지 속에서 한두 시간 걸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사람 대신 자연을 만나서 한숨 돌리는 주말의 시간은 다음 한 주를 준비하는 나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주변에 산과 바다를 포함한 공원이 가까이 있어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다.자연 속에서 걷기만 해도 얻는 에너지는 대단하다.”
전국 곳곳의 크고 작은 공원들이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도 유례없는 인파로 북적이고 있다. 유럽 남부의 무더위가 시작되고 서구 여러 국가의 봉쇄령이 완화되면서 해변과 공원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이미 불가능한 상황이다. 미국 대부분의 도시에서도 경제 활동이 부분적으로 재개되면서 광장과 공원은 두세 달 만에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대감염병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도시공원과 공공 개방 공간의 존재 이유와 그 역할을 새삼 재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5월 15일, 여러 외신은 초록 잔디밭에 새긴 하얀 동그라미 속에서 공원을 즐기는 이색적인 풍경을 앞다퉈 실었다. “공원의 인간 주차장(human parking spots in the park)”이라는 촌평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유도하기 위해 백색 분필 페인트로 그린 지름 8피트(약 2.4미터)의 원형 띠 속에 앉거나 누운 뉴요커들의 모습은 아마도 코로나 시대가 남긴 가장 역설적인 장면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서른 개의 원형 ‘인간 주차장’이 배치된 이 공원은 2년 전 개장한 브루클린의 핫 플레이스, 도미노 공(원Domino Park)이다(『환경과조경』 2019년 7월호 게재). 맨해튼에서 브루클린 방향으로 윌리엄스버그 브리지를 건너다보면 높은 굴뚝이 인상적인 노후한 갈색 벽돌 건물과 ‘도미노 슈거(Domino Sugar)’ 사인이 시선을 붙잡는다. 이 건물 바로 앞의 강변을 따라 들어선 도미노 공원은, 1856년에 세워져 ‘설탕 제국’이라 불리며 2004년까지 가동된 뒤 방치된 도미노 설탕공장 일대를 재생하는 사업의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JCFO(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가 디자인한 도미노 공원은 브루클린 탈산업 경관 고유의 풍취에 파묻혀 이스트 강 너머 맨해튼의 해질녘 스카이라인을 감상할 수 있는 낭만의 명소로 순식간에 떠올랐다. 뉴요커와 관광객들이 이 신상 놀이터에 마음껏 모여 윌리엄스버그 브리지를 사랑한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자 소니 롤린스의 재즈를 들으며 강바람에 취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 다시 올 수 있을까.
도미노 공원의 원에 갇힌 사람들을 조감한 드론 사진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이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전시장 한 벽을 내줘도 손색이 없을 만하다. 공기 여과기까지 달린 마스크를 쓰고 정자세로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진 남자, 마스크는 물론 웃옷까지 벗어던지고 태양에 몸을 맡긴 커플, 한 원에 네 명 이하라는 규칙을 어기고 일곱 명이 빼곡 모여앉아 피크닉을 즐기는 한 무리의 십 대들, 고독이 절절히 묻어나는 표정으로 원의 경계를 따라 도는 중년 남자, 할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안온하게 누운 할머니, 아이의 걸음마에 바이러스의 공포를 잊고 마냥 흐뭇한 부부, ‘홈트’ 앱을 틀어놓고 유연성 강화 운동에 여념 없는 레깅스족. 도미노 공원의 진풍경을 영상 취재한 한 저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찍은 비디오를 2019년에서 온 누군가에게 보여주면, 그는 실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디스토피아를 그린 할리우드 텔레비전 쇼의 한 장면이라고 여길 것이다.”
어찌 보면 사회적 거리를 두고 박혀 있는 원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작은 공원 같기도 하다. 휴식, 일광욕, 피크닉, 산책, 독서, 사색, 연애, 운동.평범한 공원 프로그램들을 잘라 붙인 압축적 콜라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감염 도시의 공원 풍경. 도미노 공원에 분필로 새긴 동그라미들이 등장한 지 사흘 뒤, 샌프란시스코의 힙 타운인 미션 지구의 돌로레스 공원(Dolores Park)도 똑같은 땡땡이 무늬 새 옷을 입었다.
이번 호부터 새 꼭지 ‘풍경 감각’의 문을 연다. 일러스트레이터 조현진의 그림과 글이 소란한 일상의 소중한 쉼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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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보름달을 잡는 방법
달빛에 그림자가 생기는 가을밤이었다. 강아지풀이 무성한 아파트 뒤뜰에서 동네 어른들은 맥주를 마셨고, 아이들은 안주로 가져온 과자를 집어 먹고 있었다. 이날 처음으로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다고 기억한)다. 이렇게나 좋은 소리를 작은 벌레가 낸다니. 귀뚜라미를 잡아가져가기로 했다. ... (중략)
*환경과조경386호(2020년6월호)수록본 일부
조현진은 조경학을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다. 2017년과 2018년 서울 정원박람회, 국립수목원 연구 간행물 『고택과 어우러진 삶이 담긴 정원』, 정동극장 공연 ‘궁:장녹수전’ 등의 일러스트를 작업했고, 식물학 그림책 『식물문답』을 독립 출판했다. 홍릉 근처 작은 방에서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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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설계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들
한국조경협회 40주년 좌담
모든 시작은 끝에서 비롯되듯, 우리는 이제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의 출발점에 서 있다. 앞으로 한국 조경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앞만 보고 달리기를 잠시 멈추고 지난 날을 돌아보며 미래를 가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한국조경협회 창립 40주년을 기념해 한국조경협회와 월간 『환경과조경』이 공동 개최한 좌담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 세대의 조경가들을 초대하여 조경의 미래를 그리는 작업의 물꼬를 트고자 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를 지나온 한국 조경 설계와 이를 뒷받침했던 교육 환경을 세대별로 진단하고 조경 설계 주제의 변천사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논의했다. 분야가 축소되고 분화되는 가운데 있지만 위기와 기회를 구분하는 분별 있는 관점과 조경의 희망을 기대하는 목소리로 좌담회는 마무리됐다. 아름답고 유용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조경의 역할이자 본질적 가치다. 각자의 시간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경의 가치를 실천해 온 이들의 이야기를 지면에 옮긴다.
박명권 그동안 조경 분야가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많은 발전을 이뤘다. 이제 잠시 멈춰서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좌담회에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 자재 등 전 분야의 조경인을 고루 모시고 싶었으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대신 한국 조경의 초창기를 연 안계동 대표부터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신입 사원까지 다양한 세대의 조경가를 한자리에 초대했다. 논의 주제는 네 가지다. 첫째는 내가 돌아본 조경 설계 40년이다. 세대별로 체감하는 조경설계사무소의 현실에 관한 생각을 나눠주길 바란다. 둘째는 조경 교육의 문제점이다. 설계 분야 후진 양성이 미흡한 원인과 대책도 함께 돌아보고자 한다. 셋째로 조경 설계 주제의 변천에 관해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조경 설계업의 전망과 기대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한다.
안계동1981년도에 취업해 조경을 시작한 지 거의 40년이 됐다. 당시에는 설계사무소도 별로 없고 설계를 하는 사람도 적었다. 근무 여건은 열악하고 사회에서 조경 설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에 설계비도 적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계속 걸어온 사람들 덕분에 조건이 많이 나아졌다. IMF 등 경제 위기나 설계 업계 자체의 불황도 있었지만, 어려움을 겪으면서 조경가들의 역량이 커질 수 있었다.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지만 근래 들어서는 위기감도 느낀다. 개발의 시대가 끝나가며 일거리는 줄어드는데 설계사무소는 늘다 보니 경쟁도 치열해졌다. 앞으로의 조경설계사무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세헌 나는 안계동 대표를 비롯한 1세대가 10년간 닦아 놓은 토대 위에서 출발한 세대다. 한국 국토 개발의 한복판에서 그 시작과 과정을 고스란히 경험했다. 처음으로 설계사무소에 입사했던 1991년 말, 1기 신도시인 분당, 일산, 산본, 중동 등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입사해 맡은 첫 프로젝트가 산본 신도시 중심상업지구 쇼핑몰 현상설계였고, 분당 택지개발 사업 조경의 실시설계를 진행했다. 일거리가 폭풍처럼 쏟아지는 환경 속에서 30년을 보냈다. 개발의 시대가 종지부를 찍는 오늘날에 이르러 돌아보니 그간 내용이 빈약한 설계를 해오지 않았나 싶다. 짓기 급급했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공원 등 기본 인프라는 많이 구축됐으나 공간을 도상에 빨리 표현하는 일에 매몰되어 조경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은 부족했던 것 같다.
서미경 올해로 조경 설계 일을 한 지 24년째다. 스스로 낀 세대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1996년에 대학원을 졸업했는데, IMF 직전이었고 설계사무소가 많지 않아 직장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취업 후 정신없이 바빴고 육아로 경력 단절을 겪기도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조경이 천직이라 생각했다. 식물을 직접 만지고 외부 환경을 다루는 일에 만족했다. 하지만 공공 환경보다는 건축물이나 아파트 외부 공간을 주로 설계했기에 조경의 가치와 사명감을 체감하기는 쉽지 않았다. 2000년대부터 세종시 중앙녹지공간 같은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론적으로만 고민하던 가치를 설계에 구현해볼 수 있었다. 덕분에 조경가로서 자긍심을 갖고 그 원동력으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데, 근래 들어 밀레니얼 세대 조경가들의 도전적이고 실천적인 작업을 눈여겨보게 된다. 어쩐지 이들이 만드는 급격한 변화와 초창기 세대 사이에 큰 두각 없이 끼어 있는 기분이다.
김기천 각종 이론이 난무하는 시기를 지나왔다. 조경과 도시계획에 관련된 국내외의 다양한 이론을 설계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며 20년을 보냈다. 설계할 기회는 많았는데 돌아보니 무엇을 해왔나 싶다. 젊은 후배들이 설계사무소를 차리고 자신만의 영역을 찾아가는 걸 보면 어떤 입장에서 앞으로의 20년을 보낼지 고민이 많다.
최영준 지난 십몇 년을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보았다. 이론의 부재, 디지털화, 설계 유학, 중국 건설 호황이다. 김기천 소장의 말처럼 그간 조경에 관한 여러 이론이 정립됐지만 다소 허망하거나 같은 내용의 반복처럼 느껴졌다. 이론의 한계를 드러내고 증명한 프로젝트를 접하면서 우리 세대는 실무적이고 실천적인 것을 더 중시하게 됐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의 몰락을 목격하고 이 같은 이론을 비판하는 리포트를 쓴 적도 있다. 또한 2000년대 초반 학번은 캐드부터 라이노, VR을 경험한 세대다. 랩디에이치 파트너 중 한 명은 전 세계 40명밖에 없는 루미온 초기 베타 테스터이기도 했다. 도면 제작의 기초로 여겨지는 제도를 정식으로 배워 본 적도 없다. 설계 초반에는 손 스케치를 많이 하지만 캐드와 라이노, 스케치업이 더 친숙하다. 유학이 한창 융성했던 시기를 지난 것도 우리 세대의 특징이다. 유학을 가면 장래가 밝을 거라 믿는 분위기였고, 해외에서 공부를 마치고 학교에 포진한 윗세대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하버드 GSD에 중국인보다 한국인이 많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였고, 유펜(UPenn)에서 공부할 당시 한국인이 15명, 하버드 GSD까지 합치면 거의 40명이었다. 마지막으로, 영토가 넓고 여전히 개발이 활발한 중국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좋은 프로젝트를 경험할 기회가 많았다.
김지환 최근 몇 년간 조경의 가치와 방향성, 희망을 정리하기보다 위기를 부각한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경제적 혹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부각되어 보일 순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조경의 가치를 탐구한 결과물을 학계에서든 업계에서든 알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전에는 큰 대지를 다룰 기회가 많았다면 지금은 작은 공간 혹은 새로운 유형의 공간을 다룰 일이 많아졌다. 이를 기회로 삼아 조경의 방향과 가치를 더 면밀히 탐구해야 한다.
강은영 조경에 대해 제대로 알고 전공을 택한 건 아니었다. 여러 수업을 통해 차차 조경을 공부했고 이 학문이 미적 영역을 넘어 도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배웠다. 이 배움이 저영향개발LID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관련 회사에 다니게 됐다. 졸업하고 보니 나처럼 전공과 관련된 회사에 취직한 동기나 선배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중략)
*환경과조경386호(2020년6월호)수록본 일부
토론
- 강은영 한국그린인프라연구소 사원
- 김기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소장
- 김지환 조경작업장 라디오 대표
- 서미경 해안건축 수석
- 안계동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 대표
- 안세헌 가원조경설계사무소 대표
- 최영준 랩디에이치 조경설계사무소 대표
사회 박명권 발행인
사진 유청오
정리 윤정훈
일시2020년 5월 15일
장소 환경과조경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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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 캔디렌더와 포스트 프로덕션
캔디렌더
안개비와 구라파적 가스등이 없더라도 누구나 해질녘이 되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늘 그렇듯 뻔한 거짓말을 적당히 둘러대고는 커피숍으로 달려가 새로운 트럼펫 연주에 어울리는 컴퓨터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주부터 왠지 모르게 다음 연재를 위한 캔디렌더(Candy Render)이미지(그림 1)를 무척이나 만들고 싶었다. 다른 소장들은 새로운 수주에 관해 수줍게 이야기하거나 최근에 만든 서로의 작품을 칭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는 혼자 렌더링 같은 것을 만들고 있다고 하면 아마 모두 비웃을 거다. 그래스호퍼나 넙스 같은 얘기를 더 할까도 생각해봤지만 몇 달째 반복되는 똑같은 얘기들은 우리 사이를 다시 피곤하게 할 것만 같았다.
캔디렌더는 파라메트릭도 아니고 초연결 사회의 교차점에 걸려 있는 그림도 아니며,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가 세련되게 믹싱한 새로운 시대의 재즈도 아니다. 그저 브이레이의 커스틱스(Caustics)효과를 포토샵으로 따라 한 사탕 느낌의 이미지일 뿐이다. 지금까지 패시브한 성격을 자조적으로 고백하는 우울한 디자이너를 애써 흉내 내왔는데, 귀여운 성향을 갑자기 고백하다니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다. 오늘은 과묵하게 말을 아끼다가도 내일은 엄청나게 수다스러워지고 마는 거다.
포토샵 포스트 프로덕션
적당히 어려운 얘기만 하다 연재를 마칠 생각이었다. 아무에게도 관심 받지 않고 고독하게 마감하려고 했다. 하지만 포토샵에 애달팠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져 포토샵 포스트 프로덕션(post-production)에 관한 얘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 포토샵 포스트 프로덕션은 관성적인 레이어 쌓기 게임일 수도, 디지털 사진의 일반적인 후보정 과정일 수도 있으며, 루미온 시대의 카메라 로 필터(raw filter)를 활용한 최후의 리터치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렌더링 과정에서의 연출에 대해 말하고 싶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아니지만, 디지털 콜라주에서 원근법을 구축하는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시대를 마감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무너지는 서브컬처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싶은 것이다.
아무래도 정리를 해야겠다. 너무 많은 프로그램들이 쏟아지고 있고, 전통적인 아카데미 교육과 새로운 미 디케이드ME decade(자기중심주의 시대)의 미디어들 사이에서 정체 모를 과도기가 깊어지고 있다. 이제는 소묘 수업에서 명암의 기초를 배우며 빛과 그림자로 표현하는 과정을 자연스레 익히지도 않고, 루미온을 통해 카메라와 구도에 대해 배우는 것도 아니다. 어느새 포토샵은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무시하던 프리미어 프로(Premiere Pro)(어도비의 영상 편집 프로그램)에게 스마트 시대의 주인공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누구도 영원할 수는 없는 거다. 찬란했던 모든 것들도 결국은 적막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렌더링의 과정을 다시 살펴보겠다. 렌더링은 한 마디로 ‘원근법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이 점을 확실히 이해해야 전체 과정을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디자인.모델링.렌더링.포스트 프로덕션이지만 아무래도 이래서야 재창조할 수는 없다....(중략)
*환경과조경386호(2020년6월호)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한국의 디자인 엘,뉴욕의 발모리 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고, West 8의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를 수행했다.한국,미국,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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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잇기] 어르신들에게 시간을 묻다
옛날에 내가 말이야
가난하고 힘들었던 젊은 시절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살아온 엄주옥 할아버지의 인생 무용담은 20분이 넘어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한결같이 왕년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어르신만 벌써 여섯 명째, 슬슬 수업이 산으로 가고 있었다. “어르신, 그때 누구랑 같이 사셨고 동네 이웃들은 어떤 분들이었어요?” 나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그가 살던 동네와 그 시절의 생활사를 듣고 말겠다는 의지로 질문 공세를 펼친다. “그때 동네의 모습이 지금이랑 어떻게 같거나 다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발표를 하던 할아버지는 질문을 가만히 듣다 한마디로 상황을 종료시켜 버린다. “몰라요. 그런 걸 다 어떻게 기억하고 사나. 그때는 먹고사는 게 급해서 그냥 살았어요.”
서울 북촌의 안국역 사거리와 탑골공원 사이에 있는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70대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진행한 ‘우리동네, 여행작가’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자신이 살던 곳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옛집 사진을 가져와 발표하기로 한 날이었다. 총 13강의 수업 중 세 번의 강의를 통해 일상의 공간과 삶의 기억이 마을의 역사라는 것을 열심히 설파한 뒤였다. 네 번째 수업을 기점으로 일상 공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사라지거나 변한 동네 이야기를 중심으로 수업을 이어갈 요량이었다. 그날 수업이 어려운 시절을 누가 더 잘 이겨내고 살았는지에 대한 인생 자랑 시간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내 부족함을 탓하며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들과의 만남
북촌에서 두 해 연달아 연구와 전시, 출판을 진행하다보니(4월호와 5월호 참조) 서울노인복지센터로부터 인문학 강의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기존에 진행한 연구와 결을 같이 하는 강의이면서 동시에 어르신들이 스스로 누구인지 생각해 볼 수 있게 끔 해달라고 요청했다. “어르신들을 20년 가까이 오래 보았지만, 그분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교육을 의뢰한 담당 사회복지사와 센터장은 내 연구 활동 결과물들을 접하고 든 생각이라며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이 센터는 탑골공원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많은 어르신의 주체적인 삶과 활기찬 노후를 돕는 평생 교육 공간으로, 서울시가 2001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사회복지시설이다. 설립 초기부터 ‘20년째 열정적인 어르신 학생들’이 많이 있는 이곳은 배움에 대한 열정을 충족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수업뿐만 아니라 취미 활동을 위한 기술과 지식을 가르쳐 준다. 글, 그림, 영화 등 각종 아마추어 공모전에서 수상하기도 하는 등 꽤 높은 수준의 프로그램을 이미 섭렵한 분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나는 인문학자도 사회학자도 아니며, 그저 공간 속 시간의 켜에 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소규모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라고 설명했다. 어르신들을 강의실에 모아 놓고 각자의 이야기를 얼마나 깊이 있게 끌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센터의 거듭된 요청과 설득으로 결국 70대부터 90대에 이르는 11명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기로 했다. 센터에서 붙여준 수업 제목에 부제를 붙여 목적의식을 뚜렷이 했다.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우리동네, 나의 시간여행기’, 즉 어르신들이 살던 동네에서의 삶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도 두서없는 옛날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전달 대상을 자라나는 손주 세대에 맞추겠다는 의도였다. 이야기할 대상이 명확하다면, 대상의 눈높이에 맞춰 동네의 시간적, 물리적 변화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진행한 연구들처럼 전문 연구자가 제3자 관점에서 이야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제공자인 어르신들이 주체가 되어 변화해온 동네를 기억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로 기록하게 만드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연구자는 그저 이 연구를 기획하고 설계하며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 호기로운 도전 정신이 좌절과 ‘멘붕’으로 점철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중략)
*환경과조경386호(2020년6월호)수록본 일부
서준원은 열다섯 살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뉴욕에서 약10년간 생활했다.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 다양한 생활 공간에 대해 공부했고,한국인의 주거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SOM뉴욕 지사, HLW한국 지사, GS건설,한옥문화원,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등에서 약16년간 실내외 공간을 아우르는 디자이너이자 공간 연구자로 활동했다.한국인의 참다운 주거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공간 연구를 위해 곳곳을 누비며‘공간 속 시간의 켜’를 발굴하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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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스케이프] 반지의 제왕 속 나무수염이 전하는 이야기 2
톨킨(J. R. R. Tolkien)의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에 등장하는 엔트 족(the Ents)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그들은 자족적이고 어느 편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루만에 의해 자신들의 삶이 위협받자 전투에 참여하기로 한다. 참전을 결정하기 위해 엔트들의 회의인 엔트뭇이 열리고, 호빗 메리와 피핀이 이를 목격한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호빗과 달리 엔트의 형상과 색깔, 크기는 각각의 나무만큼이나 다르다. 수염이 나고 옹이가 많아 울퉁불퉁한 매우 늙은 엔트도 있고 팔다리가 미끈하고 건장한 엔트도 있지만, 어린 나무 같은 모습의 젊은 엔팅(Enting)은 없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엔트 족의 남성형이다.
참전을 결정하고 나무수염은 종족이 너무 적음을 유감스러워한다. 병 같은 것으로 죽은 것이 아니고 단지 오랫동안 엔트의 자식이라고 해야 할 엔팅이 없었기 때문이다. 엔트들은 엔트 부인(Entwives)을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엔트 부인들은 죽은 것이 아니고 영영 사라졌다.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무수염의 말에 따르면 세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고 숲도 광막한 야생이었을 무렵, 엔트와 엔트 부인들은 함께였으나 마음은 같은 방향으로 자라지 않았다. 엔트는 거대한 나무와 야생의 숲, 높은 언덕을 사랑했고, 지나가는 길에 나무들이 떨어뜨려 준 과일만 먹었다. 하지만 엔트 부인들은 작고 연약한 나무와 숲 너머 양지바른 언덕에 마음을 쏟았고, 수풀 사이의 자두나 봄에 꽃을 피우는 야생 사과, 버찌 그리고 여름 물가에 피는 초록색 풀과 가을 들판에 씨를 퍼뜨리는 잡초를 보았다. 질서와 풍요, 평화를 원한 엔트 부인들은 식물이 자신들의 명령에 따라 성장하고 열매 맺고 잎을 피우기를 원했다. 그래서 엔트 부인들은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1 ...(중략)
각주 1. 이러한 신화적인 최초의 정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화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질 클레망, 이재형 역, 『정원으로 가는 길』, 홍시, 2012.
*환경과조경386호(2020년6월호)수록본 일부
황주영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같은 대학 미술사학과에서 풍경화와 정원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번역을 한다.생계를 위한 독서를 하기 전에는 다양한 판타지 소설을 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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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코로나 이후의 도시 공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한 지 넉 달을 넘어서고 있다. 바이러스에 움츠린 흉흉한 도시의 봄, 코로나 이후의 사회와 도시에 대한 전망이 줄을 잇고 있다. 빌 게이츠 같은 스타 기업가, 슬라보이 지제크 같은 인기 지식인은 물론이고 너도나도 유행처럼 예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들은 세계화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파탄을 예견하면서 도시와 사회는 코로나 이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이제 ‘뉴노멀’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일면 귀 기울일 만하지만, 최근의 언론 매체를 휩쓸고 있는 경고성 예측들은 지나치게 요란한 경우도 적지 않다. 섣부른 예상이나 주장을 보태기보다는, 유사한 위험이 다시 닥쳐올 때 도시가 탄력적으로 대처할 회복력을 갖출 수 있도록 기초 시스템을 보강하고 사회적 인프라를 확충하는 게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재난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에서 위험과 고립을 넘어서는 연결망으로서 공원의 가능성에 기대를 건다. 공원은 위기와 재난을 극복하는 관계와 소통의 장소, 곧 희망의 ‘사회적 인프라’라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세계 전역의 도시에서 공원의 존재감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구글이 발표한 ‘지역 사회 동선 보고서(Covid-19 Community Mobility Reports)’에 따르면, 사회적 거리 두기가 본격화된 뒤 거의 모든 도시에서 공원 방문이 증가했다. 감염의 공포에서 탈출할 수 있는 도시 내의 유일한 장소가 그나마 공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외 여러 매체들도 공원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있다. 3월 19일 자「뉴욕타임스」는 “뉴요커가 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곳, 공원이 희망이다”라는 기사에서 위안과 안전감을 찾아 센트럴파크에 몰린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상황이 심각한 유럽의 몇몇 도시에선 공원마저 폐쇄됐지만, 전문가들은 사회적 거리를 지킨다면 공원은 신체와 정신 건강의 위기를 치유하는 공간적 백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세기의 급속한 산업화가 낳은 도시 인구의 폭증과 과밀, 빈부 격차와 노동자의 여가 문제, 위생 악화와 전염병 유행을 치료하는 공간적 해독제로 투입된 게 도시공원이다. 옴스테드는 공원을 통해 열악한 도시 위생을 개선하고 시민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비전을 펼쳤다. 오랫동안 잊혔던 공원의 이 고전적 효능이 새롭게 재발견되고 있다.
이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면서 조경(학)계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도시에서 공원이 중요하다는 누구나 아는 사실만 독백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시 분야는 이미 ‘코로나 이후의 도시’를 주제로 다양한 온라인 세미나와 웨비나(webinar)(웹+세미나)를 열고 있다. 구글 창에 corona, pandemic, city 정도만 넣고 검색해보면 집단 지성의 힘을 곧바로 실감할 수 있다. 예컨대 뉴욕 컬럼비아 대학 도시계획 전공 대학원생들이 한 달 만에 만들어낸 오픈 소스 “팬데믹 어바니즘: 코로나 시대의 실천(Pandemic Urbanism: Praxis in the Time of Covid-19)”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도 유튜브 도시TV를 통해 ‘도시와 감염병’(3월 31일), ‘Covid-19 이후의 도시 정책’(4월 21일)을 기획해 공론의 장을 열었다. 도시공원동맹(City Parks Alliance)은 지역 사회를 코로나 위기로부터 구하는 공원,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한 전략적 공원 프로그램, 2020년 여름 이후를 위한 공원 계획 등을 다룬 세 차례의 웨비나를 개최했다. 온라인 조경 네트워크 Land8은 공원과 코로나 바이러스를 주제로, 줌(Zoom)을 통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세미나를 4월 20일부터 나흘간 진행했다.
우리 조경계도 조경가, 교수, 학생 가릴 것 없이 ‘코로나 이후의 공원’ 설계와 문화를 논의하기 시작해야 한다. 공원이 중요하다는 뻔한 당위론만 붙잡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도시의 위기를 구한 공원의 선례를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도시의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데 어떤 공원이 필요한지, 멀리 있는 큰 공원 하나가 더 중요한지 가까이 있는 작은 공원 여러 개가 더 필요한지, 감염과 재난에 강한 공원 설계는 무엇일지 다각적 주제를 발굴하고 토론해야 한다. 모이지 않아도 된다. 많은 예산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온라인 세미나, 웨비나, 아이디어 공모, VDF(Virtual Design Festival)등 간편하고 참신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이달에는 오피스박김의 최근작과 에세이, 이명준 교수의 비평을 엮어 특집으로 올린다.지난 15년간, 오피스박김의 박윤진과 김정윤 소장은 도시 환경의 난맥과 사회적 쟁점이 얽힌 프로젝트에 ‘산수전략’과 ‘대체 자연’ 같은 전략적 설계 해법을 대입하면서 글로벌 조경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 경관의 형태’를 실험하며 진화해온 그들의 작업은, 이번 특집 지면에서 볼 수 있듯 또 한 번의 변신을 꿈꾸고 있다. 그들이 이론적 실천과 실천적 이론을 가로지르며 탐사 중인 ‘새로운 황야(new wilderness)’는 어쩌면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조경이 지향해야 할 좌표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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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 투영법과 초점 거리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
누구에게나 사랑한다고 손꼽아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이라도 있을 것이다.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에겐 환경 운동일 것이다. 그리고 J. D.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라면 사냥 모자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일관되게 세상의 위선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 왔는지 주장할 것이다. 전혜린이 세코날을 먹고 자살하지 않았다면, 글쎄 헤르만 헤세를 얘기했을까?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라면 싸구려 재규어 기타를 들어 보이며 물질에 초탈한 영웅의 초상화를 능숙하게 그려냈을 것이다. 나라면?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설계 드로잉들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슬픈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계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젊은 조경가들 사이에서는 요새 어느 회사가 더 잘나가는지 토론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게 유행이 됐다. 그리고 학생들은 주로 설계를 너무 잘하고 싶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이제는 설계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다.
아마 술자리에서 루미온과 브이레이 중 무엇이 더 훌륭한지에 대한 백 번째 논의를 하거나 최근 유튜브의 오유 그래픽스(OU Graphics)채널에 올라온 죽이는 엑소노메트릭 다이어그램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예전부터 모든 게 그래왔던 것 같기도 하다.
조경가에게 미디어
그래서 친구가 없다거나 많다거나 뭐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억울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이제야 생각해보면 사실 ‘조경’이라는 분야가 산업 디자인 중 유독 미디어에 소홀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폴리곤(polygon)과 넙스(nurbs)의 차이점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거나 픽사(Pixar)가 ‘제리의 게임’에서 서브디비전 모델링을 최초로 사용해 시그라프(SIGGRAPH)기술상을 탔다는 얘기 같은 걸 지금까지 누구와도 나눠본 경험이 없다.
이건 정말 슬픈 일이다. 예를 들면 나는 절제된 볼록한 형태의 구조를 만들 때는 케이트너리 커브(catenary curve)를 쓰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에 대해 열 번 말할 때, 한 번쯤은 커브의 차수(degree)간의 차이에 대해 말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는 업무 시간에 라이노와 스케치업을 주로 쓰면서 회의만 시작했다 하면 지난주에 했던 콘셉트 얘기를 다섯 번째 반복하는 게 슬프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사랑하는 루미온의 그래픽이 모든 설계 드로잉들을 먹어 치우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공모전에서는 대놓고 스케치업과 루미온을 쓰라며 설계에 있어 미디어의 다양성과 개성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강요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배가본드’의 무사시는 오직 검술에만 몰두해 인생의 허무를 깨달았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건 ‘문체’라며 미디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우리는 종일 컴퓨터로 설계하면서도 정작 디지털 미디어를 부차적인 표현 수단 정도로만 생각한다. 원근법 이미지와 정투영법 도면의 역할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논의하지 않으면서, 루미온으로 비슷한 이미지들을 10분 만에 20장 렌더링해서 패널의 2/3를 채우는 것은 너무도 대량 생산적이다(디자이너가 대량 생산을 하다니). 만약 100명의 사람이 앞으로도 루미온을 쓸 생각이라면 나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거다. 언젠가 아무도 루미온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 그때 루미온을 쓸 거다. ...(중략)
*환경과조경385호(2020년5월호)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 한국의 디자인 엘, 뉴욕의 발모리 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고, West 8의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를 수행했다. 한국, 미국, 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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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잇기] 학생들과 함께 읽은 동네 이야기
아저씨, 사진 찾으러 왔어요
세 평 남짓한 작은 한옥 사진관에 여고생들의 왁자한 목소리가 가득하다. “경자야 너는 잘 나왔는데 나는 못나게 나온 것 같아.” “영애야 무슨 소리니. 네가 훨씬 예쁘게 나왔는 걸. 아저씨가 너만 잘 찍어 주셨나 보다.” “얘는 참. 우리 이 옆에 떡볶이 먹으러 갈까? 숙희랑 명진이도 그리로 온다고 했어.” 사진관 주인이었던 주희돈 할아버지 귓가에는 학생들이 사진을 찾아가며 까르르 웃던 소리가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맴도는 듯하다.
196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종로구 재동에 있던 ‘명광사’는 창덕여자고등학교 맞은편에 자리한 사진관이었다. 입학식, 졸업식, 체육 대회 등 굵직한 행사 사진뿐 아니라 각종 증명사진과 추억이 담긴 사진의 인화를 도맡았다. 안국역 사거리에서 가회동으로 올라가는 방향에 있던 창덕여고 자리에는 현재 헌법재판소가 있다. 함경북도 길주가 고향인 주희돈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서울로 혈혈단신 피난온 뒤 계동에 60여 년간 살고 있다. 고향을 떠나 고단했던 젊은 시절, 사진 기술을 가진 인생의 단짝 정옥선 할머니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재동에 명광사를 차려 동네 사람들과 서로 의지하며 정겹게 한 세월을 살았다.
“대박이다. 헌법재판소가 창덕여고였다구요?” “할아버지 그럼 명광사 한옥 건물은 지금 어디 있어요?” 계동 중앙고등학교 1학년 선재와 혜조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운 듯 큰 소리로 질문한다. “있긴 어디 있어. 지금은 다 없어지고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 아이들은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준비해온 질문과 동네 지도를 바탕으로 할아버지가 겪었던 동네 이야기를 하나씩 수집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동네 어귀의 우물터
“우리 동네 어귀의 오랜 우물터에 얽힌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조사해 오세요.” 20여 년 전 한국에서 획일화된 교육을 받다 중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가서 받은 첫 역사 수업의 과제였다. 유명한 문화유산도, 미국의 눈부신 개발상을 담은 멋진 건물도 아닌, 그저 동네 어귀에 오랫동안 자리해온 우물터였다. 비석도 없고 관리도 잘 되어 있지 않았으며, 물을 깃는 원형의 넓은 구멍은 널빤지로 단단히 못질 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사용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된 우물임을 알 수 있는, 볼품없고 허름한 곳이었다. 역사 공부는 당연히 암기식으로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것이라고 배웠던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서 과제를 제대로 이해 못 한 건 아닌지 의심하며 과제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하던 기억이 또렷하다. 한 주 뒤, 같은 반 열두 명의 친구들의 과제 발표는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떠오를 만큼 신선한 충격이었다. ...(중략)
*환경과조경385호(2020년5월호)수록본 일부
서준원은 열다섯 살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뉴욕에서 약 10년간 생활했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 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 다양한 생활 공간에 대해 공부했고, 한국인의 주거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SOM 뉴욕 지사, HLW 한국 지사, GS건설, 한옥문화원,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등에서 약 16년간 실내외 공간을 아우르는 디자이너이자 공간 연구자로 활동했다. 한국인의 참다운 주거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공간 연구를 위해 곳곳을 누비며 ‘공간 속 시간의 켜’를 발굴하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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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스케이프] 반지의 제왕 속 나무수염이 전하는 이야기 1
“이는 이미 대규모 살생을 초래했고 수백만 명 이상을 조기 사망케 하겠다고 위협하는 비상 사태다. 그 영향은 점차 확산되어 경제 전체를 불안정하게 하고 자원과 인프라가 부족한 빈곤 국가를 압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기후 위기다.”1 팬데믹(pandemic)의 주요 원인으로 기후 변화가 언급되고 이기후 변화 너머에는 인류세(Anthropocene)가 있다. 인간이 지구에 가하는 압박이 너무나 극심해져 지구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의 복수라고 하는 오래된 레토릭(rhetoric)이 다시 등장하지만,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톨킨(J. R. R. Tolkien)의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에 숨어 있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동명의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터라 절대적인 힘을 지닌 반지를 둘러싼 사건들이 잘 알려져 있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볼 수 있다.2 우선은 정원사 샘와이즈 갬지가 있다. 순박하고 정직한 그는 이야기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절대반지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충실하게 프로도를 끝까지 수행한다. 심지어는 반지의 유혹을 받았을 때에도 정복한 곳에 꽃과 수목의 동산을 만드는 환상을 볼 정도로 뼛속까지 정원사인 인물이다.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고향을 복구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으니, ‘돌보는 이’라는 정원사의 덕목을 그대로 체화한 인물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85호(2020년5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Owen Jones, “Why don’t we treat the climate crisis with the same urgency as
coronavirus?”, The Guardian 2020년 3월 5일.
2. 『반지의 제왕』은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었다. 먼저 김번·김보원·이미애의 공역본인 『반지전쟁』(예문, 1991년과 1998년)이 출판되었고, 이후 톨킨의 번역 원칙에 따라 제목을 수정한 『반지의 제왕』(씨앗을뿌리는사람, 2002년)이 출판되었다. 이 연재에서는 2002년 출판본을 참고한다. 이외에 한기찬이 번역한 『반지의 제왕』(황금가지, 2001년), 일본어 중역본인 강영운
번역의 『완역 반지제왕』(동서문화사, 2002년)이 있다. 모두 절판 되었으나 중고 서점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황주영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 같은 대학 미술사학과에서 풍경화와 정원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생계를 위한 독서를 하기 전에는 다양한 판타지 소설을 탐독했다.